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여자들은 세계를 만든다 - 분단의 나라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
김성경 지음 / 창비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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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사회는 북조선 사람들에 대해 무지하다. '북조선'이라는 국가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이들의 행위주체성의 다면성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분단을 가로질러 이주하면서 탈분단적 정체성을 구축하기도 하고, 국경을 넘나들며 코즈모폴리턴적 주체로 재탄생하기도 한다. 남북이 공유하고 있는 가부장적 체제에서 '어머니' 역할에 골몰하는 이들도 있고 도다른 이들은 좀더 자유롭고 독립된 주체성을 체현하기도 한다. 국가나 민족이라는 구조를 무력화하는 일상적 실천에 나서는 이들도 상당하다. 수많은 얼굴로 존재하는 그들에게 좀더 다가가는 것은 남한사회와 사람들의 정체성에 깊게 내재해 있는 분단을 반추할 기회이기도 하다. - P10~11

북한은 어떤 나라인가? 우리는 북한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분단이 되고 한국 전쟁이 끝난지도 70여년이 지났다. 남북한의 경제적 격차는 커졌고 냉전 종식 이후에는 북한이 핵 개발에 들어가면서 안보적 이슈까지 더해져 통일이라는 단어는 이제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가 되어버렸다.
북한을 생각하면 우리는 이념을 우선으로 생각하여 국가론적으로 인식하기 쉽다. 그래서 북한에 사는 사람들에 대해 무지하거나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는 북한을 둘러싼 이분법적 사고 체계에 문제점을 먼저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연구자가 쓴 글은 대체로 학술적이어서 딱딱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작가는 북한대학원 교수로 사회과학적 글쓰기에 익숙하다고 고백한다.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런데 작가는 (더 많은 사람들이 읽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에) 산문 형식으로 글을 써 내는 실험을 감행했다. 쉽지는 않았을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명한 결정이었다고 보인다.

이 책의 중심에는 북한 여성이 있다. 작가는 여러 명의 북한 여성들을 인터뷰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재구성해냄으로써 북한의 현실과 여성 문제를 들여다볼 수 있도록 했다.
전체적으로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는 북한의 현대사에서 북한 여성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북한에서 선전을 목적으로 소개된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북한의 역사를 빠르게 훑어내려가면서 2000년대까지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사실과 작가의 상상력이 버무려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2부는 중국과 북한의 접경 지역의 북한 여성과 조선족, 자이니치와 북조선 여성들을 작가가 인터뷰 대상으로 만난 이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며 만남을 통해 느낀 작가의 소감이나 소회도 함께 실었다. 3부는 북한 연구자로 북한 여성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를 깨닫고 그것에 북한 여성들과의 만남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그리고 그 이후 자신의 역할을 어떻게 재인식하게 되었는지 정리하였다.

그동안 북한 역사서를 몇 권 읽어보았지만 대부분 학술적으로 정리해놓은 것들이었다. 최근 업데이트된 북한 역사서에는 1990년대 초 고난의 행군 시기 이후 각자도생을 위해 시장인 장마당이 허용되었고 그 중 장사 수완이 있는 이들은 돈주로 성장했고 김정은 정권까지의 역사가 짧게나마 소개되어 있다. 다만 교과서적인 텍스트이기 때문에 멀찍이 떨어진 느낌이다. 북한 사람들의 생활은 실제로 어떠한지 속속들이 알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우리가 평소 북한에 대해 보고 듣는 정보는 언론, 통일부 등을 통해서 접하는 제한적인 것들이다보니 사실인지 홍보인지 왜곡인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경우가 있다. 더군다나 여성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지금 북한 여성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우리는 딱히 접할 수 있는 경로가 없다. 이런 연구자들의 작업을 통해서 비로소 접하게 되는 것인데 이 책은 딱딱하게 쓰여지지 않아서 대중들이 읽기에도 무리가 없는데다가 북한 현대사도 덤으로 훓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보여진다.

북한 여성들은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 누구보다 용감했고,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으며, 삶에 대한 열망과 의지가 넘쳤다. 여성들은 아무래도 '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삼시 세끼 누군가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 분투해야 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는 남한 여성이나 북한 여성이나 같았다.

