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란한 마음을 달래기에는 역시 시가 좋다. 

마음이 좀 차분해졌다. 

산다는게 가끔 쉬운 것도 같지만 쉽지 않고, 어려운 것만 같지만 또 그리 어렵지만도 않다. 

마음 먹기에 따라 모든게 달라질 수 있단 생각에 위로를 받는다. 

 

 

   
 

낯선 외로움



자기만의 길이와 폭과 분위기를 가지고 살면서 풀에겐들
왜 저만의 슬픔과 기쁨이 따로 없으랴.
마주 앉아 찻잔 비울 때까지
속으로 삭이고 삭여야 할 생각 왜 없으랴.
삭이고 일어설때 사방에 썰물 빠지는 적막, 속의 황홀!


학교 식당 건물과 땅 틈새에 배죽 나온 저 풀,
오늘은 노란 꽃대 하나 조그맣게 내밀었다.
손가락 끝으로 얼굴 들어보니
죄끄만 꽃잎과 꽃술들이 오밀조밀 한 모양을 이루고 있다,
조금 싸한 냄새까지 한 모양을.
왜 한 뼘쯤 앞으로 기어 나와 좀 편히 살지 않을까,
거기도 인간의 발길 채 닿지 않는 곳인데.
풀에게도 끼가 있는가?
기차게 고달파도 제 본때로 살아보겠다는?
말이 없어서 그렇지
몸을 온통 졸이는 황홀한 낯선 외로움이?

 
   
   
 

낙엽송



가을날 지상에서
잎새 말리며 겨울 날 준비를 하는 그 어느 나무와도
마음먹고 다가가 눈을 맞춰보면
삶의 한 고비를 넘는 마음을 짐작할 수 있지만,
늘 푸른 나무와 잎갈이 나무들 속에 끼어 사는 낙엽송만큼
몸가짐 잘 봐주는 몸뚱어리가 또 어디 있을까?
다른 나무들 속에 없는 듯 살다가
저도 모르는 듯 고요히 황금빛으로 물드는
낙엽송, 주위 나무들과의 그 편안한 보색(補色)!
날이 차가워지면 점차 땅 빛으로 채도(彩度)를 맞추다가
흙빛으로 돌아가기 직전까지 몸 가다듬으며 살다가
첫눈 내릴 때 옷과 살을 한 번에 털어버리는
저 삶의 환한 한 형상!

 
   
   
 

겨울 통영에서



그대와 헤어진 남해안 풍경들이
새벽꿈에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서있는 듯 가던 섬들,
뻘 위로 팔이나 목을 내민 폐선(廢船)들,
짧은 방파제들,
늘 혼자였던 무인 등대.
바다가 보이지 않는 모텔 방에서 깨어
출렁이는 것을 찾아 나섰따.
그대 떠나자 몇 십 년 만에 찾아왔다는 추위
비뚤게 얼러붙었던 남망산이
풍경 소나기를 맞고 제 모습을 갖추었다.


밀물 가득 차올라 울렁이는 선창을 거닐다
나도 모르게 들어선 어시장,
이 추위에 물고기들이 용케 살아들 있다.
갑갑한 김에 잘 만났다는 듯
물 위로 얼굴 살짝 내미는 놈도 있다.
반기는 놈에게 어떻게 인사 안 한다?
눈으로 물으며 주위 둘러보니
사람들은 모두 흰 김 달린 숨을 쉬고 있었다.


그대없이 섬들만 남아 가다 서다 하는
눈이 오다 말다 하는 산양일주도로를
띄엄띄엄 달려
섬들과 바다 속에 가슴팍 내밀고 있는 달아공원에 닿아
눈 껌뻑이는 차의 숨소리 죽여놓고
목도리와 목덜미를 풀어 젖히고
섬과 섬 사이로 터지려다 마는 바다를 향해
눈 소나기 냉하게 맞고 있는 자를 만난다.
서로 내면(內面)하리!

 
   
   
 

