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스크로 가는 기차 (양장)
프리츠 오르트만 지음, 안병률 옮김, 최규석 그림 / 북인더갭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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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누구에게나 그리움의 공간이 있다 <곰스크로 가는 기차 - 프리츠 오르트만>

 

 

 

 

After Reading

 

 

 

 그대가 원한 것이 그대의 운명이고, 그대의 운명은 그대가 원한 것이랍니다. 

 

 처음 <곰스크로 가는 기차>라는 책을 알게 된 후로부터, '곰스크'라는 이름은 저절로 입안에서 맴돌았다. '곰스크'라는 이 어감 좋은 말은 계속해서 책에 대한 이야기를 궁금하게 했고, 한적한 숲을 지나 달리고 있는 역동적인 기차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곰스크'라는 공간은 내 생각보다도 더 아름답고 천국 같은 공간이었다. 적어도 주인공에게는 그랬다. 어디서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없었던 상상의 공간, 이름으로만 아버지의 극찬으로만 들었던 '곰스크'라는 공간은 비록 실재의 공간이었지만 상상으로만 떠올릴 수 있었던 꿈의 공간이었다. '나'는 자신의 삶을 지배했던 '곰스크'라는 땅을 밟아보기 위해서, 아내와 함께 기차를 탄다. 그러나 예상밖의 일들이 일어나게 되고, 곰스크로 가는 여정이 늦춰질때마다 '나'는 상심한다.

 

  '곰스크'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너무나 절절하게 느껴지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누구나 마음 속에 품고 있는 그리움과 갈망의 공간이 있으리라. 그 그리움이 커져갈 때 마음이 더욱더 애타고 그 공간으로부터 멀어져만 갈때 더욱더 생각이 날 것이다. 그 그리움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직은 모르지만 내 눈이 더욱 깊게 바라보고 있던 그 이유가 분명히 언젠가는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그 그리움의 충족이 안되었을 때의 내 모습은 어떨까, 좌절할까 또 다시 새로운 '그리움'을 찾아나설까. <곰스크로 가는 기차>는 느끼게 해준다. 행복이란, 내가 그토록 원했던 무언가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연하게 또 다른 곳에서 조금씩 조금씩 생겨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을.

 

  이 책에는 <곰스크로 가는 기차> 외에 다른 단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처음에는 장편의 웅장함을 기대했으나, 따뜻한 단편 소설들이 또한 아름다워서 아쉬움은 금세 잊혀졌다. 몽환적이고 평화로운 분위기의 단편들은 이야기가 정점없이 흘러가지만, 영상으로 보았으면 하는 기대가 너무나 클 정도로 아름다운 장면들이 많다. 물론 <곰스크로 가는 기차>도 영상으로 만들지 않으면 (혹은 연극?) 아쉬울 그런, 분위기의 단편이다. 그리 유명하지 않은, 작품도 많이 내지 않은 이 작가의 글이 오래도록 읽히는 건 그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이야기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Underline

 

 

 

  - 사람들이 모두 귀가한 밤이 돼서야 나는 밖으로 나와 몇시간이고 늦은 밤까지 초원을 돌아다녔다. 그 멀리 떨어진 곳에서 느끼는 고독이란. 탁 트인 곳에 혼자 있으면서 바스락거리는 풀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아주 편안했다. 바로 그런 고독만이 내 마음을 대변해주는 듯 했다. 하지만 목적없이 들판을 이리저리 쏘다니다가 우연히 철길을 마주칠 때면, 내 심장은 미친 듯이 고동쳤다. 초원을 가로지르는 칼날처럼 매끈한 이 철길이야말로 내가 꿈꾸었고 내 원래의 존재가 시작된 그 도시, 곰스크와 연결된 유일한 끈이었던 것이다. (35p, 곰스크로 가는 기차)

 

 

  - "이보게," 철학자는 그를 동정하면서 말했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네. 모든 것이 헛되지." "나도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네." 화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강가의 큰 다리로 갔었네. 내 삶을 끝내려고 말이네. 어둡고 비가 오는 날이었네. 섬뜩하게 거대한 강철 버팀대 사이로 바람이 쉭쉭거리며 불어오더군. 나는 난간에 서서 눈물을 흘리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네. 마치 자기 침대에 누워 영원한 잠을 청하라는 듯 은회색의 큰 물결이 끊임없이 흘러가는 것을 보았네. 갈매기 한마리가 저 밑에서 이리저리 날더니 날개를 적시고는 다시 높이 솟구쳐 그 떨리는 날개를 바람에 기대고는 바로 내 코앞에서 갑자기 멈췄네. 그것 역시 굉장히 슬펐지. 그때였다네. 갑자기 가까이서 바이올린 소리가 들렸는데 놀랍게도 열 거름도 못 미친 곳에서 눈먼 걸인이 바이올린을 켜고 있었다네." (91p, 철학자와 일곱 곡의 모차르트 변주곡)

