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16 (완전판) - 엔드하우스의 비극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16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원경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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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남부 해변도시 세인트 루에서 휴가를 즐기던 에르큘 포아로는 엔드하우스의 상속녀 닉 버클리 양이 누군가에 의해 살해 당할 위기에 처해있음을 알게 된다. 그녀의 침대 머리맡에 매달려 있던 무거운 액자가 떨어지는가 하면 바윗덩어리가 그녀를 아슬아슬하게 비껴갔고, 자동차 브레이크가 고장나기도 했다. 그리고 포와로와 처음 만나는 날에는 총알이 그녀의 모자를 뚫고 지나갔다.

포와로는 닉을 살해하려는 동기가 무엇인지 조사해보았지만 이렇다 할 소득이 없었다. 그녀는 엔드하우스를 상속받았지만 부채가 많았기 때문에 재산을 노렸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원한 관계도 드러나는 것은 없었다. 포와로는 닉에게 함께 있어줄 수 있는 친척을 초대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조언했고, 닉은 이에 따라 사촌 매기를 불러들인다.

포와로는 닉의 주변 인물들을 차근 차근 조사해 나간다. 그녀 주변에는 마약에 중독된 것으로 보이는 프레드리커 라이스 부인과 그림 중개상 짐 래저러스, 그리고 퇴역 해군 중령 조지 챌린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엔드하우스의 오두막으로 이사온 크로프트 부부가 있었다.

프레드리커 라이스는 닉이 거짓말쟁이라면서 그녀가 살해당할 뻔 했다는 얘기 자체가 넌센스라고 말했다. 하지만 포와로는 닉이 죽을뻔한 일 자체는 틀림 없었기 때문에 프레드리커가 그렇게 말한 것에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했다. 한편 짐 래저러스는 엔드하우스에 있는 별 가치 없는 그림을 비싼 값에 사려고 한 적이 있었다.

파티가 있던 어느 날, 매기가 짐의 숄을 걸치고 있다가 피격 당해 사망하고 만다. 엔드 하우스의 하녀 엘렌은 사망한 것이 매기가 맞는지 묻는 등 불안한 태도를 보인다. 닉은 큰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포와로에게 세계일주 모험을 하다가 실종된 새튼과 자신이 약혼한 사이라는 것을 밝히며 이제는 어떻게 되든 상관 없다는 태도를 보인다.

새튼의 숙부는 영국에서 둘째 가는 부자였는데 얼마 전 그가 사망하면서 새튼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주었다. 그리고 새튼은 셰계일주 모험을 떠나기 직전, 약혼자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주겠다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이제 닉의 유언장에 재산을 받기로 되어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만 밝혀내면 모든 비밀이 풀릴 것이다.

그런데 닉이 작성하여 크로프트씨가 우편 발송했다는 유언장은 그의 사촌 찰스 바이스에게 도착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요양원에 머물던 닉이 외부 음식은 일절 입에 대지 말라는 포와로의 지시를 어기고 초콜릿을 먹었다가 위급한 상황에 빠진다.

초콜릿을 산 사람은 래저러스, 배달한 사람은 프리드리커였는데 프리드리커는 닉이 전화를 걸어 초콜릿을 부탁했다고 말한다.

사건은 점점 미궁에 빠지자 포와로는 한 가지 일을 꾸민다. 그는 닉이 사망했다고 모든이에게 알린 것이다. 그러자 갑자기 행방이 묘연했던 유언장이 등장하는데, 상속인은 뜻밖에도 크로프트 부인이었다. 그때 닉이 등장하고, 런던 경시청 경감 재프가 크로프트 부인은 유명한 위조범이었다고 증언한다.

그렇다면 크로프트 부인이 모든 일을 꾸민 범인인가?

 

아가사 크리스티의 열두 번째 장편이자 에르큘 포와로가 등장하는 다섯 번째 장편인 <엔드하우스의 비극>은 사실 뛰어난 작품은 아니다. 여러가지 트릭 사이에 일관성이 없고, 독자와 모든 정보를 공유하지 않은 채 범인을 지목하는 결말에 이르러서야 닉과 매기의 이름이 같았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예상 외 결말에 독자가 자신이 놓친 부분을 떠올리며 무릎을 친다면 훌륭한 미스터리이다. 반면 정보 자체를 숨기고 있다가 범인을 지목하며 공개하는 것은 속임수이다.

 

워크숍 기간 중 읽었다. 매일 출근하던 곳으로 새삼 워크숍을 가니 그다지 감흥이 일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서울N타워, 청와대, 종묘, 광화문 등지를 가이드와 함께 돌 수 있었고, <시카고>도 관람했으니 나름 호강한 셈이다. <시카고>는 어쩌다보니 이번에도 인순이가 공연하는 것으로 보게 되었는데, 처음 관람할 때 느꼈던 지루함만 다시 확인하고 말았다. 뮤지컬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지 못하고 헉헉 대는 인순이를 보다 보니 나도 숨이 가빠왔다. 장마가 주춤하더니 오늘은 무척 덥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절기가 이제 곧 끝나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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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1
치누아 아체베 지음, 조규형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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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콩코가 아홉 마을과 그 너머까지 이름을 알린 것은 열여덟 젊은 나이에 일곱 해 동안 한번도 패하지 않은 '고양이' 아말린제를 내던져 마을에 명예를 안겨 주었기 때문이다. 오콩코는 아버지 우노카가 어떤 칭호도 얻지 못한 채 성공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던 것을 항시 부끄럽게 생각하였고, 자신은 남자로서 당당한 삶을 살고자 했다. 부단히 노력한 결과 오콩코는 남들 못지 않은 집을 짓고 커다란 창고에는 얌을 비축하였으며 부인은 셋을 얻었다.

