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계년사 8
소명출판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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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부터 1907년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대표 사건들을 정리해보자.

1906년 2월 17일 밤11시 군부 대신 이근택 집에 자객 세 사람이 뛰어들어와 한 사람이 이근택을 칼로 찌르자 이근택이 촛불을 껐다. 이에 자객들은 이근택을 칼로 머리와 왼쪽 어깨 등 및 팔에 여러 곳에 상처를 입혔다. 이때 안방 근처에 있던 우리나라 병사와 순검과 일본 헌병 및 순사들이 초인종 울리는 소리에 달려왔으나 자객들은 이미 도주한 뒤였다. 이근택은 중상을 입고 한성병원 특별실에서 치료를 받았다. 한달 기간 치료하여 죽지 않게 되었다. 이로부터 박제순 이지용 등 다섯 대신의 집에는 우리나라 병사들이 총을 메고 경계하며 지키고 엄중한 경호를 하게 되었다.

1906년 6월 4일 최익현이 제자 수십 명과 선비 임병찬과 몇몇, 병사 수백 명을 거느리고 의병을 일으켰다. 6월 13일 궁중에서는 궁내부 특진관 정2품 최익현을 해임하고 법부에 명령하여 그를 붙잡아 가두라고 했다. 결국 최익현 임병찬 등 13명이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올려지고 많은 사람들에게는 흩어져 돌아가게 되었다. 최익현은 처벌로 쓰시마 섬으로 유배가 보내졌다. 쓰시마 섬에 갇히자 우리나라의 양식과 반찬거리를 마련해 가지고 갔다. 먹을거리가 다 떨어졌는데 일본이 주는 음식을 먹을 수가 없어 마침내 단식했다. 최익현의 아들과 조카가 부산으로 돌아와 곡식과 반찬거리를 사가지고 미처 되돌아가기 전 12월 30일 최익현은 숨을 거두었다.

"나 최익현은 비록 세상 돌아가는 것은 잘 모르지만, 나라에 충성하고 남을 사랑하며 믿음을 지키고 의리를 밝히는 도리는 익숙히 익혀 왔습니다. 나라와 인민에 닥친 재앙이 그지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눈으로 보고서, 오직 죽을 자리를 얻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긴 지 오래되었습니다. 수십 명의 동지들과 함께 죽을 것을 결의하고, 장차 병든 몸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가 이토 히로부미, 하세가와 요시미치 등과 한번 만나서 하고 싶은 말을 남김없이 다 하고 죽으려고 합니다. 이에 백성 가운데 함께 죽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또 약간 있습니다." - P42

이 때 재정이 고갈되어, 정부는 일본 흥업은행에서 1천만 원을 빌렸다. 3월 16일 그에 관한 계약을 맺었다.(이자는 매회 1백 원, 연 이자는 6푼 5리. 국내 해관을 담보로 하여 10년을 상환기간으로 하고 5년 내에는 상황을 하지 않으며, 발행가격은 1백 원당 90원만 받기로 했다.) 단지 관리 및 초빙 고용한 일본인들의 봉급 비용에 쓰기 위해서였다. 1907년 1월 국채가 1백30만원이었는데 정부에서 갚을 대책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1월 29일 대구에 사는 전 주사 최상돈은 국민들이 국채 보상을 담당한자는 말을 앞장서서 부르짖었고 서울과 지방의 벼슬아치, 백성들이 그 주장에 호응했다.

전 주서 나인영, 전 주사 이기, 전 의관 윤주찬, 전 주사 오기호 등이 박제순 등을 죽이려 했으나, 실패했다.

나인영은 글을 작성하여 여러 사람들을 격려했다. "여러분! 오늘의 일은 실로 대한의 독립을 유지하는 데 첫째 가는 요체입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 2천만 민중들의 생사가 달린 문제입니다. 있는 힘을 다하고 죽음을 각오하는 뜻으로, 이 다섯 역적들을 처단하여 나라 안의 화근을 제거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된다면 우리들 및 우리 자손들은 독립된 세상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줄줄 흐르는 눈물에 잠기고 뚝뚝 떨어지는 피를 걸러내어 마음을 바쳐 복수를 맹세하고, 엉금엉금 기어와 몸을 숙여 엎드리어, 이처럼 의로운 임무를 혈기와 의협심 그리고 슬기와 용기를 지니고 있는 우리 여러분의 가슴 앞에 내어놓습니다. 여러분! 각자 순결한 애국심을 힘껏 발휘해, 나라를 팔아먹은 흉악하고 완고한한 역적들을 서둘러 처단함으로써, 우리나라로 하여금 세계 위에 독립된 나라로 우뚝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 P69

광무 2년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 1차 회의가 열려 세계의 전쟁을 없애버리자는 큰 뜻으로 국제분쟁의 평화 처리조약(80조항)을 맺었다. 1907년은 제2차 회의를 여는 때였다. 황제는 5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것을 분하게 여겨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전 평리원 검사 이준을 밀사로 파견했다. 이상설에게 비밀 지령을 주어 헤이그에 가서 일본인이 강제로 맺은 조약을 맺은 것과 일본에 달라붙은 박제순 등이 정부 대신이 되어 우리나라를 억누르고 인민에게 잔인하고 포악하게 군 사실에 대해 만국평화회의에 호소하도록 시켰다. 이상설은 4월 20일 시베리아 철도로 러시아 수도에 이르러, 전 러시아 주재공사관 서기 이위종과 함께 헤이그로 갔다. 러시아 수도에 있던 네덜란드 신문사 통신원이 그 사실을 알고 6월 28일 이 내용을 본사에 전보로 알렸다. 그 신문사에서는 곧바로 한국의 밀사가 헤이그에 온다고 신문에 실었다. 7월 1일 헤이그로부터 미국의 신문사에 전보를 보냈다. 헤이그에 주재하던 일본 공사가 이 소식을 듣고 갖은 방법으로 힘써서 이상설 일행이 평화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준은 이위종에게 평화회의 간부를 방문하여 회의 참석에 대해 말하도록 했으나 간부는 그들의 회의 참석을 허락하지 않았다. 비록 발언권은 허락이 안되었으나 방청은 허락되어 회의장소로 갔다. 그곳에서 이준은 자결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궁중에서 밀사 파견을 이유로 이완용을 크게 꾸짖었다. 이완용은 7월 16일 회의에서 황제를 만나 이번 헤이그 평화회의에 위원을 보내 곤란을 당한 것을 벗기 위한 방책에 대해 말했다. 하나는 광무 9년 11월 17일의 새 조약에 옥새를 찍는 일, 둘은 황제 폐하의 섭정(대리인)을 추천하는 일, 셋은 황제 폐하께서 일본 황제에 직접 사과하러 가는 일이었다.