 

 

  - 내가 올라타자 보트는 좌우로 흔들렸습니다. 작은 노를 힘차게 저어서 해변을 벗어났습니다. 바다는 낮게 찰싹거렸고 검푸른 바닥은 마치 흔들리는 유리창처럼 내 밑에 바싹 붙어 미끄러져갔습니다. 한기가 서린 바람이 희미한 수면에 물결을 일으켰습니다. 멀리 붉은 부표 저편에서는 흰 포말이 차갑고 캄캄한 물결 위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아주 멀리 은회색 안개에 휩싸인 반대편 해안이 희미하게 보였습니다. 구름은 하늘 전체를 뒤덮었고 주변은 기묘한 정적에 휩싸였습니다. 주변에 들리는 소리라곤 노를 저을 때 보트의 모서리가 삐걱대는 소리와 바다가 규칙적으로 출렁이면서 철썩거리는 소리뿐이었습니다. (105p, 붉은 부표 저편에)

 

 

  - 누구든 모래톱 길을 건너려면 제시간에 출발해야 한다. 사람들은 늦지 않았다고 생각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갑자기 사방의 물길을 따라 조류가 밀려드는 기이한 콸콸거림이 들려오면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보통 때 같으면 바지를 걷고 건널 수 있는 좁은 도랑의 물이 단숨에 격렬한 조류가 되어 가슴까지 차오른다. 빛나는 모래 길은 점점 사라지고 순식간에 사방이 철썩거리며 콸콸대는 물로 가득 찬다. 사람들은 엄청난 두려움에 휩싸여 뛰면서 소리지른다. 그러나 그들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 채 철썩대며 콸콸대는, 점점 수위가 높아지는 바다 속으로 속수무책 끌려들어가다 깊은 웅덩이에 빠지고 갑자기 거센 조류에 휩쓸리고 말 것이다. (152p, 럼주차)

 

 

  - 십수년 만에 <곰스크로 가는 기차>를 다시 읽으며, 나는 스물네살 나에게 물었다. "너는 지금 내 삶이 실패했다고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에서 고통이 밀려든다. 스물네살 나에게 나는 다시 묻는다. "너는 왜 그리스로 가고 싶니?" 침묵. 마땅한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그때 그냥 그리스를 꿈꿨을 뿐이다. 꿈은 막연할수록 더 절절하다. 막막해야 내 삶에 대한 모든 기대를 담을 수 있지 않던가. 먹먹해진 나를 오르트만은 다시 다독여준다. "그대가 원한 것이 그대의 운명이고, 그대의 운명은 그대가 원한 것이랍니다."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195p, 역자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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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입에 붙었던 이름처럼, 참 좋았던 짧은 소설입니다.

+ 제가 본 책들 중에서 가장 좋았던 '작품 해설'이었어요, 무리하게 어려운 해석으로 쓰지도 않았고

그저 느낀대로 경험을 담아 진심으로 쓴 역자 후기가 마음에 들어요.

그리고 그림은 '최규석' 만화가의 그림, 조만간 그의 만화도 구매할 예정입니다. 여러모로 마음에 든 책이었네요 :)

 

(이 작품이 우리나라 tv 베스트 극장에서도 나왔었나봐요, 음 궁금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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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삼촌 브루스 리 1
천명관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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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인생이란 납득할 수 없는 한 편의 부조리극 <나의 삼촌 브루스리 - 천명관>

 

 

 

 

 After Reading

 

 

 

   '오리지널이 되고 싶었던 어느 짝퉁인생의 슬프고도 기적같은 일대기'

 

  좀처럼 맘대로 할 수 없는 삶을 견디기 위해 사람들이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것들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우상'이다. 과거에는 '존경하는 인물', 그리고 현재는 '멘토'로도 많은 영역으로 확장해가고 있다. 그들은 연예인일 수도 있고, 자신의 꿈을 먼저 이룬 사람일 수도 있고, 또는 자신의 가족일 수도 있다. 어쨌든 우리는 그들을 꿈꾸면서 의지하고 그리워한다. 그들은 가끔은 삶의 무게를 덜어주고, 잠시뿐이라도 희망을 얻게 만드는 소중한 사람들이다.

 

  태어날 때부터 바람 잘 날 없던 삶을 살았던 이 책의 주인공 '삼촌'의 경우엔, 그 유명한 이소룡이 우상이었다. 나는 이소룡이 영화 속에서 신나게 휘돌던 시대에 (언제인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살지 않아서, 아직까지 불리우는 그의 이름을 들어서만 유명세를 실감했다. 많고 많은 액션배우들 중에 이소룡, 브루스 리가 왜 그렇게 젊은이들의 인기를 끌었는지, 소설 속에서처럼 많은 남성들이 그에게 매혹되어서 짝퉁 '이소룡'이 되고 싶어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는 남들과는 무언가 다른 인성을 가진 배우, 아니 무도인이였나보다.