헛헛한 웃음



요새 뭘 하지?
뭘 하다니?
선산 도리사(桃李寺),
갓 스쳐간 낮비에 젖은 길 내려가
소나무 우듬지들 한 가운데
아도화상 바위 의자에 올라 모양새 갖추고
오뉴월 몰려드는 생각의 검은 구름떼를
짝퉁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잠재우려 든 일도
벌써 두 달여, 볕 아직 따가워도
저녁 어스름 바투 밀려오기 시작하는데
뭘 하고 있지?
뭘 하든 않든 아침저녁으로
하늘과 땅이 서로 들고 난 곳을 새로 맞춰보는
소나무들이 솔가리를 촘촘히 빗질해 내려보내는
가을이 오고 있겠지.
그래 그 가을의 문턱에서 지금 뭘 해?
여름내 속으로 미워한 자 하나
내처 미워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지.
그 할까 말까가 바로 피 말리는 일,
아예 소매 걷어 붙이고 나서 미워하든가
마음에서 슬쩍 지워버리는 거야.
아니면 어느샌가 바위의 따스함이 그리워지는 저녁,
바위의 피부를 간질이는 가벼운 햇볕,
볕이 춤춰, 하면 드리워진 그림자처럼 가만히 춤추다가
생판 상관없는 사람이 되어 한번 헛헛하게 웃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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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1-25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여름에 내가 리뷰를 썼던 시집이네요.
두번 살펴보고 이웃에 마종기 시인을 엄청 좋아하는 언니가 있어 건네줬어요.
여기서 다시 보니까 참 좋으네요.^^

꿈꾸는섬 2010-01-25 12:09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리뷰보고 땡스투도 눌러서 구매한거였는데 전 이제야 보네요. 그분 참 좋아하셨겠어요.^^

후애(厚愛) 2010-01-25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집을 좋아하시는군요.
나중에 기회가 온다면 꿈꾸는 섬님께 시집을 선물하고 싶네요.^^
전 시집 선물은 한 번도 못 해 봤어요.

꿈꾸는섬 2010-01-26 17:30   좋아요 0 | URL
아~~ㅎㅎ 시 좋아하죠.ㅎㅎ
후애님께 선물 받을 기회가 생긴다면 좋겠네요.ㅎㅎ

같은하늘 2010-01-26 0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에 순오기님 서재에서 보고 반했었는데 아직도 보지 못하고 있네요.^^

꿈꾸는섬 2010-01-26 17:31   좋아요 0 | URL
저도 순오기님 서재에서 보고 샀는데 이제야 보았어요.^^ 근데, 정말 좋더라구요.

비로그인 2010-01-26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 올해는 쓸 수 있을까 하여 조금 비싼 만년필도 사 두었습니다. 처음에 꼭 그 펜으로 쓸거구요..근데 다른 시들을 보면 볼 수록 너무 좋아보여 엄두가 안나네요^^

뭐..닿을 수 없으면 어떻나요? 닿으려고 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이런생각만 갖고 있네요 ㅋ 제가 뭔가를 쓴다면 제일먼저 꿈섬님께 보여드리고 싶은 생각이 마구 생기네요~

겨울밤,,자정을 넘기기 전.. 꿈섬님 공간에 뭔가 연하게 끄적여 봅니다. 근심 없는, 좋은 밤 되고 있으시길 빕니다!!

꿈꾸는섬 2010-01-30 21:16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 쓰신 시, 제일 먼저 보여주신다는 말에 감동이요.^^
어떤 시를 쓰실지 궁금해요.ㅎㅎ
 

최승자님의 시집이 오랜만에 나왔다. 너무 보고싶어 사실 안달이 좀 나있었는데 며칠전 마노아님으로부터 생일선물을 하고 싶단 글을 받고는 이 시집이 번쩍 생각났다. 처음엔 거절을 했는데 마노아님의 새해 첫선물의 주인공이 될 영광스런 날이 될거라기에 얼른 답글을 달았다. <쓸쓸해서 머나먼>을 보내주세요.ㅎㅎ 

그리고 어제 이 시집을 받았다. 알라딘의 빨간 선물 상자에 정겨운 메세지를 함께 담아 이 시집이 내게로 왔다. 

오늘 아이들 재우며 옆에서 읽었는데, 역시, 최승자님 시는 멋지다. 오랜만에 좋은 시를 읽으며 행복한 밤을 보내고 있다. 

 

 

   
  먼 방 빈 방



빈 방에서
저 먼, 없는 폭포 소리를 듣는다


(먼저는 내가 빈 방을 만들어냈고
빈 방이 저 먼, 없는 폭포 소리를 만들어냈다)


먼 방 빈 방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폭포 소리는 흘러내리는데


호젓이 고즈넉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먼 방, 빈 방 
 
   
   
  구름 한 점 쓰다 가겠습니다



구름 한 점 쓰다 가겠습니다
아침 식탁, 커피 한 스푼의 無
커피 물 한 잔의 無限


(창밖에서 한 아이가
사과를 먹고 있습니다
한 세계를 맛있게 먹는 것을
바라봅니다)


어디선가 새가 울고
달이 지고


구름 한 점 쓰다 가겠습니다
 
   
   
  하늘 虛 한 잔



아침마다 옥상에서 담배 한 대 피운다
눈앞에는 거대한 아파트 군단
그 위로 펼쳐져 있는 회색 하늘
아침마다 그 하늘 虛 한 잔을 마신다


담담하게 밍밍하게


(어쩌면 이 시시한
밀레니엄의 풍경을 가로지르는
새 한 마리조차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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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1-22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왜 이리 눈에 보이는 모든 시들이 좋을까요..?? 아니 마음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온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꿈꾸는섬 2010-01-22 23:07   좋아요 0 | URL
저도 그러네요.ㅎㅎ 좋은 시 읽고 좋은 밤 보내세요.^^

gimssim 2010-01-23 0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시집 주문해 놓고 기다리고 있어요.
시인이 투병 중이란 소문을 들었는데...
마음 절절 끓이는 시를 읽으며...마음을 좀 씻어야 겠어요.

