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지 않아야 사랑이 온다. 사랑하면 그 사랑은 달아나기 십상이다. 어느 누구도 그 사실을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 첫사랑은 실패로 남는다. 사랑을 이론서 안에서만 이해하려 한 치들은 ‘사랑은 주는 것’이라고 사람들을 기만해왔다. 사랑은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아니다.

 

 

 

 

 

 

 

 

 

 

 

 

 사랑은 혼란이다. 대개 어느 한쪽의 괴로움을 수반하는 심리적 기 싸움에 지나지 않는다. 수많은 문학작품에서 이런 주제를 다루었다. 더 많이 사랑할수록 충만해진다는 것도 거짓이다. 그런 건 신 앞에 모든 걸 맡긴 종교인에게나 가능하다. 실제 더 많이 사랑할수록 패배자일 뿐이다. 덜 사랑해야 승리자가 된다고 통찰 있는 작가들은 말해준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이제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건 상대에게 무의미하다. 상처가 되지도 않는다. 효력 발생 가능성 제로인 그 비참한 선언은 선언으로서의 가치가 없다. 반대로 덜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지 않는다는 진의를 밝히는 건 상대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과 같다. 당연히 상처가 된다. 효력 발생 가능성 백퍼센트가 될 그 무정한 선언은 선언으로서의 가치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심리적 우위를 점한 상태에서 모든 걸 자신이 의도한 대로 이끌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사랑의 속성은 불편부당함에 있다.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상처의 다른 이름이다. 우리가 첫사랑에 백전백패하는 이유는 사랑을 주려고만 했기 때문이다. 사랑에 저울추가 없다고 믿었던 순정함이 사랑을 그르친 것이다. 사랑만큼 저울추가 확실히 기울어지는 것도 없다. 덜 사랑하는 사람은 연민과 자책은 없을 수 없겠지만, 사랑 앞에서 괴로움 따위는 친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더 사랑하는 쪽은 상대의 연민과 자책을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사랑 앞에서 늘 괴로움을 친구 삼을 수밖에 없다.

 

몇 십 년 만에 동창 친구들이 모였다. 일분 스피치 시간 동안 어떤 친구가 말했다. 누군가를 사랑했는데 그 사랑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 안타까웠노라고. 우리는 일제히 웃어젖혔다. 그 친구가 남몰래 누군가를 사랑했다고 생각한 것은 그만의 착각이었기 때문이다.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다고 사랑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말하지 않았어도 그가 사랑한 사람이 누군지를 우리 모두는 알고 있었다. 어려서 순정했던 그 미세한 떨림은 비밀스러울 수가 없었다. 순정할수록 감춘 마음은 더 티가 나기 마련이었다. 사람은 말보다 몸짓과 표정으로 먼저 말한다는 것을 당사자만 몰랐을 뿐이었다.

 

 

현명한 자는 사랑을 부릴 줄 안다. 상처뿐인 순정은 가장 순수한 사랑일지 모르지만 사랑이라 불러서는 안 된다. 상처뿐인 사랑이라면 그것은 사랑일 수가 없다. 제 사랑을 온전하게 주관하지 못하는 사랑을 어떻게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상대 눈빛의 선처에 일희일비하는 감정은 사랑이 아니다. 아픔일 뿐이다.

 

사랑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그걸 안 뒤의 사랑이어야 정녕 아름다울 수 있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을 버리고서야 온다. 안타깝게도 모든 현명한 것들은 너무 늦게 알게 된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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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11-12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격하게 공감하며 읽었어요. 사랑 참ᆢ

다크아이즈 2012-11-13 07:56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사랑 참 어렵지만 알고 덤비면 덜 상처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그간의 노하우(!)를 아들에게 전수하려니 강력 거부하네요.^^
하기야 체험해야 자기 것이 되지, 질러 가서 피한다고 세련된 사랑관이 나올 것 같지도 않네요. 사랑은 원래 구질구질하고, 던적스러운 거잖아요.

