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돌베개 우리고전 100선 18
김부식 지음, 김아리 엮음 / 돌베개 / 201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 문자, 기록의 소중함을 느낍니다. 문자가 없었다면 어찌 이런 기록이 남아 있을까. 그리고 문자가 있다한들 기록할 사람이 없었다면 역시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오늘 남기는 글과 생각들의 수명이 얼마나 갈까요. SNS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많은 생각을 비록 짧은 글에나마 남기지만 그 수명이 얼마나 갈까요. 흘러가는 물처럼, 흩어지는 바람처럼 사라져갈 말과 생각들이 허다합니다.
 
『삼국사기』는 삼국시대의 정치와 외교, 사회 제도와 문화를 알 수 있는 역사서이자 가장 오래된 우리의 역사서입니다. 『삼국사기』없이 우리 역사를 말할 수 없습니다. 요즘 일본을 보면 괘씸하면서도 안쓰럽습니다. 우리나라와 중국과 계속 부딪고 있습니다. 일본이라는 나라, 해수면이 높아지면서 지형이 점점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불안감 때문에 기왕지사 물에서 놀아야하니 바다라도 넓히자는 심산인가요. 우리와 부딪는 중국의 욕심도 하늘을 찌릅니다. 동북공정(東北工程)을 통해 역사를 자기네 마음대로 끼워 맞추고 있습니다. 고구려 유적을 중국의 역사에 편입시키는 행위는 도저히 그냥 묵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고구려를 중국의 일개 지방 정권으로 정의하고 중국 영토에 있는 고구려의 문화와 역사를 중국사에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모르는 상태에선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예 관심조차도 없어지게 됩니다.
 
『삼국사기』는 총 50권으로, 본기(本紀), 연표(年表), 지(志), 열전(列傳)으로 구성된 기전체(紀傳體) 역사서입니다. 방대한 양의 『삼국사기』를 다 읽는다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러나 이 책처럼 중요부분만 발췌한 서적만이라도 읽는다면 그래도 우리나라 국사에 대한 큰 밑그림이 그려질 것입니다.
 
 
『삼국사기』를 읽으면서 오는 느낌이 있습니다. 마침 대선을 앞두고 들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누구’를 앞세워 이판에서 득세(得勢)해보자고 난립니다. 그 ‘누구’는 지금까지 치세(治世)를 해왔던 방식에서 벗어나 참 민주사회, 복지사회를 만들어보겠다고 공언(空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정치를 해보겠다는 사람들이 『삼국사기』나 읽어봤나 모르겠습니다. 이 책에는 앞서 지나간 정치가들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잘했던 못했던 그 기록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1145년에 완성된 이 책은 1000년의 역사를 담았고, 그 이후 천 년 동안 전하고 읽혀지고 있습니다. 스테디셀러인 성경에도 위로는 하나님의 말을 잘 듣고 백성들을 평안하게 한 왕의 이름이 정확하게 실려 있고, 말도 지지리도 안 듣고 포악한 정치를 하다가 비참하게 죽어간 왕들이 부지기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치가들은 이런 책을 통해 반면교사(反面敎師)의 기회로 삼을 생각을 갖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책에 실린 왕들의 이야기 중 내가 생각하는 가장 한심한 왕은 백제 동성왕입니다. 여름에 큰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려 서로 잡아먹을 지경이 되었는데 창고를 열어 백성들을 구휼하자는 관리들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 궁궐 안에 쓸데없이 높은 건물만 짓고, 연못을 파선 기이한 새들만 기르고 그야 말로 놀고 있습니다. 신하들이 상소를 올려 간언했으나 왕은 답하지 않고, 또다시 귀찮게 할까봐 아예 궁궐문을 닫아버렸답니다. 나 원 참. 아니 누가 이런 사람을 왕으로 만들었어요? 하긴 이런 사람일수록 ‘스스로 왕’이 대부분이지요. 장자(莊子)에는 “자기 잘못을 알고도 고치려 하지 않고, 충고를 들으면 더욱 심해지는 것을 못돼 삐뚤어졌다고 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에 딱 맞는 사람이 동성왕입니다.
 
 
그런가하면 문무왕은 참으로 성왕(聖王)입니다. 왕의 유언 중 일부를 옮겨봅니다. “(....)나 자신은 풍상을 무릅쓰고 다니느라 결국 고질병이 생겼고, 정치와 교화를 위해 근심하며 애쓰다보니 병은 더욱 깊어졌다. 하지만 사람은 죽어도 이름은 남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니 홀연히 저 세상으로 돌아간들 무슨 한이 있겠는가! (.....) 종묘사직의 주인은 잠시라도 비워서는 안 되니 태자는 관 앞에서 즉시 왕위를 계승하라. (.......) 옛날 천하를 다스리던 영웅도 결국 한 무더기 흙이 되었다. 나무꾼과 목동이 그 흙무덤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가 그 옆에 굴을 판다. 그러니 무덤을 호화롭게 만들어 봐야 공연히 재물만 허비하고 역사엔 오점을 남길 뿐이며, 공연히 사람들만 힘들게 하고 죽은 사람의 넋은 구제하지 못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슬프기 그지없다. 이러한 것은 내가 좋아하는 바가 아니다. 내가 죽으면 열흘 후에 곧 창고 문 바깥뜰에서 서역(西域)의 방식대로 화장하라. 상복의 격식은 정해진 예가 있는 것이지만, 장례 절차는 검소하게 하도록 힘써라. 변방의 성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일과 주, 군에 세금을 부과하는 일은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모두 없애고, 율령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즉시 개혁하라. 나의 이러한 뜻을 사방에 알려 두루 알게 하고, 담당자는 시행하라.”
아름다운 사람은 머물렀던 자리도 아름답다고 하지요.
 
