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 이야기 1 : 독립의 여명 1763~1770 - 혁명은 경제에서 시작된다 미국인 이야기 1
로버트 미들코프 지음, 이종인 옮김 / 사회평론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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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미들코프의 미국인 이야기 1권은 독립의 여명이 부제다.

이 책은 이야기체로 서술되어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듣는 기분으로 역사를 접할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인물에 대한 탁월한 묘사가 돋보였고 명사를 수식하는 미사여구가 재치 있게 느껴졌다.
그러나 딱딱한 문체의 역사서를 읽는 것에 익숙한 독자라면 오히려 그것이 군더더기로 느껴질 수 있을 것 같다.


인상적인 사건과 인물 위주로 소감을 정리하려 한다.


18세기 중반 영국은 북아메리카와 유럽, 아시아 등지에서 7년 전쟁을 치뤘다.
영국은 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했다.

윌리엄 피트는 영국 제10대 총리(1766~1768)였는데 북미 대륙에서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인물이다.

피트는 18세기의 경이적인 인물이었고, 음울한 정치가들과 몽매한 대중을 동시에 환호하게 만든 지도자였다.
특별한 호소력을 가진 그의 기질과 심성으로 강력하게 일을 완수했으며, 사회적 통념과 반대를 모두 무시하며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어냈다.
피트는 자신만의 독창성을 지닌 지도자였다.
그는 자신의 그런 성품대로 일을 완수했으며, 평범하고 뻔한 것을 경멸하면서 화려한 웅변으로 자신의 입장을 멋지게 설명했다.
사람들에게 정보를 주면서 영감까지 불어넣는 그의 웅변은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 P24

그는 상대를 사로잡는 법을 알고 있었고 자신감이 넘치는 인물이었던 것 같다.
전쟁의 주력군을 캐나다와 서부 지역에 투입시켰던 것이 성공하면서 7년 전쟁 성공의 기틀을 마련했다.
하지만 피트는 전쟁을 스페인까지 확대하기를 원했고 새로 즉위한 조지3세는 이를 불편하게 여겨 결국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 무렵 아메리카 식민지는 인구가 증가하고 상업의 발달, 무역의 활발한 전개로 경제가 성장하고 도시로의 인구 이동과 계층의 분화가 생겨났다.
도시에서는 빈민층이 생기고 농촌에서는 대지주가 등장했다.


종교의 분화도 있었다. 일명 대각성 운동이다.

식민지에서는 교회를 설립하는 데 평신도가 처음부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목사들이 바다를 건너와 유럽에서 온 이민자들을 훈련시키기는 했지만 평신도는 교회의 주도권을 그들에게 넘겨주지 않았다.
이런 평신도의 주도적 역할과, 여러 방식이 식민지 사회의 종교에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중부 식민지나 남부 식민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자율권을 누린 뉴잉글랜드의 회중교회에서도, 교회 주변 사회가 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 P104

대각성 운동은 사회 유동성, 경제성장, 인구 증가 등과 함께 회중교회 민주주의를 부양한 원천이었다.
종교의 부흥에 적극적인 목사들이 신자들에게 매달리면서 공동체 내에서 그들의 권위는 필연적으로 줄어들었다.
권위가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 P106

경제 성장과 인구 증가는 기성 교회 제도의 권위를 무너트렸다.
개인적 성령 체험과 새로운 탄생이 진정한 종교를 의미한다는 대각성 운동을 통해 당대 사람들은 청교도주의 프로테스탄티즘을 떠올리게 된다.
도덕과 올바른 행동, 공동체 권리를 강조하는 사회 윤리와 개인주의의 가치관이 그들을 자연스레 이끌었다.


영국 내각은 조지 그렌빌이 총리에 오르며 인지세법 등 식민지 과세 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조지 그렌빌은 영국의 제8대 총리(1763~1765)로 뷰트 총리에 이어 내각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그는 다른 정치가들보다 더 날카롭고 야망이 컸지만, 전통적인 영국 정치가였다.
그는 정치적 연줄이 풍부했는데 형인 템플 백작 리처드는 수년 동안 영국 정계의 거물이었다.
두 형제는 번창하는 영국 정치 가문에서도 독보적인 대표 주자였고, 이 가문의 힘은 30년 사이에 몇 개의 카운티에서 의회 전체로까지 확대됐다. - P118

1763년 영국의 부채 규모는 1억 2260만 3336파운드로 엄청난 금액이었다.
원금에 대한 이자만 매년 440만 9797파운드나 되었다. 부채에 대한 이자 처리는 내각을 힘들게 했다.
게다가 그렌빌이 취임했을 때 영국 무역마저 위축되어 있어 영국인에게 세수를 더 높이 거두는 것은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그렌빌 내각은 13개 아메리카 식민지에 당밀세를 적용하려고 시도한다.