꿈꾸는섬 2010-01-23 10:19   좋아요 0 | URL
중전마마, 처음 뵙겠습니다.^^
제 서재에도 들러주시고 고맙습니다.
저도 한번 놀러갈게요.
시집 받으시면 아마 너무 좋아 감동하실거에요.

프레이야 2010-01-23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시집 선물 받으셨나봐요.
쓸쓸해서 머나먼... 시가 아침부터 마음을 울리네요.

꿈꾸는섬 2010-01-23 10:20   좋아요 0 | URL
네, 너무 좋으네요. 저는 어제 밤새 너무 좋아 곱씹어 읽었어요.^^
프레이야님 건강하시죠? 요새 프레이야님 옆지기분이 물어온 사진 너무 좋아요.^^

비로그인 2010-01-23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승자 시인의 시가 좋군요..
'다른 세상' 특별히 좋습니다.
고맙습니다. 꿈꾸는 섬님


꿈꾸는섬 2010-01-25 10:43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좋은 시를 보고 좋으셨다니 저도 좋으네요.^^
 

대화 
 
무당벌레와 나밖에 없다 
추위를 피해 이 방에 숨어들기는 마찬가지 
 
방바닥을 하염없이 기어가다 
무료한 듯 몸을 두집고 버둥거리다 
펼쳐놓은 책갈피 위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 
갑자기 기억이라도 난 듯 
뒤꽁무니에서 날깨를 꺼내 위이잉 ㅡ 털기도 한다 
 
작은 전기톱날처럼 
마음 어딘가를 베고 가는 날개 소리 
 
겨울 햇살이 점박이등을 비추고 
그 등을 바라보는 눈가를 비추면 
내 속의 자벌레가 
네 속의 무당벌레에게 말을 건넨다 
 
조금은 벌레인 우리가 
주고받을 수 있는 대화는 어떤 것일까 
 
냄새를 피우거나 
서로의 주위를 맴돌며 붕붕거리는 것? 
함께 뒤집혀서 버둥거리는 것? 
암술과 수술을 드나들며 
꽃가루를 헛되이 일으키는 것? 
 
구석진 창틀에서 말라가기 전까지 
조금은 벌레인 우리가 
나눌 수 있는 온기는 어떤 것일까 
 
노루꼬리처럼 짧은  
겨울 햇살 
한줌 
 
-------------------------------------------------------------------------------------- 
 
옥수수밭이 있던 자리  
 
어제까지 열려 있던 문이 닫혔다 
바람에 소리를 내던 옥수수밭이 사라져버렸다 
옥수수가 사라지면서 
흔들림도, 허고도 함께 베어졌다 
허공은 달빛을 안을 수 있는 팔을 잃었다 
소리내어 울 수 있는 입술을 잃었다 
갑옷과 투구 부딪치는 소리, 
석탄을 지닌 산줄기가 먼저 폐허가 되듯이 
열매는 실한 순서대로 베어져갔다 
밑둥의 피는 아직 마르지 않았다 
밭은 더 어두워질 것이고 
성근 열매들은 여분의 삶을 익혀갈 것이다 
 
피 흘리는 허공, 
희고 붉고 검은 옥수수알, 
수확한 옥수수를 자루에 넣는 손, 
푸른 자루를 실은 트럭이 산모퉁이를 돌아간다 
 
--------------------------------------------------------------------------------------- 
야생사과 
 
어떤 영혼들과 얘기를 나누었다 
붉은 절별에서 스며나온 듯한 그들과 
 
목소리는 바람결 같았고 
우리는 나란히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흘러가는 구름과 풀을 뜯고 있는 말, 
모든 그림자가 유난히 길고 선명한 저녁이었다 
 
그들은 붉은 절벽으로 돌아가며 
곁에 선 나무에서 야생사과를 따주었다 
 
새가 쪼아먹은 자리마다 
개미들이 오글거리며 단물을 빨고 있었다 
 
나는 개미들을 훑어내고 한입 베어물었다 
달고 시고 쓰디쓴 야생사과를 
 
그들이 사라진 수평선, 
내 등 뒤에 서 있는 내가 보였다 
 
바람소리를 들었을 뿐인데 
그들이 건네준 야생사과를 베어물었을 뿐인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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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시인 20주기 추모공연] 기형도 시를 읽는 밤



  • 신청기간 : 2월 18일(수) ~ 3월 2일(월)
  • 당첨발표 : 3월 3일(화)
  • 행사일시 : 3월 5일(목) 오후 7시
  • 행사장소 : 홍대 이리카페

지금은 많이 유명해져서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좋아하는 기형도 시인. 

