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의 기원 2-1 - 폭포의 굉음 1947~1950 현대의 고전 16
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범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외부 세계는 추상적이기도 하고 국내의 위기를 불러오는 사건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실제로 그 사건들은 권력을 둘러싸고 국내에서 벌어지는 투쟁에 이용된다. 외부의 위기는 이해하기 어려운 지구 전체의 적과 전면적 대결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한 패권국이 중요하지 않은 여러 주변부에 이처럼 관심을 쏟고 집착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세계는 대체로 국내에는 존재하지 않는 거친 현실과 갈등의 원천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위기를 유발하지는 않지만, 국내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재료를 폭발시킨다. 그리고 폭발이 일어난 뒤 "외교정책의 전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국내에서 전개된 갈등의 결과이며,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은 기본적으로 추상적 형태로 남아 있다. 또한 외국에서 위기가 발생하면 한 나라 안의 권력 균형은 행정부 쪽으로 기울며, 행정부는 그 위기를 이용해 적을 제압할 수 있는 잠재적 힘을 갖게 된다. - P52

한국전쟁 발발 73주년이 되었다. 세월이 이리 많이 흘렀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 체제에 종속되어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미국과의 종속도 그렇고 일본은 한국 전쟁으로 큰 이익을 얻었으며 중국과 타이완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한국전쟁의 기원에 대하여 여러 설들이 존재했다. 어떤 가설도 완전한 진실은 없다고 생각하며 추측성이 존재한다 여긴다. 다만 더 가능성이 높은 설이 무엇이냐를 두고 셈할 뿐이다.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이 내전이자 혁명전쟁이었다고 해석한다.

나는 '반공 세대'는 아니었고 그 끝 무렵, 그리고 이제 더는 통일이라는 것이 요원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할 무렵에 걸쳐 있는 세대인 듯하다. 교련 수업을 고등학교 때 받으면서도 이걸 왜 받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통일이 막연해도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가졌던 것 같다. 이제 한반도의 평화를 바랄 뿐 한 체제, 한 국가로의 통일은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외국을 나가듯 북한을 안전하게 여행갈 수 있다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질 뿐이다. 죽기 전에 가능이나 할런지...

한국전쟁의 기원 2권은 총 2권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2권의 내용은 앞선 1권과는 성격이 다르다. 1권은 한반도 내부에 포커싱을 맞추어 전쟁의 기원을 살펴보았다면 2권은 마치 조감도로 외부에서 한반도를 전체적으로 조망한다는 성격이 엿보인다. 첫 번째 권은 총 2부로 1부는 미국에 초점을 맞추어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 이후 미국을 둘러싼 세계와 미국의 외교적 변화를 살펴본다. 2부는 한국 내부의 상황을 살펴보되 외국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되어 있다. 그래서 1권과 2권의 내용을 모두 살펴보아야 비로소 의미가 있을 것이다.

1947년은 어떤 해였는가. 이 시기 트루먼 독트린이 실시되면서 한반도 뿐 아니라 일본에도 큰 영향을 끼치고 이는 1950년 초반까지 그 흐름이 이어진다.
모스크바 3상회의 후 한반도의 신탁 통치 논의를 두고 여러 차례 열린 미소공동위원회는 결렬되었고 이 무렵에는 남한과 북한의 체제가 이미 독자적인 체제를 갖추었다. 하지만 미군정의 영향이 여전하던 남한에서 미국의 힘은 막강했을 것이므로 미국의 정치 지형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할 것이다(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미 외교정책은 1947년 전후부터 1951년 사이에 크게 변화한다. 미 외교가에는 크게 세 집단이 존재했는데 첫 번째는 '국제협력주의(제국주의)'다. 이는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을 세계에 적용한 것으로 세계시장 체제를 규제 관리하고, 문호 개방 정책 또는 "광대한 지역" 정책에 규제를 가미한 것이며, 자유무역과 경제 성장에 반드시 필요한 개방성을 추진하고 장벽을 제거하며, 경제 침체와 다루기 힘든 나라들을 길들이는 데 필요한 규제를 두는 것이다. 두 번째는 '봉쇄'다. 국제협력주의와 민족주의가 타협한 것으로, 자본주의 지역에서 자유무역과 개방된 체제, 세계경제의 동력으로 일본과 서독의 부흥을 꾀하고, 방어벽을 세워 지상군과 관료기구를 통해 통제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반격 '으로 국제협력주의에 반대하고 봉쇄에도 불만을 가진 세력으로 반공 기치를 내세우고 군사 부문을 강화하는 것이다.
1943년부터 1947년 이전까지는 한반도에 다국적 신탁통치를 기치로 한 '국제협력주의' 외교가 시행되었다. 하지만 신탁통치는 한국인에게 인기가 없었다. 1947년 이후 1949년 주한 미군이 철수할 때까지 봉쇄 정책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1949년 중국의 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하고 타이완의 안보에 위기가 드리운데다 한국전쟁 발발 후 가을 무렵이 되면 미 외교는 반격 정책으로 돌아선다.

트루먼 정부에 대표 중요 인물 중 딘 에치슨은 누구인가. 그는 트루먼독트린과 마셜 플랜의 핵심 인물이었고 1947년부터 1950년까지 한국 정책을 전반적으로 설계하였다. 그는 군부와 의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하도록 만들었다. 미 점령군의 봉쇄는 애치슨의 구상에 영향을 주었고 1947년 이후 남한이 트루먼독트린에 사실상 포함되게 만들었다.
에치슨에 대한 뛰어난 묘사에서 I. F. 스톤은 1952년 "미국에서는 공직자가 역사와 인류에 품위 있는 동정적인 시각을 가진 것은 아닐까라고 추측하는 것보다 위험한 것은 없다"라고 썼는데, 애치슨은 바로 그런 시각을 갖고 있었다.
냉전의 열기로 뒤틀린 미국의 시각에서 볼 때만 애치슨은 실제의 그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보일 수 있었다. 거칠고 거만한 표현을 쓰자면 그는 "개명한 보수주의자"로 보였다. 전전戰前 애치슨이 재무부 관료로 워싱턴에 처음 나타나자 뉴딜 정책 지지자들이 그를 "모건사에서 파견된 사람", 월가에서 보낸 트로이의 목마, 거대 은행들이 침투시킨 첩자라고 비난했다는 사실을 매카시즘이 휩쓸 때 누가 기억할 수 있겠는가?
봉쇄 정책은 미국 영국 서유럽 일본은 지키되 산업적으로 낙후되고 공격에 취약한 지역, 특히 미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부패한 아시아의 국지전이나 혁명에는 신경 쓰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에치슨을 비롯한 미 관료들은 아시아 대륙의 여러 지역을 일본의 부흥과 연결시키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일본은 경제적으로도 중요했지만 주변국에 전쟁이나 비상 사태가 발생했을 때 일본의 군사력을 제한적으로 증강하는 것이 고려되었다.

