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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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이상문학상 작품집에서 김기태의 작품을 처음 만났다. 꽤나 인상적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얼마 전 첫 소설집이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반가운 마음으로 읽게 되었다.


이상문학상 작품집에서 읽은 책은 <세상 모든 바다>이다. 부모님이 자이니치인 제일교포3세인 하쿠와 한국인 백영록의 묘한 만남이다. BTS 이후 가장 성공했다는 케이팝 그룹인 세모바가 아니었다면 그들은 만나지 않았을 사람들일지 모른다. 세상 모든 바다는 ‘ALL THE SEAS OF THE WORLD’로 그 자체로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의미로 보였다. 세모바는 인권, 환경에 관심을 가지고 평소 그런 가사와 메시지를 꾸준히 펼쳐왔다. 팬들도 이에 원전 건설 예정인 곳에 반대 메시지를 내며 ’SAVE MY BADA’로 캠페인을 벌이기도 한다. 


<로나, 우리의 별>에서는 대국민 오디션을 통해 가수로 데뷔하고 성공하는 오로나를 만날 수 있다. 그는 기타 하나에 의지해 목소리로 승부하는 가수로 시작해 여러 앨범이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기부를 하는 등 사회적 영향력을 펼치게 된다. 스스로 길을 닦아 개척해나가겠다 말할 때는 결연한 기개가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세모바와 오로나를 보면서 엔터테이너에게 대중이 기대하는 바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되었다. 특출난 장기, 스타성을 원하면서도 사회적 목소리를 내면 ‘적당히 해라!’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가. 게다가 도덕성까지도 요구하는 상황이라면 참 요즘 스타란 쉽지 않겠다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보편교양>은 생각할 거리가 많은 소설이었다. 곽은 고등학교 3학년을 대상으로 ‘고전교양’이라는 수업을 개설한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엎드려서 잠을 자고 5명 정도만이 눈을 뜨고 귀를 기울일 뿐이다. 그 5명의 아이들 중 은재가 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럼에도 입시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현재의 공교육 시스템을 부정하기란 어렵다. 학교 수업도 모자라 늦은 시간까지 학원 수업 및 과외에 매달리는 아이들에게 고전을 읽고 글을 쓰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 쓸데없거나 사치라고 느껴질 수 있을테니까. 


모두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수업을 듣지 않는 게, 혹은 어떠한 학교교육에도 참여하지 않는 게 부와 권력만을 추종하고 소수자를 배척하며 환경을 파괴하는 불량배로 성장할 거라는 뜻은 아니었다. 노동 착취에 시달리며 형벌 같은 생존을 이어가지만 어떤 비판 의식도 벼릴 수 없는 죄수가 된다는 뜻도 아니었다. 아무도 예단할 권리는 없었다. 학교에서 잘 배워야 훌륭한 시민으로 성장한다는 믿음은, 제도교육에서 ‘모범적인’ 성취를 얻어서 삶의 기반을 마련한 자신 같은 교사들의 고정관념이었다. 공교육이란 중산층의 아비투스를 재생산하고 체제 유지에 기여하는, 필연적으로 보수적인 국가 장치 아닌가. 바른 자세로 수업을 경청하라는 지도는 규율화된 신체를 양산해 사회적 유용성을 극대화하려는 ‘학교-감옥’의 통치술 아니냔 말이다. 곽은 일리치, 부르디외, 푸코 등을 떠올리며…… 어떤 지도도 하지 않았다. 엎드린 학생들의 뒤통수를 애정어린 눈으로 보았다. 학생들이 버리고 간 학습지의 빈칸에 숨은, 자신이 모르는 언어로 된 가지각색의 목소리들을 상상했다.


은재 아버지는 학교를 통해 수업에 대한 항의를 한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히는 게 유해하지 않는가 하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입시 과목 선생님이 아버지께 자본론은 문제 되는 저작이 아니라고 해명한 뒤 그제서야 곽에게 전화를 걸어 사과한다. 은재는 졸업식 때 곽에게 3학년 때 배웠던 과목 중 고전교양 수업이 가장 재밌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무척 기뻐한다. 곽은 입시 과목에서 벗어나 보편 교양을 지향하려 했으나 학생의 이야기 한마디에 일희일비하고 좌지우지되는 것을 보면 학생이 입시, 점수에 목을 매는 것처럼 자신도 평가에 목을 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정말 우리가 바라는 교육자에 대한 모습은 어떤 것일까.


<롤링 선더 러브>는 공포와 동경 사이를 저울질하며 마음의 길을 잃은 주인공 독신녀 맹희가 나온다. 그는 사랑이란 무엇일까를 질문하며 짝짓기 프로그램에 큰 마음을 먹고 나간다. ‘완두’가 된 맹희는 출연자가 아닌 인터뷰 때마다 만난 ‘우엉’ 피디에게 호감을 갖는다. 방송이 나간 후 맹희는 생각한다.


저게 나인가. 아니지. 저것도 나인가. 그건 맞지. 완두는 맹희의 전부는 아니었지만 일부이긴 했다. 나 생각보다 관종이었을지도. 맹희는 갖가지 조합의 검색어를 입력하여 시청자들의 반응을 찾아 읽었다. 각오는 했지만 어떤 말들은 너무 부당했다. 사람들은 나이와 직업과 외모를 초월한 사랑이 더 진실하다 여기면서도 정말 그것들을 초월하려고 시도하면 자격을 물었다. 인생을 반도 안 산 사람에게 어떻게 ‘도태’되었다는 표현을 할 수 있는지, 596명이나 거기에 추천을 누르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지 의아했다. 맹희 자신도, 감자도 토마토도 양파도 그들이 비난하는 만큼 잘못한 건 아니었다. 어째서 이렇게나 많은 남자가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해지고 싶다’는 말을, 무엇을 속이거나 팔아넘기겠다는 말로 번역해서 들을까.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나와 다를 것이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고독한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기대서만 채워지는 충족감은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사랑은 이성 간의 사랑만이 다가 아니다. 일상에서도, 자연에서도 충분히 애정을 쏟을 만한 것을 찾을 수 있다. 


전철역을 나서고도 집에 가지 않고 산책하는 날들. 노점에서 굽는 붕어빵 냄새. 담장 위를 걷는 고양이의 발걸음. 전동 킥보드에 올라탄 여중생들의 웃음소리. 모든 것이 은총처럼 빛나는 저녁이 많아졌다. 하지만 맹희는 그 무해하게 아름다운 세상 앞에서 때때로 무례하게 다정해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런 마음이 어떤 날에는 짐 같았고 어떤 날에는 힘 같았다. 버리고 싶었지만 빼앗기기는 싫었다. 맹희는 앞으로도 맹신과 망신 사이에서 여러 번 길을 잃을 것임을 예감했다. 많은 노래에 기대며. 많은 노래에 속으며.


9편의 소설 중 좋았던 작품 두 개만 뽑으라면 표제작인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과 <무겁고 높은>이다.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은 ‘두 사람의 역사는 길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데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너무나 단순한 문장일 수도 있는데 그냥 좋았다. 니콜라이와 진주는 자동차 전조등 생산 공장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마트 직원으로 팍팍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쉬운 삶을 사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둘은 그렇기 않기에 서로를 향해 내민 손이 위로가 되고 따뜻함을 느끼게 한다. 


미래는 여전히 닫힌 봉투 안에 있었고 몇몇 퇴근길에는 사는 게 형벌 같았다. 미미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주워 담았고 그게 도움이 안 될 때는 불확실하지만 원대한 행복을 상상했다. 보일러를 아껴 트는 겨울. 설거지를 하고 식탁을 닦는 서로의 등을 보면 봄날의 교무실이 떠올랐다. 어떤 예언은 엉뚱한 형태로 전해지고 아주 긴 시간이 지나서야 실현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때로는 시시하고 때로는 끔찍했으며 결국에는 죄다 망해버린 연애들이 있었다. 초라하게 사라진 나라들조차 폐허 어딘가에는 영광을 남기는 것처럼 그 연애들에도 부정할 수 없는 순간은 있었다. 연애가 망하더라도 사랑은 망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저렴한 각본으로 사랑하느니 다른 이름을 붙이고 싶었다. 어차피 첫 단추부터 이상했으니까. 차라리 이것은…… 딩동. 음식 도착을 알리는 초인종이 울렸다. 두 사람이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우리는 친한 사이야."


