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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카르타가 온다 - 냉전과 반공, 대량학살이 만들어 낸 세계
빈센트 베빈스 지음, 박소현 옮김 / 두번째테제 / 2025년 12월
평점 :
오페라상 야카르타, 야카르타 비에네. 플란 야카르타,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로 된 이 표현들에서 ‘자카르타‘가 의미하는 바는 명백하다. 또한 이것은 트루먼 행정부가 ‘자카르타 공식‘을 따랐던 1948년에 자카르타가 의미했던 바와는 전혀 다르다. 그때의 ‘자카르타‘는 워싱턴이 위협으로 여기지 않아도 되는 독립된 제3세계의 발전을 뜻했다. 이제 ‘자카르타‘는 아주 다른 것이 되어 반공 대량학살의 동의어가 되었다. 자카르타는 미국에 충성하는 자본주의 권위주의 정권의 건설에 반대하는 민간인을 국가가 조직적으로 절멸시키는것을 뜻하게 되었다. - P334
1954년 과테말라, 1964년 브라질, 1965년 인도네시아에서는 비슷한 형태의 참혹한 일들이 벌어졌다. 사건(?) 이후 해당 국가들은 정치 경제적으로 미국 질서에 편입되었다. '냉전반공'이란 단어가 익숙하면서도 어느 순간 이 단어와 제발 좀 헤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이 질서와 무관하지 못하다. 여전히 분단된 한반도는 이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동맹국인 미국을 비롯하여 주변국과의 관계를 고려하며 줄타기를 해야 하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제3세계의 많은 국가들도 그렇다. 오랫동안 진실을 은폐해온 미국과 소련의 문서들이 하나 둘씩 해제되면서 과거에 벌어졌던 충격적인 진실이 수면 위에 올라오고 있다. 가족이 흩어지거나 다치거나 죽고 국적을 상실해 떠돌아야 했고 수용소나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갇혀 악질적 고문을 받기도 했다. 이런 일들이 공산주의를 척결한다는 구실로 수없이 자행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그리스, 이탈리아, 프랑스 등에 공산당이 부상하자 이를 경계한 미국은 트루먼 독트린 하에 좌파 정권이 들어서지 않도록 조치를 취한다(물론 미국 내에서도 반공주의적 입장만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등장인물인 프랭크 위즈너와 하워드 팔프리 존스의 입장만 봐도 서로 달랐으니까). 식민지 국가는 종전 후에도 독립을 위해 제국주의 국가와 싸워야 했다. 게다가 냉전의 분위기 속에서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그들은 자유주의든 공산주의든 한 쪽에 서야했다. 미국은 CIA의 주도로 공산주의 확산을 저지하고 석유 확보를 위해 이란 정권을 무너뜨리려 했고 필리핀의 좌익 지도자인 훅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또 과테말라 정부의 집권자인 아르벤스도 몰아내려는 시도를 했다.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버마, 실론, 파키스탄, 인도는 반둥회의를 열어 절충주의를 표방했지만 이후 상황은 그들이 원하는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는 서구 자유민주주의 대신 내각인 정당과 시민집단인 국가위원회를 둔 교도민주주의로 인도네시아만의 정치체를 실현하고자 했다. 앞서 수카르노를 암살하려고 시도했던 미국 정부는 인도네시아 군부와 손잡고 반공전선을 결성한다. 당시 미국은 근대화론이 유행하고 있었는데 소위 근대화를 위해서는 군사 독재는 거쳐 가는 단계의 하나다라는 인식이다. 미국에 체류하던 인도네시아 지식인들은 이 영향을 상당 부분 받았을 것이다. 은연중에 스며드는 것이 무서운 법 아니겠는가. 미국에 의해 콩고 총리인 파트리스가 처형되고 콩고에는 군부에 의한 친미 독재 정권이 들어섰다.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진보를 위한 동맹'이라는 경제 협력 프로그램으로 미국식 경제 체제가 시작되었다. CIA는 만델라를 체포하고 이라크 공산당에 대항하고자 사담 후세인의 반공바트당 정권을 세우기도 했다.
