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터 프랭클 - 어느 책에도 쓴 적 없는 삶에 대한 마지막 대답
빅터 프랭클 지음, 박상미 옮김 / 특별한서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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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내내 머릿 속을 두드린 것은 두 가지 질문이었다.

'사람의 인생이 어떻게 이렇게 버라이어티할 수가 있지?'

'대체 무엇이 그의 삶을 지탱하게 했을까?'


이 책은 빅터 프랭클의 일대기가 오롯이 담긴 자서전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와 집필한 책이 전 세계의 많은 이들에게 삶의 희망을 전해주었다면

이 책에서는 그동안 그가 말하지 않았던 내밀한 이야기들을 전해 주고 있다.


빅터 프랭클은 부모님을 참 많이 사랑했구나 생각했다.

인자한 어머니, 엄격하지만 책임감과 의무감이 강했던 아버지 밑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나는 아이. 정말 행복한 것이다.)


그는 아이디어를 잘 만들어냈다고 한다. 

나는 아이디어가 정말 없는 사람이라서 그런 쾌감을 거의 느껴본 적이 없는데 부러웠다. 

또 재치 있는 말과 유머로 사람을 웃겨서 강연 때 청중들을 모조리 내 편으로 만든다고 한다. 

나는 말도 재미 없게 하고 글도 딱딱한 편이라 정말 부러웠다. 그런 재주를 가졌다면 문화해설사를 도전해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내가 정한 원칙에 끊임없이 의심을 품고 화가 나기도 하고 원칙을 지키지 못할 때는 나 자신에게 화가 나기도 하는 면은 나와 정말 비슷했다.

지금은 좀 내려놓으려고 하는 편인데 예전엔 무자르듯 기준이 칼 같아서 주변 사람들이 피곤해했다.

진한 커피를 좋아한다는 것도 똑같다. 나는 카페인을 복용하지 않으면 하루가 시작되지 않는 사람이다.


그렇다 해도 그는 천재가 분명하다.

남을 치료해주는 능력도 가지고 있고 강연도 하고 암벽 등반을 80세 때까지 했고 작곡도 즐기고. 이리도 많은 재주를 가졌다니~ 


세살 때 의사가 되기로 마음먹었고 청소년 때는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평생 철학자로 살고 싶었다고 한다.

의사는 결국 이루었고 소설가는 아니지만 글을 써서 집필했고 로고테라피로 심리 이론을 세우고 평생 좋은 에너지를 전달하며 살았으니 철학자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태어난 집 건너편엔 아들러가 살고 있었다고 하고 의과대학생 시절 프로이트를 만나기도 했다.

아들러가 만든 국제 개인심리학회지에 프랭클의 논문이 실리기도 했지만 아들러가 개인심리학회 탈퇴를 요구하여 탈퇴하게 된다. 거기서 나와 의료심리학회를 창립하고 본인의 이론인 로고테라피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1937년 정신병원을 개업했지만 1년 뒤 3월 히틀러 군대가 오스트리아 빈을 점령하면서 그의 삶은 완전히 바뀌게 된다.

수용소에 가서 그와 마주한 가족의 이야기는 슬프다고 하기에도 그 크기가 너무 큰 그런 것이었다.


미국으로 가는 입국 비자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부모님을 남겨두고 가지 못하고 결국 그곳에 남는 결정을 했을 때.

수용소에 가기 전 아내를 만났고 결혼했지만 그것이 결국 나치가 허가하는 마지막 유대인 커플이 되었을 때.

그마저도 짧은 9개월의 결혼 생활 중 레지엔슈타트 수용소에 가게 되었을 때. 그곳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아내가 따라왔을 때. 그마저도 며칠 있다가 프랭클이 카우페링 제3수용소로 가게 되어 헤어지게 되었을 때.

마지막 수용소로 가 발진티푸스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기고 호흡곤란이 찾아와서 죽음을 각오하고 막사를 탈출했을 때.

시간이 지나 1945년 4월 27일 수용소에서 풀려났지만 아내가 죽고 어머니와 형이 수용소에서 모두 숨을 거둔 걸 알게 되엇을 때.


역자도 말미에 이야기하는데 눈물 없인 이 이야기를 옮기기가 참으로 어려웠다고 한다.

