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1945-1990 - 서구의 번영 아래 전쟁과 폭력으로 물든
폴 토머스 체임벌린 지음, 김남섭 옮김 / 이데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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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따라 지도를 그려보면, 학살은 개발 도상 세계를 관통하는 일정한 길을 쫓아가면서, 모두 합쳐 냉전 시대에 발생한 전사자의 70퍼센트 이상을 차지한 광범위한 세 전선에 집중되었다. 전선 각각은 세 개의 지방 전쟁군 중 하나와 연계된 지역 투쟁들로 이루어졌고, 이 지방 전쟁군들은 다시 지구적 냉전 네트워크와 연결되었다. 각 전선은 소련과 중국의 국경을 따라 만들어졌고, 지방 권력의 대두에 집중되었으며, 탈식민지화의 뒤를 쫓아 전개되었다. 다량의 병력이 주둔한 중부 유럽의 변경 지대는 비교적 평화적으로 남았던 반면, 동쪽에서는 격렬한 충돌이 불타올랐다. - P16


2023년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는 10월 7일 이스라엘을 기습해 1,200여 명을 살해하고, 240여 명을 납치했다. 이스라엘은 ‘피의 보복’에 나섰고 현재, 팔레스타인 희생자만 2만 명을 넘어섰다. 봉쇄된 가자지구의 주민 220만 명도 생사기로에 있다. 이스라엘의 무차별 공격은 세계 곳곳에서 반유대주의 물결을 일으켰다. 국제사회의 휴전 촉구에도 전쟁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어느덧 2달을 훌쩍 넘겨버린 전장터가 된 가자지구를 떠올렸다. 중간에 일시적인 휴전이 있기도 했지만 결국 전쟁은 현재진행중이다. 


현대 아시아의 역사는 제국주의의 그늘에서 탈출하기 위한 몸부림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다 미소 냉전으로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에 의해 한쪽 편에 서는 것을 강요당했다. 1955년 비동맹운동이 일어나면서 중립 노선이 성공할 수 있을까 했으나 성과를 내지는 못하고 끝났다. 냉전이 해체되면 평화가 올 것 같았으나 강대국의 영향력은 여전하고 잠재해 있던 내부 갈등이 결합되어 연쇄 반응을 일으키며 폭력과 전쟁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번역서의 제목은 ‘아시아 1945-1990’이고 원서의 제목은 ‘The Cold War’s Killing Fields: Rethinking The Long Peace’이다. 비교해보면 번역서의 제목이 지역과 시기를 담아내고 있기 때문에 직접적이라고 할 수는 있겠으나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읽어보기 전에는 주제를 파악하기가 어려운 단점이 있다. 그런 뜻에서 번역서의 제목을 원서 제목의 의미를 살려서 번역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아시아에서 치뤄진 폭력의 역사를 담고 있다. 저자는 같은 시기 다른 지역은 냉전이라는 미명 아래 장기 평화의 시대에 진입했으나 아시아는 남은 제국주의와의 민족해방전쟁, 이념, 인종과 종교의 갈등으로 인해 이뤄진 각종 전쟁으로 열전을 치뤄냈다고 주장한다. 

시기별로 전쟁의 성격이 구분되는데 첫 번째는 동아시아 전선으로 1945년부터 1954년 시기의 중국, 한국, 인도차이나가 그 무대다. 두 번째는 남아시아 전선으로 1964년부터 1979년까지 베트남, 라오스 및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방글라데시가 그 무대다. 세 번째는 서아시아 전선으로 1975년부터 1990년까지 레바논과 이란, 아프가니스탄이 그 무대다.


기존에도 현대 제3세계가 열전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음을 많은 연구자들이 밝혔으나 저자는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보다 아시아에서 열전의 규모가 압도적으로 컸음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동안 아시아 지역의 개별 전쟁사를 다룬 책들은 있었으나 여러 전쟁사를 현대 시기 전반에 걸쳐 다룬 역사서는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독자는 소중한 참고서를 얻은 셈이다.


나는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까지 남아시아에서 벌어진 전쟁에 대해서 소중한 정보를 얻었다. 베트남 전쟁은 한국과 관련이 깊기 때문에 알고 있었지만 베트남 전쟁의 여파가 라오스, 캄보디아로 확대되었음은 잘 알지 못했었다. 또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학살과 방글라데시 해방 전쟁, 크메르 루주 정권의 제노사이드도 그 배경과 전개 과정을 전반적으로 알게 되었다.

또한 마지막 전선이었던 서아시아에서 벌어진 전쟁(레바논 내전, 이란 혁명,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란-이라크 전쟁)은 미소의 전쟁 개입으로 무장 정파 등의 급진파들을 만들어내는 데 기여하면서 현재에도 영향을 끼친다는 의미에서 중요한 역사라 느꼈다. 개인적으로 1~3부 중 3부의 내용이 가장 설득력 있어 좋았다. 


아쉬운 점들도 있다. 


