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쉘은 10대에 접어들어 우울증이 찾아왔다. 쉽게 피로했으며 가족과의 관계도 삐그덕대기 시작한다. 친척이 그녀를 표현한 바에 따르면 “I was a pretty rotten kid(P50).”

미쉘은 친구인 니콜을 부러워한다. 자신은 엄마와 점점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데 친구의 엄마는 그의 자기의사를 존중하고 두 사람이 함께 빵을 굽기도 하고 그런 시간을 가지기 때문이다.
미쉘은 음악을 하고 싶어했다(전설의 팝 밴드 이름, 그리고 음악 용어들이 나와서 반가웠다. 이런 용어에 친숙한 사람들이라면 읽기 수월할 것 같다).
엄마는 그녀가 취미 생활 정도로 음악을 할 거라 믿었을 것이다(그래서 코스트코에서 어쿠스틱 기타도 사주셨는데). 하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정말이지 음악에 푹 빠져 있어서 그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엄마는 쓸데없는 짓 그만하고 학업에 열중하라고 한다. 미쉘의 대답이 마음이 아팠다. ”This weird thing-is the thing that I love(P62).”
결국 둘의 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닫고 만다.

어릴 적 나는 미쉘과 다르게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없어서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근데 돌이켜보면 내가 sky 갈 정도로 공부를 잘했던 것도 아니었고 그만큼 노력을 들인 것도 없었다. 돈 벌라는 부모님의 말에 반항심이 가득했던 시절이었다. 그 세월이 10년은 넘게 간 것 같군. 미쉘이 과연 이후에 어떻게 엄마와 감정적인 화해를 하게 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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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6-01-01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이 책 조금 읽는데 저는 왜이렇게 어려운지 결국 전자책으로 번역본 다시 샀어요. 휴..
 

이달에 읽은 책 중 나누고 싶었으나 끝내 마무리짓지 못한 글들이 있기에 그 소감을 간단히 적어보고자 한다. 정치와 예술에 관한 이야기지만 그 안에 품은 이야기가 많아서 정리하기가 참 어렵더라.  



우리 문화는 과잉과 과잉 생산을 기반으로 한다. 그 결과로 우리 감각 경험의 선명도는 꾸준히 떨어진다. 현대 생활의 모든 조건(물질적 풍요, 과밀)이 합해져 우리의 감각 기관을 둔화한다. 따라서 (이전 시대와 달라진) 우리의 감각과 감각 능력에 비추어 비평가의 임무를 평가해야 한다.

지금 중요한 것은 감각을 회복하는 것이다.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듣고 더 많이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한다. - P35


예술 작품에서 표현성이 중요한 까닭, 표현성 곧 스타일의 가치가 내용보다 우선하는 까닭(내용을 스타일에서 분리하는 오류를 범할 때 말이다)을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우리가 실낙원을 읽으며 느끼는 만족감은 신과 인간에 관한 작품의 관점 때문이 아니라 이 작품에 구현된 탁월한 에너지, 활력, 표현성 때문이다.

또한 그렇기에 예술 작품은 아무리 표현적인 것이라고 할지라도 작품을 경험하는 사람의 협력에 크게 의존한다. 사람이 작품에서 '말하는' 것을 인지하고도 둔감해서 또는 몰입하지 않아서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 P46~47


이 책을 전체적으로 관통하는 주제가 있다면 '예술은 내용(본질)이 아니라 스타일(형식)이다. 따라서 예술의 분석을 지양하고 감각을 믿고 따르라!'가 아닐까.

그래서 1부의 '해석에 반하여'와 '스타일에 관하여'가 이 책의 전체적인 주제를 담고 있다면, 2부에서 5부까지는 이의 사례와 그것에 관한 감상이다. 

여기 쓰여진 글들은 손택이 1960년대 초중반에 쓴 것으로 다양한 예술 장르(문학, 희곡, 영화, 비평 등)를 감상한 바를 기반으로 내놓은 것이다. 


