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중국사 당 - 열린 세계 제국 하버드 중국사
마크 에드워드 루이스 지음, 김한신 옮김 / 너머북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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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의 중국인은 당唐 왕조를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중화 제국의 절정기로 인식하고 있다. (...) 중국인이 전통적으로 찬양하는 군사적 정복과 뛰어난 시문의 등장은 당 왕조의 전반기에 이루어졌다. 당 조정은 8세기 중반에 격변을 불러온 반란으로부터 회복하지 못하였고, 수십 년이 지나기도 전에 이미 중국의 정치가와 문인들은 지나가 버린 왕조의 전성기를 언급하면서 자신들은 그 지나간 영광의 그늘 속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정치와 예술에서의 초기 업적에 대한 찬양은 후대 왕조들에서 더욱 강조되었다. 이러한 생각은 당 왕실이 혈통적으로나 문화적으로 5세기와 6세기에 중국 북부를 지배하고 있었던 모든 변방의 '오랑캐'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는 사실을 무시한 것이었다. - P17~18

당은 중국 역사 사상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찬란한 시기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이는 현종 초기, 안녹산의 난이 발생하기 전 시기로 국한지어야 한다. 그 이후에는 당 초기만큼의 국력을 회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당 후기 이후 북부 지역에는 돌궐을 비롯하여 티베트 등 강한 이민족의 힘이 당을 억눌렀는데 이는 당 후기까지 내부의 반란 세력과 결합하면서 당을 괴롭혔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당의 전기와 후기가 어떻게 달랐는가.

당대 초기 중국 북부 지역에서는 균전제가 행해졌다. 그것은 원칙적으로 국가가 소유한 토지를 경작 가능한 가구들에게 주기적으로 재분배하는 것이었다. 토지를 지급받는 모든 가구에 대하여 동일하게 부가되는 세금 체계가 소유한 토지에 따라 연결되었다. 군사 체계로는 전방에 이민족 유목민 부대를, 변경에는 직업군인들을 배치하고 수도에는 정예군을 배치하는 구조였다. 수도와 다른 주요 도시들은 벽으로 구분하여 거주 구역을 두고 교역은 특정 시장에서만 열도록 제한을 두었다. 사회는 소수의 최상위 대가문들이 독점하였다. 문학적으로는 장식적이고 인위적인 스타일의 작문이 강조되었다.
이것이 당 후기가 되면 국가는 부병제를 포기하고 직업군인(모병제)로 전환된다. 도시 내 교역에서는 공간적 제약이 사라지고 도시 생활은 상업 시설과 주거 시설의 구분이 사라졌다. 또 정부가 황하 유역 대부분의 지역을 지킬 수 없게 되면서 양자강 유역이 경제 중심지이자 국가 재정 수입상 가장 중요한 지역이 된다. 남부의 항구를 통해 해상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기존의 한국, 일본 같은 동북아시아의 국가들을 넘어서서 동남아시아, 인도, 페르시아 해협의 해안 지역들과도 교류가 이루어졌다. 문학적으로는 개인의 사생활이나 인간의 희로애락을 다룬 장르의 운문들이 등장하고 남녀 사이의 관계나 내면을 탐구하는 소설도 나타난다.

당 왕조가 멸망할 즈음에는 그 모든 것이 완전히 변하였다. (...) 전통적으로 중심지였던 북서부 지역은 장기간의 경제적 · 생태적 쇠퇴가 시작되어 오늘날과 같은 빈곤하고 반 사막인 후배지後背地로 전락하게 된다. 중원 평야는 인구학적으로나 경제학적으로 지배적인 위치뿐 아니라 중국 문화의 전형으로서의 광채를 상실하였다. 북동부(오늘날의 하북성과 산동성)는 거의 이민족화되어 경계 지역이 되었고, 그중 몇몇은 이후 몇 세기 동안 중화 지역과 다시 결합하지 못하였다. (...) 양자강 하류 지역과 그 남부 지역은 풍부한 강수량과 풍요로운 식생 그리고 편리한 수상 운송으로 인하여 중국의 인구학적 그리고 경제적 중심지로서 점차 황하 유역을 대체하고 있었다. - P29~30

인상적이었거나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을 위주로 이야기를 좀 더 풀어보겠다.

지역 간 거래의 성장과 더불어 제국 전체를 포괄하는 금융거래에 대한 필요성이 더욱 커졌다. 당 말과 송대 사이의 시기는 지폐, 약속어음 그리고 다른 형태의 종이로 된 신용거래에서 혁명적 변화가 발생하였고, 이는 현금이라고 알려진 많은 양의 무거운 동전 꾸러미들을 대체하였다(P239). 교역이 늘어 기존의 동전들을 가지고 다니기 어려워지면서 화폐와 어음 등이 등장하게 되었다. 오늘날의 화폐 시스템의 기본이 되는 지폐가 이 때 등장했다는 게 놀랍다. 군부대의 병사들이 고향에서 곡식으로 구입한 영수증으로 부대에서 음식을 살 수 있었다는데 오늘날로 말하면 구내 식당의 '식권' 같은 개념이다. 상인들이 도성에서 정부로부터 권리를 구입하면 이것을 지방 금고에 가져가서 동일한 액수의 현금을 인출할 수 있도록 하였다('날아가는 현금'). 이는 비단 오늘날의 은행과 다를 바가 없다. 다양한 종류의 종이로 된 신용 증권도 이 때 만들어졌다고 한다. 종이돈이 장례식에 사용되게 된 것도 이 때부터다.

중국인의 문화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차 마시는 문화가 아닐까. 차가 제국 전체에서 보편화된 음료로 발전한 것이 당대에 와서라고 한다. 차 마시는 행위는 다양한 문화적 활동과 연관되어 이루어졌다. 북부 지역에서 차 음료의 확산은 많은 이유로 불교 사찰에서의 차의 사용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는데 승려들이 오후에 고체로 된 음식을 섭취할 수 없어 액체의 음료에 의지해야 했기 때문이란다. 이후 차 음료는 방문객들을 맞이하는 대접의 수단으로 확산되었고 조정에서는 의식에 사용되는 등 다양한 부분에 전파되었다.