나도 그랬을 것 같다. 아무리 메마른 사람이라도 억장이 무너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아니던가.


수용소만 생각하면 극심한 고통이 밀려왔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반드시 써야 한다는 집필 의지가 있었고 삶에 대한 책임 의식을 가졌기에 그는 끝내 살아남았고 많은 이들에게 삶의 희망과 의지를 전해주었다.

이것이 진정한 자기초월의 가치가 선한 영향력이 된 경우가 아닐까.


그리고 두 번째 아내를 만난 것도 그의 안정감에 한 버팀목이 되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녀를 만나지 않았다면 남은 생이 더 즐겁고 편안할 수 없었을 것이다.



기록의 중요성을 다시금 생각한다.

나의 자서전을 쓸 수 있는 이는 나 밖에 없고 글이 존재하는 한 사라지지 않는다.

3년 동안 나는 테레지엔슈타트, 아우슈비트, 제3카우페링 수용소, 튀르크하임 수용소, 네 군데를 거쳤습니다. 그리고 끝내 살아남았습니다. - P122

‘여기 오지 말았어야 해. 탈출했어야 해. 미국으로 망명했더라면 내 평생의 과업을 다 이룰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분명 강제수용소는 내가 정신적으로 성숙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시험대였다는 것을. 내가 자주 강조하듯이 자기 초월과 자기 상대화에 있어서 인간이 얼마나 무능한지,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제수용소에서 확인했죠. - P125

나는 연대책임에 반대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으면 불행의 역사는 끝나지 않습니다. - P131

"9,000달러로 살 수 없는 게 시간이에요. 저에게 사고 싶은 게 있는지 묻는다면 시간입니다. 마음껏 연구할 수 있는 시간이요. 9,000달러를 줘도, 아니 그보다 더 많은 돈을 주어도 제 시간을 팔고 싶지 않아요." - P153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책임감! 우리는 내 삶에 대한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로고테라피 치료의 원칙은 인간 개개인이 자신의 삶에서 이 책임감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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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2-04 23: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빅터 프랭클 인간적으로 너무 멋진 사람, 세기의 천재 , 진정으로 환자를 위해 쉼 없이 연구하고 진료 했던 의사
전 이분이 쓴 로고테라피 읽고 심리적으로 많은 도움도 받고 제 자신의 상태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습니다.ㅎㅎ

재치 있는 말과 유머로 사람을 웃겨서 만나면 모두 내편으로 만들지만
전, 차마 수용소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습니다....

화가님의 자서전 쓰기
응원 합니다 ^ㅅ^

거리의화가 2022-02-05 06:55   좋아요 2 | URL
빅터 프랭클 인간적으로 참 멋진 사람이다 생각했어요. 그런 어려움을 이겨내고 주변에 좋은 영향을 끼쳤다는 게 살아남은 그의 이야기가 울림을 줄 수 밖에 없는 것이겠지요. 주변에 그를 아끼고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한몫 한 것 같구요.
저는 자서전 쓰려면 많이 노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각자가 저마다의 이야기를 갖고 있으니 자서전 글감은 충분하지 않을까요? 다만 어떻게 잘 풀어내는지가 문제일 것 같네요.

mini74 2022-02-04 23:4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강제로 낙태 수술 하는 내용 너무 슬펐어요 ㅠㅠ 유대인들의 힘이 어떤 상황에서도 유머를 잊지않고 여유로움울 가지는 거란 글을 본 기억이 납니다. 대단한 분 !

거리의화가 2022-02-05 06:57   좋아요 2 | URL
네 맞아요 저도 그 부분 펑펑 울었어요. 차마 못할 짓입니다. 이분이야말로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분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도 비관하지 말고 좀 더 밝게 보자 라는 생각도 했구요.
 
우아한 루저의 나라 - 독일인 3인, 대한제국을 답사하다
고혜련 지음 / 정은문고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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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에 대한 나의 생각은 늘 복합적이다.
한편으론 애썼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주저앉아버린 망국이라는 양가 감정이다.
사실 저 양분된 감정으로 설명하기에도 모자란 것 같지만.