<무겁고 높은>에서는 역도 선수인 송희를 만날 수 있다. 우리 나라 스포츠는 일부 종목만 인기 있을 뿐 비인기 종목은 대중들조차 관심이 없다. 인기 종목도 프로 선수로 데뷔하고 성공하기 힘든데 비인기 종목은 그보다 더할 것이다. 어쩌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고 기록을 깨어 나간다는 것이 고독함을 불러오지 않을까. 

송희는 마지막 대회에서 94kg의 바벨을 들었으나 100kg의 바벨을 드는 것에는 실패하고 경기장을 내려온다. 

정확한 궤적으로 떠오르는 바벨. 무수히 상상했던 깨끗한 움직임. 꽂힌 원판을 세어보니 이미 100킬로그램이었다. 3차 시기를 위해 복도를 걸으며 송희는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오늘 역도대에 오른 건 이십여 명. 그중 십수 명은 역도화를 벗게 될 것이다. 송희는 자기가 그 십수 명 중 하나라는 걸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다만 바벨을 떨어뜨리고 끝내고 싶진 않았을 뿐.

이 대목을 읽는데 뭉클했다. 자신과의 승부에서 송희는 적어도 지지 않았다.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를 기회를 송희는 쉽게 날려버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만두더라도 후회는 없지 않을까. 그는 다른 일을 하게 되더라도 힘을 내서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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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문명과 자본주의 3 - 세계의 시간, 제2판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3
페르낭 브로델 지음 / 까치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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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시리즈의 마지막 3권은 ‘세계’를 다룬다. 1권에서는 물질활동, 일상의 ‘소비’에 주목했고, 2권에서는 그 상위인 ‘자본주의’ 경제 구조에 대해 알아보았으니 3권은 시간과 공간을 바탕으로 한 세계를 살펴볼 차례가 되었다. 


세계의 시간은 전체사의 상층구조의 작동과 관련을 가진다. 그 상층구조는 아래층에서 작용하는 힘들이 창조하고 부양해준 결과물이지만, 동시에 그 무게가 아래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장소와 시대에 따라서 이러한 아래에서 위로의 움직임과 위에서 아래로의 움직임의 중요성이 변화한다. 그러나 사회적, 경제적으로 가장 발전한 지역에서도 세계의 시간이 모든것을 다 책임지지는 못한다. - P17


세계경제는 지구 전역에 걸쳐 있다. 시스몽디가 이야기했듯이 이것은 "전지구적인 시장 또는 "함께 교역을 하여 오늘날에는 일종의 단일시장을 형성한 인류 전체, 또는 인류의 어느 부분 전체를 가리킨다. 세계-경제(이 말은 사실 어색하고 프랑스어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 표현으로예전에 내가 독일어의 ‘벨트비르트샤프트[Weltwirtschaft]의 번역어를 찾을 때 그다지 논리적이지 않다는 것은 알지만 달리 나은 표현이 없어서 만든 말이다)는 우선 지구의 일부분에만 관련된 말임을 주목해야 한다. 이 말은 경제적으로 독자적이며, 핵심적인 것들을 자급자족할 수 있고, 내부적인 연결과 교역이 유기적인 통일성을 이루는 단위를 가리킨다. - P26


3권의 내용은 우리가 대부분 세계사에서 배우는 경제사의 궤적의 흐름을 보여준다. 시장과 자본의 흐름을 바탕으로 한 ‘경제’의 영역이다. 경제는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고 사회, 문화 등과 엮여서 돌아간다. 그렇기에 15세기에서 18세기까지의 세계 경제의 역사를 살펴보는 일은 그 시기의 경제만이 아닌, 사회와 문화를 확인할 수 있는 방편이 된다. 

다만 여기에서 세계의 시간과 공간에 보편성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브로델은 세계 지도의 나라들 중 유럽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부각되어 떠올라 빛을 본 국가가 있다면 그 이면에는 착취 당하는 국가들과 수많은 시민들이 있었음을 인지해야 한다. 


세계(또는 세계경제) 차원의 분업은 매번 동등한 파트너 사이에서 조화롭고수정 가능한 협약을 통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결정한 종속관계의 연쇄로서 점진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불평등 교역은 세계의 불평등을 낳고 반대로 세계의 불평등은 끈질기게 교역을 창출한다. 불평등 교역과 세계의 불평등, 이 두 가지는 모두 오래 전부터 존재하던 현실이다. 경제라는 카드놀이에서는 다른 것보다 더 나은 패들이 언제나 존재했으며 때로는 속임수가 개재되기도 했다. 어떤 활동은 다른 활동들보다 더 많은 이윤을 가져다준다. - P62


서유럽은 북쪽과 남쪽으로 지리적으로 구분되었을 뿐 아니라 사회, 문화적으로도 다른 모습으로 대비되었다. 하나는 지중해를 둘러싼 이탈리아와 이슬람과 비잔티움의 남유럽 세계, 다른 하나는 원시적 모습에 가까웠던 북유럽의 세계다. 

13세기 두 세계는 샹파뉴 정기시를 통해 물품 교역이 이루어졌다. 


14세기 서유럽이 불황을 겪는 와중에도 이탈리아 도시들의 교역은 여전히 활발했다. 이 중 특히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경쟁이 치열했다. 이 중 승리한 것은 베네치아다. 어째서 승리했는가.


베네치아의 경제적 풍토는 따라서 아주 독특했다. 상업활동은 전반적으로 대단히 활력이 넘쳤지만 그것은 무수히 많은 소규모 사업으로 나뉘어 행해졌다. 장기간 지속되는 회사인 콤파니아(compagnia) 몇몇이 등장하기는 했으나, 피렌체식의 거대주의는 결코 이곳에서 적합한 토양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정부이든 도시귀족 엘리트이든 피렌체에서처럼 도전을 받는 일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마디로 베네치아는 안전한 곳이었다. 달리 말하면 일찍이 유복한 삶에 푹 빠진 상업활동은 이미 검증된 전통적인 방법에만 만족했던 것이다. 그러나 거래의 성격 역시 하나의 원인이 된다. 베네치아에서 상업은 무엇보다도 레반트 무역을 의미했다. 이것은 분명히 막대한 자본을 요구하는 상업이므로 베네치아의 거대한 화폐자본이 여기에 투입되어서 시리아로 갤리 선단이 떠나고 나면 도시 내에 현찰이 문자 그대로 바닥나는 정도였다. 이것은 나중에 서인도로 선단이 떠난 후에 세비야에서 일어났던 현상과 비슷했다. 그러나 자본의 순환은 제법 빠른편이어서 6개월 혹은 1년 정도면 회수되었다. 그래서 선박의 왕복이 이 도시의 모든 활동에 리듬을 부여했다. - P183


베네치아는 비교적 안전했고 지리적 상황이 더 유리했다. 베네치아의 석호를 나오면 아드리아 해로 들어가게 되지만 이곳은 여전히 자국 내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에 비해서 제노바는 도시를 빠져나오면 티레니아 해로 들어가는데 이 바다는 너무 넓어서 효과적으로 감시하기가 어려웠고 사실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되어 있었다. 그리고 베네치아는 오리엔트 방향의 교역로에 섬들이 연이어 있는 것이 이점으로 작용했다. 또 베네치아는 독일 및 중유럽 지역과 연결되어 면화, 후추, 향신료, 은 등의 공급을 쉽게 주고받을 수 있었다.  


베네치아는 16세기 초부터 쇠퇴하게 되었는데 1500년 이후부터 안트베르펜이 베네치아의 위치를 대신하게 되었고, 포르투갈이 아프리카 대륙과 대서양 연안의 여러 섬들을 정복하면서 세계를 확장시킨 것이다. 

포르투갈의 해상항로가 열린 이후 안트베르펜으로 직접 후추가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1508년 포르투갈 국왕이 상관을 세우는데 그곳은 인도 상관의 안트베르펜 지사였다. 후추와 향신료를 찾는 고객이 포르투갈의 해상을 통해  가능해져서 더는 베네치아의 상관을 거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또 1520~1530년대 아메리카산 은과 스페인 상품이 안트베르펜의 경기를 활성화시켰다. 합스부르크 가문과 발루아 가문 간의 전쟁 이후 1559년 카토-캉브레지 조약이 맺어지면서 스페인과 프랑스, 이탈리아, 발트 방면에서 통상이 재개되자 한자 동맹이 다시 기지개를 켰다. 


