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새
이혜경 지음 / 창비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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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에는 세 가지 길밖에 없대. 달아나든가, 방관하든가, 부딪치는 것.
영화 <씨티 오브 조이>에 나온 대사야. 나는 주로 방관하는 편이었어.
하지만 방관하는 게 더는 허용되지 않을 때가 오지.
그러면 달아나거나 부딪치는 수밖에. (‘문밖에서’ 95쪽)


영국에서 온 친구랑 영화를 한 편 보러 갈 건데 추천해 주고 싶은 게 없냐고
당시 내가 선생님이라고 깍듯이 부르던 어른이 근무 중에 전화를  걸어왔다.
그 전 날 호암아트홀에서 본 영화가 바로 패트릭 스웨이지 주연의 인도 빈민가가 배경인
영화 <씨티 오브 조이>.
처참하리만큼  지독한 현실과 의로운 주인공의 고군분투를 보여주는 영화가 참  좋았으므로
나는 두 말 없이 <씨티 오브 조이>를 권했다.
몇 시간 후 흥분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전화가 걸려왔다.


"어떻게 그런 영화를 좋아하고 권할 수 있어? 로드무비 이제 보니 의외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균열은 영화 한 편에 대한 감상의 차이로도 시작된다.
이혜경의 이 책 어느 소설에도 영화관을 나서며 엉뚱한 발언을 늘어놓는 남자를 보며
이 사람이랑은 안 되겠구나, 깨닫는 장면이 나오는 것처럼.
꼭 영화 <씨티 오브 조이> 때문만도 아닌 것이, 오랜 기간 아주 절친했던 그 선생님과의 관계는
어느 날 문득 눈을 뜨니 아주 데면데면한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혜경의 단편 ‘문밖에서’에 나오는 “보랏빛 씨스루 블라우스” 는
어찌 보면 영화 <씨티 오브 조이>보다 내게는 더 저릿한 상징으로 느껴진다.
우연히 모임이 이루어져 꽤 오랜 기간 지속이 되고 있는 언뜻 보기에는
굉장히 쿨하고 자유로운 전문직 독신여성 들의 정기적인 모임.
평생 연애 한 번 못 해본,  여성적인 매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한 멤버가,
어느 날 남자랑 극장에서 나오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기억나니? 우리가 돈을 모아 H에게 선물한 보랏빛 씨스루 블라우스.
그 옷을 H가 한 번이라도 입었을까? H가 자기의 연애를 알리고 싶어 했을까?
(...) H가 한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는 건 신기하고 즐거운 일이었지만,
H가 말해줄 때까지 기다릴 순 없었던 걸까?(97쪽)


남자들은 예쁜 여자보다 ‘쎅시’한 여자를 좋아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한,  치마 입은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친구를 쎅시하게 보이도록
돈을 모아 야사시한 씨스루 블라우스를 선물하는 친구들.
얼핏 보면 다정다감하고 예쁜 풍경 같지만, 그 씨스루 블라우스를 강제로 선물 받아본 사람의
곤혹스러움은 상상도 할 수 없으리라.
친구나 애인 혹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부당한 간섭이나 그 끈끈이주걱 같은
관계가 무섭고 싫어 나 또한 오래도록 세상을 겉돌았다. 지금도......

이 작가는 어쩌면 이렇게 사람 관계에 대해, 무서운 세상에 대해, 알 수 없는 인생에 대해
손이 미치지 않는  곳을  긁어주는지, 심지어는 가렵다고 느끼지 않은 부분조차
조용히 알려주는 것이다.



단편 '문밖에서'에 나오는 내 기억 속의 영화 <씨티 오브 조이>와
보랏빛 씨스루 블라우스만 가지고  리뷰를  써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런데 그러기엔 너무 허전해서,  읽다가 나도 모르게 밑줄을 친
멋진 문장 하나 를 옮겨 적는다.


--흙이 무너지지 말라고 봉분 중간을 빙 둘러가며  끼워넣은 솔가지가,
나와 남 사이에 그토록 선명한 금을 긋고,  그토록 오랜 세월 불안을 견디며

살아낸 한 생애의 이마 위에 얹힌 화관 같다.('피아간(彼我間)' , 1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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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이카 2006-06-07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하는 영화, 음악, 좋아하는 야구팀, 종교, 그리고 이데올로기 이런 게 두 사람이 친해지는 데 중요하다고 생각했었지요... 그리고 지금도 어느 정도는...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마도.... 입맛과 주량 아닐런지... ^^

hnine 2006-06-07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신문에서 오랜만에 저자가 책을 내었음을 알고 읽어봐야겠다 생각했는데 로드무비님은 벌써 후기를 올리셨군요.
영화 씨티 오브 조이, 저도 오래전에 호암아트홀에서 본 기억이 납니다.
'피아간'...한자를 보니 무슨 뜻인지 알겠네요.

로드무비 2006-06-07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nine님, 별로 관심이 없던 작가인데 너무 재밌게 읽었어요.
소설 읽는 재미에 흠뻑.^^
('시티 오브 조이' 개봉한 게 1993년인데, 어쩌면 우리
옆자리에 앉아 봤을 수도 있겠네요.)

