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월경을 한다면
글로리아 스타이넘 지음, 양이현정 옮김 / 현실문화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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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지만 이 책의 제목을 얼마 전 처음 알게 됐고 저자의 이름도 마찬가지로 낯설었다. <여전히 미쳐있는>의 참고도서로 포함되어 있던 책이었으나 오래된 책이라 과연 신선할까 싶어 망설여졌다. 그러나 제목이 흥미롭기도 했고 빈도수 면에서 꽤나 여러 번 거론되길래 읽어보게 되었다. 


책에는 스타이넘이 쓴 에세이나 칼럼, 인터뷰 등이 실려 있다. 책의 제목과 같은 <남자가 월경을 한다> 글은 놀랍기는 해도 개인적으로 와닿지는 않았다(물론 당시는 지금보다 더 놀랐을 법한 글이다). 오히려 1부 뒤의 내용인 트랜스젠더와 성기에 가해지는 범죄는 현실적이어서 끔찍하게 느껴졌다.


성기를 절단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종교적인 이유로 너무나 어린 여성들의 생식기가 잘려나가는데 감히 그 고통을 짐작할 수가 없다. 책을 읽는 것만으로 아픔이 느껴지는 듯했다. 여성에 대한 철폐, 반인권적인 행태를 이유로 1990년 이후 권고안이 통과되었지만 여전히 많은 여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 


그 지역 여성들이 주도하는 운동이 시작된 것은 정확히 1979년 2월이었다. 수단 카르툼에서 열린 역사적인 회의에는 아프리카와 아랍의 10개국대표들(외과의사, 산파, 보건 공무원 등)이 참석했고, 그 밖의 많은 나라들은 대표를 보낼 수는 없었지만 지지를 표명했다. 이 회의는 세계보건기구동지중해 지역사무국이 수단 정부의 도움을 받아 개최한 것이었다. 이 회의의 이름은 조심스럽게도 "여성과 아동의 건강에 영향을 주는 전통적 시술에 대한 세미나로 정해졌다. 구체적인 주제들은 아동 결혼, 임신 수유기동안의 음식 금기, 그리고 성기절단이었다. 회의의 결과 다음과 같은 네 가지의 권고사항이 정해졌다.

1. 국가정책으로 여성 할례를 폐지할 것.

2. 여성 할례를 금지하는 법률을 제정하는 것을 포함하여 필요한 조치를취하기 위한 국가 차원의 위원회를 설치할 것.

3. 성기 절단 시술의 위험과 불필요성에 대한 교육을 강화할 것.

4. 산파, 치료사 등 의료 시술자에 대한 교육을 강화할 것. - P55~56


1990년 여성에 대한 모든 형태의 차별 철폐에 관한 협약CEDAW 준수를 감시하는 UN 위원회가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권고안은 여성 성기절단이 여성에게 해롭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이 권고안은 여성 성기 절단은 단지 건강의 문제가 아니라 신체에 대한 기본적인 인권을 침해하는 행위라고 비판하고 있다. - P60


3부는 다섯 명의 여성에 대해 다루고 있다. 한 명의 연예인, 포르노 배우, 두 명의 정치인, 그리고 페미니스트이다. 


최근 들어 마릴린 먼로의 생애는 재주목받았던 것 같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최고의 스타가 되었지만 외모로만 자신을 평가하는 사회에 그녀는 분노와 좌절감을 느꼈을 법하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 현실이 무엇보다 끔찍하지 않았을까.  


영화, 사진, 책 등에서 그녀는 오로지 남성의 눈에 비친 마릴린이었고, 그것은 그녀가 죽고난 후에도 변함이 없다. 우리가 노마 진 베이커 (마릴린 먼로의 본명)를 돕기에는 너무 늦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그녀가 바라던 일을 할 수는 있다. 그녀가 간절히 원했던 것은 우리가 그녀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 P130


'린다 러블레이스'의 진실은 들여다보기 끔찍했다. 그녀를 고용한 인간은 고용자를 가장한 범죄자 수준이었다. 그 참혹한 현장에서 빠져나온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2부에 포르노그라피 내용을 읽고 이 내용을 읽으면 자연스레 포르노는 없어져야 할 악임을 충분히 느끼게 된다. 


"이제서야 나는 사람들이 왜 진실을 받아들이기 힘든지를 알 것 같다. 예전에는 나도 강간당하는 여자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난 마음 속으로 ‘나한테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어. 나라면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하지 않을테니까 말이야.‘ 라고 생각했었다. 이제 나는 그 생각이 ‘나라면 눈사태가 나지 않게 할 텐데‘ 라고 생각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걸 안다." - P138


신체적 학대 때문에 생긴 많은 건강상의 문제를 겪고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음으로 인한 괴로움을 당한 후에, 린다와 남편 그리고 10대 자녀 두 명은 뉴욕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조용하게 살고 있다. 그녀는 아직도 매체에서 납치, 살인, 가정 폭력 등의 이야기를 들으면 과거의 기억이 떠올라 괴로움을 겪지만, 그래도 자기 경험을 이야기하기 위해 멀리 다른 주로여행하기도 하며 성매매와 포르노그라피의 현실에 대해 증언하기 위해 법정에 서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을 돕는 데 자기 삶을 바치는 것은 치유의 마지막 단계이다. 아직도 <목구멍 깊숙이>를 만든 사람들에게 피해액을 받아내거나 그것의 배포를 중단시킬 법적인 방법은 없다. - P145