안트베르펜은 하나의 어음이 여러 사람들 손을 거치면서 유통되다가 어음을 처음 발행했던 사람 자신이 다른 채권의 지불용으로 받게 될 때 어음은 사라진다는 ‘소환’이라는 제도를 통해 채권자들이 마지막 채무자에게까지 책임을 물을 수 있게 했다. 이는 기존의 환어음이나 은행 체제 바깥에서 자체적으로 만든 유연한 체제로 편리성과 효율성을 둘 다 잡았다. 이 제도는 추후에 프랑스, 영국, 포르투갈에서도 통용되었다. 


안트베르펜 이후에는 제노바가 잠시 유럽의 경제를 책임 지게 된다. 

제노바는 제약적인 지리 조건 때문에 언제나 망을 보며 살아야 했다. 별수 없이 위험을 감수하면서 동시에 각별히 신중해야 했다. (…) 제노바는 언제든지 방향을 바꾸고 또 그때마다 필요한 변화를 수용했다. 외부세계를 독점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 그곳을 조직했다가 그곳이 살아가기에 불편하거나 이용가치가 없어지면 가차 없이 버렸다. - P223

제노바의 부는 스페인령 아메리카의 은에 기대는 것보다 더 큰 정도로 이탈리아 자체의 부에 근거하고 있었다. 피아첸차 정기시라는 강력한 체제를 통해서 이탈리아 도시들의 부는 제노바로 이끌려 갔다. 제노바인인든 타지인이든 소액 대출자가 아주 적은 보상만을 받고 그들이 저축한 돈을 은행업자에게 맡겼다. 이렇게 스페인의 재정과 이탈리아 반도의 경제는 항시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 P231


암스테르담은 중간자적 위치에 있다. 과거의 베네치아, 안트베르펜, 제노바 같은 도시 경제의 중심 시스템에서 세계를 지배하는 근대국가 경제 시스템으로 건너가는 길목에 있는 것이다. 네덜란드는 좁은 국토와 부족한 자연자원으로 곡물 반 이상을 수입해야 했고 인구 절반이 도시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함께 살기 위해 서로 돕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암스테르담은 기본적인 어업을 기반으로 저렴한 조선비용으로 해운업을 성장시켜나갔다. 


늦어도 1550년경 이후에는 네덜란드의 화물선들이 북유럽과 스페인 및 폴그투갈 사이의 해상무역 대부분을 장악하게 되었다. 암스테르담에 거래소가 개장되었고 보험국이 설립되었다. 1602년 3월 동인도회사가 설립되었다. 이 회사는 국가 속의 국가로 독립적 성격을 지니는 것이 특징이었다. 동인도 회사는 아시아의 사업에 대해서 독점적 이익을 챙기기 위해 끊임없이 나아갔다. 네덜란드는 1650~1660년대쯤 제국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동인도 회사의 도움으로 아시아 시장에서 포르투갈의 힘을 밀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다. 1696년을 전후한 30-40년 동안에 동인도회사의 사정이 지속적으로 악화되었다. 

유럽에서 후추의 우월성이 사라진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것은 1670년부터 잠재적으로 보이던 현상이다. 이외의 보상으로서 고급 향신료들이 중요한지위를 계속 유지하거나 혹은 상대적으로 나아졌으며, 비단류나 면직류 염색을 한 것이든 아니든와 같은 인도의 직물이 갈수록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고 또 차, 커피, 라카, 중국 도자기 등의 새로운 상품들이 등장했다. 또 과거의 유통로와 시장에서 고장이 일어났고, 이 회사가 많이 이용하던 순환로에 틈새가 벌어졌다. 이런 경우에 흔히 있는 일이지만 때로는 옛 체제가 계속 살아남는 것이 새로운 적응을 방해하고는 한다. 가장 중요한 혁신은 차 무역의 확대 그리고 각국 상인들에게 중국이 개방된 일일 것이다. 1698년부터 영국 동인도회사가 재빨리 직교역(즉, 현찰교역)에 뛰어든 반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기존의 방식을고집했다. 즉, 후추와 약간의 계피 그리고 산탈 목재, 산호 등을 사러 바타비아에 오는 정크선들에서 중국 상품을 구매하는 데에 익숙했기 때문에 현찰에 의존하는 일 없이 상품을 통해서 거래하는 간접교역을 계속했다. 마지막으로 면화, 은 그리고 종국적으로는 아편을 주고 차를 구하는 벵골-중국사이의 연결이 영국에 이익을 주었다. 게다가 그동안 이 회사의 성공에 큰도움을 주던 코로만델 해안이 인도 내의 전쟁으로 인해서 황폐해진 것이 큰타격을 가했다. - P306~307


프랑스 리옹과 파리는 전국 시장으로 이름을 날렸던 도시들이다. 사실 세계 경제사에서 프랑스의 힘은 뚜렷하게 느껴지지 않는다고 생각되었는데 18세기 프랑스의 경제성장은 두드러졌다고 한다. 당시 프랑스 국민총생산은 영국보다 두 배 이상 컸다. 강물을 이용한 운하와 내륙 도로의 도로망이 수송에 유리함을 제공했으니 프랑스 전국시장이 발전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든 셈이다. 


그러나 영국은 7년전쟁과 베르사유 조약을 거치며 세계 경제를 주름잡는 국가로 부상한다. 

영국의 전체 경제공간은 런던이라는 최정점에 복종한다. 정치적인 중앙집권, 영국 국왕의 권력, 상업활동의 집중 같은 요인들이 어우러져서 수도 런던의 위대함을 만들었다. 반대로 이 위대함이 이번에는 자기가 지배하는 공간을 조직하는 힘이 되며 이곳에 행정망과 시장망의 다양한 연결을 창출한다. 그라스는 보급영역의 조직화라는 점에서 런던이 파리보다 한 세기 이상앞서 있다고 주장했다. 런던에 우위를 가져온 요인 중에는 런던의 항구활동이 대단히 활발하다는 점(런던의 항구는 적게 잡아도 영국 전체 교역의 5분의 4 이상을 차지했다)도 작용했고 여기에 덧붙인다면 사치와 낭비곧문화적 창조와도 연결된다의 거대한 기생적 기구로서 파리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는 점도 작용했다. 마지막으로 특히 중요한 것은 런던이 일찍부터 수출입을 거의 독점한 결과 영국 전체의 생산 및 재분배망을 통제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영국의 다양한 지역들에 대해서 런던이라는 수도는 일종의 조차장(場)이었다. 모든 것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가 국내로든지 국외로든지 다시 배분되어 나갔다. - P511

영국이 산업혁명을 성취하게 된 힘은 단지 팽창하는 영국 시장의 상승 또는 조직화에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또 물질적 풍성함에 있었던 것도 아니다(사실 활기 넘치던 18세기에는 영국만이 아니라 유럽 전역이 풍성함을 누렸다). 그것은 영국이 스스로 인식하지도 못한 채 근대적인 해결책들을 취하도록 만든 일련의 기회들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파운드 스털링 화라는 근대적인 화폐, 근대적인 방향으로 형성되고 변형되던 은행제도, 그리고 장기채 또는 영구채라는 안정성 속에 닻을 내린 공채 경험적으로 만들어진 가장 효율적인 걸작품 등이 그런 예들이다. 이 마지막 것은 되돌아보건대 영국의 경제가 건강하다는 최고의 표시였다. 이른바 영국의 재정혁명으로부터 탄생한 이 솜씨 좋은 체제는 영구히 지불되는 공채이자를 규칙적으로 지불했다. 이자지불을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는 것은 파운드 스털링 화의 가치를 계속 유지한 것만큼이나 특출한 묘기에 속한다. - P526


세계 곳곳에서 벌어졌던 지배와 저항의 흐름도 살펴본다. 아메리카, 아프리카, 러시아, 튀르키예, 아시아를 살펴본다. 아메리카, 아시아, 러시아 등은 특히나 한반도와 더 밀접한 거리에 있었기 때문인지 더 집중해서 읽게 되었다. 그런데 20세기 미국이 강자를 차지하지 않았다면 이 챕터는 안 쓰여졌을까라는 삐딱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어쨌든. 