에로이카님, 그럼요.
그 어마무쌍한 모든 것보다 입맛과 주량이 더 중요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도 절대적인 건 아니에요.
맞으면 물론 더 바랄 게 없지만.^^

반딧불,, 2006-06-07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사람 전작도 좀 강력했었던 기억이 나는데요.
근데 무슨 책이었는지는 기억에 없네요.

nada 2006-06-07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번 우격다짐 미용실로 끌고 가신 친구분 이야기 2탄이네요. - -;;;;

"굉장히 쿨하고 자유로운 전문직 독신여성들의 정기적인 모임"에서 갑자기 무서워지는 건 왜일까요..

마태우스 2006-06-07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정말 멋집니다. 친구나 가족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부당한 간섭...키야... 시스루 블라우스라는 제목에 혹해 들어왔다가, 감동만 만땅 받고 갑니다. 죽었다 깨나도 쓸 수 없는 멋진 리뷰를 보는 곤혹스러움을 옛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다죠.
"심봤다>..."

oldhand 2006-06-07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봤다!

치니 2006-06-07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 이해는 오해에서 비롯된다고도 하듯이...
친하다고 해서 상대가 원하는 모든걸 알수가 없는데도, 우리는 자꾸 아는 척을 하네요...반성 중.

날개 2006-06-07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봤다!!! ^^

건우와 연우 2006-06-07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언젠가 씨스루블라우스를 사주었을것 같은 느낌이...
과유불급은 <관계>에도 통용되는것 같아요

2006-06-07 2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니르바나 2006-06-08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씨티 오브 조이>가 아니라도 그 선생님과는 데면데면해질 사이였을 겝니다.
로드무비님이 좋아하는 영화의 취향도 파악하지 못했으니까요.
영국에서 온 친구를 생각해서 토속적인 영화 <심봤다>를 권해드릴꺼 그랬나요. ^^

로드무비 2006-06-08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르바나님, 아이고, 아침에 만나니 더욱 반갑습니다요.ㅎㅎ
문학인들이 시민들과 함께 깃발을 들고 거리에 나가는 걸
이해 못하는 분이었으니까요.
참다운 인생의 행복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영원에 있는 건데
사소한 것들 가지고 싸우면 안된다고 생각하시니
어떤 부분은 대화를 아예 접어야 했습니다.
그래도 워낙 좋은 분이어서 관계를 놓고 싶지는 않았는데
세월 속에서 절로 그렇게 되더군요.
그러고 보니 호암아트홀에서 그분과 본 영화가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였네요. <심봤다>가 아니라!ㅎㅎ

그 사람들의 심리님, 저도 얼마나 많이 겪었는지 몰라요.
결혼생활도 옆에서 보니 뭐 그저그렇더만, 뭐 그리 자랑이라고.
아마 너무 멋진 님이 부러워서, 같이 고생 좀 하자고 자꾸 결혼을
권하는 게 아닐까요?ㅎㅎ

건우와 연우님, 전 씨스루 블라우스를 선물받는 입장이었습니다.
"좀 꾸미면 예쁠 텐데!" 하는 말을 하도 많이 들어서.
그런 말이 듣기 싫었어요.
어쩌면 저도 어떤 친구에게 또다른 의미의 씨스루 블라우스를
강제로 안겼는지 모르겟군요.;;

날개님, 따라쟁이!=3=3=3

치니님, 그런데 또 우정이나 사랑이란 이름으로 간섭하고 간섭받는 게
행복할 때도 있긴 있어요. 그죠?
인간의 딜레마.^-^;;

올드핸드님, 콩주 아빠도 이제 보니 따라쟁이였구만요.^^

마태우스님, 가끔 어리둥절한 댓글로 사람을 즐겁게 해주시는 분.ㅎㅎ
하늘하늘하고 아른아른한 시스루 블라우스를 보러 들어오셨군요.
그런데 추리닝 입은 로드무비가 헤벌쭉.ㅋㅋ
다정한 댓글 감사 드립니다.^^

꽃양배추님, 그 모임에 대해 구구절절 쓰지 않았는데도 아시는구랴.
분위기가 느껴지죠?
이 작가가 모든 작품을 통하여 말하는 부분이 있어요.
사람 사이의 그 어느 정도 거리란 과연 어느 정도를 말하는 것이냐?
저도 아직 그 고민에서 자유로운 건 아니에요.
미리, 아예, 발을 빼지는 말자, 솔직하자, 정도.
글고보니 미용실 2탄 맞네요.^^

반딧불님, 전 문예지에서 작품을 두어 편 읽어본 정도였어요.
나중에 이전 작품집도 찾아 읽고 싶네요.^^



플레져 2006-06-08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밖에서와 피아간이 참 좋았어요.
제목이 너무 안일한 거 아니야 싶었던 문밖에서가
의외의 소득이었답니다.
바탕체로 해서 그런가 로드무비님의 리뷰 중에
젤로 멋진 것 같아요 ^^;; 내용이야 말할것도 없구요.
씨티오브조이, 그 포스터는 기억나요. 영화를 왜 못봤는지... 흑.

2006-06-08 16: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검둥개 2006-06-08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제가 읽은 소설이 로드무비님의 리뷰에 등장하다니!!!
너무 감동했어요 ^.^
이 단편을 저도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로드무비 2006-06-09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둥개님, 별걸 다 감동하셔요.^ . ^
'문밖에서'가 특히 재미있었어요.

