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페트로그라드의 병사들은 "불만을 품은 농민이나 도시 거주자였다." 병사들이 지내는 병영은 "노역의 쉰내"가 진동하는 "벽돌로 지은 우리"에 지나지 않았다.

2월 23일 국제 여성의 날은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날이었다. 몇 주간 이어진 먹구름과 혹한 끝에 갑자기 날씨가 좋아지고 해가 나자 페트로그라드의 거리에는 더 만은 사람이 몰려나왔다. 미리 계획한 대로 여러 여성 단체들이 시위에 나섰다.

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는 이날의 일을 일기에 기록했다. "아니치코프 다리에 사람들이 꽤 많이 모였다. 대부분 짧은 겉옷을 입고 높은 부츠를 신은 노동자들이었다. 창을 든 카자크 기마대는 열 명이 한 조를 이루어 다녔다. … 나는 아니치코프 다리를 건너 리테이니 대로로 향했다. 여기가 집회의 중심지였다. 그곳에는 수많은 노동자가 모여 있었고 거리는 엄청난 인파로 가득했다. … 카자크 기마대는 말을 이용해 사람들을 살짝 밀고 있었다. 사람이 너무 많으면 가끔 보도 위로 올라가 구경꾼을 몰아내기도 했다.

그날 아침 시위대는 볼린스키 근위연대는 자신들이 검거한 병영 바로 옆에 있는 타브리 체스키궁의 국가 두마로 향했다. 반역자들은 거대한 건물군에 같같이 포함된 프레오브라젠스키 근위연대의 전열로 이동해 이들에게 함께 하자고 요청했다. 그리고 두 연대는 무기고에서 무기를 꺼내 노동자들에게 건네주기 시작했다. 바로 이 순간 사람들은 봉기가 갑자기 혁명이 되었음을 직감했다.

"무혈혁명"의 신화는 수도 내에서만 양측에서 100명에 달하는 사망자와 6천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는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싸움은 아스토리아 호텔 습격으로 끝났다. 이곳에 많은 장교와 장군들이 몸을 피하러 왔지만, 호텔 지붕에 배치된 경찰 저격수들이 군중을 자극해 학살에 말려들게 되었다.

전제군주제의 몰락에 크게 기뻐했던 지식인 집안의 한 노부인에게 시장에서 어떤 노점상이 말을 걸었다. "기독교인이세요?" 노점상이 물었다. "어때요, 삶이 좀 나아질 것 같나요?" 노부인이 답했다. "물론이죠." 노부인이 답했다. "오, 이봐요." 여자가 말했다. "유대인 놈들이 다 없어질 때까지는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을 거예요. 평범한 사람들이 겪는 문제는 다 유대인 놈들 때문이니까요."

제정의 붕괴는 무엇이든 제대로 작동하는 것에 붙어 있는 조작 장치를 임시정부 측에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임시정부는 정치적 무인지대에 세워졌다.

레닌은 계급적 적의 도움을 받는 것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게다가 혁명 선전을 위해 독일 정부의 비밀 자금을 받으려고도 했다. 그래서 레닌은 자신이 타도하려 애쓰는 대상인 제국주의자의 도움을 받아 혁명가 서른 명과 프로이센 장교 두 명의 호송을 받으며 ‘봉인 열차’에 탔다.

마르크스가 말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단계를 거칠 필요는 없었다. 레닌은 부르주아와 임시정부가 너무 약해서 소비에트가 즉시 권력을 잡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경찰과 군대, 관료제를 폐지하고 토지와 은행을 모두 국유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중들은 레닌의 주장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하며 경악했다. 레닌은 위선을 경멸했고 자신이 무조건 옳다고 굳게 믿었다.

입헌군주제 성립에 실패한 밀류코프는 차르의 몰락이 적어도 병사들의 애국심과 전쟁에 승리하겠다는 결심을 부활시키기를 바랐다. 병사 대부분이 3월에는 전쟁이 계속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듯 보였지만, 임시정부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 병사들의 태도가 변하기 시작했다. 4월이 되자 패전국은 배상금을 물고 영토를 빼앗기게 된다는 생각과 함께 전쟁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했다.

케렌스키는 자신의 미사여구에 심취해 자신만이 러시아군을 승리와 평화로 이끌 수 있다고 확신했고, 많은 대중이 그렇게 믿게 했다.

당시 러시아 전역에 걸친 사회적 혼란과 무질서로 장교뿐 아니라 중산층도 강력한 지도자를 원했다. 7월 7일 케렌스키가 황제 일가를 차르스코예셀로에서 시베리아의 토볼스크로 보내는 운명적 결정을 내린 것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케렌스키는 지난 며칠간 벌어진 극좌 세력의 봉기로 군주제 지지자들이 반격에 나설까 봐 두려워했다.

현재 밝혀진 증거에 따르면, 소련 역사가들이 줄곧 주장한 것과 달리 코르닐로프는 쿠데타를 모의하지 않았다. 코르닐로프의 주요 목표는 임시정부를 강화해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하고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군 내외부의 많은 코르닐로프 지지자는 갈수록 불안정해지는 케렌스키를 몰아내고 그가 권력을 잡아야 한다고 확신했다.

레닌이 몸을 숨기고 있는 동안 볼셰비키에 막 입당한 트로츠키는 당시 스탈린이 더 유리한 위치에 있었음에도 당의 지도자 역할을 맡았다. 트로츠키는 고압적 태도 때문에 동료들, 특히 카리스마가 덜한 스탈린의 환심을 사지 못했다. 타고난 웅변가였던 트로츠키는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여 예리하고 재치 있는 연설로 거대한 시르크 모데른 같은 페트로그라드의 커다란 홀을 가득 매운 청중들을 흥분시켰다. 트로츠키는 군중 사이에 누가 봐도 부르주아 혹은 ‘부르주이’ 같은 옷차림을 한 사람이 눈에 띄명 조롱하기를 즐겼다.

