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홉스봄 평전 - 역사 속의 삶, 역사가 된 삶
리처드 J. 에번스 지음, 박원용.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202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문을 읽으면서 내가 생각했던 평전이 아니구나 생각했다. 자서전이 그의 공적인 기록이 많이 담겼다면 평전은 오히려 개인적인 사생활을 비롯한 내밀한 기록이 담겨 있었다. 좀 아쉽기도 했지만 그의 저서들이 나온 배경을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읽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cott 2022-04-25 11:2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홈스봄이 오래 살아서 평전 분량이 압도적 이게 늘어 났다고 했는데
공적 기록이 별로 담겨 있지 않다면
홈스봄이 남긴 모든 저작물을 읽는 편이 ㅎㅎ


거리의화가 2022-04-25 11:36   좋아요 2 | URL
네 맞습니다 스콧님^^ 저작이 정말 많더라구요. 제가 미처 못챙겼던. 그가 남긴 저작을 읽는 편이 훨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ㅎㅎ
 
전쟁일기 - 우크라이나의 눈물
올가 그레벤니크 지음, 정소은 옮김 / 이야기장수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가가 원래 쓰려고 했던 책은 평화로운 세계가 담긴 일러스트 동화였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후 기존 출판 계약 내용과는 다른 일러스트 일기가 출간되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쓰지 않아도 되었던 글과 그리지 않아도 되었을 그림이 책 속에 오롯이 담겼다.

올가는 며칠 간의 전쟁 끝에 집에 있는 것은 위험하다 판단했다.
처음에는 엄마와 할머니, 할아버지와 헤어져야 했고 이후에는 남편과 헤어져야 했다.
아이들을 위험에 빠트릴 수 없었던 자신의 선택 뒤로 불안과 공포감은 늘 도사렸을 것이다.
하물며 남은 가족들과 헤어진다는 것은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슬픔보다는 두려움이 더 크지 않았을까.

작가는 그렇게 불가리아로 왔다.
전쟁은 전쟁일 뿐 우크라이나 사람이든 러시아 사람이든 평화를 원한다는 작가의 말이 맴돈다.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은 전쟁 최고 피해 지역이 되었다.
볼로미디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결사 항전으로 맞서겠다 했지만 곧 러시아의 수중에 들어간다는 소식이 임박했음이 전해지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피해는 늘어가고 전쟁의 피해는 참혹하기만 하다.

비단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의 전쟁이 아니라 이는 세계 곳곳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나라가 러시아에 대한 경제 제재를 가했으며
EU의 국제적 입지는 흔들리고 NATO 가입국과 비가입국 간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중도의 위치에 있던 나라들도 선택의 기로에 섰다.
북한은 핵실험과 공격 등 주변국의 위협에 대한 명분을 얻었다.

2022년의 시작은 전쟁의 기함 속에 시작되었다.
이 파괴는 평화롭게 끝날 수 있을까.
최대한의 피해를 부르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얄라알라 2022-04-20 10: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표지를 보고, 담아두었던 책인데,
더욱 슬프게도 작가가 중간에 집필 방향을 틀어 쓰게 된 것이네요. 저는 3월 비극 진행 중에 급 진행된 작품이겠거니와 했어요.

˝새벽 3시에도 편의점 외출이 안전한 나라,˝ 평온한 일상을 강조한 신문기사와
길 가다가 미사일 폭격 받고 구사일생 살아난 우크라이나 시민 동영상이 동시에 온라인 공간에 도는 이 상황에서
말하기에도 조심스럽지만, 죄책감을 느낍니다

거리의화가 2022-04-20 10:21   좋아요 2 | URL
작가가 원래 일러스트 동화를 작업하는 지라 어린이를 위한 아름답고 섬세한 글과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해왔는데 생각지 못한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이리 되버린거죠. 얇아서 금방 읽히는데 다큐멘터리 일기라고 해야할까요? 전쟁 개시 후 불가리아로 오기까지의 참상이 담겨있답니다. 마음이 아팠어요ㅜㅜ

scott 2022-04-20 10: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넘 맘이 아픕니다 ㅠ.ㅠ 작가님 한국 방송(JTBC) 인터뷰에서 한국 넘 고맙다고 지금 아이들과 불가리아에 있다고 하네요 번역자님도 이번 원고료 모두 기부 하고 작가님 남편분은 현재 적십자에서 물품 우송(운전) 하며 가족과 만나는 날만 고대하고 있는 ㅠ.ㅠ