 

  지금까지 <고래>, <고령화가족> 그리고 이번 <나의 삼촌 브루스 리>까지 작가의 소설을 접했는데, 천명관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팔자가 기구한 사람들이다. 어찌나 팔자가 사나운지 자칫하면 막장드라마의 우스운 꼴을 보일 수도 있겠다싶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어이없고, 말도 안되는 일도 부지기수. 그러나 그 이야기를 펼쳐내고 수많은 이야기의 갈래와 함께 펼쳐내는 그만의 힘이 있기에 우습기보다는, 왠지 더 처절한 느낌이 들어 감동스러운 마음이 들게 된다. 또 한가지, 그의 소설이 너무나 극적인 이야기 전개로 이어지는데도 화내지 않고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주인공의 '꿈과 바람'이다. 이루어지기까지는 고난이 한도 끝도 없지만,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고 무너지고를 반복하면서 살아가는 모습, 그것을 보는 우리에게 공감할 수 있게 만든다.

 

  '왜 실패하고 무너지고를 반복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봐야하는가, 인생도 힘들어 죽겠는데' 하고 누군가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말한다. "구원의 길을 보여주진 못하더라도 자신의 불행이 단지 부당하고 외롭기만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그래서 자신의 불행에 대해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은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요?"

 

  징하게도 계속해서 살아남는, 브루스 리가 되고 싶었던 '삼촌'의 모습을 다룬 이 소설을 보면서

서민들의 희노애락을 책임졌던 노래 '민요'를 떠올렸다면 조금, 오바일까 - 어찌됐든 너무나 흥미진진한 한 판 이었다.

 

 

 

Underline 

 

 

 

  - 그날, 삼촌은 왜 그렇게 바삐 촬영현장에서 도망쳤을까? 그것은 그의 영혼을 단숨에 꿰뚫고 지나간 그 강렬한 빛 앞에서 자신의 모습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져서였을까? 아니면 그 빛에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자신의 인생이 불행해진다는 사실을 미리 알아서였을까? 삼촌은 우연한 기회에 영화의 세계에 첫발을 내디뎠지만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선 우리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다만 본의 아니게 걸치고 온 가죽재킷을 입고 자주 거울에 비춰보며 마치 꿈을 꾸듯 몽롱한 표정으로 오랫동안 자신의 모습을 응시하곤 했을 뿐이었다. 이때 삼촌은 카메라 앞에서 그림처럼 멋진 공중회전을 선보였던 그 순간을 회상하고 있었을까, 아니면 자신의 눈동자를 스쳐갔던 원정의 고혹스런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을까? (1권, 78p)

 

 

  - 숲 한가운데 이소룡이 서 있었다. 그는 위통을 벗은 채 목인춘을 상대로 혼자 수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안개에 휩싸여 더욱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손으로 나무를 칠 때마다 목탁을 칠 때처럼 경쾌한 소리가 났고 근육이 살아 있는 뱀처럼 눈앞에서 꿈틀거렸다. 삼촌은 놀란 눈을 크게 뜨고 한동안 이소룡이 수련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이것은 필시 꿈이겠지? 삼촌은 자신의 팔뚝을 힘껏 꼬집어보았다. 아팠다! 그렇다면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이것은 현실이란 말인가? 그런데 어떻게 죽은 이소룡이 여기에 나타날 수 있지?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삼촌은 이소룡의 손동작을 유심히 지켜보았는데 칼판장이 자신에게 가르쳐 준 것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1권, 208p)

 

 

  - 그들은 아마도 서울 변두리 어디쯤에 단칸셋방을 얻어 막막한 서울살이를 시작할 터이지만 그것이 이른 새벽, 무논에 들어갈 때보다 더 서늘하고 흙먼지 날리는 묵정밭을 맬 때보다 더 팍팍하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될 것이다. 속이 메슥거리는 매연 냄새는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고 자기 집에 들어가도 남의 집에 온 듯 낯설어 몇 해도 가기 전에 오매불망, 꿈에 본 내 고향을 그리워하겠지만 한 번 등진 고향땅을 다시 밟기는 어려운 법, 아직 동도 트기 전 까마귀 시체가 널린 듯 연탄재로 온통 시커메진 골목길을 밟으며 고단한 일터로 나갈 때마다 자꾸만 발이 허방을 짚는 듯 불안하고 허전해 어쩌다 운 좋게 술이라도 한잔 얻어 걸치면 사는 게 도대체 이게 뭔가, 싶은 기분에 자꾸만 눈물이 날 것 같지만 그래도 믿을 거라곤 그저 늙어가는 몸뚱이 하나뿐, 낡은 자전거 페달을 돌리듯 체인이 끓어질 때까지 찌든 육신을 돌리도 또 돌려야 할 터였다. (1권, 243p)

