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8 - 소돔과 고모라 2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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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무심한 나그네여,
내 어깨에 이마를 대고 꿈을 꾸지 않으려오?

나는 그녀의 머리를 붙들고, 석양빛 속에 멀리 푸르스름한 골짜기들이 나란히 사슬을 이루며 닫혀 있는 지평선까지 펼쳐지는 그 물에 잠긴 말 없는 커다란 초원을 가리켰다. - P25

나와 알베르틴은 베르뒤랭 부인의 만찬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들은 동시에르 역에 가기 전까지 빈 객차만 찾아다니며 틈만 나면 포옹을 하는 등 화기애애했다. 역에 도착하니 생루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생루는 나와 알베르틴의 관계를 인지했기 때문에 알베르틴의 반응을 무시하려고 했고 이를 느낀 알베르틴이 화가 나서 다다다다(!) 하면서 분위기가 싸해졌다. 뒤에 화해를 했지만 이전에도 알베르틴이 생루에게 보인 호의에 질투를 느꼈기에 이번에도 나는 내심 둘의 만남이 불편했던 것이다.

아무튼 둘은 베르뒤랭 부인의 살롱으로 이동했고 이번에도 사교 모임의 장면은 계속 이어진다. 기존에 게르망트 사람들이 아닌 지난 번 모임부터 등장한 베르뒤랭 부인과 셰르바토프 대공 부인, 캉브르메르 부인이 새롭게 등장했다. 주최자가 모임을 개최할 결정을 하면 모임을 위한 준비는 그때부터 시작된다, 물밑 교섭이라고 해야 할까, "우리 이런 모임합니다. 꼭 오세요. 이런 것을 할 예정입니다. 어때요?" 모임의 주최자가 어떤 훌륭한 가문과 출신이냐가 중요하겠지만 주최자도, 참석자들도 여기에 누가 참여하느냐에 따라 모임의 질이 결정된다고 판단한다. 따라서 사교계에는 주최자와 참석자들을 둘러싸고 질투를 넘어선 암투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참석한 뒤에는 어떤가. 상대방을 깎아내리고 자신은 높이면서 시간을 보낸다. 나는 이런 과정이 너무 부담스럽고 지루해서 '제발 좀 끝나라!'를 연발하고 있었다. 만약 내가 이 시기에 태어났다면 이런 곳 참여는 결단코 사절이었을 것 같다. 내가 하필 공주이거나 아니면 부유한 귀족이나 부유한 상공업자 출신 딸이어서 가야 하는 상황이었더라도 어떻게든 그 상황을 피하며 다니지 않았을까 싶다.

베르뒤랭 살롱은 음악의 전당으로 통했다(뱅퇴유 소나타도 탄생했다는데 소나타 이름은 가상이고 당연히 실제 모델은 따로 있다. 이런 장치들을 끊임없이 심어두면서 독자로 하여금 유추해보게 하는 프루스트는 역시 대단하다). 셰르바토프 대공 부인은 부를 이용해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데리고 모임에 참석했다. 참석자 가운데에는 아카데미 회원인 브리쇼, 유명 학자인 코타르, 바이올리니스트 모렐, 샤를뤼스씨도 있었다. 독자들도 유추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 베르뒤랭 댁과 캉브르메르 댁 사이는 불꽃을 튀기며 설전을 벌였고 당연한 듯 사이는 좋지 않아졌다. 사교계에서 얻어야 할 가르침은 무엇일까, 주최자와 참석자 간에 화합을 표방하며 마련한 자리였다지만 모임이 파하면 허무해지는 것처럼 닿을 수 없는 것을 쫓으려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내게는 그대만이 우리가 늘 찾는 사람으로 보였도다."
그 작은 동아리 회장은 죽을 때까지 ‘신도‘를 확보하고 싶어, 대공 부인에게 두 사람 중 나중에 죽는 사람이 먼저 죽은 사람 곁에 묻히자고 제안했다. 낯선 사람들 앞에서 - 그중에는 멸시 받는 게 가장 고통스러워서 우리 자신이 가장 많이 속이는 자, 즉 우리 자신도 포함하여 - 셰르바토프 대공 부인은 세 여인과의 우정, 즉 대공비와 베르뒤랭 부인, 그리고 뛰트뷔스 부인과의 우정이, 그녀의 의지와 무관한 대홍수가 일어나서 나머지 모두를 파괴하고 나타난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자신이 여느 다른 우정보다 좋아해서 고른 것이며, 또 고독과 검소함의 취향이 그 선택을 제한한 그런 유일한 우정처럼 보이게 하려고 노력했다. - P46~47

인간은 하룻저녁에도 보통 때는 환대를 받던 모임에서 자신이 지나치게 경박하고 유식한 체하며 세련되지 못하고 무신경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고 짐작하면서 비참한 마음으로 귀가한다. 그가 남들에게 엉뚱하거나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보이는 것은 흔히 여론이나 조직의 문제 때문이다. 흔히 그는 이런 사람들이 자신보다 가치가 없다는 걸 아주 잘 안다. 그들이 자신에 대해 하는 암묵적인 비난의 도움을 받아 그 궤변을 쉽게 분석할 수 있으며, 그래서 그들을 방문하고 편지를 쓰고 싶지만, 보다 신중한 그는 다음주에 있을 초대를 기다리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때로 이런 실총은 하룻저녁으로 끝나지 않고 여러 달 계속되기도 한다. 사교계의 불안정한 판단에서 비롯된 실총은 그 불안정성을 더욱 가중시킨다. - P176~177

오늘날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세계의 중심이라고 여기며 시간을 보낸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는 우리를 위대한 ‘전체‘ 속에 녹아들게 하는 불교의 니르바나(涅槃] 같은 훌륭한 학설을 이론적으로는 전혀 반대하지 않습니다.(그 전체가 지적인 차원에서는, 뮌헨과 옥스퍼드와 마찬가지로, 파리 근교인 아니에르나 부아콜롱브보다 훨씬 파리에 가까우니까요.) 그러나 일본군이 어쩌면 우리 비잔틴 문명 바로 가까이에 있을지도 모르는 지금, 사회주의의 반군국주의자들이 자유시의 주요 가치에 대해 심각하게 토론하는 건, 훌륭한 프랑스인으로서 또는 훌륭한 유럽인으로서 적절한 행동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브리쇼가 말했다. - P186~187

사실 몇몇 사람들은 ㅡ 내 경우에는 유년 시절부터 그러했지만 - 타인이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고정된 가치를 가진 온갖 것들, 즉 재산이며 성공이며 높은 지위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환영이다. 그들은 이런저런 환영을 만나기 위해 모든 걸 실행하고 이용하면서 나머지는 희생한다. 그러나 환영은 지체하지 않고 곧 사라진다. 그러면 우리는 비록 첫 번째 환영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이 있을지언정 다른 환영을 쫓아 나선다. - P286