1949년 후반 트루먼과 맥아더는 충돌한다. 미 국내에는 매카시즘의 광풍이 불었고 개인과 사회는 서로 대립했으며, 정치, 경제와 세계에서 미국이 세계에서 가져가야할 역할이 무엇인가 갈등은 폭발하였다. 고립주의자이자 반격 세력은 아시아가 유럽보다 덜 중요하고 통제하기 어렵지만 개방되어 있어 이익을 낼 수 있는 곳으로 보았다. 팽창주의자는 아시아 중 중국에 주목했다. 이 중 반격 정책을 지지한 맥아더는 누구인가.
맥아더는 아시아를 새로운 국경으로 봤다. 그는 한국전쟁 이전에는 극동에서 반격 구상을 추진하는 데 상당히 소극적이었으나 그의 지지자는 대부분 우파 고립주의자들이었다. 그는 태평양 전쟁에서 1951년 한국 전쟁의 책임을 지고 사령부를 떠날 때까지 한국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장제스는 미국의 원조를 간절히 바랐다. 중국의 거대 재벌과 국민당 인사들은 깊은 교류 관계가 있었고 중국 로비를 위해 상당한 액수가 미국에 들어갔다.
하지만 조지 매카시는 다음과 같은 사람들을 이용하여 매카시즘 광풍을 만들어냈다. 그는 성(동성애), 공산주의를 증오의 뿌리로 매도했으나 사실은 미국의 뿌리에 존재하는 미국의 정치였다. 적색공포가 외면으로 표출되었을 뿐 잠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두메산골과 빈민가, 서부의 소박한 개신교적 정신(좌익은 대중 영합주의적 진보적이며 우익은 무지함)과 동부의 남보스턴 정신을 민족주의와 결합했다. 비유하자면 후자는 아직 발굴되지 않은 지하 묘지로, 동부 상류상회의 두 영역(자유주의자와 월가)에 있는 경박하고 건망증 심한 유력자들에게 오랫동안 불만을 품어왔다. - P178
중국의 공산화, 미국 내 팽창주의자에 반하여 미국 내 공산 세력은 좌불안석할 수밖에 없었으며 공화당을 지지하는 주요 언론 기업주도 매카시에 협조했다.
매카시는 1950년 3월 13일 오언 래티모어를 공격한 뒤 3월 21일 "소련의 간첩 두목"을 적발했다고 말하며 그를 지목했다. 표면적으로는 래티모어를 말했으나 궁극적 목표는 애치슨이었다. 트루먼을 제외하면 그 무렵 장개석은 공산 세력의 침략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기댈 자가 미국 내에 없었다. 5월 매카시는 한국 정책과 관련하여 "애치슨-래티모어 추축"을 공격하면서 애치슨을 쫓아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당시 남한 체제의 권력 핵심층은 부를 가진 우익 세력이었고 이들은 경찰은 물론 군정 사령부, 일선 현장 대부분에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남한 자체로 안정을 바랐으나 일반 대중들은 통일에 관심을 두었고 분단 정책을 결코 지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1947년 이후 수많은 청년 단체를 비롯하여 광신적 우익 대중 기반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이승만과 이범석은 파시즘화한 한국 정치를 이끌었다.
우익 단체는 조선민족청년단, 서북청년회, 대동청년단, 광복청년회, 이승만의 대한독촉청년총연맹 등이 있었고 조선민족청년단이 미군정이 자금줄을 댄 공식 기관이었다. 청년 단체를 조종한 것은 이승만, 이범석, 조병옥, 장택상 같은 우익 인사들이었고 경찰은 우익 청년들을 후원하며 그들의 도움을 받았으며 좌익의 탄압과 색출에 적극 활용했다.
이승만은 미국인이나 미국에서 여러 해를 보낸 측근 인사들을 이용했다. 그리고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친일파들을 기용하고 그들에게 로비 자금을 받으면서 면죄부를 주었다.

1947년 제주 4.3이 발생하고 1948년 여순 사건이 발생하면서 남한 정부는 빨갱이 색출에 혈안이 되어 경찰과 청년 단체들을 동원해 이들을 색출하였다. 이후 이승만은 북한을 "괴뢰"라 명칭하라 지시하고 국회에서는 "국가보안법"이 통과되었으며 공식적인 좌익 활동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제주 4.3과 여순 사건은 유격대 활동에 영향을 끼쳤고 제주와 전라도 중심이던 지역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유격대는 "인민위원회"를 재건하는 것이 목표였고 `촌락을 공격하고 주요 시설을 파괴하는 활동을 벌였다.



유격대 관련 사건은 1949년 4월부터 10월까지 증가하다가 11월부터 점차 감소하였다. 미국은 다른 어느 곳보다 전라남도가 남한에서 가장 좌익적인 도라고 판단했는데 이는 빨치산 활동이 지리산에 집중되었던 이유도 있을 것 같다. 전라남도 유격대는 1950년 초 대규모 토벌 작전이 이루어지면서 지하로 숨거나 더 이상 활동하기 어렵게 되었다.
1950년에는 유격대 주요 활동지는 경상북도였다. 우거진 지형 덕분에 은신이 쉬워서 경찰들도 많은 애를 먹었던 모양이다. 전라도와 경상도 이외에서 유격대는 강원도와 충청도 영동군 정도에서 활동이 있었다.

북한은 인민위원회를 기반한 정부를 구성하고 인구의 12~14퍼센트(성인 인구의 1/4 이상)를 포괄하는 대중 정당인 로동당을 만들면서 김일성에 대한 충성 지지층을 확보한다. 북한은 빈농을 포용하여 프롤레타리아로 개조시켰는데 이들이 군 단위의 공무원이나 장교도 꿈꿀 수 있게 함으로써 김일성의 정치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대중적 기반을 만들었다. 당의 지도부는 항일 유격 투쟁에 활약을 했던 이들로 채워졌다.
1947~1948년 소련과 북한의 전략적 이익은 일치했다. 이 시기의 시작부터 중국 국민정부군은 만주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장제스와 이승만은 거슬리는 뾰루지를 짜듯 북한을 압박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1948~1949년 중공군과 북한군이 국민정부군을 동북 지역에서 몰아내면서 이제 짜낼 뾰루지처럼 보인 것은 남한이었다. 스탈린은 그것을 대단히 복잡한 심정으로 바라봤을 것인데, 현지 정권을 간접적으로 통제하는 것 외에는 어떤 시도도 할 수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 P476
1949년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한 것은 북한 외교 정책에도 변화가 있었다. 그 전까지는 소련에 의존해야 했다면 이제는 중국의 전쟁에 한 몫을 거들어 승리를 거둔 것으로 사회주의 동맹을 얻은 셈이었다. 1948년 봄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불가리아 루마니아는 외부의 공격이 있을 때 서로 방어해준다는 내용의 협정을 소련과 체결했고 1950년 중소 간에도 이런 협정이 맺어졌다. 반면 1949년 3월 김일성은 경제, 문화, 군사 협정을 맺고 돌아왔으나 소련에 유리한 조건의 거래가 이루어졌다.
북한은 만주에서 일본 및 중국 국민당에 맞서 함께 싸웠기 때문에 중국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중국은 한국이 중국의 경세론과 문화를 모방하고 중국의 적에게 영토 점령을 허용하지 않는 한 한국의 문화적 정치적 자율성을 인정하는 "선의의 무시"를 해왔다. 


