뱁새족 - 박경리 장편소설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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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 무한, 실로 욕망 무한이로다 <뱁새족 - 박경리>

 

 

 

 

 

 

   우리나라에서 '뱁새'라는 말은 누구나 다 아는 속담 때문에 부정적으로 얘기되는 경우가 많다. 박경리 작가의 <뱁새족>또한 그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노골적인 비판의식이 담긴 책이며, 1960년대의 한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시대, 산업화 시대의 경제성장으로 많은 이들은 세속적인 욕망을 가지고 자본주의 파도에 견뎌내기 위해 힘썼다. 그 중 지식인과 상류층을 대상으로 박경리 작가는 이 소설을 펴냈다. 작가는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미술평론가 (지적 욕망만을 꿈꾸는) 병삼의 입을 빌려 그 당시 상류층과 지식인들의 허세를 비판한다모든 것에 대해 무관심하고 답답해보이기까지 하는 병삼은 자신을 포함한, 주변 인물들의 속물적 욕망에 대해 냉소적인 시선을 보낸다.

   

  그 당시 서울의 가장 핫플레이스였던 공간에서 각자의 인물들이 대화를 통해서 드러내는 허세를 보면 참으로 다양하다. 실력도 없으면서 연예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 지고지순하게 사랑에 목매는 사람, 학자 행세를 하는 사람,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 다이아몬드를 입으로 삼키기도 하는 사람 등... 이것이 자기 주제를 모르고 다리가 찢어질 정도로, 자신의 욕망을 위해 마구 달리는 뱁새족들의 모습들이다. 말 그대로 욕망무한이다. 병삼은 이를 보고, 자신을 재능도 없으면서 천재가 되어보겠다고 파리까지 비싼 여비 쓰고 갔다온 놈'이라고 욕하면서, 자신을 포함한 뱁새족을 비판한다. 그런 모습을 보면 왠지 기분이 좋지 않다.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을 넘어 우스꽝스럽고 어이없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 60년대의 뱁새족들이, 지금은 과연 없는 것일까? 결국 인간의 욕망과 허세는 시대에 발을 맞추기 위한 몸부림 끝에 어떻게든 따라오는 요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은 상황 서술보다는 대부분 인물들의 대화로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다. 특별한 사건들보다는 그들의 일상을 통해 그 시대 지식인들의 모습을 그려낸다. 실제로 있었던 시대의 산물인 영화와 소설 등의 이름은 문화 속에 투영된 사람들의 욕망을 더욱 생생하게 보여줄 수 있었던 장치로 존재한다. 아직 박경리 문학의 핵심인 '토지'를 읽어보지 못했지만, 박경리 작가의 소설 몇권을 읽어보니 이젠 약간은 박경리의 문체가 느껴지는 것 같다. 무언가 모르게 독특하다. 


 

  - 시뻘건 해는 빌딩 뒤편에 걸려 있었다. 꿈속의 풍경처럼 놀이깔린 시가는 너무 황홀하여 불안했다. 잇달아 밀려오는 차량, 그것들을, 전등 둘레를 미친 듯 선회하는 풍뎅이, 포도에, 건널목에, 구름다리 위에 군중들은 민적민적 떼 지어 지나가고 있었다. 서로의 어깨를 비비며 떠밀며. 음향과 음향은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을 듯, 황혼의 도시는 무성영화와도 같이, 사람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며 지나가는가, 자동차는 무슨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가, 짓눌린 침묵에 싸여 있는 것만 같았다. 병삼은 짙은 색채와 침묵이 덩어리로 엉켜, 그 덩어리가 전등 둘레를 미친 듯 선회하는 풍뎅이처럼 선회하는 것 같은, 광란의 의식에 쫓기며 길을 횡단한다. (51p)

 

  - '모두 허기가 들어서 저러는 거다. 눈앞에서 황금덩이가 번쩍번쩍하는데 구경만 하고 있으려니까, 답답하고 조갈증이 나서 저러는 거다. 욕망 무한, 실로 욕망 무한이로다.' 병삼은 묘하게도 자기 자신까지 슬퍼지는 생각이 들었다. (86p)

 