목숨을 걸고 고향을 떠난 그녀들이 이주 과정을 회고할 때 자주 등장하는 음식 이야기는 때로는 너무 사소해서 이질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우리는 사선을 넘어온 북조선 여성들의 증언에서 김치, 국수, 고추장과 된장, 삶은 감자, 두부밥 이야기를 좀처럼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체제, 폭력, 굶주림, 죽음과 생존 등과 같이 북조선을 가리키는 어마어마한 이야기가 등장할 것으로 기대했다면 더더욱 그녀들의 '밥'에 대한 깊은 애착을 흘려들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녀들의 '밥'이야기를 조금 더 세심하게 들여다보면 그것이 그녀들의 전쟁과도 같은 삶의 다른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이라면 먹지 않고는 결코 살아갈 수 없으니 '밥'을 마련하기 위한 그녀들의 분투기는 인간이자 어머니로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눈물겨운 투쟁 기록에 다름 아니다. - P242

그녀들의 위치가 그녀들을 제약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들의 눈물겨운 행위주체성은 전복성과 해방성을 시사하고 있다. 그동안 열등감에 휩싸여 중심만을 지향하며 살아온 내가 그들을 만남으로써 조금씩 변화했다. (...) 나는 그녀들의 고통을 통해 나의 삶을 되돌아봤으며, 그녀들의 기쁨과 행복이 나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신기한 일이다. 그녀들이 내 안으로 불쑥불쑥 들어온다. - P239

북한 연구자로서 북조선 여성들을 직접 만나면서 자신의 위치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수 있을 것 같다. '사람 vs 사람'이 아니라 분단 국가에서 사는 남한의 북한 연구자와 북한 여성들의 만남에는 개인적인 감정으로만 정리되기 어려운, 이념과 거리감이 어쩔 수 없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이렇듯 분단은 식민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가로막는 현실적인 제약과 장벽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이를 깨부수지 않으면 이 체제는 공고히 이어질 수 밖에 없음을 동시에 인식하게 된다.

이 책은 분단된 나라에서 사는 우리가 북한을 국가론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사람들의 수준에서 만날 수 있어 좋았다.

지금까지 북한학의 기존 연구는 국가와 민족의 분단을 다루는 까닭에 국가 중심성이 상당했다. 하지만 페미니스트 입장이론과 탈식민주의 문화연구로부터 시작된 나의 문제의식은 다양한 집단의 다층적인 경험을 밝혀냄으로써 억압적 사회구조의 작동 메커니즘의 면면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확신이 뒷받침된 것이었다. - 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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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3-04-09 22: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이런 연구는 진짜 쉽지 않을듯한데 아주 귀한 책이 나왔네요. 화가님의 이 리뷰 아니었으면 몰랐을 책이네요. 냉큼 담아갑니다.

거리의화가 2023-04-10 09:45   좋아요 1 | URL
그러니까요. 저자의 연구도 소중한데 연구서가 아닌 대중서로 내주어서 감사한 마음이 들더라구요^^ 바람돌이님께도 유용한 책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건수하 2023-04-10 09: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결국엔 밥에서 동질감을 느끼게 되는군요... 출근하며 정희진의 공부를 들었는데, 정말 그 놈의 밥이 뭔지...
강경애의 <소금>을 읽으며 소금이 비싸서 간을 맞추지 못해 안타까워하던 그 마음이 생각납니다 ㅠㅠ

북한에도 사람이 사는 건데, 그 사람 이야기들이 궁금하네요. 한국어가 아닌 외국어로 출판된 것들이 훨씬 많을 것 같아요.

거리의화가 2023-04-10 09:47   좋아요 0 | URL
네. 결국 밥입니다^^ 사람이 먹고 사는데 밥만큼 소중한 게 없는데 말이죠. 우리는 북한 사람들이 모두 다 기아에 허덕이고 (고위층 빼고) 있다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아요. 그리고 사람보다는 북한 정권 자체에 대해서만 집중하는 경향이 더 많아서 아쉽습니다. 이런 책을 통해서 북한 사람들의 실상을 더 알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생각해요. 이런 류의 다양한 대중서가 나오면 좋겠습니다. 좋은 시도의 책이에요.