‘포르노그라피‘ 라는 말은 그리스어 ‘포르네‘ (매춘부나 여자 포로)와 그래포스(서술, 묘사)를 합친 것이다. 그러므로 포르노그라피의 언어적 의미는 ‘성을 사는 것을 묘사한 것‘ 이며, 권력의 불균형, 성노예화를 함의한다. 또한 다른 사람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행위를 묘사하는 것도 포르노그라피의 정의에 포함된다. - P104


인종차별주의 주장은 조직적인 학살과 폭행 등의 행위로 이어지고 그 행위까지 정당화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폭력적인 영화를 보는 것은 폭력을 더 많이 용납하게 만들고 폭력을 저지를 가능성도 높인다는 사실이 실험 결과 밝혀졌다. 모든 인종의 여성들에 대한 성적인 폭력을 정당화하는 선전물 역시 집단 혐오의 한 형태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포르노에 대해서만은 아무런 위험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포르노는 남성의 공격성을 만족시키는 "안전" 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포르노가 없으면 남성의 공격성이 실제로 발휘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포르노도 폭력을 미화하는선전물들 중 하나이다. 그런데 왜 그것만은 폭력을 예방하는 것이라고 생각되는 걸까? - P108


앨리스 워커에 대한 인터뷰는 개인적으로 가장 소득이 많았고 대표작인 <컬러 퍼플>을 정말로 읽어보고 싶어졌다. 흑인 여성들이 그녀에게 기대하며 책을 읽는 마음도 이해할 것 같았으나 결국 워커의 작품이 지향하는 바는 모든 여성을 향한 것이기 때문에 더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언제나 대중은 지도자보다 앞서나가고 독자들은 학자나 비평가보다 앞서나간다. 구하기 어려운 앨리스 워커의 책들을 찾아보는 사람들 중 대다수가 흑인 여성들이고 그 점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그녀의 작품이 경험을 거쳐 보편성에 이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용감하게도 흑인과 백인의 섹스나 아프리카의 여성 억압 같은 미묘한 주제에 대해서도 글을 쓰고 있다. ("그녀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당신은 조금도 이해할 수없을 거예요."라고 스펠먼 대학의 흑인 여학생이 눈에 눈물을 머금고 내게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흑인이 아닌 다양한 여자들도 개인적으로 앨리스워커와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 일과 자기 생각을 갖는 일의 어려움, 쉽게 성폭력의 대상이 되는 우리의 몸, 어머니에 대한 우리의 부채 의식, 출산의 현실, 여자들의 우정, 우리를 하찮은 존재로 취급하는 남자를 사랑하는 일의 파괴적인 결과, 관능, 폭력 등……… 이 모든 것이 그녀의 소설과 시의 주제이다. - P162~163


앨리스에 대한 미스테리 중에는 작품을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는 것도 있다. 지금 내 맞은 편에 앉아 있는 그녀는 상냥하고 말이 많지 않은 친절한 사람이다. 나는 그녀가 여러 시간 동안 모임에서 말없이 앉아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자기가 잘 알고 있는 주제였는데도 말이다. 어떤 작가는 그녀를 투사 같지 않은 투사"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녀의 글에서 볼 수 있는 분노와 징벌, 정당한 살인에 관한 상상은 그녀 안에도 있다. 그런 분노가 터지는 것을 보려면 아주 오랫동안 그녀를 알고 지내야 한다. - P177


무엇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감동받았던 부분은 마지막 챕터에서 한 스타이넘이 쏟아낸 개인적인 기록들이었다. 가족에 대한 소회, 플레이보이클럽의 바니걸 이야기는 쉽게 할 수 없는 고백이기에 힘들게 읽어내려갈 수 없는 이야기다. 자매애에 대한 소견은 여성들이면 인생을 살다가 한 번쯤은 외로움과 고독에 나만 빠져 있다 절망한 이들이라면 어느 정도 공감하는 면이 있을 것이다.


스타이넘의 고백을 듣고 있으면 평범한 가정에서 평범하게 자라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 아닐까 느끼게 된다. 나도 어렸을 적 학대 등 아픈 기억이 있어서 부모님에 대한 고백은 눈물샘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결혼 전에는 주체적인 여성이 결혼 후 집에 갇히거나 남성과 그 집안에 의해 하고 싶은 것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될 때 자존감이 하락할 수 밖에 없다. 부모의 관계가 엉망이 되고 가정이 뒤틀린 상황에서 아이가 태어난다면 솔직히 말해서 아이가 평범하게 자라기란 더 어려울 지 모른다. 자녀가 부모를 오롯이 이해하기란 어렵다. 반대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무엇보다 나는 그녀의 어머니를 생각하면 이제는 연민이 든다는 말에 무릎을 칠 수 밖에 없다. 나 또한 그랬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원망스러워서 어머니가 밉기도 한 시절이 있었으니까. 그런 시절을 나 또한 지나왔다. 가난, 가정 폭력 등으로 신체적/정신적 피해를 경험해본 자라면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룻이라는 이름의 독특한 여성이었던 어머니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 그녀는 뉴욕에서 살고 싶어했고 유럽을 여행하고 싶어했지만, 결국 마을을 지나는 버스를 타는 것도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녀는 마을 최초의 자동차를 운전했지만 운전을 허락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했다. 