알베르틴은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나는 알베르틴과 매일 밖으로 나가 산책을 했다. 나와 알베르틴의 관계는 그렇다면 이제 흔들림 없이 갈 수 있는 것인가. 그치만 어머니는 나와 알베르틴의 만남이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았던 것 같다. 물론 어느 부모고 자식의 만남을 100% 지지해준다는 것은 쉽지 않다. 내 자식을 진심으로 좋아한다고 해도 상대를 받아들이는 것은 또 하나의 영역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아마 세월이 가면 나도 그 애는 바로 그런 사람이란다라고 말할 수 있겠지. 그리고 나는 그 아이가 너를 행복하게만 해 준다면 항상 좋게 생각할 거다. 그러나 나의 행복을 결정하는 일을 내 손에 맡기는 이런 말을 통해, 어머니는 예전에 아버지가 내게 「페드르」를 보러 가는 것을, 특히 작가가 되는 것을 허락해 주었을 때 나를 사로잡았던 것과 같은 의혹의 상태로 빠져들게 했는데, 그때 나는 갑자기 막중한 책임감과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또 나날이 우리의 미래를 은폐하는 타인의 명령에 따르는 일을 멈추고 드디어 진지하게 성숙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우리 각자의 재량에 맡겨진 유일한 삶을 살기 시작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를 사로잡는 그런 우울한 감정을 느꼈다. - P133~134

어둠이 내렸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이 언제나 이렇게 옆에 있는 것임을 떠올리며, 스카프와 토크 모자와 더불어 내 몸에 밀착한 그녀를 느끼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었는지! 어쩌면 나는 알베르틴을 사랑하는 건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사랑을 그녀가 알아차리도록 내버려 둘 용기는 없었다. 설령 그 사랑이 내 마음속에 존재한다해도, 경험에 의해 검증되지 않는 한 그것은 가치 없는 진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사랑이란 내게 실현될 수 없으며 삶의 영역 밖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였다. 나의 질투로 말하자면, 내가 알베르틴과 영원히 결별할 때라야 거기서 완전히 회복될 수 있음에도, 이런 질투심이 오히려 가능한 한 그녀 곁에서 떨어져 있지 않도록 부추겼다. 나는 그녀 옆에서도 질투를 느낄 수 있었지만, 그 질투를 내 마음속에 다시 깨어나게 하는 상황이 재개되지 않도록 조처했다. - P290~291

계속되는 알베르틴을 향한 질투의 감정으로 나는 헤어질 생각을 했고 어머니께도 결별하겠다 말씀드린다. 어머니의 반응은 "잘 생각했다." 였다. 역시 그런가. 하지만 어머니의 마음처럼 쉽사리 되지는 않을 것 같다. 떠나겠다던 나의 결심은 오히려 알베르틴을 더 붙잡게 만드는(붙잡고자 했던)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알베르틴은 만나면 만날수록 더 타오르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었나보다.
질투라는 감정은 생각보다 쉽게 사그러들지 않는다고 여긴다. 이것이 없다면 사랑이 시시해질 수도 있겠지, 그러나 질투는 그만큼 피곤한 것이기도 하다. 나는 정말로 밀당을 못하는 타입이어서 연애할 때 그 피곤하고 지지고볶고 하는 것을 왜 하나 생각할 때가 있었다. 밀당은 자연스럽지 않고 부자연스러운데 왜 이것을 하는 거지? 아무튼 내게는 여전히 멀고도 험한 밀당의 길...

그녀는 덧붙였다. "당신을 떠나지 않겠어요. 이곳에 계속 있을게요."그녀는 바로 ― 그녀만이 내게 줄 수 있는 ㅡ 나를 타오르게 하는 독약에 맞선 유일한 해독제를, 게다가 독약과 같은 종류의 약을 주었는데, 즉 하나는 달콤하고, 다른 하나는 쓴 것으로 둘 다 똑같이 알베르틴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바로 그 순간 나의 병(病)인 알베르틴은 내게 고통을 유발하기를 포기했고, 그러자 이번에는 나의 약(藥)인 알베르틴이 나를 회복기에 접어든 환자처럼 온순하게 만들었다. - P472~473


"특히," 하고 베르뒤랭씨의 말을 듣지 못한 코타르가 브리쇼에게 말했다. "베르뒤랭 부인 앞에서는 ‘모튀스(motus)‘하기요." "걱정 마시오. 오! 코타르, 당신은 테오크리토스의 말처럼 현자를 상대하고있소. 게다가 베르뒤랭 씨의 말이 맞아요. 우리가 슬퍼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하고 덧붙였다. 그는 언어 형태와 그것이 자신의 마음속에 유발하는 관념을 비교할 수는 있었지만, 정교함이 부족한 탓에 베르뒤랭 씨의 말에서 가장 용기 있는 금욕주의적 표현을 발견하고 감탄했다. - P89

베르뒤랭 부인은 진짜 뛰어난 사람들은 수많은 미친 짓을 한다고 확신했다. 거기에는 뭔가 진실이 담겨 있지만 틀린 생각이다. 물론 사람의 ‘광기‘란 견디기 힘든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깨닫게 되는 불균형은, 보통 섬세한 생각을 하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은 인간의 두뇌에 섬세한 생각이 들어가면서 생기는 결과이다. 그래서 우리는 매력적인 사람들의 기이한 모습에 분노하는데, 사실 매력적인 사람치고 기이한 점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다. - P160

자동차는 아픈 사람도 그가 원하는 곳까지 데려다 주어, 그 장소를 개별적인 기호 혹은 대용품이 없는 변치 않는 아름다움의 본질로 여기는 것을 내가 이제껏 그래 왔던 것처럼 ㅡ 방해한다. 또 자동차는 아마도 내가 예전에 파리에서 발베크에 갈 때 탔던 기차처럼, 그곳을 일상적인 삶의 우연성에서 벗어난 목적지, 우리가 출발할 때면 거의 이상적으로 보이고 도착할 때도 여전히 그렇게 남아 있는 목적지로 만들어주지 못했다. - P273

우리에게는 몇몇 새들에게 있는 방향 감각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거리감과 시정감(視程感)도 부족하여 우리 생각은 전혀 하지도 않는 이해 당사자의 관심을 그들과는 반대로 매우 가깝게 상상하며, 또 그런 시간 동안 우리가 오히려 다른 이들의 걱정거리가 되고 있음은 짐작하지 못한다. 이렇게 샤를뤼스 씨는, 자신이 헤엄치는 모습을 반사하는 물이 어항 유리 너머로까지 펼쳐져 있다고 믿는 물고기처럼 착각 속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물고기는 옆 그늘에서 자신의 뛰노는 모습을 쫓으며 즐거워하는 산책자나, 예기치 못한 운명의 순간에 지금 남작에게는 훗날로 미뤄진 ―자신이 좋아하던 그곳에서 무자비하게 끄집어내어 다른 곳으로 내던질 그 전능한 양어가(養魚家)(파리에서 이 양어가는 베르뒤랭 부인일 것이다.)의 모습은 보지 못한다. - P345

