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 간토대학살, 침묵을 깨라
민병래 지음, 간토학살 100주기 추도사업추진위원회 기획 / 원더박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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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토대학살 100주기를 맞아 여러 권의 책이 나왔다. 그 중 먼저 읽어봐야겠다 싶은 것이 이 책이었다. 그동안 학살에 대한 증언이나 기록을 담은 책들은 있었는데 이 책은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지금까지 노력해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 더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간토 지방은 구체적으로 어디를 의미할까. 현재의 도쿄, 지바현, 사이타마현, 이바라키현, 도치기현, 군마현, 가나가와현을 포함한 곳으로 일본의 동남쪽 끝에 해당하는 구역이다. 간토 대지진(관동대진재=관동대지진)은 1923년 9월 1일 11시 58분 44초에 진도 7.9 규모로 가나가와현에서 가까운 사가미만이 진원지에서 발생한 지진이다. 지진의 초기의 미동은 12.4초간, 격동은 10분 동안 계속되었으며 사망자는 9만 9,331명, 부상자 10만 3,733명, 행방불명자 4만 3,746명, 가옥 전파 12만 8,266호, 가옥 반파 12만 6,233호, 가옥 소실 44만 7,123호, 유실 가옥 868호, 이재민 약 340 만명이 발생할 정도로 피해가 무척 컸다.

문제는 이때 6,661 명이나 되는 조선인과 700여 명의 중국인이 학살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뒤 100년이 지났지만 일본 정부는 조선인과 중국인의 죽음에 사과와 배상을 거부하고 있다. 유언비어에 흥분한 자경단원이 저지른 일이고 일본인 희생자도 있다며 진상규명조차 외면하고 있다. - P18


학살의 원인은 과거 TV 다큐멘터리, 영화 <박열> 등을 보면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일본인의 조선인 멸시만이 단순한 이유는 아님을 더 깨닫게 되었다. 그 이전의 역사적 배경을 통해 누적된 결과임을 이해해야만 사건의 진실에 더 다가갈 수 있다. 또 학살의 원인을 담은 증거 자료의 출처에 대해서도 새롭게 알게 되어 도움이 되었다.

책을 읽으며 가장 뼈아픈 부분은 한국에서는 이 사건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기억하는 일을 거의 행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대부분 시민 사회 또는 개인이 자발적으로 발품을 팔아 조사 또는 연구 작업을 진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국내에는 단 하나의 추모비도 없으며 유족회도 구성되어 있지 못하다(중국에는 있다).  

 

책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미처 알지 못했던 인물들, 그리고 그 속에 세세한 이야기들을 읽다 보면 눈이 저절로 커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1.강덕상은 재일사학자로 1975년 ‘관동대진재’와 이를 보완해 2003년에 펴낸 ‘학살의 기억, 관동대진재’ 등을 통해 조선인 대학살에 관한 일본 정부의 책임을 세상에 고발한 이후로 평생을 ‘조선인 대학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한 분이다. 그는 국회도서관에서 ‘공문비고’를 발견한다. 1945년부터 1952년까지 일본에 있던 연합국사령부가 압수했다 반환한 이 문서는 해군성 자료로, 지진 당시 일본 내각의 여러 움직임을 담고 있다. 강덕상은 이를 재일사학자 금병동과 함께 정리하고 조선인 학살에 관한 다른 중요 사료까지 묶어 1963년 10월 ‘현대사자료6: 간토대지진과 조선인’이라는 자료집을 발견했다. 이 자료집은 일본 역사학계가 조선인 대학살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고 한다. 강덕상이 아니었다면 지금까지 학살의 원인이 제대로 밝혀지지 못하거나 다른 분들의 연구로 이어질 수 있었을까 싶다. 그 분의 공이 참으로 크다 하겠다.


2.니시자키 마사오는 2009년 9월에는 도쿄도 스미다구 야히로 6-31-8에 추도비를 세우고 그 옆에 10평 안팎의 조그만 자료관을 열었다. 추도비 문은 다음과 같다. (...) 도쿄 시타마치 일대(서민층 구역)에서도 식민지 지배의 고향을 떠나 일본에 건너 온 사람들의 귀한 목숨이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채 빼앗겼다. 이 역사를 마음에 새겨 희생자를 추도하면서 인권 회복과 양 민족의 화해를 위하여 이 비를 건립한다. 6년여를 그곳에서 먹고 자고 하며 생활했는데 혹시나 모를 극우단체의 공격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는 도쿄의 모든 도서관을 돌아다니며 사료를 모아 기록을 모은 끝에 2016년 ‘간토대진재 조선인 학살의 기록 - 도쿄지구별 1,100가지 증언’이란 책을 펴냈다. 그는 현재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의 국가책임을 묻는 모임(2010년 일본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로 결성)’의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3.오충공은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두 편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모두 좋은 반응을 얻었다. 특히 나는 두 번째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다룬 수용소로 보내진 조선인들의 이야기가 충격적이었다. 이 작품은 수용소에 갇힌 조선인을 인근 마을의 자경단에 넘겨 살해하게 한 놀라운 사실을 다뤘다. 당시 일본에 있는 조선인은 간토 대지진 학살에 따른 현장 상황과 이후의 반응에 따라 방침을 여러 번 바꾸었는데 마지막에는 현장을 달래기 위해 “그 성질의 선악에 관계없이 조선인을 무법으로 대우하는 것은 절대 삼가야 한다. 저들도 우리의 동포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어조를 내보였다(전형적인 기만 작전). 수용소에서도 부상 치료를 받지 못해 끙끙 앓다 목숨을 잃거나 배급이 형편없어 하루 한두 개의 주먹밥으로 연명하면서 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하는 생활을 하게끔 만들었다. 또 고의로 빨간 딱지를 씌워서 불령으로 낙인찍히면 가차없이 처단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당시 수용소의 인원이 줄었다는데 탈주자에 대한 수색 작업을 벌이지 않았다고 한다. 뭔가 냄새가 안 날수가 없는 상황이다. 


