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1 - 왕건에서 서희까지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1
KBS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 지음, 이익주 감수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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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서를 읽는 일은 역시 지식을 적당하게 채우면서도 머리를 가볍게 해주어 즐겁다. 고려의 역사를 실로 오랜만에 읽게 되었다. 계기는 우연찮게도 11월에 방영될 대하 사극이 고려와 관련되어 있어서다. 물론 그것 때문만은 아니고 중국의 역사를 원나라까지 한 번 훓은 김에 고려의 역사를 병행하여 읽는 것도 재밌겠다 싶었다. 시작은 가볍게 읽는 것이 좋은데 그런 면에서 이 책이 적당하다 여겼다. 책은 TV 프로그램으로 봤다는 이유로 사두기만 하고 정작 읽어보지 못한 채 보관용으로만 갖고 있다 이제서야 펼치게 되었다. 어쨌든 갖고만 있으면 읽게 되는구나.


고려의 역사는 475년 동안 거란, 여진, 몽골(원), 홍건적과 왜구 등 세기 별로 전쟁이 이어지다보니 대부분 ‘전쟁’의 사건과 관련 인물들을 위주로 기억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역사 공부를 좀 한 사람이라면 기억할 만한 업적을 가진 초기의 ‘광종’과 후기의 ‘공민왕’ 정도나 알까. 

고려는 조선보다 훨씬 더 알려져 있고, 더 오래 전의 신라보다도 오히려 덜 알려진, 미지의 나라로 여겨진다. 하지만 고려는 우리 역사상 두 번째 통일의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다양성과 개방성이 살아 있어 오늘날 우리가 배울 점이 있는 나라였다. 지방 사람들이 세운 나라였고, 화려한 귀족 문화가 발전한 나라였으며, 불교와 유교가 공존한 나라였고, 넓은 세상과 교류한 나라였다. 이런 고려를 미지의 상태로 남겨 둔다면 우리의 한국사 지식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 P5


고려판 왕좌의 게임의 주인공 왕건 vs 견훤의 승자는 최종적으로 왕건이었다. 둘의 대결을 마치 오늘날의 선거판으로 재해석하여 내놓아 재미를 더한다. 

견훤은 후백제의 왕으로 활동 범위는 주로 오늘날의 전라도 지역이었는데 출생지는 경상도 상주 가은현 출신 호족 아자개의 아들이었다. 대부분의 건국 조상에 해당되는 이에 신화가 부여되듯 그에게도 어릴 적 호랑이가 젖을 물렸다는 설화와 지렁이의 아들이라는 설화가 존재한다. 지렁이가 한자로 ‘지룡’으로 표현되는데다가 지렁이의 한자가 ‘진훤’으로 표현되는 것을 보면 지렁이의 설화가 좀 더 설득력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둘의 싸움에서 견훤이 공산성 전투에서는 이겼으나 고창 전투(930)에서 지면서 승기는 넘어갔고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가 왕건에게 넘어가면서 힘이 더욱 실리게 되었다. 나중에 신라 경순왕의 귀부, 아들인 신검까지 왕건에게 귀부하면서 둘의 싸움은 종지부가 찍힌다.  물론 둘의 승부를 가른 결정적인 일은 지방 호족 세력들을 끌어들이고 민심을 얻는 데 왕건이 승리했기 때문일 것이다.


왕건은 결혼을 통한 동맹을 이용해 지방 호족의 지지를 얻었다. 총 29번의 결혼을 통해 25명의 아들과 9명의 딸을 두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를 제외하고 세 번째 결혼부터는 정략 결혼이 행해졌지만 이로 인해서 다음 왕위가 순탄치 않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개인적으로 제1왕후인 신혜왕후 유씨의 성격은 탄복할 만하였다. 궁예가 학정을 펼치니까 그 밑에 있던 사람들이 왕건에 가 함께 거사를 도모하려 했다(왕건은 주저하던 상황). 거사를 도모하는 회의 전 왕건이 아내에게 오이를 따오라고 내보냈는데(회의 내용을 듣지 못하게 하려고 고의로 내보냄) 밖으로 나가는 척하다가 휘장 속에 숨었다 그것을 걷고 나와 “의거를 일으켜 포악한 군주를 교체하는 일은 옛날부터 있었습니다. 지금 장수들의 의견을 들어보니 저도 의분이 솟구치는데 하물며 대장부야 어떠하겠습니까?” 하며 왕건의 군대 파병을 종용했다고 한다. 

우리 역사에서 성을 쓰고 본관이 정착된 것이 고려 초 지방 호족들에게 성을 하사하면서부터라고 한다. 알아두어야 할 키포인트다.

태조는 그 많은 아들 중 둘째 왕후의 아들인 ‘무’에게 일찌감치 정윤(조선으로 치면 ‘태자’)으로 책봉했는데(첫째 왕후는 아들이 없었음) 비록 처가 집안은 한미하였으나 장자 계승 원칙을 가능하면 지킴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꾀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고려 초기는 유독 조선 초기와 특히 비슷한데 왕자의 난까지 닮은꼴로 일어난다. 태조를 이어 혜종이 왕위에 올랐지만 병석에 눕자 태조의 아들이었던 왕요와 왕소가 대립했고 혜종의 장인인 왕규가 난을 일으켜 자신의 외손자이자 태조의 아들인 광주원군을 왕위에 올리려다가 실패하여 왕요가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상한 것은 왕규가 혜종의 장인인데 왜 굳이 난을 일으켜서 자기 발등을 찍었느냐 하는 것인데 사료가 충분하지 않다보니 결과만 놓고 추측할 수 밖에 없어 아쉬움이 인다. 혜종이 얼마 안 가 죽고 왕요가 정종으로 즉위한다. 정종은 서경 천도를 통해서 자신의 힘을 키우고자 했으나 민심이 곱지만은 않았고 서경 이외의 호족 세력도 반발했기 때문에 광종이 즉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광종은 조선판 태종과 나란히 둘 수 있을 정도로 개혁의 피바람을 몰고 온 왕이다. 집권 초기 7년은 조용히 숨죽여 지내다 ‘노비안검법’과 ‘과거제’ 시행으로 호족들을 충격에 빠뜨린다. 특히 ‘노비안검법’은 호족들에게 큰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 밖에 없었다. 일종의 노비 해방인데 자신의 권력 기반이었던 노비를 양민으로 전환시킴으로써 국가는 노동력을 확보하고 세금을 더 걷을 수 있겠지만 호족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노동력이 빠져 나가는 일이었다. 아무튼 광종 같은 사람이 정말 무서운 사람이 아닐까. 광종 집권 15년차가 되면 주변의 문제될 만한 인물들(혜종과 정종의 아들 등)을 모두 숙청하기 시작한다. 근데 또 숙청을 하는 동안에 사람의 넋을 위로하는 법회를 열고 절을 창건하고 구제안민책을 실시했다는 것을 보면 죄를 씻고 싶은 욕망도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조선의 정종도, 고려의 광종도 개국한 왕들에 이어 왕권을 유지하며 강화하고자 짐을 지은 공통점이 존재하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천추태후의 이야기는 언제 봐도 흥미롭고 재미있다. 드라마 <천추태후>가 방영되기 전에는 나도 잘 모르는 인물이었다. 그녀는 목종을 섭정하고 김치양과 사랑에 빠졌으며 김치양과 사이에 낳은 아들을 후계자로 삼으려 헌정왕후와 숙부 왕욱 사이 태어난 대량원군을 제거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고려 사람으로 유교적 이념으로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고려는 남녀를 불문 재산 균분 상속이었으며 부모 봉양 의무도 동일했던 만큼 딸과 아들의 차이가 없는 사회였고 이혼과 재혼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단지 고려 왕실은 족내혼이 기본이었기 때문에 김치양의 신분이 문제가 되는 것일 뿐이었다. 게다가 김치양은 천추태후 근거지인 황주 부근의 동주여서 자기 세력을 키우기 위한 이유도 있었다. 