지금 내가 상륙한 곳은 무시무시한 ‘미지의 땅‘이었으며, 예상치 못한 새로운 고통의 시대가 열렸다. 그렇지만 우리를 함몰시키는 이 현실의 홍수는 비록 우리의 소심하고도 미미한 가정에 비하면 엄청난 것이라 할지라도, 이미 그 가정을 통해 예상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지금 막 들은, 알베르틴과 뱅퇴유 양의 우정과도 같은, 내 정신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을 테지만 앙드레 곁에 있는 알베르틴을 보면서 어렴풋이 불안에 떨며 두려워했던 것이다. - P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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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K Life Stories: Anne Frank (Paperback)
Stephen Krensky / Dk Pub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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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의 성장 이야기를 읽다 보면 자연스레 당시 역사도 자연스레 공부하게 된다. 올컬러에 다양한 일러스트레이션이 포함되어 읽는 재미를 더해주고 특정 용어에 대해서는 따로 칸을 만들어 설명해주어 좋았다. 뒷편에는 퀴즈도 있고 색인도 있어서 원서 학습자를 위해 친절함을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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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3-08-28 09: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언젠가 읽어봐야지 하는 책 중 하나인데 읽다가 눈물 날 것 같아서
미루고 있었어요. 이 가격에 올컬러,퀴즈등 좋네요^^

거리의화가 2023-08-28 10:30   좋아요 1 | URL
앤의 결말을 알고 있어서 슬프긴 한데 다이어리에 나오지 않는 내용들이 있어서 흥미롭더라구요. 앤의 성장 과정, 언니와의 차이점 등 인물에 초점이 맞춰지니까 더 재미났던 것 같아요. 가격 대비 진짜 훌륭한 구성이에요! 8권을 만오천원에 사다니 참 잘 장만한 것 같습니다. 미미님도 기회되면 읽어보셔요^^
 
진순신 이야기 중국사 5 - 남송.금.원.명 : 초원의 질풍 진순신 이야기 중국사 5
진순신 지음, 이수경 옮김 / 살림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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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중국사 5권은 남송, 금, 원, 명이 건국된 이후 시기까지를 다룬다. 정강의 변 이후 금군이 개봉을 점령하여 북송 정권이 멸망하고 떠밀리듯 내려가 남송을 세운 강왕 조구는 고종으로 즉위한다. 금나라는 장방창을 초 황제로 삼아 금릉에 정권을 세웠지만 회하에서 더 나아가지 않고 멈추었다. 이는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여진족의 비율이 지나치게 적어져 본인들에게도 불리했기 때문이다. 금나라는 희종 시대에 약 100만명 정도 되는 규모의 여진족 중원 이주를 감행했다. 그러나 이동 후 그들은 여진족 본연의 수렵, 사금 채취 생활이 아닌 익숙하지 않은 농경 생활을 해야 했으니 한족에 비해 소출이 잘 나오지 않았고 심지어 한족에게 땅을 뺏기는 일도 벌어진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여진인들이 한의 문화에 동화되었다는 사실인 것 같다. 거란인은 한 문화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그들 본연의 문화는 살아 있었다. 그런 반면 여진인은 이주 후 상당 부분이 한 문화에 동화되어 중원 국가화되었다.

문화에 면역성이 없는 여진족은 곧바로 한문화의 화려함에 눈이 멀어 민족 고유의 야성적인 활력을 잃기 시작했다. 경제적인 것보다 오히려 이쪽이 더 큰 문제였다. 여진족의 한족화(漢族化)가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요나라의 경우는 ‘한(漢)의 분위기가 연운 16주로 한정되어 있었다. 국가의 한 부분이었으므로, 이원제(二元制, 二院制) 정치로 대응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북을 취하고, 나아가 하남으로 진출한 금나라는 ‘한‘의 것이 주류였다. 이원제의 정체(政體)를 폐지한 것은 그것으로는 이제 해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금나라는 요나라와 달리 한적(漢的)인 중원 국가로 변질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중원으로 진출할 것을 결정했을 때부터 이렇게 될 운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금나라 황제는 여진족의 수장이라는 성격보다 한적 중원 국가의 천자라는 성격을 강화하지 않을수 없었다. - P76~77

금나라 땅은 쌀이 거의 생산되지 않았고 쌀을 남송에서 받아야 하는 처지인 상황에 이주한 여진인들이 한화하면서 쌀 수요가 늘었다. 해릉왕은 이에 남정을 단행했으나 거란이 반란을 일으키고 전쟁을 위한 징병 등 증세로 백성들은 피폐해졌다. 이에 세종은 해릉왕이 남쪽으로 내려간 사이에 백성의 추대를 받아 즉위한다. 세종은 금나라의 '요순'으로 평가되는 인물이었다. 해릉왕은 항주까지 진격했으나 남송군에게 밀려 숨고르기를 했다. 그는 3일 이내 도강하지 않으면 장군들을 죽이겠다고 으름장을 놓다가 장수들에게 시해당하고 만다. 해릉왕이 시해되자 금군은 철수했고 남송군에게 화의를 신청했다.
남송은 금나라가 영유하고 있는 북쪽 땅을 회복하지 않으면 중화제국의 영예를 되찾을 수 없었다. 금나라는 남송이 지키는 회남 이남 땅을 빼앗지 못하면, 경제적으로 균형이 잡히지 않은 결함 국가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두 나라 모두 북벌과 남벌이 국가의 기본방침이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두 나라 모두 그것을 이룰 힘이 없었기 때문에 마침내 다시 강화를 맺었다. 국경선은 이전 소흥(금나라 황통) 화약과 똑같았다. 다만 해릉왕의 폭주와 거란족의 대반란 등으로 금 쪽이 조금 불리했다. 따라서 효종 건도(乾道) 원년(1165, 금나라 세종 대정 5년)에 맺은 새로운 화약은 남송에게 조금유리해졌다. 소흥 화약의 세공은 은 25만냥, 비단 25만필이었으나, 건도 화약은각각 20만 냥, 20만 필로 줄었다. 더구나 이를 ‘세공‘이라 하지 않고 ‘세폐(幣)‘라고 불렀다. 소흥 화약에서는 두 나라의 관계가 남송이 금나라에 신종(臣從)하는것이었다. 건도 화약은 이를 ‘숙질(叔)‘ 관계로 고쳤다. 옛 화약에서 군신이었던 것이, 새 화약에서 숙부와 조카 관계로 개선된 것이다. ‘공(貢)‘을 ‘폐(幣)‘로 한 것은 속국의 진공이 아니라는 의미다. - P101

