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1
휴 하위 지음, 이수현 옮김 / 시공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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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보이는 것이 진실이라 믿는가? <울 - 휴 하위>

 

 

 

 

 

After Reading

 

 

  지상의 오염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144층의 '사일로'라는 이름을 가진 지하창고.

 

  강력한 인구 제한 등 엄중한 규칙 아래 사일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밖'을 말하는 것 자체는 금지되어 있다. 누군가 그 금지된 영역을 갈망하고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그는 밖으로 나가 대기의 오염 속에서 무방비해지는 '청소형'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런 무시무시한 형벌에도 '밖'의 진실을, 사일로 안에서 숨겨진 비밀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늘어가면서 질서 있던 '사일로'의 분위기가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땅 속에 만들어진 하나의 거대한 사회, 그 속에서 진실을 갈망하는 자들을 중심으로 소설이 진행된다.

 

  현재 한국에 출판된 두 권의 책 <울>은 작가가 소설을 펼쳐낸 후, 자비로 하나의 단편 (1부, 홀스턴 - 1권의 앞부분)을 출간했는데, 어마어마한 인기를 얻어 뒷이야기를 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옴니버스 식으로 만들어진 소설 <울>은 단편과 장편소설의 경계를 아우르는 미묘한 느낌을 준다. 이야기의 중심인물로 보자면 1권과 2권 그리고 3,4,5권의 이야기가 묶여지는 듯 한데 그 세 이야기는 서로 연관되면서도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또한 이야기의 첫 전개가 색다르게 느껴질 수 있는 장점이 되기도 한다.

 

  작가는 많은 SF나 디스토피아 문학이 그렇듯 소설의 이야기를 통해 미래의 모습을 상상하며 또한 현대의 사람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낸다. 미래에도 변함없이 악순환될 현대사회의 모습을 그리기도 한다. 지배층의 권력과 욕심, 그리고 지하의 거대한 세계 안에서도 여지없이 나눠지는 사람들의 계층, 그리고 정보의 왜곡까지. 이 중 권력과 정보의 왜곡을 떠올리게 하는 소설 속의 배경 '사일로'는 실제로 작가가 현실 속의 인터넷, TV 등의 매체 등을 생각하며 만들어냈다고 하는데. 그것들은 세상을 연결해주는 통로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세상의 많은 정보를 왜곡할 수도 있는 무시무시한 필터다. 실제로 국민들에게 '정치적 눈가리개'로 이용되기도 하는 미디어 속 정보는 현대인들에게도 끊임없이 숨겨진 진실을 파악하고 의심하게 하는 양날의 칼이기도 하다.

 

  이미 영화 판권이 세계에 팔려 '리들리 스콧' 감독으로 할리우드 영화로 제작될 예정인 소설 <울>은, 실제로도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드는 책이다. 144층의 지하창고라는 '영화의 소재로서'는 굉장히 매력적인 배경과, 후반부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의 투쟁, 그리고 파괴된 땅에서 생존하려 애쓰는 주인공의 긴장감과 스릴은 책을 읽으면서도 그랬던 것처럼 영화 속에서도 재현될 수 있을 것이다. 단, 디스토피아라는 주제와 지구의 오염 + 권력이라는 소재는 이미 많이 이용된 소재이기 때문에 식상할 수도 있지만, 식상한 만큼 익숙하고 안전하게 재미를 보장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신나게 모험하는 기분으로 책을 다 읽고 덮은 지금, '사일로'라는 공간이 영상 속에서 멋지게 재현된 모습을 기대하고 있다.

 

 

Underline

 

 

   - 잘 부서지는 돌처럼 떨어져 나가는 하얀 보호복을. 그리고 더는 머리를 지탱할 수가 없었다. 그는 느린 죽음이 닥쳐오는 동안 통증에 몸을 말고 아내의 유해를 끌어안으면서, 마지막 남은 고통스러운 숨결과 함께 생각했다. 이 죽음이, 무너져가는 도시가 쓸쓸하고 고요하게 굽어보는 가운데 생명 없는 갈색 언덕의 검은 틈 속에서 이렇게 몸을 말고 죽어가는 그의 모습이, 볼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보일지. 누구든 지켜보려고 한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무엇을 볼까? (1권, 63p)

 

 

  - 그녀가 보기에, 바깥세상에 대한 금지된 꿈은 슬프고 텅 빈 꿈이었다. 죽은 꿈이었다. 꼭대기 층에서 이런 풍경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거꾸로 알고 있었다. 미래는 아래에 있었다. 전력을 생산하는 석유도, 쓸모 있는 물건들을 만드는 광물도, 농장의 흙을 새롭게 만들어주는 질소도 다 아래에서 나왔다. 화학과 금속공학의 발자취 안에서 그림자 노릇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어린이책을 읽는 사람들, 잊혀지고 알 수 없는 과거의 수수께끼를 짜 맞추려 드는 사람들은 착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단 하나, 그들의 집착에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탁 트인 공간 그 자체였다. 솔직히 그녀는 그 풍경이 두려웠다. 어쩌면 사일로의 벽을 사랑하고, 심층부의 캄캄하고 좁은 공간을 사랑하는 그녀가 잘못된 건지도 몰랐다. 다른 사람은 다들 탈출하는 생각을 품고 사는 걸까? 그녀가 어딘가 이상한 걸까? (1권, 184p)