영국은 산업 혁명으로 근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산업화는 개발, 발전을 낳았지만 ‘성장’이라는 키워드가 지금은 양면성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면 시간이 제법 흐른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돈과 자본의 가치는 무시할 수가 없다. 자본주의는 무너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 가속화되어 부익부빈익빈의 불평등을 낳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와 시장 경제는 언제까지 가게 될까 의문을 품으며 오늘도 월급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직장인은 노동의 가치가 노동자에게 제대로 반영될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희망한다.


사회 전체가 산업생활 방식을 향해서 움직여간다는 의미의 산업주의(industrialisme)라는 말이 산업혁명이라는말보다 더 넓은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분명하다. 농업 우위의 사회로부터 산업생산 우위의 사회로의 이행을 뜻하는 그 자체가 이미 심대한 움직임이다-산업화는 앞에서 이야기한 것보다 더 넓은 의미를 가진다는 것도 분명하다. 산업혁명은 말하자면 산업화의 가속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근대화라는 말은 산업화보다도 더 넓은 뜻을 가진다. "산업발전만이 근대경제의 전부가 아니다. " 성장은 더더욱 넓은 뜻을 가진다. 이 말은 역사의 총체성을 포함한다. - P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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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전교조는 아니더라고?"
그 말을 듣고 곽은 조합에 가입해둘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민원으로부터 보호받으려면 조직이 있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전교조와 교총 등 모든 교원 조직 가입을 거절했던 이유를 돌아보고 있을 때 교장이 말을 이었다.
"다행이네. 전교조 교사, 수업중 마르크스 읽혀. 이런 기사라도 나봐. 작살난다."
기사에 달릴 댓글이 눈에 선했다. 전교조가 사상 교육으로 학생들을 세뇌하며 공교육의 저반을 흔들고 있다…… 노동조합에 대한 몰이해는 차치하고, 곽이 가늠할 때 조합에는 그런 영향력이 남아 있지도 않았다. 학생들이 들어줘야 세뇌를 하고, 조합원이 존재해야 저반을 흔들 것 아닌가. 전교조를 한국 교육에 암약하는 간첩 집단 취급하는 세계관은 황당하다못해 순진해 보였다. 하지만 광범위하게 실재하는 편견이기도 했다.

모두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수업을 듣지 않는 게, 혹은 어떠한 학교교육에도 참여하지 않는 게 부와 권력만을 추종하고 소수자를 배척하며 환경을 파괴하는 불량배로 성장할 거라는 뜻은 아니었다. 노동 착취에 시달리며 형벌 같은 생존을 이어가지만 어떤 비판 의식도 벼릴 수 없는 죄수가 된다는 뜻도 아니었다. 아무도 예단할 권리는 없었다. 학교에서 잘 배워야 훌륭한 시민으로 성장한다는 믿음은, 제도교육에서 ‘모범적인’ 성취를 얻어서 삶의 기반을 마련한 자신 같은 교사들의 고정관념이었다. 공교육이란 중산층의 아비투스를 재생산하고 체제 유지에 기여하는, 필연적으로 보수적인 국가 장치 아닌가. 바른 자세로 수업을 경청하라는 지도는 규율화된 신체를 양산해 사회적 유용성을 극대화하려는 ‘학교-감옥’의 통치술 아니냔 말이다. 곽은 일리치, 부르디외, 푸코 등을 떠올리며…… 어떤 지도도 하지 않았다. 엎드린 학생들의 뒤통수를 애정어린 눈으로 보았다. 학생들이 버리고 간 학습지의 빈칸에 숨은, 자신이 모르는 언어로 된 가지각색의 목소리들을 상상했다.

비극적으로 여길 필요는 없었다. 전성기는 무한히 지속될 수 없으며, 때로 아티스트는 대중의 외면을 스스로 가속시키는 법이다.

이야기에는 효율성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메시지가 있다

세상은 정치적인 음악가에게는 약간의 존경을 적선하지만, 정치하는 음악가에게는 무자비하다는 걸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언론은 정치에 발을 들였던 예술가들의 궁색한 말로와 군소정당의 반복적 실패를 부각중이다. 호사가들은 로나의 선언을 유력 정당 공천을 유리한 조건에 받기 위한 포석으로 폄하하고 있다. 가장 가슴 아픈 사실은, 팬들조차 그녀가 ‘순수함’을 잃었다고 손가락질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대 또는 아스팔트에 있어야만, 허락된 자리에 머물러야만 보존되는 ‘순수함’에 우리는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는 외다리비둘기이며 아로미이다. 제플린88과 똑딱이단추, 배부른소크라테스와 목련러너, 까망쥐, 잉맨, 사축A, 빵또아, 붕어싸이코, 당근도기립하시오이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친구와 연인, 추종자이자 소비자, 감시자와 연구자 또는 변호사였으며, 이제 로나의 동지가 되려 하는 사람들이다. 로나는 모두의 스타가 아닐지언정 우리의 별이다. 우리는 ‘모두’가 아니므로 당신의 하루를 모른다. 하지만 알고 싶다. 로나가 질문했듯, 만약 당신이 단지 생존하기 위해 그렇게나 일하는 데에 지쳤다면, 더 많은 삶을 사랑하고 창조하는 데에 쓰고 싶다면, 자신이 자유로운 인간인지 의심해본 적이 있다면, 당신은 우리다. 머지않은 창당 대회, 서로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지라도 우리는 붉은 도브의 연주에 맞춰 같은 노래를 부를 것이다. 우리의 별, 로나가 예고한 대로 그 노래의 제목은 ‘우리는 가능하다’이다.

하늘이 맑았다. 눈밭은 하얬고 바다는 파랬다. 음식냄새를 피우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날이었다. 미안한 일에 사과하고 고마운 일에 인사하기. 마주앉아 밥을 먹고 나란히 서서 사진 찍기. 그러려면 때맞춰 울리는 알람이 필요하다는 느낌. 한시에는 한 번, 열두시에는 열두 번의 종소리가 울리도록. 돌아가면 오른쪽 태엽을 감아보고 싶었다. 열두 바퀴든 열두 바퀴 반이든. 그때 잘못 셌거나 지금 잘못 셌거나. 아니면 그때는 열두 바퀴였는데 이제는 열두 바퀴 반이거나. 시계판 뒤에 무슨 장난과 음모가 있든 살아야 할 시간이 많았다. 어쩌면 서핑을 배울 수 있을 만큼 긴 시간이 있을지도 몰랐다. 왜 시도도 안 해봤을까. 나도 파도를 탈 수 있지. 그래, 나는 파도를 탈 수도 있어.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눈 쌓인 갓길에 서 있었다. 나직한 바람에 봉지의 표면이 파르르 떨렸다.

버리려면 들어야 했다. 버리는 것과 떨어뜨리는 것은 아주 달랐다.

아까 군청 사람을 만났는데 말이야.
아버지는 소주를 들이켜며 말을 이었다. 가족끼리도 카지노에 놀러간다는 먼 나라. 늘어나는 관광객들을 위해 지어질 도로와 호텔. 동네가 탄광문화관광촌으로 개발되면 치솟을 땅값. 국회의원으로부터 도의원, 군의원 들로 이어지는 낯선 이름들. 결국 군청의 아무개 계장이 아버지와 몇 촌이며 항렬이 어떻게 되는지. 그래서 송희 너는 앞으로 무엇을 배워두면 좋은지……
송희는 아버지의 야윈 팔뚝을 보았다. 검댕이 묻은 작업복을 입고 작업화를 신었던 옛날. 저 팔뚝으로 정말 깜깜한 땅속에서 돌덩이를 내리쳤을까. 탄차를 밀고 포대를 짊어지고 어머니를 안았을까. 그리고 나를 들어올렸을까. 송희는 눈앞의 사람이 버린 것과 버리지 못한 것을 가늠해보았다.
송희는 물었다.
근데 아빠는 몸무게가 몇이야?

정확한 궤적으로 떠오르는 바벨. 무수히 상상했던 깨끗한 움직임. 꽂힌 원판을 세어보니 이미 100킬로그램이었다.
3차 시기를 위해 복도를 걸으며 송희는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오늘 역도대에 오른 건 이십여 명. 그중 십수 명은 역도화를 벗게 될 것이다. 송희는 자기가 그 십수 명 중 하나라는 걸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다만 바벨을 떨어뜨리고 끝내고 싶진 않았을 뿐.