거리의화가 2022-04-20 11:05   좋아요 2 | URL
작가님 방송 인터뷰하셨군요. 아직 보지 못했는데 찾아봐야겠어요ㅜㅜ 남편분도 봉사하는 삶을 살고 계시죠.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환경에서 그런 결정이 대단해보이기도 하고. 저는 남편분과 헤어질 때 책 읽으면서 특히 너무 슬펐어요. 가족들이 모두 만날 수 있는 날을 기다립니다.

mini74 2022-04-20 11: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담아둔 책인데 ㅠㅠ너무 슬프네요 어서 평화가 찾아와 가족들이 서로 만나고 작가분이 아름다운 동화를 다시 쓸 수 있길 바라봅니다 ㅠㅠ

거리의화가 2022-04-20 11:34   좋아요 3 | URL
네 미니님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게 된 상황이 넘 마음이 아파요 엄마로서 아이들을 살리기 위한 결정이었는데 얼마나 가족들이 그리울까요ㅜ 평화는 이리도 요원한지 2022년은 시작부터 너무 암울합니다.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 - 남방의 포로감시원, 5년의 기록
최영우.최양현 지음 / 효형출판 / 202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상상이 아닌 실제에 나는 약하다.
이 일이 불과 80년 전 벌어진 일이라 생각하니 책을 읽는 내내 소름이 끼칠 수 밖에 없다.

식민지 조선에서 청년기를 보내던 그는 어느날 갑작스레 타국으로 향했다.

1923년생. 그가 조선을 떠나 남방으로 향한 것은 1942년. 정확히 스무살이었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 후 태평양을 전쟁의 화마에 빠져들게 만들기 시작한 다음 해였다.

그는 전라북도 남원의 유명 양반가인 삭녕 최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탄탄한 지주 집안이었으나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하고 반봉건 의식이 일반화되면서 집안은 이전처럼 유지될 수 없었다.
집안이 소유하고 있던 논밭은 흩어지고 전쟁 이후 징병과 징용이 시작되면서 집안에도 불화가 닥쳤다.

내선일체를 주장한 일본인은 조선인 청년들도 일본을 위한 전쟁에 차출되어야 한다며 군속 모집을 대대적으로 단행했다.
당시 포로감시원은 일본군이 전쟁을 수행하며 사로잡은 적군인 미국군과 영국군 포로를 감시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최씨 집안 형제 중에도 하나는 희생되어야 했는데 차남이었던 최영우는 집안을 위해 그렇게 희생의 길을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부산 서면의 노구치 부대에서 혹독한 훈련을 2달간 받았고 사이공을 들렀다 9월 10일 싱가포르를 찍고 말레이시아 창이 포로수용소를 찍고 다시 9월 14일 자카르타의 포로 수용소로 이동했다.
가는 동안 거친 풍랑 속에 난파의 위험을 몇 차례나 겪으며 겨우 살아 도착했다.

하지만 자카르타도 끝이 아니었다. 그의 최종 목적지는 말랑이었다. 자바 섬은 인도네시아 중심 섬으로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 포로수용소 사령부가 존재한 만큼 전략 지역이었다.

일본이 오기 전 이 곳은 네덜란드의 점령지였다. 때문에 일본군이 인도네시아에 왔을 때 피부색이 비슷하고 골격이 같은 탓에 인도네시아 국민들은 이들이 점령군이 아니라 자신을 구원해줄 자로 여겼다.

첫 번째 근무지는 말랑 제5분견소였다. 포로는 약 5천 명으로 대부분이 화란인이었고 영국인과 호주인도 일부 있었다. 화란인은 백인이 절반, 동양계 혼혈 2세, 3세가 절반으로 아주 구성이 다양했다.

이 곳에도 위안소가 존재했는데 최영우도 이 곳을 방문했다. 대부분의 여인이 조선인임을 알게 된 그는 안타까움을 드러내지만 마음 뿐이었다는 것은 그도 어쩔 수 없는 남성이며 군인이었다는 한계를 드러낸다.
위안소는 동남아시아 전역에 100여 곳 이상 존재했을 것으로 추산된다.