 

 

  - 나는 경희가 우는 게 지독한 최루가스 때문인지 아니면 경찰에게 질질 끌려가던 순간의 두려움과 수치심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가 느낀게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다. 그녀가 운 것은 우리가 역사의 한복판에 서 있다는 감당할 수 없는 무게감 때문이었을까? 그것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때 나는 깨달았다. 우리의 생은 그것이 무엇이 됐든 우리가 감당하기에 늘 너무 벅차리라는 것을. 그래서 또 눈물이 나고 그 눈물이 마를 즈음에야 겨우 우리가 애초에 그것을 감당할 수 없는 존재였음을 깨닫게 되리라는 것을. 나는 경희의 어깨에 팔을 둘러 세게 끌어안았고 경희는 내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오래도록 울었다. (2권, 23p)

 

 

  - 삼촌의 머릿속엔 거대한 스크린이 펼쳐졌다. 그리고 그 위에선 격렬한 액션 장면이 상영되고 있었다. 상대는 무시무시한 갈고리를 휘두르는 악당이었고 자신은 억울하게 죽은 연인의 복수를 위해 혈혈단신 적진에 뛰어든 주인공이었다. 커다란 덩치의 갈고리는 빠르고 위협적이었다. 그는 거대한 갈고리를 휘둘러 바람을 갈랐고 들소처럼 대지를 흔들며 주인공을 몰아붙였지만 기실, 현실에서 그는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한낱 썩은 각목이나 휘둘러대는 마약중독자일 뿐이었다. (2권, 27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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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와 이발사
에트가 힐젠라트 지음, 배수아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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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역사 속의 죄와 벌, 그 사이의 해결점에 대하여  <나치와 이발사 - 에트가 힐젠라트>

 

 

 

 After Reading

 

 

 

 

   "나는, 그들에게서 빼앗은 그것을 다시 돌려줄 능력이 없어, 그럴 수가 없어."

 

  <나치와 이발사>는 소재부터 파격적이고, 전개 또한 남다른 소설이다. 순수 아리아인 혈통이지만 유대인의 얼굴을 가진 '막스 슐츠'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강간과 사랑없는 가정에서 자라왔고,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나치의 SS단원으로 대학살에 참여하게 된다. 그는 뒤이어 전쟁이 끝나자, 학살당한 자들의 수많은 금니를 채취하여 생활의 기반을 다지고,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였고 자신이 살해한 사람인 유대인 '이치히'로 신분을 세탁하게 된다. 전쟁 당시 가해자였던 '막스'는 전쟁 후 교묘하게 피해자의 인생을 살며 정체성 또한 유대인으로 탈바꿈하기까지 한다. 너무나 가증스럽고 비겁한 주인공의 행보 (그러나 주인공은 마치 실없는 농담하듯 툭툭 건조하게 말한다), 과연 그는 용서받을 수 있는 인간일까.

 

  흥미로운 점이 몇가지 있다. 순수 아리아족 혈통의 주인공은 우스꽝스럽게도 유대인의 모습을 가지고 있으며 그 유대인 친구는 우월한 파란 눈의 독일인 모습을 가졌다는 것, 주인공이 유대인을 미워하는 마음 없이 학살을 저질렀다는 것, 그 때문에 계속해서 '자신은 피라미였을 뿐이다'라는 말을 반복한다는 것, 신분 세탁을 한 후 마치 유대인의 영웅처럼 행동한다는 것, 시대에 이끌려 그리고 과거의 아픔 때문에 죄를 저질렀다고 말하는 점 등이다. 전적으로 가해자의 시선으로 쓰여진 이 책은 국제적으로 많은 관심을 받으면서도, 정작 독일에서는 출간할 곳이 없어, 고생했다고 한다. 홀로코스트라는 무거운 주제를 거침없이 풍자하고 까발렸고, 특유의 블랙유머까지 첨가한 이 소설은 독일인들이 냉큼 받아들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출간하게 된 후 엄청난 반응을 일으켰다는 사실.

 

  과거의 잘못을 어떻게 속죄할 수 있을까. 나치의 대학살, 일본의 위안부와 마루타 등 역사 속 전쟁의 아픔을, 국가가 또 하나의 국가에게 행한 '죄'를 어떻게 해야 지울 수 있을까. 시대가 어쩔 수 없이 행하게 만든 죄이기 때문에 그냥 '모른 척' 해버려도 된다고? 아니면 전범의 피해자인 유대인을 양심이란 이름 하에 옹호하고 지나치게 감싸고 그들 곁에 서면 용서가 가능하다고? 죄를 행한, 방관한 자들을 모두 사형대에 올려버린다고? 그렇다고 피해자의 눈물이 닦여질까.