처음 기형도 시인의 시를 접하고 깜짝 놀랐던 이십대가 생각난다. 

어느새 20주기가 되었구나. 

30주기추모공연엔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바람만 갖게 되는구나. 

 

 

 

 

 

 

 

 

 

그집 앞




그날 마구 비틀거리는 겨울이었네

그때 우리는 섞여 있었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어Tw만

너무도 가까운 거리가 나를 안심시켰네

나 그 술집 잊으려네

기억이 오면 도망치려네

사내들은 있는 힘 다해 취했네

나의 눈빛 지푸라기처럼 쏟아졌네

어떤 고함 소리도 내 마음 치지 못했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

모든 추억은 쉴 곳을 잃었네

나 그 술집에서 흐느꼈네

그날 마구 취한 겨울이었네

그때 우리는 섞여 있었네

사내들은 남은 힘 붙들고 비틀거렸네

나 못생긴 입술 가졌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지만

벗어둔 외투 곁에서 나 흐느꼈네

어떤 조롱도 무거운 마음 일으키지 못했네

나 그 술집 잊으려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

그토록 좁은 곳에서 나 내 사랑 잃었네













빈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질투는 나의 힘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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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11-21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처음뵙네요^^

기형도 빈 집.. 일이 쌓여있는 수요일 오전, 일주일 가운데 가장 애매한 시간이라 생각하는데요.
마치 비누를 잡은 손처럼 일에 선뜻 나를 맡기기 힘든 시간 잘 읽고 갑니다 ~ :D


꿈꾸는섬 2009-09-27 23:53   좋아요 0 | URL
이 댓글을 이제야 봤어요.^^
네 반갑습니다. 전 가끔 님 서재에 들렀는데......
가끔 종종 뵈어요.^^
 

 

 

 

 

 

  담장에 넝쿨 하나

  고요하게 손을 뻗어

  담장을 만진다

 

  새 잎 하나 온다

 

  담장은 제 몸에

  새 생명 하나가 고요하게

  손을 뻗는 것 모른다

 

  이 지구에서 많은 종이

 

  새로 생겨날 때도

  혹은 사라져갈 때도

  그 어머니인 지구가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어머니

 

  그런 존재인 어머니

 

  고요하게 손을 뻗는 새끼들을 그냥 모른 체하세요

 

 

  달이 걸어오는 밤

 

  저 달이 걸어오는 밤이 있다

  달은 아스피린 같다

  꿀꺽 삼키면 속이 다 환해질 것 같다

 

  내 속이 전구알이 달린

  크리스마스 무렵의 전나무같이 환해지고

  그 전나무 밑에는

  암소 한 마리

 

  나는 암소를 이끌고 해변으로 간다

  그 해변에 전구를 단 전나무처럼 앉아

  다시 달을 바라보면

 

  오 오, 달은 내 속에 든 통증을 다 삼키고

  저 혼자 붉어져 있는데, 통증도 없이 살 수는 없잖아,

  다시 그 달을 꿀꺽 삼키면

  암소는 달과 함께 내 속으로 들어간다

 

  온 세상을 다 먹일 젖을 생산할 것처럼

  통증이 오고 통증은 빛 같다 그 빛은 아스피린 가루 같다

  이렇게 기쁜 적이 없었다

 

 

  저 물 밀려오면

 

  저 물 밀려오면 무얼 할까,

  그 물 위 수 놓을까, 어쩔까

  그 물 위 한 뭉텅이 짐승의 살 다질까, 말까,

  그 물 위 뒤 모래밭에서 깨어난 새 마늘 짷을까, 말까,

  그 물 위 햇고추 말릴까 말까, 무얼 잃을까

 

  햇빛 다지듯,

  달빛 으깨듯,

  그날 읽었던 책장에 든 낡은 짐승들이 사라진 기억

  다질까, 으깰까, 웃다가

  이 생에 한 사람으로 태어나

 

  먼 밤 잠 못 드는 저 물 밀려오는 소리, 듣는

  그 물 위 당신이 뱉어낸 별들 안아 들일까, 말까,

  그 물속 사라지는 저 빛 어쩔까, 나 말까

 

  그러다가, 사라질까, 무엇이 될까,

  잊어버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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