2-2권은 1950년 이후 전쟁의 서막과 종막을 다룬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삭매냐 2023-06-26 13: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궁금해 하던 책이었는데
좋은 리뷰 잘 보고 갑니다.

개인적으로 한국 현대사
에도 관심이 많아, 일독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거리의화가 2023-06-26 18:19   좋아요 1 | URL
네. 일독할 가치가 있는 책입니다.
이 책을 읽음으로써 한국 현대사의 전환점이 된 전쟁과 현재 체제의 기원을 엿보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도움이 되셨다니 기쁩니다.
 
법정에 선 페미니스트 - 페미니스트 법 이론
낸시 레빗.로버트 베르칙 지음, 유경민 외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로 비슷하면서도 다른 다양한 종류의 페미니스트 법 이론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페미니스트 법 이론은 공통적으로 다음 두 가지 특성을 공유한다.

바로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observation)과 나아가야 할 목표(aspiration)다. 먼저 페미니스트는 현재 남성이 누리는 권력과 특권은 남자들만이 이 세상을 만드는데 참여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모든 페미니스트 법학자는 남성은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문명의 법을 만드는 데 빠짐없이 참여했다는 명백한 사실을 강조하면서 미국 역사에서 남자가 만든 법이 남자에게 유리하게 적용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본다. 다음으로 모든 페미니스트는 여성과 남성이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평등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들은 평등의 의미가 무엇이고 어떻게 평등을 달성하는지에 관해 의견을 달리한다 - P28


대한민국 국민 중 헌법을 읽거나 공부해 본 이들이 얼마나 될까? 법관이 되기 위해 필요하여 공부하는 것이 아니면 대부분은 개인적으로 법적 싸움에 휘말리거나 아니면 사회에 어떤 문제적 사건이 벌어져서 법리 해석에 따른 논쟁이 있을 때 해당 조항을 확인하지 않을까.


나도 그 대부분의 사람에 속한다. 솔직히 법이라는 것을 몰라도 사는데 지장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과거 월급을 못 받아서 고통 받던 일과 더 과거로 가면 집안에 돈 때문에 타인과 분쟁이 생겼을 때 몰라서 당했던 일이 생각났다.

법을 어설프게 알거나 제대로 모르면 당하는 일이 사실은 너무나 비일비재하다.

요즘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전세사기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건설사, 공인중개사 등은 법의 허점을 노리고 덤벼드는데 계약자는 그 빈틈을 제대로 알지 못해 당한다. 언제까지 각자도생이라고 그냥 넘길 것인가. 법의 구멍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면 우리는 적극적으로 법의 개정을 주장해야 하는 것이다. 


여성들이 법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보편 윤리라고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은 가부장제에 의해 생성된 것이고 지금까지 대부분의 법이 남성에 의해 만들어져 여성들에게는 불리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과거 미국 여성들이 법적으로 어떤 권리를 위해 싸워왔는지 여성들의 지난한 소송(법적 싸움)의 역사를 알려준다. 그러기 위해서는 페미니즘의 역사를 훓어볼 수밖에 없는데 1장에서는 때문에 페미니즘의 역사와 정립된 이론을 소개한다. 

그리고 이후에는 그 페미니즘 이론이 실제 어떻게 법으로 만들어지는지 맥락화하여 보여준다. 


특히 동등대우 이론(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과 문화 페미니즘(남녀 차이와 가치관의 차이에 따라 대우는 달라야 한다)은 서로 상반된 주장을 하기 때문에 실 사례에서도 논쟁이 많았던 이론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문화 페미니즘과 지배 이론(여성과 남성은 힘의 차이가 존재한다)은 서로 비슷한 것 아닌가 생각했는데 지배 이론은 특히 가부장제를 문제 삼는다는 것이 특징인 것 같다.


다양한 법적 주제를 담고 있는데 개인별로 관심이 가는 부분이 다를 것이라 생각한다. 

나의 경우는 아무래도 직업과 고용, 교육, 섹스와 폭력에 특히 주목하여 보았던 것 같다. 


몇 년전 남성과 여성의 급여율에 대한 비교 리포트를 기사에서 보았었다(아마 주기적으로 조사가 이루어질텐데). 그 비율이 충격적이었던 것인지 지금도 그 비율이 기억이 난다. 69%였던가. 

그러니까 남성이 100만원 받을 때 여성이 69만원 받는다는 이야기다. 

전문대학이긴 하지만 학교를 졸업하고 어렵게 입사를 했다. 대기업에 들어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나는 하루 빨리 취업을 해야 했고 돈을 벌어야 했다. 입사하자마자 내 급여가 얼마였는지 지금도 기억나는데 솔직히 창피해서 말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문제는 초봉이 그랬다고 하더라도 매년 연봉이 오를텐데 나는 너무 더디게 올라간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같은 조건에서 남성과 초봉이 얼마나 차이나는지는 모르겠지만 같다고 하더라도 남성들은 희한하게 나중에 보면 비율이 나와 다른 것이다. 

아무튼 나는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났는데도 얼마 오르지 않았다(천 단위 올라가는 것이 왜 그리 오래 걸리는지...). 안 그래도 박봉인데 나는 늘 중소기업, 그것도 잘 나가는 회사가 아닌 곳들만 전전하며 다녀서인지 회사가 망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물론 임금이 성별에만 좌우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가방끈의 길이에 따라, 전문성(스킬)에 따라, 태도 등 여러 가지 평가 기준이 있겠지만 이런 것을 생각할 때마다 내가 굳이 이걸 하면서 먹고 살아야 하나 하는 자괴감도 들었고 내가 남자였다면 좀 더 나았을까 싶기도 했다. 

직업군 별로 여성의 비율이 높은 직업이 있고 남성의 비율이 높은 직업이 있다. 물론 꾸준이 이 비율의 차이가 줄어든다지만 여전히 교사, 간호사 등은 여성의 비율이 높고 트레이너, 군인, 지게차 기사, 철강/기계 종사자 등은 남성의 비율이 높다.

애초에 이런 직업들은 남성 또는 여성만 뽑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성소수자들의 경우에도 이로 인해 피해를 보기도 했다. 직업 간의 장벽이 사라지고 넘나듦이 자유롭게 이루어져야 직업적인 차별도 줄어들지 않을까.


