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 사이즈 축구화를 주문했다.
아이의 성화에 못 이겨서다.
남자친구의 엄마가 동네에 곧 어린이 축구단이 생기는데 주하도 
참가시키는 게 어떠냐고 하여 물어봤더니 좋다고 난리였다.
그런데 자원한 여자아이는 딸아이 달랑 하나.
주하는 그래도 상관없다 하는데 엄마들이 의논 끝에 불편하다고 제외시켰다.
얼마나 서운하던지.

어제 리뷰 쓰다 생각나서 대강 훑어본  1978년도에 나온 <반야심경 강의>에 보면,

--남성도 여성도 분별치 말라.
부처님도 보살님도 여기서 탄생하신다.

라는 금언이 떠억하니 나와 있다.
책이 나온 지 30년이 지났지만 실상을 보면 남녀차별, 달라진 것이 별로 없다.
축구를 좋아하고 곧잘 공을 차는데,  여자 멤버 하나가 끼면 불편하다고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추석이라고 부산 이모가 예쁜 옷을 사보내고, 올케는 키티 반지를 선물했지만
그런 선물에 아이는 덤덤한 반응을 보인다.
레이스옷이나 미장원은 질색팔색이다.
갖고 싶은 건 오로지 운동화,  그 중에서도 요즘은 축구화다.

함께 축구할 사람도 없는데 축구화는 사서 뭐할 것이냐 물었더니
우리 동네 조기축구회의 골키퍼로 눈부신 활약중(  '')인 아빠가 
시간 날 때마다 가르쳐주기로 했단다.
축구단에 가입하지 못하여 서운해 하는 걸 보고 위로차 한마디 던졌나 본데
아이는 그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아무튼 아이와 함께 한 쇼핑몰에서 축구화와 함께 운동화 한 켤레를 어젯밤 주문했다.
얼마전까지 170을 신었는데 어느새 180, 그리고 지금은 180도 끼어서 못 신는다.
할 수 없이 지금도 샌들을 신고 다녀서 아예 넉넉한 사이즈로 주문했다.
청바지 두 벌도 함께.
바지들이 어느새 무릎 한 뼘 아래까지 깡충해서 입을 게 없다.
(그래봤자 반에서 두 번째 작은 키.  다른 아이들은 뭐 안 자라고 가만 있나?!))

얼마 전엔 태권도 국기원 검은띠도 땄다.
'문'보다 '무'에 소질이 있는 것 같은 딸아이의 장래가 궁금하면서도 대견스럽기 그지없다.





몇 달 전만 해도 아기였는데......엄마 눈에는.






댓글(35)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urblue 2006-10-11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 나빠요, 여자아이 하나라고 제외시키다니.
어릴 적에 동생은 유도며 검도며 배웠는데, 아빠가 저는 여자아이라 안된다셨어요. 그때부터 그거 맺혀있었거든요. 주하를 비롯한 요즘 아이들은 그런 일 없이 자랐으면 좋겠는데 여전히 어렵군요.

Mephistopheles 2006-10-11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자를 더 차별하는 건 오히려 남자보다 여자들...
이라는 생각이 아주 잠깐 들었습니다.
성별은 틀리지만....
어제 본 다큐멘터리 추성훈 혹은 아키야마 이야기가 생각나는군요...

플레져 2006-10-11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린이 축구단이 아니라 어머니 축구단인가봐요? 참나.
무에 소질있는 정주하 어린이,
서재 언니(?)들이랑 축구단 하나 만들까나...^^;;

로드무비 2006-10-11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문' 쪽도 좀 거시기하면 좋으련만.ㅎㅎ
알라딘 서재 어린이들 축구단 추진해 주셔용.
님이 나서서...^^

따우님, ㅠ ,. ㅠ

메피스토님, 하긴 그런 면도 없다곤 못하겠지만,
아직 대한민국은 철저한 남성중심 국가입니다.=3=3=3

블루님, 그래서 전 아낌없이 밀어주려고요.
님도 그런 좌절이 있었다니!

달콤한책 2006-10-11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로드무비님의 따님은 언제나 저를 놀래킵니다...축구화라!
아이 도장에서도 같은 반 여자 아이가 있는데, 무지 잘합니다. 기합도 얼마나 크게 잘 지르는지 공개심사에서 엄마들이 환호성을 질러 주었지여.

프레이야 2006-10-11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주하 멋져요. 힘내라~

hnine 2006-10-11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자 아이가 있어서 불편할게 무언지 갸우뚱~
운동에 소질이 있다는 것이 다른 쪽에 소질이 없다는 것과 같지는 않겠지요.
어떤 분야든, 좋아하고 잘 하는 분야가 확연히 눈에 보일때 저는 무슨 수수께끼의 실마리를 찾은 듯이 신나던데요. 아이를 키우는 즐거움중의 하나이기도 하고요.

blowup 2006-10-11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하가 몸의 이치를 먼저 깨닫고, 마음의 이치를 깨닫는 사람이라니까요.
우리들의 꿈이로군요.
가끔씩 주하가 던지는 말이 얼마나 예사롭지 않던가요.
주하가 계속 그렇게 자라나 주어야 할 텐데.

BRINY 2006-10-11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아들들 키워서 뭐하자는 건지요, 원!

건우와 연우 2006-10-11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아침 출근길에 연우도 축구시켜달라고 하더군요. 너랑 같이할 동료가 쉽게 나타날까했더니 초등학교입학때까지 줄기차게 찾아보겠다면서요. 아직까지도 온존하는 남녀차별의 물결속으로 주하도 연우도 발을 담그기 시작하는군요. 아이들이 끝까지 상처받아도 꿋꿋하길 빌어요. 대견하고 안쓰러운 딸들....