4.야마모토 스미코는 ‘간토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 사실을 알고 추모하는 가나가와현 실행위원회’ 대표로 칠순이 넘는 나이에 ‘요코하마에서 간토대지진시 조선인 학살’이라는 논문을 쓰고 팔순이 훌쩍 넘은 나이에 현장해설과 강연을 다니기 시작했다. 소학교에 부임하여 조선인 차별의 실태에 눈을 뜨고 재일조선인을 위해 정규 외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교육자로 일해온 그였다. 그는 “100주년을 맞아 가나가와현 실행위원회 회원의 바람은 지금 모임을 사단법인으로 만들고 작은 추도비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동안 모은 자료를 하나의 보고서로 발간하고자 합니다.”라고 말했고 “나는 이 일을 조선인만을 위해서 하는 게 아닙니다. 일본인을 위해서 합니다. 사죄하지 않으면 불행이 반복되니까요.”하고 말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5.김종수는 일본 경찰서를 찾아 보호를 요청했다 자경단의 습격으로 62여차례 찔리고 베여 죽임을 당한 구학영의 이야기를 발굴해내고 책으로 펴냈다[‘엿장수 구학영’(2021)]. 그는 특별법 제정 추진위원회를 만들고 2013년 재정촉구 기자회견을 했다. 2014년 4월 7일 여야의원 103명의 서명을 받아 발의가 되었으나 본회의에 오르지 못하고 2016년 해당 안은 폐기가 되었다. 이후에는 하는 수 없이 특별법 제정은 잠시 미루고 간토학살 전시패널을 들고 어디든 달려가며 역사기행, 탁본 작업 등을 진행했다. 2017년에는 1923역사관을 세우는 작업에 착수해 2020년 ‘기억과 평화를 위한 1923역사관’을 완공했다.


6.가토 나오키는 신오쿠보에서 태어났는데 재일조선인이 많았던 동네여서 자연스레 조선인과 우정을 나누며 자랐다. 그런데 최근 재특회 같은 극우단체의 혐한 시위가 잦아지고 역사수정주의가 세를 얻어 가며 극우 정치인의 행동을 보면서 이를 막고자 항의 행동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2013년부터는 거의 매주 신오쿠보 거리에 나섰고 친구들과 ‘민족차별에 대해 항의하는 행동’을 하고 글을 쓰겠다 마음먹은 뒤 블로그를 운영해 자료를 모으는 등 기록을 바탕으로 중계하듯 글을 써나갔다. 블로그의 글의 반향이 커 책으로 출간된 뒤에 현재는 일본 곳곳을 다니며 강연 후 독자와의 만남을 가지는 중이다. 100주기를 맞아 그는 요코아미초 공원의 추도비를 방위하는 싸움에 나선다. 


7.시각 예술가 이이야마 유키는 어느 날 오지뇌병원의 과거 기록 중 1930년에 입소하여 1940년에 죽은 조선인 환자 두 명의 사연을 접했다. 그들은 ”내 손이나 다리를 베어다오, 조선인을 죽여라“라는 말을 외치며 알 수 없는 노래를 부르는 걸 들었고 이들이 간토대학살 후유증으로 정신병을 앓고 있던 게 아닐까 추측했다(추측이지만 확률은 높다). 자이니치 래퍼인 FUNI는 이 두 명의 조선인 환자의 한을 담은 가사를 랩으로 읊어내 두 사람은 협업을 하고 <In-mates>라는 30분 남짓한 영상을 만들어냈다(일본에서 상영 거부 당함). 이이야마는 “역사에 이름을 남긴 예술가보다 보통의 장애인이 받을 수 있는 연금을 국적이 다르다고 받지 못하는 현실을 보면서 작품의 동기를 발견한다. 또 장애인의 권리가 있다, 존엄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용기 있는 행동을 보면서 예술이 장애 문제를 어떻게 껴안고 갈지 고민한다”라고 말한다. FUNI도 “이제까지 작업은 자신의 감정을 랩으로 바꾸는 것에 머물렀으나 <In-mates>를 통해서 역사문제, 민족문제를 작품으로 표현하는 것에 눈을 뜨게 되었다. 앞으로도 주제의식 있는 곡을 쓰겠다“라고 힘차게 말한다. - P230~231


8.사진작가 천승환은 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하고 대학원에 들어가 미학을 공부하고 자신의 길이 다큐멘터리 사진임을 깨닫는다. 이후 국외사적지 역사기행을 계획하고 국외 여행길에 올랐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대한민국 국외 사적지 역사지도 작업’으로 한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관련 사적지 정보를 정리하고  지도화하여 온라인에서 누구나 방문할 수 있도록 사이트를 만들었다. 

올해 그는 80일간 간토 지방의 학살 사적지를 다니며 참배하고, 사진을 찍었는데 그 자료 또한 온라인에 무료로 공개될 예정이다.


뒷 편에는 부록으로 간토 대지진 학살 현장을 위한 다크 투어 안내서와 주석을 친절하게 담아 놓았다. 개인적으로 찾아가는 이들을 위해 링크와 지도, 사진 등이 첨부되어 있어 충분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메일과 홈페이지 등이 있으니 더 많은 자료를 얻는 방법도 가능하다. 간토 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현재판 주소이자 가이드라 할 수 있겠다. 나도 몸이 성할 때 꼭 이 곳들을 한 번 다녀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간토의 유족은 100년이라는 장벽을 뛰어넘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법정투쟁에 나서려 한다. 제노사이드와 반인도적 범죄는 시간이 얼마나 지났건 반드시 처벌하고 정의를 세워야 한다는 게 국제사회의 원칙이다. 간토 조선인 학살의 단죄는 이런 원칙을 실현해 인간의 존엄성을 세우는 일이 될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유기홍 의원은 올봄 여야 의원 100명의 동의를 얻어 ‘간토대학살 진상규명과 피해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을 발의했다. 통과되면 무엇보다 진상조사에서 큰 진전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할 일이 있다. 우리 땅 어디에도 6,661 명을 기리는 추도물이 하나도 없다. 일본의 시민사회는 각 지역에서 뉘우침을 이끌어 내며 20여 기나 되는 추도비를 세웠다. 부끄러운 일이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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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09-28 01: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조선 사람이 많이 죽었네요 지진이 일어나고 죽임 당했다는 것만 알았지 그 다음은 어떻게 됐는지 몰랐군요 그때는 한국이 일본 지배에 있어서 더 그러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광복 뒤에는 생각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때 제대로 하지 않은 게 지금까지 이어지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사람이 다 잘 하기는 어렵다 해도 하려고 해야 할 텐데...