어느 날 부족이 이케메푸나라는 아이를 오콩코에게 맡긴다. 이케메푸나는 우무오피아 여인이 살해당하자 사건을 일으킨 마을에서 화해를 청하며 보낸 포로였다. 3년간 오콩코와 지내면서 이케메푸나는 오콩코를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고, 오콩코 역시 이케메푸나를 자랑스러워 하였다. 또한 이케메푸나가 큰아들 은웨예의 소심하고 게으른 측면을 극복할 수 있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3년째 되던 해에 이케메푸나를 죽이라는 마을의 결정이 내려진다. 오콩코는 언제나 남자다운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기 때문에 이케메푸나를 자신의 도끼로 내리쳐 자신이 어떤 일에든 주저하는 사람이 아님을 보인다. 그 사건이 있은 후 얼마간 오콩코는 평상심을 잃고 동요한다.

오콩코는 나약한 큰아들 대신 딸 에진마가 아들로 태어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다. 에진마는 오그반제였다. 오그반제는 엄마 뱃속에서 태어난 후 곧 죽어 다시 엄마 뱃속으로 들어가길 반복하는 악독한 아이를 말했다. 주술사의 도움을 얻어 겨우 이이우와를 파낸 후에 에진마는 한동안 건강하게 자라는 듯 했다. 하지만 또 다시 이바 열병에 걸리고, 거의 나을 즈음 주술사가 아그발라에게 대면시킨다며 한 밤중에 데려간다. 오콩코가 주술사를 따라갔던 것은 남자다운 면모는 아니었지만 에진마에 대한 애정을 나타내는 사건이었다.

마을의 장로 에제우두가 사망한 장례식 때 오콩코의 총이 오발 사고를 일으켜 에제우두의 아들을 죽이고 만다. 그 일로 오콩코는 7년을 추방당한다.

 

오콩코는 마을에서 추방당한 후 가산의 관리를 친구 오비에리카에게 맡기고 외삼촌 우첸두의 마을로 떠난다. 외삼촌 우첸두는 오콩코에게 아이들의 이름 가운데 은네카, 즉 어머니는 가장 위대하시다'라는 이름이 제일 많은 이유를 묻는다. 우첸두는 이에 대해 '모든 일이 무사하고 삶이 달콤할 때 사람은 아버지의 땅에 속하지만 슬프고 고통스러울 때는 어머니의 땅에서 위안을 찾기 때문이라며 오콩코를 위로한다.

그 즈음 백인들이 한 마을 주민을 몰살시켰다는 흉흉한 소문이 들렸다. 교회를 지어 자신들의 신을 부정한다는 얘기도 돌았다. 오콩코의 큰아들 은워예도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다. 종교가 들어온 이후에는 재판소가 생겨나고 주민들이 백인을 해친 이유로 교수형에 처해지기도 한다. 그리고 마침내 오콩코의 7년에 걸친 추방이 끝난다.

 

마을로 되돌아온 오콩코는 과거의 지위를 되찾기 위해 애를 쓴다. 하지만 애초 기대와 달리 그의 귀향은 큰 주목을 끌지 못했다.

새로운 종교도 조상신들이나 악령들에 의해 저절로 소멸될 것이란 기대와 달리 소외된 부족민들에게 공감을 얻어갔다. 이로 인해 교회와 마을 사람들의 갈등이 심화되던 어느 날,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인 마을 청년 하나가 우구구의 가면을 벗겨버린 일이 발생한다. 우구구는 마을의 조상신인데 가면이 벗겨지면 영혼이 죽어버린다고 간주되었다. 분노한 주민들이 교회를 부수고, 오콩코를 포함한 여섯 명의 우무오피아 대표단이 구속되어 가혹한 대접을 받는다. 백인 재판장은 마을 주민들에게 이들을 돌려받고 싶다면 조가비 이백 자루를 벌금으로 바치라고 강요한다. 마을 주민들은 순순히 벌금을 모아서 이들을 돌려 받자 오콩코는 분노한다.

마을 사람 모두가 모이는 집회가 열린다. 오콩코와 함께 잡혀갔던 오키카가 백인들에 대항에 봉기해야 한다고 연설을 한다. 그때 군중들이 소란스러워 지더니 재판소가 보낸 전령이 들이닥친다. 전령의 우두머리가 집회를 해산하라고 명하자 분노한 오콩코의 도끼가 그의 머리를 베어낸다. 나머지 전령이 도망친다. 오콩코는 그들이 도망가도록 내버려둔 마을 주민들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음을 예감한다.

재판장이 오콩코의 집으로 들이닥쳐 그의 신병을 요구하자 오비에리카가 오콩코의 시신을 보여준다. 그리고 오콩코가 그들의 법도를 어기고 자살했기 때문에 동족들은 그의 시신을 수습할 수 없다고 했다. 모든 말을 들은 재판장은 자신의 책에 써넣을 좋은 에피소드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책의 제목은 "니제르 강 하류 원시 종족의 평정"이 될 것이다.

 

오전에는 비가 많이 흩뿌리더니 오후엔 후덥지근한 날씨가 이어졌다. 마치 우기에서 건기로 넘어가는 시기와 같이. <모든 것이 산산히 부서지다>를 읽기에 그럴싸한 날씨라는 생각을 했다.

책을 읽으면서 <암흑의 핵심>을 떠올렸는데 역자 조규형 역시 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치누아 아체베는 조셉 콘래드에 대해 매우 비판적으로 생각했는데 그가 아프리카를 문학 작품의 진지한 배경으로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를 백인에게 도덕적 아노미를 일으키는 공간으로 대상화 했다는 것이다.

<지옥의 묵시록>의 시각적 이미지가 너무도 강렬했었고, 그 후 소설을 읽었기 때문인지 몰라도 <암흑의 핵심>을 떠올리면 다른 무엇보다도 아프리카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떠오른다. 바로 그런 점이 치누아 아체베가 불편하게 생각했던 점일 것이다.

