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버릇인지 좋은 버릇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책을 읽을 때 여성적 시각을 좀체 버리지 못한다. 대부분의 고전이 남성적 시각을 견지하는지라 여성이 등장하더라도 제대로 자신의 자리를 꿰차거나 변변한 목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사라지는 게 그토록 안타까울 수가 없다. 아무래도 여성이라는 자부심보다 여성으로 살아야 하는 피해의식이 내 의식 속에 더 크게 자리잡고 있음이 틀림없다.

 

 

  요즘 다산 정약용에 관한 책을 읽고 있는데 드디어 그토록 기다렸던 홍임 모녀가 등장한다. 다산과 헤어진 홍임엄마는 베 짜기와 바느질에 제대로 손댈 수 없다. 등불 돋워 밤 꼴딱 새우기 일쑤다. 옷도 그대로 입은 채, 닭 울음 그치고서야 벽에 기대 혼자서 신음한다. 옆의 어린 홍임은 늙은 아비인 다산이 보고 싶어 보채다 곤히 잠들었을 것이다.

 

 

  다산은 강진 유배 생활 말년에 소실을 들인다. 계약된 하인이 있긴 했지만 원체 게을러서 다산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다. 해약된 하인을 대신해 제자 윤규노의 강권으로 수발 들 여자를 들인다. 안정된 저술 활동과 건강을 챙기기 위해서도 안살림을 꾸려나갈 여자가 필요했을 것이다. 처음에 다산은 거절했지만 유학자이기 이전에 한 남자로서 여자가 필요한 건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1812년을 전후하여 남당포에서 온 여자와 함께 살았고 그때 낳은 아이가 홍임이었다. 1818년 해배되어 남양주의 마재로 돌아갈 때 홍임모녀도 데리고 갔다. 하지만 다산의 아내 홍씨에겐 눈엣가시였을 수밖에 없다. 일찍이 자신이 입던 치마를 유배지에 보내 다산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고 가족의 유대를 공고히 했던 안주인이 아니었던가. 다산의 말대로 ‘아무 문제가 없지만 속이 좁은 것이 문제’인 홍씨에 의해 내침을 당하고 홍임 모녀는 강진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그 후 모녀의 지난한 삶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미루어 짐작컨대 평탄하지 않은 건 자명한 사실이렷다.

 

 

  이와 같은 얘기가 담긴 시가 바로 ‘남당사 16수’이다. 남당포에서 온 여인의 애상을 읊은 시라 그런 제목이 붙었을 것이다. 남당사가 발견되었을 때 연구자는 이 시를 강진의 어느 양반이 홍임 엄마를 대변해서 썼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삶을 바꾼 만남』에서 저자 정민 교수는 이 시를 다산 본인이 썼다고 보고 있다. 책을 읽은 독자들 대부분은 이 의견에 수긍할 수밖에 없다. 당사자가 아니면 느낄 수 없는 감정들이 시편 곳곳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홍임엄마가 되어 본다. 눈물로 얼룩져 화장은 엉망이 되고, 그리움에 진저리치다 보니 비녀마저 떨어져 있다. 남 볼까 겁난다. 웃다가 찡그리다 혼자 발광을 하다보면 어느새 다정한 낭군이 꿈속에나마 반쪽 침상을 찾아든다. 이런 서정적이고 은밀한 시를 쓰면서 다산은 소실과 자식을 제대로 건사할 수 없는 자로서의 죄책감을 남몰래 쓸어내렸는지도 모른다. 다산의 우유부단한 자책과 남당포 여인의 한이 독자의 어깨에 무거운 침묵으로 내려 앉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다산의 운명이 이해가 되면서도 한데바람에 오래 떤 여성의 시각으로 보면 다산이 원망스럽기도 하다. 카리스마 없이 고뇌만 안은 다산 곁에서 부인 홍씨는 왜 오랜 세월 기다린 보람도 없이 가위눌린 부담을 안아야 할 것이며, 홍임모 역시 무슨 처연한 연으로 그토록 모진 칼바람을 견뎌야만 했을 것인가.