희선

거리의화가 2023-09-30 10:51   좋아요 1 | URL
네. 정부가 일본 측에 해명을 요구하지 않아서 더 묻힌 것이 크다고 봅니다. 추모비 하나 없다는 현실이 씁쓸했어요. 이제 꽤 많은 진실이 수면 위로 드러난 만큼 민간 단체와 함께 정부 측에서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베를린 함락 1945 걸작 논픽션 26
앤터니 비버 지음, 이두영 옮김, 권성욱 감수 / 글항아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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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독일의 공격으로 시작된 독소전쟁은 초반에 독일이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기갑 부대의 기동력과 공군의 비행 운용 능력에 의거하여 승리하며 전쟁의 승기를 잡는 듯 했다. 하지만 900일 간 이어진 레닌그라드의 포위(쇼스타코비치가 7번 레닌그라드를 작곡했지만 정작 레닌그라드에서는 연주할 수 없어 쿠이비예프에서 초연되었고 1942년 여름이 되어서야 레닌그라드에서 연주할 수 있었다)와 결정적으로 스탈린그라드 전투(천왕성 작전)를 기점으로 전쟁의 분위기는 바뀐다. 1942년 겨울 추위에 대비가 안 된 독일군은 동상에 걸리는 병사들이 많아졌고 움직이는 거리가 길어진 만큼 보급에도 차질이 빚어진다. 12월 소련의 모스크바 반격으로 소련의 공세가 시작된 이후로 전쟁의 흐름은 소련이 주도하고 있었다. 1944년 12월 중순 서부 전선에서 독일의 아르덴 대공세가 성공하였으나(히틀러는 전황을 반전시켰다고 믿었음) 사실상 마지막 불꽃 같은 것이었다.


저자는 이 책에서 1945년 새해를 맞은 베를린의 풍경을 시작으로 5월 전쟁에 항복하기까지의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5개월도 안 되는 시간의 주 무대가 되는 곳은 베를린이다. 짧은 기간 동안을 긴 페이지를 할애하여 저자가 공을 들여 설명하는 덕분에 마치 내가 현장에 있는 듯한 생생함과 동시에 괴로움도 느끼게 했다. 특히 베를린 시내의 이야기를 볼 때는 기존에 현장을 다녀와본 적이 있어서였는지 익숙한 지명이 반가우면서도 착잡함을 느끼게 했다. 봄과 여름이면 초록초록한 티어가르텐이 불과 몇 십년 전에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전투로 폐허였을테니 말이다. 


스탈린은 영국과 미국보다 베를린에 먼저 들어가고 싶어했다. 당시 소련의 핵 연구는 맨해튼 프로젝트의 상세한 연구 정보에 의거하여 가속화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소련은 자국 내에 우라늄 매장층이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독일이 비축해둔 우라늄을 서방 동맹국들보다 선점하기를 원했다. 이와 더불어 관련 장비와 재료를 챙기고 과학 기술자들을 데려가는 일도 필요했다. 

스탈린은 서부 전선에서 별도의 강화 협정이 맺어질까 무척 두려워했는데 특히 독일 서부에서 미국과 영국에 의해 잡힌 다수의 독일군 포로들이 미국과 영국으로 하여금 베를린에 먼저 도착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것을 극도로 경계하였다. 이는 소련이 베를린을 미리 선점해야 하는 계획에 차질이 있을 수 있음을 의미했다.


베를린은 1945년 1월 당시 길어진 전쟁으로 물자가 부족했고 시내 곳곳은 폭격으로 엉망이었다. 육군 참모총장 하인츠 구데리안 장군은 1월 9일 히틀러에게 비스와강과 동프로이센 전선에서 소련이 공격 채비를 마쳤음을 보고한다. 하지만 괴링과 히틀러는 잘못된 정보라고 일축해버린다. 

“동부 전선은 카드로 만든 집과 같습니다. 최전선의 한 지점이 뚫리면 전체가 무너질 겁니다.” - P74

동부 전선을 잘 대비하지 않은 것은 히틀러가 독소 전쟁 때 내린 정책 중 가장 큰 실책중 하나일 것이다. 동부 전선을 무사히 지켰다면 독일군의 사상자가 그리 많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고 약탈, 방화, 강간 등 후폭풍도 없었을 것이다. 


붉은 군대는 1월 13일 체르냐홉스키 장군 지휘 하의 제3벨라루스군이 동프로이센에 대한 공격을 개시한다. 1월 14일 로코솝스키의 제2벨라루스전선군도 공격을 시작했다. 독일 총사령관 라인하르트 장군이 히틀러에게 전화를 걸어 동프로이센 전선이 위험하다 경고했지만 그는 들으려 하지 않았다. 붉은 군대가 동프로이센 땅을 통과한다는 소식에 마을 주민들 사이에는 끔찍한 공포를 불러 일으키면서 많은 이들이 달아나거나 피신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식이 늦어 움직이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고 알았다 하더라도 부상을 입거나 몸이 불편하여 정작 움직이기 어려운 경우도 많았다. 


“남아 있는 독일인이 거의 없다. 많은 정착지가 완전히 버려졌다.” 그나마도 남은 주민은 대부분 45세 이상이었다. 1945년 1월 12일부터 2월 중순까지 약 850만 명의 독일인이 독일 중부 주에서 자신의 비를 버려둔 채 탈출에 나섰다. 동프로이센에서는 많은 사람, 특히 국민돌격대 소속의 남성과 연약한 여성들이 분노가 무사히 지나가길 기도하면서 숲으로 몸을 숨겼다. 반면 대다수는 소련군이 오기 바로 직전에야 달아나기 시작했다. - P108


연령을 불문하고 소녀와 여성들을 집어삼킨 건 대부분 집단 강간이었다. “붉은 군대의 병사들은 독일 여성들과의 ‘개별적 정사’에는 관심이 없었다.” 붉은 군대 병사들은 여성들을 공공연하게 소유물 취급했다. - P96


비스와강 전선이 완전히 무너진 뒤로 소련의 전차여단들은 계속 서쪽으로 나아갔다. 하루에 60~70킬로미터씩을 진격했다는데 이는 마치 전쟁 초기에 독일군의 기갑부대의 진격 속도의 빠르기를 떠올리게 한다. 1월 27일 독일군 부대가 오데르강 전선에서 후퇴한 이후 소련군이 얼마 후 오데르강을 건넜다. 이 때 아우슈비츠 부근에서 수용소를 발견했다고 하는데 이후에도 베를린으로 가는 동안 여러 개의 수용소 현장의 실태를 마주하게 된다. 


1월 30일 히틀러는 독일 국민에게 마지막 연설을 한다. 독일군은 이로써 베를린에 위기가 닥쳤음을 깨닫게 되지만 하인리히 힘러는 “한 발짝도 물러서지 마라. 의무를 수행하지 못하면 죽음과 처벌 뿐이다.”를 강조했다. 이 때 히틀러는 베를린으로 돌진하는 소련 전차여단들의 소식을 듣고 대전차사단을 만들라고 명령하지만 대전차사단은 이미 유명무실한 존재였는데 주요 구성원은 히틀러 유겐트 출신으로 그들이 가진 무기는 자전거에 단 판처파우스트 2문 뿐이었다. 자전거에 싣고 다니다 싸울 때만 고정을 풀고 공격한다는데 이게 과연 얼마나 효율적이었을까. 나치군에 의해 훈련이야 받았겠지만 히틀러 유겐트 대원들의 나이는 대부분 10대 초반이었다. 아이들을 전쟁터의 총알받이로 내세우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나. 