아무래도 미국 사례이다보니 재미는 덜하다. 그러다보니 한국 법 사례는 어떨까를 계속 생각하며 읽었던 것 같다. 관련 책이 있을 지는 모르겠고 없다면 이런 책이 나와주면 좋겠다.

법은 실생활에 적용되는 만큼 중요한 것이다.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지켜보면서 법적 권리의 싸움에서 패소/승소하는 사례가 누적되어야 더 나은 사회가 될 것이다.


여성 문제를 묻는다는 것은 겉보기에 중립적인 듯한 법률이 어떻게 성편향을 가지고 있는지를 드러내기 위해 데이터를 사용하는, 어느 정도는 실증적인 평가이다. 여기서 특정한 법률이 여성의 경험을 고려하는지, 법규범이 암묵적으로 하나의 성에 우호적인지, 사회적 관행이 불법적인 성적 고정관념을 조장하는지에 관해서 반드시 질문해야 한다. 젠더의 영향을 평가하는 사례에는, 특정한 고용주에 의해 승진된 남성과 여성의 숫자를 세어보는 것, 엄마와 아빠 중에 누가 더 아이의 양육권 분쟁에서 이기기 쉬운지를 기록하는것, 학교 수업에서 소녀와 소년의 대우에 관한 데이터를 축적하는 것이 포함된다. 조사 결과는 항상 여성에게 우호적이지만은 않은데, 남성 역시 법에서 성별 편향으로 불이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 P67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읽는나무 2023-06-20 19: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성의 구성 비율이 높은 직종일 수록 성별 급여 차이가 좀 더 컸던 걸로 기억이 되네요?
지금도 그러한가 보군요?ㅜㅜ

거리의화가 2023-06-21 10:11   좋아요 1 | URL
직업별 성별 비율에 대한 구분이 없어져야 좀 나아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금은 제가 다닐 때보다는 여성들도 임금의 수준이 더 나아졌겠지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차이는 존재하는 듯해서 씁쓸하네요.

다락방 2023-06-20 19: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막연하게 옳고 그르다는 식으로 생각했던 것들이 구체적 사례들로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달리 생각하는 경험을 이 책을 읽으며 하고 있어요. 읽어두면 좋은책인 것 같습니다.
읽느라 고생하셨고 완독 축하합니다.
전 최근 회사 너무 바빠 스트레스 가득이라 좀처럼 진도가 안나가네요. 빨리 따라갈게요!!

거리의화가 2023-06-21 10:18   좋아요 0 | URL
네. 구체적인 사례들이 많아서 도움이 되더라구요. 단편적인 해석이 아니라 이론에 따른 다양한 시각을 보여줘서 좋았어요. 한국에 관련된 법 사례에 대한 책도 나와주면 좋겠습니다ㅠㅠ
다락방님 많이 바쁘실텐데 건강 잘 챙기시고 완독도 응원합니다! 화이팅!
 
토지 17 - 5부 2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17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토지 17권은 1941년 무렵 즈음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1880년 후반부터 시작했던 시기가 어느덧 40 여년의 세월이 흘렀고 조선이 식민지가 된 지도 30여년의 세월이 흐른 셈이다.

1941년 무렵은 일본은 장개석의 원조 루트를 방해하기 위한 작전이 진행중이었고 오랜 전쟁으로 전쟁 물자도 고갈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일본은 미국과의 갈등을 조장하는 단계에 와 있었기에 미국이 참전하느냐 마느냐 사람들은 기대하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했다. 40년 안에 큰 전쟁이 두 차례가 벌어지고 국가 간 전쟁은 부지기수인 상태였다. 전쟁에 끝이란 있는 것인지 공포를 넘어선 권태가 몰려오던 시기가 아니였는지 모르겠다. 조선인들도 마찬가지였을 것 같다.
국내에는 창씨 제도가 시행되었고 주요 신문이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폐간되었으며 반전운동단체라는 빌미를 구실로 기독교도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이어졌다. 국민총력연맹(國民總力聯盟)이 만들어지면서 농촌은 군량이 끊임없이 반출되었고 도시의 노동자들은 군수품을 만드는 기계가 된다. 무엇보다 사상범 보호관찰령의 강화로 조금이라도 건수를 잡으면 잡아가는 현실이 되어 버린다.

"파괴란 새 질서를 세우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휴머니즘을 결여한 새 질서란 허구이며 허구에서 시작되는 파괴란, 남 뿐만 아니라 자신도 무너지고 마는 결과를 초래하지. (...) "
평소 환국이답지 않게 그의 어투는 매우 신랄했다.
"나는 그 의견에 반대다. 민족성에다가 못 박는 것은 반대다.
체제에 따라 변질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보편성 아닌가."
"민족성에 못을 박은 것은 아니다. 나는 그들의 역사를 말한거야. 인간의 보편성에는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있는데 일본의 역사는 변해야 할 것이 변하지 않고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변해왔다. 그렇게 본다. 나는 민족성에 근거를 두고 말한 것은 아니다. 길들여진 상태를 말했을 뿐, 그러니까 그들 스스로도 피해자인 셈이지."
"변해야 할 것이 변하지 않고 변해서는 안 될 것이 변했다. 그게 뭔데?"
"우라시마 타로의 다마테바코처럼 속이 텅텅 비어 있는 신도(神道), 혹은 신국사상과 현신이라 부제가 붙은 만세일계世一系)는 변해야 하는데 변하지 않고 변해서는 안 되는 진리와 진실, 또는 사실은 그들 형편 따라 변화무상이지. 결국 그것들은 일맥(一脈)으로써 변하건 변치 않는 것이건 허구다 그 얘기야." - P22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파괴가 필요하지만 거기에 휴머니즘(인간애)이 없다면 자신과 타인을 모두 해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 질서가 보편성을 띤 가치인 것도 중요할 것 같다. 자국만의 이익을 가져오는 것이라면, 아니면 내가 세계의 주인이 되겠다는 자부심이라면? 이를 위해 타인을 짓밟고 전진하는 행위는 광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17권에서 세 가지의 큰 사건이 있었다.

송관수가 죽고 길상은 모임을 해체하기로 결심한다. 길상은 독립 자금 강탈 사건을 기획했으나 이는 명백히 실패했다(이 때문에 본인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피해가 갔으니). 확보한 자금은 국외로 나가기는 했으나 비중 있게 쓰이지도 못했다. 평사리에 우가(家)가 미꾸라지처럼 활개를 치고 다니며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는 데다가(자식 하나는 군대에 나가고, 다른 하나는 면서기에 진출. 그러니 안하무인이지!) 최참판 가(家)도 무한한 압박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이 수감될 것을 예감했기 때문이며 무의미한 침체 상태에서 조직의 멍에를 벗겨주는 편이 나으리라는 판단에서였다. 체념하고 이제는 어쩔 수 없다 하는 자조감이었달까.
길상은 최참판 가(家)의 일원이 되면서 어쩌면 스스로의 입지를 넓힐 수 없는 처지임을 한탄하기도 했을 것 같다. 그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서희, 환국이, 윤국이 등이 위험해지니까.