 

  여성의 시각에서 다산을 둘러싼 일상사를 엮는다면 어떠할까. 깊은 우물 속 두레박을 내려도 물 한 모금 얻을 수 없는, 차마 처연한 마른 슬픔만 자꾸 길어 올리느라 제대로 구성조차 짜지 못할 게 뻔하다. 한 남자 때문에, 한 세월 때문에 슬픔의 두레박만 깊이깊이 내렸을 세 여자의 우물을 그려본다. 햇발도 머물지 않고 바람도 건너지 않는 그 우물, 무연하고 깊기만 하다.

 

  할 수 없이 나는 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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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2-12-18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ㅠㅠ

다크아이즈 2012-12-19 04:16   좋아요 0 | URL
나비님도 여자라는 걸 항상 자각한다는 뜻으로 해석할게요. ㅋ^^*

페크pek0501 2012-12-19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란 없단 생각이 듭니다.
또 모든 면에서 훌륭한 사람도 없단 생각이고요.
그래서 오히려 인간적으로 느껴지는 점도 있는 걸까요. ^^

다크아이즈 2012-12-20 02:55   좋아요 0 | URL
페크님, 글치요. 전 이런 인간적인 다산이 좋은 걸요.
약간의 원망을 섞어, 그의 아주 많은 위대함과 약간의 속물근성을 신기하게 즐감하는 중이예요.

프레이야 2012-12-19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각자의 우물을 품고 살아가는 것 같아요. 그래서 외로울 수밖에 없고요. 그 우물에 얼굴 한번 비춰봅니다. 어릴적 굉장히 인상적으로 새겨져 있는 우물. 그게 저같기도 해요. 팜님 저도 여자에요, 어쩔 수 없이. 이 책도 더 미루지못할 것 같아요. 팜님의 페이퍼는 지름신을 강림하게 해요, 제게요. ^^

다크아이즈 2012-12-20 02:57   좋아요 0 | URL
프레님, 이 책은 진짜 좋아요.
정민 선생의 부지런한 학자적 자세가 존경스러울 뿐.
제법 두꺼운데 금세 읽고 싶어진다니까요.
 

 

 

 

 

 

 

 

 

 

 

 

 

 

 

 

  왜 가볍게 스치는 바람에도 아린 피멍을 느낄까. 왜 덤덤하기만 한 저 가방이 무거운 짐으로 다가올까. 왜 노래하는 저 파도가 내겐 울음 섞인 아우성으로 비칠까. 세상사 맘먹기 달렸다고? 그러니 뭐든지 담대하게 툭 털어버리라고? 그런 건 무책임한 말을 뱉고도 좋은 말을 했다는 뿌듯함을 얻고 싶은 자의 립 서비스일 뿐, 실제 소심하고 예민한 소시민인 우리는 그런 충고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언제나 내가 처한 상황이 제일 힘겹고, 내가 당한 일들이 가장 분노할만하다고 단정 짓는다. 모든 것을 내 식으로 침소봉대한다. 자학하거나 피해를 자청함으로서 자기위안을 얻으려한다.

 

 

  우리 일상은 두루마리 휴지 풀리듯 술술 풀리는 게 아니다. 실크 블라우스에 붙은 껌 딱지를 떼 내는 것처럼 성가시고 힘들 때가 더 잦다. 살아갈수록 금세 해결되는 일보다는 뭉근한 시간을 요하는 게 훨씬 많다. 이미 이어온 날들은 불만족스럽기만 하고, 앞으로 이을 날들 역시 두렵기만 하다. 산다는 것 자체가 망설임과 회한의 날들의 기록이다.

