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만강 국경 쟁탈전 1881-1919 - 경계에서 본 동아시아 근대 너머의 글로벌 히스토리 2
쑹녠선 지음, 이지영.이원준 옮김 / 너머북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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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한반도의 국경은 자연스레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 부근이고 간도 지역은 1909년 중일간 간도 협약 이후 현재의 영토 범위로 되었다라고 인식되어 있다.

남한은 두만강과 압록강이 한반도의 국경임에도 육로로는 가볼 수가 없어 체감상 거리가 까마득하다. 간도 지역은 더하다.
사실 그 지역을 직접 피부로 느끼는 것은 북한일 것이다. 한반도의 국경선이 직접적으로 맞닿아있고 간도 지역도 거리상 가까우니 말이다.
일본은 근대 시기에 식민지 제국의 대륙 발판기지로 만주 지역을 선택하면서 분쟁에 개입했다.

지난 저작 《동아시아를 발견하다》에 이어 저자 쑹녠선은 동아시아 근대를 삼국을 중심으로 다각도로 바라본다. 먼저 경계라는 의미부터 살펴본다. 

마르틴 하이데거의 유명한 말처럼 경계는 "무엇인가가 멈추게 되는 지점이 아니라 무엇인가가 존재하기 시작하는 지점이다." 이 관점은 변경에도 적용된다. 변경은 단순히 주변이 아니라 상호작용하는 장소다. - P31

서양학자 앙드레 슈미드는 두만강 경계 획정을 한국 국가건설 과정의 한 부분으로 간주한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새롭게 상상된 '한민족'이 제기되었고, 민족주의 사상가들이 현재의 정치적 주장을 뒷받침하려고 과거에 대한 낭만적 향수를 이용하기 시작했음을 그의 연구는 보여준다.
나는 이러한 관점을 수용하면서 두만강 지역의 국경 형성을 검토하는 대안적 공간 단위로 '로컬'을 적용할 것을 제안한다. 이 '로컬' 개념에는 '다변적 로컬'과 '지역적 차원의 로컬', '지구적 차원의 로컬' 등 최소한 세 가지 지리적 층위가 포함되어 있다. 이 세 층위는 서로 다르지만 역동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 P33~34


두만강은 청 제국의 국경이었을 뿐 아니라 조선인의 거주를 허용하고 양국 간 무역을 장려하는 제국의 포용성 그리고 러시아와 일본을 차단하는 제국의 배타성을 모두 보여주는 이중적 상징이기도 했다.
만주에 대한 거버넌스와 인식은 다양한 압력에 따라 그리고 국경을 초월하는 행위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재설정되었는데, 이 행위자들은 최소한 세 가지(국내, 양자 간, 다자간) 상호작용하는 공간 층위와 관계되었다. - P89

그리고 한 사건이 등장한다. 1931년 7월 두만강 국경에 있던 정계비(목극등비)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조사차 들렀던 사람들은 비석을 확인했으나 백두산 천지에 다녀온 사이 그 자리는 텅 비고 실체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것은 조사의 핵심 증거물이었다. 

두만강과 간도를 둘러싼 이전 역사를 살펴보자.

두만강 유역 부근은 조선 초기 6진이 조선의 영토가 되면서 남쪽에 있던 백성들이 이곳에 유입되며 시작되었다. 하지만 국방을 위한 혹독한 세금의 수취 요구와 차별 및 배제로 많은 백성들이 불편과 고통을 겪고 있었다. 17세기 청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전해준 지도 제작법을 전수받고 새 지도 제작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청은 1710년 이전부터 답사대를 만주로 여러 차례 파견하면서 백두산을 황실의 산으로 선전하고 왕조의 건국신화를 강화하는 작업을 했다. 1710년 그 지역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지자 강희제는 목극등에게 재판을 감독하고 끝나면 청과 조선의 경계를 조사하라 명령한다. 조선은 청의 의도를 간파하였으나 협력할 수 밖에 없다 느끼고 1712년 현지 조사 후 두만강 수원지로 결정하고 6월 18일 비석(정계비=목극등비)을 세운다. 얼마 후 조선은 이 때 선택한 수원지가 두만강이 아닌 송화강의 지류임을 알게 되었으나 조정은 이 문제를 묻기로 하면서 청 조정은 이 사실을 모르고 넘어간다.
1713년 목극등이 백두산 수계와 지리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요구하자 조선 조정은 주는 시늉은 하되 자신의 이익을 지키려고 잘못된 지리 정보를 주었다. 장 밥티스트 레지(1663~1738)는 목극등이 한국에서 수집한 자료에 기초하여 한국에 관한 지식과 지도를 생산했고, 이는 나중에 프랑스의 중국학자 장 밥티스트 뒤 알드의 중국 서술에서 재생산되었다. 이후 약 200년이 지난 뒤 시노다 지사쿠는 레지 원고에서 특정 부분만 골라내어 사실을 편집하고 왜곡했다. 두 세기 넘게 변형된 지리 지식은 일본인에 의하여 두만강과 압록강 이북의 땅이 '무주지'로 간주되는 증거로 이용되기에 이른다.

한족과 만주족 정치가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추진해온 '영토화'와 '내지화'의 지속적 실천은 만주족의 고향이 '중국'이라는 새로운 개념 안으로 통합되어가는 길을 예견했다. - P154

간도 지역에 1877년 조선인 14가구가 용정에 처음 정착했다. 본래 있었던 세금 폐해에 이 무렵 조선에 심각한 자연 재해가 발생하자 많은 백성들은 살기가 어려워졌고 이에 자발적으로 간도로 넘어가게 되었다. 1881년 조선인의 월경 사건을 계기로 청과 조선이 두만강을 둘러싼 국경 조사/협상을 시작했으나 1887년까지 이어진 후속 조사에도 양국 간 타협을 보지 못한채 종결된다. 이후 청일전쟁의 결과 일본이 승리하면서 천하질서는 막을 내리고 청과 조선 모두 세계 질서로 진입한다. 이후 알다시피 1909년 간도 협약으로 두만강의 국경선이 확정되었다. 1909년 조선은 이미 외교권을 상실한 상태였고 일본은 이미 남만주 철도부설권 획득으로 대륙 진출의 야욕을 드러낸 상태였다. 러시아도 부동항을 얻기 위해 만주를 노렸으나 러일전쟁에서 일본에 패하면서 그 기회를 잃었다.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이후 독립운동을 위해, 먹고 살기 위해 간도에 모여드는 조선인들이 많아졌다. 청은 이를 어느 순간 민감하게 여겼고 일본도 식민지민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영토 전쟁에 뛰어들었다. 

만주에서든 전국 각지에서든 '비적'에 대한 청의 정책은 탄압과 수용이 결합된 야누스식 전략이었다. 반군을 진압하는 데 실패했다면 항상 대안은 있었다. 반군을 진압하는데 실패했다면 항상 대안은 있었다. 반군을 사면하고 그들을 징집하는 것이다. 이 전략은 비정부 무장 세력에게 국가와 사회 사이에서 활동할 수 있는 상당히 넓은 공간을 허용했다. 만주의 야심 찬 젊은이들에게는 토비가 되는 것이 단순한 생존 전략이었을 뿐만 아니라 신분 상승의 수단이기도 했다. 만주에서 여러 국가가 벌인 정쟁은 비정부 무장 세력이 서로 경쟁하는 국가들과 협력하거나 대항할 더 많은 선택지를 제공했다. - P187


두만강 국경 획정 과정은 동아시아 민족과 국가가 근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많은 문제를 남겼다. 이 과정은 복잡하게 얽혀 있었고 이후 이 땅에 조선족이 정착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기존의 연구는 두만강 경계의 영토 주권 문제에 집중한 측면이 크다. 이 책은 연속성을 이야기한다. 시간적으로는 전통에서 근대의 과정이 이분법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전통을 극복하고 근대를 수용하는 과정이 공존하고 상호작용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고 이야기한다. 공간적으로는 두만강을 단절된 경계선의 영역이 아닌 수많은 사람과 물자가 오랜 시간 교류하고 소통해온 연속된 공간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동아시아의 다변적 변경지대를 개념화하는 과정에서 유라시아대륙 양편 사이의 지적 연계의 역동성이 드러났다. 로렌 벤튼의 표현을 빌리면 무주지 개념이 보여준 여정은 "갈수록 더 서로 연결되는 세계 속에서 공간의 점진적 개념화에 관한 지배적 매력적인 서사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지난 3세기에 걸쳐 지구의 다양한 지역 간에 이루어진 오랜 기간의 상호교류로 권력을 둘러싼 경쟁에 따라 공간과 법에 관한 지식은 다양한 형태로 생산 재생산되고 변형되었다. 두만강 국경 지대에 대한 인식의 전환은 그 사례이며, 이로써 우리는 유럽과 동아시아의 관계를, 특히 서로가 상대방의 역사적 발전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더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 P248

책을 읽고 난 후 한국사에서 다루는 한국 영토의 인식에 대해 생각이 많아졌다. 정권에 따라 역사 교육은 저마다 다르게 전개되고 자국사를 한편으로는 국수적이고, 다른 한편으로 근대화와 개발의 논리에 맞춰 가르친다. 이에 맞춰 과거사의 영토의 범위는 축소되고 확장되었다.
역사 인식에 다양한 관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배우고 수용하는 대로 익숙한 관점에서 바라보기 쉽다. 이 책은 그런 내 좁은 관점과 식견에 대해서 상기시키게 만들어주는 책이었다.


간도와 만주를 둘러싼 영토 경쟁과 함께 이 다변적 변경에서는 지적 차원에서 '탈영토화'와 '재영토화'가 진행되었다. 한국과 중국, 일본의 대표 지식인들은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제시하면서 이 공간에 대하여 각각 민족주의적 제도주의적 식민주의적 계획과 구상을 제시했다. 각자의 구상은 상대방으로부터 지적 자원을 흡수했고, 서로 경쟁하면서도 서로에게 영감과 양분을 주며 강화했다. 이 다변적 상호작용 과정을 거치면서 만주, 특히 백두산의 개념은 그 환상이 벗겨졌다가, 합리화되었다가, 다시 환상이 입혀지는 과정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만주는 20세기 동아시아 정신의 역사에서 복합적이고 핵심적이며 독특한 위치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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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6-13 23:0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국경이나 영토 등과 관련되면 항상 더 복잡해지는 거 같아요. 넘 재미있게 읽었어요 ~~

거리의화가 2022-06-14 06:44   좋아요 3 | URL
미니님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용이 많은데 다 담을 수가 없었어요ㅠ 국경과 영토의 의미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책이었습니다.

새파랑 2022-06-14 06:3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딱 화가님이 좋아하실 스타일의 책이네요~!! 두만강이 저런 역사와 의미가 많았다니 놀랍기만 합니다. 역시 역사천재 화가님~!!

거리의화가 2022-06-14 06:47   좋아요 3 | URL
맞습니다 딱딱해서 제 스탈입니다. 두만강 국경선에 얽힌 스토리가 참 복잡다단하더군요. 리뷰 내용에 차마 다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숨은 이야기가 많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새파랑님^^

scott 2022-06-16 00:1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간도 까지 우리 한반도 영역인데 ㅜ.ㅜ

국경의 밤이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

거리의화가 2022-06-16 08:56   좋아요 3 | URL
간도 땅에 우리 동포들이 왜 그리 많이 흘러들어가게 됐는지 기원을 알게 되니 달리 보이고 그렇습니다ㅠㅠ 먹고 살기 위해, 독립 운동을 위해 숨어들어간 곳이니까요~ 중국인들과의 마찰도 무시못할 일이었을텐데 그곳 생활이 결코 녹록치 않았을 듯합니다. 나중엔 일본인까지-_-; 1945년 이후에는 더 먼 땅이 되어버렸네요.

그레이스 2022-06-16 23:1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책 담아둡니다!

