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문제연구 제46호 - 2021
역사문제연구소 지음 / 도서출판선인(선인문화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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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탈냉전 중립과 비동맹의 역사들'은 2021년 비동맹회의 60주년 기념 학술회의에서 발표된 글로 꾸려져 있다.

비동맹회의는 1961년 유고슬라비아에서 처음 열렸고 2021년이 60주년이 되는 해였다. 2021년이 비동맹회의 60주년이라는 사실을 한국에서는 주목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반도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중립 비동맹은 지금도 유효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안타깝게도 우크라이나 땅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난 뒤 세계는 점점 더 중립이 아닌 양극화의 노선을 달리고 있는 중인 듯하다. 그래서 오히려 이 글들이 시의적절하다 여겨졌다.


실린 연구논문으로 1, 2공화국기 민주당 신파의 형성과 이완, 가족 근대화 모델에 대한 성찰이 인상 깊었다. 


1, 2공화국기 민주당 신파의 형성과 이완

1955년 비민주계에서 1960년 신파로의 변화 과정을설명하고 집권 후 혼선을 거치며 파국을 맞이하게 된 이유를 다루고 있다. 신파는 파벌 정치에 기대어 결집했고 확장했지만 파벌 갈등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고 수권 능력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면서 스스로 파국을 맞았다. 


가족 근대화 모델 찾기에서 가족 정상성에 대한 성찰

최근에는 기존의 전통/근대라는 이분법적 틀에서 벗어나 가족의 변화를 다양하게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이어지고 있다. 따라서 기존에는 문제시 되지 않았던 '정상가족' 규범과 그로부터 배제된 가족 경계 밖의 타자까지 관심이 이어지고 있다. 다만 현대 가족사 연구는 아직 여러 과제들이 많이 남아있다는 글쓴이의 생각에 공감했다. 가족의 변화에 대한 구체적인 실태 연구가 부족하고 사회가 의도하는 정상가족의 상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고찰, 가족과 정치의 관계에 대한 심화 연구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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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비평 137호 - 2021.겨울
역사문제연구소 지음 / 역사비평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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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 특집으로는 동아시아 근대, 유교적 전통의 트랜스내셔널한 발명의 주제로 3건의 칼럼이 포함되었는데 그 중 나는 두 가지 칼럼에 대한 것이 기억에 남았다.


첫 칼럼은 막스 베버의 관료제설과 유교적 전통을 연결시키고 있다. 하필 이 칼럼을 읽을 때가 <남성됨과 정치>를 읽고 있을 때였고 막스 베버의 관료제설에 관심이 갔던 때라 자연스레 호기심이 이는 주제가 되었다.

막스 베버의 관료제설은 무엇인가. 다음 링크를 참고하자(https://namu.wiki/w/%EA%B4%80%EB%A3%8C%EC%A0%9C)

해방 이후 고려시대사, 조선시대사 연구에서 막스 베버의 관료제설이 수용되었다. 특히 조선이 관료제, 자본주의 사회를 통해 발전했다는 주장을 증명할 방법으로 유교적 전통을 근대 지향적인 것으로 재정의하는 것으로써 관료제를 채택했다고 보았다.


근대 의병 운동 지도자 유인석의 사유구조와 의미를 정의하고 해방 이후 유교적 전통을 어떻게 재인식했는지 주자학적 민족주의론의 정립의 방향으로 설명하고 있다. 1950년대~60년대 초반에는 유교망국론과 근대화에 배치되는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인식했고 60년대 말 이후 박정희 정권이 민족 주체성을 강조하면서 주자학적 민족주의 개념이 정식으로 대두되었다. 이 때 의병 운동의 사상적 지향에 대한 배경으로 주자학적 민족주의를 설명한다.


역비 논단에서는 미국 신자유주의의 역사 만들기라는 주제로 시카고학파와 램지어 사태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다루었다. 초국가적 운동이었던 신자유주의로 미국 내 시카고 대학에 모여든 이들은 당대 정치 문화 속에서 주변부로 존재했다. 법경제학과 더불어 시카고 학파는 팽창하였고 프리드먼의 신자유주의 역사 만들기로 기존의 미 자본주의에 대한 논의가 뒤집어지고 시장 경제 위에서 미 자본주의가 발전적으로 이끌어왔다는 서사를 구성해낸다. 램지어의 법경제학은 신자유주의 실천과 일본 역사 만들기를 통해 일본에 특화된 모델로 정부의 역할을 부정하는 수정주의 담론으로 만들어냈다.


또 1979년 평양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의 북미 핑퐁외교를 다루었다. 북한은 이 대회 유치를 위해 물밑작업을 많이 했고 대회 결정 이후에도 미국팀이 참가 결정을 내리는데 수많은 접촉이 있었다. 남북 단일팀 협상에 대한 작업이 이루어졌으나 남측이 남한 팀의 대회 참여 보장 후 단일팀 구성 논의 가능 입장을 보이고 북측은 남북 단일팀 구성 논의부터 하자는 입장이 갈려 결렬되고 말았다. 이후 평양 탁구 대회가 진행되었으나 북미관계는 썰렁했고 핑퐁외교는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다. 이를 보면서 평창올림픽 때가 떠올랐다. 스포츠 외교를 통해 평화를 향한 관계 개선이 이루어지면 좋을텐데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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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괴물, 억압과 위반 사이 - 영화, 페미니즘, 정신분석학, 개정판 여이연문화 3
바바라 크리드 지음, 손희정 옮김 /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여이연)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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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몸에 대한 착취는 고대에서부터 시작되어 오늘날에도 많은 매체를 통해 다양한 형태의 여성괴물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지배권력이 두려움을 느끼는 비체의 존재가 공포영화에서 괴물로 등장하면서 남성들의 여성에 대한 두려움과 혐오를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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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03-28 22:3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오 거리의 화가님 완독하셨군요! 고생하셨습니다!! 👍🏻👍🏻👍🏻👍🏻👍🏻

거리의화가 2022-03-29 08:39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막판으로 갈수록 어려워서 진도가 잘 안 나갔는데... 암튼 끝냈습니다!ㅎㅎ 다락방님도 완독하느라 고생하셨어요!

미미 2022-03-28 22:5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완독 수고하셨어요!!🌹🌹🌹

거리의화가 2022-03-29 08:40   좋아요 3 | URL
미미님 일찌감치 읽으셨지요^^ 가면 갈수록 어려워서 손 놓을뻔 햇어요ㅋㅋ 감사합니다!

책읽는나무 2022-03-28 22:5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오호~역시 화가님의 리뷰!! 공감입니다^^

거리의화가 2022-03-29 08:42   좋아요 4 | URL
나무님~도 거의 다 마무리 와가시지 않나요? 마지막까지 완독 화이팅입니다!

mini74 2022-03-29 18: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100자평이 가슴에 팍 와닿습니다 화가님 *^^* 완독 감축드리옵니다 ~~

거리의화가 2022-03-30 09:08   좋아요 0 | URL
와닿으셨다니 영광입니다ㅠㅠ 100자평이 더 어려운 것 같아요...ㅋㅋ 미니님도 완독 축하드립니다!
 
미국인 이야기 3 : 건국의 진통 1780~1789 - 각자의 최선보다 모두의 차선 미국인 이야기 3
로버트 미들코프 지음, 이종인 옮김 / 사회평론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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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 이야기 3권은 건국의 진통이 부제다.

영국과의 전쟁이 마무리되고 세금 부과와 국경 정리, 헌법 제정을 위한 과정이 그려진다.
주의 이익을 중요시할 것이냐. 아니면 연합된 정부를 위해 하나의 이익을 중요시할 것이냐를 위한 결정이었다.
진통의 과정이었으나 양보를 통해 각자의 최선보다 모두의 차선의 결과를 이끌어냈다.


영국은 아메리카 남부 주요 전투에서 중요 승리를 거두었으나 고통은 커져만 갔다.
정보 전쟁에서 뒤쳐졌고 현지인들의 협력은 저조했다. 대륙군이 물러서기를 택했지만 영국군은 이들을 뒤쫓는 과정에서 지쳐갈 뿐이었다.

영국군 병사들은 행군 일정만으로 쉽게 지치고 다쳤다.
아메리카군이 치고 빠지는 기습 작전을 펼쳤기 때문에 영국군의 피해는 커져갔던 것이다.

