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비 딕 - 전면 개역판
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 202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고 긴 항해가 끝나면, 두 번째 항해가 시작된다. 두 번째가 끝나면 세 번째가 시작되고, 그렇게 영원히 계속된다. 그렇게 끝없이 이어지는 것, 그것이 바로 견딜 수 없는 세상의 노고인 것이다.

읽어본 듯 하다가도 아닌 것도 같은 묘한 느낌이었다. 아마도 전에도 읽기를 시도했던 것 같은데 앞부분 몇 페이지만 읽다 그만두지 않았던가 싶다. 그것도 아주 오래 전. 이슈메일이 퀴퀘그를 만나 피쿼드 호를 타게 되기까지 과정이 그랬다. 그 뒤 피쿼드 호를 타고 벌어지는 일들은 솔직히 지난하고 지루한 읽기 과정이었다. 핵심 줄거리는 간단한데 가지가 많은 나무 같은 느낌이랄까.
고래의 분류(향유고래 등), 포경업의 역사, 흰색이 의미하는 바, 고래가 등장하는 그림에 대한 이야기, 바다와 육지의 차이까지... 물론 그 와중에 흥미를 끄는 부분이 있을 때는 덤으로 이런 것을 얻어가는구나 싶었다.

그래도 완독하고 나서 느낀 것은 이 책은 한 번쯤은 도전해봐야 할 책이라는 것이다. 영문학 책 중 꼭 읽어야 할 책으로 분류되는 이유는 어떤 관점에 맞춰 읽느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기 때문에 꾸준히 읽기를 시도(도전)하는 책이 아닌가 싶다. 너무 뻔한 클리셰와 해석만 있는 책은 계속 읽힐 수 없을 테니까. 이 책은 역자들의 긴 주해가 있으며 다양한 해석들이 있다. 나는 책의 등장 인물과 상황에 대한 상세한 분석까지 할 자신은 없어서 이성과 감정이 가는대로(내 방식대로) 읽었다.

모비 딕은 눈처럼 새하얗고 주름이 잡혀 있는 이마와 피라미드처럼 높이 솟은 하얀 혹을 가진 고래다. 이런 두드러진 특징을 가지고 있어 바다에서도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며 먼 거리에서도 고래잡이들이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고 한다. 모비 딕이 ‘흰 고래‘라는 별명을 얻은 것은 대낮에 황금색으로 반짝이는 바다에서 거품을 만들어내며 모습을 드러낼 때 은하수 같은 포말처럼 아름다우면서도 한편으론 하얀 수의 같기도 해서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앞서 언급했듯 이슈메일은 피쿼드 호를 타고 항해를 하게 되었다. 고기잡이배를 타고 바다를 몇 년간 돌아다니는 일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 물을 무서워하는 데다가 그 망망대해를 어떻게 몇 년씩이나... 짧게 1~2시간을 이동하는 배에서도 멀미가 날 듯말듯하여 고역인데 말이다. 일반 고기잡이배는 그래도 항해 기간이 좀 짧은데 포경선은 그 기간이 무척 길다. 그런데 이들은 이를 몇 십년동안 몇 회를 반복한다. 한 번 나가면 3~4년은 걸린다고 하니 40년 동안 배를 탄다고 하면 10번을 반복한 게 되려나?

피쿼드 호의 중심 인물은 에이해브 선장이다. 에이해브는 과거 모비 딕으로부터 한쪽 다리를 잃은 후 복수(!)를 위해 고래를 추적한다. 그는 항해를 하면서 만나는 배마다 모비 딕의 행보를 물어본다. 선장은 그 욕망에 집착한다. 마치 인간이 세상을 향해, 자연을 향해, AI(기계)를 향해 (무모할 수 있는) 도전을 하는 것 같다. 마침내 이겨보겠노라고, 내가 쓰러뜨려보겠노라고. 그래서 그의 모비 딕에 대한 추적은 집착과 광기에 가깝다고 느껴졌다. 빌대드, 이슈메일, 퀴퀘그, 펠레그, 스타벅을 비롯한 선원들은 그저 고래를 잡으러 가는 목적이거나 돈을 벌기 위함이거나 등 달랐기에 갈등은 항해를 할수록 더해간다.
모든 악마성-이 모든 악이 미쳐버린 에이해브는 아담 이후 지금까지 모든 인류가 느낀 분노와 증오의 총량을 그 고래의 하얀 혹 위에 쌓아 올려, 마치 자기의 가슴이 대포라도 되는 것처럼 마음 속에서 뜨거워진 포탄을 그곳에다 겨누고 폭발시켰던 것이다.

