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다 하루키의 한국전쟁 전사
와다 하루키 지음, 남상구 외 옮김 / 청아출판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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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전사(全史)는 한국전쟁의 시작 전부터 마지막 정전 협정까지의 역사를 담고 있는 책이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은 한국전쟁의 기원에  초점을 더 맞추어 전쟁 자체의 기록은 소략해서 아쉬움이 있었다(마찬가지로 한국 저자인 박명림의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도 그 기원과 배경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런데 이 책은 그 전반적인 과정과 결과를 다루고 있고 무엇보다 한국과 소련, 중국, 미국의 기록 등 다양한 기록을 참고하고 있어 도움이 되었다.


1949년 4월 23일 중국인민해방군이 장제스 정권이 있던 난징을 함락시켰다. 이는 중국 내부에도 전환점이 되었으나 북한 지도부도 고무되었음에 틀림 없다. 변화된 미국 정세에 남한은 한국을 미국의 방위선 안에 넣어 달라고 요구했으나 미 정부는 남한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 말하며 미국에 대한 한국의 불신감을 키웠다. 이 무렵 38선을 둘러싸고 국경 충돌이 본격화했다. 5월부터 옹진 반도에서 북측의 공격으로 남측이 부대를 투입했으나 격퇴에 애를 먹으면서 6월까지 전투가 이어졌다. 

6월 29일에는 미군이 한국에서 철수하였고 6월 30일에는 남북의 노동당이 합당하면서 김일성-박헌영 체제가 확립되었다. 7월 말 조선인으로 구성된 중국인민해방군이 북한에 들어와 조선인민군으로 재편된 결과 북의 병력은 5개 사단으로 증가한다. 


북한 정부는 미군이 떠난 지금 삼척을 해방시키고 옹진반도를 탈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판단했고 이를 소련에 타전한다. 1949년 9월 24일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은 지령을 내려 김일성과 박헌영에게 다음과 같이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옹진반도와 개성 지구의 탈취 같은 부분적인 작전에 대해 말하자면, 이 작전의 결과 북조선의 경계가 서울에 거의 근접하게 된다면, 이 작전은 북조선의 전쟁 개시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군사적 면에서나 정치적 면에서나 이 전쟁을 위한 북조선의 준비는 아직 미흡하다. 덧붙여 북이 먼저 군사행동에 나서 장기화할 조짐을 보일 경우, 조선 문제에 어떠한 형태로든 미국인이 끼어들 명분을 줄 우려가 있다. 모든 점을 감안할 때 현재 조선 통일의 투쟁 과업을 위해 최대한의 힘을 결집할 필요가 있는 것은 첫째, 반동 정권의 타도와 전 조선 통일이라는 과제의 성공을 위한 남조선 빨치산 활동 전개, 해방구 설치, 그리고 전 인민 무장봉기의 준비이며 둘째, 조선인민군을 전반에 걸쳐 한층 더 강화하는 일이다.


스탈린과 소련공산당은 미군의 개입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북한 지도부의 무력 해방안을 반려했다. 하지만 1950년 일본공산당에 대한 코민포름의 비판(소련공산당이 일본공산당에 대해 미군에 맞서는 철저한 대결 노선으로 전환하라는 지시)이 나오고 소련이 중국 혁명의 길을 지지하면서 북한 지도부는 다시 스탈린에게 자신들의 계획을 타전한다. 스탈린은 1월 30일 거의 완전한 동의를 표명하는 서신을 보냈다(물론 중국 정부의 원조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조건 하에). 이로써 김일성은 전쟁 준비를 본격화할 수 있었다. 


1950년 훈련 명령을 받고 전선으로 이동한 모든 보병연대는 6월 23일 저녁 전투 명령을 받았고, 25일 오전 4시부로 공격을 개시하라는 명령이 모든 부대에 하달됐으며, 공병은 곧바로 6월 24일 지뢰 해체 작업에 들어갔다. 6월 25일 오전 4시 40분 북한군은 38선상의 모든 지점에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UN은 안보리 긴급회의를 소집했으나 소련이 불참(스탈린은 “내가 생각하기에 소련 대표는 안보리 회의에 참석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면서 불참 지시를 내렸다.)하고 유고슬라비아가 기권한 상황에서 첫 결의가 채택됐다. 29일 미국은 긴급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맥아더에게 38선 이북을 목표로 한 공군 작전 확대와 부산-진해에 한정된 미 지상군의 투입을 지시하는 명령을 결정했다. 맥아더는 전황을 시찰한 뒤 “한국군은 반어 능력이 없으며 적의 진격이 계속되면 붕괴할 위험이 있으므로 현재의 전선을 지키고 나아가 반격하기 위해 미 지상군의 투입이 필요하다.”고 보고했다. 6월 30일 미군의 전면적 출격이 단행되었다. 한국전쟁 개전으로 타이완은 제7함대의 타이완해협 파견으로 군사적 보호를 받을 수 있었으며 일본은 후방 지원으로 특수를 누릴 수 있었다. 


10월 2일 맥아더가 유엔군 전 부대에 “우리가 군사 작전을 하는 곳은 군사적 필요와 한반도의 국제적 경계에 의해서만 제한된다. 따라서 소위 38선은 우리 군의 군사적 운용 측면에서 고려할 요소가 아니다. 적을 완전히 패배시키기 위해 귀하의 부대는 그 경계를 언제든지 넘어도 좋다.” 명령하며 한국군의 북진은 추인됐다. 하지만 이후 전쟁 과정은 알려진 바와 같이 남북한 모두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난항을 겪었다. 


1951년 3월 마오쩌둥은 스탈린에게 자신들의 입장을 알렸다. 

조선의 전장에서 벌어진 최근의 전역 과정은 거의 모든 적군이 괴멸되지 않는 이상 적은 조선에서 철수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보여 줬습니다. 적의 군대 대부분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조선의 군사 작전은 장기적인 성격의 것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적어도 2년은 걸릴 것으로 상정해야 합니다.

마오쩌둥은 이북을 지키기 위한 소련 공군을 스탈린에게 요청하였는데 이를 승인했다.