미술관에 종종 가서 작품을 감상하는데 내가 느낀 바가 맞는지 걱정이 될 때가 있다. 그래서 돌아와 감상을 정리할 때도 후속 작업(책을 읽거나 관련 자료를 찾아보거나 등등...)을 하곤 한다. 나의 감상이 맞고 틀렸는지를 확인받기를 원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문학 작품이나 영화를 볼 때도 등장 인물이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 기준과 가치에 부합하지 않으면 불편함을 느끼곤 한다. 문학의 가치는 내가 경험하는 세계 이상의 다양성을 보기 위한 것일텐데 이를 심리적으로 거부해서 집중력을 흩뜨리는 원인이 된다는 생각을 했다.

초현실주의 예술에 대한 설명이 특히 좋았다. 기존의 틀을 깨고 부수어 다양한 것들과 결합하는 시도는 새로운 낯섦을 만들어낸다. 그러니 초현실주의 예술 작품을 볼 때의 낯섦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예술의 초현실주의 전통은 기존의 의미를 파괴하고 극단적 병치(또는 ‘콜라주 원칙)로 새로운 의미 또는 반反의미를 창조하려는 개념으로 한데 묶을 수 있다. 로트레아몽의 말을 빌리면 아름다움이란 "해부대 위에서 재봉틀과 우산이 우연히 만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개념의 예술은 뚜렷한 공격성을 띤다. 관객의 상투적 기대에 대한 공격성이며 무엇보다 매체 자체에 대한 공격성으로 움직인다. 초현실주의 감성은 극단적 병치 기법을 통해 충격을 주려 한다. - P383


개인적으로 문학에 대한 비평은 그나마 나았지만 희곡, 영화 등에 관한 글은 모두 생소하여 더욱 읽기 쉽지 않았다. 동시대 독자들은 과연 어땠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내 관심은 자치[자율]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인간 실존의 전반적인 도구화와 인간의 몸과 인구의 물질적 파괴를 핵심적인 기획으로 하는 주권의 형상들이다. 주권의 그런 형상들은 거대한 광기나, 몸의 충동과 이해관계 그리고 정신의 충동과 이해관계 사이의 균열을 드러내는 조각과는 거리가 멀다. 정말이지, 죽음의 수용소와 같은 이런 표상들은 우리가 계속해서 살아가는 정치적 공간의 노모스를 구성한다. 더 나아가, 인간 파괴의 동시대적 경험들은 정치, 주권, 주체 읽기가 근대성에 관한 철학적 담론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 것과는 다르게 전개될지도 모른다는 점을 시사한다. 우리는 이성을 주체의 진리로 사고하는 대신, 삶과 죽음 같은 덜 추상적이고 더 실체적인 다른 근본적인 범주들을 기대할 수 있다. - P132


좋은데 정리하기 쉽지 않은 책이 있다. 이 책이 그런 경우다. 저자는 푸코, 아감벤, 헤겔, 조르주 바타유, 파농 등 다양한 사상가의 이론을 넘어 이를 더 나은 사유로 발전시켜서 ‘죽음정치’라는 개념이란 틀로 만들어냈다. 나의 좁은 식견으로 사실 이 책의 내용을 다 소화해낼 수 없었다. 오늘날 국경은 강화되고 전쟁, 폭력이 일상화된 환경에서 ‘근대 민주주의, 민족을 넘어선 정치는 가능한가’, ‘차별과 배제를 넘어선 공동체는 기능할 수 있는가’ 등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는 것만으로 다행으로 생각한다.


근대성에 기반한 민주주의는 서구의 식민화 정책에 의해서 성립되었으며 그 안에는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 된 타자들이 있었다. 서구는 식민지 정복을 통해 민주주의 규제 밖의 영역이라는 전례를 만들어 민주주의를 규범을 벗어난 합의, 관습이 지배하는 제3의 지대에서 폭력을 외부화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인종주의는 죽음정치를 작동시키는 동인이 되었다. 