프레이야 2012-11-13 09:53   좋아요 0 | URL
맞아요. 던적스러운 그놈, 그 이름 사랑ㅎㅎ
노하우 전수는 불가라고 생각해요.ㅋㅋ
사랑은 사람수만큼이나 다르게 제각각 있으니ᆢ
근데 던적스러운, 이거 김훈의 공무도하에서 읽고
오랜만에 보는 표현^^ 사람뿐만 아니라 사랑에 딱 맞는 표현같아요.

라로 2012-11-13 0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공감하며 읽었어요. 더구나 누구를 생각하면서,,ㅎㅎㅎ

다크아이즈 2012-11-13 08:03   좋아요 0 | URL
앗, 나비님 <누구를 생각하면서> 구절, 제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ㅎㅎㅎ
왜 그땐 어설펐을까요? 돌이킬 수 없는 희망을 희망하던 모든 것을 (첫)사랑의 속성에 추가해봅니다.
 

 

 

시험이 끝났다. 시험장에다 날개를 떼어놓고 오기라도 한 것일까. 한풀 꺾인 새처럼 교문을 나서는 그들 어깨 위로 저녁 안개가 내려앉고 있었다. 아무렴, 대책 없이 다사로운 햇살보다는 눈치껏 감싸주는 안개가 그나마 위로가 될 것이다. 우르르 몰려나오는 수험생들 가운데 울상 짓는 몇몇의 실루엣에 자꾸만 눈길이 간다.

 

꿈을 얻기 위해 몇 년을 달려왔다. 하지만 아뜩하기만 한 지문(地文) 앞에서 그들은 몇 번이고 그 꿈에 대한 다음과 같은 부정적 정의를 환기시켰을지도 모른다. 꿈은 꾸는 것이지 이루는 것은 아니라고. 너무 어려워 절망의 예고편처럼 읽히는 시험지 앞에서 자조적 탄식은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사방천지 유리벽인데다,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은 더해가고, 그 어디에도 출구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맘 아플 몇몇 수험생들에게 자꾸만 감정이입이 된다. 먼 시절을 돌이키면 그 때 내 심정이 딱 저랬다. 이제껏 맛보았을 몸과 마음의 가장 큰 상처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낙담은 이르다. 입시는 가장 큰 현재형 고통일지 모르지만 가장 우스운 미래형 코미디이기도 하니까. 힘겨울 그들의 ‘지금’에게 용도 폐기용 충고라는 걸 알면서도 이런 말을 하는 건 너무 늦은 깨달음들이 세상엔 널렸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삶은 지속된다. 희망을 버린 절망의 나날보다는 절망을 이긴 앞날이 그래도 더 많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출구가 보이지 않았던 건, 문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문을 볼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볼 수도 없었고,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고군분투했을 그들이 위로받았으면 좋겠다. 며칠만 힘겹다가 툭 털고 일어나, 내팽겨 쳐 둔 날개를 가지러 갔으면 좋겠다. 들숨날숨 한 호흡 크게 쉬고 새벽길 나서는 그들 어깨를 상상한다. 안개 자욱한 그 길, 귀 열고 눈 뜨고 가다 보면 언젠가는 날개 돋는 시절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니까.

 

 

 

 

*음화홧, 위로 페이펀데 소개 상품은 수능 만점에 관한 거다.

  이런 뒤지럴스런 모순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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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2-11-09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화홧, 위로 페이펀데 소개 상품은 수능 만점에 관한 거다.
이런 뒤지럴스런 모순이라니..."

이 글에서 저, 빵 터졌어요.


다크아이즈 2012-11-11 08:42   좋아요 0 | URL
페크님, 써놓고도 이 따위 페이퍼가 그들에게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을 알기에 스스로나 위로하렵니다. 이것도 모순 맞지요? 크~

2012-11-09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그에 추천 꾹~^^

다크아이즈 2012-11-11 08:44   좋아요 0 | URL
섬님, 제가 생각해도 이 잡스런 단상은 내용보다 태그가 더 낫다는 생각이...
만나 뵈서 반갑습니다. 저도 찾아 뵐게요.

