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은 개념어는 누가 만들었을까 - 서양 학술용어 번역과 근대어의 탄생
야마모토 다카미쓰 지음, 지비원 옮김 / 메멘토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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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학술용어나 학문 분야에 해당하는 말의 기원을 엿본다. ‘백학연환‘을 통해 학술의 전체상을 파악하고 생각하는 방법을 확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학문을 대하는 방법 등 실용적인 지침까지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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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비평 143호 - 2023.여름
역사문제연구소 지음 / 역사비평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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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의 핵심 주제는 ‘인권’이다. 배경은 지난 3월 6일 2018년 대법원 판결에 대한 대응으로 국내 재단을 통한 배상인 ’제3자 변제‘ 방안의 발표다. 윤석열 정부의 용단(!)에 미일은 환영했지만, 국내 사정은 입장에 따라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시민사회를 비롯한 대부분의 학계는 반대 성명을 쏟아냈지만 정부의 태도는 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 이슈 뿐 아니라 한미일 동맹의 움직임은 이미 강화되고 있고 중국이나 북한, 소련과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중이다. 그 배경에는 물론 미국의 중국 견제가 가장 크지만 그것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요즘의 외교 분위기를 보면 마치 냉전의 회귀 같은 분위기다(실제로 신냉전이라는 용어가 쓰이고 있다).
지금의 한미일 관계는 1965년 한일협정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굴욕 외교라는 오명을 받으며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는 체결이었고 그 역사는 지금도 재현중이라는 게 뼈아프다.

<특집> 코너에서는 과거 인권의 역사를 다시 확인한다. 과거 연합국의 전범재판을 통해 바라본 인권과 냉전기 재일조선인들의 인권, 1960년대 한국의 노동자들의 인권, 국제엠네스티 인권운동과 한국의 초국가적 민주화 과정에서의 인권을 다루었다. 특히 나는 한국에서 1960년대 경제성장을 우선시하여 사회적 합의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국제노동기구(ILO) 가입이 실현되지 못했다는 사실, 국제적 노동 표준과 현실간의 괴리 탓으로 국제엠네스티를 통한 인권운동이 제대로 된 동력을 얻지 못한 사실이 인상깊었다.

경영관리 기술원조를 제공하고 인력개발을 강조하는 동시에, 노동자 인권 표준을 함께 설파하겠다는 ILO의 통합 개발모델 전략은 1960년대 한국의 여러 주체들이 ILO를 각기 달리 전유하고 상상할 수 있는 지반을 제공하였다. 정부는 경제성장과 근대화 전략을 성취하기 위해 경영기술과 인력양성을 위한 제정지원을 제공받았지만 국제적 노동 표준에 대해서는 자본과 마찬가지로 소극적으로 대처하거나 저지해 나갔다. 생산성본부를 비롯하여 자본 측은 기술 원조를 통해 경영관리 기법을 도입하고 기술인력 양성에 주력하였을 뿐이다.- P98

이어서 볼 수 있는 주제는 <기획> 코너로 한국 근현대 능력주의의 역사와 신화다. 인권은 예전과 비에 달라졌는가. 객관적인 지표는 그럴지 몰라도 결코 그렇게만은 볼 수 없는 사각지대들이 존재한다. 때문에 ’능력주의의 외부와 틈새‘ 칼럼이 인상적이었다. 여기서 능력주의를 설명하기 위하여 ’테크네‘와 ’메티스‘라는 개념을 들고 온다.

테크네와 메티스의 개념구분은 인류학자 제임스 스콧이 논의를 시작한 것으로, 체계에서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테크네라고 한다면 일종의 암묵지처럼 도제적으로 숙련되는 능력을 메티스라고 할 수 있다. 테크네는 보편적이고 기술적인 지식, 측정가능한 지식을 의미하고, 메티스는 맥락적이고 유동적이며 실질적인 지식을 의미한다. 테크네가 측정되고 양화될 수 있는 능력이라면, 메티스는 도제식 교육 등을 통해 숙련되어가는 맥락적 능력이다. - P273