이처럼 저자는 근대의 보편성 개념이 실제로는 죽음과 파괴, 전쟁과 관련이 깊다며 이를 ‘죽음정치’로 이야기했다. 공간은 주권, 폭력의 기반이 되는 것으로 주권을 행사하는 것은 공간을 점령함으로써 기능한다. 현대 들어와 확보된 이동성은 갑자기 나타났다 예고 없이 사라지는 치고 빠지기 전쟁의 형태가 가능하게 했으며 국가 조직에 의한 전쟁이 아닌 수행 과제에 따라 얼마든지 합쳐졌다 분리되었다 하는 다형적이고 분산된 조직체를 만드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푸코는 ‘주권을 행사한다는 것은 필멸성에 대한 통제권을 발휘하는 것이며 생명을 권력의 배치와 발현으로서 정의하는 것(P127)’을 생명권력(생명정치)이라는 개념으로 명명했다. 저자는 생명권력이라는 개념은 푸코가 살던 근대 시대에는 통했을지 모르나 현대 사회에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야기한다. 파농은 대상에 대한 불안과 무서움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 공포이며 인종 지배 하에서 사회적 소수가 된 네그르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파괴는 외부세계가 주체로 되돌아가는 극단적이거나 병리적인 형태로 그 대상을 내부의 타자, 주체로 삼는 것이다. 

저자는 파농의 분석에서 나아가 인종주의가 생물학적인 요소 뿐 아니라 문화적 요소에 의해 자신의 불안과 공포를 타자에게 전가한다. 이런 타자들은 여러 위험과 위협 속에서 자신을 숨기고 자신을 새로운 주체로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신자유주의 사회에 이르러 객체화, 사물화된 인간은 이제 일부가 아닌 전 세계로 확장되었다. 위기에 빠진 민주주의, 인간성을 잃어버린 현 사회를 나아가게 하기 위해서는 취약성, 돌봄, 말의 물질성에 대한 재인식(우리 자신과 세상과 소통하기 위한 말과 언어가 도구화되었기 때문)을 기반으로 하여 윤리, 정치적 전환을 해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결론이다. 


밑줄을 여러 군데 긋기는 했는데 부분이 좋다기보다는 전체 단락 전체가 좋은 경우가 많았다. 특히 근대 민주주의의 이중성을 다룬 1장과 파괴, 폭력-창조를 다룬 4장의 내용이 내게는 인상적이었다.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어떻게 인식되고, 타인이 우리를 누구로 여기는지가 어떻게 이 우연한 사건에 의해, 그렇게 돌이킬 수 없이 결정될 수 있을까? 왜 그것이 우리가 무엇에 대해 권리를 갖는지, 그리고 그밖의 것들을-우리가 무엇을 얻기를 희망할 때마다 반드시 제시해야 하는 증거, 서류, 그리고 정당화의 총합을-그렇게도 결정적으로 좌우하는가. 존재할 권리부터, 삶이 우리를 데려가는 그곳에 있을 권리, 자유롭게 이동할 권리까지.

세계를 횡단하며 우리가 태어난 곳이 지니는 우연성과 그것이 담고 있는 자의성과 제약의 무게를 가늠하는 것, 삶과 존재의 시간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을 결합시키며, 우리가 나그네라는 지위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것-어쩌면 이것이 최종적으로 우리 인간성의 조건이자, 우리가 문화를 창조하는 기반일지도 모른다. - P297~298


정리하면서도 도대체 내가 뭘 정리한 거지 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그래도 뭐라도 정리해야지 싶어 끙끙대보았지만 이게 최선인가보다 싶다. 


어느덧 올해가 이틀도 채 남지 않았다. 지난주 갑자기 몰아닥친 한파에 감기로 골골대다가 어제부터 쓴 휴가로 지금은 좀 나아졌다. 2025년 한해를 총정리하는 글을 간단히라도 써봐야지 했는데 어영부영 하다보니 결국 이렇게 시간이 흘러버렸다는. 

아무튼 개인적인 목표에 의하면 작년에도 독서를 대충 한 것 같은데 올해는 그보다 더 심한 듯 싶다. 내년에는 좀 더 나은 독서 생활을 이어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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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본미술 순례 1 - 일본 근대미술의 이단자들 나의 일본미술 순례 1
서경식 지음, 최재혁 옮김 / 연립서가 / 2022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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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했으나 역시 재미 있었다. 원래 여행기를 읽는 것을 좋아하고 거기에 하나의 주제를 기반으로 정리한 책을 좋아하는 탓이다. 또 서경식 선생님의 디아스포라적 위치, 자기 재인식의 사유를 담은 문장들이 있으니까.