희선 2023-04-13 03: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북한에서 여성으로 사는 거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잘 모르지만, 바로 그런 생각이 듭니다 북한은 가까이 있지만 아주 멀기도 하네요 한국과 북한은 통일을 할지... 그런 거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더 많다고 하던데... 전쟁보다 평화를 생각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3-04-13 09:13   좋아요 1 | URL
네. 많은 북한 여성들이 분투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한국 여성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구요. 이념과 사상, 국가 간의 경쟁 때문에 그렇지 우리가 멀게 느낄 필요가 없는데 말이죠ㅠㅠ
이제는 통일 자체를 회의적으로 보는 시각이 더 많죠. 아예 다른 국가로 생각하고 살거나;;;
 
오정희 컬렉션
오정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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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배경은 1980년대 무렵 즈음 어느 주택가를 떠올리게 한다. 아파트가 이제 막 만들어지고 있었지만 서민들이 익숙하게 사는 그 곳이다. 응팔 시리즈를 단 하나도 본 적이 없지만 주변에서 들어서 저절로 알게 된 것이 많았는데 아마도 그 무렵의 동네를 생각나게 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아이들이 이야기하는 만화가 있는데 '우주소년 토토'다. 1983년에 나왔다고 하는 것을 보니 그 무렵이 시간적 배경일 것 같다.


아이들은 건강하게 자랄 수만은 없는 환경에 놓여 있다. 어른들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는데 그마저도 분노가 쌓이니 뻔뻔해지고 감정적 폭발을 일으키기도 한다.
아이들이 안됐다고 생각하다가도 주변에 사는 사람들의 사정도 녹록치 않은 것이 보여서 마음이 불편했다.

폭력을 보고 자라는 아이의 미래의 내면은 상처와 얼룩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다. 아이들은 가만히 있는데도 "내가 미쳐!"라는 소리를 항시로 듣고 "내 명대로 못 살고 죽을 거야"라는 소리를 듣는다면 '나는 왜...' 라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

집에 온 여자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모두 매일매일 무엇인가가 되어가는 중이지. 너는 지금의 내가 되기 전의 나야. 아니면 내가 되어가는 중인 너라고 말해야 하나? 그래서 나는 너희들을 보는 게 무서워 견딜 수 없어."
나는 이 말을 하는 여자가 안 됐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말을 듣는 아이들은 어쩌라는 걸까 생각했다.

아버지는 여자들을 때리고 아이들을 내팽겨쳤다. 남자는 열등감과 열패감을 분노로 포장해 여자들을 때리고 아이들을 내던졌다.

안방의 아랫목 쪽 벽 중간쯤에, 두 짝의 미닫이로 된 벽장문이 달려 있고, 그 문을 열면 다섯 개의 계단, 그 계단의 끝에 어슴푸레 떠 있는 공간이 나타난다. 묵은 잡동사니들이 가득 들어찬 다락의 어둑신함과 그 안에 서린 매캐하고 몽롱한 냄새, 모든 오래된 것의 안도감이 우리를 사로잡았다. 어둠과 먼지, 오래된 시간, 이제는 쓰일 일 없이 버려지고 잊힌 물건들 사이에서, 그 슬픔과 아늑함 속에서 우리는 둥지 속의 알처럼 안전했다. - P27

아이들이 그 속에서 스스로를 안전하게 생각하는 공간이란 다락방이라는 공간 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 곳에서 아이들은 이것 저것 열어보며 닫힌 것을 열어 제꼈다. 하늘을 날고 싶었던 동생도 그 곳에서는 잠시 자유로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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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3-04-09 17: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마어마한 언어폭력인데요. 가끔 아니 너무 자주 부모들은 진짜 생각없이 아이들에게 언어폭력을 휘둘러요. 그게 폭력이라는 생각도 없이 말이죠. 갈수록 주변에서 우울증 증세를 보이는 아이들이 너무 많아지는 거 같아서 정말 안타까워요.

거리의화가 2023-04-10 09:36   좋아요 2 | URL
지금하고는 시대 차이가 있다고는 해도 여전히 폭력은 사라지질 않고 있어서 읽을수록 씁쓸함이...ㅠㅠ 바람돌이님은 아이들을 많이 만나니 더 많은 걸 느끼시겠네요.
저 말을 하는 어른들은 자기가 말하는 것이 언어폭력이라는 걸 인지조차 못햇을 거라고 봅니다. 그냥 자신의 한탄이자 신세 타령인데 그게 아이들에게는 내면을 갉아먹는 소리였겠죠. 이런 것들이 쌓이면 분노 조절 장애나 폭력을 가하는 아이로 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악순환이네요ㅜㅜ

건수하 2023-04-10 09: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전에 읽었던 두 단편도 화자가 여자 어린이예요.
너는 지금의 내가 되기 전의 나야.. 라니 단편에선 그렇게 직접적이진 않았는데.
장편은 아무래도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네요.
읽어보고 싶기도 하고, 그냥 넘기고 싶기도 하고...