이 무렵 국경을 수비하던 강조가 정변을 일으켰고 이 때문에 천추태후는 김치양과 두 아들을 모두 잃었으며 권력도 잃고 본거지로 쫓겨난다. 강조의 변에 대한 기록은 처음에 목종이 김치양을 제거하려고 강조를 끌어들였는데 강조가 김치양을 제거하면서 목종까지 폐위하고 대량원군을 현종으로 옹립했다고 되어 있다. 이처럼 천추태후는 강조가 수도로 오는 것을 막으려 했고 목종은 강조가 수도로 들어오길 원했다. 그런데 강조는 목종의 부름을 받고 정변을 일으키면서 김치양을 제거하는 것은 그렇다치고 왜 목종을 폐위하는 것으로 변모했는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이 사건도 사료가 불충분해서 정확한 것은 알 수가 없다는 게 안타깝다. 강조의 변은 거란이 고려를 쳐들어오는 데 빌미가 되기도 했고 향후 고려 사회가 호족 시대에서 귀족 시대로 넘어가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었다.


거란의 침입은 1차와 2차로 나뉘어진다. 1차 침입 당시 고려는 성종이라는 왕을 중심으로 왕권이 안정되어 있어 서희 같은 명장을 배출할 수 있는 토양이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에 성공하였다(강동 6주 획득). 그런데 제2차 침입 때는 강조가 목종을 시해하고 현종을 왕위에 올리면서 정치 체제가 불안정한 상태였기 때문에 강동 6주가 무너지고 개경이 함락되면서 현종이 몽진까지 하는 상황 속에 패배하고 만다. 


이처럼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의 1권은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과 전투에서 승리한 935년부터 거란의 침략으로 위기를 겪게 된 993년의 시기를 담고 있다. 책에는 우리가 역사서에서 배우는 내용도 있지만 잘 모르는 사실들, 오해하고 있는 내용들을 담고 있으며 이를 보충한 역사적 사료와 역사 패널들의 대화를 통해서 공부하는 효과까지 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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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1 - 사라진 알베르틴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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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존재가 우리 마음속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형태를 갖추고 시간이란 틀에 복종해야 한다. 연속적인 순간을 통해서만 나타나는 존재는 한 번에 한 모습밖에 보여 주지않으며, 그 모습에 대해서도 단 하나의 사진밖에 생산하지 않는다. 오로지 순간들의 집합으로만 이루어진 존재에게 그것은 큰 약점이지만, 또한 큰 힘이기도 하다. 존재는 기억의 영역에 속하며, 또 어느 한순간의 기억은 그 후 일어난 일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때 그 기억이 기록한 순간은, 그리고 그 순간과 더불어 드러난 존재는 여전히 살아 있으며 여전히 지속된다. 그리고 그런 파편화는 다만 죽은 이를 살아나게 할 뿐만 아니라 죽은 이를 무한대로 증식한다. - P110


과거의 사진을 볼 때 우리는 그 때의 자신과 만나면서 그 때의 기억이 고스란히 재현되는 일을 경험하곤 한다. 이 문장을 만나면서 지금의 나도 단 한 순간의 나이며 한 모습의 나라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지금의 나도 본인의 얼굴을 직접적으로 마주하지는 못하고 거울에 비친 한 쪽의 얼굴만을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도 타인도 나의 한 쪽면을 볼 뿐이다. 단 한 순간의 시점들이 점처럼 모여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알베르틴은 떠났지만 나는 한동안 고뇌를 하지 않는 듯 가장하며 생활해간다. 만약 그녀가 떠난 게 아쉬웠다면 직접적 그녀를 만나러 가거나 편지를 쓰는 방식으로 본인의 의사를 명확히 했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고 주변 사람을 대리자로 보내 지속적으로 떠보는 행동을 한다. 나는 과거 질베르트에게도 그랬었다. 좋은 일을 반복하는 것도 아니고 모순적 행동을 자기표절까지 해가면서 왜 할까. 최악이라 느껴졌다. 특히나 연인 관계에서 이런 태도는 모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행동이며 후회를 낳을 뿐이다. 


지금까지 나는 습관이 우리 지각의 독창성과 의식마저 제거하고 무로 돌리는 힘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나는 습관을 우리에게 고정된 무시무시한 신(神)으로 간주했고, 그 무의미한 얼굴이 그토록 우리 마음속 깊숙이 박혀 있어서, 만일 우리가 거기서 떨어져 나가거나 멀어지기라도 하면 여태껏 거의 알아볼 수 없던 그 신은 어느 누구보다 무서운 고통을 야기하고, 그리하여 죽음만큼이나 잔인한 존재가 된다. - P16~17


알베르틴이 편지를 보내왔다. “당신이 나를 필요로 한다면 왜 내게 직접 편지를 쓰지 않았나요? 그랬다면 매우 기쁘게 돌아갔을텐데…” 뒷 문장은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쨌든 첫 문장은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이었다. 이걸 보고 나는 후회하면서도 그녀에게 거짓 고백이 담긴 편지를 보낸다. 이때야말로 진심을 보이면 될 텐데 왜 또 거짓 답장인 것인지 모르겠다. 인간이란 어쩔 수 없이 나를 기준으로 타인을 생각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상황을 어렵고 힘들게 만드는 것은 자신의 행동 때문이 아니었나. 


