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근황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느라 기진맥진한 생활을 이어가는 중이다.

팀장이 나간 뒤로 팀에 큰 공백이 생겼다. 이 때문에 결정을 내가 내려야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아무래도 그것 자체가 부담이 되는 데다가 다른 사람에게 내가 전하는 말이 오해가 되지 않는지 확인하는 과정도 어려움을 갖게 한다.

몇 번이나 그만두어야 하는 것 아닌가 고민할 정도로 최근에는 어려움이 컸다.

최근 들어 두통이 잦았고 도무지 안 되겠어서 오늘 휴가를 내고 쉬고 있다.

하루 쉰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만 밀린 리뷰도 쓰고 가벼운 책을 읽고 그랬다. 참! 달리기도 했다.


걷기와 달리기는 차원이 다른 운동이라는 것을 알아가고 있다. 1분 뛰는 것과 1분 30초를 뛰는 것이 왜 이리 간격이 큰 것인지... 이제 4번째 진행했는데 하다가 막판에 좌절할 뻔했다. 내 체력이 얼마나 저질인지 새삼 느꼈다. 

어쨌든 체력이 되어야 머리도 굴리고 책도 읽고 사람들과도 만날 수 있다 생각하니 힘을 내보기로 했다.


어제 북플에 접속했다가 친구분들의 '인생네권'을 확인하고 나도 부랴부랴 했다.

좀 고민하기는 했지만 더 고민한다고 크게 달라질 목록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곧장 생각나는 책으로 꼽았다. 



<하워드 진, 역사의 힘>은 역사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 머리 두들겨 맞은 듯 강한 인상을 받았던 책이다. 아무래도 내 성정과 잘 맞는 분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얼마 후 타계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실제로 만나지 못했음이 그리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 멀리 떨어져 살면서 만날 가능성이 거의 없는데도 나는 언젠가 그 분의 강연을 꼭 한 번 경험하고 싶은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어쨌든 그의 책은 그래도 남아 있으니 계속 읽어봐야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전쟁의 기원>은 한국 전쟁사를 제대로 읽으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책이다. 그의 저작 이전과 이후가 나뉘어진다고 할 정도로 국내 학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이는 내게도 마찬가지다. 그는 한국전쟁의 기원에 특히 인민위원회의 역할과 한계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이 특징적이었다. 사실 박명림 선생님의 책이나 정병준 선생님 등의 책도 인상 깊게 읽었지만 이 책의 비중을 더 높게 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해방 일기> 시리즈는 김기협 선생님의 저작을 본격적으로 파게 된 계기였다. 민족주의적 시각에 경도되어 있던 나는 이 책을 계기로 균형 잡힌 역사 서술과 좌우파를 넘어선 시각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이 책은 재밌고 흡입력이 좋다. 1권을 읽다 보면 2권을 읽고, 이후 10권까지 쭉 달리게 된다. 또 이 책 덕분에 내가 해방 후 3년의 역사에 대한 관심이 커졌기 때문에 인생책으로 꼽을 수밖에 없다.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는 어른이 아이에게 이야기 식으로 한국사를 재밌게 들려주는 방식이라 잘 읽히고 친근하다. 이 책을 꼽은 것은 그가 역사학자로서 걸어온 발자취에 대한 존경이 어느 정도 작용했기도 하다. 1980년대 이후 시기 앞선 세대와는 달리 주류적 시각이 아니라 역사에서 숨은 민중의 목소리를 찾아내려는 노력을 꾸준히 하셨고 그랬기 때문인지 민중사가 강세를 이룬 때도 있었다. 지금은 다변화되었지만. 그 중 18권을 고른 것은 그의 동학농민혁명사 연구에 대한 존경의 표시다.



철쭉이 피고 알록달록해진 세상을 보는 것이 그나마 즐거운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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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4-04-24 1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역덕력 인정합니다!
팀장님의 공백에 찾아오는 두통이라니….ㅠㅠㅠㅠㅠㅠㅠ 회사야, 그 팀장 다시 잡아와라!!!
달릴 때는 바닥을 조심조심! 파인곳이나 느닷없이 등장하는 계단을 특히 조심하시구요 🏃🏽‍♀️🏃🏽‍♀️🏃🏽‍♀️달리세요!!