이완용 등은 황제에게 황태자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일에 대해 아뢰었다. 압박하는 분위기 속에서 황제는 오전 3시에 황태자 대리 명령 조서를 내렸다. 이완용 등은 그제서야 물러갔다. 황제는 수라를 들지 못한지 며칠이 되었고 이날 밤 밤새 잠을 자지 못했다. 대궐 안의 신하들과 대궐 사람들도 모두 잠을 자지 못했다. 이날 밤 11시 온 도성의 인민이 종로에 모여 결사회를 만들고 일곱 대신이 한 날치기 짓에 대한 상소를 적었다. 오전 4시 점포 상인들이 모여 황제가 대리 조서를 비로소 내렸다.

이완용이 이토 히로부미의 지시로 각 대신들과 함께 송병준 사저에 모여 남몰래 의논했다. 1907년 7월 24일 이완용이 이병무와 함께 황제를 만난 후 대궐에서 물러 나와 내각 회의를 열었다. 이완용과 송병준이 황제를 만나고, 대궐에서 물러 나와 통감 관저로 갔다. 임선준 고영희 조중응 이병무가 통감 관저로 가 이완용과 송병준을 기다렸다. 이토 히로부미 및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 외무성 대신 하야시 다다시와 함께 7조항의 협약에 조인했다.

"하나, 한국 정부는 시정의 개선에 관해서 통감의 지도를 받도록 할 일.
둘, 한국 정부의 법령 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거칠 일.
셋, 한국의 사법 사무는 보통의 행정사무와 구별할 일.
넷, 한국 관리를 임명하고 해임하는 일은 통감의 동의로써 이를 행할 일.
다섯, 한국 정부는 통감이 추천한 일본인을 한국 관리에 임명할 일.
여섯, 한국 정부는 통감의 동의 없이 외국인을 초빙하여 고용하지 않을 일.
일곱, 메이지 37년 8월 23일에 조인한 한일협약 제1항은 폐지할 일."
한일협약 제1항의 내용은 "대한 정부는 대일본 정부가 추천한 일본인 1명을 재정고문으로 대한 정부에 초빙해 고용하되, 재정에 관한 사항은 일체 그의 의견을 묻고 시행할 일." 이었다. 조약의 끝에 기록했다.
광무 11년 7월 24일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 인
통감 후작 이토 히로부미 인

1907년 7월 31일 오전 군부 대신 이병무와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이토 히로부미 통감 관저에 모여 우리나라 군대를 해산하기로 논의해 결정했다. 오후 9시 40분 총리대신 이완용, 법부 대신 조중응이 황제에게 아뢴 뒤에 조서를 내렸는데, 아직은 반포하지 말도록 했다. 8월 1일 7시,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우리나라 각 대대의 영관 위관 장교 및 전직 대장들을 불러모았다. 각 부대 장관은 자기 부대로 돌아가 군사들에게 맨 손으로 훈련원으로 가서 훈련을 하도록 꾀어 서로 통솔하여 갔는데, 일본군이 좌우로 호의하며 갔으니 훈련원에서 해산식 거행을 위한 것이었다. 8시에 일본 장교는 각 부대가 텅빈 틈을 타 전동의 시위 3대대 부대와 정동의 숙위소로 가서 점거하고 9시에 흥화문 앞 징상대 부대를 빼앗고 무기를 모두 거두어들였다.


을사오적에 대한 분노로 인한 줄곧은 상소와 암살 시도. 헤이그 만국회의에 밀사 파견과 그 후폭풍. 한일신협약과 군대 해산. 고종의 강제 퇴위로 인한 사회적 혼란이 등장한다.

어느 것 하나 분노하지 않을 것이 없지만 을사오적과 한일신협약을 강제로 맺은 정미칠적의 안하무인은 기가 찰 노릇이었다.
국민을 가벼이 여기고 이토 히로부미라는 권력에 빌붙어 오만하기 짝이 없는 행동을 일삼는 무리들에 가슴 속으로는 여러 번 단칼을 날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당시 백성들과 일부 관리도 수없이 그들의 집과 가옥을 불태우고 암살을 시도하기도 하는 등 수많은 행동이 있었다.
결코 가만히 그들 손에 놀아나려하지 않았다. 그들도 백성들의 눈치를 살폈고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했다고 한다.
왜 아니 그럴까. 가다가 돌 맞아 죽을까봐 두려워한 적도 많았을 것 같다.
실제로 그들은 강제 협약을 맺고 나서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군의 비호 아래 자택과 가족을 단단히 보호했다.

수많은 의병들이 강제 조약과 군대 해산, 고종의 강제 퇴위로 들불처럼 들고 일어났다.
고종은 그들을 보호하지 못했고 순종도 마찬가지였다.
을사늑약 이후에는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와 일부 대신들이 비밀리에 국정을 협의한 내용들을 고종에 통보하여 재가를 받는 식으로 이루어지다보니 그들의 입맛대로 정리될 수 밖에 없었다.

통탄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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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여자 시사IN 저널북 (SJB) 3
국승민 외 지음 / 시사IN북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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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대선이 코앞이다. 

3월 4일부터 양일간 이루어진 사전 투표율이 총 36.93%로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높은 투표율을 기록했다. 

이제 3일 앞으로 다가온 본선 투표를 합으로 대통령이 결정된다.


대선 전 20대 여성들의 생각을 면밀히 뜯어보자 생각했다.

이 책은 시사인에서 2021년 7월 30일부터 8월 2일까지 남녀 2천명을 대상(20대 600명, 30대 600명, 40대 이상 800명)으로 웹조사를 한 통계를 바탕으로 분석해 내놓은 책이다. 20대 여성을 알기 위해 세대별 조사를 한 것이 눈에 띄었다. 


책을 읽기 전 기대한 바는 20대 여성에 대한 전반적인 생각이 1차적으로 궁금했고 20대 남성과 비교했을 때 어떤 차이가 있는지, 그리고 같은 20대 여성이라도 다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추가적으로 이들이 이번 대선에 어떤 선택을 할지 미리 추측해보려는 생각도 있었다.

책을 보면 느끼겠지만 화두를 페미니즘이라는 렌즈를 통해 바라보았다.


왜 페미니즘인가?

20대 여성 10명 중 4명이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는 전체 응답자의 2배가 넘었다. 이것만 봐도 왜 페미니즘을 화두로 선택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잠깐! 페미니즘의 정의는 정확히 어떤 것일까?

모두가 '페미니즘'을 이야기하지만 페미니즘에 각자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20대 여성이 생각하는 페미니즘은?'이라는 질문이 중요한 이유다. '페미니즘은 남녀의 동등한 지위와 기회 부여를 이루려는 운동이다'는 페미니즘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정의로 꼽히기에 시사인은 이 질문을 선택했고 20대 여성의 66.9%가 동의했다. 