남송 제일의 시인은 육유다. 그는 전국시대의 대표적인 애국 시인인 굴원과 같은 위치를 점했던 인물이었을 것 같다. 그는 북송 휘종 때 태어나 정강의 변을 겪었을 때 가족과 함께 피난을 떠났다. 아버지인 육재가 주전파였던 만큼 그도 북송은 멸망했지만 송의 국토를 다시 회복할 수 있다고 믿으며 성장했다. 하필 진사 시험에서 진회의 손자와 붙는 바람에 낙제했는데 이 때문에 주전파에 더 천착했는지도 모르겠다. 육유는 평생 1만 수의 시를 썼을 만큼 다작을 했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 시를 썼는데 마지막 작품은 <아들에게>라는 제목의 시였다.
꿈에서도 잃어 버린 땅의 회복을 잊지 않은 육유는 애국시인으로서도 칭송받는다. 중국이 외국에게 영토를 빼앗겼을 때, 사람들은 육유의 시를 애송했다. 송나라 시 중에서도 육유의 시는 특이하다. 송시의 특징은 그 냉정함에 있다. 조용히 응시하는 시 정신에 뒷받침된 탓이다. 그런데 육유의 시는 결코 냉정하지 않다. 후세의 역사가가 ‘남송의 최전성기‘라고 평가한 시대도 육유는 그것을 절반은 침몰한 시대로 받아들였다. - P116~117
죽으면 만사가 헛되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으나,
다만 구주가 하나 되는 것을 보지 못하는게 슬프구나.
황제의 군대가 북녘땅 중원을 평정하는 날,
집안 제사를 잊지 말고 내게 알려다오

칭기즈 칸의 팽창은 금나라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속도로 일어났다. 대책을 강구하려고 해도 사태는 시시각각 변했다. 어쩌나, 어쩌나 하는 동안에 이미 대책을 강구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른 것이다. 금나라는 여러 유목 부족에게 경계의 눈길을 보냈으나, 칭기즈 칸 같은 전쟁의 천재가 출현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천재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므로 금나라의 정책이 잘못 되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옳지않다. 오는 강가에서 쿠릴타이를 연 뒤, 칭기즈칸은 전체 몽골 민족의 조직을 개조했다. 목가적인 동족 공동체였던 것을 철저하게 군사적 집단으로 다시 편재한 것이다. 10호, 100호, 1천 호, 1만 호라는 조직을 만들었는데, 그것은 행정단위이면서 동시에 전투단위도 되었다. 여진족의 맹안이나 모극과 비슷하다. 몽골족은 자주 이동하기 때문에 이 조직은 특히 효과적으로 기능했을 터이다. 십호장(戶長), 백호장, 천호장, 만호장이 각각 임명되었다. 만호장에는 칭기즈 칸이 신임하는 보르추, 무카리, 나야아가 임명되었다. - P137~138
칭기즈칸은 금나라를 치기 전에 금을 섬기는 서하를 먼저 공격함으로써 금에 경고장을 보냈다. 서하는 금나라에 구원을 요청했지만 금나라는 움직이지 않았고 서하는 남송에 손을 뻗는다. 칭기즈칸은 친정하여 금군과 싸우다 부상을 입어서 후퇴해야 했지만 이 무렵 금나라 내부에서는 쿠데타가 일어나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육유가 85세의 나이로 사망했을 때 원호문은 19세 정도의 나이였다. 육유는 북방의 잃어버린 땅을 회복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며 사망했으나 그가 주로 활동하던 시기는 건도화약으로 금과 남송 간의 관계가 평화로웠다. 하지만 원호문은 칭기즈칸이 금을 침공하던 무렵 22살이었고, 금이 몽골에 멸망했을 때 45세의 나이였다. 그가 68세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는 전쟁으로 나라는 피폐했고 끝내 금나라가 원에 멸망할 때까지 충성을 버리지 않았다. 난세가 시인을 만든 셈이다.
아이러니하지만 그의 시 중 내가 처음 알게 된 것은 신조협려에 등장한 '정이란 무엇이길래'이다. 제목을 봐도 느껴지지만 기러기 한 쌍을 보고 지은 시인데 정이란 쉽게 끊을 수 없는 것임을 나타낸 것이다.
세상 사람에게 묻노니,
정이란 무엇이길래 이토록
생과 사를 같이하게 한단 말인가.
하늘과 땅을 가로지르는 저 새야.
지친 날개 위로
추위와 더위를 몇 번이나 겪었느냐?
만남의 기쁨과 이별의 고통 속에
헤매는 어리석은 여인이 있었네.
임이여 대답해주소서,
아득한 만리 구름이 겹치고
온 산에 저녁 눈 내릴 때
외로운 그림자 누굴 찾아 날아갈꼬. - < 안구사雁丘詞 >

원호문은 120년을 이어온 금조에서 감히 비교할 자가 없는 시인일 뿐만 아니라 같은 시대의 남송을 포함해서 12세기와 13세기 중국 최고의시인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일 것이다. 태평성대였어도 그는 뛰어난 시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중국문학사에서 이렇게까지 위대한 존재로 만든 것은 역시 몽골의 침공이라는 난세를 시로 읊었기 때문이다. 주제가 너무 엄청나면 시문이 받아들이기어렵다. 하지만 원호문의 시문은 처참한 시대의 모습을 훌륭하게 담아내고 있다. 청나라의 조익이 원호문을 노래한 시 가운데 ‘국가의 불행은 시인의 행복‘이라는 구절이 있다. 조심하지 않은 표현 같지만, 이 구절은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힘이 있다. - P149
몽골의 공격으로 마침내 개봉의 성문이 열렸다. 금나라 주요 관료들은 포로가 되었는데 원호문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가족들과 함께 요성이라는 곳에 유폐되었다. 유폐된 곳에서 < 계사 5월 3일 북으로 건너가다 >라는 제목으로 그는 시를 지었다.
길가에 쓰러져 엎어진 포로가 즐비하고,
지나가는 전차는 물이 흘러가는 듯하다.
여인은 곡하며 회골의 말을 뒤따르고,
뉘를 위해 걸음마다 뒤돌아보는가.

