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후기 유학이 확산되면서 군주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특히 중하급 무사들의 정치참여가 활발해지자 군주친정에 대한 요구는 더욱 강화되었다. 가로합의체제하에서는 번 내 몇 개의 최고가문들이 번정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다수 가신이 이에 끼어들여지는 적었다. 그러나 이들이 일단 정치에 뛰어들게 되자 가로합의체제는 큰 벽이 되었다. 이 벽을 허물 유일한 방법은 군주의 정치적 권위를 빌려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그를 위해서는 군주의정치적 활성화, 군주친정이 필요했다. - P305

번주친정은 번 권력기구, 일반 번사 대중, 나아가 일부 영민에까지 번주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시켰고, 그에 따라 번주에게 의거하지 않고서는 번의 정치력을 동원하는 것이 어려워졌던 것이다. - P332

미토번은 막말기에 도쿠가와 나리아키가 취임하고부터 전국의 주목을 받는 정국의 중심적인 번으로 변모하게 된다. 나리아키와 후기미토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미토번사들은 외침의 위기를 강조하고 그를막기 위한 대개혁[尊王壤夷論]을 막부에 집요하게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막부와 미토번은 막말기에 항상적인 갈등 관계에 빠지게 된다. 미토번은 자신들이 막부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며, 대개혁만이 막부를 살리는 길이라는 논리를 폈지만 결과적으로 미토번의 막부 비판은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막부의 종말로 이어졌다. - P341

덴포기(天保期)의 나리아키는 비교적 온건한 입장을 유지하여 번의 분열을 회피하는 데 진력했다. 때로는 후지타파의 과격한 공격으로부터 집정 등 문벌파를 변호하여 후지타파의 급진적 주장과 대립했다. 이와 같은 나리아키의 온건한 태도는 후지타파의 불만을 샀지만, 나리아키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권력기반이 취약했던 나리아키에게는 서로 친인척의 끈으로 묶여 있어 굳건한 결속을 과시하고 있던 문벌파를 적으로 돌려서는 자신의 권력 유지가 어렵고, 번 내 갈등도 심화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치가로서 나리아키는 이 점을 냉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에 불만을 느낀 도코를 비롯한 후지타파의 압력에 대해 나리아키는 항상 그들을 위무하고 견제하여 과격화를 경계했던 것이다. - P358

1844년의 실각 이후 나리아키는 문벌파, 특히그가 총애했던 유키 도라쥬의 배신에 적개심을 불태워, 그 이전에 보여 주었던 균형 잡힌 번 내 세력 안배 조치와는 달리, 문벌파와 삼연지에 대한 극단적인 적대 노선을 취했다. 나리아키의 이러한 태도는 문벌파로 하여금 어린 신번주 요시아쓰 주위에 집결케 해, 미토번은 전 번주와 현 번주의 부자간 권력투쟁이라는 양상을 띠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일시적인 정쟁에 그치지 않고, 자칫하면 장기적인 당쟁으로 비화할소지를 안고 있는 것이었다. 이를 가장 경계했던 것이 도코였다. 그는 ‘갑진국난’을 교훈으로 삼아 나리아키에게 문벌파 삼연지 신번주 요시아쓰와 융화할 것을 촉구하고, 번 내 과격파에 대해서도 삼연지와 번 정부 유사에 대한 맹목적 비판을 자제하도록 호소했다. 그러나 나리아키는 도코의 간언과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미토번은 막말 정치사상 가장 처절한 내란으로 빠져들어 갔던 것이다. - P370

요시노부는 조정을 개국론으로 전환시키려는 에치젠번의 입장과는 정반대로, 조정의 쇄국양이 방침에 영합하여 정권 반환의여론을 억누르고 막부에의 정권 위임을 재확인받으려고 했다. 이에 요시나가는 정사총재직 사임과 귀번의 뜻을 밝혔다. 그러나 수차례에 걸친 사임 의사 표명에도 불구하고 막부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요시나가는 3월 21일 조정과 막부의 허락을 받지 않은 채 교토를 떠나버렸다. 번주의 무단귀번(無斷歸藩)에 번사들은 크게 동요했다. - P382

에치젠번의 거번상락 구상은 두 가지 요점에 집중되어있었다. 첫째, 강대한 군사력을 가지고 일단 교토의 치안을 확보한 후각국 공사를 불러들여 쇼군·관백을 비롯 조막· 제 웅번(諸雄藩)의 열석하에 대회의를 개최하여 당면한 내외의 분규하는 제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려고 했다.
둘째, 현재의 막부독재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정체의 수립을 목표로 하고 있었는데, 거번상락의 주된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 P400