 

 

  이런 이야기가 기억난다. 그다지 가난하지 않은 시골청년이 부모를 여의자 서울로 돈 벌기 위해 떠나기로 한다. 고향을 떠나 본 적 없는 청년은 앞일이 걱정스럽기만 하다. 이장에게 찾아가 덕담을 부탁한다. 그때 서예 연습을 하던 이장이 한 마디를 써준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비결은 단 두 마디면 충분하다고 말해준다. 나머지 한 마디는 다음에 알려주겠다고 한다. 세월이 흐른 뒤 그는 서울에서 성공했고, 여유도 얻었다. 하지만 그 자신이 원하던 모습은 아니었다. 걱정과 회한만 쌓여갔다. 결국 30년 전에 찾아갔던 이장을 다시 찾아갔다. 하지만 이장은 벌써 세상을 뜨고 가족 중 누군가가 청년에게 남긴 편지를 전해주었다. 조심스레 봉투를 뜯었다. 그 안에는 이장이 예전에 약속했던 나머지 한 마디 덕담이 쓰여 있었다. ‘후회하지 마라.’ 이미 중년이 되어버린 청년은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두려워하지 않고, 후회하지 않기. 이 두 마디만 새겨도 덜 피곤한 삶이 펼쳐진단다. 하지만 여린 바람에도 잿빛 피멍을 느끼고, 무던한 가방이 무거운 짐으로 다가오고, 발랄한 파도가 울음 섞인 아우성으로 비치는 날들이 쉬이 사라지지 않는 한, 저 짧은 두 마디는 여전히 실천하기 어려운 말씀일 뿐이다. 두려워 망설이고, 건너고선 후회하는 게 인생의 강물 아니던가. 그래도 삶이란 동네엔 이장의 저런 덕담이 필요한 거다. 상처 많은 인간을 위한 덕담의 효용은 실천에 있는 게 아니라 위무에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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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12-17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님, 포스팅 시간 보니 헉..
그 시간이 일어나신 거에요, 그 시간까지 깨어있었던 거에요?
저 위의 책 중 한 권 담아갑니다.^^
마지막 세 문장도 다시 읽구요. 좋은 말이 그래서 필요한 건가 싶어요.
오늘하루도 행복하고 즐겁게 보내시기 바래요*^^*

다크아이즈 2012-12-18 00:00   좋아요 0 | URL
낮에 푸지게 자고(초저녁에는 푸짐하게 자고 ㅋ), 자정 쯤에 일어나 혼자놀기합니다. 아침에 잠자리에 들어 언 발로 남푠 허벅지를 도발해 마구 깨웁니다.^^*
프레님, 뭐가 잘못 돼도 한참 잘못된 생활 패턴이지요? 어이하리이까?

근데 책 내용과 제 단상은 아무런 관련이 없어요. 단상이 허전할까 아무 거나 클릭한 거니 프레님은 책 선정에 신중을 가하셔야 하옵니다.^^*

라로 2012-12-18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담은 위로를 위해 있는 거군요!! 올려주신 이장님의 덕담은 제게도 위로가 되는군요. 특히나 요즘처럼 딜레마에 빠져 있는 저에겐 말이죠,,,제가 팜님의 글을 찾아서 읽는 이유 중 하나도 거기에 있어요. 저에게 무척 도움이 된다는!!! 복 많이 받으실거에요~~~.ㅎㅎㅎ^^;;

저도 가끔 혼자 밤에 서재에서 놀다가 차가운 발로 남편을 깨운 적 있는데,,,것도 막 잠이 든 남편을,,,팜님은 양반이십니다!!힛

다크아이즈 2012-12-19 04:21   좋아요 0 | URL
나비님, 실제 그런 건진 저도 몰라요.
그냥 모든 덕담은 위로하기 위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오늘도 본의 아니게, 새벽에 남푠 언발로 치대기 돌입해야 하네요.ㅠ
나비님도 그렇다니 우린 통했다~~
 

 

 

 

  18년간의 유배생활에서 다산 정약용이 해배되자 본인만큼이나 기뻐했던 이들이 강진의 제자들이었다. 자유의 몸이 된 스승을 축하하는 의미도 있었지만, 중앙 정계에 복귀하는 스승의 덕을 볼 수 있으리라는 현실적적인 계산도 있었다.