크라스노프가 진격할 때 이른바 ’구국혁명위원회‘(주로 우파 사회혁명당원으로 이루어진 조직)는 지지자들에게 볼셰비키 독재에 맞서 일어설 것을 촉구했다. 봉기에 합류한 제국군 장교는 놀라울 정도로 적었고, 반란군은 교관들에게 이끌려 나온 몇몇 사관학교의 사관생도들로 구성된 ’소년 십자군‘이었다. 일부는 갓 열네 살이었고 자기 키만 한 소총을 다뤘다.

볼셰비키는 지지율이 급격히 상승하기는 했지만 총득표수의 4분의 1도 안 되는 1000만 표밖에 얻지 못해 크게 실망했다. 하지만 이 결과는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 사회혁명당이 우파와 좌파로 나뉘어 분열되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회혁명당의 분열은 선거가 임박했을 때 일어나 대부분의 투표용지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 그리고 당시 좌파 사회혁명당 다수는 볼셰비키와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치권력의 분포를 정확히 반영하지 못했다.

러시아에서 반유대주의는 계급과 지역을 막론하고 깊이 뿌리박혀 있었고 볼셰비키에도 침투해 있었다. 하지만 차르 시대의 검은 백인대의 포그롬과 같은 극단적인 반유대주의가 분노한 유대인 젊은이들을 볼셰비키의 품에 떠민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그 결과 내전에서 우익 장교, 카자크,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더 만은 포그롬을 일으켰고 증오의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키예프의 러시아인들은 우크라이나 군대가 잘 싸울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러시아인들은 의도적으로 우크라이나의 실제 문화와 역사를 무시하며 우크라이나 민족주의가 우스갯소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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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휴에는 푹 쉬면서 하루는 친가 식구들과 외식만 했다.

아버지는 비니를 쓰고 나오셨는데 빠진 머리가 다시 나지 않으신다는 이유에서였다.

나는 "보온성 챙기고 좋죠 뭐." 하고 답했다. 

3차까지 진행된 항암 치료는 아버지가 견디시지를 못했다. 부작용이 심해서 구토 및 식욕 부진 등이 생겼고 잘 먹지를 못하니 온 몸에 힘이 없으시다고 했다. 결국 약물로 치료 방법을 바꾸었고 비보험이라 약값은 많이 들지만 부작용이 없고 암 수치도 좋아져서 일단은 이 방식으로 몇 달 지켜보면서 가기로 했다.

남동생이 결혼할 때가 지나서인지 부모님 걱정이 크다. 그런데 내 생각은 본인이 결혼할 마음이 있어야 하고 자신과 잘 맞는 상대를 만났을 때 해도 늦지 않다는 생각이다. 지금 결혼 적령기가 무슨 의미가 있나 생각이 들기도 하고 진지한 고민 없이 시작하는 결혼은 후회만 남을 뿐이다.


#2

아직 노안이 온 것 같지는 않은데 예전만큼 책 읽기에 집중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가끔 앞이 뿌연 경우가 있는데 이것이 노안 전 증상인지는 모르겠다. 아니면 이미 노안?ㅎㅎ)

어쨌든 책을 예전처럼 오래 잡고 있지를 못한다.

스트레칭도 자주 해주고 운동을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3

필테 개인 PT는 어느새 마무리하고 20회를 더 연장했다.  

습관화가 되었으면 좋겠는데 혼자 운동을 하면 아무래도 선생님과 함께 할 때보다 운동을 더 열심히 안하는 것 같다.

'조금 더!'해야 운동 효과가 있는 것인데 힘드니까 그만 두기도 하고. 

어쨌든 그래도 몇 개월간 한 필테는 내 몸에 효과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바디를 운동 시작하기 전 받고 얼마 전 확인해보니 체지방이 많이 감소하고 근력량이 조금 늘었다고 한다. 

일단 근력이 조금이지만 늘어서 다행이다. 다만 살이 오히려 빠져서 다이어트하자고 시작한 운동이 아니었기에 선생님께서 더 많이 먹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다행인 것은 내 기초대사량이 보통 사람보다 높다고 한다. 물론 이를 믿고 운동 안하면 아무 소용 없는 것이겠지^^


#4

1월에 사들인 책들이 많기에 당분간은 책 구매는 미루려고 한다.

사들인 책 중 가장 걱정되는 책은 역시 아래의 책이겠지. 그래도 이왕 마르크스 저작을 읽기 시작한 만큼 끝까지는 읽어보겠다.




1월에는 이런 책들을 읽었다. 도스토옙스키 전집 중에서는 <악령>을 읽었다.











한파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 한파가 지나고 나면 따뜻한 봄 기운이 몰려올거라고 한다.

꽃샘 추위도 없다고 하니 돌아다니기에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지난 번 전시회가 참 좋아서 한 번 더 다녀올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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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5-02-05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전시회가 좋으셨는지 궁금합니다.