이 무렵 미국도 정전에 대한 고려를 시작하여 대일 강화 조약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소련은 중소우호조약에 따라 대일 강화에서 중국과 보조를 맞추어야 했다. 한국전쟁 관련해서 소련보다는 정면에 중국을 내건 상황이었기 때문에 더욱 중국의 입장을 맞춰줄 수밖에 없었다. 5월 6일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대일 강화 문제 관련하여 지지를 요청했다. (1) 강화조약의 단독 준비에 반대하고, 중・소, 미・영의 공동 준비를 요구한다. (2) 중국의 타이완에 대한 권리를 명기하라. (3) 일본령 오키나와를 미국 통치하에 두는 것에 반대한다. (4) 일본 군사력의 한계를 명기하라. (5) 일본은 군사동맹에 가입해서는 안 되며, 강화 후 1년 이상 점령군이 머물러서는 안 된다. 마오쩌둥은 완전 동의를 표명하고 이를 미국에 전달했다. 미국은 6월 14일 대일 강화 조약에서 남사할린과 쿠릴제도는 일본이 포기하고 소련의 영유라는 규정은 삭제했다. - P384

이때 남한은 국민방위군 사건과 거창 사건으로 무척 혼란스러웠다. 정치적 위기 상태가 지속되면서 남한 정부가 미국에 무기 제공 등을 지속적으로 요구했으나 먹히지 않았다. 이처럼 미국은 남한 정부와 군을 불신했고 자신들이 추진하고 있던 정전회담 개시 방향 등도 공유하지 않았다. 5월 17일 미국 상원에서 한국전쟁 정전 결의가 채택됐으나 애치슨은 이승만의 동의를 얻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이 정도면 거의 이승만 패싱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9월 8일 대일평화조약 체결로 일본은 전쟁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 미국은 일본 방어를 내세워 일본 내 기지를 자유롭게 사용할 권리를 획득하게 되었다. 

한반도의 정전회담은 7월 10일 개성에서 시작되었다. 중국과 북한 측 회담 대표는 조선인민군 총참모장 남일이었고 부대표는 중국인민지원군 부사령 덩화였다. 유엔군 대표는 터너 조이 해군대장, 4명의 미군 장성과 한국군 제1군단장 백선엽 대장으로 구성됐다(이승만이 정전에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입장이 참 난감했을 것이다). 중국과 북한 측의 정전 협상은 마오쩌둥이 대부분 주도하였다. 회담 의제 중 군사분계선을 어디로 할 것인가, 포로 문제를 둘러싸고 갈등이 컸다. 그나마 군사분계선의 문제는 그리 오랜 시간을 끌지 않았으나 포로 문제 때문에 정전 협상은 결렬과 재개를 반복하며 2년 넘게 끌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1952년 부산 정치파동으로 이승만은 민의를 거슬렀고 미국 정부에도 이는 부담이 되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지금 대한민국에 이승만을 대신할 국민적 브랜드를 가진 인물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현 상태를 유지하기로 한다. 

북한은 1953년 제5차 전원회의 결정에서 종파주의분자 적발, 비판 캠페인으로 김일성에게 권력을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3월 5일 스탈린이 사망한 뒤 박헌영은 추도식 직후 체포되면서 김일성은 종전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되었다. 문제가 되었던 포로 협상에서 “송환을 주장하는 모든 포로는 즉시 송환하고, 나머지 포로는 송환 문제의 공정한 해결을 확보하기 위해 중립국에 인도할 것”으로 결론이 난다. 저우언라이, 김일성이 이에 서명하였으나 이승만은 끝까지 저항했다. 그는 (1) 한반도의 재통일, (2) 중공군의 철수, (3) 북한군의 무장해제, (4) 제3국이 북한에 무기를 제공하는 것의 금지, (5) 대한민국의 주권 존중 및 한반도 문제 해결에서 그 목소리의 존중이었다. 모두 정전을 불가능하게 하는 조건이었다. 클라크는 이승만을 지속적으로 설득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아이젠하워도 이승만에게 편지를 보냈으나 사실 그 이면에는 “에버레디 계획”으로 한국 정부가 저항한다면 정전에 협력적인 신한국 정부를 수립하려는 계획이 있었다. 이승만이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어쨌든 워싱턴이 양보하고 이승만도 물러서면서(정전협정에 서명할 수 없지만 정전회담을 방해하지는 않겠다. 이것은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방기한 것 아닌지?) 7월 24일 정전회담의 내용이 최종적으로 결정되었다. 이승만은 미국이 한국의 안전을 보장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고 7월 27일 판문점에서 해리슨과 남일은 정전협정에 조인했다. 정전 명령은 남쪽은 클라크의 이름으로, 북쪽에서는 김일성과 펑더화이의 이름으로 내려졌다. 


전쟁이 끝난 후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의 합의에 따라 비타협적 대립 속에 갇혔다. 한국 측에도, 북한 측에도 군사행동을 다시 생각할 조건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한반도에 존재하게 된 것은 평화가 아니었다. 차가운 전쟁도 아니었다. 냉전이라면 외교 관계는 있으나 군사적으로는 긴박한 대결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남한과 북한 사이의 열전은 끝났지만, 냉전 상태에도 미치지 못한 특별한 적대적인 상태가 계속됐다. - P603~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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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북한이 온다 - 미국에 미련을 버린 북한과 공포의 균형에 대하여
정욱식 지음 / 서해문집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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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북한은 미국과의 오랜 적대관계를 평화관계로 전환하는 것을 국제전략의 핵심 목표로 잡았다. 곡절과 부침이 있었지만, 2019년까지는 이러한 기대와 목표를 접지 않았다. 북한이 핵개발을 지렛대 삼아 대미 관계 정상화를 노렸다면 미국은 북핵을 명분으로 '한반도의 현상'을 유지·강화하고자 했다. 미국이 바라는 한반도의 현상이란 정전체제와 한미동맹, 남북·북미·북일 간의 긴장관계다. 북한은 2019년 2월 하노이 회담의 실패와 6월 30일 이루어진 남북미의 소득 없는 정상회동 이후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에 대한 미련을 접고 핵무력을 국가의 중심 정책으로 삼게 되었다.

2018년 4월부터 2019년 8월까지 김정은과 트럼프 간에 주고받은 27통의 친서가 2022년 9월 25일 한미클럽(전·현직 주미 특파원 모임)을 통해 전문이 공개되었다. 이를 통해 북한의 정책 변화에 대한 기조를 엿볼 수 있다.