2006-10-11 16: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hika 2006-10-11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 그 엄마들 참.... 진짜 '어머니 축구단'인거 아녜요? ㅡ,.ㅡ
제 조카도 유일하게 학교에서 혼자만 여자였어요. 물론 정식은 안되는거겠지만- 왜 축구부도 돈 많이 들어가잖아요. 애들 운동복에 간식에....
조카는 연습 좀 하고 경기에 가끔 투입되고 (^^) 나름대로 즐기면서 축구를 했어요. 학교 축구부 엄마들이 더 많이 배려해주고, 축구부 남자애들도 울 조카가 그라운드를 누비면서 맹활약을 해서 자기들이 경기에 이긴다고 칭찬해주고 그런 분위기였답니다. 어릴땐 다들 그러고 놀게 해 줘야하는데...쯥~

그나저나 정말 주하 많이 컸어요. ^^
조기 축구단에서의 맹활약을 기대합지요.ㅎㅎㅎ

국경을넘어 2006-10-11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하가 벌써 저리 커버렸네요. 축구 열심히 하길 바랍니다. 머스마들 다리 몇 개 부러뜨릴 정도로 열씨미...(너무 과격했나. 저는 한번 부러진 적이 있어서) ^^*

ceylontea 2006-10-11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런... 그렇게 남녀 차별해서 키워서 어떻게 할라구 그런답니까?
여자아이가 있어서 불편한 것이 무엇인지 저도 납득이 가지 않아요...
아직은... 대한민국이 남성중심의 나라인 거 인정합니다..

마노아 2006-10-11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따님이셔요. 계속 소신 있게 키워주세요. 나라의 재원이 될 거야요. 울 학교에도 축구소녀 있는데, 전 6개월 동안 남자아인 줄 알았답니다. 아, 그렇게 보이는 것은 좀 곤란해요^^;;; 예뻐서 그렇게 보일 리는 없을 것 같지만...^^;;;;

waits 2006-10-11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쁜 주하다! 얼마 전에 우연히 발견하고서, 주하 생각이 났었답니다. 이거라도 보고 힘내라고 전해주세요. ^^ 그리고 언제가 되더라도 제가 주하한테 선물할테니, 혹시나 사지마세요. 너무 시덥잖기는 하지만요...--;;;


날개 2006-10-11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엥? 이게 뭔 소리여요! 요즘 세대 엄마들이 어찌 그런 차별을....!!!
성재도 축구클럽 다니고 있는데, 여자아이도 하나 있어요.. 초등학생들 시합에는 남녀 구분없이 참가가능하거든요.. 잘하기만 하면 되지 여자고 남자인게 뭔 상관이라고..ㅡ.ㅡ 대체 뭐가 불편하다는건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날개 2006-10-11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추천은 주하에게.......!

울보 2006-10-11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요즘 여자 아이들도 많이 축구하던데,
주하가 많이 속상했겠네요,
주하야,,,,,
너무 속상해하지마 힘내,,멋진 주하 아빠랑 축구 많이 해요,,

서연사랑 2006-10-11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주하! 축구화 신고 운동장을 누비는 모습....완전 사랑스러울거예요^^
(서연이도 신발 사이즈는 200....왕발이 서연이...)

sooninara 2006-10-11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하가 너무 이뻐서..남친들이 태클걸기가 힘든거 아닐까요?
주하야 새축구화 신고 공 뻥뻥 차렴.
지금 축구 비긴거 보고 열 받았는데 주하 축구화 이야기 읽고 웃고갑니다.

끼사스 2006-10-12 0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hooting like 주하! ^^

2006-10-12 0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산사춘 2006-10-12 0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씨, 열받아요. 정체도 불분명한 '불편'함이 이유랍시고 대다니...
성차가 있다고 차별받아도 안되겄지만, 그 나이 때는 성차도 아예 없잖아요.
외국갔을 때 만났던 집 보니까 세 딸들이 다 축구클럽서 활동하던데...
주하선수, 미안해요. 대신 더 씩씩하게!

하늘바람 2006-10-12 0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젠 소녀네요^^ 주하.

sandcat 2006-10-12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십자드라이버에 집착하는 가온에게 냉큼 공구놀이 장난감을 사주었어요. 연두색 조끼와 햇빛, 색안경을 낀 주하의 이 모습이 오래 기억날 듯.

해리포터7 2006-10-12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은띠까지 딴 이뿐 주하..어여 그 성의 장벽을 걷어내라고 아줌마들에게 성토하셔요..주하야 힘내라~

2006-10-14 00: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6-10-14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을 닫으신 분, 인사 남겨 주셔서 고맙습니다.
섭섭하네요. 요즘 님의 방에 통 못 들렀지만.
렘브란트의 그림엽서를 보면 늘 님이 생각날 겁니다.
건강하시고 항상 평안하시길.
저도 고마웠어요.
(제가 소중한 걸 눈 뻔히 뜨고 또 놓친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로드무비 2006-10-15 0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리포터7 님, 누군가를 성토하려는 건 아니었고 축구화 샀다고
자랑하는 페이퍼인데 이상하게 흘렀네요.
쪼까 서운하긴 했나 봅니다요.^^

샌드캣님, 공구놀이 장난감이라니 괜히 반갑네요.
가온이와 주하는 엄마들하고 달리 좀 유능할 것 같지 않습니까?!=3=3=3

하늘바람님, 네! 어디로 보나 소녀랍니다.^^
저 사진은 지난 겨울에 찍은 것이어요.