안녹산의 난 발발과 티베트에 의한 북서부 지역의 점령은 아랍 세력이 중앙아시아로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이러한 침공의 성공은 18세기에 만주족이 점령할 때까지 중국 왕조들이 돈황을 경계로 그 서쪽 지역에 대해 지배권을 상실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건은 불교 세계의 한 부분이자 중화 문명의 영향이 미치는 부분으로서의 중앙아시아를 영원히 상실하게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P319). 당 초기 서쪽으로 중앙아시아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했던 당나라는 안녹산의 반란으로 내부의 위기, 서북쪽의 티베트의 공격으로 중앙아시아의 지배권을 상실한다. 이후 중앙아시아는 아랍 세력의 지배권에 들어가게 되었다.

당대에는 많은 외국인들이 국내에 들어와 있었는데 이들은 다양한 직종에 종사하였다. 기본적으로 사채업, 그 이외에도 주점은 소그디아 인 또는 토카라 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운영하였고, 주민들에게 제공되는 예능과 매춘에서는 비중국적 취향이 매우 보편적이었다. 중앙아시아 출신의 여성이 시중을 들거나 예능인인 외국인 소유의 주점과 선술집은 당대 시나 예술의 일반적인 주제였다. 중앙아시아 음악은 도시 전체에서 큰 유행이었고 수도에서부터 모든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8세기가 되자 중국의 대중음악은 중앙아시아의 오아시스 국가들의 음악과 거의 구분하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P337~338). 당이 참으로 국제적인 도시였음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이 때 중앙아시아의 음악이 중국 내 유행을 했고 거의 주류 음악처럼 되었다는 것도 신기했다. 심지어 현종과 양귀비의 애창곡도 중앙아시아 노래의 번안곡이었다고 한다.

당대의 여성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시기라는 이미지가 있다. 아무래도 무측천, 그녀의 딸인 태평공주와 위황후가 반 세기 이상의 기간을 지배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한 멸망 이후 중국 북부 지역을 차지한 유목민들이 중국에 가져온 것으로 유목 사회는 기본적으로 남녀평등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흥미롭다(물론 당에 비해서 남녀평등하다는 것이었을 것이지만). 6세기 인물인 안지추는 당시 여성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북부 지역의 여성들을 법률적 사안을 직접 처리하고 정치적으로 힘이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남자 친족을 위해서 정부 청사에 들어가 탄원과 고소를 할 수 있었다. 7세기 중반 이후 당대 황후들의 권력은 여성들이 다양한 영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북방의 전통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강력한 황후들의 존재 뿐 아니라 당대는 공주들의 정치 참여가 두드러졌다(P357~358). 

수나라 때 전래된 불교는 당나라 때 와서 중국식화된다. 그 전까지 불교는 외래 종교의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나 당대에 와서는 생사관과 의례 체계의 기저를 이루는 불교 사상의 많은 체제들이 중국의 종교(민간신앙) 속으로 융합되었다. 서구에서 연옥이 있듯 사람들이 자신들의 사망한 친족을 구제할 수 있었던 완전히 새로운 도구가 등장한다. 이 새로운 연옥은 시왕경에서 가장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사망한 자들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10곳의 연속된 법정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각각의 법정은 당대의 재판장을 모델로 묘사된 것으로서 각 법정을 지배하는 왕들(십왕)은 개인의 인생의 기록들을 조사하는 재판관의 역할을 하였고, 만일 필요하다면 죄의 완전한 자백을 받아 내기 위해서 고문을 할 수도 있었다. 법정을 떠난 이후에, 그 사망한 자들은 다음 생에서 환생할 상태가 결정되는데, 선행을 베푼 자들은 보다 나은 상태로 환생하고 악행을 행한 자들은 더 나쁜 상태로 환생한다(P381).

시를 새로운 무대와 사회계급으로 옮기고 복고의 정치-윤리적 담론에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당대에 시인들은 새로운 사회적 역할을 개척할 수 있었다. 시를 짓는 것은 사교적 세련미의 차원에서 극히 중요한 문제로 격상되었다. 시인은 유럽의 낭만주의에서 찬양하였던 기인과 '천재' 사이에 존재하는 독특한 인물이 되었다. 시는 지식인들의 소명이 되었고 시인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 완벽함을 추구하였다. 특정 작가들은 시를 '재산'을 모을 수 있는 '직업'으로 묘사하였고 시인에게는 자신들의 작품에 대한 '소유권'이 보장되었다(P514). 그러니까 당나라 때 오면 시인이 지식인을 넘어 직업인으로서 대우를 받는다는 이야기다. 당시(唐詩)가 하나의 장르가 된 것처럼 시는 당대는 물론이고 이후 지식인들이 갖춰야 할 덕목 같은 것이 되었다. 게다가 시가 개인적 소회를 푸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역할을 했다는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두보나 백거이 등은 사회 비판적 메시지를 담은 시들을 많이 발표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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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07-25 02: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당나라는 시인이 일이었다니... 그러니 두보나 백거이 시가 지금까지도 전해지겠습니다 그 뒤에도 시인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겠습니다 여성이 정치에 참여하기도 하고, 그런 게 죽 이어졌다면 좋았을 텐데 싶기도 하네요 고려시대나 조선 초기에는 여성과 남성을 비슷하게 생각했다고 하는데...