 

  결국 작가가 말하는 것은 '죄'를 기억하는 것, 역사를 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다. 현재 역사 속 위안부의 아픔을 겪은 할머니들이 외치고 있는 것은 그 죄에 걸맞는 보상일까? 그것보다도 해답은, 진심어린 인정과 반성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조금 파격적이고 날카롭지만 <나치와 이발사>같은 문학은 '역사를 잊지 말자'는 듯 보이는 작가의 의도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으며, 그것을 세상에 각인시킬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장치가 아닐런지.

 

 

 

 Underline

 

 

 

 

 

  - 나로 말하자면, 언제나 이발사라는 일을 흥미로운 직업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세상에 인간의 머리통만큼 귀한 것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 귀한 머리통을 모양내고, 다듬고, 아름답게 꾸미는 일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발사 일을 하다 보면 다음과 같은 생각도 문득 떠오를 때가 있긴 하다. 세상에서 제일 귀한 이 머리통을 으깨 버린다면, 그것도 참 재미가 있긴 하겠구나...... 하는, 너무나 간단하게 해치울 수 있는 입장이 아닌가. 그것도 두 손만 이용해서. 이 손쉬운 가능성을 실감하고 나면 누구나 깜짝 놀랄 정도이다....... 우스꽝스럽기조차 하다. 여기 누군가의 머리통이 있다! 그 머리통이 완전히 내 손아귀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47p)

 

 

  - 도대체 어디가 몽둥이의 시작이란 말인가, 그리고 또 끝은 어디인가? 끝없는 이 연쇄 고리의 어디쯤에 신이 있는 걸까? 신이 그 안에 있기는 한 걸까? 어쩌면 그것들 위에 있는 건지도 몰라. 그러면 내가 다음 순서로 몽둥이질을 퍼부어야 할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아니다 나는 슬라비츠키의 몽둥이를 굳이 빼앗지 않았다. 대신 새로운 몽둥이를 하나 구입했다. 더 좋은 놈으로...... 지금 낡아서 볼품없는 슬라비츠키의 몽둥이가 새것이었을 때보다 더욱 훌륭한 놈으로. 색깔도 노란색이나 검은 색이 아니라 나 자신의 색을 골랐다. 나는 한 명 이상의 희생자를 원했다. 한 명뿐인 희생자라니,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는 내가 받은 상처 하나당 한 명의 희생자를 원했다. (...) 오늘날 나는 그때 왜 우리 모두의 목구멍에서 튀어나온 가래 덩어리가 허공을 멀찍이 날아가 무고한 자들을 맞추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다. 당시 우리는 특별히 그들을 겨냥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숨통이 좀 트이라고 답답한 이물질을 뱉어 낸 것에 불과했다. 그때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76p)

 

 

  - 그 시절 나는 피라미에 불과했다. 비록 악마의 축제에 참여하기로 서약하고 군화와 유니폼으로 무장한 채 역사의 수레바퀴에 온 몸으로 올라타기는 했으나, 내 <무게>는 너무 미약하여 수레바퀴를 굴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기만 했다. 피라미 한 마리가 무슨 일을 벌일 수 있겠는가? 피라미가 걸친 유니폼은 또 무슨 의미가 있고? 피라미 한 마리가 군화를 신어 봤자지. 하지만 그런 피라미가 수백만 마리라면...... 유니폼을 걸친 피라미와 유니폼 없는 피라미까지 (...) 그 모든 불품없는 피라미들이 당시 함께 입을 모아 <예!>라고 답했으며 나를 포함해 모두들 한꺼번에 거대한 수레바퀴에 떼 지어 달려들었으니 바퀴가 서서히 굴러가기 시작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87p)

 

 

  - 나, 이치히 핀켈슈타인, 당시의 막스 슐츠는 단 한 번도 유대인을 미워해 본 적이 없어. 왜 내가 유대인을 미워하지 않았을까? 그건 나도 잘 몰라. 단지 내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사실은, 나 이치히 핀켈슈타인, 당시의 막스 슐츠는 결코 유대인을 미워한 적이 없다는 거야. 그러면 넌 궁금하겠지? 왜 내가 유대인을 죽였을까? 그건 나도 잘 몰라. 아마도 몽둥이 때문이 아닐까? 옛날 우리 집에는 노란 몽둥이와 검은 몽둥이가 있었잖아. 물론 색깔은 없는 다른 몽둥이도 있었고, 그리고 손들이 있었어. 그 몽둥이를 휘둘러 댔던 수많은 손들, 한번 휘둘러진 몽둥이는 예외 없이 내 엉덩이로 와서 부딪혔지...... 혹은, 그들이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의 엉덩이로...... 영혼에도 엉덩이가 있는 건 당연하잖아. 영혼도 간혹은 엉덩이를 좀 맞아야 한다고! 아니 간혹이 아니라 자주! 사실은 아주 빈번하게! (299p)