한 존재와 우리의 관계는 오로지 우리 사유 속에만 존재한다. 기억이 희미해지면 그 관계는 느슨해지고, 우리는 환상에 쉽게 속아 넘어가고 싶어 하면서도, 또 사랑이나 우정, 예의나 체면, 의무감 때문에 타인을 속이면서도 결국은 홀로 존재한다. 인간은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며, 자기 안에서만 타자를 인식하며, 그렇지만 그와 반대되는 말을 하면서 거짓말하는 존재이다. - P65


나는 지난 9, 10권을 읽을 때도 생각했지만 알베르틴에 대한 나의 감정이 과연 사랑일까 싶었다. 진심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상냥함을 불신하는 태도로서는 어느 누구를 만나도 이런 행동은 반복될 것이다. 나의 감정은 그저 알베르틴이라는 얼굴의 이미지와 육체적 욕망 뿐이었다는 생각에 분노가 치밀었다. 

알베르틴은 더 이상 돌아올 수 없게 되었지만 나는 과거로 돌아가 그녀에 대한 탐색과 욕망을 이어간다. 이 때부터 피로한 감정이 밀려왔다.


우리의 잘못은 다른 이들의 상냥함과 지성에 무관심한 데 있다. 사랑하는 여인에게서 올 때라야 거짓은 분노를, 선의는 항상 우리 마음속에 고마운 마음을 다시 불러일으키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육체적 욕망은 우리의 지성에 진정한 가치를, 우리의 정신적 삶에는 단단한 토대를 마련하는 경이로운 힘을 가지게 된다. 다시는 결코 그 성스러운 존재, 다시 말해 모든 것을 다 얘기할 수 있으며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존재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 - P140


설령 내게 가르쳐 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해도, 나는 알베르틴이 사귀었거나 사귀었을지도 모르는 여인들, 그녀와 같은 환경이거나 또는 그녀 마음에 들었던 환경의 여인들, 한마디로 알베르틴과 비슷한 매력을 가진, 또는 그녀의 마음에 들었던 여인이라는 매력을 가진 여인에게만 마음이 끌렸다. 이렇게 알베르틴 자신을, 또는 알베르틴이 좋아했을지 모르는 타입의 여인들을 환기하다 보니, 그 여인들이내게 질투와 회한이 섞인 잔인한 감정을 깨어나게 했는데, 이런 감정은 나중에 슬픔이 진정되었을 때 조금은 매력이 없지도 않은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 P229


지난 리뷰에서 주인공이 알베르틴이라는 이미지를 좋아할 뿐이라는 이야기를 했었다. 이 문장을 보니 내가 느꼈던 감정의 내용이 그대로 문장에 나와서 깜짝 놀랐다. 역시 그는 그런 이미지들의 여자만을 추구했던 것이다. 


나는 그녀를 다시 볼 수 없게 되었고 망각의 길로 들어가야했다. 개인적으로 망각은 시간만이 해결해준다고 믿는다. 아무리 힘든 기억이라도 시간은 기억을 흐릿하게 만들며 감정을 무뎌지게 만든다. 

나는 주변의 사람들을 당장은 받아들이지 못했으나 주변에 있는 사교계 사람들 등 지인들과 교류하면서 알베르틴 없는 삶을 살아갈 동력을 점차 얻게 된다.


어쩌면 그때 내가 느낀 피로감과 슬픔은 이미 망각한 것을 헛되이 사랑한다는 사실보다는 살아 있는 새로운 사람들, 순수한 사교계 사람들, 그들 자체로서는 전혀 흥미롭지 않은 단순히 게르망트네의 친구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내가 좋아하기 시작했다는 데에서 더 많이 연유하는지 몰랐다. 사랑했던 여인이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빛바랜 추억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 편이, 활기차지만 기생충과도 같은 인간 식물군으로 우리의 삶을 장식하면서 시간을 낭비하는 공허한 활동의 발견보다는 어쩌면 더 쉽게 내 마음을 달래 주었을 것이다. 그런 식물군도 죽으면 또한 무로 돌아갈 것이며 우리가 알았던 것과도 이미 무관해질 텐데도, 우리의 수다스럽고 우울하고 영합적이며 노쇠한 존재는 그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애를 쓴다. 이제 알베르틴 없이도 쉽게 삶을 견딜 수 있는 새로운 존재가 내 마음속에 출현했다. - P302


어머니는 몇 주일 동안 나를 베네치아에 데려갔다. 나는 그곳에서 콩브레의 기억이 소환된다. 이는 베네치아의 일상적인 삶이 과거의 콩브레의 풍경과 비슷하다 여겨졌기 때문이다. 산마르코 대성당, 리알토 다리, 대운하…

나는 산마르코 대성당을 보면서 단순한 건축물이 아닌 살아 있는 존재처럼 느꼈다. 시간의 색조의 선명함을 보존한 곳에서 성당은 마치 거대한 벌집 모양의 밀랍 모형처럼 부드럽고 유연한 재료로 만들어진 듯 보였고, 반대로 시간이 재료를 딱딱하게 만들고 또 예술가들이 투조 세공하고 금박으로 장식한 곳에서는 코르도바 가죽으로 장정한 베네치아의 복음서 귀중본처럼 보였다. 


나는 처음으로 「마귀 쫓는 의식을 거행하는 그라도의 총대주교」란 그림을 보았다. 높은 굴뚝을 상감하듯 박아 넣은 선홍빛과 보랏빛의 그 경이로운 하늘을 나는 오래 바라보고 있었는데,튤립꽃이 피어나듯 벌어진 굴뚝모양과 붉은색이 휘슬러가 그린 많은 베네치아 풍경을 연상시켰다. 그리고 내 시선은 오래된 리알토 나무다리에서 금빛 기둥머리로 장식된 대리석 궁전이 있는 그 ‘15세기의 베키오 다리‘로 갔다가 다시 대운하로 돌아갔는데, 분홍빛 재킷 차림에 깃털 달린 챙 없는 모자를 쓴 젊은이들이 작은 배를 모는 모습이, 마치세르트와 슈트라우스와 케슬러가 만든 그 경탄할 만한 발레 「요셉의전설」에 나오는, 진짜 카르파초를 연상시키는 인물과 혼동될 정도로 닮아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림을 떠나기 전, 내 눈은 당시 베네치아 삶의 정경으로 가득한 운하 기슭으로 되돌아갔다. 면도기를 문지르는 이발사, 술통 든 흑인, 대화 중인 이슬람 교도들, 다마스쿠스산의 화려한 비단 옷과 버찌 빛깔의챙 없는 벨벳 모자를 쓴 베네치아 귀족들. 그러다 나는 갑자기 가슴을 가볍게 깨무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소매와 깃에 금박과 진주로 수놓은 장식에서 그들이 가입한 즐거운 협회의 표시를 알아볼 수 있는 그 ‘칼차의 동반자들 중 한 사람의 등에서, 알베르틴이 나와 함께 베르사유로 무개차를 타고 갔을 때 입었던 망토를 알아본 것이다. - P392~394


이 그림은 비토레 카르파초의 ‘성십자가의 기적’으로 베네치아 리알토 다리의 옛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그림으로 실제 내용은 그라도의 총대주교가 리알토 다리 옆에서 마귀 쫓는 의식을 거행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 그림을 보면서 주인공은 알베르틴에 대한 사랑을 환기했다.