희선

거리의화가 2023-07-25 08:58   좋아요 1 | URL
그 전까지는 시인이라는 직업이 생소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해요. 위진남북조 시기 도연명이 있기는 했지만^^ 당시가 본격적인 장르가 되고 시인들이 여럿 탄생하면서(그만큼 시상이 떠오를 일이 많았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껏 흘러왔던 것 같습니다.
당나라 여성의 삶이 서술된 것만으로도 힘이 제법 있었구나 싶더군요. 송나라, 명나라 오면서 문치주의로 인해 그 힘이 약화된 것이 아쉬워요.
 
콜드브루 파우치 브라질 산토스 NY2 디카페인 - 40ml*5ea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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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드브루를 잘 마시는 편은 아니지만 브라질 원두를 좋아해서 확인차 샀는데 역시 고소해서 좋았다. 파우치 형태라 들고 다니면서 먹기에도 편하고 콜드브루니까 아주 더운 날 아이스로 마시면 좋다. 먹어보니 역시 우유랑 찰떡궁합인데 저지방우유 말고 생우유 적힌 양보다 적게 해서 마시면 더욱 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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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3-07-23 13: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지방/무지방우유 넣은 라떼는 라떼가 아니다!! 그 밍밍함 용서못해....

거리의화가 2023-07-24 08:50   좋아요 2 | URL
보통 디카페인은 오후 늦게나 저녁에 먹으니까 저지방 우유를 넣어봤는데 역시 그냥 우유만 못하죠. 역시 라떼는 고소해야!^^

scott 2023-07-24 12: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디카페 좋습니다
자칭 커피 중독자인 저
쌀자루보다 원두 자루를 더 소중히 여기는
제가 인정 ^^

거리의화가 2023-07-24 13:11   좋아요 1 | URL
디카페인 보통은 원두로 시켰었거든요. 제가 아이스를 잘 안 먹다보니까 콜드브루는 좋아하지 않는데(그 특유의 향 때문에) 우유랑 먹으니까 좋네요. 저도 커피 중독자라 줄어드는 원두량이 어마어마합니다!
 
베트남 전쟁 - 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
박태균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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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은 1955년부터 시작되어 1975년까지 장장 20 년간 이어진 대규모 전쟁이었다. 한국은 전쟁 기간 중 1964년 한국군 파병을 시작하여 1973년 철수할 때까지 총 4차례에 걸쳐 32만 5천여명을 파병했고 이 가운데 5천여명이 전사했다. 

이 책은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고 한국군이 베트남에 파병되는 기간을 주요 시기로 다룬다. 이를 통해 한국이 베트남 전쟁에 참여하게 된 배경과 국내외 전개 상황을 알기 쉽게 설명해 준다. 

한국군이 베트남에 파병된 이유는 무엇이었나? 주한미군의 규모를 유지함으로써 북한에 대응하는 안보력 약화를 막기 위한 것, 한∙미 동맹에 대한 고려, 미국의 주한미군 및 한국군 감축 정책에 대한 대응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여기에 도덕적 측면을 한 가지 더 추가한다면, 세계적 차원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데 공헌한다는 것이다(P28). 

1965년 한일협정이 체결되면서 국내는 반대 시위로 시끄러웠다. 주한 미 대사관은 이 시위로 한국 정부의 전복 가능성을 생각할 정도였고 중국이 핵 실험에 성공하면서 한층 더 위기는 고조되었다. 북한은 미국이 한국과 일본과 삼각 동맹을 형성하고 여기에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개입한다면 자신들을 심히 위협할 거라 예측했다. 이 상황에서 미국 정부의 수장이 바뀌며(케네디->존슨) 한국 정부에 파병을 요청한 것이다. 냉전과 안보 위기, 한미동맹에 대한 정치, 군사적 이익이 아니었다면 파병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이렇게 총 9년에 걸쳐 이루어진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한국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베트남 파병 시기 동안 한국 경제는 국민총생산 연 평균 8퍼센트 이상의 가파른 성장을 기록했다. 전쟁 특수와 이를 통한 경제성장과 산업화는 박정희 정부가 국민의 동의를 구하는 기반이 되었다. 
이 무렵 징병제가 강화되었고, 주민등록법이 본격적으로 실행되었다(이는 국가주의가 통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미군 감축을 위한 한국군의 현대화(무기 생산)가 이루어지면서 중공업 육성이 가능해져 한국의 산업 구조는 경공업 중심에서 중화학 공업 중심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리고 베트남을 통해 서구의 대중문화가 본격적으로 한국 사회에 유입되어 장발이 유행했으며, 미니스커트가 등장했다. 트로트의 인기를 밀어 제치고 통기타 음악이 그 자리를 차지했고, 미국과 일본의 전자제품이 유입되었다. 중산층이 생겼으며, 한강 이남의 개발로 부동산 투기가 시작되었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 중심의 세계 경제 질서를 무너지게 했다. 전쟁비 지출이 급증하면서 달러는 더 이상 세계 유일의 기축통화 자리를 지킬 수 없게 되었다. 전쟁 반대 분위기가 전 세계를 휩쓸고 수정주의가 판을 치며 자유주의적 분위기가 확산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흐름은 오래 가지 못했다. 반전과 수정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가 태동한 것이다. 미국에는 로널드 레이건 정부가 들어서면서 강한 아메리카를 외치게 되었고 일본은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가 들어선 후 극우적인 역사 인식을 내비치면서 정치인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도 이루어졌다. 


미국은 처음으로 패배한 전쟁이었던 베트남전쟁을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전술로 싸운 전쟁으로 기억한다. 한국은 어떠한가. 한국전쟁을 통해 일본이 전쟁 특수를 누리면서 경제 발전을 이룬 것처럼 한국도 베트남전쟁을 통해 이룬 경제적 발전에만 주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국가는 동원했던 군인들에 대해 제대로 된 보상을 해주지 않았고 한국군이 민간인 학살을 감행한 일에 대해서 정부는 제대로 된 해명을 하지 않고 있다.  