삼국시대는 전쟁의 시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먹고 먹히고, 쫒고 쫒기는 역사입니다. 자연적으로 이름 난 장수들의 등장이 많습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절로 가슴을 뛰게 합니다. 충절과 용맹이 그들의 타이틀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시라고도 알려져 있는 을지문덕 장군의 시는 참으로 멋집니다. 수나라 양제가 고구려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고구려에선 을지문덕이 수나라 진영에 거짓 항복을 하러갑니다. 그러나 짐짓 그들의 진영을 살펴보기 위함이 컸습니다. 수나라 왕은 밀지를 전해 만약 고구려왕이나 을지문덕을 만나면 붙잡으라고 했지만 한 고위관리가 그를 풀어줍니다. 뒤늦게 두 장군이 의논할 것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며 다시 잡으려고 쫒아갔지만 뒤도 안돌아보고 고구려로 돌아갑니다. 수나라 군사들은 살수(薩水 : 평안북도 서남부를 흐르는 옛 이름)를 건너 평양성에서 30리 떨어진 곳에 산을 의지해 진을 쳤는데, 을지문덕이 우중문에게 다음과 같은 詩를 보냈습니다.
 
신묘한 계책은 하늘의 이치를 꿰뚫었고
기묘한 계략은 땅의 이치를 다하였도다.
전투에 이긴 공 이미 드높으니
만족하고 그만두기를 바라노라.
 
‘어르고 뺨친다.’는 말이 딱 맞는 상황입니다.
 
『삼국사기』에 대해선 말도 많지요. 사대적이다. 신라 중심사관이다 등이 주요 이슈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종 임금과 김부식 어르신에게 감사할 일입니다. 이 두 분이 없었다면 우리의 역사는 ‘알’(卵) 수준의 신화에서 벗어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참 소중한 기록입니다.
 
"우리 것 먼저 알고, 남의 것 배웁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엉터리 저울추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요제프 로트 지음, 주경식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요 며칠 무거운 책을 머리에 이고 있었더니 좀 가볍게 가고 싶어 좀 핸디한 소설을 손에 잡았습니다. 제목이 재밌을 것 같지요?  “엉터리 저울추” 예..시작은 재밌었는데 다 읽고 나니까 이젠 가슴이 무거워집니다. 아니 가슴이 짠해집니다.


“옛날 츨로토그로트 지방에 안젤름 아이벤쉬츠라는 도량형기 검정관이 살고 있었다.” 로 시작이 됩니다. 도량형기 검정관은 그냥 우리식으로 ‘단속반원’이라고 하지요. 주인공이기도 한 이 사나이의 이름은 ‘콧수염’으로 하겠습니다. 이 사나이의 트레이드 마크이기도 합니다. 콧수염의 업무는 그 지방의 모든 상인들이 사용하는 도량형기의 치수와 무게를 점검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일정 기간에 이 상점에서 저 상점으로 다니면서 자와 저울과 저울추를 검사하는 일이지요. 혼자는 아닙니다. 그의 곁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일을 함께 해주는 지방 경찰서 소속의 순경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2인 1조지요. 


대단히 장대한 체구의 남자인 콧수염은 원래 포병연대의 장기 목무 하사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의 성화에 옷을 벗고 민간인이 된지 얼마 안됩니다. 콧수염은 내내 불만스럽습니다. 마누라 등쌀에 제대를 했지만 군생활이 그립습니다. 민간인 생활이 너무 불편하고 힘듭니다. 단속반원 생활이요? 차라리 군 제대 후에 주어진 직업이 맘에 들었다면 그나마 다행이겠지요. 밥먹고 할 짓이 아닙니다. 이런 상황을 그려보세요.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광장시장이나 동대문시장 포목점에 가면 아직도 팔을 쫘~악 벌리면서 마를 끊어주는 경우요. 판매자나 소비자가 너무 익숙한 생활습관에 갑자기 정부 주도로 정확한 줄자를 써서 판매를 해야 한다는 엄한 규정이 적용된다면 어찌 생각하시겠습니까? 단속에 걸리면 고발 조치를 당해서 벌금을 내야합니다. 콧수염이 하는 일이 이 일이었으니 참으로 딱하지요. 그러나 콧수염은 12년 동안 군 생활을 하며 몸에 배인 근면함, 명령에 복종 등으로 그럭저럭 버티며 나름대로 충실한 직무수행을 하던 중에 사건이 생깁니다. 사건이 안 생기면 소설의 진행이 안 되긴 하지요. 아, 글쎄 그렇잖아도 웬수덩어리인 그의 아내가 바람을 핀 것입니다. 그 상대도 하필이면 콧수염의 부하직원이군요. 화도 나고 자존심도 상하고 아무튼 그러나 자제하며 잘 넘깁니다. 콧수염의 부하직원과 그의 아내 사이에 아이까지 만들자 더 이상 참지 못한 그는 집을 나섭니다. 


그가 집을 나와 간 곳은 처음엔 업무차, 그리곤 어찌하다보니 가게되고, 이젠 아예 의도적으로 가는 국경에 위치한 술집입니다. 콧수염은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다니는데 어떤 땐 말이 알아서 그곳으로 그의 주인을 모십니다. 누구였지요? 우리 선조들 중 알아서 술집을 모시고 갔던 말. 이제는 술집에 안 간다고 다짐을 한 후. 잠결에 말이 다시 그 술집 앞에 내려주자, 그 말이 무슨 죄가 있다고 목을 베었다던가? 당신도 당신 마음을 잘 모르면서 말이 어찌 당신 마음을 알리요.. 그 술집엔 왜 가냐구요?  물론 술을 마시고 싶어서 가긴 하는데 더 중요한 것은 망나니 그 술집 주인의 애인인 집시여자를 보고 싶어 가는 것이지요. 나도 남자지만, 그저 남자들이란 돈과 여자 그리고 술을 조심해야 합니다. 아무튼.. 예상된 일이기도 하지만 콧수염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그는 갑자기 자신이 “부서지고 흔들리고 붕괴 될 것 같은 집”처럼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콧수염이 국경의 술집을 드나들 때 알아봤습니다. 스토리가 어찌 진행이 될지 말입니다. 