산사춘 님, 어쩌면 우리가 곧 이사를 갈 것이라는 사실 때문인지도 모르겠네요.
'불편하다'는 말을 분명 전해 듣긴 했는데......
전학 가는 학교에 여학생도 함께 뛰는 축구부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기묘한 느낌 님, 여학생들이 하키하고 야구하고 축구하고
그러다 연애하고......부분에서 제 가슴이 다 설렙니다.
로커를 열면 누군가 몰래 끼워 넣은 연애편지가 들어있고요.^^
아이는 처음엔 섭섭해 했지만 아빠랑 축구를 할 생각에
꿈에 부풀어 있습니다.
님이 남겨주신 글 보고 무지 반가웠어요.^^

끼사스님, 글고보니,< 슈팅 라이크 베컴>을 보여줘야겠어요.
저 참 재밌게 본 영화거든요. 야호!^^

수니나라님, 요즘 우리 대표선수들 슬럼픈가봐요.;;
주하가 예뻐서 태클을 못 걸까봐라니, 정말 그럴지도.=3=3=3

서연사랑님, 와, 오랜만입니다.
그런데 서연이 벌써 200 신는다고요? 흐미~
며칠 전 딸기 실내화 195를 사왔는데 훌러덩 잘 벗겨지는군요.
그런데 200을 주문했으니, 배송중인 신발들이 너무 클까봐
슬며시 걱정이 됩니다.^^

울보님, 책장수님이 아이의 기대에 잘 부응을 해얄텐데요.^^







로드무비 2006-10-15 0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 성재는 야구복 입은 모습이 더 잘 상상이 되는데.
하긴 축구나 야구나 뭔들 못하겠습니까!
님 사는 동네로 이사가고 싶군요.
추천 감사!^^


평택, 나어릴때 님, 하하~ 돼갈녀 주하에게 어울리는 선물이군요.
보여주면 저녁에 또 갈비 먹자 할 텐데......
그래도 보여줄게요.^^

마노아님, 그 축구소녀 얼굴이 보고싶네요.
주하가 유니폼을 입고 축구화를 신고 그라운드를 달리는 모습
저도 보고 싶습니다.^^

실론티님, 저 엊그제 외출했다가 자판기에서 실론티 꺼내
마셨어요.ㅎㅎ
도처에 서재 님들이 계시더군요.
(남녀 차별 예전에 비해 많이 없어졌다곤 하나 저도 아직 멀었다고 생각합니다.)

폐인촌님, 경기하다가 약간의 부상 입는 것, 참 멋져 보이던데.
주하는 무릎이 성할 때가 없답니다.
요즘은 머스마들 다리가 더 가늘고 약하더군요.;;

아주아주모테치카님, 우리 주하도 치카님 조카님처럼만
그라운드를 누벼봤음 좋겠어요.
기회가 꼭 오겠죠?^^

건우와 연우님, 우와! 연우도요?
연우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어쩜 그리 사랑스럽답니까?!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기만 바랍니다.
처음부터 기회조차 차단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죠.

브리니님, 아들들이야 사실 뭔 죄가 있겠습니까.
어른들 선에서 의논된 일 같은데요.^^;

namu 님, 몸의 이치, 마음의 이치라니 너무 멋진 말이잖아요.ㅎㅎ
우리들의 꿈!
맞습니다.
namu 님이 어떤 소녀였을지 궁금합니다.^^

hnine님, 어제도 피아노와 태권도 수업 중에서 피아노를 포기하더군요.
감기에 걸려 하루 쉬자고 했더니 부득부득 도복을 입고 가더라고요.
태권도와 바둑이 제일 좋다니 앞으로도 계속 하게 하려고요.

배혜경님, 네!^^

달콤한책님, 태권도장에서 가끔 부모들 수업 참관을 시켜요.
아이가 우렁차게 기합을 넣고 공중발차기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가슴이 지릿지릿합니다.^^



푸하 2006-10-15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100002 오오 10만^^;

로드무비 2006-10-16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님, 그러네요, 벌써 10만!^^

2006-10-16 1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6-10-16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책을 나갔다는 님, 잘 도착했군요.
아이들이 좋아했다니 저도 흐뭇합니다.
입던 것 작아진 것 보냈으니 눈곱만큼도 부담 안 느끼셔도 되고요.
천천히 읽고 돌려주시기 바랍니다.^^
 
법구경 - 불타의 게송
등하 지음 / 법공양 / 2006년 6월
평점 :
품절


대학 1학년 때 미팅에서 만난 남학생과 몇 개월 후 우연히 남포동 지하도에서
마주친 날, 그 날 난생 처음으로 맥주를 마셨다는 얘길  어느 페이퍼에 쓴 적 있다.
그날 헤어질 때 내 손에 쥐어준 조그만 책자가 <반야심경 강의>.
영산법화사 출판부에서 나온 것인데 올 여름 휴가 때 부산 친정에 갔더니 눈에 띄어
가져왔다.

조금 전 책의 맨 뒷장을 펴보니 그의 이름과 내 이름이 적혀 있고, 처음 보는 전화번호가 있다.
49국이면 오오래 전의 영도 쪽 국번.
영도에서 쌀집을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전화번호를 적어준 줄은 몰랐다.
아니면 전화번호를 알고 있었으면서  나는 그 사실을 감쪽같이 머릿속에서 지웠던 것일까?
먼훗날의 추억을 위해?

살면서 더욱 절실히 깨닫는 건 사람 마음의 간사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제 열광하던 것이 오늘 시들해지고, 또 어떤 좋았던 관계는  머쓱해진다.
어떤 때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자신에게서 멋들어지게 속아넘어 가기도 한다.
추억을 자신의 편의대로 위조하고, 불편한 기억은 삭제한다.
의식적으로 하는 일이 아니다.
이 모든 일은 자신도 모르게 전 인생에 걸쳐 은밀하게 진행된다.
그래서 사람은 타인을 온전히 믿을 수 없다.
자기자신도 믿지 못하는데 어떻게 남을 믿을 수 있겠는가.