첫 번째로, 1960년대 중국과 소련의 균열 구도를 설명하는 부분은 그 근거가 빈약해보였다. 우선 양국 간 정치, 이념적 차이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고 느껴졌다. 그리고 아시아 전장에서의 이득적인 면이 갈등의 요인이 되었겠지만 미국과의 이해 관계가 있다는 점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는 아무래도 제1시기와 제2시기 사이의 10년 동안 각국에서 벌어진 정치, 군사적 흐름에 대한 공백의 영향도 있지 않을까 싶다. 


두 번째로, 시기별로 주요 전장이 달라졌을 뿐이지 각 지역의 역사가 제국주의의 영향과 이념, 종교와의 갈등에서 어느 곳 하나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전장에서 벌어진 일을 그 시기로 한정하려고 하다보니 맥락이 이어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특히 1971년 벌어진 인도와 파키스탄 간 전쟁은 그 갈등의 기원이 1947년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1947년 양국은 영국에서 분리독립되었으나 이후에도 대립 구조가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카슈미르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1949년 둘 간에 전쟁이 벌어지면서 전선에 의해 카슈미르가 분할되었다. 그런데 책에서는 1970년 무렵부터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사료들이 미국 쪽에 치우쳐 있음이 아쉬웠다. 


여러 아쉬움들이 있지만 쉽지 않은 작업이었을텐데 전체적으로 정리해낸 저자의 노고에 박수를 쳐주고 싶다. 앞으로도 이런 저작이 쉽사리 나오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18일부터 읽기 시작해서 27일 완독하였으니 딱 열흘 걸려 읽어냈다. 최대한 꼭꼭 씹어 소화하기 위해 천천히 읽느라 시간이 더 걸렸는데 이해를 그만큼 했는지는 모르겠다. 앞으로도 참고서로 잘 활용할 수 있는 책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현대 아시아의 역사를 이해하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의 반세기는 세계를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 미국, 유럽, 러시아에게 냉전은 마르스크주의의 혁명적 도전을 사실상 패배시켰고, 자본주의를 지배적인 정치, 경제, 시스템으로 남겨 놓았다. 그러나 제3세계에서는 사태가 전혀 다르게 끝났다. 제3세계에서 냉전은 유럽 식민주의를 파멸시키면서 수십 개의 독립국가들을 창출하는 동시에 2000만명 이상을 죽이고 온건한 세속 민족주의의 힘을 파괴한 대량 폭력을 부채질하는 데 일조했다. 궁극적으로 두 이야기는 냉전 시대와 21세기 국제 질서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냉전의 킬링필드에서 저질러진 격렬한 폭력은 유럽의장기 평화 못지않게 현대 세계의 형성에 주요한 요소였다. - P872~873


동아시아를 위한 전투는 초강대국 투쟁을 제3세계에 가져왔다. 이 지역 전역에서 격렬한 충돌이 벌어지자 미국 지도자들은 세계 지배를 위한 공산주의자들의 노력을 목도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1949년10월부터 1950년 6월 사이의 몇 개월은 제3세계에서 냉전이 형성되는 데 핵심적인 기간이었다. 1949년 10월 중국이 공산주의 대국으로 등장하자 동아시아에서 힘의 균형이 뒤집혔고, 개발 도상 세계 전체에서 마르크스주의 혁명의 가능성이 커졌다. 워싱턴과 모스크바의 냉전 지도자들은 중국, 한국, 인도차이나에서 맹렬히 진행된 일련의 아시아 혁명들을 두고 하나의 응집된 전선으로 결합해 전략적 계산을 수행했다. 한편 동쪽에서 공산주의가 승리하자 주저하던 소련 지도자들은 아시아 혁명가들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마오쩌둥과 동지들은 냉전 투쟁의 방향을 중부 유럽에서 동아시아의 포스트식민주의국경 지역과 그 너머로 돌렸다. - P88

1954년 제네바에서 소련과 중국 지도자들은 그들 자신의 국익을 동남아시아에서 공산주의 공세를 계속한다는 목표보다 위에 두었다. 그러나 베이징과 모스크바는 그 모든 승리에도 불구하고 양쪽의 정치적, 이념적 이해관계 속에 뿌리박힌 극심한 차이를 극복할 수 없었다. 또한 마오쩌둥은 중국 내전 동안 스탈린이 했던 미온적인 지원을 결코 잊지 않고 있었다. 또한 중국 지도자들은 개발 도상 세계의 사회들에 소련 모델을 적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여전히 회의적이었다. - P267

베이징과 모스크바 사이의 균열이 깊어지면서 개발 도상 세계에서 경쟁이 더욱 치열해졌다. 쿠바 미사일 위기 동안 미국과 최후의 대결을 벌이면서 의기소침해진 흐루쇼프는 포스트식민주의 세계에서 소련의 자세를 더욱 행동주의적으로 취함으로써 제3세계 동맹자들에게 모스크바의 신뢰를 회복시킬 필요에 직면했다. 한편 중국 지도자들은 처참한 대약진운동의 경험을 잊어버리고 제3세계 혁명 프로젝트의 리더십에 대한 그들의 권리 주장을 강화하기를 바랐다. 1960년대라는 새로운 10년이 시작되면서 베이징도, 모스크바도 비서방 세계에서 자신들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 교묘하게 움직였다. - P280

