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머리앤 전집 세트 - 전8권 (완역본) 빨간 머리 앤 전집
루시 모드 몽고메리 지음, 유보라 그림, 오수원 옮김 / 현대지성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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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만화 속 여성들은 하나 같이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고 버림받고 처참한 모습이어서 불만이었다. 그러다 앤을 만났을 때 환희의 빛이 떠올랐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긍정적이며 누구에게도 당당한 주체적인 여성이어서 좋았다. 위로받고 싶을 때 늘 앤을 떠올린다. 디자인&구성 마음에 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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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중국사 남북조 - 분열기의 중국 하버드 중국사
마크 에드워드 루이스 지음, 조성우 옮김 / 너머북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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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중국의 이 시기의 역사와 관련한 책을 읽으면서 정리가 안되고 어째 더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약 4~5세기 동안 너무나 많은 왕조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기 때문인데 그런 만큼 수많은 사건과 인물들이 등장한다. 어릴 적 삼국지를 읽으며 ';왜 이리 복잡해!' 했는데 '이건 약과였구나' 싶다. 동시에 중국인들은 과연 이 때의 역사를 얼마만큼 알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도 슬며시 일었다.

후한 말 중국은 혼란기에 접어든다. 황건적의 반란을 시작으로 위, 촉, 오 삼국이 분열했다가 서진으로 통합되었으나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북쪽은 오호십육국 시기가 (북위가 북중국을 통일할 때까지) 1세기 가까이 이어진다. 남쪽은 두 세기 동안 유송, 제, 양, 진의 남조가 이어졌다.

하버드 중국사 2권은 흔히 우리가 '위진남북조'라고 부르는 시기를 '남북조'로 통칭한다. 중국인 역사학자들은 왕조별로 시대를 구분하는 전통에 따라 이 시대를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라고 부르는 반면 서구 학자들은 ‘분열의 시대(the Age of Disunion)‘ 혹은 ‘초기 중세(the Early Medieval period)‘라는 대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분열의 시대'는 어디 갖다 써도 분열의 시기에 통칭하는 일반적인 명칭이라는 생각이 들고 그렇다고 '위진남북조'라고 하기에는 중국이 어느 한 왕조로 통일되었다는 관점을 강요하는 것이라 불편하다. 그래서 저자는 중국 정치세계가 황하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과 양자강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으로 양분되어 있었음을 반영하여 '남북조'라고 통칭하자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남북조'라고만 하기에도 충분한 설명이 되는지는 모르겠다.

전한대에는 황하 상류 황토 고원과 황하 하류 범람원 사이의 지리적 구분이 아주 중요하였다. 한대 역사 전체가 이 두 지역 사이 균형의 변화라는 시각에서 서술될 수도 있다. 그러나 수 세기에 걸쳐 자발적으로 혹은 불가피하게 점차 많은 중국인이 남쪽으로 이동하였고, 이에 따라 황하 유역 내 구분보다 다른 구분, 즉 황하 유역과 양자강 유역 사이의 구분이 중요해졌다. - P29

이전까지만 해도 양자강 이남 지역은 중국에서 주변 지역이었다. 그러나 이민족의 침략과 잦은 홍수로 후한 시대를 시작으로 4세기 초까지 북중국에 있던 많은 인구가 남방으로 이주한다. 이들(한족)은 강남 지방을 농업에 적합한 자연 환경으로 만들고 토착민들은 살던 곳에서 쫓겨 나거나 한족에 흡수되었다.

한반도의 역사에도 시기 별로 지배층의 명칭이 다른데 중국의 이 시기도 마찬가지다. 일반적으로 '귀족의 시대'라는 명칭으로 정리되는데 저자는 '귀족'을 쓰지 않고 '유력 가문'이라는 용어를 썼다는 것이 특이하다. 내 생각에 너무 일반적인 용어를 쓴 것 같기는 하지만(유력 가문은 어느 시대에나 통용되는 단어인 것 같아서) 일부 가문의 영향력을 강조하기 위해 쓴 듯하다.

