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우나는 JTBC 안 봐요 - 2017년 제13회 세계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박생강 지음 / 나무옆의자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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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책은 한 소설가가 생계의 압박으로 사우나 매니저를 하게 된 이야기이다. 이것은 박생강 작가의 실화이기도 하다. 말로는 사우나 시절을 작품화 할 생각은 없었다던데, 과연 그 말이 이해가 된다. 별 내용도 없는 직장 브이로그를 꾸역꾸역 찍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다양한 인간 군상을 통해 각자의 인생 방식을 엿보는 재미와, 웃기 애매할 정도의 유머 코드도 나름 매력적이라 하겠다.


태권이 들어간 모 피트니스 소속 사우나는 상위 1% VIP 회원들만 다니는 곳이다. 다만 손발톱 다 빠져가는 말년 병장 위주이긴 한데, 하나같이 사우나에 와서도 그렇게 갑질을 해댄다. 회원 한 명 한 명이 거물인지라 피트니스 직원들은 총알받이나 다름없었고, 아쉬울 게 없는 주인공은 적당히 중립을 지키며 적응해나간다. 이후 회원들의 신상정보를 알고 나자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은 꼬여있는 저 1%들도 결국 똑같다 싶어진 태권. 실패 끝에 여기까지 온 그였지만 괄약근도 조절 못하는 회원들을 보며 위로 아닌 위로를 받는다.


대부분이 사우나 이야기지만 앞으로의 소설가 인생에 대한 고뇌를 다루고 있다. 태권은 절실함이 없는 캐릭터인데, 사우나에서 만난 회원들을 보며 성공해야겠단 마음은커녕 의욕만 꺾여버린다. 잘나가는 저들도 일순간에 망하는데 열심히 산다고 의미가 있나 싶은 거다. 일찍이 때려치겠다던 사우나는 어느새 자리 잡아버렸고, 다른 일자리 권유에도 거절할 만큼 지금 생활에 만족해한다. 이후 몇몇 회원들이 태권을 소설가라 불러주면서 굳어져버린 마음 어딘가에 금이 가고 빈틈이 생겨난다. 마침내 권태를 느낀 주인공은 그제야 사우나를 떠날 준비를 한다.


작가는 인간의 빈틈을 강조한다. 그 빈틈 사이로 영혼이 허물을 벗고 한 단계 더 성장할 수가 있다. 제 빈틈을 발견치 못한 사람은 늘 제자리걸음일 뿐이다. 물론 사람이 언제나 성실하고 생산적이고 열정적일 수만은 없다. 우리는 사는 동안 이런저런 삽질과 실패를 수차례 반복하는데, 이에 대해 태권의 여자친구가 해준 말이 있다. 사람은 게으를 권리도 있고, 떠날 권리도 있으며, 이것들은 죄악으로 여길 게 아니라고. 남들보다 느리다고 해서 하자 있는 건 아니란 얘기다. 그러므로 그대여, 꽃으로도 때리지 마시라요.


태생이 느긋한 작가가 사우나 일을 하면서, 또 소설가로 지내오면서 마주한 그 권태가 깨달음과 도약을 가져다준 셈이다. 그래서 주인공을 태권으로 지었는지도. 대다수가 이 책을 상류층에 대한 비판 및 풍자로 접근하는 반면, 나는 삶의 유연성 쪽에 더 주목하였다. 개미라고 해서 일만 하라는 법이 없고, 베짱이가 놀기만 한다는 법도 없다. 그러니 비교치 말고 자책하지도 말고 태권처럼 중립 기어 박고 살아가자. 내가 뭘 하든 알아주지도 않는 세상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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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3-04-26 09: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 이 책 재밌을 거 같아요.
인생 중립기어 박고 살아가자! 넘 공감이 갑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물감 2023-04-26 10:39   좋아요 0 | URL
쿨캣님 오랜만이에요 ㅎㅎㅎ 잘지내시나요?
이 책은 강박증에서 해방되고싶은 제게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중립기어 파이팅! ㅎㅎ 쿨캣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새파랑 2023-04-26 14: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왜 저렇게 제목을 지은건지 궁금하긴 합니다 ㅋ 요새 물감님 리뷰 별 다섯은 없는거 같습니다 ~!!

