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 바퀴가 인천공항 활주로에 쿵, 내려앉던 순간,
일주일간 잠들어 있던 머릿속에 비상등이 켜졌다.
뭘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하던 사람이었는지 깨닫기 시작한 순간 머릿속이 캄캄해졌다.


집에 돌아와 두 개의 가방을 정리하고
컵라면으로 허기를 메운뒤 수면모드로 돌입.


오후 끝자락에 일어나 집안을 휘 둘러보았다.
집을 떠나던 날 버릴 만한 것들을 죄다 버리고 간 터라 휑하고 쓸쓸했다.
내가 없는 동안 집은 그렇게 조용히 먼지를 마셨다.


인터넷이 되질 않았다.
휴대폰 액정은 천연색이 사라진 낡은 필름처럼 보였다.
켰다 껐다를 반복했다.
전화가 걸리지도 오지도 않았다.
전원이 꺼져있다는 음성만 반복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걸까?







여행이 즐겁지만은 않다는 걸 이제야 알다니.


걷고, 걷고, 또 걸었던 싱가포르의 습한 거리, 더위, 땀,
보너스처럼 쏘이던 에어컨 바람...
자신의 민족에 대한 우월감과 타 민족에 대한 예우,
남장 여자를 한 트랜스 젠더의 숲,
G 발음을 못하는 차이니즈들,
잘 있을까.


미처 생각지 못했던 영어들이 마구 튀어나오고
아무 곳에서나 퍼질러 앉아 숨을 돌리던 꾀죄죄한 내 몰골은
그곳에 이제 없다.


나에게 후했던 나날들. 
나에게만 예외라고 특별한 환상의 옷을 입혔던 나날들.
조금만 아파도 중병에 걸린 것처럼 행세했던 호사의 날들.


왜 이제서야 알았을까.
나는 왜 이제서야 나를 알았을까.
그런데,
이게 다 안 것이 아니라는 오만이 따라붙는다.


핑계는 있지만
너무 많이 튀어나올 것 같아 자제한다. 


좀 아픈, 그런 날의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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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6-10-23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기 저 감기 조심하세요~! 두건 쓰신 분이 플레져님이신가요??

플레져 2006-10-23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요. 아랍 거리에서 만난 코리안이에요 ㅋㅋ

진/우맘 2006-10-23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어쩐지, 플레져님은 꼭 저렇게 생겼을 것 같은데....^^

플레져 2006-10-23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전 저 애보다 더 괜찮아요! ㅋㅋ

세실 2006-10-23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맞는것 같은데.... 여행 다녀오셨군요.

hnine 2006-10-23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플레져님인줄 알았는데~

물만두 2006-10-23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같은데요~

미미달 2006-10-23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맞죠? ㅋ

2006-10-23 17: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노아 2006-10-23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편의 시를 보는 것 같아요. 돌아오신 것을 환영해요^^

2006-10-23 19: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클리오 2006-10-23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님, 사진이 너무 예뻐요!! 라고 할랬어요~ ^^

산사춘 2006-10-24 0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멋진 글에 현혹(?)되지 않고 사진에 꽂혔는데!

플로라 2006-10-24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행 뒤 밀려오는 상념들, 하지만 다시 또 공항으로 향하는 설레임을 그리워하게 되지 않던가요? 오늘은 쨍한 햇빛아래 야외에서 1시간 정도 커피를 마시면서 아무것도 안하고 있어도 그대로 개운한 기분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오늘 아침 오전 6시 30분.
저 수많은 구름들이 어디에서 몰려온 것일까.
아름답기 보다 조금 섬뜩했던 아침의 하늘을 다시 들여다본다.

내 안에 구름 있나?
기분이 자꾸 뭉게뭉게 가라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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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23 15: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Mephistopheles 2006-10-23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상시간이 빠르시군요 저시간이면 전 코 드럭드럭 골면서
잠에 빠져 있을 시간이였는데..^^
(사진에 녹색은 항개도 안보여요..)

날개 2006-10-23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행 잘 다녀오셨나요?^^
오늘 날씨 너무 춥네요.. 이불안에서 꼼짝않고 있어요..에헤헤~

플레져 2006-10-23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 세익스피어의 비극이 공연되기 직전의 무대같아서
베란다 문을 열고 깜짝, 놀랐어요.
그저 잠만 잤습니다.
왜 이렇게 잠이 쏟아지는지 모르겠어요. 아함~~


메피스토님, 저절로 일어나는 시간이 되버렸어요.
녹색들은 지금 어디 있을까요? ㅎㅎ

올리브님, 으스스하기도 하지요? ^^


날개님, 잘 다녀왔어요.
보일러의 계절이 돌아왔어요. 두둥!

