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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한 오해
스티븐 제이 굴드 지음, 김동광 옮김 / 사회평론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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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의 비참함이 자연법칙이 아니라 우리들의 사회제도에 의해 비롯되었다면, 우리의 죄는 중대하다."
 - 다윈,「비글호 항해기」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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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인 스티븐 제이 굴드는 전형적인 68세대이다. 2002년에 그가 오랜 지병으로 숨졌을때 뉴욕타임스는 "찰스 다윈 이후 가장 유명한 생물학자가 사망했다"고 보도했다고 한다. 그만큼 그는 20세기의 과학사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또한 그는 과학의 대중화 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이며 많은 과학 저서를 발간한 대중적인 저술가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1981년에 초판이 나온 이 책은 저자의 대표적인 역작 가운데 하나다. 이 책은 한 마디로 말하면 생물학적 결정론에 대한 비판을  다룬 책이다. 이 책의 전반을 통해서 그는 인간의 생물학적 차이에 대한 갖가지 '오해'의 역사를 시대의 흐름에 따라 추적해 나간다. 그리고 과학이라는 가면을 쓴 생물학적 결정론의 갖가지 오류들을 찾아내고, 이를 논증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차례대로 그 허구를 무너뜨린다.

'인간'을 잘못된 척도로 삼은 역사는 놀랄만큼 그 뿌리가 깊다. 그래서 프로타고라스의 유명한 아포리즘(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에 대한 패러디에서 따온 이 책의 원제(원제는 The Mismeasure of Man이다.  즉 '인간이라는 잘못된 척도'이다)는 생물학적 결정론에 대한 비판의 의미 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오해의 오랜 역사까지 느껴질만큼 다의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에게 최초로 불을 가져다준 프로메테우스는 그에 대한 벌로서 밤마다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먹히는 끔직한 형벌을 받는다. 그리고 그의 간은 낮이면 또다시 자라난다. 고대 신화는 오늘날에 와서도 좀처럼 달라지지 않는다. 20세기 이후 인류는 DNA의 발견과 게놈 지도 및 줄기세포 연구 등을 통해 생물학 및 생명과학 분야의 놀라운 발견들을 더욱 빠른 속도로 진척시켜 나가고 있는 중이다. 이러한 여러 '과학적 발견' 또한 불의 발견처럼 늘 인간에게 커다란 희망을 주면서 동시에 커다란 위험을 보여주는 데 예외일 수는 없다.

이 책에서 '불의 발견'에 대응되는 키워드는 소위 IQ라는 용어로 물화(物化)되어온 인간의 '지능'에 관한 발견이다. 그리고 '지능'으로 대표되는 편리한 도구의 발견은 IQ테스트라는 일순간적 측정에 의해 막대한 권능을 부여받는다. IQ로 측정된 인간의 '지능'이 인간의 일생을 따라다니는 분류 라벨 혹은 일종의 바코드처럼 물화함에 따라 인류사회에 가해진 죄과들은 무수히 많다. 인종별 IQ 수치에 대한 서열화와 분류는 미국에서의 이민제한법을 낳게 되고, 특별한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식별하기 위한 IQ테스트는 교육 불능이라는 낙인을 찍는 데 오용되어 왔으며, 인종차별적 폭력과 편협한 국수주의들이 난무한 원인의 일단을 제공하는 일에도 나름대로 기여해왔다.

사실 지능 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물학적(유전적) 차이에 대한 갖가지 오해들에 대한 역사는 매우 뿌리깊은 데다가 음험하기까지도 하다. 이 책에서 굴드의 날카로운 비판 앞에 속수무책으로 오류를 드러내는 유명한 과학적(?) 연구들만 대략적으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뇌의 크기가 지능과 연관된다는 신화를 만들어낸 폴 브로카의 연구, 네오테니(neoteny)라고 불리는 지체발생 현상과 귀선유전(atavistic)의 특징을 통해서 인간의 미개성과 '원숭이성'을 찾아내려 애쓴 연구, 해부학적이고 생리학적인 특징들로 사회적 낙인의 도구로 삼으려한 롬브로소의 범죄인류학, 인간에 대한 서열화와 딱지붙이기의 도구로 전락한 IQ라는 발명품에 대한 연구 등......

인간의 '지능'이 인종과 계층과 성별에 따라 다르다고 해서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차별 마저 정당화하는 시도들은 역사적으로 인류가 무수히 겪어온 반복적 오류들의 전형을 이루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사회적 불평등이 생물학의 명령임을 인정하기 위한 근거들을 마련하기 위해 시도된 온갖 과학적 연구와 주장들의 오류들을 파헤치기 위해 열정적인 학문적 연구와 노력을 쏟아붓는다. 이 책이 결코 적지 않은 분량을 자랑하고 있다고는 하나, 굴드 자신이 찾아낸 수백년 혹은 수십년 전에 씌여진 먼지가 수북이 덮힌 서류뭉치 더미 속의 '인간에 대한 오해의 흔적들'의 엄청난 분량에 비하면 별것도 아니라는 생각마저 든다.