저자가 이 책을 낼 수 있었던 동력은 두 가지였다고 한다. 하나는 참전 군인들의 문제였다. 참전 군인들의 존재는 한국을 제외하고는 다른 나라의 어떠한 연구 성과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심지어 베트남에서조차 위령비와 증오비를 제외하고는 한국군에 대한 언급을 찾기 어렵다(P339). 둘째로 베트남전쟁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꿈으로써 한국은 다르다는 것을 전 세계에 보여주고 싶었다. 한국 사회는 범죄 행위를 미화하고 숨기는 일본의 극우 세력들과는 다르다. 한국은 지나간 역사에 대해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성찰하는 시민사회를 갖고 있다(P340). 


오늘날에도 한국은 견고한 한미동맹을 내세우며 자유주의를 외치고 있다. 하지만 그만큼의 안보 강화는 이루어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베트남 전쟁의 한국군 참전의 역사를 보면서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문제들이 많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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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22 23: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7-23 07: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23-07-23 01: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쟁을 반대하고 파병을 반대할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힘 있는 나라 눈치를 봐야 한다니... 그 뒤에도 그런 일은 있었네요 베트남 전쟁에 나간 사람 많았네요 한국 정부는 거기 갔다 돌아온 사람 아무 도움도 주지 않았을 것 같네요 전쟁이라는 걸 겪으면 힘들 텐데... 그런 걸 생각한 건 얼마 되지 않은 듯도 합니다 한국군이 한 민간인 학살...


희선

거리의화가 2023-07-23 07:18   좋아요 1 | URL
그 때는 한미동맹이라는 명분도 그렇지만 안팎으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파병을 억지로 강행했다가 맞을 겁니다. 한국군 파병 숫자가 외국군으로는 가장 큰 것으로 알고 있어요. 거기서 죽을 고생을 하고 와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고엽제 등의 후유증으로 말도 못할 고통을 겪었을텐데 한국은 제대로 된 보상을 해주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물론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한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는 사과가 반드시 있어야겠죠.
 
조용한 미국인
그레이엄 그린 지음, 안정효 옮김 / 민음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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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들은 공산주의를 원치 않아요."
"이 사람들은 먹고 살아갈 쌀만 넉넉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말했다. "그들은 총에 맞아 죽기를 바라지 않아요. 하루하루 무사히 지내기만을 원한다고요." (P210~211)

보통 한국인이 인식하고 있는 베트남 전쟁의 기간은 1964년의 한국의 베트남 후방 지원, 1965년 본격적인 군사 지원 이후이다. 그러나 전쟁 기간은 그보다 훨씬 더 길었다. 1955년 11월 1일부터 시작된 전쟁은 1975년이 되어서야 끝이 났으니 말이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호찌민이 베트남 독립을 선언했으나 프랑스가 이에 불복하여(프랑스는 베트남을 식민지로 소유하고 있었다) 벌어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군이 패배, 베트남이 분단된 것까지 베트남 전쟁의 배경이라 따진다면 그보다 더 오랜 기간 영향권에 있는 셈이다.

조용한 미국인은 본격적인 베트남 전쟁이 시작되기 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기간 동안을 배경으로 한다. 때문에 이 소설을 읽고 나면 자연스레 향후 베트남의 암울한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물론 당시 사람들은 이후의 결과를 원치도 않았을 것이고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전쟁사를 읽다 보면 늘 느끼는 것이지만 전쟁을 원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전쟁을 결단하지만 그 피해는 대중이 원치 않게 받는다. 일상은 대중에게 결코 평화롭지만은 않지만 전쟁은 살아갈 기반 자체를 모조리 파괴할 수 있고 후폭풍(언제 또 나를 공격할 지 모른다는 의심과 불신, 그로 인한 피해 망상의 발생)을 낳게 한다는 의미에서 결단코 벌어져서는 안 되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런 데도 경제적인 이득과 국가적 이익을 위해 전쟁 버튼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인간들을 생각하면 기시감과 혐오감이 생길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조용한 미국인(The Quiet American)' 이라는 제목에서 꽤나 의미심장함을 느꼈다. 미국은 20세기 전쟁사에서 많은 족적을 남긴 국가인데 '조용한 미국인이라니?' 미국인을 통칭해서 하는 말일까 궁금했다.


주요 등장인물인 파울러와 파일의 성향은 정 반대라 할 수 있겠다.
파울러는 종군 기자로 왔으나 기자정신이 없는 것 아닌가 할 정도로 건조해보이고 적당히 현실에 타협한 채 진지함이 없는 듯하며 무엇보다 심각한 일에는 끼어들고 싶어하지 않는다. "난 그런 일에 끼어들지 않는다고요." 인간적인 조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처지라면 남들이 싸우건 말건 내버려 두고, 사랑을 하건 말건 내버려 두고, 하물며 살인을 저질러도 가만 내버려 둔 채 나는 끼어들지 말아야 했다. 나는 내가 본 사실들을 그저 글로 적어 보내기만 한다. 나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견해 또한 일종의 행동이므로(P68~69). 전쟁이 일어난 국가에 와서 2년을 지내다 보니 모든 게 시큰둥해진 것일까. 하긴 전쟁이 벌어진 곳에서도 사람들은 일상을 어떻게든 버티며 살아가니까. 하지만 후엉이라는 현지 여성을 만나 살면서 본국인 영국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원하는 대로 이 곳에서 어떤 사건이든 개입하지 않고 외면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시니컬한 그의 태도와는 다르게 세상은 그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파일은 베트남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며 사회와 세계를 진단하고 분석한다. 그는 어느 한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를 위해서, 대륙을 위해서, 세계를 위해서 좋은 일을 하고 말겠다는 각오가 대단했다(P47). 파일의 대의는 지나치리만큼 거창하지만 그것이 옳은 대의라 해도 어떤 방법을 쓰는가,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과연 그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까.


