이탈리아 전쟁 1494~1559 - 근대 유럽의 질서를 바꾼 르네상스 유럽 대전
크리스틴 쇼.마이클 말렛 지음, 안민석 옮김 / 미지북스 / 202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양 중세(근세까지도)까지의 역사에서 이탈리아의 지분이 크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중세의 역사에서 십자군 전쟁, 종교 개혁, 르네상스까지 이탈리아는 늘 중심에 있었으니까. 서양사를 잘 알지 못해서 틈날 때마다 공부 중이지만 여전히 어렵다. 그래도 서양 중세의 역사(보다는 미술 쪽인 듯)에서 그나마 가장 흥미를 느끼는 부분은 르네상스의 시기인데 이 당시의 미술가들을 유독 좋아하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화가의 그림에는 신이 아닌 인간이 등장했고 인간의 실제 모습처럼 그려졌다. 이탈리아에 갔을 때 라파엘로의 그림을 보았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가 없다. 화가란 그림의 주체에 생동감을 부여해야 함을 그가 그린 그림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되었달까. 살아 움직이는 그림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던 느낌을 받았다. 


이 책은 15세기(1494년)에서 16세기(1559년)에 걸쳐 이탈리아 반도에서 일어난 60년간의 전쟁을 다루고 있다. 그렇다면 이 시기 이탈리아에서는 왜 전쟁이 일어났는가. 긴 십자군 전쟁이 끝나고 난 뒤 이탈리아 반도에 있었던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는 해상 왕국으로 발돋움하며 세력을 확장중이었다. 이때 이탈리아 왕국에 눈독을 들이며 권리를 주장하는 여러 세력이 있었다. 프랑스 왕과 스페인 왕은 나폴리의 왕위를 두고 계승권을 주장했고 대가 끊긴 밀라노 공국의 왕위를 두고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당시 북부와 중부 이탈리아 영토의 많은 부분이 제국의 봉토였음)이 격돌했다. 당시 이탈리아는 여러 왕국으로 나뉘어 있었다. 대표적으로 나폴리, 밀라노, 피렌체, 베네치아, 그리고 교황령의 큰 도시 국가가 있는가 하면 이 밖에도 시에나, 루카, 제노바, 페라라를 비롯한 수많은 소국이 존재했다. 소국들은 서로 동맹을 맺고 연합하여 대국을 상대하고 방어했다고 한다. 

주요 참전국은 프랑스, 스페인, 밀라노 공국, 나폴리 왕국이었다. 여기에 스위스, 독일, 네덜란드, 발칸반도의 국가의 군인들이 참전하며 전쟁 참전국 범위가 확대되었다. 


전쟁의 흐름을 바꾼 몇 차례의 전투가 있다. 


1503년 벌어진 체리뇰라 전투는 프랑스군의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프랑스 기병과 스위스 창병의 공격에 맞서 스페인은 화승총병으로 맞서며 승리했다. 이 전투는 화승총을 사용하여 승리한 최초의 유럽 전투로 평가되고 스페인의 지휘관이었던 곤살로 데 코르도바였는 위대한 지휘관으로 회자되었다.

1508년부터 1516년까지 이어진 캉브레 동맹 전쟁은 베네치아를 상대로 일어났다. 반베네치아 연합에는 프랑스, 스페인, 신성로마제국, 교황령 등이 동맹에 포함되었다. 전쟁 기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 이 전쟁하는 동안 동맹관계가 자주 바뀌어 전쟁의 흐름이 복잡했다. 캉브레 동맹 전쟁 중 아냐델로 전투는 1509년 벌어졌다. 전투에서 베네치아가 프랑스군에 지면서 이탈리아에 소유하고 있던 상당수의 영토를 토해내야 했다. 

1512년 벌어진 라벤나 전투는 프랑스군 vs 스페인-교황군 간에 이루어졌으며 프랑스군이 승리했다. 스페인은 교황을 끌어들였지만 프랑스군에 승리하며 참패의 쓴맛을 봐야했다. 그러나 프랑스군도 지휘관인 가스통 드 푸아가 전투 중 사망하면서 그 빛을 퇴색시켰다. 

