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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곡 - 지옥.연옥.천국 귀스타브 도레 삽화 수록본
단테 알리기에리 지음, 귀스타브 도레 그림, 김운찬 옮김 / 열린책들 / 2022년 3월
평점 :
마치 꿈꾸면서 무엇인가 보는 사람이 꿈을 깨고 나면, 각인된 인상만 남고 나머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 것처럼, 내가 바로 그러하였으니, 나의 환상은 완전히 끝났으나 거기서 나온 달콤함은 지금도 내 가슴속에 흐르고 있는데, 마치 햇살에 눈이 녹는듯하고 바람결에 가벼운 나뭇잎에 적힌 시빌라의 응답이 흩어지는 듯하였다.
단테의 신곡은 ‘지옥’, ‘연옥’, ‘천국’ 세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구 (특히) 중세 작품을 읽을 때, 신곡은 필독서이자 교양서처럼 되어 있다. 사실 중세의 역사는 너무 재미가 없어서 매번 공부할 때면 고역이었다. 그럼에도 문학 작품을 읽을 때, 또는 현대 작품에서도 신곡이 수시로 언급되곤 해서 언젠가 제대로 읽어야지 생각하고 있었다. 다행히 이번에 신곡을 읽으면서 예전에 한 번 읽었던지 ‘지옥’ 중간까지는 좀 익숙했다. 아마도 직접 읽었지만 내용이 기억에 남아 있었거나 알음알음 들은 내용이 남아 있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이번에 읽을 때는 부디 이해를 하지 못하더라도 끝까지 읽어내자 생각하며 읽었다. 신자의 입장이라면 더 익숙했겠지만 무신론자인 나도 일상적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며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지라 ‘지옥’편에서 만난 이들의 입장이 이해가 되었다.
이때부터 내가 보았던 것은 언어를 초월했으니, 그 광경에는 언어도 굴복하고, 그 엄청남에는 기억도 굴복해야 하리라.
오, 탐욕이여, 너는 인간들을 네 밑에 잠기게 하여, 누구도 네 물결 밖으로 눈을 돌릴 수 없도록 만드는구나!
질투와 탐욕, 수시로 찾아오는 분노를 참으며 매 순간을 살아내는 나는 어쩌면 이성과 감정의 충동 사이에서 타협해야 한다는 명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인간이다. 책에서 신자의 최고봉에 자리한 수도사조차도 권력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해 부패의 길로 나아가는 걸 보니 인간이란 어쩔 수 없는 건가 생각하기도 했다.
인간의 육신은 너무나 약한 것이기에 지상에서는 시작이 좋아도 참나무가 싹터서 도토리를 맺을 때까지 지속되지 못하지요.
<신곡>이 계속 읽히는 이유는 첫 번째로, 나 같은 무신론자라도 이성적이든 감성적이든 어떠한 방면에서든 읽힐 수 있을 만한 보편적인 인간의 고민이 얽힌 명제를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사물 이면에 본질을 보지 못하는 인간은 어떤 것이든 확답을 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답을 구하는 명제란 한정적이고 질문을 품은 명제는 오래 걸려도 답을 구할 수 없음을 인간은 살아갈수록 느끼고 ‘그러면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가?’라는 고뇌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이는 누구나 겪는 본질적인 고민이자 실존적인 명제다.
단테는 스승인 베르길리우스를 따라 지옥 여행을 시작한다. 지옥의 여러 단계를 거치며 고통에 빠진 인간들의 천태만상을 통해 스스로의 삶을 회고하고 뉘우치는 과정을 거친다. 연옥을 거쳐 단테는 사랑하던 베아트리체를 천국에서 만나 계속 여행을 한다. 여행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현재와 과거를 만나며 그는 자신의 삶을 자연스레 돌아보게 된다.
개인적으로 신곡이 읽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미지의 탐색을 향한 인간의 욕망을 건드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입장에서 잡힐 수 없었다고 생각한 우주는 중세의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에서 시작했다. 우주의 중심은 ‘나’, ‘우리’에서 시작하여 지구가 중심이 아니라는 지동설이 탄생할 때까지 오랜 세월을 거쳐야 했다. 나는 어디로 향할까, 이 땅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할 수 있을까 끊임없는 고민을 거듭한 끝에 근대, 현대를 거쳐 지금의 우주 과학 이론과 실천이 뒤따랐다. <신곡>의 지옥, 연옥, 천국 장소의 위치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다양한 물리 이론을 비롯한 흥미로운 이론과 지각이 뒤따른다.
그렇다고 해도 솔직하게 고백해야 하리라. 지옥 > 연옥 > 천국 편으로 읽을 만했음을. 천국 편의 서두에는 이런 글귀가 자리하고 있다.