크렘린에 대한 베이징의 적대감이 증대하고, 인도네시아에서 인도네시아 공산당이 학살당했으며, 중소 국경 충돌이 1969년에 발생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하노이를 통제할 수 없게 되자, 중국 지도자들은 워싱턴과 관계 회복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1971년 방글라데시 해방전쟁부터 1979년의 중국-베트남 전쟁에 이르는 동안 워싱턴과 베이징의 지도자들은 소련과 그 동맹국에 맞선 투쟁에서 불가능할 것 같은 제휴 관계를 형성했다. 인도네시아, 베트남, 방글라데시, 캄보디아의 전쟁은 공산주의 세계를 갈갈이 찢어놓았고 제3세계 공산주의 프로젝트를 완전히 파괴했다. - P554

냉전 시대의 마지막 10년 동안에는 혁명전쟁의 경로가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로부터 새로운 지역으로 두드러지게 이동했다. 아야톨라 호메이니, 사담 후세인, 오사마 빈 라덴은 포스트냉전 시대의 국제정치에 긴 그림자를 드리울 것이었다. 이 세번째 충돌의 물결은 좌익 게릴라들이 친서방 정부와 싸우는 이전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났다. 공산주의 혁명가들이 아니라 종교적, 인종적 정치에 사로잡힌 새로운 유형의 급진주의자들이 선두를 차지했다. "동도 서도 아닌" 새로운 길을 개척한 이 다음 세대의 전사들은 워싱턴과 모스크바의 영향력을 모두 거부했다. 냉전 말기의 종파 전사들은 외부 세력에 맞서 싸우는 만큼이나 서로를 상대로도 싸웠다. - P558

대대적인 종파 반란의 전쟁들은 레바논, 이란, 아프가니스탄에서 전투적 그룹들을 급진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그와 동시에 이스라엘, 시리아, 이라크, 파키스탄의 군사화된 정권들을 더욱 튼튼하게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포스트식민주의 세계 전역에서 맹렬하게 진행된 충돌들에 미국과 소련이 퍼부은 군사적, 정치적, 재정적 지원은 온건파를 파멸시키고 세계의 사회들을 급진화하는 데 일조했다. - P8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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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12-28 08: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리뷰 읽고 이 책 장바구니에 넣었는데 분량이 어마어마하네요.
저 미국이 캄보디아 폭격했다는 걸 알았을 때 되게 놀랐던 기억이 나네요. 그 커다란 나라가 도대체 그 작은 나라를 왜 폭격하는거야? 하고 말이지요. 그때 정말 대충격이었는데, 이 책 읽어보고 싶습니다.

거리의화가 2023-12-28 09:05   좋아요 2 | URL
미국은 아시아 대부분의 전쟁에 개입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과 러시아(소련)은 그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죠.
아무래도 시기도 길고 전 아시아의 역사를 다루다보니 분량은 두껍지만 필독서임에는 분명합니다. 현대의 아시아를 이해하시는 데 도움이 되실거에요.

잠자냥 2023-12-28 08: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보관함에 담아두기는 했는데, 필독서군요!!

다락방 2023-12-28 08:59   좋아요 2 | URL
나에겐 오늘 잠자냥 님이 쏘아준 600원이 있다.. 이 책을 사기에 충분하지!!

거리의화가 2023-12-28 09:03   좋아요 1 | URL
두분 다 꼭 읽어보셔요! 좋은 책입니다^^
 
귀로 보고 손으로 읽으면 - 시각장애 언어학자가 전하는 '보다'에 관한 이야기
호리코시 요시하루 지음, 노수경 옮김 / 김영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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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의심하고 묻는 일이 필요한 이유가 들어 있다. ‘신scene(풍경)‘은 결코 신seen(보이는)‘이 아니다. 장애, 인권에 대한 생각을 넘어 교육 등 사회의 전반적인 이슈에 대한 통찰이 인상적이었는데 결국 마음의 방향이 중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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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미쳐 있는 - 실비아 플라스에서 리베카 솔닛까지, 미국 여성 작가들과 페미니즘의 상상력
샌드라 길버트.수전 구바 지음, 류경희 옮김 / 북하우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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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정지해 있거나 심지어 퇴행하고 있는 것만 같은 시기도 사실은 도전 의식을 북돋우며 미래에 필요한 전술을 정교하게 만들어내는 시기인지도 모른다(P45).


다른 어떤 문장보다 나는 책에서 이 문장이 가장 좋았는데 이것이 그동안 여성들이 걸어온 길과 여성 운동의 역사를 말해주는 동시에 현재와 미래를 긍정 또는 부정으로 속단하거나 예단하지 않기 때문이라 여겨서다. 