플레져님, 리뷰를 절반 썼다가 다운되어 날려먹는 바람에
'한글'로 썼어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쓰길 잘했네요.
우리가 소설 보는 안목이 있잖습네까!ㅎㅎ
사실 취향의 문제이겠지만.^^

parc 2006-06-09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의 리뷰를 보니 저도 '틈새' 책이 읽고 싶어져요. 문화의 취향이 다름을 인정해주고, 또한 서로의 문화취향에 발을 한발짝 들여놓는것도 사실 괜찮은 일일텐데요..^^
더불어 아직 보지 못한 '시티 오브 조이'도 보고 싶어요;

로드무비 2006-06-10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arc님, 책 귀퉁이를 살짝 접어놓고 싶은 문장들을 많이 만나실 거예요.^,.~
시티 오브 조이에서의 패트릭 스웨이즈 정말 멋졌고요.


balmas 2006-06-11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역시 멋있는 리뷰!
마지막 인용문도 넘 멋있어요. :-)

로드무비 2006-06-12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역시 안목이 있으시다니께유.^,.~
 

어쩌다보니 며칠 전 해물탕 거리 한 팩을 사놓고 김치냉장고에 넣어둔 걸 깜빡했다.
비닐을 벗기니 우럭 토막이며 조개며 곤이며 알이며 이미 싱싱하지 않다.
해물의 그 낯익은 비린내가 콧구멍 속으로 물씬 달려든다.

소쿠리에 담아 두어 번 흔들어 깨끗이 씻고, 맛술로만 부족할 듯해서 찬 소주를 좀 들이붓고,
큰 냄비에 넣었다.
무를 큼직하게 썰어넣고, 양념으로는 된장과 고추장을 1,2작은술 기본으로 해서,
다진마늘과 고춧가루와 후춧가루를 듬뿍 넣어 잘 개어서,  물을 붓고 끓이기 시작했다.

몇 주 전 포천에서 가져온 미나리가 남아 있어 탕이 끓는 동안 다듬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나물을 다듬고 있노라면 오만 가지 잡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 우정, 좋지! 하지만 때로는 헌신짝 같은 것이 우정이야!

--내 인색함에 인색함으로 화답해 오는 그대여, 라는 편지를 쓴 적이 있었지.
그녀는 내게 뭐라고 답장을 했던가?
'실력 이상의 우정이 어쩌구 저쩌구' 했던 것 같은데......

-- 상하기 직전, 혹은 약간 상한 과일이 제일 달고 맛있다고 썼던 시인이 양선희였던가?
그녀는 요즘도 시를 쓰나?

청양고추와 배추를 좀 썰어넣고 팔팔 끓이니 농익은 해물탕 냄새가 온집안에 가득하다.
이걸 온갖 양념 넣고 끓여서 과연 제대로 된 해물탕이 나올 것인지 조금 염려스러웠는데
한 국물 떠먹어 보니 너무나 만족스럽다.

조금만 시들어도, 냄새나도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렸던 날들이 있었다.
이런 맛과 즐거움과 보람을 진작에 좀 알았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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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dan 2006-06-04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저 조금만 시들고 냄새나도 바로 쓰레기통에 버려요. ㅠ.ㅠ

하늘바람 2006-06-04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금 덜 싱싱해도 맛날것같은데요. 아 먹고파라

에로이카 2006-06-04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질문 있습니다. 저는 해물탕 종류를 끓일 때, 배추랑 후추는 안 넣거든요... 로드무비님께서 언급하신 것 중에 없는 것으로는 생강이랑 콩나물을 넣어요... 제가 알기로는 이게 뭐 표준적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배추와 후추를 넣으면 맛이 어떤 지 혹시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오... 침 꼴까닥.. 배 꼬르륵... 언제고 한 번 로드무비님 식으로 해봐야 하겠네요.. ^^

부리 2006-06-04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의 문학적 내공이 잔뜩 들어간 해물탕, 그거 먹으면 저도 리뷰 잘쓸 수 있을까요?^^

Mephistopheles 2006-06-04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체 로드무비님은 해물탕을 끓이시면서까지 저런 심오한 생각을 하시는 걸 보면..
아무리 봐도 밥상위의 철학자 같아 보인다니까요...

건우와 연우 2006-06-04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일찍 모든걸 알면 아마도세월이 알려주는 애틋함이나 아련함은 알기 어려웠겠죠...
근데 해물탕 먹고 싶네요

瑚璉 2006-06-04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 생각도 없이 요리하는 제가 부끄럽습니다요(-.-;).