귀족의 시대라는 표현이 전적으로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 시기 동안 황제 권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덕분에 일부 가문이 조정과 지방에서 과도한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사실이다. 이들 중 어떤 가문도 몇 세대 이상 조정을 지배할 수는 없었지만, 일부 가문은 수세기 동안 상당한 영향력을 유지하였고 사회 지배층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운명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 가문이 중국에서의 높은 지위에 대한 개념을 바꾸었고, 그리하여 사회 지배층과 조정 간의 관계를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는 점이다. - P69

이 시기 유력 가문은 여러 문화 및 문학 활동을 추구(시 짓기, 서예, 글쓰기, 사상)하며 이전의 지배층과 다르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런 활동이 새로운 관료 선발 방법에 녹아들며 국가의 중앙 집단을 재구성했다. 또 가족 묘지를 만들고 한식(청명절)에 가계의 구성원들이 정기적으로 모이게 되었으며 족보를 작성하면서 가문을 친족 집단으로 규정 짓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의식하는 친족 집단이 점차로 확대된 현상은 가훈과 족보라는 새로운 형식의 글쓰기에 의해 더욱 심화되었다. 구두로 남기거나 혹은 짧게 글로 적어 남긴 유훈은 이전 시기 문헌에도 기록되어 있고, 한대의 문헌 일부는 가계를 언급하고 있다. 위진남북조 시대에 이르면 자신의 가문을 차별화하며 가문의 번영에 요체가 되는 행동 방식을 명기하고 후손에게 주지시키는 장편의 글 중 현존하는 최초의 사례가 등장한다. - P342

한나라는 징병제를 폐지한 이후 비한족 기병과 죄수, 지원자로 군대를 꾸려 나갔다. 후한 말에는 소작인, 유목 군대, 투항한 반란 세력들로 군사를 충원했다. 이후에는 소작인과 비한족 기병으로 그 대상을 충당하였기 때문에 지주와 친족 집단의 군사 역량은 위축되었다(소작인들이 차출되니). 5세기 이후에는 군사력의 중심이 지배층 중심에서 다시 조정 기반으로 되면서 황제의 권력도 강화된다.

중국에 중앙아시아 및 인도와 정기적으로 교류하면서 불교가 전래되었다(불교는 한반도와 일본에까지 전파된다). 도교는 기존의 전통 신앙과 맞물리면서 이미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터였다. 불교가 흥기하고 도교가 상호작용하면서 중국의 종교세계는 여러모로 변화하였다.

첫째로 한대인들의 모호한 사후 세계는 천국과 지옥의 각 층위가 겹겹이 쌓여 생생한 모습의 지리적 관념을 갖춘 사후세계로 대체되었다. 또한 아귀를 비롯해 새로운 귀신의 존재를 도입하면서 불교는 중국의 사후 세계를 풍부하게 만들었다. 둘째로 불교는 영혼의 세계를 윤리적인 성격의 세계로 바꾸어 놓았다. 한대인들이 저승에서의 보상과 처벌을 믿었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가장 보편적 원리는 올바르게 매장되면 죽은 사람은 저승에서도 이승의 지위에 상응하는 대우를 받는다는 것이었다. 생전의 행위가 아니라 매장 의례가 사후 운명을 결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위진남북조와 그 이후 중국의 사후세계 관념을 지배하게 된 것은 생전의 행위에 따라 보다 좋거나 나쁜 존재로의 환생, 혹은 천당이나 지옥으로의 전생이 결정된다는 식의 단순화된 업의 교리였다. 세 번째 변화도 이와 관련되어 있었다. 중국의 상장 의례와 망자를 구원하기 위한 명절에서 불교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불교 의례는 조상을 지옥에서 구원하여 불교의 낙원인 정토에 다시 태어나게 하기 위해 부처와 승려의 영적인 힘을 행사하였던 것이다. - P412~413

위진남북조 시대의 글쓰기와 문학은 같은 시대의 중국 문화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자율적 영역의 개창을 그 특징으로 한다. 사람들이 모여 함께 시를 짓고 대화를 나누기 위한 장소가 생겨나고, 아울러 교단 종교, 도시 내 사원과 원림, 산지에 자리한 별장과 은자의 동굴 등이 등장한 것과 더불어 문인들은 고전, 철학, 역사가 제시하는 윤리적 틀에 더 이상 구속되지 않는, 보다 자율적인 미적 영역을 만들어내었다." 글쓰기와 문학적 관념의 이러한 새로운 영역은 ‘현학玄學’의 등장으로 지적인 토대를 얻게 되었다. - P427

이 시기 북방 유목민들이 중국에 세운 왕조는 이후 수, 당 시기에 많은 유산을 남긴다. 그리고 이 지역은 한반도의 고대 국가와도 깊은 관련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특히 고구려는 중국의 북방 지역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어서 더욱 그렇다. 중국의 북방이 분열되었던 이 시기는 그래서 고구려에게 기회의 시기이기도 했다.