국경의 술집으로 말할 것 같으면 온갖 건달과 범법자들의 집합소이기도 합니다. 러시아군의 탈영병들의 단골 숙소이기도 하구요. 탈영병들이 네덜란드나 캐나다 혹은 남아메리카로 가려면 돈만 있으면 되는 일이었지요. 그 술집의 주인인 망나니가 단속반장 콧수염에게 걸려들면서 감옥에 갑니다. 그 사이에 콧수염은 그 망나니의 애인을 가로챕니다. 공교롭게도 정부에서 그에게 그 국경주점의 관리를 맡기게 되는군요. 그 문서를 들여다보면서 콧수염이 이런 마음을 갖습니다. “내겐 지금 불행과 행운이 같이 왔다.” 그래도 본성은 착한 사람입니다. 비록 그의 아내가 바람을 피어 다른 씨앗을 키웠지만, 그래도 아내에 대한 연민의 마음, 그의 업무에 대한 책임감은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군요. 그러나 그러면 뭐합니까. 무너지기 시작하니까 걷잡을 수 없습니다. 그가 국경주점에 폭 빠져 있는 동안 콜레라가 창궐하면서 그의 아내와 아내의 아이가 죽습니다. 그리고 콧수염은 탈옥한 망나니의 손에 죽습니다. 

콧수염. 그가 무너지는 과정이 안쓰럽습니다. 그도 그것을 알고 있었겠지요. 모든 것이 다시 회복되기 힘든 구렁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요.


책을 다 읽고 나서 나의 관심은 콧수염보다 이 소설의 작가인 ‘요제프 로트’에게 쏠렸습니다. 이 작품은 한국어로는 처음 번역 출간되는 책이기도 합니다. 요제프 로트(Joseph Roth)는 1894년 9월 2일 우크라이나 서부에 위치한 브로디에서 출생했고, 1939년 5월 27일 파리에서 사망했습니다. 


“나의 가장 강력한 체험은 전쟁과 내 조국의 멸망이다. 내가 가졌던 유일한 조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이 멸망하기 몇 주 전에 나온 이 고백을 읽어보면 그의 생애가 방향을 찾지 못하고 헤매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를 짐작하게 됩니다. 지원병으로 전쟁에 참여했던 로트는 군인신문의 기자로 출발합니다. 기자 생활 틈틈이 칼럼, 시, 소설, 시사 해설 등 전 방위적인 글쓰기에 몰입합니다.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자 로트는 누구보다도 먼저 독일을 떠납니다. 그는 파리로 망명을 떠났고 그 후 빈, 잘츠부르크, 암스테르담, 마르세유, 니스 그리고 폴란드 등지를 전전합니다. 

“이 땅의 손님” 스스로 그 자신을 묘사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디아스포라’ 였습니다. 


주인공 콧수염이 머물고자 했던 집은 무너졌습니다. 사라졌습니다. 그에겐 한 쪽 눈이 먼 퇴역 말과 잠시 그의 삶의 목적이기도 했던 바람 따라 떠도는 집시 여인뿐이었습니다. 그가 가고자 했던 곳은 어디였을까요? 우리의 상식으로 군대 탈영병은 매우 위험한 존재입니다. 그냥 입은 채로 나오는 탈영병은 그래도 착합니다. 군에 대한 불만, 사람에 대한 불만, 자기 자신에 대한 불만을 주치할 수 없어 뛰쳐나오며 그냥 안 나옵니다. 총이나 수류탄을 들고 나옵니다. 그러나 이 책에 나오는 탈영병들은 측은지심입니다. 

“새벽 3시경에 어떤 탈영병 하나가 하모니카를 불기 시작한다. 그는 노래 〈야 루빌 티비아(I love you)〉를 불었다. 모두 울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제 막 포기한 고향을 그리워하며 울었다. 이 순간 그들은 자유보다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느꼈다.”

아마 저자인 로트가 이 나라 저 나라 떠돌며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있지 않나 생각해보게 됩니다. 


저울추..엉터리 저울추..저자에겐 이 저울추가 나라마저도 없애고 모든 국민들을 디아스포라로 만들어버리는 어둠의 큰 손을 생각하며 만들어낸 소재일 수도 있겠지요. 그 손안에서 흩어져버리는 민초들의 삶을 생각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엉터리 저울추는 내 품안에도, 그대 품안에도 있지요. 나와 남의 몸과 마음을 잴 때 달리 적용되는 엉터리 저울추 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메타 역사 2 - 19세기 유럽의 역사적 상상력
헤이든 화이트 지음, 천형균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독일의 철학자이며 지성사가인 카를 뢰비트는 궁극적으로 ‘역사의 개념’이 신화, 그리고 중세 초에서 19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의 사학 사상을 지배해온 역사 지식과 신화 간의 혼동이 초래한 흉악한 ‘역사 철학’으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은, 오직 부르크하르트와 더블어서였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뢰비트는 부르크하르트가 발전시킨 우아함과 기지,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파악하려는 욕구인 ‘사실주의’와 순수한 ‘관조’로서의 지식에 내포된 반동적인 의미가 바로 특수한 형태의 신화적 의식의 요소였음을 간파하지 못했습니다. 부르크하르트는 역사적 사고를 신화가 아니라 당대의 상상력을 사로잡고 있던 역사의 신화, 즉 로맨스, 희극, 비극의 신화로부터 해방시켰을 뿐이었지요.