 

 

  - 나무들이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너는 가장 마지막 인간이다. 서열상으로 가장 마지막 인간. 모든 할례 받은 자들 중 가장 마지막. 그리고 할례 받지 않은 자들 중에서도 가장 마지막." 나는 나무들에게 물었다. "내가 왜 가장 마지막 인간이란 말인가?" 나무들이 내게 대답했다. "마지막 인간들 중에서도 가장 마지막 인간!" 나무들에게 다시 물었다. "도대체 왜? 내가 뭐 남들보다 더 특별하게 쏘아 죽이고 특별나게 목매달고 특별나게 때려죽였단 말인가....... 그래서 마지막 인간들 중에서도 가장 마지막이란 건가?" 나무들이 내게 대답했다. "네가 잘못을 인정하고 있지 않으니까! 모두 부인하고 있으니까! 몰래 숨어 버렸으니까! 게다가 희생자들의 뒤에 숨었으니까...... 죽은 자들과 살아남은 희생자들의 뒤에!" (51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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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의 이름 '막스 슐츠'는 독일어로 max Schuld (최대 유죄)

라는 뜻이라 합니다. 이름에도, 작가의 관점이 드러나고 있는 듯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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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레미, 오늘도 무사히 사계절 1318 문고 86
자비에 로랑 쁘띠 지음, 김주열 옮김 / 사계절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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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 무심코 되뇌게 되는 말 <제레미, 오늘도 무사히 - 자비에 로랑 쁘띠>

 

 

 

 

 

After Reading

 

 

 

  '내가 꿈꾸는 건 오직 한 가지, 이 모든 엿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

 

 청소년 소설이지만, 나름 무거운 주제가 스며든 이 책. 주인공인 제레미는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일을 찾았다. 군대에 가서 다리를 공사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 잉여같은 일상을 탈피할 수 있을거라 여겼지만, 상황은 안좋게 흘러간다. 얼떨결에 일등 사수가 되고, 전쟁이 일어난 지역에 파견되는 제레미. 그는 신나는 음악을 함께 즐겼던 사랑하는 동생에게 전쟁의 참혹한 상황을 메일로 털어놓으며, 하루하루 살아간다. 그의 편지는 항상, '오늘도 무사히'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오늘도 무사할 수 있기를 스스로에게 그 어린 제레미는 다짐하면서 쓴다. 동생 오스카는 메일을 통해 알게 된 전쟁 속 군대의 상황을 노래로 만들어나간다. 설레는 첫사랑과 함께. 제레미는 하루라도 빨리 지긋지긋하고 무서운 군대를 빠져나올 방법이 없는지, 되뇌고 또 되뇐다. 과연 그의 선택은 어떻게 될까 -

 

  첫사랑과 함께 설레는 나날들을 함께 보내고 진실을 알게 되는 동생 오스카, 전쟁 상황에서 동생과 주고받는 메일을 통해 위안을 받는 형 제레미.

 그들은 각자 나름대로 주체적인 선택을 하면서, 오늘도 무사히, 성장해 나간다.

 

  전쟁의 상황은 픽션이 아닌, 작가가 직접 실제 체험자에게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해서 쓰여졌다. 청소년 소설이고, 글로써는 그 참혹함을 제대로 보여줄 수는 없지만 하루하루 견디기 힘든 상황이라는 것을 이야기 속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오늘도 무사히' 라는 말을 심심할 때도 아닐 때도 중얼거려야 할 정도로, 다급하고 조심스러운 생활. 작가는 말한다. 그 군대에서 빠져나오기를 바라는 것은 '반역자'도 아니고, '비겁자'도 아닌 '아니오'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라고.

 

  그러나 휴전국가이며 병역이 '의무'인 이 나라에서 '탈영'이라는 민감한 소재를 떠올릴 수 있는 이 책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지는 의문이다. 너무나 힘든 군대생활 속에서 '탈영'을 떠올리는 것, 그리고 심지어 그것을 실행하는 자는, 절대 우리 사회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할 것이다. '아니오'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용기라는 것이 통할까, 그들은 오직 '비겁자'라는 이름표를 달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엔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조마조마함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우리나라의 현실이 너무 안타깝기만 하다.