거리의화가 2025-02-05 16:32   좋아요 1 | URL
블랑카 님 안녕하세요. 지금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하고 있는 수묵별미 전시입니다. 기간이 다음주까지인 것으로 알아요. 확인해보시고 관심 있으시면 가보셔도 좋겠죠. 감사합니다^^

blanca 2025-02-05 16:38   좋아요 0 | URL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쟝쟝 2025-02-05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장 걱정되는 책을 저도 획득하였습니다.... ㅜㅅㅜ (약간 참담한 기분) 올해 안에는 힘들 거 같은데 부지런히 먼저 가계세요. 그나 저나 아, 어디로 가시나요 화가님. 그 길 뒤 따라 가려면....ㅋㅋㅋㅋ
암튼 대단하세요! 짝짝짝~

거리의화가 2025-02-06 16:22   좋아요 0 | URL
책 받아놓고 참담한 기분이 드신 것 충분히 공감합니다. 언제 마무리될지는 모르겠으나 몇 쪽씩이라도 꾸준히 읽어봐야죠.
작년에도 어떤 주제를 정해놓지 않고 마구잡이로 읽었던 한 해였는데 올해도 비슷할 것 같습니다. 쟝 님의 길도 화이팅!!!

독서괭 2025-02-05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안 읽힌다고 하셨지만 충분히 많이 읽으신 것 같습니다 ㅎㅎ 운동 꾸준히 하고 계시군요! 필라테스 한 후 키가 1센티 컸다는 사람들도 있더라고요 ㅎㅎ 아마도 척추가 펴져서? 근육량 늘어난 것 축하드립니다!

거리의화가 2025-02-06 08:27   좋아요 1 | URL
몇 년전에 비하면 요즘은 그나마 좀 적절히 섞어서 읽고 있는 것 같습니다(단짠단짠이랄까요^^;)
필라테스하면서 제 몸에게 미안함이 들었어요. 너무 안 써서 여기저기 뻑뻑 소리날 지경이었으니... 일단 목과 어깨, 허리가 많이 펴진 느낌입니다!ㅋㅋ 근육량 조금이지만 늘어서 저도 기뻐요. 괭 님도 운동 화이팅입니다^^

단발머리 2025-02-05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께서 더 많이 먹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오늘 저의 픽은 이 문장입니다. 저도 이런 말을 누구에게서든 듣고 싶어요~~
거리의화가님, 많이 읽으셨어요~ 많이 부럽습니다^^

단발머리 2025-02-05 19:30   좋아요 0 | URL
참, 눈 앞이 뿌연 증세는.... 저는 몇 년 전 독감을 앓은 이후에 그 증세가 나타났어요. 한달 이상 책을 볼 수 없었습니다. 지금은 나아졌는데 컨디션이 안 좋은 날에는 어김없이 그 증세가 나타나더라구요. 전 안경을 쓰고 있어서 그런지 그걸 노안이라고 보긴 어쩔지 모르겠지만(안경 쓴 사람에게는 노안이 늦게 온다는 말을 믿는 편) 아무튼 그렇습니다.
블루베리를 냉동실에 쟁이고 먹고 있습니다^^

거리의화가 2025-02-06 08:32   좋아요 0 | URL
먹는 양은 평소와 비슷하고 운동량이 늘었으니 체지방이 그만큼 많았다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읽기는 했는데 그만큼 쓰지를 못했어요.

저도 안경과 한 몸인지 오래인데 노안이 늦게 온다는 말을 믿고 싶어집니다ㅎㅎ 아무래도 컨디션이 안 좋으면 저도 눈부터 많이 피곤해지더라구요. 블루베리 많이 먹고 조금이라도 노안이 늦게 오기를 바라봅니다^^;

새파랑 2025-02-06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읽는 사람은 비타민 A를 드셔야 합니다~!!
어제 악령을 완독했습니다 ㅋ 재미있어서 시간가는줄도 몰랐네요!!!

거리의화가 2025-02-06 11:18   좋아요 1 | URL
ㅎㅎ 그러게요. 루테인 먹어야 한다고 주변에서 권하기는 하는데 저는 보조 식품은 믿지 않는 편이라 당근이나 블루베리 같은 것으로 많이 보충해야겠습니다.
악령 완독 축하드려요. 저도 재밌게 읽었습니다^^

희선 2025-02-10 0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위가 거의 한주 간 듯하네요 이게 가면 따듯해진다고 하더군요 그건 그것대로 걱정스럽습니다 아직 멀었지만 벌써부터 여름을 걱정했어요 더위보다 비를... 눈 많이 올 때도 그런 거 걱정했지만...

아버님 건강 좋아지시기를 바랍니다 거리의화가 님 책 즐겁게 만나세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5-02-10 14:13   좋아요 1 | URL
이번에는 꽤나 오래 가는 추위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오늘 낮에는 볕이 따뜻해서 좀 낫더라구요^^
한국에 4계절도 이제는 옛말인 것 같고... 추위와 더위만 있게 되버린 것 같습니다ㅠㅠ

아버지 건강 걱정해주셔서 감사드려요^^ 언제나 그렇듯 무탈한 게 제일인 것 같습니다. 희선 님도 행복한 독서 생활하시길!
 
역사의 증인 재일 조선인 - 한일 젊은 세대를 위한 서경식의 바른 역사 강의
서경식 지음, 형진의 옮김 / 반비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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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에게 조선의 문제는 옛날 일이나 남의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 오늘날 일본의 성립에 깊숙이 관련된, 자기 자신의 문제입니다. 재일조선인이라는 존재는 그것을 잊지 않도록 하는 산증인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재일조선인과 만났을 때, 이 사람은 왜 여기에 있는지 생각하고, 그것을 알려고 하는 것만으로도 일본의 역사가, 특히 교과서에서 가르쳐주지 않은 역사가 보입니다. 그것이 현재의 자신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아는 것이, 앞으로 당신이 나아가야 할 ‘앞’을 생각하기 위해 필요합니다. - P219