간단하게 말하면 테크네는 양으로 측정가능한 지식을 의미하고 메티스는 상황에 따라 변하는 유동적인 지식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사회에서 비정상이라고 규정된 사람들은 능력주의의 경쟁 영역에 진입조차 하지 못한다. 능력주의의 외부에 있는 이들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삶을 이어가야 했다. 신자유주의 시대 국가와 시장 중심으로 사회가 돌아가는 상황에서 사회에서 밀려난 이들은 어디로 가야 했을까. 결국 틈새다. 그 예로 시각장애인들의 점복업 공동체를 든다. 이들은 조합의 방식으로 능력을 훈련하고 도제식 교육을 받으며, 경제적 활동을 이어간다고 한다. 시각 장애인들이 글을 단순히 읽기 어렵다고 치부할 수 있지만 그들의 구술 능력으로 얼마든지 직업 활동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사회에서 메티스에 기반한 능력을 부정하는 문제는 비단 장애인과 비정상인 집단에만 해당되지는 않는다. 한국 사회에서는 사회의 구성원들이 도제식 관계에서 다양한 숙련성을 기르는 집단적 역량과 배움의 가치를 부정하고, 시험과 공식 자격 중심적인 방식으로만 능력을 평가하고 있다. - P287

지금의 잘못된 역사의 반복은 역사를 통한 반성은 없고 정치와 경제에 모든 이슈를 밀어두는 탓이 크다고 본다. 어제 보고 들은 광복절 기념사를 보면서 씁쓸함을 지울 수 없는 이유다.