이 책에서 굴드가 찾아내고자 애쓴 여러 저명한 과학자들의 선입관과 편견과 피암시성-무의식적 편향에 의한 집착 또는 '객관적인' 정량적 자료가 선입관에 이끌려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경향성-들에 관한 저자의 눈부신 성찰은 이 책의 가치를 드높이는 또 하나의 색다른 매력이다.

이 대목은 소위 볼테르의 신에 대한 유명한 경구(만약 신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를 창조할 필요가 있었겠는가)를 생각나게 하는 측면이 있다. 말하자면 객관성이라는 가면을 쓴 공유된 도그마에 대해 무언가 끊임없이 교훈을 떠올리게 만든다는 점이다.

"이론은 사실로부터 얻어지는 냉엄한 귀납이 아니다. 가장 창조적인 이론은 사실에 상상적 관점이 가해진 것이며, 그 상상력의 근원 역시 대단히 문화적인 것이다....... 결정론자들은 흔히 과학이 사회와 정치의 오염에서 자유로운 객관적 지식이라는 전통적 권위에 호소하며 자신들의 주장을 펴왔다. 이들은 스스로를 엄격한 진리의 징발관으로 묘사하고,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을 감상주의자, 공상가, 그리고 몽상적 사상가로 표현했다."

굴드의 표현대로 '기대가 행위의 강력한 지침이 된 사례들'은 이 책에서 무수히 등장한다. 그래서 날조가 필연이 된 여러가지 허구적인 주장들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굴드의 손 끝을 떠나 이 책 속에 고스란히 정체를 드러내고 만다. 실증적 연구에 의해 하나의 객관적 이론으로 정립된 시대적 노력들이 사기극과 조작을 거쳤음이 분명해짐에 따라 낡은 사고의 오류와 악취는 이 책의 여러 곳에서 끊임없이 등장을 반복한다.

이 책에서 저자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주제는 그의 영웅인 찰스 다윈이 노예제도에 대해『비글호 항해기』에서 탁월하고도 통렬하게 비판한 대목인 '우리의 죄는 중대하다'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생물학적 선언에 의해 희망이 내동댕이쳐진 사람들의 고통을 더 이상 만들어내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최근들어 생물학자들은 인종 사이의 전체적인 유전적 차이는 놀랄 만큼 작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한다. 즉 어떤 인종에게는 존재하지만 나머지 인종에는 존재하지 않는 '인종 유전자'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만약 엄청난 대량학살이 일어나서 뉴기니의 깊은 삼림 속에 사는 작은 부족이 유일한 생존자로 남았다 해도 오늘날 50억 인구의 무수한 집단들 속에 표현되어 있는 모든 유전적 변이는 보존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굴드의 주장이다.

인간의 다양성을 지리적 고려에서 계층적 서열화로 이행시킨 것은 서양 과학사에서 일어난 결정적인 변화를 잘 나타낸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철도나 핵폭탄에는 못미쳐도, 그 변화는 우리들의 집단적 삶과 민족성에 엄청난 실질적 영향을 미쳤음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가장 큰 지적 모험이 우리 내부에서 일어날 수 있음을 역설한다. 그것은 낡은 편견을 버리고 새로운 개념적 구조를 구축할 필요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지적 추구에서 철저히 새로운 이해를 얻었을 때 느끼는 흥분만큼 달콤하고 훌륭한 보상은 없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것은 진정한 학자들을 감동시키고, 우리 이외의 사람들에게 호된 충격을 주는 마음속으로의 여행이라고 말한다.

하버드 대학교의 지질학과 동물학 교수로 재직했던 굴드는 과학 자체를 사회로부터 분리된 객관적이고 균일한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사회적.역사적 맥락 속에서 과학을 가장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평생에 걸쳐서 모색했던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이 책을 통해서 인간의 '생물학적 차이'에 대한 숱한 과학적인 연구와 주장들에 대해서도 그 '오해'의 발단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문제인가를 그만의 예리하고 독특한 성찰을 통해 분석해 낸다.

오늘날 우리는 단지 과학 지식을 늘리기 위해서 과학 서적을 읽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과학사나 과학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 과학서적을 읽는다는 말이 더 적합할 것이다. 철학자인 모티머 J. 애들러는 과학이 발전한 발자취를 따라가보고, 사실, 명제, 논증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방법을 추적하는 것은 가장 성공적인 인간 이성 활동에 참여해 보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또한 그는 과학적 객관성이란 '편견의 부재'가 아니며, 오히려 이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 객관성을 낳는다고 말했다.