 

이 작품은 <타임>선정 100대 영문 소설, <뉴스위크> 선정 100대 명저, <옵저버>선정 인류 역사상 가장 훌륭한 책에 선정되었다고 한다. 사실 아프리카 못지 않은 침탈의 역사를 갖고 있는 남한 독자들에게는 그다지 새로운 내용이 아닌 고로 서양인들에게 주었던 그러한 충격과 감동을 기대하기엔 무리일지 모른다. 소설은 나이지리아 공용어인 영어로 쓰여졌고, 나이지리아에 비극을 가져다 준 자들은 이 소설에 갖가지 찬사를 보냈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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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깊은 계단
강석경 지음 / 창비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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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는 고고학 강의를 하며 고도(故都) 경주에서 발굴 작업을 하고 있다. 아버지는 치과 의사이고 어머니는 법학을 전공한 후 신문사 일까지 했던 엘리트이다. 작은아버지는 사업을 해서 큰 돈을 벌었는데 첩을 두었다. 첩은 강희와 소정을 낳는다. 강희는 강주의 사촌 형이고, 소정은 사촌 누이가 된다.

강희는 어머니가 첩이라는 사실을 안 후부터 독립적인 성격이 되어 자기 앞가림에 골몰한다. 독일로 유학을 가 10년이라는 세월을 연극 공부를 하고 한국에 돌아온 강희는 아라발의 <환도와 리스>를 무대에 올릴 예정이었다. 여배우들은 강희의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과 연극에 대한 열정에 이끌려 그를 거의 숭배하다시피 했다. 강희는 그런 여자들과 관계하면서도 결코 곁을 주지 않았다.

한편 소정은 강희가 독일에 가 있는 동안 어머니와 살았다. 큰아버지가 취직시켜준 은행에 잠시 다니기도 했지만 지금은 도서관 사서가 되어 있다. 수더분하다고 생각되던 남편과 결혼했지만 오산이었다. 남편은 끝내 어머니를 장모라 부르지 않았고 소정을 첩의 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다른 사랑에 상처받은 직후 소정과 결혼한 것이었다. 소정은 그 사실을 알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소정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강주의 약혼녀 이진에게 강희가 무대 음악을 맡아달라고 부탁한다. 이진은 바이올린을 전공하고 유학까지 다녀 왔지만 다른 동료들에 비해 자신의 감성이 부족하며 그것은 노력으로 극복될 성질이 아님을 잘 알았다. 아라발의 연극에 참여하는 동안 이진은 강희 때문에 불편한 자신을 깨닫는다. 강희가 선을 넘으려는 기색을 보이자 이진은 뿌리친다. 하지만 이진은 자신의 마음에 파문이 일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소정이 중국 여행을 떠난다. 강주가 꼭 가보고 싶다던 창사를 여행하면서 신라사를 공부하는 일본인 히로를 만난다. 소정은 히로에게서 따뜻한 사랑이 어떤 것인지 깨닫는다. 돌아온 소정은 남편과 이혼하고 호주로 유학을 간다.

강주는 강희가 가변차선을 잘못 들어선 탓에 교통사고를 당해 죽고, 이진은 자신의 뱃속에 강주의 아이가 자라고 있음을 깨닫는다. 강희는 이진에게 자신들은 운명이라며 청혼한다. 결혼한 후에도 강희는 자신의 헛헛함을 이기지 못해 끊임없이 여자를 찾아다니고, 이진은 끝내 강희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소설은 강주를 중심으로 네 명의 삶이 교차되며 여성성과 남성성, 정치권력과 폭력, 그리고 사랑에 대해 말한다. 또, 유물 발굴과 페르난도 아라발의 희곡 <환도와 리스>,  창사 여행이 각각 독립적인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하기도 한다.

강주를 통해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 궁금한다. 강주는 고고학을 전공하고 있고, 버스를 타고 이동하다가 극심한 공포를 느낀 후부터 버스는 물론이고 비행기도 타지 못한다. 자동차 역시 누군가 동승했을 때나 운전이 가능하다. 독재자 박정희가 고고학에 미친 긍정적인 영향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경주라는 고도(古都)에 살길 희망하던 강주는 결국 자동차 사고로 죽는다. 고고학, 이동수단과의 불화, 고도에 대한 집착, 개발에 대한 부정적 시각 등 강주는 변화와 가장 거리가 먼 인물이다. 그리고 유일하게 죽는 인물이다.

작가는 <환도와 리스>에서 리스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이를 수수방관하는 주변인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작가의 의도인지는 모르나 강주야 말로 소설 속에서 가장 순진한 인물이다. 그는 강희와 이진 사이의 일을 모르고, 첩의 자식도 아니며, 고고학에 도움을 주었는지 아닌지에 따라 독재자를 판단하기까지 한다. 얼핏 강주가 주인공 같지만 강주를 둘러싼 인물들의 이야기가 작품의 주조를 이룬다. 강주는 그들 모두를 알고 있는 매개체일 뿐이다. 어쩌면 강주의 순진성이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소설 속에서 또 알 수 없는 것은, 아니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것은 여성의 첫경험과 관련된 것이다. 처녀성을 '바치는'는 상황이 곧 남성에게 예속되는 상황임을 모르지 않지만, 처녀성을 '버리는' 상황이 곧 이의 극복이 아닐진대 여성 작가들의 소설 속에서는 자주 자신의 처녀성을 아무 남자에게나 '버리는' 상황이 자주 등장한다. '바쳐야 할' 중요한 '무엇' 이 아니라고 해서 아무데나 '버려야 할' 당위가 취득되는 것이 아닐텐데, 이 부분은 여성이 아닌 나로서는 언제나 수수께끼다.