한국 대법원의 판결은 식민지배와 전쟁 수행에 직결되어 기업이 개인에게 가한반인도적 행위에 대해 그 피해자에게 배상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개인 배상은 냉전 시기에 체제 경쟁을 빌미로 봉인되었으며, 그 도장이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고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이었다. 탈냉전과 민주화의 시대가 되었다고 바로 봉인이 풀린건 아니었다. 냉전 시기에 목소리를 내기 힘들었던 피해 당사자들이 지난 30여년간 뼈와 피를 갈아넣어 소송을 진행한 결과 겨우 봉인이 뜯기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 정부와 이번 한국 정부는 다시 봉인하여 피해자들의 입을 막으려 한다. 탈냉전대 신냉전, 인권 대 지역안보의 충돌이다. - P15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나? 첫째, 식민지배와 전쟁의 피해 당사자들과 지원모임이 생을 바쳐 얻어낸 한국 대법원의 판결, 인권회복의 권리를 이제 시민이 연대로써 지켜내야 한다. 이는 피해 당사자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유산, 미래 인권과 평화의 문을 여는 열쇠이다. 권리를 공유한 시민들이 힘을 합쳐 그 실현을 요구하면 효과적일 것 같다. 물론 피해자 당사자, 그대리인과 협의하여 동의하에 적절한 연대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또 법적 권리가소멸되었다고 진실이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법적 틀에 얽매이지 않는 광범위한 연대도 모색해야 한다. 약자의 최고무기는 연대이다.
둘째, 식민지배와 전쟁의 폭력, 반인권 범죄를 한국과 아시아, 세계에 널리 알리자, 강제동원 피해 문제의 해결은 다음 세 가지가 충족되어야 한다. 하나, 가해자의 사실인정과 사죄, 둘, 사죄의 증거로서 배상, 셋, 다음 세대에 반복되지 않도록 교육. 앞의 두가지는 이번 정권 아래에서는 바라기 힘들 것 같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순 없다. 교육 그리고 선전을 강화하여 장기적으로 사죄와 배상을 끌어내야 한다. 매년 3월 1일, 또는 8월 15일에 탈식민 탈냉전 포럼을 개최하고 한국, 세계 여러 나라의 식민지배와 전쟁 피해자를 초청하여 그 경험담을 듣고 이를 전 세계에 중계하자. 아시아, 나아가 세계 청년들이 모여 전 세계로 ‘차별 철폐, 폭력 근절, 인권 존중’을 발신하자.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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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3-08-16 15: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국사회만큼 능력주의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환호하는 나라도 드문 것 같아요. 능력이 다르면 당연히 다르게 대우받아야 하고 불평등한 것이 오히려 평등하다고 생각하잖아요. 심지어 그 능력이라는 것이 결국 대부분은 시험성적(수능, 취직시험, 승진시험 등등)을 말하는 것이니 사실은 능력주의라는 것인 시험을 잘 치르는 능력이라는 단 한가지 잣대로 사람들을 평가하는 지극히 불평등한 잣대라는 것을 어떻게 인식시킬 수 있을지 참 암담하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거리의화가 2023-08-16 16:33   좋아요 1 | URL
한국사회가 능력주의에 대한 신봉에 가까운 집착을 버리지 않는 한 차별당하고 배제되는 사람은 계속 발생할 것이란 절망감이 들어요. 말씀하신대로 평가에 대한 기준이 그저 수치로, 시험으로 재단되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은 모두 제각각이고 다른데 하나의 잣대와 기준으로 그것이 어찌 평가될 수 있겠어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7 - 소돔과 고모라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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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뤼스 씨와 쥐피앵의 시선은, 적어도 일시적이긴 했지만 뭔가에 이르고자 하는 목적이 없다는 점에서 아름다웠다. 이런 아름다움의 발현을 나는 남작과 쥐피앵을 통해 처음 목격했다. 이들 두 사람의 눈에 떠오른 것은 취리히의 하늘이 아니라, 내가 아직 그 이름을 알아내지 못한 어느 동방 도시의 하늘이었다. 샤를뤼스 씨와 조끼 재봉사를 사로잡을 수 있었던 요소가 무엇이었든 그들 사이에는 협정이 체결된 듯 보였고, 그 불필요한 시선은 이미 정해진 결혼에 앞서 베풀어지는 축제처럼 의례적인 서곡에 불과했다. 보다 자연에 가까워진 두사람은 그리고 이런 다양한 비교는, 우리가 몇 분 동안 살펴보면 동일한 인간이 연이어 인간, 인간-새, 인간-곤충 등으로 보여 그 자체로도 더욱 자연스러웠다. ―마치 한 쌍의 새처럼 보였는데, 수컷이 먼저 다가가려고 하면 암컷인 쥐피앵은 이런 술책에 어떤 신호로도 응답하지 않고 놀라지도 않은채 자신의 새로운 친구를 무심히 응시했으며, 수컷이 먼저 수작을 부린 이상 자기는 깃털을 쓰다듬는 정도로 만족하는 게보다 자극적이며 유일하게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판단한 듯보였다. - P23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7, 8권은 '소돔과 고모라'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소돔과 고모라'는 구약성경 창세기에 죄악의 도시로 등장하며 레반트 지역에 실재했던 곳으로 여겨 지는 곳이다. 물론 샤를뤼스 같은 부류의 남자들은 삶의 가능성과 어떤 타협도 하지 않고 다른 부류의 남성, 즉 여성을 좋아하는 남성(또 그 결과 그를 사랑할 수 없는 남성)의 사랑을 추구하는 특별한 사람들이다. 난초꽃이 벌에게 수작을 부리듯, 쥐피앵이 샤를뤼스 씨의 주위를 맴도는 모습을 목격한 화자처럼 '소돔과 고모라'는 특히 동성애로 의인화되고 하느님은 이들을 벌하라 지시하여 두 도시가 망했다고 한다(구체적으로는 ⌜창세기⌟ 18~19장에서, 소돔과 고모라를 벌하려는 하느님께 롯이 간청하자 하느님은 의인 열 명만 있어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롯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자 하느님은 도시를 파괴하려 한다. 그러자 천사들이 롯과 가족들에게 도망치라고 말하면서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명하나, 롯의 아내는 뒤돌아보다 소금 기둥으로 변한다).
샤를뤼스와 쥐피앵의 만남을 보며 화자는 남성이 남성을 열망하고 쫓는 행위에 대해서 자기만의 생각을 정리한다. 알베르틴과 앙드레는 그 반대편에 서 있지만 같은 결에 있다. 화자는 이렇게 동성애에 대해서 특이함, 기이함으로 바라보는 쪽에 가깝다고 느껴진다.