1515년 마리냐노 전투는 캉브레 동맹의 마지막 전투로 프랑스군과 스위스군이 격돌했다. 스위스군은 당시 유럽 최고의 보병으로 평가받았기에 프랑스군은 수세에 몰렸다. 그러나 이때 베네치아군이 프랑스군에 합류하면서 프랑스군이 최종적으로 승리했다. 프랑스의 지휘관은 이제 막 국왕이 된 프랑수아 1세였고 그는 이 전투로 자신의 능력을 만방에 알렸다.

1525년 파비아 전투는 신성로마제국군의 압승으로 끝났다. 프랑스는 군이 거의 전멸했을 뿐 아니라 국왕인 프랑수아 1세가 포로가 되는 수모를 겪었다. 전투의 결과 프랑스는 나폴리와 밀라노, 제노바에 대한 권리를 포기한다는 서명을 해야 했다. 


전쟁에 가담 인물도 많고 여러 국가가 엮여있다 보니 솔직히 많이 복잡하다. 게다가 짧지 않은 기간의 전쟁인 만큼 여러 차례의 전투가 벌어지기 때문에 넋놓고 보면 흐름을 놓치기 십상인데 책에서 전투의 배경과 전개 과정, 결과를 충분히 설명해주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는 없다. 

책의 앞부분에 전쟁의 주요 등장인물인 스페인-합스부르크(막시밀리안 1세, 카를 5세), 프랑스(루이 12세, 프랑수아 1세, 앙리 2세), 교황령(율리우스 3세, 레오10세, 바오로 3세) 뿐 아니라 그 밖의 인물 중 체사레 보르자, 루도비코 마리아 스포르차, 피에로 데 메디치, 샤를 드 부르봉, 루도비코 마리아 스포르차 등 중심 인물들의 사진이 실려 있어 도움이 된다. 

또한 이탈리아 지도를 전체, 북부, 중부, 남부의 부분도로 나누어 놓아 독서 중 관련 지명이 나올 때마다 찾아볼 수 있어 도움이 되었다.


이처럼 이탈리아 전쟁은 서유럽 강대국들이 충돌하며 발생했다. 결국 승리는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차지했다. 그 결과 이탈리아에서 스페인 황실의 입김이 강해졌다. 전쟁 기술적으로는 보병의 강화, 장창과 화승총의 확산, 대포와 요새의 발전, 직업 군인 제도의 도입 등이 이루어졌다. 또 이탈리아 전쟁에의 교황의 참전은 유럽 전역에서 하나의 제도로서 교황과 교황권이 인식되는 방식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교황이 세속적 목적을 위해 기독교 세력들을 상대로 능동적으로 전쟁을 일으켰다는 점, 그리고 때때로 자기 가문을 군주적 지위로 격상시키겠다는 목적을 위해 일으킨 군사 원정에 교회 재산을 유용했다는 점 등은 로마 교황청을 향한 환멸을 더욱 자극하여 신교 확산에 기름을 부었다(이는 종교 개혁의 빌미가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전쟁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가 알프스 너머로 확산되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는 데 기여했다. 이는 향후 종교 개혁, 과학 기술의 발전과 맞물리며 서양 근대 문명의 기틀을 확산시켰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띤다고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 전쟁이 중요한데 왜 이제야 제대로 된 한 권의 책으로 정리되어 나왔는지 의아할 따름이었다. 이탈리아 전쟁의 역사를 읽으니 비로소 십자군 전쟁과 종교 개혁, 르네상스까지 비로소 한 흐름으로 정리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여러 모로 구입하고 읽기를 잘한 책인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란츠크네히트의 다수가 루터파였다는 사실은 이러한 신성모독행위들값비싼 교회 식기류를 약탈하거나 수녀들을 강간하는 등의도시 약탈 과정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특징이었다에 또 다른 차원의 의미를 부여했다. 성유물함이 박살났고, 전임 교황들의 것을 포함해 무덤들이 파헤쳐졌다. 미사를 풍자한 집회가 열렸고, 란츠크네히트가 ‘교황‘ 선출을 패러디하기도 했다. 바티칸의 프레스코화에 루터 - P336

를 칭찬하는 낙서가 새겨져 있는 것을 지금도 볼 수 있다. 사도 베드로의 도시에서 그러한 신성모독이 행해졌다는 것, 유럽 전역의 순례자들이 방문하는 교회들의 유물과 재단을 더럽혔다는 것이 특히 충격적으로 여겨졌다.
혹자에게는 로마를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어준 예술가와 학자들의 공동체가 해체된 것도 통탄할 만한 사태였다. 이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이탈리아 전역으로 흩어졌다. - P337

