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율사 이청준 문학전집 장편소설 3
이청준 지음 / 열림원 / 199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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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잡지사 편집 사원으로 일하며 소설을 쓰고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조율'에 만족하고 있는데, 이 '조율'이라 말이 그들 사이에만 통용되는 일종의 은어이다.  

글쟁이들 여럿이 <기적>이라는 다방에 모여 문학에 대한 이야기들을 활발히 나누면서 정작 글은 쓰지 못하는 것을 본 한 시인이 '연주는 못하고 악기만 녹슬까봐 조율만하는 조율사들'이라고 비아냥댄 사건에서 연원한 말인 것이다. 

얼마 후 평론가 지훈이 '지식인은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남쪽으로 잡았다면 그쪽으로 가도록 배를 유도해야 한다. 서쪽으로 가려는 세력이 있을 때에는 자신이 의도하는 방향이 남쪽이라는 이유로 그쪽으로만 배를 저으며 알리바이에 골몰할 것이 아니라 동쪽으로 배를 저어야 할 것이다' 라는 요지의 글을 발표한다. 마치 조율사들에게 금기가 되어버린 한 음을 되찾아 연주한 것과 같았다. 그후 지훈은 미치고 만다. 

'나'는 글을 못 쓰는 것 외에도 여자친구 은경과 이별 일로에 있었고, 술주정을 하다 끝내 세상을 뜬 형님의 권속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또한 위장병이 점점 심해지고 있어 때때로 '단식'을 생각하고 있으며, 전쟁통에 잃어버린 외종사촌형을 꼭 찾아야하리라는 강박도 갖고 있다. 

은경과의 관계가 끝내 파국을 맞고, 형수님이 아이들 중 하나를 '나'에게 맡긴 후 재가하겠다는 의사까지 밝힌다. '나'는 엉뚱하게도 부산으로 외종사촌형을 찾으러 떠난다. 하지만 형님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고, 되돌아온 서울에는 형님의 맏아들 신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45일간의 단식에 들어간다. 단식에 들어가 점차 음식물을 줄여갈 때 느끼는 고통이 '죽음'을 의사체험하는 과정이고, 15일간의 단식 후 다시 음식물을 섭취하기 시작할 때 찾아오는 고통은 '환생'의 과정일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친구 팔기는 단식조차도 조율의 한 방편이 아닌지 의문을 나타낸다. '나'는 단식 과정 중 사실은 우리 모두가 출구가 없는 조율실 안에 갖혀 죽어가는 악몽을 꾸게 된다. 

 

1973년에 발표된 <조율사>는 이청준의 다른 소설들에 비해 구조가 산만하다는 평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평론가 정과리는 이러한 산만함이 어쩌면 의도된(혹은 필연적인) 것일 수 있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조율사>는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소설이 아니라, 삶의 문제의 근원을 찾아가는 소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모르는 문제에 대한 대답은 거짓 대답이니 작품의 골격이 곁 이야기들의 변주에 따라 꺽이고 휘어지는 게 당연하다는 것이다.

정과리는 4.19 혁명이 이승만 정권은 붕괴시킨 후 시간이 지날수록 혁명의 이념이 퇴색되고 참여자들 중 다수가 혁명의 외양적 승리에 자족할 때에 '자기 정립에 실패한 시민의 소시민 의식화 현상'이 나타났다고 말한다. 

 

작가 이청준은 작품 속에 '민중청부업'이란 제재 하에 우화를 하나 마련해 놓았는데 내용은 이렇다. (1) 민중청부업자들(지식인)들은 민중의 호응을 얻어 민권 옹호를 위해 싸운다. (2)권력은 위장과 변신을 거듭하고, 민중은 청부업자들에게 모든 것을 내맡기고 만다(혁명 이념의 승리) (3)편한 잠에 빠져든 민중들 위에 권력이 새로운 지배를 시작한다(혁명의 붕괴) (4) 이제 잠이든 민중에게 화살을 돌려 그들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찾게끔 해야 한다(지식인의 배반)

 