"나라면 물론 내 딸들을 이런 곳에 오지 못하도록 할 걸세. 어쨌든 여자아이들이 예쁘기는 한가? 나는 저 아이들의 얼굴을 구별하지 못하겠네. 저런, 저걸 보게나." 하고 그는 서로를 껴안고 천천히 왈츠를 추는 앙드레와 알베르틴을 가리키면서 덧붙였다. "코안경을 잊어버리고 와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저 아이들은 틀림없이 쾌락의 절절에 있을 걸세. 여자들이 다른 무엇보다도 젖가슴을 통해 쾌락을 맛본다는 걸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네. 저 아이들의 젖가슴이 완전히 붙어 있는 걸 보게나." 실제로 앙드레와 알베르틴 사이에서 젖가슴의 접촉은 멈추지 않았다. 그때 앙드레가 알베르틴에게 한마디 했고, 그러자 알베르틴은 조금 전 내가 들었던 그 날카롭고도 뜻깊은 웃음을 터뜨렸다. 알베르틴은 그 웃음소리를 통해 은밀하고도 관능적인 전율을 앙드레에게 가리키고 확인하려 하는 듯했다. 그것은 미지의 축제에서 처음이나 마지막에 울리는 화음과도 같았다. - P345

악덕은(언어의 편의상 이렇게들 말하는), 마치 정령의 존재를 모르는 인간에게서 그 인간이 모르는 정령이 눈에 띄지 않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각자의 악덕은 우리를 동반하고 있다. 선함이나 교활함, 명성과 사교적 친분 관계는 그 자체로서는 드러나지 않으며 우리는 그것을 감춘 채 지니고 있다. 오디세우스도 처음 순간에는 아테나 여신을 알아보지 못했다. - P35~36

스완은 병색이 완연해진 모습을 보인다. 그런 스완의 모습을 보고 화자는 충격을 받았다. 아픔과 고통을 마주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이를 감내하기엔 아직 그의 연륜이 깊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화자는 발베크로 두 번째 방문했다. 그 방문은 첫 번째 방문 이후 할머니의 죽음을 떠올리게 했고 고통이 찾아든다. 공교롭게도 이 책을 읽기 얼마 전 시할머니께서 돌아가셨기 때문이었는지 나는 화자의 감정에 연민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시할머니를 뵈었을 때 모습이 스쳤지만 그 때는 이미 눈을 뜨시지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슬픔이 밀려들었다. 우리를 보실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후회가 덜할까 싶기도 했지만 인생사는 알 수가 없지 않나. 결국 이런 고통은 추억 때문이 아닐까. 할머니의 부재는 화자에게 앞으로도 순간 순간 아픔처럼 다가올 것이라는 걸 짐작케 한다. 하지만 그 순간이 언제 찾아올 지 알기 어려우며 그 감정을 제어하기도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게다가 화자는 할머니의 부재에 대한 기억에서 어릴 적 어머니에 대한 상실감의 감정이 오버랩되는 것을 느낀다. 부재는 상실이며 그리움이기도 하다. 죽고 나면 다시는 만날 수 없고 그저 기억으로 대체되어 자리할 뿐이다.

스완은 예언자의 나이에 도달했다. 물론 병의 영향 때문이긴 했지만 마치 얼음덩어리가 녹으면 모서리 전체가 떨어져 나가듯 얼굴 윤곽 전체가 사라진, 상당히 변한 모습이었다.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그가 얼마나 변했는지 나는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 P169

적어도 어머니에 대한 감정과 알베르틴에 대한 감정이라는 이 두 요소는, 그날 저녁과 그 후에도 오랫동안 서로 분리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미 이날 전화에서 들은 마지막 말로부터 나는 알베르틴의 삶이 내게서 먼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물론 물리적 거리는 아니지만) 내가 그 삶을 손안에 넣으려고 할 때마다 언제나 힘든 탐색을 해야 하며, 더 나아가 그 삶은 야전 요새처럼, 또 보다 안전을 기하기 위해 우리가 나중에 관습적으로 ‘위장된 요새‘라고 부르게 된 그런 종류의 것으로 조직되어 있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 P240