홍이의 아내 보현이는 아파서 국내에 들어갔다가 금을 구입해 들어온다. 그런데 이 사건이 경찰에 발각되어 홍이 내외는 곤욕을 치른다. 홍이는 처가와 썩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 산소를 보러 오거나 할 때 아니면 들어올 생각이 없었는데 이 때문에 국내에 압송되고 처가집과 직면해야 했다(아마도 불편했겠지).
홍이는 40이 다 된 나이이지만 공적인 외부 활동(독립 운동) 이외에는 대처를 잘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 보현이와 아이들에게도 밖에서 보면 잘하는 남편이자 아빠이지만 서로 간에 끈끈한 정은 없다. 아내는 장이와의 일 이후에 늘 전전긍긍해했는데 홍이가 좀 더 세심하게 대처했다면 그럴 일이 없었을 것 같다. 딸인 상의와의 대화에서도 이는 드러난다. 상의가 아는 언니가 간호부가 되겠다고 하는데 나도 하고 싶다고 말하니 발끈한다. 왜 발끈하는지 설명이라도 하던가. 차라리 김두수가 여자들을 팔아 넘기는 일을 한다고 말하는 누나의 직설적인 말이 훨씬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다(물론 상의는 당황하지만). 감정이 앞서서 욱하다가 (누적되어) 돌발 행동을 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결코 도움이 안 되니까.

인실과 오가타가 드디어 만난다. 지난 번에 하얼빈에서 인실이 탄 마차를 발견하고 오가타가 얼마나 미친 듯 쫓아갔던가. 결국 잡지 못했지만 인실은 그가 자신을 보았음을 알고 있었다. 어쨌든 이번 만남에서 오가타는 인실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가 있다는 것과 조찬하가 아이를 길러왔음을 알게 되곤 혼란스러워한다. 오가타는 세월이 흘렀지만 예전과 별반 다름이 없다. 좋게 말하면 이상주의자고 나쁘게 하면 현실감이 부족한? 인실은 진실을 말하고 오가타에 대한 애정의 말을 던진다. 오가타는 분노의 말을 토로하고 헤어지는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일었다. 인실은 오가타를 잊지 못했구나... 해방이 되어 둘은 해후할 수 있을까. 그러기엔 국적이라는 장벽은 너무나 크다. 조선이 해방한다면 일본은 패망이니까 말이다.

"일본이 망하는 것을 원치 않는 오가타상이나 망하기를 고대하는 조선인, 따지고 보면 같은 차원이오. 일본을 비판하고 압박 민족에 깊이 동정하는 오가타상도 조국이 망하는 꼴은 못 본다, 그와 같이 어쩌다 친일파로 몰린 사람들 심중에 회한이 없겠소? 종속을 그 누가 원하겠소. 민족에 대한 존엄은 변할 수 없는 보편적 윤리 아니오? 게다가 그것은 짙은 감정이니까."
"우문이었소."
"악질 친일분자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분자는 제 나라가 융성하면 애국자가 되고 충성을 하고, 항상 강자 지향의 노예들이지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그 같은 노예근성, 나같이우유부단의 방관자는 있게 마련, 사실은 조선인들의 경우 그대부분이 친일하게 하는 잔혹성 밑에서 신음하고 있으며 친일하는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 실상 아닐까?"
"우리는 평행선, 적입니까? 영원히."
"그렇지는 않지. 그 해답은 당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거 아닌가요?"
"내가요?"
"세계가 하나 될 때, 그게 당신의 주의였고 이상 아니었소? 그리고 또 이웃으로서 우리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을 때 적이 될 이유가 없지 않아요? 당신의 반전 사상은 그거 아니었소?"
"그건 그래요."
"하면은 우리가 어찌 적이겠소. 친구지." - P198

오가타와 조찬하가 적이 아니고 친구라고 말하는데 나는 희망을 찾고 싶으면서도 쉽지 않음을 느낀다. 인실과 오가타도 마찬가지의 복잡한 감정을 느꼈듯이 말이다.

마지막 5부를 읽으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등장 인물들은 과거를 자주 회상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은 일명 "옛날이 좋았대이." 다.
내가 생각에 조선이 식민지가 된 이후에는 조선인은 식민지민이 되었기에 위치성에서 변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식민지 정책의 변화, 외부 상황에 따라(중일전쟁,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쟁) 그 비애가 더 커졌을 뿐이다.
물론 조선이 식민지가 되어서 이득을 본 많은 이들은 상실이 아니라 기회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도 마음 속에는 일말의 비애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지난 권에서 송관수가 호열자로 타국에서 쓸쓸하게 죽고 이번 권에서는 봉기 노인이 죽는다. 같은 사망이라도 반응은 달랐다. 한 사람은 타국에서 쓸쓸히, 다른 한 사람은 고향에서. 한 사람은 호열자로, 다른 한 사람은 자연사로. 한 사람은 동학, 형평사를 비롯 독립 운동에 노력했던 인물, 다른 한 사람은 그저 이 땅에서 먹고 살아간 인물이었다. 그만큼 둘을 놓고 사람들은 다르게 반응한다.
송관수는 너무 이르게 갔음을 한탄하고 봉기 노인은 살 만큼 살았다는 식이다(물론 그만큼 오래 살기도 했다). 송관수는 출신의 그늘에서 자유롭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그가 펼친 행동들은 그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었기에 존경을 받았다. 반면 봉기 노인은 주변 사람들을 시기하고 괴롭힌 적이 많았으므로 호평을 받지 못한다.
두 사람의 살아온 궤적을 보면서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고민하게 되었다. 주어진 조건과 한계를 넘어선다는 것이 개인에게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물며 당시 상황에서 반기를 든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것일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송관수의 죽음은 안타까웠으나 그의 삶은 그를 아는 모든 이들에게 귀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이 내 강산을 범하지 않았던들. 처음에는 의병이었고 형평사운동에서 사회주의 문턱까지… 그리고 송관수는 만주벌에서 삶을 끝마감했고, 권속을 끌고 서희 일행을 따라갔던 용의 풍상, 항일의 기운이 팽배해 있던 간도 땅에서 홍이는 감수성이 가장 첨예했던 소년시절을 보냈다. 한복은 아비와 그리고 애국 지사를 악마같이 엮어간 형 거복의 죄업을 보속하기 위하여 만난을 무릅쓰고, 형의 지위까지 암암리에 이용하면서 조선과 만주를 오가며 전령 노릇을 하고 자금을 운반하고 일하는 사람들을 인도하기도 했다.제국주의 일본의 동물적 탐욕은 그 얼마나 많은 조선 백성들의 운명을 바꾸어왔는가. 두메 산골, 골짝골짝마다 핏줄같이 시내 흐르는 곳에서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유민이 되어 떠도는 이 그 얼마인가. 만주로 가고 중국으로 가고 연해주로 가고 하와이 일본으로, 피 값도 안 되는 노동력을 팔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건만 도시에는 여전히 거지들이 떼지어 다니고 지게 하나에 목숨을 건 사대육부 멀쩡한 사내들이 정거장마다 부둣가마다 허기진 눈빛으로 짐을 기다리고 있는 풍경, 바로 이들에 소속되었던 사람들이 방 안에 앉은 사내들 부모들이었다.정면돌파를 했든 측면지원을 했든지 간에 그들의 유대는 동지로서 깊고 강한 것이었다. 그들의 열정은 투명하고 깨끗했다. - P302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선 2023-06-15 02: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때 송관수나 봉기 노인처럼 산 사람으로 나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많은 사람이 평범하게 살려고 했지만, 시대 때문에 그러지 못하기도 했겠습니다 소설에서는 한국말로 하지만 한국말도 제대로 못하고 한국말을 한 게 들키면 잡아가기도 한 듯한데...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사람은 예전에 잘 살지 못했다 해도 예전이 좋았다 할지도 모르죠 지나간 일이기에 좋은 기억으로 남은 걸지...