1년이 지나고 전쟁은 대치 상태에 접어들었고 태평양 섬들에 끊임없는 공습으로 보급은 제 때에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보급이 끊기자 지방의 각 포로 수용소는 수도 자카르타로 집결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자카르타 총분견소는 지방의 각 수용소 중 가장 규모가 크고 핵심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갑작스런 호명을 받고 어디 가는지도 모른 채 배를 타고 이동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군 점령지를 연합군이 다시 차지하면서 태평양 바다에서는 격전이 벌어졌다. 그가 타고 있던 배도 이동 중 무수한 공격을 받아 격침되어 바다를 떠다니다가 다른 배에 구조되어 겨우 육지에 닿을 수 있었다.
결국 승선 인원 중 30여 명은 실종되었다.

일본군은 인도네시아 점령 후 네덜란드인의 자치를 허락하고 비교적 자유를 주며 관리했다. 그러나 1942년 전황이 불리해지자 이들을 한 공간에 억류하는 조치를 시행했다. 초기에 2천여 명에서 시작했던 억류 인구는 전쟁 말미 1만여 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포로수용소와 다름 없는 처우로 인해 억류인들 중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포로들은 수마트라의 페칸바루 철도 공사를 위해 동원되었는데 무덥고 습한 환경 속에 이질, 말라리아에 쉽게 걸렸고, 부족한 급식으로 영양실조에 노출된 상태였다. 일본군이 이들을 강제 노역에 마구 동원하면서 사망자는 속출하였다. 이 철도는 '지옥의 철도'로 불렸다.

자카르타 포로수용소에서는 수시로 포로들을 이동시켰고 그 때문에 최영우도 싱가포르로 이동하게 되었다.
당시 싱가포르는 네덜란드가 아닌 영국의 식민지였다.
네덜란드인은 화교를 탄압하였으나 영국은 이들의 상업 활동을 허락하였기에 싱가포르는 1940년대부터 동남아시아 최대의 무역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동시에 싱가포르는 영국군의 아시아 최전선 기지 역할을 하였다.

싱가포르에 보름쯤 있다가 최영우는 생채소를 오랫동안 제대로 섭취하지 못한 탓에 각기병에 걸린다. 이 때문에 자카르타 분견소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그곳에서 작업을 나갔다가 여인 하푸카스(네덜란드인과 인도네시아인 사이에 태어난 혼혈인)를 만난다.
다시 만날 기약을 하며 일단 그곳에서 그녀와 헤어진다.

인도네시아는 300년 넘게 네덜란드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혼혈인이 무척 많았다고 한다.
포로감시원은 청년들이 많았는데 1945년 종전 후 포로감시원이 그들과 결혼하여 현지에 정착한 경우도 존재했다.

이후 최영우는 근무지가 또 바뀌어 글로독 수용소로 전근을 가게 되었다. 글로독은 자카르타 지역 중 오래된 역사를 지닌 곳으로 화교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전에는 네덜란드 통치 당시 인도네시아 범죄자나 독립운동가를 투옥했던 장소로 유명한 곳이었다.

1945년 6월 글로독 수용소에 독일군 포로가 들어왔다. 독일은 이미 패전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연합군과 싸울 이유가 없어졌고 동남아시아 전선에서 일본군을 돕던 독일군은 투항 후 포로가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다.

그가 하푸카스에 대한 애정을 키울수록 전황은 복잡해져만 갔다.
막바지에는 그녀를 만나러 가는 것조차 힘들게 되었다.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 선언이 발표된다.
"일본은 연합국에 대하여 무조건적인 항복을 수락한다. (...중략) 항복한 일본군은 자기 가정으로 돌아가되, 우리들의 포로를 학대한 자를 포함해 일체의 전쟁 범죄자에 대해서는 엄중한 처벌이 가해질 것이다."
최영우를 비롯한 포로 감시원들은 마지막 조항 때문에 충격과 불안에 휩싸인다.

포로감시원들은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연합군 측과 교섭을 벌이려 '조선인 민회'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하지만 그들은 테러와 분란을 일으킬 수 있는 위험한 조직으로 인식되었다.

결국 포로감시원들은 승선 명령을 받고 싱가포르 창이 전범수용소로 가게 된다. 이전에 포로수용소였던 이 곳은 전쟁이 끝나고 나서 전범수용소로 바뀌게 되었다.
포로를 감시했던 그는 전범이 되었다.