서경식 1주기 무렵 마침 추모를 위한 글이 올라왔다. 어느덧 1주기라니… 1년 전 그의 글을 한 번 읽어보겠다 생각했는데 어영부영 하는 사이에 1년이 훌쩍 그렇게 지나버렸던 것이다. 과거 그의 인터뷰나 칼럼, 에세이 등 조각 글을 읽어본 적이 있으나 그의 책을 완본으로 읽어보지는 못했다. 어떤 책을 읽을까 고민했다. 사실은 근저를 살까 생각했는데 먼저 이 책을 읽고 싶었다. 그가 오래도록 천착해온 주제이자 그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재일조선인에 관한 주제를 담은 책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여러 모로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우리는 ‘재일조선인’에 대해서 얼마나 알까. ‘재일조선인’ 하면 일본 사회에서 차별받아온 마이너리티 집단 정도로 여기는 사람이 수두룩하지 않을까.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재일조선인’은 어떤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고 누구인지 사실을 정확히 직시하는 것부터가 먼저다. 게다가 이 책은 관련 지식이 전무한 청소년을 비롯하여 젊은 층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쓰여졌으면서도 ‘재일조선인’에 대한 주제의 핵심을 비롯하여 관련된 다양한 논점까지 파악할 수 있는 책이다. 2012년 일본에서 원서가 출간되고 국내에도 바로 그해 번역되어 출판이 되어 나온 지 한참 되었으나 여전히 그들과 관련한 문제는 해결된 것이 거의 없어서 유효한 문제이기에 시간이 갈수록 더 중요성이 더한 책이라고 볼 수 있겠다.


저자인 서경식은 1951년 교토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자랐다. 어릴 적 어머니에게서 “조선은 나쁜 게 아니다.”라는 말을 듣고 자랐지만 주변에서 재일조선인으로서 받는 수모와 차별을 보고 들으며 자신도 그런 차별을 받을까봐 많이 두려웠다고 고백한다. 집단 따돌림 문화가 있는 일본에서 더군다나 한 번 그런 일을 겪으면 그 트라우마는 생존과도 직결될 정도로 두려운 것이 아니었을까.


재일조선인은 정확히 누구일까. ‘일본의 식민지 지배의 결과로 일본에 거주하게 된 조선인과 그 자손’을 말한다. 식민지 지배가 시작된 조선에서 살기 어려워진 조선의 많은 사람들이 그 기간 동안 일본에 건너갔다. 1945년 이전 전쟁 막바지에 가서 짧게 정착했던 조선인들은 일부 조선에 돌아갔지만, 일찍부터 일본에 정착해서 가족과 이미 생계를 꾸리고 살게 된 조선인들은 일본에 계속 정착했던 것이다(지금은 어느덧 그 후손이 4, 5세대까지 이어졌다고). 일본에서는 ‘특별영주자’라는 자격을 가진 사람들인데 말은 특별한 자격을 주는 듯하여 그럴싸해보이나 실상은 일본인과 달리 일이 있어 외국에 나갔다 오더라도 재입국 허가가 필요하고(그 기간이 끝나면 돌아오지 못함), 중범죄를 저지르면 국적을 언제든 박탈당할 수 있는 불안정한 신분이다. 심지어 이 자격은 1991년에서야 부여된 자격이라고 한다. 그 전에는 이런 제도마저도 없었던 셈이다. 


메이지 시대에 일본은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제도를 공고히 하고 ‘문명개화’를 추진하면서 천황에게 충의를 다하고 애국심이 강한 자가 ‘충량(충성심이 있고 우수)한 국민’이라는 사고를 일반 사람들에게 주입했습니다. 구미를 본떠 다른 나라나 타민족을 지배하는 것을 지향하면서도, 정치 제도에서는 구미와 같은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일본의 ‘문명화’였습니다. - P101


일본의 허울 좋은 문명화의 논리는 구미 열강의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따른다는 명분을 표방했으나 ‘민족(야마토)’을 강조하며 차별을 오히려 조장하는 반인권적인 행태에 불과한 것이었다. 


1944년까지 조선인은 병역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투표권도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병역을 부과하게 되자 투표권을 요구하는 조선인의 목소리를 무시할 수 없게 되어, 1945년 1월에 귀족원령과 중의원 선거법이 개정되었습니다. … 그러나 제도만 개정되었을 뿐,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선거는 실시되지 않았습니다. … 외지인 조선 반도의 조선인은 1945년까지 단 한 번도 참정권을 행사할 수 없었지만 내지에 거주하는 조선인에게는 참정권이 부여되었습니다. - P121


1940년대 들어오면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는 ‘내선일체’를 표방했으나 1945년까지 조선반도에 있는 조선인은 외지인으로 취급되며 투표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1947년 외국인 등록령이 발표되면서 조선인은 구식민지 사람들로 일본인임을 부정당했다. 더군다나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일본의 패전에 대한 책임을 다루는 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동서 대립의 영향으로 미국과 관계가 깊은 자본주의 진영 국가만 참여했다(북조선, 소련은 참여하지 못했음). 그 결과 구식민지 출신자들은 일본 국적을 상실하면서 모두 무국적자가 된다. 1965년 한국과 한일조약(?)이 맺어지면서 이들은 한국 국적 선택이 가능해졌으나 통일 정부를 염원한 이들 또는 남북 한쪽을 선택하기 어려운 이들은 무국적자로 남게 되었다. 1959년부터 1980년까지 북조선 귀국 사업이 진행되면서 일본에 있던 조선인 중 10만 명이 북한으로 귀국하였다. 그러나 이는 일본 정부가 인도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재일조선인을 떠넘기기 위한 일환이었음이 밝혀졌다고.  