그는 또 과학 서적에 있는 귀납적 논증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과학자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을 바탕으로 보고하는 증거를 따라가야 하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과학 서적이 지니는 유용성에 관해서 얘기하자면, 오히려 굴드는 이 책에서 편견에 바탕을 둔 증거들의 허구성과 논증의 오류들을 밝혀내는 일에 집중함으로써 애들러의 주장을 역설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고도 생각된다.

여기서 다시 한번 모티머 J. 애들러의 말을 빌려와야 할 것 같다.

그런데 몇 가지 해결할 수 없는 인간적인 문제가 있다. 인간과 인간 사이, 그리고 인간과 세상 사이는 뭐라고 단정지을 수 없는 관계다. 자연과 그 법칙, 그리고 존재와 생성에 대한 최종적인 이해를 아직 아무도 얻지 못한 과학이나 철학 분야에만 해당되는 소리가 아니다. 남자와 여자, 부모와 자식, 인간과 하나님처럼 일상적인 관계도 그렇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 생각할 수 없는 그런 것들이다. 위대한 책들은 이에 관해 좀더 잘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생각하는 사람들이 썼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그의 논적인 사회생물학의 주창자 에드워드 윌슨이 쓴
인간 본성에 대하여라는 책이나, 영국의 유명한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도 도움이 될만한 책이라고 생각된다. 에드워드 윌슨과 리처드 도킨스는 스티븐 제이 굴드의 과학적 성찰에 대한 태도 또한 그의  사회주의적 성향 내지는 "정치적 도그마"와 무관하지 않음을 비판하는 입장에 서있기도 하다.

조금 덧붙이자면, 진작에 사두고 여태껏 읽어 보지 못한 두 권의 책이 이 책을 읽는 동안 계속해서 나를 압박해 옴을 느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한 권은 '인간은 태어나는가 만들어지는가'라는 부제를 단 매트 리들리의
매트 리들리의 본성과 양육이라는 책이다. 또 한 권은 스티븐 제이 굴드를 환경결정론주의자라고 비판한 하버드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스티븐 핑커의 빈 서판이라는 책이다. 특히 스티븐 핑커의 책은 901쪽이라는 엄청난 분량과 4만원이라는 책값이 주는 압박감이 만만치 않지만, '인간에 대한 오해'를 줄이기 위해서, 아울러 나 자신 속에 숨어있는 여러 종류의 편견들을 발견하기 위해서라도 즐겁게 읽어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100% 유전적 근시도 20달러짜리 안경으로 교정할 수 있는데......" (본문 中에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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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시간의 화살, 시간의 순환
    from Value Investing 2013-12-30 15:12 
    시간이 지나간다. 저만치 흘러가는 시간의 아득한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현기증부터 난다. 시작도 끝도 없는 이 '시간'을 두고 하필 이 즈음에 굳이 '전에' '있었던 것' 혹은 '앞으로' '있을 것'이라고 기필코 '둘로 갈라놓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 * * 프로이트가 간과한 '엄청난 시간적 규모에 대한 이해'인류의 소박한 자존심은 역사 속에서 과학적 진보를 통해 두 차례나 큰 상처를 입었다. 첫째로 갈릴레이의 지동설은
 
 
oren 2005-04-19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에..zahir님. 이 리뷰는《인간에 대한 오해》에 대해 쓴 것이 맞습니다. 알라딘 측의 의도인지 실수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서평글 속에 참고삼아 인용한 책들에서도 이 리뷰글이 동시에 올려져있다는게 다소 혼란을 주고 있는게 문제입니다. '링크' 상태로 인용한 점이 문제로 보입니다만, 일부러 '링크' 상태를 해제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리뷰글이 잘못 올려진 것처럼 느껴지는 '오해'는 알라딘 측의 잘못된 시스템에 의해 비롯되었겠지만 그 죄는 별로 '중대'하지 않다고 봅니다. ㅋㅋㅋ
 
인간 본성에 대하여 사이언스 클래식 23
에드워드 윌슨 지음, 이한음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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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인 에드워드 윌슨은 하버드 대학교에서 생물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개미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이자 '생물다양성'과 '사회생물학'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다. 그는 1956년부터 하버드 대학교 교수로 재직해 왔으며, 이제는 대학 강단에서도 은퇴한 칠순을 넘긴 노학자이다.

또한 그는 20여 권의 과학 명저를 저술한 과학저술가로서 이 책『인간 본성에 대하여 On Human Nature』와『개미 The Ants』로 퓰리처 상을 두 번이나 수상했다. 그 밖에도 미국 국가과학메달, 국제생물학상, 크러포드상 등을 수상했으며, 비단 생물학뿐만 아니라 학문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준 20세기를 대표하는 과학 지성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과학이 고도로 발달함에 따라 프로메테우스적 과학정신은 최근에 와서 인간의 유전자지도를 완성한 데 이어 생명복제기술의 영역까지 마음대로 넘나들고 있는게 현실이다. 그러다보니 '복제인간의 탄생'이라는 미증유의 새로운 신화(?)가 눈앞에서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지금 세계 각국에서는 과학적 유물론의 신화 탄생을 도대체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고 또 풀어나가야될 것인지에 대해서 뜨거운 논쟁이 끊이질 않고 있다.