  - "가발 같지 않지? 글쎄, 말도 말어. 이젠 식모까지 미니컷이란다. 온 창피스러워서, 모두들 원숭이처럼 흉내는 자알 내지. 처지도 모르고, 어울리고 안 어울리는 것 가릴 것 없이, 줄에 엮은 동태처럼 너도나도야. 외국에선 유행이라면 상류사회를 돌다 마는 건데." (101p

 

  - 진실이 모욕이 되는 세상이죠. 뭐 오늘날만이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가랑이가 찢어져도 황새를 따라갈려는 뱁새의 비극은 바로 그것이 희극이라는 데 있죠. 재능이 없으면서 천재가 되어보겠다고 파리까지 비싼 여비 쓰고 갔다 온 놈을 위시하여 돈푼이나 긁어모은 상놈이 어느 명문 호적에 기재된 이름 석자밖엔 가진 것 없는 거지 처녀를 비단에 싸서 데려오는 위인, 졸업장 한 장 우물쭈물 얻어둔 덕택으로 학자 행세하게 된 인사, 남의 재산을 계산하고 장래의 대재벌을 꿈꾸는 사람, 사업가 호주머니 털어서 여자나 끼고 다니며 백성을 다스리는 정치를 넘보는 건달이 (...) 그리고 또오...... 많죠. (18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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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와 사랑 소담 베스트셀러 월드북 35
헤르만 헤세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199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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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지와 사랑 - 헤르만 헤세> 

 

 

 

 

 

  자신의 체험을 위해 그보다 더 문학을 필요로 했던 작가는 없을 것이라고 역자는 말한다. 이 말처럼 <지와 사랑>도 그러했다. (사실 원제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라는 제목이 더 좋다.) 그리고 많이 유명한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 그 밖에도 그의 많은 문학에 헤세의 삶이 녹아들어있다. 그의 어린 시절과 방랑에의 갈망, 예술과 동양에 대한 관심, 수도원 생활 등 문학에 표현된 주인공들을 보면 헤세라는 사람의 형체가 하나하나 머리속에 입혀지는, 그런 느낌을 받게 된다. 책들에 나타난 정신적 혼란과 철학적 고뇌 또한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헤르만 헤세는 헤세의 문학을 읽는다가 아닌, ‘헤세를 읽는다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작가일 것이다.

 

  이 소설에서 헤세는 두 명의 매력적인 인물을 내세워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성적인 인물로 대변되는 수도원의 나르치스’, 감성적이고 예술적인 인물인 골드문트’. 사람의 수많은 본성을 단순히 두 개로 나눈 것은 다소 의문이 들기는 하지만, 가장 극단적인 예를 들었다고 생각하려 한다. 첫부분에서 수도사와 학생 관계로 만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우연하게 이끌려 우정을 나누게 된다. 그리고 나르치스는 첫눈에 제자 골드문트의 숨겨진 본성을 느끼게 된다. 아니면 그의 눈빛이 그리고 있었던 감성을 읽어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어찌됐든 그러한 능력을 좀 더 자유롭게 분출시킬 수 있음을 골드문트에게 여러번 상기시킨다골드문트는 처음엔 그의 본성을 거스르려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역시 그 운명에 빠져들게 된다. 그는 여러 곳을, 여러 여자를, 여러 예술을 만날 수 있는 세계를 방랑하게 된다.

 

 골드문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 존재가 소설 속에서 여러번 다뤄지는데 그것이 '어머니'라는 것이다. 그에게 어머니는 이브이며, 행복의 근원인 동시에 죽음의 근원이며, 세계의 끝에서 꿈꾸듯 앉아서 꽃을 한잎 한잎, 생명을 하나하나 따서 천천히 끝없는 심연으로 던지는 거인이다. 골드문트가 방랑하며 지나가는 모든 것들에 어머니의 형상이 있고 고통스러운 죽음의 모습까지 '모상'이 입혀진다. 결국 그에게 어릴 때 죽은 어머니는 복합적인 세계로 다가오는, 삶에서 떨쳐버릴 수 없는 그 무엇인 것이다.