카를 5세의 이탈리아 순방 계획은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이를 반드시 저지하려고 했던 프랑수아 1세는 이탈리아 내 자신의 동맹 세력들과 새로운 군사 원정 계획을 논의해왔는데, 왕이 직접 이탈리아 원정을 지휘하든, 스페인 국경지대로 군대를 보내든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동맹국들은 둘 다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것을 잘 알고있었다. 프랑수아 1세와 카를 5세 모두 평화협정을 체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카를 5세의 고모이자 플랑드르의 섭정 마르가레테와 프랑수아 1세의 모친 루이즈 드 사보이아 사이에서 원격으로 협상이 진행되었다. 7월에 두 부인이 캉브레에서 회담을 갖기 전에 많은 외교적 기초 작업들이 수행되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진행된 양측의 회담은 어떠한 형식에도 구애받지 않았다. 강인하고 지적인 두 여성은 최선의 협상 조건을 끌어내기 위해 단단히 결심한 상태였다. - P359

분명한 것은 그(카를 5세)가 교황의 대관식 주재를 바랐던 것의 이면에 한 가지 실제적인 고려 사항이 있었다는것이다. 자신의 대관식을 통해 동생이 로마인의 왕(신성로마제국 황제의 후계자)으로 선출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는 이 일이 조속히 진행되지 않을 경우 독일 내 자신의 적대 세력들이 다른 후보자를 선출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실제로 그의동생은 1531년 로마인의 왕으로 선출되었다. - P368

교황과 프랑스 왕은 공의회를 하나만 소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데 입장을 같이하고 그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 프랑수아1세는 구교, 신교를 가리지 않고 독일의 제후 및 도시들과 긴밀한 접촉을 유지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을 상대로 음모를 꾸몄다. - P387

황제는 결혼 동맹을 통한 지속적인 평화를 위해 밀라노와 저지대 지역 가운데 어느 곳을 희생해야할지 고민했고, 스페인 중신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의견은 둘로 나뉘었다. 한쪽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습 영토에 속하는 저지대 지역이아니라 전쟁의 원인을 제공함으로써 재원 고갈의 주범이 된 밀라노를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한쪽은 밀라노가 독일과 연결되는 중요한 통로이자 나폴리와 시칠리아 방어의 핵심이며 저지대 지역보다 스페인에 훨씬 더 유용하다는 입장이었다." 카를 5세는 저지대 지역을 지키는 쪽으로 결정했다. - P420

바오로 3세의 마지막 명령은 조반니 마리아 델 몬테, 즉 율리우스(율리오) 3세가 1550년 2월 말 그의 후임으로 선출되자마자 재확인되었다. 기분에 따라 변덕이 심했던 새 교황은 국정과 씨름하기보다는 느긋하게 사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특별히 자신의 가문을 위한 야심 같은 것도 없었고, 자신을 존중해주는 이상 파르네세 가문에 대해서도 적대적이지 않았다. - P434

카를 5세는 1554년 7월 25일 펠리페와 메리 튜더의 결혼에 맞춰 밀라노-이전에 했던 책봉은 무시하고와 나폴리를 펠리페에게양여했다. 펠리페는 나폴리 국왕 책봉에 대해서만 따로 기념식을 가졌다. 밀라노는 이미 자기 것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카를 5세는 펠리페와 상의하지 않고 몇 달 동안 더 이 나라들의 국정에 결정권을 행사했다. - P461

1555년 5월 금욕적인 개혁가이자 종교적 권위를 수호하는 데 매우열성적인 것으로 알려진-특히 스페인의 나폴리 지배와 카를 5세를싫어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나폴리 추기경 잔 피에트로라파가 교황에 선출되었다. 바오로 4세는 모든 외국 세력이 축출되면 이탈리아가 더 나아질 것이라고 믿었는데, 스페인보다는 프랑스의 존재로 인한 폐해가 덜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프랑스의 두 왕자가이탈리아에서 한 명은 베네치아에서, 다른 한 명은 로마에서 교 - P474

육을 받고 각각 밀라노 공작과 나폴리 왕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옹호할 것이었다. 전임자들과 달리 그는 강대국들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고, 카를 5세와 펠리페에 맞서 기꺼이 프랑스 국왕 편에 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 - P476