반딧불,, 2006-06-04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후....
너무 맛나겠어요.
그게 시간이더라구요.
이제는 대충 고쳐서 만들 수 있게 되는 그 시간이라는...;;

검둥개 2006-06-05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상하게 나물을 다듬고 있노라면 오만 가지 잡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전 이상하게 언제나 그래요. 나물도 안 다듬으면서 --.--;;

비로그인 2006-06-05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맛없을거라거나 글이 안재밋다고 한다면 저 빨간 글러브로 한 방 주시려는 의미??^^

날개 2006-06-05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물탕.........!
집에서 할 자신은 없고, 한번 사먹어주겠습니다...흐흐~

니르바나 2006-06-07 0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나물을 다듬을 때는 나물삼매에 빠지시면 어떨까요.
우정삼매에는 헌신짝도 없고 실력도 없어야지요.^^

로드무비 2006-06-07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르바나님, 나물삼매!
그러게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나물 다듬는 걸 싫어해요.
삼매는커녕 오만가지 잡생각이 떠올라서.ㅎㅎ

날개님, 님 사시는 동네도 맛집 많은 걸로 유명하더군요.^^

캐서린님, 그럴 리가!!
제가 쓰는 열쇠고리입니다.
너무 마음에 들어서 기념으로 한 장.ㅎㅎ

검둥개님, 하긴, 항상 오만 가지 잡생각이지요.
언제쯤 쓸만한 생각이 떠올라 줄까요?^^*

반딧불님, 신기하죠?
나이 드는 게 아주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아요.
제법 알뜰해지기도 하는 걸 보면.^^




로드무비 2006-06-07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질님, 저도 아무 생각 없이 요리합니다.
근데 이상하게 나물 다듬을 땐 뜬금없는 생각들이
줄줄이 떠오르더라고요.^^

건우와 연우님, 애틋함, 아련함, 그런 정서를 좀 많이
가지는 게 좋을까요?
별로 선호하지 않는 건데, 요즘 팍팍 늙는다는 게 느껴집니다.;;

메피스토님, 아니 그렇게 말씀하시믄
정말 뭔 증뿔난 생각을 한 것처럼 으쓱해지잖습네까!^^

부리님, 문학적이든 뭐시든 간에 그 내공이라는 것 저도 한번
가져봤으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에로이카님, 콩나물이 없어서 그냥 넣어준 거고요.
후추는 비린내 없애려고.
있는 재료로만 어떻게든 만들려다 보니 항상 전 좀
닥치는 대로 만드는 편이에요.
섬세한 요리와는 거리가 멀지만 맛이 괜찮다고 하니 다행이지요.^^

하늘바람님, 그런데 역시 나중에 데워먹으니 비린내가
더 많이 나더군요.
해물은 그때그때 바로 요리하는 게 제일 중요한 것 같습니다.^^

수단님, 저도 그랬다니까요.
그런데 있는 재료 최대한 끝까지 아껴 활용하는 것도
의외로 재밌네요.
자기 만족감이 그 첫째!^^

마태우스 2006-06-07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와 같이 내공을 키워봅시다.
naegong2.com에 가입하시고 가입비 내시면 됩니다. 휴대폰 결제도 가능합니다^^

로드무비 2006-06-08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청하신 웹사이트의 주소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는데요?ㅋㅋ

OTL 2006-06-14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물탕먹고파 ㅋㅋ
 

올해 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겠다는

지원비가 드디어 한달에 100만원씩

1200만원으로 올랐다, 용렬하게

이 몸도 신청했다. 문득 화곡역 청소부에게

한달 월급이 얼마나 되느냐고

왜 물어보고 싶었을까?

63만원이라고 했다.

시집도 내고 목돈으로 1200만원이나 벌었으니

행복은 역시 능력 있는 사람의

권리지 의무가 아니라고

누군가는 생각할 것이다, 솔직히

배때지가 꼴린다, 내가 못 받았기 때문이다

"모든 예술은 사기다"

백남준의 이 말은 은유도 비유도 아니다

부를 창출하는 게 아니다. 그 청소부는

얼마나 많은 부를 창출하고도 그것밖에 가지지 못하나

예술은 허구를 조작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자각하는 시인만이 시인이라고

단언하기는 그렇지만, 시인들이여

행복은 권리라고 생각하지 마라, 그렇다면 그대는

시인은 못되리라. 행복은 누구나의 의무이다

우리의 행복함은 곧 우리가 선함이요

우리의 불행은 곧 우리가 악하기 때문이라

이러한 행복과 불행의 원리는

화곡전철역에서 하루종일 허리 구부리고 청소하시는

아주머니의 월급이 63만원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 최종천 詩, <창작과 비평> 2006년 여름호




오래 전 용산구 한강로에 있는 모 여성지에 한달에 닷새쯤 나가 품을 판 적이 있다.
특히 만화와 여성잡지 쪽을 잡고 있던 그 유수의 출판사는 편집부 직원들 연봉이 높기로 유명했다.
나야 일감이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희희낙락하는 아르바이트생이었으니 그렇다 치고,
어느 달에 내가 나갈 수 없는 사정이 생겨 문지에서 시집을 내기도 한 젊은 시인에게
내 대신 며칠 나가  일을 할 테냐고 물었더니 하겠다고 한다. 아르바이트비도 얼마 안 되는데......
그런데 시인이니 뭐니 그런 소개는 제발 하지 말아 달라고.

시 잘 쓰기로 유명한 젊은 청년이 돈이 궁하여 여성지 사무실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교정을 보는 게 얼마나 안됐던지 이틀이나 일부러 나가서 밥을 사주었다.
아무데나 빈 책상에 앉아 시무룩한 얼굴로 교정지를 들여다 보다가
내가 나타나면 엄마를 만난 소년 같은 얼굴이 되던 시인.

그런데 어느 날 가만 생각해 보니 그럴 일도 아니었다.
그는 나보다 몇 살 젊기라도 하지, 등단해서 시인이지, 더구나 시 좋다고 소문났지, 
뭐가 안됐다고 어쭙잖은 연민을 품었던 것일까?
더구나 모성애가 너무 강하면 매력적인 여자로 대접도 못 받는 세상인데!