거리의화가 2022-06-17 09:11   좋아요 2 | URL
그레이스님 이 책 문체는 딱딱해도 두만강과 간도에 얽힌 한중일 삼국간 서로 다른 관점들을 엿볼 수 있을듯합니다. 도움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동아시아를 발견하다 - 임진왜란으로 시작된 한중일의 현대
쑹녠선 지음, 김승욱 옮김 / 역사비평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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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통해 얻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가? '동아시아'와 '현대'라는 용어의 기원과 둘의 관계에 대한 모색이었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현대'는 대체로 19세기 이후 유럽 식민주의의 팽창과 함께 이루어진 세계사적 전환이다. '동아시아'는 어떨까? 냉전 이후 자본주의 국가->발전 이라는 흐름 속에 '동아시아'는 지역적 의미가 아닌 민족이나 종족성 의미를 내포하게 되었다. 저자는 일반적 현대의 개념이 아니라 '동아시아 현대'를 정리하려 했는데 그 기점이 16세기이다. 따라서 부제도 '임진왜란으로 시작된 한중일의 현대'로 되어 있다.

'동아시아' '중국' '일본' '한국'은 시대마다 다른 함의를 내포한다. 이 개념들은 구역 내부의 교류 및 구역과 외부의 상호작용 속에서 점차 형성된 것이다.  그것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끝나지 않았으며, 미래에도 분명히 낡은 내용은 버려지고 새로운 내용이 첨가될 것이다. 오직 변하지 않는 것은 그것들에 대한 부단한 정의, 부정, 재정의다. - P15

책의 내용은 약 16세기 말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구역의 역사가 세계 역사의 흐름 속에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살펴보는 과정을 담고 있다. 다만 사료를 새로 발굴했거나 독특하거나 새로운 내용이 있거나 하지는 않는다. 대부분 삼국의 역사를 공부했다면 알 만한 내용이기 때문에 상식적인 내용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서양철학자 헤겔(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1770.8.27~1831.11.14)은 이성이 인류를 진보로 이끌어가는 메커니즘을 삼단논법인 변증법을 통해 설명했다. 이는 유럽을 이성-선진-문명-진보로 여기고 아시아는 야만-낙후-우매-정체로 하여 부각시켰다. 이는 일반적인 유럽(인)의 시각이었다.

아시아가 존재하는 의의는 유럽이 왜 유럽인가를 증명하는 데 있었다. 1885년 「탈아론」은 헤겔 이래 유럽 사상 속의 이 '아시아 안티테제'를 상당 정도 드러내고 있었다. - P23

유럽 중심 시각의 영향 아래 아시아 안티테제'는 동아시아 모든 국가에서 일찍이 자리했다. '아시아주의' 속에 서양은 종족과 문명이고, 제3세계 이론 속에 서양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를 대표하였다. 따라서 ''동아시아' 개념은 내부에서 생겨난 듯 보이지만 매우 강한 외부적 영향이 접목되면서 탄생했다고 보아야 한다.

'아시아'는 본래 타인 눈 속의 타자였다. 그러나 동아시아인은 이 개념을 가져와서 역으로 타자를 주체적인 자기 인식으로 변화시켰다. 스스로 인식한 '아시아'도 상당 정도는 유럽(또는 서양)을 안티테제로 삼은 것이다.
「탈아론」에 대한 단순화된 해석은 곧 '현대화'를 탈아와 동일시한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이 여전히 익숙하게 '우매 폐쇄 야만 전제'와 같은 크고 부당한 모자를 씌워서 동아시아의 역사 경험을 부정한다. 그에 내재하는 논리는 '탈아'와 일맥상통하며, 심지어 지적인 면에서는 더 나태하고 조악하다. - P24


조선전쟁의 '현대'적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동아시아 국제 관계 기억의 결절점이자 원점이라는 데 있다.

첫째, 이 전쟁에 대한 한중일 삼국의 서사는 처음부터 줄곧 서로 다른 방향을 지향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둘째, 삼국은 이후 다른 시기에, 늘 이 전쟁에 대한 회고를 통해 당면한 자신의 운명, 민족의 운명, 세계 구조에 대한 역사적 해석을 찾았다. 자료와 연구가 이미 한우충동汗牛充棟이지만, 이 충돌에 대한 동아시아인의 인식은 시종 혼란스럽게 나뉘어서 나라에 따라, 시기에 따라, 정세에 따라 다르다. 그뿐 아니라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인식과도 연관되어 있으므로 정체성의 변화에 따라 서술도 바뀐다. - P63

전쟁에 대한 삼국의 기록은 저마다 다른데 이마저도 서로에게 유리하게 기술되어 있는 탓에 후대의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렵게 할 뿐 아니라 평가에도 어려움을 겪게 한다. 임진왜란을 바라보는 전쟁의 성격, 전쟁의 명칭은 삼국이 서로 다르다.

임진왜란의 배경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심도 큰 몫을 차지했으나 더 큰 것은 경제적인 이유였다라고 생각된다. 명과 일본 사이에는 100 여년 동안 감합무역이 이루어졌으나 16세기 중엽이 되면 감합무역은 중지되고 공식적 교류도 단절된다. 이 상황에서 일본은 조선과의 교류가 중요해진다. 이전에 조선과 일본은 통신사와 수신사를 서로 파견하였고 부산에 왜관이 설치되면서 상인의 거래가 가능했다. 조선-일본을 이어주던 쓰시마 섬 영주는 일본의 커지는 요구에 문서를 날조하여 조선에 전달했고 조선은 일본의 목적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 전쟁에서 삼국이 악역으로 삼은 인물은 누구일까? 명의 심유경이다. 그는 자싱 출신으로 일본과 왕래하면서 일어를 할 줄 알았다. 일본이 조선을 침공하자 병부상서의 요청으로 일본과 교섭하게 되었다. 그는 적의 요구를 적당히 들어주면서 평화를 이끌어내려고 했다. 문제는 중국과 조선 사이 오가는 문서를 위조했다는 사실이다. 심유경의 죄는 결국 만력제에게 드러나 전쟁 후 참형에 처해진다. 심유경은 동아시아의 조공 체제를 잘 알았고 체제 담론 아래서 어느 정도의 변통 내지 조작의 공간이 있을 수 있음을 잘 아는 인물이었다. 그는 중국과 일본 간에 요구사항을 잘 알았기에 적당히 얼버무리고 넘기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실제로 중국과 일본은 그의 설득으로 전투를 멈추고 공격을 중단했다.

미국 역사학자 피터 퍼듀는 종번 담론이 일종의 '과문화 언어(Intercultural language)'로, 상당히 큰 융통성을 가지고 서로 다른 목적으로 사용되었다고 지적한다. - P71


만주 지역은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변방으로 치부되기 쉽다. 그러나 중국의 내륙아시아 특히 동북 지역은 농경 지대도, 유목 지대도 아닌 중간 지대로 누르하치가 굴기한 것은 명, 몽골, 조선 등 모두의 역사에 걸쳐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임진왜란은 조선에도 영향을 미쳤으나 명이 조선에 참전하면서 만주 지역이 다각도로 변화하는 데도 영향을 미쳤다. 명조가 조선에 파견한 부대가 만주 동북의 여진, 몽골 등의 부족을 견제하기 위한 요동 부대였기 때문이다. 이들이 파견되면서 역설적으로 동북 변경은 틈이 생겼다. 게다가 명 내부에 반란이 일어나면서 명 조정은 이것에도 대응해야 했기에 누르하치가 주변 부족들을 위협하여 통합하는 동안에도 충분한 군대를 투입하지 못하게 되었다. 누르하치가 사망할 즈음 정권은 이미 여러 부족이 결합한 다원적 국가였다. 홍타이지는 이후 조선을 두 차례 공격하여 명까지 전쟁에 참여하게 만든다. 게다가 차하르를 포함한 내몽골 전체를 복속시킨다.

여기에서 동아시아의 민족은 어떻게 구분해야 할까? '이족'과 정통이란 구분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동아시아 각국의 민족주의는 확실히 19세기 이후의 의식으로, 전 지구적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이중 압박을 받은 뒤에 피동적으로 발생한 '상상'의 산물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결코 공중누각은 아니며 역사가 형성한 신분 정체성 인식의 기초 위에 접목된 것이다. 이 신분은 '민족'이 아니지만 후대인에 의해 매우 쉽게 '민족'으로 개편되었다. 민족과 민족주의 양자는 모두 인위적이며 비자연적인 산물이다. 민족주의 이전의 엘리트 계층은 결코 현대 민족주의자처럼 하층 민중을 포함한 전체 '국민'을 동원하여 '한 쟁반의 흩어진 모래'를 하나의 통일적인 '국國/족族'으로 만드는 데 힘을 쏟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 인식을 자기 계층의 문화와 정치 신분에 더 많이 호소했다. 중원, 조선, 베트남, 일본에서 이 엘리트 계층은 유가儒家 사인士人 집단을 주요 대표로 삼았다. - P99

청조 통치자는 중원 지역에서 "화와 이를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일부 한의 유학자들의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청 조정은 명조의 정치와 이념 이데올로기를 계승하기는 했으나 다양한 집단들을 포함한 국가였기에 이를 아우르는 논리가 필요했다. 동아시아 세계에 명조 시기 형성된 '중화'라는 인식의 개념이 청의 등장으로 변화가 생긴 것이다.


기존의 '중화'는 성리학 학풍을 따르는 것을 전체적으로 지칭하는 흐름인데 명의 유학자들은 자신들을 '중화', 조선의 유학자들은 '소중화' 로 이를 지칭하였다. 청은 명의 제도를 계승하여 예부를 통해 대외 교류를 이어갔다. 이는 종번(조공-책봉) 체제를 기반으로 조선과 일본 등의 국가와 관계를 맺으면서도 다른 제도를 통해 내륙아시아 변강 지역(몽골, 칭하이, 티베트, 신장 및 서남 지구)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그 책임기구는 설립 초에 '몽고아문'(1636)으로 바뀌었다. 순치 연간 이번원은 예부에서 벗어나 외번 사무를 전담하는 독립 부문이 되었다. 이번원으로 내륙아시아에 대한 통치를 실시한 것은 청이 명과 다른 매우 큰 특징이며, 오늘날 중국이 '중국'으로 될 수 있도록 한 중요한 걸음이었다. - P113

홍타이지는 폭력과 강압만이 아니라 정치 체계와 종교 신앙 측면에서 자신과 몽골을 한데 섞어 하나로 만드는 데 주력하였다. 군사 무역 이민 등의 방식으로 영토와 인구를 탄탄히 하고, 지역을 나누어 집정관을 파견하여 관리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17세기가 되면 동아시아의 '중화' 체계는 모호해지고 청을 중심으로 한 '천하' 질서로 바뀌게 된다. 중국은 여러 부족이 통합된 단일국가가 되었고 러시아와의 변계가 확정된다. 종번 원칙을 통해 조선 및 베트남 등과도 경계가 획정된다.


대항해 시대 로마교황청과 스페인 포르투갈은 동맹을 맺고 유럽 바깥의 세계에서 공동으로 식민지를 개척하게 된다. 1494년과 1529년 토르데이야스 조약과 사라고사 조약을 체결하여 지구를 동서로 분할하여 스페인은 아메리카와 태평양 서부를 맡고, 포르투갈은 아프리카와 아시아 대부분을 포함하여 브라질 동부에서부터 인도네시아 군도에 이르는 지역을 갖게 된다. 이 때 예수회는 로마교황청과 포르투갈의 후원을 받아 아시아로 진출하게 된다.

마테오 리치는 중국에 선교를 위해 갔으나 선교만이 아니라 유럽 문명을 전파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는 중국 뿐 아니라 조선과 일본에도 전해진다. 마테오 리치는 세계지도를 통해 아시아라는 용어를 출현시키기도 했다. 물론 이 때의 아시아라는 용어는 새로운 공간 인식의 틀을 의미하는 것이다.
마테오 리치는 중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높았고 일방적인 전달 방식이 아니어서 청 강희제에 의해 '마테오 리치 규칙'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았다.