나는 베네치아에서 돌아와 앙드레와 만나 놀라운 이야기를 듣는다. 알베르틴이 베르뒤랭 연회에 참석하고 싶어했던 이유가 봉탕 부인이 알베르틴의 결혼 상대로 생각한 베르뒤랭 부인의 조카를 만나기 위한 것이지, 뱅퇴유 딸과의 만남 때문이 아니었다는 사실, 알베르틴의 필체로 오인한 질베르트의 전보가 실은 질베르트와 생루의 결혼을 알리는 청첩장이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생루가 질베르트와 결혼한 것도 그녀가 가진 부와 모렐과의 관계를 숨길 수 있어서이고, 샤를뤼스가 모렐로부터 버림받은 쥐피앵의 조카딸을 양녀로 삼은 뒤 캉브르메르 후작의 아들과 결혼시킨 것도 모렐에 대한 복수 때문이었다. 질베르트는 파리의 포르슈빌 가에 상속녀가 되었지만 부와 명예에 철저히 이용되면서 정작 본인의 삶은 불행히 이어간다. 


그 먼 시절이 긴 고통에 지나지 않았던 영혼의 상태로부터 이제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마멸되고 사라지는 이 세상에서 폐허로 변하는 것, 아름다움보다 잔해를 덜 남기면서 보다 완전하게 파괴되는 것은 바로 슬픔이기 때문이다. - P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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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10-03 13: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벌써 11권! 이제 얼마 안남으셨군요~! 전 개인적으로 11권이 가장 좋았었습니다.
역시 화가님이어서 그림도 찾아보셨군요 ~!!

거리의화가 2023-10-03 15:49   좋아요 1 | URL
네. 힘들어서 얼른 끝내고 싶은데 아직도 2권이 남았습니다ㅋㅋㅋ 그림은 항상 궁금해서 찾아보게 되더군요^^; 책의 설명과 비교하면서 보는 맛도 있고요^^
새파랑님은 11권이 가장 좋으셨군요! 저는 아직까지도 1~3권이 가장 좋았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이 어떻게 결론이 날지 궁금하네요.

페크pek0501 2023-10-03 14: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다른 책을 읽느라 레 미제라블2에 머물러 있어요.님의 꾸준함을 본받겠습니다.

거리의화가 2023-10-03 15:51   좋아요 1 | URL
페크님 거의 10개월째 읽다보니 힘들어서 이제는 좀 끝내야겠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도 평소 여러 권의 책을 읽는데 잃시찾 시리즈는 한번에 몰아읽기가 힘들어서 계속 쉬다 읽다를 반복하고 있네요. 어쨌든 남은 2권은 올해 안에는 끝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페크님의 독서 생활도 응원합니다^^
 
루쉰 소설 전집 을유세계문학전집 12
루쉰 지음, 김시준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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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 중단편 소설들이 한 권에 담겨 있다. 루쉰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을 테지만 정작 소설을 한 편도 읽어보지 못했거나 나처럼 아큐정전이나 광인일기 정도만 읽은 이도 많을 것 같다. 루쉰은 중국의 대표적인 문학 작가이지만 그는 단순히 그 타이틀로만 평가되지는 않는다. 중국의 신해 혁명 후 스스로가 근대 중국을 여는 길을 주도했기 때문에 근대의 포문을 연 사상가라는 평가를 받으며 무엇보다 자국 뿐 아니라 일본, 한국에서도 유명세를 떨쳤던 사람이었다.


주안 평전을 읽고 나서 이제는 루쉰의 소설을 읽어보고 싶었고 기왕이면 제대로 읽어보자 해서 이 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책의 번역이 매끄럽게 잘 되어 있어 읽기 참 수월했다. 무엇보다 인물들의 이름도 중국어를 한자로 표기했을 때의 발음이 아니라 중국어 발음을 한국어로 소리나는 대로 옮겨 놓아서 현실감이 더 있었다. 중국어를 공부하고 있어서인지 더 감정 이입이 잘 되었던 것 같다.


시기별로 제1소설집에서부터 제3소설집까지 실려 있다. 


<광인일기>의 주인공은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노리고 있다는 망상에 사로 잡혀 있다. 증상은 점점 심해지고 급기야 사람들이 자신을 잡아먹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고 만난 사람에게 “사람을 잡아먹는 일이 옳은 거요?” 묻는다. 

자신이 사람을 잡아먹고 싶어 하면서 또 남에게 잡아먹힐까 봐 두려워서, 모두가 지극히 의심이 깊은 눈빛으로 서로의 얼굴을 살핀다. 그런 생각을 버리기만 하면, 안심하고 일을 하고, 길을 걸어다니고, 밥을 먹고, 잠을 잘 수 있을 테니 얼마나 편안하겠는가. 이는 단지 문지방이요, 문턱일 뿐이다. 그들은 정녕 부자, 형제, 부부, 친구, 스승과 원수 관계이며, 또 서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까지도 모두가 한 패거리가 되어 서로 이끌어주거나 서로 견제하면서, 죽어도 이 한 걸음을 넘어서려고 하지 않는다. - P30

먹고 먹히는 관계. 자본주의 사회로 경쟁에 내몰린 사람들을 생각했다. 이는 비단 개인들 간의 관계 뿐 아니라 나라 대 나라, 당시의 국제 관계를 떠올리게 했다. 광인일기는 충격도와 강렬함 면에서는 그의 작품 중 단연 최고이지 않을까 싶다.


<고향>의 주인공은 어릴 때 함께 생활했던 친구와 계급적 차이로 인해 자연스레 멀어지게 되었다. 비단 이것이 근대 중국의 일 뿐일까. 현대에도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계급은 만들어지고 보이지 않는 차이가 존재한다. 상위 계급은 아래를 내려다보고 무시하며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가지를 쳐낸다. 오늘 당장 먹을 것이 있었으면 하는 희망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편 다른 한 쪽에서는 거대한 꿈이 희망일 수도 있다. 이런 이들이 길 위에 존재한다.