 

 

  - 배기관 누수가 모두를 질식시킬 수도 있고, 망가진 배수펌프가 모두를 익사시킬 수도 있던 심층부에서는 하찮게만 보였던 질문이 이제는 그녀 앞에 커다랗게 버티고 섰다. 이 좁은 지하 공간에서 사는 그들의 삶이란 대체 무어란 말인가? 저 바깥, 저 언덕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들은 왜 여기에 있으며, 무엇 때문에 있는 걸까? 그녀와 같은 사람들이 저 멀리에서 무너져가는 높은 사일로들을 지었을까? 무엇을 위해서? (1권, 189p)

 

 

  - 그녀는 손을 내려다보고, 손톱에 깊이 배인 가느다란 기름 자국을 보면서 자신은 이미 죽었음을 알았다. 어쩐지 그건 별로 상관이 없었다. 그녀 뒤에도 앞에도 시체가 줄을 이었다. 그녀는 그저 끌려가는 존재였다. 기계 안에서 빙빙 돌며 금속 이빨을 가는 톱니바퀴에 불과했다. 끝내는 장치가 마모되고 조각이 떨어져 나가면서 주변 장치에 피해를 입히는, 결국 다른 부속품으로 대체되어야 하는 톱니바퀴. (1권, 287p)

 

 

  - 식칼을 잃어버리다니 욕이 나왔다. 확실히 격자판에는 없었다. 얼마나 멀리 떨어졌을까, 다시 찾을 수는 있을까, 아니면 대신할 물건을 찾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물통을 집으려고 몸을 돌렸는데...... 물통도 없어졌다. 시야가 좁아지고 심장이 빨리 뛰었다. (...) 물통이 넘어진 걸까 생각했다. 식칼은 칼자루보다 더 좁은 격자판 사이로 어떻게 떨어졌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관자놀이의 지끈거림이 약해지자, 다른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 아래쪽 계단에 울려 퍼지는. 달려가는 발소리 (2권, 11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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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결론은, 참 재밌다는 이야기입니다 :)

한 글자의 단순한 제목도 임팩트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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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게 - 어느 은둔자의 고백
리즈 무어 지음, 이순영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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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당신이 짊어지고 있는 그 짐, 견딜만 한가요 <무게 - 리즈 무어>

 

 

 

 

After Reading

 

 

 

  "'Heft'는 짐이 되는 것, 고통스럽게 짊어지고 가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복잡하고 힘겨운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단어는 진지하고 심각하며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이것 또한 앞의 두 가지 의미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당신의 '무게 (Heft)'는 어떠한가요, 견딜만 한가요?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 나름의 짐을 지고 삶을 살아간다. 그 짐들의 무게를 하나하나 비교하긴 쉽지 않지만, 무겁고 가벼움에 상관없이 사람들은 그것을 극복하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극복하지 못한 사람들로 나뉘게 된다. 그 중 후자는 '삶의 짐'의 무게에 마음이 짓눌려버린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은 짓눌리고 남은 마음의 공간, 그 곳의 결핍을 채울 무언가에 몰두하게 된다. 그 무언가가 좋은 취미나, 그런 것들이라면 참 좋을 것이지만, 이미 짓눌린 마음을 빠르게 채워줄 것은 충동적이고 순간적인 욕심에서 비롯되는 것들이 선택되기 마련이다. 그것들은 마음의 결핍을 제대로 충족시켜주질 못한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그들의 마음을 달래줄 수 있을까. 소설 <무게>는 삶의 무게를 감당하기 힘들어하는 사람들, 그들이 그 무게를 극복할 수 있는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해답을 이야기를 통해 풀어나가고 있다.

 

   책 속의 주인공들은 모두가 이런 결핍과 자신이 직접 걸어잠근 외로움의 문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대학교수였지만 가족들에 의해 새겨진 상처를 안고 있는 '아서', 그와 편지로 감정을 주고 받았던 외로운 여자 '샬린' 그리고 아픈 어머니를 돌보며 그것에 대한 부담과 또한 그녀에 대한 애착을 동시에 느껴가며 살아가는 야구 소년 '켈'. 그들은 지독한 외로움과 상처를 옳지 못한 방법으로 극복해내려고 노력한다. '아서'는 과식으로, '샬린'은 술을 통해서, '켈'은 사람들과의 감정없는 사교를 통해서. 그러나 물론 그 결핍이 채워지지는 않는다. 그들은 계속해서 외로움 속으로 침잠해있는 듯 하다. 그러나 그 모습 속에, 세상과 섞이고자 하는 소심한 욕망이 있다는 것이 소설 속에 드러난다. 그들은 그런 자신의 바람을 조금씩 조금씩 드러내면서 세상 속으로 걸어나오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아픔을 공감해줄, 자신의 짐을 덜어줄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우연히 그들 사이에 만들어진 조그만 연결고리가, 세상을 견딜 수 있는 든든한 끈이 될 수 있을 거란 희망이 조금씩 생기게 된다.