 

그의 스승인 랑케처럼, 부르크하르트도 역사를 당시의 정치적 분쟁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했으며, 적어도 역사 연구 - 사실은 보수주의의 명분에 기여할 따름인 역사연구 - 가 초래한 정치적 교리를 역사 연구가 배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그리하여 부르크하르트는 랑케의 ‘역사철학’을 ‘역사의 ‘이론’이라고 불렀으며, 그것을 설명과 분석의 목적 때문에 사료를 ‘자의적으로’ 배열하는데 불과하다고 설명했지요. 그의 염세주의가 그로 하여금 사건에는 어떤 ‘성격’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설의 사치조차 용인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사건에 ‘실질적인 성격’을 부여하려는 기도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이 염세주의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통해 부르크하르트의 정신 속에서 지적 근거를 찾게 되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포이어바흐가 마르크스나 정치적 좌파에게 한 것과 같이, 쇼펜하우어는 부르크하르트와 정치적 우파에게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염세주의의 대부 쇼펜하우어를 만나보겠습니다. 얼마 전 얼핏 TV 프로그램에서 쇼펜하우어 운운하는 이야기가 들려서 하던 일을 멈추고 잠시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패널들 5~6명이 나오고 MC가 괄호 넣기 문제를 내는 프로그램 이었지요. 문제는 “쇼펜하우어가 이야기하길 상대방의 논쟁에서 이기는 것은 ( )이다.” 이었습니다. 답이 궁금해서 잠시 지켜봤더니, 어처구니없게도, 아니 ‘쇼펜하우어답게’ 라고 해야 할까요? 괄호 안에 들어간 답은 (인신공격)이었습니다. 그냥 웃고 말았지요.

1840년대까지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1850년 이후에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전문적인 철학자들 사이에서보다 오히려 예술가, 작가, 역사가, 정치 평론가들 사이에서, 다시 말하면 철학적인 데 관심을 갖고 있거나 철학 체계에서 행동의 근거를 찾으려는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럽의 지적 생활의 중심으로 떠올랐습니다. 세계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개념은, 1850~1875년 사이에 지식인들의 욕구에 특히 적합했다고 합니다. 또한 수많은 젊은 저술가들과 사상가들이 극복해야 할 출발점임과 동시에 장애물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니체, 바그너, 프로이트, 만, 부르크하르트 등은 모두 그 개념으로부터 배웠고, 또 창조적인 예술가와 인간의 고통에 대한 학습자로서 그들 각자가 느낀 삶의 불만을 설명한 스승을 쇼펜하우어에게서 발견했습니다. 이들 다섯 사람 가운데서 두 사람은 끝까지 쇼펜하우어의 신봉자로 남아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바그너와 부르크하르트입니다.

 

“그대가 살고 있는 동안에 가질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것만을 추구하도록 힘쓰라. 물질적인 사물은 변하고 있으므로 이 욕구는 비물질적인 것을 지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욕구가 다른 어떤 것에 의존하고 있다면 욕구도 소멸되어 버리기 때문에, 완전히 개인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 쇼펜하우어의 메시지입니다.

 

역사학자들과 역사 철학자들간의 예민한 신경다툼이 있었습니다. 역사철학은역사철학자가 전문적인 역사가의 저작에 내포되어 있는 설명적이며 설화적인 전략을 들추어내려고 하기 때문에, 역사학에 대한 하나의 위협이 될 것이라는 것이었지요. 역사철학은 특히 학문적으로 인정된 전략을 역사에 의미를 부여하는 전략으로 바꾸려는 욕구의 산물이므로, 역사학에 더 큰 위협이 되기도 했습니다.

 

마르크스니체는 고통과 갈등의 상태로부터 벗어난, 건전한 역사적인 삶의 탄생을 인식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두 사람은 사학(史學)상 그들과 유사한 인물이 없었다는 의미에서 다 같이 극단적인 낙관론자들이었습니다. 랑케의 낙관론은 개인의 악덕을 공익으로 전환 할 수 있다고 주장할 만한 이론적인 근거에서 주장된 것이 아니었지요. 미슐레의 낙관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것은 미슐레가 심각하게 느끼고 역사적 합리화라는 방법을 통해서 시도한 모든 것을 가리키는 어떤 분위기나 욕구를 반영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토크빌과 부르크하르트에게도 낙관론의 근거는 없었지요. 마르크스와 니체는 낭만주의나 아카데믹한 사실주의자들로 자처한 사람들의 낙관론은 물론, 그들과 유사한 아마추어 사가들의 비관론까지도 비판했습니다. 19세기 후반의 ‘역사주의의 위기’에 대한 마르크스와 니체의 공헌은, 바로 객관성 그 자체에 대한 개념의 역사화에 있었다고 봅니다. 그들에게 역사적인 사고는, 단순히 역사의 장에 관한 자료에 ‘적용’할 수 있는 객관성의 기준이 가져다 준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문제시한 바로 객관성 그 자체의 본질이었습니다.

 