이 책의 저자인 윌슨은 이미 이러한 과학적 진보가 초래하게될 필연적 논쟁들을 오래전부터 예견했던 것일까? 그는 바로 이 책을 통해 오늘날 우리에게 절실한 해결과제로서 대두되고 있는 문제인 '생물학적 차원에서의 인간'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가를 밝히려는 노력을 꽤나 많이 진척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그가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를 새롭게 추구한 시도는 오늘날 '사회생물학'이라는 학문영역으로 확고히 자리잡은 것으로서, 이 책이 출간된 1978년 당시에도 물론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지만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윌슨의 주장은 수많은 논쟁속에 휩싸여있음에 틀림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 본성'에 관한 탐구의 최적의 대안을 '생물학적 본성으로의 통합'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그는 종교와 윤리를 포함한 인간의 모든 사회 행동은 결국 생물학적 현상에 불과하며 집단생물학과 진화학적 방법론으로 분석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인간 본성'에 관한 주제에 당면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연과학을 사회과학 및 인문학과 통합함과 동시에, 인간 본성을 자연과학의 한 부분으로서 연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 책은 본질적으로 사회과학이론이 자신과 가장 관련이 깊은 집단생물학 및 진화론이라는 자연과학과 접목되었을때 나타날 심오한 결과들을 다룬 사색적인 에세이'라고 저자 스스로 규정하고 있기도 하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자신이 '과학적 유물론을 지나치게 확신한다는 점이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생물학과 사회과학 사이의 현저한 거리를 줄일 시기가 도래했으며 '인간 본성'에 접근할려는 주된 추진력으로서의 '생물학적 탐구'를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윌슨의 논리를 짧게 축약한 표현은 '닭은 달걀이 더 많은 달걀을 생산하기 위해 잠시 만들어낸 매개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생명의 주체라는 것을 의심해볼 까닭은 없지만, 생명체란 태어나서 일정 기간을 보낸 다음 어김없이 사라지는 존재일 뿐이라는 점에서 보면 태초에서부터 지금까지 면면이 명맥을 유지해 온 DNA야말로 진정한 생명의 주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는 DNA를 가리켜 '불멸의 코일'이라고 부르고 생명체는 그저 '생존기계'일 뿐이라고까지 주장한다.

그렇지만 이른바 이러한 '유전자 결정론'이라는 논리에 있어서 짚고 넘어가야 될 점 한가지가 있다. 즉 윌슨과 마찬가지로 사회생물학자들은 결코 생명체가 유전자의 꼭두각시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생명체는 누구나 유전과 환경의 공동 작업에 의해 형성되는 독특한 존재라는 사실이다. 아무리 완벽하게 똑같은 유전자를 가진 일란성 쌍둥이도 모든 성품이나 사고까지 똑같은 복제품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제양 둘리가 태어난 이후의 상황에서 '복제 인간'의 출현이 그렇게도 온세상을 떠들석하게 만들지라도 우리는 '유전자를 복제한 것이지 생명체를 복제한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도 있어보인다. 복제 인간은 출산 시간이 많이 늦어진 쌍둥이에 불과하다는 것이며 가령 내가 만일 지금 나를 복제한다면 '그'는 유전자는 나와 완벽하게 같을지라도 그 유전자들이 발현되는 환경이 나와 다르기 때문에 전혀 다른 인간으로 성장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윌슨은 이 책을 통해 '인간의 궁극적인 본성은 무엇일까?'에 대해 결코 간단치 않는 답들을 내어놓는다. 그는 인간 본성의 두 가지 딜레마를 제시하면서 이들 딜레마로부터의 해결을 끊임없이 시도한다. 첫번째 딜레마는 인간은 포함한 그 어떤 종도 자신의 유전적 역사가 부과한 의무를 초월하는 다른 어떠한 목적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두번째 딜레마는 우리가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에 내재한 윤리적 전제들을 놓고〈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윌슨의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에 있어서의 주된 도구는 물론 '유전적 진화'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도 수많은 생물학적 다양성들이 사례로서 제시된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의 모든 사회적 행동의 생물학적 원리에 관한 체계적 연구가 사회생물학의 주요 연구 대상이기 때문이다. 과연 인간처럼 행동한다고 해서 인간이라 할 수 있는가? 원숭이가 이럭저럭 문화적 진화의 임계점을 건넜다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의 영역 속으로 진입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인가? 저자는 인간의 사회적 행동의 유전적 진화가 대부분 문명이 발생하기 이전인 500만 년 전에 일어났다는 것을 어느 정도 확신할 수 있다고 한다. 그 뒤 약 만 년 전, 농경과 도시가 출현한 뒤에는 훨씬 더 대규모의 문화적 진화가 일어났다고 한다. 그래서 인간이 역사적으로 질주하는 동안에도 일부 유전적 진화가 계속되기는 했지만, 그것은 인간의 본성 형질 중 미미한 부분만을 형성하는 데 그쳤다고 한다.