개혁의 씨앗을 불태울 수 있었던 기회는 여러 차례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한제국의 시절은 독립협회와 만민/관민공동회의 의지를 꺾어버린 이후로는 그 기회를 상실했다고 생각한다.
개항 이전에 자력을 키우고 외부에 귀를 기울였다면.
민심을 돌아보고 백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면.
뇌물을 탐하고 백성을 수탈하고 임금은 아첨하는 자들의 편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짓이 반복되니 민란은 끊임이 없었고 백성들의 삶은 녹록치 않았다.

이 책은 대한제국 초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3명의 독일인이 조선을 왔다가 가서 남긴 기록의 흔적을 옮겨놓았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인물에 대한 소개와 역사적 배경과, 저자의 개인적인 생각까지 담고 있다.


특히 첫번째 크노헨하우어의 강연문(1901)을 신선하게 읽었다.
크노헨하우어는 1897년 채굴권을 취득한 후 광산 채굴 지역을 찾기 위해 대한제국을 방문하였다.
1898년 2월부터 1년 6개월 동안 체류하고 돌아가 1901년 2월 25일 조선에 관한 대중강연을 하였는데 그 전문을 실었다.

줄곧 등장하는 세창양행에 대한 이해를 하고 넘어가야 한다.
1883년 고종은 조선사절단을 중국에 보내 조선의 근대화 자금을 위한 신용장을 발행하는 일을 하게 한다. 조선사절단은 상하이와 톈진에 머물면서 상하이의 자단메티슨, 톈진의 에드아르트 마이어와 만나서 지사 설립을 설득한다.
마이어는 독일 함부르크 상인 볼터에게 마이어회사의 지사를 설립 전권을 맡기는데 볼터는 제물포로 와 지사 이름을 세창양행으로 하고 조선에서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세창양행은 조선 최초로 차관 대출을 제공한 서양 기업이 되고 조선의 대출 지불이 끝날 때까지 증기선을 운행하면서 각종 이권을 얻는다.
1897년 가을 조선정부와 협상하여 세창양행은 광산 채굴권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읽으면서 몇 번 어이없거나 피식거리기도 했는데
차를 이용할 수 없는 조선에서 운송수단이라곤 가마나 마차였는데 그 울렁거림에 힘들어하고
체구가 작은 나귀에 짐을 균형있게 싣고 가파른 산을 올라가는 모습을 놀라움에 보기도 한다.(입이 떡 벌어졌을듯)
말의 교환을 위해서는 통역이 필요한데 제대로 전달하는 것이 맞는지 의구심이 들어하는 부분도 있었다.
외국인 고위 공무원에겐 숙소가 제공되는데 막상 배정받으려면 끈기있게 기다려야 한다는 대목도 나온다. 이때 조선인 통역사들은 별일 아니라는듯 구경꾼들과 끝없는 대화를 한다는 대목에서 폭소하게 만든다.
부처탄신일에 축제를 하는데 북과 태평소 소리를 듣고는 유럽인 청각에 통증을 유발시킨다는 것에도 일면 이해되는 부분이 있어 웃었다.
조선의 황폐한 산림을 보고 한탄하는 부분은 나조차 안타까웠다.

하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채굴권을 얻기 위해 방문했다.
따라서 조선 정부와 끊임없는 기싸움도 벌여야 했고 내정 장소로 정해진 강원도 당고개 주민들과도 대치하는 일을 계속해야 했다.
그러므로 강연에서 그가 한 말은 전적으로 독일의 이익 앞에 설 수 밖에 없으므로 그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두 번째 예쎈은 독일 예술사학자로 1913년 미국을 거쳐 일본을 답사한 후 쓴 답사기 '조선의 일본인' 내용이다. 
예쎈은 식민지가 된 조선의 문화를 이왕가박물관을 방문해 유물을 들여다보며 든 생각과 일본인의 고대 문화와 메이지유신 이후 서양의 문화를 수용한 일본의 변화를 관심 있게 지켜본다. 