니체는 비합리주의로의 퇴각에 의해서만 벗어날 수 있었던 절망 상태에 빠지지 않고, 어떻게 인간이 아이러니 형식으로 설명되고 구성된 역사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해결하려고 한 역사철학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19세기의 모든 역사철학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탁월한 역사가였던 베네데토 크로체입니다. 크로체는 철학자로서는 물론 전문적인 학자로서도 출발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대학도 마치지 못했고, 대학에서의 지위도 얻지 못했지요. 실제로 당신의 대학 문화에 대한 그의 견해는 니체나 부르크하르트와 매우 유사한 경멸감을 내포한 것이었습니다. 그는-부르크하르트와 마찬가지로- 교양 있는 학자였으며, 개인의 고통과 공동생활의 권태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역사 연구로 방향을 돌린 아마추어였습니다. 그의 초기 저작은 엄밀한 의미의 용어로는 골동품 수집적이었고, 역사적이라기보다는 고고학적인 것이었으며, 구 나폴리의 민속생활, 건축에 관한 연구로 구성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1893년에 이르러 크로체는 〈예술의 일반적 개념에 내포된 역사〉라는 제목의 에세이로 역사철학의 분야에 뛰어들게 됩니다. 사상에 대한 그의 집념과 노력은, 그로 하여금 철학자로서의 생애를 시작하도록 만든 이 에세이에 잘 드러나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 메타 역사 』1, 2권을 통해서 많은 역사가와 역사철학자들을 만나봤습니다. 이제 남은 과제는 깊이 있게 그들을 만나보는 길입니다. 이 헤이든 화이트의 시각을 통해 얻어진 밑그림 위에 역사서를 한 권 한 권 읽어 나갈 때마다 구체화된 형상이 빚어질 것입니다. 전적으로 저자의 의견이 옳다고는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마음도 듭니다. 그러나 저자가 언급한 역사가와 역사철학자들의 저서들을 제대로 못 봤기 때문에 반박할 자료가 전무한 상태입니다. 앞으로 그들의 저서를 읽을 때 곁에 두고 참고 자료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역사서를 읽어보고자 하는 분들이나 기왕의 역사, 역사철학서들을 읽으신 분들이 참고로 하시면 큰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역사관련 서적으로만 보기에는 아까운 감도 듭니다. 19세기 사상과 철학의 흐름을 알 수 있는 명저(名著)로 추천 드립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메타 역사 1 - 19세기 유럽의 역사적 상상력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사상선집
헤이든 화이트 지음, 천형균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얼마 전 미국 여행을 마치고 온 한 사진작가의 글을 읽었습니다. 미국 여러 곳의 풍광(風光)을 사진에 담아 오는 작업 중 가장 감사했던 일은 미국에 거주하는 한 지인이 바쁜 일상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함께 하며 View Point를 잡아 주었다는 것입니다.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선 어느 point에서 찍느냐가 중요합니다. 그 외에 카메라의 어떤 조건을 적용시키느냐가 남습니다. 포인트와 조건이 잘 맞아 떨어지면 기가 막히게 좋은 사진, 두 번 다시 찍을 수 없는 명품 사진이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같은 장소에서 같은 곳을 찍어도 이미 시간은 흘러갑니다. 빛의 밝기가 달라집니다. 바람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역사를 읽는다는 것을 이렇게 생각해봤습니다. 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일면 역사가를 읽는다고 여겨집니다. 연대기적 서술은 달리 할 수 없지만, 역사를 기술하는 저술자의 입장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지배자의 입장에서 쓰느냐 피지배자의 입장에서 쓰느냐에 따라 책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어쩌면 독자에게 본인의 생각을 강요하는 경우까지도 생기겠지요. 객관적인 역사의 기록과 연대기는 그대로 풍광처럼 미동하지 않지만, 어느 포인트에서 어느 조건으로 글을 쓰느냐에 따라 독자들이 그 역사를 받아들임이 달라집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역사를 바라보는, 역사서를 읽는 관점과 생각을 점검해보게 하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방대한 분량인지라 1,2권으로 나뉘어 출간 되었군요. 역사와 철학 전공자인 헤이든 화이트는 이 책 외에 주요 저서로 《역사의 선용(The Uses of History)》 《비코(Vico)》 《자유주의적 휴머니즘의 시련(The Ordeal of Liberal Humanism)》 《담론의 비유법(Tropics of Discourse)》 등이 있습니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 책의 저술 목적을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19세기 유럽의 사학 사상의 고전들을 읽어가는 동안에, 나는 그러한 고전들을 역사적 성찰의 대표적인 형식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형식이론(formal theory)을 역사 연구에 적용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저자는 역사가 일반적으로 시적(詩的)이며 본질적으로는 언어적일 뿐 아니라, 마땅히 있어야 하는 독특한 ‘역사적’ 설명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패러다임으로서 기여하는 심층구조적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패러다임이 바로 모든 역사 연구에서 ‘메타 역사적(meta historical)'인 요소로 작용하며, 이 요소는 연구 논문이나 기록문서보다도 훨씬 포괄적이라고 합니다.

 

역사가들이 역사서를 써내려갈 때 이용하는 전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형식적인 논증에 의한 설명, 플롯 구성에 의한 설명, 이데올로기적 의미에 의한 설명 등입니다. 이 상이한 각 전략들 속에 저자는 네 개의 또 다른 상이한 표현 형식들을 찾아냈다는군요. 논증에는 형식주의, 유기체론, 기계론, 맥락론 등의 형식이 있으며, 플롯 구성에는 로맨스, 희극, 비극, 풍자의 원형들이, 이데올로기적 의미에는 무정부주의, 보수주의, 급진주의, 자유주의 전략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독특한 형식의 결합은, 저자가 특정한 역사가나 역사철학자의 역사 서술상의 ‘문체’라고 부르는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거론되는 역사가 또는 역사철학자들이 1, 2권에 나뉘어 초대됩니다. 미슐레, 랑케, 토크빌, 부르크하르트와 같은 19세기 유럽의 역사가들과 헤겔, 마르크스, 니체, 크로체와 같은 역사철학자들입니다. 역사가란 본질적으로 시적(詩的) 활동을 수행하는 사람이며, 그러한 시적 활동을 통해서 역사가는 역사의 장을 예시하고, 역사의 장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있어났는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가 이용하는 독특한 이론들을 적용하는 장으로 역사를 구성한다고 합니다.

또한 이 예시(pre-figuration)의 행위는, 언어 형식으로 규정 할 수 있는 수많은 형식과 유형들을 받아들이고 있다합니다. 저자는 이 예시의 형태를 시적 언어의 네 가지 수사법으로 구분합니다. (나누는 것도 많군요). 은유(metaphor), 환유(metonymy), 제유(synecdoche), 아이러니(irony) 등입니다.