거리의화가 2023-04-10 09:42   좋아요 1 | URL
단편은 좀 소프트한 표현이었나보네요^^; 아무래도 단편은 짧은 이야기로 작가의 메시지를 보여주기에는 어려움이 있으니까.
읽기 힘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읽어보길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폭력에 무뎌지지는 않아야 하지만 이런 책을 통해서 어떤 것이 폭력적인 표현임을 인지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수하님께 감사 인사 전해요^^

건수하 2023-04-10 09:45   좋아요 1 | URL
감사는요… 거리의화가님이 관심가지셔서 저도 기뻤어요.
단편에서는 어른들이 말을 많이 하지 않고 주로 아이의 시선으로 서술했던 것 같아요.

위에 신세한탄이라고 하셨는데 저도 그렇게 느껴지더라고요… 저도 모르게 하고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조금 더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그게 조심한다고 되는게 아니라 애초에 상황이 그리고 성격이 긍정적이어야 될 것 같네요.. 🥲

거리의화가 2023-04-10 09:50   좋아요 1 | URL
이 책도 아이의 시선입니다. 다만 어른들의 대화들도 등장하는데 뼈아픈 말들이 좀 많았어요. 당시에는 지금보다 폭력에 더 무딘 시대였으니... 좀 더 나아지는 세상이 되면 좋겠네요^^;
 
사기세가 - 개정판 사기 (민음사)
사마천 지음, 김원중 옮김 / 민음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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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세가는 패권을 장악한 일인자의 옆에서 도움을 준 참모나 제후들, 후비들의 이야기다.

세가는 총 30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기별로는 춘추 전국시대가 18편, 한나라 시대가 12편이다.
서술 방식은 본기와 마찬가지로 인물의 행적을 기본 바탕으로 역사적 사건을 연계시키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사기의 장점이라면 역시 대화문인데 인물의 일화를 보여줄 때 그것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자치통감에서 보여주는 평서문의 서술 방식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방식이다.

세가에 어떤 인물이 포함되었는지 살펴봄으로써 사마천의 시각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유방의 핵심 참모들의 이야기가 눈길을 끈다.
유방이 세력을 이끌고 초나라와 최종적으로 승리할 때까지 큰 도움을 준 핵심 참모라면 소하, 진평, 장량, 한신이 있다. 한신은 제후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세가에서 빠진 반면 나머지는 세가에 나란히 올랐다. 세 명의 인물에 대한 사마천의 평가도 표현 방식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는데 흥미로웠다.

그리고 공자와 진섭이 세가에 포함되었다.
공자를 세가에 포함시킨 것은 유가의 사상적 구심점이 된 인물이기도 하고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면서도 자신을 제대로 알아봐주지 않는 제후들에 대한 아쉬움과 한탄이 자신의 삶과 비슷하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 같다.
진섭은 진나라가 멸하고 한나라가 설 때까지 그 흐름을 시작한 주자라는 것을 높게 평가한 것이 아닌가 한다.

사마천은 제후가 되었더라도 반역 혐의를 받아 제후 작위를 박탈당한 인물의 경우 세가에서 제외시켰다.
그는 원칙이나 질서가 중요하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이에 비켜서 있으면 당시 좋은 평가를 받았던 인물이더라도 비판적인 입장을 내놓았다.

본기에서는 ‘항우 본기’가 백미였다면 세가는 한 고조의 개국 공신들의 이야기인 ’소 상국(소하) 세가‘, ’유후(장량) 세가‘, ’조 상국(조참) 세가‘가 백미였던 것 같다.
각 인물들의 서로 다른 행위를 통해서 그들이 제후의 반열에 오른 이유, 그리고 제후에 오르고 나서 한 고조에게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행하는 행동들을 보는 것에 재미가 있었다.
소하가 살림꾼이었다면 장량은 비상한 계책을 낼 줄 아는 모사꾼이었고 조참은 현실적으로 자기 이득을 잘 챙길 줄 아는 자였던 것 같다.
유방은 권력의 정점에 오른 그들과 기싸움을 벌이며 그들의 힘을 끊임없이 견제한다.