1530년대가 되면 장창병과 화승총병의 조합으로 유럽 각국의 군 전력에서 보병의 우위가 확고해지고, 스페인, 독일 그리고 이탈리아 화승총병들은1520년대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승리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6세기 초에 이처럼 비교적 갑작스럽게 효과적인 총기류가 등장한 것은 세 가지 요인 때문이었다. 첫째는 1480년대에 화승총 발화장치에서 일어난 기술 발전이었다. 초기 총기류가 그랬던 것처럼화승총도 엉덩이 부근에서 한 손으로 격발했는데, 기술 발전으로 어깨에서 발사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두 번째는 화약 성능이 개선되고가격이 싸졌다. 화약 가격은 15세기에 80%나 떨어졌고, 화약 성능의개선으로 사거리는 크게 증가하고 사격 속도도 훨씬 빨라졌다. 세번째는 독일 남부와 이탈리아 북부에서 대규모 화기 제조업이 발전했다. 이는 지리적으로 보았을 때 스위스 용병의 경쟁 상대로 란츠크네히트가 부상한 것과도 연결되었다 - P513

이탈리아 전쟁에서 교황의 참전은 유럽 전역에서 하나의 제도로서교황과 교황권이 인식되는 방식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교황이 세속적 목적을 위해 기독교 세력들을 상대로 능동적으로 전쟁을 일으켰다는 점, 그리고 때때로 자기 가문을 군주적 지위로 격상시키겠다는 목적을 위해 일으킨 군사 원정에 교회 재산을 유용했다는 점 등은 로마 교황청을 향한 환멸을 더욱 자극하여 신교 확산에 기름을 부었다. - P614

이탈리아는 나폴리와 밀라노가 스페인 왕가와 밀착하고, 프랑스 국왕과 황제가 계속해서 이탈리아 내부 문제와 이해관계로 얽히면서, 불가피한 수준으로 유럽의 국가 체제에 보다 긴밀히 얽혀 들어갔다. 특히 북부 이탈리아는 다시 한 번 유럽 열강의 전장이 될 것이었는데, 롬바르디아를 누가 소유하느냐가 핵심적인 전략적 관건이었다. 향후 수세기 동안 이탈리아 국가들의 운명은 스페인과 프랑스의 - P648

국왕 그리고 황제 사이에 체결되는 외교적이고 왕조적인 합의에 따라 결정될 것이었다. 크고 작은 이탈리아 국가들 사이의 관계망서그토록 중요한 요소였던 ‘보호‘와 ‘복종‘을 낳는 정교하게 맺어진 정치적 후원과 충성의 체제가 근본적으로 재구축되었다. - P649

1495년 3월, 루도비코 스포르차는 피렌체 대사에게 보낸 답신에서 "당신은 내게이탈리아에 대해 말하지만, 나는 그것의 얼굴을 한 번도 본적 없소"라고 말했다.23 1556년 10월, 로마의 영주이자 군인인 카밀로 오르시니는 베네치아 대사에게 "나는 프랑스에는 프랑스 사람이, 스페인에는 스페인 사람이, 그리고 이탈리아에는 이탈리아 사람이 있는것을 보고 싶소"라고 말했다." 사람들에게 이탈리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더욱 의식하게 만든 것은 외국의 지배 경험 그 자체라기보다는수천수만 명씩이나 되는 외국 병사들의 존재였을 것이다. - P656

이탈리아 전쟁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가 알프스 너머로확산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문화야말로 이탈리아인의 우위가 인정된, 그래서 그들이 스스로 위안을 삼을 수 있는 분야였다. - P660

이탈리아 전쟁이 불러온 모든 장기적 결과 가운데 가장 큰 파급효과를 낳은 것은 당연히 이탈리아반도의 많은 부분이 이제 외국 군주-이탈리아에 거주하지 않는ㅡ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 P671