사랑하는 이가 죽으면 우리는 다른 사람이 될까 두려워 망자의 실제 모습만을 찬미하며, 당시 이미 우리의 모습이었으나 다른 것에 섞여 있던 모습을 배제하고, 오로지 망자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만을 물려받으려 한다. 이런 의미에서(우리가 보통 듣는 그렇게 모호하고 거짓 의미에서가 아니라) 죽음은 헛되지 않으며, 망자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다. 망자는 산자보다 많은 영향을 미치는데, 그 이유는 진정한 실재란 정신작용의 대상이기 때문에 정신을 통해서만 표출되며, 우리는 나날의 삶이 감추는 것을 사유에 의해 재창조할 때에야 진정으로 그것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망자에 대한 이런 그리움의 의식에서, 우리는 망자가 생전에 좋아했던 것을 맹목적으로 숭배하고 싶어 한다. - P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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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08-16 02: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7권 보셨군요 7권을 보기 전에 시할머님이 돌아가셔서 책을 볼 때는 시할머님 생각이 더 났겠습니다 자신이든 상대든 살았을 때 잘해야 할 텐데... 그렇게 생각해도 잘 안 되기도 하는 거네요


희선

2023-08-16 09: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목련 2023-08-16 16: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가 님, 연휴에 진짜 책 많이 읽으신 듯^^

거리의화가 2023-08-16 16:34   좋아요 0 | URL
책도 보고 드라마도 보고 바람도 종종 쏘이고 그랬답니다.

그레이스 2023-08-18 08: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8권까지 이르니 이 책을 내가 왜 읽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정말 잘 쓴다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정말 아이러니 하죠.
이왕 늦은김에 나중에 1권부터 몰아서 쓰렵니다. ㅎㅎ

거리의화가 2023-08-18 09:55   좋아요 1 | URL
저도 생각은 비슷한데(글 잘쓴다는 부분은 특히!) 그레이스님은 프루스트가 심어놓은 곳곳의 은유들을 찾아내실 정도로 제반 지식이 있으셔서 더 잘 읽어내시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몰아서 쓰는 리뷰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ㅎㅎㅎ 저도 어서 줄거리 안 까먹으려면 8권 읽어야겠습니다.
 
일본산고 - 역사를 부정하는 일본에게 미래는 없다, 박경리 유고 산문
박경리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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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역사일 뿐 현재와 무관하다는 인식에 대한 철저한 경계. 삶은 고뇌이지만 그럼에도 긍정적으로 바라보려 하는 자세. 문명을 우상화하고 자각 없는 개발에 대한 무자비한 비판. 토지를 읽은 후 이 책을 읽는다면 더 도움이 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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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와 역사의 정치 딕테 시리즈 3
조앤 스콧 지음, 정지영 외 옮김 / 후마니타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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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차에 대한, 역사적으로 특수한 지식으로 상대화된 젠더 개념을 통해 페미니스트들은 여성과 성차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생성하는 동시에, 역사학을 비롯한 다른 분과 학문의 정치에 비판적으로 도전하는 방법을 제공해 줄 양날의 분석 도구를 벼릴 수 있다. 그래야만 페미니즘 역사학은 단지 과거의 불완전한 기록을 바로잡거나 보충하는 시도가 아니라 역사가 어떻게 젠더에 관한 지식을 생산하는 장소로 기능하는지를 비판적으로 이해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 P37