패트릭 퍼거슨은 7년 전쟁에 복무한 유능한 스코틀랜드 군인 출신으로 국왕파 민병대의 감찰관으로 지명되었다.
퍼거슨의 지위를 받은 국왕파는 나인티식스부터 노스캐롤라이나 경계 지역을 오가며 적을 상대했고 1780년 여름 끝 무렵이 되자 사우스캐롤라이나 북서부의 아메리카군을 모조리 쫓아냈다.
퍼거슨의 병력은 9월 12일 길버턴에 도착해서 소규모 접전에서 붙잡은 사람을 풀어주면서 반군에게 이런 메시지를 전했다.
"국왕의 병사들과 맞서는 일을 그만두지 않으면 주동자들을 목매달아 죽이고 화포와 검으로 이 지역을 초토화하겠다."
이는 식민지 대항군을 분노하게 하여 집결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퍼거슨은 위협이 왔음을 느끼고 병사들을 킹산 위로 보냈다. 그곳은 사우스캐롤라이나와 노스캐롤라이나를 분리하는 경계에 있는 곳의 능선 정점에 있었다.
아메리카군은 킹산 전투에서 주변 지형을 활용하여 영국군을 포위하여 승리를 거뒀다.

대륙회의는 남부를 지휘할 새 사령관으로 너새니얼 그린을 뽑았다. 워싱턴에게 새 사령관 지명 요청에 따른 결과였다.
그는 병참감으로 3년 차를 보내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린은 위대한 대의에 닿기 위해선 위대하지 않은 일도 해내야 한다는 것을 워싱턴에게서 배운 바 있었다.
이처럼 그는 워싱턴에게서 많은 점을 배웠지만, 그렇다고 그것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그린은 총사령관의 방식과 전략을 검토했으며,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것은 흉내를 포기하는 영민함도 보였다.
그는 이후 열 달 동안 군대가 반드시 온전하게 유지돼야 한다는 전제 아래 전쟁에 임하고자 했다. - P26

노스캐롤라이나에 도착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린은 이런 글을 남겼다.
"자부심 또는 원칙이 군인을 만든다."
훌륭한 지도자는 그 두 가지를 모두 휘하 병사들에게 심어준다.
하지만 병사들이 헐벗거나 굶주리면 그런 감화는 전부 실패할 것이다. - P27

11월 27일 힐즈버러에 도착한 그린은 병사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걱정스러웠다.
병사들의 대부분이 보급품 없이 헐벗은 상태였고 싸우겠다는 기백이 사라져 있었다. 장교들도 캠던 전투의 패배로 패배감에 빠진 상태였다.

그린은 병사들을 나누어서 자신이 지휘하는 군은 체로로, 모건이 이끄는 군은 카토바강 서쪽으로 이동시켰다.

1781년 1월 초, 그린은 윈즈버러의 콘월리스에게서 탈턴이 모건의 부대를 향해 진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탈턴은 콘월리스에게 힘을 합쳐 킹산 근처에 모건을 몰아넣자는 제안에 동의하고 탈턴에게 추격을 허락했다.
모건은 1월 16일 해나스 카우펜스로 이동했다. 모건 부대는 무거운 짐마차를 끌고 다니는 상태로 탈턴이 가까이 추격하는 상태에서 도망쳤다가는 따라잡힐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카우펜스는 목초지였다. 목초지에는 덤불은 별로 없었지만 소나무, 참나무, 히코리 나무가 산재해 있었다.
이곳은 그야말로 기병을 위한 장소였는데, 탈턴은 모건보다 3배 많은 기병을 거느리고 있었다.
현장을 살펴본 영국군 자군 찰스 스테드먼은 모건이 전술적 의도와는 맞지 않는 지형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양 측면이 열린 데다 기병에 취약했고 등 뒤의 브로드강이 퇴각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 P38

이런 불리한 지형이었으나 모건은 지형을 잘 활용했다.
그리고 모건의 군사는 모두 정예였다. 탈턴의 병력은 모건의 군사보다 수적으로 우세였으나 정예병은 아니었다.
모건은 달아날 곳 없는 고립된 목초지에서 배수진을 치고 싸우는 결정을 내렸으나 완승을 거두었다.

콘월리스는 카우펜스 전투 소식을 듣고 모건을 뒤쫓기 위해 움직였다.
하지만 그는 엉뚱한 방향을 선택해 하루를 날렸다.
(정보를 돈으로 사려 했지만 정보를 팔겠다는 이는 적었다.)
좀 더 일찍 더 나은 정보를 얻어 빠르게 움직였다면 모건을 따라잡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모건은 길포드 법원 청사로 이동하여 대륙군 주력 부대와 합류했다.
작전회의를 통해 그린이 이끄는 대륙군은 도주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콘월리스와 그린이 있는 길포드 법원 청사 사이에는 강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도주에 위험이 도사렸다.
이 때 대륙군 장교 중 한 사람인 윌리엄스는 군 내에서 과소평가를 받았으나 양동작전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여 군사를 이끈다.

길포드 법원 청사는 언덕 위 마을의 가장 자리에 있었고 계곡 대부분에는 나무가 우거져 있었다.
이곳에서의 싸움은 대부분 백병전으로 진행되었는데, 대륙군이 점차 승기를 잡았다.
콘월리스는 아군이 패배할 거라 생각하고 대포 두 문을 가져와 아군과 대륙군이 뒤엉킨 곳에 발포 명령을 내렸다.
그 결과 아군, 적군 가리지 않고 많은 병사들이 전사했다.
그린은 더 이상의 전투를 포기하고 후퇴를 명령했다. 이 때 영국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게 컸다.

4월 7일 콘월리스는 윌밍턴에 도착했으나 오는 도중 많은 병사들이 사망했다.
그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콘월리스는 필립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의중을 드러냈다.

"전쟁의 목표가 확실해지고 우리가 만약 승리한다면 아메리카를 얻게 될지도 모르네."
체서피크가 중대한 곳이라는 추정, 단 한 번의 전투로 전쟁을 종결할 수 있다는 생각은 콘월리스의 전략적 사고방식에 한계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지루하고 비참하고 값비싼 작전에 좌절했던 그는 계속해 아메리카 정복의 꿈을 꾸다 마침내 착각에 빠졌다. - P64

그린은 홉커크스힐에 자리를 잡았다. 그곳은 소나무로 덮이고 동서로 뻗은 산등성이로 캠던에서 북쪽으로 2.4킬로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캠던을 공격하는 것은 무모하다 판단한 그린이 적이 나오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끝에는 노스캐롤라이나 민병대의 지원을 받는 메릴랜드 대륙군 2개 연대가 있었고, 오른쪽에는 버지니아 대륙군 2개 연대가 있었다.
대륙군 좌측에는 오토 윌리엄스가, 아이작 휴거는 우측 진영을 지휘했다.
로던은 3개 연대를 전선에 내세우고 다른 3개 연대는 예비 병력으로 남겨두고, 아메리카군에 접근했다.
최정예 부대인 63연대는 공격 대형 가장 오른쪽에 있었다.

전투가 끝날 때 유일하게 온전하게 남은 부대는 대륙군 우측의 버지니아 연대였다.
워싱턴 기병대는 늦게 도착하여 후위 교란 작전을 수행했다.
그린은 질서정연하게 퇴각했고 추격하는 로던을 잘 방어했다.
홉커크스힐 전투가 끝나고 로던은 결국 캠던에서 철수하기로 한다.

1781년 9월 8일 그린과 스튜어트는 유토 스프링스 전투를 한 번 더 치른다.
유토 스프링스는 찰스턴에서 북서쪽으로 5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병력과 보급품이 충원된 아메리카군은 영국군의 통제력 상실을 보면서 의욕을 높일 수 있었다.
대륙군은 영국군 진영 공격에 성공했으나 전열이 무너진 가운데 혼란 속에 영국군에 반격의 기회를 내준다.

그렇지만 최종적으로 영국군은 캐롤라이나와 조지아를 잃음으로써 남부에서 힘을 잃게 된다.
이는 현지인들의 비협조 속에 정보전에서 허약했고, 아메리카군의 대의 앞에 스러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캐롤라이나인은 콘월리스에게 협조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식량도 내놓지 않았다.
심지어 그들은 콘월리스나 그의 후임들에게 아메리카군의 동태에 관한 정보도 제공하지 않았다.
캐롤라이나인은 오히려 영국군의 정보병들을 습격했고, 보급품 수송 행렬을 공격했으며, 영국군을 지원하려는 왕당파 세력을 한꺼번에 제거했다.
남부 민병대는 대다수의 북부 비정규군과 마찬가지로 대치전에서는 믿음직스럽지 못했지만, 국왕과 민병대와 싸울 때에는 무지막지할 정도로 유능했다.
적어도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에라도 그들은 그런 비정규 전투에서 훌륭하게 싸웠다.
첫째, 그들은 영광스러운 대의를 믿고 있었다.
둘째, 그들은 남부에 사는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었다. - P77


아메리카인들은 모든 전투에서 대부분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아메리카 민병대는 버티고 싸우는 일을 잘하지 못했지만 서로 잘 아는 마을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단결력이 강했다.
영국 정규군은 아메리카 민병대와는 반대로 사회에서 철저히 격리되고 엄격한 규율 속에 엄청난 훈련을 받았다.
영국군 장교와 병사들 사이에는 거리가 있었지만 전투에서는 서로를 격려하며 사기를 끌어올렸다.
아메리카 정규군인 대륙군은 영국군만큼 정비되지 않았지만 점차 인내심을 키워갔다. 패배하고 물러나더라도 다시 쉼없이 공격하는 그런 끈기 말이다.