그렌빌은 재무부 관리들의 조언을 바탕으로 당밀에 과세하면 세수를 올릴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그렌빌은 당밀법을 의회에서 통과시키기 전 세관 업무를 강화하기 위해 또 다른 조치를 취했다.
1763년 7월 관세청의 조언을 받아서 관세 징수관들에게 모두 현지에 부임하여 징수 업무를 수행하든지 아니면 사임하라고 지시했다. - P133

설탕법은 외국 당밀에 대한 관세를 갤런당 3펜스로 낮춘 것 이상의 일을 했다.
이 법은 무역을 규제하고 세수를 올리기 위해 다른 관세들도 부과했다.
또한 오로지 영국으로만 선적할 수 있는 물품들을 지정했는데, 특히 그중 목재는 식민지 무역에서 가장 귀중한 품목들 중 하나였다. - P134

1760년 후반부터 경제 불황이 시작되어 경기가 체감되자 아메리카인들은 불황의 원인을 설탕법과 연관지어 생각하게 된다.
게다가 식민지로 보내진 세금 징수관들은 무역 관세를 징수하겠다 압박했으니 이는 아메리카인들을 분노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는 아메리카 영국 세관 곳곳에서 충돌을 일어나게 만들고 반대 운동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그렌빌 내각은 멈추거나 후퇴하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간다. 인지세 요청이다.

1765년 2월 영국 의회가 소집되기 직전, 절망적 상태에 빠진 식민지의 대리인들은 동료 네 명을 보내 마지막으로 그렌빌을 만나게 했다.
전기 실험으로 명성을 얻었고 세상사에 밝으며 약간 냉소적인 벤저민 프랭클린, 아메리카에서 금방 건너온 강인하면서도 철저하게 보수적인 자레드 잉거솔,
영국 의회 의원이면서 코네티컷 매사추세츠 펜실베이니아의 대리인인 리처드 잭슨, 역시 의회 의원이고 사우스캐롤라이나 대리인이며 예리하고 총명한 찰스 가스 등이었다.
그랜빌은 회담 초반부에 아메리카인에게 불안감을 안겨준 것을 후회한다고 말하면서도, 그들이 국방비의 일부를 지불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며 의회를 통해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식이라고 말했다. - P156

아메리카인(자유의 아들들)은 여기에 굴복하지 않고 폭동을 일으키기로 결정한다.

소수의 사람들은 매사추세츠 인지 분배관으로 임명된 앤드루 올리버에게 폭력을 행사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을 로열 나인이라 불렀는데, 나중에 자유의 아들들로 명칭을 변경했다.
이들은 장인과 가게 주인 등으로 구성되었고, 존 길과 함께 《보스턴 가제트》를 발간했던 인쇄공 벤저민 이데스도 일원이었다.
로열 나인은 하노버 광장에 있는 체이스와 스피크먼 증류소에서 자주 만났고, 거기에서 8월 14일의 폭동을 계획한 듯했다. - P181

이들은 '영국의 어리석음'이 '미국의 파멸'을 가져온다는 구호를 내걸고 세관 관리의 집들을 파괴하며 인지세법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
보스턴 이외에도 각지에서 인지세법에 대한 반대 논쟁이 벌어지고 폭력 저항이 일어난다. 결국 영국 의회는 1766년 3월 18일 법안을 철회한다.


인지세법은 폐지되었으나 영국인들은 여전히 아메리카에 과세하려는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윌리엄 피트가 또 등장한다. 그는 정부 수반이 되자 귀족으로 신분이 상승하여 채텀 백작 호칭을 수여받는다.

채텀이 구성한 내각은 능력은 훌륭하지만 기질이나 야망이 서로 다른 사람들로 채워졌다. - P285

채텀 내각에 참여한 인물 중 찰스 톤젠드가 있다.

톤젠드는 괴팍하고 변덕스러운 사람으로 알려졌지만, 아메리카의 문제에 대해서는 하나의 소신을 일관되게 유지했다.
아메리카에 나가 있는 영국 관리는 그곳 인민의 통제를 받아서는 안 되고 독자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 P287

톤젠드는 토지세를 낮춘 대신에 다른 곳에서 추가로 세수를 확보해야 했는데 이를 아메리카에서 거두어들이기로 한다.
이에 따라 아메리카 관세법, 세입법, 정지법을 추진한다.

첫째, 숙영법을 준수하기로 동의할 때까지 뉴욕 식민지 의회의 기능을 정지시켜야 한다.
둘째, 납, 유리, 종이, 화가의 물감, 차 등의 품목이 식민지에 수입될 때는 관세를 납부해야 한다.
셋째, 각 식민지에 본부를 둔 아메리카 관세 위원회를 설립해야 한다.

이 제안은 거의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 P293

이 세 가지 법은 식민지에 대한 영국 의회의 묵은 태도를 보여준다.
아메리카인은 영국 의회에 철저히 종속적이어서 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톤젠드가 추진한 법에 식민지인들은 자유 침해를 주장하며 들고 일어났고 시작은 보스턴이었다.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새뮤얼 애덤스다.
애덤스는 시청 하급직 자리에서 일하다 세금 징수관으로 일했다고 한다.
정치 단체인 코커스 클럽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장인, 상인, 직인, 변호사, 의사 등으로 구성된 이 곳은 시청회의에 영향력을 행사할 목적으로 결성된 곳이었다.
이곳에 새뮤얼 애덤스가 속해 있었다. 코커스 클럽은 인지세법 위기 때 자유의 아들들로 활동했고, 톤젠드 법으로 저항 운동에 앞장서게 된다.