방해하는 사람은 없어.
그래. 사실 언제나 없었지. 적어도 역도대 위에서는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도 말리지도 않았어. 송희는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들었거나, 내가 들지 못했을 뿐.
이상하게 말이야.
송희는 그렇게 말하며 바벨에 원판을 더 꽂았다. 그것은 100킬로그램이 되었다.
이제 아무도 밉지가 않아.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어떤 실수는 바로잡을 수 없을 뿐이다.

나는 살고 있을까.

잘 살려면 일단 살아야 한다. 살려면 생각을 멈추고 잠들어야 한다. ‘나는 살고 있다’는 쓸모없는 주문이다.

지금 내가 알아내야 할 것은 보편 법칙이나 핵폭탄 해제 비밀번호가 아니라 어머니에게 선물한 태블릿의 게임 계정이 왜 자꾸 로그아웃되는가이다. 〈사천성〉과 〈애니팡〉은 어머니의 취미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요즘은 혼자 하는 캐주얼 게임조차 로그인을 요구한다. 영문자와 숫자와 특수문자가 조합된 열두 자리의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일은 68세의 인간을 화나게 한다. 대문자 자동 변경 기능을 끄고 특수문자 키보드로 전환하는 방법을 전화로 설명하는 일은 나를 화나게 한다.

오늘날 ‘문명국가’의 다수 시민은 화요일 밤에는 실시간 중계되는 가자 지구의 화염을 보고 목요일 정오에는 총기 난사범의 프로필을 듣더라도 일요일 오전에는 애인에게 단검이 아니라 커피와 토스트를 건넬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차세계대전을 끝낸 폭발 이후 현재까지의 시대를 핵에 의한 평화, 즉 ‘팍스 아토미카Pax Atomica’라 부르기도 한다.

누구도 누구를 치유하기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은 마음의 상호확증파괴다.

나는 가장 먼저 깊은 밤의 문 앞으로 간다. 나는 문을 닫지 않는다. 문을 열지도 않는다. 나는 문을 없앤다. 문도 문틀도, 그것들을 지지하는 벽과 기둥도 없애버린다. 모두 사라진 곳에 활주로가 나타난다.

‘규범’ ‘정상’ ‘평균’ 같은 억압적 개념들에서 평범함을 떨어뜨려놓을수록, 평범함이 얼마나 다양하고 비일관적이며 풍부한 것인지 볼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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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조가 멸망한 후 중국은 청 제국의 강역을 계승했고 만주족은 중국인의 일원이 되었다. 지금 중국이 주장하는 중국사의 영역은 중국 내지China proper를 넘어 청 제국이 지배한 광활한 공간을 포괄한다. 중국은 만주 지역을 동베이東北라고 부르며 중국사가 포괄하는 공간으로 편입시켰다. 반면 한국에서 만주 지역은 한국 고대사의 공간으로 간주된다. 두 나라는 만주 지역에서 태어난 국가를 각자 ‘국사’의 일부에 배치했고, 역사의 일부를 공유하고 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양자의 역사 공간은 충돌한다. 양자의 사이에서 만주족과 그들의 조상이 영유했던 그들만의 역사와 그들만의 공간은 실종되어 갔다. 이 글은 만주족이 살았던 이야기를 그들의 시각으로 서술했다. 한국과 중국이 서로의 역사를 이해하고 공존하는 길을 찾는 데 이 글이 조그만 도움이 되기를 희망한다.

건주여진의 조상인 오도리부는 무단강의 하류역으로부터 남쪽으로 이동하여 조선의 회령에서 거주하다가 서진하여 압록강의 북방에 자리 잡았다. 해서여진의 기원인 훌룬은 동류 송화강의 지류인 훌룬강 유역으로부터 서진하여 송화강 만곡부에서 거주하다가 남하하여 북류 송화강의 중류역에 정착하여 울라와 하다로 발전했다. 여진의 주요 부족의 인구 이동이 일단락된 것은 16세기 초중반이었다. 이 시기에 여진은 건주여진, 해서여진, 동해여진으로 구분되었다.

한국인은 이 지역을 ‘만주’라고 부르고 있지만 정작 청대에 만주인은 ‘만주’를 지명으로 쓴 적이 없다. 만주인에게 ‘만주’는 족명일 뿐이었다. 청대 만주인은 만주 지역을 행정적으로 성경盛京, Mukden·기린吉林,Girin·흑룡강黑龍江, Sahaliyan ula으로 분할하여 불렀다. 때로는 이를 합쳐 불러야 할 현실적 이유 때문에 동북東北, dergi amargi ba이나 관외關外, furdan i tule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동북’은 중국 내지의 동북쪽에 있는 땅이라는 의미에서 나온 말이고 ‘관외’는 산해관의 밖에 있는 땅이라는 의미에서 나온 말이다. 둘 다 만주 지역 자체의 단일한 정치적인 속성에서 도출된 이름이 아니고 수도인 북경北京을 기준으로 한 방위적 성격을 지닌 명칭이었다.

훗날 청대에 만주족 황실은 조상인 몽케테무르의 거주지를 만주어로는 ‘오모호이Omohoi’라고 쓰고, 한자로는 오막휘鼇莫輝, 아막혜俄漠惠, 악막휘鄂謨輝 등으로 다양하게 음사했다. 오모호이의 위치에 대해 중국의 일부 연구자는 아막혜라는 지명이 있는 현재 길림성 돈화敦化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오모호이는 돈화가 아니고 오음회, 즉 조선의 회령이었다. ‘회령’이란 지명은 김종서가 육진을 설치하던 시기인 1434년(조선 세종 16)에 오음회에서 ‘회會’ 자를 취하고 거기에 ‘안녕하다’는 의미의 ‘령寧’을 붙여 만든 이름이다. 따라서 회령은 오모호이의 ‘호이會’를 계승한 지명이다.

1432년 몽케테무르가 북경에 조공하고 있는 때에, 조선은 여연閭延과 강계江界를 약탈한 파저강 유역의 여진을 정벌하기로 결정했다. 사실 여연을 약탈한 여진족은 파저강의 건주여진이 아니고 훌룬 우디거였다. 그러나 조선은 약탈자가 건주위의 이만주라고 오판하고 그를 공격 목표로 결정했다. 이때 북경에 있던 몽케테무르가 문제가 되었다. 세종은 정벌군이 출정하기 전에 사령관인 최윤덕崔閏德에게 비밀 지시를 내렸다. 그 내용은 조선군이 건주위와 전투할 때 북경에서 돌아오는 몽케테무르가 이만주에 조력하면 ‘모르는 체하고’ 그를 죽이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세종의 밀명은 사후에 명의 문책이나 여진인의 반발 등을 피하기 위해 의도된 오살誤殺을 하라는 것이었다. 몽케테무르는 조선군과 길이 엇갈렸고 이만주를 지원하지도 않아서 의도된 오살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최윤덕이 받은 비밀 지시는 세종의 인자하고 온유한 이미지와 전혀 다른 마키아벨리적 모습을 보여 준다. 또한 북방 변경 지역의 개척을 준비하던 세종에게 명의 정1품 우도독 지위와 수천 명의 직속 백성을 보유하고 변경에서 거주하는 몽케테무르가 얼마나 부담스러운 존재였는지를 보여 준다.

1427년(조선 세종 8)에 몽케테무르는 큰아들 권두와 손자 마파馬波를 조선에 파견했다. 권두는 세종을 알현하여 그의 아버지가 자신에게 ‘전심하여 나라를 받들라’고 당부한 뜻을 전하고 그 자신은 한양에서 시위로 종사하겠다고 밝혔다. 세종은 그의 충성은 알겠으나 그가 명에 종사했으니 조선에서 시위를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답변했다.
21) 권두는 1431년(조선 세종 13) 다시 한양을 방문하여 과거에 아버지 몽케테무르가 태종으로부터 상장군上將軍에 임명되어 북변 방어의 임무를 수행했으니 부친이 노쇠한 지금 그 지위를 자신에게 계승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권두는 이 요청의 말미에서 조선이 자신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강조했다. "나는 조선 경내에서 자랐으니 이 해골은 이미 조선의 물건입니다. 청컨대 우리 부친의 직임을 대신하여 북변의 간성干城의 임무를 맡도록 해 주십시오".
22) 권두가 이때 건주좌위의 배후에 있는 명과의 관계를 어떻게 인식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보면 곧 건주좌위의 조선에 대한 복속을 선언한 것과 다름없었다. 세종은 명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은 권두의 과도한 충성 발언이 부담스러웠는지 권두를 접견하지 않았고 그에게 상장군을 수여하지도 않았으며 하사품만 주어 돌려보냈다. 권두는 송별연 자리에서 "시위를 하려고 왔는데 전하께서 허락해 주시지 않으니 실망이 크다"며 눈물을 흘리고 돌아갔다.