4세기에 걸친 분열기를 지나 수가 589년에 중국을 재통일하고 뒤이어 당(618~906)이 들어서면서, 한의 멸망 이래 변모해왔던 중국 사회에 다시 단일한 황제 지배가 행해졌다. 한 제국의 계승 혹은 부활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사실 수당 왕조는 5~6세기에 북중국을 지배했던 이전의 ‘오랑캐‘ 왕조 북위, 북주, 북제에서 발전한 많은 제도와 관행을 흡수하였다. - P481

하버드 중국사의 특징은 시간 순으로 나열하는 방식이 아니라 지리, 제도, 가족(및 친족) 구조, 종교, 문화와 예술 등 주제 별로 사안을 다룬다. 시간 순의 역사를 먼저 읽고 나서 이 책을 읽으면서 전체적으로 정리한다는 생각으로 읽거나 아니면 그 반대로 이 책으로 이 시기를 특징 지은 후에 세부적인 흐름의 역사를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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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6-06 22: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중국사에 관심이 많아 이 시리즈
를 한동안 사서 모으긴 했는데...

결국 완독한 책은 없네요.

기록을 찾아 보니 모두 3권을 샀
네요. 남북조는 무려 6년 전에 샀
다는 :>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책은 <원명>
이구요. 한 번 살펴 보려고 합니다.

거리의화가 2023-06-07 10:11   좋아요 1 | URL
중국사에 관심이 많으시다면 이 시리즈 관심가지실 만합니다^^ 물론 서구 학자들의 관점이 중심이라 한반도나 주변 국가에 대한 서술은 아쉽지만 주제별로 다루어 시기를 정리하기 좋더군요^^
 
민중사의 지평에서 민주주의를 다시 본다
역사문제연구소 민중사반.아시아민중사연구회 지음 / 도서출판선인(선인문화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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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인식 관심의 하나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제도적이고 절차적인 민주주의를 넘어 새로운 주체 및 테마로 그 경계를 확장해야 할 때라는 인식이었다. (...)
다른 하나의 관점은 소수자 정치의 구체적 양상에 대한 인식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점에 초점을 맞추었다. 첫째, 에스닉적인 소수자 주체에 더 유의하였고, 둘째, 앞서 새로운 주체테마가 제도적 민주주의의 확장에 시선을 두었다면, 소수자 정치는 소수자의 자기결정권과 그것의 다수자와의 관계성에 더 큰 관심을 두었다. (...)
마지막 인식 관심은 과거의 경험 재현과 관련된 민주주의 문제이다. 한국에서는 과거 자체가 확고한 진실로서 정립해 있지 않고, 그것에 대해 진실을 규명하거나 기념하는 사업이 고도로 정치화되어 있다. - P5

한국에서 민중사가 처음 주목을 받았던 것은 1980 년대였다. 민주화의 바람을 타고 민중이 대두하면서 기득권에 입장에 쓰여진 역사를 넘어 민중(대중)의 역사로 나아갈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리라.