 

   그 짐을 잠시 잊게 만들어주는 '무언가'뿐이 아니라 그 짐을 진심으로 공감하며 덜어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혼자서는 어떻게는 참아지는 외로움의 눈물이, 누군가의 '힘내'라는 말 한마디에 톡 하고 터져버리는 건 아마 그런 이유일 것이다. 지금 내가 밝게 살아가고 있는 것도 나의 짐 한 편을 조용히 들어준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소설 <무게> 속 아무렇지 않은 척 하던 아웃사이더들을 생각하며, 그들이 정말로 행복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져보며, 언젠가 외로움 속에 빠져있는 곁의 누군가에게 손을 먼저 내밀어 볼 수 있길 빌어본다.

 

 

Underline

 

 

 

   - 이 음식을 모두 먹어도 좋다고 자신에게 허락했고, 그런 허락이 주는 황홀한 해방감을 만끽했다. 하지만 아삭아삭 소리가 가만히 입에서 새어나오는 순간 긴장했다. 내 소리를 듣는 게 싫다. 나는 혼잣말을 하지 않는다. 집에서 혼잣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그러지 않는다. 바보 같아 보인다. 내 목소리를 들으면 구역질이 난다. 혼자 있는 걸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조용한 내 집에서 철저하게 혼자 있는 걸 왜 좋아하는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걸 왜 좋아하는지 갑자기 기억났다. 내게는 아주 재미있는 책이 있었다. 라디오를 켰더니 정말 운좋게도 미켈란젤리가 연주한 <갈색 머리 처녀>라는 드뷔시의 서곡이 나왔는데, 그 곡을 들을 때마다 여름날의 특별한 기억이 떠오른다. 이 순간 나는 행복했다. (53p)

 

 

  - 한없이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내 안에서 전율이 일었다. 갈비뼈를 가르고 뭔가 나오려는 것처럼 내 안에 있는 무엇이 벌어진 것 같았다. 집 안에 갇힌 뒤로 자주 그런 생각을 했다. 내 집은 이 시대에 존재하는 플라톤의 동굴이며 나는 그 동굴 속에 살던 사람이고, 비록 내 몸은 그러지 못한다 해도 마음은 온 집 안의 벽과 천장에 부딪친다고. 밀실 공포증 비슷한 느낌이 들었고 밖으로 너무도 나가고 싶었다. 아쉬운 대로 문을 열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밖은 추웠고, 문 안에 서서 잠시 동안 몸을 떨었다. 그러다 거의 충동적으로 다시 거실로 가 수화기를 들고는 기억 속에 있는 샬린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84p)

 

 

  - 내가 속삭인다. 엄마, 켈이에요. 엄마 얼굴에 깜빡거리는 빛이 스치는 것 같다. 켈이에요, 나는 다시 말한다. 엄마 아들 켈이에요. 죄책감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엄마 곁에 있지 않았다는 죄책감. 엄마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인 펠스 랜딩에 나 혼자서만 있었다는 죄책감. 다른 사람의 집에서 칠면조 고기를 먹었다는 죄책감. 의자를 더 가까이 끌어당긴다.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손으로 턱을 받친다. 정강이가 침대에 닿을 정도로 의자를 끌어당긴다. 잠시 동안 아무 말 없이 그렇게 앉아 있다. 윙윙 소리가 점점 더 커진다. 엄마 머리 위의 형광등에서 나는 윙윙 소리. (218p)

 

 

  - "내게 뭐 하고 싶은 얘기 있어요?" 내가 물었다. 예전에 학생들에게도 꼭 그렇게 말했다. 학생들은 지금 욜란다처럼 내 맞은편에 앉곤 했다. 학생들은 혼란스럽거나 당황할 때면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들이 털어놓는 내용은 실로 놀랍다. 그들의 고백이 모두 그렇다. 내가 신부나 심리 치료사가 된 듯한 착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던 때가 좋았다. 그것이, 고백을 들을 때의 기분이 그립다. "제가 왜요?" 욜란다가 물었다. "전 당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요." 욜란다는 아주 침울하게 말하고는 작은 두 손으로 머리를 받쳤다. 그 말이 마음에 아프게 박혔다. 우리는 당근을 먹었고, 그러는 동안 욜란다의 매몰찬 말이 허공을 떠돌았다. (322p)

 

 