새뮤얼 애덤스는 '데테르미나투스'라는 필명으로 1768년 여름 많은 글을 썼다.
그는 사람들이 분노를 느끼는 이유를 이렇게 요약했다.
나는 맹세하거니와 총독 각하와 마찬가지로 '폭동, 소요, 불법 집회'의 친구가 아니다.
그러나 인민이 억압당하고 그들의 권리가 침해되며 그들의 재산이 침탈되고 그들의 머리 위에 감독자가 배치될 때, 해군력이 눈앞에서 불법적인 행위를 저지를 때,
그리고 그들이 날마다 군부대의 주둔으로 위협을 당하고 의회가 해산될 때,
그리하여 남아 있는 정부라는 것이 밀실 회의처럼 은밀하고 고위 공부원과 하급자들이 주위에서 우글거리고 연금 수령자들이 무례하게 등장할 때,
이럴 때 인민은 불만족을 느끼는데, 결코 그들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 P329

애덤스는 대중의 불안과 우려를 한 편의 글로 잘 표현했다.
대중의 열망을 진작시키기 위해 언론에는 이와 같은 지속적인 규탄의 글이 올라왔다.

보스턴에 영국군이 파견되었고 이는 아메리카인의 불만을 더 키우게 되었다.
군대 주둔을 위한 숙영 장소 등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힐즈버러 식민지 장관의 태도는 아메리카인들을 더 분노하게 만들었다.

이는 영국 상품의 수입을 거부하자는 운동으로 확산된다.

수입 거부 운동의 전략들은 다양한 집단이 협조해서 가능했다.
여성들은 옷감을 직접 짜거나 가내 생산에 몰두했고, 학생들은 수입 와인이나 차를 마시지 않았다.
온갖 종류의 장인들과 직인들은 헌법적 원칙을 옹호하는 한편 새로운 시장을 확보하려 했고, 상인들은 자신들이 납부하는 세금에 대해 발언권을 얻기를 바랐다. - P362

톤젠드 법은 인지세 법보다 더 후폭풍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그 폭퐁 기간이 더 길었고 의견 불일치로 논쟁이 많았으며 많은 이들이 참여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극대화된 사건이 보스턴 학살이었다.
보스턴 부두 노동자들과 영국 주둔군 사이 유혈 사태로 번진 사건이다.

전투 대형의 끝에 서 있던 사병 휴 몽고메리에게 얼음덩어리가 날아와 얼굴을 때리자 그는 그 타격으로 쓰러졌거나 혹은 뒤로 움찔 물러나다가 미끄러운 바닥에 넘어졌다.
그런데 그가 다시 일어서더니 그만 그대로 총을 발사해 버렸다. 이 최초의 총성 직후 짧은 정적이 흘렀고, 곧 나머지 병사들이 방아쇠를 당기기 시작했다.
이 불규칙한 총격은 열한 명을 맞추었다.
세 명이 즉사했고 한 명은 몇 시간 뒤에 사망했으며 다섯 번째 사람은 며칠 뒤에 사망했다. 여섯 명의 부상자는 목숨을 건졌다.
그 뒤 24시간 동안 공공질서는 완전히 무너진 것 같았다.
적어도 1000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군중이 총격 직후에 사방으로 달아났다.
분노한 군중은 프레스턴, 초병 소대, 영국군에게 복수를 하려 했다.
허친슨은 부대에게 도시에서 철수하라고 명령하고 싶지 않았으나 몇 시간 더 관찰하고 다음 날 도시의 여론을 살펴본 뒤 철수를 명령했다. - P393


학살은 영국의 권력이 아메리카에서 무슨 일을 행하는지 의문을 불러일으킨 계기가 되었다.
영국과 아메리카의 권력의 기울기가 명징하게 드러난 사건이라고 볼 수 있겠다.


영국과 아메리카의 갈등은 경제적 이유에서 시작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먹고 사는 문제는 중요하고 사람을 폭발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
2권에서는 영국군과 아메리카 연합군 간의 전쟁의 서막이 시작된다.


읽어보니 이 책은 이야기체라 한 번에 몰아서 읽는 것이 더 좋겠다 판단된다.
끊어 읽으면 흐름이 중단되어 재미가 덜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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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3-21 00: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드디어 1권 완독! 추카!추카!ㅎㅎ 2권은 본격적으로 전쟁이 터져서 넓혀지는 전선에 정신이 ㅎㅎ없지만 3권은 폭풍 완독하고 재독하면서 밑줄 왕창 치게 됩니다. 4권 5권 6권 어서 빨리 나와야 하는뎅 ^ㅅ^

거리의화가 2022-03-21 08:32   좋아요 1 | URL
2권 읽으면서 어질어질 왜 이리 얽힌 인물과 전투가 많은지. 완독은 했는데 주중에 리뷰 적을 시간이 없을 것 같아요. 3권 더 재밌을 것 같아 기대중입니다!ㅎㅎ 다 읽고 스콧님 리뷰 읽으면 책 내용 정리될 것 같습니다^^*
 
[eBook]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21 - 미조의 시대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이서수 외 지음 / 생각정거장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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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는 참 많은 문학상이 있다.
몇년전부터 꾸준히 나오는 젊은작가상 을 포함해
대작가의 타이틀을 단 문학상도 다수 존재한다.
젊은작가상 수상작의 경우 매년 단행본으로 나올 때 읽어본 적이 몇 번 있다.
작년은 건너뛰었던 것 같고^^;
그래도 이런 단행본의 장점은 대부분 단편이라 부담이 없고
이야기가 제각각이기 때문에 몰아서 읽거나 나눠서 읽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내겐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이 처음이다.