2월이 되자 얄타에서 정상 회담이 열린다. 회담의 주요 의제는 폴란드 정부 구성 문제였다. 1944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독일군의 전력이 약화되었을 때 소련이 접근하자 폴란드인들은 위기를 감지하고 소련군이 바르샤바에 도착하기 전 폴란드 저항군이 바르샤바를 해방시킨다며 봉기했다. 문제는 저항군이 보급품이 떨어지며 독일군의 대학살의 대상이 되었고 바르샤바는 피해가 막심했다. 스탈린은 폴란드를 원조하겠다는 의사를 보였으나 이는 그가 폴란드 정부를 소비에트 정부로 구성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처칠은 전후 소련 세력이 부상할 것을 경계한 반면 루스벨트는 서방과 소련이 공동의 적과 싸우기 위해서 연합해야 한다고 보았다. 루스벨트는 건강도 좋지 않은 상태였다. 결국 폴란드에 대해서는 기존의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에서 규정한 폴란드 동부 영토 대부분을 소련에 병합하기로 합의하였고, 그 대신 폴란드에게는 동독의 일부 지역을 주기로 하였다. 이로써 스탈린은 얄타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챙겼다. 


붉은 군대는 동프로이센 숲에 숨은 독일인들을 수색하며 후방 소탕 작전을 개시한다. 민가에 불을 지르고 약탈하였으며 숨어 있던 국민돌격대원들을 찾아내 피하면 총살하는 과정이 이어졌다. 포로로 잡힌 국민돌격대원은 강제 노동을 위해 소련으로 보내졌다. 여성들의 경우 힘든 노동을 하거나 감시병들에게 강간을 당해 성병을 얻게 되는 경우도 있었으며 이것이 자살로 이어지기도 했다. 


스메르시는 NKVD에서 독립한 소련군의 방첩조직으로 "스파이들에게 죽음을"의 준말을 통해 느낄 수 있듯 장교들, 병사들 모두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붉은 군대는 반역죄나 도망(전선 이탈) 등으로 수시로 감시를 받았고 스메르시란 이름만 들어도 적개심을 느낄 정도였다. 1943년 스메르시에 관해 비밀리에 불리던 노래가 있었는데 이후에도 여전히 공공연히 불렸다고 한다.


첫 금속 파편이 연료 탱크에 구멍을 냈지.

나는 T-34에서 뛰어내렸어. 어떻게 그랬는지 몰라.

그러나 그들이 날 특수부에 불렀어.

“이 새끼야, 왜 전차와 함께 불타지 않았어?”

“다음 공격 때는 반드시 불에 타겠습니다.” 내가 대답했어. - P235


2월과 3월에 베를린 맞은편의 오데르 교두보에서 전투가 이어지는 동안 주코프와 로코솝스키는 포메라니아와 서프로이센에 있던 독일군을 괴멸시킨다. 비스와강 건너편의 로코솝스키 휘하 4개 군이 서프로이센 남부로 밀고 나갔으며 2월 말이 되면 주코프와 로코솝스키의 군대가 발트해까지 나아가게 된다. 

독일군은 탄약과 차량용 연료가 부족해서 어려움을 겪어 낮에는 움직이기 어려웠다. 반면 소련군은 숲이나 버려진 집에 진을 치고 위장술로 몇 시간 동안 숨어 있다가 방비가 약한 독일군 전선에 침투하여 병사들을 몰래 빼갔다.


3월 말 아이젠하워는 향후의 미군-영국군 작전에 대해 스탈린에게 전문을 보낸다. 핵심은 "베를린이 더 이상 특별히 중요한 목표가 아니다"라고 한 것이다. 이에 대해 처칠은 격앙적인 반응을 드러냈고 처칠과 아이젠하워 사이에 갈등이 벌어진다. 4월 1일 스탈린은 "베를린은 예전의 전략적 중요성을 잃었습니다. 붉은 군대는 서방 연합군과 합류할 것이고 주력 부대는 5월 하반기쯤 진격할 것입니다." 라며 얼마 후면 뻔히 드러날 거짓말을 했다. 


낮에는 ‘미군’이, 밤에는 ‘영국군’이 강렬한 공습을 이어간 2년 동안, 지하실과 방공호에서는 독특한 파생 문화가 자라났다. 한 일기 저자는 기이한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평가했다. 이 ‘지하실 종족’은 매우 부유한 지역에서든, 아주 가난한 지역에서든 다양한 특성을 만들어냈다. 어떤 이는 총통과 최후의 승리를 정당화하려고 했다. 몇몇 베를린 시민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히틀러를 갑자기 ‘그자’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행운을 가져다주는 주문이나 부적에 집착했다. 많은 지하실 종족은 특별한 미신이나 생존 이론을 발전시켰다. - P424~425


전쟁이 오래 지속되면 어떤 것이든 의지할 것을 찾게 된다. 베를린 시민들에게는 이념적 대의명분은 어느덧 사라진 지 오래였다. 4월 23일 프라하의 나치 산하 라디오 방송국에서 총통이 베를린에 잔류하기로 했다는 결정도 시민들에게는 대수롭지 않았다. 포격에서 살아남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베를린은 외부에서 들어온 피란민들, 귀환한 시민들, 몰래 숨어든 군인들 등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었다. 하지만 시내 지상 건물은 성한 곳이 없었고 언제 폭격이 이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지하 방공호 대피 생활은 일상이었다. 100만 명이 넘는 이들이 폭격으로 집을 잃었다. 노면 전차의 95퍼센트가 파괴되고 철도의 많은 부분이 파괴로 여전히 물에 잠겨 있었다. 도시의 다른 지역에 있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는 얼마 안 남은 힘을 써야 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제대로 먹지 못해 몸이 쇠약했다. 그들은 먹을 것을 찾는 데 에너지의 대부분을 써야 했다. 기차 운행이 시작되자마자 수많은 사람이 기차 지붕이나 바깥 쪽에 매달려 먹을 것을 찾아 시골로 향했다. 시내에 있는 사람들은 살아남아야 했기에 여자들은 폐허 속에서 가족들을 위해 요리를 하기 위해 불 연기를 피웠고 때로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폭격을 피해 빠르게 숨어 이동하는 사람들이 다였다. 