일부 아메리카인이 독립의 원칙에 헌신했고, 그로 인해 전장에서 믿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역설은 어떤 측면에서는 사실에 가깝다.
그럼에도 원칙에 대한 헌신은 여전히 그들을 전장으로 이끄는 데 도움을 주었다.
총사령관인 조지 워싱턴은 그들의 영광스러운 대의 덕분에 독립 전쟁이 자유민 대 용병의 싸움이 되었다는 점을 줄곧 휘하 병사들에게 상기시켰다.
그들은 '자유의 축복'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 - P101

병사들은 싸울 때마다 집단과 자유 사이에서 선택을 내려야 했다.
싸워야 하는가, 아니면 도망쳐야 하는가?
그들은 선택이 죽음과 삶을 결정한다는 것을 알았다.
병사들은 밀집대형에 끼어서 전우들과 어깨를 맞댔고, 자신에게도 미덕을 실천할 기회가 생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반면 전투에서 도망치는 것은 개인의 안위만을 지키는 것이었다. - P102

대륙회의와 각 주 정부는 입대 보상금을 지급하고 복무 후 토지 지급을 조건으로 신병을 모집했다.
이 때문에 부패한 군인들이 나타나고 군대의 사기가 떨어졌다. 각 주의 경쟁은 보상금 철새들을 출현시켰고, 보상금만 챙기고 탈주하는 군인들을 낳았다.

대륙회의는 병참 체계를 개편해야 했다.
부대를 편성해 전쟁 지역에 파견해야 했고, 부대에 보급품을 팔아 수입을 내고자 했다.
대륙회의는 병사들의 수요를 만족시키려 했으나 큰 조직과 복잡한 절차 때문에 병사들은 만족스러워해하지 않았다.

1776년 말 대륙회의는 병참부의 업무를 개편했다.
첫째는 전쟁청 산하에 신설된 피혁 조달부로 신발을 보급하는 업무였다. 둘째는 군대에 의복을 제공하는 독립된 피복 조달부 설립이었다.
대륙회의에 재무감으로 일한 사람 중 로버트 모리스는 보급 체계 혁신을 위해 노력한 인물 중 탁월한 성과를 냈다.
모리스는 필라델피아 상인으로 전국적으로 재계의 인맥을 알고 있어 대륙회의의 재원으로 납품계약금을 지불했다.
그는 자신의 권한을 활용해 대규모 군사 작전에도 충분한 보급을 제공했다.

연대 군의관들은 종합병원을 보급소로 활용하고자 했지만 병사들은 연대 내의 야전 병원을 더 선호했다.
연대 병원과 종합병원 외과의들 사이의 긴장과 갈등으로 병사들에게 제대로 된 의료 지원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병원부 조직은 전쟁 끝무렵까지 정비되지 못했다. 게다가 장교들과 연대 군의관들은 위생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대륙군의 위생은 엉망이었던 반면 영국군은 야영지를 께끗하게 정비하여 질병에 덜 걸렸다.

18세기 천연두는 위험한 질병이었다. 워싱턴은 병사들의 감염을 막기 위해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의 형 로렌스는 폐를 망가트리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바베이도스로 요양을 갔고, 워싱턴도 동행했다.
바베이도스에서 지내던 워싱턴은 1751년 천연두에 감염됐다.
로렌스 워싱턴은 18세기에는 폐병, 현대에는 폐결핵으로 불리는 병을 앓고 있었다.
결국 그는 낫지 못하고 1752년에 사망했다.
조지 워싱턴은 병마를 이겨냈지만, 천연두를 겪은 일은 잊지 못했다. - P126

워싱턴은 이런 경험이 있었기에 누구보다 천연두에 민감할 수 밖에 없었다.
1775년 보스턴 인근에 퍼진 천연두 문제 해결을 위해 병사들에게 접종을 받게 할지, 격리를 할지 판단해야 했다. 접종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천연두에 걸린 병사들과 민간인 중 천연두에 걸린 자만 격리했다.
하지만 1777년 1월 뉴저지주 모리스타운에서 천연두가 퍼졌을 때 접종을 선택했고 효과를 보았다.

존 폴 존스는 대륙군 해군을 이끌고 프랑스 항구에서 출발해 영국 본토를 공격했다.
존스는 영국에 가능한 많은 피해를 입히겠다는 생각으로 본험 리처드호와 콜베트함(소형 호위함), 커터(소형 보트)와 사략선 두 척을 이끌고 간 것이다.
1779년 9월 23일 본험 리처드호는 영국의 세라피스호에 맞서 용기와 기백, 행운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전쟁으로 파괴된 도시와 농촌에 사는 민간인들은 어떻게 아메리카를 위한 대의에 나섰을까.
민간인들은 군인이 아니었지만 전쟁에 다른 형태로 참여했고, 여성들은 가정에서 남성을 대신해 삶을 포기하지 않고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국왕파, 흑인, 인디언 등도 참호를 파고 군부대를 따라다니며 세탁이나 간호 등의 업무를 하기도 했다.

전쟁의 '이면'은 '외부', 즉 전쟁을 지속하는 민간 사회에도 영향을 미쳤다.
전쟁의 이면과 외부를 구별하는 것은 어느 정도는 기만적이고 더 나아가 엉뚱한 것이기도 하다. - P151
전쟁이 일으킨 물리적 파괴는 아메리카인을 고통스럽게 했다. - P152

파괴의 아픔보다는 덜 극적이었지만, 전쟁이 불러온 또 다른 슬픔이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전투에서 싸우는 동안 홀로 집을 지켜야 하는 외로움이었다.
주로 여자들이 이러한 외로움을 이겨내야 했다.
나아가 그들은 남은 가족의 단합을 걱정해야 했다. - P154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를 전쟁에 나간 남편을 떠올리며 그립기도 하고 불안해했을 여성들이었을 것이다.
가족들을 위한 생계로 마냥 시름에 빠져 있을 수도 없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당신을 오로지 신의 처분에 맡기는 것 뿐이에요.
우리가 그분을 제대로 믿는다면 그분께서는 우리를 변함없이 지켜주실 테니까요."
사라 호지킨스는 남편과 떨어져 있어야 하는 세월을 잘 견뎠고, 1779년 6월에 조지프는 집으로 돌아왔다. - P156

사라 호지킨스는 남편의 목숨을 걱정하며 시간을 보냈지만 적이 그녀의 재산을 빼앗을 거라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여성들이 처한 상황은 더 위태로웠다.

메리 피쉬 실리먼은 영국군의 상륙작전에 고통받은 코네티컷 페어필드에 살고 있었다.
남편인 골드 셀렉 실리먼은 1779년 영국군 국왕파 무리에게 납치되었다가 1780년 국왕파 판사와 교환되어 귀향할 수 있었다.
그녀는 전쟁 시작 전만 해도 열성적인 애국자가 아니었으나 영국 정부가 아메리카의 자치권을 제약하는 강압법 제정 이후 반발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메리는 남편의 분노에 공감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편이 참전했던 화이트플레인스의 전투 이후에 그녀는 달라졌다.
남편의 코트 주머니에서 옷을 뚫고 들어온 머스킷 총 탄환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남편이 죽거나 다쳤을지도 모르는 이 단순하지만 극적인 사건으로 인해 메리는 영국에 단호히 저항하게 되었다.
실리먼이 1780년에 풀려났을 때, 메리는 이제 더 이상 원상회복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녀는 뉴잉글랜드인이면서 동시에 자유로운 아메리카인으로 거듭났다. - P159

남편과 아버지가 군대로 떠난 대다수의 가정은 궁핍하게 지내야 했다.
로이스 피터스 역시 그랬지만, 남편의 안장 작업을 이어받으며 아이들의 옷을 만들고, 소를 키우며 치즈를 만들어 생계를 이었다.
게다가 직접 만든 셔츠와 양말과 치즈를 남편에게 보내기도 했다.
가족을 지키는 일은 그녀에게 소중한 것이었다.