 

 

역사는 흔히 과학과 예술의 혼합이라고 일컬어집니다. 그러나 최근 분석철학자들은 역사가 어디까지 일종의 과학으로 간주 될 수 있는가를 해명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역사의 예술적 구성요소에 대해서는 거의 주목하지 못했습니다. 저자는 19세기의 위대한 역사가의 저작들에 나타난 이 ‘메타 역사적’인 요소가 ‘역사철학(philosophy of history)'을 구성하고 있으며, 이 역사철학이 그들의 저작들을 떠받치고 있는 지주이며, 역사철학 없이는 그들이 이룩한 어떤 형태의 업적도 결코 나타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헤겔의 사학사상은 아이러니에서 출발했군요. 그는 역사를(역설로서의)의식과 (모순으로서의) 인간 존재에 관한 근본적인 사실로 전제하고, 환유적, 제유적 이해 형식이 세계를 그렇게 보도록 만들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역사철학강의》서론에서 헤겔은 형식주의 방법을 이용한 추론의 한 형태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재질, 능력, 미덕, 감정, 신앙심이 모든 영역과

모든 정치적 제도와 상황을 통해서 발견될 수 있다는

타당한 주장에 대해서 하나의 (....)추론 과정이 적용 될 수 있다.

그러한 현상을 드러내주는 사례는 풍부하게 존재한다.

《역사철학강의》p.65

 

또한 헤겔은 ‘근본적’ 역사와 ‘반성적’ 역사를 반복해서 구분했는데, 본질적으로 근본적 역사는 시적 성격을 띠게 되고 반성적 역사는 차츰 산문적인 경향으로 기우는 면이 있으며, 반성적 역사는 보편적, 실용적, 비판적 형태의 역사로 나눠진다고 합니다.

 

헤겔의 뒤를 잇는 역사학의 거장들은 낭만주의 역사학을 주도한 천재 미슐레, 역사학파의 창시자이며 탁월한 역사가일 뿐 아니라 아카데미 사학의 전형이기도 한 랑케, 뒤르켐, 베버와 함께 근대 사회사학의 원조이자 사회사의 실질적인 창시자인 토크빌, 그리고 전형적인 문화사가이며 심미적 사학의 개척자일 뿐 아니라 역사적 표현에서 인상주의적 형식의 대표자인 부르크하르트 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역사’와 ‘역사철학’의 차이는 어디에 두어야 할까요?

19세기의 위대한 네 사람의 역사가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상이한 해답을 제시했으나, 그들 모두가 진정한 역사선입견을 버리고 객관적으로 과거의 사실 자체에만 의거해서, 그리고 사실을 형식의 체계로 몰아넣으려는 어떤 선험적인 편견도 지니지 않고 서술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이 거장들이 서술한 역사의 가장 놀랄 만한 특징은, 형식적 결합과 역사의 장에 대한 개념의 우위였습니다. 이 네 사람 가운데서도 부르크하르트는 사실 그 자체로 하여금 말하게 하거나, 이야기의 관념적인 원리들을 가장 완벽하게 그의 저서들의 구성 속에 감추었다는 인상을 강렬하게 심어 준 인물이었습니다.

19세기의 위대한 이 네 사람의 역사가들은 역사를 어떻게 서술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해서 서로 다른 해답을 제시하고, 역사를 구성하기 위해서 로맨스, 희극, 비극, 풍자라는 형식들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역사의 장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적 자세 - 무정부주의, 보수주의, 자유주의, 복고주의적 자세 - 가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 가운데서 어느 누구도 급진주의자는 아니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들이 역사의 장을 예시한 언어학적 규약이 바로 은유, 제유, 환유 , 아이러니의 규약이었습니다.

 

 

2권에서는 역사철학자들을 만나보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등신화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구우 지음, 정용수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선비가 무료한 시간을 보내던 중 바다의 용왕이 보낸 사자(使者)둘이 찾아왔다. 간곡히 동행을 원하자 길을 나선다. 그들을 따라 함께 남문 밖에 나가 보니, 붉게 칠한 큰 배 한 척이 물가에 대어 있었다. 배에 오르자 두 마리 황룡(黃龍)이 양편에서 옹위하며 달리는데, 질풍같이 달려 순식간 즉, 눈을 한번 깜빡이고 숨을 한 번 쉬는 동안에 용궁에 도달했다.”

 

용왕은 선비에게 예(禮)를 다해 융숭한 대접을 해줍니다. 용왕이 하는 말 좀 들어보소. “과인의 거처가 누추해, 교룡(蛟龍)이나 악어(鰐魚)와 이웃하고, 물고기나 게들과 같이 살다보니, 왕으로서의 위신과 권위를 보이거나 왕명을 떨칠 수 없어, 이제 따로 한 궁전을 지어 영덕전(靈德殿)이라 부를 생각이외다. 이미 집지을 목수와 재목들은 다 갖추어 놓았으되, 상량문(上樑文, 궁전을 건립하며 대들보를 올릴 때 지은 집을 칭송하는 뜻으로 지은 글. 당나라 말엽부터 비롯되었다고 함.)만 갖추지 못했소이다. 들리는 소문에 선생은 세상에 다시없는 드문 재주를 지니고 이 세상을 구제할 경륜을 쌓았다지요. 특별히 맞이해 이곳까지 모셔 온 것이니, 과인을 위해 상량문을 지어 주심이 어떠하오니까?”

 

용궁까지 가서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어진 선비는 근사하게 장문의 상량문을 써줍니다. 미녀 스무 명이 춤을 춰주는 잔칫상까지 받고, 시문(詩文)을 주고받으며 즐기다가 드디어 떠날 시간이 되었지요. 용왕이 빈손으로 보낼 리가 있겠습니까. 야광주(夜光珠)열 알과 통천서각(通天犀角, 뿔 소에는 일맥의 기운이 있다. 상하로 곧바로 뚫린 것을 통천서라고 한다, 이것을 닭에게 비추면 닭이 두려워서 물러난다고 했다). 선비가 집에 도착해 가지고 온 보석들을 팔아 억만금 부자가 되었다지요. 훗날에도 그 선비(선문)는 공명에 뜻을 두지 않고 집을 나와 도를 닦으며 명산을 두루 돌아다녔는데, 어떻게 생을 마쳤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이런 내용의 이야기가 21편 실려 있습니다. 아직 전등신화를 읽지 못하신 분들은 응, 이런 이야기? 우리 아이 동화책에 나오는 이야긴데? 전등신화인줄 알았더니 전등동화네..하실 분도 계실 것 같습니다. 요약해서 옮기다 보니까 동화같이 되어버렸네요. 그러나 짧은 이야기 속에 담긴 시문(詩文)들은 그 자체가 귀한 문학의 유산입니다. 고전(古典)이 고전으로 남은 것은 고전다움이 있기 때문이지요. 이 책의 글들에는 무려 150여 편의 서책(사서삼경을 비롯해서)과 60여 인의 시문이 담겨 있습니다. 원래는 40권이나 되는 방대한 양이었으나 현재 총 21편만이 남아 있습니다. 이 책은 조선 목판본 《剪燈新話句解》(1559)를 원전으로 삼아 고전문학 전공자인 정용수교수가 아주 꼼꼼히 주석을 붙이며 옮긴 것입니다. 현전하는 최고본으로, 현재 규장각(奎章閣)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요약이 아닌 완역본입니다.