 

누구의 가슴 속에나 저만이 딛고 내려가는 깊은 계단이 있어. 인간은 다 고독해. 고독해서 불안정하고 격정에도 휩싸이는 거야. 부나비처럼.

 

<숲속의 방>에서 <내 안의 깊은 계단>을 응시하는 작가의 시선은 소설가 양귀자의 표현대로 격조 높고, 서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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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복 세이초 월드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경남 옮김 / 모비딕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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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에 결말이 포함되어 있음

 

o 얼굴(顔)

 

소규모 극단에서 8년간 열심히 연기하던 이노 료키치가 거장 이시이 감독의 눈에 들어 비중 있는 조역을 맡게 된다. 

지난 번 영화 촬영 때는 그냥 넘어갈 수 있었다. 클로즈업 신도 없었다. 하지만 이번 촬영에서는 이시오카 사다부로의 눈에 뜨이지 않을 리 없다. 이노 료키치는 다시 한번 이시오카 사다사부로에 대한 흥신소의 보고서를 읽으며 회상에 잠긴다.

9년 전 좋아지내던 미야코가 자신의 아이를 밴 후 책임을 물어오자 이노 료키치는 그녀를 살해하기로 결심한다. 그녀를 속여 기차에 태워 시골로 가던 중 미야코가 알은 척 했던 이가 바로 이시오카 사다부로이다. 미야코의 사체가 발견되어 수사가 시작되고, 신문에는 그때 마주친 이시오카 사다부로가 범인으로 짐작되는 이의 얼굴을 기차에서 봤다고 적혀 있었다. 이노 료키치는 이시오카 사다부로와 생활권이 다른 곳에서 산다면 별 일 없으리라 생각하고 흥신소에 의뢰해 그의 거주지를 수소문해 왔다.

하지만 이제 사정이 달라졌다. 영화에 나온 자신의 모습을 이시오카 사다부로가 볼 것이 틀림 없다. 그를 살해해야 한다.

이노 료키치는 꾀를 내어 이시오카 사다부로에게 편지를 쓴다. 자신은 미야코의 친척이다, 범인으로 짐작되는 이를 찾아냈으나 확신이 서지 않으니 이시오카 사다부로가 직접 와서 확인을 해줬으면 한다, 그런 내용을 편지에 적고 기차삯을 소액환으로 바꿔 동봉해 보낸다. 편지를 받은 이시오카 사다부로는 고민하다 경찰에 편지를 들고 찾아간다.

경찰들은 긴장한다. 편지를 보낸 사람이 범인일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신문 기사에는 이시오카 사다부로의 이름이 나오지 않았고, 이시오카 사다부로의 소재지 역시 계속적인 관찰이 아니라면 알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형사 둘이 이시오카 사다부로와 함께 약속 장소로 향한다.

운명의 장난인지 이노 료키치와 이시오카 사다부로가 식당에서 합석을 하게 된다. 이노 료키치는 이시오카 사다부로가 자신을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을 눈치챈다. 그는 해방감에 눈물마저 흘린다. 약속 장소에는 나가지 않는다.

얼마 후 이시오카 사다부로가 이노 료키치가 나오는 영화를 우연히 보게 된다.이노 료키치가 기차에서 담배 피우는 모습이 클로즈업 된다. 9년전의 기억이 일순 떠오르며 그가 범인임을 알게 된다.

 

o 잠복(

 

 

o 귀축(鬼畜)

 

다케나카 소키치는 각 지방 인쇄소를 전전하며 기술을 배우던 중 스물 일곱에 오우메라는 여공을 아내로 얻는다. 둘은 열심이 돈을 모아 마침내 인쇄소를 차린다. 형편이 나아지자 소키치는 술집을 드나들게 되었고, 거기서 기쿠요라는 여자를 만나게 된다. 정을 통하던 밤 기쿠요가 자신을 책임질 수 있는지 묻자 소키치는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심정에서 그렇다는 대답을 한다. 관계는 8년간 지속되고 아이도 셋이나 낳는다.

어느 날 인쇄소에 불이 난다. 주변에 최신 설비를 갖춘 인쇄소가 들어서는 악재까지 겹치자 소키치는 기쿠요에게 돈을 가져다 줄 수 없었다. 기쿠요는 생활비를 졸라대고 소키치는 이에 응할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된다. 기쿠요가 마침내 인쇄소에 아이들을 데리고 와 담판을 짓고자 한다. 하지만 담담하게 응대하는 오우메의 서슬에 질려 기쿠요는 아이들을 내팽개친 채 가버린다.

오우메는 아이들을 키울 생각이 전혀 없다며 모든 육아를 소키치에게 맡긴다. 막내 쇼지가 영양실조에 걸려 앓는다. 어느 날 2층 방에 올라가보니 쇼지의 얼굴에 담요가 떨어져 있었다. 저절로 떨어졌더라도 쇼지의 얼굴에 떨어질 위치는 아니었다. 소키치는 오우메가 쇼지를 죽였다고 생각한다. 알 수 없는 것은 자신의 마음이었다. 홀가분함을 느낀 것이다. 그날 밤 오우메가 집요하리만치 소키치를 유혹하여 둘은 정사를 나눈다. 절정의 순간에 오우메가 요시코를 도쿄에 내버리고 오라고 시킨다. 소키치는 오우메가 시키는 대로 하고 돌아온다.

오우메가 가장 싫어하는 아이는 큰애인 리이치였다. 리이치는 종이나 석판석의 파편에 그림을 그리고 놀 뿐 말도 별로 하지 않고 오우메를 슬슬 피했다. 오우메는 소키치를 시켜 리이치에게 청산가리를 조금씩 먹이라고 한다. 하지만 리이치는 청산가리 맛을 느꼈는지 먹은 음식을 뱉어내곤 했다.