여성들은 독립 전쟁의 주역이 아니라 보조역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여성들이 자신의 희생과 자립적인 생활을 직접 선택한 것이 아니라, 전쟁이 그것을 강요했다고 비춰지는 것이다.
이 주장은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지만 독립을 쟁취하는 데 많은 여성이 능동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독립하기 한참 전에도 여성들은 솔선수범해 결단력 있는 행동에 나섰다.- P161

전쟁 내내 약탈이 계속되면서 민간인들은 고통에 시달렸다.
영국군이 점령하면서 가장 큰 고통을 받은 것은 빈민층의 사람들이었다.
전쟁으로 생필품의 물가가 폭등하면서 큰 피해를 입게 된 것이다.
영국군이 점령한 9개월의 기간 동안 각종 사업이 번창했는데 럼주, 증류주, 당밀 소금 등이 밀수 대상 상품으로 인기를 끌면서 국왕파 상인들은 크게 돈을 벌었다.
돈을 가진 상인이나 영국군 장교들은 다양한 문화 생활을 즐겼는데 매주 무도회를 열고 연극, 연주회, 파티가 개최되었다.

한쪽에서는 사치가, 다른 한쪽에서는 굶주림이 이어지는 상황은 씁쓸함이 들게 만든다.

아메리카 내부의 모든 사람의 의견은 일치했을까. 당연히 아니다.
약 50만 명의 사람들이 영국에 충성했고, 8만 명은 아메리카를 떠났다. 이들은 국왕파였는데 아메리카 총 인구의 약 16퍼센트 정도에 해당했고 백인을 기준으로 하면 19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인구였다.
국왕파는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국왕파는 유서 깊은 전통과 의회 같은 오랜 역사를 가진 기구들이 자유를 만들고 보호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역설했다.
따라서 이러한 국왕파 대다수는 독립 선언의 방안이 제시됐을 때 아메리카의 위기가 정점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아메리카에 새로운 기반이나 정치권력이 생겨났다는 점을 믿지 않았다.
예전의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국왕파는 예전의 것을 고수하려고 했고 그로 인해 고통받았다. - P195

영국에 충성하는 그들은 기존의 아메리카를 고수하는 것이 이득이였을 것이다.
아메리카의 독립은 그들에게 원치 않는 움직임이었고 그에 대한 반발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국왕파와는 다르게 흑인 노예들은 자유의 대의의 원칙에 부응했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은 노예 해방에 어려움을 겪게 만들었다.
인종주의와 경제적 필요성은 혐오와 맞물려 심리적 강화를 불러 일으켰다.

모든 북부 주는 어떻게든 점진적인 노예 해방을 추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다수 북부 주는 노예의 자식은 반드시 출생 후 몇년 뒤 해방되어야 한다고 명시한 법안을 통과시킴으로써 노예 해방을 향해 나아갔다. - P198

남부 주는 북부 주의 선례를 따르지 않았다. 남부에서는 노예제가 너무나 깊이 정착돼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노예 무역을 폐지하자는 북부 주의 주장에 동의했다.
이런 조치들을 다 종합하더라도 노예제 폐지와 관련된 대책들은 별로 인상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런 조치들은 노예제를 무너트리지 않았다.
노예제는 남북 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계속 번창할 터였다. - P199

독립 혁명 과정에서 인디언은 많은 인명 피해와 물질적 손실을 겪었다.
서부 경계지를 따라 벌어진 싸움으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고 농지와 거주지도 잃은 것이다.
일부 인디언은 싸움을 피해 달아나기도 했지만 대다수의 인디언들은 참담한 운명에 휩싸였다.


1781년이 되면 독립 전쟁은 막바지로 향한다.
아메리카군은 요크타운에서 영국군을 포위하면서 항복을 받아낸다.
요크타운 전투를 마지막으로 미국과 영국, 프랑스와 스페인은 강화회담을 벌이게 되고 1782년 11월 공식 합의에 이른다.

영국군 사령관 콘월리스는 리치먼드, 포인트 오브 포크, 샬러츠빌을 점령하고 체서피크만에 해군 기지를 건설하라는 명령에 따라 요크타운에 요새를 구축했다.
그러나 드 그라스 제독이 가세하면서 프랑스 해군은 우세한 전력을 확보하게 된다.
거기에 프랑스 육군에 로샹보 백작이 합류한다. 그는 워싱턴보다 7살이나 많았으나 유럽의 전쟁에서 잔뼈가 굵은 활약을 보여준 베테랑 군인이었다.
대륙군은 영국군 몰래 체서피크만 방향으로 남하하였고, 영국군은 윌밍턴에서 올라와 요크타운에서 맞붙게 되었다.
프랑스 함대와 영국 함대는 체서피크만에서 해전을 벌였다.

프랑스 함대는 영국 함대에 승리하여 영국 함대가 뉴욕으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요크타운에 2개의 방어선을 만든 영국군에 맞서 아메리카군과 프랑스 육군 연합군은 포위 작전을 벌여 최종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는 미리 배치한 대포들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면서 영국군의 보루를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요크타운의 전투로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지만 영국 의회는 전쟁에 더 이상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1782년 3월 20일 노스는 총리직을 사퇴하고 로킹엄이 총리에 오른다.
새로운 내각이 들어서자 강화조약을 위한 협상에 들어간다.

하지만 강화 협상은 쉽지 않음을 예고했다.
영국 뿐 아니라 프랑스, 스페인이 생각하는 바가 다 달랐기 때문이었다.

3개월 간의 협상이 진행된 결과 1782년 11월 30일 미국과 영국 간의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미 합중국이 주권을 가진 독립국임이 인정되었고 국경 문제도 합의를 보았다.
1783년 1월 20일 프랑스와 영국도 강화 조약에 서명했다. 스페인과 영국도 비슷한 시기 강화에 동의했다.

1783년 아메리카 북쪽 국경은 오늘날의 국경과 비슷했고, 남쪽 국경은 위도 31도, 서쪽은 미시시피강으로 정해졌다.
평화조약 체결 소식에 아메리카에서는 축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1783년 11월 25일 영국군이 뉴욕에서 철수하고 조지 워싱턴과 대륙군은 뉴욕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 속에 입성했다.

아메리카인이 전쟁에서 최종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대의를 향한 열망이었던 것 같다.

대의는 아메리카인의 치열한 저항에 영향을 주었다.
독립 혁명 기간 중 아메리카에서 제기된 무언의 질문은 "무엇이 우리를 하나의 국민으로 결합하고 있는가?"였다.
1760년 전까지 아메리카인은 언어, 혈연, 친척, 무역, 자유, 입헌주의 등 영국인과 많은 요소를 공유했다.
독립혁명이 발발하기 전 몇 년 동안 아메리카가 겪은 경험은 이런 유대 관계를 느슨하게 풀어놓았다.
이익은 상호적이지 않았고, 가치는 공유되지 않았으며, 공통점은 손상되거나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영국은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메리카인이 자유를 손상하는 행동에 대해 저항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 P254

종전 후 군사권, 영토권, 재정권을 두고 이견을 정리하는 작업이 남았다.

전쟁 후 워싱턴은 대륙군의 총사령관 직에서 사임했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그의 행동은 위엄과 기개, 결단력이 느껴졌다.

"제게 부여된 일을 끝마친 지금, 저는 이 위대한 작전의 무대에서 내려오고자 합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내려온 이 장엄한 기관에 애정을 담아 작별을 고합니다.
여기서 저는 사직서를 제출하고 모든 공직에서 떠나고자 합니다." - P263

대륙회의는 전쟁이 끝난 뒤 아메리카 영토를 재정립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미국이 영국과 맺은 조약은 불명확했고, 스페인 등 다른 나라들도 이 조약을 존중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메리카 서부에서 주권을 수립하려는 대륙회의에 맞서 영국군은 5대호의 모피 교역 요충지를 장악하고 있었기에 이곳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또한 미시시피강 동쪽 영역도 미합중국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었는데 스페인이 미시시피강을 자유롭게 탐사할 독점 권리를 요구했다.
서부와 동부 간의 갈등도 첨예했다.

재정권을 둘러싼 주 정부와 대륙회의의 갈등도 컸다.
정부는 독립 혁명 전 돈을 마구 찍어내고 그 돈으로 각종 비용을 충당했다.
무절제한 화폐 발행으로 화폐 가치는 급락하였고 세수는 걷히지 않았다.
대륙회의는 통화 회수를 위해 특별 증서를 발행했으나 각 주 정부와 공채 모집관이 계획을 따르지 않아 실패했다.

연합헌장이 작성되고 주 헌법이 비준되었으나 아메리카인들은 연합회의가 중앙정부의 역할을 맡게 하는 것을 경계했다.
연합규약은 16개월 간의 토론 끝에 대륙회의에서 1777년 11월 채택됐다.
연합규약 2조는 각 주들이 대륙회의보다 우월한 지위임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783년 아메리카인들은 사실상 연합회의가 아니라 주 정부의 지시를 따르고 있었다.
당시 주들은 독립 혁명의 목적에 자극을 받아 많은 일을 해낸 상태였기 때문에 자신감이 넘쳤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될까?