  - 예전에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기도하고 밤에 잠들기 전에 또 했다. 이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지독한 외로움 속에서 허덕이는지 상기해보곤 했다. 그런 일이 매일 일어난다고, 매일 누군가는 세상에서 떨어져 나와 고결한 은둔자가 되고, 자신의 꼬리를 먹는 뱀처럼 혼자만의 세상에 갇히고, 그러다 외로운 대령을 줄기차게 바라보며 도움을 구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고 나 자신에게 말한다. 그리고 그는 나처럼 된다. 대령은 사랑과 관대함을 더 널리 뻗쳐 그를 비밀 클럽의 일원으로 맞아들인다. 이 세상에 외롭거나 아프거나 아주 슬픈 사람 모두를. (35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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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뒤에 작가 인터뷰와 옮긴이의 말도, 책 내용 못지 않게 좋았어요 :)

참 따뜻한 소설, 오랜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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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물 소리
황석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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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되면 귓전에 다가오는 물소리처럼 <여울물 소리 - 황석영>

 

 

After Reading

 

 

 

  "속삭이고 이야기하며 울고 흐느끼다 또는 외치고 깔깔대고 자지러졌다가 다시 어디선가는 나직하게 노래하면서 흐르고 또 흘러갔다."

 여울, '강이나 바다의 바닥이 얕거나 폭이 좁아 물살이 세게 흐르는 곳'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갖고 있는 예쁜 순우리말. '이응'이란 자음으로 이루어진 단어라서인지, '개울'이란 단어가 연상되는 발음이기 때문인지 처음에는 부드럽게 흘러가는 물이 연상되었다. 그러나 물이 세게 흐르는 곳이란다. (개인적으론) 발음과 뜻이 반대되는 느낌을 가진 뭔가 매력적인 단어로 기억해두게 될 듯 하다.

 

  작가는 왜 이 이야기에 '여울물소리'라는 제목을 붙였을까? 뜻을 제대로 알고서 이야기를 되새겨보니, 이 책은 마치 말그대로 '여울물소리'와 같다고 느껴진다. 여울을 따라 빠르게 흘러 독자들에게 들려주는 듯한 이야기, 그리고 그 속의 격정적인 주인공의 인생 이야기, 때로는 고요해졌다가 울며 흐느끼는 그리고 뒤이어 담담해지는 이야기. 이 책이 아닌 많은 소설이 이런 비슷한 특징을 가지고는 있지만, 한국의 역사와 그 속에서 엮이는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물처럼 빠르게 뒤섞여 이어지는 걸 보면 '여울물소리'라는 제목이 얼마나 이 소설에 잘 어울리는지 생각할 수 있다.

 

  전기수 (고전소설을 읽어주는 사람), 강담사 (재담꾼), 고수(북치는 사람), 광대의 물주, 게다가 혁명가의 삶까지 살았던 '이신통'이라는 사나이, 그리고 그의 마음을 평생토록 따른 '연옥'이라는 여인. 그들의 삶이 우리나라의 근현대 역사와 맞물려 벌어지는 이야기들을 이 소설에서 펼쳐내고 있다. 외세의 간섭과 임오군란에 이어 동학(소설 속 '천지도')혁명까지 소설 속에서 거론되는 사건들은 아픔이 많았던 우리의 역사를 한번 되짚어주면서, 동시에 작가는 그 역사 속의 '이야기꾼'이 어떤 삶을 살았을지의 상상을 소설 속에 녹혀내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출간직후 열린 황석영 작가의 행사에서 처음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간직할 수 있는 흔적까지 남겼었다. 그 때 작가님의 말씀 중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 '시대가 흐르면서 토박이 이야기꾼이 사라져갔고, 그 토박이 이야기꾼에 대한 그리움이 생기게 되었다'는 말이다. 책의 맨 끝에 자리한 작가의 말에 쓰여진 '이야기는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생겨나나,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나, 어떤 것이 남고 어떤 것이 사라지나?'라는 한 줄은, 황석영 작가의 '이야기꾼'에 대한 그리움과 재현에 대한 열망이 <여울물소리>라는 한 소설을 쓰게 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밤새도록 흐르다가 밤이 되면 귓전에 다가오는 여울물의 소리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담담하게 써낸 이 소설은 그 화려하지 않은 특징 때문에 그저 동요없이 읽어나가게 되는 함정이 있다. 그러나 그 담담한 기쁨과 슬픔이 만드는 소설의 물소리가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 듯한 소설의 결말은 진한 여운을 남긴다.