왜 하필 모비 딕일까, 왜 하필 흰 색의 고래일까 생각했다. 흰색은 여러 함의를 지닌다. 그것은 깨끗함을 상징하기도 하지만(과거 우리 선조들이 입었던 흰색의 한복) 흰 배경 사이에서는 보호색처럼 은폐되기도 하여 눈에 띄지 않음으로써 두려움을 이끌어낸다. 가장 중요한 것은 흰 색이 수의로 널리 쓰인다는 것이다. 죽음의 세계와 가장 가까운 색이라 두려움을 자아내면서도 사후세계와 신-인간을 연결하면서 영적인 힘, 신성함과 숭배를 나타내기도 한다.
이는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포경선을 타는 선원들은 언제라도 사고를 당할 수 있기 때문에 죽음을 가깝게 느끼고 준비한다는 사실이다. 앞으로 살 날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기 때문에 배를 타기 전에는 무사히 그 여정을 끝마칠 수 있기를 기원하며 의식을 가지고, 만약 무사히 육지에 닿는다면 남은 날들은 덤으로 사는 인생으로 여길 수 있는 일이다.

사실 인생을 살다 보면 내 마음대로 제어할 수 없는 일들이 더 많다. 내 의지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인데도 불평하고 한탄하며 감정 낭비를 하여 손해를 보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나. 따지고 보면 에이해브의 집착과 광기를 나 또한 어느 측면에서는 갖고 있을 것이다. 모든 인간은 목에 밧줄을 두른 채 태어났다. 하지만 인간들이 조용하고 포착하기 힘들지만 늘 존재하는 삶의 위험들을 깨닫는 것은 삶이 갑자기 죽음으로 급선회할 때뿐이다. 그래서 태어남과 사라짐만이 인간에게 유일한 공통점이 아닐까. 살아가는 모양은 다르겠지만 말이다. 결국 태어나고 죽음을 향해 가는 과정은 동일하니까.

나는 누가 어떤 종교를 믿든, 그 사람이 자기와 다른 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남을 죽이거나 모욕하지 않는 한, 그 사람의 종교에 대해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사람의 종교가 정말로 광신적이 되어 그 사람에게 명백한 고통이 되면, 그리하여 결국 우리의 이 지구를 살기 힘든 곳으로 만들어버리면, 그 개인을 구석으로 데려가서 문제점을 따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위처럼 종교적 관용성과 포용성을 주장하는 부분도 있지만 이 책의 주요 흐름은 ‘기독교=문명‘ 이라는 레퍼토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볼 수 있다. 기독교세계, 문명과 그 외를 분류하며 차별화하고 계급화, 위계화시키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지금으로서는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게 한다. 특히나 골상학에 대한 신봉은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다.

저 멀리 아메리카와 아시아를 향해 너도 나도 배를 띄웠던 일들이 19세기와 20세기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흐름의 시작이라고 한다면 포경선은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여겨진다. 나아가 지금의 자본주의 세계도 위계화되어 있다는 측면에서 주축국과 식민지는 여전히 존재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이런 측면에서 포경선은 참으로 여러 함의를 지니고 있다고 보여진다.
고래의 남획으로 개체수가 많이 줄어들었다고 알고 있다. 이를 비롯하여 인간의 탐욕으로 들소, 호랑이, 펭귄 등이 지구상에서 많이 사라졌다. 모두 다 인간의 창 끝에 사라진 것들이다. 현재 들끓는 지구의 기후도 이의 영향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생각이다.

이 책을 완독하며 숙제 하나를 끝낸 기분이 들었다. 잘 읽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돌이 2025-07-09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게도 숙제 같은 책이에요. 몇년 째 책꽂이에서 저를 노려보고 있어요. ㅎㅎ
어쨌든 좋은 책이란 이렇게 사람마다 다른 생각을 하게 할 수 있는 책일테니 이 책도 많은 사람들이 좋다하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요. 화가님 글 읽으면서 또 어떤 부분을 생각하며 읽어야 할지도 생각이 되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맘브루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7
R. H. 모레노 두란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아버지 없는 자는 고통과 향수가 아니라 호기심 때문에 자기 아버지가 누워 있는 곳에 세워진 십자가를 찾는다. 우리 아버지는 너무나 먼 시대의 지시물이라 내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못했다. 아버지는 내가 여섯 살 때의 사진과 느낌, 그리고 희미한 기억이 서로 교차하면서 행방불명된 지시물에 불과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친 사람의 아들이라면서 대표적 본보기로 나를 내세우는 사람들에게 더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 것이 아닌 것을 가지고 주인 행세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 P415


주인공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아버지의 후예라는 위치에서 태어나 아버지란 사람에 대한 궁금증과 전쟁에 대한 의문점을 갖고 관련 연구를 시작한다. 국내외 문서보관소와 도서관의 자료부터 찾는 것을 시작으로 알려진 일들이 과연 진상인가 궁금증이 일면서 사건에 더 파고들게 된다. 하긴 수치로 기록된 통계를 얼마나 믿을 수 있을 것이며 기록의 사실들이 서로 맞지 않는 경우도 있었을테니 참전한 군인들로부터 증언을 들어보자 생각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그러나 짐작하겠지만 자료나 보고서에서 기록된 수치적 통계와 참전 용사들의 증언은 일치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이로서 기록과 현실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 느끼게 된다. 결국 보고서와 증언이 미묘하게 겹치는 공간을 추적하고 빈 공간을 다른 자료를 통해서 교차 분석하는 것만이 가장 가까운 진실에 다가가는 일이 아닌가 싶다. 