당시 내가 베트남에 살아가고 있던 시민이었다면 어떠했을까 생각해보았다. 군복을 입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군인을 구분할 수 없다. 누가 누구인지 어떻게 알 수 있으며 이 사람이 아군인지 적군인지 끊임없이 경계해야 해야한다니 상상만으로도 힘겹다. 믿을 수 없는 이들이 기댈 수 있는 것은 그래서 결국 신이었던 것 같다. 그들은 무슨 종교를 믿든 이곳에서라면 안전하리라고 믿었다. "여기선 중립을 지켜야 해요. 이곳은 하느님의 영역이니까요." '하느님의 왕국에서는 길 잃고 가난한 백성이 춥고, 굶주리고 겁에 질린 채로 살아가는구나.' 신부가 말을 이었다. "위대한 왕이 이곳에 임한다면 이보다 좋은 세상을 만들 거라고 당신은 생각하겠죠." 하지만 나는 다시 이런 생각을 했다. '어디를 가든 다 마찬가지여서 - 가장 강력한 지배자의 백성인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진 않겠지.(P113~114)' 파울러의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신의 왕국에서는 전쟁의 포화도 막을 수 있나? 보이는 인간도 믿을 수 없는 마당에 보이지 않는 신을 믿는다는 것이 무신론자로서는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든다. '중립'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도 질문이 남는다. 한국전쟁에서도 이념이라는 허울 하에 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쳤고 지금까지 앙금이 남았다. 이런 상황에서 '중립'은 지나친 이상이 아닐까.
내 세상에서는 죽음이 유일한 절대 가치였다. 인간은 목숨을 잃으면 아무것도 영원히 잃지 않게 된다(P105). 이상하게 오래 기억에 남는 구절이었다. 죽음이라는 것이 두렵고 무섭지만 죽음보다 더한 고통과 불안이 엄습하는 상황에서 이렇게 생각하면 죽음이 슬프지만은 않겠구나 싶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하나 둘 잃어가는데 죽고 나면 더 이상 잃을 일이 없는 것 아닌가 하면서.


나는 스스로를 잘 알고, 내가 얼마나 속속들이 이기적인 인간인지를 분명히 안다. (내 가장 큰 소망은 마음 편한 삶이며) 다른 사람이 겪는 고통을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감촉으로 느낄 때면 나는 그저 불안하고 속이 몹시 메스꺼워져서 견디기가 어렵다. 때때로 순진한 사람들은 이런 반응을 박애주의 정신이라고 착각하지만, 내 행동은-가령 내 아픈 상처를 치료하는 일보다 소년병을 먼저 챙긴 선택은 기껏해야 훨씬 더 큰 어떤 선을 위해 작은 선 하나를 희생했던 데에 불과했으니, 오직 나 자신만을 생각해야 할 때에 조금이나마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 행한 선심의 시늉에 지나지 않았다(P254). 적나라한 인간성의 묘사라 생각한다. 대부분의 인간은 내 마음이 편하기를 원할 뿐 타인에 대한 박애와는 거리가 멀다 생각한다. 인간은 결코 인류애라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이기적인 본성을 소유하되 이런 조그마한 선심성 행동들로 스스로를 덜 이기적이라고 위안을 삼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인류는 결코 평화로워질 수 없는 것 같다.


순진함은 무모함과 결합하면 돌발적이고 위험한 결과를 낳는다. 순진한 사람이란 내가 아는 것이 전부라 생각하고 판단하여 앞뒤 가리지 않고 실행하는 사람이라 무모하고 두려운 법이 아닐까. 하지만 의문도 동시에 들었다. 인간은 불완전한 법이라 잘못된 판단을 할 수 있고 오류가 있을 텐데 그런 사람들을 모조리 제거한다면 이 세상에 남는 사람들이 과연 있을까. 제노사이드라는 끔찍한 단어가 떠올랐다.

'순진한 사람은 항상 죄가 없으니 순진함을 탓할 수야 없는 노릇이다. 그런 사람들을 저지하려면 통제하거나 제거하는 길 말고는 대책이 없다. 순진함은 일종의 광기다.'(P363)

"La liberté, qu'est-ce que la liberté ? 자유, 자유란 무엇인가요?" - P216~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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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7-20 16: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완독 추카추카 ㅎ <토지>보다 오래 걸리신 거 아닌가효 ㅋㅋㅋㅋ

거리의화가 2023-07-20 17:01   좋아요 1 | URL
유독 오래 걸린 것 같습니다. 토지는 그나마 배경을 더 잘 이해하고 있어서 좀 더 빨리 읽을 수 있는 것 같아요.

레삭매냐 2023-07-20 17: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비엣남 전쟁에 대해 어려서부터 관심
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진 몰라도
우리 세상을 만든 100대 소설이라는
문구가 눈길이 확 가네요.

1955년 작품이라고 하니, 미국이
개입하기 전 식민종주국 프랑스
와 맞짱을 뜬 시절의 이야기인가
보네요. 호기심 발동...

거리의화가 2023-07-20 17:05   좋아요 1 | URL
1952년 즈음으로 본격적인 냉전이 들어설 무렵이라 냉전 배경 소설이라고 익히 알려져 있더군요. 매냐님도 흥미롭게 읽으실 것 같습니다^^

독서괭 2023-07-20 18: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 잠자냥님 리뷰로도 봤지만 참 표지가 안 어울리는 책이 아닌지..ㅎㅎ 인간성에 대한 심도 깊은 고뇌가 담긴 작품일 것 같습니다. 화가님 완독 추카요~~^^

거리의화가 2023-07-21 10:03   좋아요 1 | URL
표지만 봐서는 책의 내용이 연상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베트남의 숲과 밀림이 배경인 것 같긴 하지만 사실 책의 주요 내용은 그렇지는 않은데 말이죠^^; 괭님 감사합니다.