거리의화가 2024-04-25 06:22   좋아요 1 | URL
팀장 빨리 뽑아달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새로 뽑는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니ㅠㅠ
안 그래도 달릴 때 계단 있는 곳은 피하고 트랙 있는 운동장이나 평평한 산책로에서 하고 있어요. 원래 발목이 안 좋았어서 무리하지 않고 천천히 달립니다. 쟝님 감사해요^^

새파랑 2024-04-24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화가님은 역사!
역시 역사!!
네권선택을 고민하는 시간도 재미있었습니다~!!

거리의화가 2024-04-25 06:23   좋아요 1 | URL
ㅋㅋ 네. 역시 어쩔 수 없는 역사 덕후인가봅니다^^; 저도 선택을 고민할 때만큼 설레고 즐거울 때가 없었어요. 알라딘 덕분에 다양한 분들의 선택지를 볼 수 있는 것도 즐거움입니다.

잠자냥 2024-04-24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리면서 꽃 사진 찍은 거면 인정!! ㅋㅋㅋㅋ (뭘?! ㅋㅋㅋㅋ)
아 진짜 역적 아니고 역덕!!

거리의화가 2024-04-25 06:25   좋아요 0 | URL
ㅋㅋㅋ 체력이 늘어 달리면서 꽃 사진을 찍을 정도가 되면 좋겠네요. 역적 아니고 역덕이라서 다행입니다!ㅎㅎ

다락방 2024-04-24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거리의화가 님 진짜 넘나 멋집니다!! 특히 역사책이 인생 네권 이라니! 😍
달리기 시작하셨다니 정말 좋고요 우리 함께 열심히 달려봅시다. 저는 오늘 열한번째 달리기 했습니다!! 💪💪

거리의화가 2024-04-25 06:27   좋아요 0 | URL
선택할 때 다른 분야의 책은 아무래도 생각이 안 났어요. 떠오른 책을 바로 고른지라!ㅋㅋ 늘 마음 속에 자리한 책을 고르게 되는 것 같아요.
그나저나 다락방 님 11번까지 어떻게 가셨나요ㅠㅠ 저 4번인데 이미 힘듭니다!ㅋㅋ 언어도, 달리기도 화이팅이에요!

은하수 2024-04-24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역덕으로 인정합니다.
하워드 진 저도 꼭 만나고 싶은 분이었는데.. 나중에 천국에서라도요~~^^
꽃 천지 구경하며 달리기라니 멋집니다. 두통이 날아갔을 듯 해요~~

거리의화가 2024-04-25 06:29   좋아요 1 | URL
하워드 진 강연을 실제로 듣고 얼굴을 본 독자들이 있다면 얼마나 행운일까 생각 많이 했었어요. 천국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뵐 수 있다면 좋겠죠!ㅎㅎ
꽃 천지 구경하며 달리기 정말 할 만합니다. 달릴 때는 숨차서 고통이지만ㅋㅋ 그래도 달리는 순간은 잡 생각 달아나서 좋더라구요. 감사합니다.

희선 2024-04-25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리기도 하시다니, 가끔 달리기도 해야 한다지만 저는 늘 걷기만 할까 합니다 빨리 걸으면 되죠 잘 쉬셨네요 하루라 할지라도 그런 날 있으면 좀 더 낫겠지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4-04-25 06:30   좋아요 0 | URL
저도 늘 걷기만 하던 사람이었어요^^ 근데 요새 스트레스가 많았는데 달리면서 생각이 그 순간은 달아나서 좋더군요. 바람을 느끼며 달리는 맛이 꽤나 좋습니다. 하루 쉬니 좀 낫네요. 오늘은 어떤 일이 기다릴지^^; 희선님 건강 잘 챙기시고 즐거운 나날들 되시기 바랍니다.

자목련 2024-04-25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역사서는 화가 님으로 통한다!
그나저나 업무로 힘드셔서 걱정이네요.
달리기, 산책, 그리고 책과 꽃들이 화가 님께 평안을 찾아주기를 바라요.
꽃 사진과 하늘 넘 예쁩니다!