저자는 인간의 정신은 경험을 통해 선과 점으로 뒤엉킨 그림들이 그려지는 백지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여러 대안 중에 어떤 특정한 대안에 먼저 다가가서 본능적으로 특정한 하나를 선택하고, 유아에서 어른으로 자동적이고 점진적으로 변화하도록 정해진 신축적인 계획표에 따라 육체한테 어떤 행동을 하라고 촉구하는, 주변 환경을 빈틈없이 경계하는 탐색자, 즉 자치적 의사 결정 기구로 기술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고 주장한다. 오랫동안 해온 선택의 축적, 그것들의 기억, 앞으로 해야 할 선택에 대한 심사숙고, 각인된 감정들의 재경험, 이 모든 것이 정신을 구성한다고 한다. 한 개인의 의사결정은 그를 다른 인간과 구별해 주는 특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런 결정에 따라붙는 규칙들은 모든 개인이 내린 결정들을 폭넓게 중첩시키고, 그리하여 인간 본성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기에 충분하고 강력한 수렴을 이끌어낼 수 있을 만큼 빈틈이 없다는 것이다.

수 세기 동안 위대한 철학자와 심리학자들은 결정론 대 자유의지라는 커다란 역설을 붙잡고 씨름해 왔다. 신경생물학의 핵심적인 수수께끼는 자기애나 불멸의 꿈이 아니라 의지이다. 일차 작동자, 즉 번쩍이는 북들을 지휘하는 직녀는 과연 누구일까? 저자는 이에 대한 타협안은 인지심리학자들이 스키마 또는 지식구조라고 부르는 것을 인식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현대인의 사회적 행동은 인간 본성의 단순한 특징들이 이상 발달한 과잉 성장물들이 한데 모여 불규칙한 모자이크를 형성한 것이라고 저자는 해석한다. 이상 발달 중 가장 극단적이고 중요한 부분은 지식의 집적과 공유에 있다고 본다. 그래서 저자는 자아에 대한 지식은 현대 사회 생활 속에서 온갖 낯선 형태로 증식되어 온 생물학적 인간 본성의 요소들을 밝혀낼 것이며 , 또한 미래의 행동이 나아갈 위험한 경로와 안전한 경로를 더 정확하게 구분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주장한다.

총 9장으로 된 이 책의 내용 가운데 4개의 장은 인간 행동의 네 가지 기본 범주인 공격성, 성(性), 이타주의, 종교를 사회생물학 이론의 토대 위에서 다시 검토해 보는 일을 다루고 있다. 인간의 공격성은 타고난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저자의 답은 '그렇다'이다. 성의 복잡성과 다의성은 성이 본래 번식용으로 설계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그것들은 모두 결속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동성애 또한 생물학적 의미에서 정상일 뿐 아니라, 초기 인류 사회 조직의 중요한 요소로서 진화해 온 독특한 자선 행위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고 싶어한다. 무엇보다도 동성애는 결합의 한 유형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이타주의도 근거를 따져보면 포유동물적인 양가감정(兩價感情,ambivalence)에 물들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숭고한 도덕 가치들의 문화적 진화가 스스로 방향을 설정하고 자체 추진력을 획득하여 유전적 진화를 대체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흥미로운 철학적 의문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이렇다. '유전자는 문화를 가죽끈으로 묶어놓고 있다. 끈은 상당히 길지만, 가치들은 자신들이 인간의 유전자 풀(gene pool)에 미치는 결과에 따라서 불가피하게 속박될 것이다.'

