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

19세기 중반 과학자들 사회에서 과학의 엄격한 보편성, 무조건적 필요성, 절대적인 진리성을 버리고 지식의 자성적 특징, 유효조건, 상호주관성, 독립성을 강조하는 과학의 새로운 개념이 확산되었다. - P2080

중국에는 언어훈련을 받은 인재가 전혀 없었고, 이것이 중국과 서방의 불균형한 관계에서 중국 측 열세의 한 요소였다. 황실은 오랫동안 왕조의 전통을 지키느라 ‘오랑캐’가 중국어를 배우는 것을 강력히 막아왔다. - P2088

메이지 시기에 보다 집약적으로 서방 지식의 수입이 가능했던 이유는 서방의 전문가를 초빙했을 뿐 아니라 번역인재를 체계적으로 양성하는 제도가 수립되었기 때문이다. - P2089

유럽 각 민족은 언어공동체로 간주되고 또 그렇게 선전되었다. 고상한 문어는 모든 민족의 핵심적인 성취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여러 지역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말하는 언어는 그 지역의 풍속과 강고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 P2093

19세기의 가장 중요한 문화적 진보 가운데 하나는 문해력의 대규모 확산이었다. 대중적인 문해력의 보급은 하나의 과정이었다. - P2095

엘리트들이 문해력 보급에 대해 보인 반응은 이율배반적이었다. 한편으로는 이성적인 읽기와 모범적인 문화생활을 통해 ‘보통사람’을 계몽시켜 미신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한편으로 읽고 쓰는 능력의 대중화는 일반적으로 명예와 권력의 등급질서의 변혁을 유발하거나 현존질서를 건드릴 수 있었다. - P2099

현대 이전 사회에서 기타 국가와 비교할 때 중국의 읽고 쓰기 교육은 높은 수준이었으나 19세기에 들어와 중국의 읽고 쓰기 교육은 거의 정체되었다. - P2104

국가가 청년의 공식교육을 독점적으로 통제한다는 구상은 19세기의 혁명적인 혁신이었다. - P2109

몇몇 국가에서는 대학생들의 정치적 행동이 관심을 불러일으킬 때라야 대학과 관계없는 사람들이 대학의 존재를 의식하게 된다. 19세기 초가 되자 ‘대학생-청년-저항’이란 연상의 고리가 형성되었다. - P2117

19세기 말이 되자 새로운 연구기관 이 생겨났지만 독일 개혁가들의 기본 구상은 연구 기능을 연구기관으로부터 대학으로 옮기고 독립적인 연구기관을 대학의 깃발 아래로 결집시키는 것이었다. - P2125

1880년부터 미국의 부는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대학을 설립하여 자신의 이름을 영원히 후세에 알리려는 부호들이 속출했다. - P2130

일본인들은 독일 역사학파가 제시한 사료비판과 실증주의를 흡수했으나 독일 역사학의 철학적 방법론과 문학적 서술 기교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 P2132

개별적인 지식의 이동성은 차이가 많았다. 어떤 지식은 다른 지식보다 쉽고 빠르게 움직였다. 유럽 지식은 내재적 우월성 때문에 자연스럽게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는 오래된 관념은 전혀 설득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나치게 단순한 평가였다. 이런 평가는 지식의 접촉과 전파 과정이 일어난 특수한 문화적 정치적 상황을 무시한다. - P2136

언어의 관점에서 번역은 거대한 도전이었다. - P2138

일본의 회화는 유럽의 아방가르드가 당면하고 있던 문제에 해답을 제시해 주었다. 모더니즘 예술운동의 선봉에 서 있던 유럽 예술가들은 유럽의 영향을 받지 않은 일본의 예술작품에서 자신들의 노력과 일맥상통하는 방향을 발견했다. 바로 이 시기에 유럽의 일본예술에 대한 열광과 일본의 유럽예술에 대한 열광이 동시에 정점에 도달했다. - P2141

서방의 조성음악이 이국의 성소를 흡수하여 불안정해진 곳에서 아시아 음악이 깊은 영향을 미쳤다. - P2142

아무런 구분 없이 구원종교의 발생지로 인식되던 ‘아시아’는 비이성주의의 상징이 되어 서방의 이성주의와 논쟁적으로 맞서게 되었다. - P2143

과학의 제도적 확장은 자연과학과 의학 영역뿐만 아니라 인문학과 사회과학 영역에서도 일어났다. 이런 개념은 19세기 말에 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이미 있어왔지만 이 시기에 과학계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 P2145