하푸카스와는 헤어진다는 말조차 못하고 그렇게 그곳을 떠나오게 되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만난 사람이었기에 그 애정은 더 각별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헤어진다는 인사만이라도 했으면 조금 나았을 것 같은데 아마 평생의 한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당시 인도네시아는 독립을 외치던 노선의 갈등이 극도로 치열하여 해방 후 한국 상황과 매우 비슷했다.
더군다나 네덜란드는 일본군이 물러나기 이전 자신들의 지위를 탐냈다. 이 때문에 인도네시아 독립군과 화란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은 1945년 8월 17일 시작되어 1949년 12월까지 4년간에 걸쳐 벌어졌고 80만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창이 전범수용소에서 힘겨운 생활을 끝마치고 치피낭 형무소로 왔다. 치피낭 형무소는 20세기 초 네덜란드 식민 정부가 인도네시아 독립운동가를 수감하기 위해 만든 곳이었고 태평양 전쟁 때는 포로 수용소로 이용되었다.
이곳에서는 그나마 하는 일을 선택할 수 있었다. 식사도 조금 나아졌다. 하지만 치피낭 형무소는 열악한 수용 환경으로 최근까지도 고발이 됐을 정도로 악명이 높은 곳이라고 한다.

이것에서 최영우의 기록은 끊긴다.
그는 1947년 3월 자카르타 항구에서 조선인 동료 173명을 태운 귀환선에 함께 몸을 실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떠난 것은 1942년 8월, 돌아온 것은 1947년 3월 약 5년 만이었다.

그가 돌아왔을 때 식구들은 그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피골이 상접해 있었고 낯빛은 어두웠으며 고된 억류 생활로 우울함이 느껴졌다고 한다.

조선을 떠나기 전 그는 하고 싶은 것이 무척 많았던 젊은이였다.
힘든 세월을 견디고 돌아온 그는 어느덧 노총각 대열에 진입해있었다.

2002년 작고하기까지 남은 세월을 어떻게 보냈을까. 역시 상상할 수 없는 서글픔과 괴로움이다.
이 책을 읽으며 비슷한 처지였던 이학래를 떠올렸다. 그의 영상과 글이 남아 있으니 추가로 본다면 더 도움이 될 것 같다.


달리는 기차에서도, 기차가 쉬고 있는 정거장에서도 전투모와 군인만 보이면 곳곳에서 손을 흔들어 댄다. 실로 지금 이 땅은 환호의 일색이다. 일본군은 해방자이고, 원수 화란을 몰아낸 자이며, 은인이다. 이들에게는 수백 년 만에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 P63

이 광경을 처음 목격했던 나는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제는 눈물도 마르고 한숨도 멀어져 버렸다고 하는 게 낫겠지. 하지만 나이 많은 동료 중에는 그녀들과 잘 어울리며 휴일과 근무일을 막론하고 위안소를 자주 찾는 이도 있었다.
포로 감시원 대부분은 이국 여인의 낯선 정취를 좋아했다. - P82

그제야 끼리끼리 패를 지어 점검을 하니 가까이 지내던 동료 두 명이 보이지 않는다. 총 삼십여 명이 실종되었다고 한다. 산 사람의 입장에서 동료의 죽음은 슬픈 일이었지만, 지금은 내 목숨을 건졌다는 게 더 중요하다. - P102

이들은 어디서나 군소리 없이 줄지어 서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다. 그러니 재촉하거나 꾸짖을 필요는 없다. 그들은 가진 능력 그대로를 성실하게 행한다. - P106

하루는 독일인 포로들이 들어와서 따로 수용되었다. 근 몇 년간 일본의 동맹국 군인으로 우리와 함께 협력하여 작전을 수행했지만, 1945년 5월 독일이 항복을 했으니 이젠 적군이 된 것이다. 그리고 6월부터는 수용소 신세가 되었다.
"저들은 싱가포르를 기점 삼아 영미군의 배를 공격했다고 하는데."
"일본군 측에서는 믿을수가 없겠지. 전투에 내보냈다가 연합군에 투항하면 역이용할지 모르니까."
"우수운 운명이구먼." - P147

나는 금반지와 손목시계를 그녀의 집에 맡겼다.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함께 궁리해 본다. 촌락으로 들어가서 은신하면 어떨까. 내가 여기 새 나라의 국군으로 들어간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나 이곳에 정착해 버리면 조선에서 기다리는 부모 형제와의 재회는 단념해야 하며 이는 불안을 자처하는 행동일 수도 있다. 어느 안도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고 안전한 것이 못 되어 결정과 행동으로 옮길 수 없었다. - P165