1781년 이후로 아메리카는 많은 점을 배웠다.
연합규약으로는 추진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주 헌법은 풍부한 정치적인 지혜를 담고 있지만, 역시 그것만으로는 일이 되지 않았다.
뭔가 획기적인 조치를 취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미합중국은 쪼개진 주권을 지닌 소규모 공화국들의 유별난 연합체로서 강력한 군주제가 번성하던 세계에서 오래 살아남지 못할 터였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고민하며 사람들은 헌법제정회의로 모였다. - P328

1787년 5월 25일 필라델피아에서 헌법제정회의가 열렸다.
회의에 참석한 대표자들은 토론을 거쳐 미국의 뼈대가 되는 헌법을 만들었다.
본래 연합규약을 개정하여 개정할 목적으로 모인 것이었으나 많은 이들이 새로운 연방정부가 필요하다는 데 동의하여 다른 모습으로 전개되었다.
9월 17일 55명의 대표 중 39명이 헌법에 서명하면서 비로서 헌법이 비준되었다.

55명의 대표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최소한 34명은 법률 교육을 받았고, 21명은 법조인이었다. 농장주와 농부는 18명, 노예주는 19명, 상인은 7명이었다. 나머지 8명은 변호사이자 상인이었다.
이들 중 다수가 주의 공직을 맡았거나 대륙회의에 있었거나 독립전쟁의 참전 용사였다.
이 짧은 개요로 이 회의에 믿음직한 시민, 자산가, 정치 및 사회 분야 지도자가 모였다는 점을 알 수 있고, 실제로도 그랬다.
변화에 저항한다는 의미에서 소수는 융통성 없는 보수주의자였다.
대표들은 대부분 30대나 40대 젊은 사람이었고, 몇 명의 예외가 있을 뿐이었다. - P337

인구비례와 대표성에 관한 입장 차이로 합의를 보기 까지 대토론이 이어졌다.
작은 주들은 평등하게 한 표를 갖게 되는 것을 고수하기를 원했으나 큰 주는 인구에 비례해 투표권을 갖게 되는 것을 원했다.
헌법제정회의는 토론과 논쟁을 통해 이성과 지성을 작용시켰던 반면 비합리성, 열정 등도 일부 작용했다.

대위원회가 제출한 최종 보고서는 '대타협'이라고 불리지만, 사실은 엘스워스와 코네티컷 대표단이 고안해낸 작은 주들의 방안을 수용한 것이었다.
대타협은 인구 4만 명당 한 명의 연방의회 의원을 두고, 다섯 명의 노예를 세 명의 자유민으로 산정하며, 연방 하원만이 재정 법안을 발의할 권한을 가지고, 상원에서는 각 주가 동등한 대표 구성을 갖는다는 내용을 담았다. - P359

대표들은 9월 17일 서명에 참여했다. 헌법에 완전히 동의하지 않은 이들도 대부분 서명했다.
헌법은 보수적이었으나 공화국의 가치를 어느 정도 구현한 안이었다.
권력을 제한함으로서 부패를 막고 다수의 폭정으로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도 엿보이는 것이었다.
연방주의자들과 반연방주의자들 사이의 첨예한 갈등이 존재했으나 결국 연방주의자들이 승리하면서 헌법은 비준되었다.

연방 하원은 인민이 선출하는 기관이었다.
따라서 계층, 지위, 숫자와 무관하게 인민은 자유로웠고 동시에 구속받았다.
자유롭다고 한 것은 공화국이 도덕적인 인민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고, 구속을 받는다고 한 것은 이런 다양한 부류의 인민이 인간적인 약점을 지녔기 때문이다.
대표들은 이런 추정을 공화주의의 언어로 표현했다.
그들은 간접적으로 '두 번 태어난 사람들'의 자녀들에게 익숙한 옛 도덕적 확신을 상기시켰다.
대표들은 인간의 이기심, 욕망, 악을 행하려는 성향 등을 분명히 고려했다.
인간이 지닌 매우 악한 충동 중 최악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본능이다.
이런 본능을 제약할 수 있는 정부를 설립한 것은, 헌법 자체에 신교 문화의 지속적인 관심사인 도덕성이 반영됐음을 보여준다. - P385

헌법 비준 과정은 대체적으로 평화롭게 진행됐다.
비록 반연방주의자들은 헌법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들은 헌법에서 자유로운 영국인들의 권리장전의 내용이 빠졌다는 것과 큰 영토를 지닌 나라에서 공화정 자체가 존속할 수 없다는 것을 이유로 들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연방주의자들이 비준회의에서 우위를 점했다.

조지워싱턴은 1789년 4월 30일 뉴욕에서 미합중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식을 치렀다.


1권에서부터 3권까지의 시리즈 1 중에서 압권은 3권이라고 생각한다.
아메리카를 구성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목표와 희망을 엿볼 수 있고 또 대의를 위해 나선 대표들의 리더십을 통해서 많은 것을 느끼게 했다.
합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들은 중요한 목표가 있었기에 결론적으로 합의에 이를 수 있었다.
여성, 노동자, 흑인 노예들의 시선에서 미 합중국의 대의를 위한 행동들은 감동적이었다.
(이는 개정판에서 많이 보강된 부분이라고 한다.)

부디 4권부터 12권까지 남은 시리즈의 책들도 늦지 않게 완간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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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3-27 17: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12권 짜리 시리즈군요~! 이 시리즈 다 읽으시면 미국역사의 천재가 되는건가요? ^^ 리뷰만 봐도 3권이 제일 재미있는거 같아요~!!

거리의화가 2022-03-27 18:46   좋아요 2 | URL
네 새파랑님. 남은 4권부터 12권까지 빠른 시일 내에 나오면 좋겠습니다.
3권이 제일 재밌었어요. 읽을수록 작가의 문체에 적응되는 것도 있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내용 자체가 주는 재미가 컸던 것 같아요. 미국역사의 천재까지는 모르겠지만 미국 역사의 이정표로 참고할 책 중 하나가 될 것 같습니다*^^*

페넬로페 2022-03-27 17:5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거리의 화가님께서 3권까지 단숨에 읽으내신 것 같아요.
이 책 다 읽으면 어느정도 미국 역사의 흐름은 잘 알 수 있을것 같네요.
완간되려면 아직 많은 시간이 걸리겠어요^^

거리의화가 2022-03-27 18:48   좋아요 3 | URL
네.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리겠지요. 그래도 좀 빨리 나오면 좋겠어요ㅎㅎ
이 책은 한 번에 몰아읽는게 좋은 것 같습니다^^ 재미도 있고 유익도 있는 책이었어요.
다 읽으면 아마 미국 역사의 흐름을 어느 정도 잡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mini74 2022-03-27 19: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너무 재미있게 읽었어요 화가님 ~ 요약도 발췌글도 👍. 저도 부지런히 읽고 있는데 옛날 세계사 시간도 생각나고 합니다 *^^*

거리의화가 2022-03-27 19:19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미니님^^ 세계사 시간에 보통 간략하게 이야기하고 넘어가던 빈 공간을 채우는 기분으로 읽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 얼른 4권을 읽고 싶은데 말이죠ㅎㅎ 역사의 방향은 구성원들의 생각과 의지가 큰 몫을 차지하는구나 느끼게 됩니다^^

책읽는나무 2022-03-27 22: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미국역사 박사님 되시겠군요?^^
꾸준히 읽으시는 모습 정말 본받고 싶어요.
12 권까지면 정말 미국의 모든 것을 정립하겠습니다.
아직 4 권부터는 안나왔나 보군요?

거리의화가 2022-03-28 09:10   좋아요 1 | URL
미국 역사 저도 잘 알지는 못합니다. 한 권씩 읽으면서 공부해가는거지요.
꾸준함밖에 없는 사람이라...ㅎㅎ
저는 한 권의 책을 깊이 읽는 것도 좋지만 여러 권의 책을 읽으면서 덧칠해가는 식으로 공부하는 것이 도움이 되더라구요. 모르는 게 많아서 그렇게 읽고 좋은 책은 여러 번 읽으면서 깊이 읽고 그런 방식이 역시 정공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4권부터는 아직 안 나왔어요. 나오면 바로 읽어볼 참입니다^^

scott 2022-03-28 00:4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추카합니다 화가님
3권 마지막 정말 재밌죠
저는 대여섯번은 읽었습니다(3권만)
12권 완독 출간을 간절히 바라며
출판사에 독촉 메일을 써야 겠어요.^ㅅ^

거리의화가 2022-03-28 09:13   좋아요 2 | URL
아니 대여섯번을!!! 역시 스콧님 대단하셔요.
저도 시간이 넉넉하다면 한 권의 책을 여러 번 읽을텐데 아무래도 다른 나라의 역사는 시간을 그만큼 들이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한국사 책도 읽고 싶은 것들이 여전히 쌓여있고 참... 여러 모로 욕심만 드네요.
저도 3권이 젤 재밌었어요. 12권까지 최대한 빨리 나와주면 좋겠습니다^^
 
미국인 이야기 2 : 전쟁의 서막 1770~1780 - 자율이 강제를 이긴다 미국인 이야기 2
로버트 미들코프 지음, 이종인 옮김 / 사회평론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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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 이야기 2권은 전쟁의 서막이 부제다.