전쟁 발발 후 미국을 비롯하여 많은 해외 국가가 참전했다(그 시기와 규모만 다를 뿐). 콜롬비아도 그 중 하나다. 콜롬비아군은 총 두 차례에 걸쳐 한국에 파견되었다. 1951년 5월에 제1파견대가 에이킨 빅토리호를 타고 부산으로 향했고 휴전이 가까워질 무렵(1953년 3월) 제2파견대가 출발했다. 시기적으로 보면 짐작할 수 있듯 1차 파견대는 실 전투(녹십자 전투, 바르불라 전투, 불모 고지 전투 등)를 겪었으나 제2파견대는 부산에 도착할 무렵 휴전 즈음이 되어 실 전투에는 투입되지 않았다. 당시 콜롬비아 내정은 혼란스러웠다. 명분은 국가를 위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내정의 눈을 외부에 돌리고자 대통령은 준비도 되지 않은 이들을 전쟁터에 내보냈다.

천 명이 넘는 신병들이 레알 거리를 행진했어요. 마치 엄청난 승전보를 울리러 가는 것처럼. 오로지 낙관적인 친구들만, 우리를 보면 적들이 부리나케 숨어버릴 거야, 하고 말했어요. 난 군기 인도식을 거행하면서 대통령이 했던 말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대통령은 말끝마다 그가 매일 짓밟았으나 검열 때문에 그 누구도 문제 삼지 못했던 단어인 '자유'를 입에 올렸어요. 우리나라에서는 자유가 범죄인데 머나먼 아시아 국가로 가 자유를 위해 죽으라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 P54

자유를 억압당하는 와중에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나가라니 참 어처구니가 없을 법하다. 이는 콜롬비아가 내정도 어지러웠지만 당시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는 현실이다. 


한국전쟁은 1951년 무렵이 되면 전선이 이미 교착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그 2년 동안 격렬한 전투들이 이루어지면서 많은 병사가 희생되었다. 콜롬비아 1파견대군은 (이전과는 달라진 전투적 양상에서) 갑작스럽게 튀어나오는 중국군을 비롯한 북한군과 어려운 전투를 치러야 했다. 미군의 강요와 입김으로 올 수 밖에 없었던 이들은 후방에 있는 미군들을 위해 전방에 나서야 했던 것이다(예를 들어 미군 앨라배마 연대 병사가 뒷정리를 하는 동안 전선의 돌파구를 열고 앞장서는 일 같은 것). 

전쟁을 마주한 어느 병사는 당시 전쟁터의 상황을 이렇게 증언한다. 우리는 한강변의 화천지구를 따라가고 있었고 나는 휘파람을 불었어요. 종종 새의 노랫소리가 들렸고 도로변에 탱자나무가 한 그루 보였지요. 우리는 마치 굶주린 벌레들처럼 바로 열매를 따먹었어요. 저 멀리 버려진 집 몇 채와 폭격 맞은 집들이 보였어요. 이런 평화는 지옥 속의 전원곡이었지요. 그러나 정찰에 나선 날은 모든 게 달랐어요. 광활한 사막, 재로 뒤덮인 평원,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황무지, 정말이지 나무 한 그루 구름 한 점 없었죠. 침묵에 잠긴 참호가 있을 뿐이었지요.(P36) 전쟁이 시작하고 이미 1년이 지난 즈음 한반도는 그야말로 초토화되어 있었다. 


흥미로운 에피소드는 생각지도 못했던 통역이었다. 

가끔씩 미군들이 말하고 연락장교가 통역하고 나머지 군인들이 끝없는 논쟁을 벌일 때면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미군들 전략에 오류가 있거나 그것에 반대했기 때문이 아니라, 연락장교가 마음대로 통역하는 바람에 그런 끔찍한 소동이 벌어졌던 거거든요. ... 발단은 미군들이 참호로 들어가 더 넓게 파라는 뜻으로 '호우hoe'하고 지시한 것이었습니다. 이 말은 '괭이' 혹은 '파다'라는 의미였지만, 우린 자기들 스스로를 비하하거나 우리에게 욕을 한다고 생각했어요. '호그hog', 그러니까 '돼지'라고 들었던 거죠. - P174

그러고 보니 낯선 땅에 가서 소통을 해야 하는데 통역을 어떻게 했을까 싶은 것이다. 전투에서 여러 개의 전략이 충돌하며 갈등이 일어나고 언제 사고가 터질지 알 수 없는 와중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니 생각해보면 당황스럽다. 전쟁만큼 소통이 중요한 때가 있을까. 말귀 못아먹어서 작전이 잘못 전달되면 나도 너도 죽고 다 죽는 일인데 허허. 단 한 번도 통역을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인지 좀 놀라웠다.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언급조차 안되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을 것 같다.


공감가는 이야기는 역시 미국의 매카시즘, 반공주의였다.  