<조율사>는 '나'의 개인적 사건들을 병치, 나열하며 두서 없이 전개되고 있는 듯 하지만 그 이면에는 4.19 이후 지식인 사회에 만연해 있던 침묵의 분위기와 이를 탈피하고자 하는 작가의 고민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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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든파티 (반양장) 펭귄클래식 79
캐서린 맨스필드 지음, 한은경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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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스필드는 1988년 뉴질랜드에서 태어난다. 아버지는 은행가였고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별다른 애정을 보이지 않아 할머니가 육아를 전담한 것으로 보인다. 1903년에 두 언니와 함께 영국으로 건너가 퀸스칼리지에서 배운다. 이때 평생을 함께할 아이다 베이커(Ida Baker)를 만난다. 아이다 베이커와의 관계를 동성애 관계로 보는 사람도 있고 일종의 대자매, 혹은 결혼 관계로 보는 사람도 있다. 아이다 베이커는 맨스필드의 동료이자 간호사, 하녀 등 여러 역할을 수했하였고 후에 레슬리 무어(Lesley Moore)라는 필명으로 개명한다. 

어쨌든 1906년 12월 뉴질랜드로 돌아온 맨스필드는 자신이 영국적으로 변모했음을 깨닫고 뉴질랜드에서의 생활에 욕구 불만을 느낀다. 이 시기에 두 건의 동성애 사건이 일어난다. 소녀시절 알고 지내던 마아타(Maata)와 화가이자 삽화가였던 20대 여인 이디스 벤돌(Edith Bendall)이 상대였다. 

1908년 18개월만에 런던으로 돌아간 맨스필드는 그 뒤로 죽을 때까지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다. 이때부터 그녀는 '모더니즘적'이며 '우연적'인 삶을 산다. 영국에 도착한 맨스필드는 자신을 양녀로 입양한 트로웰(Trowell)부부의 아들 가넷(Garnet)과 연애관계를 일으킨 후 트로웰 부부와 관계가 소원해지자 충동적으로 조지 보든(George Bowden)이라는 남자와 결혼한다. 그러나 결혼식 당일 신랑을 버리고 가과 재결합하는 돌출 행동을 벌인다. 그녀는 당시 임신중이었고 이를 알게 된 어머니는 유언장에서 맨스필드를 제외시키기까지 한다.

얼마 후 맨스필드는 폴란드 작가이자 번역가인 플로리안 소비에니옵스키(Floryan Sobieniowski)를 통해 체호프를 알게 된다. 두 사람은 동성애 관계로 발전하는데 이 관계에서 맨스필드는 임질에 옮는다. 하지만 병에 걸린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해 치료를 받지 않았고 이로 인해 류머티즘으로 고통 받았고 불임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18년 봄에 맨스필드는 보든과 이혼하고 존 미들턴 머리와 결혼한다. 

한편 맨스필드는 남동생 레실리 '처미' 보샹은 1915년 프랑스 전선에서 사망하는데 남동생에 대한 맨스필드의 감정은 조금 기묘했던 것으로 보인다. 맨스필드는 남동생을 자신의 뮤즈로 생각하였고 그의 죽음을 통해 자신에게 작가라는 소명이 요구되었다고 느낀 것으로 보인다. 

1917년 결핵에 걸려 치료를 위해 애쓰던 맨스필드는 자의식 강한 모더니즘 작가로 창작과 인생 모두에서 실험적인 면모를 드러냈고 D.H.로렌스, 버지니아 울프 등 당대의 작가들과 교류하며 상호 영향을 주었다. <가든파티와 그 외 단편들>을 완성한 후 병세가 악화된 맨스필드는 러시아의 도사 구르지에프(Grudjieff)가 프랑스 퐁텐블로에 운영하던 수상한 공동체에 합류하여 지내다가 사망한다.

(이상은 로나 세이지의 서문을 발췌한 것이다)

 

3월 9일부터 닷새간 잠들기 전 조금씩 읽었는데 한 권의 책을 읽으면서 이토록 몽롱하고 희미한 인상을 받기는 처음이다. 소설은 일정한 형식을 결여한 채 의식의 몽롱한 상태를 기술하기도 하고 모처럼 이야기라 할만한 것이 전개되다가도 말줄임표와 같은 애매한 결말로 끝나버리기도 한다.

사실 한 권의 소설을 읽고 희미하고 몽롱한 인상만 받은 데에는 모더니즘 작가들에 대한 나의 이해가 저열한 탓도 있겠지만 맨스필드가 쓰는 이야기들이 전연 나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탓도 있다. 맨스필드가 써내려가는 중언부언의 안개 속에서 감지되는 것은 분열의 징후와 퇴폐적인 경향을 가리려는 허위의식 들이다. 