예쎈은 동아시아의 고대 문화에 무척 관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일본을 방문하고 자신이 생각했던 모습이 아니여서 충격에 빠진 모습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왜 자국의 고대 문화를 지켜내지 않고 서양의 문물을 그대로 수용하지 하는 의문을 보인다)
조선은 신분에 대한 차이에 따른 차이와 남녀의 차이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수공업자들이 왜 천민 대우를 받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분노한다.
본인 스스로가 예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다보니 장인 정신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한글에 대한 체계성을 보고 놀라움을 보이는 부분도 흥미로웠다. 
예쎈은 독일이 배울 식민지 정책 중 예술행정 정책을 눈여겨 본다. 
일본이 식민지 왕족을 공예품을 만들 수 있는 공예학교인 조선총독부공업전습소를 확장시켜 졸업하면 이왕직미술품제작소에서 조선 일본의 박물관 상품을 생산하도록 만들었다고 한 것이다.
정작 이용되었을 왕족을 생각하면 뒷맛이 씁쓸하다. 

참고로 크노헨하우어의 강연문과 예쎈의 여행기에는 역사 오류가 등장한다.
조선에 대한 지식이 성립되어 있지 않았을테니 감안하고 보아야 할 부분이다. 

먼저 크노헨하우어의 강연문 中

일본인들은 12세기부터 조선을 주시했습니다. 때로는 한반도의 남쪽 전체, 심지어 신라조차도 일본 소유였습니다.
(중략)
일본은 16세기에 20년 동안 잔인한 전쟁으로 조선을 정복했습니다. 
평화협정으로 내건 조건이 얼마나 잔인했는지 상상해 보십시오.
조선인은 매년 36명의 인간 피부를 일본에 전달해야만 했습니다. 나중에 이 고통은 완화되었지만 농산물 등이 이를 대신했습니다.



예쎈의 여행기 中

6년 동안 전쟁을 하며 힘들게 조선을 점령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곧 죽었다. 
그의 후계자는 조선에 관한 권한을 만주중국(청나라)에게 넘겨줬다. 
다만 항구도시 부산만 일본이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었으며 일본은 수백년동안 조선 땅에 한발을 걸치고 있었다.

고려 왕조(935~1392)는 하위 왕국으로 중국에 귀속되었으며, 고려 말부터 한반도 지역에 지속적으로 고려라는 이름을 부여하였다.


세 번째 라우텐자흐 헤르만의 '조선-만주 국경에 있는 백두산의 강도여행' 이다.
이는 1933년 8월부터 9월까지 압록강 어귀부터 백두산 천지까지의 여행기다.
그는 같은 해 7월부터 10월까지 지형학과 식물, 농업 등 경제 현황 탐사를 위해 조선을 여행하였다.
남으로는 제주도, 지리산, 동으로는 울릉도, 북으로는 백두산까지 이어졌다. 

그는 한 나라의 위도가 이리 다양한 것에 놀라며 기온차에 주목한다.
백두산을 여행하면서 수많은 식물을 수집하고 한라산의 수종과 비교하는 작업도 한다.
백두산의 풍경이 너무나 아름다웠다고 극찬한다. 
그의 여행기에 강도라는 단어가 왜 나오나 궁금했는데 여행하면서 몇 차례 강도를 만났기 때문이다. 그들이 누군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저자는 이들을 독립군이 아닐까 추측한다. 게릴라 집단이라고 묘사한 걸 보면 그럴 가능성도 있을 것 같다.
라우텐자흐 교수의 여행기를 보니 솔직히 다른 걸 떠나서 너무 부러웠다. 
백두산 여행기가 이제는 너무 멀게 느껴져서인가. 


사실 대한제국이라고 하기에는 두 명의 독일인들은 일제강점기 시기에 대한 내용이기 때문에 좀 애매하다.
용어에는 괄호 안의 설명을 통해 자세히 실어놓은 것은 저자의 정성이 돋보였다. (다만 너무 길어지는 경우가 있어 책의 흐름을 놓치는 경우도 발생할 것 같아 이 점이 아쉬웠다. 차라리 아래 주석을 이용하거나 했다면 어땠을까)

독일인 3명을 통해 당시 대한제국과 식민지 조선의 풍경을 엿볼 수 있었다.
문화적 차이가 크니 조선인들의 태도나 생활 양식 등에 경계나 거리감을 느끼기도 했을 것이다.
조선에 대한 무지, 그리고 선입견이 있는 상태에서 서술한 부분도 있지만 그것은 감안하고 보면 될 것이다.

또 하나의 한국근대사 자료를 얻은 것 같아 기분 좋게 읽었다.