 

 

 

Underline

 

 

 

  - 그들은 맹목적 복종에 대한 거부를 선택했습니다. 공포를 앞세워 강요되는 권력의 폭압을 거부하는 결단 말입니다. 이 작품에 묘사된 전쟁 장면 중 지어낸 것은 하나도 없으며 모두가 실제 참전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했습니다. '전쟁 거부자들'은 반역자도 비겁자도 아닙니다. 그들은 그저 '아니오'라고 말할 용기를 가진 자들입니다. (글쓴이의 말)

 

  - 제레미가 내일 떠난다. 눈물을 보여선 안 돼. 이 빌어먹을 두 문장이 끊임없이 맴돌았다. 정신 나간 새들마냥 머릿속에서 서로 부딪치고 충돌했다. (...) 마치 둑이 터진 것처럼 눈물이 와락 쏟아졌다. 나는 울기 시작했다. 진짜 홍수라도 난 것처럼. 금세기 최고의 수량 증가. 나는 멈추지 못하고 아이처럼 흐느껴 울었다. 그래 제레미는 내일 떠날 거다. (98p)

 

  - 나는 일등 사수니까 수색을 나갈 때 가장 잘 보이는 곳에서 '나쁜 놈들', 그 개자식들을 찾아내는 게 임무야. 그놈들은 물론 우리가 주된 표적임에도 온 사방에 폭탄을 설치해. 희생자가 자기편에서 나든, 어린 아이든 여자든 상관없다는 식이지. 모두가 그 지긋지긋한 자들을 두려워해. 그들은 어디서도 물러서는 법이 없고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자폭할 준비가 되어 있어. 그래서 철칙은 아무도 믿지 말라는 거야. 아이들조차도. 그놈들은 우리한테 수류탄을 퍼붓기 위해 아이들을 끌어 모은 것 같아. 폭탄은 어디서든, 언제든, 또 누구로부터든 우리 얼굴에 떨어질 수 있는 거지! (119p)

 

  - 이제 곧 여기 온 지 6개월이 된다. 빌어먹을 기념일! 그동안에 내 인생의 절반이 지나간 것 같다. 이젠 진짜 생활이 어떤 건지도 잘 모르겠다. 우리가 몸에 구멍이 뚫릴 위험이 없이 길을 건넌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도 모르겠고 여자와 콜라를 마시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 것들은 정말이지 존재한 적이 없다는 느낌. (21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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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나토노트 1 (양장)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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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의 시작, 영적 세계로의 여행 <타나토노트 - 베르나르 베르베르>

 

 

 

 

After Reading

 

 

 

 

   감히 상상하지 못할, 영적 세계로의 여행이 시작되다.

 

  '죽음'이란 것을 인식하게 된 것은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되도록이면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앞으로 멀었으면 하는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면 걱정만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메멘토 모리(죽음을 생각하라)'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 유명한 말은 나에게 '언젠가 다가올 죽음에 대하여 기억해야 한다'고 되새긴다. 하지만 역시 우울한 건 우울한 것이다. 내가 눈을 딱 감는 순간, 생각이 멈추게 되고 아예 나란 사람이 없어져버린다는 것이 가끔 두렵다. 언젠가 세월이 흐르면 무덤덤해질지도 모르겠지만, 아직은, 그 눈을 감는 순간이 너무나 허무하고 무서울 것 같다는 생각.

 

  그런데, 죽음을 향해 직접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있다면, 죽은 다음에 또다른 여행이 시작된다면 어떨까? 소설의 제목 '타나토노트'는 죽음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타나토스'(thanatos)와 항해자를 의미하는 '나우테스(nautes)'의 합성어다. 말그대로 죽음 항해자라는 말이다. 주인공과 그의 친구는 구상한 영계를 탐험하기 위해, 그들은 감옥의 지하실에서 무기징역을 사는 수감자들을 지원받아 실험을 감행한다. 소설 <타나토노트> 속 주인공들, 타나토드롬에 모인 '영계탐사 개발자'들은 죽음 후의 세상, 영계를 직접 탐사하려는 시도를 성공한다. (물론 수많은 희생양이 있었지만) 그들은 타나토노트로 선발된 사람에게, 약물을 주입하여 일시적으로 삶을 중단시키고 그들의 경험담을 통해 '영계 탐사 지도'를 만들어나간다. 처음에는 반발이 심했던 '영계 탐사'는 전세계적으로 퍼져나간다. 많은 아마추어 타나토노트들이 증가하고, 점차 전문적인 탐사와 함께 심지어 영계에서 떠돌아다니는 '영혼 아닌 영혼'의 충돌이 빈번해진다. 영계에는 생명줄이 붙어있는 사람들이 급격하게 증가한다.

 

  <타나토노트>속 영계, 즉 죽음 이후의 세상은 많은 차원으로 되어 있는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고통스러운 세계뿐이 아니라 색다른 세계도 있다. 그 유혹적인 세계를 지나면 지날수록 현실 세계와 멀어지게 만든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미지에 세계에 현혹당하면서 그 세계를 계속해서 갈망한다. 자신이 직접, 자발적으로 (물론 돌아올 수 있다는 믿음 하에서) 죽음 속 탐험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굉장히 아이러니하다. 그 미지의 세계가 미지의 세계가 아니게 될 순간, 사람들은 어떤 변화를 보일까.