공신에 대한 봉읍과 작위를 나누는 자리에서 소하와 다른 공신들의 차이를 말하며 사냥개와 사냥꾼의 차이에 비유하는 일화가 있다.
“사냥에서, 들짐승과 토끼를 쫓아가 죽이는 것은 사냥개이지만, 개 줄을 풀어 짐승이 있는 곳을 알려 주는 것은 사람이오. 지금 여러분들은 한갓 들짐승에게만 달려갈 수 있는 자들뿐이니, 공로는 마치 사냥개와 같소. 소하로 말하면 개의 줄을 놓아 방향을 알려 주니, 공로는 사냥꾼과 같소.” - P800
전쟁터에서 싸우는 장수들이 공신의 최고봉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소하는 유방이 항우와의 싸움을 하는 동안 관중의 땅을 지키고 백성을 잘 보호하였으며 유방의 군대의 수가 모자라지 않게 끊임없이 채우는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고조가 장량에게 제나라 삼만호를 준다 이야기하자 그는 유현에 봉해지는 것으로 충분하다며 삼만호는 감당하지 못한다 이야기한다. 이후에도 공신들을 봉하는 일에 잡음이 끊이지 않자 이를 잠재우기 위해 장량이 고조에게 계책을 내는 장면도 있다.
“황상께서 평생 동안 미워하시는 자로 여러 신하들도 다 아는 사람 중에서 누가 가장 심합니까?” 황상이 대답했다.
“옹치는 나와 오랜 원한이 있으니, 그는 일찍이 자주 욕되게 하여 내가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그의 공이 많기에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소.” 유후가 말했다. “지금 시급히 먼저 옹치를 봉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보여주십시오. 여러 신하들은 옹치가 봉해지는 것을 보고, 사람들마다 자신들도 봉해지리라 굳게 믿고 의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 P842
옹치가 후가 된 것을 보고 다른 공신들은 더는 안절부절하지 않았다.

조참과 소하는 사이가 좋았으나 소하가 승상이 되고 조참이 장군이 되자 자연스레 거리가 생겼다. 하지만 소하는 죽기 전 조참을 승상으로 추천했고 조참이 조 승상이 된 이후에는 소하가 해온 일을 잘 이어받아 한나라를 안정시켰다.
조참은 제나라를 분봉받은 후 황로학설에 정통한 갑공이라는 사람을 초청한다. 그는 국가를 다스리는 이치를 그에게 물었는데 “귀한 것은 맑고 고요한 것이니 그렇게 되면 백성들은 스스로 안정되며, …” 조참은 이 황로학설을 받아들이고 제나라를 다스리는 기본 정책으로 삼은 뒤 나라가 안정되었다고 한다.

한나라 공신들의 세가 말고도 개인적으로 제나라가 강씨에서 전씨로 바뀌는 과정이 나오는 전경중완 세가, 한 문제와 무제의 아들들에 대한 세가들도 재미났는데 업적으로는 공이 있다고는 해도 인품이나 사생활 등에서는 일반 사가의 자제들만 못한 점이 엿보인다. 이들도 욕망에 휩쓸리기 쉬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로써 사기 본기와 세가를 모두 읽게 되었는데 본기를 읽으면서 부족했던 부분을 보완해간다는 생각으로 읽었다. 열전까지 읽으면 사기의 흐름이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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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04-03 00: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마천이 쓴 글을 보면 그때 사람뿐 아니라 사마천도 조금 알게 되겠네요 이건 어느 역사가나 다르지 않겠습니다 사실을 쓴다 해도 자기 생각을 쓰기도 할 테니...


희선

거리의화가 2023-04-03 08:47   좋아요 1 | URL
네. 사기를 읽다 보니 사마천이 어떤 시각으로 이 책을 썼는지 느껴지더라구요. 비단 역사가 뿐 아니라 작가들도 자신이 쓴 저작에는 주관적인 관점이 들어가는 것이겠구나 생각이 듭니다.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 고독으로부터 찾는 해답 서양문학의 향기 10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김재혁 옮김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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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에세이는 작가의 삶을 통해 독자 개인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일이라 생각한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그런 면에서 이 편지는 내게 좋은 에세이다.