물감 2023-04-26 14:43   좋아요 1 | URL
보아하니 편집팀의 어그로였더라고요 ㅋㅋㅋ 내용과 전혀 무관하지도 않지만 딱히??
저야 뭐 원래 짠돌이라 별 다섯이 잘 없긴 하죠 ㅋㅋㅋㅋㅋㅋ 여튼 좀 더 발굴해보도록 할게요!!

자목련 2023-04-27 09: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를 여유있에 풀어어낸 재미로 기억하는 소설이에요.
봄날을 즐기는 하루 보내세요^^

물감 2023-04-28 05:21   좋아요 0 | URL
가볍게 읽기 좋더라고요. 박생강 작가의 그 여유로움이 참 맘에 들더라는 ㅎㅎ 자목련 님도 좋은 하루 되세요😀
 
레몬 - 권여선 장편소설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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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은 머리를 비우려고 산책을 나가지만, 오늘은 생각에 빠지고 싶어서 산책을 나갔다. 천천히 동네를 거닐며 여러 사람들을 구경했다. 횡단보도 앞에서 재잘거리는 학생들, 킥보드 타고 쌩쌩 달리는 소년, 아이스크림을 먹는 태권도복 입은 꼬마, 유모차 안에 강아지를 태우고 걷는 사람, 벤치에 앉아 스마트폰 게임하는 아이, 커피 마시며 느긋하게 걸어가는 커플 등등. 별다를 것 없는 저 평범한 일상들이 되게 행복해 보였다. 프리하고 내추럴한 내 모습을 보며 부러워할 사람도 있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하다 오랜만에 도서관을 가서 책 몇 권을 빌려왔다. 집에도 책들이 쌓여는 있지만...


권여선 작가의 책은 <레몬>이 처음이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제목과 표지에 끌려 고른 건데 음, 기대보다 쏘쏘했더라는. 두부 손상으로 살해당한 고3 언니의 주변인들에 대한 내용이다. 가족, 친구, 용의자, 관계자의 이야기들이 뒤엉켜 나오지만 범인은 누군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이 책은 범인 찾기보다 남은 자들의 ‘그날 이후‘를 조명하고 있다. 각자의 삶이 어떻게 망가지고 무너졌는지와, 복원의 가능성을 두드려보는 정도의 서사를 그려낸다. 겨울나무 같은 앙상함이지만 이런 전개 방식과 포커싱도 뭐 그럭저럭 괜찮았다.


엄마는 동생을 언니의 얼굴로 성형시켜버린다. 그리고 언니의 이름까지도 개명하려고 한다. 엄마가 누구를 더 사랑했는지 알게 된 동생. 엄마는 언니를 잃었고, 동생은 자기 자신을 잃었다. 이외에도 다들 잃어버린 ‘무언가‘로 인해 빈 껍데기의 삶을 보내게 된다. 바란 적도 없는데 어쩌다 이 같은 생애를 짊어지게 된 걸까. 어떤 경우에도 그 ‘무언가‘를 절대 손놓지 말았어야만 했다. 우리 모두는 그 사실을 언제나 뒤늦게 깨닫는다.


권여선 작가는 불가능한 평범에 관하여 지적한다. 삶이 그러하기에 우리는 보통의 나날을 갈망한다는 말이다. 어떤 사건 따위가 없어도 삶은 충분히 위협적이지만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고, 여기에는 어떤 의미나 목적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오늘 산책길에서 느꼈던 일상의 행복들도 그렇다. 그것은 잠깐의 평범한 시간들이 한데 모여서 만들어낸 불가능 중에 불가능이다. 그러니 원한다면 얼마든지 평범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나 역시 그렇게 되려고 노력 중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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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숲
니콜 크라우스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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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쓰기에 진심이었던 나님은 이제 그만 지쳐버렸다. 이번 책을 끝으로, 아니다 싶은 책은 리뷰고 뭐고 그냥 덮어버릴 것이다. 이제는 예전처럼 전투력이 솟질 않는 데다 한번 다운되면 그 여파가 너무나도 오래간다. 그러니 앞으로는 재미난 독서와 즐거운 쓰기에만 전념할 생각이다. 더 이상은 에너지 낭비에 시간을 뺏기지 않겠다.