하이드 2006-10-23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이 멋져요. ^^

플레져 2006-10-23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을 확~ 깨운 섬뜩한 광경이었어요. 덜덜...
 




여름 휴가를 가지 않고 (못 간 것이지만) 가을로 미뤘다.
결혼기념일 여행겸해서 아름다운 우리나라의 가을에 도취할 예정이었다. 
남편의 출장이 싱가포르 일주일로 확정되는 바람에 덤처럼 따라왔다. 
남편은 회사에 가고 나는 홀로 투어에 나선지 4일째. 

여기는 창이 빌리지, 한적한 싱가포르의 구석이다. 
숙소 건너편에 바다가 있고 산책로가 있어 유한마담처럼 아침과 늦은 오후에 독서와 바람을 즐긴다.




 


바퀴가 보일만큼 커다란 비행기가, 바게뜨 같은 비행기가 빠른 속도로 떴다 사라진다.
바게뜨 같은 비행기라는 내 말에 웃어준 그녀가 있어 한번 더 써먹는다.
내 말에 귀기울여주고 웃어주는, 칭찬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행복하다.





싱가포르는 여전히 덥고 습하고 조용하다.
어디선가 빌딩들이 무럭무럭 크는 소리가 심장 박동처럼 틈틈이 들려오는 가운데
길을 물어오는 외국인들에게 친절한 가이드 노릇도 하며 배회하는 중...







Asia Civilization Museum 관람이 '특히' 좋았다.
환상 여행을 온 것처럼 어둑한 박물관 내부, 섬뜩한 공포가 밀려오는 아시아 유물들... 
동그마니 홀로 앉아 인형극을 관람하고 터치 스크린의 긴 듯한 이야기는 건너뛰며
오래 머물러 있었다. 머릿속이 미로가 되버리는 느낌.



흐릿한 기억이 되지 않도록 기운을 내야 한다.
날씨가 너무 덥고 체력이 딸린다.

내일은 오리라도 한마리 잡아먹어야지.

아, 그리고 하마터면 리틀 인디아에서..........................................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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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6-10-20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은 정말정말 멋지게 사는 분이세요. 글구 늘 책과 함께 있으시니 어딜 가든지 든든하겠어요

2006-10-20 0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시장미 2006-10-20 0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그럼 지금 싱가포르에서 글을 남기신거예요? 으흐흐 인터넷 속도 많이 느리다고 하던데 괜찮으세요? ^-^ 나중에 출장 자주 다니는 사람이랑 결혼해야 겠다는 생각까지 드네요. 그래야 저도 여행 많이 다닐 수 있을 것 같아서요~ ㅋㅋ

몸 건강히 잘 지내다 오세요. 근데, 밥, 라면, 김치, 고추장.. 뭐 이런거 생각나지 않으세요? 뭐, 한식식당에 가면 그만이지만.. 전 유럽여행 갔을 때 식사해결이 제일 어려웠어요. 정말 집에서 해먹는 밥이 제일 그리웠는데... 으흐

잘 챙겨드시고, 잘 돌아오셔서 또 좋은 글 남겨주세요! ^-^*

stella.K 2006-10-20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싱가폴에 계시구만요. 부럽삼. 맞아요. 내가 처음 플레져님 알게 됐을 때 이맘 때가 결혼기념 일이라고 호텔방이었나 어디서 창가에 고개 숙이고 찍은 사진 어렴풋이 기억나요. 흐흐. 암튼 잘 댕겨오삼.^^

플로라 2006-10-20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창이빌리지 너무 여유롭고 좋아보여요. 공항서 가까운 곳이라 비행기가 들고 나는 풍경이 보이나봐요. 여전히 무덥고 습한가요? 싱가폴은...ㅎㅎ 더위에 지치지 마시고 건강하게 즐겁게 잘 보고오세요~^^ 오리고기 시식는 어떠셨는지...ㅎㅎ 리틀 인디아의 여정을 오늘밤 풀어놓으시려나? 기대기대~^^

2006-10-20 21: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연 2006-10-20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참 멋지세요^^ 싱가폴은 저도 가보고 싶은 곳 중의 하난데..
님의 여행기, 기대만빵입니다!^^

2006-10-23 1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해리포터7 2006-11-19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혼자서 다니실수 있다니...부럽습니다^^저같으면 숙소근처만 얼쩡거릴텐데 말이어요..
 