몇몇 사람들은 서양이란 단어는 미국을 의미한다는 생각을 머리에서 지울 수가 없었지요. 파나마 아래쪽과 적도 북부를 끊임없이 공포 속으로 몰아넣는 도살장 말입니다. ... 우리가 한국에 관해 뭘 알고 있었을까요? 아무것도 몰랐어요. ... 무조건 복종하는 통역사는 괴로워하는 목소리로 그들을 빨갱이, 빨갱이 개자식들, 빨갱이 살인자라고 칭했지요. - P167 

한국은 당시 매카시즘 광풍의 한복판에 있었다. 어쩌면 미국 국내보다도 전선에서 한반도의 남쪽과 북쪽을 오가며 한편에선 자유주의와 다른 한편에선 공산주의의 길로 나뉘어 있었던 것이다. 자유주의 편에 서지 않으면 살아남을 길이 없었다. 콜롬비아도 같은 이념을 강요받았다. 


(이와 이어진다고 볼 수 있는데) 주인공이 홉스봄 교수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내용으로 흥미로웠다. 홉스봄의 이야기는 지금은 철지난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어찌 되었든 한국이 이념 전쟁의 한복판에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의 세기가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세기이며 진정한 야만의 극치라는 것은 틀린 소리가 아니라네. 제3차 세계대전은 한국에서 시작됐거든. 많은 사람들이 줄기차게 지칭하던 '냉전'을 말하는 것이네. 한국전쟁은 특정 지역에서 일어난 전쟁이었지만 전쟁터가 아니라 협상 테이블에서 전쟁이 끝났다는 것을 보여주지. 새로운 방식이자 새로운 전략이었어. 미국은 자기들이 한국에서 싸우는 건 북한군이 아니라 중공군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고, 백오십 대의 중공군 비행기들이 사실상 소련인들이 조종하는 러시아 비행기라는 것도 알고 있었네. 그러니까 내 말은 콜롬비아는 사실상 미국의 사주를 받아 한국에 가서 북한군과 싸웠지만, 북한군이 중공군의 사주를 받았다는 것도 모른 채 러시아군과 싸운 꼴이 되었다는 소리야. - P281


그렇지만 이 책을 읽는 일은 어렵다. 포르노 잡지 사진을 제작 및 보급하여 돌려보는 병사들과 유곽과 유흥업소를 드나드는 일을 무훈처럼 떠벌리는 병사들이 계속 등장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전투 고지를 여성의 신체 기관에 빗대어 묘사하는 부분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콜롬비아군은 전투에서 북한군의 공격으로 부모가 사망하여 고아가 된 아이를 부대원으로 들이는데 이들이 보고 배우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기가 찰 노릇이었다. 모성을 찾아, 실연을 찾아 성을 찾아다닌다는 논리가 말이 된다고 보는가? 그저 구실이고 허언이며 집착이자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하지만 이것이 전쟁터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난 현실이었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하물며 전쟁터 뿐이겠는가). 


파견된 콜롬비아군은 1954년 10월에야 부산을 떠날 수 있었다고 한다. 1953년에 휴전협정이 맺어졌음에도 1년이 훌쩍 지난 기간동안 이들은 전선을 정리하고 봉사하는 일에 시간을 보냈다. 이들이 귀국하자 그야말로 환영 인파들이 가득했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보상을 바라고 떠났던 이들에게 실제로는 원하는 만큼 주어지는 것은 없었다. 살아 돌아온 병사 중 몇몇은 범죄의 세계에 빠지기도 했다. 정부는 군대 파견으로 미국에 성의를 보였고 국민에게 체면 치레를 했지만 이들은 정작 돌아온 것이 작지 않았나 싶다. 물론 명예는 다른 일이겠지만(명예가 밥 먹여주나. 실제적인 것이 있어야지^^;). 


이 책을 통해서 콜롬비아군이 한국에 어떤 배경으로 파견되었고(정치적 상황이라던지) 전쟁터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등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혹시라도 읽고 싶은 분들이 계시다면 지금처럼 찜통 같은 계절에 이 책을 읽는 것은 결코 추천하지 않는다(울화통 터짐 주의. 분노 조절 장애 주의). 


"우리가 서로 죽고 죽이는 건 내가 보기엔 정치적 이유 때문이야." -P18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탈리아 전쟁 1494~1559 - 근대 유럽의 질서를 바꾼 르네상스 유럽 대전
크리스틴 쇼.마이클 말렛 지음, 안민석 옮김 / 미지북스 / 202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양 중세(근세까지도)까지의 역사에서 이탈리아의 지분이 크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중세의 역사에서 십자군 전쟁, 종교 개혁, 르네상스까지 이탈리아는 늘 중심에 있었으니까. 서양사를 잘 알지 못해서 틈날 때마다 공부 중이지만 여전히 어렵다. 그래도 서양 중세의 역사(보다는 미술 쪽인 듯)에서 그나마 가장 흥미를 느끼는 부분은 르네상스의 시기인데 이 당시의 미술가들을 유독 좋아하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화가의 그림에는 신이 아닌 인간이 등장했고 인간의 실제 모습처럼 그려졌다. 이탈리아에 갔을 때 라파엘로의 그림을 보았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가 없다. 화가란 그림의 주체에 생동감을 부여해야 함을 그가 그린 그림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되었달까. 살아 움직이는 그림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던 느낌을 받았다. 