 

수록된 단편들


<만에서(1922년 1월)>

<죽은 대령의 딸들(1921년 5월)>

<낯선 사람(1921년 1월)>

<어린 소녀(1920년 10월 29일)>

<브릴 양(1920년 11월 26일)>

<마 파커의 일생(1921년 2월 26일)>

<하녀(1920년 12월 24일)>

<비둘기 씨와 비둘기 부인(1921년 8월 13일)>

<현대식 결혼(1921년 12월 31일)>

<항해(1921년 12월 24일)>

<첫 번째 무도회(1921년 11월 28일)>

<이상적인 가족(1921년 8월 20일)>

<가든파티(1922년 2월)>

<노래 수업>

<은행 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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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트로이카 - 1930년대 경성 거리를 누비던 그들이 되살아온다
안재성 지음 / 사회평론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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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유는 1903년 함경북도 삼수군 별동면 선소리에서 이각범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이각범은 일제에 순응해 그럭저럭 밥벌이를 하는 면서기였는데 동네에서는 어느 정도 인심을 얻고 살았던 듯 하다. 삼수의 보통학교에 잠시 다니던 이재유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어 자퇴한다. 1919년 이재유가 열 다섯 되는 해에 '삼일만세운동'이 일어난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한 동리에 살던 사회주의자 박기춘이 처형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두 사건은 이재유에게 큰 영향을 미쳐 그가 조선의 독립을 위해 사회주의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도록 만든다.

더 배우고 싶은 욕심에 무작정 서울로 향한 이재유는 막노동판을 전전하는 한편 도서관에서 독학을 시작한다. 이 당시 접한 책이 일본의 사회주의자 가와카미 하지메가 번역한 <유물사관>이었다. 신선한 충격을 받은 이재유는 이후로 사회주의 서적을 집중적으로 탐독하였고 열여덟 살 생일날 아침 스스로 사회주의자가 되었음을 선언한다.

 

보성고보 입학시험에 붙었으나 돈이 없어 몇 달 다니다 그만둔 이재유는 중병으로 죽음을 앞둔 아버지의 간청에 따라 고향 이웃 마을의 나이 많은 처녀와 반강제로 결혼식을 올린다. 1924년의 일이다.

이듬해에 개성의 송도고보에 입학하지만 사회과학연구회를 만들어 동맹휴학을 주동했다가 1926년 11월에 퇴학당한다. 이재유는 인천을 거쳐 동경으로 떠난다. 

 

일본에서 노동을 하는 한편 공부를 한 이재유는 두 번 낙방한 끝에 일본대학 전문부 사회과에 입학한다. 하지만 역시 석 달 만에 학비가 없어 그만둔 후에 동경대학교 신인회가 주최하는 노동 야학에 다닌다. 사토 마나부, 후쿠모토 가쓰오 같은 유명한 사회주의자들로부터 직접 사회주의 강연을 듣는 한편 '전국무산자평의회' 같은 일본인 노동조합에도 가입해 집회와 교육에 참석하여 활동한다. 이러한 활동이 인정되어 얼마 뒤에는 좌우익 진보 지식인의 총집결체인 '신간회' 동경지회 위원으로 피선되고, '동경조선노동조합' 같은 몇 단체의 중요한 핵심 인물로 추대된다. 이때부터 이재유는 경찰서를 내 집 처럼 드나드는 인물이 되었는데 삼 년 동안 일본 경찰에 일흔 번이나 연행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그가 송도고보에 들어간 1926년 결성된 '조선공산당'은 와해와 재건을 되풀이하고 있었는데 1928년 네 번째로 조선공산당이 재건되고 그 하부 조직으로 일본총국이 세워졌을 때 이재유는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어 '고려공산청년회' 일본총국의 선전부장을 맡게 된다. 이 일로 검거가 반복되다가 급기야 경성으로 압송되기에 이른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이재유는 그곳에서 김삼룡과 이현상을 만나 사귀게 된다. 이재유는 이들과 함께 '경성트로이카'를 결성한다. 

 

김삼룡은 소탈한 성품을 가진 대중조직가 스타일로 해방 후에는 남로당의 실질적 남한 총책임자로 일하였다. 전향한 남로당원의 제보로 은신처가 발각되어 도주하다가 체포되어 함경도 지역의 전설적인 운동가 이주하와 함께 전쟁 발발 직후 처형 당한다. 