저자의 주장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내용은 단일 민족에 대한 강조와 국가관에 대한 문제 의식이다. 우리는 주민등록증과 여권이 없으면 어떤 것이든 할 수 없는 제도권에 묶여 있다. 내가 선택하고 싶지 않아도 주민등록증은 나의 신분을 대리하고 여권은 해외에 나가서 체류하기 위한 당연한 신분증이다. 이 둘이 없다면 나를 증명할 만한 수단은 하나도 없는 셈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이것을 왜 증명해야 하는 것인가. 내가 국가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속해 있다. 국가에 속하지 않으면 이 세계 어디에서든 살기 어렵다. 난민으로 떠돌아야 하는 신세가 된다. 나는 어떤 국가에 속해서 국민으로 살고 있는 것이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닌데도 그 조건을 맞춰 가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부당한 이야기일 수 있다. 

일본 국민의 단일 민족 국가관은 국적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국민이 아니면 인권도 없다는 이야기다. 1950년 부모가 일본인이어야 자식도 일본인임을 부여했다. 그러나 제도상만으로 그런 것이고 실제로는 1985년 개정 전까지 아버지가 일본 국민이어야 자식이 일본 국민인임을 인정받았다고 한다. 일본인으로 귀화하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조건을 거쳐야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심지어 이는 법무 대신에게 결정권이 있는데 그 말인즉슨 재량에 따라 귀화가 결정된다는 의미이겠다. 


조선 학교의 문제도 있다. 일본 정부는 일본의 학교 교육법을 기반으로 하는 교육이 아니면 정식 학교로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전후 일본의 연합국 사령부도 일본 정부의 방침을 그대로 따랐다. 재일 조선인은 억압 받았고 조선 학교를 폐교하라는 지시가 내려오자 항의하던 재일조선인 학생이 경찰 부대에 사살당하는 일도 있었다(1948년 한신 교육 투쟁). 

1965년 한일 조약이 맺어졌지만 한일간 입장 차이가 큰 상태에서 억지로 맺어진 조약이라 한계가 있다. 물론 일본 정부는 이 조약을 빌미로 현재까지도 강제 징용, 위안부 등 전쟁에서 발생한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중이다. 이는 전범 기업들도 마찬가지다. 


또 한 가지 눈여겨볼 만한 것은 3명의 재일조선인의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재일조선인 1세 문금분 씨, 재일조선인 2세 이정자 씨, 재일조선인 3세 배귀미 씨가 그 주인공이다. 저자인 서경식의 체험담도 책에 있기 때문에 사실상 최소 4명의 재일조선인이 있는 셈이지만 그밖에도 여러 명의 재일조선인의 사례를 거론함으로써 일본 사회에서 재일조선인들이 겪는 실생활에 대한 목소리를 간접적으로 들을 수 있다. 

문금분 씨는 9살 때 일본에 와 시멘트 공장, 과자 공장에서 일을 했고, 열일곱 살 때 조선인과 결혼하여 아이를 낳아 키웠다. 아이를 키우느라 바쁜 생활 속에서 교육을 받지 못해 딸들이 모두 결혼한 후 야간 중학교에 문을 두드려 배움을 시작했다고 한다. 


나는 일본인이라고 해서

조선인을 그만두라고 해서

배타고 왔습니다

아이를 기를 때

기모노 입었습니다

집 얻기 위해

기모노 입었습니다

저고리를 옷장에

넣어두었습니다

이제, 저고리 입습니다

외인 등록에

지문 찍습니다

아이에게도 찍게 합니다

그래도 

손주에게는 찍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녀가 쓴 시인데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이정자 씨는 1947년 일본에서 태어났는데 저자와도 같은 세대로 시를 써서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교류를 하는 사이였다고 한다. 그녀는 단카를 쓰는데 저자도 그의 애독자라 밝힐 정도다. 짧은 구절 속에 마음을 담아 표현하는 단카는 생각 이상으로 어려운 장르라 생각한다. 


자식을 낳았네. 조국을 알지 못하는 자식을 낳았네.

어미는 맘속으로 하늘에 죄를 묻노라.


이 단카를 읽으며 마음이 내려 앉았는데 나중에 그녀의 아들이 37살에 갑작스레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저자는 황망함을 느꼈다고 한다. 대체 어떤 일로 자식을 앞세우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마음을 감히 짐작할 수조차 없음이다. 


배귀미 씨는 재일조선인이었지만 재일조선인임을 부정하고 그들을 혐오하며 지냈다고 고백한다. 조선적 행동이 싫었고 일본인으로 동화하며 지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며 지낸 것이다. 그는 나중에 심포지엄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다. “저는 다음 세대의 어린이들이, 어렸을 때의 저와 같은 생각이나 사고방식으로 현실을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일본 사회의 현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일본에 동화하는 길을 걷지 않았으면 합니다. ‘사실’을 가르쳐주십시오. ‘사실’을 배우십시오. 단지 그것뿐입니다.” 사실을 배우라는 그녀의 말이 귓가를 울린다.


재일조선인에 대한 생각은 한국의 마이너리티 차별에도 여러 모로 경종을 울린다. 나와 같은 사람을 분류하고 재단하려는 순간 차별은 시작된다는 사실 말이다. 