 

  책에서는 골드문트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며 그의 자의식을 찾는 여정이 마지막까지 계속된다. 그리고 그가 자유롭게 본성을 찾을 수 있게 만드는 조력자이자 스승이자 친구인 나르치스가 있다. 중간중간 헤세의 철학적인 물음들이 이어지며 그러한 고뇌는 후반부에 가서 거의 폭발하듯 보여진다. 헤세는 그 둘의 본성을 모두 다 가지고 있었으며 (그래도 굳이 말하자면 골드문트에 가깝다) 그 둘의 균형을 어떻게 맞추느냐에 대한 혼란을 가지고 있었을거라 추측해본다. 그래서 그의 이중성을 소설 속에 투영해놓은 것 같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사이에 시작된 이 새로운 우정은 실로 기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을 좋은 시선으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때로는 두 사람 스스로도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여기는 때가 많았다. 이 일로 인해 누구보다 괴로워하는 사람은 바로 사색가인 나르치스였다. 그에게는 일체의 모든 것이 정신이어서 사랑마저 그러했다. 때문에 아무런 생각도 없이 끌리는 대로 몸을 맡긴다는 것은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이 우정에 있어서 그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이끌어 가는 정신이었다. 그리하여 이 우정의 운명과 그 넓이와 의미를 확연히 자각하고 있는 이는 처음 얼마 동안은 나르치스 한 사람뿐이었다. 오랫동안 그는 사랑을 하면서도 고독을 느껴야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벗으로 하여금 스스로 깨닫도록 이끌어주어야 그 벗이 자신의 진정한 벗으로 완성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골드문트는 열렬히 그 새로운 운명에 몸을 맡겼으며 나르치스는 그 높은 운명을 지각하고 책임있게 그것을 받아들였다. (42p)

 

  - 그들 두 사람 사이에는 그 본성으로 보아 서로 상충되는 점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가 상대방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하여 그 둘 사이에는 이성의 언어와 더불어 영혼과 상징의 언어가 생겨나기에 이르렀다. 말하자면 어떤 두 채의 집 사이를 큰길이 하나 뚫려 말이나 마차가 다닌다고 가정한다면 그 옆에 다른 여러 개의 작은 길과 옆길과 샛길이 생겨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어린이들이 노는 놀잇길, 애인들의 산책로, 개나 고양이만 다니는 눈으로 찾아보기 힘든 길이 생겨나듯이. (58p)

 

  - “너희들의 본질은 어머니에게서 비롯된 거야. 너희들은 충일한 삶 속에서 사랑하고 체험하는 힘이 부여되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우리들 지성적인 사람들은 때때로 너희들을 인도하고 지배하는 것같이 보이지만 충일한 삶을 살아가진 못하지. 우린 메마른 생활을 하고 있어. 넘치는 삶, 즙이 흐르는 과실, 사랑의 화원, 아름다운 예술의 나라는 모두 너희들의 소유야. 너희들의 고향이 대지라면 우리들의 고향은 관념이야. 너희들의 위험은 감각의 세계에서 헤매는 것이지만 우리들의 위험은 진공 상태에서 질식하는 거야. 너는 예술가이고 나는 사색가야. 너는 어머니의 품 안에서 잠을 자지만 나는 황야에서 잠을 자는 거야. 나의 눈은 태양을 보지만 너의 눈에는 달과 별들이 보이는 거야. 너의 꿈에는 소녀들이 나오지만 내 꿈에는 소년들이 나오는 거야. (64p)

 

  - 어느 예술이나 정신의 근원은 어쩌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일 것이다. 우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며 무상에 몸서리치고 꽃이 시들고 잎이 지는 것을 슬픔으로 바라보며, 우리들 자신도 그처럼 덧없이 시들어 버리고 말리라는 것을 가슴속에서 확신하고 있다. 우리가 예술가가 되어 어떤 상을 만들거나, 사상가가 되어 법칙을 탐구하고 사상을 체계화한다면 그것은 그 크나큰 죽음의 무도에서 무언가 구해 내고 우리들 자신보다는 좀더 영속성을 지닌 그 무엇을 만들어 내기 위함이리라. (201p)

 

  - “우리들의 사색은 끊임없는 추상이며, 감각적인 것에 대한 외면임과 동시에 순수한 정신적인 세계의 건설을 위한 시도일세. 그러나 자네는 변하는 것과 유한한 것도 가슴에 받아들여 세계의 의미를 무상한 데에다 알려준다네. 자네는 무상한 것에서도 외면하지 않고 그것에 헌신하는데, 자네의 그런 헌신에 의해서 그것은 지고의 것으로도 될 수가 있고 영원의 비유로도 될 수가 있네. (369)”

 

 

 

골드문트는 그 이름 Gold(금), Mund(입) 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려진다. 여자도 많다.