어머니가 떠나간 지금 나는 일이 제대로 풀렸다면 어머니가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가 열정과 유머를 보여준 몇몇 순간들에서 그 단서를 포착할 수는 있다.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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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3-10-14 09: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타이넘 참 좋죠. 앨리스 워커도.
평범한 가정이야 말로 가부장적 질서의 가족인 거 같아요. 그리고 신화였다는 걸. 그 평범성을 획득하기 위해서 평생을 지극히 애써오신 나의 부모님. 애씀은 자칫 폭력이 되고 아니 애쓰는 것 자체가 폭력이라는 것.이 보일때 까지. 보게된 후.

저는 저의 가족을 사랑하는 데 그건 가족이어서가 아니에요. 그들 각자 개인은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인식에 닿기위해 정말 많이 노력했던 것 같아요. 그래도 사랑을 하는 건 너무 어렵고ㅋㅋㅋ (공부의 결론) 저는 이제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습니다! 노력하면 안되더라고요. 제게. 저의 사랑방식은.

거리의 화가님의 평범하지 않은 독서에 아침부터 감동받고 갑니다! (책목록이 다 너무 비범하다😻)

거리의화가 2023-10-14 20:40   좋아요 1 | URL
어렸을 때 ‘왜 우리 가족이 평범하지 않지?‘라고 생각했었어요. 그러나 나중에 보니 다들 조금씩의 트라우마와 고통이 있더라구요. 평범성이라는 것의 기준도 결국 사회에 기준에 맞춰진 것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게 된 것 같습니다.

‘개인으로서의 나‘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만 여전히 가족 간에 문제는 조심스러운 면이 있어요.

평범하지 않은 독서! 쟝님의 철학 책 읽기 무엇보다 비범한 걸요^^
 
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 - 자연의 재발명 Philos Feminism 4
도나 J. 해러웨이 지음, 황희선.임옥희 옮김 / arte(아르테)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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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이분법적 사고가 통할 수 없는 세상이 된 지금 도나 헤러웨이의 혜안은 미래로 갈수록 탁월함을 느끼게 한다. ‘경계‘는 불안을 뜻하기도 하지만 변화와 새로움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사유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그녀의 철학을 이번에야말로 섭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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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4 - 충렬왕에서 최영까지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4
KBS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 지음, 이익주 감수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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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시리즈의 마지막 편까지 왔다. 공부를 할수록 고려의 역사가 더 좋아지고 궁금해진다. 고려의 역사에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지셨으면 좋겠는데 이런 쉽고도 알찬 교양서를 통해서 공부한다면 쉽고도 재미있게 공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지난 권 마지막에 삼별초의 항쟁이 끝나고 강화도에 있던 조정이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이제 명실상부 몽골의 내정 간섭이 시작되었다. 
 
원종에 이어 즉위한 충렬왕은 쿠틀륵케미시(제국대장 공주)와 혼인(제국대왕 공주와 충렬왕의 관계는 딱히 좋지는 않았음)하면서 부마 지위를 활용해 외교적 이익을 추구했다. 1278년 몽골에 가서 쿠빌라이 칸을 만나 몽골의 다루가치 배치와 호구조사 요구를 철회하게 하는데 성공했다. 몽골이 고려에 항복을 받아들이게 하면서 요구한 ‘6사‘의 내용 중 고려가 결코 들어줄 수 없는 두 가지 사항들이었는데 이때야 비로소 받아들여진 것이다. 또 이 때 고려에 주둔한 몽골군이 철수하면서 몽골 관리나 군대가 상주하지 않게 되었다. 이로서 고려 국왕의 지위는 부정되지 않았으며 고려 독립국의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매사냥을 하는 응방의 인물을 측근들에게 맡기는 등 자기가 신임하는 사람들 위주로 정치를 행하면서 왕권을 강화하려고 함으로써 한계를 보인다.

충선왕은 충렬왕이 죽지 않은 상태에서 왕위를 양위받는다. 그는 쿠빌라이의 외손자이기도 했고 계국대장 공주와 혼인하여 몽골의 부마가 되면서 왕위 경쟁에서 유리했다. 충렬왕은 제국대장공주와 혼인하였으나 그녀는 쿠빌라이 칸의 정비 소생이 아니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힘이 약했다. 쿠빌라이 칸이 죽고 후계를 정할 때 충렬왕이 원 성종을 지지하지 않으면서 왕위에서 물러나게 된다. 아버지의 측근 정치를 보고 못마땅했던 충렬왕의 측근세력을 제거하려다 오히려 원의 의심을 샀고 계국대장공주와 불화가 생기자 8개월만에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원나라 성종이 죽고 인종과 무종 간에 대결이 펼쳐졌는데 줄을 잘 선 충선왕은 원의 실력자로 등극한다. 이후 그는 고려 인사 행정 관제를 바로잡고 공이 있는 자를 포상하고 백성 착취를 금지하는 등 개혁 정책을 펼쳐 나갔다. 하지만 그는 즉위 후 3개월만에 원에 가서 고려에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 같은 측근정치를 하지 않기를 원했지만 결국 이전의 측근정치를 반복하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고려 내에서 직접 개혁을 했다면 나았겠지).