 

 

 서울로 올라갈 스승과 강진에 남아 있을 제자들은 영속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모임을 만들었다. 이름하여 다신계(茶信契). 모임을 조직한 이유 중에는 다산이 강진 유배 동안 마련한 토지와 그곳에서 나오는 소출을 관리하기 위한 것도 있었다. 당시 다산이 강진에서 불린 땅은 서울에서 기와집 두 채를 살 수 있는 큰돈이었다.

 

 

원체 다양한 곳이 사람 사는 데인데, 다산을 둘러싼 인적 환경도 다를 바 없었다. 처음에는 제자들도 다산의 재산을 잘 관리해주었다. 때가 되면 소출된 곡식과 차를 다산에게 올려 보냈다. 하지만 유배에서 풀려났다 뿐, 다산은 노론이 득세하는 중앙 정계에 복귀하지는 못했다. 정계 진출의 끈이 되어주지 못하는 스승에게 실망하고 지친 제자들은 하나둘씩 떠나갔다.

 

  스승과 제자 사이가 갈라진 것은 제자 탓만은 아니었다. 다산은 강진의 재산 관리에도 관심이 많았고, 요구 사항이 있으면 제자들을 다그쳤다. 인간적 한계를 보인 다산에게 제자들이 등을 돌린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아무리 유가 이데올로기가 지배한 사회라 해도 기브앤테이크가 되지 않는 세계에서 제자들 역시 인간적인 갈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현상을 두고 다산은 다신계가 무신계가 되었다고 자조한다. ‘신의를 잃어버린 모임’이 와해되는 건 당연지사였다. 특히 학문적 소양이 뛰어났던 이청(이학래)과의 결별에는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다산의 수많은 저술에 지대한 편집자 역할을 했던 이학래도 스승이 이렇다 할 믿음을 주지 못하자 추사 김정희의 식객으로 자리바꿈을 하고 만다. 이청의 작업이 없었다면 다산의 저술은 후대에 빛날 수가 없었다. 그 어떤 미래도 보장해주지 않고 평생 부려만 먹었다고 생각한 이학래의 고충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신뢰를 주지 못하고 의무감만 부여하는 스승이 야속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수많은 다산의 제자 중 끝까지 남은 이는 황상 한 명 뿐이었다. 곁가지를 돌아보지 않는 그의 우직함은 곁가지를 돌아보지 않았고, 오직 학문에만 힘썼다. 스승이 가르친 대로 실천했을 뿐, 애초에 스승에게 바라는 게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스승과 제자는 많지만 참된 스승과 제자 되기는 어렵다. 스승은 제자를 키우고, 제자는 스승을 세운다. 키우고 세우는 일은 쌍그네를 타는 것과 같다. 스승이 무릎에 힘을 실어 그네를 시룬다. 제자는 스승의 기를 받아 허리와 발끝까지 온힘을 모아 그네 키를 높여나간다. 하지만 감당할 수 없는 태풍 앞이라면 그네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 태풍이 견딜 만한 것인가 아닌가는 그네를 잇는 동아줄이 안다.