마테오 리치 규칙은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이질적인 두 문화가 만났을 때 좋은 측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이며, 상호 적응을 시도하는 노력이다. 이는 중국 역사에서는 그리 신선하지 않지만, 줄곧 이슬람의 부상을 위협으로 보고 또 바야흐로 신교의 충격을 받은 천주교 유럽의 입장에서 보자면 대담한 조치였다. 바로 이러한 태도에 이끌리는 가운데 천주교의 몇몇 기본 개념은 한어 맥락에 뿌리를 심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몇몇 한어 어휘도 기독교화했다. - P173

예수회는 16세기 일본 엘리트가 외부 세계에 품은 관심과 호기심에 영합하는 전략과, 발리냐노의 현지화 전략을 통해 천주교가 초창기 동아시아에 안착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하지만 예수회의 성공은 스페인과 그 지지 교단을 시샘하게 만들었고 유럽과 천주교 내부의 정치적 경쟁으로 일본은 격랑 속에 휘말린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정권을 공고히 해야 했기에 정치적인 견해가 다른 사람을 배제하기 시작했고, 대외무역에 대한 관리도 강화했다. 이 과정에서 천주교 다이묘는 배제되어 '겐나 대순교' 등이 발생하였다. 얼마 전 엔도 슈사쿠의 작품 《침묵》이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 책이라는 것과, 책을 배경으로 한 영화 〈사일런스〉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 책에서 숨은 기리시탄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어서 놀랐다. 중국과 조선의 천주교도들에 대한 박해도 거셌으나, 일본의 기리시탄에 대한 박해는 아주 처참했다고 한다. 잔혹한 박해와 형벌로 일부 기리시탄은 겉으로 종교를 포기하고, 자신의 종교를 위장하고 숨어들었다. 그 세월을 2세기 동안 지켜냈다는 게 놀랍다.

17세기 후기에 이르면 예수회는 천주교 내부에서 배척당했고 포르투갈의 세력도 약화된다. 1773년 로마 교황청은 예수회를 불법으로 지정하였다.

16~18세기 유라시아 교류는 보통 유럽인이 출발점인 경우이다. 하지만 17세기 초 일본이 파견한 하세쿠라 쓰네나가 사절단은 태평양을 건너서, 강희 연간 번수의는 서쪽으로 인도양을 가로 질러 유럽에 이르렀다.
하세쿠라 쓰네나가와 번수의가 살던 시대는 천주교의 운명이 역전되던 때로 외부 세계에 대한 배척이 강해지던 때였다. 이 때문에 금교를 계기로 초래된 교류는 19세기 이래 '쇄국'이라는 단어로 통칭한다. '쇄국'이라는 단어는 어디에서 왔는가?

미국이 견고한 함선과 고성능 대포를 가지고 일본을 강제로 개방시킨 뒤, 종래 어떤 정령 속에서도 출현한 적이 없던 쇄국'이라는 단어는 에도시대 일본의 '자아봉쇄'에 대한 고정 인식이 되었고, 이후로 전근대 동아시아 세계 전체에 대한 '상식적' 묘사로 더 확대되었다. - P216

동아시아의 역사를 곧 '쇄국'과 '개국'이라는 기본 논리로 삼아 파악하는 것은 구미가 주도하는 '현대' 서술을 구성하는 요소가 되었다. - P217


아메리카의 은이 화폐를 대신하고 노예가 상품 가치를 띄기 시작한 이후 차와 담배가 동아시아 삼국 사회에 깊숙이 파고든다. 대항해 시기 이후 중국의 바다는 28년의 해금 정책 시기를 제외하고는 계속 열려 있었다. 당시 동아시아 해역은 이민이 빈번하여 이민 사회가 형성되어 있었으며, 일본인 이민도 동남아시아까지 두루 퍼져 있었다. 조공 무역을 제외하면 해상무역이 빈번했고 이 때문에 해상을 장악한 세력은 부를 쌓을 수 있는 명백한 기회가 되었다.

역사상 중국의 바다 봉쇄와 개방은 국가와 해상 집단 간의 역량 각축이 서로 길항하며 소장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 배후에 존재하는 논리는 해양무역에 대한 거부라고 하기보다는 해양무역의 통제권에 대한 쟁탈이라고 해야 한다. 국가와 상인은 절대로 항상 대립적이지 않았다. 해상 집단은 전형적인 초국적 세력으로, 무릇 세력이 커진 자는 주변의 국가 및 비국가 정권과 미묘하고 복잡한 관계를 가졌다. 해금 시대의 동아시아 해역은 조금도 쓸쓸하거나 적막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번화하고 시끌벅적한 역사 극장이었다. - P241

1793년 영국 사절 매카트니는 중국 황제의 조정을 방문했다. 그러나 건륭황제는 그를 내쫓았는데 이유가 있었다.

닝보, 저우산 등 지역을 항구로 개방한다. 베이징에 영사관을 상설한다. 저우산 부근의 섬 하나를 획정하여 영국 상인의 거주지와 창고로 제공한다. 영국 상인이 광저우에 상주하는 것을 허가한다. 영국 배가 광저우와 마카오 수로에 출입할 수 있도록 하며, 아울러 과세를 감면한다. 영국 선교사의 선교를 허가한다. - P264

요구 조건이 누가 봐도 과하다. 통상적 권리가 아닌 영국 자국에 특수한 권리를 요구하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매카트니가 삼궤구고의 예를 행하기 거부한 것과 건륭제가 영국왕에게 준 회신의 오만한 태도가 강조되며 선입견을 만들어 냈다. 이는 야만적인 '동양'이 침략당해도 싸다는 근거가 된다. 하지만 사실 건륭제의 회신은 1896년이 되어서야 전체가 영문으로 번역되었고, 그 서신과 거기에 담긴 말은 19세기 전반에 걸쳐 어떠한 주목도 끌지 않았다. "천조에는 없는 것이 없으며 ... 지금껏 정교한 제품을 중시하지 않았으니, 당신 국가의 제품은 조금도 필요치 않다." 해당 말의 문맥은 매카트니가 가져온 예물을 이야기한 것이지, 중영 간의 무역에 대한 언급이 아니었다.


17세기 조선의 강항과 중국의 주순수는 유학자로 일본 근대사상에 영향을 끼쳤다. 강항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하였으나 일본군이 전라도 해상에 쳐들어오자 그만 포로로 붙잡혀 일본으로 가게 된다. 일본에서 그는 후지와라 세이카와 교류하게 되었는데 그는 조선통신사를 통해 유학을 접한 이후 유학 연구에 매진하던 학자였다. 강항은 후지와라의 도움으로 조선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주자학은 후지와라 세이카 이후 하야시 라잔을 비롯하여 도쿠가와 시대 일본 사상의 주류 흐름으로 발전한다. 주순수는 정성공이 강남 지방을 공격할 때 전투에 참가했다가 실패하자 일본 나가사키로 가 학문을 전수한다. 이 때 주순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자인 도쿠가와 미쓰쿠니를 가르쳤고 에도로 가게 된 그는 이후 일본 지식인과 많은 서신을 주고받으며 유명해졌다.

중국은 강남풍 문인화가 유행하고 일본에서는 우키요에 문화가 유행한다. 강남 풍격은 조정의 주류와 분리되어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호방한 기상을 담으며 개성이 뚜렷한 화풍을 열었다. 일본에서는 다이묘가 에도에 출사하러 가면서 에도의 무사 중심 인구가 급격히 늘고, 남녀 비율이 불균형해지면서 연예업, 서비스업, 색정업 발달이 촉진되었고 이로 인해 17세기 후기 우키요에 문화가 출현하였다.

청학은 경세치용 실사구시를 추구하면서 전통 유학의 관변 흐름 속에서 새로운 길을 열었으나 유학의 리와 이의 추구는 유학이 주도하는 흐름 속에 흘러갔다. 반면 일본 근대 사상은 청학과 달리 유학을 수용 발전시키기도 하였으나 난학처럼 유럽을 귀감으로 삼아 본토의 지식을 수정하고 국학과 같이 일본 내부의 특성을 담은 학문도 전개되는 등 다양한 모습으로 전개되었다.

실학은 유학 체계 안에서 정주이학에 대한 비판 및 반성과 부합했으며, 또한 16세기에 전해진 유헙 과학기술의 도움을 받았다. 실학에서 '경세'는 학문의 실천을 검증의 표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동시에, 이성을 숭상하고 과학 등의 실용적 지식을 중시하면서, 그것들을 유가 도덕 및 정치와 대립시키지 않았는데 이는 조선에 특히 영향을 주었다.


18세기 백은 공급이 하락한 뒤 동인도회사는 중국의 차와 바꿀 다른 상품으로 인도에서 생산된 아편에 주목한다. 동인도회사는 대중국 아편 무역을 회사가 인증한 항각상인이라는 산상에게 넘겨주었다. 많은 항각상인들이 광저우 관부와 결탁하여 아편을 밀수해 들여와 폭리를 취했다. 이로 인해 중국은 아편이 10배 느는 동안 백은이 대량으로 유출되고 사회 풍조가 부패하고 해이해지면서 결국 영국과 전쟁까지 벌이게 된다.

일본은 페리 개항 이후 문명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이야기한다. 요시다 쇼인은 미국인에게 접근하기 위해 밀항을 준비하며 미국 군관에게 한문으로 쓴 편지를 찔러주기도 한다. 이 편지가 영문으로 번역되면서 미국이 일본을 이해하는 하나의 창구가 된다.

흑선의 도래는 미국이 동아시아를 정식으로 척식하는 한 과정이었으며, 일본이 '식민 현대'의 세례를 받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미국에게 이후 대부분의 시간 동안 일본은 마치 요시다 쇼인이 페리를 추종했던 것처럼 동아시아의 겸손한 동료였다. 비록 두 나라는 20세기 사생결단의 전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미국의 점령과 개조를 거쳐 일본은 다시 좋은 학생의 모습으로, '문명'으로 되돌아갔다. - P335

중국은 아편전쟁의 결과로 개항을 하게 되고, 조선은 강화도 조약 이후 조미수호통상조약으로 개항을 하게 된다. 다만 두 나라는 당시의 국제법에 대한 원칙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한 채 여러 나라를 상대로 조약을 맺게 된다. 국제법은 모두 식민제국 체제 하에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동아시아 '천하' 구조는 외부 압박과 내부 변란이 이중으로 작용하는 가운데 해체되어 하나의 '구역'이 되었다. 그러나 구질서가 해체된 뒤 도래한 것은 하나의 민족국가 체제가 아니라 일본이 중심이 된 제국주의 질서였다. 신질서는 국제법의 언어를 차용했지만 오히려 '중화-천하' 질서의 많은 면모를 계승했다. - P345

동아시아는 '식민 현대'의 한 대상이었지만, 그것은 단지 구미 제국의 눈에 '비문명' 세계의 한 구성 부분, 그 정도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아'를 가져다가 추상적인 서양과 상대되게 한 것은 식민 체계 아래서 동아시아인의 인식 착오다. - P353


인류를 과학적 방법에 의거해 '인종'으로 구분한 것은 18세기 스웨덴 자연학자 카롤루스 린나이우스로부터 시작되었다. 인류학은 갖가지 측량술의 발달로 종족 이론의 생물학적 근거를 강화했다. 19세기 찰스 다윈의 자연진화론은 인류 사회의 차이를 해석하는 데 쓰였다. 종과 족은 문명진화론과 긴밀히 연계되었고 식민 압박을 합리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1904년 세인트루이스 세계박람회가 열릴 때 러일전쟁이 한창이었다. 러시아는 대회 참여를 사양했고, 일본은 세계 박람회에서 자기 문명의 높은 수준을 전시하면서 일본인이 러시아를 넘어서 '가장 문명적인 종족'을 자처했다. 일본의 논리는 유럽과 미국이 주장하던 식민 체제의 논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동아시아가 민족주의로 자신을 개조한 것, 그 하나의 주요한 자극은 담론과 실천 두 측면에서 마치 한 쌍의 대립적인 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동전의 양면이다. 피식민자가 일련의 반항적 민족주의를 구축하면서 의지한 논리 역시 식민자가 가져온 그 문명 진화 논리였다. - P366

17세기에 기원한 현대 국제법은 식민주의가 세계에 확장되면서 식민 활동을 지지하는 역할을 담당했다고 이야기했다. '보호국'이라는 개념은 1885년 유럽 국가가 아프리카를 분할하면서 세운 논리였다. 일본은 식민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구미 국가의 평가에 특히 신경쓰는 모습을 보인다. 이 때문에 매 단계마다 국제법을 준수하고 문명의 규범에 부합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1912년 메이지 천황 사후 일본은 새 시대를 맞이하면서 명목상으로 구미 식민제국과 자신이 완전히 평등한 국가가 되었음을 인식한다. 이것은 1920년대 다이쇼 데모크라시 이후 '아시아주의'를 표방하며 삼국의 정치에 깊은 영향을 끼친다. 하지만 아시아주의는 새로운 압박으로 기존 압박을 반대했기에 초월성을 가지기 어려웠기에 결론적으로 실패로 귀결될 수 밖에 없었다.