당장은 먹을 것이 문제였지만 앞으로 우리를 어떻게 할 것인지 그 의도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저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사진을 찍어 가는 것뿐이다. 앞으로 찍고, 옆으로 찍고, 그런 식으로 몇 번이고 사진을 찍는다. - P185

석 달이 지나고 넉 달이 되니 늑골이 적나라하게 불거졌다. 마치 뼈로만 걸어 다니는 인간 같다. 어쩌다 수용소 밖에서 작업할 일이 생겼다. 굶주린 우리들은 밭에서 김을 매는 시늉을 하면서 뿌리고 잎이고 먹을 수 있는 것들은 죄다 뜯어 입에 넣었다. - P186

언제 교수대가 나를 부를지 모른다. 이 머나먼 이국땅에서 겪는 운명의 장난 치고는 너무 가혹하다.
큰 감방에서 이리저리 사람이 빠져나가고 나를 포함해 대여섯명이 남게 되었다. 이제는 이 감방 안에 한 사람은 저쪽에, 다른 한 사람은 다른 쪽에 고독하게 앉아 있다. - P199

예전 생각이 난다. 우리가 포로들을 감시했을 때에 약간의 친절과 연민을 보였더라면, 저들도 지금 우리에게 두 배의 호의와 동정으로 갚으련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들이 우리를 이렇게 대하는 것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간다. - P200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ini74 2022-04-12 15: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글 읽으면서도 저도 감정이입이 되네요. 저희 아이와 비슷한 또래. 그 나이로 전쟁과 강제징역에ㅠㅠㅠ

거리의화가 2022-04-12 15:43   좋아요 2 | URL
미니님 아이가 있으시니 저보다 더하시겠죠. 제가 만약 아들을 먼 타지에 그것도 전쟁터에 내보내야 한다면~? 생각만 해도 힘드네요~ㅜㅜ
실제로 존재하는 이야기였기에 저도 글 읽으면서 많이 감정이입이 됐어요. 마지막 치피낭 형무소에서부터 조선으로 되돌아올 때까지 이야기를 기록하지 않아서 물음표가 될 수 밖에 없지만 아마도 심적으로 많이 힘들어서 글을 더 이상 쓸수 없지 않았을까 생각해봐요. 그래도 그 가족들 입장에서는 살아 돌아온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요.
전쟁은 정말 모든 이들에게 가혹함을 남기는 것 같습니다.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 - 남방의 포로감시원, 5년의 기록
최영우.최양현 지음 / 효형출판 / 202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스무살의 청춘을 좌절시킨 난폭한 시대. 하고 싶은 것이 많은 꿈 많던 젊은이가 집안을 대신해 타국으로 가 전쟁의 피해자가 되었고 나중에는 전쟁의 부역자로 이름지워져버린채 겨우 살아 돌아왔다. 좋은 전쟁이란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스포를 보지 않고 책을 봤음에도 기대한 것보다 soso했다. 반전이 드라마틱하거나 스펙타클하다는 느낌도 없었고~ 내가 너무 시니컬한건지... 아니면 내가 놓친 부분이 있던가~? 간혹 인상 깊은 문장이 나오기는 했지만 서사의 탄탄함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어들을 신중히 여기기- 사다리.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2-04-11 15: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4-11 15: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로 2022-04-11 17: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말씀하신 것 이해가 됩니다. 저도 반전이 있기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왜이리 왔다리갔다리 하는 거지? 재미없다고, 그런데 그 반전을 읽은 후 글이 더 아름답게 읽히는 마법이!!^^;; 저는 아주 좋앗어요. 하지만 말씀처럼 인상깊었던 문장은 별로 없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아주 좋았어요. 그 결론에 달하는 부분이, 어린 시절의 얘기부터 어쩐지 여자로서 공감이 되는 부분이 넘 많았던 것 같아요. 제가 자라난 상황은 많이 다르면서도 또 그렇지 않고,,, 암튼 저는 다시 읽어 볼 예정이에요. 그런데 처음 그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이야기를 또 읽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한숨 나옵니다만.^^;;

거리의화가 2022-04-11 17:45   좋아요 2 | URL
네^^; 조금 더 스토리를 매끄럽게 풀어주었다면 그래도 반전의 결말 후에 감흥이 있었을 것 같아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