2018년 4월 판문점 정상회담 합의와 1차 북미정상회담에서의 결과로 종전선언이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외교안보 관료들은 종전선언 이전 북핵문제에 진전을 요구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평화협정은 비핵화의 최종 단계에서 체결한다는 구상이 남북 정상회담의 합의'라 말했지만 김정은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2018년 6월 북미정상회담에서 북한은 단계적 비핵화에 상응하는 제재 완화를 기대했으나 한미 연합훈련 실시 방침이 발표되자 김정은은 8월 5일 트럼프에게 다음과 같은 친서를 보낸다.
"나는 도발적인 연합군사훈련이 중요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북미 실무회담에 앞서 취소되거나 연기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 이 훈련은 누구를 겨냥한 것이냐. 나는 미군이 이러한 남한의 편집광적이고 매우 과민한 행동에 관여하고 있는 것이 더욱 마음에 들지 않는다. (···) 미국과 골칫거리로 인식하는 (북한의) 미사일 위협과 핵문제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는 미국과 남한의 군사적 행동들이다. 이러한 요인들이 제거되기 전까지는 이전과 다른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 - P45~46

2019년 6월 판문점에서의 남북미 깜짝 정상회동에서 트럼프는 8월 예정된 한미연합훈련 취소를 약속하고 김정은은 북미 실무회담에 응하겠다고 화답했다. 트럼프는 7월 3일자 친서에서 김정은에게 "가장 중요한 사안"으로 "미사일 엔진 시험장에 기술 전문가들의 방문을 허용해줄 것"을 요구했다. 9월 6일에 보낸 답장에서 김정은은 "핵무기 연구소의 전면 가동 중단과 핵물질 생산시설의 불가역적인 폐쇄"를 제안하며 "우리가 기울이는 노력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해줄 우리 주변 환경의 변화를, 약간만이라도 느낄 필요가 있다"는 단서를 달 정도로 한 발 이상 대화에 진전된 행보를 보여줬다. 그러나 미국은 '선 비핵화, 후 제재 해결'이라는 입장을 고수했고 문재인 정부의 중재는 통하지 않았다.  이후 2019년 10월 열린 실무회담은 미국의 대북 제재의 변화 없음으로 성과 없이 끝났다.
지금의 윤석열 정부는 전임 정부의 남북관계 악화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좌초가 단계적 군축 합의, 한미연합훈련 중단을 지키지 않은 데서 비롯되었음에도 3축 체계를 비롯한 군사력과 한미연합훈련의 강화 정책을 이어가는 중이다.

우리는 북한=경제난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는 팩트가 아니다. 경제가 어렵긴 하지만 우리가 생각할 정도로 예전의 고난의 행군 때문만큼은 아니다라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2023년 5월 직접 만나본 중국의 관계자들은 '북한이 식량난을 해결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아사자가 속출하고 있다는 징후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평가하며 식량 사정은 개선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그런데도 한국은 여전히 북한을 지원의 대상으로 본다. 문재인 정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북한을 돕겠다고 했지만 북한은 거부하거나 응답하지 않았다. 윤석열 정부는 이미 중단된 대북 지원을 또다시 중단하겠다며 엄포를 놓는다. 이런 괴리가 '주민들은 굶주리는데 김정은 정권은 핵과 미사일에만 매달린다'는 인식을 부추기며 새로운 대북정책 수립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내가 볼 때 가장 문제는 국내 언론과 정부의 과도한 북핵 공격 조장 행위라고 생각한다. 북한이 과연 핵무기를 앞세워 우려하는 적화통일에 나설까. 이는 북한에도 자충수일 뿐더러 국내에도 과도한 군사력 강화 태세, 정쟁을 키우기만 하는 요인이 된다. 한국이 결핍감에 시달리면서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을 과도하게 억제하려고 할수록 정작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의 억제가 힘들어진다는 역설을 이해해야 한다. 한미, 혹은 한미일이 대북 억제 강화를 이유로 군사력과 준비태세를 강화할수록 북한도 마찬가지 선택을 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또 미국의 확장억제와 한미일의 군사적 결속은 북한만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중국과 러시아는 자신을 겨냥한 군사적 조치로 간주하며 맞대응에 나서서 한중·한러 관계에 큰 부담과 위험을 야기한다. 한국이 이미 충분히 강력한 미국의 확장억제를 더 강화해달라고 매달릴수록 미국은 한국에 부담금 청구를 들이밀 것이므로 악순환을 끊어내야 한다(이 부분이 나는 꽤나 중요하다 생각한다).

1954년부터 유럽에 핵무기를 배치하기 시작한 미국은 1966년에 나토 회원국들과 '핵공유 협정'을 체결하면서 평시에는 접수국 기지에 배치된 핵무기를 미군이 관리·보호하다가 유사시 접수국의 전투기에도 탑재되는 방식으로 운영했다. 프랑스를 제외한 나토 회원국은 '핵기획 그룹'에 참여해 나토의 핵 정책 발전과 실행에 관여했다. 
미국은 한국에 1950년대 후반부터 핵무기를 배치했고, 1970년대 초반에는 그 수가 1000개에 육박했음에도 한국과 핵공유를 하지 않은 것은 1953년 정전협정의 '신무기 반입 금지' 조항을 의식해서다. 미국이 한국에 핵무기를 배치하고 핵공유 협정을 체결하는 것은 정전협정 위반인 것이다. 동시에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주한미군에 따르는 경제적 부담을 줄이려고 했기 때문에 한국과 협의도 없이 몰래 핵무기를 배치했다. 한미가 '나토식 핵공유'를 추진할 수 없을까 생각하지만 이는 핵확산금지조약NPT 때문에 불가능하다. NPT에 따르면 핵보유국은 핵무기를 직간접적으로 양도하지 않고 양도받지 않을 것이라고 규정되어 있다. 나토는 핵공유 협정을 1966년 체결하여 1970년 NPT 조약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고 동맹의 핵보유국들이 그들의 핵무기에 대한 통제와 관리를 유지하기 때문에 핵무기 통제 이전을 금지한 NPT 조항에도 부합한다 보았다. 
2023년 4월 한미 간 체결된 워싱턴 선언은 한국이 NPT와 한미원자력협정을 준수한다는 내용을 통해 독자적 핵무장을 하지 않겠다는 것과 더불어 그 어떤 핵공유는 불가능하다는 의미가 담겼다. 이에 반해 일본은 핵공유 논의는 불필요하다고 선을 그으면서 미국과의 반도체 합작에 나섰다. 
북한은 2013년 핵독트린에서 '적대적인 다른 핵보유국이 우리 공화국을 침략하거나 공격하는 경우 그를 격퇴하고 보복타격을 가하기 위하여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의 최종명령에 의하여서만 사용할 수 있다.'라고 명시했었다. 그러나 2022년 핵독트린에서는 '핵무기 사용 결정권을 김정은에게 독점 부여하면서도 국가지도부와 국가핵무력지휘기구에 대한 적대 세력의 핵 및 비핵공격이 감행되었거나 임박했다고 판단되는 경우로 사용조건을 명시했다. '공격하는 경우 -> 임박했다고 판단되는 경우'로 한발 더 나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저자는 안정성이 결여된 억제 관계는 무력충돌의 위험을 높이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라며 '한반도형 3C'를 제안한다. (한미동맹과 북한이 군비경쟁보다는) 군비통제를 통해 군사력 균형을 유지하려는 접근, (보복 위협이 빈말이 아님을 상대에게 각인시키는 적대적 신뢰보다는) 서로가 선제공격하지 않고 우발적 충돌 발생 시 이를 평화적으로 해결하자는 우호적 신뢰 구축의 노력, (두려움 주기식의 전달을 지양하고) 상호만족할 수 있는 해법을 찾으려는 대화와 소통 방식의 마련 이다.
더불어 최대주의적 접근이 아니라 최소주의적 접근이 필요하다라는 저자의 말에 가장 공감했다. 지금까지 남북 대화를 포함한 각종 회담의 목표는 '최선의 시나리오'에 맞춰져 왔다. 많은 것을 얻으려다 보니 어느 하나 얻을 수 있는 게 없었던 게 아닌가 싶다. 우선은 대화와 협상의 목표를 '최악의 시나리오'를 방지하는 데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방지하는 것이야말로 최소한 전쟁을 방지하고 긴장 완화를 가능하게 하는 접근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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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3-09-09 12: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최소의 시나리오.. 군비도 최소로 들고 그러면 참 서로 좋을텐데 말입니다.