몇 달 뒤 술집에서 그 시인이랑 시인이 되려고 준비중인 어느 출판사 편집부 직원이랑
싸움이 붙었다.
마침 나는 그 둘 사이에 끼어앉아 있다가  둘이 피던 담배를 집어던지며 싸우는 바람에
오른쪽 손등에 가벼운 화상을 입었다.
그 싸움은 시인의 지나친 자부심과 시인이 아닌 자의 열패감이 술에 취해 정면으로 부딪친 것이었다.
그로부터 2년 뒤인가,  담뱃불을 던졌던 인간도 시인으로 등단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실린 시를 읽는데 문득 그때가 떠오른다.
나는 자신이 시를 써서 밥을 벌어먹는 행위를 '정직한 노동'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좋다.
자신을 높은 곳에 두고 의기양양하는 인간은 질색이다. 

이 시는 요즘 내가 한 편씩 올리는 '노동시' 카테고리에  알맞아서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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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da 2006-06-03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6년 여름호네요...63만원도 2006년 시세(?)인가요? 아아아아.....

그나저나 어쭙잖은 연민...ㅋㅋ
우린 너무 마음이 여려서 세상 살기 힘들어요? =3=3=3=3=3=3

릴케 현상 2006-06-03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직한 시라는 생각을 해도...맘에는 안 들더라구요. 문득 김수영이 신동엽의 어느 시를 보며 '민중만 달리게 하고 시인은 가만히 서 있는 시'라고 했던 게 생각나네요. 그래도 추천은 할게요^^=3=3=3

로드무비 2006-06-03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책님, 저도 뭐 쏙 마음에 완전히 드는 시는 아니어요.
하지만 괜찮지 않나요?
김수영이 한 저 말은 직접 노동을 하지 않으면서 노동시를 쓰는
모두에게 해당하겠지요.
추천 감사!ㅎㅎ

꽃양배추님, 우린 너무 마음이 여려서라니, 호호~~
그런데 왜 부리나케 내빼시는 거유?^^


프레이야 2006-06-03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예술은 사기다.. 추천~

mong 2006-06-03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술이니 뭐니 해서 말로만 부추겨 놓지만
실은 그들도 그걸로 밥벌이를 하는 노동자가 맞지요
그나저나 담배불은 왜 던져서 남의 손등에 화상을 입히고 그랬대요!
에이 화상같은 시인들...흥

비로그인 2006-06-03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까 남푠이랑 '예술가' 에 대한 주절거림을 했던 생각이나네요. 감수성이 너무 뛰어나 세상 살기가 힘든 사람' 이라는 생각을 했었죠. 자부심과 열패감이 괴로워서 술깨나 마셨을 그들이 아직도 펜을 잡고 술을 마실것 같은 생각이드네요. 머리와 가슴을 펜에 담으려니 말이죠. 참 힘든길이에요. 예술이란 일.

호홋^^ 마치 해본냥 =3=3

플레져 2006-06-03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용산구 한강로... 어딘지 알 것 같아요 ㅎㅎ
나중에 창비, 빌려주삼~ ^^

이리스 2006-06-03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친구가 그 잡지사 기자인데..연봉이 그렇게 높지 않은데요. 연봉 높기로 치자면 그곳이 아니고 시청에 있는 모 잡지사 겸 출판사겠죠. --;

로드무비 2006-06-04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낡은구두님, 연봉이라는 게 상대적으로 느껴지는 것이기도 하니깐요.ㅎㅎ
내 연수입(수입이랄 것도 없는)과 비교했을 때는 엄청 높게 느껴졌나 보죠.;;

플레져님, 제가 묶어두고 있는 책들 조만간 보내드리겠습니다.
여름호에 김윤영 씨 소설이 하나 실렸는데 읽고 기절하는 줄 알았어요.^^

캐서린님, 남푠이랑 그런 얘기도 하시는군요.
열패감조차 없는 제가 이상한 인간이었을까요?
문득문득 캐서린님에게서 그 감수성이란 게 느껴지는데.=3=3=3

mong님, 그나마 그 화상들과도 완전히 소식이 끊겼네요.^^

새벽별님, 님의 말씀이 오묘하십니다.^^

배혜경님, 앗쌀하십니다.^^

치유 2006-06-05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참을 들여다 보다 추천만 누르고 갑니다..

릴케 현상 2006-06-06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지만 괜찮'네요=3=3=3

로드무비 2006-06-07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책님, 호호호~~~

배꽃님, 고맙습니다.^^
 
용은 잠들다
미야베 미유키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30년 만의 대형 태풍'이라는 기상 예보관의 말을 흘려듣고 고향집에서 나와
도쿄로 돌아가기 위해 차를 몰던 잡지사 기자 고사카.
차창을 뚫고 들이닥칠 듯한 폭풍우의 위세에 목숨의 위험을 느끼고
잠시 갓길에 차를 대려는 중 이리 비틀 저리 비틀 자전거를 끌고 씨름하는 소년을 만난다.