바다에 빠뜨리려던 계획도 실패하자 이번에는 잠이 든 리이치를 낭떠러지에서 떨어뜨린다. 소키치는 리이치가 자신과 조금도 닮지 않았으므로 기쿠요가 부정한 짓을 해서 낳은 아이라 생각하며 죄책감을 덜어내려 한다.

다음 날 낭떠러지 중간에 걸려 있는 흰 물체가 어부들에 의해 발견된다. 아이는 탈진 상태였다. 경찰은 아이에게 이런 저런 질문을 던졌지만 아이는 아빠와 놀러 왔다가 잠에 든 후 떨어졌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아이의 주머니에서 나온 돌을 마침 경찰들의 명함을 전해주러 왔던 인쇄업자가 알아본다. 석판석을 복원해 인쇄하자 거기에 소키치가 인쇄했던 라벨이 찍혀 나온다. 경찰은 살인미수사건으로 보고 수사에 착수한다.

 

o 투영(投影)

 

다무라 다이치는 도쿄의 일류 신문사에 다녔지만 부장과 불화를 일으켜 사직하고 세토 내해에 있는 S시로 이사한다. 처음 얼마간은 퇴직금으로 그럭저럭 버텨냈지만 점차 형편이 곤란해지자 아내 요리코가 호스티스로 일을 하기 시작한다. 다무라 다이치도 계속 낚시나 하며 태평하게 지낼 수만은 없어 <요도신보>라는 지방지에 면접을 보러간다. 말이 신문이지 병석에 누워 있는 사장 한 명에 기자도 한 명뿐인 신문사였다. 하지만 더운 밥 찬 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S시에는 시장파과 보좌파가 다투고 있었다. 보좌파는 시의원과 공무원을 마음대로 주무르며 부정 부패를 일삼고 있었다. 그렇다고 시장파가 청렴한 것도 아니었다. 히타나카 사장은 병석에 누워 있으면서도 신문이 시정의 정의를 바로잡는 역할을 해야 한다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취재를 위해 시청을 어슬렁 거리던 다무라 다이치는 우연히 미나미 토목과장이 덩치 큰 사내에게 곤경을 치루는 장면을 목격한다. 같은 신문사 동료인 신로쿠에게 물었더니 덩치 큰 사내는 이시이 엔키치라는 시의원으로 보좌파를 좌지우지 하는 인물이라고 했다. 그는 항만 한쪽에 철사 공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최근에 항만 확장 공사가 확정 됨에 따라 철사 공장의 보상비 명목으로 400만엔을 요구했다. 그런데 미나미 토목과장이 한푼도 줄 수 없다면서 버티고 있는 것이다.

내막을 캐보니 철사 공장의 토지소유주는 이시이 엔키치가 아니었고, 공장 건물 자체도 무허가 건물이었다. 이시이 엔키치는 항만 확장 계획을 미리 입수한 직후 남의 땅에 무허가 건물을 지어 시청의 돈을 우려내려고 했는데 미나미 토목과장에 가로 막힌 것이다.

얼마 후 미나미 과장의 부하 직원 야마시타가 새로 신설된 항만 과의 과장으로 승진한다. 야마시타는 이시이 엔키치의 충복이었다. 승진을 축하하는 술자리가 끝나고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가던 미나미 과장이 절벽에서 떨어져 사망한다.

다무라 다이치와 신로쿠는 철사 공장 보상비가 600만엔이나 항만과에서 지급되었다는 사실을 입수한다. 미나미 과장은 살해당했다고 전제하고 둘은 조사를 시작한다.

미나미 과장이 죽던 날 밤 가로등을 야마시타의 아들이 공기총으로 쏴 깨뜨렸다는 사실, 사진을 좋아하지도 않던 이시이 엔키치가 촬영회를 연다며 사진사들로 하여금 연신 플래시를 터뜨렸다는 사실에서 다무라 다이치는 미나미 과장이 그들에 의해 살해되었음을 밝혀낸다. 미나미 과장이 한밤중에 이정표로 삼는 불빛을 이들은 거꾸로 만들어내어 자전거가 집과 반대편에 위치한 절벽으로 향하게끔 유도한 것이다.

도쿄로 돌아가게 된 다무라 다이치는 의기에 넘치는 히나타가 사장과 신로쿠를 생각하며 가슴 뜨겁게 눈물을 흘린다.

 

o 목소리(聲)

 

다카하시 도모코는 모 신문사의 전화 교환원이었다. 어느 날 기자의 요청에 따라 전화를 연결하다가 실수로 엉뚱한 번호에 연결한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그곳이 화장터라며 장난을 친다. 곧 누군가 억지로 수화기를 내려놓는 기색과 함께 전화가 끊긴다.

그런데 다음 날 세타가야에서 주부가 살해된 강도 살인 사건이 보도된다. 도모코가 전화를 잘못 건 곳이 범행 장소였다. 도모코의 제보 덕택에 두 명 이상이 범행했다는 사실은 밝혀졌지만 목소리만으로는 범인을 잡아 낼 수가 없었다. 도모코는 시게오와 결혼하면서 회사를 그만 두게 된다.

시게오는 결혼 전부터 낭비벽이 심하고 책임감이 없었는데 결혼 후에도 그 습벽은 여전해서 금새 회사를 그만 두게 되었다. 그 후 시게오는 6개월을 빈둥대더니 수상한 회사에 취직을 한다. 월급은 가져왔지만 봉투에 회사명이 적혀 있지 않았고 명세서도 없었다. 그리고 마작을 한다며 수시로 회사 동료를 데려왔다.

어느 날 하마자키라는 자가 마작에 올 수 없다며 전화를 걸어오는데 목소리를 들은 도모코는 경악하고 만다. 도모코는 평소 하마자키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는 아무런 느낌도 갖지 못했었는데 전화기를 통해 목소리를 듣자 그가 3년 전 범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도모코는 무서운 마음이 들면서도 하마자키의 목소리를 다시 한 번 들어 모든 것을 확실히 해두고 싶었다.