희선

거리의화가 2023-06-15 09:09   좋아요 1 | URL
맞아요. 40년대 초니까 창씨개명 시행이 되고 이미 교육 체계는 일본어가 국어처럼 쓰이던 때죠. 조선말 하면 혐오와 괄시를 받는 그런 때! 내가 잡혀가지 않으려면 누군가를 덤탱이 씌우기 좋은 환경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전이 좋았다고 한 이유는 그때는 독립운동의 불꽃이 남아 있을 때고 그에 참여한 인물들이 살아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그만큼 동네도 북적였고 활기가 있었을 때였는데 이제는 친일파들 빼고는 몇몇 남지도 않은 데다가 잡혀가지 않기 위해 쉬쉬하는 그런 분위기? 라고 할까요.
 
한국전쟁의 기원 1 - 해방과 분단체제의 출현 1945~1947 현대의 고전 16
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범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에 대한 해석을 비롯하여 한국현대사와 관련한 저작들을 내놓은 학자다. 한국전쟁의 기원은 내부적 문제로 인한 갈등 폭발, 미소 등 외부적 세력에 의한 영향, 내부적/외부적 결과의 혼합 등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을 1차적으로는 해방 후 5년 간 일어난 사건들에서, 2차적으로는 남한에 일제강점기 식민 지배구조가 뿌리내린 것이 영향을 주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민위원회의 역할과 그 한계에 중요성을 부여한다.

식민지에서 뿌리 내린 체제에서 비롯된 계급 갈등의 문제(지주와 농민 간, 기업가와 노동자 간)는 내부의 갈등이 뿌리 깊었음을 인지하게 하며 통일 후 지향할 사회의 문제(이념)는 신탁 통치를 기점으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간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일본은 조선을 권위적이고 강제적으로 통치하면서 군림했다. 조선총독부는 한국의 비주류 지배층과 갑자기 부유해진 양반과 지주, 관료들을 포섭하여 민중의 저항을 철저히 통제하였으며 자원을 동원하고 수탈하는 정책을 펼쳤다. 식민지 시기 철도망이 발달하면서 농업이 상업화되고 일본은 제국을 통합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다. 기존의 조선 지주들은 토지 자본을 상업과 산업에 투자하며 배를 불렸고 일부 평민, 천민들은 사업을 통해 기업가로 변신한다. 산업의 중심은 농업에서 공업으로 이동하였고(제조업, 산업, 광업, 상업 중심의 공장이 많았던 북부 지방의 고용이 증가하여 남부의 농민들이 대거 북부로 이동), 노동 계급이 형성되었다. 식민지의 노동 정책은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갈등을 강화하는 기제로 작동하였고 1930년대 이후 일제의 강제 동원이 시작되면서 만주나 일본 등 해외로 노동하러 가는 인구가 늘었다. 해방 이후 북에서 남으로, 만주나 일본에서 귀환한 노동자(농민)들은 자신의 기반인 토지를 잃었다.

해방 후 조선에 남아 있던 일본인들은 한국인의 보복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조선총독부는 영향력 있는 한국인 인사와 접촉을 하였는데 첫 주자인 송진우는 거절하였고 여운형이 수락하면서 과도적 행정기구 책임자로 국내 치안 임무를 맡게 된다.
여운형은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연합군에 외국의 개입 없이 한국은 즉각 독립할 것과, 친일 세력은 배제해야 함을 전달하였다. 8월 16일 감옥에 있던 정치, 경제범이 석방되자 건국준비위원회는 공산주의자들로 채워지게 된다. 그리고 대중들도 일본과의 협력는 거부했기 때문에 조선총독부의 요구는 설 길을 잃는다. 건국준위위원회(건준)은 전국적으로 지부가 만들어지며 산하 단체까지 조직되고 8월 20일 무렵이 되면 일본은 건준 반대 입장으로 돌아선다. 미국이 9월 초까지 국내에 들어오지 못하는 동안 일본은 남은 물품을 폐기하고 화폐를 마구 찍어냈으며 친일 성향의 한국인에게 은사금을 마구 뿌려대는 등 남한 경제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

8월 28일 건국준비위원회는 치안 유지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부를 수립할 것임을 선언하고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이 수립된다. 그 배경에는 조선의 자주성과 미국의 입김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인공 지도부는 좌우익을 연합한 명단으로 구성되었다.
9월 16일 인공에 반대하며 한국민주당(한민당)이 결성된다. 이들은 주로 대지주, 식민지 시기 각종 혜택을 받은 계층과 지도자급 인물들, 서구에서 유학한 엘리트 계층이 많았다. 한민당의 최대 목표는 식민지 시기 지주/농민 구조와 토지 지배 관계를 존속시키는 것이었다.

루스벨트는 공산주의, 자본주의, 민족주의로 분화된 세력을 포용하고 포괄하고자 노력했다. 1943~1946년에는 미국의 영향력을 유지하며 다국적 신탁통치를 시도했다. 루스벨트는 여러 나라가 참여하는 신탁 통치는 식민지를 겪은 나라가 이전의 식민 지배를 대체하고 미국의 이익에 반대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으면서 식민지는 점진적으로 독립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련이 만주와 한국으로 빠르게 남하하면서 미군의 상륙 날짜는 거듭 앞당겨졌고 소련에게 한국이 넘어갈 것을 우려한 미국에서 국제협력주의가 설 자리는 없게 되었다.