등하 스님이 다시 옮기고 펴낸 <법구경>을 읽었다.
오래 전 현암사 판, 김달진 시인의 편역으로 읽을 땐 불타의 게송이라기보다
허무시의 연장으로 읽었었다.
아무리 좋은 뜻의 글이라도 문장이 좀 이상하다 싶으면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 삿된 소견이라니!

최근에 나온 등하 스님의 <법구경>은 '여래의 뜻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고 한다.
일반 대중이 이해하기 쉽도록 진리의 말씀을 무조건 쉽게 풀어쓰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나는 이 책을 침대 머리맡에 두고 아침에 잠에서 깨었을 때, 또 잠자리에 들기 전 성경처럼
몇 장씩 읽었다.
내키는 대로......

그런데 이 책에서는  '무명'과 '피안'이 새삼스럽게도 생전 처음 보는 단어처럼 내게 다가왔다.

無明 : 중생이 겪는 생사의 괴로움의 최종적인 원인이 바로 이 무명,
존재의 실상에 대한 무지이다.(334쪽 해설)

彼岸 : 삼계를 고해에 비유했을 때, 이 생사의 고통바다를 건너 도달한 저쪽 기슭
곧, 열반을 일컫는 말이다.(338쪽 해설)

아무리 주의를 기울인다고는 해도  어떤 책을 읽을 때 자의적으로 해석하게 된다.
분별심이라는 것을  버리려 해도 호오(好惡)의 감정은 여전히 남는다.
생각을 너무 많이 하면 행동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어색해진다.
차라리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고, 나중에 반성할 건 반성하지 뭐.

나의 시시한 깨달음은 여기까지.
그래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엇인가는 남는다. 소금처럼.....




















 

댓글(16)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blowup 2006-10-10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좋군요. 읽고 나니 주변이 조금 어둑해진 것 같습니다.
간사함. 그런 걸 느낄 때마다, 이렇게 저렇게 떠들고 다닌 소리들. 다 물리고 싶습니다.

하루(春) 2006-10-10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 자신에게 속는다는 말, 아주 진한 슬픔(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이 몰려오는 것 같네요.

2006-10-10 2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mong 2006-10-10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사할때 간사해 지더라도 오늘은 또 내 마음 가는대로 사는거죠...흐

waits 2006-10-11 0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존재의 실상에 대한 무지... 와닿네요.

건우와 연우 2006-10-11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금의 부담이 전화번호는 잊으라 시켰었나요...
시간이 지나니 그마저 추억이 되어 로드무비님의 법구경리뷰를 읽을 기회를 주는군요.^^
법구경구절속에서 소금같은 무엇을 담아내시는 로드님처럼, 어느순간 저도 그렇게 고요히 글속에서 무언가를 받아낼수 있는 그릇이 되고 싶어요.
저는 아무래도 책보다 로드무비님의 리뷰가 더 좋으니 참.....

2006-10-11 1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자림 2006-10-11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양파 껍질을 벗겨 내었을 때 전혀 새로운 색깔의 양파를 보듯이 마음 속 상념들을 한꺼풀 한꺼풀 벗겨내어 자세히 들여다 보는 님의 글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2006-10-12 1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6-10-11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래하는 돌>님, 이게 낫겠어요.ㅎㅎ

비자림님, 언제나 진지한 댓글.
님의 말씀이 되려 가슴에 와닿는데요?^^

죄송죄송님, 별 말씀을요!^^*
제가 번거롭게 해드렸는데.

건우와 연우님, 제가 기억을 조작하는 데는 일가견이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내 유리한 쪽으로다가.
제가 그나마 낙관적인 건 그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으' 리뷰가 좋다고 해주셔서 고마워요. 진심으로......^^

평택, 나어릴때 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인지 표상인지 어쩌고 하는
성경구절도 떠오르네요.
찾아봐야겠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브리서 11장 1절)


mong님, 바로 그겁니다. 히히~~

'만물보다 거짓되고'님, 반갑습니다.
모든 것이 쓸데없는 짓으로 느껴질 때가 저라고 왜 없겠습니까만
또 뭐라고 긁적이는 순간이 주는 즐거움을 무시하지 못하겠어서.
님과 가끔 이 얘기 저 얘기 나누고 싶어요.

하루님, 전 좀 뻔뻔해졌습니다.

namu님, 어제 이 리뷰 올리고 댓글이 하나도 안 달려 좀 무안했는데요.
님이 짠~하고 나타나서 만세를 불렀답니다.^^

플레져 2006-10-12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를 낮추는 일, 생각이라도 하는 게 어디냐 싶어서
저도 제 마음가는 대로 저지른 다음에 반성하는 방법을.......^^;;
제목이라고 해야 하나... 언제 들어도 참 좋은 말이에요. 법구경...

2006-10-12 0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산사춘 2006-10-12 0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금같은 추억, 소금같은 말들이어요. 주변을 포함한 자신을 돌아봅니다.

2006-10-14 18: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10-15 0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6-10-16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짐이 이사 수준인 님, 그곳의 가을 만끽하고 계시죠?
부럽사옵니다.^^

역지사지님, 한 며칠 가슴에 돌덩이를 얹어놓은 듯했어요.
어제부터 좀 가벼워지더군요.
일간 또 님께 소식 전하겠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 2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 2
박종호 지음 / 시공사 / 200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강아지  '말리' 그림이 인쇄된 사은품 컵이 탐나서 <말리와 나>라는 책을 주문했는데
요즘 침대 발치에 뒹굴고 있다.
박종호의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 제 2권을 읽고 알라딘에 들어와
리뷰 제목을 뭘로 할까, 생각하니 '말러와 나'가 떠오른다.
구스타프 말러. 말러와 나......

클래식에 문외한인 내가 십몇 년 전부터 거의 유일하게 지니고 있던 음반이
말러의 교향곡 1번에서 9번까지 전곡이다.
10년도 전,  여동생네 가족이 미국에서 1년 동안 살고 돌아올 때 뭘 선물할까 하기에
말러의 교향곡을 1번에서 9번까지, 엄선해서 구해달라고 주문했다.