한편 시게오의 동료들도 도모코의 태도 변화를 통해 그녀를 의심하여 뒷조사 하게 되고 결국 3년 전 목소리를 들은 교환원이 도모코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들은 도모코를 유인해 살해한다.

경찰은 도모코의 사체를 부검한 결과 폐와 코에서 석탄이 나왔다는 점과, 저탄고 인근에서 그녀의 핸드백이 발견된 점을 알아낸다. 유력한 용의자로 시게오의 동료들을 조사했지만 저탄고 까지의 거리를 왕복하기에는 그들의 알리바이 공백 시간이 너무 짧았다.

석탄 시료를 채취하기 위해 봉투에 담아가는 것을 본 한 형사가 용의자들이 저탄고에서 범행이 일어난 것처럼 꾸민 후 사다코를 밀폐된 공간에 가두고 석탄 가루를 흡입시켰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o 지방신문을 구독하는 여자(地方紙を買う女)

 

시오타 요시코가 <고신신문> 앞으로 선금을 보내 구독을 신청한다. 연재중인 <야도전기>라는 소설이 재미있는 것 같아서 받아보려 한다는 내용과 함께.

신문이 도착하자 요시코는 자신이 찾는 내용이 있는지 꾸준히 신문을 읽는다. 구독한지 한 달 정도 지나자 찾던 기사가 발견된다. 동반 자살한 남녀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기사다.

<고신신문>에서 구독기간 연장 여부를 묻는 엽서가 도착한다. 요시코는 아무 생각 없이 <야도전기>가 재미없어져서 구독을 종료한다는 답변을 보낸다.

<야도전기>의 작가 스기모토 류지는 불쾌한 생각이 든다. 소설이 점차 흥미 진진해 지려는 판국에 재미 없어졌다는 여성 독자의 엽서가 아무래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여러가지 생각해보니 그녀는 도쿄에 살면서 <고신신문>을 구독한 것으로 보아 소설 때문이 아니라 특정 기사를 찾기 위해서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19일부터라고 명토 박아 신청한 점을 보면 18일 즈음 일어난 어떤 사건이 신문에 나는지 보려는 것 같았고 한 달이 종료된 시점에 구독을 중지했으니 그녀가 찾던 기사가 신문에 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과연 신문에는 동반자살한 남녀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있었다.

흥신소를 시켜 조사해보니 죽은 남자는 요시코와도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였다. 스기모토 류지는 여러가지로 요시코를 떠본다. 요시코는 스기모토 류지가 무언가 눈치 챘음을 알고 그에게 접근해 친한 척을 하더니 함께 놀러가자고 권한다. 친한 여자 한 명을 더 데려오라면서.

스기모토 류지와 요시코, 그리고 또 한 명의 여자가 산 속으로 놀러간다. 요시코가 초밥을 꺼내 스기모토 류지와 다른 여자에게 권한다. 스기모토 류지는 초밥을 못 먹게 하면서 청산가리로 두 남녀를 죽인 후 동반 자살로 위장했을 거라는 추리를 말한다. 요시코는 말도 안된다면서 초밥을 모두 자신이 먹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얼마 후 요시코의 유서가 스기모토 류지에게 날아든다. 죽은 남자는 백화점 경비원으로 여성에게 도둑질 했다는 누명을 씌운 후 농락하는 사내였고 거기에 걸려든 요시코는 몸은 물론이고 돈까지 빼앗기고 있었다. 남편이 시베리아에서 곧 돌아오게 되자 요시코는 그로부터 벗어나야 겠다고 결심하여 살해한다. 초밥에는 독이 없었다. 초밥을 먹으면 목이 마를 것이니 주스에 타두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요시코는 주스는 자신이 마실 것이라면서 유서를 마친다.

 

o 일 년 반만 기다려(一年半待て)

 

29세의 스무라 사토코가 남편을 살해한 죄로 구속당한다.

사토코는 전쟁 중 여전을 나와 회사에 취직했다가 스무라 요키치를 만나 결혼한다. 스무라 요키치는 학벌이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에 회사에 구조조정이 닥쳐오자 해고되었고, 그 후로도 신통치 못한 회사를 전전하다가 결국 백수가 되고 만다.

사토코가 보험외판일을 하여 생계를 꾸려가기 시작한다. 밉지 않은 외모와 지적인 말투 덕분에 보험은 잘 팔린다. 경쟁이 심화되자 댐 건설 현장으로 가서 남들보다 발빠르게 마케팅을 성공시키기도 한다. 점차 벌이가 좋아진다.

하지만 남편이 술을 입에 대기 시작하고 여자에 빠져들더니 급기야 사토코와 아이들을 구타하기 시작한다. 매일 밤 구타가 반복되던 어느 날 아이들을 때리는 남편을 사토코가 장대를 휘둘러 살해하고 만다. 사정이 알려지자 여론이 들끓는다. 사토코는 징역 3년, 집행유예 2년의 가벼운 처벌을 받게 된다.

어느 날 사토코의 변호를 맡았던 다카모리 다키코에게 오카지마 히사오라는 남자가 찾아온다. 그는 사토코 사건에 관해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오카지마 히사오는 사토코가 남편과의 잠자리를 6개월간 거부한 뒤 술집을 운영하는 자신의 친구 집에 남편을 보내 성적 불만을 해소하도록 유도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사토코는 댐 건설 현장에 찾아와 자신이 미망인이라고 말했다고도 했다. 건설 현장의 건장하고 정렬적인 사내와 무기력한 남편이 비교되었을 것이라고도 했다. 그는 자신이 하는 말은 모두 추측이라고 했다. 다카모리 다키코는 그렇다면 더 들을 것이 없다고 말한다. 오카지마 히사오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떠난다. 스무라 사토코는 히사오가 청혼하자 일년 반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그리고 정확히 일년 반 후에 사토코는 집행유예를 받았다. 그녀의 유일한 오산은 일 년 반을 기다리게 한 남가자 도망갔다는 것이다.