그레이스 2024-04-25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래쪽 두권은 저도 읽었습니다 ㅎㅎ
그래도 인생책 4권에 포함시키는 화가님 포스는 못따라가겠네요 ㅎㅎ
 
캠브리지 중국사 11 - 하 - 청 제국 말 1800~1911, 2부 캠브리지 중국사 11
존 킹 페어뱅크.류광징 책임 편집, 김한식.김종건 외 옮김 / 새물결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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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브리지 중국사 11권은 청나라 제국 말 1900년부터 1911년까지 그 파도 같았던 시기를 드라마틱하게 다룬다. 이 시기 가장 큰 사건은 역시나 ‘신해혁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먼저 그 이전 중국의 개혁의 모습을 살펴보자. 


1860년대 중국을 여행한 일본인들은 태평천국의 난을 직접 목격하고 일본에도 위기가 찾아올 것이라며 대응책을 찾기 시작한다. 일본은 이를 바탕으로 메이지 유신으로 변화하였고 청일전쟁을 거치면서 아시아 국가의 맹주 자리를 꿰차게 된다. 1901년 이후가 되면 중국인의 일본 유학이 유행 수준으로 급증하는데 이 유학세대들이 훗날 중화민국의 1세대 지도자가 된다. 더군다나 1905년 과거제가 폐지된 이후에는 관료 선발을 해외 유학 경험자를 원하면서 청년들에게 유학을 더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중국인들은 일본 유학으로 자국의 개혁에 대한 열망에 눈을 떴지만 그 지식이란 근본적으로 일본인들이 번역한 서양 지식이었다는 한계가 있었다. 또한 일본과 중국의 혁명가들은 같은 문화와 같은 인종에 대한 동질성으로 뭉쳐야 한다는 사고를 가졌는데 이는 일본의 아시아주의와 통하는 측면이 많았다. 


1900년부터 신해혁명 이전까지 중국은 다양한 정치, 제도의 개혁이 이루어졌다. 앞서 말한바대로 과거제가 폐지되고 신식 학당이 건립되었으며 유학이 장려되었다. 하지만 교육의 외양만 바뀌었을 뿐 실 내용은 여전히 과거 유학을 고수했다는 한계가 있었다. 

군사 제도의 개혁도 있었다. 36진의 신군이 만들어졌고 상비군 이외의 예비군인인 속비군과 후비군이 조직되었다. 이후 육군 통합 체계가 만들어지고 금위군과 해군처가 만들어진다. 북양군도 육군부에 통합되면서 군대 편제가 일률화되었다. 

19세기 말 중국은 국력 신장을 해야 한다는 필요성에 의해 근대 기업을 장려하였다. 근대 기업은 관료들을 그에 맞게 배치하면서 공업화에 힘썼다. 19세기 하반기가 되면 새로운 상인인 매판, 교역업자, 금융업자, 신상이 등장한다. 


1911년 청 제정은 무너지고 공화정이 들어선다. 그러나 신해혁명에 대한 혁명의 의미 자체에 대해 갑론을박이 벌어지는 등 최근 그 의미 자체를 의문시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이 혁명에 대한 오늘날의 해석들은 신해혁명이 지금까지의 생각보다 훨씬 더 거대한 현상이었지만 이 혁명에 대한 실제적 성과는 과거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적었다는 역설로 기울고 있다(P770). 


1898년 유신 운동이 실패한 후 공화제를 주장하는 혁명파와 급진 개혁파들은 각자의 세력을 얻기 위해 집중했다. 1900년대 초 늘어난 유학생들은 이 혁명 세력의 강력한 지지자들이 되었는데 대체적으로 민족 의식을 일깨우고 중화민족을 지키며 중국이 부강해져야 한다 생각했다. 

쑨원은 하와이에서 홍중회라는 혁명 조직 결성을 주도했는데 그것은 중국 최초의 근대 혁명 단체였다. 그는 캉유웨이, 량치차오, 다른 유신파들과 합작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캉유웨이는 1899년 보황회라는 단체를 만들었고 1900년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자 광서제를 수반으로 하는 정부를 만들고자 봉기를 일으키려 했다. 이 때 쑨원도 이를 반청 세력을 결집할 기회로 보았기에 캉유웨이에게 의사를 타진했으나 거부당했고 보황회의 반란도 정부에 의해 진압되었다. 쑨원은 이후에도 비밀 결사, 화교 세력들, 일본인과 서양인 등에게 호소하는 전략으로 운동의 기반을 삼았다. 