새파랑 2023-07-21 07: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사 좋아하시는 화가님과 잘 맞는 소설인거 같습니다~! 저도 얼마전에 그레이엄 그린 단편집 구매했는데 이런 우연이! 역설적인 제목이군요 ^^

거리의화가 2023-07-21 10:06   좋아요 0 | URL
네. 그래서 읽은 것도 있어요. 저는 역사적 배경이 있지 않은 소설은 난해해서 읽기 어렵더라구요. 그린 단편집 새파랑님의 감상이 궁금합니다. 나중에 공유 부탁드려요!^^

희선 2023-07-22 01: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베트남 전쟁이 꽤 길었군요 전쟁이라는 건 알아도 그걸 자세하게 모르기도 하네요 제트남 남과 북이 통일을 하려던 전쟁이었다는 말이 있기는 한데... 거기에 미국이나 한국은 미국 때문에 가야 했고... 남의 나라 전쟁으로 돈을 벌기도 하는 건 참 안 좋기도 하네요 전쟁이 일어난 곳에서 사람이라는 게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가끔 기적 같은 일도 일어나지만...


희선

거리의화가 2023-07-22 19:51   좋아요 1 | URL
네. 베트남 전쟁 순수 기간만 따져도 20년 동안입니다. 한국전쟁도 그 짧은 시간 안에 피해가 컸는데 베트남은 오죽할까 싶더군요. 책에 한국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몇 차례 언급되어 놀라기도 했습니다.
 
토지 19 - 5부 4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19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먹는 데서 인심 나더라고 밥 한술, 술 한잔 나누어 먹을 것이 없게 된 세상, 늙었거나 병들었거나 의지할 남정네 없는 젊은 아낙들 아이들, 이슬같이 서글픈 명줄이나마 잇기 위해 식량배급에만 매달려 있는 일상에서 사람들은 원시세계로 돌아간 듯 일체를 생략하고 살았으며 냉수 한 그릇 떠놓고 혼례하는 것이 예사요, 장례식인들 무슨 수로 조문객 대접을 하겠는가. 징용 나가는 아들 남편을 위해 주먹밥이라도 몇 개 뭉치고 나면 식구들 죽그릇에서 푸성귀만 돌아야 했다. 극도로 이기적인가 하면 극도로 외로워하고 거리에서 직장에서 혹은 집 마당에서 기둥 뽑아 가듯 젊은이들을 잡아가지만 그것도 거의 일상화되어 울음소리 한숨 소리 위로의 말도 들려오지 않는 것 같았다. 배급을 받아 절반은 팔아서 다음 배급 탈 돈을 마련해놓고 배급의 절반으로 연명하는 기막힌 처지도 있었고 생산량이 날로 줄어만 가는 양조장의 술 찌꺼기, 두부공장의 비지조차 구하기 힘들게 되었다. 식량 배급소의 유세는 대단했으며 배급계 관리들은 살림이 윤택하여 태평성세였다. - P42

인간이란 의식주가 모름지기 중요한 법이다. 그 중에서도 먹는 행위가 가장 중요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먹을 것을 뺏긴다? 먹고 살 길이 없어진다? 막막하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은 이성을 잃을 수밖에 없다. 먹을 수 없으면 인간은 죽는다. 내 것을 뺏기지 않으려면 최소한 지키거나 남의 것을 뺏어야 하니 인심은 사나워질 수밖에 없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중하층 계급의 이야기고 상층 계급은 없는 사람들을 더 착취하고 빼앗기 위해 혈안이 되었을 것이다. 구체적인 년도는 안 나와서 알 수 없지만 전시 체제 막바지임이 느껴진다. 아마도 1944년 무렵이 아닐까 싶다. 학병제는 진작 시작되었고 조선인 징용제가 시작된 것을 보면 말이다.

상부층은 협력을 해야만 조선 민족이 살아남는다는, 자기 자신조차 믿지 않는 논리를 리코딩하여 되풀이 되풀이하여 판을 돌리고 있었다. 열혈의 조선 청소년들이여! 국가 위난을 보고만 있을 쏜가, 총칼을 들고 전선으로 나가라! 대군(大君)의 신금을 우리는 보위해야 하느니, 펜을 버리고 총을 들라! 오오 감읍(感泣)의 극(極)이로소이다. 폐하의 적자로 조선 백성을 안으신 그 크나큰 성은을 어찌 우리가 잊을 쏜가! 저 하늘의 태양이 영구불멸이듯 우리의 인군 또한 그 영광이 무궁하리, 오오 조선의 청소년들이여! 일어나라! 일어나라! 총을 들고 전선으로 나가 적을 무찌르라! - P63

이광수가 每新에 새해 첫 날 발표한 시로 조선인들이 황국신민이 되어야 한다는 취지의 내용을 일장 연설해놓았다. 한문 해석하면서도 부들부들했다. 대체 그 좋은 머리 갖다 무얼 했는가. 그러면서도 나중에 본인은 억울하다, 해방이 될 줄 몰랐다 세례라니. 1940년 이후의 신문 기사를 찾고 싶었으나 이 무렵은 이미 조선, 동아일보 폐간으로 기사 자체가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이광수를 비롯한 친일 지식인들은 연설회나 강연, 논문 등을 통해 친일 행위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장 화가 나는 것은 학병들을 동원하는 데 적극 앞장섰다는 점이다. 생각할수록 기가 찬다.