개인적으로 1권보다 2권이 재밌었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니 하나의 주제가 관통되어서인 것 같다.

2권은 영국과 아메리카 사이에 갈등이 폭발되어 전쟁이 발발한 뒤 그 전개 과정이 그려진다.
영국은 아메리카를 하위에 두고 싶어했음이  분명했다.
아메리카는 영국의 권력에 의한 압제를 더 이상 두고 보지 못했고 압제라 느꼈다.
둘 사이의 갈등은 피할 수 없는 전쟁으로 비화되었다.



영국 노스 내각이 들어서면서 톤젠드 법안이 철회되고, 상인들이 수입 거부 운동을 중단하면서 문제는 봉합되는 듯 했다.
그러나 종교적 갈등과 경제 문제로 결국 아메리카인들은 통신위원회란 조직을 만들어 대응에 나서게 된다.
영국은 국교회라는 종교를 가지고 있었으나 아메리카인들은 국교회에서 자유로워지길 원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프로테스탄티즘이었다.
또한 상인과 세관 징수관 사이 갈등은 톤젠드 법안 이후에도 지속되고 있었다.
보스턴 선언은 식민지인의 권리의 소중함을 일깨우며 권리는 자연과 이성에서 온 것이므로 어떤 권력도 민중의 권리를 침탈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식민지인들은 차세법 이후 보스턴 앞 바다에 도착한 차 상자를 던지는 것으로 대응했다.
영국 의회는 이를 반란으로 여겨 한층 더 강화된 제재를 단행했으나 식민지인들은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
결국 전면적인 수입 거부 운동이 일어나고 대륙회의에서 권리선언을 발표하면서 조직적인 저항이 시작된다.

군중은 전쟁에 나가는 병사들처럼 소리를 내지르며 모임 장소를 빠져나가 선창을 따라 달리면서 그리피스 부두로 갔다.
그곳에는 다트머스호, 엘리너호, 비버호 등이 계류되어 있었는데, 뒤의 두 배 역시 차를 싣고 최근에 도착해 있었다.
얼굴을 검게 칠하고 담요를 몸에 두른 채 '인디언 복장을 한' 약 50명의 남자가 군중 사이에서 빠져나와 배에 오르더니 보스턴 항구 앞바다에 차를 우려내는 작업에 돌입했다.
그들은 신속하게 그 일을 해치웠는데, 차가 든 궤짝을 갑판 위에 올려서 깨부순 다음, 차를 선창 너머 바다로 내던졌다.
배 주위의 바닷물은 곧 차로 뒤덮였고, 아침이 오기도 전에 일부 차는 저 멀리 도체스너 넥까지 흘러내려갔다. - P45

영국 의회는 군중의 행동에 대응하여 보스턴 항구법을 통과시키고 이후 매사추세츠 정부법, 정의의 불편 부당한 시행법을 통과시킨다.
보스턴 항구법은 영국 국왕이 재개항을 명령할 때까지 보스턴 항구를 폐쇄하고, 동인도회사가 차 손실에 대해 보스턴 시로부터 전액 배상을 받을 때까지 재개항 명령을 하지 않도록 한 것이었다.
매사추세츠 정부법은 매사추세츠 정부를 왕실 직영 정부로 전환하는 것으로 매사추세츠 식민 정부의 자치권을 크게 축소시키는 것이었다.
정의의 불편부당한 시행법 또한 식민지 권한을 축소한 것으로 식민지에서 중죄를 저지른 영국 관리를 영국이나 다른 식민지로 보내서 재판을 받게 하는 것이었다. (이는 조선 개항기 외국과의 조약에서 치외법권과 상당히 유사한 내용이다.)

필라델피아에 대륙회의로 모인 대표들은 영국을 향한 분노보다 앞으로의 미래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여기에서 두각을 드러낸 인물은 존 애덤스와 토머스 제퍼슨이다.
버지니아주 주지사였던 토머스 제퍼슨은 미국 제3대 대통령을 지낸 인물이고 존 애덤스는 매사추세츠주 대표를 거쳐 미국 제2대 대통령을 지낸 인물이다.

역사가들은 존 애덤스와 토머스 제퍼슨을 종종 비교했다.
제퍼슨은 아주 평온한 외양을 유지한 반면, 늘 불안감을 느끼던 애덤스는 단 한순간도 그런 평온함을 얻지 못했다.
제퍼슨은 우아한 반면, 애덤스는 결코 막돼먹지는 않았으나 충동적인 기질로 인해 다소 거칠었다.
그는 제퍼슨처럼 다재다능하지는 못했으나, 제퍼슨 못지않게 날카로웠고, 종교사와 정치학이라는 두 분야에서 애덤스의 학문이 제퍼슨을 능가했다.
그는 열심히 노력해 공직 생활에서 뭔가를 이루고 싶어 했고 인기와 명성을 갈망했지만 오로지 세상의 인정을 받으려고 행동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의 처신은 대체로 청교도의 문화였다. - P67

애덤스에 대한 평가가 좀 박하고 제퍼슨은 후하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둘은 여러 면에서 비교가 되었고 그만큼 달랐던 듯하다.

토론의 진통 끝에 권리선언 발표가 합의되었다.
발표문에는 식민지의 권리가 자연법, 영국 헌법, 식민지 특허장에 바탕을 두고 있음이 담겼다.

청교도 윤리를 강조하면서 아메리카인들은 오래된 생활방식을 상기해냈다.
18세기 동안, 인생 내내 더 많이 획득하고 소비하라는 강요 때문에 잊어버렸던 이전의 생활방식 말이다.
영국과의 위기가 닥치면서 아메리카인은 자신이 본래 어떤 사람이었는지 계속 고민해야 했고, 대륙협회는 아메리카인에게 검소하고 절약하는 생활이라는 새로운 도전 과제를 제시했다. - P85

영국 내각은 대륙 회의의 결정과 아메리카인들의  지속되는 반란을 진압하라는 결정을 내린다.
렉싱턴과 콩코드에서 아메리카 민병대와 영국군 사이에 개전이 시작되며 드디어 전쟁은 막에 오른다.

1775년 4월 18일 영국군은 콩코드를 비밀리에 공격하기 위해 보스턴에서 출발했으나, 이미 소식을 접한 아메리카 민병대가 렉싱턴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렉싱턴과 콩코드 전투는 피할 수 없는 싸움이 되었다.

전투에서 영국군은 모두 273명의 사상자를 냈고, 아리카는 95명의 사상자를 냈다.

제2차 대륙회의에서 조지 워싱턴이 사령관으로 선출되면서 그는 아메리카 민병대를 군대다운 군대로 만드는 노력을 기울인다.
이어지는 벙커힐 전투와 퀘벡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한 아메리카군은 보스턴에서 영국군을 철수시키는데 성공한다.

1775년 6월 뉴잉글랜드 벙커힐에서 아메리카 민병대가 영국군을 몰아내기 위해 선공을 감행했다.
하우가 이끄는 영국 함대는 벙커힐과 브리즈힐에 주둔한 아메리카군에 일제 포격을 퍼부어 영국군의 상륙을 돕는다.
아메리카군은 브리즈힐에서 미스틱강까지 전선을 구축해 상륙한 영국군에 대항했으나 아메리카군이 반도에서 철수하면서 영국군은 찰스타운 넥까지 반도를 완전 점령하였다.

조지 워싱턴은 총사령관 자리를 맡기는 했지만 자신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나의 능력과 군사적 경험으로 이 중요하고도 광범위한 신임에 부응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워싱턴은 실패를 예상하는 일을 싫어했고, 그것이 그의 '명성'에 입힐 피해를 의식했다. - p162

그는 명예가 실추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에겐 명예라는 가치가 중요한 사람이었고 실패로 인해 주변인들에게 줄 실망 등으로 걱정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전쟁에서 자신이 선택됐다는 믿음, 아메리카인의 자유 수호에 대한 애정이 그것이었다.