아이젠하워가 한반도에 핵무기를 설치했었다는 걸 전 화가님 글에서 처음 알았네요. 충격적입니다…. 지금도 한반도에 핵무기가 있을 수도 있겠군요.

거리의화가 2023-09-10 21:07   좋아요 1 | URL
한반도에 핵무기가 한 때 천기도 넘게 있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고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군비를 한쪽에서 확장하면 다른 쪽에서도 확장할 수 밖에 없는 구도이니 경쟁은 끝이 나질 않겠지요. 이미 한국의 군사력이 6위까지 올랐는데 이것이 좋은 일인지... 정부와 국방부에서는 무기 수출했다고 자랑하는 것이 씁쓸하게 느껴집니다.
 
민족의 장군 홍범도
이동순 지음 / 한길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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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벌어진 가슴, 다부진 체격, 짙고 숱 많은 눈썹은 활처럼 굽었고, 두 눈은 슬픈 코끼리를 닮았다. - P60

홍범도는 키가 190 정도로 무척 컸고 단단한 체격이었다고 전해진다. 남아 있는 사진을 봐도 '건장함'이 느껴진다고 할까. 책에서의 '슬픈 코끼리의 두 눈을 닮았다'는 표현이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이 책은 1982년부터 2003년까지 저자가 쓴 민족서사시를 기반으로 하여 산문적 서술로 바꾸고 최신 역사 사료를 업데이트하여 다듬어낸 평전이다. 저자는 시인이자 문학평론가로 그 때문인지 문체 자체가 물 흐르듯 하여 책 내용이 딱딱하거나 지루하지 않게 느껴지지 않아 좋았다. 대화문들을 읽을 때는 마치 홍범도 장군의 목소리를 듣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했다.

홍범도의 일대기를 몇 년만에 읽게 되었다. '청산리 대첩, 봉오동 전투, 흑하 사변' 등 교과서에서 붙박이처럼 배우는 사건이지만 어떠한 배경에 의해서 일어났고 어떤 과정으로 일어났는지 다시 한 번 정리할 수 있어 좋은 경험이었다고 여긴다.

홍범도의 원래 이름은 범동이었다. 어머니는 산독으로 돌아가셨고 아버지가 동냥젖을 먹여 가며 키우셨으나 아버지도 8살 때 돌아가신 뒤로는 홀로 살아가야 했다. 남의 눈칫밥을 얻어가며 살아간다는 게 어디 쉬운가. 그럼에도 맡은 일을 잘 해냈는데 3년간 일했던 제지소에서 품삯을 미루고 주지 않아 제지소 주인을 때리고 도망쳐 산으로 들어가게 된다. 금강산 신계사에서 수계를 받고 지담 스님의 상좌가 된 홍범도는 스님으로부터 '범도'라는 이름을 부여받게 된다. 범동이 범도가 된 순간이었다. 나를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분노와 치기가 많았을 나이, 범도가 되면서 그는 큰 그릇의 사람이 되어 백성을 돕겠다는 포부를 품게 된다. 범도라는 이름을 얻게된 것도 모자라 이 곳에서 아내 분을 만나 아이를 가지게 되어 강원도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사연이 흥미로웠다. 강원도에서는 매일 사격 연습을 하며 단련했다고 한다.

을미 사변, 단발령 이후 전국적인 의병이 일어난다. 이 때 주도적인 의병 세력 중 한 명은 유인석이었다. 홍범도는 강원도 철원 보개산으로 들어가서 유인석의 부대를 마주한다. 이 때 유인석은 홍범도의 기개에 인상이 깊었는지 '여천汝千'이라는 호를 내렸주었다고. 그 후로도 둘은 서찰을 주고 받으며 뜻깊은 인연을 이어간다. 유인석은 홍범도의 항일무장투쟁 활동을 지지했지만 그의 투지만으로 싸우는 모습은 옳은 방향이 아니라며 충고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유인석은 홍범도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스승 같은 존재가 아니었나 싶다.