인간 정신 중 가장 복잡하고 강력한 힘인 종교에 대한 저자의 주장도 그의 표현을 빌자면 '철저한 오만함에 의해 뒷받침되는 시원시원한 논리적 폭격은 강철 탄환처럼 안개를 뚫고' 나아가는 모습과 닮아있다. 그는 종교 행위들을 유전적 이득과 진화적 변화라는 이차원 상에서 측량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과학이 고대 신화들을 하나씩 붕괴시켜 왔기 때문에, 이제 신학은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는 마지막 발판을 딛고 서 있다고 보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종교 자체가 자연과학의 설명 대상이 되는 시점에 도달해 있다는 사실이며, 사회생물학은 유전적으로 진화하는 인간 뇌 속의 물질 구조에 작용하는 자연선택 원리를 통해, 신화의 근원 자체를 설명해 낼 수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9장의 제목은 '희망'이다. 여기에서 저자는 왜 과학정신을 종교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지를 다시 한번 말한다. 교조화한 세속적 이데올로기를 포함하여 모든 종교가 뇌의 진화 산물로서 체계적으로 분석되고 설명될 수 있다면, 종교가 지닌 도덕성의 외부 근원으로서의 힘은 영원히 사라질 것이며 마침내 인간 본성의 두번째 딜레마의 해답은 현실적인 필연이 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사회과학자들과 인문학자, 신학자들까지도 결국은 과학적 자연주의가 정신 과정 그 자체를 재정의함으로써 그들의 체계적인 탐구의 토대를 바꿔놓을 운명을 지녔다는 것을 수긍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진정한 프로메테우스적 과학정신은 인간에게 물리적 환경을 지배할 몇 가지 수단과 지식을 줌으로써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윌슨은 인간 본성에 대한 지식이 증가할수록, 그리고 마침내 냉철한 정신이 따뜻한 가슴과 만날 때, 인간 본성의 유전 법칙에 속박된 진화 궤도의 집합 가운데 어느 하나를 따라 더 멀리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인류는 세번째이자 아마도 마지막이 될 정신적 딜레마와 마주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진화 서사시의 풍요로움 속에서 고전 신화의 영웅들을 소환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실존주의적 시지프스나 재앙의 판도라 뿐만 아니라 결국 프로메테우스에 대한 믿음으로 되돌아가서 끝끝내 맹목적인 희망을 굳건히 유지해야만 한다는 것이 이 책에서 저자가 마지막으로 맺는 말이다.

이 책의 서평글이 윌슨의 주장에 대한 두루뭉실한 요약으로 대체되고만 느낌이 없지 않다. 그 이유는 솔직히 말해서 저자의 해박한 지식이 담긴 많은 인용문구들과 수많은 함축적 의미를 지닌 책의 문장들에 대한 나 자신의 어설픈 이해로부터 상당부분 기인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이런 책을 읽을 때마다 마치 힘든 운동을 통해 신체가 단련되듯이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좋은 운동을 했다는 느낌 때문에 기분이 좋은 것도 사실이다.

이 책이 다른 책의 참고문헌으로도 많이 인용될 만큼 유명한 책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저 '인간의 본성'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으로 이 책을 읽은 점에 비춰보면 이 책을 통해 얻은 소득이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는 점도 꼭 얘기하고 싶다. 2000년 '커밍 아웃'을 선언한 홍석천씨가 최근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 아시아판이 선정한 '올해 아시아의 젊은 영웅 20인'에 뽑혀 다시 관심을 받은 적이 있다. 성적 소수자인 동성애자들에 대한 편견도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부족의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 윌슨의 주장이고보면 인간에 대한 사회적 문화적 특징들의 생물학적 토대를 더 깊이 이해하는 일의 중요성은 보다 분명해지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이 주는 무게와 깊이 만큼이나 많은 사색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고, 또한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 몸 속의 유전자가 걸어온 엄청나게 머나먼 길을 내내 따라온 여행은 흥미로움과 유익함과 즐거움으로 충분히 보상받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지만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준 프로메테우스가 그에 대한 벌로서 독수리에게 쪼아먹히게 될 그의 간이 낮이면 다시 자라나듯이,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심 또한 우리가 인간의 굴레에 결박되어 있는 한은 계속해서 자라나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여전히 남아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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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유전자 - 개정판
리처드 도킨스 지음, 홍영남 옮김 / 을유문화사 / 200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바닷가에서 놀고 있는 어린아이와 같다. 아직도 발견되지 않은 많은 진리가 거대한
바다처럼 내 앞에 일렁이고 있다.
- 아이작 뉴턴

다윈의 진화론과 더불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위대한 과학자였던 뉴턴 경도, 미개척지로 남아 있는 진리의 대양은 너무나 넓고 깊어서, 자신은 그저 해변의 조개껍질을 줍고 있을 뿐이라고 자신의 말년에 위와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고 한다.

다윈의《종의 기원》이 생명과 인류의 기원에 관한 비밀을 진리의 대양속에서 찾아낸 사실은, 마치 우주의 문제에 있어서는 '코페르니쿠스의 전회'에 비유될 만큼 획기적인 것이어서, 생물의 진화에 관한 혁명적인 사고의 전환을 가져왔던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다위니즘의 탄생 이후 수많은 과학자들의 수많은 논란들이 당연히 존재해 왔겠지만, 다윈주의의 신봉자의 한 사람인 리처드 도킨스의《이기적 유전자》만큼 또다시 유전과 진화에 관해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킨 책도 흔치 않은 듯 하다.