막상 민병대를 맡고 보니 그들은 너무나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았다.
이 때문에 사병들의 군기와 임무 수행의 기준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고 군법회의도 진행하는 등 규율에 대한 전반적인 점검을 진행했다.

대륙회의의 뜻에 따라 아메리카 대륙군은 퀘벡 원정을 떠나게 된다.
이들은 290킬로미터만 여행하면 될 것으로 알았으나 실제로 캐나다 북상까지 560킬로미터를 이동하느라 45일의 강행군을 하게 된다.

퀘벡 원정에서 대륙군의 한 부분을 이끌던 몽고메리 장군은 머리에 총을 맞아 전사한다.
조지 워싱턴은 보스턴이 보이는 도체스터 고지를 점령해 보스턴 공격 발판으로 삼으려 했으나 날이 추워 보스턴 항구가 얼어붙어 땅을 굴착하기 어려워 요새화할 수 없었고 그런 상태에서 영국군이 쉽게 공격해올 것은 뻔했다.
하지만 이미 보스턴에 주둔하던 영국군은 철수를 선택했고 1776년 3월 27일 그들이 항구에서 물러나면서 1년에 걸친 전투가 끝이 난다.

그것은 존 애덤스가 그 당시 말한 "절반의 전쟁"이 아니었고, 아메리카 측에서 전면적인 노력을 기울인 온전한 전쟁도 아니었다.
캐나다에 대한 점령 시도는 식민지가 "방어선 위에서 행동"한다는 주장, 즉 방어전을 펴는데 만족한다는 애덤스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애덤스의 실망은 이해할 만했다.
그는 보스턴 포위 공격뿐만 아니라 북부로의 공격도 원했다.
나아가 아메리카가 독립을 선언하기를 바랐다.
아마 영국군이 보스턴에서 퇴각한 바로 그 다음 날에 독립 선언이 나왔더라면 그는 더욱 흡족해했을 것이다. - P190

전쟁 후 아메리카 식민지들은 영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자치를 시작하여 1776년 7월 4일 독립을 선언하게 된다.

영국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상황에서 식민지 의회들은 신중한 태도를 보였으나 이 와중에도 식민지의 독립을 부추기는 주장으로 흔들리게 된다.
대표적인 인물이 토머스 페인이다.

토머스 페인은 불우한 청년기를 보냈다. 그러다 페인의 친구이자 세무 관리인 조지 스콧이 1774년 그를 벤저민 프랭클린에게 소개했다.
프랭클린은 페인에게서 재능을 발견하고 페인이 아메리카로 간다고 하자 자신의 사위인 필라델피아 상인 리처드 바크에게 소개장을 써준다.
페인은 1774년 11월 30일 아메리카에 도착하여 바크를 찾아갔고 현지 신문에 시와 논평을 기고하는 일을 했다.

페인은 다양한 실패를 경험하는 과정에서 글쓰기 기술을 배웠고 그 기술을 인류에게 혜택을 가져다주는 대의에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가 아메리카인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그들이 평소에 갖고 있던 몇 가지 확신에 심각한 도전을 제기했다.
가령 아메리카인은 그들의 권리가 오래된 정체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들의 이해는 영국과의 전통적인 유대 관계에 의해 보호받는다고 확신했다.
페인은 그런 확신이 "환상"이라고 지적했다. - P204

최근에 아메리카인이 피의 희생을 치렀고, 그 때문에 '모국'에 대한 아메리카의 사랑은 이미 사라져버렸다.
현재 벌어지는 갈등에 아메리카인들은 많은 열정을 쏟았고, 영국을 향한 그 열정은 곧 증오로 바뀌었다.
이러한 분석의 결론은 너무나 분명했다. "타협은 이제 헛된 꿈이다." - P205

《상식》은 아메리카의 독립의 당위성을 일깨워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필라델피아에서 발간된 상식은 신문에 게재되었고 주요 아메리카 도시와 마을에서 책자로 간행된다. 몇 달 사이 10만 부가 발간되고 신문의 지면을 채웠다고 한다.

미국의 독립 선언서 작성 위원회는 조머스 제퍼슨, 존 애덤스, 벤저민 프랭클린, 로저 셔먼, 로버트 R. 리빙스턴이 참여했고 대부분은 제퍼슨이 맡았다고 한다.

대륙회의가 7월 4일 최종 승인한 문서는 위기 사태의 책임자로 영국 국왕과 영국 의회를 지목했다.
독립 선언은 존 로크의 계약 이론을 바탕에 두었다. 
아메리카를 통치하는 영국인이 아메리카-영국 관계의 합의 사항을 위반했고 시정 사항을 여러 차례 건의했으나 거부 당했으니 아메리카는 독립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선언서에는 한계가 존재한다. 예상하겠지만 모든 것이 평등하다는 것에 역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아메리카인에게는 흑인 노예를 해방할 의사가 없었다. 대규모 백인 농장주들이 있었고 그들은 흑인을 지배하고 군림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들을 결코 평등하게 바라보지 않았을 것이다.

전쟁은 완전히 종결된 것이 아니었고 양측은 더욱 신중하게 접근했다.
하우가 이끄는 영국군은 뉴욕의 여러 요새에서 워싱턴이 이끄는 아메리카군을 몰아냈으나 결정적인 승리는 아니었다.
고전을 거듭하던 워싱턴은 1776년 크리스마스 트랜턴의 공격으로 마침내 전쟁의 분위기를 바꿀 기회를 잡는다.

아메리카가 독립을 선언한 직후 1776년 8월 뉴욕 브루클린 하이츠를 둘러싸고 벌어진 롱아일랜드 전투에서 아메리카군은 영국군에 패한다.
워싱턴은 패배 후 하우가 이끄는 영국군의 또 다른 공세가 있을까 불안했다. 
아군과 적군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그는 진지전과 방어전을 선택했다. 
이는 영국군이 대양과 해안지대, 대부분의 강을 선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군은 해상에서만 강했던 게 아니라 육지에서도 강했다. 
그들은 정규 군대로 일정 이상의 기량을 발휘했다. 
반면 아메리카군은 들쑥날쑥한 기량을 보일 수밖에 없었고 지휘하는 장군들 입장에서는 병사들의 미흡함이 두드러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8월 29일 워싱턴은 참모회의에서 나온 건의에 따라 브루클린 하이츠를 지킬 수 없음을 깨닫고 철수를 결정한다.
아메리카군은 영국군의 포위 공격을 예상하여 영국군을 피해 비밀리에 강 건너 뉴욕으로 철수하였다.
그리고 맨해튼에서도 철수하기로 결정하였으나 아메리카군은 영국군의 공세에 밀려 진지를 옮겨 다니며 고전했다.

영국 군함은 허드슨강 양쪽의 요새인 포트 워싱턴과 포트 리를 돌파하며 내륙으로 북상했다.
결국 버티지 못하고 항복한 아메리카군은 후퇴를 거듭하다 12월 3일 델라웨어강의 트랜턴에 도착했다.

필라델피아를 사수하기 위해 워싱턴은 이곳에서 영국군에 선제공격을 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이 결정은 모 아니면 도였다. 위험하고 무모할 수 있었던 그의 결정에 운명은 뒤바뀌었다.

그가 델라웨어강 위쪽으로 밀고 올라가기로 결정한 것은 그의 오래된 열정, 즉 영광과 명예를 얻기 위해 공격하려는 열정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또한 그는 영국군이 봄에 반드시 필라델피아를 공격하려고 할 것이니 그 예봉을 꺾어놓자는 생각도 했다.
"나는 필라델피아를 생각하면 몸이 떨려옵니다"라고 그는 썼다. 하지만 이런 무모한 공격을 감행해야할 만큼 그 도시가 중요한가?
그곳은 아메리카의 수도였고, 그 도시를 잃으면 공동의 대의에 큰 손상을 입을 터였다.
그것은 "모든 고결한 아메리카인의 가슴을 아프게 할 것"이라고 워싱턴은 존 핸콕에게 썼다. 공격의 배경은 바로 그것이었다.
일반 대중의 사기를 유지하고, 대중의 미지근한 애착심을 더욱 강하게 하려는 뜻이었다. - P273

추운 날씨로 델라웨어강은 얼어붙었고 워싱턴은 트랜턴 공격을 진두지휘하며 강을 건넜다.
크리스마스 날 밤, 2400명 정도로 구성된 주력 부대가 맥콩키 나루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집결했다.
부대는 둘로 나뉘어 한 갈래는 위쪽인 페닝턴로드로 가고, 다른 한쪽은 리버로드로 향했다.
대포로 헤센인들이 전투대형을 갖추지 못하게 만들고 난 뒤 서서히 포위하는 형태로 전개되었고 전투는 1시간도 안 되어 끝났다.
헤센인과 영국군은 도망쳤고 워싱턴은 펜실베니아로 들어갔다.
워싱턴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병사들을 독려하여 프린스턴까지 북상했고, 직접 말에 타고 지휘하며 승리를 이끌었다.