1919년 일부 지식인들은 식민주의의 타개도 중요했지만 어떻게 자신을 '현대'로 만들 것인가가 본질적으로 더 중요했다. 이 때문에 '현대'를 가속화하기 위해 자아 비판 나아가 동양 비판으로 나아갔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의 본질을 급격하게 실천한 이들은 중국과 조선에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중국해방전쟁, 한국전쟁, 베트남전쟁이 연이어 일어나며 중소간 분열의 무대가 된다. 중국해방전쟁으로 중국과 미국이 조선에서 직접적으로 교전했고 베트남에서 간접적으로 대항했다. 미소간 게임이 아니라 중미와 중소의 게임이 이어졌는데 이는 19세기 이래 이어진 식민과 반식민, 패권과 반패권 항쟁이 심화된 무대였다. 1949년 이후 중국은 국가 건설에 어려움을 겪었고, 일본과 한국의 경제 도약은 한국전쟁 이후 영향 하에서 이루어졌다.

오늘날 냉전 구조는 대체로 종료되었지만 식민 자본주의 체제가 무너졌는가 생각하면 그것은 결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그 흐름은 세계를 주도하고 있기에 우리에게 식민 현대성과 다른 대안적 발전관을 찾도록 요구한다.

오늘날 동아시아를 곤혹스럽게 하는 역사 인식의 문제는 근본적인 차원에서 말하자면 어떤 전쟁, 어떤 사람(집단), 어떤 사건에 대한 책임을 확인하는 데 있지 않고 우리의 현대성 개념에 대한 인식에 있다. 19세기 후기부터 동아시아는 점차 민족국가를 단위로 하고, 정해진 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일종의 발전주의 시대관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역사는 부단히 '진보'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다, 인류는 '야만'에서 '문명'으로 나아간다, 미래는 과거보다 더 '선진'적일 것다, 우리가 매 맞는 이유는 '낙후'하기 때문이며 낙후한 원인은 '폐쇄 보수'에 있다. 이러한 일련의 논리는 우리에게 영원히 '문명의 승리자'의 시각에 서서 '몽매한 야만인'을 부정하도록 요구한다. 그런데 누가 문명과 승리를 대표하며, 누가 몽매와 실패를 대표하는가? - P458

인류의 현대는 어느 하나의 국부적인 기원에서 다시 전 지구적으로 확대된 것이 아니며, 서로 다른 사회 간에 긴밀히 교류하고 만나는 과정 속에서 함께 형성해낸 것이다. 동아시아, 남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의 상호작용이 없었다면, 유럽의 현대화도 우리가 아는 방식으로 나타날 수 없었다. 그러므로 '현대'는 동아시아에 내재된 것이다. 외부 세계가 가져온 충격을 직시하되, 이러한 충격을 유일한 역사 추진력으로 간주하지 말고 외부 충격에 조우하고 반응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현지의 역사적 동력으로 내화하는지의 과정을 탐구해야 한다. - P462

이 책을 통해서 동아시아가 현대로 들어서는 과정의 역사를 들여다 보았다. 한중일 지역을 둘러싼 지역의 역사를 한 곳에 모아놓아서 한 권의 책으로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다만 저자의 기호가 균형 있다고 생각되어지지는 않는다. 아무래도 조선에 관한 분량은 적은 편이고 중국에 우호적인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재밌게 읽었다. 한중일 근대사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있는 상태에서 이 책을 읽는다면 더 재미나게 읽을 수 있을 책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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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06-07 11: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디선가 임진왜란이 동아시아
최초의 국제 전쟁이었다는 해석
을 본 기억이 나네요.

굽작가도 혹시 이 책을 참조하지
않았을까 추정해 봅니다 :>

거리의화가 2022-06-07 11:39   좋아요 1 | URL
임진왜란를 조선전쟁이라고 하기에는 명칭이 맞지 않죠^^; 애초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을 정벌하러 간다는 의도로 시작한 전쟁이고 명도 참전한 전쟁이니까요. 명도 이 전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고 결국 청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잖아요.
삼국의 역사를 함께 보여주는 이런 역사책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여러 모로 비교할 지점이 생기니까요^^ 감사합니다.

얄라알라 2022-07-08 15: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거리의 화가님 축하드립니다!

거리의화가 2022-07-08 15:34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2-07-08 17: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화가님 ^^

거리의화가 2022-07-08 17:31   좋아요 2 | URL
축하 인사 감사합니다^^ 저도 놀러갈게요.

mini74 2022-07-08 17: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학 축하드리러 왔다가 붕어빵 말풍선에 빵 터지고 갑니다 ㅎㅎ
축하드려요 ~

거리의화가 2022-07-08 17:37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 랜덤 스킨인데 왜 하필 붕어빵에 소주?ㅎㅎ 저도 덕분에 들여다봤어요^^;
어제는 소주잔 스킨이 당첨되더니ㅋㅋㅋ

미니님 감사합니다*^^*

이하라 2022-07-08 18:1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거리의 화가님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거리의화가 2022-07-09 21:33   좋아요 2 | URL
이하라님 축하 인사 감사합니다^^*

새파랑 2022-07-08 18: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당선 축하드려요. 역시 역사책은 화가님이 최고~!!

거리의화가 2022-07-09 21:33   좋아요 2 | URL
ㅎㅎ 영광입니다^^ 소설은 새파랑님이 최고!^^*

겨울호랑이 2022-07-08 23:2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거리의화가님 글에서 어쩌면 임진왜란을 전후한 동북아의 국제질서는 ‘사상의 중심과 공간의 중심을 일치시키기 위한 일련의 노력‘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전통적인 중화사상의 명나라, 포르투갈과 교류하며 중화를 넘어선 서구문명과 중화세계의 연결점으로 서려던 일본, 소중화 세계의 조선과 중화로부터 독립된 과거 홍산문명의 후계로서 독립문명을 꿈꾸던 청나라 등. 이들 인식의 대립이 페이퍼의 배경이 아니었을까를 잠시 생각해 봅니다. 거리의화가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

거리의화가 2022-07-09 21:42   좋아요 2 | URL
겨울호랑이님 이런 멋진 댓글을!ㅎㅎ
저자가 임진왜란을 현대의 기점이 된 사건으로 꼽은것이 인상적이었어요. 전쟁 후 조선은 종번체제에 철저히 이입되는 모습으로 나아갔고 일본은 물론 쇄국 정책을 펼치기는 했지만 포르투갈, 네덜란드를 비롯한 무역을 통해 서양 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이 있었고요. 명의 지역은 청이 들어섰지만 명이 유지하려던 체계를 청도 이어가려고 했던 걸로 보입니다.
감사합니다^^

희선 2022-07-09 03:1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거리의화가 님 축하합니다 한국만이 아닌 한중일 세 나라로 역사를 보는 건 더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라와 나라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도 하니... 그러고 보니 한중일 역사를 만화로 내는 사람도 있군요 그 책을 보신 분이 쓴 글만 봤지만...


희선

거리의화가 2022-07-09 21:43   좋아요 1 | URL
네. 하나의 시선만이 아닌 다양한 시선으로 보는 역사를 요즘은 더 찾게 되는 것 같습니다.
희선님 감사합니다^^

페넬로페 2022-07-11 00: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거리의화가님, 이달의 당선, 축하드려요.
역사에 대해 관심이 많으신 것 같고, 항상 깊이 들어가셔서 많이 배웁니다**

거리의화가 2022-07-11 09:01   좋아요 3 | URL
페넬로페님 관심만 많습니다. 아직 많이 부족해요^^ 축하 인사 감사합니다.

scott 2022-07-11 00: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이달의 당선 축하 합니다

아베 피살
소식을 들은 주말
한국 중국 일본의 지난 역사들이 스쳐 지나가네요

한반도의 운명 ㅜ.ㅜ

거리의화가 2022-07-11 09:02   좋아요 2 | URL
스콧님 감사합니다^^
피격 소식 듣고 놀랐다가 사망까지 이르다니 심경이 좀 복잡해졌어요. 삼국 간에 더 피튀기는 외교전쟁이 벌어질 것 같습니다ㅠㅠ

thkang1001 2022-07-11 06: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거리의화가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한 주 되세요!

거리의화가 2022-07-11 09:03   좋아요 1 | URL
thkang1001님 감사합니다^^ 즐거운 한주 보내세요~

독서괭 2022-07-11 13: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당선 축하드려요~^^

거리의화가 2022-07-11 13:11   좋아요 2 | URL
괭님도 당선 경축드립니다^^*

thkang1001 2022-07-11 20: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거리의화가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광장 / 구운몽 최인훈 전집 1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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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예전에 읽었으니 가지고 있던 책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디에 둔지 알 수가 없어서 결국 새로 구입한 책이다. 이전에는 같은 출판사이지만 최인훈 전집으로 나온 판이 아니라 다른 형태의 판본이었다.

어쨌든 광장은 재독이었다.

1960년대를 대표하는 문학 작품으로 손꼽히는 광장. 1960년 11월에 발표된 소설이다.
출간 당시가 전쟁이 끝난 지 6~7년, 4.19 혁명의 열기가 가시지 않은 상황이었다. 남북한은 갈라진 상태에서 전쟁으로 막심한 피해를 겪었고 인간에 대한 증오와 불신이 여전히 남아 있을 때였다고 생각한다.
이 시기 다른 아시아 지역에서는 비동맹 선언, 중립주의 등의 새로운 시도들이 이어진다.
공교롭게도 이명준의 선택은 당시 사람들의 상황과 선택지 중 하나를 예상케 한다.

명준이 남한과 북한 어디에도 가지 않겠다면서 중립국을 선택하는 모습은 비장미마저 느껴진다. 남한과 북한 사회의 모습들을 친절하게 보여주는 모습에서 명준이 왜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납득할 수 있도록 한다.

구운몽은 처음 읽게 되는 것이었다. 
(근데 이전에도 같이 실려 있었을텐데 왜 나는 구운몽을 함께 읽지 않았을까.)
우선 읽기 전 왜 하필 구운몽이 광장과 나란히 한 책에 묶였을까 궁금했다.
어떤 배경도 접하지 않은 채 이야기를 전달받고 감정을 겪자 생각하여 곧바로 읽게 되었다.

완독 후 첫 감정은 혼란과 어지러움이었다.
독고민이 몇 차례의 꿈을 꾸고 환각을 경험하던 것처럼 나도 마치 악몽을 꾸었다 현실로 돌아왔다 다시 비슷한 악몽을 꾸는 과정을 여러 번 겪듯 메스꺼움이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구운몽을 이끌고 가는 인물은 독고민 뿐 아니라 김용길, 시사회 해설자 등 다양하다. 이 때문에 장면의 전환이 빨라서 혼란스러움이 더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작가의 의도일거라는 생각이 든다.

구운몽은 1962년 4월에 발표된 소설로 5.16 군사 쿠데타의 상황을 그렸을 거라 짐작할 수 있다.
혁명군 방송에서는 혁명이 위기에 빠졌다며 시민군이 일어서기를 반복적으로 종용하고 자유를 부르짖는다.

독고민의 내면을 끊임없이 괴롭히던 것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이 무엇이든 반복되는 내면의 상황들이 독고민의 마지막을 짐작할 수 밖에 없게 만든다.
<광장>의 광장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광장이라면 <구운몽>의 광장은 썰렁하고 시멘트 바닥의 느낌처럼 차갑고 얼어 붙어 있다.

같은 작가의 작품인데도 불구하고 광장과 구운몽은 형식이 달라서 새롭게 느껴졌다.
<광장>은 명준이 선택하는 외부 상황에 대한 묘사에 집중하는 모습이라면 <구운몽>은 철저히 인물에 대한 내면에 치중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독자들은 한 권의 책에서 완전히 다른 이야기 두 개를 만날 수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역시 두 소설을 한 권에 담은 더 큰 이유는 역사적인 이유가 아닐까 한다.
4.19 이후 독재에서 벗어나 이제 진정한 자유를 찾는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던 대한민국 국민들은 5.16 으로 그것이 송두리채 무너지게 되니 말이다.