조선의 사계절을 경험하며 봄과 여름에 같은 장소를 지나가게 된다면 마치 다른 곳이라고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여름의 풋풋한 녹색의 향연, 다랑논에 심은 녹색 벼들이 찰랑거리는 풍경, 시골집 지붕 위 호박과 수세미 넝쿨, 수많은 녹색 풀들이 짚풀로 엮은 지붕과 울타리를 둘러싸고 있어서 모든 것이 풍부하고 축복받은 땅이라는 인상을 받습니다. - P83

조선 관리는 친절하고 세련된 말투로 먼저 다른 주제를 꺼내 대화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 매우 유감스러운 말투로 미안하지만 우리 지역에는 당신들에게 도움을 줄 것이 전혀 없으니 여기, 저기, 다른 곳을 찾아가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방금 그곳에서 왔다고 하며 끈기 있게 반복적으로 묻자 고위 관리는 실례했다고 하며, 자신은 이곳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잘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관리는 결코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 P97

조선의 회화와 목공예를 보면 전성기 때는 현재보다 월등한 수준의 공예품이 생산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대웅전의 앞 현관 옆에 정교하게 장식된 큰 동종이 있습니다. 안뜰과 사원 건축물 사이에 화강암 탑이 있으며, 탑의 장식으로 매달려 있는 귀퉁이 작은 종은 절반만 남아 바람따라 조용한 소리를 냅니다. 그 절반이 이미 도난당했으나 아무도 신경쓰지 않습니다.도서관에서 꽤 오래된 비단 위에 수를 놓은 작품을 보았습니다. 여러 가지 귀중한 보석, 인연옥으로 장식한 긴 염주 등은 사리함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모든 유물은 수준 높은 공예품이며 현재 아무도 그 수준을 따를 수 없습니다. - P113

우리는 종종 야영지에서 떨어진 5~6곳에서 불꽃 재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우리 일행은 불을 지른 화전민 밭 한 가운데를 지나야 했던 적도 있습니다. 아무도 이 무의미한 삼림의 황폐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조선의 법은 화전을 확실히 금지하고 있지만, 조선의 권력자는 누구인가요? 나는 묻습니다. 누가 과연 화전 금지 명령을 집행할 권한이 있는가요? 소나무만이 건축 목재로 보호됩니다. 그러나 아무도 벌목한 후 식목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수십 년이 지나면 북쪽 삼림은 현재 남쪽처럼 황폐하게 변할 것입니다. - P127

조선 정부는 뒷문으로 비열한 행위를 하며, 외면하고, 번복하며 우리가 얻은 권리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독일 영사는 어떠한 것도 동의하지 않았으며 엄격하게 최혜국 약관에 의한 승인을 요구했습니다. 첨예한 분위기 가운데 외교각서를 교환하면서 외국인 고문이 설명한 덕분에 조선 정부는 이성적으로 돌아왔고, 마침내 우리가 선택한 당고개를 승인하였습니다.
고문 중 한 사람이 왕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절대 독일인들에게 농담하면 안 되며, 그렇게 한다면 그들은 더 큰 배상을 요구할 것이며, 자오저우만의 점령이 그 증거라고 하였습니다. - P140

불쌍한 고종은 유감스럽게도 자신의 부하들에게 여러 번의 공격을 받아서 의기소침하였습니다.
특히 여왕이 몇 년 전 일본인에 의해 굴욕적으로 살해된 이후 더 심해졌습니다.
그는 매우 지적이고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단력 없고 탐욕스러웠던 그는 붕당으로 나뉜 대신들의 공놀이 대상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가능한 한 많은 돈을 갖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이 나라의 복지와 불행에 무관심하였습니다. - P150

그들은 무리를 져서 옮겨 다니고, 과일과 야채를 수확하는 일을 하는 허름한 노동자들이지만 우리의 일상생활이 유지되기 위해서 필요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재산을 조금씩 늘려가며, 더듬거리는 영어로 말하며, 자식들을 미국 학교와 도서관에 보낸다. 이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며, 백인들과 합류하기를 원하지 않고, 절대로 동화되지 않을 것이다. 가장 섬뜩한 것은 호놀룰루에서 관찰된 점이다. 이곳에 이주한 일본인들 수천 명은 표면적으로는 평화롭게 보이지만, 곧 호놀룰루를 점령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이들 일본인들을 절대 얕보면 안 된다. - P204