이서수의 《미조의 시대》
이렇게 새로운 작가를 알게된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2014년 등단하여 6년 정도 공백기를 거쳐 첫 소설집을 냈다고 한다.
오늘 신문을 보니 얼마 전에 또 하나의 소설집이 나왔다.
작가의 글을 보니 소설이 아닌 현실을 잘 담고 있어서 쓴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시선이 차갑지 않아서 마음에 들었다.

5천만원으로 전셋집을 찾아다니는 모녀. 우울증을 겪는 엄마. 집을 나간 뒤 알바를 전전하는 오빠. 잦은 이직과 퇴사로 취업문을 자주 두드려야 하는 나.
성인 웹툰 보조로 원형탈모증까지 겪게 된 수영.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시고 오빠라곤 있지만 집을 나가버려서
사실상 가장은 나(미조) 이다.
미조는 경영 악화 등으로 회사를 이직해야 해서 본의 아니게 취업문을 여러 번 두드리지만 그때마다 돌아오는 건 면접관의 싸늘한 질문 뿐이다.

우울증을 겪는 엄마에게 시를 쓰라고 권했고 그런 시를 딸에게 읽어줄 때만큼은 엄마는 시인이자 연극배우가 된다.
엄마는 미조에게 버팀목이자 부담스러운 존재이기도 하다.

어쩌면 나는 엄마에 대한 몰이해의 장벽에 시를 세우고 있는건지도 모른다.
첫째 딸은 나이지만 둘째 딸은 시인 것이고, 그렇게 존재하지도 않는 둘째 딸에게 내 역할의 일부를 떠넘기고 있는 건지도,
엄마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이럴 줄 알았으면 딸 하나 더 낳을걸 그랬다는 후회를 시로 해결해보라고 등 떠미는 건지도. - P18

IT 회사에서 일한다고 말하는 수영은 회사 오너의 요구에 따라 성인 웹툰을 그리고 있다.
점점 더 가학적인 말도 안되는 스토리와 그림을 그리라는 요구에 원형탈모증까지 겪어가며 꾸역꾸역 일을 해나간다.
그런 수영은 시대의 요구라며 다 그런 거라며 자위하고

나는 저 여자처럼 시대가 요구하는 걸 만들고 있는 거야. 시대가 가발을 만들어야 돈을 주겠다고 하면 가발을 만드는 거고, 시대가 성인 웹툰을 만들어야 돈을 주겠다고 하면 그걸 만드는 거야. 그렇게 단순한 거야. 마찬가지인 거야. - P30
미조야 너 그거 아니? 인간을 육체적으로 학살하는 것은 시간이지만, 정신적으로 학살하는 것은 시대야. - P31

오빠는 남보다 못한 존재이다.
전셋집 문제로 전화를 했더니 전국 맛집 탐방을 하고 공장 건물을 사진 찍는 일로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미조는 수영이 힘들게 돈을 벌고 있음을 알기 때문에 더욱 화가 났을 것이다.

안에 들어가 본 적 있어?
없는데?
그냥 구경만 하려고 간다는 거야?
충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왜?
왜라니. 멋지니까.
이런 공단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나 좋아하라고. 그런 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힘들 거 아니야.
오빠보다 훨씬 힘들게 일할 거 아니야. 멋지다니. 그냥 멋져서 구경만 하고 온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오빠는 그런 말도 못 들어봤어? 그 쇳물 쓰지 마라. - P35

5천만원으로 서울 안에서 전세 구하기는 애시당초 무리였는지 모른다.
부동산에 가서 여러 집을 구하기는 하지만 사진과는 다르게 실상은 집들은 과대포장되었다.
볕도 잘 안드는 어두컴컴한 반지하. 남의 발이 보이는 그런 집이었다.


그들의 시대는 어떻게 흘러갈까?
미조와 엄마는 집을 어떻게든 구할 것이고, 미조는 일기를 쓰고 엄마는 시를 쓰고, 수영은 산책을 할 것이다.
우리는 동시에 문장을 쓰고, 언니는 아마도 걷고 있을 것이다.
내일은 멀고, 우리의 집은 더 멀고, 민들레 꽃씨가 날아와 우리 머리 위에 내려앉는 꿈은 가까운 그런 밤이었다. - P40

그들이 살고 있는 시대는 내가 살고 있는 시대이기도 하다.
조금 더 그들에게 안온한 볕이 드는 세상이길 소망했다.


《미조의 시대》 뿐 아니라 최진영 작가의 《차고 뜨거운》 도 좋았다.
시대마다 각기 달라왔던 여성들의 모습을 한 가정의 모습을 통해 그려볼 수가 있다.
임신과 출산, 육아.
엄마는 엄마의 시대를 살았고 나는 나의 시대를 살고 싶은데, 그럼에도 여전히 세상은 여성을 속박하고 억압하는 것들이 많다.
직장을 다니며 아이를 키운다는 게 쉬운 것이 아닌데 엄마는 예전 자기가 키웠던 방식을 고집하는 것처럼.
가부장제는 여전히 여성들을 곤란하게 한다.
그러니 연대라는 서사가 머릿 속에서 읽는 내내 떠나지 않았다.