맥아더 사령부는 일본과 한국까지 점령하라는 작전 지시 아래 미국 제10군 24군단에 하지를 임명하여 조선으로 보낸다. 한국은 카이로 선언에서 일본 침략의 희생자로 인정되었음에도 하지는 한국이 미국의 적이며 패전국의 규정이 적용될 대상이라 생각하고 행동했다. 한반도에 들어온 하지는 기존 질서를 유지하고 통치 기구를 존속시키라 지시한다. 미군의 목표는 소련의 영향을 받은 외부적 혁명 세력과 국내의 자생적 혁명 새력을 차단할 방어책을 세우는 것이었다. 점령군은 한국의 일부를 물리적으로 점령해 다른 세력이 독점적으로 장악할 수 없도록 만들기를 원했다.

1945년 미군정은 임정 관련 인물들이 미국의 정책에 도움이 되는 대중적 지지와 정통성을 지녔다 생각했다(미 국무부는 임정을 비롯한 한국인 단체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했다). 미군정은 정치 단체 협의회를 군정 내 한국 정부를 구성하고 정무 위원회를 조직할 것을 기획하였다. 정무 위원회는 과도 정부로 기능하고 미군 사령관은 거부권, 미국인 감독 및 고문의 지명권을 갖는다는 생각이었다. 1945년 10월 16일 이승만이 귀국하고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조직하여 좌우익 결집을 시도한다. 그는 소련과 소련의 북한 정책을 비난하였고 인공 참여 요청을 거부하였다. 이에 여운형과 박헌영 같은 좌익 계열은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탈퇴한다. 여운형은 11월 11일 인민당을 결성하고 이전의 인공보다 좀 더 온건한 세력을 흡수하여 조직을 구성하였다. 중국에서 임정 세력이 귀국하자 자체 정부를 세울 것이라는 소문에 인공 대표자들은 위협을 느꼈고 이에 인공대표자들은 군정 지지를 표명하였다. 하지만 하지는 인공을 비판하고 심지어 그들의 활동을 불법적으로 규정한다. 이 때부터 하지는 인공, 전평 등 좌익 세력을 적극적으로 탄압했다.

미군정은 기존 토지 관계가 유지되길 바라는 한국인과 결탁하여 미곡 경제 법령을 발표하고 미곡을 자유롭게 사고 팔 수 있는 시장을 설치하는 정책을 펼치지만 이것은 미곡 유통 구조를 미군정이 장악하려는 시도로 대중의 반발만 불러오며 처참한 실패로 끝이 난다.

1945년 12월 16일부터 모스크바 삼상 회의가 열렸다. 4대 강국이 한국에 5년 이내의 신탁 통치를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핵심은 신탁 통치 이전에 과도 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내에는 우익의 반대, 이후 좌익이 찬성하며 극심한 대결 끝에 혼란을 불러온다. 송진우는 저격으로 암살되었고 김구는 파업과 시위를 이끌며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실패(이후 국내에서 핵심 입지를 잃음)하면서 반탁운동의 중심은 이승만과 한민당으로 넘어간다. 또한 임정과 인공의 연합 노력은 좌익이 모스크바 협상 지지 입장으로 변화하자 중단되었다.

미군정은 1946년 1월 남북한 모두 인민위원회를 해체하고 대표민주위원을 한국 과도정부의 모체로 내세운다. 과도 정부 수립을 위해 다양한 한국 정치 단체들에게 주요 민주 개혁을 포함해 신정부가 추진할 정책을 합의하도록 촉구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미군정은 우익을 우선적으로 확보하는 것에 목표를 두었다. 실제로 28명의 정무위원 중 4명만 좌익이고 나머지는 모두 우익이 차지했다. 이 무렵 조선공산당과 임정의 좌익 계열을 아우른 민주주의민족전선이결성된다. 민주주의민족전선은 인공의 직접적 계승자임을 자처했다.

미국은 정부 형태와 관계 없이 한국의 조속한 독립과 자치를 추진하고 소련과 협력해 미소양군 점령을 종결시키겠다 공표한다. 미소공동위원회 협상이 그렇게 시작되었으나 과도 정부 수립을 한국의 어떤 단체와 논의할 지 합의하지 못하여 무기한 중단된다. 미국은 대표민주의원을 남한의 유일한 자문기구로 사용 제안했으나 소련은 모스크바 협정에 반대하는 정당이나 단체와는 협의할 수 없다며 반대하였다. 공위의 핵심 쟁점은 소련이 지지하는 형태의 정부(인민위원회와 관련된 조직)가 남북한 모두에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미군정은 1946년 2월 정당등록법을 공포하여 좌익 색출 단체를 해체하려 했고, 1946년 3월에는 군정을 공격하는 행위에 대한 처벌을 규정하였으며, 1946년 5월이 되면 전국의 경찰을 이용하여 좌익을 전면적으로 공격하는 전권을 부여한다.

하지는 레너드 버치 중위에게 온건파를 포함하되 극좌, 극우 세력을 배제하는 중도파 합작 형성을 목표로 좌우합작을 추진한다. 하지만 여운형과 박헌영이 좌익 주도권을 놓고 갈등하였고 과도입법의원이 대표기구로 수립되었으나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인민위원회는 자생적이었고, 다양한 계급 구성원(지방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자, 학생과 제대한 군인, 지방의 명망가와 지주, 일제강점기 관료)이었기 때문에 지역 마다 정치 참여 수준과 토지 상황, 지리적 위치, 인구 이동, 근대화 정도에 따라 양상이 달랐다. 거기에 일본에서 미국의 통치로 넘어가는 기간도 그 결과를 다르게 하는 조건이 되었다. 조직 구조가 알려진 지방 인민위원회는 대부분 중앙의 건준과 인공과 비슷한 부서로 이루어졌고 조직부, 선전부, 치안부, 식량부, 재정부가 있었다.

1946년 가을 인민위원회가 장악한 전국에 농민 봉기가 발생한다. 봉기는 경상도에 집중되었으며 인민위원회가 강력하거나 지배한 전라남도, 충청남도, 강원도 군에서도 발생했다. 봉기가 경상도에 집중된 것은 해방 뒤 이 곳에 인민위원회가 존재했으며 토지를 잃고 불만에 찬 농민들이 모여들면서 일어났다.

1946년 9월 23일 부산 철도 노동자 파업이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남한 전체의 철도 수송이 멈춘다. 나중에는 인쇄공, 전기 노동자, 전보국, 우체국 직원 등으로 확산되면서 전국적인 총파업이 벌어진다. 여기에 학생들도 참여하여 파급력이 커졌다. 이들은 쌀 배급량을 늘리고 임금을 올리며 실직자와 피난민들에게 집과 쌀을 배급할 것, 공장 노동자들에게 작업 환경을 개선할 것, 조직 결성의 자유를 요구하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민위원회에 권력을 이양하라는 요구였다. 군정청은 북한 공산주의자가 혼란을 부추긴다며 비판하였고 현재 한국인은 자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미군정은 시위자 검거를 실시하고 파업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요구를 거부하면 즉시 해고하고 쌀 배급을 중단하겠다 엄포를 놓는다.