흔히말해 나쁜 남자 + 예술가 스타일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팜므파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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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 탐정 설록수
윤해환 지음 / 씨엘북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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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콤비 완전 상큼해! <트위터 탐정 설록수 - 윤해환>

 

 

 

 

 

 

 

  우리나라에는 탐정이 없다. 있어도 외국탐정들이 들어와 있다거나 다른 이름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는 없는 탐정을, 간혹 추리소설을 읽거나 추리만화의 주인공을 떠올리면서 상상해보곤 했는데, 이런 상상을 증폭시키는 소설이 또한번 나왔다. 바로 <트위터 탐정 설록수>다.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가? 셜록홈즈! 그 유명하고 유명한 셜록홈즈가, 구수하고 정감가는 '설록수'라는 이름을 가지고 우리나라 탐정으로 재탄생했다. 왓슨 박사도 있다. 똑똑해보이지는 않지만 설록수에게 은근한 도움을 주는 '김영진'군. 그러나 셜록홈즈와 설록수가 다른 점이 있다면, 바이올린 대신 우쿨렐레, 안락의자 대신 앉은뱅이 의자, 편지로 의뢰를 받는 대신에 트위터로 의뢰를 받는다는 것!

 

 현재 우리나라에서 완전 열풍인 트위터로 의뢰를 받는 것도 신선한데, 설록수와 김영진의 콤비가 정말 상큼하다. 상큼이란 말이 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왠지 상큼하다라는 단어말고는 생각나지 않는다. 귀엽고 신선한... 그런. 서로 은근히 끌려다니고, 투닥투닥거리면서, 삐지기도 하고.. 끈끈한 우정도 아니고 사뭇 진지한 동료같은 느낌이 아니라 왠지 귀여운 친구같은 느낌, 아무튼 이들에겐 역시 사건들이 끊이지 않는데, 이 책에서 차례대로 추리 에피소드가 소개된다. 펭귄녀 이야기, 마을의 구렁이 사건, 아이돌의 도난사건... 그리고 트위터 모임의 살인사건까지. 갑자기 흥미진진한 소설을 읽고 싶어서 꺼내들었던 이 책에서 생각보다 풍성한 여러가지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다. 단지 그 중에 '협찬은 아무나 받나'이야기는 이전 한국추리스릴러 단편집에 나왔던 얘기여서 쬐끔 아쉬웠다.

 

  어찌됐든 이 많은 에피소드들을 설록수의 말 한마디를 기다리고 기다리면서 (그리고 흔히 탐정들이 하듯, 설록수의 '난 답을 알고있지'하는 허세를 느끼며 ㅋㅋ) 재미나게 읽었다. 후반부의 에피소드에서 나오는 작가님 블로그 이웃들의 악숙한 닉네임을 보니까 또 엄청 몰입이 되면서 컴퓨터 상에서 댓글놀이하는 분들이 꼭 모인 것 같아서 왠지 실감나고, 또 정말로 이런일이 있을 수도 있겠구나 하면서 책장을 또 넘기고. 역시나 <홈즈가 보낸 편지>때처럼 '안읽으면 섭섭할' 주석들에서 셜록홈즈 전집에서 나왔던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보고, 모르는 게 손해라는 걸 정말 크게 느꼈다. 이어서 설록수 다음 편도 나온다는데, 그때까진 셜록홈즈 몇권이라도 좀 읽고난 다음에 읽어야겠다. 개인적으론 이 설록수 시리즈가 왕창 나와서 책장에 순서대로 쫘악 진열해놀날이 왔으면.