이 책은 15세기(1494년)에서 16세기(1559년)에 걸쳐 이탈리아 반도에서 일어난 60년간의 전쟁을 다루고 있다. 그렇다면 이 시기 이탈리아에서는 왜 전쟁이 일어났는가. 긴 십자군 전쟁이 끝나고 난 뒤 이탈리아 반도에 있었던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는 해상 왕국으로 발돋움하며 세력을 확장중이었다. 이때 이탈리아 왕국에 눈독을 들이며 권리를 주장하는 여러 세력이 있었다. 프랑스 왕과 스페인 왕은 나폴리의 왕위를 두고 계승권을 주장했고 대가 끊긴 밀라노 공국의 왕위를 두고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당시 북부와 중부 이탈리아 영토의 많은 부분이 제국의 봉토였음)이 격돌했다. 당시 이탈리아는 여러 왕국으로 나뉘어 있었다. 대표적으로 나폴리, 밀라노, 피렌체, 베네치아, 그리고 교황령의 큰 도시 국가가 있는가 하면 이 밖에도 시에나, 루카, 제노바, 페라라를 비롯한 수많은 소국이 존재했다. 소국들은 서로 동맹을 맺고 연합하여 대국을 상대하고 방어했다고 한다. 

주요 참전국은 프랑스, 스페인, 밀라노 공국, 나폴리 왕국이었다. 여기에 스위스, 독일, 네덜란드, 발칸반도의 국가의 군인들이 참전하며 전쟁 참전국 범위가 확대되었다. 


전쟁의 흐름을 바꾼 몇 차례의 전투가 있다. 


1503년 벌어진 체리뇰라 전투는 프랑스군의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프랑스 기병과 스위스 창병의 공격에 맞서 스페인은 화승총병으로 맞서며 승리했다. 이 전투는 화승총을 사용하여 승리한 최초의 유럽 전투로 평가되고 스페인의 지휘관이었던 곤살로 데 코르도바였는 위대한 지휘관으로 회자되었다.

1508년부터 1516년까지 이어진 캉브레 동맹 전쟁은 베네치아를 상대로 일어났다. 반베네치아 연합에는 프랑스, 스페인, 신성로마제국, 교황령 등이 동맹에 포함되었다. 전쟁 기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 이 전쟁하는 동안 동맹관계가 자주 바뀌어 전쟁의 흐름이 복잡했다. 캉브레 동맹 전쟁 중 아냐델로 전투는 1509년 벌어졌다. 전투에서 베네치아가 프랑스군에 지면서 이탈리아에 소유하고 있던 상당수의 영토를 토해내야 했다. 

1512년 벌어진 라벤나 전투는 프랑스군 vs 스페인-교황군 간에 이루어졌으며 프랑스군이 승리했다. 스페인은 교황을 끌어들였지만 프랑스군에 승리하며 참패의 쓴맛을 봐야했다. 그러나 프랑스군도 지휘관인 가스통 드 푸아가 전투 중 사망하면서 그 빛을 퇴색시켰다. 

1515년 마리냐노 전투는 캉브레 동맹의 마지막 전투로 프랑스군과 스위스군이 격돌했다. 스위스군은 당시 유럽 최고의 보병으로 평가받았기에 프랑스군은 수세에 몰렸다. 그러나 이때 베네치아군이 프랑스군에 합류하면서 프랑스군이 최종적으로 승리했다. 프랑스의 지휘관은 이제 막 국왕이 된 프랑수아 1세였고 그는 이 전투로 자신의 능력을 만방에 알렸다.

1525년 파비아 전투는 신성로마제국군의 압승으로 끝났다. 프랑스는 군이 거의 전멸했을 뿐 아니라 국왕인 프랑수아 1세가 포로가 되는 수모를 겪었다. 전투의 결과 프랑스는 나폴리와 밀라노, 제노바에 대한 권리를 포기한다는 서명을 해야 했다. 


전쟁에 가담 인물도 많고 여러 국가가 엮여있다 보니 솔직히 많이 복잡하다. 게다가 짧지 않은 기간의 전쟁인 만큼 여러 차례의 전투가 벌어지기 때문에 넋놓고 보면 흐름을 놓치기 십상인데 책에서 전투의 배경과 전개 과정, 결과를 충분히 설명해주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는 없다. 

책의 앞부분에 전쟁의 주요 등장인물인 스페인-합스부르크(막시밀리안 1세, 카를 5세), 프랑스(루이 12세, 프랑수아 1세, 앙리 2세), 교황령(율리우스 3세, 레오10세, 바오로 3세) 뿐 아니라 그 밖의 인물 중 체사레 보르자, 루도비코 마리아 스포르차, 피에로 데 메디치, 샤를 드 부르봉, 루도비코 마리아 스포르차 등 중심 인물들의 사진이 실려 있어 도움이 된다. 

또한 이탈리아 지도를 전체, 북부, 중부, 남부의 부분도로 나누어 놓아 독서 중 관련 지명이 나올 때마다 찾아볼 수 있어 도움이 되었다.