홍범도는 사포수로 사냥하고 가족들은 농사를 지어 생활을 했다. 처음에는 사냥꾼 사포계에 포함되어 활동하다가 후에 차도선, 송상봉이 지휘하는 의병대와 조직을 합친다. 1907년 일제가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공포하자 그의 의병대 활동에도 영향을 주게 되지만 수차례의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며 유명세를 얻게 된다. 주로 일진회 회원을 처단하거나 일본군 토벌대의 사무실, 통신 기관 등을 파괴하는 일을 행했는데 각지에서 의병대 활동을 위한 의연금을 보내올 정도로 응원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홍범도는 이 때 신출귀몰-(날아다니는 장군: 飛將軍)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에 슬픔들이 이어졌다. 일본군은 의병대 내부의 반일 역량을 분해시키기 위해 차도선에게 접근했는데 이 때 휘하 부하들과 함께 일본군에 투항해 귀순하고 만 것이다. 일본군은 홍범도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고 그의 가족도 대상이었다. 첫째인 홍양순은 홍범도와 함께 의병 활동을 하고 있었기에 무사했으나 단양 이씨(홍범도의 아내)는 둘째 용환이를 빼돌리고 정작 본인은 유치장에 갇혀 모진 고문과 협박에 못 이겨 사망하고 만다. 1908년 바배기 전투에서 첫째인 홍양순이 사망하였다. 이후에 둘째인 용환이도 병으로 앓다 사망한다. 어릴 적 부모와 일찍 헤어진 그는 가족과의 애착이 무척 컸을 것이다. 그런데 세월은 그의 단란한 가정을 가만 내버려두지 않았다. 독립 운동을 하지 않고 평범한 사람으로 살았더라면 좀 더 단란함을 오래 유지할 수 있었겠지만 그는 그 삶을 택하지 않았다. 

상황은 갈수록 홍범도 의병대에 불리해져 갔다. 총은 있지만 탄약이 떨어져 쏠 수 없어 숨어다니는 상황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전투 의욕을 상실한 탈주자들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결단을 내린 그, 가려는 의지가 있는 40명만 데리고 압록강을 건너기로 한다.
두만강 너머는 일찍부터 조선에 살던 많은 백성들의 이주가 이어졌다. 주로 북방 지역에 살던 이주가 많았는데 고향 땅이 점차 살기 팍팍해졌던 탓이 클 것이다. 처음으로 이주한 조선 백성들은 터를 잡고 척박한 그 땅을 개간해나갔다. 이후 점차 이주하는 백성들이 늘어 1920년대가 되면 20만명이 된다. 그 곳에 살던 중국, 러시아인들도 조선인들의 농사 능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는 이야기를 몇몇 책에서 보았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두만강을 넘어 연해주 땅으로 간 홍범도는 그 곳에 있는 독립군 세력과 연합하여 독립 운동을 전개한다. 대표적인 전투가 1920년 10월부터 11월 사이에 이어진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다. 유리한 지형에 효과적인 전략과 전술을 결합한 완벽한 아군의 승리인 동시에 일본군에게는 무참한 패배를 안긴 전투였다. 다만 일본군의 패배는 그들을 복수심에 불타 오르게 해 조선인 동포들을 무참하게 학살하는 참극을 낳게 하였다.

이후 만주의 독립운동 세력 9개의 단체가 모여 대한독립단 단체를 만들지만 내부 노선의 차이가 존재하는 상태에서 갈등은 잠복해 있었다. 러시아 백군이 홍군에 의해 박살이 나고 연합국 최고회의는 1920년 1월 16일 볼셰비키 정권과의 통상을 재개하면서 군대 철수를 선언했지만 일본은 버팅기며 철수하지 않고 있었다. 같은 해 4월에 러시아 빨치산 부대가 니콜리스크에 와 있던 일본군을 살해하면서 연해주의 러시아 혁명군 무장해제를 요구, 블라디보스토크와 니콜리스크 등지의 한인독립운동세력에 대한 공격 및 학살을 벌인다. 이 때 최재형을 비롯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사망했다. 이것이 '4월참변'이다.
문제는 일본군이 4월 참변 이후에도 철수하지 않은 채 한인마을을 공격하는 와중에 1921년 3월 소련정부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는 모든 대한독립단 부대를 소련군 한인보병자유대대에 강제편입시키는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다. 자유시에 집결하라는 요구를 한쪽은 받아들이고 다른 한쪽은 거부하면서 분열은 증대한다. 이것이 흑하 사변의 계기가 되었다. 홍범도는 이 때 독립 세력 간의 갈등을 보며 무척 환멸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통합하기 위한 그의 노력은 쉽지 않았고 결국 흑하사변이라는 비극으로 끝맺음이 났다. 서로 총을 겨눈 상황에서 발생한 사건은 그에게 큰 상실감과 슬픔을 남겼다.


2021년 8월 15일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담긴 관이 크즐오르다 공항을 출발하여 같은날 저녁 서울공항에 도착했다. 8월 17일 정부는 홍범도 장군에게 건국 훈장 최고의 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8월 18일 국립대전현충원 제3묘역에 안장되어 78년 만의 고향 땅에 묻혔다. 


"이 땅에서 왜적을 말끔히 물리치는 날, 그날에 나는 비로소 죽을 수 있으리라. 그날까지 나는 제국주의자 침략자들과 싸우고 또 싸우리라. - P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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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3-09-06 1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긴 글 쓰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거리의화가 2023-09-07 09:03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희선 2023-09-09 02: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020년에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 100년 기념 우표가 나왔어요 2021년엔 유해가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2023년엔... 나라를 생각한 홍범도 장군일 텐데... 봐야 하는 건 안 보고 다른 걸 보는군요 한국 사람이 다 그런 건 아니어서 다행이네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3-09-09 08:22   좋아요 1 | URL
네. 기념우표 소식은 들었는데 정작 사지는 못했어요. 예전엔 그런거 나오면 곧잘 사곤 했는데 정작 제가 관리도 못해서 안 사게 되더군요.
이념에 의한 정쟁이 피곤합니다. 정작 중요한 나라 현안들은 다 내팽개쳐져있어서 한숨이 나네요.
 
크리티크M Critique M 2023 Vol.6 - 마녀들이 돌아왔다
김정희 외 지음 / 르몽드디플로마티크(잡지)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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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섹션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 이 잡지를 애써 구매하고 읽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녀들이 돌아왔다> 섹션은 내 기대를 대체적으로 충족시켰다.

아무래도 국내 필자가 쓴 내용들이 나와 대체적으로 더 맞는 것 같았고 '마녀사냥' 이라는 키워드 때문인지 페데리치의 <캘리번과 마녀>는 기본적으로 대부분의 칼럼에서 언급되었다.


그리고 내가 이 잡지를 읽기 전 그 책을 읽었던 것이 도움이 되었다.