하지만 베를린 시민들은 동프로이센, 포메라니아, 슐레지엔에 있는 동포들보다는 훨씬 더 형편이 좋았다. 1940년 220만 명이었던 인구는 1945년 5월 말 19만3000명으로 줄어 있었다. 소련군의 증오를 받은 동프로이센은 점령 지역 대부분이 끔찍한 운명을 맞았다. 땅은 수년 동안 황폐한 채로 방치됐다. 집은 불타거나 가장 기본적인 살림살이가 약탈당했다. - P649~650


4월 30일 히틀러는 아내인 에바와 함께 자살하고 두 시신에는 휘발유가 뿌려져 불태워졌다(히틀러 시신 중 턱은 스메르시가, 두개골은 NKVD가 보관했고 1970년에 나머지 시신을 파내워 불태워 처리했다고 한다). 5월 1일 나치의 선전 장관인 괴벨스와 아내인 마그다도 히틀러 부부 시신이 묻힌 곳 근처에 나란히 서서 청산가리를 삼키고 마찬가지로 시신에 휘발유가 뿌려져 불태워졌다. 그 날 오후 9시 30분 함부르크 라디오 방송국은 중대 발표 연설을 예고했다. 바그너와 브루크너의 7번 교향곡의 음악이 흘러나오면서 대제독 뇌니츠의 연설이 이어졌다. 그는 히틀러가 "군대의 선두에서" 싸우다 사망했다고 말한 다음 자신이 계승자가 된다 밝혔다. 정작 이 때 전기 공급이 안 되어 방송을 들은 독일 국민은 얼마 없었다. 그마저도 전투에서 사망 거짓부렁이라니. 남은 독일군이 베를린에서 탈출을 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수백 명의 친위대와 독일 국방군 병사, 시민들이 함께 빠져나가기 위해 모여들었다. 하지만 소련군이 이를 놓칠 리가 없었다. 탈출하는 행렬에 포격을 퍼부어 많은 민간인과 병사들이 사망하였다. 


전쟁에서 징벌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규율 빠진 병사들은 성적인 면에서 원시적인 남성으로 재빨리 돌아갈 수 있다. 동프로이센에서의 일관성 없는 성폭력과 베를린에서 전리품으로서 성욕 사이의 개념 차이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범죄에 대한 정의는 있을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반면 사회적 그리고 규율상의 제약이 없는 전쟁에서 남성의 어두운 부분이 너무 쉽게 나타날 수 있다. 붉은 군대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심지어 집단 강간은 병사들 사이의 유대감을 형성하는 한 가지 방법일 수도 있었다. - P516


전쟁을 개시한 자들은 전쟁의 승패에 따라 책임 유무를 따진다 생각하겠지만 전쟁이 한 번 시작되고 나면 피해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가장 큰 피해는 결국 약자들, 특히 여성과 아이들에게 돌아간다. 원치 않는 전쟁에 휘말려 여성들은 성폭력과 강간에 노출되고 그 와중에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거나 그렇지 않다고 해도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것들은 여성이었을 것이다.  대체 전쟁은 누굴 위한 전쟁인지... 전쟁 버튼은 결코 함부로 눌러서는 안 될 일이다. 


5월 7일 아이젠하워 사령부가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같은 날 독일군 참모총장 알프레트 요들이 항복 문서에 서명을 했다. 다음날 이들은 베를린의 주코프의 사령부에서 서명하면서 전쟁은 마침내 끝이 난다. 


전쟁은 끝났지만 독일과 소련은 막심한 피해를 입은 만큼 오랜 복구 기간이 이어졌고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동유럽 지역은 더욱 피해가 컸다. 

이번 책을 읽으면서도 느꼈지만 동유럽 중 특히 우크라이나는 1930년대에는 스탈린의 집단 공산화 정책으로 인해 대기근을 겪었는데 독소 전쟁으로 독일군과 소련군 양측 모두에 또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물론 폴란드도 그렇지만). 현재는 푸틴이 개시한 전쟁으로 인해 1년이 훌쩍 넘는 기간동안 고스란히 고통을 겪고 있다. 언제 끝날지 모를 전쟁으로 인해 국민들은 여전히 고통을 받고 있고 이는 전 세계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반도를 비롯한 미국, 러시아, 중국 등 세계 곳곳이 외교로 풀 일을 물리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가고 있음에 참으로 우려가 크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에 일어난 일들을 책을 통해 돌아보는 것은 무척 도움이 된다. 


이 책은 전쟁 작전이 그려진 여러 장의 지도와 중요 인물들의 경우 본문에서 일화나 사건을 통해 충분히 설명해주고 있고 논픽션이어서 그런지 더 장면을 실감나게 상상하며 읽을 수 있었다. 또 앞에서도 말했듯 1945년을 시기적으로 한정하여 전시의 일상을 세밀하게 묘사함으로써 전쟁 말미를 훨씬 다층적으로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앞으로도 이런 책이 많이 나와서 독자들에게 읽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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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3-09-25 13: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유사한 지역에서 역사가 반복된다는 것이 참 두렵습니다... 베를린은 왠지 가보고 싶지 않은 곳이었지만, 이제는 한 번 가서 보고 느껴야겠구나 싶어요. 화가님 리뷰 잘 읽었습니다. 수상 기원!

거리의화가 2023-09-25 15:34   좋아요 1 | URL
우크라이나에서 또 전쟁이 발생하니 유독 안타까운 마음이 큽니다. 지도자들이 과거를 통해서 배우기보다는 당장의 눈앞의 이득에만 몰두하고 외교보다는 자국에만 유리한 조건을 내거는 느낌입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 한국의 이야기기도 해서 더 뒷맛이 씁니다ㅜㅜ
개인적으로 베를린 저는 정말 좋았었어요. 기회가 되시면 언제 한 번 가보셔요^^

페넬로페 2023-09-25 16: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거리의화가님
리뷰 잘 읽었어요.
저도 완독했는데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좋은 책이었다고 생각해요^^

거리의화가 2023-09-25 16:40   좋아요 2 | URL
앗 페넬로페님 안 그래도 읽으실거라 생각했는데 리뷰는 아직 안 올리신거죠? 못 본 것 같아서... 저도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드는 좋은 책이었어요. 앞으로도 이런 다양한 시각에서 볼 수 있는 대중 역사서가 많이 나오면 좋겠습니다.

잠자냥 2023-09-26 16: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제 리뷰 올리신 것 봤는데 오늘 읽었습니다.
두껍고 고통스러운 책 읽으시느라 고생하셨어요!

거리의화가 2023-09-26 16:28   좋아요 2 | URL
잠자냥님도 힘든 책 읽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3-10-01 21: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관련책들 읽는 계기가 된 독서였습니다.