이처럼 이탈리아 전쟁은 서유럽 강대국들이 충돌하며 발생했다. 결국 승리는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차지했다. 그 결과 이탈리아에서 스페인 황실의 입김이 강해졌다. 전쟁 기술적으로는 보병의 강화, 장창과 화승총의 확산, 대포와 요새의 발전, 직업 군인 제도의 도입 등이 이루어졌다. 또 이탈리아 전쟁에의 교황의 참전은 유럽 전역에서 하나의 제도로서 교황과 교황권이 인식되는 방식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교황이 세속적 목적을 위해 기독교 세력들을 상대로 능동적으로 전쟁을 일으켰다는 점, 그리고 때때로 자기 가문을 군주적 지위로 격상시키겠다는 목적을 위해 일으킨 군사 원정에 교회 재산을 유용했다는 점 등은 로마 교황청을 향한 환멸을 더욱 자극하여 신교 확산에 기름을 부었다(이는 종교 개혁의 빌미가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전쟁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가 알프스 너머로 확산되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는 데 기여했다. 이는 향후 종교 개혁, 과학 기술의 발전과 맞물리며 서양 근대 문명의 기틀을 확산시켰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띤다고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 전쟁이 중요한데 왜 이제야 제대로 된 한 권의 책으로 정리되어 나왔는지 의아할 따름이었다. 이탈리아 전쟁의 역사를 읽으니 비로소 십자군 전쟁과 종교 개혁, 르네상스까지 비로소 한 흐름으로 정리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여러 모로 구입하고 읽기를 잘한 책인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란츠크네히트의 다수가 루터파였다는 사실은 이러한 신성모독행위들값비싼 교회 식기류를 약탈하거나 수녀들을 강간하는 등의도시 약탈 과정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특징이었다에 또 다른 차원의 의미를 부여했다. 성유물함이 박살났고, 전임 교황들의 것을 포함해 무덤들이 파헤쳐졌다. 미사를 풍자한 집회가 열렸고, 란츠크네히트가 ‘교황‘ 선출을 패러디하기도 했다. 바티칸의 프레스코화에 루터 - P336

를 칭찬하는 낙서가 새겨져 있는 것을 지금도 볼 수 있다. 사도 베드로의 도시에서 그러한 신성모독이 행해졌다는 것, 유럽 전역의 순례자들이 방문하는 교회들의 유물과 재단을 더럽혔다는 것이 특히 충격적으로 여겨졌다.
혹자에게는 로마를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어준 예술가와 학자들의 공동체가 해체된 것도 통탄할 만한 사태였다. 이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이탈리아 전역으로 흩어졌다. - P337

카를 5세의 이탈리아 순방 계획은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이를 반드시 저지하려고 했던 프랑수아 1세는 이탈리아 내 자신의 동맹 세력들과 새로운 군사 원정 계획을 논의해왔는데, 왕이 직접 이탈리아 원정을 지휘하든, 스페인 국경지대로 군대를 보내든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동맹국들은 둘 다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것을 잘 알고있었다. 프랑수아 1세와 카를 5세 모두 평화협정을 체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카를 5세의 고모이자 플랑드르의 섭정 마르가레테와 프랑수아 1세의 모친 루이즈 드 사보이아 사이에서 원격으로 협상이 진행되었다. 7월에 두 부인이 캉브레에서 회담을 갖기 전에 많은 외교적 기초 작업들이 수행되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진행된 양측의 회담은 어떠한 형식에도 구애받지 않았다. 강인하고 지적인 두 여성은 최선의 협상 조건을 끌어내기 위해 단단히 결심한 상태였다. - P359

분명한 것은 그(카를 5세)가 교황의 대관식 주재를 바랐던 것의 이면에 한 가지 실제적인 고려 사항이 있었다는것이다. 자신의 대관식을 통해 동생이 로마인의 왕(신성로마제국 황제의 후계자)으로 선출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는 이 일이 조속히 진행되지 않을 경우 독일 내 자신의 적대 세력들이 다른 후보자를 선출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실제로 그의동생은 1531년 로마인의 왕으로 선출되었다. - P368

교황과 프랑스 왕은 공의회를 하나만 소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데 입장을 같이하고 그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 프랑수아1세는 구교, 신교를 가리지 않고 독일의 제후 및 도시들과 긴밀한 접촉을 유지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을 상대로 음모를 꾸몄다. - P387

황제는 결혼 동맹을 통한 지속적인 평화를 위해 밀라노와 저지대 지역 가운데 어느 곳을 희생해야할지 고민했고, 스페인 중신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의견은 둘로 나뉘었다. 한쪽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습 영토에 속하는 저지대 지역이아니라 전쟁의 원인을 제공함으로써 재원 고갈의 주범이 된 밀라노를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한쪽은 밀라노가 독일과 연결되는 중요한 통로이자 나폴리와 시칠리아 방어의 핵심이며 저지대 지역보다 스페인에 훨씬 더 유용하다는 입장이었다." 카를 5세는 저지대 지역을 지키는 쪽으로 결정했다. - P420

바오로 3세의 마지막 명령은 조반니 마리아 델 몬테, 즉 율리우스(율리오) 3세가 1550년 2월 말 그의 후임으로 선출되자마자 재확인되었다. 기분에 따라 변덕이 심했던 새 교황은 국정과 씨름하기보다는 느긋하게 사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특별히 자신의 가문을 위한 야심 같은 것도 없었고, 자신을 존중해주는 이상 파르네세 가문에 대해서도 적대적이지 않았다. - P434