이 책은 1950년대부터 2020년 현재에 이르기까지 미국을 배경으로 페미니스트들이 걸어온 길을 조망한다. 그러나 이 책은 페미니즘의 쇠퇴와 몰락을 다룬 역사가 아니며, 그런 일과 관련된 페미니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역사도 아니다. 물론 오늘날 우리가 목격중인 부활에 관해 희망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보다 이 책은 수 세대에 걸쳐 여성 작가들이 어떤 식으로 문화적 변혁의 비전을 형성하기 위해 자기 삶의 수수께끼를 타진해왔는지 따져보는 이야기다(P43). 


미국 페미니즘의 역사는 그동안 다른 책들을 통해서 경험한 바 있기 때문에 책을 읽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페미니즘 작가나 사상가들의 작품은 생소해도 이제 대부분의 작가들의 이름은 낯설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19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는 냉전의 시작과 함께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전쟁(특히 베트남 전쟁 등)으로 인해 페미니스트들도 반전 운동에 뛰어들었다. 


‘평온한’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성별 분화라는 이데올로기가 W.H.오든이 1947년에 (개인적인 불안감과 공적인 불안감을 뜻하여) “불안의 시대”라고 명명했던 때에 생겨났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 개인적인 불안감과 겹쳐진 공적인 불안감은 의심의 여지 없이 2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킨 버섯구름에 집중되어 있었다. - P62


“그와 그녀의 시간”이라는 어구는 양성의 별개 영역, 즉 생계 책임자와 가정주부라는 별개 영역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회색 모직 양복을 입은 남편”이 하루의 노동을 끝내고 귀가하면, 길고 폭넓은 치마와 장식이 달린 1950년대식 뉴룩 스웨터를 입은 교외 지역 내조자가 깔끔하고 깨끗한 베티 크로커/베티 퍼니스사의 가구가 구비된 부엌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P59


언급된 페미니스트들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실비아 플라스였다. 그녀가 토해낸 ‘아빠’라는 단어는 어떤 여성도 쉬이 지나칠 수 없는 문장이 아닐까 생각했다(아빠에게서 시작하여 남편에 이르기까지). 위압적인 “아빠”와 흡혈귀 같은 존재이자 아빠의 복제물인 남편 모두에 대해 다시 상상한다(P122). 


당신의 살찐 검은 심장에 말뚝이 박혔어요

마을 사람들은 당신을 결코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들은 춤을 추었고 당신을 짓밟았어요.

그들은 그게 당신이라는 걸 내내 알고 있었어요.

아빠, 아빠, 이 나쁜 인간, 이제야 끝이 났네요. - P122


또 베트남 전쟁과 그것에 철저히 개입한 미국에 대해 언급한 수전 손택을 빼놓을 수 없다. 

손택은 역사학자 시어도어 로자크가 대항문화라고 불렀던 문화 운동의 진정한 조력자가 되어 있었다. 1966년에 발표한 ⌜미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는 “캘리포니아의 새로운 아빠가 된 로널드 레이건과 백악관에서 돼지갈비를 씹고 있는 존 웨인이 지배하는 오늘날의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을 공격했다는 점에서 더욱 괘씸한 글이었을 것이다. 미국의 결함을 나열하면서 (“근대의 제도 중 가장 잔혹한 노예제도”, “토착 문화가 그저 적일 뿐인 나라”, “자연 역시 적으로 삼는 나라”) 그녀는 미국이 악명 높게도 “백인종” 문화를 신성시하는 곳이라고 언명했고, “백인종이야말로 인류 역사의 암덩어리이며, (…) 그들이 퍼져나가는 곳마다 자율 문명을 박멸하고 지구 생태계의 균형을 뒤집었다”고 결론지었다. - P167~168


1970년대 페미니즘이 절정에 이르면 운동 주체들의 여러 가지 차이(표면적인 리더들과 추종자로 추정되는 사람들 사이의 차이, 급진주의자와 자유주의자 사이의 차이, 레즈비언과 이성애자 사이의 차이, 유색인종 여성과 백인 여성 사이의 차이)가 때로는 격렬하고 때로는 상처를 주기도 한 담론들을 다양한 형태의 굴종 문제를 다루는 가운데 만들어냈다. - P199


1980년대로 들어오면 페미니스트들은 정체성 정치(인종적, 민종적, 언어적, 영적 기원의 탐색에 전념하는 여성들의 연대를 고취)와 후기구조주의(남성성과 여성성에서 나아가 이성애와 동성애에 관한 인습적 사고에 대한 해체)를 들고 나온다. 이 두 그룹은 앞선 1970년대 활동가들이 유색인종 여성의 현실을 보지 못했다고 하거나 젠더의 사회적 형성을 보지 못했다고 하면서 이들을 맹비난했다(P341). 


이번 기회에 새롭게 알게 된 페미니스트들이 존재했는데 맥신 홍 킹스턴과 글로리아 안살두아가 그렇다. 