 

 

  스승으로서 자기 관리에 서툴렀고, 제자를 기르는데 미욱했던 다산의 동아줄이 터지는 걸 보면서 슬픔이 아니라 위안을 얻는 것은 왜일까. 아마 학문적 깊이나 인품의 넓이에 상관없이 우리는 누구나 약점 많은 인간으로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렀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호모사피엔스들, 오늘도 곳곳에서 위태로운 그네를 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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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2-12-17 0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이 절창입니다~ ^^

다크아이즈 2012-12-17 05:06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의 한마디야말로 절창이지요.^^*
바뀐 로고가 절절하옵니다.
물론 저도 투표합니다. 님께 이보다 더한 응원 있을까요? 크~
 

 

 

 

 

  다 놓아야 오는 게 있다. 모든 걸 버린 뒤에야 짜릿하게 얻는 게 있다. 바로 자유다. 그토록 갈구하는데도 언제나 그것이 멀기만 한 것은 우리 일상 자체가 버릴 수 없는 것들을 위한 연극 무대이기 때문이다. 밥벌이를 위해 힘껏 고개 숙여야 하고, 눈물을 감추기 위해 크게 웃어야 하며, 벼랑이 두려운 나머지 단단히 밧줄을 잡아야 한다. 정말로 자유가 다급하다면 그 모든 걸 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지극히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우리는 그럴 수가 없다. 관계망이란 현상과 자유라는 본질을 동시에 얻으려는 모순된 굴레, 그런 인간 속성을 쉽게 벗어날 수가 없다.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두목, 당신은 긴 줄 끝에 있어요. 당신은 줄 위를 오가죠. 그리고 그걸 자유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그 줄을 잘라 버리진 못해요.’『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는 고용주인 ‘나’에게 저처럼 일갈한다. 아무리 자유로운 영혼인 척해도 그것은 실제 자유와는 별 상관이 없다. 제스처에 지나지 않는다. 평범한 사람은 자유를 위해 제 인생 순간순간을 도박에 걸지는 않는다. 그토록 어리석을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정한 자유인 조르바는 다르다. 벼랑에 몰리더라도 인간이 줄을 자르지 않으면 무슨 살맛이 나겠냐고 다그친다. 일상의 우리가 우물쭈물하며 생각만 하고 있을 때, 소설 속 조르바는 과감하게 내려놓고 실천한다. 본능의 화신인 그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삶을 부렸다. 춤추고 싶으면 춤추고, 떠나고 싶으면 떠났다. 그에게 과거란 없는 것이며, 미래는 미리 걱정할 게 아니었다. 오직 현재만이 유효한 놀이터였다.

 

 

  무지렁이 단순 일꾼 조르바는 안타까운 인간 굴레를 위무하기 위해 만든 작가의 꽃다발이 아니었을까. 살아서는 결코 누릴 수 없는 게 완전무결한 인간의 자유라는 걸 방증하기 위해 조르바란 꿈을 만들어냈을지도 모른다. 조르바의 눈에는 팽팽한 긴 줄 끝에 있으면서도 끝내 그것이 자유라고, 행복이라고 착각하면서 살아가는 게 인간으로 보일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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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2-12-13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화심리학자인 김정운 교수가 이 책의 영향을 받아 '자유'를 위해 학교에 사표를 냈다는 걸 신문에서 본 적이 있어요. 그의 독후감이 그 신문에 실리기도 했죠. 그가 어리석을까요, 그렇게 못하는 우리가 어리석을까요.

그런데 그런 자유 선언도 운 좋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당장 식비와 교육비를 마련하기가 급한 사람은 직업을 버릴 수 없을 테니까요.

팜님, 저, 첫 댓글이라 기분이 좋아요.^^

다크아이즈 2012-12-16 03:56   좋아요 0 | URL
앗, 어리석은 용기를 끝내 실천하는 분도 계시군요. 그럼 김정운 교수는 지금 자유인? 어쩐지 머리칼 휘날리는 것부터 남다르게 보이더니...