“부자들은 있으면 있을수록 한 푼도 풀려고 하지 않고, 한 푼도 풀려고 하지 않으니 더욱 부자가 될 수밖에.” - P106

아무리 오랜만에 만났지만 법적으로는 평등사회가 되었음에도 그는 “나으리”라는 말로 친구를 호칭한다. 둘 사이의 거리는 여전히 두터운 장벽으로 막혀 있으며 나도 말이 편해질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나와 친구는 멀어졌다 해도 나는 미래의 세대가 괴로움을 덜 갖기를 원하며 마땅히 새로운 생활을 가질 수 있길 꿈꾼다. 하지만 그 소망은 막연하고 아득하다. 

희망이란 것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사실 땅 위에는 본래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곧 길이 된 것이다. - P113

지금 우리는 그가 꿈꾼 이상을 실현 중인가.


도시에 살던 <복을 비는 제사>의 주인공은 섣달 그믐 고향의 숙부댁을 방문했다가 그 집에서 일하던 하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알게 된다. 그는 듣자마자 며칠 전에 길에서 만난 어떤 여자를 떠올리는데 죽으면 영혼이 사라지느냐에 대해 집요하게 물어 자신을 당혹시켰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단시간 내에 답을 얻기 어려운 질문에 대한 답 때문에 곤혹스러워했고 상황을 빨리 피하고 싶어했다. 결국 “정확히 말할 수는 없어요… 사실이지 영혼이 있는지 없는지도 나는 정확하게는 몰라요.”라고 답하는데 이 대답이 최선이지 않았을까. 물론 주인공에게는 그것이 다른 도화선이 된다. 

‘정확히 말할 수는 없다‘는 말은 매우 쓸모 있는 말이다. 세상경험이 없는 용감한 청년은 때로 타인을 위해서 의문을 풀어 주기도 하고, 의사를 불러다 주기도 하지만 만일 그 결과가 좋지 않으면 대개는 도리어 원한을 사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 ‘정확히 말할수는 없다‘는 한마디로 결말을 지어 두면 모든 일에 거리낌이 없게 된다. 나는 지금 이 한마디 말의 필요를 실감하였다. - P243

그녀는 무척 힘든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거듭되는 불행에 삶에 대한 회의가 찾아올 때 어디에라도 의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그녀는 반복해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비참한 이야기를 했고, 항상 너덧 명이 그녀의 이야기에 이끌려 듣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안 되어 모든 사람들은 귀가 닳도록 들어서 가장 자비심 많고 부처를 잘 믿는 노부인네들의 눈에서조차 한 방울의 눈물도 볼 수없게 되었다. 나중에는 온 마을 사람들이 그녀의 이야기를 외울정도가 되었고, 마침내는 듣는 것조차 넌더리치게 되었다. - P258

하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이 하나 없고 자신의 상황을 타개해나갈 방법조차 보이지 않는 상황은 뼈아플 수밖에 없었다. 


<고독한 사람>의 웨이렌수는 서양식 학문을 공부하고 중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며 이상을 펼칠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막상 학교는 자신의 미래를 펼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구습에 얽매인 학교를 보며 그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감을 느낀다.  어느 날 할머니의 장례 때문에 고향에 갔다가 서양식 공부를 한 손자의 행동을 주시하는 어른들을 만나 싸움에 휘말리지 않고 스스로 피곤해지지 않기 위해 손자 편을 들어주지 못하고 어른들의 장단에 맞춰준다. 그는 학교에 돌아오지만 결국 교원으로 적응하지 못한 채 그만두고 먹고 살기 위해 군벌의 고문으로 취직하게 된다. 

내게는 아직 할 일이 있소. 나는 그걸 위해 구걸하고, 그걸 위해서 굶주리고, 그것을 위해서 추위에 떨고, 그것을 위해서 쓸쓸해 하고, 그것을 위하여 쓰라린 고생도 기꺼이 감수했소. 다만 멸망하는 것만은 원하지 않았소. 보시오. 내가 좀 더 살아 있기를 바라는 한 사람의 힘이 이렇게도 컸소. 그러나 지금은 없소. 한 사람도 없소. 동시에 나 자신도 살아갈 자격이 없다고 여기고 있소. 다른 사람이오? 역시 자격이 없소. 동시에 나 자신은 또한 내가 살아가기를 원치 않는 인간들을 위하여 고집으로라도 살아가겠다고 생각하고 있소. - P378

하지만 현실과 타협해버린 자신을 끝내 용서하지 못하고 파멸하고 만다. 


<이혼>의 주인공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는 생각을 했다. 봉건사회가 굳건했던 당시의 농촌에서 한 부부가 있었다. 남편이 바람을 피웠는데 그 부정행위를 안 부인은 저항하다가 부당하게 이혼을 당한다. 

“나는 화가 나서 그래요. 생각해 보세요. 짐승 같은 아들놈은 젊은 과부와 눈이 맞아서 나를 싫다고 하니, 일이 그렇게 쉽게 될 수 있겠어요? ‘짐승 같은 아비는 자식 놈의 편만 들면서 나보고 필요 없다고 하니, 쉽게 되겠냐구! …” - P441

일이 커져서 마을의 어른이 나서서 이 일을 수습하려고 하지만 이게 어디 중재한다고 될 일인가. 그는 여전히 남편이 바람을 피웠기 때문에 이혼은 당연한 것이라며 당당히 맞선다. 

“다 저들 ‘지승 같은 늙은이’와 ‘짐승 같은 놈’들이 미리 꾸며 놓은 대로 되는 거죠. 그들은 마치 초상을 알리러 가듯이 서둘러 개구멍으로 빠져 나가려나 하구, 약아빠진 인간들… 

그러는 그는 어디 점잖은 데가 있습니까? 입을 열었다 하면 ‘천한 종자’라느니, ‘어미를 잡아먹을 년’이라느니, 그 잡년과 사귄 뒤로는 저희 조상까지 들먹거렸답니다….” - P450, 451

비록 욕은 들어먹었을지언정 남은 그녀의 인생을 생각하면 속이 다 시원한 결말이 아닐 수 없다. 


제3소설집은 과거 중국의 신화와 전설, 대학자들의 작품과 이야기를 끌어왔으나 이를 루쉰만의 방식으로 개편하여 내놓는다. 여와의 이야기가 담긴 <하늘을 보수한 이야기>, 물을 다스린 곤와 우의 이야기가 담긴 <치수>, 노자와 공자의 학설을 비교한 <출경>, 묵자의 학설을 담은 <전쟁 반대>, 장자의 학설이 담긴 <죽은 자 살리기>가 있다. 