은희경 작가의 소설은 오랫만이었다.
중견 작가의 글을 수상작에서 보는 것도 어쩌면 생경할 수 있겠다^^;

이 외에도 수상작들이 현실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전체적으로 잘 읽혔다.
장애인, 동성의 사랑 등 한 번쯤 고민해볼 일이 담긴 주제들이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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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3-18 10: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은희경 작가의 새의 선물 읽고 정말 좋아했던 기억이 납니다 작가님 작품 오랜만에 보니 반갑네요.

거리의화가 2022-03-18 10:07   좋아요 1 | URL
네^^ 저도 은희경 작가 작품을 아주 오랫만에 읽었네요. 반갑기도 하고 시간이 참 많이 흘렀다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필력은 여전하신듯요

그레이스 2022-03-18 13: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러네요. 은희경 작가 반갑기도 하고 이 리스트에서 보는게 어색하기도 하네요^^
저도 <새의선물> 좋았어요!

거리의화가 2022-03-18 13:39   좋아요 2 | URL
그쵸. 저도 수상작품에서 은작가님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새의선물 좋았다고 하시니 궁금해지네요^^

페넬로페 2022-03-18 13:2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전에는 문학상에 관심도 많고 자주 챙겨 읽었는데 요즘은 잘 보지 않아요.
그래서 한국 작가들의 이름이 생소한 경우가 많아요. 관심 갖고 읽어야겠습니다^^

거리의화가 2022-03-18 13:41   좋아요 4 | URL
요즘 작가들 중 박상영, 김초엽, 천선란 등 아주 이름난 작가 아니면 사실 저도 잘 몰랐던 것 같아요. 그만큼 관심을 덜 가지고 있었던 것 같고. 저도 소설을 많이 읽는 편이 아니지만 이런 단편들을 읽으면 당시의 흐름도 알 수 있고 필진들도 얻어가는 맛도 있고 그런 것 같습니다^^
 
대한계년사 9
소명출판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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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부터 1910년까지의 3년 간의 역사를 다뤘다.

그 어떤 이야기보다 고통스럽고 힘겨운 스토리였다.
아는 내용인데도 마주 대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1. 전명운과 장인환의 미국인 스티븐스 암살

정부 고문관 스티븐스가 휴가로 제 나라에 3월 21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지역 신문기자와 인터뷰했다.
인터뷰 기사가 실린 뒤 샌프란시스코의 우리나라 인민들은 분노하지 않은 이들이 없었다. 3월 22일 샌프란시스코 공립관에서 공동회가 열렸고 대표 최유섭 문양목 정재관 이학현 등 네 명을 보내 스티븐스를 방문토록 했다. 네 사람은 스티븐스에게 우리나라 정세를 묻고 신문 기사에 대해 따져 물었으나 스티븐스는 잘못을 바로잡을 게 없다 말했다. 네 사람은 화를 참지 못하고 스티븐스를 폭행했으나 주변 이들이 말려 겨우 진정하고 사태 수습 후 돌아갔다.
3월 23일 스티븐스가 워싱턴으로 가기 위해 오클랜드 정거장에 도착했을 때 전명운과 장인환이 세 발의 총을 쏘았다. 스티븐스는 넘어져 병원으로 실려갔으나 사망하고 장인환은 전명운이 쏜 총에 어깨에 부상을 입었다. 12월 23일 두 사람의 판결은 장인환 25년 징역, 전명운 95개월 징역에 처해졌다. 애국심에서 한 행동이 인정되어 정상 참작된 것이다.

스티븐스는 말했다.

"한국에는 충신 이완용이 있으며 또 이토 히로부미 통감도 있으니 한국과 동양의 행복입니다. 내가 한국의 형편을 보건대, 태황제의 허물이 너무 많았습니다. 고집 센 무리들은 백성의 재산을 도둑질했으며, 인민은 어리석어 독립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니 일본이 빼앗아 가지지 않았더라도 일찍이 러시아가 강제로 합쳤을 것입니다. 나는 일본의 정책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 - P24


2.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1909년 10월 26일 러시아 대장 대신은 극동지역을 시찰하기 위해 하얼빈에 왔다. 이토 히로부미는 그와 만나 만주의 일을 논의하기 위해 기차를 타고 하얼빈에 도착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걸어서 각국의 외교관들, 인민들 앞으로 와서, 악수를 하고 일본인들이 늘어서 있는 곳으로 돌아섰다. 갑자기 러시아 군대가 있는 쪽에서 총탄이 발사됐다. 이토 히로부미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사망했다. 안중근은 체포되었다.
11월 3일 안중근 및 이 사건에 관련된 8명이 여순에 도착했다. 한 대의 마차에 나누어 싣고 시가지를 거치지 않은 채 산길을 돌아 곧바로 여순의 감옥서로 향했다.
1910년 3월 26일 안중근은 사형에 처해졌다. 그는 사형장에서 동양의 평화에 있는 힘을 다하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안중근의 두 동생은 그 시신을 귀국시켜 그의 고향에 장사지내게 해달라고 간청했으나 일본인이 허락하지 않아 여순의 공동묘지에 장사지냈다. 