 

저자 구우(瞿佑)(1347~1433)에 대해 :

원말 명초의 학자입니다. 중국 절강성 전당(지금의 항주)출신으로 학식도 풍부하고 문필에도 능해 14세 때에 이미 문명(文名)을 사방에 떨쳐 당시 대 문장가였던 양유정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청, 장년기 때엔 훈도 생활을 하다가 노년기엔 우장사라는 직위까지 올라갔으나 61세 때 견책을 당해 귀양을 갑니다. 18년 동안 귀양 생활을 하던 중 복직이 됩니다. 86세(1433)에 생을 마감합니다.

저작으로는 《전등신화》 외에도 《귀전시화》, 《존재시집》, 《악부유언》 《춘추귀주》. 《여청곡》 등이 있었다고 중교 서문에 전하지만 확인할 수 없다가 최근 그중에서 《악부유언》이 중국 남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음이 확인됨으로써 그의 많은 작품들이 후대에 들어 간행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또한 그의 시가 《열조시집》, 《명시기사》 등에 실려 있습니다.

 

 

전등신화(剪燈新話)의 문학적 가치 :

《전등신화》는 중국 명대의 소설이지만, 조선조 초에 이미 유입되어 왕조가 끝날 때까지 줄곧 읽혔습니다. 창작되고 채 50년이 못 되어 조선으로 유입된 《전등신화》를 읽고 우리 이야기를 만든 매월당 김시습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금오신화(金鰲新話)》입니다. 《전등신화》는 전기소설(傳奇小說)입니다. 전기소설이라 함은 말 그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기이한 이야기를 의미합니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엔 현실적 사회문제를 비판하고 탐관오리를 고발하고, 서민들의 마음을 보듬어 힘을 주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아울러 당시(唐詩)의 난숙함과 고문(古文)의 사실적인 정신이 깊이 배어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이러한 전기소설의 전통을 계승해 당시에 유행하던 기괴한 내용들을 소재로 창작된 대표적인 명대 문언소설이 《전등신화》입니다.

 

 

내용은 비록 지괴(志怪)적인 소재를 채용했지만 현실과 사상의 표현 수법 면에서는 적극적인 환상 수법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구우선생에게 결례가 안 된다면 동양권 최초의 ‘판타지 문학’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물론 현대적 판타지 문학과는 그 느낌이 다르긴 합니다만 독자를 이야기 속에 빠지게 만듭니다. 일단 재밌습니다. 러시아의 망명 문학가이자 학자인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미국 코넬대학의 첫 번째 문학수업에서 학생들에게 수업을 수강하는 이유를 적어서 제출하라고 했습니다. 다음 시간에 나보코프는 한 학생이 적은 답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아마도 제일 맘에 들었던 모양이지요.

“이야기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용왕이야기가 좀 썰렁 하시다구요? 이런 이야기는 어떨까요?

‘취취전(翠翠傳)’이라는 이야깁니다. 취취는 성이 유씨로, 회안 지방 어느 평민의 딸입니다. 날 때부터 총명해서 능히 시서(詩書)에 달통하자 부모도 그녀의 뜻을 물리칠 수 없어 서당에 다니도록 했습니다. 같은 서당에 다니는 김씨집 아들이 있었지요. 이름을 정이라고 하는데 그와 동갑인 데다가 또한 총명하고 잘 생겨서 서당에 다니는 다른 아이들은 그들을 놀려댔지요.

“동갑네는 부부가 된다더라.”

두 사람도 마음속으로 그리 되려니 생각하고 있었지요. 서로 시문(詩文)을 주고받으며 사랑을 키웁니다. 그러나 막상 결혼할 적령기가 되자 양가집의 빈부가 걸림돌이 됩니다. 중매쟁이가 끼어들어 지혜롭게 잘 처리하는군요.

드디어 결혼입니다. 첫날밤에 시(詩)를 주고받습니다. 베갯머리 시입니다.

먼저 신부가 신랑에게

 

일찍이 서재에서 함께 공부하다가,

옛 친구 오늘은 신랑이 되었네.

신방에 밝힌 불빛 완전히 봄이건만,

땀은 분가루를 적시고,

몸은 사향 먼지를 일으키네,

 

체우우운(殢雨尤雲, 남녀 간의 사랑하는 마음,

‘심한 구름과 오래 머무는 비’라는 뜻도 있다합니다.)은 전부 익숙지 못한 거라서,

잠자리에서 눈썹먹을 찡그리며 부끄러워하네.

가련하고 애처롭다 자주 싫다 마소서.

원하노니 낭군이요! 이제부터 시작합시다.

날마다 가까이하고 날마다 서로 사랑하기를.

 

이에 신랑이 화답합니다.

 

서재에서 함께 공부하던 기억뿐인데,

신부가 다른 사람이 아니었구나.

쪽배로 찾아든 무릉은 봄이니,

신선 사는 곳에 이웃한 자부는

속세의 홍진과는 떨어져있으리.