"판단하려 하기 전에 유보하라!"라는 말을 오래 들었다. 고질적인 문제인데 나는 어떤 문제를 오래 끌어안고 살지 못하는 편이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그 끌어안고 있는 시간을 못견뎌한다. 그래서 어떤 질문이 생겼을 때 A플랜, B플랜, C플랜 정도를 생각해 놓고 브레인스토밍을 멈춘다. 그리고  그 세 가지 답 중 가장 나은 답을 찾는다. 나에게는 정답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가장 나은 선택이 중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이냐. 더 많은 플랜이 있을 수 있는데 생각을 끊어냄으로써 더 나은 플랜의 기회를 생각해내는 기회를 놓쳐버리는 것이다.
정말 내가 고치고 싶은 문제인데 늘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문제를 끌어안고 있으면 나는 그것으로 머릿속이 꽉 차서 다른 것은 들어올 틈을 찾지 못하는 것에 대해 괴로워하는 것 같다. 그리고 어떤 다른 새로운 경험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 눈과 귀를 열어두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호기심은 많은데 탐구심이 부족한 것일까. 그렇다고 해서 끈기가 부족하지는 않다.

"당장 해답을 구하려 들지 마십시오. 아무리 노력해도 당신은 그 해답을 구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아직 그 해답을 직접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직접 몸으로 살아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제부터 당신의 궁금한 문제들을 직접 몸으로 살아보십시오. 그러면 먼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해답 속에 들어와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 P40
릴케는 시인 지망생이었던 카르푸스(카푸스)와 여러 통의 편지를 주고 받는다. 릴케는 인생 후배의 고민에 공감하면서 조심스럽게 조언을 해준다. 당시 20대의 릴케가 얼마나 많은 인생을 알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그는 시인이었기에 지망생이 보내는 편지를 쉽사리 지나쳐버리지 못했을거라 생각한다.
릴케의 핵심 메시지라면 '당장 해답을 구하려 들지 말고 몸으로 깨달을 때까지 그 고독을 견디라!'는 의미일 것 같다. 진정으로 내게도 필요한 메시지인데 나는 절감하면서도 지금까지 살면서도 잘 되지 않았는데 과연 이것이 앞으로도 나아질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나의 문제를 다시금 여기서도 깨달았다는 것이 중요하겠다.

'사랑을 위해서는 각자의 고유성이 중요하다'라는 메시지도 내게 적지 않은 울림이 있었다. 누군가 내게 가면을 쓰고 있는 것 같다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웃고 있는데 슬픔 같은 것이 느껴진다고 했다. 그 때는 실제로 삶이 힘들었고 팍팍했다. 그래서 매일 산다는 것이 절망이었고 그야말로 난간에서 억지로 버티고 있는 상황이었다. 웃을 수가 없는 상황에서 내가 그렇게나 웃었나보다. 아마도 '썩소' 아니었을까. 결코 자연스러운 웃음은 아니었을거라 생각한다. 내면의 슬픔이 가득한데 사람들이 가득한 장소에서 억지로 풀어보려 애썼던 나날들이 길었다.

슬픔의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하여 사람들이 슬픔을 시끌벅적한 곳으로 들고 갈 때, 오히려 그 슬픔은 위험스럽고 나쁜 것이 되는 것입니다. 표피적으로 그리고 아둔하게 치료한 질병처럼 그런 슬픔들은 물러나는 척하였다가는 짧은 잠복기가 지나고 나면 전보다 훨씬 무섭게 터져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슬픔들이 가슴속에 집적되어 인생이 되면, 그 인생은 제대로 살지 못한 삶, 거부된 삶, 실패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삶으로 인해 죽을 수도 있습니다. - P80~81