 

o 카르네아데스의 널(力ルネアデスの舟板)

 

사학과 교수 구무라 다케지는 은사 오쓰루 게이노스케로부터 사사받았다. 오쓰루 게이노스케는 대정익찬회라는 우익 단체에 참가하는 등 우편향 사학자였고 국가주의적 역사론을 강의하고 저술했다. 그리고 그 이유로 학계에서 추방당했다.

이를 본 구무라 다케지는 마르크스주의적 유물사관으로 발빠르게 전향하여 교과서, 참고서를 집필해 큰 돈을 번다. 구무라 다케지는 은사를 찾아가 자신의 성공을 자랑하고 싶었다. 은사는 생각보다 영락해 있었고 제자에게 비굴했다. 비굴한 이유는 그의 추방이 곧 끝날 것이고, 6개월 뒤에 학교로 복귀하도록 힘을 써달라는 청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시큰둥한 구무라 다케지의 운동에도 불구하고 오쓰루 게이노스케는 대학에 복귀한다.

오쓰루 게이노스케는 구무라 다케지의 집과 벌이를 보더니 자신도 좌편향으로 돌아선다. 그리고 구무라 다케지를 열심히 쫓아오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 즈음 교과서의 검정 체계가 바뀌더니 좌편향 인사들의 교과서가 무더기로 탈락한다. 구무라 다케지는 더 이상 좌편향 저술은 먹혀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다시 노선을 바꿔타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오쓰루 게이노스케가 한 발 먼저 우편향을 선언하고 나설 참이었다.

구무라 다케지는 오쓰루가 먼저 우편향을 선언하고 나서면 자신의 전향이 두드러져 보일 것이고 그렇게 되면 기회주의적이라는 비판이 날아올 것이 겁이 났다. 그 때 카르네아데스의 널이라는 형법 학설이 떠올랐다. 물에 빠져 널판을 잡고 있는 두 명 중 한 명만 살아남을 수 있는 상황이라면 다른 사람을 바다에 빠뜨리고 살아남더라도 무죄라는 학설이었다. 구루마 다케지는 자신의 정부 류게쓰를 사주하여 오쓰루에게 강간 누명을 씌워 고소하고 그를 학계에서 쫓아낸다.

얼마 후 구무라 다케지가 류게쓰를 살해한 혐의로 입건된다. 그는 류게쓰와 오쓰루의 관계를 사주했으면서도 그 후로 류게쓰가 다른 남자와 관계했다는 점을 견디지 못했고 결국 다툼 끝에 모든 것을 폭로하겠다는 류게쓰를 살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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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모토 세이초를 흔히 사회파로 분류하는데, 작가 자신도 그러한 분류에 동의했는지는 차치하고 여기 소개된 8편의 단편은 그의 초기작들로 미스터리이면서도 수수께끼 풀이보다는 범죄의 동기, 혹은 범죄가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조건이나 배경에 천착한 작품이 많다.

데뷔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잠복>은 사실 미스터리 작품이 아니라고 봐도 무방한 스토리이고, 작가 자신도 이를 미스터리 작품으로 여기지는 않았다고 한다. 지루하고 틀에 박힌 일상에서 잠시나마 생의 활력을 얻어 탈출을 꿈꾸던 여자는 상대 남자가 검거됨과 동시에 다시 박제와 같은 삶으로 돌아간다. 담담한 묘사가 일품이다.

<얼굴>과 <목소리>는 인간의 기억에 관한 관찰이다. 직접 얼굴을 보았으면서도 알아보지 못하다가 영화 속 특정 행동을 하는 얼굴은 알아본다든가, 육성을 식별하지 못하다가 전화기 속 목소리는 식별해낸다는 설정이다.

아이를 살해한 후 극도의 욕정을 느끼는 <귀축>의 오우메나 치밀한 계획을 세워 남편을 살해하고 형벌을 가볍게 받는 <일 년 반만 기다려>의 사토코를 통해서는 남녀 관계의 미묘함과 인간 존재의 악마적 속성을 그리고 있는데, 마쓰모토 세이초는 이러한 악마적 속성이 특정 조건 하에서 발현되는 과정을 정묘하게 보여준다.

 

마쓰모토 세이초를 처음 접한 것은 책을 통해서가 아니라 드라마를 통해서였다. 기타노 다케시의 팬임을 자처했으므로 드라마 <점과 선>은 고대하던 작품이었다. 허름한 모자를 쓰고 지겹게도 걸어다니며 사건의 단서를 수집하는 형사 주타로 역이 기타노 다케시였다.

더운 여름, 여덟 편의 단편을 읽으며 행복을 느낀다. 마쓰모토 세이초는 지독히도 많이 써냈고, 나는 지금까지 <잠복>을 포함해 그의 책을 세 권 읽었을 뿐이다.

 

http://blog.naver.com/rainsky94/80193535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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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을 위한 우산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5
빌헬름 게나치노 지음, 박교진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화자인 '나'는 46세의 중년으로 구두를 신어본 뒤 착화감을 보고하는 것으로 푼돈을 벌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일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구두를 신고 도시의 여기 저기를 돌아다니며 사람과 사물을 관찰하는 것이 그의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그는 도시를 돌아다니며 어렸을 적 친구들을 만난다. 친구들의 모습은 영락한 '나'의 모습, 혹은 영락할 수 밖에 없는 그 나이대의 인간을 표상하는 것 같다. '나'는 사소한 사물들과 영락한 친구들의 모습을 보며 '나' 스스로에 대해서 생각하고 분열의 예감에 공포를 느끼기도 한다.