그 무렵 읽었던 어느 책에서 구스타프 말러를 소개받았고 '대지의 노래' 에 대해 알게 되었다.
죽음에 대한 천착과 철학, 대서사시 어쩌고 하는 표현에 사정없이 끌렸던 것.
그렇게 해서 말러는 나에게 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30대 초반에 나는 죽음에 꽤 관심이 많았던 듯.

베토벤도 그렇고 슈베르트도, 브루크너도, 또 다른 작곡가들도,
 아홉 개의 교향곡을 완성, 혹은 완성 직전  세상을 떠났다는 일화는
박종호의 이 책에서 읽었다.  말러는 그래서 죽음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아홉 번째 교향곡을  '대지의 노래'라는 이름으로 발표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인 1911년,  세상을 떠났다. 

-- 카플란은 언제나 말러의 교향곡 2번만을 지휘한다.(146쪽 사진 설명 문장)

언제나 어디서나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2번만을 연주하는 지휘자!
20대 초반에
연주회장에서 우연히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제2번 '부활'을 듣고
"번개가 내 몸을 관통하는 것 같았"던 길버트 카플란은 언젠가 자신의 손으로 '부활'을
지휘해 보리라는 꿈을 품는다.
사업자로 큰 성공을 거머쥔 그는 1981년, 39세에 음악 공부를 시작했으니
그것은 오로지 말러의 교향곡 제2번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몇 년 뒤 한 호사가의 사치쯤으로 짐작하고 마음속으로 입을 비쭉이는 
사람들 앞에서 무대에 섰으니, 이후 그는 세계 정상급 오케스트라들의 초청으로
말러의 '부활' 을  연주하여 명실공히 '부활' 하면 누구나 떠올리는 지휘자가 된다.

--저는 두 가지 부끄러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하나는 제가 남들 앞에서 지휘를 했을 때 당할 부끄러움이요,  나머지 하나는
제가 지휘를 하지 않았을 때 두고두고 제 자신이 후회하게 될 부끄러움이었습니다.
저는 전자를 택했을 뿐입니다
.(147쪽)

책에서 제일 인상 깊은 일화 역시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과 연관된 지휘자
길버트 카플란이었다.
저자의 말처럼, '인간의 가장 큰 희열은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을
이루는 데 있지 않을까?'

그리고 얼마 전 한 친구가 내게 귀한 음반을 무더기로 빌려주었는데
마침 그 속에 말러의 교향곡 2번과 9번이  들어 있어 이 친절한 저자의 손을 잡고
곧바로 음악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 희열이라니......

이 책에는 저자가 독자에게 주는 깜짝선물이 달려 있으니, 자신이 사랑하는 클래식 곡들을
열 곡 선정하여 맛보여 주는 음반이다.
그가 사랑하는 한 곡 한 곡에 대한 에세이를 읽고 나면,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레코드 가게 진열장을 뒤지거나 음악실 소파에 깊숙이 파묻히고 싶은데 그럴 수도 없고.
그러니 이 얼마나 살뜰하고 다정한 선물이란 말인가.

가령 몬티의 '차르다시'라는 집시 음악을 로비 라카토시의 밴드가 연주하는데
유장하면서도 현란하고 파워풀한 선율에 내 마음 한 자락이 공명했다.
몬티의 '차르다시'를 찾아 몇몇 연주를 들어보았는데 역시 라카토시 밴드만한 울림은 없었다.

'말러와 나'라는 제목을 잡고 나서  리뷰를 쓰다보니 이야기가 구스타프 말러에만 한정되었다.
아쉽지만 할 수 없는 일이다.














댓글(17) 먼댓글(0) 좋아요(3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노아 2006-10-04 1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이 책 사야겠어요. 넘 궁금하잖아요. 그 음악 저도 듣고 싶은 걸요^^
근데 내가 사랑한 클래식1편부터 보아야 하겠죠? ..;;;

로드무비 2006-10-04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전 이 책부터 읽었어요.
2권도 주문했습니다.
뭐 어떠려고요.^^
(음반을 함께 주니 참 좋습니다!)

sudan 2006-10-04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읽고 십초만에 결재까지 완료. 올해의 충동구매 중 가장 신속하고 재빠른 결정이었어요.(씨익. ^^)

마태우스 2006-10-04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리의 오타인 줄 알았는데 덕분에 말러라는 분을 알게 되네요 뭐든지 사고 싶게 만드는 님의 재주, 부러워요 근데.. 책은 빌리면 잘 안돌려주는 경향이 있던데, 음반은 어떤가요?

로드무비 2006-10-05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전 책이든 음반이든 확실히 돌려줍니다.
단, 책이나 음반을 함부로 굴려서 기스가 나고, 미루다가 보면
반납하는 데 몇 달씩 걸립니다. 헤헤~

sudan님, 앗, 음반은 정식 음반은 아니고 맛뵈기용인데.
아무것도 모르는 저같은 사람은 그나마도 감지덕지했는데
님은 어떠실지.....
그나저나 제가 삐끼 소질이 좀 있나요?
namu 님도 얼마 전 그런 말씀하시던데. 히히~~

산사춘 2006-10-05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플란도 참 대단하네요. 로드무비님 작품도 기둘려 봅니다. 말러와 카플란에 이은 무비와 춘... 히힛

하루(春) 2006-10-05 0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말리와 나>라는 책인 줄 알고 클릭했는데... ^^;;;

에로이카 2006-10-05 0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누가 자기는 말러를 제일 좋아한다고 한 적이 있었더랬어요. 전 잘 모르지만... 옆에서 그 말을 들은 사람이 말러를 좋아할 정도면 음악을 아는 사람이라고 그러더군요...

waits 2006-10-05 0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러와 로드무비님, 추석 잘 보내세요! ^^
(이 좋은 책이 왜 시공사에서 나왔을까요... 라고 하면, 짜증나실까요...^^;; 히히.)