 

 

Underline

 

 

 

   - 내 꼴이 무슨 주인을 쫓는 삽살개 같아져서 나는 문고리를 잡고 섰고, 이신통은 다시 휘적휘적 다리를 건너갔다. 그가 아직 물안개가 퍼져 있는 장터 모퉁이를 돌면서 자취를 감출 때까지 나는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어찌 그와 함께 살았던 날을 하루씩 쪼개어 낱낱이 이야기할 수 있으랴. 나중에 그가 곁에 없게 되었을 때, 가뭄의 고로쇠나무가 제 몸에 담았던 물기를 한 방울씩 내어 저 먼가지 끝의 작은 잎새까지 적시는 것처럼, 기억을 아끼면서 오래도록 돌이키게 될 줄을 그때는 모르고 있었다. (88p)

 

 

  - 최씨가 과부 배씨와 재혼하고, 데리고 온 딸 팥쥐와 함께 모녀가 콩쥐를 부려먹고 구박하는 대목에는 모두들 한숨을 쉬거나, 저런 몹쓸 년! 어허 저런 불여우 같은 것들이 있나? 하다가도 나무 호미를 부러뜨리고 밭두렁에 앉아 우는 콩쥐 앞에 검은 소 한 마리가 나타나 대신 밭 갈아주는 대목에는, 에그 불쌍한 것, 하늘이 도와주는구나! 하면서 제 일인 듯 손뼉을 치고 기뻐했다. 신이는 이러한 좌중의 기쁨과 슬픔과 분노와 감동의 느낌이 책을 읽고 있는 자신에게 그대로 전달되어 마치 술이라도 마신 것처럼 온몸이 달아올랐다. (144p)

 

 

  - 그 깊이란게 무슨 말이오? 사는 게 기쁘고 슬프고 화나고 즐겁고 날씨 바귀듯 하지 않습디까? 일테면 기쁨과 즐거움은 새벽이슬처럼 덧없이 스러지고 슬픔은 상여 타고 북망으로 갈 때까지 길게 이어진다오. 인생이 고해라고 하지 않소? 살며 겪은 것들이 녹아들어야. 그들이 생긴다고 하지요. 남도의 소리는 그늘에서 시작되오. (353p)

 

 

  - 내 생각에는 기왕에 사방으로 거처를 옮겨 다니는 신사의 도소를 따라가지 못할 바에야 신통의 짐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었다. 불승들처럼 단칼에 마음의 집착을 휙 베어낼 수야 없겠지만, 내 몸이 먼저 떠나면 마음은 타래에서 풀린 실처럼 서서히 따라오다가 모르는 결에 어디선가 툭 끊어져 나가게 될 것 같았다. 혹시 누가 알까, 그이가 끊어진 실의 끄트머리를 잡고 내가 간 길을 되짚어 돌아오게 될지. 그이에게 역겨움을 주기보다는 내 빈자리를 그의 곁에 남겨두고 싶었다. (45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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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꾼'이라는 작가의 그리움이 담긴 '등단 50주년' 소설이었습니다.

재미가 있든 없든, 인기가 있든 없든 이런 소설에

굳이 '사재기'라는 얼룩을 뒤집어씌워야 되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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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시선
이승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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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재하는 '아버지'에 대한 묘한 이끌림 <한낮의 시선 - 이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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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는 왜 나를 사랑하느냐, 혹은 사랑하지 않느냐고 묻지 않는다. 그것은 '사랑하다'가 아들에게 속한 동사가 아님을 아버지가 알고 있다는 뜻이다."

 어쩔 때 생각해보면 아버지의 존재는 딸-아버지의 관계 보다도 아들- 아버지의 관계 속에서 보다 모호하게 드러나는 듯 하다. 직접 느껴보진 못했지만, 그리고 제대로 설명하고 표현할 수는 없지만, 딸인 내가 생각할 수 없는 뭔가 오묘한 감정을 품고 있는 것 같다.

 

  책 속의 주인공은 이름도 모르는, 없어도 아무렇지도 않았던 아버지를 찾아서 떠난다. 키워준 아버지가 없었기에, 어머니는 그에게 너무나 각별한 보살핌을 주었다. 완벽한 어머니로 인해 아버지의 존재는 흐릿했지만 그에게는 아버지와 대면해야겠다는 이상한 이끌림이 생긴다. 그래서 머무르게 된 휴전선과 가까운 작은 도시 안에서 외삼촌에게 들은 약간의 단서 하나로 아버지를 찾아나간다.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그 이름을 가진 자의 부재때문에 발음이 되지 않았던 아버지. 그 아버지의 부재가 존재로 바뀌는 순간, 그 순간 앞에서 그는 두렵다. 그러나 그는 말한다. '내가 당신의 아들'이라고.

 

  삶에서 계속해서 '부재'상태였던 그의 아버지는 주인공 한명재의 꿈속에 등장하여, '절대로 한데에 오줌을 누면 안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꿈 속의 나를 지독하게 옭아매었던 아버지, 그는 현실에서도 주인공의 앞에 불편한 존재로서 등장하게 된다. 절대로 사랑을 주지 않는, 오히려 그를 이용하려고도 한다. 이끌림으로 찾아내었던 아버지에 대한 환멸과 실망은, 결핵을 앓고 있던 주인공이 피를 쏟게 함으로서 지금까지의 감정을 모두 분출해내게 한다. '그는 드디어 참으로 간절하게 신의 빛나는 사랑을 받고자 원하면서 그에게 이르는 길이 아득히 멀다는 것도 함께 깨닫는다.' 작가는 소설의 첫부분부터 인용했던 <말테의 수기>의 '말테'의 행동을 해석해가며, 사랑의 있고 없음과 상관없이 추구하는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를 일깨우고 있다.