마치 영화로 그 장면을 보는 듯 요란한 빗소리와 박진감 넘치는 장면으로 이 소설은 시작되는데.
두 사람은 고속도로의 열려진 맨홀 뚜껑과 그 주변에 굴러다니는 아동용 노란우산을 발견한다.
이렇게 가슴 철렁한 도입부가 또 있을까!
거기다 소년 신지는 알고봤더니 남의 마음을 읽는 사이킥(Psychic)이다.
16, 17세의 감수성 예민한 소년이 사람들의 과거와 숨겨진 마음을 읽는다니,
이건 폭풍우 몰아치는 밤의 고속도로보다 더 무시무시한 설정이다.

--나처럼 어리고 아직 세상물정도 잘 모르는데, 보고 싶지도 않고 듣고 싶지도 않은 것을
알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났다면 어떻게 할 거죠? 보이잖아요? 들리잖아요?
그렇다면, 그렇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보고 들은 것을 어떻게든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고사카 씨라면 어떻게 할까요?(103쪽)


추리소설을 많이 읽지는 않았다.
몇 달 전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를 아주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리뷰 쓸 생각은 못했다.
게임에 이긴 상대방이 최대한 힘을 모아 내려친 뿅망치에  머리통을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랄까.
아무리 정교한 장치가 있든 놀랄만한 반전이 있든  추리소설은 내게 "이래도? 이래도?"하고
충격과 재미를 강요하는 뿅망치 같았던 것.

그런데 미야베 미유키의 <용은 잠들다>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그 사건을 풀어나가는
일반적인 추리물과는 좀 달라 보인다.

폭풍우 치는 날, 도로의 맨홀 뚜껑을 아무 생각 없이 열어놓고 가버린 차의 운전자들처럼,
아내와 다투고 난 후 베란다에 나와 담배를 한 대 피워물다가 무심코 눈에 띈 화분을
아래로 던져 지나가는 사람을 죽게 만드는 인간의 무신경한 얼굴이 있다.
내가 바로 그 무심한 행동의 주인일 수 있고,  어느 순간 그 앞을 지나다
화분을 맞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원하지도 않는 능력을 자신도 모르게 갖게 되어 사람의 무시무시하고 추악한 면들을
보고 듣지 않을 수 없는 두 소년의 고뇌와 갈등에 이르면......
내가 봐버린  것들을 외면할 것인가, 아니면 얼마만큼 행동할 것인가.

폭풍우 치는 밤에 시작된 사건과 그 사건을 풀어나가는 열쇠들보다 내 마음을 끈 것은
그런 심리적인 측면과 인간의 선택 부문이었으니, 이 소설은 내게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재미있는 추리소설로 기억될 것 같지는 않다.

이 책의 등장인물들 중 제일 인상 깊었던 건 고사쿠와 결혼할 뻔했던 사에코라는 여성이다.
아니, 그 여성이라기보다는 그녀가 펼쳐보였던 확신이 가득찬 인생의 청사진.
그러한 것을 한 번도 가져보지 않아서일까?
그림으로 치면 '맨홀'과 '청사진'이라는 두 개의 오브제가 잘 어울리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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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이카 2006-06-03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리소설인가요, 납량특집 공포소설인가요? 독서폭이 정말 넓은시네요... 그리고 무슨 영화 예고편처럼, 내용은 전혀 보여주지 않으면서 호기심 유발시키는... 정말 대단하십니다..

로드무비 2006-06-03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로이카님, 제 독서 폭은 사실 무지 좁고요,
리뷰 쓰겠다고 자원해서 얻어 읽은 책이에요.
며칠 전에 읽었는데 이제야 씁니다.
어떤 부분 관심 가는 데도 있고 재미있었어요.^^

플레져 2006-06-03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맨홀과 청사진, 절묘하게 어울리는데요? ^^
섬뜩한 느낌이 먼저...

로드무비 2006-06-03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추리소설을 많이 안 읽어봤지만 추리소설로는
좀 약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초능력보다도 그걸 가진 소년들의 고뇌가 제겐 섬뜩했고요.
제목을 생각하니 적당한 게 안 떠올라 그냥 주워섬긴 거랍니다. 헤헤~

sudan 2006-06-03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주워섬기신 제목이라기엔 너무나 그럴 듯해요. 오옷. 공포 영화 예고편 마냥 섬뜩한 분위기를 잔뜩 느끼게 해주시는데요?

로드무비 2006-06-03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단님, 제가 좀 호객행위에 재조가 있습니다.ㅎㅎ
그건 이미 아시죠?^,.~

mong 2006-06-03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추리쪽도 좋아요~~
(꼬시는 중...ㅎㅎ)

로드무비 2006-06-04 0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ong님, 너무 깊이 빠질까봐 걱정이예유.^^
 
소풍
성석제 지음, 김경호 그림 / 창비 / 2006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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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맛있는 음식이라면 환장을 하는 나는 어젯밤 도서전시회 준비 때문에
코엑스에 가 있다는 남편의 말에 반색을 하며  1층에 오므라이스를 그렇게 잘하는 집이 있다는데 
알아보고 1인분 사오라고 부탁했다.
여직원들에게 물어보고 가게 이름(오므토 토마토)을 알아낸 남편이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종류가 많다는데 뭘로 사갈까?

--새우와 해산물 들어간 종류!