여러 사람들은 아내나 자식 일에 이르게 되면 슬퍼하고 눈물 흘리며 고향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 유독 안중근만은, 나라를 걱정하는 뜻을 가진 사람으로서 아내나 자식은 생각하지 않으며, 암살 사건은 달리 관계된 사람은 없고 오직 자기 한 사람의 뜻이었다고 했다. - P53

"이토 히로부미의 죄악은 가득찬데, 오히려 또 간사하고 교활한 수단으로 '일본의 보호정책에 한국의 인민들이 기쁜 마음으로 따른다'며 각국에 발표하여 세계를 속여넘겼다. 이제야 한국의 뜻 있는 사람들이 이토 히로부미의 잔인한 행위와 한국인들의 복종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널리 드러내어 알리기 위해 많은 수가 외국으로 나아갔다." - P130

"나는 사천 년의 우리 조국을 위하여 이천만의 우리 동포를 위하여 동양 전체의 평화를 위하여, 우리 백성과 나라의 권리를 짓밟고 우리 동양 평화를 어지럽게 하는 간악한 도적을 죽이는 하나의 거사, 이것이 나의 목적이다. 이와 같이 바르고 옳으니, 나는 국민의 커다란 의무로서 살신성인하려고 한 것이다." - P136


3. 이재명 등의 이완용 암살 시도

1909년 12월 22일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이 벨기에국 황제 레오폴드 2세 추도회 참석 후 돌아가기 위해 나섰다. 이재명이 길 옆에서 나와 단도를 휘두르며 인력거 앞으로 달려들었다. 인력거꾼을 찌르니 그 자리에서 바로 죽었다. 수레가 뒤집히고 이완용이 허리와 어깨가 찔리자 순사들이 이재명에 맞서며 상처를 입혀 이재명은 결국 붙잡혔다.
1910년 5월 13일 이재명 등에 대한 공판이 열렸다. 방청인들이 1천여 명이었는데, 방청권을 얻은 사람은 1백 여명을 넘지 않았다. 변호사 안병찬, 이면우, 오사키 유노쇼, 이와타 센소, 기오가 줄지어 앉았다. 한국과 일본의 신문기자 수십 명도 자리했다. 독일 통신사의 사원 보리안(정확한 이름이 확인되지 않는다)도 있었다. 이재명의 아내 오인성과 백 소사 등 부인 다섯이 있었다. 사법청 관리 10여 명과 독일의 총영사도 자리했다.
최종 선고로 이재명은 사형, 김정익 김병록 이동수 조명호는 징역 15년, 오복원 전태선은 징역 10년, 김용문 박태현은 징역 7년, 이응삼 김병현 김이걸 이학필은 징역 5년에 처해졌다.

"이완용이 죽어 마땅한 죄는 하늘과 땅에 가득하여, 낱낱이 지적할 겨를도 없다. 5조약의 이전과 7조약 이후의 드러나지 않은 죄는 일일이 기억할 수도 없으므로 이쯤에서 그만두겠다." - P218

"이재명이 세상에 있을 때에는 한 사람의 이재명이지만, 죽은 뒤에는 수천 수백의 이재명으로 바뀌어져 다시 살아나기 때문이다. 다만 여러분들에게 간절히 바라는 것은, 빨리 통감을 없애버리고 당장 5조약과 7조약을 폐기하며, 그밖에 옮겨지거나 빼앗긴 모든 우리 나라의 권리나 물품을 일일이 돌려 받아, 뒷날의 두려워할 만한 일을 벗어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 P224


국민들에게는 그 어떤 시도들보다 통쾌한 소식이었겠지만 이들이 암살 또는 기도 이후 법정에서 하는 이야기와 암살 배경 스토리는 감정의 동요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그리고 변호를 맡은 안병찬 선생께 감사하는 마음이 컸다. 변호인으로써 최선의 변론을 하는 모습은 정말 뭉클했다. 안병찬 선생은 안중근, 이재명 재판에 변호를 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안중근 의사는 일본인이 아니면 변호 자체가 거부되어서 달려갔음에도 변호를 할 수 없어 무척 슬퍼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재명 변호는 진행은 되었으나 1심의 결과 그대로 사형이 내려졌으니 마음이 너무 아프셨을 것이다.


4. 일진회의 (끊임없는) 한일합방 상소

전 일진회 부회장 홍긍섭이 이토 히로부미 장례식에 참석했을 때, 일진회 총재 송병준과 한일합방의 문제에 대해 은밀히 논의했다. 귀국해서 일진회 회장 이용구와 이 일에 대해 은밀히 논의했다. 당시 한국과 일본이 연합한다는 ‘한일연방’의 이야기와 한국과 일본이 한 나라로 합친다는 ‘한일합방’의 이야기, 일진회 회원들이 화계사에 모여 ‘합방선언서’를 기초했다는 이야기 등이 신문 지상에 오르내리며 인심이 떠들썩했다.
1909년 12월 2일 밤 이용구는 일진회 본부 앞에서 총회를 열었다. 참석한 회원은 수백 명이었다. 한 회원에게 성명서를 낭독시키게 한 뒤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발표했다.(이때 여러 회원은 갑자기 이 말을 듣고 까닭을 알지 못하여 대답하지 못했다. 이용구는 회원들이 말하지 않는 것을 인정한다고 생각해 만장일치 가결이라 했다.) 우편으로 성명서를 내각과 부 원 청 및 13도 관찰사와 군수, 서울과 지방의 각 사회단체, 학교와 신사들에게 발송했다.
12월 3일 밤 대회에서 한일합방의 문제를 결의하여 황제에게 상소했다. 또 한 통의 상소를 통감 소네 아라스케에게 보내 일본 황제에게 아뢰어 달라고 부탁했다. 또 이완용과 소네 아라스케에게도 편지를 올렸다.