프레이야 2012-11-09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순도 가지가지ㅎㅎ 뒤지럴스런 ㅋㅋ 요런 발랄한 표현을요! 친구 딸도 생각보다 못 나왔다고 좀 걱정하네요. 에효ᆢ

다크아이즈 2012-11-11 08:46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발랄하다기 보다, 가끔 제가 장소와 때에 맞지 않게 분위기를 망친다는 생각은 할 때가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님의 위로가 필요할 때. 에효..

2012-11-11 1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11 1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14 2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14 2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15 2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댈러웨이 2012-11-11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므느와르님, 짧은 페이퍼 참 따뜻하고 좋다, 이러면서 읽어나가다가 덧붙이신 글에서 화들짝! 터프한 분이셨군요! ^^

다크아이즈 2012-11-12 01:44   좋아요 0 | URL
네,역시 댈러웨이님 예리하시네요.
암만 생각해도 따뜻한 면 보단 터프한 게 제 실체인 건 맞습니다.
따뜻하고 싶습니다... 크~
 

 

 

외투를 걸쳐도 좋을 만큼 쌀쌀해졌다. 볼일 때문에 들른 시청사 안의 진열된 화분에서는 막바지 국화향이 진동한다. 창 너머 은행나무 가로수들도 달린 잎보다는 떨어져 뒹구는 잎새가 더 많다. 가을도 얼마 남지 않았다. 한 계절 속절없이 떠나가고 있다. 이맘때면 백만 번이라도 사과를 다시 하고픈 아이 한 명이 떠오른다.

 

은행잎 날리고, 찬바람 돋던 어느 오후였다. 현관 앞 복도에 세워둔 자전거가 없어졌다. 새 것이기도 했지만, 자전거 타기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던 딸내미를 위해서라도 되찾고 싶었다. 그 즈음 아파트 단지 안에서는 자주 자전거가 없어졌다. 단순 호기심에서 한 번쯤 해보는 장난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분명 상습 절도범이 계획적으로 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여기까지 미치자 자전거를 찾고 싶은 것 이상으로 그 절도범 얼굴이라도 확인하고 싶어졌다.

 

아파트 관리실의 협조를 얻어 CCTV를 확인했다. 엘리베이터 안을 비추는 화면에 드디어 자전거 도둑이 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볼수록 화면 속에 비친 얼굴은 내가 열고 있는 논술교실의 회원이었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아무리 칭찬해도 지나치지 않을 모범 어린이였으므로 내가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화면을 캡처한 사진을 그 아이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그 아이가 범인이 아니었다. 비슷하게 생긴 다른 애라고 그 아이가 확인해주었다. 너무 큰 실수를 저질러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선명치 않은 CCTV 화질을 믿고 착하디착한 아이를 자전거 도둑으로 몰다니.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이었다.

 

사과를 한다고 했지만 내 사과는 충분치 않았다. 사과라는 건 상대가 온전히 받아줄 때까지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진심을 전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몇 년 뒤 한 고등학교 특강 수업에서 그 아이를 만났다.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그 아이를 보자 반갑고 미안한 마음에 계속 눈길을 주었다. 하지만 그 아이는 나를 외면했다. 아직 나를 용서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사과를 했지만 상대방이 맘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그 사과는 계속되어야 할 것이었다. 당시 무조건적이고 깔끔한 사과를 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린다. 한참이나 지난 그 일을 다시 들춰낼 수도 없고, 노란 은행잎 뒹굴고 찬바람 스미는 오늘 같은 날이면 그때 내 큰 실수와 미흡했던 사과가 떠올라 마음이 편치 않다. 몇 번이고 해도 모자랄 나의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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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11-07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느와르님의 진심어린 사과에도 마음이 안 풀렸다니 힘들겠군요. 마음이란 게 참 그란거 같아요. 진심만이 마음을 열 수 있게한다니 쉬운말로 들리지만 그게 한번으로는 안 풀리나봐요. 페이퍼 제목처럼 천만번 해야될 일도 있고 또 그만큼의 시간이 지나야 되는 것도 있고요. 사과도 기술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저도 참 서툰 부분이에요. 느와르님 진심이 이렇게 느껴지는데도 ᆢ참 안타깝네요. 솔직한 고백 페이퍼에 울컥 ᆢ 토닥토닥^^