‘저 사람들은 국민이 아니니까 차별 받아도 어쩔 수 없다;는 지점에서 생각을 멈추는 것은 ‘나는 국민이니까 우대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저 사람들’에 대해 상상하지 않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생각을 멈추는 것이며, 타자에 대한 상상력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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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조선인의 역사는 일본인에게 ‘타인‘의 역사가 아닙니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직접 관여해서 만든 역사이며, 말하자면 일본 자신의 역사입니다. - P21

‘조선‘이란 원래 ‘베트남‘, ‘멕시코‘와 같이 나라나 지역을 나타내는 말이고 ‘조선인‘은 ‘베트남인‘, ‘멕시코인‘과 마찬가지로, 어떤사람들의 집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멕시코인을 멕시코인이라고 부르는 것에 그렇게 주저하지는 않겠지요.
일본인에 대한 차별어로 재퍼니즈(japanese)라는 영어를 짧게 만든 ‘재프(jap)‘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일본‘이나 ‘일본인‘이라는 호칭이 그대로 차별어가 되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어느 나라나 민족의 호칭이 그대로 차별어라니,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지요. - P52

일본에는 제국헌법이 있었지만, 이 헌법은 식민지에는적용되지 않았습니다. 식민지도 일본의 영토였고 거기 있는 사람도일본 국적이지만 이들에게는 헌법상의 권리가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대일본제국헌법을 적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 반도나 대만 등 식민지를 가리켜 ‘이법 지역(法)‘ 또는 ‘외지(外地)‘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조선인이나 대만인은 ‘외지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에 대해 원래의 일본 지역(현재의 일본 영역에 거의 해당됩니다.)은 ‘내지(內)‘, 일본인은 ‘내지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외지‘를 가짐으로써 ‘내지‘는 윤택해집니다. 또 평범한 사람들까지도 구미와 어깨를 나란히 한 자신들이 조선인이나 중국인보다 우수하다는 우월감을 맛보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일본인이 조선 병합을 환영한 것입니다. - P93

조선에서는 삼권분립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 대신 총독 - P94

이 집중적이고 절대적인 권한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총독은 군인 출신 중에서 선출하여, 천황 직속으로 두었습니다. 즉 조선식민지 지배는 모두 천황을 최고 책임자로 하여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병합에 앞서 1909년의 ‘민적법‘을 통해 조선인의 인구 구성을 빠짐없이 파악하고 있던 일본은 1910년 병합 이후, ‘민적법‘을 ‘호적령‘으로 바꾸고, 이에 따라 조선의 모든 사람들을 신민(일본 국적)으로 했습니다. - P95

1933년 만주사변 후, 군은 「조선 동포에 대한 내지인 반성 자료기록(朝鮮同胞忙對寸乙內地人反省資錄)」이라는 책자를 냈습니다. 지금 같은 심한 차별을 계속하면 원활한 통치를 할 수 없다고 하여 만든 것입니다. 서문에는 천황의 단카를 인용해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여기서 ‘대제(大)‘는 천황을 의미합니다.
・이에 거듭 대제의 ‘자비를 널리 펼치면 다른 나라들판의 호랑이라도 잘 따르지 않을 리가 없다‘는 말씀을 삼가 전하며, 내지인 여러분의 깊은 반성을 촉구한다.…………… - P111

1959년부터 북조선의 귀국 사업이 시행되어, 1980년까지 10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귀국‘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국교가 없는 북조선으로의 귀국 사업을 ‘인도적‘인 입장에서 실행했다고 해왔지만실제로는 재일조선인을 떠넘기려고 했다는 사실이 최근의 연구에서밝혀졌습니다.
재일조선인들은 대부분 조선 반도의 남쪽 출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사람이 북조선 이주를 결정한 데는 사회주의 국가에희망을 건 사람들이 있었다는 이유 외에 많은 사람들이 일본에서는도저히 살 수 없을 만큼 궁지에 몰렸다는 이유도 있었습니다. - P142

‘특별영주‘라는 자격은 긴 세월 동안 투쟁한 결과 1991년에 생긴비교적 안정된 자격입니다. 1965년의 한일조약까지는 재일조선인을대상으로 하는 ‘영주‘ 자격 규정 자체가 없었고, 1965년 이후에는앞서 말한 것처럼 ‘협정영주‘라는 자격이 생겼는데, 이것은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만을 대상으로 하는 불공평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특별영주‘는 정말로 ‘영주‘를 보증하는 것인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에는 법무성이 이 자격을취소할 수 있습니다.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다면 당연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일본 국민 누군가가 어떤 범죄를 저질렀을 때, 일본국적을 취소당할까요? 일본에서 형을 살아야겠지만 일본 밖으로 나가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3세대, 4세대에 걸쳐 일본에서 태어나도 무슨 일이 있으면 쫓겨날 수 있는 것이 ‘특별영주자입니다. - P147

유럽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여권이 없었습니다. 그런 개념이 없었던 것입니다. 어딘가에 가는 데 국가의 허가 등은 필요 없었으며, 어디든 가도 좋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 점점 많은 신청서를 써야 했는데 그런 움직임은 20세기 들어서 수많은 전쟁을 겪고, 근대 국민국가가 태어난역사와 궤를 같이 합니다.
근대 이후 한 명, 한 명의 인간은 어딘가의 국민이 아니면 대단히불편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이 국가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국민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안정된 상태임과 동시에, 그만큼 국가에 구속되어 있는 상태이기도 합니다. ‘연금을 받을 수 있다‘
는 말에서 알 수 있듯 구속되지 않으려면 불안한 상태가 됩니다. 또국민은 마음대로 그만둘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 P173

‘조선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와 보상은 한일조약으로 해결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선 한일조약의 상대는 한국뿐이지만, 식민지 지배의 피해자는북조선이나 재일조선인도 포함하는 조선 민족 전체입니다. 게다가일본 정부는 식민지 지배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입장이기 때문에당연히, 한일조약 체결 때 사죄도 하지 않았습니다.
보상 문제도 아직 남아 있습니다. 한일조약을 맺으면서 일본에서 - P209