일진회는 1904년 8월 송병준이 일본군을 배경으로 유신회가 조직되었다가 일진회로 개칭된 후 9월에 동학 잔존 세력이던 이용구의 진보회를 흡수하여 최종 통합된 조직이다.
따라서 천도교 세력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상소로 인하여 일진회 회원 중 많은 이들이 탈퇴하고 떨어져 나가는 상황이 발생되었다. 손병희, 오세창, 권동진 등도 이 때 일진회와 결별하게 된다. (손병희 등이 일진회에 몸담았다는 것이 사실 그들의 인생의 오점처럼 느껴지는 부분이다. 물론 이후 그들은 모두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나는 이전부터 일진회라는 세력 자체의 기원과 이후 조직이 전개되는 과정이 매끄럽고 깔끔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물론 이 때의 시대적 상황이 그렇기도 했고 조직이 여러 번 변화를 겪었던 과정이 있지만 그럼에도 껄끄럽고 찜찜한 구석이 많다.
하지만 어쨌든 한일합방 청원 상소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잘못이다.

같은 민족이면서 마치 일본인의 입장 같은 발언을 일삼는 그들을 보라.

동등한 정치적 권리를 획득하는 것을 법률에서 '정치적으로 나라를 합친다'고 합니다.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합병'은 나라의 영토를 큰 나라에 딸려 붙이는 것이라느니 갖가지 다른 잘못된 말로 선동하면서, 인심을 의혹시키고 나라의 방침을 어지럽게 하여 갈수록 헛갈리게 합니다. 앞길을 아득하게 하는 어리석은 무리들은 일일이 거론할 필요가 없습니다. 노련한 정치가와 의분에 찬 뜻 있는 선비들은 이 일에 대해, 일본의 한국에 대한 정책이 이를 너그럽게 인정할지를 알지 못하여 애써 속을 태웁니다. 일본의 황실과 정부의 여론이 이를 너그럽게 인정하는 것은 우리 이천만 국민 모든 사람이 진실로 호소하고 요청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 P68

근대 세계의 대세가 크게 바뀌고 국제 경쟁이 더욱더 격심해져 이긴 자는 흥하고 패한 자는 망하는데 이것은 진화의 법칙으로 보아 당연한 것입니다. 인도 미얀마 자바 필리핀이 멸망한 것이나 베트남 타이가 거꾸러진 것, 중국이 쇠퇴해진 것이 다 여기에서 말미암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 P80


이들의 논리의 기저에는 진화론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다. 우리는 약하고 일본은 강하다라는 논리, 그 흐름 속에 대한제국은 사직과 백성을 위해 일본에 합쳐져야 보전될 수 있다라는 흐름으로 가게 만든다. 당시 일진회는 전국적으로 80만 명이 넘는 회원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합방 청원 상소 이후 채응언 등 의병들은 들불처럼 일어났고 이용구 등을 처단하라는 상소가 끊이지를 않았다.
이용구는 합방 청원이 거절당했으나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 것을 생각해 이후 연이어 상소를 올린다.
하지만 이에 반대하는 상소, 국민대연설회가 줄기차게 이어졌고 이들을 처단하라는 목소리는 줄어들지 않았다.


책을 읽으면서 잘 울지는 않지만 도무지 눈물이 터져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번 그랬는데 한 번은 안중근의 변론과 사후 과정.
다른 한 번은 이재명의 변론 후 바로 다음 장에 나오는 한일강제병합 소식이다.

두 분 모두 재판 과정에서 결코 굽힌 적이 없고 시종일관 기개가 있었고 당당했다.
나라가 힘들고 어려울 때 내 삶을 생각하지 않고 분연히 떨치고 일어선 분들이다. 남에게 손벌리거나 아첨하거나 그러기 쉬웠을텐데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을 한 이들이다.

비록 1910년 대한제국은 망했으나 그 과정이 진행되기까지 선택의 순간들은 많았다.
국가의 선택의 순간들.
개개인의 선택의 순간들.
당시의 선택들이 그 당시만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현재는 그 선택에 따른 평가를 각기 받게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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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3-12 21:0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읽으면 국가는 망했지만 국민들은 망하지 않았단 생각들어요. 그 용기와 기개는 정말!!! 존경심이 우러납니다.

거리의화가 2022-03-13 11:58   좋아요 1 | URL
대다수의 백성들의 행동이 권력자들의 오만이나 잘못을 참고 두고 보지 않았다는 게 놀라워요. 지금도 계속 이 전통(!)은 이어지는 것 같아서 뿌듯함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는 보고 들을 때마다 존경스러워요. 개인의 삶을 포기해야 가능한 일이고 신념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scott 2022-03-15 17: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1908년부터 1910년까지 고통스러웠던 한반도


화가님 읽는 동안 흘러 내리는 눈물 ㅠ.ㅠ

역사의 과오, 독립 운동가들이 흘린 피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ㅠ.ㅠ

거리의화가 2022-03-15 17:41   좋아요 2 | URL
눈물 훔치며 읽었어요. 어떤 소설보다 드라마틱할 수가 없다는.