오갈암 전투라고 불리는 이 전투는 조선 영역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조선에 의해 전투의 참상과 경과가 관찰되어 『조선왕조실록』에서 전하고 있다.
34) 오갈암 전투에서 건주여진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상대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홀라온忽喇溫’은 훌룬의 음역이며, 그 실체는 부잔타이가 이끈 울라의 군대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부잔타이를 하질이何叱耳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부잔타이의 여진어 칭호인 하스후 버일러Hash? beile(좌左버일러)의 하스후를 표기하기 위해 ‘하何’와 사이시옷을 나타내는 이두문자 ‘질叱’, 그리고 ‘후h?’ 음을 표기하는 ‘귀耳’, 이 세 글자를 결합한 것이다. 부잔타이는 오갈암 전투에서 패전한 후에 여허와 협력하여 건주에 대항했지만 기울어진 대세를 돌이킬 수는 없었다.

1599년 누르하치는 여진 통일의 장정을 시작했다. 그해 건주여진은 하다를 공격했고, 하다는 해서여진 가운데 가장 먼저 멸망했다. 하다의 마지막 버일러인 멍거불루는 생포되어 건주여진의 수도인 퍼알라에 끌려와 있다가, 누르하치의 비첩婢妾과 사통하고 대신인 가가이G’ag’ai, ?盖(?~1600)와 밀통하여 찬탈을 도모했다는 죄로 죽임을 당했다. 1607년에는 해서여진 가운데 가장 존재감이 약했던 호이파가 멸망당했다. 호이파의 바인다리 버일러는 방어를 위해 도성을 삼중으로 축성한 보람도 없이 누르하치의 공격을 맞아 패배했고 아들과 함께 살해당했다. 울라는 호이파가 멸망한 후에 6년을 더 버티다가 멸망했다.
해서여진 후기의 맹주였던 여허는 해서여진 가운데 가장 오래까지 버티다가 1619년에 멸망했다. 몇 년간이나마 건주여진이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방파제가 되어 여허의 멸망을 막아 준 것은 명이었다. 명은 1619년 10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몇 년 전부터 아이신 구룬金國이라는 국호를 사용하고 있던 건주여진을 공격했다. 그러나 명의 공격이 완전히 실패하자 여허는 후원자를 상실했다. 명은 여허를 후원하고 지켜 주기는커녕 신흥 금나라 앞에서 자신의 안위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 봉착했다. 그해 가을 누르하치는 여허를 공격했고, 동성의 버일러 긴타이시와 서성의 버일러 부양구는 피살되었다. 해서여진의 마지막 국가가 멸망한 것이다.

‘동해’가 ‘동쪽 바다’를 뜻하는 어휘에서 만주 지역 동부를 가리키는 지명으로 전화했을 것임은 상식적 차원에서 추론 가능하다. 기록에서도 ‘동해’가 단순히 ‘동쪽 바다’의 의미에서 지역명으로 전화해 가는 단계의 다음 용례를 찾을 수 있다. ‘동해에 가까운 후르카국dergi mederi hanciki h?rha gurun’,
44) ‘동해에 가까운 사견국使犬國, dergi mederi hanciki yendah?n tak?rara gurun’,
45) ‘동해 연안을 따라 거주하는 나라 사람dergi mederi jakarame tehe gurun’,
46) ‘동해 쪽의 와르카dergi mederi ergi warka’
47)가 그 용례이다. 용례에서 보이듯이 아마도 ‘동해 가까운dergi mederi hanciki’에서 ‘가까운hanciki’을 생략하고, ‘동해 연안을 따라 거주하는dergi mederi jakarame tehe’에서 ‘연안을 따라 거주하는jakarame tehe’을 생략하면서 ‘동해Dergi mederi’가 지역명으로 정착했을 것이다.

누르하치 시기부터 홍 타이지 시기까지 후금은 만주 지역 동부를 지속적으로 공략했다. 그 가장 중요한 목적은 인력을 조달하기 위해서였다. 17세기 초기에 후금이 세력을 확대하면서 명, 몽고, 조선과 대치해 갈수록 인구의 부족이 큰 문제가 되었다. 당시 후금은 직접 통치하의 총인구가 100만 명 미만이었다. 반면에 명의 인구는 약 1억 명이고 조선의 인구는 약 1,000만 명 정도였다. 인구가 적은 것은 끊임없이 전쟁을 치러야 하는 신생 국가의 존립을 위협하는 요소였다. 후금에게 인구의 증가는 국가의 성패가 걸린 문제였다. 동해여진인은 후금의 인구를 증가시키는 데 가장 좋은 집단이었다. 누르하치 시기와 홍 타이지 시기 동안 무력으로 포획하여 끌고 오거나 자진 이주한 동해여진인의 수가 10만 명을 상회할 정도로 동해여진은 양적으로 상당한 인구를 가진 집단이었다. 양보다 질은 더 좋았다. 동해여진인은 몽고인이나 조선인과 달리 여진어를 쓰는 집단이기 때문에 건주여진에 동화되는 것이 쉬웠다.

누르하치가 여진 세계를 통일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후금이 복속된 지역을 통치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일통된 여진에 대한 후금의 지배는 영역적 지배라기보다는 복속된 인민을 후금의 중심지인 허투알라 일대로 이주시켜서 사람을 통치하는 인민 지배의 성격이 강했다. 일반적으로 주장되는 것처럼 영역 지배의 성립이 근대국가의 출발점이라면 후금은 확실한 전근대국가였다. 보통 청나라나 만주족의 역사에 관심을 가진 독자라면 만주족 대부분이 중국으로 이주한 1644년 이후에 만주 지역이 인구가 텅 비어 버린 공간으로 변했다고 알고 있다. 그것은 절반만 맞는 말이다. 만주 지역은 이미 누르하치 통치기부터 인구 이동이 급격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누르하치는 정복한 만주 지역 곳곳의 인구를 건주여진의 중심지인 현재 요령성 동부에 집결시킴으로써 팔기의 몸집을 불리고 명과 정면 대결을 지속할 수 있었다. 그 대가로 입관하기 수십 년 전부터 요령성 동부를 제외한 만주 지역 곳곳은 인구가 사라진 황무지가 되어 갔다.

니루라는 이름의 수렵 조직이자 전투 단위는 1니루에 성인 남성 10인 정도가 포함되는 작은 규모로 존재하고 있었다. 누르하치는 1601년 무렵 기존의 니루를 성인 남성 300명당 1니루의 큰 조직으로 확대시키고, 상시적으로 병사를 동원할 수 있는 군사 단위로 재탄생시켰다. 5개의 니루로 구성되는 잘란jalan과 그 상급 단위인 25개의 니루로 구성되는 구사g?sa가 언제 처음 만들어졌는지는 명확하지 않은데, 아마도 1601년 니루를 만들 때 함께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에 황黃, suwayan, 홍紅, fulgiyan, 백白, sanyan, 남藍, lamun의 4개 구사가 조직되었고, 정복전을 거치며 건주여진에 복속되는 인구가 많아지면서 1615년에 양황?黃, kubuhe suwayan, 양홍?紅, kubuhe fulgiyan, 양백?白, kubuhe sanyan, 양람?藍, kubuhe lamun의 4개 구사가 증설됨으로써 모두 8개의 구사, 즉 팔기가 완성되었다. 이때 누르하치의 통치하에 포함된 모든 인구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심지어 노복까지 팔기의 구성원으로 등록되어 기인旗人, g?sai niyalma이 되었다. 따라서 흔히 말하듯이 팔기제를 군사제도라고 설명하는 것은 절반만 맞는 말이다. 팔기제는 군사제도였을 뿐만 아니라 행정제도이자 사회조직이었다. 다시 말해 팔기는 누르하치가 건설하고 확장시킨 국가 그 자체였다.