유럽에서만 동방학이 형성되었을 뿐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는 20세기 말이 되어서야 서방학의 싹이 나왔다. - P2151

당시에 문자 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자위능력을 갖춘 국가를 형성하지 못했으며, 도시생활이 극히 일부이거나 아예 없는 유럽 이외 지역의 사회에 대해서는 동방학의 어문학 연구방법을 적용하여 연구할 수가 없었다. 이른바 ‘미개민족’ 또는 독일어로 ‘원시민족’에 대해서는 19세기 60년대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새로운 과학인 민족학이 주도하여 연구했다. - P2153

19세기 서방의 타자 연구의 학문적 발전은 그 속의 불쾌한 교만에도 불구하고 비유럽 문화의 역동적인 학문 활동에 대한 제국주의의 파괴적인 침입이면서도 동시에 그 시대의 세계화된 인문학의 기초를 놓은 동력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 P2156

모든 학과 가운데 지리학은 서방의 제국주의적 확장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 P2157

미슐레와 릴은 같은 시기에 현재와 과거의 사회 저층의 생활을 묘사했다. 그들의 작품에서 흘러나오는 사회 저층에 대한 동정심과 극히 사실적인 기술 방식은 당시로서는 보기 힘든 것이었다. 릴은 독일에서 ‘민속학’이라 불렀던 학문분야를 창시했다. - P2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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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급제도

그 시대의 대부분의 이론은 ‘유럽 중심적’이었지만 최소한 메인, 뒤르켐, 베버의 이론에는 비유럽 지역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 그들은 원칙적으로 비유럽 문명세계의 후발민족은 피부색과 신앙에 관계없이 사회진보의 보편적 모형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믿었다. - P1991

초기의 상황이 지역마다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등급에서 계급으로’의 모형은 유럽사회의 변화를 불완전하게 묘사할 수 있을 뿐이다. 19세기가 시작되었을 때 ‘등급’은 모든 유럽사회에 적용될 수 있는 주요 구분원칙은 아니었다. 1800년 무렵 ‘등급사회’는 세계 기타 지역에서는 흔치 않았다. - P1993

족내혼, 기생계층, 정결금기를 기반으로 한 힌두교 카스트제도는 전 현대사회의 인도에서의 등급 구분에서 유럽의 전통적 계층사회와는 다른 규칙이 적용되고 있었다. 이 규칙을 식민주의가 자기목적에 맞게 강화했다. - P1994

19세기의 세계사회사는 대부분 이민사와 중복되며 디아스포라와 그 결과로서 형성된 새로운 프런티어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 P1995

가톨릭 고위 성직자나 유대인 거물 금융가를 제외한다면 19세기의 귀족은 유럽사회에서 가장 국제화된 집단이었다. 그들은 서로 알고 있었고, 서로의 등급을 평가할 수 있었다. 행동규범과 문화적 이상을 공유하고 있었고, 필요할 때는 프랑스어로 대화할 수 있었다. 또한, 국제 혼인시장에 참여했다. 등급이 높을수록 재산이 많았고 국제적인 교제 네트워크에 접촉하는 면도 넓었다. - P1999

빅토리아시대에 궁정귀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몇몇 사회영역에서 지도자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반대급부로서 사람들의 감사와 복종을 누렸다. - P2003

벵골과 인도의 기타 지역에서 20세기 초에 농촌의 주도 계층이 된 집단은 자민다르가 아니라 토지를 소유한 중간 규모의 농민이었다. - P2007

1869년 이후 일본은 단계적으로 사무라이 신분을 폐지했다. 가장 치명적인 경제적 타격은 연봉제도의 폐지였고 가장 심각한 신분적 굴욕은 1876년에 시행된 칼을 찰 수 있는 특권의 폐지였다. 이제 사무라이는 개별적으로 활로를 찾아나서야 했다. - P2009

신사는 통치자와의 접근성, 국가를 유지하는 역할, 고전에 통달한 지적 능력을 바탕으로 한 세계관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귀족과 유사했다. 이 밖에도 두 가지 공통요소는 토지에 대한 통제권과 육체노동으로부터의 이탈이었다. 여러 면에서 신사의 기능은 유럽 귀족과 대응했다. - P2014