남한 시절의 그에게는 철학이 모든 것이었다. 부모도 없고 돈도 없고 명예도 없는 청년에게, 철학이란 모든 것을 갚고도 남을 꿈을 보여주는 단 하나의 것이었으리라. 또는 양반과 종놀음으로 헤아릴 수 없는 세월살아온 고장에서, 꿈을 이룰 엄두조차 내지 못할 사회에서, 철학이란, 양심의 마지막 숨을 곳이었으리라. 아니면 그 신분이 임금이건 종이건 사람이 산다는 일에 놀라움을 느끼고, 그 뜻을 캐보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마음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어느 것이든 좋고, 철학이란 그 모든 것을 다 뜻한다. 어쨌든 그는 철학의탑 속에서 사람을 풍경처럼 바라보았다. - P106

인류는 슬프다. 역사가 뒤집어씌우는 핸디캡. 굵직한 사람들은 인민을 들러리로 잠깐 세워주고는 달콤하고 씩씩한 주역을 차지한 계면쩍음을 감추려 한다. 대중은 오래 흥분하지 못한다. 그의 감격은 그때뿐이다. 평생 가는 감정의 지속은 한 사람 몫의 장에서만 이루어진다. 광장에는 플래카드와 구호가 있을 뿐, 피묻은 셔츠와 울부짖는 외침은 없다. 그건 혁명의 광장이 아니었다. - P158

에덴 동산에서의 잘못에서 법왕제에 이르는 기독교의 걸음걸이는, 그대로 코뮤니즘의 낳음과 자람의 걸음에 신기스럽게 들어맞는 것이었다. 그들은 쌍둥이 그림이었다. - P184

그는 지금, 부채의 사북자리에 서 있다. 삶의 광장은좁아지다 못해 끝내 그의 두 발바닥이 차지하는 넓이가 되고 말았다. 자 이제는? 모르는 나라, 아무도 자기를 알 리 없는 먼 나라로 가서, 전혀 새사람이 되기 위해 이 배를 탔다. 사람은, 모르는사람들 사이에서는, 자기 성격까지도 마음대로 골라잡을 수도 있다고 믿는다. 성격을 골라잡다니! 모든 일이 잘될터이었다. 다만한가지만 없었다면. 그는 두 마리 새들을 방금까지 알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무덤 속에서 몸을 푼 한 여자의 용기를, 방금 태어난아기를 한 팔로 보듬고 다른 팔로 무덤을 깨뜨리고 하늘 높이 치솟는 여자를, 그리고 마침내 그를 찾아내고야 만 그들의 사랑을. - P208

마음이 추우면 죽는다. - P223

더 많은 탐조등 빛이 도시의 하늘에서 갈팡질팡 엇갈리고 있다. 폭격, 혁명, 누가 혁명을 일으킨 것일까. 스피커의 부름에도 불구하고, 거리고 나오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개 한 마리 얼씬 않는 거리는 사방이 괴괴할 뿐, 총소리 한 방 들리지 않는다. - P249

불사조처럼 날아오르는 그대의 양심을. 그대의 사랑을. 양심과 사랑에 거듭나서, 심연의 그 아득한 거리에 승리하고, 저 높은 자유를 향하여 날아오르는 그대의 앞날을 봅니다. 이 도끼를 받으십시오. (총성. 또 총성. 뒤따라 기관총이 이어쏴) 안녕히. 연인이여. 그래도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 자유 만세. 공화국 만세. - P278

현대는 성공의 시대가 아니라 좌절의 시대며, 건너는 시대가 아니라 가라앉는 때며, 한마디로 난파의 계절이므로, 다음에 현대인의 인격적 상황은 극심한 자기 분열이다. - P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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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2-06-04 22: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광장은 몇 년 전에 재독했는데, 같이 실린 구운몽은 아직 못 읽었어요^^; 구운몽 쪽이 더 읽기가 어려울 것 같군요. 화가님 즐거운 연휴 보내세요^^

거리의화가 2022-06-04 22:59   좋아요 3 | URL
괭님도 구운몽 못 읽으셨군요ㅎㅎ 구운몽 내면 묘사가 좀 많고 장면 전환이 휙휙이라 어지럽더군요^^ㅎㅎ
월요일까지 쉬니 여유가 더 생긴 것 같아요~ 연휴 잘 보내세요^^

mini74 2022-06-04 23: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광장, 밑줄 그으며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고딩때 읽었었는데, 반공교육이 익숙했던 세대로 주인공의 선택이나 결말이 꽤 충격으로 다가왔어요. ㅎㅎ 화가님도 연휴 즐겁게 보내시길 *^^*

거리의화가 2022-06-04 23:11   좋아요 2 | URL
저도 처음에 읽을텐 명준의 선택이 아쉽기도 하고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다시 읽으니 명준의 마음이 더 이해되는 측면이 많더라구요 가면 갈수록 명준이 혼란스러워하는 걸 보니 말이죠. 그 시기를 직접 겪은 분들의 심정도 돌아보게 됐어요^^ 연휴 잘 보내세요!

바람돌이 2022-06-05 15: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저 책 가지고 있는데 왜 광장만 읽었을까요? 광장 처음 읽은게 중학교때였던 거 같아요. 순전히 집에 책이 있어서.... 그런데 진짜 그때는 이해가 하나도 안돼는.... 학교에서 하는 반공주의 교육에 찌들어있던 어린 영혼이 뭐가 이해가 되었을까 싶어요. 그 뒤 어른이 되어 다시 읽으면서는 1960년대에 이런 소설을 쓸 수 있었다는데 정말 놀랐었고 감격했던 기억이 나네요.
구운몽은 아마 제목 때문에 안 읽지 않았을까 싶기도 해요. 고전 소설 구운몽을 연상시키는데 저는 그 구운몽 싫어했거든요. ㅎㅎ

거리의화가 2022-06-06 21:43   좋아요 0 | URL
ㅎㅎ 저도 구운몽 제목 듣자마자 예전 고전 소설 떠올렸거든요~ 진짜 그게 연상되서 꺼려진건가 싶기도 하군요ㅋ 저는 어릴 때 읽지는 않아서 처음 읽을 때도 나름 잘 읽긴 했는데 그때는 명준의 마지막 선택이 강렬해서 다른 건 순삭되었었던 것 같고 이번에 읽으니 주변의 여러 상황들이 눈에 들어오더라구요. 어쨌든 잘 쓴 소설인 것 같긴 합니다!

scott 2022-06-06 00: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고 쓴 독후감으로 상을 받았었는데
이후 두번 다시 읽지 않았던!ㅎㅎ

화가님 환각 경험까지 일어 나셨다고 하니
진심으로 명준의 선택에 아쉬움 가득 ㅠ.ㅠ

거리의화가 2022-06-06 21:45   좋아요 2 | URL
오~ 스콧님 독후감으로 상 받은 적이 없어서^^; 역시 능력자 스콧님! 근데 왜 두번 다시 읽지 않으셨어요...ㅋㅋ

환각은 뒤에 읽은 구운몽 때문에 생겼어요. 어찌나 상황이 어지럽던지ㅋㅋㅋ
명준의 선택은 충분히 이해되는 면이 있어서 괜찮았습니다! 제가 그 시절이었고 명준의 상황이라면? 전 물도 무섭고 겁이 많아서 육지에 내리긴 했을 것 같긴 한데 말이죠ㅋㅋㅋ

희선 2022-06-12 03: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제목만 아는 책이네요 구운몽은 옛날 소설도 있는 거 맞군요 그것도 제목만 알지만... 그것과 아주 다른 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형식이 비슷할지...


희선

거리의화가 2022-06-12 07:02   좋아요 2 | URL
고전 구운몽 학교 다닐 때 분명 읽었을 것 같은데 내용이 가물거리네요^^;
최인훈의 구운몽 제목은 아마도 주인공이 현실과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의 꿈을 여러 차례 꾸거든요 그래서 이름을 가져다쓴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희선님.
 
완전한 이름 - 미술사의 구석진 자리를 박차고 나온 여성 예술가들
권근영 지음 / 아트북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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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반응하는 분야의 책이 있다면 미술 쪽일 것이다. 미술 중에서도 그림이 그렇다.
미술을 잘 모른다. 학교 때도 미술 점수는 늘 바닥이었다보니 그 시간이 오는 것이 나중에는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점수를 얻고 평가를 받아야 하는 교육 현장을 벗어나니 그제서야 조금씩 그림들이 눈에 들어왔다.
30대 이후 여행을 가면 박물관과 미술관을 보러 다녔고 외국 작가의 전시가 국내에서 열리면 종종 보러 가고는 했다.
2년 전 이사를 하면서 거리가 멀어지고 코로나 등의 여파로 전시회를 거의 가지 못하고 있는 게 아쉽다.

책에서는 세 개의 주제를 바탕으로 다양한 여성 예술가들을 다루고 있다.


- 호기롭게 길을 떠난 이들.

프리들 디커브란다이스.
10년도 훌쩍 지난 지난 이야기지만 독일 바이마르에서 만났던 바우하우스 건물이 생각났다.
바우하우스 하면 현대 건축에서 이정표 같은 역할을 한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바우하우스의 교육 이념은 평등이었으나 결코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여성들은 공방 등에서 일해야 했고 심지어 등록금도 더 비쌌다고 한다.
프리들 디커도 바우하우스 교육생 중 한 명이었다. 유대인이었던 그녀는 탈출에 실패하고 결국 수용소로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쳤다.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보면 나비 등의 이미지가 그려져 있다. 선생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듬뿍 담겨 있는데 죽기 전 이들은 그림으로나마 평화를 꿈꾸었을까.

엘리자베스 키스
어디서 많이 본 이름이다 싶었는데 결정적으로 게일 신부의 이름을 보자마자 아!!! 했다. 키스의 책이 복원판으로 나온 것도 알고 있었고 게일 신부의 책은 이미 가지고 있었다.
키스 자매들은 이방인으로 낯선 땅 조선에 왔다가 눌러 앉아 조선의 골목을 누비며 조선 민중의 삶을 주목했다. 특히 여성들의 그림이 많은 것이 눈에 띤다.
키스 자매들이 보기에 조선인 여성들은 임신 및 육아, 가정 살림까지 많은 것을 감내하며 힘겹게 사는 것으로 비쳤던 모양이다.  그녀들의 시선이 따뜻하다는 게 느껴져서 좋았다. 이걸 보며 키스 올드 코리아 복원판을 구입해야겠다 생각했다.

노은님 
타국에 가서 하마터면 꾸준히 그림을 그려 이름을 알린다는 게 정말 대단하게 느껴졌다.
저자는 노은님이 파독 간호 경력 2년으로만 알려지고 이후 긴 예술 활동에 대해서는 주목받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힘찬 걸음을 표현한 <큰 걸음>은 방향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른 느낌을 주는 것 같기도 하다.
앞으로도 그녀의 다양한 작업을 만나고 싶다.

정직성
정직성은 예명이다. 들으면 바로 꽂히는 이름이라 한 번 각인되면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그림에만 국한되지 않은 다양한 예술 세계를 보니 그녀는 한계를 모르는 예술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일단 서울의 연립주택을 표현한 그림을 보면서 현실을 예술로 이토록 잘 승화시킬 수 있구나 해서 놀라웠는데 이런 작업은 계속 필요하지 않나 생각했다.
하루가 다르게 무너지고 바뀌는 서울의 도시 풍경은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의 모습이 담긴 프로필의 문패도 인상적이었다.

- 거울 앞에선 이들.

베르트 모리조
인상파 여성 멤버인데 주로 마네의 그림에 모델로 많이 등장했다.
파리 살롱전에서 6번이나 당선된 이력을 가진 화가인데 왜 나는 마네의 이름은 알면서도 그녀의 이름은 알지 못했을까.
책에서는 몇 개의 작품이 나오지 않지만 모리조 이름으로 검색한 그림들을 보니 하나 같이 다 화사하고 예쁘다.
인상파 그림의 특징을 잘 담고 있으면서도 주변의 환경을 잘 그려냈다는 생각이 든다.