이건 딴 얘긴데, 호텔처럼 흰 침대보에 대한 로망이 있어 집침실에도 그렇게 해달라고 아내분께 요구했다는 김정운 교수 말 듣고, 넘 재밌을 것 같아서 저도 그렇게 바꿔 봤다는 거 아녜요. 호텔 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신선했다는... 관리하긴 힘드네요. ㅋ

페크님 글에도 언제나 첫댓글을 달고 싶은 일인인 걸요. ^^*


라로 2012-12-15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헉!!!
팜님,,,저 이 글이 저에게,,,,,,ㅠㅠ
말을 못 잇겠어요. 언젠가 이 댓글에 대한 얘기 해드릴께요.
아~~~~팜님에게 갑자기 해드릴 이야기가 많아지고 있어요!!^^;;(뭐 제 개인적인 얘기라 님께 중요하진 않아요,,그러니까 해드릴 얘기가 많아지는게 아니라 제가 생각해야 할 것이 많아진다는,,^^;;)

다크아이즈 2012-12-16 03:59   좋아요 0 | URL
나비님 혹, 조르바 때메 자유인을 꿈꾸거나 실천한 경험이 있어서 이런 감탄사 섞인 덧글 단 것 아닐까요?
완전 궁금해요. 개인적일수록 공감하기 쉬우니 언젠가 나비님께 그 얘기 들을 날이 오고 말것이예요. 그날을 기다릴게요. 크...

프레이야 2012-12-16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팽팽한 긴 줄 끝에 매달려 있군요, 우리가요.
살아선 자유를 구가할 수 없을테죠. 비자유, 부자유, 그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자유 비스무리한 가짜자유. 그리고 스스로에게 주는 위무.
간결하면서 콕 아픈 곳을 건드려주는 팜님 리뷰, 제가 늘 좋아합니다.^^

다크아이즈 2012-12-16 04:03   좋아요 0 | URL
프레님, 언제나 긴 줄 끝이죠, 뭐.
살아서 자유를 실천해야 진정한 멋쟁인데,조르바 말고 몇이나 가능하겠어요.
심지어 카잔차키스도 그 자유 실천하지 못했을 거예요.
크레타 섬에 대한 부채의식으로 힘들어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님도 잠 못 이루고 계시는군요. 얼른 주무세요. 좋은 목소리로 녹음하시려면 체력 관리해야 되는데...^^*
 

 

 

 

 

  한 줄도 너무 길다. 일본의 독특한 문학 장르인 ‘하이쿠’(俳句)를 가리킬 때 자주 듣는 말이다. 하이쿠는 우리나라의 시조와 비견될 수 있겠다. 글자 수로만 비교한다면 우리나라 단시조의 초장 수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독서클럽에서 하이쿠 모음집을 읽고 토론했다. 일본 문학을 깊이 공부한 이가 없으니 수박 겉핥기이긴 했다. 아쉬운 대로 하이쿠에 대한 기본 정보를 나누었다는 데서 만족해야만 했다. 하지만  큰 소득도 있었다. 짧은 시가 주는 매력과 그것이 주는 치유의 느꺼움을 맛보았다는 것이다. 

 

 

  하이쿠는 총 17글자로 이루어진 5·7·5조의 일본 정형시이다. 지구상의 가장 짧은 시 형식 중의 하나이다. 처음 그것을 접했을 땐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예를 들면 ‘해묵은 연못이여 / 개구리 뛰어드는 / 물소리, 첨벙’ - 마츠오 바쇼의 이 하이쿠는 최고로 꼽히는데, 잘 모르는 상태에서는 이게 왜 좋은 시라는 건지 받아들이기 힘들다. 하지만 하이쿠 특유의 일본 정서를 살피다 보면 짧은 시가 품은 그 의미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하이쿠는 크게 세 가지 형식미를 갖는다. 앞서 나온 대로 열일곱 글자 내외의 정형성을 갖는다는 게  그 첫번 째다. 두 번째로 짧은 시 안에는 계어(季語기고)가 있어야 한다. 개구리, 장마, 기러기, 첫눈 등 누가 봐도 계절을 연상할 수 있는 낱말들이 하이쿠에 자주 쓰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 번째는 절자(切子기레지)를 갖추어야 한다. 세 구 중 어느 한 곳에 여운이나 감탄을 나타내는 어미를 써서 시적 흐름을 끊어주는 것을 말한다. 위의 바쇼 시에서 ‘해묵은 연못에’ 하지 않고, ‘해묵은 연못이여’하고 한 호흡을 끊어줄 때 훨씬 시적 긴장을 유발한다.