단테는 철학이나 신학의 교양이 부족한 독자에게는 천국이 어렵게 보일 수도 있다고 미리 말해준다. 잘못하면 길을 잃고 헤맬 수도 있으므로 미리 돌아가라고 권한다.
신에 대한 믿음이 없는 나는 천국 편을 읽는 것이 도무지 쉽지 않았다. 읽는 내내 자꾸만 졸음이 밀려왔고 피곤했다. ‘대체 어쩌라는 거야?’ 하는 말이 머릿 속에 떠나질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만난 이유, 베아트리체가 천국에서 단테를 이끈 이유가 무엇일까 ‘천국’ 편을 읽으면서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어서 소득이 있었다.
그를 돌이키려고 꿈이나 다른 방법으로
영감에 호소하는 것도 소용없었으니,
그는 그런 것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오!
너무나도 아래로 떨어졌기에, 그에게는
길 잃은 사람들을 보여 주는 것 외에
어떤 수단도 구원에 미치지 못했지요.
그 때문에 나는 죽은 자들의 입구를
방문했고, 그를 이곳까지 인도해 주었던
사람에게 울면서 부탁했던 것입니다.
베아트리체는 하얀 올리브 가지를 두르고 영롱한 불꽃 같은 모습으로 단테 앞에 나타난다. 그녀를 그리워한 단테는 연신 놀라움에 떠는데 마치 예수 앞에 엎드린 신자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단테에게는 베아트리체가 신비로운 영력을 지닌 거대한 신과도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10년도 더 된 이야기지만 어머니가 크게 병을 앓으시고 나서 기독교 신자가 되셨고, 집안에 늘 풍파를 일으키던 아버지도 열렬한 신자가 되셨다. 자식이 당신 곁을 떠나고 더 이상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아 병마에 시달리면 무언가를 잡고 싶은 것인가 곱씹어 보게 되었다. 부모님은 내게 종종 믿음을 권유하시지만 나는 손사래를 치며 거부하는 일을 반복한다. 나는 인간은 고독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사는 사람이고 언제든 나를 지켜 주는 이들이 떠난다는 것을 연신 생각하고 사는 사람이다. 보이지 않는 존재를 믿는다는 것에 여전히 회의적인 사람이라는 뜻이다. 물론 생각과 실천은 다르다. 인간은 냐약하고 보이지 않는 존재라도 어딘가에 기대고 싶기 마련이라는 것을 이해는 한다.
우리 괴로움은 단 한번이 아니라
이 둘레를 돌고 나면 새로워지는데,
괴로움이 아니라 위안이라 해야겠지.
<신곡>이 대단한 저작으로 평가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단테의 지식력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앞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당시 최신이라고 언급될 수 있었던 (우주) 과학 지식이 있었는데 뿐만 아니라 과거부터 이어져온 이야기의 소재와 관련 등장 인물들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읽다 보면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대체 이 사람은 이 많은 정보를 얻고 정리하고 자신만의 문학에 얼개로 짜 맞추어 넣기까지… 그 과정을 생각하면 더 놀라울 수밖에 없다.
게다가 오늘날에도 유효한 여러 가지 질문들을 하고 있다.
법은 있지만 누가 그걸 지키게 합니까?
아무도 없고 따라서 인도하는 목자는
되새길 수 있지만 갈라진 발굽이 없지요.
사람들은 자기 안내자가 그런 선에만
탐내어 기우는 것을 보고, 자기들도
그것만 먹고 그 이상을 요구하지 않아요.
이 세상을 사악하게 만들었던 원인은
그대들에게서 타락한 본성이 아니라
잘못된 통치임을 잘 알 수 있으리다.
미래가 없을 것만 같은 현실의 정치를 보면서 한숨을 짓다가 이런 구절들을 만나면 그 시절에도 이런 고민을 했구나 여기게 되면서 ‘그렇지!’ 탄성을 부르짖는다.
살아 있는 그대들은 온갖 이유를 저 위 하늘로 돌리지요. 마치 거기에서 모든 것을 필연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인간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다. 과거는 선택할 수 없었다고 해도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현재와 미래는 충분히 바꾸어나갈 수 있다고 긍정하고 싶다. ‘하늘’로 돌린다는 말은 ‘남’ 탓을 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고 여긴다. 이미 주어진 삶을 바꾸어 나갈 수 있는 것은 내 몫이다.
신곡에서 다룬 여러 명제들 중 내가 얻은 최소한의 정보이다. 너무 부족하지만 어찌되었든 완독해냈는데 부끄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