이 새로운 질서에 대한 평가는 스페인 왕이 이탈리아에서 지배적인 세력이 되는 것이 전쟁의 고정된 결론은 아니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져야 한다. 확실히 그 문제는 1529~1530년 카를 5세가 이탈리아를 방문했을 때까지도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였다-그시기 전후로도 그의 군대는 수세에 몰리는 경우도 잦았고, 그의 사령관들은 급료도 제대로 받지 못한 충분치 않은 병력으로 전선을 사수하느라 고군분투했으며, 병사들이 제대로 싸울 것이라 믿을 수 없어야전에 임하지도 못했다. 카토-캉브레지 조약으로 구체화된 전쟁의최종적 결과는 당시 이탈리아인이나 프랑스인, 심지어 스페인인이보기에도 이탈리아 주둔 스페인군이 거둔 확고부동한 승리의 불가피한 결과는 아니었다. 오히려 깜짝 놀랄 만한 이변으로 비쳤다. 이탈리아인들은 스페인 제국의 힘을 압도적이고 불가피한 것으로 여길 필요가 없었다. 이탈리아 내 스페인 세력의 토대는 이탈리아 전쟁 시기에 살았던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그다지 대단하지도, 탄탄해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 P673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얄리얄리 2025-06-30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에 댄 존스의 [중세인들] 읽을 때 이탈리아 전쟁을 종교개혁에 붙여놓았던 것을 보고 좀 의아해 했는데... 화가님이 그동안 올려주신 문장들을 다시 읽으면서 정치와 종교를 나눌 수 없었던 그 시기를 새롭게 생각해 보게 되네요. 감사합니다!

거리의화가 2025-06-30 21:49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책 읽으면서 말씀하셨던 부분을 잘 이해하게 되었거든요. 도움이 되신 것 같아 저도 기쁩니다.
 

아냐델로 전투는 이탈리아 전쟁에서 벌어진 많은 전투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전투 가운데 하나였다. 전투가 이루어진 방식 때문이 아니라 당시 입은 패배로 베네치아가 한 세기 넘게 이탈리아 본토에서 획득한 거의 모든 영토를 상실함으로써 공화국 역사에서 가장결정적인 순간의 도래를 알렸기 때문이다. 전투에 가담하지 않은 베네치아군의 주력이 온전히 남아 있었으나 사기가 크게 저하된 탓에, 베네치아는 주력부대의 보전을 위해 동쪽으로 퇴각을 명령했다. 이들은 시민들의 반대로 테라페르마의 주요 도시로부터 주둔을 거부당하다가 마침내 석호 지대에 있는 메스트레에 베네치아시를 방어하는 진지를 구축했다. 메스트레에 도착하는 동안 부대 병력은 탈영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 P197

그들은 종속 도시들의 방어를위해 병력을 분산 배치하기보다는 본 병력을 그대로 유지한 상태에서 베네치아시 방어에 주력하는 것을 우선했다. 또한 10년 전 밀라노공국의 도시 엘리트층이 그랬던 거처럼 1509년 당시 베네치아 종속도시들의 시민들도 외국 군주가 멀리서 종주권만 행사하고 자신들은사실상 자치를 누리는 특히 중요한 것은 자기들도 주변으로 확장하여 속지를 통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 P199

새 교황은 레오 10세로 불리게 될 조반니 데 메디치였다. 율리우스 2세보다 훨씬 젊었던 레오 10세는 그 정도로 호전적이지 않았으며, 외교 문제에 훨씬 더 미묘하고 가변적이었다. 그를 상대할 사람들은 그의 확고부동한 목표가 메디치 가문을 군주급 왕조로 격상시키는 것임을 곧 알게 되는데-피렌체를 지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 점을 제외하면 그는 의중을 읽기 힘든 인물이었다. 그가 교황의 자리에 앉음으로써 당연히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문의 위상은 강화되었고, 레오 10세는 피렌체의 외교 정책을 실질적으로 좌우했다. - P252

베네토에서는 전쟁의 어느 단계에서든 전투로부터 직접적인영향을 받지 않은 지역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영토가 이쪽이든 저쪽이든 군대의 주둔을 경험했고, 어떤 곳은 해마다 겪기도 했다. 비첸차의 한 연대기 작가에 따르면, 아냐델로 전투가 벌어진 1509년부터 1517년 사이에 비첸차 정권은 36번이나 교체되었다. … 베네치아인들에게 전쟁은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드는경험이었다. 그들은 전쟁 자금의 압박 때문에 공화정에 자부심을 가 - P282