어제 저녁 우리 집 메뉴는 전날 먹고 남은 감자탕 국물이었다.
선거일에 주소지가 서울로 돼 있어 연남동에 간다는 동생 부부에게 거기 살 때
단골로 가던 '송가네 감자탕'을 사오라고 시켰던 것.
투표를 마친 동생네 가족이 감자탕을 사와서 실컷 먹고 남은 국물을 어제 저녁
주요리(!)로 떠억하니 내놓았으니, 나의 뻔뻔함도 정말 극에 달한다.

밤 열 시경에 남편이 오므라이스를 사들고 돌아왔다.
새우와 홍합, 주꾸미 등이 제법 풍성하게 든 크림소스는 따로,
깔끔한 도시락 속의 오므라이스는 노란 달걀지단이 찢어지지도 않고 봉긋하니 볶은 밥을
잘 감싸고 있었다.

--절반은 남겨놨다가 아침에 아이들 먹여야지.

나는 인심 쓰듯 반을 덜어내고 접시에 담아 전자레인지에 잠깐 돌렸다.
흰우유를 먹으면 소화가 잘 안되고 치즈나 버터라면 잘색인 내 입에는
그 서양식 소스를 덮어쓴 오므토 토마토의 해산물 오므라이스가 썩 맛있는 편이 아니었다.
대학 앞 분식집의 오므라이스가 내 입에는 훨씬 맛있게 느껴지니......
아무튼, 유명한 맛집의 오므라이스를 마침내 맛봤다는 만족감으로
어제는 달디단 잠을 잤다.

오므라이스와 감자탕에 필 받아, 오늘 아침 마침 눈에 띈  성석제의 음식 산문집 <소풍>을 읽었다.
제주도 남쪽의 표선면 면사무소 앞 버스정류장 근처 한 블록집,
그 흔한 간판도 하나 없이 가정집에서 국수를 말아내는데, 주인장 이름이 '춘자'여서
단골들 사이에는 '춘자싸롱'으로 통한다고 한다.
어느 날인가는 춘자국수의 국물에 관한 '쎄미나'가 열려 제주도에서만 나는 어떤 물고기 새끼를
국물 내는 데 사용한다는 비밀을 밝혀냈다고 한다.

두부니 묵밥이니 냉면이니 하는 가지가지 음식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도라무깡을 엎어놓은 시장통의 허름한 식당이나 선술집을 미치게 사랑하는  나에게는,
그 식당들의 시금털털하고 구수한 냄새와 담배연기와 잡담이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듯해
이 책의 장면장면들이 너무나 정겨웠다.
직접 만든 두부를 한 모에 3500원에 판다는 경기도의 한 원조 묵밥집의 주인장의 얼굴이
궁금하질 않나.

'그 얼굴은 자신의 인생을 살아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얼굴이었다'.(138쪽)

한사코 소주병을 달라고 하더니 마침내 낚아채 간  생태찌개집 노파의 말은 또
얼마나 당당하고 흥겨운가!

"술이란 지집이 따러야 맛이제. 자,  받어, 이 잔."(79쪽)

각설하고, 춘자싸롱 국수가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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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2006-06-02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요~오늘 점심은 국수로 할까요?

waits 2006-06-02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이웃으로 살면서 친한 척 하면 가끔 얻어먹을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그나마 식탐(?)은 별로 없는 걸 다행이라 여깁니다...^^(야식배달 남편님과 반 떼놓는 모정에 추천을~)

Mephistopheles 2006-06-02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리봐도 로드무비님은 알라딘의 `런치의 여왕'이라니까요~~!!
여왕만세..!!

blowup 2006-06-02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굉장히 재미있을 것 같은데도, 별로 당기지 않는 책이에요. 성석제의 그 놀라운 이야기들이 제겐 대충 그래요.
-춘자살롱이라는 프렌치 레스토랑도 있다는데요.^-^(그런대로 먹히는 키치인 모양입니다.)
-저도 그랬어요. 오므라이스 전문점들의 맛이 의외로 패스트푸드 같았어요.

mong 2006-06-02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정말 맛집도 맛집이지만
만들어 주시는 주인 아주머니 얼굴이 궁금해 지는군요~

2006-06-02 1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6-06-02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ong님, 식당 주인 얼굴이 궁금하게 만드는 것도 이 작가의 역량이죠.^^

namu님, 너무 재밌어서 단숨에 읽었어요.
춘자살롱은 언젠가 또 어느 글에서 읽은 적이 있는데 말입니다.
성석제 씨의 글들을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이 책과 그는
궁합이 잘 맞더군요.
오므라이스도 그렇고 전 역시나 오래되고 꾀죄죄한 식당 음식이 좋아요.
찌그러진 양푼이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전생이 의심스러울 정도랍니다.^^

메피스토님, 책장수님이 어디에 있다 하는 전화를 받으면
그 부근에서 사오라고 할 음식 뭐 없을까 짱구를 굴립니다.
제가 생각해도 너무 귀여워요. 호호~~

나어릴때님, 식탐이 없으시다니 부럽사옵니다.
전 싸고 맛있는 음식을 좋아합니다.
가격 면에서 그나마 다행이죠.
직접 사들고 나르는 책장수님은 좀 괴로울 거예요.^^;;

진주님, 아직 점심을 안 드셨어요?
국수, 너무 좋아요.
맛나게 드세요.^^

sandcat 2006-06-02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 근처 롯데슈퍼에서 멸치국수를 천 원에 팝니다. 국수 사리에 양념장, 김가루, 김치만 얹어, 자리도 없이 서서 먹어야 하는 덴데 맛은 그럭저럭 괜찮더라구요. 근데 기분이 이상하데요. 대형할인마트에서 먹는 양은냄비 멸치국수라니.. 로드무비 님이라면 아무리 국수 맛이 그럴 듯해도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을지도.