‘부르주아계층’이란 개념의 기만성은 부르주아계층의 생활방식에서 나왔다. 부르주아는 (계층)’상승’을 추구하면서 그 반대의 경우를 가장 두려워한다. 귀족은 몰락해도 귀족이지만 몰락한 부르주아는 사회적 지위를 완전히 상실한 낙오자일 뿐이다. - P2018

프티 부르주아는 19세기에 예외적으로 지역화된 존재였다. 그들의 경제활동 반경은 상시 접촉하는 이웃의 범위를 넘어가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 P2022

진정한 부르주아는 프티 부르주아보다 사고의 지평이 넓고 자본을 소유하고 있으며 육체노동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 P2024

농업과 전원생활과 정통문화보다는 상업이나 비정통적 지식과 관련된, 나아가 시야가 ‘교회의 첨탑’을 넘어서는 직업과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이 지난 어떤 시대와 비교하더라도 중요해졌다. 이런 직업, 생활방식, 사고방식의 주체는 흔히 전통을 버린 새로운 형태의 사회세력, 준 부르주아였다. - P2029

유럽과의 상업적 접촉이 시작되면서부터 비유럽 준 부르주아는 중간에서 거래를 알선해주는 ‘매판’의 기능을 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현지 교역 네트워크와 접촉하는 경험을 넓히고 이 네트워크를 세계경제와 연결시켰다. - P2032

세계 어디에서나 ‘중산계급’은 현대적이고자 하는 욕구 때문에 서로를 알아보았다. 19세기 말에 드러난 현대성은 아시아의 준 부르주아 계급 엘리트에게는 양날의 칼과 같은 선물이었다. 현대성은 보편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권위를 갖추기 위해서는 문화 중립적이고 초국가적이어야 했다. - P2036

캐나다와 뉴질랜드 같은 소수의 예외를 제외한다면 유럽사회는 식민지에서 파편화되고 균열된 상태로 복제되었다. - P2041

19세기의 새로운 사건은 새로운 코스모폴리탄 부르주아계급이 형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서방의 부유한 국가에서 원거리 자본이익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집단이 형성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부르주아 코스모폴리타니즘의 실패한 유토피아가 등장했다. - P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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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허무함이 존재의 의미를 파괴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겪은 모든 시간과 경험은 과거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안전하게 보관되는 것입니다. 누구도 그 무엇도 그것을 훼손하거나 없앨 수 없습니다. - P18

철학적인 사색보다 환경이 중요하죠. 다섯 살 무렵, 피서지 하인펠트에서의 기억을 잊지 못해요. 눈부신 아침이었는데, 햇살이 눈꺼풀을 간질거릴 때 나는 눈을 감고 있으면서도 무언가 따뜻한 기운이 나를 행복하고 안전하게 감싸고 있는 느낌을 받았어요. 눈을 떠보니 아버지가 미소 띤 얼굴로 잠든 나를 바라보고 있었어요. - P19

수용소에서는 틈만 나면 한 줄이라도 책을 쓰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니까요. 일분일초를 아껴서 의미 있게 쓰는 법을 그 시절에 몸에 익혔습니다. - P24

나는 회복탄력성이 좋은 사람입니다. 마음이 괴로울 때도 빨리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낙천적이고 삶을 즐기는 기질을 타고 난 것 같기도 해요. - P27

미래를 기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과거를 의미 있게 기억하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 P28

나는 정신과 의사, 심리치료사로서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입니다. 의미 없어 보이는 고통도 가치 있는 업적으로 바꾸는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일에는 의미가 있다고 확신합니다. 로고테라피는 바로 이런 확신의 토대 위에서 체계화된 이론입니다. - P53

사람들이 ‘비정상이다, 미쳤다, 바보다’라고 규정하는 그들의 말을 잘 들어보면 진실인 경우가 많아요. 나는 이것을 ‘로고 이론’이라고 부릅니다. 로고테라피는 모든 것을 병리학적인 것으로 환원시키는 것과 맞서서 환자의 편에 설 것을 선포합니다. - P84

내가 그 상황에 처해 있지 않으면서 쉽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 P9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그 순간 나는 결심했습니다. 이 땅에서 부모님과 함께 있어야겠다고. - P100

프랭클의 아내로서 잘할 것 같은 여자가 아니라, ‘틸리’라는 존재 자체가 참 멋진 사람이었습니다.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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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네트워크의 형성 과정
철도, 선박부터 전보, 금융에 이르기까지.