기황후는 몽골에 끌려간 공녀가 뛰어난 정치력으로 황후에 자리까지 오르면서 큰 권력을 가졌던 인물이다. 이 무렵 원나라와 고려 내 왜구 출몰이 잦아지자 원 조정은 공민왕을 세워 해결하려 한다. 공민왕은 핵심 부원 세력이었던 기황후 세력을 몰아내고 신돈을 기용해 개혁 정치를 펼쳐 나가는데 원나라의 힘이 약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정동행송 이문소를 폐지하고 쌍성총관부를 수복하였으며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권문세력이 불법소지한 토지와 노비를 토해내게 하여 국가 재정을 확충하고 권문 세력을 몰아냈다. 또 과거 제도를 개혁함으로써 기존의 유학자들의 계파 정치의 연결고리를 끊음으로써 새로운 인물을 발탁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신돈이 사적 권력을 지나치게 휘두르자 공민왕도 그를 경계하며 내치게 된다. 중국은 원나라에서 명나라로 교체되었고 공민왕은 명나라에 책봉됨으로써 친정 정치를 행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이인임은 대표 권문세족으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사람이다. 그는 개혁 세력인 신진사대부들을 내치고 개혁 이전으로 흐름을 돌리기 위해 최영과 결탁하였다. 명 사신이 피살되는 일이 발생하자 이인임은 원과 끊어져 있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북원에 사신 영접을 추진한다. 그로서는 명, 원과 둘 다 관계를 가짐으로써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인임의 고단수 정치력은 여기서 발휘되는데 대표적인 신진사대부였던 정도전을 북원 사신으로 보내려고 한다. 정도전이 이를 받아들일리가 없었고 이 일로 정도전은 나주로 유배를 가게 된다(나주 현장에서 백성들의 참상을 보면서 그는 개혁 의지를 일으키게 되었다). 이인임은 정도전 뿐 아니라 이 때 신진사대부들을 모조리 싹쓸이함으로써 개혁 동력을 끊고자 했다. 그러나 이인임의 계속되는 국정 농단 때문에 최영과의 연립 의지는 끊어진다. 이인임이 이 때 개혁 세력들을 잘 보듬고 건강하게 끌어갔다면 고려는 더 이어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권력욕과 탐욕은 그들에게 내어줄 의지가 없었다.

14세기 말 왜구가 침공하자 고려는 전국에 계엄령을 내린다. 이 때 일본은 남과 북으로 나뉘어 전쟁을 벌이고 있었던 만큼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고 중국은 원-명 교체였기 때문에 정세가 불안정했다. 왜구의 출몰이 심각했던 배경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최영이 홍산에서 왜구를 막아내고 이성계는 황산에서 왜구를 막아냈다. 1389년에는 조선과 왜구 사이에 다리 역할을 하던 쓰시마를 정벌한다. 일본이 남북조를 통일하자 내부가 안정되었고 원-명이 교체되고 명이 해금 정책을 펼치면서 왜구는 자연스레 줄어들게 되었다.

최영은 이성계와 손을 잡고 이인임을 비롯한 권문 세족(구 귀족 세력)을 제거한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최영과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 사건으로 갈린다. 명이 고려에 철령 이북 땅을 요구하자 최영은 요동 정벌을 주장했고 이성계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이성계가 돌아온 뒤 최영은 체포되고 명이 철령 이북 땅을 포기함으로써 최영은 고려의 마지막 무신으로 남았고 이성계는 고려의 무신이자 조선의 개국 왕으로 변모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물론 이 때 당시에는 새 왕조를 열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최영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마지막 이야기는 조선과 이어져서 대중들도 잘 아는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고려 말의 역사는 조선의 건국 역사와 맞물려 있기 때문에 더 자주 다루어져서 잘 알게 된 측면도 있는 것 같다.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은 패널에 신병주 선생님이 참여함으로 인해 고려의 역사를 조선의 역사와 비교하여 설명해주면서 더 쏙쏙 이해되는 측면이 있었다. 책을 읽기 전 역사저널 그날 고려편을 보아도 좋고 후에 복습 겸으로 해서 보아도 도움이 될 것 같다. 책을 다 읽고 나니 고려 편을 복습해보고 싶은 생각이 절로 일었다.