사실 이야기를 그대로 가져다 쓴 것이 아니라 현대의 공간과 물체를 가져다 쓴 것이 많아 좀 난해하기도 하다. 그렇지만 <고사리를 캐는 사람>은 백이, 숙제가 나오는데 현대의 양로원이 배경이어서 결코 고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특히 <전쟁 반대> 같은 작품은 제목도 그렇고 묵자의 학설을 평소에 좋아하기 때문에 호기심 있게 읽을 수 있었다. 


루쉰 소설을 접하고 싶은 분들에게 조심스레 추천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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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10-01 21: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게는 일월서각에서 나온 아주 오래된 노신전집이 있습니다. 이걸로 바꿀까 생각중입니다.

거리의화가 2023-10-03 07:55   좋아요 2 | URL
최신판으로 읽어보시는 것도 좋겠죠. 번역이 훌륭하더라구요^^

2023-10-07 2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0-08 08: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0 - 갇힌 여인 2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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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특히 우리가 아는 사람들에 대한, 그들과 가졌던 관계며 우리와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행동 동기에 대한 완벽한 거짓말,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사랑하는 것, 또 우리를 사랑하고 또 우리를 하루 종일 포옹하고 있어 우리를 자신과 닮은 존재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존재에 관해 우리가 느끼는 감정에 대한 거짓말, 이런 거짓말이야말로 새로운 것이나 미지의 것을 향한 전망을 열고, 또 마비된 감각을 일깨워 우리가 결코 알지 못했을 세계를 관조하도록 하는, 이 세상에서 드문 것 중 하나이다. - P42


브리쇼는 내게 베르뒤랭 살롱에서 주최하는 음악회가 열린다는 정보를 전해준다. 샤를뤼스는 브리쇼가 젊은 남자와 산책한다는 이유로 소르본대학에 협박성 고발장을 날린다(이런 면에서 보면 샤를뤼스는 보수적인 것 같기도 하다). 샤를뤼스는 실수로 레아가 보낸 모렐의 편지를 열어봤다가 큰 충격을 받는데 이는 모렐이 남성에게만이 아니라 여성에게도 매력을 받는 존재라는 생각에 두려움과 동시에 불안을 느낀 것이 아닐까. 


베르뒤랭 부인은 자신의 살롱이 공연 프로그램과 공연단을 일류로 꾸리며 관객들을 끌어모으려 노력한다. 게르망트 공작 부인의 살롱이 일류였기에 자신도 그에 견주어 뒤지지 않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샤를뤼스 남작이 살롱 모임에 귀부인들에 해당하는 참석자들을 배제시키자 베르뒤랭 부인은 크게 분노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베르뒤랭 부인은 샤를뤼스와 모렐의 관계를 이용하여 브리쇼로 하여금 샤를뤼스를 철저히 매장시킬 것을 주문한다. 


내 연로한 대화 상대자에게만 존재하여 내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빛깔을 가진, 순전히 정신적인 것이 된 그 부분은, 외부 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와 우리의 영혼 속으로 피신하여, 영혼에 더 많은 가치를 주고, 또 영혼의 일상적인 실체에 동화되어, 영혼 속에서 추억의 반투명한 설화 석고로 변하면서 기억 속에 떠올리는 파괴된 집들이며, 옛사람들이며, 야식용 과일을 담은 굽다리 접시며 오직 우리에게만 보이는그 빛깔을 우리는 결코 타인에게 보여 줄 수 없으며, 그래서그들이 어떤 관념도 가질 수 없는 이런 지나간 물건들에 대해, 우리는 그것이 그들이 보아 왔던 것과 전혀 닮지 않으며, 또 우리 자신도 어떤 감동 없이는 바라볼 수 없다고, 마음속에 꺼진 등불의 그림자나 더 이상 꽃피지 않을 소사나무의 향기가얼마 동안 존속하는 것도 바로 우리 사유의 존재에 달렸다고생각하면서, 있는 그대로 말할 뿐이다. - P161


모렐은 베르뒤랭 부인의 계획을 눈치채고 샤를뤼스에게 절교 선언을 한다(그는 철저한 권력 지향주의자다). 그러나 베르뒤랭 부인은 겉으로는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말하면서도 샤를뤼스가 그에게 세심함이나 배려는 부족했다며 은근한 비난조를 덧붙인다. 샤를뤼스는 이후 베르뒤랭 네 집에서 쫓겨났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그 세계에 더 이상 발을 못 붙이게 되었고 병까지 깊어진다.


평화에의 의지를 꽃피우기 위해 사람들이 권하는 가장 잘못된 격언인 전쟁 준비는, 이와는 반대로 각각의 적들에게 상대방이 결별을 바란다는 믿음을 야기하며, 이 믿음이 결별을 가져오고, 그래서 결별이 실제로 일어날 때면, 둘 중 하나에게 결별을 원한 것은 바로 상대방이라는 또 다른 믿음을 야기한다. 비록 진심이 아니었다 해도, 일단 협박이 성공하면 그것은 또 다른 협박을 부추긴다. 그러나 이 허풍이 어디까지 성공할지, 그 정확한 지점을 결정하기란 어렵다. 허풍은 진지함과 혼동되거나 교차할 수 있는데, 어제는 단순히 장난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내일은 현실이 되는 수가 있다. 끝으로 적들 중에 어느 한쪽이 실제로 전쟁을 결심하고, 이를테면 알베르틴의 경우에는 머잖아 더이상 이런 삶을 계속하지 못하겠다고 생각할 수 있으며, 또는 반대로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그런 생각이 한 번도 떠오른 적이 없으며 그저 내 상상력이 송두리째 지어낸 것일수도 있다. - P296~297


나는 계속하여 칩거 생활중이었으나 알베르틴과 ‘헤어질 결심’만 반복한 채 결별을 미루고 언젠가는 헤어질 것을 예상하면서도 그녀를 놓지 못한다. 자유로웠던 발베크의 소녀가 따분하고 자신에게 순종적인 수인 같은 삶을 사는 것을 지켜보자 그녀를 갇힌 여자라고 생각한다. 정작 갇혀 있는 것은 나다. 