얼마 전 펀딩을 한 2권을 읽기 전 이 책을 먼저 읽기 위해 집어 들었다. 


저자는 일본 근대 미술을 언제고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고 한다. 책에 소개된 미술가들은 다양한 범위를 아우르고 있으나 보편적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 수도 있는, 저자의 표현에 의하면 ‘이단자’들이 표현한 미술이다. 또 자신은 일본에서 태어나 자랐기에 조선보다 일본에 아무래도 더 친숙할 수밖에 없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책을 쓸 당시 코로나로 전 세계가 시름하고 있을 때였던데다 한국과 일본과의 관계도 악화된 상태였기에 개인적인 안타까움도 덧붙여졌을 것으로 생각한다. 저자는 일본 미술을 미화하자는 것도, 비난하자는 것도 아닌 일본을 비판하기 위한 하나의 거울로 삼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책을 썼다고 밝힌다.


총 일곱 명의 미술가를 다루는데 이중 아이미쓰와 마스모토 슌스케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나카무라 쓰네의 <두개골을 든 자화상>은 두개골을 들었다고 믿기지 않을 만큼 평온하다. 두개골은 서양화에서도 익숙한 그림의 등장 소재다. 두개골은 죽음에 대한 상징적 묘사로 17세기부터 ‘바니타스’라는 형식으로 북유럽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에서 시작되었는데 전통적으로 정물과 해골을 함께 배치하는 것이 특징이다. 자화상 속 인물은 두 뺨이 붉게 물든 것을 통해서도 어딘가 아픈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도 표정은 두려움 같은 감정을 초월한 모습이다. 저자도 그 점이 신기해서 이 그림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나카무라 쓰네는 우크라이나 출신의 시인이자 언어학자, 동화작가인 바실리 에로센코의 자화상을 그렸는데 그 초상화는 근대 일본 서양화의 대표작으로 남았다고 한다(에로센코는 루쉰과 교류하고 염상섭, 박헌영과 만남을 갖기도 했다고 한다. 사망 직전 한국의 전래동화 <선녀와 나무꾼>을 에스페란토어로 남겼다니 놀라웠다). 


사에키 유조는 ‘요절, 파리, 화가’라는 세 가지 요소를 지녀 일본 근대 미술의 신화로 남았다. 도쿄미술학교 졸업작품으로 그린 자화상은 공교롭게도 앞서 언급한 나카무라 쓰네의 바실리 에로센코의 자화상과 비슷한 느낌을 받게 한다. 그러다 1924년 파리로 건너가 만난 야수파 화가 모리스 블라맹크에 의해 비난을 받고 충격을 받은 뒤 그린 자화상은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그렸다. 그는 일본 근대미술의 정통 아카데미즘적 화풍에서 길을 벗어나 자신만의 화풍을 만들어냈다. 사에키의 주변에는 조선과 관련 있는 인물들이 많았다고 한다. 후지시마 다케지는 그가 미술학교에서 가르침을 받았던 스승으로 짧게나마 조선에 체류하며 작품을 남기고 조선미술전람회 심사를 맡기도 했다(그는 조선 화가 오지호의 스승이기도 하다). 미술학교 선배인 이시이 하쿠테이, 친구인 야마다 신이치도 조선미술전람회 심사를 여러 번 맡았다. 


일본의 군국주의가 강화된 이후 서양화를 그리던 대부분의 일본 화가들은 전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후지타 쓰구하루는 그 흐름에 앞장선 대표적인 화가다. 그런데 그는 전쟁이 끝나도 이에 대한 반성은 커녕 오히려 이를 정당화하는 발언을 했고 심지어 유럽으로 가 이름을 바꾸고 남은 삶을 살아갔다고 한다. 

이 흐름에 예외라 할 수 있는 부류가 아이미쓰와 슌스케다. 