19세기 중반부터 1차 대전이 일어나기까지 60년 동안은 전례없는 네트워크 형성의 시기였다. 이것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이유는 1차 대전 중에 많은 네트워크가 해체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후 수십년 동안 자기중심주의의 힘이 더 강해졌기 때문이다. 세계를 뒤덮는 네트워크의 형성을 ‘세계화‘라고 부른다면(화려한 색깔의 모호한정의이긴 하지만) 1860-1914년은 세계화가 뚜렷하게 진행된 시기였다. 우리는 두 가지 사례 - 대륙 사이의 인구이동과 식민제국의장——에 대해서는 이미 논한 바 있다. - P1910

식민지 인도와 반(半)식민지 중국은 하나의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두 나라는 자체적인 역량으로는 (민영이든 국영이든) 원양선단을 건설할 수 없었다. 이 방면에서 일본은 또 다시 아시아- 아프리카의 특수한 예외였다. 아무리 늦어도 1918년 이전에 일본의 군용과 민용 조선업은 다 같이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했다. 일본은 상업해운과 해상군사력에서 세계의 선도국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것은 일본민족 성공의 표지이자 동시에 성공의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 P1916

교통의 역사에서 세계화로 나아가는 강한 흐름은 2차 대전 이후, 특히 비행기를 이용한 장거리 여행이 더 이상 정치인, 기업가, 부호의 전유물이 아니게 된 20세기 60년대부터 형성되었다. 이런 발전의 기술적 기초는 항공 여객운송에 적용된 분사식 추진력이었다. 1958년 보잉 707 모델이 취항하면서 우리는 제트여객기의 시대로 진입했다. 19세기의 가장 대담한 환상으로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한실이 되었다. - P1919

철도의 건설과 운행에는 강철기술, 기계제조, 채광, 통신, 지질, 교량건설, 터널건설, 기차역 설계, 공사현장 조직관리, 자금조달, 인사관리,
운행시간 조정 등 대량의 전문지식이 필요했다. 특히 철도사업이 아직 과학으로 자리 잡지 못한 초기에는 임시변통으로 해결책을 찾아내야 했다. 기술문제는 해결책을 찾아낸다 해도 토지를 징발하고 보상해야 하는 법률문제가 동시에 등장했다. 이 밖에도 철도는 항상 중요한 전략적 의미를 지니는 정치적 화제였다. - P1921

이제 개별 시장 상호 간의 반응은 빨라졌고 가격 수준은 근접했다.
주문이 신속하게 이루어지면서 많은 업종이 대량의 재고를 가질 필요가 없어졌다. 이것은 소기업에게 특히 유리한 환경변화였다. - P1931

얼마 되지 않아 사람들은네트워크 접근권을 세밀하게 규정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인식을갖게 되었다. 이 매체가 처음으로 사용된 크리미아전쟁에서 영국과프랑스의 지휘관들은 군사지식이 별로 없는 민간정치가들이 함부로보내오는 모순된 내용의 전보더미에 파묻혔다. 전보는 공정한 무대가 아니라 새로운 계층질서를 만들어 냈고 고위 관료들만 그것에접근할 수 있었다. 국외에서의 협상은 당연히 수도의 본부로부터접 내려오는 지시의 압력을 받게 되었다. 전권을 부여받은 노련한 외교관이 큰 틀의 외교를 연출하던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 P1932

노동력으로서 아시아인과 아프리카인은 유럽화된 새로운 세계경제에서 필수불가결한 요소였을 뿐만 아니라 많은 경우에 이들은 상인으로서도 시대의 흐름을 놓치지않고 변화에 적응해나가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들에게 더 힘든 일은 공업과 금융업에서 종속적인 지위를 벗어나는 것이었다. 1차 대전이 시작되었을 때 오직 일본만 이 분야에서성공했다. 일본의 공업은 아시아 시장에서 유럽/미국에 맞서 점차로경쟁력을 갖추었고 일본의 무역과 해운회사는 일본열도를 벗어나먼 곳까지 활동범위를 넓혔다. - P1941