이들은 멍하니 한가하게 앉아 있거나 그저 서 있었다. 크고 바른 당당한 체구와 자랭긴 모습의 사람들은 상의, 치마, 바지, 신발 모두 흰색으로 차려입었으며, 머리는 뒤에서 흰 모자 안으로 감아 올렸으며, 대나무 틀 위에 느슨하게 말총으로 직조한 높고 넓은 차양 모자를 쓰고 모자 끈을 턱 아래에 묶었다. 수많은 상점 앞에서 기다란 담뱃대로 끊임없이 흡연을 하거나 수다를 떠드는 등 우아한 루저의 모습으로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들의 아내는 집과 안뜰 내부에서 대마나 면을 두드리며 빨래를 하는 등 지칠 줄 모르고 일을 한다. - P209

백정과 신발 제조업자는 이 사회에서 천대받는 신분이다. 동물의 표피와 살을 손으로 직접 처리하거나 바구니 제작자는 살아 있는 나무 껍질을 벗기는 작업을 다루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예술가라 부르는 배우와 가수가 이러한 천민 계급에 속한다.
황동 공예품, 촛대, 등불, 담뱃대, 아름다운 쇠장식이 달린 목가구 등을 만드는 장인들이 있는 이 나라에는 모든 종류의 금속, 금, 구리, 철 등이 풍부하다. 종이를 만드는 제지업은 오랜 전통 작업이다. - P212

중국인보다 수준이 높았던 조선인들은 25개의 모음과 19개의 자음으로 아름다운 한글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이와 같이 수준 높은 인쇄 기술로 제작된 한글 인쇄물 한 두 권을 집으로 가져오는 것은 내게 충분히 가치가 있었다. - P224

총독부 보고서를 읽어보면, 토지 조사, 소유권 확인, 생산과 수출, 수입 조사 등 경제적으로 법률적으로 새로운 질서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알 수 있다.
한 회사는 1년 동안 7,300건의 재정 지원을 받기도 하였다. 창조적이며 기술적으로 정제된 작업은 유명한 공예박물관의 지원을 받는다. 그것은 교토, 나고야, 도쿄 혹은 다른 도시의 상업박물관의 보조 상품 판매망과 연결되었다. 새롭게 추천하는 재료, 도구, 작업 방법은 마치 신지식을 주는 것처럼 포장되었다. 국가에서 추천하는 작업 유형은 이미 오래된 낡은 작업이었지만 기품이 있어 보이도록 포장했다. 게다가 이러한 판촉 정책으로 상품의 생산량이 증가하였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구매 욕구를 부르는 일본의 추천 상품은 부족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모든 학교 정책은 영리한 프로파간다가 될 수 있는 사례로 까다로운 유럽인들도 이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 P229

만주의 강도들은 절반 정도 훈련받은 정규 군인과 일반 중국인 집단이며 일본의 무력 진압에 대항하는 반일본 게릴라 집단이다. 이들은 듣기만 해도 용맹한 작전을 거침없이 수행하였다. 일반적으로 만주의 강도들은 이주민들이 거주하는 압록강과 두만강이 흐르는 지역에서 활동하지 않았다. - P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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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2-01 22: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조선의 언어 인쇄술, 기술 문화 모두 중국과 일본을 뛰어넘는 세계적인 수준인데,,,,

세도가들의 이권다툼과 분열,,
역사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것 같습니다 ㅠ.ㅠ

거리의화가 2022-02-02 10:45   좋아요 1 | URL
당시에는 조선에 대한 인식 자체가 외국엔 거의 없거나 있어도 잘못 알려진 경우가 많았죠. 지금은 K-Culture가 세계적으로 알려지고 인정받는걸 보면 기분이 좋습니다. 외교의 중요성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지요. 너무 퍼줘서도, 너무 밀어붙여도 안되는 노련함이 필요합니다.