아이미쓰의 <눈이 있는 풍경>은 서양의 초현실주의 대표 미술가인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과 비슷한 느낌을 떠올리게 한다. 사실적인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형체를 알 수 없는 덩어리들이 붉은 기운에 휩싸여 있다. 저자는 2020년 예술학 강의에서 ‘전쟁과 미술’을 테마로 삼았을 때 이 그림을 학생들에게 보여주었다고 한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때라 학생들의 감정도 남달랐다고. 이 그림은 1938년 그려졌다. 1938년은 중일전쟁이 시작되고 일본이 군국주의의 기치를 내건 이후다. 그림 속 묘사는 당장의 현실은 아니지만 미래를 예견한 듯한 불안과 공포의 그림자가 엄습하고 있다. 아이미쓰는 전쟁화를 그리지 않았다. 조각가 이데 노리오의 회상에 따르면 어느 날 모임에서 화가 후루사와 이와미가 “요즘은 군부에 협력해서라도 살아남아야 해.”라고 말했을 때, 아이미쓰는 히로시마 사투리로 “아무리 그리 말해도 나는 전쟁화는 못 그려, 어쩌면 좋지?”라고 울먹였다고 한다(P113). 그는 정치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시류에 편승하는 화가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아이미쓰의 <눈이 있는 풍경>은 현대미술가 야나기 유키노리에 의해 <고질라 프로젝트-눈이 있는 풍경>으로 재탄생되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일본 정치, 우익 단체에 의해 전시 설치를 지속적으로 방해받는 등 우여곡절이 많다. 과거의 망령은 여전히 떨쳐지지 못했다. 


마쓰모토 슌스케의 그림은 대체로 어둡고 음울한 색채와 분위기를 지녔다. 슌스케는 도쿄에서 태어났으나 열 살부터는 모리오카시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는 갑작스런 고열 이후 얻은 청각장애로 원래 꿈이었던 엔지니어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다행히 형 덕분에 붓을 잡으면서 화가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 

‘신념’이란 말이 번번히 입에 오른다. 하지만 오히려 현대의 지식인이나 젊은이에게 신념이 없다는 것은 그들에게 아직 반성하는 양심이 있다는 증거다. 신념의 부족보다도 몽매한 신념이 얼마나 크나큰 재앙이 되는지를 생각해 보고 싶다. - 잡기장, 1937년 4월호 (P208)

그는 아내와 함께 발행한 잡지에서 이런 글을 남겼다. 충성과 신념을 강요당하던 시대 몽매한 신념을 부르짖는 일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음을 느끼게 한다. 그는 스즈키 구라조가 기고한 미술가가 국가를 위해 붓을 휘둘러야 한다는 글에 대해 예술의 휴머니티로 논박한다. 물론 그의 휴머니티에 대해서는 곱씹을 필요가 있다. 슌스케는 전쟁에 협력하지 않고 저항한 예술가의 전형으로 추켜세워진 면이 있기 때문이다. 보편적 가치이자 인도주의인 휴머니티의 구체적인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을 뿐더러 그가 일본의 군국주의이자 대동아주의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도 알 수 없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이런 시대 속에서 그가 예술가로서 최선의 길을 걸었다고 할 수 있다고 평한다. 


7명의 화가 중 4명의 화가를 언급했을 뿐이지만 나머지 인물들도 흥미롭다. 책은 각 화가의 작품과 삶의 궤적, 그와 관련된 인물들과 역사를 언급하고 있기에 근대 시기 예술과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누구나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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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5-12-30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엄청 궁금한데 참고 있던 책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뒤로 뒤로 미뤄두고 있는데,,, 모른척 할 수가 엄ㅅ습니다.^^;;
 

대타자의 존재를 내 생명에 대한 공격으로, 생물물리학적으로 제거해야만 내 생명의 잠재력과 안전을 강화될 수 있는 그런 치명적 위협 또는 절대적 위험으로 인식하는 것, 이것이 근대 초기와 후기 모두에 걸쳐 나타나는 특징적인 주권의 여러 상상적 차원 중 하나라고나•는 주장한다. 허무주의와 권력에의 의지 선언을 존재의 본질로서 다루든, 인간의 대상되기becoming-object로 이해되는 물화의 문제를 다루든, - P138