그 중 맥신 홍 킹스턴은 특히나 눈에 띄었는데 이는 얼마 전 원서 읽기에서 중국계 이민자 소녀 가족의 이야기를 만나서 그런지 더욱 그랬던 것 같다. 

그녀는 1976년 ‘정체성 정치’ 개념이 부상할 즈음 새로운 종류의 페미니즘 텍스트를 발표했다. 소설집 ‘여전사: 귀신들 사이에서 보낸 소녀 시절 회고담’이 그것이다. 이 작품은 남성과 여성의 차이와 여성과 여성의 차이에 관한 1970년대 담론들에 더해, 여성으로 성장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특징짓는 다른 많은 차이들(지리적 차이, 언어적 차이, 요리법의 차이)에 대한 인식을 추가시켰다(P319). 

‘여전사’는 어머니이기도 하고 딸이기도 하며 나아가 일반적인 여성 명사의 대표로 쓰이는 존재가 아닐까. ‘귀신’은 중국계 이민자로서 경험한 미국인/백인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 작품이 1980-1990년대 베스트셀러였다고 하는데 지금 읽어도 여전히 유효하게 읽을 수 있는 읽을 거리가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후에 인종 문제를 노예 제도에 빗대 다룬 토니 모리슨의 ‘빌러버드’란 작품도 있다. 


‘글로리아 안살두아’는 남부 텍사스에서 멕시코계 미국 여성으로 성장한 과정을 민족정체성 정치와 초국경적 사안에 관한 페미니즘적 사고에 영감을 불어넣으며 이민 정책의 역사를 조명했다. 

“젠더만이 유일한 억압은 아니다”라고 선언한 그녀의 말에 나도 동감하는 바이다. 그는 멕시코계 미국인들의 문화와 멕시코 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멕시코계 미국/멕시코 문화와 흑인 문화, 북미 토착 미국인 문화, 앵글로색슨계 미국인 문화, 그리고 다른 나라 문화와의 소통을 증진하기 위하여 역사, 자서전, 신화를 이용했다. 그녀는 “메스티사 의식”이라는 역설적 사고에 대한 인식을 논했다. 메스티사 의식은 다층적 정체성을 지니고 사는 법을 배워야 하는 국경선 경계 지대의 거주민들이 물려받은 상충하는 충성심에 대한 인식을 말한다. - P351

국경이라는 단어는 인위적인 것이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정체성은 한쪽으로 정해지는 것을 강요받기 쉽다. 장르는 SF로 다르지만 멕시코계 인물들이 나오’고 그들의 언어가 나오기도 하는 ‘Last Cuentista’의 배경이 떠오르기도 했다.


21세기는 9.11테러에 이어 이라크 전쟁 발발로 1950년대가 회귀하는 듯한 흐름으로 시작했다.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민주주의는 후퇴하는 듯 보였으나 조 바이든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질 바이든이 있었고 카멀라 해리스가 부통령이 당선되었다. 트럼프는 자신의 지지자들을 배경 삼아 국회를 장악했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고 있는 중이다. 


여성들은 이런 사회적 흐름에 맞서 꾸준히 투쟁 중이다. 비록 인종주의자들이나 남성우월주의자들에 의한 백래시를 겪기도 하지만 N.K.재미신이 ‘부서진 대지’ 3부작을 통해 지구온난화보다 더 나쁜 기후변화를 겪으며 파괴되는 지구를 묘사하는 것처럼 발전된 문명에 대한 의문(페미니즘의 확장)을 품으며 끊임없이 질문을 하고 있다.


이틀 만에 완독했는데 재밌었고 잘 읽혔다. 비록 미국의 페미니즘 역사이지만 멀지 않은 과거의 현실이기 때문에 지금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은 역사라서 더 눈에 잘 들어왔던 것 같다. 

앞서 언급한 작가들의 작품은 한 번쯤 읽어보겠다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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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3-12-25 15:0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빨리 읽으셨네요! 전 일주일에 한 장씩 읽었는데.. 화가님 완독 축하드려요~ 👍👍

거리의화가 2023-12-25 15:12   좋아요 3 | URL
수하님^^ 생각보다 잘 읽혀서 쑥쑥 읽었습니다. 찾아보면서 읽으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ㅎㅎ) 아주 훌륭한 페미니즘 역사서였네요! 수하님도 완독 축하드립니다.

단발머리 2023-12-25 20: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완독 축하드립니다. 👏👏👏👏👏
전 지금 글로리아 스타이넘 부분 읽고 있는데 넘 흥미롭네요.

거리의화가 2023-12-26 09:14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남은 분량도 즐겁게 읽어나가실 수 있을거예요^^ 응원합니다!

독서괭 2023-12-26 14: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축하드려요! 전 4장까지 읽었어요. 저자가 백인 페미니스트 뿐 아니라 흑인 페미니스트 이야기도 고루 하려고 노력한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중국계, 멕시코계도 나오는군요! 끝까지 열심히 읽어봐야겠습니다.