로드무비 2006-10-05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택, 나어릴때님, 그러게나 말입니다.
저도 무척 안타까워요.
더구나 최근에 그 父子 또 택도 없는 짓을 하고 있더군요.;;
(평택, 나어릴때님도 추석 잘 보내시길.^^)

에로이카님, 말러 음반을 사달라고 졸라놓곤 또 그렇게
즐기지는 못했습니다.
귀가 뚫리지 않았으니 오죽했겠습니껴.
그런데 이번에 다른 연주로 들으니 또 좋더라고요.^^

하루님, 실망하신 건 아니죠?ㅎㅎ

산사춘님, 무비와 춘이라니, 님과 이름이 연결된 것만으로도
가심이 설렙니다.
저는 인생에서 중심 되는 뭐 하나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카플란이 무지 부러웠답니다.^^





마노아 2006-10-10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주의 마이리뷰 당첨된 건 줄 알고 호들갑 떨며 축하했는데, 다시 보니 그게 아닌가 봐요. 저만 낚였나요? ㅠ.ㅠ

로드무비 2006-10-10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이주의 마이 리뷰는 <안녕, 캐러멜>로 받았잖아요.
얼마 전.ㅎㅎ
그리고 님 외에도 한 분 확실하게 낚인 걸로 알고 있어요.^^

2006-10-12 1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10-13 16: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6-10-14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러팬 님, 반갑습니다.
전 아직 관심을 가지고 들어보려 하는 초보 단계고요.
님의 말씀을 들으니 5번의 트럼펫 연주 당장 들어보고 싶네요.
반갑습니다.^^

어제 부쳤습니다 님, 최종병기 1권 오늘 읽었어요.
꽤 재밌던데요?^,.~
(님의 댓글은 최소한 다섯 번은 읽어봅니다.
제가 딴청 부리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이해해 주시라요.)

skyblue 2006-10-16 0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멋지시네요.
클래식을 좋아하려고는 애는 쓰지만, 아직은 안맞은 옷 걸친것처럼 익숙치는 않았어요. 덕분에 책도 읽고, 음반도 들어봐야겠어요. 기대되네요

로드무비 2006-10-16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kyblue 님, 저도 아직 익숙지 않아요.
깊이 들어가볼 생각도 없고요.
그저 인연이 있어 마음 가는 곡들은 좀 챙겨 들을 생각입니다.
이 책 입문용으로 좋을 것 같아요.
반갑습니다.^^
 
경성 트로이카 - 1930년대 경성 거리를 누비던 그들이 되살아온다
안재성 지음 / 사회평론 / 200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경성'이나 '트로이카' 하면 왠지 눈빛이 게슴츠레해지면서,
앞머리라도 좀 지져서 침 발라 붙이고,  입술이라도 빨갛게 칠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트로이카, 즉 삼두마차는 옛날옛날  문희, 윤정희, 남정임, 혹은
장미희, 유지인, 정윤희라는 아름다운 세 여배우와 함께 엮여 떠오르는 단어.
그런데 일제 강점기 무렵의 우리나라 수도 '경성'과 결합하니
유성기에서 흘러나오는 지지직 잡음 가득한 유행가와 함께
누렇게 바랜 한 장의 흑백사진으로 마음속에 처연하게 자리잡는다.

이현수의 <신기생뎐>처럼 <경성 트로이카>도 기막힌 인연으로
작가 안재성을 찾아왔다.
어느 날 우연히 모르는 화가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인사동 화랑에 들른 작가,
그날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심상찮은 분위기의 작품들은 바로 1930년대
 '경성 트로이카'의 주역들과 동지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이효정의 아들이
제작한 것이었다. 그날, 안내원의 책상 위에 쌓인 시집은 화가의 어머니 이효정이 
여든이 넘은 나이에  펴냈던 것.

25년 전 노동자로 소설가로  노동운동의 최전선에 있을 때 풍문처럼 얼핏 접한,
우리나라 최초의 자생적인 사회주의 단체가  '경성 트로이카'이다.
이재유, 이현상, 김삼룡이 주도했는데 구체적인 노동운동을 기반으로 해서
혁명을 꿈꾸었으며, 주먹구구식이 아니라 조직에서부터 활동까지
그렇게 주도면밀할 수가 없었다. 

그 옛날 만주에서 장바구니에 육혈포를 숨겨 나르던 어머니의 피를 이어받아
코민테른의 팸플릿을 가슴 속에 품고 나르던 동덕여고 학생 이효정의 책상머리엔
'내 작은 이름을 혁명에 바치리라!'는 글귀가 붙어 있었다.
그 소녀가 아흔 살이 넘은 파파할머니의 모습으로,
운동과 문학을 접고 지방에서 농사를 짓던  작가의 눈앞에
거짓말처럼 나타난 것이다.

이효정 할머니의 생생한 육성을 발판으로 일반인들에겐 이름조차 생소한
'경성 트로이카'가  복원되었으니, 책을 읽는 내내  가슴이 설레었다.

나름대로는 혜택받은 자들이었던 꿈많은 여고생들이 참혹한 조국의 현실에 눈을 뜨며
학내에서 백지동맹을 주도하고 독서모임을 결성하고 사상적으로 무장해 가는 과정이
얼마나 어여쁘고 미더운지.

'경성 트로이카'의 활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동덕여고의 그 여학생들과 함께였다.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를 배경으로 여성이라고 해서 미미하고 소극적인 활동에 그친 것이 아니다.
하루 열여섯 시간 노동의 참혹한  공장 생활은 물론,  
투옥과 끔찍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가열차게 투쟁했다.
아침부터 밤까지 그들의 생활은 오로지 노동운동과 결합되었다.