일단 작년에 역사문제연구 48호를 통해 '새로운 민중사'에 대한 제안을 통해 선행 학습한 것이 이 책을 읽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새로운 민중사는 간단하게 말해서, 마이너리티에 주목한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은 한일 민중사 연구자들이 2017년 이후 2020년까지 여러 차례 모임을 가지며 내놓은 결과물을 정리한 것으로 두 번째 결과물이다(첫 번째 결과물은 2015년 나왔다).
총 3부로 나뉘어져 있으며, 1부는 새로운 민중사의 '민주주의적 주체'는 어떻게 설정되어야 할 것인가에 주목한 내용이다. 핵심 키워드는 여성의 몸(식민지 여성 신체에 대한 종속), 도쿄 고가네이 지역의 환경, 광주항쟁에서 빈민들에 대하여 다루었다.
2부는 민주주의와 소수자 정치로 말 그대로 '소수'에 주목한 내용이다. 일본에서 오랫동안 단절되고 분리된 채 생활을 한 오키나와(민족 내 차별), 나리타 공항을 둘러싼 갈등(환경 vs 개발), 일본의 재일대한기독교회의 사회운동을 통한 재일조선인의 문제(민족 외 차별)를 다루고 있다.
3부는 민주주의의 역사와 기억에 대한 문제다. 광주미술인협회의 활동, 해방 이후 동학농민전쟁이 정치에 맞물리는 양상, 오키나와의 선거 운동과 민주주의에 대한 사항을 다루었다.

특히 재일 조선인 기독교 교회에 대한 사회 운동, 나리타 공항 문제의 역사, 광주자유미술인협회를 중심으로 한 민중미술운동은 잘 알지 못했던 부분이어서 새로 알아가는 즐거움이 컸던 챕터였다. 새로운 민중사가 나아갈 길과 관련한 주제만으로 따지면 1, 2부의 내용이 핵심을 파고든다는 생각을 했으나 3부는 특히 기억과 역사를 정치에 어떻게 이용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었다.

소수자 문제와 민중사가 연결되어야 하는 이유는 보편적 인권의 문제로 봐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결국 이것을 확장시켜 나아가면 민주주의가 다수에 기반한 대의 정치에서 그쳐서는 안되고 소수자 문제를 건드려야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소수자 문제는 결국 불평등의 문제 아니겠는가. 젠더 불평등, 부의 불평등, 환경의 불평등으로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미래를 위해서라도 우리가 민중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다.

역사를 공부할수록 주목받지 못한 사람들의 역사를 찾아내고 발굴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리고 국내 안에서만이 아니라 이런 국가 간 연구자들의 네트워크 교류를 통해서 다양한 연구 결과물이 꾸준히 나오는 것이 중요한 듯 하다. 물론 대중서도 꾸준히 나와주어야겠다. 이런 결과물들이 많아야 독자들의 선택지도 넓어질 것이다.

민중사의 전개로 보아 민주주의는 일국사적 경계 속 사건으로서의 운동이나 선거로 이룰 수 있는 목적지가 아니라, 변화하는 과정과 민중의 삶 속에서 계속 나타나고 경합한 가치로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민주주의를 역사적으로 보는 작업에서 민중사 관점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 P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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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 정치인류학 논고
피에르 클라스트르 지음, 홍성흡 옮김 / 이학사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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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으로 통합돼 있는 모든 사회는 과거에는 야만 상태였다"고 레이날은 주장하였다. 그러나 진화를 자명한 것으로 보는 주장이 문명 상태를 그대로 국가의 문명으로 마음대로 연결시켜 후자를 모든 사회의 필연적인 도착 지점으로 상정하는 학설을 정당화시킬 수는 없다. 그렇다면 아직도 원시인들을 야만 상태에 놓여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 P235

클라스트르의 대표작인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를 읽었다. 이 책을 출간하고 몇 년도 지나지 않아 교통사고로 사망하다니 작가의 이력을 보고 너무 안타까웠다. 만일 불의의 사고가 없었다면 진행중인 '원시사회의 전쟁론'에 대한 연구 결과물을 비롯해서 더 많은 지적 결과물이 생산되었을텐데 말이다.

현실은 도대체 어떠한가? 자연을 절대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이는 우리 세계와, 우리 세계의 데카르트적인 어리석은 시도에서만 통용되는 것이다. 이 시도가 생태적으로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는 이제 겨우 측정되기 시작하였다)가 아니라 주위의 자연을 인간의 필요에 맞게 만들기 위해서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기술 전체를 놓고 볼 때 더 이상 원시 사회가 기술적으로 낙후되어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원시 사회 역시 공업화된 기술 사회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과 비슷한 정도로 필요를 만족시킬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준다. 바꿔 말하자면 모든 인간 집단은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환경에 대해 필요한 최소한의 지배력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까지 외부로부터의 구속이나 폭력을 제외하고, 통제가 불가능한 자연 공간에 형성된 사회는 전혀 없었다. - P237