거번상락이 좌절하게 된 것은 그 계획의 급진성에 대한 요시나가의 경계심 때문이기도 했지만, 번 내의 붕당적립 관계가 그 배경을 이루고 있었고, 군주인 요시나가가 그중 한쪽을강하게 편드는 과정에서 발생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필자가 이 당파 대립을 굳이 붕당적 대립이라고 칭하는 것은, 이 당파 간의 대립을 낳은 주요 배경 가운데 학문적 요소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기때문이다. 나카네 유키에는 히라타 아쓰타네(平田篤胤)의 문하로 에치젠번 내 히라타학(平田學)의 일인자였고, 그의 가르침을 받았던 요시나가도 분큐기에는 히라타학에 심취하고 있었다. 한편 요코이 쇼난은 주자학자였고, 혼다 히다 마쓰다이라 슈메 등은 모두 요시다 도코의 문하로 야마자키파이며 주자학을 신봉하고 있었다. 이런 학문적 배경의 차이가 붕당적 대립 관계를 더욱 심화시켰던 요인 중의 하나였던 것은 아닐까. - P412

도쿠가와 시기의 봉건 · 군현론은 표면적으로는 봉건제의 일본 사회를 찬미하면서도 실상은 봉건과 군현제를 상당 부분 절충시킨 것이었으며, 봉건과 군현이 대립물로 인식된 흔적은 잘 보이지 않는다. 막말유신기의 군현제 실시론이 결국 봉건제에 군현지의(郡縣之意)를 깃들게 하는 것(寓郡縣之意於封建之中)으로부터 군현제에 봉건지의(封建之意)를 깃들게 하는 것(寓封建之意於郡縣之中)으로의 전환이었다면, 도쿠가와 시기의 봉건 · 군현론은 이것과 근본적인 단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P429

막말기의 도막파와 좌막파의 대립에서, 정권의 소재[막부를 유지할 것인가, 왕정복고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치열하게 다퉜으나 정체에 관해서는 봉건제 유지가 압도적 우위를 보이고 있었다고 할수 있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봉건제는 700여 년간 장구하게 이어져 왔고, 또 에도시대 내내 봉건제에 대한 호의적 담론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그 지속에 대해 새삼 문제의식을 갖지않았다는 점, 둘째는 일부가 장래 군현제 도입을 생각했더라도, 그것이중국에서처럼 단순히 중앙집권-지방분권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다이묘가와 사무라이 신분 자체의 해체와 관련 있는 문제이므로 도막파, 좌막파를 막론하고 치열한 정쟁 속에서 대다수 사무라이의 호응을 얻기힘든 이 노선을 취기는 어려웠으리라는 가능성이다. - P435

왕정복고 직후에는 ‘봉건의 제에 군현의 의를 우하게’ 하는 국가 구상이 지배적이었다면 판적봉환을 거치면서 ‘군현의 제에 봉건의 의를 우하게 하는’ 것으로 서서히 변화해 갔다. - P443

군현제 실시는 애초에는 신분제 폐지와 능력 위주의 인재 등용으로 경계되었지만, 세상은 ‘조진의 악폐’에 대한 우려를 뒤로 하고 소라이가 경계했던 ‘입신출세’의 사회로 진입하고 있었고, 군현제는 ‘입신출세’의 제도로 수용되어 갔다. - P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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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론정치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걸쳐 재정과 국방 문제라는 국내외의위기가 감지되었을 때, 그 해결책으로서 일본인들이 주창한 주요한 캐치프레이즈 중 하나가 언로통개(言路洞開)였다. 즉 정부는 사회적 지위나 권력의 고하에 얽매이지 않고, 능력 있는 자의 정치적 의견 표명을허용, 권장하고, 이에 기반을 둔 정치를 운영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언로통개의 주장은 19세기에 들어서자마자 급격히 확산되기 시작해, 점점 어떤 정치세력도 그 정당성만은 부정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어 갔다.
언로통개가 정당성을 갖게 되자 그것은 상서, 회의라는 형태로 정치현장에서 실현되었다. 상서의 활성화로 번 정부는 여론의 동향에 주의하기 시작하고, 관계된 몇몇 역인만으로 정책을 결정하던 관습은 수정되어, 정책을 둘러싼 토론이 행해지는 ‘회의‘가 정책 결정의 기구로 기능하기 시작한다. - P186