아쉬운 점은 역사저널 시리즈로 조선은 총 8권의 분량이었는데 고려는 4권의 분량이어서 상대적으로 짧았다는 점이다. 아무래도 방송 분량 자체가 조선보다 훨씬 짧았기 때문일 것이다. 11월에 드라마 방영도 있는 만큼 고려의 역사를 더 다루는 기획 시리즈가 있으면 좋겠다. 고려의 역사는 여전히 부분적으로 가려져 있어 메워야 할 역사가 많다. 앞으로 더욱 많은 자료가 발굴되고 이를 바탕으로 역사들이 보충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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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10-15 02: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모르지만 아는 이름이 보이기도 하는군요 고려 시대 일어난 일은 잘 모르고 이름만 기억하는 것 같기도 하네요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어지는... 조선은 기록을 잘해서 더 많이 알기도 하겠습니다 고려 때 왕권이 약해서 조선이 되고는 왕권을 강화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3-10-15 16:08   좋아요 1 | URL
조선으로 넘어가기 전 역사는 의외로 많이 드라마에서 다루기도 했고 알려진 게 많아서인지 익숙한 면이 있습니다. 아마도 공민왕 때부터인 것 같아요. 조선은 자료도 많이 남아 있어서 더 매체에서 다루기 쉬운 것이겠죠^^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3 - 만적에서 배중손까지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3
KBS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 지음, 이익주 감수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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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민‘의 힘을 믿는 편이다. 우리 역사상으로도 ’민‘은 많은 역할을 해왔고 때로는 주도적인 힘으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왔다.
3권은 특히나 민의 힘이 돋보이는 주제들이 많아서인지 지금 나라 꼴이 엉망이어서이기도 하지만 힘이 되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주제 파악 좀 하시지.‘라는 말을 우리는 많이 듣고 산다. 그런데 주제 파악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계급이나 신분을 뛰어넘는다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 것임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어쩌면 모든 것을 잃어버릴지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박차고 일어난 ’민‘들을 생각하면 전율이 인다. 그 세세한 이름들을 알 수 없어 더욱 그렇다.

3권은 민란을 일으킨 주인공들을 다루며 시작한다. 먼저 만적은 최충헌의 노비임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이 잘 알려져 있다. 왜일까? 고려사에서 ‘만적의 난‘ 사건은 최초의 신분해방운동의 성격을 가진다. 그는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나.˝를 주장하며 신분해방을 꿈꿨다. 하물며 주인인 최충헌이 무신시기 집권자인 상태에서 말이다. 물론 그 전에 이의민이 소금장수 출신의 천민으로 무신 집권자가 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입장에서는 본보기가 있다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삼국 시대에도 신분 차별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며 봉기가 일어난 경우가 있지만 만적은 신분 해방을 꿈꿨다는 측면에서 그 경우가 달랐다.
공주에서는 망이, 망소이의 난이 일어났다. 당시 공주는 ‘부곡‘에 속하던 곳이었는데 이곳은 ‘향‘과 마찬가지로 농산물을 생산했다(‘소‘는 수공업품이나 광물, 수산물을 생산). 고려 시대 지방 체계는 주현-군현-향소부곡 구조로 주현만 지방관이 직접 파견되는 형태였다. 처음 교과서에서 향소부곡을 배울 때 잘못 배웠는지(그 이후에 바뀐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곳에 사는 이들이 천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오해였다. 고려 시대에 천민은 국역을 지지 않으면 천민이고 나머지는 다 양인이다. 향소부곡도 국역을 지기 때문에 당연히 양인이다. 다만 주현이나 군현의 주민들보다 조금 천한 일을 하는 것 뿐이다. 이번 기회에 향소부곡민이 양인이라는 것을 재확인하고 넘어간다.

최충헌 집권 시기는 길었던 만큼 자기 손으로 두 명의 국왕을 폐위시키고 두 명의 국왕을 옹립시켜서 결과적으로 여러 임금을 모셨다. 앞서 2권 후기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최충헌은 개인에 대한 권력욕과 탐욕이 많았던 인물이었던 만큼 왜 스스로가 왕이 될 생각은 하지 않았을까 궁금했을 수 있다. 그래도 하극상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여겨서일 수도 있겠지만 민심의 눈치를 살폈던 이유가 아무래도 더 클 것 같다(생각은 했지만 감행을 안 한 것일지 모르나 이것은 기록에도 없고 추측일 뿐이다).
최충헌의 권력이 끝모르게 비대해지자 희종은 그의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암살을 시도한다(최충헌은 이를 비롯하여 여러 차례 암살 시도를 받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암살은 실패했고 희종은 유배길에 오른다. 그런데 이후에도 희종은 최충헌에 대한 견제를 멈추지 않았고 최충헌은 결국 희종을 폐위시키고 강화도에서 명종의 맏아들인 왕숙을 데려와 강종으로 옹립시키게 된다. 앞선 의종은 망나니였다고 쳐도 희종의 암살 시도가 성공했다면 어땠을까. 아들인 최우가 있었다지만 아버지가 살해당한 만큼 최씨 집권이 더 이어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어쩌면 무신 정권 자체가 종료되었을수도 있지 않을까.

몽골은 앞선 거란과 여진의 침입과 다르게 고려에 큰 피해와 영향을 주었다. 그렇지만 몽골이 침입한 국가엔 흔적 하나 남지 않았다는 역사를 보면 고려는 왕조를 지켜냈고 얻을 것은 얻어내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후손으로서 감사하면서도 뿌듯함을 느끼게 한다.