바람돌이 2022-02-02 02: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대한제국의 탄생부터가 당대의 흐름을 거부하고 복고적 왕권강화로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다는 생각에서 출발하다보니 아무래도 긍정적 평가를 하기가 힘들어요. 이 책의 주인공들이 독일인들이라는 것에 약간 호기심을 느낍니다. 독일인들이 또 어딜 가나 자신이 본것들을 상세하게 기록하는데는 또 아주 뛰어나잖아요. ^^

거리의화가 2022-02-02 10:49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군주체제가 아닌 다른 정치형태가 되었어야 하는데 그 부분이 아쉽습니다.
정말 별의별 이야기를 적어놓았더군요. 읽으면서 이런 기록이 남아서 다행이다 싶었어요. 물론 시선의 한계는 있습니다만 자료 자체가 평면적인 역사를 입체적으로 보게 해 주는 기회가 되는 것 같습니다.
 
대한계년사 6
소명출판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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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계년사 6권은 1900년부터 1903년 시기를 다루고 있다.


내부적 개혁 동력은 진작에 꺾이고 오로지 백성의 재물을 수탈하고 권세를 탐할 생각만 하는 관리들.

백성의 생각은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탁상 공론만 펼치는 관리와 고종 황제.

일본과 영국, 러시아 등 외국 세력의 이권이 야금야금 차지해가는 모습.

심지어 전 판서 민영주, 전 비서원 승 송정섭, 수륜과 장 강면희 등이 월미도를 일본인에게 돈을 받고 몰래 파는 일도 생겼다.

러시아 사람들이 용천 용암포에 와서 땅을 차지하고 물러나지 않자 일본과 영국도 이에 개입하기를 원해 이곳에 대한 개항을 정부에게 요구한다. 하지만 이때 조선은 러시아의 원조를 중요시 여겨 결국 용암포를 허가하고 만다. 이는 나중에 러일전쟁의 빌미가 된다는 안타까운 일.


그리고 대한계년사는 을미사변을 굉장히 디테일하게 다루는데 그 후폭풍이 이 시기에도 어김없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을미사변 때 서명한 대신들, 이재면과 김윤식, 여러 대신들이 상소를 올려 처형하길 요청하지만 고종은 허락하지 않는다.

일본으로 건너간 박영효는 현 정부를 수구당이 집권한 부패한 정권으로 여겨 전복할 기회를 몇 차례나 노리기도 했다.


1902년은 가장 중요한 일영협약이 있던 해이기도 했다.

일본과 영국은 암암리에 협약을 맺으며 청은 영국이, 일본은 조선의 이익을 가지고 있음을 약속한다. 두 나라 간의 교전이 발생하면 서로를 돕는다는 약속도 함께 이루어진다.


특이했던 것은 엄귀비에 대한 묘사가 부정적이라는 것이다.

1900년 8월 엄씨가 황제의 총애를 받으면서 순빈에 책봉되는데 정사에 자주 간여하며 주변 사람을 요직에 앉히는 등의 묘사가 나온다. 엄씨는 1902년 10월 황귀비로 높여 책봉이 된다.

황제에게 총애를 받고 아들을 낳았다는 정도만 알 뿐 이렇게까지 좌지우지하는 인물인 줄 몰랐다고 해야할까. 

승정원 일기 등에도 찾아봤는데 엄귀비가 책봉될 때의 사실만 나오지 다른 이야기는 찾질 못했다. 관련하여 좀 더 정보를 찾아봐야할 것 같다.


다음 권은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는 해이다. 더욱 암담한 이야기들이 이어질 것 같다.

독립협회가 해산된 뒤로부터 각 도 수령들은 오로지 탐욕스럽고 포악하게 백성의 재산을 빼앗는 것을 일삼았다. 또 나라의 돈으로 이자놀이를 하고, 위에다 바치는 것은 그 날짜를 넘기곤 했다. - P37

러시아 공사가 하야시 공사를 향해 말하기를 ‘일본과 러시아가 모여 협상한 다음 한국을 분할합시다‘하니, 하야시 곤노스케가 말하기를, ‘이 문제는 우리 정부를 향해 할 일입니다‘ 하고 거절했다. 다시 일본주재 러시아 공사가 이토 히로부미 후작에게 한국을 분할하는 문제에 대해 말했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는 역시 사절하고, 이타가키 다이조 백작을 시켜 ‘한국을 연합하여 보호한다는 주장‘을 야마가타 아리토모 수상에게 알리도록 했다고 한다."라고 한 적이 있었다. - P39