청일전쟁을 겪은 이후 학생들은 일본 유학으로 깨어난 의식을 바탕으로 청의 제정에 강력히 반대하고 공화주의적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1903년 무렵 량치차오는 미국을 여행하며 혁명과 공화주의만으로는 중국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국민들 개인의 계몽이 이루어져야 자치할 수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이 때문에 학생들은 쑨원의 입장으로 선회하게 되었고 반제국주의 구호는 약해지고 서구식 개혁이 강조되었으며 배만주의는 강화되었다. 중국의 병폐는 대부분 이민족 왕조 때문인 것으로 치부되는 등 반만 선전이 먹혀들었다. 

흩어져 있던 혁명 운동이 1905년 중국동맹회라는 조직을 기반으로 묶이게 된다. 중국동맹회는 처음에는 학생 조직을 연합하고 이후에는 쑨원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모으고 나중에는 전국 규모로 반청 연합 단계로 나아가고자 했지만 통일성이 약하여 1908년 무렵 사실상 활동은 중단되었다.

1911년 5월 청 조정은 새로운 내각을 발표하고 철도 국유화를 위한 외국 차관 도입을 내놓는다. 차관은 청조가 처음 들여오는 외국 차관이 아니었지만 반청파들은 정부의 무책임을 들며 폭정의 근거가 되었다. 이는 종족 문제와 애국심, 민주적 의식, 경제적 이익을 모두 건드리는 아킬레스건이 되어버렸다. 


새로운 분열은 본질적으로는 도시화와 서구화를 따르고 있던 중국을 대부분 농촌에 기반하고 있는 전통적 중국으로부터 분리시켰으며, 구식의 혈연, 계급, 지연 관계를 뛰어넘기 시작한 - 예를 들어 상회와 정당 같은 - 새로운 결합과 새로운 동맹 관계를 촉진시켰다. 이러한 혁명 운동에서 생겨난 각종 분열, 각종 결합 방식들, 이해관계, 각종 감정이 이후 중국인들의 삶을 수십 년 동안 형성하게 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1900~1913년 사이의 시기는 중국 혁명의 첫번째 단계를 대변하게 된다. - P772


1911년의 중국은 해체된 사회가 가진 이중적 전망을 보여주었다. 사회는 동시에 신군, 근대적 엘리트, 혁명파 등 1911년에 왕조에 반대하기 위해 협력한 일군의 새로운 사회 세력의 온상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처럼 새로운 생명을 서서히 영혼과 정신을 잃어가고 있던 사회의 흐릿한 틀 안에 감추어 둘 수는 없었다. 당시 사람들이 말하던 소위 소년 중국Young China은 분명한 정체성을 갖지도 못한 채 극히 다양한 지역적 상황에 불확실하게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면 위의 거품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민중의 압력으로 인해 장기간에 걸쳐 왕조의 권력이 소진되지 않았다면 벼락부자(폭발호戶), 청년 장교, 활력에 찬 대도시의 지식인들이 정말 왕조를 종식시킬 수 있었을까? 그러나 결국 황제를 퇴위시킨 것이 과연 이 소년 중국의 공격이긴한 것일까? 최고위층의 정치적 의지력의 약화와 상실 때문이 아니었을까? 도시 폭동인 신해혁명은 아편전쟁 이후의 전례 없는 사회적 변화의 결과이자, 농업 제국인 낡은 세계에서 등을 돌리고 정치 조직과 경제적 발전에 관한 새로운 기술을 서구에서 찾으려고 한 도시 엘리트들의창작품으로 해석되어왔다. 그러나 공화국은 당시 새로운 엘리트들의손에 장악되어 있었으나 그것을 탄생시킨 청조의 붕괴는 농촌 전체 내부에 깊숙한 근원을 가진 운동이 서서히 진척되면서 나온 성과였다. - P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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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집 : 재일 디아스포라의 목소리
김용규 외 엮음, 김석범 외 인터뷰이 / 소명출판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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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의 위치는 이산, 이주, 망명으로 인한 상실감과 상처를 경험하면서도 자신들을 억압한 문화의 차별과 폭력에 맞서 비판적이고 급진적이며 소수적인 문화, 특히 타자의 환대에 열린 문화의 가능성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우리가 인터뷰한 재일조선인 디아스포라 지식인들은 모두 디아스포라의 이런 곤경과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20세기 들어 국권의 상실과 민족 분단으로 자신이 살던 고향을 떠나 일본으로 이주하여 식민주의와 분단체제에 의한 억압과 차별을 감내하면서 이를 극복할 비판과 저항의 형식을 창조해온 지식인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이런 민족적 현실 때문에 '자기 민족이 사는 공간'을 떠나야 했던 박탈과 상실의 고통을 경험하면서도 '자기 민족이 아닌 민족이 사는 공간'에서도 차별과 억압을 겪어야 했던, 민족과 민족의 사이-경계in-betweenness를 살아온 존재들이다. 이들의 목소리가 소중한 것은 이런 사이-경계의 사유를 토대로 민족 내의 다수자의 체제와 이념의차별적 폭력성을 집요하게 문제 삼으면서 그것들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 P6~7