 

 

 

 

  - 동이 트면 잠이 깨고 시험을 보면 성적표가 나오듯 설록수에 대한 화가 풀리자 남는 것은 설록수의 직업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대통령 이름도 모르는 설록수, 도대체 그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자기 입으로 백수가 아니라고 했으니 분명 직업이 있을 터였다. 하지만 남들처럼 매일 어디를 나가는 것도 아니니 회사원은 아닐 테고, 하루종일 방 안에 틀어박혀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면 게임이나 펀드로 재미를 보나 하겠지만 밖에 있는 시간 또한 그에 못지않았다. 의대에서 몇 번이고 목격하였기에 의사인가 싶었지만 그러기엔 너무 자유분방했고, 안 팔리는 인디 가수라고 하기엔 우쿨렐레 연습 시간이 너무 적었다. 이 정체불명의 남자는 유달리 만나는 사람도 많았다. 처음엔 성격이 워낙 기묘하여 사람들이 기피하지 않을까 싶었으나 뜻밖에도 꽤나 인기가 많았다. (24p)

 

  - 마루 건너편 창호문 너머, 설록수가 있었다. 내 손을 이끌어 함께 가자고 먼저 말해주었다. 설록수를 따라갔다가 나는,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눈으로 볼 수 없는 놀라운 세상을. (...) 충선대학교 야외무대에 해골처럼 키가 크고 비쩍 마른 사내가 서 있었다. 사내는 불안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나를 발견했다. 눈 주변에 주름이 잔뜩 잡히도록 해맑게 웃었다. 키만큼이나 긴 팔을 번쩍 들어 나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왓슨 박사, 왔는가!" (93p)

 

  - "불확실한 1퍼센트의 확률 때문에 눈앞에 있는 100퍼센트의 현실을 버리시겠다! 고작 로또가 뭐라고! 김영진 군, 내가 친절하게 가르쳐주지. 행복은 행운의 결과물 따위가 아니라네. 행복은 말이야. 현실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따르는 별책부록이야. 그러니 로또 따위는 잊어. 잊고, 눈앞에 사건에 집중하자고." (130p)

 

  - 저에겐 오래된 좌우명이 하나 있습니다. 아무리 믿을 수 없다하더라도 모든 불가능을 배제하고도 남았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실이다. (189p)

 

  - 나에게 트위터란 심심풀이 땅콩이었다. 트위터로 대화를 나누는 것은 나누는 것이고, 실생활은 따로 있었다. (...) 이상했다. 너무나 이상했다. 이 모든 것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그 사람들 속에서 혼자만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나 자신이 모두 이상하게만 보였다. (31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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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형제의 연인들 - 박경리 장편소설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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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한 시정과 향수, 사랑에 대한 이야기 <그 형제의 연인들 - 박경리>

 

 

 

  토지를 먼저 읽어봤음 좋았을뻔했지만 박경리 작가의 미출간작인 이 책을 작가의 첫 책으로 읽게 되었다. 산뜻하고 세련된 표지가 끼워진 <그 형제의 연인들>은 60년대 작품이고 신문에서 연재가 되기도 했지만 연재본을 발굴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아직까지 미출간작으로 남아있는 작품이다. 이 책은 제목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사랑과 형제에 대한 이야기인데, 통속적인 연애소설이나 불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세상의 많은 제약 속에서 이끌어가야할 사랑의 모습이 이 소설에 나타나 있다.

 

  이야기는 인성과 주성 형제의 여인들, 그리고 그들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실타래처럼 얽혀있는 그들의 관계에 대해 그려내고 있다. 의심으로 가득찬 부인과 함께 무미건조하게 살아가는 인성과, 나이차가 꽤 나는 친구의 누이를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주성. 그들은 비정상적인 사랑에 얽매여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한 관계에서의 결핍이 있었기 때문인지, 새롭게 등장하는 여인들에 대해 애정을 품게 된다. 그리고 그 애정을 표현하고, 기존에 있던 관계를 다시 도려내고, 사랑을 이어가는데 있어서 그 형제는 서투르고 완벽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위태위태한 사랑을 이어갈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고 그들 나름의 방법으로 사랑을 정리해나가면서, 보통의 정상적인 사랑으로 치부되는 관계 대신에 희생으로 일궈나가는 사랑도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그 밖에도 금기와 관습을 뒤로한 채 흔들리는 사람의 마음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 모습, 그리고 비정상적인 인물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욕망과 이기심을 표현해내고 있는 이 책은 단순한 사랑이야기가 아니라 더욱 매력있고 진중하게 읽을 수 있다. 언젠가 토지도 꼭 읽어볼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 따뜻한 피가 전신을 맴돌고 있는 것을 느낀다. 지금까지 여자에게, 아니 인간에게 대하여 느껴본 일이 없는 강한 인력, 그것은 인간에 대한 시정詩情이며 향수였다. 인성은 자기 자신 속에 그런 피가 세차게 잠을 깨고 있는 것에 스스로 놀란다. (73p)