페미니스트에 대한 감정 온도(100이 긍정 0이 부정)나 타인이 페미니스트였을 때의 관계성 면에서 20대 여성은 53.3도로 우호적이었다. 반면 남성은 66.6%가 페미니스트를 받아들일 수 없고 페미니스트에 대한 감정 온도도 14.35도로 무척 낮았다.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20대 여성에 대한 생각은 짐작한 대로였다. 20대 여성은 페미니즘이 지나치게 공격받고 있고 소수의 극단적인 주장으로 과대대표되고 있다고 인식했다. 20대 여성의 페미니즘에 대한 우호적 태도는 또래 집단과의 경험으로 비슷한 인식을 지니게 되었고 이것이 연대를 위한 밑거름이 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20대 여성은 사회구조적 차별이 존재한다고 느끼는데 이는 성별 임금 격차가 존재하며 능력에는 차이가 없거나 높은데도 취업의 문이 남성에게 더 유리하다 여기고 있다. 게다가 결혼 출산 등으로 경력 단절이 이루어진다는 인식 속에 결혼과 출산에 대한 20대 여성의 비율은 전 연령 통틀어 유일하게 한 자리수였다.


20대 여성이 중요하게 여기는 정책은 무엇일까?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 금지와 다양성(다문화주의) 등과 관련이 있었다. 다른 선택지는 '법과 사회질서 확립 우선'(권위주의), '정부 개입의 최소화 우선'(자유시장주의), '경제적 재분배 우선'(사회민주주의)이 있었다. 20대 남성은 지지 세력 1순위가 법과 사회질서 확립 우선이었다. 

성장보다는 복지를, 경제성장보다는 환경보호를 선택했다. 차별금지법과 동성결혼 허용에 대한 찬성 비율이 높았다. 

20대 여성은 정치에 관심이 많고 정치참여에 높은 열의를 가지고 있지만 자신들의 요구를 정치권에서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땅한 정당과 정치인을 지지할 곳이 없다는 이야기다.

20대 여성의 표심이 20대 대선에서 어디로 움직일지 이 부동층의 표심이 대선의 키가 될 수 있을까.


20대는 현재 사회적 갈등 중 어떤 것을 가장 심각하다고 느낄까? 예상하겠지만 젠더 갈등이다. 이는 20대 남성, 여성 모두 공통적이었다.(85.6%)

20대는 전통적 갈등인 진보/보수 갈등, 빈부 갈등, 세대 갈등보다 젠더 갈등이 심각하다고 평가했다.

여성/남성 혐오 표현을 쓰는 친구와의 관계의 변화에 대해서 전체 조사 대상의 51.3%는 변한 적 없다 답했으나 20대는 44.5%가 변했다고 답했다. 

성범죄에 대한 생각은 어떨까? 여성들은 이에 대해 세대 불문하고 모두 공포를 가지고 있다 답했다.

하지만 20대 남성은 여자들이 실제보다 성범죄 위험을 과장한다 여겼다. 

페미니즘에 우호적인 20대 여성은 문재인 정부에 우호적인 편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20대 대선에 이재명을 지지하는 결과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통계 결과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을 본다면 먼저 연령별로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의 격차가 크게 나타난 것이다.

40대 이상에서는 페미니즘에 대한 입장 차가 뚜렷하지 않았는데 2019년 극단적 안티페미니즘 성향의 집단이 주로 20대에 남성에 나타났던 것이 비해 20대에는 못 미치더라도 윗세대에까지 확산되었다는 것이다. (다만 이에 대한 해석은 세심할 필요가 있다)

또 젠더 갈등의 시야를 바깥으로 돌려 서유럽이나 미국의 인종 갈등에 대비한 것은 다소 무리는 있더라도 신선한 시각이었다고 생각한다. 서유럽이나 미국은 기존의 주류 집단이 정체되고 마이너리티화된다 느끼면서 인종 간 갈등이 격화되었고 백인의 분노가 극단적으로 나타난 것이 트럼프 현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정체성 정치로 젠더를 이슈로 끌어올릴 수 있을까. 현재로서는 쉽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이 결론이다. 다른 우선순위에 밀려 쉽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시사인이 정체성 정치를 젠더와 매치시킨 것은 어떤 집단이 힘을 잃는 동안 새로운 집단이 대두하면 기존 집단은 피해의식을 느끼기 쉽고 대표적으로 무임승차 등의 이슈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20대 여자 현상 표본 조사 연구를 위해 238개 항목이 최종 선택됐다. 300개가 훨씬 넘는 질문 중 많은 것들이 탈락되었는데 이 중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에서 공표 불가 판정을 하여 다음 항목은 탈락했다고 한다.(세대별 가중치 배율 문제로)

- 대통령 선거 투표 의향

- 2022년 20대 대통령 선거 지지

- 차기 대통령 적합도

- 정당별 호감도

- 정당별 호감도 변화

- 대통령 및 주요 대권 주자 호감도

- 더불어민주당이 내부 권력형 성범죄 피해자 보호 노력 시 지지 여부 변동

- 국민의힘이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 유지 시 지지 여부 변동

- 페미니즘 행보 강화 시 지지 변동 여부

- 현재 지지 정당


이번 대선과 연결된 핵심 질문들이 많아 만약 실렸다면 더 좋았을 것 같아 너무 아쉽다.

특히 더불어민주당 성범죄 지지 여부 변동, 국민의 힘 페미니즘에 대한 지지 여부 변동 질문은 상당히 구체적인 내용이라 더욱 궁금했는데 아쉬울 따름이다.


238개 질문을 통해 페미니즘이 젠더 문제가 아님을 느끼게 되었다.

페미니즘은 분배 노동 등 많은 영역에서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고 지지 정당에도 영향을 미치는 변수임을 인식할 수 있었다.

20대 여자 내부만이 아니라 20대 여자를 둘러싼 외부 변수들까지 다루어주어 더욱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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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최후의 대국, 우크라이나의 역사 - 장대한 동슬라브 종가의 고난에 찬 대서사시
구로카와 유지 지음, 안선주 옮김 / 글항아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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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에 대해서 나는 얼마나 알고 있던가? 책을 읽기 전 가장 먼저 든 생각이다.
무지하거나 그렇지 않다고 해도 강대국의 입장에서 바라본 역사로 인식했을 소지가 다분할 것이다.
이 책을 보면서 이것이 피할 수 없는 사실이란 생각이 들어 부끄러움을 많이 느꼈다.