‘토의정치‘의 형성에는 그것을 뒷받침하는 미디어나 토의 공간의 존재가 불가결하다. 이 시기 ‘토의정치‘의 형성을 뒷받침하는 미디어로서는 봉서(封書), 상서 등을 들 수 있겠고, 토의 공간으로서는 정부 내 회의, 어전회의 같은 회의 공간이나 번교, 사숙, 향교 등학교 기관, 그리고 종교 기관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중에서 필자가 주목한 것이 봉서, 상서 등의 미디어와 사숙, 향교, 사·사(社·祠)라는 토의실행 · 여론 형성의 장(場)이다. - P221

미토번 남상운동은 앞서 살펴본 구마모토번과 사쓰마번의 경우와비교할 때 장기간에 걸쳐 지속되었다는 점, 죠카마치의 번교, 사숙뿐아니라 지방의 향교가 큰 기반이 되었다는 점, 따라서 번사 이외의 상층 민중이 학적 네트워크‘에 포섭되고 정치화되어 가는 과정을 잘 보여 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 P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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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사록당’을 통해 본 ‘학당’의 특징
- 소라이학과 한당 훈고학을 배척하고 주자학을 숭상
- ‘학당’의 상대는 또 하나의 당파가 아닌 번의 기성체제
- 회독이라는 학습 방법을 채택
- 결사성

1847년(弘化4)경이 되면 겐모쓰 자택의 학습회는 이미 죠카마치(城下町)에서 유명해져 문벌의 청년 사무라이들이 다수 참여했을 뿐 아니라, 향당(鄕黨)들도 연계되었다. "쓰보이, 교마치의 향당들이 크게 분기하여 실학을 제창했다"는 말이, 이들이 겐모쓰 자택 학습회에 참석했다는 것인지 아니면 앞에서 본 것처럼 쇼난 사숙에 참석한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인지 분명치 않으나, 어쨌든 고카(弘化) 연간(1844~1847)이 되면 겐모쓰 자택 학습회에 동조하는 문벌, 향당 세력이 적지 않게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 P146

번교 바깥의 학습회가 활성화되자 학생들은 자연히 번교출석과 번교에서의 학습을 소홀히 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번교 내 교원들의 불만과 반발이 생겨났다. - P148

학문과 경국(經國)의 관계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야심에 찬 학문 리더들은 경국에 무관심한 채 자구 고증이나 사장적 경쟁 또는 박람강기(覽强記)를 존중하는 풍조를 비판하면서, 그 대신 몇몇 제한된 텍스트민을 중시하고 그 속에서의 복잡한 언설 체계를 간단명료하게 제시한 후이를 곧바로 정치문제와 연관시키는 학습 방법을 택했다. 이는 젊은 시무라이들을 매혹시켰다. 이들이 자신들과 다른 학문 방법을[특히 번ㅠ의] 강하게 비판하고 당파성을 강화해 나가면서 정치적 발언을 하기 시작할 때 ‘학당‘은 형성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 P150

이 시기 등장하는 학당‘은 당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던 정치체제에서 한쪽의 정치세력이 초기적으로 당을 형성해 나가는 성격의 것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 점은 사쓰마번에서도 근사록당(近思錄黨)은 결당의 이름으로 비판받고 있는 데비해서, 근사록당은 타 세력을 당(黨)으로 지칭하고 있지 않은 점에서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1850년대 이후 정치세력들이 자신을 ‘정의당(正義黨)‘, 상대방을 속론당(俗論黨)‘으로 이름 지어 상호 비난하는 것과는 다른 상황인 것이다. - P150

‘근사록당‘은 이어 자신들의 스승인 기도 다케키요의 가격(家格)을 높여 준 다음, 야마모토를 대신해 어전강의를 담당케 했다. 즉 1808 년(文化5) 정월 18일 기도가 처음으로 어전에서 『태극도설』을 강의하기 시작해 이로부터 3일 혹은 5일 간격으로 강의가 계속되었다. ‘근사록당‘의 핵심인 구마모토도 어전에서 『태극도설』 수장을 강의했다. 그리고 이어 정월 21일 야마모토가 공식적으로 면직되어 번교조사관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근사록당’은 권력을 잡은 지 4년 만인 1808년 시마즈 시게히데의 반격을 받고 권력의 자리에서 일제히 쫓겨났다. 수십 명이 면직된 것은 물론 중심인물인 지치부와 가바야마는 할복했다. -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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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번의 학적 네트워크와 학당의 형성