파울라 모더존베커
누구의 아내도 엄마도 딸도 아닌 파울라 모더존베커.
<옆으로 누운 엄마와 아이>는 엄마와 아이의 유대성과 친밀감이 잘 느껴졌다. 그 시기는 지금보다 아이를 낳는다는 것이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려웠을것이다.
그녀의 그림들 속 얼굴의 눈동자가 동그랗고 크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찾아보니 아이를 낳고 얼마 안 되서 찍은 사진 속 모습과 일치한다.
아이를 낳고 얼마 안 되서 색전증으로 사망했다니 31살의 짧은 생애가 너무도 안타깝다. 더 많은 작품을 남길 수 있었을텐데...

버네사 벨
버지니아 울프의 언니가 화가였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녀의 작품들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못했다.
책에서 다루고 있는 작품들이 아이러니하게도 버지니아 울프와 노년의 모습을 담은 자화상이다.
유명 작가였던 언니의 그늘에 가려진 자신의 작품 세계를 본인은 어떻게 생각했을지 궁금해진다.
버지니아 울프는 삶을 일찍 마감했으나 상대적으로 버네사 벨은 꽤 오랜 삶을 살았다.

천경자
몇 년전 근대 여성에 대한 전시로 <신여성 도착하다> 를 보러 간 적이 있었다. 여기에서 천경자를 처음 만났다. 도록도 집에 갖고 있는데 신여성들의 다양한 예술 활동에 주목한 전시여서 정말 흥미롭게 보았던 기억이 있다. 천경자의 작품은 고전 기법의 그림부터 서양화까지 스펙트럼이 넓다는 생각이 들었다.
뱀 여러 마리가 인간의 머리 위에서 또아리를 틀고 왕관 형태를 하고 있는 그림은 그 자체로 신선하고 충격이다. 다시 봐도 놀라운 그림이다.
박경리 선생님과 가까운 사이였다라는 것은 몰랐는데 그녀를 묘사한 글을 보니 정말 잘 표현하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경자의 예술세계는 자유로움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영숙
이 책에서 여러 예술가를 만났지만 그 중 가장 인상적인 인물이라면 박영숙이다. 그녀야말로 스스로 한계를 가두지 않고 뻗어나가는 예술 활동을 하신 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사진 작가인 그녀는 주변 인물들을 사진으로 담기도 하고 제주의 곶자왈에서 시간을 보내며 생태 환경적 사진을 담아내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녀는 마녀와 미친년이라는 단어에 주목했다. 여성을 매도하는 단어로 쓰인 마녀, 미친년 말이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 예술가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운동가로까지 나아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되찾은 이름들.

유딧 레이스터르
최초의 여성 직업화가였던 유딧 레이스테르의 이름은 230년 만에 되찾게 되었다. 루브르 박물관에 거래하려던 그림은 그녀의 것이었으나 나중에 밝혀져 고소를 당했다고.
직업 화가였던 만큼 팔레트와 붓을 들고 있는 그림들이 눈에 띈다.
그녀의 그림을 보고 느낀 건 인물들의 표정이 하나 같이 생동감 있다는 사실이다. 익살스럽기도 하고 유쾌하기도 하다.
바로크 시대 화가로 정물화도 있으나 대부분 다양한 인물들을 그렸다. 섬세한 붓터치가 눈길을 끈다.

힐마 아프 클린트
칸딘스키, 몬드리안보다 앞선 최초의 추상화가였다고 한다.
근대의 문, 과학이 떠오르던 시기 그녀는 영속성과 영적 세계에 경도되었다.
미래를 위한 그림을 보면 이집트 피라미드를 연상시키는데 마치 태양을 향한 영적 숭배의 신성함 같은 것이 느껴진다.
개인적으로는 상상 속의 현실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양식으로 추상적인 방식을 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나혜석
나혜석은 근래 들어 많은 자료 등으로 조명되면서 회자되는 여성 화가다.
다만 작가의 말처럼 예술보다는 개인적인 삶에 치중하여 주목하거나 나아가 비난받는 점이 강해서 마음이 좋지가 않다.
그림에 대한 전문가들의 평가를 논외로 친다면 어쨌든 그녀는 당시로서 조선의 서양 화가라는 타이틀 자체가 희귀할 때 그림을 그렸으므로 그것만으로도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에 전시회도 열고 많은 문화계 인물들과 교류를 했다. 여성으로서 견뎌내야 하는 환경적 부당함에 대해서 끊임없는 주장을 펼쳤던 그녀는 페미니스트 선구자라고 평가될 만하지 않을까.

아델라이드 라비유귀아르
아델레이드는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으로 활발히 활동했던 화가였다.
<두 제자와 자화상> 마리 가브리엘 카페와 마리 마거릿 카로 두 제자와 자신의 모습이 담겨 있는데 두 제자도 마찬가지로 아카데미 회원의 일원이다.
팔레트와 여러 개의 붓을 들고 있는 화가와 뒤의 두 명의 제자들의 서로 다른 시선이 재밌으면서도 나는 이런 그림 구도 자체가 생경했다.
무엇보다 아델라이드는 남성 일색이던 아카데미에 많은 여성 화가들이 입학할 수 있도록 하는 등 끊임없이 여성 권리의 신장을 위해서 노력했던 인물이었다.

아르테미시아 젠텔레스키
바로크 화가였던 젠텔레스키. 그녀의 그림을 보면 카라바조가 떠오른다. 카라바조보다 그녀가 먼저 활동했다면 젠텔레스키풍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을까.
당시 여성 화가들이 무대에 설 기회가 아주 제한적이었을텐데 젠텔레스키는 그림으로 당당히 피렌체 예술 아카데미에 여성 첫 회원이 되는 쾌거를 이룬다.
하지만 아버지의 지인으로부터 그림을 도와주다가 성폭력을 당하는 사건 이후 법정 싸움까지 가게 되는 수모를 겪는다. 이 때문에 그녀의 작품에 유독 유디트가 많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스스로 주장하고 쟁취할 줄 알았던 젠텔레스키. 그녀는 많은 작품을 남기며 당대 최고의 화가로 성공한다.


다뤄진 예술가들 중 아는 이름이 얼마 없다는 게 민망하고 죄송했다.
그동안 가려지고 없어진 여성 예술가들의 이름이 얼마나 많았던걸까.
당연히 이 책에서 다뤄지지 않은 수많은 이름들이 있을 것이다. 그 이름들을 찾아내는 작업들이 꾸준히 이어져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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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6-02 21:4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이렇게 여성화가들을 주목하며 그들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조망하는 책들이 간간히 나와서 너무 좋네요. 젠틸레스키의 유디트를 보면 여성이 파악하는 유디트가 남성들에 의해 왜곡된 유디트와 얼마나 다른지 확 와닿더라고요.
이런 책들이 더 많이 나오면서 위의 화가들 각자에 대한 책들도 다 나와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 그러고 보니 최근에 젠틸레스키에 대한 책은 나왔네요. ^^

거리의화가 2022-06-03 08:56   좋아요 2 | URL
젠텔레스키 유디트의 묘사와 표현이 기존과 어떤 차별점이 있는지 책에서도 언급이 나옵니다.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피해를 겪으면서 충격이 컸을텐데 주저만 있지 않고 적극적으로 타개했다는 것이 대단하게 느껴졌어요!
최근 들어 여성에 주목하는 여러 작업들이 벌어지고 있어서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듭니다. 지나치지 않도록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는 작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면 좋겠어요. 젠텔레스키 책은 구입했고 이 달에 읽을 예정이에요. 그녀의 삶과 예술 활동에 대해서 더 많이 들여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아요.

scott 2022-06-03 00:3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클림트 누이들도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하는데 남아 있는 작품이 없고
까미유 끌로델의 뛰어난 조각품들은 몇 점 없고(로댕의 작품 상당수가 그녀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

마녀와 미친 *이라는 소리를 ㅠ.ㅠ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 여성 예술가들
부지런히 발견 되어 이름을 되찾아야 합니다.

거리의화가 2022-06-03 08:57   좋아요 3 | URL
스콧님 말처럼 역사 속에 묻혀 버린 여성 예술가들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이런 작업들이 멈추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봐요. 여성들의 목소리가 지속적으로 강해지고 있는 현재 앞으로도 이런 책과 자료들이 많이 나와주길 바랍니다!

새파랑 2022-06-03 06:5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역시 화가님이라고 닉네임을 지으신 이유가 있으시군요~!! 저도 학교다닐때 미술만 ˝미˝ 였습니다 😅

거리의화가 2022-06-03 08:59   좋아요 3 | URL
ㅎㅎㅎ 화가라는 닉네임은 제가 지은 것이 아니라 누가 붙여준 것입니다. 미술에 미 자도 모르는데 음... 닉네임을 바꿔야 하는게 아닌지ㅋㅋ 근데 거의 20년 넘게 쓴 닉네임이라 바꾸기도 뭣하긴 합니다ㅎㅎ 미술 점수 정말 미 이상 받아본 적 없는 것 같아요ㅋ

mini74 2022-06-03 1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랑 같은 ㅎㅎㅎ 그림은 매번 졸라맨 수준인데 ㅠㅠ 학교를 떠나니 그림이 좋더라고요. 의도적으로 묻힌 여성화가들, 폄하된 여성화가들의 제자리 찾기는 제대로 이름을 불러주는데서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ㅎㅎ 너무너무 잘 읽었어요 화가님 *^^*

거리의화가 2022-06-03 13:08   좋아요 0 | URL
ㅎㅎ 졸라맨^^; 저는 사람을 그린다고 그리면 매번 얼굴 몸통 다리 삼분할만... 표정도 없고 똑같습니다ㅋㅋ
학교라는 환경이 즐겁게 배울 수 있도록 도와주면 좋을텐데 점수와 성취로 학생들을 몰아가는 영향이 큰 것 같아요. 편한 마음으로 보니 그림이 좋아지더라구요~
제대로 불러주지 않았던 여성 화가들의 이름들 저라도 열심히 부르짖고 다녀야겠습니다!ㅎㅎ 미니님 감사해요~^^*
 
역사의 원전 (컬러 도판 양장본) - 역사의 목격자들이 직접 쓴 2,500년 현장의 기록들
존 캐리 엮음, 김기협 옮김 / 바다출판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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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르타주(reportage) 선집을 편집하기 위해서는 르포르타주란 무엇인가를 결정해야 하고, 또 좋은 르포르타주를 선정하는 기준을 세워야 한다. - P12
과거에 관한 모든 지식, 추측이 아닌 확실한 지식이란 "내 눈으로 봤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여기에 모아놓은 구경꾼, 여행가, 전사, 살인자, 희생자, 그리고 직업기자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다음 장점은 문체의 힘이다. 목격자의 기록은 숨이 빠르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진실의 느낌을 준다. 정교하지만 생명이 없는, '객관적'으로 재현된 역사 서술과 다르다. - P12

르포르타주의 현장성을 고집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현장 기록만으로 제한하는 것은 너무 답답한 노릇이다. 황급한 기록은 예리한 위기감을 전해줄 수 있지만 역시 너무 황급한 것이기 쉽다. 그래서 사건으로부터 한참 지나 작성된 자서전이나 여행기 등에서도 많이 선별해 실었다. - P13

현실로부터 후퇴하려 하는 언어의 타고난 속성에 저항하는 노력이 훌륭한 르포르타주의 요건이다. 물론 아무리 뛰어난 르포르타주라 하더라도 언어의 울타리를 아주 벗어날 수는 없다. 르포르타주 역시 언어의 한 부분이다. '텍스트'만이 서로 뒤얽혀 있을 뿐, 접근할 수 있는 별도의 '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공리가 현대 비평론에 횡행하고 있다. 설령 이 공리를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훌륭한 기록자는 이 공리에 대항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해야 한다. 자기 기록을 독자들이 현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사건의 특징을 잘 뽑아냄으로써 기록의 전달을 넘어 목격의 전달에 가까이 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 P15

이 책은 역사적 사건을 경험한 목격자들이 현장을 보고 겪은 기록을 정리한 것이다.

기록자들의 면면을 살펴본다면 투키디데스, 플라톤, 아메리고 베스푸치, 귀스타브 플로베르, 알렉상드르 뒤마, 폴 고갱, 조지 버나드 쇼, 로자 룩셈부르크, 어니스트 헤밍웨이, 존 스타인벡 등 이름이 알려진 유명인들의 글도 담겨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 '한 목격자의 기록', '정부 첩자의 보고', '어느 독일 사병', '《타임》 특파원' 등 이름을 알 수 없는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다.