이현상은 고지식한 성격에 지독한 원칙주의자였는데 혁명에 관계되지 않으면 농담조차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해방 후 지리산 빨치산 총대장으로 활약했는데 그가 이끈 부대가 바로 '남부군'이다. 북한은 남한과 휴전협상에 들어가면서 이현상의 '남부군'을 매우 껄끄러워했고 그런 이유로 방치되다시피 하다가 국군의 매복에 걸려 총에 맞아 죽는다.

 

한편 동덕여고 출신의 자생적 운동가들이 이재유를 찾아오는데 이관술, 이순금, 박진홍, 이효정이 그들이다.이관술은 동덕여고 교사로 원래는 민족주의적 성향을 지니고 있었으나 민족주의자들이 일제에 순응하고 변절하는 과정을 지켜본 후 한계를 느껴 사회주의로 전향한 케이스였다. 사심없이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해야할 일이 무엇인가 고민하고 선택하는 성향이었기 때문에 화려한 면은 없었다. 그래서 일본경찰들은 이관술이 마지못해 이재유에 동조한다고 보았으나 이재유 검거 후에도 이관술은 '경성꼼그룹'을 결성해 '경성트로이카'의 활동을 계승한다. 후에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라는 조작에 휘말려 달러를 위조했다는 혐의로 사형당한다.

이순금은 이재유의 이복동생으로 활달하고 의리있는 성격이다. 감옥에서 운동을 하려면 이재유에게 가라는 말을 듣고 친구들을 이재유에게 소개시킨다. 한때 이재유의 아지트키퍼를 하는 짧은 기간 동안 이재유와 동거를 하는데 이 때문에 언론에서는 이순금과 박진홍, 이재유를 삼각관계라 보도하며 도덕성에 흠집을 내려한다. 김삼룡에게 연정을 느껴 그와 동거하기도 했고 경성꼼그룹이 해체된 후에는 박헌영과 함께 광주로 잠적해 그의 연락책을 맡기도 한다. 아이러니한 점은 월북 후에 박헌영이 미제국주의 첩자로 몰려 사형을 당하는데 그 증인으로 이순금이 채택되었다는 점이다. 이순금이 정확히 어떤 증언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이순금이 살아남아서 요직을 꿰찬 것으로 보아 박헌영에 불리한 진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박진홍은 좌우익을 통틀어 가장 뛰어난 머리를 지니고 있는 재원이었다. 문학에 소질이 있었으나 조국의 현실 앞에서 한가롭게 문학을 할 수는 없다며 사회주의 활동에 투신했는데 후에 이재유와 사랑에 빠져 그의 아이를 임신한다. 박진홍은 임신한 상태에서 검거되어 고문을 받다가 감옥에서 아이를 출산한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아이는 일찍 죽고 만다. 이재유를 끝까지 지키다가 그가 옥사하자 김태준과 함께 연안으로 떠나 항일무장독립투쟁을 준비한다. 해방 후 남한에 들어온 뒤 김태준이 검거되자 월북하는데 그 이후의 행적은 알 수가 없다.

 

이재유는 일본인 공산주의자로 경성제국대학 교수인 미야케와도 교분을 쌓는다. 경찰에 쫓겨 그의 집에 은신하게 되었을 때 미야케는 자신의 집에 지하 토굴을 파고 이재유를 숨겨 주었고, 경찰에 검거된 뒤에는 하루 동안 은신처를 발설하지 않고 고문을 버틴다. 

 

이재유의 '경성 트로이카'는 대중적인 토대를 중요시하였기 때문에 전위를 조직하려는 분파와는 종종 충돌이 있었다. 또한 국제선과도 원만하게 지내지 못했는데 정태식은 이재유를 '분파주의자'로 낙인 찍고 그가 제안하는 '투쟁을 통한 자연스러운 통합'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았다. 

'경성 트로이카' 맴버들이 저마다의 강인한 의지와 활동력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직적인 활동을 일정하게 펼치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갖은 검거와 구속으로 이재유, 이현상, 김삼룡이 함께 활동한 시기는 거의 없었고, 이관술과 이순금, 박진홍 등도 감옥과 바깥을 교대로 드나드는 식이었기 때문에 정세를 분석하고 통일된 강령 하에 행동하기란 상당히 어려웠다. 이재유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고무받아 NPN의 발간을 지향하며 팸플릿을 유포하고 이를 통해 조직을 강화하려 하였으나 발간은 3회에 그치고 말았다. 

 

1936년 12월 4일 체포된 이재유는 6년의 형량을 언도받고 복역하였으나 예비검속제도 때문에 출소하지 못하고 1944년에 옥사한다. 폐결핵과 각기병 때문이었다. 

