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가, 어쩌자고 남도를 며칠 다녀 올 기회가 있었다. 가끔 팀이 꾸려지는 멤버들과 함께 였는데 여행지에서 읽는 소설맛이 꿀맛인 것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일이다. 주섬주섬 가져 간 책을 펼치고 있으면 맞은 편에서 또 주섬주섬 책을 꺼내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인데, <스토너>는 내가 가져간 책, <어린 당나귀 곁에서>는 친구가 가져 온 책이다.

 

스토너의 첫 부분이 너무 좋아서 읽고 또 읽었다.

'땅과 똑같은 갈색을 띠고, 땅처럼 수동적이던 사람',

'자신이 중요한 목표라고 판단한 것이 옳다는 감정을 스스로 불러일으키려고 애썼다. 그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듣듯이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아버지의 표정을 지켜보았다. 아버지는 거듭된 주먹질을 받아들이는 돌덩이처럼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어머니는 삶을 인내했다, 마치 생애 전체가 반드시 참아내야 하는 긴 한 순간에 불과하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자식이라고는 윌리엄 밖에 없어 쓸쓸한 분위기를 풍기는 집에서 식구들을 묶어 주는 것은 힘겨운 농사일 뿐이었다',

'그는 대학 공부도 농장 일을 도울 때처럼 즐거움도 괴로움도 없이 철저하게, 양심적으로 했다', '그는 이런저런 강의를 함께 듣는 동료 학생들에게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것을 그들에게서 느꼈다',

'자신을 압축해서 집어 삼킨 그 환상 속에서 그는 도망칠 길도, 도망칠 생각도 없었다'.

읽는 것만으로 모자라서 여관방에서 기차안에서 줄곧 옮겨 적으며 행복했다.

 

김사인의 시집 <어린 당나귀 곁에서>는 아무데나 펼쳐 읽어도 다 좋다. 시인은 어쩜 시인으로 태어나는 걸까 탄복하며, <스토너>와 번갈아 가며 읽었다. 현지 지인이 합류하면서 일정에 없던 완도 수목원에 가느라 다시 버스를 타고 목포로 귀환했는데, 버스를 탄 것도 참 좋았고, 벼르고 별러도 이상하게 타이밍이 안 맞던 완도 수목원엘 이렇게 가졌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어진 막내 처제가 있어

형부! 하고 쫓아나올 것 같은 명정골 따뜻한 골목입니다.

동백도 벚꽃도 이젠 지엽고

몸 안쪽 어디선가 씨릉씨릉

여치 하나 자꾸만 우는 저녁 바다입니다.

<통영>

 

 

 그냥 그 곁에만 있으면 배도 안 고프고, 몇날을 나도 힘도 안 들고, 잠도 안 오고 팔다리도 개뿐혀요. 그저 좋아 자꾸 콧노래가 난다요. 숟가락 건네주다 손만 한번 닿아도 온몸이 다 짜르르허요. 잘 있는 신발이라도 다시 놓아주고 싶고, 양말도 한번 더 빨아놓고 싶고, 흐트러진 뒷머리칼 몇올도 바로 해주고 싶어 애가 씌인다요. 거기가 고개를 숙이고만 가도, 뭔일이 있는가 가슴이 철렁허요. 좀 웃는가 싶으면, 세상이 봄날같이 환해져라우. 그 길로 그만 죽어도 좋을 것 같어져라우. 남들 모르게 밥도 허고 빨래도 허고 절도 함시러, 이렇게 곁에서 한 세월 지났으믄 혀라우.

<보살>

 

굴 한 다라이를 서둘러 마저 까고

깡통 화롯불에 장작을 보탠다.

시래기 해장국으로 아침을 때우며

테레비 쪽을 힐낏 흘긴다.

누가 당선되건 관심도 없다.

화투판 비광만도 못한 것들이 뭐라고 씨부린다.

 

판은 벌써 어우러졌다.

추위에 붉어진 코끝에 콧물을 달고

곱은 손으로 패를 쥔다.

인생 그까이꺼 좇도 아닌 거,

옜다 똥피다 그래, 니 처무라

아나 고밥데이 복 받을 끼다

겹겹이 쉐타를 껴입고 질펀한 욕지거리에 배가 부르다.

진 일로 뭉그러진 손가락에 담배를 쥐고

 

세상 같은 것 믿지 않는다.

바랜 머리칼과 눈빛뿐

믿고 자실 것도 더는 없는 일

이냉 그까이꺼 연속극만도 못한 거

고등어 속창보다 더 비린 거.

<서부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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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나흘이 이렇게 긴 시간일 줄 몰랐다. 고작 나흘 서울을 비웠을 뿐인데, 아파트 화단의 목련이 개화하여 떨어지고 있다. 어제 나가는 길에 바닥에 떨어진 목련 꽃잎들을 보며 올 봄은 정말 오는 지 가는 지도 모르게 보내게 생겼다며 혼자 피식 웃었다. 봄을 유난하게 보냈던 2,30대를 지나니 40대의 봄은 정말 먹을거리 많은 한 시절쯤으로 보내게 되었다. 일찌감치 산천을 돌면서 땅꽃들을 탐하고, 시절을 기다렸다 제철 먹거리들을 채취하고 먹는 것으로 나를 잊었고, 많이 웃으며 다녔는데, 더 웃을 일이 남아 있을 줄이야. 인생 참 오묘하다고 느끼는 요즘이다.

 

읽을 책이 많고, 사실 글이 잘 눈에 안들어오기도 하지만, 지나가는 봄에게 미안하여 봄독서 한 권은 해보려 한다. 누군가에게 건네서 없겠거니 한 책이 어디선가 나오면 반갑기 그지 없다. 지난 주에 소파 밑에서 발견한 공선옥의 <행복한 만찬>. 남도쪽이 고향인 분들이라면 몰입도 백프로. 먹거리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몰입도 이백프로가 될 이 책이 달 출판사에서 나온 것을 알게 된 것도 발견이라면 발견이다. 몇 년전에 읽을 때도 탄복했는데, 이런 책은 매 년 한 번씩은 읽어 주어 살아 있다는 기쁨을 느껴야 한다. 주제, 소재, 사진,그림, 어휘, 그립감, 사이즈, 디자인, 마지막으로 필력, 어휘들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게 없는 명품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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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남여객 김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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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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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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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3-29 14:29   좋아요 0 | URL
미치겠다..동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