구한 말, 일제 강점기 시기 한반도에 살던 이들 중 자의든 타의든 고향을 떠나 해외로 나가서 정착한 이들이 많다. 그들은 미국, 일본, 멕시코, 남아메리카 지역 등 어렵게 그 곳에서 살면서 정착을 위해 애를 썼고 그 중 상당수가 조선의 독립을 위해 자금을 대기도 하고 실제로 독립 운동에 뛰어든 이들도 존재한다. 1900년 무렵 넘어갔다고 한다면 어느덧 120년이 훌쩍 넘는 세월이 흘렀으니 몇 세대가 흘러간 것이다. 근래 들어 이민 세대들이 딕테, 마이너 필링스, 파친코 등과 같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내놓고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무렵부터 이민자들에 대한 생각에 주목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재일조선인도 어느덧 3세대가 훌쩍 지났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 책은 세대 별 재일조선인들을 만난 인터뷰을 기록화하여 담고 있다. 세대가 지나면서 변화하는 재일조선인의 위치와 그에 따른 생각을 확인해볼 수 있다. 다만 인터뷰 시기는 2014년 무렵 10년 전인 경우가 많아 대담자들의 최근 생각이 아닌 것이 좀 아쉬웠다. 그래도 古 서경식 선생님의 경우는 2014년, 몇 년 후로 2차례에 걸쳐 인터뷰를 실어서 시간이 흐른 만큼 변화한 생각도 확인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재일조선인 디아스포라 1세대가 식민주의와 냉전과분단의 역사적·집단적 경험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인식했고 주로 조국에 대한 집단적 의식을 갖는 경향이 있다면, 2, 3세대들은 그런 경험을 물려받으면서도 일본사회의 일상을 살아가야 했기 때문에 1세대보다는 일본사회 내부에서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차별과 마주쳤을 것이다. 따라서 2세대 이후에는 모국과의 관계 못지않게 일본사회 내부의 문제와의 깊은 연관성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1세대에서는 주로 디아스포라의 집단적 생성이 두드러진다면, 2, 3세대에서는 디아스포라의 개인적 생성이 두드러져 보인다고 말해볼 수 있을 것 같다. - P8~9


‘디아스포라’라는 개념이 주는 의미를 곱씹어본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존재쯤 될까. 나의 정체성이 흩어져 있다면 고달픈 생각이 들 것 같다. 원치 않아도 나만 생각할 수 없는, 주변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테니 말이다. 태어나보니 우연히 대한민국에 자리잡은 나는 다른 곳에 태어났다면 지금의 정체성과는 다른 색채를 갖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디에 자리하든 정체성은 혼란스럽기 마련일 것 같다. 죽을 때까지 흔들리는 것이 정체성이 아닐런지. 어쨌든 이들은 몸은 타지에 남아 생활해야 했는데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분투한 흔적을 인터뷰를 통해 엿보게 된다.


첫 번째 대담자는 재일조선인 1세대 김석범이다. 그는 1925년 오사카에서 태어나 일제 강점기를 겪고 일본공산당에 입당 및 탈당한 이력을 갖고 있다. ‘화산도’라는 대표작을 써낸 문필가로 지금까지도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그의 글을 보면 민족 의식이 뚜렷하고 통일에 대한 열망도 강렬함을 느낄 수 있다. 온전히 그 시절 역사를 살아낸 분 아니던가. 그는 재일조선인으로서 강한 정신을 갖고 버티며 살아야 한다고 단언한다. 뉴라이트 등의 극우 인사들에 대한 역사 인식에도 비판적 잣대를 들이댄다. 현재의 정치상의 분열과 대립이 과거에서부터 흘러온 것임이라고 말하고 있다. 