1959년 인도네시아 군부가 외국 국적자의 경제 제한법을 실시하면서 이민자들의 탈러시가 시작된다. 도착지는 브라질이었다는데 정작 브라질은 불평등에 의한 위계도, 인종차별도 심한 곳이었다. 1960년 브라질에 주앙 굴라르라는 사람이 등장해 개혁을 꿈꾸었다. 그러나 미국은 CIA에 자금을 투입하며 그를 끌어내리려 했다. 브라질 내 파시즘과 반공주의에 반대하던 민족해방동맹의 군인들이 해고된 동료들에 분개해 반란을 일으키자 정부는 학살로 대응했다. 대응차원에서 던진 수류탄이 폭발하자 정부는 이를 공산주의 봉기로 몰아가면서 좌파 인사를 모조리 잡아들이게 된다. 주앙 굴라르는 결국 미국이 참여한 쿠데타에 의해 자리에서 물러나고 새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영국이 영국령 말라야를 말레이시아로 세우려 하자 수카르노는 이에 반대했다. 그러나 케네디 후 들어선 린든 존슨 정부는 베트남에서 영국 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영국의 말레이시아 연방안을 지지하기로 결정한다(거기에 인도네시아 원조를 완전 중단했다). 이에 복수하듯 인도네시아는 통킹만 사건이 벌어진 뒤 북베트남과 수교했고 말레이시아가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 이사국이 되자 유엔에서 탈퇴한다.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가 이런 복잡한 사정이 엮인 줄은 미처 자세히 알지 못했던 내용이다. 미국과 영국은 이에 정규 군인들로 구성된 조직원들을 인도네시아 군 장교 집에 투입시켜 체포한다. 다음 날 미국이 내세운 지도자인 수하르토에 의한 반공 반격 계획이 실행되면서 인도네시아 공산당과 수카르노는 악마화되었다 .
그후 아체, 발리 등에서는 소리 소문 없는 체포 이후 집단 학살이 이루어졌다. 여기에 인도네시아 무슬림 조직이 가담했다. 1945년 이후 한국 전쟁 시기 이후까지 한반도의 상황이 떠올랐다. 서로 간 이웃이었으나 죽고 죽이는 상황이 벌어졌던 것이다. 발리에서는 전 인구의 5%인 8만 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결국 수카르노는 수하르토에게 모든 권력을 이양하고 권좌에서 내려왔다. 베트남, 과테말라, 중국, 캄보디아, 가나 등등 세계 곳곳에서 벌어졌다.
책의 제목 중 '자카르타'는 의미심장한 말이다. 이 시기 반공 대량학살을 의미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정부에 반하는 민간인과 지식인들이 절멸의 대상이 되었다. 칠레에서는 미국의 등을 업은 군부가 독재 정권을 세우고 반공 작전 하에 3천명 가까이 되는 인명이 죽었다. '자카르타 방식'의 대량 학살과 반공 작전은 중앙 아메리카 지역으로도 확산되었다. "그들은 공산주의이므로 무신론자이며, 악마이므로 죽여도 된다." 정말이지 그 시절엔 붉은색 콤플렉스 또는 노이로제 망령이 단체로 걸려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이것이 광기가 아니고 무엇인지...
이렇듯 미국이 주도한 경제 협력 프로그램과 반공 군사 동맹은 각국 군대와 결합하여 미국식 체제에 길들여진 권위주의 정권을 공고히 했다. 결과적으로 냉전기 동안 공산주의는 '악마'로 규정되었으며, 이를 척결한다는 명목하에 전 세계적으로 폭력과 광기가 정당화되었다. 안타까운 것은 분명 이렇듯 많은 국가적 피해를 입은 이들이 있음에도 그들이 자본주의 경제 체제 하의 미국을 벗어날 수 없다는 현실이다.
책은 여러 역사 문헌을 참고하고 관련 피해자의 직접 인터뷰를 함께 실었다.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면서 사건 속에 인물들의 경험담을 실어 그 역사가 실제적으로 느끼게 했다. 인물들의 이야기가 역사의 한 부분처럼 느껴지게 책의 내용을 편집한 기법이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 아닐까 싶다. 미소 냉전기 아시아에서 펼쳐진 열전에 대한 내용은 앞서 출간된 여러 책들을 통해서 접할 수 있는데 이 책은 그 범위가 아시아만으로 국한되지는 않고 미국을 제외한 아메리카까지 포함하고 있다.
어떤 식으로건 냉전의 영향을 받아 온 나머지 세계에서 어떤 것은 변했지만 어떤 것들은 변하지 않은 채로 남았다. - P3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