기원전부터 현재까지 2500년의 역사를 하나의 책에 담았다니 이를 모으고 편집한 것이 놀라웠다. 총 181개의 글이 담겨 있고 각 글들의 분량은 짧은데 사건을 훓어보기에는 충분하다. 하나의 기록을 읽고 사건에 관심이 생겼다면 관련 책이나 동영상, 자료 등을 이용해 세부적으로 들여다본다면 이 책의 목표는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고대부터 중세, 근세,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 중 중세와 근세의 역사에 대해서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이 있어서 도움이 되었다. 상대적으로 1800년 이후의 역사가 챕터의 2/3 정도를 차지한다. 원서의 꼭지 수로 60%, 분량 중 70% 정도만 책에 담겼는데 한국 일반 독자들에게 관심을 끌기 어렵거나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되는 것들을 제외해서라고 한다.

책의 장점이라면 사료 소개에 그치지 않고 사건의 맥락을 파악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역자의 해설이 각 기사 뒤에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원 저자의 주석은 기사의 앞머리에 편저자주로 담겨져 있지만 거의 없거나 짧은 경우가 많아서 만약 역자의 해설이 뒷 부분에 없었다면 기사를 이해하고 배경을 찾는데 어려움을 겪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만 해도 많은 도움이 되었고 책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들은 추가 자료를 찾으면서 공부도 되었다.

네로는 안티움에 있었다. 그는 집 잃은 이재민들을 위해 마르스 광장을 개방했다. 아그리파의 공공 건물과 자기 정원들까지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많은 난민들을 위해 긴급 수용시설도 만들었다. 오스티아와 인근 도시들로부터 식량을 운송해 왔고 곡식 가격은 1파운드에 4분의 1 세르테르스 이하로 묶였다. 그러나 이렇게 서민 위주의 정책을 취해도 그에게 감사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은 하나의 풍문 때문이었다. 도시가 불타는 동안 네로가 자기 개인 무대에 올라가 현재의 재앙과 과거의 재앙을 비교하면서 트로이 멸망의 노래를 불렀다고 하는 풍문이었다. - P44~45

'네로=폭군' 으로 단순 치환하여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이 날은 로마에 화재가 발생하여 숲과 각종 집들을 태우는 등 이재민이 발생하였다. 타키투스의 네로에 대한 설명을 보면 네로가 정치적으로 이용되어 과장되거나 조작된 기록으로 피해를 입은 측면이 있어 보인다. 기록의 말미에는 로마의 열네 구역 중 다치지 않은 것은 넷뿐이었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얼마나 큰 화재였는지 알 수 있다.

죽음의 공포로 인해 모든 물가가 낮아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돈이나 어떤 재산에도 마음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에 40실링 값을 부르던 말 한 마리를 반 마크(6실링 8펜스)에 살 수 있었고, 살찐 황소 한 마리에 4실링, 암소 한 마리에 12펜스, 암송아지는 6펜스, 살찐 숫양은 4펜스, 암양은 3펜스, 새끼양은 2펜스, 큰 돼지 한 마리를 5펜스에 살 수 있었으며, 한 스톤(약 10킬로그램)의 양털은 값이 9펜스였다. - P100

14세기 흑사병 유행으로 유럽 인구의 1/3 정도가 희생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으리라 본다. 이 기록을 통해 발견한 재밌는 지점은 흑사병 이후의 경제에 대해서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전염병의 결과는 경제의 충격이었다. 사람이 줄어드니 생산량도 줄었을 것이고 이는 광범위한 사회 경제적 변화를 이끌게 되었다. 생산은 해야 하는데 사람이 줄어들어 인건비는 상대적으로 상승하고 임금노동은 발전하게 되었다는 측면도 있다. 이를 기록한 인물은 헨리 나이튼이다. 1396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흑사병 발생 한참 이후이기 때문에 직접 겪은 일은 아니고 다른 사람의 기록이나 구술을 정리하여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전쟁을 좋아하고 잔인한 성질을 가진 사람들이다. (...) 싸움터에 살아남은 자들은 자기편 사람들의 시체는 모두 매장하지만 적의 시체는 잘라서 먹는다. 포로로 잡은 자들은 집으로 데려와 노예로 삼는다. 어떤 때는 악마 같은 광기에 사로잡힌 자들이 어떤 의식을 행하며 그들을 활로 쏘아 죽이고 잡아먹어 버린다. 그들은 이런 짓을 앞에 말한 노예, 그리고 노예가 낳은 아이들에게 행한다. 그들을 수없이 훈계하기는 했지만 그들이 그런 습속을 고쳤는지는 알 수 없다. - P144

기록의 주체는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아메리고 베스푸치다. 1502년 남아메리카를 발견했을 때의 기록인데 그가 신대륙을 발견하기 이전까지 유럽인들은 아메리카를 아시아의 동쪽으로 인식했다.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유럽인들은 처음 만난 이들을 자신들처럼 문명인으로 개화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들은 문명인이고 이들은 미개인이라는 발상, 그것은 후에 수없는 비극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우물에 들어가는 것처럼 손에 촛불을 들고 밧줄을 타고 내려가자 시체들을 밟고 돌아다녔다. 온갖 종류와 크기의 시체들이 있었고, 작은 토기 항아리 안에 처리되어 들어 있는 것도 있었다. 항아리들은 큰 시체들의 발치에 놓여 있었다. 나는 인간의 신체가 어떻게 그런 물질로 변해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 온갖 부위를 다 부러뜨려 보았고, 구경거리로 삼기 위해 여러 개의 머리와 손, 팔, 그리고 발을 집에 가져왔다. - P208

1625년 존 샌더슨이라는 런던 상인이 이집트 카이로에 방문했다가 피라미드 등을 보고 기록한 것이다. 충격적인 만행과 약탈. 남의 나라 물건을 이렇게 마구잡이로 헤쳐도 되는 건지도 의문이고 막 가져간다니... 이것을 보면서 문화재 개념이 없던 한국의 과거도 떠올랐다. 신라 왕릉, 백제 무령왕릉 발굴 등에서 보인 진지하지 못했던 발굴 모습 말이다.

나는 그들이 위협했던 대로 다시 데려가 고문을 가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자기 병사의 연약함을 알아보시고, 행여 쓰러지는 일이 없도록 짧은 투쟁만을 내려 주셨던가보다. 나보다 굳센 분들, 월폴 신부님이나 사우스웰 신부님 같은 이들에게는 그분들이 승리를 거둘 정말 힘든 싸움을 내려주셨다. 그분들은 '짧은 동안에 먼 길을 갔다.' 더 긴 세월을 살아가며 내 부족한 점을 채우고 내 피로 일거에 씻어낼 자격을 인정받지 못한 하나의 영혼을 수많은 눈물로 씻어내도록 남겨졌다. 이것은 주님의 기쁨을 위한 것이니, 그분의 눈에 좋으신 것이라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 P237

16세기 초반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가톨릭교회는 대응을 필요로 하였다. 예수회는 가톨릭 개혁 중요 주체 중 하나로(우리 나라 천주교에도 깊숙이 연관되어 있는 곳이라고 알고 있다.) 1534년 세워져 1540년 교황의 인가를 받았다. 1570년 엘리자베스 여왕과 교황청의 사이 갈등이 벌어지면서 잉글랜드에 가톨릭교회를 부활시키려고 할 때 예수회에도 이 일에 관여하게 된다. 이 글은 헨리 가네트라고 예수회의 가담 인물 중 하나였다. 16세기 말 잉글랜드에서 고문은 줄어드는 추세였다고 하지만 이 글에서 보는 대로 종교 갈등으로 인해 추세가 잘 지켜졌을 것 같지는 않다.

함께 가는 브라만들은 여인에게 결단과 용기를 보이도록 권면하는데, 많은 유럽인들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무슨 약을 마시게 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 약을 마시면 신경이 마비되어 죽음의 준비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두려움과 걱정을 막아 준다는 것이다. 불행한 여인들이 불에 타 죽겠다는 결심을 끝까지 지켜내느냐 여부는 브라만들의 이해 관계에 직결되는 일이기도 하다. 팔과 다리에 끼고 있던 팔찌와 발찌, 귀걸이와 반지 등은 화장 후 재를 뒤질 브라만들에게 소유의 권한이 돌아가기 때문이다. 여인의 신분과 재산 수준에 따라 이런 장신구들은 금제가 아니면 은제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구리나 주석으로 만든 장신구를 걸친다. - P258

1650년 경 장-바티스트 타베르니에가 쓴 글이다. 인도 브라만 여인들은 남편이 죽으면 애도를 하고 며칠 후 삭발을 한 뒤 몸을 꾸미던 장신구를 없애버리고 홀로 살아가야 했다고 한다. 이것이 싫어 대부분의 여자들이 장례 시 남편과 함께 불에 타 죽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하는데 우리 과거의 순장이 생각나기도 해서 씁쓸했다. 실제 브라만들은 남편을 따라 죽을 것을 장려했다고 하지만 그 여인의 삶은 대체 무엇인지 곱씹게 되고 이내 착잡해진다.

군중의 열광이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죄수들이 달아나고 애커먼 씨 집이 벽돌 벽의 껍데기만 남은 뒤, 폭도들은 집 안의 불길을 다른 용도에 쓰기 시작했다. 건물 전체가 빨갛게 달아올라서 문과 창문이 마치 화산 분화구처럼 보였다. 폭도들은 얼마간 애를 쓴 끝에 채권자 감옥에도 불을 지르고 문을 부숴 안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탈주시켰다. - P323

영국의 조지 폭동에 대한 글이다. 7년 전쟁(1756~63)을 통해 식민지 싸움에서 프랑스를 상대로 승리한 대영제국이 가톨릭 교도들에 대한 억압과 제한을 상대적으로 약화시키는 가톨릭 구호법을 1778년 이후 취하게 되었다. 당시 의회 내 힘이 없던 조지 고든이 대중의 반 가톨릭 정서에 기대 가톨릭 구호법 철폐를 주장하며 소동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영국의 가톨릭교에 대한 탄압은 여전히 진행중이고 특히 아일랜드와의 갈등은 종교로 인한 것이 크다. 뿌리 깊은 종교 갈등의 시작이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는 글이다.

당신의 몸에 상당한 기형이 생긴 것은 이 노동 때문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언제부터 생긴 것인가요?
열세 살 때 생기기 시작했고 그 후로 심해졌습니다.
공장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체격과 건강에 아무 문제가 없었나요?
네, 동네에서 뛰노는 아이들 중 누구 못지않게 바른 체형이었습니다. - P390

1815년 영국 의회 조사단에 제출된 한 여공의 증언 기록이다. 당시 공장의 근로조건은 매우 열악했고 기형이 생길 정도였다고 한다. 이를 보고 있자니 한국의 과거의 공장 노동자들의 생활 조건의 열악함이 오버랩되어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수많은 노동자들의 노력과 희생으로 그나마 지금에 이를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감사함이 생긴다.

버지니아주 피터스버그 부근에서 토지와 기타 재산의 매각장에 갔다가 뜻밖에 노예를 파는 공개 경매를 구경했다. (...) 이제 자기들이 팔려가고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영원히 떨어지게 된다는 끔찍한 사실을 깨닫고 그들이 보인 반응은 형언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여자들은 갓난아기를 낚아채듯 안고 소리를 지르며 오두막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이들은 오두막과 나무 뒤로 몸을 숨겼고, 남자들은 절망감에 싸여 말없이 서 있었다. - P417

1846년 미 버지니아에서 엘우드 하비는 노예 매매 현장에 와 있었다. 아메리카 노예는 그야말로 상품이었다. 그들은 주체로서 기능할 수 없어서 사고 파는 매매의 객체로서 취급받았다. 특히 아메리카 지역의 노예는 학대 피해도 많았다고 한다. 사람이 인격적인 주체로서 대우받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지 우리는 과거의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노예제 자체는 사라졌다고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노예는 여전히 존재하기에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이 크다.