뉴라이트 사람들이 이승만을 국부로 모시고 말이야. 역사는 그저 이데올로기 싸움이 아니라 역사의 진리를 가지고 맞서 싸워야 하는거죠. 그러니까 디아스포라 문제도 그런 데서 나오는 겁니다. 다 관계되어 있는 것이죠.

요는 분열의 원인이 외세와 역사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외세와 결탁한 세력, 특히 이승만 같은 친미주의자에 있다는 겁니다. 미소공동위원회 결렬을 바라면서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해서 공작을 하러 다니지 않았습니까? 그때 미·영·중·소와 조선의 임시 정부가 신탁을 했더라면 꿈같은 얘긴지 모르지만 6.25도 터지지 않았고 통일 정부가 수립되었을 수도 있었겠죠. 앞으로 통일논쟁할 적에는 왜 분열되었느냐, 외세 때문에 그렇게 되긴 했지만 왜 단독선거가 이루어졌느냐하는 것을 꼭 따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P50


두 번째 대담자는 재일조선인 2세대 서경식이다. 그는 최근까지도 일본, 한국을 넘나들며 가장 많은 활동을 벌였지 않았나 한다. 조금 더 활동해주셨으면 좋았을텐데 이제는 뵐 수 없게 되어 아쉬움이 든다. 특히 소수자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재일조선인 2세대로 이전 세대와 이후 세대들과의 사이에 위치하여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치열하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인과 일본 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하기도 했고 디아스포라라는 개념 자체를 많이 설파했다. ‘국가’라는 경계를 넘어 사고한다는 것이 디아스포라적 사고임을 그는 특히나 강조한다. 국가주의적, 국민주의적 사고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나도 동의하는 부분이다. 이는 차별이 아닌 차이를 보아야 하는 미래를 위해서도 중요한 일인 것 같다.


디아스포라적인 사고라는게 한 마디로 하면 국가에 거리를 두고 국가에 대항해서 하는 사고죠. 그러니까 디아스포라적인 사고가 가장 필요한 사람들이 국민주의자들입니다. 그러니까 국가에 속하고 일본의 다수자, 미국의 다수자가 디아스포라적인 사고를 가져야지 대화도 이루어지고 하지요. 그러나 그것은 간단치 않아요. 그런데 적어도 지식인, 글 쓰는 사람, 예술 하는 사람은 잘 견디고 그 방향으로 다수자를 교육해야 합니다. 소수자가 "소수자, 싸워라"라고 하면 아까 말한 악몽이 이뤄지기 쉬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저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는데도 어려운 것이 사실이에요. … 조국이 분단되어 있고, 이렇게 계속 70여 년 동안 차별을 당하면서도 40만 넘는 사람들이 그래도 조선인으로 살고 있다는 것. 그 사람들 중에 제가 볼 때에도 민족적인 지식이 하나도 없으면서도 조선인으로 살겠다는 사람이 있는 것이 놀라운 사실이에요. - P105~106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재일조선인 2세의 입장에서 '재일조선인들이 일본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어떻게 민족의식을 만들어 내었는가'를 볼 때는 이 사람이 일본사회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보는 것이 중요해요. 나라는 사람이 일본사회를 묘사할 때, 소위 재일조선인이 아닌 일본인이든 미국인이든 그런 사람들이 일본사회를 묘사할 때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어떤 미묘한 차이를 느끼고 보고 있는지, 그걸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따라서 재일조선인의 의식을 분석한다, 연구한다고 할 때, 재일조선인만을 대상으로 하고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의 시선으로 세계나 사회를 다시 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죠. - P143