<위대한 집> 이후 7년 뒤에 나온 <어두운 숲>은, 같은 저자가 맞나 싶을 만큼 낯선 분위기와 감성을 보여준다. 두 남녀의 이야기가 교차하는데, 이 둘이 나중 가서 만나거나 하는 일은 없다. 그냥 중편 두 개가 번갈아가며 나온다고 보면 된다. 물질적인 삶에 지친 은퇴한 변호사 노인과, 글쓰기의 한계를 만난 소설가의 내용인데, 소재는 좋았으나 전개며 서술이며 참 대략난감이었다. 썩 필요해 보이지 않는 장면들이 많은 데다 딥&다크한 저자의 철학들이 순서 없이 날아든다. 아따메, <위대한 집>도 여러모로 읽기 힘들었었는데 말입죠.


<어두운 숲>은 니콜 크라우스가 이혼하면서 생긴 감정들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사랑의 역사>로 큰 성공을 거둔 작가는, 이혼의 아픔을 치유해 주지 못하는 부와 명예에 회의감을 느꼈을 것이고, 그 심정을 담아 변호사 노인의 이야기를 썼을 테다. 또한 내 작품이 유대인을 대표한다는 부담과, 유대인과 미국인 사이에서 오는 정체성 혼란으로 내내 가시방석이었겠지. 소설가의 내용 곳곳에서 작가의 고통이 묻어 나온다. 니콜 크라우스는 직업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지 않았나 싶다. 결국 그녀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글쓰기로 눈앞에 벽들을 넘어섰다. 누가 뭐라 하든 이제는 자신을 위한 글쓰기로 마이웨이 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중반까지는 나름 괜찮았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찾는 과정은, 작가와 독자 서로에게 꼭 필요한 화두니까. 그런데 후반에 들어서도 계속 헤매고 있는 게 아닌가. 어쩌면 작가 자신도 인생에 어떤 확신을 갖지 못한 채 이 작품을 완성한 걸 수도 있다. 그저 오랫동안 막혀있던 벽을 허물은, 기념비적인 작품일지도 모르겠고. 아무튼 기존의 모습에서 탈피하려는 시도는 좋았다만 작품성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못미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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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3-04-23 09: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생각 잘하셨습니다.
무엇보다 나 자신이 점점 힘들어지는 것 같아요. 문제투성이 책은 너무 많거든요. 이렇게만 쓰신 것도 냉정하게 잘 쓰신 것 같습니다.^^

물감 2023-04-23 10:04   좋아요 2 | URL
좋은 책은 좋은대로, 나쁜 책은 나쁜대로 의미가 있다 생각했는데요. 수차례를 반복하다보니까 확실히 기빨려서 독서를 손 놓게 되네요 ㅠㅠ 한 때는 글쓰기의 원동력이 까칠함이었는데 어느새 다 시들어져 버렸어요 ㅎㅎㅎ

그레이스 2023-04-24 19: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같은 곳으로 결론이 나는 저에게도 조금 식상할때가 있더라구요^^;;

물감 2023-04-24 19:55   좋아요 1 | URL
ㅎㅎㅎ그레이스 님도 그러시군요. 참고 넘기는 데에도 한계가 있죠 😭

공쟝쟝 2023-04-29 16: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생했습니다... 저는 니콜 크라우스의 아마 최근 작인 <남자가 된다는 것> 다 못 읽고 반납했습니다. 읽는 데 까지는 재밌게 읽어서 다시 빌릴 생각 있습니다ㅋㅋ 유대인에 대한 문제 의식이 있는 작가군요. 어쩐지 그 단편집에서도 자주 등장하더라구욥.

물감 2023-04-29 22:08   좋아요 1 | URL
이 작가는 유대인을 대표하는 글을 써내야한다는 강박에 갇혀있단 느낌이에요. 통찰과 고뇌가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가는데 영 정돈이 안된다고나 할까요. 그건 그거대로 볼만할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여기까지만... ㅋㅋㅋㅋ
 
위대한 집
니콜 크라우스 지음, 김현우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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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 크라우스의 작품을 두 권째 읽어보니, 유대인만의 감성이 뭔지를 알 것도 같다. 흑인문학과 비슷하면서도 뭔가 다르다고 느껴지는 건 유대인들의 민족성 때문일까. 해는 떴던 곳으로 지고 바람은 불던 곳으로 돌아간다는 성경 구절처럼, 떠나온 것들은 다 있던 곳으로 가야 한다는 관념 비슷한 게 있다. <사랑의 역사>에서 보여준 그 먹먹함을 갑절로 보여준 <위대한 집>은 솔직히 좀 과했다고 본다. 어떤 고급 요리라도 계속 먹으면 질리거든.