옷과 옷깃, 애들 양말, 부인용 둥근 모자 따위가 여기저기 흩어져 피에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나무기둥의 칼자국에는 칼날에 묻어 옮겨진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붙어 너펄거리고 있었습니다. 보기에 너무나 괴로운 광경이었습니다. - P456

세포이 항쟁은 1857~58년 영국 동인도회사가 조직한 인도인 군대가 일으킨 봉기를 영국인들이 '세포이 항명사태Sepoy Mutiny'라 부른 사건이다. 당시 벵골에 13만명의 세포이 병력이 있었는데 인도 전체 영국군 주둔 병력은 불과 2만 3천명이었다고 한다. 탄창에 쇠기름과 돼지기름을 재료로 한 윤활유가 발라져 있는 것에 모욕감을 느낀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들이 수령을 거부하자 이들을 감옥에 가두었고, 세포이 병사들이 감옥에 쳐들어가 이들을 구해 오면서 항쟁이 시작되었다. 종래 영국의 인도 지배가 얼마나 문화적 이해와 종교적 이해가 무지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빗물에 흠뻑 젖은 천 조각 아래 동료들 틈에 끼어 찢어진 그물침대에 누워 있던 내 눈에 로턴 장군의 키 큰 모습이 들어왔다. 장군은 잿빛 여명을 배경으로 진흙탕 길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스페인군이 참호와 요새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산티아고 데 쿠바를 향해 미국군이 밤새 행군해 온 길이었다. 4세기간의 영광과 치욕으로 점철된 스페인의 서반구 지배를 종결시킬 전투가 이제 시작할 참이었다. - P503

1898년 스페인과 미국 간의 전쟁이 벌어졌다. 선전포고에서 강화조약까지 6개월도 걸리지 않은 전쟁이지만 이 전쟁 이후 스페인의 힘은 약화되고 미국이 열강 세력에 들어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7월 1일 쿠바의 엘 카네를 점령하기 위해 전투가 벌어진다. 약 6천 명의 미군과 3천 명의 스페인 군과 쿠바 동맹군이 맞붙었다고 한다. 왜 쿠바에서 전투가 벌어졌을까. 미국에 인접해 있으면서도 당시 경제 개발이 활발하던 스페인령 쿠바를 빼앗아 오기 위함이었다.

6월 28일은 모든 세르비아 사람의 가슴에 깊이 새겨져 있는 특별한 날이다. '비도프난'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날이다. 1389년 옛 세르비아 왕국이 터키에 정복당한 암셀펠데 전투가 있었던 날이다. 또한 2차 발칸전쟁에서 세르비아군이 터키군에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두어 과거의 패배와 오랜 예속의 빚을 갚은 날이기도 하다. 새 압제자인 프란츠 페르디난드가 바로 그 날짜에 세르비아의 턱밑에 와서 우리를 짓밟는 수단인 군사력을 시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의 결정은 거의 즉각적으로 떨어졌다. 폭군에게 죽음을! - P551

사라예보에서 페르디난드 대공이 암살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 침공의 구실을 얻으면서 1차 대전의 발발로 이어진다. 암살 범인은 19살 프린치프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였다. 독일의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 전쟁, 프랑스 전쟁 승리를 이끌며 근대 독일의 문을 열었다. 그가 사임할 때까지 독일은 일류 강국의 대열에 섰고 과거의 지역 맹주였던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주도권 하에 있었다. 비스마르크가 이끈 철혈 정책은 민주적 요구를 무시하거나 압제하는 것으로 민족주의자들의 불만과 요구는 커질 수 밖에 없는 한계를 지녔을 것이다. 알다시피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전 세계는 극심한 전쟁 피해를 겪었고 이후 경제 대공황까지 이르게 하는 기원이 된다.

매일 오후 독일의 과자가게와 찻집에 프랑스 손님들이 몰려드는 것은 볼 만한 풍경이었다. 독일인들은 아주 좋은 과자, 사실 기막히게 좋은 과자를 만들었는데, 지금처럼 마르크 값이 떨어지는 상황에서는 스트라스부르의 프랑스인들이 제일 작은 프랑스 동전, 1스우짜리로도 살 수 있는 것이다. 독일 과자집에 몰려든 프랑스 젊은이들이 크림을 채운 보드라운 독일 케이크를 한 조각에 5마르크씩 배가 터지도록 꾸역꾸역 처먹고들 있는 돼지우리 같은 광경은 환율의 마술이 만들어낸 것이다. 문 열고 30분이 지나면 과자집 재고가 동나버린다. - P623

글의 표현력이 기가 막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1922년 9월 19일 기록한 글이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독일은 배상금 지불 문제로 마르크화의 가치가 급락하였다. 기록의 장소는 독일 국경에 있는 스트라스부르다. 이곳은 1870년 전쟁으로 독일 땅이 되었는데 1919년 베르사유 조약으로 프랑스 땅이 되었다. 헤밍웨이는 당시 《토론토 스타》 특파원으로 유럽에 체류 중이었다고 한다.

방송에서 펄 하버 근무자들은 모두 즉각 출근하라고 하고 있어, 하고 말했습니다. 포치로 나가보니 하늘 높이 대공포화의 폭발이 보였습니다. 내 입에서 "저런, 저런!" 소리가 튀어나왔죠. 우리 집은 4마일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오토바이를 집어타고 5분인지 10분인지 뒤에 기지에 도착했지요. 난장판이었습니다. - P677

하와이 오아후섬에 정박해 있던 미 태평양 함대는 일본의 기습 공격을 받는다. 진주만 공격은 미국이 2차대전에 뛰어드는 계기가 된다. 이 글은 1941년 12월 7일 16살이던 진주만 해군 조선소에서 배관 견습공으로 일하던 존 가르시아라는 사람의 기록이다. 당시 일본은 동남아시아 침략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미국과의 대결은 회피하려 했다. 하지만 일본이 인도차이나에 진주하는 것에 대해서 미국이 항의하고 석유 금수조치를 가하자 대결이 불가피해진 상황에서 기습 공격이 감행된 것이다.

문이 열릴 때 시체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올 정도로 꽉 차 있었습니다. 근육이 매우 수축되어 있어서 서로 떼어내기가 몹시 힘들었지요. 죽음을 앞두고 몸부림을 심하게 쳤다는 인상이 들었습니다. 가스실에 시체가 1미터 반 높이로 꽉 채워져 있는 광경을 본 사람은 절대 잊을 수가 없습니다. (...) 모두 악마의 졸개들이 되어 있습니다. 살로니카에서 온 계리사고, 부다페스트에서 온 전기 기술자고, 다 똑같아집니다.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이들에게, 일하는 동안에도 몽둥이와 고무봉 세례가 계속 쏟아집니다. 이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그자들은 구덩이 앞에서 사람들을 쏘아죽이고 있습니다. 가스실이 꽉 차 있어서 미처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한 시간 반이면 모든 작업이 끝납니다. - P747

1944년 8월 유대계 루마니아인 의사의 증언 기록이다. 이 곳은 악명높은 비르케나우 수용소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아우슈비츠 주임 의사로 임명받아 수감자에 대해 각종 의학 실험을 감독한 요제프 멩겔레(1911년 생)는 전쟁 후 남아메리카로 탈출했단다. 기록을 읽는 것만으로 당시의 상황이 그려져서 힘들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런 피해를 당했는지 우리는 알고 있으니까. 이렇게 가스 처형장에서 사라진 많은 이들. 그리고 그 전 수없이 많은 의학 실험들의 대상이 되었던 이들이 있었다. 이는 어떤 것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일 것이다.

어린아이였다. 거의 발가벗은 몸에 오물만이 잔뜩 덮여 있었다. 아이는 가마니 틈에 헤쳐 낸 보금자리 속에 자기가 배설한 오물 위에서 누워 있었다. 팔꿈치를 짚고 일어날 기력조차 없었지만, 갈라진 입술을 말아 올리고 피 흐르는 잇몸을 드러내며 성난 고양이 새끼처럼 신부를 향해 으르렁대고 침을 뱉을 기운은 있었다. 목은 빗자루 손잡이보다 많이 굵지 않았고, 굶주린 아이들 특유의 엄청난 올챙이 배였다. 빈약한 목과 튀어나온 큰 눈을 보면 둥지 안의 새끼병아리가 겁먹은 모습과 같았다. 신부가 조심스레 팔에 안아 트럭으로 데려오는 동안 이 끔찍스러운 존재는 아무 소리를 내지 않으면서도 할퀴고 깨물려는 미약한 시도를 계속했다. (...) 오전 11시에 신부가 고아원에 돌아올 때는 트럭이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이 바로 전쟁의 진짜 희생자들입니다." - P804~805

1950년 12월 한국전쟁이 한참 벌어지고 있을 때의 기록이다. 르네 커트포스라는 사람의 기록인데 당시 블레델 신부는 서울 강변로 골목 곳곳에서 수없이 남겨진 고아를 발견한다. 부모를 잃고 정처없이 방황하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죽은 부모 위에서 울부짖을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라 눈물이 터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아이들을 목격한 신부님은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었을 것 같다. 전쟁이 벌어지면 안되건만 여전히 이 세계는 전쟁을 멈출 줄 모른다. 과거는 말해주고 있다. 전쟁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우리는 근대 역사 기법에 익숙하다. 사료를 증명하려고 하고 의도를 해석하려는 행위 등 말이다. 이 책은 르포르타주의 다양한 글들을 통해 현장감을 드러낸다. 물론 기록한 사람들의 의도성이 있을 수도 있으나 상대적으로 목적을 가진 역사서에 비해서 의도성이 약하다고 할 수 있다. 한국사의 경우 현대까지도 역사를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끌어안는 시도들이 비일비재하였다. 이념으로 선을 긋고 사료를 왜곡하여 구미에 억지로 맞추는 일이 많았다. 이 책을 통해서 그런 한계를 지나 대안적인 역사의 흐름이 이어질 수 있으면 좋겠다.

언제 어디서나 정치적 목적에 부합하는 역사의 연구와 교육만이 사회의 지원을 받았고 그 반대의 경우는 억압을 받았다. 그 결과는 우리 모두가 함께 겪어온 것이다. - P829

누가 옳고 누가 그르고 따지기에 앞서, 냉전의 논리가 더 이상 우리의 갈 길을 정해 주지 않는 새로운 상황을 다 함께 맞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많은 학자들이 연구와 교육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근대역사학의 집단식중독에서 사람들이 벗어날 수 있는 효과적 처방이 나오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역사의 원전』 같은 책이 치료의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다. - P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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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6-01 15:4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현장성이라는 측면에서 사료로서의 의미가 큰 책일것 같네요. 아까 페이퍼에서 이 책 소개 보고 관심이 갔는데 화가님의 이 글을 보니 확실하게 봐야겟다는 생각이 듭니다. ^^ 항상 좋은 책 소개 감사드려요.

거리의화가 2022-06-01 16:04   좋아요 3 | URL
네 저도 이 책 생각 이상으로 좋았어요. 바람돌이님께 도움이 되어서 기쁩니다! 항상 저도 감사드려요.

새파랑 2022-06-01 17:1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책 목차만 봐도 엄청나네요~! 조지 오웰과 헤밍웨이 찾아보니 딱 있네요 ㅋ 르포르타주가 확실히 현실감이 있고 재미도 있는것 같아요~!!

거리의화가 2022-06-01 21:34   좋아요 0 | URL
정말 다양한 기록자들이 모여 있습니다 헤밍웨이, 조지 오웰 소설로는 익숙하겠지만 다른 양식의 글을 만나니 새롭더군요 비문학과 문학은 다르니까요 그럼에도 확실히 위트 있는 글체라는 게 느껴졌습니다ㅋ 현장감 넘치는 글들이어서 저도 재미나게 읽었답니다^^*

mini74 2022-06-01 17:3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제국주의의 정당성을 위해 식인문화를 부각한 면도 있다고 읽었어요. 그들의 제례나 매장풍습을 과장하거나 오해를 내버려두는 식으로 ㅠㅠ 네로 이여기가 의외네요. 전쟁고아 이야기는 슬프고.ㅠㅠ 저도 이 책 찜입니다 *^^*

거리의화가 2022-06-01 21:37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미니님 제국주의자들의 위계 질서를 드러내려고 의도한 부분도 클 것 같습니다 네로는 정말 의외였어요 그러고 보면 고정관념을 벗어나는 게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전쟁 이야기가 여러 번 나오는데 특히 뒷부분 현대전은 아무래도 더 비극적입니다ㅜㅜ 무기가 탄탄해질수록 피해가 더 크니. 미니님도 요 책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