1234년 몽골과 남송 연합군의 공격에 금나라는 마침내 멸망했다. 몽골 제국은 유목민족계 정권이어서 막내 아들이 상속하는 관습을 따랐다. 단 영지상속과 몽골의 국주 계승은 별개의 문제였다. 칭기즈 칸 제국의 약점은 쿠릴타이의 구성과 기능이 명확하지 않아 후계자 선출에 불안 요소가 많다는 점이다. 이 정권은 세계 제국이 된 뒤에도 여전히 부족공동체 분위기에 머물러 있었다. 오는 강 유역에서 유목하던 시기에는 그것이 소박하고 평화롭게 보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중국과 이슬람, 유럽의 문명지역까지 뻗어나간 나라가 된 이상, 이제는 그것이 통하지 않는다. - P189 칭기즈칸 사후 대쿠릴타이에서 카간으로 추대된 것은 셋째 아들 우구데이였으나 상속법에 따르면 톨루이가 계승을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다행히 톨루이는 우구데이의 즉위를 인정하여 제국의 분열을 막을 수 있었다. 우구데이는 태종으로 즉위한 기간 동안 금나라를 토멸하고 카라코룸에 궁전을 지었다. 그는 후계자로 손자인 시라문과 톨루이의 장남 뭉케를 지목했으나 대쿠릴타이에서 황후인 투르게네가 그의 유지를 어기고 장남인 구육을 즉위시켰다. 구육은 정종으로 즉위했지만 주치 집안의 가장인 바투가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두 세력 간 내전이 벌어질 수도 있었으나 정종의 급작스런 사망(3년 만에)으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바투는 쿠릴타이를 열어 톨루이 집안의 뭉케를 칸으로 추대했다. 헌종 뭉케는 남송 토벌군을 일으킨 1259년 사망했는데 계승을 둘러싸고 또 툴루이 집안의 네 아들 간에 내분이 일어난다. 잘 알고 있듯 최종 승자는 쿠빌라이다. 이 때 고려의 원종이 적지 않은 힘을 실어주었다는 것은 우리도 잘 아는 사실이다.

몽골은 남송과 함께 금나라를 멸망시킨 후 하남 땅을 남송에게 반환하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았다. 남송에는 주전론이 힘을 얻으면서 군대를 출병시켰다. 몽골군은 송군의 출병 소식을 듣고 남하했다. 남송군이 출병하지 않았다면 몽골군은 남하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 후 수년에 걸쳐 남송과 몽골의 싸움이 계속되면서 백성들의 고통은 날로 가중되었다. 이미 원(元)이라 칭한 몽골이 남송을 공격하는데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양양(襄陽)이었다. 남송이 양양을 확보하고 있는 한, 원은 ‘함부로 군대를 진격시킬 수 없었다. 뭉케의 명령으로 쿠빌라이가 남하했을 때도 양양을 공략하지 않고 악주까지 진출했기 때문에 몽골군은 살얼음을 밟는 느낌이었다. 쿠빌라이는 이번에는 양양을 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공격하기로 했다. 대원이라는 국호를 세운 지 2년 뒤인 지원 10년(1273) 정월, 원군은 마침내 번성(樊城)을 함락했다. 이로써 양양의 운명은 다했다고 할 수 있다. 양양성은 고립되어 쉴새 없이 긴급사태을 알렸으나, 재상 가사도는 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수장 여문환(呂文煥)은 성내를 돌 때마다 남쪽을 향해 통곡했다고 한다. 더는 손 쓸 방법이 없었다. 마침내 쿠빌라이의 항복 권고문이 도착했다. - P252

이후에는 몽골이 중원에서 실권적으로 우위에 서게 되었다. 고려는 이 때 몽골과의 외교적 변화를 꾀했다. 쿠빌라이 지원 원년(1264)에 아릭 부케 평정을 축하하는 행사가 열렸는데, 고려의 원종은 권신 김준의 반대를 물리치고 직접 그 행사에 참가했다. 고려는 건국 이래 346년, 24대왕으로 이어지는 동안 외국의 책봉을 받은 일은 있었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왕이 직접 외국에 입조한 일은 없었다. 이때 원종의 입조가 처음이었다. 몽골 제국도 성격이 바뀌었지만 고려도 바뀌었다. 그때까지 고려의 국왕은 권신의 강한 반대를 거스를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원종은 김준의 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대도(大都, 북경)로 갔고, 그리고 무사히 돌아왔다. 몽골의 힘을 등에 업고 있으면 권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몽골의 힘에 의지하면서 고려의 속국화는 진행속도가 빨라졌다. - P300 원은 남송을 완전히 제압하고 싶어했다. 일본은 여전히 남송과 통상을 계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원나라에 괴씸죄가 부과된 것은 아닐까. 어쨌든 원은 일본에 원정을 감행한다. 고려는 조정이 강화도로 천도한 상황에서도 의병, 삼별초 등의 항쟁이 이어지면서 원을 계속 괴롭혔다. 하지만 원은 삼별초 항쟁을 물리치고 고려에 전선 건조와 병사, 어부 등의 동원 명령을 내린다. 그럼에도 원은 일본 원정에 두 차례나 실패했는데 이는 일본의 운(?)도 있었겠지만 급박스런 선박 건조에 문제가 있었을 것이란 해석이 많다. 두 번에 걸친 원정 실패에도 쿠빌라이는 일본 원정을 포기하지 않았다. 두 번 모두 전쟁에 진 것이 아니라 태풍으로 함대가 궤멸했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전선을 건조하고 병대를 파견한 고려와 남송이 떠안았을 뿐 원나라는 그다지 큰 타격을 입지 않았다. 일본 원정으로 고려와 남송이 피폐해지는 것을 어쩌면 원나라는 바랐는지도 모른다. 피폐해질수록 반항할 기력도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했기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안일한 생각이었다. 강남 지방에서 반란이 잇따라 일어났다. 제2차 원정에 실패한 이듬해 쿠빌라이는 다시 고려에 전함 건조를 명령하고 일단 폐지한 정동행성을 부활했다. 충렬왕은 좌승상으로 임명되었다. 그러한 때에 강남에서 반란이 잇따라 일어나 일본 원정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쿠빌라이는 여러 번 일본 원정을 계획했으나, 그때마다 사고가 일어나 실행으로 옮기지 못했다. - P324

원나라는 북경을 국도로 삼았기 때문에 운하 외에 바닷길을 이용할 수 있었다. 겨울철 결빙기를 제외하면, 천진의 백하(白河) 하구가 북경의 주요 항구가 되었다. 해상 수송의 이점은 운하 수송보다 큰 배를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해안의 염전 단지에서는 편리하다는 이유로 해상 수송을 많이 이용했다. - P397 강남 땅을 손에 넣은 원 왕조의 사치는 심해졌고 이제는 강남이라는 곳이 원에 없어서는 안될 정도가 되어 버린다. 해상 수송을 이용하게 되면서 해적이 출몰하게 되는데 해적 소탕을 명했음에도 별 효과는 없었던 모양이다. 이런 배경에서 방국진의 난을 시작으로 온갖 군벌들이 등장하였다. 장사성도, 주원장도 이런 세력들 중 하나였다. 장사성이 고우에서 남하한 것은 기아(餓) 지대에서 탈출하기 위해서지 특별히 장래를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에 비해 주원장의 남하는 이선장의 의견에 따른 것으로, 이것은 확실히 장래를 염두에 둔 포석이었다. 더구나 이 남하군은 매우 숙연했다. 사람을 죽이지 말라, 주민을 학대하지 말라는 명령은 말단까지 철저했다. 이것은 홍건군의 전통이기도 했지만 이선장의 헌책이기도 했다. - P464
여러 가지로 명나라의 주원장은 한나라의 유방과 비슷해서인지 비교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공격하면서도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하는 등의 태도와 유방 곁에 장량이라는 참모가 있었듯 주원장 곁에는 이선장이 있었던 것이다. 여러 군벌들 중 최종 승자는 주원장이었고 명나라는 이렇게 건국되었다. 