"젠더"와 "역사", "정치"는 내가 모두 관심을 가지는 개념이자 용어이다. "역사"는 관심을 둔 지 꽤나 오래 되었고, "정치"는 현실 정치가 너무 답답하여 욕을 하면서도 그 끈을 놓을 수 없어 억지로 붙잡고 있는 느낌이고, "젠더"는 최근 들어 공부해보고 싶어진 용어라 할 수 있다. 이 세 가지가 과연 현실에서 조화될 수 있는 개념인지 솔직히 회의적이었다. 그런데 저자는 젠더 개념을 역사학을 비롯한 다른 학문 지식을 이용하여 비판적인 도구로 사용해보자 주장한다.
초반에 서문과 서론이 어렵다는 느낌이어서 끝까지 읽을 수 있을까 걱정을 했다. 그러나 인용한 사건이나 인물들이 생소해서 그렇지 친절한 설명에 이해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젠더와 "정치"는 서로 대립되는 개념도 아니고, 여성 주체의 회복과 대립하는 것도 아니다. 젠더와 정치를 넓은 의미로 정의할 경우, 공과 사의 구별은 해소될 것이고, 여성의 경험에는 그것만이 가진 개별적이고 독특한 특질이 있다는 식의 주장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과거와 현재 남성과 여성으로 고착된 이분법이 과연 명확한 것인지 이의를 제기하며, 남녀 이분법에 따라 서술된 역사 그 자체의 정치적 성격을 폭로할 수 있다. - P61

어쩌면 이 책에서 가장 핵심인 파트가 젠더 개념을 설명하는 부분일 것이다. 나는 젠더를 '생물학적인 성sex'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 속에서의 성'으로만 이해하고 있었는데 저자는 여러 페이지를 할애하여 설명해주고 있다. 성별 간 차이로 인식되는 것에 의해 사회관계들을 구성하는 요소들에 네 가지 요소가 있다는 것이 눈에 띈다. 첫 번째는 상징(서구 기독교에서 여성을 상징하는 이브 등...). 두 번째는 상징이 가진 의미에 대한 해석에 따른 규범적 개념(범위, 한계를 설정하거나 억제하는 역할. 서구 빅토리아시대의 가정 이데올로기 같은 것). 세 번째는 정치 개념과 사회제도 및 조직에 대한 고려(젠더는 친족 관계만이 아니라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경제, 정치의 영향 속에서도 구축됨). 네 번째는 정체성(개인적 면만 아니라 집단에 대한 논의까지. 시기에 따라 개개인의 문화적 경험은 달라지는 것, 집단으로도 확장할 수 있음). 난해한 개념들이라 직독직해가 안 될 수는 있지만 기존에 알고 있던 젠더라는 개념을 더 폭넓게 확장하여 정리해보는 데 의의를 두었다. 이 모든 요소가 연관되어 영향을 주지만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젠더에 대한 나의 정의는 두 가지 부분과 각각의 부분집합들로 이루어진다. 그것들은 서로 연관돼 있지만 분석적으로 구별돼야 한다. 핵심은 다음 두 명제가 뗄 수 없이 연관돼 있다는 점이다. [첫 번째 명제] 젠더란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성차에 기반한 사회관계들의 구성 요소다. [두 번째 명제] 젠더란 권력관계를 의미화하는 주된 방식이다. (...) 성별 간 차이로 인식되는 것들에 입각해 사회관계들을 구성하는 젠더는 네 개의 상호 연관된 요소들을 포함한다. 첫 번째는 복합적인(흔히 모순적인) 재현들을 떠올리게 하는 문화적으로 유효한 상징들이다. (...) 두 번째는, 규범적 개념들이다. 이는 상징들이 가진 의미에 대한 해석을 제시하는, 다시 말해 그 은유적 가능성들에 한계를 설정하거나 억제하는 역할을 한다. 새로운 역사 연구의 핵심은 불변성과 영속성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억압의 본질을 밝혀내는 데 정치 개념과 사회제도 및 조직에 대한 고려를 포함해야만 한다. 그것이 젠더 관계의 세 번째 측면이다. (...) 젠더의 네 번째 측면은 주관적 정체성이다. (...) 역사 연구가 제기해야 하는 질문은 이 네 가지 측면들 사이의 관계가 어떤 것이냐 하는 점이다. - P88~92

역사학에서 여성은 오랜동안 주변화되어 있었고 배제되어 있었다. 2부와 3부에서는 젠더와 계급의 연관성과 역사 속에서 젠더가 어떤 모습으로 묘사되었는지 확인하고 향후 여성의 이야기는 어떤 방식으로 써야 효과적인지 확인해볼 수 있다.