2022년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일어나기 전 글로벌 이슈로 미-러시아 간, 러시아-NATO 간 첨예한 대립을 보면서 설마 전쟁이 벌어지기야 하겠어~? 하는 안일한 생각을 했다.
설마가 현실이 될 줄이야. 전쟁을 피해 우크라이나를 떠난 피난민들이 100만에 이른다고 한다.
미-러시아 간 협상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긴 하지만 서로의 입장 차이만 확인한 채 진전된 결과가 나오지 않고 있다.
이 와중에 민간인에 대한 폭격과 학살이 벌어지고 있고 러시아가 자포리아 원전을 장악했다는 기사를 접했다.
더 이상의 피해가 있어서는 안될 터인데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이 책은 우크라이나 영토를 둘러싼 역사를 담아내고 있다.
따라서 우크라이나 민족의 역사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우크라이나 민족은 아니지만 우크라이나 영토에 존재했던 다양한 민족들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이것이 장점이나 단점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같은 지역이라도 우크라이나어와 러시아어 발음이 엄연히 구분되어 존재한다는 것을 명확히 인식할 수 있었다.
짐작했던 것처럼 내 경우도 키예프나 드네프르강이 익숙하지 키이우, 드니프로강은 익숙하지 않게 느꼈다. 그만큼 많은 단어들이 러시아어로 관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B.C 1500~ B.C 700년경 흑해 북쪽 해안의 땅인 지금의 우크라이나 땅에는 키메리아인이 거주했다.
그들은 유목생활을 했고 능란한 승마술로 유명했으며 철기시대를 이룩한 민족이었다.
B.C 750 ~ B.C 700년경이 되면 스키타이인들이 흑해 북쪽 해안으로 들어와 키메리아인을 쫒아내고 그 땅의 주인이 된다.
스키타이 민족의 특징을 잘 묘사한 인물은 헤로도토스다. 그의 저서인 『역사』에서 스키타이의 기원을 설명하고 있다.
헤로도토스는 세 가지 설을 제시하는데 그 중 스키타이인이 아시아 최초의 유목민이었으며, 아랄해 주변에 살던 마사게타이인에게 쫓겨나 키메리아인이 살던 현재의 땅으로 이주했다는 설을 가장 신뢰했다.
B.C 4세기 이란계 민족인 사르마타이인이 중앙아시아에서 스키타이의 동쪽 땅으로 이동해온 뒤 B.C 2세기 스키타이인들을 그 땅에서 몰아낸다.
사르마타이인은 A.D 3세기까지 번성했고 스키타이인과 신앙 및 풍속에서 공통점을 가졌다.
A.D 3세기 중반 ~ A.D 4세기 말 게르만계 고트족, A.D 4세기 후반 ~ A.D 6세기 중엽 훈족, A.D 6세기 중엽 아바르족, A.D 6세기 말 ~ A.D 7세기 중엽 불가르족 등의 민족이 잇달아 흑해 북쪽 해안의 땅을 차지했다.
6세기 중반 동로마의 유스티아누스 대제 시대에 케르소네소스(현재의 세바스토폴 근교)를 중심으로 비잔티움 문화가 번성하면서 주목을 받게 됐다.

다음으로 키예프 공국에 대한 이야기다. 키예프 공국은 전성기 유럽 최대의 판도를 과시했을 만큼 대국이었다.
키예프 공국의 군주는 '크냐지'라고 불렸는데 이는 영어의 king 에 해당되는 단어였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크냐지가 다스리는 국가로 한 단계 낮춰 공국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당시에는 '키예프 루스'가 아닌 '루스'로만 불렸지만 러시아가 루스에서 파생되어 국명과 혼동을 피하기 위해 '키예프를 수도로 삼는 루스'라는 뜻의 키예프 루스가 관례가 되었다.
이전까지 키예프 루스 공국의 역사는 러시아사 하에서 다루어졌다. 러시아의 논리는 키예프 공국이 멸망한 후, 우크라이나 땅은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영토로 분할이 되었고 나라 자체가 소멸했으므로 계승자가 없지만 모스크바 공국은 단절되지 않고 러시아 제국으로 이어졌기에 러시아가 키예프 루스 공국의 계승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15세기의 모스크바는 키예프 루스 공국 지배하의 비슬라브 부족의 연합체일 뿐이고 중앙집권제인 러시아 소련 체제와 키예프 루스 공국 체제는 전혀 달라서 별개의 국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키예프 루스 공국의 정치 사회 문화는 할리치나 볼린 공국으로 계승되었기 때문에 키예프 루스 공국의 계승자라고 주장한다.
슬라브인은 6세기 현재의 우크라이나 서부와 폴란드 동부에서 시작하여 7세기 초부터 사방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그들 중 동슬라브인이 키예프 루스를 구성한 사람들이며 현재의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의 선조라고 볼 수 있다.
8~11세기 스칸디나비아에서 인구 폭발이 일어나며 바이킹들이 바다를 건너 확산되기 시작했다.
동슬라브인은 바이킹을 '바랴그인'이라고 불렀다. 바랴그인은 계속 이동하여 드네프르강을 따라 흑해로 나와 콘스탄티노플에 이르는 바닷길을 확립했다.
동슬라브인 사회의 문헌상 최초 기록은 12세기 초 편찬된 『원초 연대기』의 키예프 도시의 기원에 대한 전설이다.
동슬라브인은 바랴그인에게 공물을 바치다 바랴그인을 내쫓고 자치를 시작했지만 내분이 일어나자 과거에 쫓아낸 루스(그 땅의 바랴그인이 자칭하는 말)에게 사신을 보내 땅을 통치해달라 요청했다. 이를 받아들인 루스 때문에 '루스'라는 나라 이름이 탄생했다.
키예프 루스 공국은 키예프 공이 아들들을 각지에 보내고 형제 상속, 부자 상속이 동시에 이루어져 대가 바뀔 때마다 싸움이 일어나는 문제점이 있었다. 이런 힘겨움을 뚫고 볼로디미르 성공과 야로슬라프 현공 시대에는 황금기였다.
1125년 볼로디미르 모노마흐 사후 1240년에 몽골이 키예프에 들어오기까지 1세기 동안 키예프 루스 공국의 힘은 서서히 약화된다.
할리치나-볼린 공국은 키예프 루스 공국의 서남부의 할리치나 공국과 볼린 공국이 병합하여 형성된 공국으로 우크라이나인들은 이를 '최초의 우크라이나 국가'로 평가한다.
1340년대에 볼린은 리투아니아에, 할리치나는 폴란드에 각각 병합된다.