책임자가 되면 주변에 있는 것을 모두 쳐내야 직성이 풀리는 걸까. 홍무제는 여러 번의 옥사를 일으키며 주변 세력을 남김 없이 섬멸한다. 호유용과 남옥의 옥(獄)에 관해서는 다음에 인용하는 조익의 의견이 정확할 것이다.
명조(明祖, 홍무제)에 이르러 옥사를 일으킨 것이 빨랐다 해도 천하가 평정되었을 때는 그의 나이 이미 60세였다. 의문태자(懿文太子, 주표)는 온화하고 인자했다. 의문이 죽고 손자는 더욱 나약했다. 마침내 앞날을 염려치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또다시 대옥을 일으켜 일망타진했다. 이것으로 그의 심사를 추측할 수 있다. 호유용이 죽은 것은 홍무 13년으로, 함께 주살된 자는 진녕, 도절 등 몇 명에 지나지않는다. 호당(胡黨)의 옥에 이른 것은 23년의 일이다. 호유용의 죽음에서 10여 년이 지났는데, 어찌 죽은 역적의 공모자라 하여 10여 년이지난 지금 새삼스레 문죄할 수 있으랴. 이는 호유용을 빙자하여 죄목을 만들어 여러 사람을 견제하고 이들을 올가미에 얽으려는 계책일뿐이다. 호당을 이미 주살하고도 여전히 미진하여 26년에 다시 남당의 옥을 일으켰다. 이로써 모든 공신과 숙장이 사라졌다. - P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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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 - 7개의 도시
발레리 한센 지음, 류형식 옮김 / 소와당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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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의 역사를 조금씩 접하고 있다. 최근에는 사기나 한서를 통해 중국 한나라 시기와 교류한 다양한 나라들(대표적으로 흉노)의 이름을 눈으로 익혔다. 수-당과 경쟁했던 돌궐의 역사도 보았다. 몽골의 역사는 안다고 볼 수 없지만 그래도 청을 제외하면 비교적 익숙한 것 같다.

이 책은 우리에게 초원길로 잘 알려진 실크로드의 범위에 있던 7개의 대표 도시의 역사를 다룬다. 내부에서 바라본 역사이기 때문에 미시사를 다룬다고 할 수 있겠다. 미시사는 이야기들 자체가 흥밋거리가 되는 경우이므로 전체가 보이지 않는다고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길을 걸으며 산책하듯 도시를 누빈다는 생각으로 저자인 가이드의 시선에 따라 도시를 탐방하면 되겠다.

실크로드의 "로드(길)"는 "길"이 아니라 사실은 이동의 범위였고, 거대한 사막과 산맥을 가로지르는 이정표 없는 발자취들이었다. "실크(비단)"는 "로드(길)" 못지 않은 오해를 담고 있다. 비단은 실크로드의 여러 무역 상품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P21). "실크로드"라는 명칭은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다. 1877년 리히트호펜(Ferdinand von Richthofen) 남작이 "실크로드"라는 말을 만들어 냈다. 그는 1868년부터 1872년까지 중국에서 석탄 매장지와 항구를 조사했던 유명한 지리학자였고, 5권짜리 지도책을 썼다. 거기서 처음으로 실크로드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P22).

실크로드의 "실크"와 "로드", "실크로드"라는 명칭에 대한 정의와 기원은 다음과 같다. 리히트호펜이 만들어낸 실크로드라는 용어는 점점 퍼져나가다 중앙아시아 탐험 관련 책이 번역되어 출간된(The Silk Road, 1936) 이후 다양한 경로를 통해 확산되면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생각보다 실크로드라는 용어를 사용한지는 얼마 되지 않은 셈이다.



실크로드의 역사책이 유물을 기반으로 설명한 것이 많은데 이 책은 고문서를 바탕으로 했다. 7개의 도시는 니아/누란, 쿠차, 투르판, 사마르칸트, 장안, 돈황, 호탄이며 역사의 범위는 2~3세기에서 11세기 초까지 다룬다. 11세기 초로 범위가 설정된 이유는 발굴된 고문서들의 하한 연대가 그렇기 때문이다. 2~3세기 중국과 서양의 문화가 처음 만나기 시작하여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각기 다른 실크로드 유적들을 만날 수 있었다. 니아, 쿠차, 투르판, 돈황, 호탄은 중국의 북서부에 위치하며 사마르칸트는 우즈베키스탄에, 장안은 옛 당나라의 수도로 중국 중부 섬서성에 있던 곳이다. 무역은 제한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서 간의 광범위한 문화 교류가 이루어졌다. 다양한 그룹의 사람들이 서로 다른 길로 중앙아시아를 거쳐갔다. 이 때 종이를 만드는 기술이나 비단을 직조하는 기술이 중국에서 서쪽으로 전해지고, 유리를 만드는 기술이 중국으로 전해졌다.