페데리치는 중세 유럽에서 억압당한 여성의 역사를 연구하면서 여성들이 어떠한 배경 속에서 마녀로 몰렸는지를 밝히고 있다. 소외된 여성이 마녀로 몰렸다. 정부와 교회는 주류에서 벗어난 여성들을 공격해 기준을 세웠다. 사회의 틀에서 벗어난 여성들, 즉 독신으로 사는 여성, 자유분방한 여성, 부랑자 여성, 근대 의학이 등장해 이 시기에 사라져가는 민간요법을 잘 아는 여성들이 타깃이었다. [ 재조명되는 마녀의 시대 by 나이케 데크슨 ]

중국에 양리라는 코미디언이 마녀사냥으로 집중 포화를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다큐 <피의 연대기>를 다룬 칼럼도 인상적이었다(다큐를 막상 보지는 못했지만 여자들이라면 공감할 수밖에 없는 내용). 


이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칼럼은 현대미술에서 제의로 표현되는 예술가의 표현 방식에 대한 것이었다. 덕분에 나는 이 예술가의 이름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아브라모비치, 이름이 알려진 만큼 아시는 분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유명세(!)를 탄 작품 때문에 그녀는 이후 활동에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사실 한국 현대 미술계에도 초기 박영숙 선생님 등이 활동을 시작하신 후 오늘날에는 점점 더 많은 여성 예술가들의 활발한 활동이 이어지는 것 같다. 현대 미술은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 멀리하고 있었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서 조금씩 이해도를 높여가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한여름의 더위에 고기와 지방이 부패하는 악취가 지하에 가득했다. 흰 옷을 입은 여자가 소뼈 더미 위에 앉아 브러시를 들고 뼈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 있었다. 그가 부르는 노래는 고향인 유고 슬라비아의 민요였다. 노래를 부르며 뼈를 닦다가 울부짖는 행위가 나흘 동안 지속되었다. 1997년 6월, 비엔날레에서 선보인 퍼포먼스 작품 <발칸 바로크>(1997)다. 영적인 에너지를 탐구하고 신체를 적극 활용하며 파격적인 형태를 선보이는 작품들 때문이기는 하지만 결정타는 <영혼요리>(1996) 때문이다. (...)


<발칸 바로크>는 1990년대 발칸 반도에 피바람을 불러온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하고, 고향인 유고 슬라비아가 자행한 대량 학살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속죄의 퍼포먼스였다. 완전한 외부인이 아니었던 그는 전쟁과 인종 청소에 대해 강력하게 발언하기도, 그렇다고 외면할수도 없었기에 피를 닦아내고 노래하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삶에 쌓인 업을 지워내고 희생자들의 안녕을 빌었던 것이다. - [ 현대미술의 제의적 순간, 마녀와 예술가 사이 by 김지연 ]



다만 아쉬운 것은 성서에서의 마녀, 악마의 이미지에 대한 해석인데 내가 잘 이해를 하지 못하는 바람에 그냥 훓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성서에 대한 이해, 그리고 그에 의구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덧) 100자평을 쓰기에는 모자란 것 같고 리뷰 쓰기에는 내용이 빈약한 것 같았지만 100자가 넘어서 리뷰로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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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3-09-05 07: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화가님 빠르게 읽으셨네요! 👍👍👍
역시 성경 공부는 언젠가 해야 하는 숙제일까요.. ㅠㅠ

거리의화가 2023-09-05 09:15   좋아요 1 | URL
잡지는 오래 읽으면 좀... 한 번에 후딱!ㅎㅎ 근데 내용이 은근히 많아서 나중엔 대강 훓어 읽은 느낌이!
뒷부분의 성경 인문학도 그렇고 <마녀들이 돌아왔다> 섹션에도 관련 칼럼이 있었는데 내용이 제겐 많이 어려웠습니다. 성경 공부까지 할 시간은 안 되는 것이 현실!ㅎㅎㅎ

건수하 2023-09-05 08: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직 펴보지 못했는데 화가님 리뷰를 보니 얼른 펴봐야 될 것 같습니다.
리뷰 남겨주셔서 감사해요!

거리의화가 2023-09-05 09:14   좋아요 1 | URL
수하님 저야말로 감사하죠. 덕분에 구매해서 읽게 되었네요^^*

미미 2023-09-05 1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중국 코미디언 양리를 검색해 봤는데 우리나라 게임 업계의 여성혐오가
떠올랐어요. 저도 마저 읽어야겠습니다. ^^

거리의화가 2023-09-05 11:31   좋아요 1 | URL
맞아요 미미님. 저는 코미디를 좋아하는 사람인데 왜 남성들이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성적 농담이나 개그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면서 그 반대는 포화를 가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 있어요. 정작 양리는 자신이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는데 남성들의 공격이 참... 아무튼 미미님 즐독하시길요!
 
하버드 중국사 원.명 - 곤경에 빠진 제국 하버드 중국사
티모시 브룩 지음, 조영헌 옮김 / 너머북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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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중엽부터 17세기 중엽 사이에 중국에는 두 왕조가 군림했다. 첫 번째 왕조는 1271년 건립한 원으로, 쿠빌라이 칸은 세계 정복자 칭기즈 칸의 손자였다. 다음 왕조는 명으로, 주원장이 1368년 건립했으나 1644년 북방 초원에서 내려온 만주족에 의해 전복되었다. 원-명은 중국의 전제 체제를 구축했고, 중국 사회를 확대가족 집단으로 재편했으며, 상업적 부가 집중되기 쉽도록 중국의 가치를 재조정한 왕조였다. 원-명 시대는 기후학자들이 '소빙하기'라 부르는 시기와 일치했다. 원-명 사람들은 안으로는 이상 기후에 시달리고, 해안에는 외국 상인이 끈질기게 출현하는 통에 더욱 가중된 혼란을 겪었다. 그 가운데 과거의 전례에 집착하며 이를 모범으로 삼고자 하는 이들이 있었다. 반대로 어떤 이들은 과거는 버리고 새로운 방식을 받아들여 그 안에서 자기를 위한 공간을 찾았다. 원-명 시대가 대단히 혼돈스럽고 불화不和의 사회였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 P15~18