역사에서 배울 수만 있다면 지금 이렇지 않을텐데... 왜 늘 반복되는지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전진할 수 있기를 희망할밖에요^^
 
여성혐오, 그 후 - 우리가 만난 비체들
이현재 지음 / 들녘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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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체(abject)라는 개념을 알기 위해 추천받은 책이다.
2016년에 쓰여져서 메갈리아 논쟁, 강남역 살인사건 등 그 시기 이전의 사건을 다루고 있어 실례의 신선함은 떨어진다.
그렇다고 해도 비체라는 개념을 이해하기에는 충분한 책이었다.
이 책을 읽기 전 여성괴물에서 비체 개념을 처음 접하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다행히 이 책을 추천받아 읽게 되었는데 얇으면서도 개념이 명징하게 잡혀서 정말 좋았다.


비체는 abject. 객체object와 어떻게 다를까?
단어를 보면 알겠지만 둘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었다.


객체는 말 그대로 대상이다.
비체는 정해진 위치에서 벗어난 것. 기존의 질서로는 이해되지 않는 어떤 것이다.
그래서 항상 흐르고 있어서 쉽게 잡히지 않는 존재이다.


비체는 흐르는 것이자 경계를 넘나드는 것이며 고체화되지 않기에 어떤 규정, 어떤 언어로도 잡히지 않는다. 비체가 대상object이 아닌 이유는 그것이 주체의 모든 규정성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비체는 손에 잡히는 착한 대상이 아니다. 비체는 경계를 넘나드는, 그래서 더럽다고 여겨졌던 것이며 잡힐 수 없기에 공포스러운 것이다. 비체는 철통방어라고 여겨졌던 경계에 구멍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존재이며, 따라서 특정 사회적 질서와 동일성을 강화하려는 자들에게 경계를 위협하는 비체는 공포를 넘어 혐오의 대상이 된다. - P29


비체의 목소리가 배제되고 혐오집단으로 치부된 이유는
남성이 여성의 소유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 여성을 끊임없이 객체로 몰아갔던 이유가 있다.
이 굳건한 지배 구조에서 비체의 목소리는 지워지고 억압된 것이다.
남성들은 굳건한 지배구조를 깨뜨리거나 흐트러뜨리는 비체를 공포스럽게 느끼며 혐오집단화했다.


이 책은 객체와 비체가 어떻게 다른지. 객체에서 비체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도시화의 시대 속에서 여성 비체가 어떤 모습으로 등장했는지.
여성혐오가 인정 욕망과 왜 연결되는지 이론과 실제 사례들을 바탕으로 설명하고 있다.


비체라는 개념을 얻은 것 외에도 비체가 존재하는 공간이 사회 밖이 아니라 사회 내부라는 사실도 되새겼다.
무엇보다 여성혐오가 인정 욕망과 연결되고 신자유주의 사회의 폐해까지 더해지면서 확대된 것에도 공감이 가서 좋았다.


비체는 항시 흐른다.
그래서 어떻게든 변화할 수 있는 존재이다.
비체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비체들이여! 소통하고 공감하고 연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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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3-11 18: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화가님 감사합니다. 비체, 정리 넘 잘해주셔서 쏙 들어옵니다 ~~

거리의화가 2022-03-11 20:13   좋아요 1 | URL
이 책 읽고 개념이 어느 정도 정리됐어요. 이제 여성괴물 다시 읽기 시작해야겠습니다^^

독서괭 2022-03-11 19: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비체들이여!! 라는 말씀이 멋지네요^^

거리의화가 2022-03-11 20:17   좋아요 2 | URL
앗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제가 익숙한 분야가 아니라서 낯설고 어렵더군요. 모르는 게 너무 많고 해서 그저 짧게 정리하는 수준 밖에 안되는 것 같습니다. 리뷰 쓰는 거 자체가 어려운데 이렇게 조금씩 시작하는거겠죠^^;

수이 2022-03-11 20: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읽기도 전에 개념 잡히니 넘 좋아요. 이제 저도 슬슬 시작하겠습니다!

거리의화가 2022-03-11 21:40   좋아요 1 | URL
도움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비타님 아자아자!

다락방 2022-03-11 21: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휴 거리의화가 님 같이 읽게 되어서 너무 좋고 감사하고 그렇습니다. ㅠㅠ 게다가 이렇게 글도 써주셔서 진짜 감사드려요. 복받으세요! ㅠㅠㅠ

거리의화가 2022-03-11 21:44   좋아요 1 | URL
어휴 다락방님 무슨 말씀을… 이 책 읽고 여성괴물 읽으니 확실히 이해가 잘됩니다.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eBook] 여성혐오, 그 후
이현재 지음 / 들녘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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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적 외부로 취급된 비체들이 벗어나고자 하는 그 공간은 공감과 연대의 장소이기도 하다. 자신을 알기 위해 타인을 보는 것처럼 비체들간의 감응과 참여로 구조적 공간에서 감정의 전환이 이루어진다면 혐오와 배제에서 벗어나고 차이와 인정의 사회를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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