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혐오스러울 수밖에 없는 방식에 의존해야했다-실제로 그들은 정부 관직과 상원 의원직을 가장 높은 값을 부르는 사람들에게 판매했다. 베네치아인들은 이미 자신들의 해상 제국에 점점 더 큰 위협을 가하는 튀르크 세력과 공존하는 법을 배워야했다. 관건은 그들이 어디로 더 확장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그들이가진 것을 계속 지켜낼 수 있는지의 여부였다. - P28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전쟁과 타자의 텍스트
이정현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공식적인 역사‘에는 수많은 영웅이 존재하고, 전황 분석과 숫자가 가득하다. 아울러 그것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객관적인 자료도 넘쳐난다. 그러나 기억의 전승은 객관적인 사실들을 그대로 전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 모든 기억의 전승은 ‘이야기‘와 ‘이미지‘를 동반한다. 국가가 관리하는 기억에는 개별적인 인간이 감내해야 했던 고통은 쉽게 잊힌다. 특히 국가의 관리 방향과 다른 기억일수록 빠르게 부정되고 소거된다. - P8
이야기와 이미지는 어떤 방식으로 생성되는가. 문학과 영화 등의 텍스트가 가장 적절한 예시일 것이다. ... 충분히 기억되지 못한 그 결여를 채우려는 노력이 동반되지 않은 채 서술되는 기억은 과거를 단조로운 이미지로 박제할 뿐이다. - P9~10

이 책은 한국전쟁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국가들의 당시 역사적 상황과 이를 기록한 문학, 영화 등의 텍스트를 다룬다.

한국전쟁에 직접 참전하지 않았지만 일본은 2차 세계대전 종전 당시부터 시작된 미소의 갈등으로 전후 세계질서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입장에서 끌어들여야만 하는 국가였다. 소련이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참전하며 아시아에 관여하고 미국이 힘을 실었던 국민당이 공산당에게 밀리면서 미국은 소련과의 힘의 싸움에서 다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일본은 아시아를 침략한 제국주의적 과오를 잊고 새 출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냉전 초기에는 일본 사회를 비판적으로 응시하며 의견을 내는 지식인들이 있었고 직접 운동에 뛰어든 청년들도 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동력은 떨어졌고 비판의 목소리는 지속되지 못했다.
오에 겐자부로 초기 작품은 전후 일본 청년의 공허함을 묘사했다면 오구마 에이지, 존 다우어 같은 학자들은 전후 일본 사회의 변화에 주목했다. 일본에 강제로 편입된 오키나와는 태평양전쟁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곳이다. 이후에도 미국의 기지로 전용되면서 상당한 인적, 물적 피해를 입었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일본에 지배당하고 이후에는 미국에 의해 여러 피해를 입었기에 특히나 우리와 비슷한 역사적 시간을 거쳤다. 때문에 관련 텍스트를 읽어보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될 것같다.

중국은 한국전쟁을 항미원조전쟁이라 부르며 매해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당시 중국 국민들에게 전쟁이 미국과의 싸움에서 밀리지 않고 버텨 자긍심을 심어준 계기가 되었다면 오늘날에는 미중 간의 밥그릇 싸움으로 자국민을 끌어모으는 도화선이 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 포로 협상에서 중국군의 2/3 이상이 타이완행을 선택했다는 사실은 중국 정부를 불편하게 했고 (당연히) 공식적으로 이 진실을 거론하지 않았다. 하진의 <전쟁쓰레기>는 거제수용소에서 친공 포로와 반공 포로로 나뉘어 있던 상황에서 국민당 장교 출신이던 주인공이 선택의 기로에 놓이는 상황에 대해 다루고 있다. 최인훈의 <광장>과 비슷한 구도에서 주인공이 어떤 선택을 하고 상황이 전개될지 궁금하다.
중국의 참전으로 타이완은 미국에 의해 보호받을 수 있었던 측면이 있다. 그러나 그 후에 중국은 타이완을 여러 번 도발함으로써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타이완은 일본의 지배를 받았고 이후에는 미국의 보호를 받으며 냉전기를 거쳤기에 우리와 비슷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한국전쟁을 다룬 타이완 텍스트는 천잉전의 <충효공원>에 대해서만 나와 있는데 그만큼 국내에 번역된 작품이 별로 없다. 다만 최근 타이완 작가들의 작품이 국내에 활발하게 소개되고 있다는 점은 고무적인 것 같다.