겨울이 되자 전투는 잠시 중지가 되었다가 봄이 되어 다시 재개되었다.
영국 내각은 하우에게 작전지휘를 내리지 못했고 존 버고인은 캐나다에서 남하해 아메리카 공격에 참여했지만 하우와 손발이 맞지 않았다.

하우에게 전쟁의 전체적 국면과 현재 진행 상황을 살피도록 지시하는 책임은 아메리카 식민지 담당 장관 조지 저메인 경의 몫이었다.
저메인은 북부에서 모종의 작전이 구상되고 있다는 막연한 소식을 하우에게 알려주었을 뿐 그 이상은 조치하지 않았다.
버고인이 북부 원정대의 지휘권을 받는 것이 거의 확실했던 3월 3일과 4월 19일 사이에 저메인 장관은 하우에게 여덟 번이나 편지를 쓰면서도 버고인 부대의 임무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었다.
저메인은 캐나다의 칼턴에게 버고인이 남하침공부대의 맡을 것이라고 알리면서 그 편지의 사본을 하우에게 보냈다.
그러나 이 편지에는 전략에 대한 설명은 없었고, 하우 부대가 버고인 부대와 협력해야 한다는 지시도 없었다.
그 대신 저메인은 하우에게 보낸 편지들에서 필라델피아 침공 계획을 승인하면서 그 계획이 적절하며 하우의 암울한 전망과는 반대로 그것으로 전쟁이 종결될 것이라는 격려를 써서 보냈다. - P296

버고인 부대는 다양한 병력이 모인 혼성 부대였고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했다. 이에 맞서는 아메리카 북부군의 지휘관 필립 스카일러는 부대를 제대로 장악하지 못했으나 호레이쇼 게이츠로 지휘관이 교체되면서 아메리카군에 호기로 작용했다. 결국 호레이쇼 게이츠와 베네딕트 아놀드가 이끄는 아메리카군에게 영국군이 항복하고 만다.
하우는 브랜디와인과 저먼타운에서 아메리카군을 물리쳤으나 완전한 승리 상태는 아니었다.

영국과 아메리카 사이의 관계가 흔들리자 유럽의 판도도 불안정해졌다.
영국의 라이벌인 프랑스와 스페인이 영국을 흔들기 위한 기회를 엿보았다. 프랑스와 아메리카가 비밀리에 접촉함으로써 전쟁의 양상은 유럽의 정세를 흔드는 것으로 변모한다.

1778년 3월 영국은 윌리엄 하우 대신 총사령관으로 헨리 클린턴 장군을 임명한다.
전쟁은 프랑스에 대항하는 것이 되어야 했기에 서인도제도에 일부 병력을, 플로리다로 일부 병력을 파견하고, 나머지 병력은 직접 이끌고 뉴욕으로 철수하라는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하지만 영국의 핵심 전력은 아메리카에 있었고 서인도제도에서 프랑스에 맞설 군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겨울이 되어 워싱턴이 이끄는 아메리카군은 포지 계곡으로 이동해 겨울 숙영을 했으나 추위와 배고픔에 어려움을 겪었다.
워싱턴 자신도 간단한 식사를 했고 모자란 식량을 구해보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대륙회의 의원들은 필요 식량을 민간에서 강제 징발하라고 권유했으나 워싱턴은 이를 물리쳤다. 혁명의 원칙을 훼손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물론 때때로 물자를 압수하거나 무력으로 빼앗는 경우도 생겼으나 이 때도 약속어음을 주고서 가져오고 판매자 이익을 가능한 보호하려 애썼다.
탈영 병사는 많지 않았으나 일부 병사들은 인근 농가를 약탈하거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총을 쏘는 병사들이 생겼다.
열악한 환경은 군기 저하를 불러올 수 있었다.

병사들에게 군사 훈련을 시킬 조련사로 프로이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슈토이벤 남작이 등장했다.
그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소개장으로 아메리카에 도착해 대륙회의를 찾아간 뒤 포지계곡으로 가게 된 것이다.
슈토이벤은 프로이센군의 앞서가는 병영 체계와 전투 방식을 워싱턴 군대에 전수해주었다.

워싱턴은 필라델피아에 파견되 있던 스파이로부터 영국군이 그곳에서 뉴욕으로 떠날 것 같다는 첩보를 받는다.
프랑스의 라파예트 후작은 적 보급선을 타격하겠다고 워싱턴에게 제안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그는 필라델피아로 떠났다.
라파예트가 아메리카로 건너온 1777년은 21세도 채 되지 않은 나이였다. 부모와 왕은 그가 목숨을 버리지 않길 원했으나 영국의 독재에 맞서 싸우기 위한 목적 하나로 아메리카로 건너갔다.

워싱턴은 아메리카군을 이끌고 포지 계곡에서 동쪽으로 이동하여 델라웨어강을 건넜고, 영국군은 앨런 타운을 지나 샌디 훅 방향으로 진군했다. 양군은 몬머스 법원 청사에서 충돌하였다.
영국군은 찌는 더위에 긴 거리를 이동하여 지쳐 있었다. 
울퉁불퉁한 길과 모직 군복, 성가신 소총 등으로 인해 더욱 버거운 상태였다.
헤센인 용병 부대는 영국군보다 더 두꺼운 군복을 입었기에 고통이 더 컸다.

워싱턴은 지휘관들을 사령부로 소집했다. 이 중에 찰스 리가 있었다.
그는 워싱턴과 하우 사이의 포로 교환 합의에 의해 4월에 영국군 포로 신세에서 해방되어 아메리카군에 돌아온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가 영국군에 잡혀 있는 동안 영국군에게 작전 계획을 제공하는 등 동료를 배반한 흔적이 보인다.
포로 신분에서 돌아온 뒤에도 아메리카군은 영국군을 이길 수 없다는 식의 발언을 했고 워싱턴이 지휘관을 맡아달라고 요청했으나 거절, 라파예트가 적임자라고 했다가 라파예트가 다시 지휘를 맡겠다 하자 돌변하여 지휘관을 맡겠다 선언하는 모습을 보인다.
여러 가지로 볼 때 그는 지휘관을 맡기에는 자격이 없는 인물이었으나 워싱턴은 그에게 지휘권을 부여했다.
하지만 그것이 패인이었다. 그는 전투에서 다른 지휘관들에게 제대로 지시를 내리지 않았고 전선 구축에 대한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
다행히 워싱턴은 불리해진 상황에서 퇴각하는 아메리카군을 잘 이끌어내었다.

해가 바뀌기 전까지 양측에게 전투는 계속 이어졌으나 1778년 말이 되자 영국 내각과 의회 내 비관론이 커졌다.
식민지에 병력을 집중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하고 아메리카 전쟁도 실패라는 것이었다.
아메리카군도 초조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워싱턴은 전쟁 종결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남부에 희망을 걸기로 한다.

1779년 12월 26일 영국군 원정대는 뉴욕을 떠났다.
찰스턴은 남부 도시들 중 유일하게 1만2천명의 시민이 거주하는 지역이었다. 거주민들은 주로 영국인의 후손이었으나 흑인 노예도 많았고 프랑스 신교도도, 소수지만 프랑스인과 독일인도 있었다.
찰스턴에서 공성전이 발생했고 캠던 전투에서 승리를 취한 영국군은 남부를 반격의 기회로 삼을 수 있게 되었다.



2권은 둘 간의 많은 전투를 담고 있어 많은 전투명이 나오고 관련된 사건과 인물이 수없이 등장한다.
이 때문에 흐름을 놓치면 곤란할 수 있다.
집중해서 읽기를 권한다^^;

나는 이틀 만에 몰아 읽었는데
아메리카의 독립이 쉽게 얻어진 게 아니구나~
꾀를 가진 사람들이 머리를 짜내고 더 좋은 미래를 위해 많은 거래가 오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비록 한계를 가지기는 하지만 아메리카의 독립선언서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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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3-26 00: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벌써 2권? 전 아직 1권 읽고 있습니다. 요약 잘 해주셔서 넘 잘 읽고 갑니다 *^^* 그래도 1권 좀 읽었다고 아는 녀석이 피츠버그대 간다길레 오 월리엄 피트 이름 딴 동네? 하고 아는 척 했습니다 ㅎㅎ

거리의화가 2022-03-26 08:05   좋아요 2 | URL
윌리엄 피트 저도 1권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입니다. 인물에 대한 묘사가 잘 되어 있는게 이 책의 장점인 것 같아요ㅎㅎ 재밌게 읽으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