기존의 씨족과 촌락 구조를 깨지 않고 니루로 만들거나, 기존 구조를 깨고 니루를 만드는 두 가지 방식을 적절히 배합함으로써, 누르하치는 팔기를 청 초기 국가의 발전 과정에서 중앙집권적인 권력의 핵심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니루의 규모는 다양했는데, 자발적으로 복종한 집단은 니루의 정원인 300명에 못 미치더라도 자체적으로 니루를 만들 수 있게 허락했고, 저항했던 집단은 분할하여 니루들의 구성원의 수를 맞추는 데 충원했다. 또한 혈연과 지연의 내부적 결합이 흔들리지 않고 니루로 이어진 경우에도, 니루를 각 구사에 나누어 배치함으로써 부족의 결합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만주의 어원에 대한 여러 설 가운데 어느 것 하나 결정적인 것은 없다. 지금까지의 연구를 바탕으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만주’가 누르하치 통치 시기부터 그의 세력권 내의 여진인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드물게나마 사용되었고 홍 타이지 재위 시기에 ‘주션’을 대체한 공식 집단명으로 선포된 후 사용 빈도가 대거 증가했다는 정도이다.

홍 타이지는 ‘주션’이라는 명칭을 폐기함으로써 그 이름에 묻어 있는 과거의 상쟁의 기억, 특히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의 상쟁의 기억을 일소하고, ‘만주’만을 사용함으로써 여진을 새로운 이름 아래 하나로 통합하고자 의도했던 것이다.

중국을 정복해서 중원 왕조의 외피까지 입은 만주족은 티베트·신강·몽골까지 지배 영역을 확장했다. 만주족이 획득한 강역과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창안한 통치 기술은 현대 중국에 계승되었다. 이런 성취와 유산에도 불구하고 만주족은 역사에서 평가절하되어 왔다. 많은 사람들은 만주족이 중국을 지배하면서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한족과 우월한 중국 문화 속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한족에 흡수되어 버렸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만주족은 청대에 자신들의 언어와 생활양식의 많은 부분을 상실해 갔지만, 한인과의 경계를 허물어뜨리지 않았고 만주족이라는 자의식과 정체성을 잃지도 않았다. 현재 만주족은 중국에서 ‘만족滿族’이라는 민족명으로 여전히 존속하고 있으며, 그 인구는 1,000만 명을 상회한다. 근래 이들은 각종 단체와 협회를 조직해서 만주족 문화의 유지와 부활을 도모하고 있다. ‘만주’가 지나간 과거의 주인공만이 아닌 ‘만족’의 전신으로서 오늘에 드리우고 있는 그림자의 실체로 주목받아야 하는 이유이다.

허투알라 일대에서 이동해 온 다수의 여진인을 요양의 한인들과 한 집에서 거주하도록 조치한 만한동거滿漢同居 정책은 요양 한인의 반발과 저항을 야기했다. 한인은 우물에 독을 풀어서 여진인을 살해하는 방식으로 소극적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누르하치는 요양의 한인을 설득하지도 제어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학살이라는 극단적 방법을 선택했다.

누르하치 시기의 심양 궁궐은 외조와 내정이 하나의 영역 내에 있지 않고 서로 떨어진 두 공간에 분리되어 있었다. 이 점이 중국식 궁궐 구조와 크게 다른 점이었다. 건물의 명칭도 한어가 아닌 만주어였다.

홍 타이지의 권력 강화와 중앙집권적 제도의 지향은 필연적으로 중국식 제도의 도입으로 이어졌고, 그 임무를 수행한 한인 관료를 통해 한어와 중국식 문화가 후금의 권력 핵심부로 유입되었다. 홍 타이지는 한인과의 공존을 위해 아버지 누르하치와는 다른 유화적 정책을 시행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요양 한인의 학살에 대해 아버지 누르하치의 오류를 비판했다. 이어서 누르하치가 노예화시켰던 한인을 평민으로 격상시켰으며 그들 가운데 지식인을 관료로 기용했다. 이들 한인 지식인 관료들은 중국식 문화를 후금에 도입함으로써 후금에 관료제를 정착시키고 후금을 중앙집권적 국가로 변화시킨 주역이었다.
1636년 홍 타이지는 국호를 기존의 ‘아이신 구룬’에서 ‘다이칭 구룬’으로 개칭하고, 만주족의 한이자 요동 한인의 황제이자 몽고의 대칸이 되었다. 이는 곧 만주족이 한인, 몽고인과 공존하겠다는 의지를 선포한 것이었고 다민족국가의 표방을 의미했다.

강희기 동순의 이면의 목적은 시행 시기의 상황에 따라 각기 상이하다. 그러나 표면과 이면의 목적을 통합하여 구조적으로 보면, 표면의 목적은 언제나 조상 능 참배와 성공의 자신감을 표방하는 것이었다. 반면 이면의 목적은 시기마다 닥친 상이한 위기의 관리와 타개를 위한 것이었다.

건륭제가 심양의 궁궐을 증축한 것은 만주족의 정체성을 재수립하고 조상의 고토인 만주 지역의 의미를 재발견하기 위한 중심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건륭제가 심양 궁궐에서 시행한 행사 가운데 샤머니즘 제사를 지낸 사건은 만주족의 정체성 수립과 만주 지역을 연계하고 궁궐이 그 중심 공간으로 기능했음을 잘 보여 준다.

지금 중국 흑룡강성 영안寧安의 청대 지명은 닝구타였다. 이 곳은 먼 과거에 발해가 건국된 곳으로 발해의 다섯 수도 가운데 하나인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가 있었던 곳이었다. 조선 전기에 조선인은 이곳을 고주古州나 구주具州라고 불렀고, 그곳에 사는 여진인을 혐진우디거라고 불렀다. 『만주실록』에서 닝구타는 누르하치가 여진을 통일하기 전까지 동해여진 워지부의 영역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누르하치는 동해여진을 본격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한 1610년에 닝구타를 공격하여 복속시켰다.

두 번째의 닝구타는 누르하치가 후금을 개국한 지역인 허투알라 인근, 즉 현재 요령성의 신빈현 내에 있었다고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신빈의 닝구타는 청대에 기록된 누르하치의 사적과 관련한 문헌에서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청대에 만문과 한문으로 제작된 지도에서도 신빈현 일대에서 닝구타Ningguta, 寧古塔라는 지명을 찾을 수 없다. 신빈 일대에서 닝구타와 유사한 지명은 조선인 신충일이 남긴 『건주기정도기』에서 ‘림고타林古打’라는 형태로 유일하게 나타난다. 신충일은 1595년(조선 선조 28)에 건주여진의 도성인 퍼알라Fe ala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 귀국한 후에 『건주기정도기』를 썼다. 그는 이 기록에 수록한 지도에서 허투알라에서 약간 떨어진 소자하蘇子河의 상류역에 ‘지명림고타地名林古打’라고 기입했고, 소자하의 상류를 ‘림고타천林古打川’이라고 지칭했다. 엄밀히 따지면 림고타林古打가 닝구타Ningguta의 음역인지도 확실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청대에 그리고 현재까지도 영안의 닝구타와 신빈의 닝구타가 착종되며 빚어져 온 혼란은 림고타가 닝구타의 음역이고 누르하치의 할아버지의 여섯 형제를 지칭하는 ‘닝구타의 버일러들Ninggutai beise’의 닝구타가 이 지명에서 비롯한 명칭이라는 가정에서 시작되었다.

‘닝구타 버일러’의 닝구타는 ‘나단타’나 ‘우윤타’와 동일선상에 있는, 형제들의 수로 그들을 합칭하는 호칭이자 일족을 부르는 명칭이고, 지명에 기인한 명칭은 아닌 것이다. 만약 지명 림고타와 ‘닝구타 버일러들’의 닝구타가 관련이 있다면, 그것은 닝구타가 지명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고 그 반대일 것이다. 즉 ‘닝구타 버일러들’이 거주했기 때문에 림고타라는 지명이 생겼을 것이다.