하버드 중국사 이번 편은 13세기부터 17세기, 장장 4세기에 걸친 시기를 다룬다. 송을 정복한 몽골은 중국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가 필요했는데 이를 위해 전 정권의 합법적 계승자임을 선언하는 동시에 역사를 수집하여 기록하였다. 명은 몽골이 지배한 영역보다 축소된 영토를 얻은 대신 중화를 회복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중국인은 몽골을 '호'라고 여겼으므로, 몽골인에게 스스로 '화'의 지위를 획득했다고 주장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좀 더 포괄적인 '일통一統'이라는 개념을 찾아냈다. 쿠빌라이는 여러 민족을 자기의 통치권 아래에 두어 하나의 백성으로 만들고 자기를 하늘의 아들, 즉 천자라고 주장했다.
원이 중국 전통 왕조의 하나로 자리매김하는 데는 요사, 금사, 송사라는 세 왕조의 정사 편찬 작업이 큰 도움이 되었다. 더 나아가 쿠빌라이는 또다시 중국인의 권고를 받아들여 국가 규모의 지방지를 편찬하도록 했다. 이 안에는 모든 영토를 포괄하는 지리와 행정 명부, 그리고 인물에 대한 기술이 담겼다.
주원장은 몽골 지역과 시베리아 영토를 포기해야 했다. '천하일통', '국조일통', '일통만방' 같은 표현들이 주원장 때뿐만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지속해서 국가적 담론을 지배했다. - P66~67

나는 성격이 다른 두 왕조를 저자가 왜 한 권에 다루려는 선택을 했을까 궁금했다. 이는 결국 두 왕조 모두 공통적으로 기후 재난의 시기를 겪었기 때문이었다. 가뭄과 홍수, 기근, 메뚜기 때의 공격, 소빙하기로 평년보다 낮아진 기온 때문에 농업을 기본 산업으로 운영되는 국가의 입장에서 큰 혼란이 초래되었다. 책에는 '아홉 번의 늪'이라고 표현이 되어 있는데 한 번 올 때마다 짧으면 2~3년인 경우도 있지만 길면 15년이 이어진 경우도 있었다. 장기간의 재난을 개념화하기 위해 저자는 '슬라우'(번역서에는 늪이라고 표현됨)라는 고어를 사용했다. 슬라우는 거름을 모아두는 곳으로 나그네가 빠지기 쉬운 웅덩이 또는 저지대를 지칭하는 용어인데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 곤란한 상황을 묘사하는 은유로 사용된다. 
날씨는 살아가는 데 가장 기본이 되는 물질적 조건이다. 당시 사람들도 이상 기후 및 재난에 관한 기록을 정사에 기록했고 기후를 바탕으로 앞으로의 재난을 예측하기도 했다. 기후 문제가 역사서에 등장한다는 게 놀라울 수도 있겠지만 나는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오늘날에도 매일의 날씨는 사람들의 기분을 좌우하는 데 영향을 미치지 않는가. 점점 온난화되는 기후로 인해 이미 지구는 병들어 이상 기후로 나타나고 지구인들은 고스란히 그 피해를 받고 있는 중이다. 하물며 이 시기에 사는 사람들은 농업에 종사했다. 농사를 짓고 먹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가뭄, 홍수, 한파 등은 흉작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명은 장자 계승이 기본 원칙이었지만 몽골은 형제 상속을 기본 원칙으로 하여 쿠릴타이에서 경쟁자를 물리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때문에 원은 우구데이 사망 이후에 끊임없이 상속을 둘러싼 분열과 갈등이 지속된다. 원 왕조가 오래 가지 못했던 이유 중 가장 큰 것이 이 왕위 계승의 시스템 때문이 아닐까 싶다.
왕위 계승에 장자 상속제가 여전히 유효했으나, 다른 요소도 개입할 수 있었다. 칸은 경쟁자와의 경쟁에서 승리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에 '쿠릴타이'라고 부르는 귀족들의 회합에서도 선거로 지배권을 비준받아야 했다. 부친을 계승하려고 형제들이 경쟁하는 관습을 '테니스트리tanistry'(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지방에 거주하던 고대 게일Gael인의 계승 제도를 가리키는 말로, 가장 능력 있는 사람이 재산과 지위를 계승하는 관행을 일컫는다.)라고 부르는데, 이 과정에서 형제 간의 살육은 비일비재했으며, 이를 '유혈의 테니스트리'라고 부른다. - P162~163

명은 5차례의 정치적인 중대 위기(호유용의 변, 정난의 변, 토목의 변, 대례의 논쟁, 국본의 위기)를 겪었다. 다섯 사건 대부분이 왕위 계승 등의 문제로 왕권과 신권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여 피바람이 일어난 것이다. 왕조의 합법성을 지켜낸다는 명분을 내건 황제의 바람이 한 쪽을 담당했다면 나머지는 충신의 의무를 지켜내기 위함이라는 관료들의 논리가 있었다.

명의 정치 문제는 그 원인을 비극적인 결함으로 보기보다는 '타협의 문제'로 보는 편이 적합할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통치자와 고위 관료 사이에 독재 정치를 수긍하는 '충성' 조항이 있다고 이해한다. 따라서 잘못은 관료에게만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통치자가 처신을 잘하는지 못하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사실 황제는 독재 정치 시스템의 본질이자 국가의 근본이었고, 그 왕조의 생존을 보증하는 확실하고도 유일한 담보였다. 황제는 권력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했으나 그 방법을 몰랐고, 관료들은 황제를 섬기는 일에 앞서 나라를 위해 지켜야 할 원칙이 있다고 믿었으면서도 그 원칙을 버리고 황제를 택했다. 이러한 관계에서 발생한 충성은 결국 통치자와 관료 모두를 딜레마에 빠뜨렸다. - P203~204

원-명 시기 중국의 경제가 성장하면서 정치와 사회의 수준은 따라 높아졌고 농상공업의 발전으로 도시가 발전하자 교류가 활발해졌다. 경제가 발전하면서 거래되는 물품의 가치가 높아졌고 단위가 큰 물건을 구입할 때 휴대가 편리한 은의 필요성이 증대했다. 1436년 명이 일부 지역의 세금을 은으로 납부하도록 하자 은납화가 더욱 가속화되었다. 하지만 조정은 개인이 귀금속을 보유하는 것에 대해 우려하였기 때문에 국내 은광 개발을 제한하여 은 품귀 현상을 빚게 된다. 16세기 후반 일본과 페루에서 막대한 은이 유입이 되고 나서야 상황이 개선된다. 원-명 시대에는 늘어난 교류만큼 새로운 문물과 사상을 받아들이기 좋은 조건이 되었다.
다양한 상품이 막대한 규모로 생산, 유통, 소비되면서 황실, 권세가 뿐 아니라 집에 막대한 물품을 쌓아놓은 창고를 소유한 거부(대상大商)가 생겨난다. 돈만큼이나 취향이 경제를 구성하는 중요 기반이 되면서 미적 안목이 있는 감정가들의 몸 값도 자연스레 올라가게 된다. 이제는 사치품을 살 만한 형편이 되는지의 여부보다 어떤 사치품을 구매하는지가 더 중요해졌다. 책에서는 명 말 수집가들 중 가흥에서 거부가 된 이일화라는 사람의 물품 획득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 때 서적, 가구, 도자기, 서예와 회화 등 다양한 물품이 거래되었다. 이일화는 진정한 문화물을 소유하는 것이란 좋은 양육과 교육을 받은 증거라고 간주했다. 그는 투자나 사회적 지위 때문에 명품을 수집하는 부자가 아니라 사심 없이 문화적 전통을 전수하는 자임을 인정받고 싶어했다. 덕분에 오늘날 우리가 일컫는 '중국 문화'가 형성될 수 있었다.