<사랑의 역사>에서 액자소설의 구성을 썼던 것처럼, 이번 작품도 여러 명의 서사를 ‘책상‘이라는 매개체로 하여 연결 짓는 독특한 구성을 보여준다. 말이 연결이지, 단편집의 독립적인 내용들로 이뤄져 있다. 그러니 애써 퍼즐 맞추기를 할 필요는 없겠다. 총 네 명의 화자가 들려주는 고백록인데, 각자 지나간 세월에 관하여 줄줄이 내뱉느라 이야기 자체로는 재미가 떨어진다. 남편과 아내, 친구와 애인, 부모와 자식, 가족과 타인 등등. 유대인들과 관계 맺은 사람들 혹은 유대인 자신들이 말 못 할 어떤 결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다만 그 패턴이 반복되다 보니 짠하던 마음이 점점 느슨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작가가 만든 유대인들의 공통점. 내 아픔은 어디까지나 내 몫이어야 한다는 고집이다. 그렇기에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털어놓지 않고 혼자서 감당한다. 연대 책임을 지게 하거나 피해를 줄까 봐 그런 건 아니라서, 그냥 유대인의 민족성이란 이유라 믿기로 했다. 이 책은 세대를 거쳐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게 된 ‘로르카의 책상‘의 소유자 네 명에 관한 이야기이다. 다만 그 책상에 관련된 에피소드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게다가 제목에 있는 ‘집‘도 내용들과는 전혀 연관성을 찾지 못했다. 해설에서는 책상을 물려주고 넘겨받는 이 행위를 주목하고 있다. 환경이든 물질이든 운명이든 주어진 건 수용해야 한다는 게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본분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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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역사
니콜 크라우스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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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말을 했었다. 어떤 제목이라도 외국인이 쓴 거면 촌스럽지가 않다고. <사랑의 역사>라는 다소 밋밋한 이 제목을 국내 작가가 썼다면 금방 묻혔을 거란 생각이 든다. 사랑이 역사로 존재하려면 아무래도 깨소금 볶는 쪽보다는 운명의 장난 혹은 시련 쪽이어야 할 테지. 그걸 역사라 부를 수 있다면, ‘사랑의 역사‘를 가지지 않은 이가 아무도 없다는 뜻이렸다. 저마다의 역사처럼 나도 나만의 것을 끄집어내어 저자가 얘기하려는 사랑에 다가가고자 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는 접근이 불가할뿐더러, 어떻게 해봐도 내 아픔들과 좁혀지지 않을 성질의 작품이었다.


크게는 세 가지 시점이 교차하며 진행된다.

① 나치의 침공으로 소녀와 헤어진 유대인 소년. 미국으로 떠난 소녀는 그의 아이를 낳았으나 연락 두절로 결국 딴 사람과 결혼한다. 절망의 세월을 지나 독거노인이 된 그에게 날아든 익명의 소포. 내용물은 과거 자신이 소녀를 생각하며 썼었던 ‘사랑의 역사‘ 원고였다.


② 독일군에게 소년이 죽은 줄 알았던 친구. 소년에게 건네받은 ‘사랑의 역사‘ 원고를 스페인어로 번역해 자신의 이름으로 출간해버린다. 그러나 양심에 찔린 그는 원작자를 책 말미에 언급한다.

③ ‘사랑의 역사‘의 주인공 이름을 물려받은 앨마. 어느 날 ‘사랑의 역사‘의 번역본을 요청받은 엄마에게 묘한 냄새를 맡은 앨마는, 작품과 요청자 그리고 앨마라는 이름의 관계를 추리한다.


읽어보면 썩 친절한 작품은 아니구나 할 것이다. 액자소설이니 꼭 메모하면서 읽으시길. 근데 다 읽고 보니 어지러웠던 플롯은 보기보다 간결했다. 뒤죽박죽의 챕터들도 하나의 그림을 향해가고 있었다. 추리소설과 순문학의 결합이라. 2005년도 작품이던데, 시대를 얼마나 앞서간 것인지. 이 영리한 작가의 책들을 좀 더 읽어봐야겠다.