그런 의미에서 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 비단 연인이 아니더라도 친구 등 모든 관계에서 바탕이 되는 것은 개인이다. 스스로가 홀로설 수 없다면 제대로 된 관계도 성립되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는 더 확고해지고 있다.
내가 하나의 주체로서 꼿꼿이 서 있지 않으면 어디든 휘둘리기 쉽다. 쉽게 사람을 만나고 헤어질 수 있는 세상이 되었기에 이 메시지는 더욱 중요하다. 개인이 존립해 있지 않으면 누군가의 만남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사랑은 개인이 성숙하기 위한, 자기 안에서 무엇이 되기 위한, 하나의 세계가 되기 위한, 즉 상대방을 위해 자체로서 하나의 세계가 되기 위한 숭고한 동기입니다. 사랑은 개인에게 주어지는 위대하고도 가혹한 요구입니다. 즉 사랑은 한 개인을 지목하여 그에게 원대한 사명을 부여하는 그 무엇입니다. - P69
그들은 이 문제가 사람마다 각각 경우가 다른 사적인 문제로서 그때마다 새롭고 독특하고 극히 개인적인 답변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상대방에게 자신을 내맡기고 서로의 경계를 짓지도 않고 구별하지도 않게 된 그들이, 다시 말해서 자신들의 고유성을 더 이상 지니지 못하게 된 그들이 어떻게 자기 자신들로부터, 이미 막혀버린 고독의 깊은 곳으로부터 나가는 출구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 P71

이 책은 스스로에 대한 진지한 탐구, 성찰이 필요한 모두들에게 좋은 메시지를 줄 수 있다. 청년이 더 어린 청년에게 쓴 편지지만 비단 청년에게만 통하는 메시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른들에게도 위로와 성찰의 기회를 줄 수 있는 조용하지만 묵직한 메시지로 다가올 편지다.

당신의 회의는 탐구적이 되어야 하고 비판적이 되어야 합니다. 당신의 회의가 당신의 무언가를 파괴하려 들면, 그때마다 그 무언가가 도대체 왜 보기 싫은 건지 회의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리고 회의에게 그에 대한 증거를 요구하시고, 회의를 시험해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아마도 회의가 할 말을 잃고 당혹해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혹은 회의가 반항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 굴복하지 말고, 논쟁을 끝까지 이끌어가십시오. 그리고 그때마다 한시도 눈을 떼지 말고 철두철미하게 행동하세요. 그러면 회의가 파괴자에게 당신의 가장 훌륭한 일꾼 중의 하나가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아마도 회의는 당신의 삶을 만들어가는 모든 일꾼 중에서 가장 현명한 일꾼이 될 것입니다.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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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비평 142호 - 2023.봄
역사문제연구소 지음 / 역사비평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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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상’이라는 단어가 다양한 냉전의 동아시아 공간에서 어떻게 펼쳐지는지 살펴본 특집 구성이 인상적이었다.

자조라는 용어의 기원부터 시작하여 현대 이후 한국에 이 담론이 어떻게 적용되고 변주되는지(미국의 대외원조와 접촉하며 변주를 겪었다) 알려주는데 아주 흥미로워 향후 더 깊이 조사해보고 싶은 생각이 이는 발제 논문이었다.
제주 4.3 사건에서 갖은 이유로 ‘손상’의 주체로 만들어내려는 당국의 의도 하에 수용소가 운영되었음은 인권의 또 다른 유린 현장을 들여다보게하는 아픔이었다.
베트남전쟁 파병에 대해 한국 대학생의 인식은 어떠하였는지도 흥미로웠다. 베트남에 6차례에 걸쳐 대학생 위문단을 파견한 정부의 의도가 파병에 대한 국내 여론을 의식하여 한일협정 파문에 따른 대학생들의 시위를 누그러뜨리려는 시도의 일환에서였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전후 타이완 냉전주체인 영예국민, 그리고 영예국민지가라는 것은 생소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한 주제였다. 타이완 국민당 정부가 한국전쟁 이후 동아시아 반공 기지로서의 역할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들여다볼 수 있었다. 타이완은 퇴역 군인, 반공의사, 대륙에서 귀환한 동포 등을 위해 다양한 정책을 이용하여 섬 전체를 반공기지로 자기매김하려는 의도를 공고히 하였다.

역비논단 주제는 조금은 아쉽기도 했는데 식민주의 역사학에 대한 단상, 세키노 타다시의 한국 고적 조사에 대한 시각은 내가 이미 몇몇 책을 통해서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던 부분이라 새로울 것이 없었다. 다만 안중근과 조마리아 여사의 편지에 대한 실체와 조선후기 화이론을 문화가 아니라 풍기적으로 접근한 논문은 잘 읽었다.

어느덧 5번째로 연재되고 있는 세종 시대의 재조명 기사는 뉴라이트 역사가들과 지식인들의 허점이 무엇인지 비판적으로 들여다보기 위해서라도 이런 기획의 논문이 지속적으로 나와주어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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