칼로 사과를 먹다



사과 껍질의 붉은 끈이
구불구불 길어진다.
사과즙이 손끝에서
향긋한 사과 내음이 기어든다.
나는 깎은 사과를 접시 위에서 조각낸 다음
무심히 칼끝으로
한 조각 찍어올려 입에 넣는다.
"그러지 마. 칼로 음식을 먹으면
가슴 아픈 일을 당한대."
언니는 말했었다.

세상에는
칼로 무엇을 먹이는 사람 또한 있겠지.
(그 또한 가슴 아프겠지)

칼로 사과를 먹으면서
언니의 말이 떠오르고
내가 칼로 무엇을 먹인 사람들이 떠오르고
아아, 그때 나,
왜 그랬을까......

나는 계속
칼로 사과를 찍어 먹는다.
(젊다는 건,
아직 가슴 아플
많은 일이 남아 있다는 건데.
그걸 아직
두려워한다는 건데.)


詩  황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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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6-10-02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사과는 통째로 베물어 먹는게 좋아요..^^*

플레져 2006-10-02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사과의 안보이는 부분에 깨물어 먹은 자국이 있다지요...헤헤 ^^*

물만두 2006-10-02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 본 적 없는 사람도 마찬가지죠...

아영엄마 2006-10-02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그런 거였군요.. 예전에 칼로 많이 찍어 먹었는데...@@;; (요즘이야 아이들 있어서 껍질 깎거나 자른 다음에 잽싸게 치워 버리지만~)

비로그인 2006-10-02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좋은 시네요 추천!

ceylontea 2006-10-02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과색이 참 예쁘네요.. ^^

rainy 2006-10-02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업뎃이 잦아서 반가워요. 시도 물론 좋구요^^

플레져 2006-10-02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rainy님, 안녕하셨죠? 반가워요.
추석 잘 보내셔요 ^^

실론티님, 홍옥이랍니다. 홍옥은 새콤달콤한 맛도 일품이지만
색이 참 끝내주죠 ㅎㅎ

체셔고양이님, 추천 감사해요.

아영엄마님, 저는 무서워서 칼로 먹지는 못했는데
시인의 시를 읽고보니 무섬증 때문이 아니라
많이 아파서였나봐요 ㅎㅎ

만두님, 그러니깐...저요...ㅠㅠ

mong 2006-10-02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안녕하시죠? ^^
그간 저도 바빠서 안부도 못 여쭙고~히힝
명절 잘 보내시구요
맛난 음식 마니 드세요오~~

ceylontea 2006-10-02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사는 달아서 사과를 먹다보니.. 새콤달콤한 홍옥이 더 맛나더라구요.

마법천자문 2006-10-02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칼로스 쌀은 들어봤는데 '칼로 사과' 는 처음 듣는 브랜드로군요. 농산물은 우리 것을 애용해야 합니다. 신토불이~♬ 신토불이~♬ 신토불이야~♩

hnine 2006-10-02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도 좋고요,
사과를 저렇게 찍어 놓다니, 사진도 맘에 쏙 들고요.
제가 사과 매니아 아닙니까 ^ ^

Mephistopheles 2006-10-03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님이 깍아준 사과는 그냥 넙죽넙죽 받아먹는 입장이다 보니.....^^
안가리고 먹습니다...ㅋㅋ

플레져 2006-10-03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몽님, 와락! 덥석! 잘 지냈죠?
너무 뜸한 거 아녀요? 이제 출몰해주삼 ^^
몽님도 추석 잘 보내요~

실론티님, 홍옥만 드시는 분들도 꽤 많더라구요.
그런데 홍옥도 짧게 나왔다 사라져서 좀 아쉽죠.