14세기 중반 할리치나-볼린 공국의 멸망 후 17세기 중반이 될 때까지 약 300년 동안 우크라이나를 대표하는 정치 세력이 없었다. 대신 리투아니아와 폴란드가 각각 우크라이나를 지배했다.
이 시기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민족으로 분화되었고, 언어도 러시아어, 우크라이나어, 벨라루스어가 형성되었다.
리투아니아는 우크라이나의 볼린, 체르니히우, 키이우, 드니프르 등의 넓은 영역을 지배 하에 두었다. 1362년에는 강력함을 자랑하던 킵차크한국과 싸워 승리하기도 했다. 이후 과거의 키예프 루스 공국이 가진 절반 이상의 땅을 지배하게 된다.
폴란드는 13세기 신성 로마 제국에 패배하고 남쪽의 보헤미아, 모라비아에도 위협을 받고 있었기에 유일한 출구는 동방이었다. 14세기 중엽이 되면 할리치나 지방은 폴란드 지배 하에 놓인다.
리투아니아 전성기가 지나고 점차 폴란드 힘이 강성해지자 1569년 루블린 연합이 성립되면서 리투아니아가 폴란드의 수중에 들어간다.
폴란드는 기존 키예프 루스 공화국이 기독교였던 것과 달리 가톨릭 신자들이 많았고 문화적으로도 서로 달라 이질감이 컸다. 이 시기가 되면 귀족의 힘이 강해지고 왕권은 약해졌으며 농민이 농노화가 된다.
고대부터 우크라이나 땅에는 유대인이 많이 살았다. 게다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서 유대인을 우대하는 정책을 펼쳤기에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살기 좋은 환경이 형성되면서 유대인 인구가 급증했다.
그리고 이 시기 정교가 분열되고 키예프 루스의 정교와 달리 '우니아트'라는 그리스 정교와 가톨릭 절충안이 등장했다. 우니아트는 율리우스력을 사용하고 성직자 결혼도 인정했지만 로마 대주교에게 복종하는 모습을 보였다.
'우크라이나'라는 단어는 어디에서 왔을까. 러시아사를 바탕으로 한 학설 기준으로 우크라이나의 의미는 '변경지대'(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서 봤을 때 변경)이다. 현재 우크라이나에서는 '땅' 또는 '나라'를 의미한다 라고 주장한다. 우크라이나 어간에 해당하는 'krai'는 '가장자리' '지방' '나라'라는 의미가 있고 '우크라이나'가 문헌에 등장한 것은 12~13세기다. 『키예프 연대기』는 1187년 볼로디미르 공이 죽었을 때 '우크라이나는 그를 위해 슬퍼 탄식했다'고 기술했다. 『할리치나-볼린 연대기』는 1213년 '브레스트, 우프레브스크 등 모든 우크라이나를 재통일했다'고 기록했다. 이런 것을 볼 때 '우크라이나'는 '변경지대'보다는 '땅'이나 '나라'라는 의미의 보통 명사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

15세기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남부 스텝 초원지대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자치 무장 집단을 형성했는데 이들이 '코사크'이다.
우크라이나의 슬라브인에게 사용됐던 코사크라는 단어가 문헌상 최초로 등장한 것은 1492년이다. 키예프와 체르카시 사람들이 타타르 배를 약탈하여 크림의 칸이 리투아니아 대공에게 항의하자 대공이 우크라이나 코사크를 조사하겠다고 약속한 내용이 그것이다. 1493년 크림의 칸은 드네프르강 하구에 있는 크림한국의 오차키프 요새를 파괴한 체르카시의 대관과 부하를 '코사크'라고 불렀다.
좀더 큰 자유를 찾아 떠난 이들은 '시치'라 불리는 요새를 짓고 1530년이 되면 드네프르강 하류의 섬에 주요 시치가 만들어졌다. 이 중 자포로제는 우크라이나 코사크의 중심지가 되었다.(러시아 변경의 돈 코사크)
코사크 수가 증가하면서 군사력이 커지자 이들은 원정에 나서 여러 도시들을 습격했다. 코사크는 16세기 말 이후 폴란드 왕에게 복종하여 각지에 싸우며 정치적 지위를 높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왕에게 받는 대우와 영주에 대한 불만으로 종종 반란을 일으켰다. 회의를 통해 선출된 헤트만은 군사 독점권을 소유했지만 그만큼의 책임이 따랐다.(전투에서 패배하면 사형되기도 했음) 사하이다치니는 최초의 헤트만으로 알려져 있으며 우크라이나의 문화와 교육, 정교의 진흥에 힘썼다.
우크라이나사 최고 영웅으로 손꼽히는 보흐단 흐멜니츠키는 조직가이자 군사령관, 외교관으로서 우크라이나 역사에서 최초로 자신들의 국가를 완성했다. 헤트만 국가를 지키는데 자력만으로는 안되므로 외부의 힘을 빌려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폴란드와 대항하여 타타르-오스만튀르크-크림한국-몰다비아-트란실바니아 등 주변국과 동맹을 맺었다. 하지만 대부분 열매를 맺지 못하고 실패했다. 결정적으로 모스크바와 페레야슬라프 조약을 맺으며 평가가 엇갈리게 된다. 그는 10년 간 활약하였으나 우크라이나의 국민 시인인 타라스 셰브첸코는 흐멜니츠키가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에 팔았다고 비난했지만 역사상 헤트만 국가를 형성하여 후세 우크라이나 재건의 상징이 된 인물이라는 이중 평가를 내렸다. 우크라이나 독립 후 그의 초상은 5흐리브냐 지폐에 새겨졌다.
이반 마제파는 흐멜니츠키에 이은 강력한 지도자로 폴란드, 우안 우크라이나, 좌안 우크라이나, 모스크바 등 수장의 마음을 얻는데 성공할 정도로 정치적 생존 기술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헤트만에 올라 20여년간 자리를 유지했다. 마제파라는 인물의 생애 덕분인지 그에게서 수많은 작품이 나왔다. 바이런, 푸시킨, 빅토르 위고가 서정시를 썼고, 차이코프스키가 오페라를 작곡했으며, 프란츠 리스트도 관현악을 위한 교향시를 작곡했다.
최후의 헤트만인 키릴로 로주모프스키는 예카테리나 여제에 의해 퇴임당하고 대신 러시아의 백작이 되었으며 광대한 영지를 받는다. 아들 안드레이 라주모프스키는 러시아의 주오스트리아 대사를 역임하며 폴란드 분할 협상에 관여했고 1815년 나폴레옹 몰락 후 빈 회의에서 러시아 전권으로 활약했다. 그리고 그는 베토벤을 후원하기도 했다. 「라주모프스키 현악 사중주곡」과 「운명」 교향곡, 「전원」 교향곡이 그에게 헌정되었다.
1783년이 되면 코사크 연대가 러시아군으로 편입되면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제국의 한 지방으로 전락한다. 80년간 유지해온 헤트만 국가는 소멸한다.
1772년, 1793년, 1795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폴란드 분할이 이루어지면서 폴란드는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3국으로 완전히 분할된다. 이로써 우크라이나는 정치상 지도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폴란드 분할 후 1차 세계대전까지 약 120년 동안 우크라이나 영토의 약 80퍼센트는 러시아에 의해서, 나머지 20퍼센트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의해서 지배된다.
러시아 제국은 강력한 전제군주제이자 중앙집권제였고 오스트리아는 상대적으로 민족동화정책은 약했기에 내셔널리즘의 거점이 되었다. 크림전쟁(1853~1856)은 동유럽과 지중해에 진출하려던 러시아를 영국과 프랑스가 튀르크를 돕는 형태로 저지하려 하면서 벌어진 대규모 전쟁이었다. 톨스토이가 참전한 전쟁이었으며 나이팅게일이 활약한 전쟁이었다. 최종적으로 러시아가 패배하면서 러시아의 농노제는 폐지된다. 민족 시인 타라스 셰브첸코가 우크라이나어로 코브자르를 쓰면서 내셔널리즘을 고양하고 정당이 성립하는 등의 활동이 일어났지만 1863년 이후 우크라이나 민족에 대한 철저한 탄압이 벌어지면서 이 기세는 수그러든다. 하지만 19세기 말이 되면 우크라이나 민족 운동의 열기가 고조되면서 각종 결사 단체와 정당이 출현하기 시작한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하면서 우크라이나 민족 운동은 새 단계에 접어든다.
오스트리아에 있던 우크라이나인들은 대부분 우니아트인이었다. 프랑스 2월 혁명이 발발하면서 민주화와 민족 독립 시위가 증가하면서 오스트리아 재상 메테르니히가 해임되고 농노제가 폐지되었다.
최초의 우크라이나어 신문이 발행되었으며 우크라이나 독립과 통일을 표방하는 급진당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리비우 대학에는 우크라이나어 강좌가 처음으로 개설되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으로 러시아 제정이 붕괴되고 소련이 탄생했다. 구러시아 제국 하의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핀란드 발트 북유럽 국가들이 독립했고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하의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도 완전한 독립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어떤 국가보다 활발한 독립운동으로 독립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조건을 가졌지만 결과적으로 대부분 소련 또는 폴란드 지배 하에 들어가고 말았다.
1917년 2월 혁명으로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고 국회 중심의 임시 정부와 노동자 병사 중심의 소비에트의 이중 권력 상태가 되었다.
3월에 우크라이나 중앙 라다(회의, 평의회를 뜻하는 우크라이나어)가 결성되어 임시 정부에 자치를 요구했으나 임정은 이를 거부하였다. 10월 혁명이 발발했고 볼셰비키가 무력으로 임정을 제압하고 소비에트 정부를 수립하게 된다. 12월 소비에트 정부는 우크라이나 국민공화국 승인을 통고했으나 우크라이나 정부가 거부하여 볼셰비키가 힘으로 우크라이나 점령을 결정한다. 이 때문에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와 볼셰비키 간 전쟁이 벌어진다.
1918년 10월 오스트리아가 붕괴하면서 독립의 움직임이 활발해진 이후 11월 13일 서우크라이나 국민공화국 수립 선언을 했지만 이는 8개월 간의 단기간의 정부였다. 서우크라이나는 대외적인 지지를 얻지 못한 상태에서 폴란드와의 싸움을 지속했으나 역부족이었고 1919년 7월 동우크라이나로 후퇴하게 된다.
우크라이나 국민공화국과 서우크라이나 국민공화국이 합병하여 1919년 1월 우크라이나 국민공화국이 된다. 그러나 1919년 10월 티푸스 발생으로 우크라이나군의 70%가 괴멸되고 말았다. 프랑스는 볼셰비키 혁명을 저지하고 러시아 부활을 위해 러시아에 무력 간섭을 했으나 1919년 4월 볼셰비키가 들어오면서 소비에트와 폴란드 간 전쟁이 발발하였고 1920년 6월 페틀류라를 폴란드가 포기면서 리가 조약이 체결된다.