 

  - "노오랗게 나뭇잎이 물들고 그러지 않아도 마음이 센티해지는데 그이의 죽음을 봤을 때 자살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어요. 뭔지 죽음이 아름다운 것만 같았어요. 나뭇잎이 굴러 떨어질 때 슬프지만 아름답다 생각하지 않으세요? 감상입니까? 감상이겠죠. 하지만 감상을 경멸만 할 게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어차피 사람은 다 죽게 마련이지만 저의 경우에 삶보다 죽음이 더 가깝고 의미가 있을 것만 같아요. 어떻게 사느냐는 문제보다 조용히 곱게 죽을 수 있는 일이 더 절실한 문제만 같았어요." (98p)

 

  - 그러나 허무해하는 감정을 빼버리는 일에 있어서 인성은 과연 의사일 수 있는지 그것은 심히 의심스런 일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 문제에 있어서 인성 자신이 환자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금까지 인생에 대하여 무관심하려 했던 인성이나 일종의 자학 의식에 사로잡힌 규희나 다 같이 육체보다 어떤 정신적인 환자가 아니었던가. 그 정신적인 환자들이 지금 서로 다가서려 하고 있는 것이다. (103p)

  - 한 생명이 방금 병원에서 마지막을 고했는데 그들 무생명체의 기계문명의 산물들은 마치 불사조처럼 그들의 생명을 구하고 있는 듯한 환각이 인성의 머릿속에 스치고 간다. 인성은 그 무생명체들이 오만스럽게 그들의 활동을 개시하고 있는데 대하여 별안간 울화가 치밀었다. 그는 달려들어 그것들을 모조리 때려 부수어 망가뜨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아아, 나도 역시 저들 무생명체의 조직의 한 부분이 아니었던가." (184p)

 

  - 중얼거리면서 주성은 남자와 여자의 커다란 차이점을 깨닫는다. 슬픔은 여자보다 더 컸을지도 모른다. 고통도 여자보다 더 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외골수는 될 수 없고 바늘처럼 가늘고 매서울 수는 없다. 여자의 슬픔이 예리한 것이라면 남자의 슬픔은 둔중한 것이다. 여자의 고통이 국부적인 것이라면 남자의 고통은 전신적인 것이 아니겠는가. (43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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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빙 더 월드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공경희 옮김 / 밝은세상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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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그냥 살아보는 거야 <리빙 더 월드 - 더글라스 케네디> 

 

 

 


  

 

 

  이전의 어떤 책에서 만난 하워드가 인생의 전환점에서 지혜를 얻고 긍정적인 자세로 살아왔다면, 이 책의 주인공인 '미스 하워드'는 태어날 때부터 거듭되는 불행으로, 인생을 삐딱하게 터덜터덜 살아간다. 그녀가 어릴 때, 무심코 부모앞에서 했던 선언은 부모와 자식간의 응어리가 되고 하워드에게는 공허와 죄책감을 안겨주게 된다. 대학교수의 제자로서, 또는 비밀연애의 대상으로서 학업과 경력, 사랑과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아슬아슬 줄타기하는 듯 살아가는 제인 하워드. 그녀에게 삶은 그리 호락호락하게 쭉 행복한 순간만 주지 않는다. 불행, 절망, 충격, 좌절.. 죽음과 포기까지.. 세상을 사는 것에 대해 두려움과 허무함을 느낄만한 그런 일들이 계속 찾아오게 된다.