당시 이용익이 내장원을 자기 사저에 두고 황실의 재정과 부세를 전적으로 책임지고 맡아서 관리하며 가혹한 세금 징수를 일삼으니, 백성들은 매우 원망하며 괴로워했다. - P46

김영준은 재판장이 되어, 선량한 백성들을 상대로 없는 사실을 꾸며 함정에 빠뜨리고 재산을 억지로 빼앗았다. 김영준이 처형되자, 많은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통쾌하게 여기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 P61

각 고을의 수령들이 나라에 바치는 돈을 교묘한 꾀로 농락하고 거저 떼먹는 폐단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심지어 여러 해 째 기한 안에 돈을 못 바치기도 했다. 이때에 이르러 탁지부에서 그 액수가 군수 2백여 명 모두를 장차 황제에게 보고해 면직시키고 붙잡아다가 납부토록 독촉하려 했다.
각 고을의 수령과 그 친족들은 앞다투어 벗어날 길을 꾀하려고, 혹은 돈을 더러는 수표를 가져와 바쳤다. - P63

박영효가 말하기를, 「오늘날 우리나라의 일의 형편이 매우 위태롭습니다. 이 기회를 틈타서 정부를 전복하고 수구당을 제거해 우리 대한을 보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활동자금 10만 원을 변통하여 얻은 뒤에야 일이 성취될 수 있을 것입니다...(중략)」 - P68

이근택은 오로지 인민을 모략해 죄에 빠뜨려 재산을 빼앗음으로써 황제에게 사적으로 바치고 자기를 살찌우는 짓을 일삼았다. -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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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1-31 22:1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화가님이 올려주시는 대한 계년사
따라 읽는 재미 만큼 한국 현대서
울분과 울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엄귀비 등에 업혔던 고종!(아관파천)

결국 황귀비가 되는 군요

화가님 설 연휴 가족과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福마뉘 ^ㅅ^

거리의화가 2022-02-01 19:20   좋아요 2 | URL
읽다 보면 진짜 분노가 여러 번 치밀어올라요 헌데 지금 정치판도 다르지 않으니 화가 나고. 이 시기 백성들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여러 모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으니…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Book] 타이가의 시간여행,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다 - 모스크바에서 바이칼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여행자 K 지음 / 시대의창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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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중 여행에세이를 좋아한다.

겁이 많고 소심한 내가 대리만족할 수 있는 아이템이기 때문.

헌데 생각보다 책에 대한 평이 너무 없어 놀랐다.

그리고 그마저도 평이 별로다.

음. 너무 기대가 커서였을까.


하지만 나는 읽어보니 이 분의 성정이 느껴졌고 잘 읽혔다.

내 스타일이었나보다.

두고 두고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지만 여행기는 어차피 그 당시의 기준에서 바라보는 이야기이고

언제나 최신으로 갈아치워지므로 별 문제는 없다 생각한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타고 여행을 하는 것은 어릴 적부터 내 꿈이었다.

코로나가 터지는 바람에 지금은 가고 싶어도 가기가 그렇지만

갈 수 있는 상황이 되더라도 옆지기를 설득하는 일이 우선일 것 같다.

몇 차례나 꼬드겨봤지만 꿈쩍을 하지 않았다.

혼자 간다고 하니 위험해서 안된다고 하고.(어쩌라는 거냐)


참! 여행기 중 러시아 혁명기를 거쳐간 조선인들의 이름이 종종 나오기 때문에 흥미로웠다.


다만 아쉬운 것은 문장이 좀 뻔하다는 것~?^^;

그래도 여행의 설레임을 느끼기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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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1-30 22: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시베리아횡단열차 타보고싶어요. 부산에서 북한 찍고 시베리아 넘어 유럽까지 가는 날이 오길 ㅎㅎ 저희 옆지기도 집나가면 고생이란 주의랍니다 ~

거리의화가 2022-01-31 21:12   좋아요 1 | URL
너무 타보고 싶습니다ㅜㅜ 언제나 타볼지. 죽기 전에 북한은 가볼 수 있겠죠.
옆지기가 움직이는 걸 싫어해서 큰일이에요. 점점 더 안 움직이려고 하니...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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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내 취향의 원두다. 바디감이 무겁지 않으면서 개운하고 깔끔하다. 종종 이용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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