세 번째 대담자는 재일조선인 3세대 최덕효다. 그는 영국 셰필드 대학 교수이자 역사학자로 재일조선인에 대한 문제를 박사 논문으로 내세워 자신의 위치를 연구 주제로 삼았다. 인터뷰에서 특히 역사학자로서의 보편적 고민, 그리고 일본의 주장과의 충돌에서 오는 불편함과 갈등 등을 논한 부분이 정말 좋았다. 그는 존 다우어의 책 ‘패배를 껴안고’라는 책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다우어는 미국의 점령에서 일본인의 목소리와 행위에 주목하면서 긍정적 평가를 받았지만 그는 제국의 유산과 재일조선인과 같은 식민지적 유산에 대한 문제나 비판은 누락되어 있다고 말한다. 에드워드 사이드에 대해서도 일본과 미국의 입장은 있지만 한국의 입장은 빠져 있다는 비슷한 비판이 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마지막으로, 재일조선인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한반도와의 관계 속에서 재일조선인의 정체성을 살펴보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재일조선인의 역사야말로 일제의 식민주의가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계기가 될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재일조선인의 역사와 한반도의 역사를 어떻게 통합하여 얘기할 수 있을까, 그리고 한반도의 역사가 본류고 재일조선인의 역사는 주변에 있는 다른 역사가 아니라 이 둘을 역사적으로 동시에 볼 수는 없을까? 이런 문제 의식 하에서 이 두 역사를 재일조선인의 시각 속에 통합합으로써 더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한반도와 한민족의 역사 혹은 재일조선인의 역사를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 제 관심은 국경을 넘어선 체제의 존재를 이해하는 데 있었습니다. 한국 역사학계에서 하듯이 일국사 내지 민족사가 아니라 트랜스내셔널한 시각에서 재일조선인의 역사와 한반도의 역사를 연결할 수 있는 방식을 모색했습니다. - P184


마지막 대담자는 재일조선인 3세대 정영환이다. 그는 조선근대사와 재일조선인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역사학자로 개인적으로 몇 차례를 통해서 글을 만난 적이 있어서인지 내적 친밀감이 느껴졌다. 그는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라는 책이 국내에서 논란이 된 후 그 책이 일본에서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라는 책으로 펴내며 한국 사회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박유하의 책이 소비가 된다는 것은 그 담론을 받아들이면서 전쟁과 식민 지배 책임에 대한 일본의 호응이 있다(국내 일부 극우 인사들도 마찬가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는 1994년 북한을 방문한 경험이 있고 1998년에는 금강산으로 수학여행을 가기도 했으며 북한이 가장 어려웠던 고난의 행군 시기를 지켜보며 자란 세대다. 그가 조국을 복잡한 심경으로 느낀다는 부분은 솔직함으로 다가왔다. 그는 최근 지역사에 주목하고 있는 것 같다. 지역사 속에서 조선인들의 모습에 대한 연구를 넘어 제3세계에 대한 연구라니, 앞으로 그의 글을 기다리게 될 것 같다.


조국의 문제는 학교에서 항상 제기되는 문제, 어떻게 조국에 보답할까?, '당신은 일본에 있지만, 어떻게 조국을 위해서 살 것인지? 하는 문제들, 그러니까 조국을 위해서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큰 물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물음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직접 살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관념적일 수밖에 없었죠. 학교를 통해서만 알 수 있었던 조국이 고등학교 시기까지 내가 아는 조국이었고, 학교 다닐 때 공책, 학습장이나 그런 것을 사도, 모두 총련에서 만든 것이기 때문에 금강산이나 묘향산, 평양에 있는 여러 시설들이 그려져 있었죠. 조국은 저에게 그런 것이었어요.

저에게 ‘조국’은 동질성을 느낄 대상이라 하기보다는 오히려 차이를 느낄 경우가 많은 대상입니다. 다른 세계인데 한편에서는 친밀감도 있는 복잡한 심정입니다. - P257~258


재일조선인 각 세대별 언어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보는 것이 흥미로웠다. 1세대 만해도 조선의 말과 글을 쓰고 지켜야 한다는 구속이 강했겠지만 2세대, 3세대에 가면 그 구속력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럼 그들은 어떤 고민을 하고 언어적 행위를 이행했는가. 

아래는 차례대로 김석범, 서경식, 최덕효인데 1세대와 2, 3세대가 구별됨을 확연하게 느끼게 된다. 일본어가 편해진 2, 3세대는 오히려 조선어를 말해야 하는 것이 더 어렵고 불편할 수도 있다. 한국어를 잘 표현할 수 없다는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놓지 않는 자세가 놀라웠다.