1차 세계대전 후 파리강화회의가 열렸고 베르사유 조약으로 소련, 폴란드,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분할 통치 결정이 이루어졌다.
1922년 12월에 소비에트 연방이 성립되었으나 공산당은 우크라이나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우크라이나화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1927년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연이은 5개년 계획과 농업 집단화로 농민들을 통제하면서 농민들이 도시로 이주하며 노동력이 부족되면서 대기근이 발생되었다. 1930년대 초 우크라이나 땅에서 스탈린 땅의 대대적 숙청이 감행되면서 30년대 중반이 되면 전체 37%에 달하는 우크라이나 공산당 당원이 숙청되고 30년대 말이 되면 공화국 자치는 완전히 사멸되고 전체화가 이루어진다.
서우크라이나는 폴란드 지배하에 들어갔는데 우크라이나 자치 조직을 결성하고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를 조직하는 등 활발한 활동이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이 발생하고 나치 독일은 우크라이나에서 85~90만의 유대인을 학살했다. 얄타회담으로 폴란드 국경이 획정되었고 국제 연합 결성 여부와 소련의 대일 참전이 결정되었다. 스탈린이 남사할린과 쿠릴 열도를 가져가는 것을 루스벨트가 승인하였고 종전 후 200 만명의 우크라이나인들이 귀국하였다. 다만 정치적 이유로 1만 명이 넘는 이들이 처형 당했고 35만 명이 중앙아시아, 극동 등지로 끌려갔다.
1985년 고르바초프가 실행한 글라스노스트, 페레스트로이카 개혁이 부메랑이 되어 소련은 해체되었고 우크라이나도 이 결과로 독립하게 되었다.
다만 우크라이나의 독립이 피를 흘리지 않고 평화롭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때론 무임승차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과연 우크라이나의 독립은 거저 얻어진 것인가. 그렇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 같다.
이들의 독립은 몇 세기에 걸쳐 문을 끊임없이 두드렸기에 얼마만큼의 시련과 고난이었을지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우리도 상대적으로 훨씬 짧은 기간 타국에 의한 지배를 받은 역사를 지녔지 않았나. 때문에 결코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이 책이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온전히 담아냈을까 하면 솔직히 평가가 어렵다.
우크라이나는 대부분 러시아사 하에서 다루어져 선입견 하에 쓰여진 역사였기에 단독의 우크라이나 역사에 대한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이 책에 대한 평가는 보류할 수 밖에 없다.
향후 더 많은 자료들이 쏟아져 평가할 수 있는 날을 기다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으로 책을 읽으며 내내 들었던 생각은 역시 우크라이나의 평화에 대한 것이었다.
더는 피를 흘리는 이들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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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3-06 21:5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보니 우크라이나 역사가 참 험난했군요~ 한 나라로 다시 일어선게 얼마되지도 않았는데 전쟁이라니 ㅜㅜ 더이상 피해가 없었으면 좋겠네요~!!