9월 말 대구에서 많은 공장과 기업에서 파업이 발생하고 3천 명의 노동자가 참여하면서 전국으로 파업이 확산되며 격렬해진다. 이 과정에서 진압자는 발포를 하고 시위자는 지방의 공무원과 경찰을 살해, 관공서 건물을 불태우는 등 과격해진다. 군정은 농민 봉기 진압에 경찰을 활용하였고 무자비한 탄압으로 대응했다. 파업과 봉기는 미군정의 곡가 정책으로 1946년 하반기 곡물가의 폭등, 통화 팽창, 실업이 불러온 결과였다.

소련은 1945년 9월 북한 내부를 어느 정도 파악한 후 기존에 이미 설치되어 있던 지방 인민위원회를 이용해 식민지 유산을 재편하기 시작했다. 북한은 고위층인 친일 인사들이 대부분 남쪽으로 피신하는 등 지주, 식민지 시대 관료, 경찰의 활동이 힘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피를 흘리지 않은 채 혁명이 신속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북한 지도부는 중앙과 지방의 요구를 결합, 중앙집권적 통제 방식과 대중 노선을 혼합한 방식을 추구하려 했다. 김일성은 지도자, 조직, 대중 노선을 내세우며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세움으로써 중앙적 조직의 기반을 마련한다.

북한은 빈농과 노동자들 중심의 농촌위원회를 조직하면서 중앙에서 마을 밑바닥까지 하나의 유기적 명령 체제를 완성하였고 무엇보다 토지 개혁을 추진함으로써 이전의 지주는 소규모 토지를 받고 다른 지방으로 이주하게 함으로써 지주 제도를 뿌리 뽑고 하층 농민들은 자신의 토지를 갖게 함으로써 정권에 호응도를 높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8시간 노동제, 사회 보험 제도 실시, 노동 조건 개선, 성별에 상관 없이 같은 노동에는 같은 임금을 지급, 남녀 평등법을 제정, 일본인 소유의 공장과 기업은 국유화, 중소기업은 도군 인민위원회 관할 아래 투자와 생산활동을 하도록 장려하면서 사회 전반적인 개혁을 이루어낸다.
1946년 8월 29일 북로당이 결성되면서 북한의 내부 당파를 통합하게 됨으로써 북한은 남한과 명확히 다른 노선의 체제가 만들어지게 된다.

해방 뒤 첫해 한국의 북반부에서는 대부분의 한국인과 여러 서구 관찰자가 일제 지배가 끝난 뒤 필연적으로 나타날 결과라고 생각한 것을 달성했다. 해방 뒤 9개월 만에 지주 제도가 사라지고 토지는 다시 분배됐으며 주요 산업이 국유화되고 완전히 왜곡되었던 식민지식 공장 시스템을 뿌리 뽑았으며 남녀평등을 확립하는 급진적 개혁이 이뤄졌다. 해방 뒤 1년 만에 수십만 명의 한국인을 아우른 강력한 대중정당과 초보적인 군대가 조직돼 오랫동안 한국 정치에 없었던 통일성을 부여했다. 1946년 말 북한에서도 남한과 마찬가지로 분단 국가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해 1948년 9월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북한 공산주의와 연결된 대부분의 특징도 이 시기에 나타났다. 민족주의의 강조, 지도자의 절대적 역할 중시, 포괄적 통일전선 그리고 민족적 색채가 짙은 한국 공산주의의 특유한 수단이 된 사회주의와 주체사상의 이념적 혼합이었다. 모두 가차 없이 이뤄진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최소한의 유혈만으로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이뤄졌다. 달리 말하면 북한은 일제의 식민 지배가 남겨놓은 영향에서 예상할 수 있는 "일반적" 경로를 따랐다. - P489

일제강점기 지배층과 통치 구조를 남한이 이식되지 않았다면, 하지가 버치 중위를 끌어들여 주도한 좌우합작이 성공했다면 한국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곱씹어볼수록 해방 이전의 식민지 지배층이 통치권력으로 이양되었던 것이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물론 미군정의 헛다리와 판단 미스도 많은 영향을 끼쳤음을 부인할 수 없다. 자생적인 조직이었던 인민위원회를 인정하고 잘 활용했다면 어땠을까. 1945년 8월부터 12월의 5개월이 역시 뼈아픈 듯 싶다. 이 때 이식된 결정들이 향후 바꾸어보려고 여러 시도를 하지만 잘 이루어지지 못했고 안착되지 못했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겨울호랑이 2023-06-11 17: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이런... 거리의화가님 이번 리뷰는 <한국전쟁의 기원>에 관심있는 이웃들을 두 갈래 길로 이끌듯 합니다. 리뷰를 읽고 지도처럼 활용하여 글의 큰 흐름을 잡는 이들과, 아니면 리뷰만 읽고 책을 ‘읽는 셈치고‘ 건너뛰는 독자로... ㅋㅋ

거리의화가 2023-06-11 17:51   좋아요 1 | URL
앗! 정리하다보니 너무 길어지긴 했네요. 어떤 분들이든 제 리뷰에서 도움을 얻으시면 감사하겠죠^^ 그래도 제 리뷰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직접 읽어보셔야!ㅎㅎㅎ 겨울호랑이님 감사합니다*^^*

희선 2023-06-15 03: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국전쟁의 기원이군요 외국 사람이 이걸 쓰다니... 다른 나라 사람이 그때가 어땠는지 쓴 걸 보는 것도 괜찮겠네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을 테니... 그런 거 본다고 알지...


희선

거리의화가 2023-06-15 09:11   좋아요 1 | URL
워낙 유명한 저자입니다. 한국현대사, 그리고 한국전쟁사 관련하면 이분이 바로 생각날 정도로요!^^;

NamGiKim 2023-09-17 17: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참으로 좋은 책입니다.

거리의화가 2023-09-18 09:07   좋아요 0 | URL
네. 많은 분들이 읽어보면 좋을 책이죠. 한국전쟁사를 다룬 책들 중 분기점이 된 책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전쟁의 기원 1 - 해방과 분단체제의 출현 1945~1947 현대의 고전 16
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범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국전쟁은 식민지 시기에서 얻은 구조적 문제와 해방 후 전쟁 전까지의 사건들이 영향을 준 결과 발생했다. 1권은 식민지 시기 통치 하에서 이루어진 산업 구조의 분화와 동원, 해방 이후 1946년 말까지의 시기를 다루며 남북한의 이념과 체제가 확고하게 분화된 배경과 사건들을 파헤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