 

 

  짧은 시가 주는 긴 여운이 신기해 우리식으로 17자 시 짓기 대회를 했다. 격조 높아 부담스러운 우리 시조에 비해 접근하기가 쉬워서 그런지 회원들 반응이 나쁘지 않다. 하이쿠의 묘미인 촌철살인엔 미치지 못해도 저마다 숨겨뒀던 발설욕구는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겠다. 시가 뭐 별건가. 제 안을 맴돌던 말씀들의 향연을 짧은 호흡으로 쏟아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마다 시인이 아니던가. 모두들 절제된 언어의 명쾌함이 주는 치유 놀이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기고 있었다.

 

 

 

 

< 회원들의 미완 촌철살인 하이쿠 모음 >

 

 

 

1.시린 손 불며

기표하는 스무 살

떨리는 손끝

 

 

2. 녹는 똥 밟았다

조카 크레파스 십팔색깔!

구린 신 바닥

 

 

3. 벗은 나무여

가지마다 설움 달아

흐느끼는 온밤

 

 

4. 첫눈길 님 마중

맘보다 차바퀴 앞서네

가드레일 휘청!

 

 

5. 살얼음 꼈네

백로떼 어딜 갔나

호수엔 그림자만

 

 

6. 시린 어깨여

켜진 프린터 소리가

온풍기인 줄!

 

 

7. 시린 발걸음

마음처럼 못 가는 건

심장 먼저 언 탓

 

 

8. 마른 잔디밭

성급한 냉이 돋아

당황한 햇살

 

 

9. 얼음 낀 물확

수초는 그대론데

마실 갔나 구피!

 

 

10. 하이쿠 짓는 동지

팥죽 색깔 얼굴만

붉으락 푸르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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댈러웨이 2012-12-12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므느와르님이 쓰신 건 2번일까요? 아니면 10번? --;



매미소리 쏴-
아이는 구급차를
못 쫓아왔네.

-이시바시 히데노

다크아이즈 2012-12-13 08:11   좋아요 0 | URL
ㅋㅋ 역쉬 예리하신 댈러웨이님
2번이요~~ 제 기질 어디 가겠어요?
하이진(하이쿠 전문 작가들)이 똥 이야기 많이 하길래 저도 그냥 ㅠ

맞아요. 공감각 넘치는 히데노의 저 작품도 넘 신선하게 다가왔어요.
기왕이면 댈러님도 17자 한 수 답글을 주시지. 저 넘 감격해서 기절했을라나. ㅋ

페크pek0501 2012-12-13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7번과 8번, 좋아요. ^^

2012-12-16 04: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로 2012-12-15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하이쿠 한수 올리려고 생각해봤더니 좀 어려운걸요!!
언제 한 수 올려봅지요,,ㅋㅋ

다크아이즈 2012-12-16 04:10   좋아요 0 | URL
나비님, 꼭 한 수 올려 주시어요. 넘 재밌을 것 같아요.
근데, 너무 바쁘신 분이라 하이쿠 짓는 건 힘들지 않으실텐데
시간 내는 게 가장 힘들 것 같아요. ^^*

프레이야 2012-12-16 0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었지요. 오래전. ^^
그나저나 2번이 정녕 팜님 작품? 화끈하니 참말 좋아요^^

다크아이즈 2012-12-16 04:13   좋아요 0 | URL
넹, 저 좀 저질인가요? ㅋ
논술교실 열었을 때(지금은 집에서는 안 해요.)학생들이 와서 저런 욕
저한테 가르쳐줬는데 넘 재미있어서 정말이지 배꼽 잡고 웃었어요.
그걸로 재배치 한 번 해봤어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