거리의화가 2023-10-03 08:01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님 리뷰 올리신 거 봤어요^^ 저도 이 책 읽으면서 독소전쟁사를 훓었습니다. 도움이 된 시간이었네요^^
 
생각의 요새 - 사유의 미로를 통과하는 읽기의 모험
고명섭 지음 / 교양인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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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기준은 무엇일까. 어떤 분야이든 이 책은 반드시 읽어야 한다는 필독서 같은 것이 존재한다. 난이도의 강도와는 별개로 그 산을 넘어가야 다른 책들로 옮겨감으로써 지식의 확장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고전은 시간이 지나도 그 가치가 변하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 낡은 것이 되는 경우가 있으므로 나는 고전도 꾸준히 업데이트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인문, 사회, 과학 등 다양한 분야의 길잡이 같은 역할을 한다. 다루고 있는 책들이 최신 책들까지 포함하고 있어 도움이 된다. 누가 봐도 이건 고전이야 하는 책보다는 생소한 저자나 저작들이 많아서 놀라웠다.


입문자는 어떤 책이 좋은 책인지 가려내기 쉽지 않다. 또 입문자가 무턱대고 고전이라고 일컫는 책을 시작하기에는 어렵다. 이 책에서 다루는 책들의 범위는 무척이나 넓고 그런 만큼 사상가의 이름만 알고 있거나 이름조차 모르는 경우도 많았다. 게다가 저자가 제시한 길잡이로서의 본문도 꽤나 어려운 경우가 많은 것을 보면 대부분의 책들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도전해보고 싶은 책들이 몇 권 있었다. 

세어보니 총 13권 되는데 단시간에 읽어보기에는 어렵겠지만 장시간에는 가능하지 않을까. 대부분 모르는 저자와 책이 많기 때문에 섣불리 깊이 들어갈 만한 저자를 고르기에는 어렵고 시간을 들여 이 책들을 읽고 나서 생각해보려고 한다. 

13권에는 성서를 너무 몰라 서양 고전을 읽을 때 어려운 점이 있었기에 구약성서 읽기에 도움이 되는 책들이 몇 권 들어갔고 철학, 문학 이해에 도움이 되는 책들, 역사, 정치 사상가의 책들도 포함되어 있다. 과거에도 고전이었고 현재도 고전인 책들도 포함되어 있으나 기존의 보편적이라고 여겨진 서구 담론에서 더 나아간 담론을 제시한 경우의 책에 관심이 가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내 관심사가 그쪽으로 어쩔 수 없이 흐르는 것일테다. 후퇴한 현재의 민주주의, 끝모르게 치닫는 신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찾고 싶고 나아가 더 나은 역사적 관점들을 공부하면서 이 세계를 이해해보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다양한 분야의 책들이 포함되어 있는 만큼 독자마다 눈여겨볼 책이 다를 것이다. 눈여겨본 책이 있다면 읽어보고 그 저자의 책을 더 읽어봐도 되고 나처럼 눈여겨본 책들을 모두 읽어보고 더 깊이 들어갈지 선택해도 되겠다. 독자의 관심사에 따라, 또는 애초에 관심이 있었던 저자가 있거나, 담아둔 책이 포함되어 있다면 그 책부터 읽어나가는 것부터 괜찮은 선택일 것 같다. 


간혹 다루고 있는 책들 중 절판이나 품절된 책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 경우 아쉽지만 도서관을 이용해야 할 듯 싶다. 도서관에도 없는 경우는 중고로 책을 찾아야 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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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09-22 15: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목차를 봤는데



전 읽은 책이 하나도 없군요 ㅜㅜ

거리의화가 2023-09-22 15:55   좋아요 1 | URL
새파랑님 저도 읽은 책은 한 권도 없어요. 심지어 처음 들어본 책이 대부분입니다ㅋㅋㅋ 저 많은 리스트 중 끌리는 책 한 권만 읽어도 괜찮을 듯 합니다^^*

페크pek0501 2023-09-22 15: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으면 엄청 똑똑해질 것 같아요.
그런데 페이지가 술술 잘 넘어가는지는 미지수인 것이, 구매가 망설여지는 지점이에요.^^

거리의화가 2023-09-22 15:57   좋아요 1 | URL
음... 저도 낯선 책들이 대부분이었는데요. 저자가 가이드 역할을 잘 해줘서 책을 읽고 싶게끔 잘 설명해놓았습니다. 저는 도서관 희망도서 신청하여 읽었는데요. 페크님 구매가 망설여지신다면 저처럼 희망도서로 읽어보시는 것도 좋은 선택일 것 같습니다^^

희선 2023-09-24 01: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기에서 말하는 책에서 관심 가는 게 많은 듯하네요 책이 책을 부르는 거군요 이 세계를 이해해 보고 싶은 욕심이라니 멋지네요 거리의화가 님 읽고 싶은 책 천천히 보시기 바랍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3-09-25 09:59   좋아요 0 | URL
네. 다양한 분야의 책들이 있어서 고르는 재미도 있어요. 저는 철학 쪽에 너무 약한 듯하여 그쪽으로 눈이 많이 갔습니다. 감사합니다 희선님^^
 
米小圈上學記(一年級)耗子是條狗 (平裝, 第1版)
北猫 / 四川少年兒童出版社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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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미샤오췐이 하오즈라는 개를 만난 이후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그렸다. 서로 다른 친구들을 만나는 즐거움과 더불어 뻔한 스토리가 아닌 곳곳에 반전이 숨어 있어 읽는 재미가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의 재기발랄함을 보는 흐뭇함은 덤! 중국어 두 번째 원서 읽기 책이었는데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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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3-09-19 14: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즐거웠어요!

거리의화가 2023-09-19 15:52   좋아요 0 | URL
자목련님 함께 즐겁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시리즈도 gogo해야겠어요!ㅎㅎㅎ

책읽는나무 2023-09-19 17: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두 덕분에 즐거웠어요^^

거리의화가 2023-09-19 17:49   좋아요 1 | URL
나무님 항상 감사합니다. 다음 시리즈도 재미나게 즐겨주세요!
 
피에 젖은 땅 - 스탈린과 히틀러 사이의 유럽 걸작 논픽션 22
티머시 스나이더 지음, 함규진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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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보고 내용이 짐작 가능한 책들이 있다. 이 책은 내겐 그렇지 않은 책이었다. ’피에 젖은 땅’은 BloodLand의 번역어이다. 이는 소련 서부로 구체적으로는 지금의 러시아 서부 일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발트 3국(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폴란드를 의미한다. 그럼 이 땅에서 피에 젖을 정도로 끔찍한 일이 벌어졌음을 예상할 수 있다. 언제, 어디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역사 분야의 신간이 나오면 으레 살펴보기 마련인데 이 책이 발간된 무렵도 그랬다. 다만 시간을 두고 읽기를 원해서 미루어 두었다(역사 하위 분야 중에서도 관심이 가는 분야가 있으면 신간을 바로 사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정말 궁금한 경우가 아니면 좀 묵혀 두었다 평가를 보고 읽는 편이다). 그동안 보관함에 묵혀두었다가 다른 신간이 나왔길래 이 책으로 미리 예열을 해볼까 해서 이제 접하게 되었다. 