다크아이즈 2012-11-08 01:35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평생 마음의 짐이 될 것이예요. 이 아이 엄마께도 충분하 사과를 하지 못했어요. 역지사지해도 저 역시 쉽게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지 않거든요. 세상에 충분한 사과란 (신이 아닌)상대가 용서할 때까지라는 걸 요즘에야 알겠어요.ㅠ

 

 

 

우리 사회에서 아직 ‘아줌마’라는 말은 긍정의 의미보다는 부정의 의미가 더 강하다. 처음부터 나쁜 의미로 쓰인 건 아닐 것이다. 아주머니에서 출발한 그 말은 친척이나 가까운 이웃의 부인네를 친숙하게 칭할 때 두루 쓰이는 말이었을 게다. 하지만 이 글을 쓰기 위해 사전을 펼치니 그리 좋은 뜻으로 쓰인 게 아닌 건 확실하다. ‘아주머니를 낮추어 이르는 말’이라고 제일 먼저 명시되어 있다. 씁쓸하게도 ‘아줌마’란 호칭은 좋은 뜻보다는 그렇지 않은 쪽으로 더 많이 쓰이는 게 현실이다.

 

 

사전적 의미의 아줌마를 오늘 목격했다. 은행잎 가로수 흩날리는 대로변에서였다. 예의 아줌마가 한 남자에게 악다구니를 퍼부으며 뺨을 사정없이 후려친다. 그것도 분에 차지 않는지 핸드백으로 남자의 가슴팍과 어깨 등을 닥치는 대로 내리치고 발길질까지 서슴지 않는다. 호기심 발동한 몇몇이 길 가다 말고 전후사정 파악하기에 바쁘다. 재혼 가정인 모양인데 딸 혼사 문제로 실랑이를 벌이는 듯했다. ‘네 딸 아닌 내 딸이니 혼수 문제에 관여하지 말라’는 취지로 ‘아줌마’는 남자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다. 남자로서는 혼수 문제에 끼어들다 된통 당하는 모양이었다.

 

 

아줌마의 여러 이미지 중 ‘그악스러움’이 담긴 얘기는 옛날에도 있었다. 구한말 때의 여행가 새비지 랜도어는 우리의 아줌마 관찰기를 이런 내용으로 기록했다. 꿔 간 돈을 갚지 않은 포졸이 오리발을 내민다. 채권자 남편이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자 구경만 하고 있던 아내가 빨래방망이로 포졸의 머리를 사정없이 두들긴다. 실신했던 포졸이 달아나자 아낙은 끝까지 쫓아가 포졸의 배를 걷어차고 얼음판에 쓰러뜨리고 얼굴을 물어뜯기까지 한다. 보다 못한 새비지 랜도어가 말리러 끼어든다. 결과는 빨래방망이로 무릎을 얻어맞아 달걀만한 혹이 생겼다나.

 

 

예나 지금이나 ‘아줌마’는 약간은 그악스럽고 조금은 불편한 이미지로 그려지나 보다. 하지만 양성 평등론과 여성 운동이 본격화되면서 그 말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알리게 되었다. 남성의 그악스러움과 불편부당함은 ‘아저씨’로 한정되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어머니, 엄마’가 주는 이미지만큼 성스러운 위상을 기대하는 건 아니지만 아줌마도 여성인 만큼 너무 부정적인 의미로만 국한되지 않기를 희망해본다. ‘아줌마는 나라의 기둥’이라면서 아줌마들 힘을 돋우는 여성 단체도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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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2-11-06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전적 의미는 어떠하든지
저는 아줌마의 힘이 세상을 바꾼다고 믿어요!^^
대한민국 아줌마들 화이팅!!

다크아이즈 2012-11-06 22:37   좋아요 0 | URL
아, 순오기님 저도 그런 날 만날 꿈 꾸는걸요. 세상을 바꿀 아줌마들 많아지기를...

blanca 2012-11-06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줌마'라는 말이 좀 더 이쁜 말로 대체되었으면 좋겠어요. 왠지 모를 그악스러움의 뉘앙스가 넘 아쉬워요.