 

  벌써 세번째, 아버지를 이야기하는 이승우 작가의 소설을 세 권이나 읽었다. 그만큼 이승우 작가는 소설 속에서 '아버지'에 관한 물음을 재차 던지고 확인한다. 소설 속의 '아버지'는 작가에게 아버지의 존재가 어떠했는지 계속해서 궁금해지게 만든다. 또한 <한낮의 시선> 속에서 '아버지'는 신적인 존재로서도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이승우 작가의 소설은 소설의 의미와 재미를 떠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독특한 문체를 보는 재미도 있어 보는 맛이 있다. 해외에서 사랑하는 작가이자 한국의 두터운 매니아층을 갖고 있는 이승우 작가, 그의 소설은 '관계'와 '사랑'의 진중한 문제를 다루고 있어 다소 무겁긴 하지만 하나하나 읽어나가고 싶게 만든다. 묘하게 끌린다.

 

 

Underline

 

 

 

 

  - 버스 안에는 불안정한 침묵이 감돌았다. 지친 낙타의 신음 같은 엔진 소리만 침묵의 표면을 휘저었다. 오르막길을 오를 때 버스가 내뿜는 배기가스가 간혹 차내로 들어왔다. 공기 속에 이미 가득 차 있는 악취에 스며든, 연소가 덜 된 일산화탄소와 질소가 속을 뒤집어 메슥거리게 했다. 먹은 것은 없다고는 해도 차멀미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식도를 타고 올라오는 신물을 삼키며 어질어질한 머리를 손가락으로 누르는데, 무슨 불길한 조짐처럼 <말테의 수기>의 첫 문장이 떠올랐다. 도대체 나는 그곳에 살려고 가는 것일까, 죽으려고 가는 것일까. (9p)

 

 

  - 나는 처음으로 자연 가운데 혼자 있었다. 그때까지 사람들에게 둘러싸이지 않고 온전하게 혼자 있어 본 적이 없었다. 그 숲에 들어오기 전에는 혼자 있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그랬으니까 혼자 있어야 한다는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정작 필요할 때는 필요한 줄 모르니까 원하지 않고, 어찌어찌하여 원치 않았던 필요가 충족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것이 필요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우리는 우리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산다.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의 인식이라는 게 대개 이런 식이다. (...) 모순이지만 필요를 느끼지 못하면서 원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다고 말할 수 밖에. 어쨌거나 정적과 고요 속에서 나는 아마도 처음으로 내 안으로 침잠해 들어갔고, 아마도 처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안락감 속에 빠져 지냈다. 그것은 나로서는 퍽 이색적인 경험이었다. (22p)

 

 

  - 아버지는 말로만 존재했다. 참을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해요. 나는 물었다. 참을 수 없는 경우가 있어서는 안 된다. 참을 수 있어도 참아야 하고 참을 수 없어도 참아야 한다. 아버지는 단호했다. 아버지의 금령은 예외가 용납되지 않는 절대적인 법칙이었다. 나는 그 법칙을 지키려고 했다. 그것은 그렇게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참을성이 있는 편이었다. 지킬 수 없는 상황이 생기기까지 지킬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킬 수 없는 상황은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32p)

 

 

  - 나는 내가 이제까지 접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문 앞에 서 있다는 걸 알았다. 할 수만 있다면 들어가고 싶지 않지만, 그럴 수 없을 거라는 예감이 정신을 멍멍하게 했다. 왜냐하면 법 앞에 서 있는 카프카의 인물에게 그랬듯 그 문은 오직 나를 위한 문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무언가를 찾고 추구하는 존재거든. 때로는 자기가 무얼 찾는지, 왜 추구하는지도 모른 채 찾고 추구하지. 몽유병 환자처럼 말이야. 찾다가 못 찾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 추구가 의미 없는 건 아니지." 은퇴한 교수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렇게 말했다. (41p)

 

 

  - 두 사람의 이야기는 나를 빨아들였다. 문제의 인물에게 감정이입까지 하며 이야기에 몰입했다. 폭군-보호자의 괴롭힘보다 그의 부재가 더 견디기 힘들었을 정황이 어렴풋이 이해되었다. 두렵고 불안한 '있음'보다 두렵지도 않고 불안하지도 않은 '없음'이 더 두렵고 더 불안했을 것이다. (14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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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표지가, 완전 맘에 든다.

판형도 작고 150페이지 남짓의 얇은 책이어서 읽어나가기는 편하다

그 안의 내용은 결코 쉽지만은 않은 소설.