계급 개념의 구축에 여성적인 것이 어떻게 이용되었는지를 검토하지 않은 채 노동계급 여성에 대해 쓴다는 게 가능할까? 여성들의 문화가 여성들을 어떻게 재현하고, 여성들이 자신을 어떻게 정의하는지를 묻지 않은 채, 여성에 대한 글쓰기가 가능한가? 이런 문화적 재현과 자기 정의 사이에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고 가정할 수 있는 것일까? 어떻게 하면 그 연관성을 읽어낼 수 있을까? 계급의 의미-그 용어나 정치적 기획의 내용뿐만 아니라 그 상징적 조직화나 언어적 재현의 역사-를 질문하지 않고서 계급에 대해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 - P168
여성 노동자의 주변화는 역사적으로 생산된 효과이며 그 자체가 비판적 검토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여성 노동자가 도시화와 산업화 과정에서 주변적 존재였다고 여기는 역사가들은 19세기의 담론적 조건을 무비판적으로 영속화하면서 그 작동을 분석할 기회를 놓치고 있다. - P286

1부와 더불어 인상적이었던 파트는 4부 내용이었다. '평등과 차이'라는 제목만으로 머리가 지끈거림을 느꼈는데 내용을 읽으면 읽을수록 어려운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페미니즘 안에서도 평등에 주목하는 입장이 있는 반면 차이에 주목하는 입장이 있다. 우리 나라도 차별금지법 문제로 시끄러운 것처럼 개인의 권리가 중요하냐 집단 정체성이 더 중요하냐라는 논쟁은 극단성을 띠게 마련이다. 집단을 선택할 것이냐 개인을 선택할 것이냐는 문제는 어느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는 반드시 포기해야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얼마 전 어느 영화에서 우리가 익숙했던 백인 여성 캐릭터를 쓰지 않고 흑인 여성 캐릭터를 써서 논란이 되었다는 기사를 보고 놀랐던 적이 있다. 이렇게 따지면 특정 범주로 사람을 묶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이는 비단 인종 뿐 아니라 계급, 젠더로 영역을 확대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최근 미국에서는 백인 남성이 중요 집단으로 다시 가시화되면서 인종 차별이 발생하고 있고 한국도 남성들이 여성에 대한 역차별을 운운하며 백래시가 가시화되고 있다.

페미니즘의 역사와 정치 전략은 차이의 작동 방식에 주목하면서도 차이들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단순히 이분법적 차이를 다분법적 차이들로 대체해서는 안 된다. (...) 대신 비판적 페미니즘 관점은 항상 두 가지 행동을 포함해야 한다. 첫째는, 범주를 통해 설정된 차이들의 작동에 대한 체계적 비판, 그것이 만들어 내는 배제와 포함의 유형들-그 위계-의 폭로, 그리고 그 궁극적인 "진실성"에 대한 거부이다. 그렇지만 이런 거부가 동일성 혹은 유사성을 내포하는 평등이라는 명목 아래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이것이 두 번째 움직임인데) 차이들에 근거한 평등으로 논의되어야 한다. 여기서 차이들이라는 것은 모든 고정된 이분법적인 대립항의 의미를 혼란스럽게 하고, 방해하고, 모호하게 만드는 것들을 말한다. - P306

저자는 개인과 집단, 평등과 차이는 필연적으로 긴장 관계에 있는 상호 의존적 개념이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차별은 차별에 대한 항의로 정치화하고, 개인의 정체성은 집합적 정체성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그리고 그것에 맞서면서 명확해진다고. 결코 쉬운 길은 아니다. 

오늘날 최고의 정치적 해결책은 (집단이든, 개인이든, 평등이든 차이든) 최종적이고 총체적인 해결책을 주장하는 것의 위험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내가 설명해 온 역설들이야말로 물질적인 것임을 말하고 있다. 바로 그 물질적인 것을 통해 정치가 구성되고 역사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 P371

<행복의 약속>도 잘 읽었었는데 후마니타스 딕테 시리즈 중 한 권인 이 책도 역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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