소소너님, 안녕하세요 ^^
칼로 사과는 들어봤는데 칼로스 쌀은 못 들어봤어요.
어디서 파나요? ^^

hnine님, 아... 그러시구나...
사과를 좋아하는 미녀셨군요! ^^

메피스토님, 잘 드시는 것만으로도 마님은 만족하실겁니다 ^^

산사춘 2006-10-03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이 깨물으셔서 사과가 씨뻘겋게 질린 거야요. 추석 잘 보내시고 사과도 많이 드세요~

플레져 2006-10-03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사춘님, 그런 것도 같습니다 ㅎㅎㅎ
행복한 추석 보내셔요. 맛있는 거 많이 드시구요 ^^

2006-10-03 2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10-09 05: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10-09 2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10-09 2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10-17 23: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제목을 써놓고 보니 무슨 화장품 광고 카피 같다. 요즘 나는 남편과 함께 피부 가꾸기에 열을 올리는 중이다. 계기는 남편이 화장품을 바꾸면서 시작되었다. 동갑이나 마찬가지인 어줍잖은 연상연하 커플인 우리 부부는 멋에 관해서 만큼은 양보가 없다. 나는 그런 남편이 참 마음에 든다. 내가 새옷을 사와 패션쇼를 해도 즐거운 관객이 되어 예스 or 노우를 단호하게 말하고, 장소에 맞는 차림을 코디해주는 내 센스를 믿어주고 즐기는 남편. 결혼을 한 달 앞두고 살림을 합친 우리는 가장 먼저 손모아 정성을 들인 것이 '이뻐지기, 혹은 잘생겨지기' 였다. 오랜 세월 자취하며 불규칙한 식사를 일삼은 남편은 본디 검은 피부를 갖고 있긴 했지만 새신랑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어떻게 하면 새신랑으로 보이느냐, 라고 물으신다면... 각자의 기준이라 말 할 수 없노라고 얼렁뚱땅 넘어가야지.

남편이 될 그에게 나는 그가 퇴근하여 돌아오면 피부 관리를 시작했다. 전문 피부 관리사도 아니고 화장품을 다양하게 구비해놓은 것은 아니지만, 화이트팩과 영양크림 같은 기본적인 화장품들만 갖고 있었지만 나는 꽤 성실한 피부관리사가 되어 남편의 피부를 가꿨다. 오가는 스킨십 사이에 싹트는 우리의 애정행각! 남편이 될 그 역시 기꺼이 내게 몸(?)과 얼굴을 맡기고 피부 관리에 동참했는데 정말 재미있었던 건 그는 내가 얼굴을 마사지하거나 팩을 바르고 있으면 눈을 꼭 감고 있는다는 거였다. 그럴땐 내가 엄마가 된 기분이 든다. 엄마가 내 얼굴을 닦아줄 때 눈부터 감았던 버릇처럼. 그런 그가 무지 사랑스러웠는데 지금도 남편은 팩을 집어든 순간 눈부터 꼭 감는다.

요즘 내가 구비해둔 화장품들은 그동안 모아놓은 덕분에 꽤 다양하다. 황토팩 매니아이니 황토팩이 빠질 수 없고, 피부 색을 화사하게 만드는 화이트팩, 영양과 수분을 공급하는 마스크팩 (요건 나만 쓴다 ㅋㅋ), 샘플로 한 상자쯤 얻어놓은 옥용팩, 각질 제거에 좋은 라이스팩, 워시오프형 마사지 크림등... 

남편이 피부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회사의 상사분 때문이다. 그분이 파우치에 유행하는 화장품 시리즈를 넣어갖고 다닌다는 거였다. 중년의 나이에도 그렇게 관리를 하는데, 게다가 우린 무서워서 성형은 일체 꿈도 꾸지 않는터, 피부가 환하고 좋으면 열 살 쯤 거뜬하게 아웃 시키는데  그걸 안해? 싶은 것이... 자극이 되었다. 자기 관리를 잘하는 남자도 멋있지만 피부 좋은 남자, 자신의 피부를 사랑하는 남자에게 끌리는 내 성향 덕분에 남편은 적극적인 피부 관리를 받게 되었다.

어제는 옥용팩을 해주었는데 한번에 필 오프 (다 마른 후 얼굴에서 떼어내는 것) 되는 것을 보고 남편은 눈이 휘둥그레져 아가처럼 신기해했다. 워시 오프형 화이트팩의 효과에 만족하고 올인하고 있던 참에 옥용팩의 필타입은 남편을 놀라게 할만했다.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고 돌아와 휴식같은 시간, 곧 나를 가꾸는 시간을 갖게 된 남편은 야식을 찾던 버릇도 끊어버리고 오이와 두부등을 먹으며 소극적인 다이어트도 시작했다. 낮엔 일해야 하니 먹지 않을 수 없어 금세 체중이 줄지는 않을거다. 얼마전 부터는 술도 자제하고 있으니 1년 후에는 몸메도 달라져 있지 않을까 싶다.