몇 가지 키워드를 떠올렸다. '발전 지향', '진화', '국가', '자연 지배', 서로 모두 연관된 내용이라 볼 수 있다. 우리는 문명이라는 단어에 지나치게 집착한다. 인간은 자연보다 우월하고 문명은 야만에 앞서야 하며 진화라는 논리에 의거해 판단하고 인종적으로 더 나은 것이 있다 착각해왔다. 그 정점에 결국 국가가 있다는 생각이다.
진화 주의는 과학적인가. 그렇다면 고대 사회가 진화적으로 뒤쳐져 있다고 판단하는 것은 당연한가. 원시 사회는 국가가 없는 사회이고, 문자가 없으며, 역사가 없는 사회이고, 시장 경제가 없는 사회이다. 그런 사회를 결여된 사회로 판단할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원시 사회의 인간에게 있어서 생산 활동은 정확히 필요의 충족에 의해 측정되며 제한된다. 여기서 말하는 필요란 기본적으로 에너지의 필요이며, 생산은 소비된 에너지의 양을 원래 수준으로 채우는 것으로 한정된다. 다른 말로 하면ㅡ축제 때의 사회적 소비를 위한 재화의 생산에 있어서 - 재생산에 필요한 시간의 양을 확립하고 결정하는 것은 자연으로서의 생명이다. 즉 일단 에너지의 필요를 완전히 충족시키고 나면 원시 사회가 그 이상의 것을 생산하도록, 달리 말하면 어떤 목적도 없는 노동을 위하여 시간을 사용하거나 소외시키도록 유도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게다가 그 시간을 게으름을 피우거나 놀이나 전쟁 또는 축제를 하는 데 쓸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 P244

베네수엘라 아마존 유역에 사는 야노마미 인디언들과 여러 해 동안 살아온 리조는 그 사회의 성인이 하루 노동하는 시간은 모든 활동을 포함하여 3시간을 약간 넘는 정도라는 것을 조사를 통해 밝혔다. 사냥과 채집은 대개 아침 6~11시 사이에 이루어지고 그것도 매일 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원시사회의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서 언제나 식량을 찾아다녀야만 하는 동물적인 상태에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매우 짧은 시간만 일하고서도 생존-아니 그 이상-을 확보하였다.
그들은 무능력한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과잉을 거부하면서 필요를 충족하는 생산활동을 전개해왔던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원시 사회가 잉여를 생산하지 않고 최소한의 경제 활동으로 굴러가므로 최대의 효율을 지녔다고 이야기한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서 최소한의 지배력을 행사하며(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얻는다는 것이다.
무리한 자연의 개발로 지구상에 돌아온 것은 무엇이었나. 기후 위기가 아닌가. 개발이 최고라 자부한 지구 경제와 사회에 일침을 날리는 메시지가 아니라 할 수 없다.

국가는 사유 재산을 소유하는 사람의 대표자이자 보호자라고 한다면 이런 재산을 거부하는 원시 사회 내부는 어떻게 사회가 굴러갈 수 있었을까. 정치는 경제와 별개이다. 국가의 기원을 경제적인 것에서 찾는 것이 애초부터 잘못된 것이다. 원시 사회는 내가 남보다 더 많이 일한다고 해서, 더 많이 가졌다고 해서, 더 낫게 보이려고 하는 사람이 없다. 그들은 지나친 풍요로움을 향한 욕망을 경계하며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을 자연스럽게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당시의 프랑스나 포르투갈의 연대기 작가들은 부족 연합의 대추장에게 "지방의 왕"이나 "소왕"이라는 명칭을 붙일 정도였다. 투피-과라니 사회의 이 심오한 변화 과정은 유럽인의 도래로 돌연 중단되었다. 그것은 만일 신세계의 발견이 예컨대 1세기 늦어졌다면 브라질 해안 지역의 인디언 부족에서 국가 형성이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의미인가? 어떤 것으로도 반증할 수 없는 가설적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은 언제나 쉬우면서도 위험하다. 그렇지만 이 투피-과라니족의 사례에 한해서 우리는 확실하게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다. 즉 투피 - 과라니 사회에서 일어날 수도 있었던 국가의 출현을 막은 것은 서구인의 도래가 아니라 원시사회로서의 사회 자체의 자각이었다. - P265