<새해>(1944년 1월 1일 『每新』)
새해가 왔네.
地球(지구)가 처음 보는 偉大(위대)한 새해
貪慾(탐욕)의 地獄(지옥) 舊世界(구세계)가 무너지고
仁義(인의)와 禮(예)의 새 世界(세계)의 터를 닦는 새해.
太平洋(태평양)의 물결에 잔잔함이 돌아오고
亞細亞(아세아)의 天地(천지)에 復興(부흥)의 萬歲(만세)소리가
우렁차게 일어날 새해.
기뻐라. 나는 이 새해를 보았어라
開闢 以來(개벽 이래)에 처음오는 偉大(위대)한 새해를
노래하는 나의 幸運(제군)이어
그러나 一億(일억)의 同胞(동포)여
이 해 새해는 또 땀을 많이 흘려야할 해.
農夫(농부)는 논밭을 갈기에 가꾸기에 일구기에 鑛夫(광부)는 땅속에서 파기에 깨뜨리기에 저내이기에
工夫(공부)는 공장에서 갈기에 두들기기에 漁夫(어부)는 바다에서 그물치기에 낚기 끌기에 男,女,老,少, 一億一心(남,녀,노,소,일억일심) 쉬일새없이 흘리는 땀이 日本의 國土를 흠씬 적실 때에- 오직 그 때에만야
榮光(영광)의 勝利(승리)는 오는 것이다.
이를 일러 一億 戰鬪配置 戰力增强(일억 전투배치 전력증강) 빛나는 새해 偉大(위대)한 새해
씩씩한 우리 아들들은 銃(총)을 메고
戰場(전장)으로 나가고
어여뿐 우리 딸들은 몸빼를 입고
工場(공장)으로 農場(농장)으로 나서네
말 모르는 마소까지도 나라 일 위해
나서는 느들이 아닌가
千年和平 道義世界(천년화평 도의세계)를 세우랍신 우리 임금님의 命(명)을 받자와 ‘예’ ‘예’하고 집에서 뛰어 나오는 무리 이 날 설날에 半島三千里(반도삼천리)도 기쁨의 日章旗(일장기) 바다.
無限(무한)한 榮光(영광)과 希望(희망)의 偉大(위대)한 새해여! ;

징용은 처음에는 모집 방식이었으나 반응이 없자(시, 도에서 인원을 배분받았을텐데 인원 충족수에 거의 미달이었다고 한다) 나중에는 강제 차출 방식이 되었다. 길에 가다가도 눈에 띄면 끌려가는 형편이었는데 이는 여성들도 마찬가지였다. 결혼하지 않은 처녀들을 원했기 때문에 여성들은 어린 나이에 강제로 시집을 가는 경우도 빈번했다.

"조선인들 징용에 비하면 일본인 징용은 천국입니다. 조선인 노동자는 사람도 짐승도 아닌 기계지요. 일본은 언젠가 벌을 받을 것입니다. 도시락 싸들고 공장으로 일하러 나가는 젊은 여자들, 그들이 불만에 차서 못 견디겠다, 못 견디겠다 하고 있을 때 전선에서는 마구 무차별로 끌고 온 조선 처녀들이 하루에도 수십 명, 심할 때는 오십 명 이상의 군인 놈들을 받아내고 있었습니다."
유키코 얼굴에 피가 모여들었다. 수치와 분노였다. - P152~153

유키코의 수치와 분노, 오가타의 분노를 넘어선 절망 어린 반응을 보면서 이것은 식민지인 조선의 상황을 떠나 인권, 인류애로도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졸지에 가해자가 되어 버린 두 사람의 씁쓸함과 참담함이 느껴지는 것 같다.

"말이야 차차 지 맘 내킬 때 하것지마는 지가 걱정하는 것은 핵교를 그만두는 일보다, 건강이 나쁘다는 것도 큰일이기는 하지만 시국이 시국인 만치로 정신대에 뽑혀가지 않을까 그기이 걱정입니다." 정신대라 했을 때 남희는 강한 반응을 나타내었다. 어쩌면 그는 정신대 내막에 관하여 소상하게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정신대라 카믄 여자 보국대 말가."
"예, 수을찮이 처녀 아이들이 뽑히 나간 모앵인데, 이 동네서도 더러 나갔을 걸요?" - P35

국민징용령은 저항을 우려한 ‘모집’형식 노무동원이었는데 직업소개령에서는 이를 구체화시켜 6개의 관영직업소개소를 설치하고 보다 대대적인 노동력 동원을 강행하였다. 이때 조선인 노동자들은 「종업자이동방지령」「국민노무수첩법」등에 구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39년부터 조선노무협회가 만들어지는 1941년 6월 이전까지의 강제동원은 명목상 ‘모집’의 형식이었다. 그러나 이 모집에는 시종일관 국가권력에 의한 엄격한 통제가 가해졌다. 즉 조선총독부, 경찰당국, 직업소개소 등의 긴밀한 연계와 계획 아래 사실상의 연행이 실시된 것이다. 대부분의 조선인 노동자들은 행선지도 모르고 연행되었으며 연행된 후에는 강제적 노무관리에 의해 육체와 정신까지 구속되어야 하는 형편이었다. 이때의 모집지역은 경기도, 충청남북도, 전라남북도, 경상남북도의 7개도였다. 1942년 3월 이후, 종래의 연행형식은 모집에서 이른바 관알선(官斡旋)으로 바뀌었다. 본부는 총독부에 있었고 지부는 각 도청에, 분회를 부·군·도에 둔 조선노무협회는 관청과 경찰, 일본 사업주가 파견한 노무지도원 등과 협력하여 강제연행을 수행하였다. 관알선은 44년 9월, 징용령이 적용되어 명실공히 강제연행이 시작되기까지 시행되었고 이 시기의 대상지역에는 ‘모집’시기의 7개도에다 강원도와 황해도가 추가되었다. 연행된 노무자들의 생활은 비참한 것이었다. 일본의 탄광노동조건을 예로 보면, 일본의 노동자들이 비교적 조건이 좋은 군수공장으로 이동하자 일제는 노동조건을 개선하지 않고 조선인 노동자의 도입, 여자 및 연소광부의 갱내 사용허가, 심야작업 금지의 완화, 광부의 취업시간 제한의 완화에 의하여 재생산을 꾀했기 때문에 그 악조건은 이입 조선인 노동자들이 그대로 감수해야 하는 것이 되었다. 또한 이 조선인 강제연행은 일본인 노동자의 임금을 억제 또는 인하시키는 정책으로 이용되었다. 거기에 덧붙여 토지관리란 명목하에서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갖가지 훈련이 가해졌다. 그것은 조선현지훈련, 취로지 도착훈련, 황민훈련, 일본어 훈련, 작업훈련, 생활훈련, 체력훈련, 취로 후의 재훈련, 불량자 특별훈련 등 9가지 종류가 있었다. 이들의 노동시간은 10~12시간이었으며 아침밥을 먹은 후 갱내에 들어가면서 점심을 먹어버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밖으로 나을 때 “감독님, 죽여주십시오 일어설 수가 없어요”하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구주(九州:큐우슈우 도요스)탄광의 한국인 합숙소 벽에 남아 있는 한글 낙서 중 “어머니 보고 싶어” “배가 고파요” “고향에 가고 싶다”는 절규는 아직도 우리의 가슴을 쥐어뜯고 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민독립운동사 중 3)강제연행 中)