19세기의 국제 화폐체계는 처음으로 몇몇 국가가 협력하여1540년대 이후로 전 세계에서 유통되어오던 귀금속의 흐름을 통제하려는 시도였다. 경제(와 기타) 방면에서 대외관계를 엄격하게 제한하던 국가 일본 그리고 특히 중국도 이런 화폐의 유통을 수용했고, (원인을 알지 못한 채) 화폐와 금속의 세계적 유통이 가져온통화팽창 또는 통화긴축의 피해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 P1951

19세기 70년대 초 이전에는 세계에서 영국이 유일하게 이런 통화체계를 채택하고 있었다. 영국에 대응하는 라틴화폐동맹이란 통화체계가 얼마가지 않아요절하자 금·은복본위제는 사라지고 유럽 각 국가는 앞다퉈 금본위제를 실시했다. 독일은 1873년에, 덴마크와 스웨덴은 같은 해에, 노르웨이는 2년 뒤에, 프랑스와 기타 라틴화폐동맹 가입국은 80년대에금본위제를 실시했다. - P1955

금본위제는 역설적이게도 자유주의가 같은 정도로 경제 메커니즘의 철칙‘에 굴복한 자본과 노동의 손을 잡은 경제질서의 규칙이자 상징이었다. - P1960

본질적으로 자본수출은 19세기 후반에 일어난 혁신이었다. 1820년무렵, 해외 직접투자는 아주 소액이었을 뿐만 아니라 전부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가 장악했다. 그러나 1850년 이후로 필요한 조건들이 점진적으로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차입국과 대출국 모두에서특수한 금융기구가 세워졌고, 신흥 중산층의 저축이 축적되었고, 해외투자 기회에 대한 인식이 생겨났다. 무엇보다도 유동자산과 그것을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역사에 유례가 없는 혼합체가 사람들이 런던금융가라고 부르는 곳에 등장했다. - P1961

절대규모를 보면 지금은 백 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그러나 지리적 분포는 넓어지지 않고 서유럽과 북아메리카에 극도로 집중되어 있다. 세계의 자본네트워크는 무역네트워크나(1950년 이후의) 항공운수 네트워크처럼 고르게 두터워지지 않았다.
오늘날 라틴아메리카는 상당히 높은 정도로, 아프리카는 거의 완전히 자본의 흐름과 단절되어 있다. 이에 반해 거대한 규모의 자본이1913년에는 세계 금융체계의 주변부였던 지역(아랍산유국, 중국)으로부터 북아메리카와 서유럽의 중심도시로 유입되고 있다.
20세기는 국제금융의 탈세계화를 목격했다. 가난한 국가는 1차 대전 전과 비교해서 외국자본 도입 경로에 접근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좋은 소식이라고 한다면 정치적 식민주의가 몰락했다는 것이고, 나쁜 소식은 외국자본이 전혀 참여하지 않는 경제발전은 더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 P1967

1825년 이후 라틴아메리카 국가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한 새로운유형의 위기(국가채무위기)는 아무리 늦어도 19세기 70년대부터종의 지역적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이 위기는 대부분 라틴아메리카국가 정부와 유럽 민간 채권자 사이의 충돌이었지만 정치적 또는 외교적 문제를 남기지 않고 해결된 적은 거의 없었다. 채권자는 돈을 돌려받고 싶었지만 쌍방 정부가 담판해야만 해결할 수 있었다. 따라서 금융제국주의가 국제금융시장에 강력하게 개입하는 경향이 있었다. - P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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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의 처우가 개선되고 노동 환경이 좋아진 것이 불과 얼마되지 않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1960, 70년대 아동과 여성 노동자들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생산 압박에 쫓겨 저임금 노동에 시달리던 때가 얼마 되지 않았다.

① 마을은 행정단위다. 예컨대 마을은 정부의 징세 단위이며 심지어 법률적으로는 독립된 법인이 될 수 있다.
② 마을은 공동체가 공유하는 토지를 갖고 있으며 이 토지는 (러시아의 농촌 공동체 옵쉬나Obshchina처럼) 공동체의 결정에 의해서만분배되거나 재분배될 수 있다.