2차 대전 후부터 서서히 시작한 미소간 대립은 소련이 원자폭탄을 개발하는데 성공하고 중국 내전에서 마오쩌둥이 승리하면서 미국은 위기 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여기에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국은 곧바로 전쟁에 개입한다. 소련은 암묵적이지만 적극적으로 한국전쟁에 개입했고 중국은 많은 병사를 실전에 투입하면서 전쟁이 장기화되는데 큰 역할을 했다. 한국전쟁은 무엇보다 미국의 매카시즘 광풍과 엮이면서 반공 정치 투쟁을 심화시켜 정치계 뿐 아니라 문화, 예술업계 등에 몸담고 있던 사람들이 ‘나는 공산당원이 아니에요.‘란 사상 검증을 강요받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렇게나 적극적으로 전쟁에 개입한 미국 작가의 텍스트에 정작 한국전쟁은 갑자기 떠밀려 휘말린 전쟁처럼 부차적으로 다뤄졌다. 필립 로스의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닥터로의 <다니엘서>는 매카시즘의 광풍을 잘 그린 텍스트라고 한다.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한 경험이 있는 제임스 설터스의 <사냥꾼들>은 공중에서 한국전쟁을 겪은 미군의 이야기를 그린다. 토니 모리슨의 <Home>은 전쟁의 상처 뿐 아니라 인종 차별 문제까지 함께 다룬다. 제인 앤 필립스의 <Lark & Termite>은 노근리 학살 사건을 다룬다니 관심이 가는데 둘 다 번역서는 찾아보니 없는 것 같아서(누가 번역 좀) 아쉽다. 폴 윤의 <스노우 헌터스>는 한국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가 아닌 이후 세대가 이방인의 시선에서 한국전쟁을 다루고 있는 텍스트다.

이 밖에도 한국전쟁 관련하여 프랑스, 독일, 영국, 콜롬비아의 역사와 문학 텍스트를 다룬다는 것이 흥미롭다. 특히 콜롬비아는 남미에서 유일하게 참전한 국가다. 당시 경제적 상황이 좋지 않았던 콜롬비아는 미국이 마셜플랜으로 유럽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것처럼 자신들에게도 그렇게 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군사적인 요구만 늘어나자 국민들의 반미 감정이 고조되었다고 한다. 이에 미국이 경제 문제 해결을 협력하는 제스쳐를 취한다. 콜롬비아는 한국전쟁에 참전함으로써 미국과의 관계 개선 및 국가 안정에 도움을 받고자 했다. 그러나 전쟁에 참전했던 병사들은 신체적, 정신적 후유증에 시달렸고 정부의 지원도 딱히 없어서 빈곤에 내몰렸다고 한다. 모레노 두란의 <맘브루>가 번역서로 나와 있는데 읽기는 쉽지 않을 것 같지만 도서관에 대출해서 조만간 읽으려고 한다.

몇 작품만 언급했지만 이를 비롯하여 많은 텍스트들을 다루고 있다. 

공식적인 역사에서 언급하지 않은 많은 목소리들이 이처럼 텍스트에 기록되어 있다. 물론 이들의 언급과 기억도 축소, 과장되어 왜곡될 수 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할 것이지만 물질적인 숫자로만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한계를 보완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역사라는 점은 분명해보인다. 묵혔던 책을 이제야 끝내서 홀가분한데 읽을 책은 더 많아졌다. 즐거운 비명이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건수하 2025-06-26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즐거운 비명이 들리는 것 같아요! 저도 궁금해지는 책이 많네요. 전 요즘 책을 거의 안 읽고 있지만…

거리의화가 2025-06-26 21:13   좋아요 1 | URL
수하 님도 관심이 갈만한 책이 많을 것 같아요. 책이야 읽을 수 있는 마음이 들 때 읽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몸과 마음이 준비가 되어야 책도 읽히는 것 같아서요. 축축한 장마 기간인데 건강 잘 챙기시길^^

건수하 2025-06-27 00:21   좋아요 0 | URL
앉아있을 수 있는 시간이 짧다보니 누워서 폰을 보게 되네요 ^^ 화가님 말씀대로 몸과 마음이 다 준비된 때가 오겠지요? :)

희선 2025-06-29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전쟁도 세계사에 들어가기도 하겠습니다 한국전쟁으로 다른 나라는 어땠는지를 볼 수 있는 책도 있군요 가깝든 멀든 세계는 이어져 있기도 하니 영향이 아주 없지는 않겠습니다 그런 걸 생각하면 자기 나라만 생각하지 않아야 할 텐데... 이런 생각해도 하는 건 거의 없네요 거리의화가 님은 관심을 가지고 책을 만나시는군요

유월 하루 남았습니다 2025년 반이 다 가겠습니다 거리의화가 님 여름철 건강 조심하시고 하루 남았지만, 칠월 반갑게 맞이하세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5-06-30 21:46   좋아요 0 | URL
요즘은 한국사라도 주변 국가와의 역사를 다루며 관련성을 짓는 시도를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일국사를 읽는 것만으로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죠.
6월도 이제 몇 시간 남지 않았습니다. 희선 님도 7월 반갑게 맞이하시기를요!
 