그렇다면 원시 사회는 부족 사회인데 그들의 구심점이 되 주는 것이 무엇일까 궁금했다. 추장이라는 지위가 존재하는데 그는 수장이 아니던가. 그러나 추장은 전쟁시 필요한 지도자 자격을 제외하고 평시에는 자신의 말로 사람들의 이해 관계를 조정하는 조정자의 역할을 할 뿐이다. 추장은 자신의 설득이 그 사회에 통하지 않으면 추장으로서의 수행 능력이 없어 위신을 지닐 수 없게 됨을 인지하고 있다. 추장의 능력은 기술적 능력, 말솜씨와 사냥 실력, 군사 행동 조직 능력으로 판단된다. 추장은 이런 기술적 범위를 넘어서서 정치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추장은 사회 봉사직인 셈이다.

우리는 흔히 지구상의 흐름을 가속화시킨 두 가지의 혁명이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신석기 혁명으로 인한 이동 사회에서 정착 사회로의 전환, 그리고 나머지는 산업 혁명이다. 신석기 혁명으로 모두 정착 사회가 되었는가. 신석기 혁명으로 일부 사회가 정착 생활로 도시와 국가가 형성되었지만 여기에는 농업으로 인한 정주 생활만을 전제한 것이다. 세계 곳곳에서 농경 생활을 하지 않고서도 정주 생활이 이루어지는 사례들이 얼마든지 많다. 농경 생활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무능하고 기술적으로 낙후되며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것이 아님에도 우리는 그렇게 단순하게 판단을 하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대다수 사회의 수렵에서 농업으로의 이행과 몇몇 사회의 농업에서 수렵으로의 반대되는 이행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그것은 이러한 변동이 사회의 성격을 완전히 바꾸지 않고도 이루어진다는 것, 사회의 물질적 생활 조건이 완전히 변화하는 경우에도 사회 자체는 변화하지 않고 유지된다는 것이다. 신석기 혁명이 당시의 인간 집단의 물질 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미쳐 생활을 편하게 해주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기계적으로 사회 질서의 전복을 가져오지는 않았다. 바꾸어 말하면 원시 사회들에 관한 한, 맑스주의자들이 경제적 하부 구조로 명명한 수준에서의 변화는 정치적 상부 구조에 "반영되어" 그것을 규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후자는 물질적 기초로부터 독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 P249~250

역사를 가진 사람들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적어도 그것과 똑같은 정도의진리로서 역사 없는 사람들의 역사는 국가에 대항하여 싸우는 투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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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3-06-05 0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원시사회의 전쟁론]이 나올 수 없었던 비극이 있었군요

노란 표지의 이 책을 여러번 넘겨 보았으면서도, 정작 그런 부분을 전혀 몰랐네요

거리의 화가님, 정리해주신 내용보니 제가 얕게 읽었음을 반성하게 됩니다.

거리의화가 2023-06-05 15:07   좋아요 1 | URL
책 읽을 때 저자를 먼저 확인하거든요^^ 이 책 내고 5년 만에 돌아가셔서 안타깝더군요. 조금 더 사셨으면 다양한 책들을 접할 수 있었을텐데 말이죠.

알라님께 도움을 드린 것 같아 저도 기분이 좋습니다. 즐거운 한주 보내세요^^*
 
진순신 이야기 중국사 3 - 후한.삼국 시대.오호십육국.위진남북조 : 군웅과 패자 진순신 이야기 중국사 3
진순신 지음, 이수경 옮김 / 살림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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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의 중심 이야기가 초한전쟁의 결과에 따른 한의 역사였다면 3권은 수많은 왕조가 교체되어 어느 하나 특징지어 사건을 손꼽을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최초의 통일 왕조였던 진나라가 짧은 시일 만에 무너지고 한나라가 들어섰으나 무제 사후에는 외척이었던 왕망이 왕위를 찬탈하고 신나라로 교체된다.
왕망은 복고주의 사상에 입각해서 모든 것을 과거 주나라 때로 되돌리려 했다. 하지만 이상만을 앞세우고 현실을 보지 못한 탓에 권력을 붙잡고 있었던 호족들은 반기를 들고 일어선다. 게다가 백성들은 먹고 살기가 어려워지니 비적이 된다. 왕망은 이 상황에서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왕망이 물러나고 후한 시기에 접어들었으나 광무제 이후에는 사실상 황제들이 제 구실을 하지 못했고 외척과 환관 세력이 주도권을 엎치락 뒤치락 하면서 짧은 시간 안에 무려 7왕조가 바뀐다(화제-상제-안제-순제-충제-질제-환제).