1930년대 식민지 노동자의 참혹한 삶에 대해서는 소설 등을 통해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전 존재를 던져 일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건 몰랐다.

"진정한 사회주의자는 머릿속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철저한 자기희생과 불굴의 의지를 통한 실천 속에 완성됩니다."

'경성 트로이카'를 이끌었던 이재유의 말처럼, 비료공장에서, 방직공장에서
또 어디어디의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경성 거리에서 순사에게 쫓기며
사랑하고  미워하고 투쟁했던 그들.

이재유, 김삼룡, 이관술, 박진홍, 이순금, 이효정, 이현상....
그 이름들을 불러본다.


댓글(15)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반딧불,, 2006-09-29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고새 제목이..^^

2006-09-29 15: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조선인 2006-09-29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적거리며 미루던 책인데, 확실하게 불 지르시네요. *^^*

blowup 2006-09-29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 님 제목이 왜 이리 순정할까?, 했더니만 바뀐건가 봐요.
침발라 붙인 머리처럼 참해요.
다시 태어난다면, 저 들끓는 시기였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그 동안 재미난 책 많이 보셨구나.^-^

로드무비 2006-09-29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순한 시절 님, 제 가슴도 두근댑니다.
그날이나 그 전 날 읽은 책 아니면 리뷰 잘 안 쓰는데
이 책은 어쩐지 꼭 쓰고 싶어서요.
오늘처럼 가끔 아는척 좀 해주세요. 고.독.합.니.다.=3=3=3

반딧불님, 제목이 좀 허한 것 같아서.
'그리워서'를 붙이니 쪼매 낫네요. 히히~

로드무비 2006-09-29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namu님, '그리워서'를 나중에 붙였어요.ㅎㅎ
아, 님도 그런 생각 하신 적 있구나.
전 오래 전 사람 사는 모습들이 너무 좋아서
'그때를 아십니까' 하는 디비디까지
2마넌씩이나 주고 샀다는 것 아닙니까.
그것도 석 장이나요.ㅎㅎ
우리가 동덕여고생으로 그 당시 만났다면 좋았겠어요.

FTA반대 조선인님, 이 책 무지 재밌습니다.
사게 되면 땡스투 잊지 마세요.=3=3=3

클리오 2006-09-29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이 재밌다 하시니 저도 보관함으로.. 물론 땡스투도 잊지 않구요.. ㅎㅎ

라주미힌 2006-09-29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재밌겠네욤...
근데 제가 재밌다고 하면 왜 무반응일까 ㅠㅠ;
아이디 또 바꿔야겠다.. 노드무비 로...

waits 2006-09-29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반가운 리뷰~^^ 로드무비님이 지른(!) 불이 많은 분들께 번졌으면 정말 좋겠어요.
주제넘지만, 이 설렘과 감동이 감성으로만 머리로만 스쳐지나지 않고...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채 추수철을 맞은 평택분들의 가슴에,
올림픽 대교 위에서 추석을 맞을지도 모르는 노동자들과 가족들에게,
불법파견이 아니라는 노동부 판정에 또 한 번 대못이 박힌 KTX 승무원들에게,
사무실을 빼앗기고 농성에 들어가는 전공노 분들에게,
그리고 하나하나 거론할 수도 없을만큼 여기저기서 고통 받고 있는 많은 분들에게 향하는 관심과 연대의 마음으로(이왕이면 실천으로^^) 이어지기를 정말 바랍니다.
너무 반가워서, 완전 재수없음을 무릅쓰고 오바를! ^^;;;

2006-09-29 2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6-09-30 0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움에 얼른 님, 글쎄, 모두 어디에 엎드려 있을까요?
치열하게 사신 분들 보면 부럽습니다.
전 그냥 멍청하게 젊은 날을 보냈거든요.^^

평택, 나어릴때 님, 저는 리뷰 금방 쓰는 편인데 이건 좀 끙끙댔어요.
그만큼 제대로 쓰고 싶었달까.
마음에 드시는 것 같아 기쁩니다.
님의 귀여운 오바도 유쾌하고요.^^

산새아리님, 노드무비요? 으하하하~~~
그리고 무반응은 무슨.
인기 절정이시면셔.=3=3=3

클리오님, 땡스투로 들어오는 몇십 원이 참 좋더라고요.
이 책 꼭 읽으시길.^^

2006-10-02 17: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10-02 15: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산사춘 2006-10-03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제목은 증말 영화배우나 문학모임이 떠올려지는데, 치열하고 뜨거운 이야기들이네요. 추석지나고 바로 콜입니다.

로드무비 2006-10-04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사춘님, 추석 지나고 바로 코올~~
잊지 마셔용.^^
 


Roger Kunts,  Bathtub 시리즈 1960.




어제 어느 님의 방에서 처음 본 저 화가의 그림이 좋아서 검색을 해봤더니
욕실 그림이 나왔다.
짙푸른 한쪽 벽과 물이 담긴 욕조, 변기.
저렇게 생긴 옛날 욕조가 참 좋다.


오래 전 자하문의 김환기 미술관에는 사방 벽과 천정이 모두 푸른색인
방이 하나 있었다.
김환기의 푸른색 그림으로 도배된 방이었던가?
기억은 정확하지 않다.

2개월 뒤 이사를 가게 된다.
방 하나는 온통 푸른색  벽지로 푸른 방을 만들고 싶다고 했더니 안된단다.
벽지 아자씨랑 책장수님이랑.

그래서 안방 벽 한 면만 저 그림 속 욕실 벽면과 비슷한 색상의
푸른 벽지를 바르기로 했다.

지지난주  구경을 갔더니 한쪽 벽만  짙고 푸른색인 그 방.
아쉬운따나.....

