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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과 세계 - 에코페미니스트 마리아 미즈의 삶과 시대 ㅣ 계명대학교 여성학연구소 전환의 시대와 젠더 번역총서 1
마리아 미즈 지음, 안숙영 외 옮김 / 에코리브르 / 2024년 5월
평점 :
나는 오랫동안 ‘마을과 세계‘ 혹은 ‘세계와 마을‘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노력했다. 이런 긴장을 관리하려면 큰 힘이 필요하지만 나는 서로 다른방향으로 이끌리며 많은 것을 배웠다. 이는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힘, 삶에 대한 열정을 주었다. - P316
오늘날 신자유주의 기반의 세계에서 사는 인간에게 과연 좋은 삶이란 가능할까. 마리아 미즈의 책을 읽기 전, 다 읽고 난 뒤 같은 질문이 떠올랐다.
이 책은 마을과 세계 사이를 오간 마리아 미즈의 삶의 여정을 담은 회고록이다. 개인의 삶은 사회와 무관할 수 없기에 그녀가 산 시대의 역사와 사회상을 자연스레 알 수 있었고 그녀가 왜 에코페미니스트가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미즈는 어릴 적 농촌 마을에서 자급자족하는 시스템 하에 생활하며 자랐다. 어머니의 삶을 보면서 스스로의 삶을 계속 유지하려면 책임져야 하는 자세가 필요함을 배웠다고 한다. 이런 환경에서 성장했기에 ‘자급자족’에 대한 개념을 이해하고 심화시킬 수 있었다고 여긴다.
당시 기독교 하의 독일 사회는 15살 이후 소녀는 하녀로 일하다 자연스레 결혼 수속을 밟는 것이 일상적이었지만 미즈는 이를 거부하고 16살에 학교에 들어갔다. 기존 체제에 대한 그녀의 첫 번째 거부이자 삶의 전환이었다.
사랑을 하면서 인도에 대한 관심이 생겼고 이는 자신의 삶과 세계에 대한 시야를 넓히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졸업 후 교사가 되었지만 아이들을 가르치며 보람을 느끼면서도 세계를 변화시키고 싶다는 열망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낭만적인 꿈보다 불완전한 현실이 좋다.”를 받아들여 인도로 출발하게 되는데 이것이 그녀의 두 번째 삶의 전환이었다. 인도에 머무는 동안 인도 사회와 계급 제도에 대한 현실을 확인하면서 의문을 품는데 이 경험은 향후 그녀의 삶을 이끄는 하나의 축이 된다.
미즈는 1968년 학생 운동을 시작으로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 여성 운동을 시작하며 본격적으로 사회와 만났다.
인도 여성 운동을 하다가 1975년 비상법이 선언된 인도 정부에서 농촌 및 도시 빈곤층 남성에 강제 불임 시술을 하고 좌파 탄압을 실시하자 인도 중산층 남자와 결혼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자본주의는 생산적, 가시적 노동만을 화폐 단위로 측정하여 부를 계산하는데 미즈는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그럼 그녀의 대안은 무엇일까. 바로 자급 관점이다. 자급은 삶을 직접 유지하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을 두지 않는 개념이다. 상품 및 잉여 가치 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시스템과는 정 반대의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자급 관점은 필연적으로 생태, 사회, 정치, 문화, 경제의 기반 위에 존재한다. 이는 도시와 농촌, 빈국과 부국 어디서나 가능하며 다양한 문화적·생물학적 배경을 바탕으로 할 수 있다. 자급 관점은 이미 다양한 방식으로 시작했으며 이 다양성을 존중하고 유지한다. - P213
과연 자급을 이용해 필요 속에서 자유를 구할 수 있을까? 남녀 사이에 평화가 찾아올까? 미즈는 자급 관점을 위해서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지배를 반드시 극복해야 하며 좋은 삶을 향한 방향의 재설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나는 이 전제조건의 해결이 애당초 쉽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에 회의가 일었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를 집필할 무렵 페미니즘의 주류 의견은 ‘여성은 남성과 별개로 생각을 세우고 이론, 실천에 익숙해지며 남성이 주요 업무를 한다는 통상적 이론에 참여 제한을 해야 한다.’였다. 그러나 마리아 미즈는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차이가 아니라 가부장제와 식민주의 자본주의 하의 착취와 억압의 경험이라는 공통점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그들과 거리를 두었다.
오늘날에도 여전한 페미니즘의 의견들 중 좁혀지지 않는 답이 아닐까 한다.
기술과 진보가 여성 해방에 도움이 되었는가. 예를 들면 피임약과 재생산 기술은 여성의 신체에 대한 속박을 자유롭게 해주지 않았는가. 그러나 미즈는 이 의견을 비판하는 입장에 있었다.
에코 페미니즘은 서구 산업 국가의 소비 모델이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반면 보부아르는 ‘여성이 월경, 임신, 출산의 주기를 통제하고 정복할 때까지는 남성에게 문화적 성취에서 배제당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기술과 도구, 여성과 육체 사이의 관계도 달라져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난 바나나를 원해요.” “우리가 온 세상을 짊어져야 합니까? 여성 문제를 계속 다루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나요?” 이 말이 뜻하는 바를 바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대중 교통만을 이용해서 삶을 지속할 수 있는가. 아이와 함께 이동하는 엄마로서는 대중교통만으로 다닌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것 같다.
"만일 세계적 자유 무역에 반대한다면 대안으로 어떤 경제와 사회를 제시하시나요?"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사람들이 "대안은 없다" 증후군을 거부할 때 시작한다. - P310
그러나 기술과 진보는 세계를 전쟁터로 몰아 넣었고 자급자족 사회를 파괴, 빈곤의 나락에 빠뜨리며 서구 산업국 시스템에 의존하게 만들었다. 자본은 끊임없는 개발을 추구하면서 경쟁을 추구하게 한다. 세계적 자유 무역은 성장을 촉진해야 번영을 꿈꿀 수 있다고 입김을 불어넣는다. 미즈는 다른 세계를 꿈꾸어야 하고 이는 가능하다고 말한다. 세계화 대신 지역화를, 텃밭 가꾸기를, 공동체적인 삶을 통해서 말이다. 그러나 일개 개인인 나로서는 편리함을 포기하고 대안을 찾고 행동하는 일이 참으로 요원해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와 소비 모델에 편승하는 일은 세계와 구성원들을 파괴하는 일임에는 분명하다. 이를 위한 작은 노력이라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미즈의 ‘좋은 삶’이란 말이 계속 머릿 속에서 되뇌인다. 부디 나도, 너도, 우리도 좋은 삶을 살 수 있기를.
좋은 삶이란 일의 부담과 즐거움, 만족, 창의성, 공동체 의식을 분리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왜냐하면 인간은 함께 살고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좋은 삶은 일을 마친 후에 오는 것이 아니라 일의 일부가 돼야 한다. 현대 사회의 불행은 대부분 일과 ‘자유 시간‘ 모두에 즐거움이 부족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 P3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