순제는 환관들의 도움을 구해 황제에 오른다. 그때까지는 괜찮았는데 양씨가 황후에 오른 뒤 그 일족은 권력을 믿고 횡포를 부렸다. 그 중심에는 황후의 오빠인 양기가 있었고 이후 즉위한 환제는 양씨 일족을 견제하기 위해 환관을 끌어들인다. 이 무렵 환관이 양자를 들여 권력 계승이 가능해지고 사람을 추천할 수 있게 되면서 그들의 권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본래는 가장 넓은 층인 사인 계층에 많은 기회가 주어져야 했을텐데 그들은 외척과 환관들 사이에 끼어 주요 무대로 진출하기 힘들어졌다. 
혼란스러운 사회상을 나타내듯 황건적의 난이 발생하여 지방은 어지러워지고 조정은 십상시가 난을 일으키니 중앙마저 초토화된다. 이 무렵 지방의 군벌들이 하나 둘 등장하는 것이 삼국지 배경의 시작이다.

삼국지는 초반부터 동탁, 조조, 원소 등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며 압도한다. 초한지는 유방과 항우를 중심으로 놓고 양강구도로 가기 때문에 전투 중심으로 보게 되어 단순한 구조인 반면 삼국지는 전투들도 중요하지만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는 만큼 그 구조가 복잡하나 인물들이 많아서 캐릭터를 분석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삼국지는 읽을 때마다 주목하는 인물들이 달라지는 경험을 느끼게 된다. 아마도 자신의 상황과 이전의 경험에 맞춰서 그 인물에 몰입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나도 처음 읽었을 때는 유비,관우,장비 삼형제 중 유비의 현덕함에 끌렸었는데 다음에는 관우, 그 다음에는 제갈량, 조조 이런 식으로 매번 바뀌었었다. 아마도 인물별로 개성이 워낙 뚜렷해서 어디에 가치를 두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듯 싶다.

어쨌든 이런 여러 군웅들 중 삼국(위/촉/오)로 결국 압축되었다. 이 시기 황제의 권위는 유명무실했고 헌제는 조조의 아들인 조비에게 권위를 선양(220년)하면서 후한 시기는 끝이 난다. 황실의 일원이었던 유비가 익주에서 촉한을 건국하였으나 40 여년밖에 유지하지 못한 채  한나라는 멸망하였다.

분열의 삼국시대를 끝내고 통일이 이루어졌지만 급속히 무너진 서진이 화북에서 힘을 잃고 강남 지방으로 내려간 사이 화북에서는 여러 민족들이 나라를 세웠는데 이것이 오호 십육국 시대의 시작이다.

여기에서 5호는 흉노, 선비, 갈, 강, 저 등의 다섯 민족을 뜻한다(갈은 흉노의 한 갈래이고, 저와 강은 티베트계 민족). 16국은 이들과 한족을 포함해서 화북 지방에 세운 수많은 나라들 중 주요 16국을 뜻한다. 16국 중 전량, 서량, 북연은 한족 왕조에 속하며 나머지 13국이 이들 다섯 이민족이 세운 국가다. '16국'은 화북 지방에 있던 '북조'의 수많은 국가들을 묶은 것이고 강남 지방의 '남조'는 한족 왕조인 동진이 있었다.
'호(胡)'란 한족에서 보면 이민족을 뜻하는 말인데 그것이 멸시하는 칭호였으므로 이 시대에는 사용을 금했다. 최근 중국에서는 이 시대를 '동진십육국'으로 표현하는 일이 많다. 남쪽은 동진이고 북쪽은 여러 나라의 십육국이므로 전국적인 명칭이 된다. 화북 상태만 가리키는 오호십육국보다는 시대 명칭으로서 적당하지만, 이 시대 말기에 남쪽은 이미 동진이 아니라 송(宋) 시대에 접어들었다. 그런 점에서는 조금 문제가 있는 명칭이다. - P370