아쉬운 점은 전체적으로 앞 수식이 길고 명사로 끝나는 문장의 번역어 투가 강해서 매끄럽게 읽히지 않았다. 그러니까 한국인이 사용하는 한국어 문장으로 번역이 안 되어서 잘 읽히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물론 중반 이후에는 독자도 문체에 적응하기 마련이어서 나도 어느 정도 감안하고 볼 수 있게 되었지만 말이다. 


나치주의와 스탈린 체제는 블러드랜드에서 1400만 명 이상의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갔다. 1932년 스탈린은 소련령 우크라이나에 집단화 정책을 실시하며 300만 명을, 1937년에서 1938년 사이에는 대공포 실시로 부농들과 소수 민족 70만 명을 학살했다. 1939년에서 1941년 사이 소련과 독일이 합동하여 폴란드 국민 20만 명을 학살했다. 1941년 스탈린을 배신하고 전쟁을 선택한 히틀러는 소련 전쟁포로와 민간인 400만 이상의 목숨을, 점령지 소련과 폴란드, 발트3국에서 540만 명의 유대인의 목숨을, 벨라루스와 폴란드 바르샤바의 빨치산 전투로 50만의 민간인의 목숨을 빼앗아갔다. 


사건에 가담한 인물, 그리고 관련 숫자는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이 책에서 주안점을 둔 것은 숫자 안에 포함된 사람들의 이야기들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거기에 집중하여 읽었다. 


1932년 우크라이나에서 펼쳐진 집단화 정책으로 극심한 피해가 발생했다. 이 무렵 우크라이나에서는 이런 동요가 아이들에게 불렸다고 한다. 이는 결코 아름다운 동요가 아니라 잔혹한 노래가 아닐 수 없다. 동요에서 당시 분위기를 적나라하게 느낄 수 있다.


스탈린 아버지, 이걸 보세요

집단농장은 정말 정말 멋지다나요

오두막은 망가졌고, 헛간은 꼴랑 내려앉았죠

말은 몽땅 지쳐서 주저앉았죠

오두막에는 망치와 낫이

헛간에는 죽음과 굶주림이 있대요

소는 한 마리도 남지 않았고, 돼지도 몽땅 사라졌대요

꼴랑 벽에 걸린 스탈린 아버지 사진만 있대요

아빠 엄마는 집단농장에 계세요

불쌍한 아이는 혼자 울면서 걸어간대요

빵도 없어요, 기름기도 없어요

공산당이 모조리 쓸어갔어요

친절함도 부드러움도 쓸려갔어요

아버지가 자기 자식을 잡아먹어요

당원은 아버지를 때리고 밟고

우릴 시베리아 수용소로 보내버리죠


1937년과 1938년 사이 대공포 시대 소련 서부 지역은 살육과 매장이 곳곳에 자행되었다. 일명 폴란드 박멸 작전으로 내무인민위원회 전담은 갑자기 마을에 나타나 지정된 숫자의 사람을 잡아들이고, 고문과 자백을 강요한 뒤 처형을 집행했다. 

체포된 남편의 아내들은 음식과 깨끗한 속옷을 들고 매일 의례적으로 면회를 갔다. 간수들은 더럽혀진 속옷을 건네주었다. 더럽혀진 속옷은 남편이 살아 있다는 유일한 증거였기에, 아내들은 기쁜 마음으로 속옷을 받았다. 간혹 남편들이 몰래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한 남편은 아내에게 보낸 속옷에 이렇게 적었다. “감옥생활이 너무 힘들어. 난 죄가 없는데.” 어떤 날은 속옷에 피가 묻어 있었다. 그 이튿날에는 속옷이 나오지 않았는데, 이는 남편이 더 이상 살아 있지 않음을 의미했다. 


1941년 레닌그라드 봉쇄가 있었던 겨울의 기온은 혹독했는데 사전에 비축해둔 식량과 땔감, 물이 떨어지자 10년 전 우크라이나의 기근의 상황이 이 곳에서 고스란히 재현되었다. 

레닌그라드 포위 당시 소녀였던 반다 즈비예리예바는 훗날 자신의 어머니를 회상하며 그녀를 향한 사랑과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우리 어머니는 참 아름다운 분이었어요. 그분의 얼굴은 모나리자와도 견줄만했을 겁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주머니칼로 나무를 깎아 그리스 여신상을 만들 만큼 예술가적 기질이 충만한 물리학자였다. 온 가족이 배고픔에 쓰러져가던 1941년 말, 그녀의 아버지는 가족들이 먹을 음식을 구할 배급 카드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은 채 자신의 사무실로 향했다. 그는 며칠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느 날 밤, 잠에서 깬 반다의 눈에 들어온 것은 낫을 든 채 그녀 곁에 서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저항했고 어머니를, 아니면 “그녀의 모습만 하고 있던, 그녀의 그림자”를 떨쳐냈다. 즈비예리예바는 어머니의 행동을 자신을 구하려 했던 것으로 해석했다. 자신을 빨리 죽여줌으로써 굶주림에 더는 고통받지 않게 해주려고 그랬으리라. 이튿날 그녀의 아버지가 먹을거리를 가지고 돌아왔지만, 어머니를 구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불과 몇 시간 뒤 어머니는 숨이 멎었던 것이다. 가족들은 시신을 묻을 수 있을 만큼 땅이 부드러워질 때까지 그녀의 시신을 바느질한 담요로 감싸 부엌에 놓아두었다. 아파트가 너무나 추웠기에 어머니의 시신이 썩는 일은 없었다. 봄이 되자 이번에는 아버지가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전쟁에서 밀리게 된 히틀러는 유대인 절멸에 대한 계획을 실천해 나간다. 


“러시아 중부” 나치 친위대 상급 장교 및 경찰 지휘를 맡은 이는 벨라루스에서 여성 및 아이를 죽이라는 지시를 내렸다. 