 

이재유는 해외에서 학습받은 사회주의 사상으로 국내에 돌아와 학자연하는 활동가들과는 거리가 멀었고 그들을 신뢰하지도 않았다. 정세가 불리하고 탄압이 거세진다고 해서 해외로 망명하지도 않았고 언제나 자신이 발 딛고 선 자리의 대중조직을 강화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래서 코민테른의 지도를 받는 국제선과의 연대도 형식적인 통합이어서는 안되고 '투쟁을 통한 연대'의 형태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경성 트로이카>는 <파업>으로 제2회 전태일 문학상을 수상한 안재성이 우연히 이효정과 끝이 닿아 시작된 소설로 <일제하노동운동사>, <이재유 연구> 등의 저서를 집필한 김경일 교수의 도움을 받아 1930년대 '경성 트로이카'를 중심으로 한 혁명가들의 운동과 사랑을 소설로 복원한 것이다. 

그러나 이미 비전과 전망을 내려놓은 작가는 어쩐지 흔들린다. 흔들리는 작가는 이재유를 부여잡고 집요하게 파고들기를 저어한다. 그래서 이재유는 소설 속에서 감옥에 들락날락하는 전설적인 인물이되, 그의 사상의 요체는 무엇이고 활동 양상은 어떠했는지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 점에서는 김삼룡과 이현상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활동은 권두에 사진에 부연된 설명이 거의 전부이다. 

 

http://blog.naver.com/rainsky94/8020885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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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라, 잡상인 - 2009 제3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우승미 지음 / 민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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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맨이었다고는 하지만 딱 한 차례 방송에 출연해 대사 한 마디 해본 게 전부인 철이는 커오는 후배들에게 밀려 개그맨을 그만둔 후 만화방에서 시간을 보낸다. 만화방 대여료와 중국집 외상값이 점점 불어나자 철이는 할머니 조지아 여사의 소개로 지하철 잡상인계의 판매왕 미스터 리를 소개 받게 된다. 그는 감색 양복에 선글라스를 끼고 어눌한 말투로 물건을 팔았는데 신기하게도 사람들은 그의 물건을 홀린 듯 사갔다. 철이도 미스터 리의 사사를 받은 후 칫솔을 판매하기 시작했는데 벌이는 신통치 못했다.

겨우 칫솔 하나를 팔아 천원을 번 어느 날, 지하철에서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할 뿐 아니라 지금은 아이까지 임신해서 몹시 힘들다는 내용의 종이 쪽지를 돌리던 수지를 만난 철이는 번돈 천원을 고스란히 그녀에게 주고 만다. 그리고 그날 이후 철이는 수지의 모습이 아슴하게 눈에 밟힌다. 다시 수지를 만난 철이는 그녀에게 하루 매상을 온전히 줄테니 바람잡이를 해달라고 제안하고 2인 1조가 된 둘은 십만원을 넘는 매상을 올린다. 그녀는 그 돈으로 New Trolls의 공연 티켓을 산다. 듣지 못하는 수지가 콘서트 티켓을 산 것을 의아해하자 그녀는 소리는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들을 수도 있다고 항변한다. 그리고 그 말대로 그녀는 벤치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New Trolls의 음악을 들었다.

수지는 동화를 그려 생계를 꾸려갔는데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하지는 못했고 다른 작가가 수지의 그림을 리터칭하여 사용했다. 수지는 자신의 처지가 비참하게 생각되면 지하철에 나와 그렇게 '수치심'을 파는 행동을 함으로서 삶을 견디고 있었다.

수지는 자신보다 더 장애가 심한 동생 효철과 함께 살았는데 효철은 듣지도, 말하지도, 보지도 못했다. 또 효철에게는 왕싸가지 여자친구 지효가 있었는데 똑부러진 성격이 철이와 잘 맞지 않았다. 어쨌거나 철이는 수지네 집에 놀러가서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는 게 좋았고 남는 시간에 지효에게 수화와 점자를 배우기도 한다. 