원-명은 가족의 사회적 성격이 변화되는 시기였다. 당의 오래된 귀족 가문은 사라졌고, 송의 왕실 가문도 사멸하고 있었다. 명 때는 조상의 연원을 원 이전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뼈대 있는 가문이 드물었다. 원-명에도 훌륭한 가문은 계속 출현했지만, 그들은 과거의 명문가들보다 빠르게 사라졌다. 따라서 개인의 정체성과 위상은 국가가 아니라 그 개인과 얽힌 사람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친족망이 사람들의 삶에 기반이 되었다고 한다면, 성의 구별은 친족망을 구성하는 원칙이었고 남성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형성되었다. 부계 사회 유지를 위해 사회적으로 관혼상제가 정례화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사후 세계가 어떠한지, 물질세계의 본질은 어떻게 규정되는지, 지구는 평평한지, 도덕적인 삶은 어떤 것인지 다양한 의견을 나눌 준비가 되었다. 특히 16~17세기가 되면 사람들은 세상을 탐구하고 책을 참조하며 고정 관념을 타개해 나갔다.

만력 연간 지식인들 사이에는 이미 격물格物이라고 하는, 사리事理에 대한 진지한 탐구가 내재했던 터라 이들에게 원형 지구 이론은 쉽게 침투될 수 있었다. 그들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수학과 천문학의 기초를 잘 다진 뒤 우주에 대한 논의를 전개한다는 점을 인정했다. ... 이로 인해 천원지방이라는 자기들의 논리가 훼손됨에도 불구하고, 지식인들은 선교사들의 논증을 신뢰하게 되었다. - P345
만력 연간 지식인들 사이에 예수회 선교사들의 영향력이 대단히 크기는 했으나, 믿음이 변화하게 된 계기는 단지 소수의 유럽인 때문만은 아니었다. 명 후기 사회 내부에 가해진 각종 압력 때문에도 기존의 믿음은 끊임없이 요동했다. 가령 만력과 천계天啓(명의 15대 황제) 연간의 정치적 문란, 급속한 상업화, 신분 질서의 변동, 변경 지방의 군사적 위기, 그리고 환경 조건의 악화 또한 믿음을 변화하게 만든 주요 원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거의 믿음을 더는 고수하기 어렵다고 느낀 일부 사람이 주로 제도권 밖에서 새로운 세계관을 찾기 시작했다. - P346

'세계 경제'라는 말은 지중해 유럽을 연구하는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1902~1985)이 만들어낸 용어로, 본래 의미는 모든 세계의 경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실질적인 의미는 빨라야 18세기부터 통용되기 시작했다. 본래 세계 경제라는 말은 정기적인 교역망을 통해 수준 높은 통합 경제를 이루어내면서도, 내부적으로는 노동 분업이 자치적으로 지속되는 광대한 지역을 의미했다. '세계 경제'가 가지만의 '세계'를 꾸릴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상대적인 자치성 덕분이었다. ...
남중국해는 상대적으로 자치적이었지만 내부적으로는 통합된 무역 구역이었다. 북쪽으로는 중국 상인이, 남쪽으로는 이슬람 상인이 조직적으로 진출하면서 15세기 후반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정화 원정단도 이 구역에 중국인들의 참여를 확대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보아야 한다. 하지만 국가 주도의 항해로는 아무리 해도 그러한 세계 경제를 창출할 수 없었다. 오직 교역이 조공을 뛰어넘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 P440~441

두 차례의 만력의 늪과 숭정의 늪, 그리고 만주족의 출현은 명의 붕괴로 이어졌다. 숭정의 늪 때는 하필 재난으로 전염병이 돌고 상업 경제가 중단되었으며 식량이 줄어들어 곡물 가격이 치솟았다. 국가 재정이 악화되자 정부 조달에 의존했던 북방 지역은 타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고 그 곳에 있던 병사들이 도망쳐 반란을 일으키는 사태가 이어지게 된다. 청이 들어선 후 명의 생존자들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만주 정권에 복종했다. 하지만 순순히 항복하지 않은 저항군은 만주군에 의해서 처형되거나 자살로 끝이 났다. 청은 다민족의 통합을 주장하며 들어섰다. 만주족은 제국을 대대적으로 개편하지 않고 명의 사회 질서를 그대로 이어갔다. 이후에는 청에 대한 저항의 불도 사그러들었고 명의 백성은 청의 백성이 되었다.

만력의 늪과 숭정의 늪은 농업 지식의 결핍이라는 함정에 걸려든 사태이기도 했고, 동시에 나라 안팎에서 진행된 엄청난 변화의 물결에 휘말린 사건이기도 했다. 남중국해에 세계 경제가 성장함에 다라 명의 경제는 연안으로 이동되었고, 물가 역시 단순히 국내 시장에 좌우된 것이 아니라(국내 시장이 좀 더 크긴 했다) 남아메리카와 남아시아 및 유럽의 수요와 공급에 따라 재조정되었다. 새로운 사상 또한 혼란을 더욱 부채질했다. 기존의 문제에 새로운 문제가 겹치면서, 아무리 훌륭한 전략가라도 체제 재정비의 과제 앞에서는 당혹스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1644년 청의 등장과 함께 세계 제국들의 급격한 재편이 없었다 하더라도, 적어도 이러한 당혹감 때문에 명은 끝났을 것이다. 만주족은 국경을 차단하고 황제를 칸으로 교체했으며, 제국이 되려는 야망을 부활시켰다.- P512

이 책은 원-명 시기를 환경적 접근을 통해 다루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다만 시기적으로 더 짧기는 하지만 원에 대한 설명은 너무 소략하고 대부분이 명의 체제를 설명하기 위해 할애된 점이 아쉬웠다. 차라리 분권을 해서 각각을 충분히 다루는 것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경제, 국제-교역, 환경적 접근이 특히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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