중국 남부지역에서 반드시는 아니지만 대체로 폐쇄적인 주민 거주지역과 맞물리는 (북부의 마을보다 좀더 확장된) 문중조직이 통합과조정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런 문중조직을 역사발전의 시각에서 본질적으로 낙후되었거나 나아가 ‘원시적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문중조직은 고도로 효율적인 농업을 창조하는 조건이었다. 유사한 기능을 공유재산을 보유한 사원(寺院) 공동체가 담당했다. 이런 상황은 중국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 P1827

서술하는 과정에 삽입되어 있는 중국과 인도의 대비에서 알 수 있듯이 세계의 양대 농업사회는 여러 면에서 유사했다. 농민은 원칙적으로 법률상 자유인이었다. 그들이 생산한 것은 일부는 시장에서 팔려나갔다. 경영의 가장 중요한 단위이자 원시 생산단위는 (때로는 소수의 하인과 고용 노동자의 도움을 받는) 가정이었다. 이 세 가지 특징은 인도/중국과 서유럽 —— 최소한 프랑스와 엘베강 서쪽의 독일의 공통점이면서 동시에 인도/중국이 19세기에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노예를 사용하거나 예속적인 노동에 의존하는 플랜테이션, 라티푼티움, 대형 농업기업과 대비되는 점이다. 그러므로 자유로운 서방과 노예노동에 의존하는 동방이란 이분법적 구분은 착오다. - P1832

19세기를 통틀어 세계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농업노동은 육체노동이었다. 유럽의 대부분 지역과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사이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26) 계층상황도 문화에 따른 차이는 없었다.
포메라니아(Pomerania)* 또는 폴란드 장원의 고용 농업노동자와 인도의 고용 농업노동자는 (각자 특유의 위계질서와 문화적 환경 안에놓여 있었지만)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었다. 물질적인 불안정 때문에 일거리를 찾아 사방을 떠돌아야 한다는 것은 그들의 생활환경과경험의 기본적인 유사성이었다. - P1834

자유주의 경제학은 국제교역이 ‘봉건적 제도를 해체함으로사람들을 낡은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노동의욕과 창의력을북돋울 것으로 예상했다.
예상은 실제로 현실이 되었다. 특히 외부의 이해관계가 개입되지않은 곳에서는 소농 경영자는 해외 판매망을 이용해 생산품의 판매처를 찾아냈다. 그러나 자국 정부(예컨대 일본)가 명확하게 수출을지지하고 이를 위한 법률제도와 필요한 사회기반시설을 건설했을때에만, 또는 식민정부가(정치적 안정을 위해 식민지 농민을 보호하려는 의도에서) 외국 플랜테이션 기업을 억제하는 상황에서만 장기적인 성공을 기대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이런 조건이 갖춰지지않았고 그 결과 외부의 이해관계가 우위를 차지했다. - P1835

식민지 플랜테이션은 전혀 새로운 형태가 아니라 구시대 노예제 플랜테이션이진화한 산물이었다. 플랜테이션은 글로벌 자본주의의 도구였으며하나의 예외도 없이 열대지역 국가에서 등장했다. 공업과는 달리 플랜테이션 경제는 국민경제 발전의 과정에 포함되지 않았다. - P1836

전체적으로 볼 때 19세기 라틴아메리카의 아시엔다는 폐쇄된 왕국이었다. 아시엔다 내부에서 농장주가 모든 일을 독단했다. 법률제도는 매우 선진적이었으나 경찰과 법원이 채무고용농의 이익을 보호하는 경우는 드물었고 그들의 생존을 보장해주던 마을 공동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 P1839

19세기에 작업 장소는 새로운 모습을 갖추었다. 공장과 달리 조선소는 몇몇 문명에서 수천 년 동안 수공업노동 협업의 장소로서 알려져 왔다. 근대 초기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에서 조선업은 대기업 조직형식을 갖춘 가장 중요한 경제부문의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그 시절조선업은 목수들의 세계였고 그 뒤로 공업화를 주도하는 부문이 되었다. - P1843

19세기의 공장은 새로운 특성 - 이중성 - 을 지녔다. 공장은 대의 은형 생산 장소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행위의 장소였다. 각종 협력의형태와 권력의 등급이 공장에서 먼저 나타난 후 사회의 다른 부문에확산되었다. 공장은 가정과는 완전히 분리된 순수한 생산의 장소였다. 공장에서는 새로운 작업 습관과 리듬이 필요했고, ‘자유로운 임금노동의 이념이 제한적으로만 적용되는 새로운 규범이 필요했다. 공장노동은 분업과 협력 - 노동자의 능력에 따라 분배되고 조정되는 이었다. 공장노동은 시발점에서부터 작업의 효율을 높이는 방식을 시험해왔고 마침내 1911년에 뛰어난 관리자문가 프레드릭 테일러(Frederick Winslow Taylor, 1856-1915)가 작업과정의 속도를이고 보다 과학적으로 작업과정을 통제하는 심리물리학적 최적화이론 — 이른바 ‘테일러주의‘(Taylorism) —을 창안해냈다. - P1844