그녀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알베르틴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발베크에서처럼 끊임없이 자전거를 타고 도망치며, 또 친구들과 함께 자러 간 수많은 작은 해변들 때문에 찾을 수 없었고, 게다가 그녀의 거짓말로 인해 더욱 포착하기 어려웠던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제 내 집에 온순하게 홀로 갇힌 그녀는, 발베크에서 내가 그녀를 발견했을때 해변에서 보았던 그런 도망치는 신중하고 교활한 존재가아니었으며, 그 존재가 능숙하게 감출 줄 알았던 수많은 밀회로, 그토록 나를 고통스럽게 하여 사랑할 수밖에 없게 했던 밀회로 길게 이어지면서, 다른 이들을 대할 때면 그토록 냉정한태도와 진부한 답변 아래 전날과 내일의 밀회가 느껴지고, 또내게는 멸시와 술수로 에워싸인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녀는 바람이 불어도 옷이 부풀지 않고, 특히 내가 날개를 잘라 버린 탓에 더 이상 승리의 여인이기를 멈춘, 오히려내가 떨쳐 버리기만을 바라는 귀찮은 노예였기 때문이다. - P311


‘예술의 실재’와 ‘실재’는 서로 다르다. 예술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는다. 관객이 보는 대로 예술성이 전달된다. 나는 예술도 사랑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사랑의 주체인 내가 보는 상대, 상대가 보는 나가 다르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감정은 자연스레 서로 같은 비율일 수도 없을 뿐더러 각자의 모양은 다를 수밖에 없다. 

옆사람을 만났을 때 먼저 좋아한 것은 그였다. 이후 어느샌가 나도 스며들어 좋아하게 되었다. 그렇게 둘의 시간은 다르다. 그리고 공간도 마찬가지, 내가 특별하게 느끼는 장소와 그가 특별하게 생각하는 장소가 다른 적이 많았다. 우리의 사랑은 각자가 저장한 시간과 공간 속에 자리하고 있다. 


알베르틴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얼마나 많은 장소들을(그녀와 직접 관계없는 장소라 할지라도, 그녀가 맛볼지도 모르는 쾌락의 어렴풋한 장소,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의 몸을 스치는 장소), 지금까지 그런 사람들과 장소에 관심이 없던 내 상상력이나 추억의 문턱으로부터 ㅡ 마치 개표구에서 수행원이나 한 무리의 친구들을 자신보다 먼저 극장 안으로 들여보내는 누군가처럼 - 내 마음속으로 이제 그런 사람들이나 장소에 관한 나의 적으로, 경련을 일으키는 고통이 되었다. 사랑이란 우리의 마음에서 지각되는 공간과 시간이다. - P337


나는 이별의 순간을 상상하고 열망했다. 베네치아를 가고 싶었는데 그녀가 방해꾼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사랑은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지만 근본적으로 이는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래서 사랑의 부재이다. 출발한다고 하면 그제서야 절박해지는 아이러니 같은 것인지 모른다. 내가 떠나려 했지만 결국 그녀가 떠났다. 


내가 어두운 방에 있다 해도, 지금 내 양옆으로 수레국화와 개양귀비와 선홍색 클로버를 피어나게 하여 전원의 냄새처럼 나를 취하게 했으며, 그러나 산사나무에 부착되어 끈적거리는 짙은 요소에 붙들린 채 울타리 앞에서 뭔가 안정적으로 감도는 냄새처럼 한정되고 고정된 냄새가 아니라, 그 앞에서 길들이 사라지고, 지형이 달라지며, 성들이 달려가고, 하늘빛이 희미해지고, 우리가 가진 힘을 열 배로 커지게 하는 힘과 도약의 상징과도 같은, 내가 발베크에서 느꼈던, 그 크리스털과 강철로 만든 우리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망을 되살아나게 하는 냄새였다. 그 욕망은 낯선 고장에서 미지의 여인과 더불어 사랑을 나누는 것이었다. "파리지앵, 일어나요, 일어나요, 그늘 아래로 아름다운 소녀와 함께 점심 먹으러 가요, 강으로 보트를 타러 가요. 일어나요, 일어나요." 그리고 이 모든 몽상은 너무도 즐거웠으므로, 내가 부르지 않으면 프랑수아건 알베르틴이건, 어떤 '소심한 인간'도 나를 방해하러 '궁중 깊은 곳'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준엄한 율법'을 정해 놓은 일을 스스로 칭찬했다. - P379~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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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3-09-30 14: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베르뒤랭 부인을 보면서 그 세계가 무척 매정하다는 생각을 했고
모렐은 정말 나쁜놈이라는 생각도 했어요.
화자가 알베르틴에 대해 느끼는 감정도 별로 맘에 들지 않았어요.
사랑이 이렇게 쉽게 변할 수 있을까요~~

거리의화가 2023-10-01 09:30   좋아요 2 | URL
사교계는 지금의 정치판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권력을 잡거나 유지하기 위해 혈안이 된 모습이 악귀처럼 느껴져서 섬뜩하기도 했습니다.
저도 화자가 알베르틴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어떠한 정형화된 이미지나 사물을 보는 느낌이어서 결국 알베르틴이 아니더라도 그 이미지에 맞는 사람에게는 동요를 느끼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희선 2023-10-03 03: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람이 다르게 보인다고 마음이 바뀌다니... 잘 모를 때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겠지만, 조금 가까워지면 달라질 것 같기도 한데, 그런 것도 받아들여야 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이 책 앞으로 세권 남았네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3-10-03 07:58   좋아요 0 | URL
한 권 마무리해서 이제 2권 남았는데 진짜 이 책은 한 번에 쭉 읽기가 너무 힘든 책입니다ㅠㅠ 이달에 다 읽어버리고 싶긴 한데 어찌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는 대사가 갑자기 떠오르네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9 - 갇힌 여인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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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우연성의 세계에 더 많이 열려 있던 내게 이런일은 그만큼 더 위험했다. 가능성의 세계는 인간의 영혼을 이해하도록 도와주지만, 개인에게 속을 위험이 있다. 내 질투는 가능성이 아닌 이미지에서, 내게 고통을 주기 위해 생겨난 것이었다. - P38


어느덧 잃시찾 시리즈 9권까지 왔다. 특히 5~8권이 읽기가 힘들어서 진도도 잘 안 나가고 이해도 된 건지 아리송함만 더 커졌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1권부터 4권까지도 아리송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8권까지 읽고 지치는 것 같아 거의 한 달 정도 쉬었다가 추석 연휴를 이용해 9권과 10권을 읽었다. 


알베르틴은 크루즈 여행을 떠나지 않는 대신 내가 사는 파리 집에 들어와 같이 살게 되었다. 그에 대한 어머니의 반응은 ‘찜찜한’ 허락이라고나 할까. 다 큰 어른을 말린다고 들을까 싶은 생각에 그랬을 것이다. 

나는 알베르틴에게 ‘권태로운 집착’을 이어간다. 알베르틴에게 조금도 사랑을 느끼지 않는다 생각하면서도 그녀의 하루 일과에 몰두(열중)한다. 그마저도 타인에게 그녀에 대한 감시를 맡기고 스스로를 집안에 가둔다. 사랑이라는 감정의 단계에서 질투는 반드시 필요한 것일까.