번교 시습관에서의 ‘학적 네트워크’가 형성되는 모습
학당이 형성되기 까지 나가오카 겐모쓰의 역할

당시 많은 사무라이는 수없이 존재하는 학습회 중 어딘가에 속하여 학문, 특히 유학을 공부했고, 또 해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번교의 동년배, 선후배 또는 사숙, 학습회의 동료 간에 인적 관계가 생겼고, 각자의 선생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갔다. 이처럼 학을 매개로 한 관계에서는 기존의 반 구미로 이뤄진 군사 조직이나 역직 조직보다 가격이나 신분을 상대화할 여지가 많았고, 학문 실력이 관계의 성격을 결정하는 데 중요했다. 이런 성격의 ‘학적 네트워크’가 19세기 전반 구마모토번에 광범하게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 P128

번 당국은 학문 교육을 통해 가신단의 규율과 질서를 바로잡으려고 했지만, 학문을 통해 사무라이들이 정치화되는 것에는 큰 경계심을 갖고 있었다. 번 당국이 번교에서 정치토의의 금지 방침을 표명하는 것은 어느 번교에서나 쉽게 볼 수 있었다. 이런 번 당국의 방침에 맞추어 대부분 번교들은 젊은 사무라이들의 혈기와 무례를 다스리기 위한 효제 등의 인성 교육이나 도시와 상업 발달로 인한 사치풍조를 교정하기 위한 절검 강조에 교육 방침을 두었다. 학문적으로는 훈고학적인 고색을 주로 하거나 사장적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 P128

학당‘은 주로 번교 바깥의 사숙·학습회를 기반으로 발생했지만, 번교 내의 인맥이 번교 바깥에서 학당을 만드는 데 기여하는 경우도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번교 바깥에서 ‘학당‘이 발생했기 때문에 흔히학당‘과 번교의 주류 세력들은 학문적·정치적으로 대립되는 경우가많았다. 이 경우 번교를 중심으로 한 ‘학적 네트워크‘는 ‘학당‘의 개혁요구에 대항하는 중심 역할을 하기도 했다. - P129

‘학적 네트워크’, 나아가 ‘학당’에 가로급 인물 또는 그 자제들이 참여하는 경우는 주목할 만한 특징 중 하나다. 막말 정치변혁은 하급 사무라이들이 번 질서를 정면으로 뒤집지 않고 번 권력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이용하는 형태를 취해 격렬한 소요나 많은 희생자를 내지 않고 진행되었는데, 이런 과정이 가능하게 된 배경으로 가로급 인물들의 정치적 태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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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묘 가신단의 내부 계층

시=사무라이: 지교와 기마가 허락되었고 집안도 유서 깊음. 가역과 가록이 세습됨
우마마와리 이상: 상급 사무라이(상사)
나카고쇼: 중급 사무라이(중사)
가치: 하급 사무라이(하사), 보병. 세습되지 않았음. 이무에 종사
아시가루 쥬겐 고모노: 졸병, 경제. 군속 담당. 평민층 간의 구분이 크지 않음

번교를 단순히 교육사적 측면뿐만 아니라 정치사적 맥락에서 파악하려고 한다면, 사무라이 내부의 다양한 계층이 번교라는 새로운 공간에서 어떤 관계로 존재하는지 살피는 일은 중요할 것이다. - P87

홍도관 체제가 기존 신분 서열에 기본적으로는 의존했지만, 훈도와 사장에 가치층 혹은 가치 이하 헤야즈미 등 비교적 낮은 서열의 자들이 다수 임명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그들은 일선에서 학생들을 직접 교육, 지도했기 때문에 그 인품과 능력에 따라서는 학생들에게 큰 영향력을 지닐 수 있었다. 정규 가신단 조직에서는 얻을 수 없는 지위를 홍도관 내에서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 P98

교원들이 표강석과 공자들과의 수업을 통해 번정의 실력자 혹은 장래의 권력자들과 친분을 형성할 가능성도 생기게 된 것이다. 더욱이 강습생, 사장조차 강의를 매개로 그들과 접촉했다면 그 과정에서 신분이 낮은 이들 젊은 가신들과 번 상층부 인물들이 가까워질 가능성도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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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2-22 00: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본 대하 역사 소설 나올때
이런 신분 계급이 나오는데
일본이 역사적으로 철저하게 상하 계급 구별을 한
견고한 구조의 계급 피라미드 사회고
이걸 당연시 여기는 일본인들에 충격 받았습니다 ^^

거리의화가 2022-02-22 09:09   좋아요 1 | URL
네. 저도 번교라는 학교가 생기고 그 안에서도 철저하게 계급이 나뉘어서 생활하는 모습이 있었구나 알게 되었고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까지 번교가 전국적으로 활성화되면서 물론 조선이나 중국만은 못했겠지만 유학과 학문이 통용되고 그들끼리 토론의 문화를 펼치며 학적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는 게 인상깊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