어느 독일인(오스트리아인) 경찰은 부인에게 쓴 편지에서 10월의 첫째 날 벌어진 유대인 사살 작전에 대한 자신의 심경과 경험을 밝히고 있다. “처음으로 총구를 당겼을 때, 내 손은 조금 떨리고 있었소. 허나 누구나 이내 익숙해지는 법이지. 열 번째가 되자 나는 수많은 여자, 어린이, 심지어 갓난아이까지 차분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조준 사살하게 되었다오. 내 머릿속에 가득했던 생각은 이 무리들을 살려두면 이들이 분명 내가 그들에게 했던 것만큼은 아니더라도 집에 있는 우리 두 젖먹이에게 그 못지않은 짓을 하리라는 것이었소. 우리가 그들에게 선사한 죽음은 게페우GPU 교도소의 수천만 명이 겪은 지옥 같은 고통에 비하면, 오히려 고통 없이 빠르게 죽여주는 아름다운 것이었소. 젖먹이들은 큰 원을 그리듯 공중으로 내던져졌는데, 우리는 그들의 몸뚱어리가 구덩이나 물에 떨어지기 전에 사격, 말 그대로 공중에서 갈가리 찢어버렸소.” 1941년 10월의 둘째 그리고 셋째 날, 독일인들은 (우크라이나 보조 경찰 인력의 도움을 받아) 모길료프의 남성, 여성, 아이 2273명을 사살했다. 그달 19일 또 다른 3726명이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독일 경찰들은 유대인 경찰들에게 특정 시간까지 주어진 장소에 유대인들을 끌어모으라고 지시했다. 먼저, 유대인들을 꾀어내기 위해 흔히 해당 장소로 나오면 음식을 내준다거나 좀더 유리한 “동부” 노동 인력으로 배정되었다는 등의 거짓 약속들이 주어진다. 그러고는 끌어모으기 작업이 진행되는 며칠 동안, 독일인 및 유대인 경찰들은 특정 구역 혹은 가옥들을 봉쇄하고 강제력을 동원해 해당 구역에 있는 사람들을 집합지로 몰아간다. 어린아이, 임신부, 장애인, 나이든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총에 맞았다. 베우제츠 수용소에 이동한 그들은 먼저 살균 소독을 위해 어떤 건물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고는 마찬가지로 살균 소독 후 돌려줄 테니 입고 있던 옷가지와 귀중품을 내놓으라는 말을 듣게 된다. 다음이자 마지막 단계에서, 그들은 발가벗은 채 이내 엔진 배기가스(일산화탄소가 들어 있는)로 가득 차게 될 정체불명의 방으로 들어간다. 베우제츠에 내린 유대인들 중 겨우 2~3명만이 목숨을 건졌고, 나머지 약 43만4508명은 한 명도 빠짐없이 죽음을 맞이했다. 


스탈린은 소비에트 공산주의 하에 집단화 정책으로 특히 우크라이나에 기근을 불러와 대참사를 일으켰으며 부농 및 소수 민족을 대량 학살하는 일을 저질렀고 히틀러는 유대인을 절멸하는 것으로 나치 숭배와 전쟁 승리를 정당화하려 했다. 

그러나 나치와 소련을 비인간화하여 몰아 그들을 가해자로 규정하는 것은 편리하지만 너무 단순하고 위험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나도 이 말에 동의했다. 


범죄자를 단지 잘못된 생각을 가진 사람으로, 따라서 그의 존재가 자신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여기기는 편리하다. 경제의 중요성과 정치의 복잡성을 무시해버리고, 그런 요인들이 사실상 역사의 죄인들이자 나중에 자신들의 행동을 후회할 자들과 매한가지라고 치부해버리면 더 편안할 수 있다. 더 유혹적이 될 만한 것은, 적어도 오늘날 서구인들에게는, 희생자들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그들이 블러드랜드의 범죄자와 방관자들이 대면해야 했던 역사적 배경과 같은 배경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외면하는 것이다. 희생자와 자기 자신의 동일시는 스스로는 범죄자와 전혀 다르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이들을 이해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도 기억을 지우는 일에 방조자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가해자의 행위에 집중하여 사건의 실체를 돌아보지 못하고 정작 버려지거나 지워진 기억들이 너무나 많다. 우리는 죽은 사람 한 명 한 명의 숫자가 아닌 삶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죽은 사람들은 기억된다, 그러나 죽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한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기억할 힘이 있고,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판단한다. 나중에는,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들의 죽음의 이유를 정한다. 의미가 살육 행위에서 나온다면, 문제는 더 많은 살육은 더 많은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데 있다.


각각의 사망 기록은 하나의 독특한 삶에 대해 그 존재를 제시하지만, 내용을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우리는 죽은 이의 숫자를 셀 뿐 아니라 죽은 이 한 명 한 명을 개인으로 취급해야 한다. 대규모 학살에 심층 조사를 실시한 경우는 홀로코스트로, 570만 명의 유대인이 죽었고 그 가운데 540만 명이 독일의 손에 죽은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이 숫자도, 다른 숫자들과 마찬가지로, 다만 추상적인 ‘570만’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하나의 570만 배’로 여겨져야 한다. 그것은 뭐랄까, 한 사람의 유대인이 570만 번 죽었다는 식의 의미가 아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은 하나하나 기억될 가치가 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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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09-18 01: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쟁에서 죽은 사람은 숫자로 말할 때가 많기는 하죠 한사람 한사람을 알면 전쟁 같은 거 일으키려 하지 않을지도 모를 텐데 싶네요 그렇게 해도 전쟁을 일으킬 사람 있기도 하겠습니다 그런 사람보다 그러지 않는 사람이 더 많으면 좋을 텐데... 한사람이 많은 사람을 이끌면, 히틀러처럼... 그런 것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스스로 생각하기도 해야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해도 자기 생각이나 마음을 지키기 어렵기는 하겠네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3-09-18 09:06   좋아요 2 | URL
이 책을 보면 기근으로 굶주려서 죽거나 수용소에 끌려가 죽거나 그런 세세한 사연들이 여럿 나옵니다. 그래서 읽는 게 괴롭기도 했는데 보통 우리가 전쟁사 하면 가해자에 주목하거나 전투의 면면만 살펴보기 쉬워서 주목하기 어렵죠. 그런 면에서 이런 책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고 봅니다. 희선님 감사합니다.

잠자냥 2023-09-18 10: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지금 읽고 있는 <베를린 함락>도 만만치 않네요. 붉은 군대가 복수한다고 독일 여성들 강간하는 장면이 너무 생생하.......-_- 독일 여성한테만 그러는 게 아니라 소련의 어린 소녀들한테도... 하....... 전쟁.

거리의화가 2023-09-18 10:38   좋아요 2 | URL
사실 이 책에도 그런 장면들이 여럿 나오는데 올릴까 하다가 비참해서 넘겼는데 <베를린 함락>은 더 할 듯한 예감이... 저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도 떠올랐습니다. 우크라이나가 그 때도 많은 피해를 입었었기 때문에 더 그런 것 같아요. 슬프네요 진짜ㅜㅜ

잠자냥 2023-09-18 10:45   좋아요 2 | URL
x놈들.. 전쟁은 남자놈들이 벌여놓구 피해는 여성과 아이들이 고스란히... 하.....(쌍욕했다가 화가님 서재라서 지움요 ㅋㅋㅋㅋ)

거리의화가 2023-09-18 10:57   좋아요 2 | URL
전쟁하면 피해는 약자들만 받는 구조기 때문에 정말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욕은 저도 하면서 읽었어요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