거리의화가 2023-12-26 17:26   좋아요 1 | URL
저도 다양하게 다루고 있어서 더 좋더라구요. 뒷부분도 흥미롭게 읽으실 수 있을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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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a의 용기와 당당함에 ‘멋지다!‘라는 말을 연발하게 되는 마법. 따뜻한 시선으로 감싸주는 부모님과 찐친 Lupe, 멋진 calivista weeklies 친구들(특히 Hank)이 있어서 어떤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용기를 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장까지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이야기 전개가 돋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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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3-12-22 21: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완독 축하드려요!!^^

거리의화가 2023-12-24 17:16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후반부는 뒷 내용이 궁금해서 계속 읽게 되더라고요!ㅎㅎ

건수하 2023-12-22 21: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가님도! 완독 축하드려요! 🥳

거리의화가 2023-12-24 17:1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수하님도 남은 분량 힘내세요^^

미미 2023-12-23 2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오 화가님! 완독 수고하셨어요>.<🌹🌹

거리의화가 2023-12-24 17:16   좋아요 0 | URL
미미님. 덕분에 좋은 책 읽었습니다^^ 남은 분량 완독을 향해 화이팅!
 
8월의 포성
바바라 터크먼 지음, 이원근 옮김 / 평민사 / 2023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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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우연한 계기에 발견하여 읽게 된다. 이 책이 그랬다. 지난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2권을 읽다가 1차 세계대전의 배경의 이야기 때문에 바닥에 쌓여 있던 이 책의 붉은 색의 강렬한 표지가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비록 다음에 읽기로 예정된 책이 있었으나 이 기회를 놓치면 언제 읽게 될 지 알 수 없는 노릇이므로 지금 집어들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전쟁사 읽는 것을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다가 1차 세계대전은 2차 세계대전보다 더 시기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 개인적으로 거리감이 있는 편이었다. 그러나 읽어보니 저자의 흥미로운 서술 전개 방식, 인물에 대한 탁월한 묘사, 균형감 있는 서술 덕분에 끝까지 지치지 않고 읽을 수 있었다. 부제가 눈에 띄었는데 ‘제1차 세계대전 개전 초기 1개월간의 전사’라는 것 때문이었다. 우연한 계기(사라예보 사건)로 촉발된 것처럼 보이는 이 전쟁은 이전까지 유럽에서 벌어진 전쟁의 경험을 돌아보건대 이번에도 단기전으로 종료될 것으로 사람들은 생각했다. 그런데 전쟁 초기 1개월 여의 기간 동안 끝날 수 있었던 전쟁은 4년의 시간이 흐를 정도로 지지부진하게 진행되며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왜 그랬을까?


직관으로 그랬는지 또는 고도의 지적능력으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모두 군인인 세 사람만은 수 개월이 아닌 수 년간 길게 뻗은 검은 그림자를 보았다. "길고, 소모적인 투쟁"을 예언한 몰트케가 그 중 하나였다. 죠프르가 두 번째였는데 그는 1912년 장관들의 질문에 대해 만일 프랑스가 전쟁에서 먼저 승리를 거두게 되면, 독일의 국가적인 저항이 시작될 것이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대답했다. 양쪽 모두 다른 나라들을 끌어들일 것이며 그 결과는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각각 1911년과 1906년부터 자국의 총사령관이었던 죠프르나 몰트케, 그 누구도 계획을 세우면서 자신들이 예견한 형태의 전쟁에 대한 어떠한 배려도 하지 않았다.
세 번째이자 자신의 전망대로 행동했던 유일한 인물은 키치너 경인데, 그는 최초의 계획에는 참여하지 않았었다. 8월 4일 이집트로 향하는증기선에 승선하려는 순간 급하게 소환되어 국방장관에 임명된 그는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어떤 수수께끼 같은 신통력에 의해 이 전쟁은 3년간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이를 믿지 않는 다른 각료들에게 그는 어쩌면 더 걸릴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3년은 각오해야 합니다. 독일 같은 나라는 사실상 결말이 난 후에도 완전히 궤멸되어야만 굴복할 것입니다. 그 과정은 매우 오래 걸릴 것 같군요. 지금 살아 있는사람은 누구도 그것이 얼마나 걸릴 지 알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 P218~219


1장부터 5장까지는 1차 세계대전의 배경과 주요 참전국들의 전쟁 계획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개인적으로 가장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각국의 전쟁 계획을 엿봄으로써 전쟁의 전개 방향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중 주요국에 해당하는 독일군과 프랑스군의 작전 계획은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슐리펜 계획’은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지만 ‘플랜 17’은 작전계획이라고 하기에는 유동적인 측면이 많았던 것 같다. 