니아와 누란은 간다라 지역에서 온 이주민들이 정착한 곳이다. 그들은 카로슈티 문자와 목판에 글을 새기는 기술을 현지인들에게 전했고 불교를 전파했다.
오아시스인 쿠차의 주민들은 독실한 불교 신자들이었는데 쿠마라지바(344-413)는 산스크리트어 불교 경전을 중국어로 최초로 번역하여 중국에 불교가 널리 확산되는데 도움을 주었다. 쿠마라지바가 얼마나 유명한지 대표적인 유적지인 키질 석굴에는 그를 기리는 거대한 기념상을 만날 수가 있다.
투르판은 중국 지역과 이란 지역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의 역할을 했던 도시다. 오늘날에도 화려한 국제도시의 느낌이 드는 곳이라고 한다. 투르판과 관련해서는 현장 법사의 서역 원정기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제자 혜립에 의해 그의 여정기가 마치 무용담처럼 전해지는데 사실로 다 믿기는 어려우나 이런 목숨을 건 여정들이 많았겠구나 생각해보게 된다. 투르판 주민들은 5~6세기 다른 중앙아시아 사람들이 동전을 사용하는 동안 은화를 사용했는데 이를 통해 당시 서쪽의 이란과 많은 교역이 이루어졌음을 짐작하게 한다. 투르판은 매우 건조하여 상대적으로 유적의 보존 상태가 매우 좋다고 한다(다른 도시들에 비해서).
사마르칸트는 실크로드의 대표적인 상인인 소그드인이 주로 활동하던 도시였다. 그들은 이란계 민족으로 실크로드 무역에서는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중국 문헌상으로는 그들의 특성이 야비하고 남을 잘 속이는 식으로 묘사되어 있는데(아이가 성장해서 입으로는 달콤한 말을 하고 손에 들어온 돈은 꿀에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도록 한다는 의미이다. ... 그들은 무역에 능하여 이익을 좋아한다. 이익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간다.) 역시 이는 상행위를 그만큼 잘했다는 방증일 것 같다. 소그드인은 소그드어라는 중세이란어를 사용했고 국제적인 교류가 있었던 당나라 시기에는 그쪽으로 많이 이주하기도 했다.
장안은 10개 왕조의 수도였다. 그 중 7개의 왕조는 통치 기간이 짧아 금방 왔다 사라졌지만 3개의 왕조는 통일된 왕조인 전한, 수, 당이었다. 장안은 정치의 중심일 뿐 아니라 국제 무역의 중심지였고 서역으로 떠나기 위한 출발지이기도 했다. 도시는 109개의 방으로 나뉘어져 높은 담장이 둘러쳐져 있었으며 엄격한 시간에 따라 통행이 이루어졌다. 시장 중 동시(東市)는 국산품, 서시(西市)는 수입품에 특화되어 있었다. 이민자들이 많이 들어오면서 자신의 종교를 그대로 가지고 들어와 당시 장안에는 조로아스터교 사원이 6곳, 기독교(네스토리우스파) 교회 1곳이 있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현재 남아 있는 당나라 건축물이라고는 두 개의 전탑인 대안탑과 소안탑 뿐이라는 게 아쉬울 뿐이다.
돈황은 기원후 천년 동안 중요 군사 주둔지이자 불교 순례지, 무역 거점도시의 역할을 했다. 저자 왈 실크로드 유적지 한 곳만 가야 한다면 무조건 돈황으로 가야 한다고 한다. 바위 절벽을 파내어 만든 석굴들이 500여 동이 있고 거기에는 벽화들이 그려져 있다. 또 도서관인 장경동 석굴도 만날 수 있다. 석굴 자료는 8세기 중반 이전은 중원에서 온 텍스트이고 이후는 돈황 인근에서 생산된 텍스트인데 이 때 학생들이 필사한 자료들이 많이 기록되었다는 게 흥미롭다. 짐작하겠지만 돈황은 현존하는 실크로드 자료들이 가장 많이 배출된 곳이다. 하지만 이 많은 유적과 유물을 발견한 사람의 행위는 협잡꾼이자 도굴꾼과 다를 바가 없어 마음이 찜찜했다. 아쉽게도 돈황의 석굴이 많은 관광객들의 유입으로 최근 많이 훼손되었다고 한다. 이제는 관광객도 적당히 받는다고 하지만 이제는 거기에 기후 변화가 더해져 그 훼손도가 가속화하지 않을까 우려가 된다.
호탄은 1006년 이전까지는 불교 왕국이었다가 이슬람이 정복하면서 완전히 성격이 바뀐 도시이다. 호탄 주민들은 이후 이슬람으로 개종하였으며 자국어인 호탄어를 사용하지 않고 위구르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순례객들이 많아서 방문객들은 이곳을 "성지"라고 부른다.

실크로드는 인류 역사상 교통량이 가장 적었던 길이다. 일정 시기에 운송된 물량, 교통 빈도, 혹은 여행객의 수를 의미 있는 기준으로 본다면 연구할 가치가 별로 없는 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실크로드는 역사를 바꾸었다. 대체로 실크로드의 일부 혹은 전체를 힘겹게 건넸던 사람들이 외래종의 씨앗을 심듯이 자신의 문화의 씨앗을 먼 지역으로 옮겨와 심었기 때문이다. ... 여러 갈래 길의 네트워크는 지구상 가장 유명한 문화의 혈맥이었다. 이를 통해 동양과 서양의 종교, 예술, 언어, 신기술이 교환되었기 때문이다(P403). 지금은 사라져버린, 그러나 한때 다양한 문화를 포용했던 한 세계의 유물을 보고자 하는 관광객들이 지금도 이곳을 찾고 있다(P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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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의 제국 산책자 에쎄 시리즈 1
롤랑 바르트 지음, 김주환.한은경 옮김, 정화열 해설 / 산책자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텍스트는 이미지를 '주해'하지 않으며, 이미지가 텍스트를 '설명'하지도 않는다. 나에게는 각각이 일종의 시각적 불확실성의 시초이며, 선에서 깨달음이라 일컫는 의미의 상실과도 비슷하다. 텍스트와 이미지는 서로 엇갈리면서 몸, 얼굴, 글쓰기라는 기표를 확실하게 순환시키고 교환하며 그 안에서 기호의 퇴각을 읽으려 한다.


얼마 전 오디오 매거진을 듣다가 알게 된 책이다. 소개하기를 얇은 에세이로 여행지에서 읽기에 적합하다 하는게 아닌가. 반신반의하며 도서관에 상호대차를 신청해놓고는 잊고 있다가 도착했다는 문자 메시지를 보고 '앗!' 했다. 요즘은 이렇게 도서관에 책을 신청해놓고도 잊어버리기 일쑤다. 이제는 도서관에 신청할 때도 무엇 때문에 신청했는지 책 이름과 함께 기록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어쨌든 저자는 프랑스 구조주의 철학자로 '현대 비평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이라지만 나는 철학자들과는 거리가 먼데다 심지어 현대 철학자는 더욱 잘 모르기 때문에 저자에 대한 정보는 없는 상태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 책은 바르트가 일본 문화를 경험하고 엮은 글을 모은 에세이이다. 모를 때에는 무턱대로 뛰어드는 수밖에 없겠지, 에세이는 오히려 아무 것도 모를 때 더 신선할지도 몰라 주문을 외우면서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바르트의 글을 읽고 해석하기에는 역시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글 속에서 드러나는 그의 글쓰기에 대한 생각들이 드러나는 문장들이 있었는데 그런 부분이 좋았다. 예를 들면 아래와 같은 문장들.

글을 쓴다는 것은 결국 그 나름대로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지식이나 주체를 동요하게 만드는 강력한 지진과도 같다. 그것은 말의 텅 빈 상태를 만들어낸다. 말의 텅 빈 상태에서 나의 글쓰기가 이루어진다. - P13~14

나는 글을 쓰면서 깨달음을 얻을 때가 많다. 책을 읽는 행위와는 별개로 쓰면서 나의 생각을 정리하고 정리하는 중 불현듯 수면 아래 잠자던 생각이 튀어오르기도 한다. 깨달음이 주체를 움직이는 강력한 지진 같다는 말에 동감했다. 그리고 그럴 때 말은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사용하는 언어의 한계도 인식하지 못한 채 사회에 대해 논의한다고 떠드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것은 늑대의 목구멍 속에 편안하게 들어앉아 늑대를 죽이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상상력에 기반을 두어 탈선적인 문법을 연습한다면 적어도 우리말의 이데올로기 자체를 의심할 수 있는 유리한 자리에 서게 될 것이다. - P18

언어에 대해서 생각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현대어는 서양에서 가져온 근대의 번역어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근대어의 기원에 대한 책을 최근 읽는 중이어서 이 문장이 더욱 깊게 다가왔다. 내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의 대부분이 외부에서 가져온 것들인데 과연 제대로 인식하고 사용하고 있는 것인가 곱씹게 되었다.