흉노의 대수장이인 유연은 308년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한(漢)이라 하고 한나라의 제도를 모방한 정권을 수립한다. 흉노는 더는 유목국가가 아니고 중원국가임을 선언한 것이다. 선비족도 단석괴라는 걸출한 인물이 출현하면서 국력을 키웠다. 위진(魏晉) 시기에 선비족은 모용, 우문, 걸복, 탁발, 단 이렇게 다섯 부로 나뉘어 있었다. 
하지만 유연이 세운 한이 무너지고 흉노의 여러 부도 세력이 갈리어 화북은 동으로는 선비족, 서쪽으로는 저와 강 같은 티베트 계통의 민족이 병립하는 상태가 되었다. 선비 모용부 왕조는 국호를 연(燕)이라 칭했 오호십육국 시대를 매듭지은 것은 이 가운데 탁발부였다. 갈족의 지도자는 석륵(石勒)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었다. 가난하고 문맹이었으나 정치는 훌륭했다고 한다.

화북 지방에 있던 사람들이 대규모로 남쪽에 정착하면서 혼란이 찾아왔다. 내가 사는 땅에 누가 들어오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안 그래도 먹고 사는 일이 어려운데 토착 세력의 반발은 당연한 것이었을 것 같다.
보통 새롭게 찾아온 사람들은 토착민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차별을 받는다. 하지만 이 시대의 새내기들은 중원의 높은 문화를 몸에 익힌 사람들이었다. 토착민들보다 훨씬 고도의 지식을 가진 계층이 적지 않았다. 새로 온 사람들이 오히려 토착민을 멸시하는 분위기였다. 토착민이 그것에 반발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P418

오, 동진, 송, 제, 양, 진. 삼국 이래 강남땅에 이 여섯 왕조가 흥망을 거듭했다. 오나라의 손권이 황제를 칭한 229년부터 진나라가 멸망한 589년까지 360년 동안을 '육조 시대'라고 부른다.

육조 시대를 귀족사회라고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귀족사회라고 하면서도 중요한 때 세상을 움직인 사람은 실력을 갖춘 군인들이었던 것이 육조 시대의 참모습이었다. - P421

삼국 이후 중원이 어지러워지자 중국 정권의 힘은 서역에 미치기 어려웠다.

화북 땅을 거의 통일한 전진의 부견은 비수전투에 패하여 남정에 실패하면서 정권이 붕괴되었다. 한 사람에게 권력이 몰리면 언제나 이렇게 위험하다. 북위의 선비 탁발부는 부견을 거울 삼아 장기정권 유지에 힘을 쏟았다. 부, 낙, 족의 유력자를 가능한 그 조직에서 떼어 놓고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해 행정을 처리하도록 한 것이다. 북위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군대를 보내 화북을 통일하였고 화남의 송왕조와 천하를 양분하는 세력이 되었다. 이 때 북위가 서방으로 진출하면서 불교가 유입된다. 낙양 천도 후 북위는 한화에 힘을 쏟았다. 선비족 언어와 성씨, 풍습을 금지하고 한족의 문화를 따르게 된 것이다. 이 때부터 북방의 고유 문화는 한화에 밀렸고 중국은 중화사상을 더욱 강조하게 된다.

어느 역사나 복잡한 시기가 있지만 거의 500 여년의 세월 동안 이렇게 복잡한 왕조가 흥망성쇠를 거듭하다니 놀라웠다. 자고 일어나면 왕조가 바뀐다고 할 정도라고 해야 할까.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삼국지 시대는 나관중이 소설을 써서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읽히는 등 자료가 남아 있지만 특히 위진남북조 시기의 역사는 자료도 빈약하고 정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는듯해서인 것 같다. 어릴 적 세계사 수업을 받을 때도 '중국의 위진남북조 시기가 있었다.' 간략하게만 말하고 넘어갔던 기억이 났다. 너무 소략해서 궁금했었는데 이번에 읽으면서도 궁금증이 더 커졌고 좀 더 세밀하게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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