오늘은 한국전쟁 75주년이 되는 날이다. 며칠 전부터 관련 책들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해서 책장을 확인하다 이 책을 발견했다. 당시 책의 제목과 소개글을 보고 이 책은 당장 읽지 못하더라도 사두어야한다 여기고 구입했었다. 이 책은 한국전쟁과 관련하여 일본, 중국, 미국, 그리고 콜롬비아의 입장에서 본 타자의 텍스트들을 다루고 있다.


내부인의 시선과 외부인의 시선은 다를 수밖에 없다. 하나의 사건이라도 누가 보느냐에 따라서 사건의 서술이 달라질 수 있는 지점을 확인하는 일은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책에 서술된 텍스트들을 통해서 다양한 시선을 만날 수 있다. 특히나 문학에 약한 내게 한국전쟁 관련하여 다양한 문학 텍스트를 얻어가는 것은 매우 도움이 되었다. 


책을 읽으면서 읽고 싶은 책이 여럿 생겼다. 한꺼번에 다 읽으려면 곤란할테니 시간 날때마다 독서 계획에 끼워넣으면서 읽어봐야겠다. 일단 <맘브루>를 도서관에 상호대차해두었고 <스노우 헌터스>(원서도 함께), <전쟁 쓰레기>는 구입했다. <스노우 헌터스>는 이 책이 나왔을 때만 해도 번역서가 없었는데 읽으려니 어떻게 딱 나와주는지 참 절묘한 타이밍이 아닐 수 없다. <스노우 헌터스>, <전쟁 쓰레기>, <광장>(by.최인훈)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이분법을 강요받던 시기에 어느 한쪽을 선택하지 못하는 상황과 인물의 내면을 그리고 있는데 이를 위한 비교 텍스트로 읽어볼 작정이다. <맘브루>는 한국전쟁 관련하여 콜롬비아 작가의 시각은 접한 적이 없어 읽어보고자 하기 위해 골랐다. 


일종의 길라잡이 역할을 하는 책이라 볼 수 있겠다. 





묵혀 두었던 <역사비평>과 <역사문제연구>도 읽기 시작했다. <역사비평> 2025년 여름호는 진짜 대박이다. 온통 눈에 띄는 내용이 가득하여 눈과 뇌가 함께 즐거울 따름이다. 일단 조선공산당 100주년 특집 내용과 윤석열 탄핵 관련, 최근 <반일종족의 역사내란>이란 책을 또 다시 펴낸 이영훈의 책에 대한 특별 기고가 실려 있다. 브루스커밍스 다시보기 기획도 있다. 

<역사문제연구>는 최근 읽었던 이연식 선생님의 책에 대한 좌담회 내용과 한국 자본주의 개발 시대를 1980년대까지 확장하는 의미에 대한 특집 내용이 눈에 띄었다. 보통 한국 자본주의가 눈에 띄게 발전한 시기를 꼽으라면 박정희 시기를 꼽는 경우가 많아서 1960~70년대 내용은 많이 연구가 되어 있는 반면 1980년대는 그 연구가 빈약하다. 주로 1980년대는 정치, 문화적으로 치우쳐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향후 1980년대 이후의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에 대해서도 좀 더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졌으면 한다.

(역사문제연구는 서점에서 더는 검색이 되지 않는다ㅠㅠ)



아! 마무리는 다시 한국전쟁 이야기로! 정병준 선생님의 <한국전쟁>도 미루지 말고 읽어봐야겠다. 읽을 책은 많은데 눈은 뻑뻑하고 이거원ㅎㅎㅎ 


군비 증강의 시대다. 한쪽에서 (상대가 쳐들어올지 몰라) 군사력을 늘리면 당연히 상대도 군사력을 늘릴 수밖에 없다. 이런 생각은 결국 평화로운 시대가 요원하게 만드는 것 같다. 끊임없이 상대를 경계하고 대비해야만 하는건지 답답하고 피로하다. 마무리가 이상해져버렸지만 어쨌든 내가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읽고 쓰는 것뿐인 듯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