내가 말하고 싶은 언어의 두 측면은 개별성과 보편성입니다. 개별성이란 언어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 일반적으로는 민족이죠. 그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일본어도 한국어도 다 민족과 연관되어 있죠. 발음도 그렇고 글자의 모양도 그렇고요. 또 하나의 측면은 보편성, 말하자면 그것을 다른 언어로 대체로 번역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근대 일본말이라는 건 거의 서양말을 일본어로 번역한 것이고, 그것이 중국과 한국에도 퍼져 나간 것이죠. 이런 점은 일본이 동아시아에 큰 공헌을 한 것이라 할 수 있죠. 이런 번역을 통해 근대 문명을 동양으로 보편화시키는 데 큰 공헌을 했다는 것이죠. 내가 작가로서 언어의 주박을 느낀 것은 일본어의 민족적인 측면입니다. 모양만이 아니라 일본어 발음이나 글자 등이 일본적인 것이지 조선적인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데서 주박을 느끼기 시작한것이죠. 일본 사상뿐만 아니라 글 자체로서 말이죠. 그것과 더불어이전에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사실 등과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나자신이 가지고 있는 일본적인 의식의 잔재, 일본어가 가지고 있는 개별•적인 구속성, 그런 주박, 더 나아가 우리를 지배한 지배자의 글로 써야 한다는 굴욕감 이런 것을 견디기 힘들었던 겁니다. - P60


저는 한국어를 완벽하게 사용하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면서도, 그렇게 되는 것은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라고 동시에 느끼고 있어요. 디아포스라적인 것인지 제 개인적인 것인지 모르겠지만, 제 본심입니다. 그래서 완벽하지는 않지만 제 생각을 그래도 충실히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일본어입니다. 이것이 사실입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 한때는 오랫동안 좌절감 같은 것을 느끼면서, '나는 마지막까지 해방될 수 없는 식민지 시민이다'라고 진짜로 진지하게 느꼈었어요. 고등학생 때 제 시가 시집에 실렸는데, 후기에 앞으로 다시는 시를 안 쓸 거라고 했었어요. 왜냐하면 일본어로 표현하는 것에 반해, 나는 한국어로 표현할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때 벌써 그렇게 느꼈어요. - P98


제 신체 감각으로서는 일본어가 제일 편하고 그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재일조선인이 조선사람으로서 한반도와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재일조선인으로 살아가야한다고 생각한다면, 언어는 반드시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일본어가 편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일본어가 편한 것에 대해서 불편함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언어를 민족의 자격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그래도 재일조선인이라는 존재를 한반도와의 관계 속에서 구축하려고 하면 언어를 고민해야 하고 항상 일본어를 상대화하려는 노력, 즉 일본어가 모어라는 것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면서 그런 불편함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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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와일드 편

1. 행복한 왕자
자신의 것을 내어주고 희생을 감행한 왕자. 친구들을 따라가지 않고 왕자를 돕고 그 곁에 있다 함께 떠난 둘.
아름다움이란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 내면에서 나오는 것일 것이다.
쓸모 있음이란 가치가 얼마나 작위적인 기준인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돈과 자본이란 가치에 휘둘리기 쉽기 때문이다.

2. 어부와 그의 영혼
어부는 인어를 만났고 사랑을 얻기 위해 마녀를 찾아가 자신의 영혼을 분리시켜 떼어낸다.
영혼과 육체가 분리된다면 그것이 온전한 나이지는 않을 것 같다. 분리된 영혼이 나쁜 짓을 하고 돌아다닌다는 상상은 좀 소름이었다.


전체적으로 실린 단편들이 계급을 풍자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의 삶 때문인지 naive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다.

그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사람들이 겪는 고통이란다. 비참함만큼 큰 신비는 없거든.

사람들이 그림자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몸의 그림자가 아니라 영혼의 몸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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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陳嬰의 어머니는 陳嬰의 가문이 대대로 빈천하였으니 갑자기 부귀해지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陳嬰을 만류해서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고, 王陵의 어머니는 나라가 반드시 천하를 얻을 것을 알고 칼에 엎드려 죽어 王陵을 굳게 권면하였으니, 필부의 밝음으로도 오히려 事理의 이치를 추측하고 禍福의 기미를 살펴서 宗祀를 무궁한 후세에 보전하고 策書를 春秋에 전했는데, 하물며 大丈夫의 일이겠는가. 이 때문에 곤궁하고 영달함은 天命이 있고, 길하고 흉함은 사람에게 말미암는 것이다. 陳嬰의 어머니는<陳嬰이 王이 되면 > 망할 줄을 알았고 王陵의 어머니는 漢나라가 흥할 줄을 알았으니, 이 두 가지를 자세히 살펴보면 帝王의 구분이 결정될 것이다. -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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