독일군의 작전명은 ‘슐리펜 계획’이었다. 핵심은 적의 양 날개를 꺾고 그 배후를 공격함으로써 적을 완전히 괴멸시키는 것”이다. 이 작전의 핵심은 프랑스군을 메츠와 보쥬 사이의 자루로 돌진해 오도록 유인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약하게 만든, 알자스-로렌 전선의 독일군 좌익이었다. 프랑스군은 빼앗긴 영토를 해방시키기 위해 이 지점을 공격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며 그렇게 되면 독일군이 작전을 성공시키기에는 더 유리할 것으로 판단되었다. 왜냐하면 전쟁의 진정한 승리가 프랑스군의 배후에서 성취되는 동안 그들은 독일군 좌익에 의해 자루 속에 갇힌 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 P78


반면 프랑스 군측의 주요 작전인 ‘플랜 17’은 1913년 4월에 완성되었다. 그것의 동기가 되는 아이디어는 “우리는 마인쯔를 지나 베를린으로 가야 한다”는 것인데, 작전계획이 아니라 정해진 목표도 없이 환경에 따라 유동적인 각 군의 몇 가지 공격로에 대한 지침을 포함한 군의 배치계획이었다. “주변 여건에 관계없이, 모든 병력이 하나가 되어 독일군의 공격에 맞서 진격하는 것이 총사령관의 뜻이다.” 일반 지침의 나머지 부분은 프랑스군의 행동이 두 곳의 주공격으로 이루어질 것이며, 하나는 메츠-티옹빌의 독일군 요새 지역 왼쪽을, 또 하나는 그 오른쪽을 공격한다고만 언급하고 있다. 총체적인 목표는 밀려오는 독일군 우익을 고립시켜 후방과 차단하면서 동시에 라인으로 밀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 P108


5장부터 9장까지는 초반 전쟁의 분수령이 된 영국 참전 여부와 벨기에 중립을 둘러싼 각국의 활동을 엿볼 수 있다. 

10장 이후부터 마지막 장까지는 1개월 동안의 주요 전투의 전개, 결과를 확인하며 앞으로의 전쟁을 예상하게 한다. 


리에쥬는 독일로부터 벨기에로 들어오는 길목을 지키는 철책문이었다. 이곳은 유럽에서 가장 함락하기 어려운 전략 요충지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독일군은 벨기에의 힘을 약하게 보았을지도 모르지만 예상 못하게 선전하면서 독일군은 빠른 시간 내에 그곳을 통과하여 프랑스로 들어가려는 계획에 차질을 빚게 되었다. 


리에쥬의 의원인 셀레스탱 뎀블롱은 그때 쌩 피에르(St. Pierre) 광장에 있다가 공성용 대포가 광장의 모퉁이를 돌아 나오는 것을 보았는데 "대포를 구성하는 부품들이 너무 거대하여 우리의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괴물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다가왔으며 36마리의 말들이 끌었다. 포장된 도로가 들썩거렸다. 군중들은 이 엄청난 기계장치의 출현에 너무 놀라 말문이 막혔다. 그것은 천천히 쌩 랑베르(St. Lambert) 광장을 지나 테아트르(Théâtre) 광장으로 들어간 다음 호기심에 가득 찬 군중들을 끌어 모으면서 소브니에르(Sauveniere) 대로와 아브루아(Avroy) 대로를 따라 느릿느릿 무겁게 지나갔다. 한니발의 코끼리들도 로마인들을 이보다 더놀라게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것과 동행하는 병사들은 거의 종교적인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절도있게 행진했다. 그 대포들은 악마였다..…그것은 아브루아 공원에 조심스럽게 설치된 다음 정밀하게 조준되었다.

그리고 나서 엄청난 폭발이 있었는데, 군중들은 뒤로 나가떨어졌고, 땅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으며, 가까운 곳의 창문은 모두 박살이 났다." - P321


영국군은 영국의 군사적 대비책에 관한 기본 방향을 견지하였으며, 프랑스에 파병한 BEF의 지휘에 관해 죤 프렌치 경에게 시달할 지침을 통해 전쟁초기 단계에서 원정군의 책임을 제한하려는 자신의 의지를 반영시켰다. 


프랑스군의 공격 위주 전략에 대해 비난을 반영하고 있는 키치너의 명령은 만일 프랑스군이 대규모로 동원되지 않은 채 영국군이 "적의 공격에 과도하게 노출될" 수도 있는 그 어떤 "공격 작전"에 참여하도록 요청을 받는다면 죤 경은 우선 본국 정부와 협의해야 하며, "경의 지휘권은 전적으로 독립적인 것이며, 경은 어떠한 경우라도 동맹국 장군의 명령에 어떤 의미로도 통제 받지 않음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 P338