단조로운 습관이 침묵하게 한 악기와도 같은 우리라는 존재 안에서, 노래는 모든 음악의 원천, 다시 말해 어떤 날의 날씨가 우리로 하여금 금방 하나의 음에서 다른 음으로 넘어가게 하는 이런 악기의 차이와 변화에서 생겨난다. 그리하여 우리는 수학적 필연성으로 예측할 수 있었지만, 처음 순간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노래하는 그 망각했던 곡을 되찾는다. 밖에서 온 변화지만, 이런 내적 변화만이 외부 세계를 새롭게 했다. 오래전부터 닫혀 있던 사잇문이 내 머릿속에서 다시 열렸다. 몇몇 도시에서의 삶이, 몇몇 산책의 즐거움이 내 마음속에서 다시 그 자리를 되찾았다. 바이올린의 진동하는 현 주위에서 온몸을 떨면서, 나는 이런 특별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습관이라는 지우개로 지워 버린 내 퇴색한 과거의 삶과 미래의 삶을 기꺼이 포기했을 것이다. - P40~41


모렐(샤를=샤를리)은 샤를뤼스 남작에게 쥐피엥의 조카딸과 결혼하고 싶다 말한다. 쥐피엥은 샤를뤼스의 심복이었고 남작과 특별한(!) 관계였기 때문에 허락을 요청한 것이다. 모렐은 바이올리니스트로의 자부심이 있지만 권력 지향적인데 스스로의 힘으로 올라서기보다는 권력자들(대귀족 등)의 힘을 이용하려한다. 샤를뤼스는 모렐의 결혼을 기쁘게 생각했는데 이는 그를 빼앗기지 않아도 된다고 여겨서다. 샤를뤼스는 모렐을 자신의 눈 언저리에 두면서 언제라도 그를 통제할 수 있기를 원했다.  


모든 이에게 자신이 소유한 것을 감추는 자들은, 대개는 그 소중한 대상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느끼는 행복은 이렇게 침묵을 지키려는 조심성으로 인해 감소한다. - P85


모렐은 가진 돈을 탕진한 뒤 주변 사람들에게 돈을 꾸러 다닌다. 쥐피엥의 조카딸은 자신이 모렐과 후원자를 어떤 인간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던 것처럼 나도 앙드레와 알베르틴을 자신의 틀에 규정짓고 판단하려 한다. 나는 알베르틴이 자신의 요구에 응할 뿐이라 무료함을 느낀다. 


(마달레나 도니의 초상 by 라파엘로 산치오)


라파엘로의 그림에는 언제나 인물(주체)에만 집중되어 있다. 나무는 배경 속의 한 객체일 뿐이다. 그의 그림에서 나무는 살아 있지 못하다. 알베르틴을 바라보는 관점이 라파엘로의 그림 속 나무 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각했다. 


내가 찾고, 휴식을 취하고, 그에 기대어 죽고 싶은 이미지는 더 이상 미지의 삶을 사는 알베르틴이 아니라, 가능하다면 내게 그 실체가 완전히 알려진 알베르틴이었다.(바로 그런 이유로 이 사랑은, 내가 불행하지 않고는 지속될 수 없었다. 그것이 본래 가지는 신비로움에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먼 세계를 투영하지 않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으며 사실 그렇게 여겨지는 순간들도 있었다. 오로지 나와 함께 있으며, 나와 비슷해지기를 바라는 알베르틴, 미지의 것이 아닌 바로 내 것으로서의 이미지인 알베르틴이었다. - P123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좋아하는 글도 쓰지 않은 채 시간만 흘려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에메가 알베르틴을 발베크에서 봤다며 어떤 소녀들과 있다는 소식을 전한다. 되짚어보니 그날 알베르틴은 자신의 성적 접촉을 거부했었다. 그순간 나는 알베르틴이 자신에게 왜 거짓말을 했을까 내게 그동안 한 말과 행동들이 진실일까를 생각하며 의혹에 빠진다. 그러다 알베르틴이 베르뒤랭 댁에 간다고 하자 나는 자연스레 경계를 내비친다. 

반대로 알베르틴은 잠결에 ‘앙드레!’를 외치기도 하고 내가 앙드레를 만날 때마다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다. 질투는 마귀를 불러들이고 둘 사이에 생기는 불만은 상상의 간극을 키워간다. 


우리는 사랑의 대상이 육체 안에 갇혀 우리 눈앞에 누워 있는 존재일 거라고 상상한다. 그러나 슬프게도 사랑은 이 존재가 과거에 차지했던, 또 앞으로 차지할 공간과시간 속의 모든 지점으로의 확대이다. 그러므로 만일 이 존재가 접촉했던 장소나 시간을 알지 못한다면, 존재를 소유하지 못한 것과 다름없다. 그런데 이 모든 지점에 이를 수는 없다.
그 지점이 어디인지 지적되기만 해도, 어쩌면 그곳까지 손을뻗을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찾지 못하고 그저 더듬을 뿐이다. 거기서 불신과 질투와 박해가 연유한다. 우리는 엉뚱한 길에서 찾느라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곁에 있는줄도 모르고 진실을 지나친다. - P162


나는 불확실성이 가져오는 두려움과 공포에 맞서야 했다. 하지만 의혹은 의혹을 불러올 따름이며 그 사람을 내가 원하는 사람으로 맞추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러려면 인형과 사는 것이지 그게 어디 사람과 사는 것인가. 알베르틴은 발베크에서 자유로운 소녀였고 나는 그것에 반했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손에 들어오니 그녀의 삶을 틀어쥐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실제 삶과 관련해서 우리가 모르는 온갖 것에 대해 우리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런저런 일이나 사람들에 대해 그녀가 했던 말도 모두망각한다. 따라서 훗날 그 동일한 사람들로 인해 질투가 유발되는 경우, 그 질투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우리 애인이 그토록 서둘러 외출하려고 한 것도, 우리가 너무 일찍 귀가해서 자기 뜻을 이루지 못해 불만의 표정을 지은 것도 그들과 관계된일은 아닌지 하고, 우리의 질투심은 과거를 뒤지면서 어떤 사실을 유추하려 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언제나 회고적인 질투는 자료 하나 없이 역사책을 쓰는 사학자와도 같다. - P241


진실이라는 것이 있을까. 내가 상대에게 보여주는 모습이 모두 진실은 아니다. 어떤 것이 진실인가, 어디까지 믿어야 하나 판단하는 것은 자신의 몫이지만 그렇게 판단했다고 해서 그것이 진실임을 확신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외관은 어디까지나 속임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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