일본 문화에 대해서 여러 편의 글을 통해서 드러내고 있는데 뒤로 갈수록 알 듯 말 듯 모호한 표현들이 '적당히 넘어가자.'라는 생각만 하게 되었다. 어쨌든 변명같지만.

그 중 기억나는 키워드를 꼽아본다면 텅 빈 중심, (반듯한) 공간, 공손한 인사(절), 하이쿠, 가부키다.

하이쿠, 가부키는 일본 문화 예술에 지금도 핵심적 역할을 하지 않나 생각한다. 하이쿠는 과도한 형식주의에서 벗어나 가벼우면서도 단순하고 평범해져도 되기에 오히려 대중들에게 계속 호응을 받으며 양산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니까 '의미로부터의 면제'다. 무언가 있어야 한다는 것에서의 강박으로부터의 탈피다.
가부키는 일본 여행을 갔을 때 한 번쯤 경험해보고 싶은 유혹을 느낄 때가 있었다. 결론적으로 경험해보지는 못했지만 일본극예술 하면 가부키를 빼놓을 수가 없을 것 같다. 가부키는 오늘날에도 흰 얼굴로 대표되는 이미지가 존재한다. 이미지로 덧씌어져 내면이 드러나보이지 않는다. (반듯한) 공간이란 대표적으로 일본 정원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그야말로 정갈해서 뭐 하나 흐트러짐이 없는 느낌의 정원이다. 과거 일본식 모래 정원을 보았을 때 관리하시는 분이 주변에 있어 모래를 항상 모양대로 관리하는 것을 보았다. 한국의 정원과 여러 모로 다른 형식이라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있다.

내가 지금 말하는 도시에는 중요한 역설이 있다. 이 도시는 중심부가 있지만 그 중심부는 텅 비어 있다. 이 도시 전체는 금지된 중립의 공간을 빙 둘러싸고 있다. 이곳은 나뭇잎 뒤에 숨겨져 해자의 보호를 받고 있으며, 아무도 본 적이 없는 천황이 사는 곳이다. 매일 총알처럼 빠르게 정력적으로 달리는 택시들도 이 원형의 공간은 피해가며, 보이지 않는 것을 가시화한 형태인 낮은 용마루 장식은 신성한 '무'를 숨기고 있다. - P46~47

'텅빈 중심'이란 말 그대로 중심은 중립을 지향하는 듯(?)처럼 보이는 천황이 사는 곳이 있고 그 주변을 둘러싼 공간은 다른 공기와 구조로 돌아가는 도쿄를 말하는 것이다. 천황은 일본의 근대 이후 상징성을 지닌 존재가 되어 중요한 정치적, 군사적 순간마다 '나는 관련 없어요.' 하지만 과연 그 어떤 의제들에서도 그가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일본 사회에서 천황제라는 시스템이란 무엇인가 나는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 인사는 진정 어느 누구에게도 인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굴욕이나 허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두 개인의 제국 간의 사려 깊고 겸손하며 신중한 의사소통의 기호가 아니다. 중단되거나 얽매이지도 깊이가 있지도 않은 형태들의 그물망의 특질일 뿐이다. 누가 누구에게 인사하는가?라는 질문만이 인사를 정당화해서 인사를 절로, 절로 만든다. 이로써 의미보다 의미의 그림이 영광스러워진다. 또한 이 질문은 우리에게 과장된 것으로 보이는 자세에 신중성을 부여하는데, 이 자세는 모든 기의가 놀랄 정도로 텅 비어있는 몸짓이다. - P89

지금까지 만나본 일본인들은 모두 인사를 지나칠 정도로 한다는 느낌이었다. 인사를 잘하는 게 무슨 문제가 되냐 친절하면 좋은 것 아니냐 할 수 있는데 나로서는 좀 부담스러운 느낌이었던 것이다. 과도한 몸짓 같아서 이것이 그저 형식이 아닌가 할 때가 많았다. 그들 중 대부분은 몸에 밴 습관처럼 나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바르트의 말에 의하면 인사를 함으로써 오히려 그들은 자유로워지는 것인가보다 생각하니 그제야 수긍이 갔다.


나는 바르트가 일본을 경험하면서 적은 글들 중 아래의 글이 결국 바르트가 말하고 싶어하는 메시지와 가장 근접하지 않을까 싶었고 나도 어느 정도 공감했다.

이 도시를 횡단하는 것은 일본의 제일 꼭대기에서부터 저 밑바닥까지를 여행하는 것이며 또한 일본의 얼굴에 대한 글쓰기를 그 지형학에 포개놓는 일이기도 하다. 각 구역의 이름은 저마다의 소리를 지니고 있으며 원시부족만큼이나 개성적인 인구를 가진 마을과 밀림지방 같은 대도시를 연상시킨다. 여기서 기표로서의 이름은 한낱 기념품이라기보다 생생한 회상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곳의 소리는 역사의 소리다. - P5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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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3-08-20 21: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글을 쓰면서 깨달음을 얻을 때가 많다는데 동의해요. 헝크러져 생각이 정리되지 않다가도 글을 쓰다보면 그 생각이 정리가 되어지는 신기한 경험요. ㅎㅎ 롤랑 바르트가 한 말의 의미는 잘 모르겠지만 화가님 말은 절대공감이 됩니다. ^^

거리의화가 2023-08-21 09:19   좋아요 0 | URL
바르트의 말을 이해하고 싶었는데 한 1/3쯤 이해한 느낌?
글쓰기가 그래서 매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좀 더 자주 써야 제 널려진 생각들도 정리될 기회가 늘겠죠^^

그레이스 2023-08-21 18: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바르트 읽으셨어요? 와~

거리의화가 2023-08-21 21:42   좋아요 1 | URL
읽기만요^^; 본문에도 적어놓았지만 이해는...ㅎㅎ 책의 내용은 얇은데 단번에 이해하기에는 쉽지 않았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더 읽어보는 것으로 해야할 것 같네요.

건수하 2023-09-14 1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백래시> 때문에 오디오 매거진 다시 듣다가 이 책 가볍게 읽힌다 하셔서 찾아봤더니 화가님 리뷰가 딱 있네요.
이해는 어렵다 하시니 그럼 다시 잊어버려도 될 것 같습니다 ㅎㅎ

거리의화가 2023-09-14 11:26   좋아요 0 | URL
정희진 선생님이어서 쉬운 게 아니셨을까 싶은 생각도ㅎㅎㅎ 일본 문화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서 이런 비평 에세이가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