또는 모든 것을 비인격 논리와 계산 가능성과 도구적 합리성의 지배에 복종시키는 문제를 다루든 상관없이, 전통적인 근대성 비판 대부분을 이런 지각의 인식이 뒷받침하고 있다. - P139

영원을 향한 욕망 속에서 포위된 몸은 두 단계를 통과한다. 첫째, 몸은 단순한 사물, 모양을 바꿀 수 있는 가소적인 단순한 물질로 변환된다. 둘째, 몸이 죽음에 처해지는 방식, 즉 자살이 그 몸에 궁극적인 의미를 준다. 몸의 물질, 또는 다시 말해서 몸으로서 존재하는 물 - P172

질은 사물로서의 속성이 아니라 그것 바깥의 초월적인 노모스로부터 연역될 수 있는 특성을 지닌다. 포위된 몸은 희생을 통해 영원한생을 존재하게 하는 금속 조각이 된다. 몸은 스스로를 이중화하고,
죽음 속에서 글자 그대로 또는 은유적으로 포위와 점령의 상태로부터 탈출한다. - P173

파괴의 충동은 먼저 내부의 타자를 표적으로 삼으며 시작된다. 나치 통치하에서 독일 민족의 몸에 퍼져 있다고들 하는 썩은 조각인 유대 민족을 절멸시키려는 명령이 이런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곧 주체그 자체를 그 대상으로 삼는다. 이 경우 파괴는 "외부 세계에서 되돌아와 주체를 향하고", "시의적으로 맞지 않는 일을 하도록, 자신의익에 반하여 행동하도록, 현실 세계에서 그에게 열린 전망들을 파괴하도록, 결국 그 자신의 실제 존재를 소멸시키도록" 주체를 밀어붙인18다.‘ 식민주의, 파시즘, 나치즘은 외부라고 생각되던 세계가 주체로 회귀하는 극단적이거나 병리적인 세 가지 형태라 할 것이다. - P189

"나는그저 다만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사람일 수 있기를 바랐다. (...) 나는사람이기를, 오직 사람이기만을 바랐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다른 사물들에 둘러싸인 하나의 사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른사람들 사이에서 사람이고 싶다는 욕망은 차이의 명령에 의해 저지된다. 인종의 주체, 즉 차이로 규정되는 주체에 대해 인종주의는 "네그르의 행실 conduite de Negre"를 요구한다. 말하자면 이는 따로 놓인 사람의 행실인데, 왜냐하면 네그르는 따로 떨어뜨린 인간들의 일부-따로 떼어진 몫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불명예와 치욕에 귀속되도록 배치된 일종의 ‘잔여물‘이 되는 것이다. - P210

성의 두 양상의 중심에 팔루스phallus가 있다. … 식민지 상황-그러므로 인종주의적 상황에서 그것은 삶에 대해 가장 순수한 방식으로 발기,
돌출, 그리고 침입으로서 나타나는 것을 상징한다. 팔루스에 그 물질성이나 그도 아니라면 최소한 그 살아있는 살을, 감각의 영역을 증언하는 능력, 모든 종류의 감각과 진동과 전율(색, 향기, 촉감, 무게, 냄새)을느끼는 능력을 회복시켜주지 않고서는 발기, 돌출, 침입에 대해 말할수 없다. 인종적 지배의 맥락에서, 따라서 사회적 소수화의 맥락에서, 네그르의 팔루스는 무엇보다 거대한 자기 긍정의 힘으로서 인식된다. 그것은 완전히 긍정하는 동시에 위반하는 힘, 어떠한 금기로도억눌리지 않는 힘의 이름이다. - P216

아프로퓨처리즘afrofuturisme[아프리카 미래주의]은 20세기 후반 디아스포라에서 등장한 문학적, 미학적, 문화적운동이다. 이는 SF, 흑인 문화와의 관계 속에서의 기술에 대한 성찰, 마술적 리얼리즘, 비유럽적 우주론을 결합하여, 소위 유색인종의 과거와 현재 상황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 P260