청조의 만주족 통치자들은 그들의 먼 과거의 전설적 조상인 부쿠리 용숀의 신화를 장백산이라는 탁월한 랜드마크에 연결해 갔다. 그 이유는 이 신령스러운 지리적 표상을 자신들의 왕조와 황실의 정통성을 빛내는 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태조고황제실록』은 첫머리 부분에서 『태조무황제실록』과는 달리 장백산을 조상의 발상지라고 확실하게 규정했다. 또한 이 기록은 『태조무황제실록』의 서술과는 달리 장백산의 지리적 배경과 부쿠리 용숀 탄생 신화라는 두 개의 상이한 사실을 하나의 단락 안에서 하나의 사실처럼 자연스럽게 결합시키고 있다. 결국 이 기록에서 부쿠리산은 수많은 산으로 이루어진 장백산 산무리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그곳에서 태어난 부쿠리 용숀은 곧 장백산에서 태어난 것이 되었다. 이로써 장백산과 부쿠리산과 부쿠리 용숀 삼자가 완벽하게 결합했다.

부쿠리 용숀의 탄생지인 부쿠리산에 장백산이 첨입되어 결합하는 최초의 기록은 『태조무황제실록』이다. 이 책은 1636년(숭덕 1)에 편찬되고 여러 번의 개수改修를 거쳐 1655년(순치 12)에 정본定本이 완성되었다. 책의 권1 첫머리에서는 「선先 겅기연 한의 훌륭히 행한 규범」에 기록된 부쿠리 용숀의 탄생 신화와 그의 일란 할라로의 이동과 몽케테무르로의 계보 연결을 그대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태조무황제실록』은 이 서술과는 달리, 부쿠리 용숀의 탄생 신화 앞에서 장백산의 지리적 배경을 서술하고, 그에 뒤이어 부쿠리 용숀의 탄생지인 부쿠리산을 서술하면서 위치를 설명하는 지리적 기준점으로 장백산을 삽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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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한 항구의 끝. 콘크리트 방파제에 서서 바다를 봤다. 아주 짙고 또 넓었다. 파도는 끊임없이 밀려왔지만 먼바다는 잔잔하게만 보였다. 수평선은 단호했다. 보이지 않는 건너편에는 내가 살던 일본. 그 건너의 건너편에는 또다른 얼굴들. 그 모두를 잇는 커다란 바다. 송희가 말한 커다란 사랑의 모양과 크기를 상상해보려 했다.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아이들, 정희정, 이저벨라 린, 박규영도 포함될 만큼 둥글고 크게. 그런데 아까의 아주머니가 가질 수 있는 것이 그 커다란 사랑의 어떤 조각인지는 알 수 없었다. 영록이 산 수건 세트가 그의 어머니에게 전해졌는지 궁금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서 있었다. 나는 그냥 선 채로…… 있었다.

플래그는 서랍 속에 접힌 채로 있다.
지금은 펼치지 않고도 떠올릴 수 있는 그 세계지도에서, 세상의 모든 바다는 분명 이어져 있다. 이제 나는 그 사실이 다소 무섭다. 바다를 등지고 아무리 멀리 가도, 반드시 세상 어떤 바다와 다시 마주치게 될 테니까. 그 불편한 예감에 시달릴 때마다 이상하게도 오래전 지하 소극장에서 본 오타쿠들이 떠오른다. 그 기모이한 오타쿠들의 열렬한 구호. 가치코이코죠. 진짜 사랑 고백. 좋아 좋아 정말 좋아 역시 좋아…… 그것도 사랑이라면, 나는 어쩐지 그 근시의 사랑이 조금 그립다.

혼자가 되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리 멀리 떠났다가도 돌아와 몸을 눕히게 되는 침대처럼, 있는 힘껏 뛰어올라도 바닥으로 끌어내리고야 마는 중력처럼 혼자 됨이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나. 이미 혼자인데 어떻게 더 혼자가 될 수 있을까. 어떤 혼자는 다른 혼자보다 더 완성된 것일까.

혼자를 두려워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말 것. 적극적으로 혼자 됨을 실천할 것. 연애는 옵션이거나 그조차도 못 되므로 질척거리지 말고 단독자로서 산뜻한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할 것.

리아는 사랑이란 우리가 관성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고 넓고 깊다며, 눈을 뜬 자에게는 도처에 존재하는 것이라 했다. 왜 사랑을 성애性愛에서만 구하려고 하니. 우리는 신을 사랑할 수도, 계절을 사랑할 수도 있지. 조카의 해맑은 웃음에서, 동네 빵집에 진열된 갓 구운 빵에서, 뜻밖에 가뿐하게 눈뜬 아침 이불 속에서 듣는 새들의 지저귐에서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야. 그게 성숙이라고.

저게 나인가. 아니지. 저것도 나인가. 그건 맞지. 완두는 맹희의 전부는 아니었지만 일부이긴 했다. 나 생각보다 관종이었을지도. 맹희는 갖가지 조합의 검색어를 입력하여 시청자들의 반응을 찾아 읽었다. 각오는 했지만 어떤 말들은 너무 부당했다. 사람들은 나이와 직업과 외모를 초월한 사랑이 더 진실하다 여기면서도 정말 그것들을 초월하려고 시도하면 자격을 물었다. 인생을 반도 안 산 사람에게 어떻게 ‘도태’되었다는 표현을 할 수 있는지, 596명이나 거기에 추천을 누르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지 의아했다. 맹희 자신도, 감자도 토마토도 양파도 그들이 비난하는 만큼 잘못한 건 아니었다. 어째서 이렇게나 많은 남자가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해지고 싶다’는 말을, 무엇을 속이거나 팔아넘기겠다는 말로 번역해서 들을까.

전철역을 나서고도 집에 가지 않고 산책하는 날들. 노점에서 굽는 붕어빵 냄새. 담장 위를 걷는 고양이의 발걸음. 전동 킥보드에 올라탄 여중생들의 웃음소리. 모든 것이 은총처럼 빛나는 저녁이 많아졌다. 하지만 맹희는 그 무해하게 아름다운 세상 앞에서 때때로 무례하게 다정해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런 마음이 어떤 날에는 짐 같았고 어떤 날에는 힘 같았다. 버리고 싶었지만 빼앗기기는 싫었다. 맹희는 앞으로도 맹신과 망신 사이에서 여러 번 길을 잃을 것임을 예감했다. 많은 노래에 기대며. 많은 노래에 속으며.

그는 어떤 것들은 예고될 수 없으며 호명될 뿐이라고 생각하며 담대해졌다. 당장 해야 할 일은 단순하고 명료했다.

두 사람의 역사는 길다.

결석하지 않고 학교도 잘 다녔다. 법을 어긴 적도 없었다. 하루에 삼분의 일에서 이분의 일을 일터에서 성실히 보냈고 공과금도 기한 내에 냈다. 그럼 큰 걱정 없이

살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살았으니까 이만큼이라도 산다고 만족해야 할까. ‘스물일곱 살 인생 평가 좀’ 같은 제목의 글에 사람들이 쏟아놓는 댓글을 보면 가끔 뭘 잘못한 것 같기도 했다. 더 잘살고 싶었다면 공부를 더 잘했어야 한다고. 솥뚜껑삼겹살도 즉석떡볶이도 먹지 말고 맥주도 마시지 말고 섹스도 하지 말고 닥치고 공부해서 시험에 붙든 돈을 모으든 했어야 한다고. 남들 다 자리잡을 때 어리바리하고 게을렀던 우리가 ‘빡대가리’라고. 두 사람은 이런 질문에 도달했다.
"우리가 그렇게 잘못 살았냐?"

미래는 여전히 닫힌 봉투 안에 있었고 몇몇 퇴근길에는 사는 게 형벌 같았다. 미미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주워 담았고 그게 도움이 안 될 때는 불확실하지만 원대한 행복을 상상했다. 보일러를 아껴 트는 겨울. 설거지를 하고 식탁을 닦는 서로의 등을 보면 봄날의 교무실이 떠올랐다. 어떤 예언은 엉뚱한 형태로 전해지고 아주 긴 시간이 지나서야 실현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때로는 시시하고 때로는 끔찍했으며 결국에는 죄다 망해버린 연애들이 있었다. 초라하게 사라진 나라들조차 폐허 어딘가에는 영광을 남기는 것처럼 그 연애들에도 부정할 수 없는 순간은 있었다. 연애가 망하더라도 사랑은 망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저렴한 각본으로 사랑하느니 다른 이름을 붙이고 싶었다. 어차피 첫 단추부터 이상했으니까. 차라리 이것은…… 딩동. 음식 도착을 알리는 초인종이 울렸다. 두 사람이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우리는 친한 사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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