報道特別挺身隊(보도특별정신대)의 結成式(결성식)이 朝鮮神宮(조선신궁)에서 거행되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일제침략 한국 36년 사 13권 매일신보 1944.2.1 기사 中)

"국민을 제물로 삼으려는 의도가 뭡니까? 바로 마지막까지 살아남으려는 자들의 본능 아니겠어요? 그 본능 때문에 눈이 어두워 이미 사리판단을 못하고 있어요. 만일 자신들이 죽겠다 한다면 국민은 살릴 수 있겠지요. 군부나 황실이나."
어쨌든 이들은 좋았던 시절에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들이다. (...) 침략과 약탈 덕분에, 저변의 그 많은 생명들이 남의 산하에 뼈를 묻어준 덕분에 누릴 수 있었던 좋은 시절, 그렇다고 본다면 이들 역시 나라의 은공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며 그 숱하게 죽어간 사람들에 대해서도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이제 죽어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들 아닌가, 미묘한 심리적 딜레마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를 성토하고 비난할 것인가. - P162~163

요시에이와 오가타의 대화는 묘한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졸지에 전쟁을 일으킨 국가의 국민이 되어 버린 두 사람은 자국을 욕하면서도 국가가 전쟁과 약탈에 힘을 쏟아 얻은 이익으로 특수를 누렸기 때문에 제 얼굴에 침뱉기라는 것을 느낀다. 내가 두 사람의 입장이라면 어찌 괴롭지 않겠는가. 나라면 이꼴 저꼴 다 보기 싫어서 술로 세월을 보내지 않았을까.

오가타는 쇼지의 반쪽이 이 나라, 가난하고 핍박받는 조선의, 그 민족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뼈저리게 느낀다. '그래 내 아들아! 너의 어머니는 바로 저 불쌍한 동족을 위하여 북만주, 네가 보고 싶어하는 황량한 벌판에서 지금 싸우고 있단다. 가해자로서 괴로워하고 있는 일본인, 나를 언제인가 아버지로 네가 받아들이듯 동족을 위하여 투쟁하는 조선의 여성도 언젠가는 네가 어머니로 받아들여야 한다. 세상은 민족과 민족의 투쟁이 없어지고 억압하는 자와 억압당하는 자의 투쟁으로 진행되어야 하며,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지상에는 식민지라는 존재가 없어질 것이다. 그리고 너희 어머니와 나의 슬픈 사랑, 비극도 없어질 것이다.' - P192~193

오가타는 아들인 쇼지와 여행을 하면서 인실을 떠올린다. 어디선가 조국을 위해 독립 운동을 하고 있을 인실을 생각하면 이것은 부군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존경심을 갖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는 인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아마 마지막 권에 나오지 않을까 싶은데 고통스럽고 힘든 세월이지만 이 때 인실과 같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조선의 민중들은 희망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정면대결 해보아야 뭐 나오는 것 있어? 피장파장인데, 갈 때가 되면 가는 거고, 올 때가 되면 오는 거고, 팔다리에서 힘을 빼버리고, 바다 위에 떠다니는 해파리같이 사는 거지 뭐. (...) 온갖 잡신들이 한낮에 한길을 활보하는 세상, 평범하게 저속하게 진담 반 농담 반 그렇게, 아암 그렇게 살아야지." - P110

유인배는 나일성(송영광)에게 떠다니는 해파리처럼 힘을 빼고 생활하라고 말한다. 이것은 영광이 양현과의 관계에서 갖는 아픔만이 아니라 전선에 있는 위문 공연을 가서 웃으며 연주를 해야 하는 고뇌까지 적용되는 문제일 것이다. 나는 더 나아가서 조선 민중들에게 건네는 메시지로도 읽혔다. 어느 편이든 극단은 살기 힘들었을 시기가 아니었나.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박쥐 같이 살아야 한다는 말은 아니지만 미친 것처럼 모든 것에 일희일비하고 목숨을 걸기에는 36년이란 세월은 참 녹록치 않다는 생각이 든다. 곱씹어봐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

토지 19권은 큰 사건들이 있으나 모두 스포가 될 만한 사건이라 거론하기에는 그렇다. 대부분은 무거운 사건이었지만 스파이가 암살되기도 하고 동네를 쥐새끼처럼 훼방 놓던 놈은 쫓겨나는 일처럼 빛이 되는 일도 있었다. 그 얼마나 다행인가 싶으면서도 그 둘도 죽어도 싸다, 맞아도 싸다 하기에는 찝찝함이 남는다. 어쨌든 그들이 해방 후까지 살아 남았다면 대부분의 친일파들이 늘어놓는 이야기와 비슷한 변명을 했을 것이라는 점은 거의 틀림이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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