다양한 유형의 상호작용은 우리가 관습적으로 대립시키는 개념들을 서로 연결한다. 과거는 현재 속에 있다. 이는 반드시 과거가 현재를 반복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때때로 현재 속에서 굴절되고, 때로는 그 틈새로 스며들어 자신을 암시한다. 혹은 단순히 시간의 표면으로 다시 살아나, 시간의 표면을 회색빛으로 공격하고, 포화시키고, 읽을 수 없게 만들려고 한다. 가해자는 피해자 속에 있다. 고정된것은 움직임 속에 있다. 말하기는 침묵 속에 있다. 시작은 끝에 있고끝은 중간에 있다. 그리고 모든 것, 아니 거의 모든 것이 서로 얽힘, 불완전, 확장과 수축 속에 있다. … - P270

아카이브 자료에 침투한다는 것은 흔적을 다시 방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것은 바로 그 경사면을 파고드는 것을 의미한다. - P276

않다. 인류는 영원히 창조 중이다. 인류가 공유하는 바탕은 취약성vulnérabilité인데, 이는 고통과 퇴화에 노출된 신체의 취약성에서 시작한다. 이 취약성은 다른 존재들에게 노출된 주체의 취약성이기도 한데, 그 다른 존재들이 경우에 따라 자신의 존재를 위협할 수도 있다.
이러한 취약성에 대한 상호 인정 없이는 배려가 자리하는 것은 물론이고, 돌봄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 P281

모든 건정한 민주주의의 체제에는 말의 물질성이 존재하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과 세상에 대해 발언하고 이 세상에 작용하는데 우리가 가진 것은 말과 언어뿐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그런데이제 말과 언어는 도구, 나노-대상, 기술이 되었다. 그것들은 무한한 재생산의 순환에 흡수되어 스스로를 도구화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 도구가 되었다.
그 결과 우리의 의식을 강타하는 끊임없는 사건들의 흐름은 우리의 기억 속에 역사로서 새겨지지 않는다. - P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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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민주주의의 역사는 사실상 두 개의 얼굴을가진 역사, 나아가 두 개의 몸을 가진 역사다. 한편으론 태양의 몸이 - P47

며, 다른 한편으론 밤의 몸이다. 식민지 제국과 노예제 국가-그리고더 정확히 플랜테이션과 유형지bagne3"는 이 밤의 몸의 주요한 상징들이다. - P48

우리가 가진 유일한 세계는 그것이 지속 가능하려면 그 권리를 가진 전부, 즉 섞여든 모든 종이 함께 공유할 수 있어야 하는 세계다. 이러한 나눔이 가능해지고 이러한 전 지구적 민주주의, 종들의 민주주의가 도래하기 위해서는 정의와 배상에 대한 요구가 불가피하다. - P79

우리의 세계가 되어버린 슈미트의 세계에서, 적의 개념은 구체적이고 실존적인 의미로서 이해되어야 하며, 결코 은유나 공허하고 생명 없는 추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슈미트가 말하는 적은 단순한 경 - P95

쟁 상대나 적수가 아니며, 우리가 적대하거나 반감을 느끼게 하는 사적인 라이벌도 아니다. 그것은 궁극적 적대antagonisme suprème를 가리킨다. 그는 그의 몸과 살 속에서, 우리의 존재를 실존적으로 부정하기 때문에, 우리가 물리적으로 죽음을 유발할 수 있는 그런 자이다.
적으로부터 친구를 가려내는 것은 물론이고, 적을 확실하게 식별해야 한다. 편재성이라는 당혹스러운 형상으로서, 그는 이제 어디에나 있는 만큼 더 위험하다. 얼굴도 이름도 장소도 없다. 혹 그에게 얼굴이 있다면 베일 쓴 얼굴, 얼굴의 시뮬라크르일 뿐이다. 혹 그에게 이름이 있다면 그것은 차용한 이름-그 첫 번째 기능이 은폐인 가짜이름에 불과할 것이다. 어떤 때는 가면을 쓰고서 때로는 민낯으로나아가며, 그는 우리 사이에서, 우리 주변에서, 우리 가운데에서, 한밤중에도 대낮에도 갑자기 나타날 수 있으며, 매번 출현할 때마다 그가 없애버리겠다고 위협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존재 양식 그 자체다.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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