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州, 河南省 ?陽市)에서 말하기를 ‘백성들 가운데 수재(水災)나 한재(旱災)를 입은 것이 20무(畝) 이하의 사람이 조세를 면제해 달라고 청구한 것은 조신(朝臣)들이 전무(田畝)가 많지 않다고 하여 그 소원(訴願)을 받지 말기를 요청하였다.’고 하였다. 황제가 말하였다.
"이와 같이 한다면 가난한 백성으로 전지(田地)가 적은 사람은 은택(恩澤)이 항상 미치지 아니한다. 재앙과 해를 받으면 조세를 면제해 주는 것은 정치가 곤궁함으로 말미암은 것인데 어찌하여 많고 적은 것을 가지고 한정하겠는가?"
신미일(20일)에 조서를 내렸다.
"지금부터 백성이 수재와 한재를 호소하면 전지가 많고 적은 것을 가지고 가리지 말고 모두 더불어 검사하고 시찰하라."

2월 초하루 임오일에 황제가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서 친히 여러 군대의 장교를 사열하고 명적(名籍)에 의하여 수고하고 업적을 쌓은 것을 참고로 그들을 올려주거나 내쫓았는데, 한 달이 넘어서야 마치었다. 가까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짐이 장교(將校)를 발탁하여 뽑는 데는 우선 그 사람이 삼가면서도 능히 아랫사람을 어거(馭車)할 수 있는 사람을 뽑았고 힘세고 용감한 것은 다음으로 하였다."

정미일(26일)에 요(遼)에서는 초토사(招討使)인 한덕양(韓德讓)이 당항을 정벌하고 돌아오다가 드디어 하동(河東)을 습격하니 조서를 내려서 아름답다고 포상하였다.

3월에 문무관원과 외국의 번객(蕃客)에게 대명전(大明殿)에서 연회를 베풀어 주고 발해대사(渤海大使)인 난하(鸞河)를 불러서 그를 위로하며 어루만져 주었다. 난하는 발해(渤海)의 추장(酋長)인데, 황제가 유주(幽州)을 정벌하자 부족(部族)을 인솔하고 귀순하였으니 그런 연고로 이러한 하사를 한 것이다.

5월 신해일(2일)에 성의 남쪽에 행차하여 보리밭을 관찰하였으며 보리를 베는 사람에게 전백을 하사하였다. 돌아오다가 옥진원(玉津園)에 행차하여 물고기를 관람하고, 연사(宴射)하고 가까이 있는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짐이 오대(五代) 이후를 보건대 제왕이 처음에는 근검하다가 끝내는 마침내 그 간난(艱難)하였던 것을 잊어버리면 넘어져서 망하는 것이 빠르게 되었으니 모두가 스스로 남긴 것이다. 다른 사람의 위에 있는 사람은 마땅히 경계해야 한다."

염철사(鹽鐵使)인 왕명(王明)이 강남의 염금(鹽禁)을 열어 주어 1년에 판매하는 소금 합계 53만5천여 관(貫) 가운데 28만7천여 관의 공급하는 소금을 백성들에게 주고, 세금징수 시에 그 전(錢, 鹽錢)을 거두고, 24만여 관은 상인들이 판매하고 무역하도록 허락해 주어 그 산전(算錢)을 거두자고 하였는데 이를 좇았다.

"진박은 다만 그 자신의 몸을 선하게 하고 세리(勢利)에 간여하지 않으니 이른바 방외(方外, 세상 밖)의 선비이다. 화산에 이미 40여 년 살았으니 그 나이를 헤아려 보건대 마땅히 100세일 것이며, 스스로 오대(五代)의 어려움과 흩어짐을 경험하였는데 다행스럽게 천하가 승평하니 그러므로 와서 조근(朝覲)하게 하였다.

8월 초하루 계유일에 요(遼)에서는 요택(遼澤)이 막히고 잠겨서 고려 정벌을 그만두고, 추밀사인 야율색진에게 명령하여 도통으로 삼아서 여진(女眞)을 토벌하게 하였다.

이 해에 연계(燕?)에서 군사를 운용할 것을 논의하고 고려(高麗)에 조서를 내려서 유시하여 군사를 징발하여 서쪽에서 만나자고 하였다.