저자 스스로가 '만약 다윈이 이 책을 읽는다면 거기에서 그 자신의 본래 이론을 거의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이 책은 분명히 다위니즘의 본질에 더욱 가까이 다가서는 주장을 담는 책이며, 1976년에 초판이 발행되었을 때만 해도 혁명적이고 극단적인 주장이라고 까지 비난받아 왔지만, 어느새 도킨스의 주장은 '무엇때문에 야단법석을 떨었는가를 의심하게 할 정도로' 천천히 정설로 자리잡아 왔다고 인정받는 책이 되었다고 한다.

이 책의 주장은 한마디로 '유전자'의 눈으로 본 '다윈주의의 관점'을 담고 있는 책이다. 즉, 진화는 유전자의 역사이며, 40억년 전 스스로 복제 사본을 만드는 힘을 가진 분자가 처음으로 원시 대양에 나타난 이래, 이 불멸의 코일인 자기 복제자는 절멸하지 않고 생존기술의 명수가 되었으며, 그것들은 생존 기계에 해당하는 생물의 개체 속에서 안전하게 들어있다고 하는 것이다. 인간은 이기적 유전자를 보존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프로그램을 짜 넣은 로봇 기계이며, 이 유전자의 세계는 비정한 경쟁과 끊임없는 이기적 이용 등으로 가득 차 있으며, 유전자는 유전자 자체를 유지하려는 목적 때문에 원래 이기적이며 심지어 이타적 행동을 보이는 것도 자신과 공통된 유전자를 남기기 위한 행동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얼핏 들으면 이 책은 마치 공상 과학 소설처럼 여겨질 수도 있으나, 저자가 얘기한 것처럼 '사실 소설보다 더 기이한 정도로 진실에 대해 느끼고 있는 생각들'에 관한 이야기이며 또한, 재미있고 멋지고 쉽게, 그리고 분명하게 과학적으로 증명해 내려고 한 책이다. 이 책은 DNA에 관해서 주로 다루고 있지만, 무슨 복잡한 DNA의 이중나선구조니 감수분열이니 하는 생물학이나 유전학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자세히 알 필요까지도 없으며, 동물행동학, 분자생물학, 집단유전학, 발생학 등등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 점은 저자가 미리 세 부류의 가상 독자들을 염두에 두면서, 무엇보다도 첫번째로 생물학에 문외한인 일반 독자들을 위한 배려를 해두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더구나 저자는 과학을 대중화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 책의 주제가 가치있는 만큼 재미있고 흥미롭게 만들려고 노력했으며, '생물학 자체가 하나의 추리 소설이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생물학은 마땅히 추리 소설처럼 흥미로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동물행동학자의 전문적 지식과 아울러 다양한 인접분야와 고전문학, 시 등의 일반 교양 그리고 수많은 사회 현상에 이르기까지의 폭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흥미진진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쳐내고 있어서 더욱 재미있다. 또 한가지 덧붙일 점은 궁극적으로는 '유전자'에 관한 얘기는 결국 인류라는 종의 한 개체인 당신과 '나' 자신에 관한 얘기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일 것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인간은 이기적 유전자의 자기 보전을 위해 프로그램된 기계이다!", 혹은 "유전자가 그 자신의 복제품을 더 많이 퍼뜨리기 위해 개체(운반자)를 고안했다"는 주장은 자유로운 상상의 소유자라면 얼마든지 생각해 낼 수 있는 '혁명적 발상'일 수도 있다고 여겨지지만, 저자는 이런 상상이 단순한 상상이 아닌 명백한 '과학적 사실'임을 수많은 과학적 근거와 논증들을 통해 자세히 밝혀내고 있다. 물론, 다위니즘의 탄생 이래 존재해 왔던 수많은 '통설'이나 '보편적인 견해'들에 대해서도 '유전자의 눈으로 본 다윈주의'로 단단히 무장한 상태에서는 저자의 무릎 앞에 굴복시키지 못할 주장은 별로 없게 된다. 저자가 잘못된 주장의 대표격으로 본 것은 '그룹 선택설'이며, 그것은 '개체 선택설'에서 더 나아가 '유전자 선택설'로 마땅히 바뀌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들로서 제시되는 수많은 이야기들 가운데 특히 흥미로운 부분들은 생명의 기원에 관한 문제, 유전자의 맹목적성, 이기적 목적을 둔 이타적 행동, 노화이론, 인간의 수명, 유전자의 손익계산, 부모와 자식의 친자관계, 가족계획, 번식 허가증, 암수의 다툼, 성의 전략, 이기적인 배우자 등에 관한 것들이다. 이러한 소주제들에 등장하는 동식물들 또한 무수히 많은데, 특히 재미있는 부류들은 교미시 수컷을 잡아먹는 사마귀, 의태를 하는 나비, 사회성 곤충인 개미와 벌, 바다표범과 하렘, 탁란성 조류인 뻐꾸기 등이며, 행동 특성으로 분류한 매파와 비둘기파, 보복파와 허풍파, 선심파와 사기꾼파 그리고 원한파에 관한 이야기를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바탕으로 하여 풀어나가는 부분도 무척이나 흥미로운 부분이다.