로저 쿤츠의 그림은 내가 보기에 어딘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과 닮았다.







댓글(2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하늘바람 2006-09-29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좋네요. 그런데 파란색 조금 우울해 보이기도 해요

로드무비 2006-09-29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울하고 침착한 저 색이 좋아요.^^

반딧불,, 2006-09-29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참 좋아합니다.
좋네여..퍼가서 볼래요. 이사 축하드려요. 좋은 곳으로 가시는거죠??

아영엄마 2006-09-29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만간 이사가시는군요... 모처럼 대대적인 정리(?)를 할 기회가 되실듯...^^;; - 그림 보면서 감상하는게 아니라 저도 욕조있는 집으로 이사가고 싶단 생각을 했나이다..

바람돌이 2006-09-29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가끔씩 박혀 있기에는 모르겠는데 좀.... 전 온통 푸른 방이라니 반대에 한표던질래요. ^^

urblue 2006-09-29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그림만 보면 호퍼랑 비슷하기도 하지만, 뭐랄까, 호퍼보다 좀 더 감정적인 듯하네요.
온통 푸른 방은 저도 반대. ㅎㅎ

로드무비 2006-09-29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그림도 호퍼랑 좀 비슷해요.
그리고, 저도 뭐 말이 그렇다는 거지.
바람돌이님 말씀처럼 가끔씩 보면 좋겠지요.

김환기의 푸른방은 정말 황홀했거든요.
요즘도 그 방이 있는지 몰라요.

아영엄마님, 욕조 있는 집으로 꼭 이사하시길.
대대적인 정리, 생각만 해도 골치아픕니다.
임박해서 얼렁뚱땅 해치우려고요.^^

반딧불님, 거기서 거기죠, 뭐.
셋집인데......
퍼가셨다고요? 저도 답례로 가서 추천을.=3=3=3

Mephistopheles 2006-09-29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억이 정확한 편이십니다. 자하문에 위치한 환기 미술관은 그 위치만으로도
사람을 편한하게 해주는 매력을 가지고 있는 건물입니다. 라고 말하지만 저만
그런 느낌이 드는 걸지도 몰라요..^^ 그리고 기획전시가 없는 이상 김환기 미술
관은 김환기씨의 작품만 언제나 걸려있답니다.^^

비자림 2006-09-29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맑고도 처연한 슬픔이 고여있을 것 같은 욕조..

로드무비 2006-09-29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자림님, 맑고도 처연한 슬픔이라니,
님은 천상 시인이세요.^^

메피스토님, 그 방에서 나오기 싫었어요.
얼마나 좋은지.
혹시 김환기미술관, 메피스토님이 설계하신 것 아닌가요?=3=3=3

Mephistopheles 2006-09-29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기....그거 설계하신 분하고 저는 연배 차이가 꽤..됩니다...^^

blowup 2006-09-29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푸른 방이네요.
부엌 한쪽 벽을 푸른색으로 칠했어요. 방 하나는 벽면 전체가 역시'우울하고 침착한(맘에 드는 표현이라 따라했어요^^)' 청회색이죠.
전, 반대 안 해요. 담엔 보라색으로도 칠해 볼 거구. 빨간 색으로도 칠해 볼 거예요.
이사갈 때마다, 이 색 저 색 칠해보려구요.

로드무비 2006-09-29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namu 님,
책장 넣는 방을 회색 벽지로 했더니 그냥 시멘트 상태로 보이더군요.
님의 푸른색 주방 벽 사진 찍어 살짝 보여주시면 안될랑가요.
청회색 좋아합니다.
보고 있음 마음이 좋고 편해요.
이 색 저 색 칠해 볼 거라는 말씀이 부럽네요.^^


메피스토님, 그것 알고 내뺀거잖아요.
요즘 님과 좀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kimji 2006-09-29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림 좋습니다. 저 푸른 빛도 욕조도 제가 다 좋아하는 이미지. 아, 정말 좋군요.
(저도 그림을 좀 찾아봐야겠습니다)

아, 그리고- 환기미술관, 문득, 깊게 그리워졌습니다.

로드무비 2006-09-30 0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kimji님, 멋진 그림 발견하면 보여주실 거지요?
환기미술관은 저도 다시 가보고 싶어졌습니다.
좀 큰 슈퍼처럼, 그 꼬불꼬불한 골목 주택가 한가운데
자리잡은 미술관도 드물잖아요.

로드무비 2006-09-30 0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출콘크리트 마감 님, 녹색끼 도는 어두운 청색이 무지 궁금합니다.^^

니르바나 2006-09-30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댁이 이사하시는군요.
읽을 때는 좋아도 이사 때는 돌덩어리로 변신하는 책들이 걱정이 되는군요.
포장이사를 돕는 분들이 가장 싫어하는 그야말로 짐스런 존재라던데
걱정입니다. (로드무비님 걱정을 마음으로라도 덜어드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건 그렇고,
로드무비님 방이 하나 허락된다면 푸른기운이 도는 방 하나쯤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요.
금으로 도배한다면 말리고 싶지만요.ㅎㅎ

로드무비 2006-09-30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르바나님, 책이라야봤자 얼마 안 돼요.( '')
방구석이 좁아서 좀 많아 보이는 것일 뿐.ㅎㅎ
푸른 벽 하나만 해도 서늘하고 침착하고 참 좋더라고요.
언제 사진 찍어 보여드릴게요.
이사는 미리 걱정하지 않고 일주일 전쯤부터 해서 후다닥
정리할 건 정리하지요, 뭐.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2006-10-10 1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10-10 15: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6-10-10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오늘 택배 아자씨 부를 일이 있어서
박스에 넣은 김에 그냥 보냈어요.
그 책도 꼭 챙겨드릴게요.^,.~

2006-10-18 1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