 

여자친구 리자는 얼마 전 '나'를 떠났다. 리자만이 유일하게 '나'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었지만 2년간 모은 통장의 잔액을 나에게 맡겨둔 채 어느 날 집을 나갔고,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녀에게 연락하고 싶지만 함께 사는 친구가 전화를 받아 원치 않는 대화를 해야 할 것만 같아 그만둔다. 대신 '나'는 방에 낙엽들을 흩뿌려 놓는다. 어렸을 적 낙엽을 한쪽으로 모으면서 느꼈던 그런 아늑함을 다시 맛보며 리자를 잊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미장원에 간다. 그곳은 60년대 이후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 같은 실내장식과 집기들을 갖추고 있다. 그곳에서 마르고트와 관계를 갖는다. '나'는 미장원에서만 그녀에게 관심을 갖는다.

구두 테스터 일의 임금 조건이 나빠진다. 상황이 달라졌다며 사례금이 1/4로 삭감된 것이다. '나'는 구두를 벼룩시장에 내다 판다. 그리고 착화감에 대한 보고서는 순전히 거짓으로 작성한다.

경제적 위기가 눈 앞에 닥쳤는데도 '나'에게는 별다른 대비책이 없고 적극적으로 타개해 나갈 만한 의지도 없다. 그 즈음 연극배우로서의 삶을 꿈꿨으나 현재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는 수잔네와 우연히 만나 점심을 함께 한다. 얼마 후 저녁에 초대받은 '나'는 수잔네의 손님들에게 허황된 말을 지껄인다. '나'의 그럴싸한 말에 발크하우젠 부인이 반응을 나타내자 한술 더 떠 기억술과 체험술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고 내뱉고 만다. 손님들은 강렬한 인상을 받은 눈치다. 손님 중에는 힘멜스바흐도 있었다. 그는 대학 시절 친구로 사진작가를 꿈꿨으나 재능과 끈기가 없어 실패했고 꿔간 돈을 갚지 않은 자였다.

힘멜스바흐는 '나'에게 신문사 사진 작가 자리를 따내는데 힘을 써달라고 부탁한다. 청탁을 위해 신문사를 찾아간 '나'는 엉뚱하게도 기자 자리를 제의 받고, 힘멜스바흐의 부탁은 거절된다. 그에 대한 미안함은 미장원의 마르고트를 힘멜스바흐가 집적거리는 것을 본 것으로 상쇄된다.

발크하우젠 부인이 권태를 이기지 못해 '체험술 연구소'를 운영하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온다. 시덥잖은 잡담을 나눈 댓가로 200마르크를 벌고, 그녀는 자신의 치유 효과를 다른 이들에게 광고까지 해준다. 경제적 배경이 생겼다는 느낌을 받는다. 리자에게 전화를 해서 얼마나 건실한 삶의 배경이 생겨났는지 얘기해 주고 싶을 지경이다.

 

신문사에서 원하는 기사를 쓰기 위해 축제에 참가한다. 그곳에서 한 아이가 담요로 자신만의 동굴을 만들고 있는 것을 본다. 강렬한 자극이 넘치는 축제와 아이의 동굴이 대비된다. '나'는 어쩐지 그 아이가 '나'를 위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와 같다고 생각한다. 기사를 신문사에 넘겨준 후 '나'는 동굴이 무사한지 확인하러 그곳에 다시 간다. 소년은 보이지 않았고, 그녀의 어머니는 동굴이 망가질새라 조심조심 발코니를 지나다녔다. 축제의 흔적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내 교육 수준으로 보자면 나는 중요한 사람일 수 있고 내 지위를 보자면 그렇지 않은 것이다. 진짜로 중요한 사람들이란 오직 자신들의 학식과 지위를 삶 속에서 서로 융화시켜나갈 수 있는 사람들이다. 단지 교육만 많이 받은 나 같은 아웃사이더들은 어디에 몸을 숨겨야 할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 현대판 거지에 불과하다.

 

'나'의 자조적인 고백이다. 일제 강점기에, 지식을 써서 밥벌이를 할 곳이란 일제에 부역하는 곳 외에는 없다는 사실에 절망한 지식인들이 스스로 룸펜을 자처한 것이 역사적 타의에 의한 것이라면, 빌헬름 게나치노는 '자기 내면의 동의'라는 개인적 차원의 문제에 천착하고 있다.

개인(주체)과 사물(객체)의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인식한 화자는 그 원인을 '자기 내면의 동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때문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 분열 상태에 빠지지 않을까 우려하면서도 끊임 없이 타인의 삶과 사소한 이웃들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고 곧바로 이를 부정하기도 하는 등 혼란스러운 양태를 보인다.

자신을 유일하게 이해해주던 여인의 부재, 자신이 유일하게 돈벌이하고 있는 직업을 박탈 당할 위기에 직면해서도 화자는 이를 개선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보이지 않는다.

연인의 부재를 이겨내기 위해 낙엽을 주워다 방에 늘어놓는 행위와 전화를 걸지 않으려 이유를 대는 화자의 행동은 영화 <중경삼림>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중경삼림>이야 말로 의사소통에 관한 가장 훌륭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금성무는 통조림 유통기한에 의미를 부여하고, 임청하의 구두를 닦아준다. 왕정문은 양조위의 집을 몰래 청소해주고 양조위는 비누와 대화를 나눈다. 가장 주목할 만한 대조는 금성무가 무선호출기를 버리는 행동과 양조위가 잉크가 번진 냅킨 항공권을 간직하는 행동이다. 금성무는 끝내 계속 달리기를 해야 할 운명이고, 양조위는 액면이 날아간 수표일지언정 통용에 성공할 것이다.

<이날을 위한 우산>의 화자는 금성무의 운명이 될 공산이 크다. 그는 끝내 리자에게 전화를 걸지 않는다. 

 

http://blog.naver.com/rainsky94/80193423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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