특히 12장에 나오는 '마음씨 좋은 놈이 일등 한다(Nice Guys Finish First)'에서 도출하는 결론은 의미심장한 내용이다.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컴퓨터를 이용한 시뮬레이션 게임을 통해 반복함으로써 도출해 낸 결론은 '배신', '협력', '관용' 등의 행동 가운데 최적의 전략은 '마음씨 좋은' 전략이며, 이는 소위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ESS)'에서의 결과와 일치한다는 점이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재미있는 얘기는 '영합 게임(zero sum game)'과 '비영합 게임(nonzero sum game)'으로서도 보충 설명되는데, '우리도 살고 남도 살리자'는 축구 게임의 사례는 최근에 우리가 봤던 아테네 올림픽 축구 경기 후반전에서의 '한국과 말리와의 비기기 전략'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이어서 흥미롭다. 12장에서의 결론은 결국 '이기적 유전자의 기본 법칙에서 이탈하지 않고 서로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세계에서조차도 협력과 상호 부조가 어떻게 번창하는지'에 관한 얘기이다. 유전자를 둘러싼 자연 환경이 때때로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설정하기도 하고, '영합 게임'에 맞딱뜨리게도 하겠지만 '이기적 유전자에 지배되면서까지 마음씨 좋은 놈이 일등이 될 수 있다'는 자비심 깊은 사상이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임은 시사하는 바가 결코 단순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이 밖에도 저자는 《확장된 표현형(The Extended Phenotype)》이라는 저서에서 주장한 내용도 이 책의 말미에 덧붙인다. 즉 '유전자의 활동 반경이 생물체 내부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생물체든 아니든 가리지 않고 개체의 밖으로까지 넓힌다'고 주장하면서 '확장된 표현형의 세계에서는 동물의 행동이 어떻게 해서 그 유전자에게 이익을 주는가를 묻지 말고 그 행동이 이익을 주는 것은 누구의 유전자인가를 묻기 바란다'고 독자들을 일깨운다.

또한 생물체는 소위 '병목형'의 생활사에 참가하는데 이 말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코끼리 한 마리의 몸에 얼마나 많은 세포가 있는가에 상관없이 코끼리는 그 생애를 단일 세포인 수정란에서 시작했으며, 이 수정란이 좁은 병목이며, 그리고 코끼리로 성장하여 얼마나 많은 세포가 얼마나 많은 특수화된 세포로 이루어져 성체 코끼리가 달릴 수 있게 상세히 협조하든지 간에 이들 모든 세포의 노력은 오직 단일 세포(정자 또는 알)의 생산이라는 최종 목표에 수렴된다는 것이다. 하나의 개체인 우리 자신의 몸 속의 유전자들이 서로 협력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우리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미래로의 같은 출구-알이나 정자-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야 '개체다움(oranismy)'의 느낌이 생겨나는 것이며 '개체'라는 이름에 걸맞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참으로 혁명적인 발상들이 끝이 없지만, 이 책에 푹 빠져 읽은 독자라면 애써서 저자의 이러한 주장들에 대해 반박하기 보다는 '당연히' 그러리라고 수긍하는 편이 훨씬 쉽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끝으로 저자는 자연 선택을 믿는 다위니즘의 신봉자 답게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우연이라기에는 너무 실제적으로 중요하지만, 필연이라 하기에는 이론상 불충분한 사실을 하나 추가해 두자. .... 이 지구에서는 그렇게도 낯익은 그 개체가 존재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우주의 어떤 장소이든 생명이 생기기 위해 존재해야만 하는 유일한 실체는 불멸의 자기복제자뿐이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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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래 전부터 이어져 온 '날조된 신'에 관한 통렬한 공격을 담은 책
    from Value Investing 2012-02-08 23:23 
    리처드 도킨스의 이 책이 나오기 얼마 전에 잠시나마 '망상'을 해 본 적이 있었다. 도킨스라면 결국 언젠가는 '신의 부재'를 증명하려는 시도를 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결국 그는 이 책을 쓰게 되면서 '대형사고'를 치고 말았다. 그러나 언젠가는 누가 나서든지 결국 '신은 허구다'라는 주장을 '과학'의 힘을 빌어 당차게 도전하기 마련이었을 것이고, 사실 그런 시도는 이미 오래 전부터 끊임없이 이어져 온 것도 사실이다. 과학이 인간을 미신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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