요(遼)에서는 태후가 스스로 칭제(稱制)하고 바로 야율휴격(耶律休格)에게 남쪽의 업무를 총괄하도록 위임하였다. 야율휴격은 수병(戍兵)을 고르게 하고, 경휴법(更休法)을 세우고 농상(農桑)을 권고하며 크게 무력적인 대비를 닦았다. 송(宋)에서 군사를 사용할 뜻이 있음을 엿보고 간첩을 많이 두어서 거짓으로 나라 안이 텅 비었다고 말하게 하였다. 변방의 우두머리들은 꾀가 없어서 모두 이를 믿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02

1800년 당시 내륙아시아는 크게 만주, 몽골, 신장, 티베트의 4개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4개 지역 모두에 청군이 주둔하고 있었지만 통치를 위한 행정 구조는 각기 달랐다.
만주는 3개의 성으로 되어 있었으며, 몽골은 이보다 훨씬 더 세분화되고 엄격하게 통제되기는 했지만 외형상 고유의 행정 체계를 갖고 있었다. 신장은 일리에 주둔하고 있는 청 장군의 관할하에 있었지만 하급 지방 행정 차원에서는 각급의 토착 지배자나 관리가 저마다에당하는 통치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티베트는 여러 지역으로 나뉘어있었다. 티베트 본토는 온전한 토착 정부에 의해 다스려졌다. 그러나북동부(칭하이) 지역은 청조에 직접 세금을 납부했으며 시닝성의대신 관할하에 있었다. 티베트 동단(동부 캄Kham)도 청에직접 납세하는 구역으로서 쓰촨 성의 행정 구역에 속해 있었다. - P84

만주 변경(지린성, 헤이룽장성)은 공식적으로 한족 이주가 봉쇄되어 있었다. 하지만 18세기 내내 청정부는 점점 더 이중적인 정책을채택해 때로는 이주를 금하고 때로는 한족 이주민들의 류타오볜통과를 방임했다. 1800년경에는 이미 펑톈성을 특별 봉금지로 지정하거나 중국 문명의 동화력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을 고려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러나 지린 성과 헤이룽장 성의 경우인구나 문화적으로 한화 경향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그렇게 강력하지는 않았으며, 청 정부도 적어도 고위급에서는 한족의 만주 변경이주를 금하고 만주 변경에서 한족 문화와의 접촉을 최소화시키려 진지한 노력을 계속했다. 예컨대 1811년 베이징 정부는 이전처럼 다시명령을 내려 한족 이주를 금지시켰다. - P87

내외몽골을 막론하고 몽골에는 전체를 포괄하는 자신들의 정부가 존재하지 않았다. 청정부는 내몽골에서는 몽골 남부와 동부 변경에 주둔한 청 군대를 통해 통치권을 유지했다. 이들 군대가 내몽골의각종 업무를 엄격하게 통제했기 때문에 19세기까지 이 지역에는 실질적인 자치권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외몽골에서는 청의 주둔군들이청 제국의 주권을 확인시키고 있었지만 중국 본토에서 멀리 떨어져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많은 자치권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청의 통제력은 확고했다. - P101

톈산 산맥의 연봉을 기점으로 현저히 다른 두 개의 지역이 나타난다. 톈산 이남은 동투르키스탄 지역으로 농작 지대에 속하고, 이북은 준가르로 스텝 지역에 속한다. 1750년대 건륭제는 톈산 산맥의남북 양면을 모두 정복함으로써 당시 내륙아시아에서 가장 다양한 민족이 사는 이 지역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준가르는 톈산 북로라 불렸고, 동투르키스탄은 톈산 남로라 불렸다. 청의 군대는 이 두 지역을통합해 간쑤 성의 ‘새로운 영역‘ 이라는 의미의 신장이라는 이름으로 속령으로 삼았다. 이 속령에는 옥, 금, 동, 면제품, 농토, 목초지가풍부했다. 그리고 정치적 난제들도 그만큼이나 많았다. - P115

티베트는 만주, 몽골, 신장과 달리 상당한 정도의 독립을 누리고있었는데, 대체로 먼 거리와 험준한 지형 덕택이었다. 1800년경 티베트 정부는 철저한 쇄국정책을 실시하고 있었는데, 이런 고립 정책은이전의 티베트 역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것이어찌나 이질적이었는지 "19세기는 티베트를 ‘금단의 땅‘이라 불러야마땅한 유일한 시기"라는 주장을 찾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 P161