다크아이즈 2012-11-06 22:39   좋아요 0 | URL
블랑카님,이쁜 말 좋네요. 기왕이면 엄마처럼 숭고한 의미로다가?
그렇게 되면 아줌마의 본질이 훼손될까 걱정되긴 합니다. ㅋ
 

 

 

 

 도나도나 그리고 존 바에즈

 

「도나도나」란 포크송은 반전(反戰)가수 존 바에즈가 불러 유명해졌다. 구슬픈 가락의 그 노래는 물론 그녀가 처음 부른 건 아니다. 유태인 작곡자와 작사자가 따로 있고 곡에 얽힌 사연도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홀로코스트에 희생된 유태인 이웃을 지켜본 상황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노래라고 알려져있다. 마차에 실려 어딘가로 끌려가는 송아지의 슬픈 눈은 맥없이 수용소로 잡혀가는 유태인들을 가리키리라.

 

‘시장가는 달구지 위에 슬픈 눈동자를 하고 있는 송아지, 하늘에는 제비 한 마리가 날고. 바람은 온밤과 낮 종일토록 웃다 못해, 여름이 다가도록 웃지. 도나도나도나. 농부가 송아지에게 말하지. 불평 좀 그만해. 누가 송아지가 되래? 제비처럼 날개를 달아 뿌듯한 자유를 얻지 그랬니. 도나도나도나. 쉽게 잡힌 송아지들은 이유도 모른 채 도살장에 끌려가지. 하지만 자유를 소중히 여긴다면 제비처럼 나는 법을 배워야해. 도나도나도나.’

 

들을 때마다 가사에 나오는 송아지, 제비, 바람, 농부의 이미지가 하나의 그림이 되어 떠오른다. 쓸쓸하다 못해 서늘해지는 그림 한 점을 해설하자면 이렇다. 속박된 송아지의 슬픈 눈앞에는 가없이 자유로운 바람의 웃음(어쩌면 비웃음일지도)과 맘껏 나는 제비의 날갯짓이 펼쳐진다. 송아지로서는 부럽기만 하다. 그런 송아지의 눈빛을 보는 달구지의 주인인 농부도 맘이 편할 리 없다. 송아지의 운명을 연민하듯, 억울하면 날개 달고 제비처럼 날아보지 그랬니, 라고 원망 섞인 충고를 한다. 자유가 소중하다면 나는 법을 배우라고.

 

훗날 기타 든 존 바에즈가 이 노래를 자기화하여 불렀을 때, 비폭력 저항 및 자유에 대한 상징의 기치와 매우 잘 어울리는 노래가 되었다. 온몸으로 읊조리듯 고백하는 목소리와 시적이고 구슬픈 노랫말 때문에 귀가 절로 열린다. 특히, 후렴구인 ‘도나도나’ 부분은 묘한 여운이 남는다. 후렴구 도나도나는 보는 이에 따라 다르다. 원곡에 충실하자면 절대자인 구원자를 의미할 것이고, 시적인 가사에 충실하자면 이탈리아 말로 ‘부인’이란 뜻도 있다니 그렇게 봐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자유를 갈구하는 노랫말로 보자면 단순한 추임새 기능으로 봐도 무방하다.

 

존 바에즈의 도나도나를 떠올린 건 얼마 전 그녀가 낸 자서전 기사를 읽었기 때문이다. 내 기억의 그녀 대표곡인 그 노래가 떠오르는 동시에 밥 딜런도 떠올랐다. 동지이자 애인이었던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 후보로 몇 번이나 오르내릴 때 나는 그녀야말로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완전히 읽지 않은 그녀의 자서전 곳곳에도 그런 문학적 조짐이 보인다. 미화된 찬사만이 아니라 치부와 약점마저 오롯이 담겨있는 이 책이 많이 팔렸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출간기념회 겸 고희를 넘긴 존 바에즈가 전 세계를 돌며 도나도나 구슬프게 읊는 자유의 노래를 한 번 들어보고 싶다. 상상만으로도 도나도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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