한국에 무상 공여 3억 달러와, 정부 차관 2억 달러를 지불했는데, 이것은 결코 배상금이나 보상금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독립 축하금‘이라는 명목의 경제 협력 자금이라는 것이 일본 정부의 입장입니다.
식민지 지배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사죄하거나 보상할 수없다는 것입니다.
한일조약 체결에는 다음과 같은 배경도 있었습니다.
1965년 당시 미국은 베트남전쟁 중으로 돈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는 군대를, 평화 헌법 때문에 군대를 파견할 수 없는일본에는 돈을 요구했습니다. 일본은 오키나와의 가데나(手) 기지를 비롯해 많은 미군 기지가 베트남전쟁의 전선 기지로 활용되었고, 일본 국내에서는 네이팜탄이라는 폭탄을 만드는 등의 일로 기업이 이익을 냈습니다. 그런 미국에서 보면 일본과 한국이 대립 관계에있는 것은 곤란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조기에 조약을 맺도록 양국에강한 압력을 가했습니다. - P210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존재, 그것이 재일조선인이다. 머조리티에게는 그런 고민이 없다. 그러나 마이너리티의 고민에는 귀중 - P236

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국가라는 것을 뛰어넘어 다음 시대를 통찰하는 인간이 갖는 고민이기 때문이다. 재일조선인이란 국가나 머조리티의 횡포에 복종하지 않는 인간을 가리킨다." - P237

당사자인 세대가 직접 과거 행위를 솔직히 인정하고 ‘미안하지만우리 세대가 남긴 부채가 여기 있다. 그것을 함께 짊어지고 가주기바란다‘ 하고 젊은 세대에게 부탁하는 것이 이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그러나 윗세대는 젊은이들에게 역사의 진실을 가르치지 않고, 그 결과 그들이 품고 있는 ‘우리는 알지도 못하는 비난‘이라는 감정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것으로 해석하고는, 오히려 그 감정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 P243

타자를 부정함으로써 자신을 긍정하는 사고방식 때문에, 자신도 피해를 당하는 입장임에도, 계속 차별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나보다 더 낮은 존재‘를 마음속에 만들어, 그들보다는 내가 낫다고 자신을 위로하고 싶기 때문은아닐까요. 차별 구조의 하위에 놓인 사람들이 자신을 차별하는 상위의 사람들을 향해 항의하고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더 하위에 있는사람을 차별하고 공격하는 것, 그럼으로써 차별 구조 그 자체가 흔들림 없이 유지되는 것은 고금의 역사에 얼마든지 예가 있습니다. - P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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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를 위하여
루이 알튀세르 지음, 서관모 옮김 / 후마니타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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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텍스트들은 어떤 저작에 대한 고찰, 비판이나 반박들에 대한대답, 공연에 대한 분석 등으로서 거의 모두가 어떤 정세 속에서 탄생했다. 각기 어떤 특정한 계기에 탄생한 이 텍스트들은 그렇지만 하나의 동일한 시대와 동일한 역사의 산물이다. 그것들은 각기 나름의방식으로, 마르크스 속에서 사고하고자 한 내 나이 또래의 모든 철학자들이 겪어야 했던 하나의 특이한 경험, 즉 역사가 우리를 몰아넣은 이론적 궁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수 불가결했던, 마르크스의 철학적 사고에 대한 탐구에 관한 증언들이다. - P43~44


해제 읽었다가 너무 어려워서 화들짝 놀랐는데 그나마 본문은 이해가 조금은 갔다고 해야 할까(그래도 머리에 쥐나는 줄). 물론 이 책을 단번에 이해하겠다고 덤벼드는 것은 애시당초 무리라 생각했다. 이 책은 알튀세르가 여러 잡지에 낸 글들을 한데 모아 책으로 펴낸 것이다. 마르크스가 펴낸 텍스트를 통해 그 시대를 이해하고 마르크스주의에 집착했던 당시의 젊은이들의 생각을 확인할 수 있다. 나아가 알튀세르가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게 된 이유도 짐작할 수 있다.


마르크스의 저작들은 총 4개의 시기로 구분될 수 있다. 1840~1844은 청년기 저작들, 1845은 분기점이 되는 저작들, 1845~1857은 성숙 단계로 나아가는 저작들, 1857~1883은 성숙기 저작들이다. 이 중 눈에 띄는 시기는 단연코 1845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시기를 분기점으로 보는 이유는 마르크스와 포이어바흐의 관계, 마르크스와 헤겔의 관계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이 행해지기 때문이다. 1845년은 마르크스가 <포이어바흐의 테제>를 써낸 해이다(물론 이는 마르크스 생전에 알려지지 않았고 1888년에서야 엥겔스에 의해 출간되었다). 포이어바흐는 청년헤겔학파 철학자로 마르크스가 선구적 유물론자라고 생각했던 인물이다. 마르크스는 당시 독일이 관념론의 철학으로 이론에 집착한 채 현실의 개혁과는 유리되어 있다고 여겼다. 


포이어바흐는 청년 헤겔주의 운동의 이론적 발전에서 등장한 위기의 증인이자 동인지이다. 1841년과 1845년 사이 청년 헤겔파의 텍스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포이어바흐를 읽어야만 한다. 특히우리는 청년 마르크스의 저작들에 포이어바흐의 사상이 어느 정도까지 스며들었는지 볼 수 있다. - P89


<청년 마르크스에 대하여>는 ‘마르크스주의 철학과 특수성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를 담고 있다. 알튀세르는 이를 위해 앞선 헤겔과 포이어바흐의 철학을 읽으면서 그들 간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연구했다. 