중국 본토에서와 마찬가지로 내륙아시아에서도 청당국은 평화시에는 황제의 신민들 위 저 높은 곳에 있다가 반란이 발생할 때만 압박을 가하는 겉 씌우개같았다. 청의 상부 구조는 평민들의 일에는 거의 간섭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존재자체만을 통해서 토착적인 권력구조를 유지했고, 지방의 제도들을 보존하고 한층 더 공고히 하기까지 했다. - P183

내륙아시아의 평민들에게 중국과 한족은 멀리 있었다. 기인과 청조 관리들의모습은 거의 볼 수 없었다.
내륙아시아의 속국들에서 베이징으로 유입되는 세입은 많지 않았다. 사실 청이 그들에게서 원한 것은 오직 평화였다. 만주인의 내륙아시아 정복은 이윤을 고려한 것이 아니라 강력한 적대적 세력의 등장을 억제할 목적으로 전략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리하여마침내 대륙 방면에서 중국 본토는 안전하게 보호받았다. 그러나 변경 문제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영령 인도의 팽창은 티베트의 청조 당국에 강력한 위협이 되었다. 코칸드의 상업적 야심과 마흐둠자다의 종교 정책은 알티샤르에 대한 청의 지배를 위협했다. 신장, 몽골,
만주 등의 변경에서는 러시아 세력이 대두했다. 그러나 중국 본토에서 보면 이들은 먼 지방의 문제였다. 1815년 베이징에서 이러한 문제들은 거의 감지조차 되지 않았다. - P18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h7

What elegant historian would neglect a striking oppor-tunity for pointing out that his heroes did not foresee the history ofthe world, or even their own actions? For example, that Henry ofNavarre, when a Protestant baby, little thought of being a Catholicmonarch; or that Alfred the Great, when he measured his laboriousnights with burning candles, had no idea of future gentlemen measur-ing their idle days with watches. Here is a mine of truth, which, how-ever vigorously it may be worked, is likely to outlast our coal.



it is a narrow mindwhich cannot look at a subject from various points of view. - P6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3장

거란의 국호 중 한자로 ‘요’라고 표기한 것은 한족들이 위화감을 같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거란의 국호는 계속 ‘거란’이었다. - P24

석경당이 유주를 거란에 바친 사건은 중국 역사에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베이징이 북방 민족의 손에 들어가게 됨에 따라 만리장성은 더 이상 병풍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후 중국 역사는 북방 민족과 중원의 대립에서 북방 민족의 우세로 기울기 시작했다. - P59

거란 통치자들은 북위 정권처럼 한화되어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의 근본을 초원에 두고 전통과 정통성을 지키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백성의 2/3을 차지하는 한족문화도 부정하지 않았다. 거란 사회는 유목과 농경 그 사이 어디쯤에서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 P90

성종이 즉위한 10세기 말 거란은 송과 여전히 충돌하고 있었고, 고려와는 교류가 거의 끊어졌으며, 만주와 초원의 여진과 여러 부족들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고, 대하와도 원만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후 40여 년간 다원적 국제질서의 맹약체제를 구축하면서 1020년대 이후부터 12세기 초까지 1세기 동안 전쟁을 피하고 평화를 누렸다. 거란은 한족 중심의 조공체제와 천하관의 명분에 얽매이지 않고 송, 대하, 고려 등 이웃 국가들과 공존을 추구하였다. - P129

거란 제국과 주변 국가들 사이에 발생한 전쟁, 타협, 그리고 평화 관계는 조공체제의 형식이 아니라 당시 다원적 국제질서와 세력 균형의 틀에서 이해해야 하며, 거란의 역사적 정체성에 대한 연구는 ’중국사에서의 요대‘가 아니라 아닌 거란 중심적 시각에서의 접근을 요한다. - P13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We mortals, men and women, devour many a disappointment between breakfast and dinnertime, keep back the tears and look alittle pale about the lips, and in answer to inquiries say, "Oh, noth-ing!" Pride helps us, and pride is not a bad thing when it only urges us to hide our own hurts-not to hurt others. - P5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