운동이건 피부관리건 결국 나 자신을 위한 처방이다. 여자들이 거울을 많이 보는 이유가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다. 내 스스로 나에게 만족하면 그 누가 개구리를 닮았다고 킬킬거려도 내 눈에는 눈이 큰 아이로 보이는 법. 이야기의 결론이 이렇게 나버린 마당에 제목을 바꿔야 하는데... 오랜만에 서재를 가꾸는 터에 호객행위 하는 셈치고 그냥 둘란다.



sleeping in - sebastia boa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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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영엄마 2006-10-02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모나~ 정말 멋진 자기 관리입니다.(남자들도 가꿔 줘야 하구요...) 플레져님네 부부께서 더 이뻐지시겠네~~ ^^

비로그인 2006-10-02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굉장히 부러운 바람직한 부부상 같은데요 ^^

뭔가 같이 할 수 있다는 건, 두배의 기쁨이 따라오는 건가봐요.
나도 이뻐져서 좋고, 이쁜 나를 바라봐서 좋을 상대방도 있구요 ^^

물만두 2006-10-02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도 관리 받고 시포요~

urblue 2006-10-02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집 냉장고에도 애인을 위한 마스크팩이 들어 있습니다요. 호호.

마늘빵 2006-10-02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 닭살닭살 부르르르르

2006-10-02 13: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sooninara 2006-10-02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남편에게 계란이나 황토팩할때 발라달라고 해요. 혼자하려면 힘들어서..
전 마스크팩 남성용도 사주었는걸요.^^
저만 혼자하면 미안하잖아요. 그래도 열심히 한편은 아니었는데..플레져님 글에 필받아서 앞으로는 더 열심히.ㅎㅎ부부피부관리실을 운영해야겠어요.

플레져 2006-10-02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니나라님, 저보다 너그러우시군요 ^^;;
30일 코스로 피부의 완성도(?)를 봐서 마스크팩으로 단계를 높여가야겠어요 ㅎㅎ
함께 팟팅! ^^

속삭님, 님의 글이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아세요?
눈으로 읽은 만큼 모니터가 닳거나 한다면... 선명도가 제로일거에요.
고마워요. 잊지않을게요 ^^

아프락사스님, 음... 닭살스럽지 않게 쓰려고했는데 늘 실패합니다 ㅎㅎ

블루님, 아휴. 꾜쇼한 신혼이신데 오죽하겠수! ㅎㅎ

만두님, 제가 해드릴수도 없고... 만순양께 ^^

체셔고양이님, 빙고~! 피부관리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같이 무언가를 하는 것 같아요.
취미가 비슷하면서도 결정적인 부분에서 다르기때문에
남편의 피부를 쓸어주는 일이 제겐 즐거움이죠 ^^

아영엄마님, 요새 저희 부부가 때깔 좀 나요 ㅎㅎㅎ

플로라 2006-10-02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아아아, 너무너무 부러운 장면들.... 정말 귀여우신데요~^^ 저도 나중에 꼭 해볼래요~^^;;

날개 2006-10-02 1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남편한테 해주겠답시고 팩을 사긴 했는데, 딱 한번 해주고는 귀찮아서 그대로 있다지요....ㅎㅎㅎ

Mephistopheles 2006-10-03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관리를 빙자한 플레져님이 솔로들에게 날리는 라부라부 카운터...!!!

플레져 2006-10-03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로라님, 나중에 더 많은 팁을 알려드리죠 ^^

날개님, 오~ 역시 날개님도 센스쟁이 ^^
추석이 코앞인데 추석선물로 팩, 어때요? ㅎㅎ

메피스토님, 음음...'빙자한'이 몹시 맘에 드는군요 ^^

oooiiilll 2006-10-03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초나 녹두가루, 감자나 오이 갈은 것 등 천연 재료가 가장 좋지만 피부관리실에서 사용한다는 고무팩을 인터넷으로 주문해 사용해 봤더니, 어머나, 꽤 좋던걸요.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팩을 해주며 오고가는 러브러브 스킨쉽이야말로 최고의 피부 보약이 아닐까 싶네요. 혼자 거울 보며 반죽 같은 팩을 처덕처덕 얼굴에 붙이는 모양새에 지쳐 피부관리와 멀어진 지도 벌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