청년 마르크스의 저작들의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서 철학자들에게도 청년기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이다. 마르크스도 청년기가 있다는 사실, 여물지 않은 시기에 마르크스도 불완전한 부분과 문제적 부분이 존재할 수 밖에 없음이다. 그리고 이데올로기(이론)는 이데올로기가 펼쳐지는 장에서 구성되거나 그와 반대되는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한 지식을 전제로 한다. 


마르크스 자신의 시작이 부과한 이 이론적 "장정"에서 마르크스는 무엇을 얻었는가? 그가 결말로부터 그토록 먼 곳에서 시작함으로써, 철학적 추상 속에 그토록 오래 체류함으로써, 현실을 다시 발견하기 위해 그런 공간들을 편력함으로써 얻은 것은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은 그가 개인으로서 비판적 정신을 날카롭게 가다듬게 되었다는 것과 계급투쟁과 이데올로기들에 대한 역사적으로 비견할 수 없도록 주의 깊은 "임상적 감각을 취득했다는 것일 터이요, 그뿐 아니라, 특히 헤겔과 접촉함으로써, 모든 과학적 이론의 구성에 불가결한 추상화의 감각과 실제, 즉 헤겔 변증법이 그에게 그 추상적이고 "순수한" "모델"을 제공한 이론적 종합 및 과정의 논리의 감각과 실제를 익힌 것일 터이리라. - P156


‘지금 문제되는 것은 변증법, 오직 변증법이다. 헤겔은 “변증법의 일반적 운동 형태들을 최초로 포괄적이고 의식적인 방식으로 서술한” 인물이었다. 마르크스는 헤겔에게서 변증법을 되찾아서 이념이 아닌 삶에 적용하고자 했다. ‘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낄 수 있는 사실은 마르크스가 헤겔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는 인식이었다. 비판을 하기 위해서는 이론을 파지 않으면 안 된다. 헤겔의 변증법을 이용하여 마르크스는 나아가 유물론적 변증법을 펼쳤다.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을 헤겔 변증법과 구별하는 고유한 차이란 무엇인가? 제기된 이 문제는, 마르크스의 이론적 실천에 의해서든 계급투쟁의 정치적 실천에 의해서든 간에, 마르크스주의적 실천에 의해 이미 해결되었다. 따라서 그 해법은 마르크스주의의 저작들 속에 실존하는데, 그러나 그것은 실천적 상태로 실존한다. 이제 그 해법을 이론적 형태로 진술해야 한다. - P312


마르크스가 생각한 자본-노동의 모순은 국가, 지배 이데올로기, 종교, 조직된 정치운동에 의해 특수화되고 내적, 외적인 역사적 상황에 의해 특수화된다. 어느 조건 안에서도 모순은 결코 순수한 상태로 나타나지 않고 역사적 실천과 역사적 경험 속에서 작동한다. 

마르크스주의적 모순의 특유한 차이는 모순의 "불균등성" 또는 "과잉결정"이며, 이 "불균등성" 또는 "과잉결정"은 모순 속에 모순의 존재 조건을, 즉 모순의 실존인 항상-이미 주어진 복잡한 전체의 특수한 (지배 관계를 갖는) 불균등성의 구조를 반영한다. 이처럼 이해된 모순은 모든 발전의 동력이다. 모순의 과잉결정에 기반한 전위와 압축은 그것들의 우세 dominance 여하에 따라, 복잡한 과정의 실존, 즉 "사물들의 생성"의 실존을 구성하는 (비적대적·적대적·폭발적)국면들을 설명한다. - P375


변증법에 대한 정의가 자신이 그것에 대해 진술한 그 영역을 넘어서는지, 따라서 이론적으로 단련된 보편성을 주장할 수 있는지 여부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이 정의를 다른 구체적 내용들, 다른 실천들의 시험에 부쳐 봐야 한다. 예컨대, 자연과학의 이론적 실천의 시험에, 과학들 속에서 아직도 문제가 야기되는 이론적 실천들(인식론, 과학사, 이데올로기들의 역사, 철학사 등)의 시험에 부쳐 봐야 한다. 이 정의를 이런 시험에 부치는 것은 이 정의의 유효범위를 확고히 하기 위한 것이요, 경우에 따라, 의당 그래야 하듯이, 이 정의를정정하기 위한 것이며, 요컨대 우리가 검토한 "개별특수적인 것"particulier 내에서 이 "개별특수적인 것"을 개별특수적인 것으로 만든보편적인 것 자체를 제대로 파악했는지 알아보기 위한 것이다. - P377


책을 좀 더 꼭꼭 씹어 소화시켜서 정리하면 좋을텐데 역시 쉽지는 않은 것 같다. 용어 자체가 난해한데다가 문장이 단 번에 이해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혹 읽으면서 놀라움을 주는 구절들도 있었다. 참고로 주석이 어마어마하다. 물론 주석을 읽는다고 해서 이해되는 것은 아니지만 나중에라도 참고할 수 있겠다. 뒤이어 <자본을 읽자>를 읽게 될 텐데 조금은 도움이 될 거라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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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5-01-30 08: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화가님, 저 존경심이 완전 파도처럼 일렁거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루 늦었지만 존경심 이야기만 하고 그냥 가면 서운해서 :)

거리의화가 2025-01-31 16:08   좋아요 0 | URL
너무 대충 써서 민망합니다. 안 쓰면 그마저도 휘발될 것 같아 써둔 것이라서^^;
수이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건강하시고 무탈하시고 하는 일 모두 잘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새파랑 2025-01-31 1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어려운책 전문 화가님~! 마르크스는 이름부터 어려워요 ㅜㅜ

거리의화가 2025-01-31 16:09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이 책이 어려운 것은 맞지만 리뷰 쓰면서도 날림으로 읽었다 싶어서 민망합니다. 새파랑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