몽골군은 고려 땅에 언제 들어오게 되었을까. 1218년 12월 거란이 침입했을 때 거란군을 따라 몽골군이 떠밀려 내려온 것이 그 시작이었다. 몽골군도 처음에는 형제 관계를 요구하였으나 앞선 거란과 여진과 달리 지나친 공물과 보상을 요구하면서 고려에 부담을 주게 되었다. 어느 날 몽골 사신인 제구예가 들어왔다 피살되자 양국 교류는 단절된다. 범인은 고려일 수도 있고 몽골(의 자작극)일 수도 있고 동북쪽에 있던 동진이라는 나라일 수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추정 세력일 뿐이고 정확하지는 않다. 어쨌든 몽골군의 1차 침입의 명분은 이 사건(이라고 주장) 때문에 발생한다. 1차 침입(1231.9) 때는 귀주성에서 큰 전투가 있었다. 여기서 정주 지방의 장군을 맡고 있던 김경손이 불과 12명의 군사를 데리고 성문을 나와 몽골군을 기습 공격하면서 긴장시킨 덕분에 무려 4개월 동안 성을 지키며 전투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고종은 더는 전투를 이어가는 것은 피해를 키우는 일이라 보았기 때문에 지휘관인 박서에게 항복을 종용하면서 몽골과 화친(1232.1)을 맺게 된다.

1232년 7월 최씨 정권이 강화도로 천도하면서 40여년 가까운 강화도 시대가 시작된다. 최씨 조정은 강화도에 있었으나 와중에도 산성이나 섬으로 대피하는 방식으로 몽골군과의 전투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산성에는 산성방호별감이라는 관리자를 파견하여 수령을 지휘하게 하고 백성을 위한 구휼 사업도 하였다. 문제는 강화도 최씨 정권의 탐욕이다. 병사들과 백성들은 전투로 다치거나 죽어가고 있는데 그들은 세금으로 연회를 열고 펑펑 놀았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왜 집권자들이 되면 이리 엉망이 되는지 모르겠다. 인간의 욕심이 결국 발현되는 것이겠지.
1232년 8월 몽골이 2차 침입을 단행하자 처인성(지금의 용인)에서 전투가 벌어진다. 승려인 김윤후가 주연급 활약을 하였는데 그는 백성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면서 전투를 승리로 만들었기 때문에 더 값지다고 생각한다(처인은 원래 부곡이었으나 주현으로 2단계나 승격되었다). 기억해야 할 인물이 있다면 홍복원인데 그는 몽골에 귀부해 관리가 되고 세력을 얻어 이후 몽골 침입 때마다 길잡이 노릇을 한다. 고려판 앞잡이로 보면 되겠다. 사람의 선택은 한 순간이지만 역사에 어떻게 이름을 남기는가는 그조차도 몰랐을 것이다.
몽골의 3차 침입은 1235년에 시작해서 무려 5년 간 이어졌고 경상, 전라 지역까지 몽골군이 밀고 내려오면서 문화재까지 소실되는 등 피해가 극심했다. 1241년 우구데이 칸이 사망하고 1246년 구육 칸이 즉위하면서 몽골 내정이 혼란했기 때문에 전쟁은 잠시 멈추어졌으나 다시 1247년 4차 침입이 이어지고 1248년 구육 칸이 사망하여 다시 휴지기를 갖다가 1253년에 5차 침입이 이어진다. 5차 침입 때는 몽골이 철저히 준비를 하고 나와 공성 무기와 발화 무기를 사용하여 방어에 주력하던 고려군이 힘에 부칠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충주성 전투에서는 2차 침입 때 처인성 전투에서 활약한 김윤후가 다시 백성들을 이끌어내며(노비 문서를 소각해주겠다라는 명분) 활약한다.

쿠빌라이와 원종의 만남은 고려 시기를 좌우할 정도로 영향력 있는 사건이었다. 태자였던 원종은 신의 판단력으로 당시 즉위 순위 1위인 아릭 부케를 만나러 가지 않고 쿠빌라이를 만났고 쿠빌라이가 칸에 즉위하면서 원종은 고려를 안정적으로 이끌 동력을 얻게 된다.
1254년 몽골이 6차 침입 후 고려 땅을 떠나지 않으면서 더는 몽골과 싸우는 것이 불가능해진 고려는 강화 후 쌍성총관부를 설치하고 몽골과 책봉-조공 관계를 맺게 된다. 몽골은 ‘6사‘를 요구했는데 고려의 대응이 놀라울 정도로 멋지다(지금도 왜 이렇게 외교를 못하는 건지...).
참고로 몽골이 요구한 ‘6사‘는 다음과 같다.
1.인질 보낼 것 2.군사 파견 요청 시 올 것 3.수량과 군량 수송 4.성역과 역참 개설 5.호구조사 보고 6.다루가치를 둘 것
특히 5, 6번 원칙은 고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고려의 원칙은 단 한 가지였는데 고려를 지킨다는 것이다.
무신정권이 원종을 폐위하자 그는 쿠빌라이 딸과 결혼하고 몽골군의 힘을 빌린다(이 지점이 두고 두고 아쉽다). 결국 1270년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정권이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고려 내 몽골의 영향력이 강화되는 결과를 낳는다.