2006-06-02 17: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니르바나 2006-06-02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사랑스러운 분이랑 가정을 꾸리셨네요.
그 분을 코엑스에서 오늘부터 열리는 서울국제도서전에 가면 뵐 수 있겠군요.^^

로드무비 2006-06-02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르바나님, 호호, 그렇게 말씀하시니 부끄럽사옵니다.
게으르다는 면에서 죽이 맞는 바람에!
이상한 결합도 다 있지요?^^

추천만 하고 님, 그러시면 섭하죠.
가끔 모습 좀 보여주세요.^^

샌드캣님, 양은냄비 멸치국수 사정없이 땡기는데요?
단돈 천 원이라니, 일부러라도 한 번 가봐야겠는 걸요.^^

야클 2006-06-02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춘자싸롱에서 커피도 아니고 국수라니요. 아참, '국수'하니까 또 부담되네. -_-+

nada 2006-06-02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허름한 식당과 선술집 미치게 사랑합니다...ㅋㅋ 닭발과 순대국두요. 양푼이를 좋아하셔서 전생이 의심스러우시다구요? 전 하도 입맛이 촌스러워 해방둥이가 아닌가 착각할 때도 있답니다..ㅎㅎ

에로이카 2006-06-02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연남동 일대가 쏠솔하게 맛있는 집들이 많은 것 같아요. 순대국집들도 그렇고, 무슨 산채비빔밥집도 그렇고...
- "도라무깡을 엎어놓은 시장통의 허름한 식당이나 선술집"... 아.... 정밀 미치도록 그립습니다... 그나마 지금은 여름이니 좀 덜하네요...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코로는 맛있는 냄새가, 안경으로는 김이 덥석 서리던...

로드무비 2006-06-03 0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로이카님, 잘 아시는군요. 연남동 기사식당 골목 분위기.
그런데 제가 아주 오래 전 떠듬떠듬 옮겨 쓴 적 있는 전영경 시인의 시들
('오래된 수첩' 카테고리) 아세요?
그놈의 도라무깡이 어쩌구 하는 시도 있었는데.
안 읽으셨다면 보여드릴게요.
문을 열면 냄새와 훈김이 확 달려드는 그 분위기를 잘 아시는 것 같아서.^^

꽃양배추님, ㅋㅋ 전 순대국은 순대만 넣어달라고 해서 먹어요.
그 이상하게 뻐등뻐등하고 흐물흐물한 것들이 싫더라고요.
내장탕 이런 것도 못 먹고.
미식가는 못됩니다.
꽃양배추님이 해방둥이라면 전 이미 이 세상에 없겠군요.
우스워 죽겠습니다요.^^

야클님, 사방에 매복하고 있는 국수 그릇들입니까?=3=3=3


에로이카 2006-06-03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로드무비님. 보고 싶어요. 그런데 어떻게 해야 볼 수 있지요? '오래된 수첩' 카테고리가 지금은 안 보이네요..

로드무비 2006-06-04 0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로이카님, 마음에 드셨다고요?
그럴 줄 알았어요.^^

춘자 사랑 2010-07-13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춘자국수를 먹어본 일 인입니다. 죽여주는 맛입니다. 간판도 없는 허름한 가게에 탁자라고는 2개밖에 없는..그야말로 구멍 가게지요. 가게 안은 멸치 우려내는 냄새로 가득차서 한 치의 틈도 없어요. 가면 방 안에서 춘자 아줌마가 느릿느릿 나오셔서 국수를 삶기 시작하십니다. (아, 멸치 육수는 휴대용 가스렌지에서 계속 우러나고 있고요.) 고명이니 이런 거? 없습니다. 그냥 고춧가루에 깨소금. 채썬 당근 정도? 그게 제주도 국수이지요. 하지만 그 맛은 고급 호텔의 어느 우동과도 견줄 수 없는 맛입니다. 여기는 꽤 유명한 곳이라 손님이 많아요. 그래서 자리가 모자랄 때가 많아요. 그럴 때는 먹고 있던 사람들도 기다란 테이블 구석으로 자리를 옮겨 주죠. 다른 사람들이 합석을 할 수 있게요. 그러면 두 팀, 세 팀이 한 테이블에 앉게 됩니다. 이건 아줌마가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손님들이 자발적으로 하는 겁니다. 정말 멋진 곳이죠? 제주도 오게 되면 일부로라도 한 번 꼭 오셔서 드셔보세요. 아! 원래 2000원이었는데 얼마 전 올라서 2500원 입니다~^^ 곱배기는 3000원이고요. 콩국수도 있어요.

로드무비 2010-07-13 14:15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입에 침이 막 고이네요.
제주도 가면 머무는 동안 매일 곱배기로 먹어야겠습니다.
비빔국수는 없나 몰라요.^^

춘자 아줌마가 방안에서 느릿느릿 나오셔서 국수를 삶기 시작하신다니
생생한 묘사!
당장이라도 가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