카를 5세는 1554년 7월 25일 펠리페와 메리 튜더의 결혼에 맞춰 밀라노-이전에 했던 책봉은 무시하고와 나폴리를 펠리페에게양여했다. 펠리페는 나폴리 국왕 책봉에 대해서만 따로 기념식을 가졌다. 밀라노는 이미 자기 것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카를 5세는 펠리페와 상의하지 않고 몇 달 동안 더 이 나라들의 국정에 결정권을 행사했다. - P461

1555년 5월 금욕적인 개혁가이자 종교적 권위를 수호하는 데 매우열성적인 것으로 알려진-특히 스페인의 나폴리 지배와 카를 5세를싫어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나폴리 추기경 잔 피에트로라파가 교황에 선출되었다. 바오로 4세는 모든 외국 세력이 축출되면 이탈리아가 더 나아질 것이라고 믿었는데, 스페인보다는 프랑스의 존재로 인한 폐해가 덜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프랑스의 두 왕자가이탈리아에서 한 명은 베네치아에서, 다른 한 명은 로마에서 교 - P474

육을 받고 각각 밀라노 공작과 나폴리 왕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옹호할 것이었다. 전임자들과 달리 그는 강대국들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고, 카를 5세와 펠리페에 맞서 기꺼이 프랑스 국왕 편에 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 - P476

1530년대가 되면 장창병과 화승총병의 조합으로 유럽 각국의 군 전력에서 보병의 우위가 확고해지고, 스페인, 독일 그리고 이탈리아 화승총병들은1520년대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승리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6세기 초에 이처럼 비교적 갑작스럽게 효과적인 총기류가 등장한 것은 세 가지 요인 때문이었다. 첫째는 1480년대에 화승총 발화장치에서 일어난 기술 발전이었다. 초기 총기류가 그랬던 것처럼화승총도 엉덩이 부근에서 한 손으로 격발했는데, 기술 발전으로 어깨에서 발사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두 번째는 화약 성능이 개선되고가격이 싸졌다. 화약 가격은 15세기에 80%나 떨어졌고, 화약 성능의개선으로 사거리는 크게 증가하고 사격 속도도 훨씬 빨라졌다. 세번째는 독일 남부와 이탈리아 북부에서 대규모 화기 제조업이 발전했다. 이는 지리적으로 보았을 때 스위스 용병의 경쟁 상대로 란츠크네히트가 부상한 것과도 연결되었다 - P513

이탈리아 전쟁에서 교황의 참전은 유럽 전역에서 하나의 제도로서교황과 교황권이 인식되는 방식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교황이 세속적 목적을 위해 기독교 세력들을 상대로 능동적으로 전쟁을 일으켰다는 점, 그리고 때때로 자기 가문을 군주적 지위로 격상시키겠다는 목적을 위해 일으킨 군사 원정에 교회 재산을 유용했다는 점 등은 로마 교황청을 향한 환멸을 더욱 자극하여 신교 확산에 기름을 부었다. - P614

이탈리아는 나폴리와 밀라노가 스페인 왕가와 밀착하고, 프랑스 국왕과 황제가 계속해서 이탈리아 내부 문제와 이해관계로 얽히면서, 불가피한 수준으로 유럽의 국가 체제에 보다 긴밀히 얽혀 들어갔다. 특히 북부 이탈리아는 다시 한 번 유럽 열강의 전장이 될 것이었는데, 롬바르디아를 누가 소유하느냐가 핵심적인 전략적 관건이었다. 향후 수세기 동안 이탈리아 국가들의 운명은 스페인과 프랑스의 - P648

국왕 그리고 황제 사이에 체결되는 외교적이고 왕조적인 합의에 따라 결정될 것이었다. 크고 작은 이탈리아 국가들 사이의 관계망서그토록 중요한 요소였던 ‘보호‘와 ‘복종‘을 낳는 정교하게 맺어진 정치적 후원과 충성의 체제가 근본적으로 재구축되었다. - P649

1495년 3월, 루도비코 스포르차는 피렌체 대사에게 보낸 답신에서 "당신은 내게이탈리아에 대해 말하지만, 나는 그것의 얼굴을 한 번도 본적 없소"라고 말했다.23 1556년 10월, 로마의 영주이자 군인인 카밀로 오르시니는 베네치아 대사에게 "나는 프랑스에는 프랑스 사람이, 스페인에는 스페인 사람이, 그리고 이탈리아에는 이탈리아 사람이 있는것을 보고 싶소"라고 말했다." 사람들에게 이탈리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더욱 의식하게 만든 것은 외국의 지배 경험 그 자체라기보다는수천수만 명씩이나 되는 외국 병사들의 존재였을 것이다. - P656

이탈리아 전쟁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가 알프스 너머로확산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문화야말로 이탈리아인의 우위가 인정된, 그래서 그들이 스스로 위안을 삼을 수 있는 분야였다. - P660