거리의화가 2022-03-07 08:24   좋아요 2 | URL
네 저도 이렇게 우크라이나 역사를 알게 된 것이 뭔가 부끄럽게 느껴지더라구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내가 외면하고 살았을지 몰랐을 것 같아서… 더불어 보이는 것을 함부로 재단하거나 하지 말아야겠단 생각도 했습니다. 전쟁이 하루 빨리 멈추었으면 하는 바람이 크네요ㅜㅠ

책읽는나무 2022-03-07 16: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덕분에 저도 우크라이나 역사를 대략적으로 알게 되었네요.ㅜㅜ
정말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다시 봐질정도로 힘든 역사를 안고 살아왔었군요.
강대국 사이에 끼어 고생하는 모습이 우리네 역사 같아 보이기도 하구요.
스키타이인 들어본 듯도 하구요. 아시아 최초 유목민이었다니?.....
암튼 전쟁이 빨리 끝나서 국민들이 가족들을 빨리 만났음 싶네요. 큰 피해가 없어야 할텐데요~

거리의화가 2022-03-07 17:02   좋아요 2 | URL
나무님 저도 마찬가지 입장이에요. 전쟁이 아니었다면 이 책을 주목하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우크라이나 땅의 환경이 곡창지대인데다 유럽의 길목에 위치하기 때문에 노른자 땅이였던 것 같아요. 주변에서 군침을 안 흘릴 수 없었겠죠. 오늘 기사에서도 푸틴이 민간인 공격을 하지 않겠다는 임시 협정을 어기고 폭격을 해서 사망하고 다쳤다는 걸 봤어요. 남편과 아내가 헤어지고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졌다는 것도 마음이 아픕니다. 국민들은 무슨 죄인지... 모쪼록 휴전이 빨리 되어야할텐데요.

mini74 2022-03-07 17: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크라이나 ㅠㅠ 우리처럼 이들도 한이 많은 민족이군요. 스탈린도 푸틴도 천하의 삐삐삐 입니다. ㅠㅠ 전쟁이 끝나야 할텐데. 다치고 피난가는 아이들 사진 보니 너무 화가 나더라고요.

거리의화가 2022-03-07 17:04   좋아요 2 | URL
네 한이 많을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저희도 알게 모르게 울분 같은 게 있잖아요. 사진이나 동영상 보는데 도저히 제대로 봐지지가 않더라구요. 정말 그들이 무슨 죄인지 모르겠습니다.
 
낯선 삼일운동 - 많은 인민을 이길 수 없다
정병욱 지음 / 역사비평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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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삼일운동 103주년이다.

기념하여 눈에 띈 도서인 이 책을 부랴부랴 읽었다.


기존 연구나 매체 활용에서는 삼일운동에 참여한 인물들 중 민족대표 33인을 비롯한 엘리트들에 주목된 면이 있다.

참여 인구로 따지면 67% 정도로 민중의 비율이 높음에도 엘리트에 주목을 한 건 상대적으로 이들은 이름이 알려져 있기에 남아 있는 자료가 많고 그들에 대한 평가도 양에 있어서 많아서일 것이다.

민중들의 자료는 지역사에서 간혹 다루어지지만 이마저도 모두가 다루어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사료로 이용되는 인터뷰나 구술도 100% 확신성을 갖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 때문에 언제나 오류 가능성을 생각하고 접근해야 함을 인지해야 한다.

그래도 최근 들어 삼일운동에서 민중을 주목한 연구가 늘어나는 것은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사건의 맥락이자 줄거리인 큰 그림을 그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에만 매몰되면 사람을 놓치게 될 수 있다.


책의 내용은 챕터별로 다른 이야기라 이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각 챕터별 중심 인물들이 생소할 수 있고(몇몇 인물 제외) 주변 관계 인물은 더더욱 생소할 수 있다.

물론 저자가 최대한 친절하게 풀어서 설명은 했지만 그럼에도 낮설어서 인물의 관계를 정리하고 상황을 그려가면서 보지 않으면 사건이 잘 안 들어올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책의 분량은 적었는데 읽으면서 정리하느라 시간이 더 걸렸다.

그리고 책에 삼일운동 DB의 출처들이 나오지만 더 상세한 내용을 원한다면 직접 DB에서 관련 내용을 찾아보고 사건에 대한 그림을 그려보는 것을 추천한다.


본문 내용 중 인상적이었던 것 몇 가지를 꼽아본다.


2019년 개봉작 영화 항거에는 여성 만세 시위자들이 등장한다.

유관순의 수인번호는 371로 등장하는데 이는 수인번호가 아니라 사진(문서)보존원판번호라고 말한다.

당시 삼일운동으로 검거된 많은 이들의 사진이 일제감시대상카드에 올라와 있는데 이를 비교해보고 검토한 결과이다.

조선감옥령시행규칙 18조(1912.3 제34호)에 따르면 입감자에게 번호를 부여하는데 번호표를 상의 옷깃이나 가슴에 부착한다고 되어 있다.

수인번호는 수인복에 부착된 번호, 보존번호는 사진 원판 뒷면에 쓰인 번호라고 보면 된다. 

그리고 임명애, 어윤희, 유관순 사진의 보존번호가 연속하는데 어윤희 수감사진이 4월 1일에 찍었다고 되어 있으나 해당 날짜에 유관순은 병천리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했으므로 같이 찍은 사진이 아니다. 따라서 후대에 보존번호를 부여하면서 여성참여자 일부의 보존번호를 모은 것으로 보인다.


황해도 수안군 사건의 중심인물인 홍석정이 있다.

1919년 3월 3일 낮 12시 한병익은 황해도 수안군 수안면 만세시위에 참여한 뒤 오후 4시경 출발하여 밤새 걸어 다음날 오전 5시쯤 곡산군 곡산면에 도착하여 오전 10시 시위에 참여했다.

두 곳의 직선거리는 약 27km인데 산길로는 90리쯤 된다. 

한병익이 그 정도 걸렸는데 54세인 홍석정(전 천도교 수안교구장)은 3월 2일 새벽 수안면을 출발하여 곡산면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고 돌아와서 3월 3일 오전 6시 수안면 만세시위에 참여했다.

당시 해주 지방법원 검사는 그 시간에 90리 되는 길을 왕복한다는 게 말이 안된다며 다른 사람일거라 의심했다.

홍석정은 하루 꼬박 180리 넘게 산길을 걸으면서 독립선언서를 전달했고, 길가는 이들에게 만세시위 참가를 역설했다.

당시 판결문에는 홍석정의 연락을 받고 시위에 참여했다는 인물이 많이 보인다.

홍석정이 홍길동이 아니고서야 이는 말이 되지 않으므로 연락을 받은 이들은 직접적이 아니라 간접적인 연락일 수 있을 것 같다고 저자는 말한다.

수안 만세시위 사건은 1919년 하반기 해주 지방법원에서 경성 고등법원으로 이관되었는데 이는 내란죄로 다루기 위해서였다.