개경 환도 세력에 맞서 배중손 지휘 하에 삼별초가 자신들의 조정을 세우고 강화도, 진도와 제주도로 옮겨 가며 몽골군과 항쟁한다. 삼별초는 본래 무신정권의 핵심군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몽골군과 대결하기로 하면서 백성들은 이에 힘을 실어준다(몽골군에 맞서길 원했고 또 호적 문서를 불태워준다는 약속이 있었음). 특히 진도에서 싸울 때는 전라도 남부를 석권할 정도로 그 세력이 컸다고 한다. 하지만 1273년 제주도에서 아쉽게도 삼별초 항쟁은 막을 내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별초의 대몽항쟁은 몽골을 괴롭혔고 고려의 자주성을 보여주는 기회도 되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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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10-15 02: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몽골이 고려에 쳐들어오다니 그런 게 전라 지역까지 밀고 내려 온 적도 있었군요 삼별초 생각나기도 하는데, 삼별초가 몽골과 끝까지 싸우다니... 잘 안 됐다 해도 그런 사람이 있었기에 나라를 다 빼앗기지 않았겠지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3-10-15 16:06   좋아요 1 | URL
몽골은 고려에 여러 모로 큰 피해를 입혔고 또 많은 영향을 주었죠. 시기가 긴 것도 있었고요. 6차까지 침입을 했던 걸 보면 백성들의 피해는 알만합니다.
삼별초가 전라도 지역을 한 때 장악했었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어요. 그리고 개경 정부와는 달리 정부를 새로 세웠다는 것도 새로 인식하게 되었고요. 삼별초가 그냥 단순한 반란군이 아닌 셈이죠!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2 - 강감찬에서 최충헌까지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2
KBS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 지음, 이익주 감수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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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2권은 거란의 2차 침입부터 무신 정권의 지도자인 최충헌이 들어설 때까지를 다루고 있다. 책이 두껍지 않기 때문에 <무신 정변>을 깊이 다루어주지 못할거라 생각했는데 읽어보니 대중들이 사건의 배경과 전개 과정, 결과를 충분히 살펴볼 수 있도록 해 놓았다.

고려의 역사를 처음으로 배울 때 ‘무신 정변‘(과거에는 무신의 난이라고 하기도 했었던)이 흥미로운 사건이라 생각했음에도 지도자가 바뀌는 과정이 복잡하거나 어려워서 오히려 공부를 등한시했었다. 하지만 ‘무신 정변‘은 고려 시대의 전기와 후기의 분수령이 되는 사건이며 무려 100년간 이어진 이 시기에 몽골의 침입이 있었기 때문에 그 중요성은 더 높다고 할 수 있다.

1. 우리는 거란의 침입에 대처한 고려의 인물로 보통 ‘서희‘는 알고 있어도 2차 침입 때 협상을 주도한 하공진과 후방 공격에서 활약한 양규는 잘 알지 못한다. 거란이 2번째로 침입하자 현종은 강감찬의 권유에 따라 나주로까지 피난길에 오르게 된다. 비슷한 것으로 조선 임진왜란 때 선조가 피난길에 행차한 게 떠오르지만 이 때 고려는 하공진을 사신으로 보내 협상을 적극적으로 하면서 전쟁을 끝내기 위한 노력도 동시에 했다. 양규의 활약은 알고 있었으나 거란과 협상한 하공진은 훨씬 덜 알려져 있기에 안타깝다. 그는 그 때 인질로 잡혔는데 거란으로 귀부할 것을 종용받았으나 거절하면서 살해되고 말았다. 꼭 기억해두어야 할 분이 아닐 수 없다.

2. 현종이 거란의 침입으로 피난하던 중 공주절도사인 김은부를 만나 눈도장을 받게 되는 일이 있었다. 당시 외부인의 침입으로 민심이 흉흉했기 때문에 현종의 피난길은 아주 험악했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 김은부가 대접을 잘해주니 현종 입장에서는 없던 총애도 생길 수밖에 없다. 김은부의 세 딸이 왕실과 혼인하게 되면서 그는 문벌 귀족 세력의 하나(안산 김씨)로 올라서게 된다. 또 하나의 문벌 세력인 인주 이씨는 김은부의 처조카인 이자연(이자겸의 아버지)의 딸이 문종의 왕비가 되면서 성장하게 되는 세력이다. 김은부 딸이 왕실과 혼인하게 된 사건이 왜 중요하냐면 최초로 외부 세력이 왕실과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기존까지 고려 왕실의 결혼은 왕실 근친혼이었다).