공장에서 어린 여성노동자를 맞이한 것은 공포스러운 작업조건이었다. 그들은 감시받는 대형 숙사에 기거하면서 한 가지 채소 반찬만곁들인 쉰밥을 먹어가며 하루 15-17시간을 일했다. 중간 휴식시간은매우 짧았고 성폭력은 빈번했다. 작업은 단조로웠으나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누에고치를 삶는 솥 주변에서는 수시로 사고가 발생했다. 이런 환경은 무서운 폐결핵의 온상이었다.
같은 시기에 번성기에 들어간 면방공업의 작업조건도 이보다 나을게 없었다. 일본의 면방공업은 머지않아 견사공업보다 더 중요한 고용주가 되었다. 면방공업의 특징은 작업자를 극도로 피곤에 빠트리는 야간작업이었다. 1916년 이전까지는 하루 14시간 노동이 보편적이었다. 귀가 멀 정도의 소음 속에서 섬유조각이 떠다니는 공기를 호흡하며 아무런 방호장치도 없이 기계 옆에서 작업하는 여성 노동자들이 기계에 말려들어가 목숨을 잃는 사고는 끊임없이 일어났다. - P1846

운하공사는 노동의 세계가 직면한 새롭고도 가혹한 경험이었다. 수공업 공방에서 공장으로 가는 길이 19세기의 유일한 길이 아니었다. 매우 다양한 배경의 비숙련 노동자 군단이 미국의 운하 건설공사장에 벌떼처럼 모여들었다. 이들은 농촌에서 일거리를 찾아 나선 사람들, 새로운 이민자, 노예, 자유인 신분의 흑인, 여성과 아동이었다. 이들은 권력도 지위도 갖지 못했고 작업조건을 선택할 힘도 없었다. 이들이 연대하고 상호 부조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운하건설 작업에서는 조직적인 노동운동이 형성될 수 없었다. 지리적인 분포만 보더라도 운하건설 노동자의 작업 장소는 변방이었다. 그들의 세계는 공사 현장과 임시 숙소가 전부였다. - P1849

모든 대륙에서 철도건설 공사가 벌어지는 곳이면 지역의 경계를넘어선(흔히 국제적인) 새로운 노동시장이 형성되었다. 많은 대형 공사가 아시아 농촌사회라고 하는 거대한 노동력 비축기지로부터 비숙련 노동력을 조달했다. 반면 철도 운영에는 높은 수준의 기술인력 기관사, 열차장, 철도 순시원, 철도 수리공 등 ㅡ 이 필요했다. 가변적이기는 하지만 결코 사라진 적이 없는 인종차별의 벽 앞에서 멈추어야 했던 식민지 주민들에게 새로운 신분상승의 기회가 찾아왔다. 이 기회는 민족주의가 촉발한 권리요구와 관련성이 있었을것이다. 예컨대, 멕시코에서는 1910년의 혁명이 시작되기 전에 현지 노동자들이 미국이 출자한 철도회사에서 고위 기술직을 차지하기 위한 투쟁을 벌였다. 전 세계에서 철도종사자 특유의 행태가 형성되었다. 철도가 국유인 곳에서 철도인의 행태는 더 뚜렷했고 ‘철도인은 공공의 권위를 대표했다. - P1857

선박은 군대와 플랜테이션을 제외하면 가장 폭력적인 작업 장소였다. 미국은 1850년이 되어서야 선상에서 행해지는 채찍 형벌을 폐지했다. 19세기 70년대까지도 영국 해군은 아주 잔혹한 형벌 도구인 끝부분이 ‘아홉 갈래로 갈라진 채찍을 사용하고 있었다. 장교가 수병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현상은 상선에서도 모방하는 완고한 관습이었다. - P1858

‘자유로운‘ 노동은 형식상으로나 법률상으로 어느 정도 모호하게정의될 수밖에 없다. 자유로운 노동이란 직접적인 외부의 압력이 없는 상태에서 맺어진 계약관계이며, 이 계약을 근거로 고용인이 자기노동력의 사용권을 고용주에게 제공하고 그 반대급부로서 금전적보상을 받는다. 원칙적으로 이 관계는 쌍방 모두에 의해 해제될 수 있으며 고용주에게는 고용인을 지배할 수 있는 어떤 권리도 주어지지 않는다. - P1866