이탈리아 전쟁이 불러온 모든 장기적 결과 가운데 가장 큰 파급효과를 낳은 것은 당연히 이탈리아반도의 많은 부분이 이제 외국 군주-이탈리아에 거주하지 않는ㅡ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 P671

이 새로운 질서에 대한 평가는 스페인 왕이 이탈리아에서 지배적인 세력이 되는 것이 전쟁의 고정된 결론은 아니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져야 한다. 확실히 그 문제는 1529~1530년 카를 5세가 이탈리아를 방문했을 때까지도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였다-그시기 전후로도 그의 군대는 수세에 몰리는 경우도 잦았고, 그의 사령관들은 급료도 제대로 받지 못한 충분치 않은 병력으로 전선을 사수하느라 고군분투했으며, 병사들이 제대로 싸울 것이라 믿을 수 없어야전에 임하지도 못했다. 카토-캉브레지 조약으로 구체화된 전쟁의최종적 결과는 당시 이탈리아인이나 프랑스인, 심지어 스페인인이보기에도 이탈리아 주둔 스페인군이 거둔 확고부동한 승리의 불가피한 결과는 아니었다. 오히려 깜짝 놀랄 만한 이변으로 비쳤다. 이탈리아인들은 스페인 제국의 힘을 압도적이고 불가피한 것으로 여길 필요가 없었다. 이탈리아 내 스페인 세력의 토대는 이탈리아 전쟁 시기에 살았던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그다지 대단하지도, 탄탄해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 P673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얄리얄리 2025-06-30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에 댄 존스의 [중세인들] 읽을 때 이탈리아 전쟁을 종교개혁에 붙여놓았던 것을 보고 좀 의아해 했는데... 화가님이 그동안 올려주신 문장들을 다시 읽으면서 정치와 종교를 나눌 수 없었던 그 시기를 새롭게 생각해 보게 되네요. 감사합니다!

거리의화가 2025-06-30 21:49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책 읽으면서 말씀하셨던 부분을 잘 이해하게 되었거든요. 도움이 되신 것 같아 저도 기쁩니다.
 

아냐델로 전투는 이탈리아 전쟁에서 벌어진 많은 전투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전투 가운데 하나였다. 전투가 이루어진 방식 때문이 아니라 당시 입은 패배로 베네치아가 한 세기 넘게 이탈리아 본토에서 획득한 거의 모든 영토를 상실함으로써 공화국 역사에서 가장결정적인 순간의 도래를 알렸기 때문이다. 전투에 가담하지 않은 베네치아군의 주력이 온전히 남아 있었으나 사기가 크게 저하된 탓에, 베네치아는 주력부대의 보전을 위해 동쪽으로 퇴각을 명령했다. 이들은 시민들의 반대로 테라페르마의 주요 도시로부터 주둔을 거부당하다가 마침내 석호 지대에 있는 메스트레에 베네치아시를 방어하는 진지를 구축했다. 메스트레에 도착하는 동안 부대 병력은 탈영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 P197

그들은 종속 도시들의 방어를위해 병력을 분산 배치하기보다는 본 병력을 그대로 유지한 상태에서 베네치아시 방어에 주력하는 것을 우선했다. 또한 10년 전 밀라노공국의 도시 엘리트층이 그랬던 거처럼 1509년 당시 베네치아 종속도시들의 시민들도 외국 군주가 멀리서 종주권만 행사하고 자신들은사실상 자치를 누리는 특히 중요한 것은 자기들도 주변으로 확장하여 속지를 통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 P199

새 교황은 레오 10세로 불리게 될 조반니 데 메디치였다. 율리우스 2세보다 훨씬 젊었던 레오 10세는 그 정도로 호전적이지 않았으며, 외교 문제에 훨씬 더 미묘하고 가변적이었다. 그를 상대할 사람들은 그의 확고부동한 목표가 메디치 가문을 군주급 왕조로 격상시키는 것임을 곧 알게 되는데-피렌체를 지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 점을 제외하면 그는 의중을 읽기 힘든 인물이었다. 그가 교황의 자리에 앉음으로써 당연히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문의 위상은 강화되었고, 레오 10세는 피렌체의 외교 정책을 실질적으로 좌우했다. - P252

베네토에서는 전쟁의 어느 단계에서든 전투로부터 직접적인영향을 받지 않은 지역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영토가 이쪽이든 저쪽이든 군대의 주둔을 경험했고, 어떤 곳은 해마다 겪기도 했다. 비첸차의 한 연대기 작가에 따르면, 아냐델로 전투가 벌어진 1509년부터 1517년 사이에 비첸차 정권은 36번이나 교체되었다. … 베네치아인들에게 전쟁은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드는경험이었다. 그들은 전쟁 자금의 압박 때문에 공화정에 자부심을 가 - P282

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혐오스러울 수밖에 없는 방식에 의존해야했다-실제로 그들은 정부 관직과 상원 의원직을 가장 높은 값을 부르는 사람들에게 판매했다. 베네치아인들은 이미 자신들의 해상 제국에 점점 더 큰 위협을 가하는 튀르크 세력과 공존하는 법을 배워야했다. 관건은 그들이 어디로 더 확장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그들이가진 것을 계속 지켜낼 수 있는지의 여부였다. - P28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