 

'그런데 정말, 아들에게 아버지의 존재는 어떤 것일까요?' 문득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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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의 나라 1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8
모옌 지음, 박명애 옮김 / 책세상 / 2003년 2월
평점 :
품절


향락에 취한 도시, 상상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 <술의 나라 - 모옌>

 

 

 

After Reading

 

 

 

   사람에 따라 역겨울 수도 있는 책입니다. 아니, 아마 많은 사람에게 혐오감을 줄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우울하고 어두운 분위기의 소설이라도 그럭저럭 상관없이 읽는 편이지만, 이 책은 중간중간 참을 수 없이 얼굴이 찡그려져서 덮을까말까 고민했습니다. 그 이유는 소설의 재미와는 상관없이, 인간으로서 상상하기 버거운 소재를 이 책이 다루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탄광산업으로 번창한 주꾸어라는 도시에 고위 수사관인 띵꼬우가 수사를 나가게 됩니다. 바로 '아이고기'를 먹는다는 소문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서지요. 그런데 수사의 초반부터 뭔가 제대로 알 수 없는 분위기가 풍겨옵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만화(혹은 영화) <이끼>에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의문을 파헤치기 위해서 들어갔을 때, 아이러니한 냄새를 풍기던 도시와 그 마을 사람들처럼요. 수사관 띵꼬우도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호랑이 굴 속에서 마치 포위된 짐승과도 같은 느낌을 말이죠. 경제발전으로 술과 향락에 엄청 빠져들던, 그런 이상한 눈길의 주꾸어 시 사람들은 띵꼬우에게도 호화스런 식탁을 대접합니다. 술은 안마신다던 띵꼬우의 입에 한 잔, 한잔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올바른 수사를 해야할 목적은 점차 흐릿해지고, 점점 알 수 없는 혼란스러운 사건들이 그에게 일어나게 되면서 점차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야기의 독특함과 함께 소설은 아주 재밌는 형식 또한 갖추고 있습니다. 띵꼬우 수사관이 도시에 잠입한 기본 틀의 이야기와 더불어, 또 하나의 이야기가 등장하지요. 주꾸어 시에 살고 있는 문학청년 '리이또우'와 '모옌'이 나누는 편지글, 그리고 '모옌'작가에게 보내는 '리이또우'의 짧은 소설들. 그 짧은 소설들은 주꾸어 시에 대한 내용으로 어린 아이, 제비집, 당나귀 성기를 먹는 이상하고 해괴망측한 도시 사람들의 이면을 볼 수 있게 합니다. 이러한 소설의 형식은 소설 속의 액자, 계속해서 액자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을 주면서, 색다른 소설을 만들어내는 작가의 재치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대신, 중간 중간 환상 속 이야기 같은 부분은 조금 책장을 넘기기 힘들기도 합니다.

 

   다양한 형태의 이야기가 섞인 <술의 나라>는 타락한 인간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줍니다.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하지만, 그들의 식문화는 인정할 수 없는 너머로 들어선 듯 보입니다. 먹을 것에 대한 욕망이 넘쳐흘러, 기본적인 생존욕구를 넘어 폭력적인 학살의 수준까지 넘어가는 <술의 나라> 속 사람들의 모습은 '그들이 과연 인간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향락과 욕망에 취해 이성을 잃어버린 주꾸어 시의 사람들, 그리고 그 도시에 발을 들여 같이 취해가는 주인공. 절대 있어서는 안될 이야기지만, 혹시나 실제로 있을까 싶어 두려워지는 소설입니다.

 

 

Underline

 

 

 

   - 태양이 아이들의 얼굴을 비추고 있어서 아이들의 얼굴은 여러 개의 꽃송이가 무더기로 피어난 해바라기 꽃밭 같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갓길을 따라서 아이들에게 접근했다. 그의 몸을 스쳐 지나가는 자전거는 거무죽죽한 뱀장어 같았다. 자전거를 탄 사람들의 얼굴에는 강렬한 햇빛 때문인지 모호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아이들은 하나같이 꽃처럼 단장을 하고 있었으며, 포동포동한 얼굴에 미소 짓는 눈동자들이 돋보였다. 그들은 굵고 긴 붉은 줄에 묶여 있는 한 두름의 물고기 같았으며, 한 나무 줄기에 열려 있는 잘 익은 열매 같았다. 자동차가 아이들의 몸에 매연을 내뿜었다. 그 연기는 석탄 같았고, 아이들은 한 꼬치에 꿰어 구워진 새 같았고, 그 위에다 여러 가지 조미료를 뿌려놓아서 독특한 향기가 코를 찌르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나라의 미래이고 꽃이며 제일 소중한 보배다. 누가 감히 그 아이들을 깔아뭉개 죽이겠는가? (1권, 30p)

 

 