 

바다에 서약하고 산에 맹세하며 마음으로 이미 허락했거니,

가벼운 웃음과 살짝 찡그린 얼굴이 몇 번이건,

날 보고 오히려 혼잣말이 잦아도,

마음에 품은 생각 딴 뜻이 없다면,

사랑한 다음에 뉘 있어 사랑하겠소.

 

참..대단합니다. 신혼 첫날밤에 이렇게 詩를 주고받으신 분 있습니까? 나도 못해봤습니다만.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 전쟁이 일어나서 신부가 점령군 장군에게 붙잡혀갔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랑이 신부를 찾아 나섭니다. 천신만고 끝에 신부가 있는 장군의 집에 도착합니다. 그러나 “내 아내 내놓으시오.” 하고 덤벼봤자. 두 사람에게 좋을 일이 없는지라. 신랑은 신부가 피붙이라고는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누이라 속이고 한 번 만납니다. 그리고 신랑은 장군의 눈에 들어 비서격인 서기로 임명됩니다. 그러나 신랑, 신부의 목적은 단 하나 서로 함께 손을 잡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세월만 갑니다. 한 지붕에 있으면 뭐하나요. 얼굴도 못 보는데. 마음의 병이 깊어진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장군의 집에서 숨을 거둡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요. 장군이 남매라 여기고 있던 두 사람의 무덤을 나란히 해서 묻어줍니다.

 

 

(여기서부터는 두 사람이 소위 귀신이 되어 나타납니다)

  신부의 친정집에 있던 하인 중에 장사를 업으로 하는 자가 우연히 두 사람이 누워있는 무덤 앞을 지나는데, 이 무덤이 장사치의 눈에는 붉은 대문이 달린 화려한 집으로 보입니다. 두 부부가 집 앞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며 놀랜 이 옛 하인 편에 고향집 부모님께 보내는 장문의 편지를 보냅니다. 편지를 받은 부모는 너무 기뻐 즉시 부부가 산다는 곳으로 길을 떠납니다. 그러나 옛 하인이 부부를 만나게 된 그 집을 찾았으나 집은 간 곳이 없고, 황량한 들판에 나란한 무덤 두 개만 있었지요.

 

마침 지나가는 스님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자, 그 스님이 장군 집에서 숨을 거둔 김생과 취랑부부의 무덤이라고 일러줍니다. 깜짝 놀라 그 편지를 꺼내 살펴보니 백지 한 장이었습니다. 너무나 마음이 아픈 이 아버지, 딸에게 이르기를 “나와 너는 살아생전에 부녀간인들 죽은들 무슨 상관이냐. 너에게 혼백이라도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한 번 나타나서 내 의심을 풀어 주려무나.” 나는 이 대목에서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보통 귀신은 두려운 존재입니다. 생(生)은 생(生)이고, 사(死)는 사(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 가족, 꿈에라도 나타났으면 하는 내 사랑이 설령 귀신의 모습으로 나타날지라도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갖고 있을 듯합니다. 문득, 내게도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너무 자주 나타나면 골치 아프겠지요? 어쨌든 그 날 밤 먼 길을 마다않고 온 아비는 무덤가에서 잠이 들고 부부가 나타납니다.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하는 귀신이나 듣는 사람이나 모두 마음이 아픕니다. 보는 나도 마찬가지구요.

 

아비는 부부의 묘를 고향땅으로 이장했으면 하나 이렇게 답을 하는군요.

“다행히도 저는 살아서는 진짓상을 살펴 드릴 부모님을 얻지 못하지는 않았고 죽어서는 머리를 선영에 둘 인연이 없지는 않군요. 그러나 땅속이 아직 조용하고 마음도 편안하오니, 다시 뼈를 옮긴다면 도리어 번거롭기만 할 것이옵니다. 하물며 산천이 수려하고 초목이 우거져 이미 안정이 된 터라서 원하는 바가 아니옵니다.”

 

21편의 이야기 중에서 2편을 아주 간략하게 액기스만 뽑아서 소개해드렸습니다. 이 글이 쓰인 시대적 상황은 인재들을 산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분위기였더군요. 권력을 쥐고 있는 관리들이라는 존재들이 무식하거나 탐욕스럽거나 둘 중 하나인 경우가 많았답니다. 이런, 그리고 보니 역사와 전통이 오래되었군요. 목이 뻣뻣한 관리들의 존재 말입니다. 그런 입장에 처한 선비들이나 서민들에게 어찌 꿈이 없겠습니까. 이 《전등신화》엔 속이 타들어가는 민중들의 마음에 카타르시스를 주는 내용들이 자주 눈에 띕니다. 몽환적이지만, 사랑, 꿈과 희망을 주는 이야기들입니다.

 

전등(剪燈)이란 뜻은 ‘등불의 심지를 자른다.’는 의미입니다. 이 글을 쓴 구우선생이 전등(剪燈)을 하시면서 글을 썼듯이 후세 사람들 역시 전등(剪燈)하면서 책을 읽었다고 합니다. 어려서 시골 외갓집에 갔던 기억이 납니다. 겨울 방학이었지요. 날은 춥고 밤은 일찍 찾아오는 겨울. 호야불이라고도 하는 호롱불을 켜놓고 책을 읽었습니다. 한참 켜놓으면 심지(心地)가 탑니다. 그대로 두면 그을림만 생기지요. 그래서 타버린 심지는 가위로 조심스럽게 잘라내고 다시 심지를 돋웁니다. 불의 밝기는 심지로 조절하지요. 심지를 잘라내고 다시 불을 켜면 아주 맑은 불이 켜지던 것이 기억납니다. 동양의 고전을 읽는 맛은 깊은 맛이 있습니다. 다 타버린 심지(心地)를 잘라내고 새 심지 (心志)를 심습니다. 독서를 통해 생과 사가 그리 멀리 떨어져있지 않다는 것, 모든 것 지나고 나면 그만이라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참으로 남은 시간을 지혜롭게 잘 쓰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