노예는 다른 어떤 방식으로도 자신을 정의할 수 없고, 노예제 덕분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치스러운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노예주 역시 다른 어떤 방식으로도 자신을 정의할 수 없다. 본질적으로 대서양 세계의 노예제는 일종의 노동착취 관계였고, 논의는 그런관점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 P1869

노예해방의 경험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교훈은 자유란 전부가 아니면 전무의 문제도 아니라는 점이다. 자유는 다양한 모습과 다양한정도로 찾아왔다. 한 사람이 자유로운지의 여부는 학술상의 질문이고 한 사람이 얼마나 자유로운가, 무엇을 할 수 있을 만큼 자유로운가, 지금까지 어떤 권리를 박탈당해왔는가, 최근에 또 어떤 권리를박탈당했는가 하는 것은 현실적인 문제이다. 브라질처럼 물질적 생존을 위한 사전조처도 전혀 없이 ‘노예에게 자유를 주는 것’과 노예에 대한 사심 없는 배려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해방노예는 사회와 자연스런 유대를 형성하지 못한 취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존재였다. 그들이 시장경제의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초기의 완충장치가 있어야 했다. - P1871

1861년의 농노해방은 문화적 혁명이 아니었다. 전혀 목가적이지않은 농촌 상황에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거칠고 저속한 농촌사회의 기풍은 개선되지 않았으며, 농촌의 교육수준을 높이고 보드카 소비량을 줄이겠다는 계획도 별 성과를 내지 못했다. 해방‘은(서유럽 계몽주의의 관점을 엄격하게 적용한다면) 일어난 일들의 실상을 묘사하기에는 지나치게 과장된 용어이다. 미국 남부에서 해방노예는 ‘재건‘ 이후에도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어떤 도움도 받지 못했다. - P1875

미국법원이 1821년에 처음으로 노동의 의무는 자발성을 바탕으로해야 하며, 노동자가 작업장을 떠나기로 결정했을 때 물리적인 제재를 받는다면 자유로운 노동이 아니라고 판결했다. 이런 해석은 노예제를 둘러싼 논쟁에도 영향을 미쳤다. 미국 북부의 주가 남부의 연방탈퇴를 반대하는 전쟁에서 ‘자유로운 노동‘은 전투구호가 되었다.
이와 함께 노동자에 대한 신체적 폭력의 사용은 본질적으로 불법으로 규정되었다. 미국 법원의 판례는 독자적인 가정을 가진 노동자와주인으로부터 부양받는 예속노동자·하녀 하인 사이의 구분을 없앴다는 점에서 이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이 방면의 법운용에서 미국이 영국보다 앞섰다. - P1882

노예제와 (특히 러시아의) 농노제가 그랬듯이 일종의 과도적 단계가 있었다. 영국에서도 비금전적 강제에 의한 노동은 하룻밤 사이에 사라지지 않았다. 성문법과 실제 사법판결 모두 기업주와 농업 고용주에게 노동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각종의 강제적인 수단 - 오늘날 우리가 ‘강제구류‘라 부르는 법절차와 유사한 —을 인정해 주었다. 수십 년 동안 강제노동의 잔재가 자유로운 임금노동의 관계 속에 은폐되어 있었다. - P1883

세기 말에 등장한 새로운 요소는 조직적인 노동운동이었다. 집단으로서의 노동자가 강대한 자본소유자에게 도전할 수 있는 조건이점차 형성되어갔을 때 노동시장의 불균형이 교정되었다. 그러나 국가입법으로 노동자와 자본가의 담판(단체교섭, Collective bargaining)이 가능해졌을 때 노동운동은 비로소 돌파구를 찾았다. 여기서여러 장애를 넘어온 자유로운 노동의 발전은 하나의 역설과 마주쳤다. 노동자 쪽에서 담판을 독점하는 조직을 형성하여 시장의 자유를제한해야만 노동자 개인은 노동력을 구매하는 쪽이 갖고 있는 통제수단 - 일자리를 찾는 노동자를 서로 경쟁시키고 언제든지 해고할수 있는 힘 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 P1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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