3. 12세기에는 북쪽에서 힘을 키운 여진이 고려에 침입한다. 1차 침입 때 윤관의 활약(기만 전술)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패배하였으나 3년 간 별무반을 만들어 열심히 기병을 보강한 뒤 2차 침입 때는 여진족이 점령하고 있었던 영토에 9성을 쌓아올리는(동북9성) 쾌거를 거둔다(동북9성의 위치는 일반적으로는 두만강 북쪽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확실하지 않아 학계적으로도 의견이 분분하다). 아쉽게도 2년 만에 동북9성을 다시 여진에 내어주게 되면서 윤관은 그 책임을 지고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여진이었을 때도 힘이 만만치 않았지만 금나라는 차원이 다르게 막강했다. 금은 처음에 형제 관계로도 만족했으나 나중에는 군신 관계를 요구하였고 실리상 이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아쉽게 느껴지겠지만 그 때 사람이라 생각해보면 최선이 아니었나 싶다.

4. 이자겸은 딸을 예종에 보내고 그 아들인 인종이 왕위에 오른 후 다른 두 딸도 인종에 시집을 가면서 그는 외조부이자 장인으로 명실상부 최고의 권력자가 된다. 그 시기 인종의 역할은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 인종은 이자겸의 권력이 강해지자 이를 견제하고 자신의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이자겸을 공격한다. 또 이자겸이 오른팔인 척준경과 틈이 벌어지는 것을 알고 이 갈등을 이용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이자겸이 오히려 조연이고 인종이 주인공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자겸이 워낙 유명한 문벌귀족세력의 대표 수장이어서 위세가 등등해서 인종의 행동이 뒤에 가려져 있을 뿐이다.

5. 묘청이 ‘서경천도운동‘(수도를 서경으로 옮기고 금나라를 정벌하며 왕을 황제로 칭하고 연호를 사용하자 주장) 사건을 일으킨다. 금나라를 정벌하자는 주장은 ‘국가의 자주권‘를 원하는 백성들에게 먹히는 점이 있었다. 서경천도운동을 김부식이 진압하면서 두 세력은 충돌했다. 묘청의 주장 자체는 그럴싸 했지만 결정적으로 신룡의 침(기름을 넣은 떡을 물에 던져 놓고 물에 떠오른 기름이 무지개처럼 나타난 효과를 보고 이는 상서로운 일이니 서경으로 천도해야 한다)으로 무리수를 두며 자멸의 빌미가 된다.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은 신채호 선생님의 말인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이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 문장만 보면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 위대한 혁명 운동처럼 비쳐지지만 그것은 분명한 오해다. 묘청이 자충수를 두면서 이후 진취적인 개혁이 더 이상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는 안타까움을 담은 것이다. 백성들은 호응했지만 당시 금국 정벌이 현실적으로 가능했다고 보이지 않을 뿐더러 무리한 서경천도운동 주장으로 그 운동은 실패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

6. 무신정변은 하위 지배층인 무신들이 고위 지배층인 문신들을 누르고 집권 세력으로 올라선 사건이지만 그렇게 단순하게만 볼 수 없다. 왕인 의종의 정치적 무능과 고려 초기 이후 계속된 무신들의 지위 상승, 지배층의 분열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일어난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의종은 책에서 말하길 고려판 연산군이라고 패널들이 이야기하는데 에피소드를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게 한다. 정사는 돌보지 않고 향락과 유흥에 빠져 있었으며 대간들을 쫓아내고 환관과 내시를 주변에 두어 측근정치를 강행했으니 지금으로 보아도 언제 탄핵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이의방이 의종을 폐위하고 문신 세력을 모두 몰아내면서 단독자로 올라선다. 이후 정중부(권력욕이 강했음)->경대승(복고를 표방)->이의민(행동대장 스타일)으로 집권자가 변화되지만 그들은 자신들끼리의 투쟁, 살육, 파괴를 이어가면서 백성들에게도 명분을 얻지 못했다. 경대승은 무신정변에 참여하지 않은 세력이었던데다가 그나마 도방을 세우고 문신 인사들을 등용하려고 노력했지만 안타깝게도 잘 되지는 않았다.
이후 최충헌이 집권하면서 무신정권의 최씨 집권기가 시작된다. 그는 백성의 눈을 두려워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권력을 독점하면서 사병을 강화하는 등 국가를 위한 힘이 아닌 사적인 힘을 키우는 데 골몰했다.

3권은 남은 무신집권의 시기와 몽골과의 투쟁기가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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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10-11 02: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역사를 배우기는 했지만, 하나도 생각나지 않네요 그래도 조선 시대는 여기저기에서 보기도 했는데... 고려는 잘 모르는군요 여러 사람 이름은 생각나기도 합니다 고려는 왕족이 친척끼리 결혼을 했군요 어쩐지 조선 시대에는 그걸 아주 안 좋게 여긴 듯도 합니다 옛날 드라마 보면 상사병으로 죽는 사람이 나오기도 했는데, 어떤 책을 보다 그건 친척을 좋아해서 그런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더군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3-10-11 09:10   좋아요 1 | URL
고려 왕실은 기본적으로 자기들끼리만 인연을 맺는 근친혼이었는데 문벌귀족세력이 등장하면서 이때부터 외척 관계를 맺게 됩니다. 고려 역사는 조선에 비해서 사료나 유물이 부족하다보니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고 등한시하는 경우가 많죠. 참 아쉽습니다. 저는 고려에서 특히 유연한 외교 철학은 배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