수지의 뱃속에 있는 아이의 아빠가 되기로 결심한 철이는 수지를 조지아 여사에게 데려가 소개시키고, 조지아 할머니는 마냥 수지의 달덩이 같은 배를 쓰다듬는다. 철이는 수지의 살갗으로 솟구치는 아이의 앙증맞은 발을 만지며 세상 모든 것들을 다 용서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지하철 잡상인이라는 흥미로운 소재와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인상적인 소설이다. 다만 호흡이 짧은 것이 흠이다. 항상 이런 류의 소설을 읽을 때면 '판타지'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된다. 삶에 대한 작가의 믿음이나 바램이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서 작품이 현실을 정확히 반영하지 못하고, 작가가 바라는 모습으로 등장 인물들이 행동하기 시작하여 결국 현실에 대한 왜곡이 일어난다면, 그것도 일종의 '판타지'가 아닐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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팅커스 - 2010년 퓰리처상 수상작
폴 하딩 지음, 정영목 옮김 / 21세기북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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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워싱턴 크로스비는 죽기 여드레 전부터 환각에 빠지기 시작했다. 거실 한가운데 놓인 빌려온 병원 침대에 누워 천장 회반죽에 생긴 상상의 균열로 벌레들이 빠르게 들락거리는 것을 보았다.

 

조지는 자신이 이제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고, 가족들 역시 그 사실을 알기에 조지의 주변에서 임종을 지키기 위해 머물고 있다. 그는 은퇴한 후에 시계를 고치며 살았고, 꽤 많은 돈을 여러 은행에 예치해 두었다. 가족들에게 예치한 돈의 액수를 정확히 알려주지 않았고, 가지고 있는 시계 콜랙션의 가치도 평가절하하여 일러 두었다.

죽음이 다가올수록 조지의 기억은 과거로 치닫는다. 조지의 아버지 하워드는 마차에 잡화들을 싣고 오지 마을을 돌았다. 하워드는 간질병이 있었다. 간질병이 지나갈 때 하워드는 번개를 맞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아내는 언제나 조용히 하워드의 간질 발작을 처리했기에 하워드는 아내가 자신의 병을 감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하워드가 아이들 앞에서 발작을 일으킨다. 하워드가 혀를 깨물지 못하도록 조지가 돕는 과정에서 손을 깨물린다. 하워드의 아내는 의사와 상담한 후 받아온 정신병원 브로슈어를 하워드가 볼 수 있도록 놓아둔다. 브로슈어를 본 하워드는 자신이 지금까지 아내에 대해 잘못 생각해왔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날로 집을 떠나 다른 고장으로 가서 전혀 다른 삶을 시작한다.

이제 하워드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생각한다. 하워드의 아버지는 목사였는데 무언가를 적으며 많은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노력들이 거듭 될수록 설교는 형편 없어졌다. 설교를 하면서 범신론적인 관점을 웅얼거리는 것까지도 좋았다. 어느 날 악마에 대해서 관용적인 발언을 한 후 그는 목사의 직을 계속 유지할 수 없게 된다. 하워드의 아버지, 즉 조지의 할아버지는 그 후로 점차 존재감이 희미해져 간다.

조지가 죽으면서 마지막으로 기억한 것은 1953년 크리스마스 저녁식사였다. 그날 사라졌던 조지의 아버지 하워드가 조지를 방문했었다. 하워드는 가족들의 안부를 묻고, 만나서 반가웠다고 말한 후, 떠나는 게 좋겠다면서 곧 돌아갔다. 그 기억을 끝으로 조지는 사망한다.

 

조지가 병원에서 빌려온 침대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는 순간이 고통스러운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동양에서 일컫는 오복(五福) 중 하나가 고종명(考終命)이다. 천명(天命)을 다 살고 죽는 것이 바로 그것이니 조지는 고종명을 누렸다 할 수 있고, 주변을 정리할 시간도 누린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죽음을 기다리는 순간에는 누구를 떠올리게 될까? 작가 폴 하딩은 아버지를 떠올릴 것이라 가정하고 소설을 시작한다. 왜 아버지일까? 보통은 어머니가 아닐까? 게다가 조지의 아버지 하워드는 간질병 환자로 조지의 손을 나무토막 대신 깨문 후에는 가출하는 등 살갑고 정겨운 존재가 아니었다. 그런데 조지가 죽기 직전 떠올린 것이 그의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조우했던 크리스마스의 기억이었다는 것은, 조지의 무의식 영역에서 죽기 전 어떤 식으로든 아버지와 정식으로 작별 인사를 해야 한다는 부채의식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가출했고, 다시 찾아왔을 때에도 곧 서둘러 떠나갔으므로.

죽음과 환상, 기억에 대한 명상적 이미지들이 환상적인 이 작품은 폴 하딩의 처녀작이고 퓰리처상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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