 

   도대체 실패와 역경, 좌절 속에서도 우리가 왜 삶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할 것인가. 왜 살아야 하는가. 세상은 나에게 손을 내밀어주지 않는데 내가 왜 항상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할까. 하지만 불행 속 그녀의 선택은 일단, 그냥 살아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인 하워드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불행한 상황 속에서 안간힘을 쓰며 세상을 넘나 들게 된다. 마음 밑바닥 속에서 끌어올린 그 힘은 처음엔 조금 약했지만 결국 그녀는 자신 스스로 치유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비로소 자신의 어떤 작은 마음가짐과 행동이 인생의 큰 변화를 이끌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리빙 더 월드>는 절망 속에 빠져있는 많은 사람들을 위로할 책임에는 분명하지만, 사실 가끔 등장한 억지스러운 설정은 눈살을 찌푸리게 했고 읽기 힘들게 만들었다. '꼭 이렇게까지 했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렇게 까지 나락으로 떨어뜨려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런 불행한 설정을 대신 경험하면서 어쨌든 내가 살고 있는 순간에 감사할 그런 느낌은 충분히 들었던 것 같다. 실패에 무게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보다 덜한 힘듦에는 퍽 적응할 수 있겠다는 힘을 얻은 것 같다. 제인 하워드, 그녀도 어쨌든 일어날 수 있었으니까.

 

 

  - 갑자기 그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들 -대중에게 보이는 모습 뒤의 개인적인 슬픔-을 이해할 수 있을 듯했다. 그의 암울한 현실이 인생을 얼마나 바꾸어놓았는지 알 수 있을 듯했다. 그의 분노와 답답한 처지에 대한 하소연을 들으면서 '인생에서 가벼운 짐을 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목적지에 다 와간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모든 일이 엇나가기 시작하는 게 바로 인생이라는 생각....... (39p)

 

  - 매서운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해변을 걷다보니 갑자기 엔도르핀이 저절로 솟아나는 것 같았다. 마치 만물에 신성이 깃드는 순간을 경험하는 듯했다. 대자연에 압도적이고 위대한 힘에 저절로 경외심이 느껴졌다. 갑자기 삶의 시름도 저만큼 물러섰다. 어두운 빛깔의 성난 바다가 빚어내는 웅장한 풍경에 잡다한 생각들이 모두 녹아내렸고, 나는 비로소 환희를 느꼈다. 살아 있다는 느낌이 온몸을 관통했다. (145p)

 

  - "옳은 일을 해놓고도 피해를 당해야 한다니 너무 불공평해. 그렇다고 신념을 버리자니 양심이 허락하지 않을 테고. 결국 어떤 선택을 하든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라는 결론이네. 대단한 모순이지만 분명한 현실이기도 해."

 "왜 내 인생은 상호 모순되는 불운의 연속일까?" "우리는 해야 할 일은 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한다/ 그리고 그 일이 우리를 살아가게 해준다는 생각에 기댄다." (182p)

 

  - 사람들은 흔히 잘못된 관계와 상황을 바로잡고 싶어 한다. 많은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온갖 수수께끼에 반드시 해답이 있다고 믿는다. 개뿔! 현실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상처가 깊으면 치유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 (216p)

 

  - 천국은 두려움과 외로움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니까 혼자 있는 걸 겁내지 않을 거라 믿고 싶었다. 천국은 시간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니까 눈 한 번 감았다 뜨고 나면 60년의 세월이 흐르고, 상실감을 극복하지 못한 엄마가 암에 걸려 딸과 재회하게 된다고....... 그렇게 만난 엄마와 딸은 하느님의 자애로운 보살핌 속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아갈 거라 믿고 싶었다. 하지만 천국의 생은 생이 아니지 않은가? 말 그대로 천국이니까. 실제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곳이니까. 사람들은 어떻게 그 공허한 말을 믿을 수 있을까? 어떻게 그런 개념이 실제로도 존재한다고 설득할 수 있을까? 고통을 덜어주려는 의도는 가상하지만 결국 비참한 희망에 불과한 것을...... 천상이라는 개념을 발견하고 싶다면 브루크너나 바흐의 칸타타를 들으면 된다. 산길에서 하이킹하면 된다. 비행기에 올라 하늘을 누비면 된다. 그 대신 내가 극복하지 못할 상실감에 빠져 있는 동안 사후 세계에서 내 예쁜 딸을 잘 보살펴준다고 설득하려 들지는 말기를....... (404p)

 

 

 

 이 위의 404p 발췌부분은, 좌절감에 휩싸인 사람에게 어떠한 행동이 가장 큰 위로인지 제대로 보여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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