굵직한 스토리라인이 온통 인물들의 감정선에 가려져있다. 소중한 사람의 부재로 인한 상실감이 공통점인데, 그것이 각자를 삶의 어딘가에서 밀어내고만 있다. 먼저 노인이 된 레오의 아픔을 느껴보자면, 앞서 말했듯 연인과의 이별 아닌 이별을 겪었다. 그로부터 수십 년을 그리움과 탄식 속에 갇혀지낸다. 어떻게든 정리하고 새 출발 하기엔 자신의 아들이 눈에 밟혔더랬다. 비록 레오의 존재조차도 모를 테지만 혈육에 대한 사랑은 흘러간 세월만큼 커져 있었다. 어느 날 아들의 사망 소식을 듣고 찾아간 장례식장에서 타들어가는 마음을 달래던 중, 소년 시절의 자신과 찍은 소녀의 사진을 발견한다. 아들의 이부동생 말로는 돌아가신 엄마의 유품이라 했다. 그녀도 나를 잊지 않고 있었구나. 애써 외면했었던 평생의 사랑을, 다 떠나간 뒤에야 겨우 불러볼 수 있다니. 아름다운 세상과 잔인한 세상은 종이 한 장 차이였던가.


소녀 앨마의 아픔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아빠가 암으로 세상을 떠난 뒤 모든 게 변했다. 늘 태연한 척하는 엄마와, 갈수록 사차원이 돼가는 동생. 그리고 뭘 해야 할지 막연한 나. 아빠를 대신해 자신이 가족을 지키기로 한다. 앨마의 관심사는 야생에서도 살 수 있는 생존비법 연구로 이어진다. 그러다 ‘사랑의 역사‘ 번역 요청자를 엄마의 재혼상대로 점찍고 다리를 놔주려다가, 그 책의 주인공이 실제 인물이라는 가설에 이르자 직접 찾아 나서기로 한다. 이 과정들은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과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고픈 무의식의 집념이었다. ‘앨마‘란 이름이 진정 사랑의 대상이었는지, 부모님은 무슨 생각에서 그 이름을 나에게 준 건지, 정녕 나는 그 이름을 물려받기에 적합한 사람인지를 알아야 했다. 그래야 손상된 심장이 다시 제 기능을 할 테니까. 마침내 사랑의 근원과 마주한 앨마는 모든 역사를 눈으로 확인한다. 이제는 제자리로 돌아갈 일만 남았다. 그녀의 오랜 갈증은 과연 해소되었을까.


혐오범벅 헬조선의 마지막 낭만파인 나님과 딱 맞는 감성의 작품이었다. 드라마는 안 보면서 드라마틱한 사랑은 또 좋아하는 나님의 90년대 취향과도 꽤나 일치했다. <사랑의 역사>는 상실에도 전염성이, 아련함에도 유전성이 있다고 느끼게 해준다. 이런 복합적인 감성 표현이 가능한 건, 니콜 크라우스 자신이 유대인이기 때문이리라. 작가는 레오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설명하고, 앨마를 통해서 유대인의 심정을 그려낸다. 그리고 두 인물의 결합이 만들어낸 에너지를 독자에게 전파한다. 레오처럼 간직하는 사랑도. 앨마처럼 찾아 나서는 사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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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04-12 15: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저도 완전 애장하는 책입니다. 표지만 좀 평범(?)했더라면 좋았을텐데 ㅜㅜ
저도 물감님 의견에 공감하는게 만약 이 제목을 가지고 한국작가가 썼더라면 저는 왠지 안읽었을거 같습니다 ㅋ

물감 2023-04-12 16:19   좋아요 1 | URL
문학동네가 전반적으로 디자인이 좀 약해요(고전은 제외). 그래도 좋은 작품 많이 내줘서 넘어가줍니다 ㅎㅎㅎ 새파랑 님도 제목에 대한 선입견이 있으시군요! 저만 그런 게 아니었어요! 저라도 안읽었을 텐데, 이런 식으로 놓쳐버린 좋은 국내작품이 얼마나 많을까 생각도 듭니다 ^^

공쟝쟝 2023-04-12 17: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나 이작가가 쓴 다른 책 빌려놨는데!! 보고 잼쓰면 읽는데 참고할게요!

물감 2023-04-12 18:07   좋아요 1 | URL
전에 얘기했었던 바로 그 잔잔바리 감성이에요 ㅋㅋㅋ 개취지만 강추!
지금은 <위대한 집> 읽는 중! 그리고 <어두운 숲>도 연달아 읽을 예정!
참고하라고 얼른 읽고 리뷰 쓸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