만세시위 후 수안 천도교인은 분열로 쪼개지며 시련을 맞이한다.


수원군 장안면 우정면 만세시위. 현재는 화성시로 편입된 지역이다.

장안면 우정면 만세시위는 삼일운동을 대표하는 격렬한 시위로 그간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지역이다. 폭력시위의 면에서 자주 언급되곤 한다.

우리는 보통 삼일운동 시위를 비폭력 운동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은 사례가 많은데 이 시위가 대표적이다.

장안면 우정면 만세시위 주동세력은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하나는 지역유지 그룹이고, 다른 하나는 농촌의 하층민, 개간 노동자, 외지인 같은 농촌의 기층민중이었다.

전자는 조직을 통해 장안면 주민을 동원했고, 후자는 마을을 돌아다니며 주민과 동료를 모았다.

이렇게 위와 아래가 함께 만세시위를 하는 경우가 드문 것은 아니지만 장안면 우정면의 만세시위가 특별한 것은 기층민중이 주도권을 잡았고 이것이 시위의 방향을 결정했다는 것일 것이다.

시위 참가가 대세로 흘러갔지만 이 과정에서 동원을 해석해야 한다.

피의자 대부분이 협박에 못 이겨 나갔다는 진술을 했다고 한다. 이런 모습은 농촌에서 특히 많이 보였다고 하는데 이런 협박과 동원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저자는 주목했다.

강제는 사람들의 봉기에 대한 의욕을 돋우는 역할을 했다.

다만 이런 동원을 자주성이나 주체성 결여로 보는 것은 근대인의 편견이라고 말한다. 

강제에 매개된 공동체적 규제, 관계성은 민중이 움직이는 힘에 의거한다고 볼 수 있다.


본문의 내용만큼 보론을 실어둔 것이 인상적이었다.

삼일운동의 사료에 대한 비판, 그리고 황해도 수안 만세시위 사건에 대한 재구성, 삼일운동과 학력주의의 제도화.


삼일운동의 사료에 대한 비판은 다음과 같다.


삼일운동 100주년 기념으로 만들어진 온라인 데이터베이스인 삼일운동 DB를 기억할 것이다.

2019년은 삼일운동 100주년으로 온라인 DB 구성 뿐 아니라 관련한 전시 등도 많았고 많은 저서들도 출간되었다.

DB 작업은 많은 노력이 필요한 작업이다. 나도 당시 사이트를 확인하고 감동했던 기억이 있다.

삼일운동의 공식적인 온라인 DB가 생겼으니 이후에는 손쉽게 DB를 검색하여 1차 자료를 정리할 수 있다.

그런데 삼일운동 100주년 때 출간된 도서 중 여러 저서에서 사료를 사용한 것 중에 출처가 없거나 무분별적으로 수용한 것이 있음을 비판하였다.

이런 경우는 자주 있다. 

하지만 역사 연구자가 출처가 없는 사료를 그대로 가져다쓰는 경우 문제가 발생한다. 

연구자조차 검증을 하지 않고 무비판적으로 사료를 가져다 쓴다면 대부분의 역사책을 읽는 독자들이 검증을 거치지 않는다고 가정할 때 오류 발생 가능성을 낳는다.

문제는 이런 독자가 늘면 늘수록 전방위적으로 확산된다는 점이다.

저자는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수안면 만세시위에 대한 기존 연구와 저자의 시각의 차이가 커서 기존 연구에 대한 내용을 검토하고 저자의 시각에서 재구성한 사건을 담은 논문을 실었다.


삼일운동과 학력주의의 제도화는 삼일운동과 조선총독부의 대책, 엘리트와 민중의 대응을 담은 글로 삼일운동 전후의 맥락을 살펴보는 데 도움이 될 내용이다.


이제는 삼일운동도 어느덧 100년도 훌쩍 지난 일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꾸준히 기록을 찾아내고 발굴하지 않으면 점점 더 잊혀질 수 밖에 없다.

시간이 지나면 기록조차 사라질 수 있기에 1차 자료를 꾸준히 발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렇게 해당 자료를 다양한 시각으로 재조명하는 작업들이 역사를 공부하는 이들에게 새로운 자극을 줄 수 있기에 반갑고 좋은 일이라 여겨진다.

물론 평가는 독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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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3-04 19: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벌써 3.1.운동이 103년전이네요.다르게 보면 그렇게 오래된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듭니다. 알려지지 않은 민중에 대한 이야기여서 더 좋은거 같습니다~!

거리의화가 2022-03-04 20:01   좋아요 3 | URL
당시 사건을 직접 경험한 분들은 이제 거의 남아있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한 세기가 흘렀다는 것이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는 생각도 들구요. 누구나 다 아는 독립운동가들이 아니라 실질적인 운동의 주체자인 민중들을 다루어주어 좋았습니다.

책읽는나무 2022-03-04 20:1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읽고 있으니 정말 이분들이 안계셨더라면 우리의 독립이 제대로 이루어졌을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세계대전의 종결로 인해 거저 얻어진 게 아닌, 독립운동가들의 목숨의 대가이지 않을까?싶어요.
벌써 103주년이라니~~

거리의화가 2022-03-04 22:42   좋아요 4 | URL
저는 당시 사람이었다면 내가 어떻게 살았을까 종종 떠올리는데 그때마다 심정이 복잡하더라구요ㅠㅠ 21세기에도 버젓이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이 씁쓸한 현실 앞에서 내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서 달려들었을 선조들을 떠올려봅니다.

mini74 2022-03-05 21:3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삼일운동시 잡힌 분들 사진 보는데 너무 어리더라고요. 그 분들 위해서라도 친일청산 제대로 되었어야 했는데 말이죠 ㅠㅠ

거리의화가 2022-03-05 22:45   좋아요 1 | URL
네 친일청산이 제대로 되지 못한 것은 두고 두고 아쉬운 일이에요 이 때문에 현대사도 이 그늘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됐죠. 독립운동가와 친일파의 후손들의 삶도 여전히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게 안타깝습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신영복 옥중서간, 제3판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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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그려지는 이야기.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 스스로를 돌보는 생각과 실천. 학문에 대한 태도. 이론에서 나아가는 실천. 타인에 대한 이해와 배려. 스스로도 견디기 힘든 세월이었겠지만 옥바라지를 했을 가족들과의 오가는 편지는 특히나 뭉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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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3-01 19: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표지가 바뀌었군요. 저도 너무나 감명깊게 읽은 책입니다 ~ 100자평 넘 좋습니다 *^^*

거리의화가 2022-03-01 20:30   좋아요 1 | URL
네 1월에 알릴레오북스 유튜브 방송으로 새로 표지 바꿔서 나온 걸 알게 되었어요 안 가지고 있던 책이라 여차저차 구입했네요 읽고 나니 역시 좋은 책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