 

  우리가 한번쯤 상상해왔던 죽음 후의 세상을, 기막힌 상상력을 가진 작가의 눈을 빌려 볼 수 있다는 것에서 너무나 흥미로운 소설이다. 소설을 보고나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죽음'을 더욱 무섭고 끔찍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걸, 삶의 끝인 '죽음'에는 어떤 것도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사람들의 다양한 행동과 우연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곧 삶임을 생각하게 된다.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베르나르 시리즈의 시작, 발칙하고 흥미진진한 발판을 디딘 것 같다.  

 

 

 

Underline

 

 

  - 다섯 목숨을 연거푸 희생시키고 나니, 사람이 죽어도 이제 그다지 마음의 동요가 일지 않았다. 내 감수성이 무디어지고 있었다. 사람을 저승으로 보내고 있는데도, 마치 우주로 로켓을 쏘아 올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로켓이 이륙하다 폭발하면, 다음 발사가 성공할 수 있도록 필요한 수정을 가하면 그뿐이었다. 다시 다섯 명의 인간 기니피그가 선발되었다. (1권, 161p)

 

 

  - 허영주머니들, 즉 타나토노트가 되는 것을 무슨 고상한 조합에 가입하는 것쯤으로 여기고 친구들이나 애인에게 으스댈 생각이나 하는 사람들은 사절! 너무 절망한 나머지 영계 탐사를 새로운 자살 방식으로 여기고 찾아온 자들도 제외! 고통에 찬 육신이 싫어서 하늘 나라가 이승보다 더 좋은지 알아보려는 자들도 뒤로 돌아갓! 훌륭한 타나토노트는 행복하고 심신이 건전해야 하며, 죽어서는 안 될 충분한 이유가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1권, 291p)

 

 

  - 전에는, 죽음을 삶의 단순한 종말, 즉 불꽃의 소진쯤으로 여기는 축도 있었고, 희망에 찬 약속으로 받아들이는 축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가 죽음이 최후의 형벌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가 죽음이 최후의 형벌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삶이란, 언젠가는 행복의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할 덧없는 천국이 되는 셈이었다. 삶은 축제였고 피안은 암흑일 뿐이었다. (...) 우리의 실험은 선친께서 되풀이해서 가르쳐 주신 두 가지 위대한 진리, 즉 <죽음은 가장 무서운 것이다>와 <죽음을 가지고 농담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확인해 준 셈이었다. (1권, 327p)

 

 

  - 우리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네. 죽음은 단지 내적인 발전 단계의 하나일 뿐이네. 그 단계를 거쳐 우리 삶의 다음 지평이 열리는 것이지. 말하자면 죽음은 하나의 문턱인 셈이네. 그 문턱을 넘어서면 또 다른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우리는 되도록 냉철하고 평온하게 죽음을 맞아야 하네. 죽는다는 걸 두려워 하고, 그 때문에 마음이 혼란에 빠지고, 죽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것은 가장 나쁜 태도일세. 평정을 잃지 않아야 순조롭게 다른 세계로 넘어갈 수 있는 거지. (2권, 454p)

 

 

  - 삶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가 원하는 것을 언제나 얻을 수 있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천사들은 절실한 욕망과 치기 어린 변덕을 구별할 줄 안다. 천사들은 절실한 소원만을 들어주는 것이다. 자기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다고 세상의 문제가 다 해결될 것 같지는 않다. 어느 시대에나 깨달은 이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언제나 자기들의 깨달음을 신비의 너울로 감추었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2권, 602p)

 

 

  - <언젠가는 죽게 될 것을 알기에, 인간은 진정으로 느긋할 수 있다. 그것은 한 세기 전의 미국 철학자 우디 앨런에게 답하는 말이었다. 사실 불멸성보다 더 끔찍한 게 무엇이 있겠는가! 우리의 삶이 영원히 지속되고 반복되고 연장된다고 상상해보라. 우리는 금방 모든 것에 싫증을 느끼게 될 것이다. 모든 게 시들하고 권태롭고 짜증스러울 것이다. 시간의 의미는 사라지고 희망도 한계도 두려움도 사라질 것이다. 어느 하루도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 못한 채 하루하루가 기계적으로 반복될 것이다. 능력 있는 통치자들은 영원한 지배자가 될지도 모르고, 절대로 늙지 않을 권력자들 때문에 모든 자유가 억압될지도 모른다. 자기 삶을 끝낼 자유조차 사라질지 누가 알겟는가. 불멸은 죽음보다 천 배나 더 나쁘다. (2권, 80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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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너무 재밌어서 밤새서 읽었당께!

그리고 다음 시리즈 (천사들의 제국)을 읽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결말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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