브뤼셀의 함락소식이 전해지자 8월 20일 마침내 프랑스는 총공격에 임하게 된다. 랑허작은 상브르에 도착했으며 영국군도 그와 이웃한 위치에 있었다. 그동안 우왕좌왕하던 죤 프렌치 경도 마침내 죠프르에게 다음날이면 작전에 임할 수 있도록 준비가 끝날 것이라고 확인해 주었다. 그러나 로렌에서는 나쁜 소식이 들려왔다. 루프레흐트의 반격이 엄청난 위력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카스텔노의 제2군은 죠프르가 일부 군단을 벨기에 전선으로 이동 배치함으로써 균형을 잃고 후퇴 중이며, 듀바이도 혹독한 공격을 받고 있다는 보고였다. 알자스에서는 현저하게 줄어든 독일군을 상대로 포 장군이 물루즈와 그 주변 지역을 전부 재탈환했지만 이제 랑허작 군이 상브르로 이동하면서 중앙공격에 투입될 전력이 빠져나가게 되어 포의 군대가 그 자리를 대신 맡아야만 했다. 죠프르의 어쩔 수 없는 입장 때문에 포의 병력을 철수시키라는 결정이 내려졌으며, 알자스마저 가장 큰 제물로써 플랜17의 제단에 바쳐지게 된 것이다. - P375


8월 20일부터 24일까지 실제로 전투가 벌어진 곳은 전체 서부전선 중 네 군데였으나, 역사는 이들을 묶어 국경의 전투(the Battle of the Frontiers)라 부른다. 8월 14일부터 우측의 로렌에서 이미 시작된 각각의 전투 결과가전 전선에 알려지게 되면서 로렌의 소식이 아르덴느에, 아르덴느는 다시 샤를루와 전투로 불리는 상브르와 뫼즈에, 그리고 샤를루와는 몽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 P377


러시아는 프랑스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전방동원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전쟁에 필요한 준비는 아무것도 되어 있지 않았다. 충분한 전력이 갖추어져야 참전할 수 있다고 했지만 8월 10일이 되자 독일이 동프러시아에 남겨둔 병력에 공격을 가함으로써 가능한 가장 신속하게 독일을 향해 진격하는 형태로 공격을 가하는 결정이 내려졌다. 


8월 말이 되자 연합국 국민들은 자신들이 궤멸시켜야만 하는 적, 붕괴시켜야만 하는 정권, 끝장을 봐야만 하는 전쟁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9월 4일 영국, 프랑스, 그리고 러시아정부는 "현재 진행 중인 전쟁 중에는 개별적으로 강화를 맺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런던조약에 서명했다. 그 이후 문제는 더욱 어려워졌다. 연합국들이 자신들의 목표는 독일군국주의와 그 황실의 패망이라고 선언하면 할수록, 독일도 더욱 완강하게 완전한 승리를 얻을 때까지 전쟁을 멈추지 않겠다는 일관된 맹세를 다짐했다. 윌슨 대통령의 중재안에 대한 답신에서 베트만홀베그는 런던조약이 독일에게 끝까지 싸울 것을 강요하였으므로 독일도 강화를전제로 한 제안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연합국들도 같은 입장이었다. 양측은 전쟁기간 내내 이러한 입장을 고수하게 되었다. - P509


이미 정해진 결정을 재확인하기 위해 작전실로 들어선 죠프르는 그곳에 모여 있던 장교들에게 "여러분, 우리는 마른에서 싸울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다음날 아침 진격나팔이 울려 퍼질 때 전 장병들에게 낭독될 명령에 서명했다. 대개 프랑스어는 특히 대중에게 공표될 경우 그것이 화려하게 들리도록 정성을 들이게 마련인데, 이번에는 거의 진부할 정도로 평범한 단어를 사용했지만, 그 요지는 강하고 단호했다. "이제 전투가 국가의 안위와 직결된 단계에 이르렀으므로 우리 모두는 더 이상 과거를 되돌아볼 때가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모든 노력은 적을 공격하여 물리치는 데 기울여져야 합니다. 진격하는 것이 불가능한 부대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 자리를 사수해야 하며 뒤로 밀리기보다는 차라리 그 자리에서 전사해야 합니다. 현재의 상황에서는 어떠한 실패도 용납되지 않을 것입니다." - P674


마른 전투를 시작하는 것에서 이 책의 내용은 끝이 난다. 전투의 결과는 독일군의 패배로 끝이 나면서 초반 승리의 기회는 더 이상 사라지고 없었다. 

서부전선의 교착은 슐리펜 계획의 실패와 플랜17의 실패가 합쳐져 이루어졌다. 하루에 5,000명 때로는 50,000명 꼴로 인명을 빼앗고, 무기, 에너지, 돈, 고급 두뇌, 훈련된 인력을 고갈시킨 서부전선은 연합국의 전쟁자원을 소진시켰으며 다른 경우였으면 전쟁을 단축시킬 수도 있었던 다다넬스 작전과 같은 이면작전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렸다. 개전 첫달의 실패로 인해 굳어진 교착상태는 전쟁의 향후 진로와 결과적으로 강화조약의 조건, 양 대전 사이의 사회상, 그리고 제2차 대전의 조건들을 결정짓는 데 영향을 끼쳤다. - P681


이 책으로 전쟁 초기의 역사를 정리한 이후 다른 1차 세계대전의 역사 사료들을 접한다면 더 풍성한 읽기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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