  - "저는 상황을 조사하려고 왔지, 술을 마시러 찾아온 게 아닙니다." 무례한 어조가 역력했다. 광산 책임자와 당 위원회 서기가 완전히 똑같은 눈길을 주고 받더니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여전히 자애로운 어조로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알지요. 당신에게 술을 마시라고 권하지 않을 겁니다." 띵꼬우는 형제 같은 이들 중 도대체 누가 당 위원회 서기이고 누가 광산 책임자인지 구분할 수 없었지만, 그들이 언짢아할까 염려되어 묻지도 못한 채 멍청하게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 "어서어서 가기나 하십시다. 술은 안 마셔도 식사는 해야지요." 그는 계속 앞으로 나갈 수 밖에 없었다. 한 사람이 앞에 서고 두 사람이 뒤를 따르는 삼각형 구조가 싫다고 그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그 모양으로 걷자니 술자리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법당을 향해 걷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발걸음을 늦추어 그들과 나란히 걸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헛된 생각이었다. 그가 발걸음을 늦추면 뒤따르던 두 사람도 동시에 발걸음을 늦추었으니 삼각형 모양은 결코 뒤틀리지 않았고, 그는 시종일관 붙잡혀 가는 사람 같은 위치에 처해 있었다. (1권, 70p)

 

 

  - 나중에 누군가 여러 개의 손가락이 달린 손으로 선홍색의 포도주 술잔을 그에게 넘겨주었는데, 그에게는 그 손가락이 마치 다리가 여덟 개 달린 오징어처럼 모호하게 느껴졌다. 아직 껍데기 같은 몸에 남아 있는 의식의 찌꺼기 까지 동원해 있는 힘을 다해 힘겹게 일을 하고 있으나, 이미 해체되어가고 있는 그에게 그 손은 무리 지어 돌아다니는 사물처럼 보였다. 그것은 마치 여러 층으로 겹쳐진 분홍색 연꽃 같았다. 그런데 술잔 역시 여러 층으로 겹겹이 쌓여 있었다. 영롱한 보석으로 된 탑 같고, 특수한 기술로 찍어낸 사진 같았다. 주위의 선홍색보다 짙은 색을 띠고 있는 술잔들은 비교적 안정적으로 놓여 있었고, 한 무리의 얇고 붉은 안개를 뿌리고 있었다. 이것은 한 잔의 술이 아니라 금방 떠오른 태양이며, 차갑고 농염한 그 불길한 애인의 심리였다....... (1권, 79p)

 

 

  - 얼어붙은 비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소리가 갑자기 사라지면서 산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듯한 어떤 격렬한 소리가 부근에서 들려왔다. 그 진동에 그는 자기도 모르게 뛰었다. 무엇이 폭발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손전등 불빛이 혁명 전사 묘지를 비추던 바로 그 순간 한 줄기의 거대한 용기가 갑자기 그의 온몸에 주입되었다는 것이었다. 한 줄기 거대한 용기는 술의 고질병 같은 질투, 과부의 술과도 같은 사악함과 연약함, 애정의 술처럼 엎치락뒤치락하면서 늘 마음에 걸리는 것들, 이 모든 것을 시큼하고 더러운 땀과 비린내 나는 오줌으로 바꾸어 체외로 배출해버렸다. 카자흐 초원을 질주하는 맹렬한 말과 같은 보드카가 그를 용맹스럽게 만들었다. 조심성이 없고 거칠고 호방하며, 거칠면서도 섬세하며, 모험심이 풍부하고 아주 자극적이어서 마치 스페인의 투우사처럼 광란적인 코냑이 그를 변하게 만들었다. (2권, 398p)

 

 

  - .......와, 와, 와! 진깡쫜, 그리고 이미 먹혀버린 후 화장실에 배설될 어린 남자아이들을 생각하자 띵꼬우의 마음속에 남아 있던 책임감과 정의감은, 한쪽에서 불타고 있는 북두칠성과 같이 암흑 속에서 도처로 돌아다니고 있는 의식을 비춰주었다. 이때 그는 귓바퀴와 코끝에 참기 어려운 아픔을 느꼈다. 마치 독을 묻힌 날카로운 물건이 그의 귀와 코를 지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구부려 앉았다. 하늘과 땅이 돌았고, 커다란 머리는 아주 큼직한 별자리처럼 느껴졌다. 힘겹게 부은 눈을 뜨니 네다섯개의 커다란 회색 그림자가 그의 몸을 넘고 있었으며, 땅을 내디딜 때마다 가슴이 갑갑해지는 듯한 이상한 소리를 굼뜨게 내뱉었다. 동시에 그는 날카롭게 찍찍거리는 새된 소리를 들었다. 도대체 어떤 진귀한 동물이 울고 있는 것일까? (2권, 51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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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자신의 문장에 대해 '세련되지 않은, 흙에서 빚은 문장이고 질그릇같이 투박하다'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충분히 세련된 것 같은데?.......... 노벨문학상 수상자라고 기대했는데, 정말 대단하긴 하네요.

다음에는 모옌의 <열세걸음>이나 <개구리>를 한번 읽어볼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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