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미치도록 빠져읽었던 디스토피아 판타지 시리즈 소설들을 정리해보고 싶어졌다. 나는 원래 책을 전혀 읽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특히나 소설은 더욱 그랬는데, 내용 파악의 어려움 이전에 각 장면과 상황들이 전혀 시각화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미지 트레이닝에 판타지소설이 딱이겠다 싶었지만 솔직히 판타지 특유의 유치함을 이겨낼 자신이 없더라고. 게다가 판타지 장르는 글맛보다 영상미 아니던가.


이런 생각을 하던 중에 국내에 디스토피아 판타지 소설이 줄줄이 출간되어 이거다! 싶어서 냅다 읽어댔고, 덕분에 시각화하여 내용에 몰입하는 기술을 터득하였다. 암튼 디스토피아와 판타지의 크로스오버 장르가 주는 메시지와 재미, 그리고 스릴감과 여운만큼 내 취향과 딱 맞아떨어지는 장르도 잘 없더랬다.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못 읽은 시리즈들도 찾아봐야겠다.




1. 다이버전트 시리즈 



























다섯 개의 분파로 나누어진 미래 사회. 일정 나이가 되면 적성검사를 하고 분파를 지정받는다. 그런데 주인공은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 특수 유형이었고, 이런 분파가 없는 아이들을 '다이버전트'라고 명명했다. 문제는 다이버전트가 사회의 질서를 무너뜨린다는 이유로 제거대상이라는 것. 하여 불합리한 사회와 시스템에 저항하며 개인의 가치를 증명해낸다는 소녀의 이야기인데, 틈만 나면 로맨스 쪽으로 빠져서 답답했던 기억이 난다. 프리퀄인 <포>는 안 읽어봐서 모르겠다.



2. 헝거게임 시리즈 ★☆


 


























아마 국내에 소개된 디스토피아 판타지물 중에서는 가장 유명하지 않을까. 영화는 영상미가 끝내주는 반면 너무 많이 생략되어서 아쉬웠다. 매년마다 '헝거게임'이라는 국가행사가 열리며, 지역별로 남녀 한쌍이 게임에 참가해 서바이벌 사냥을 벌인다. 짐승같은 연례행사의 마침표를 찍기로 한 주인공 팀은 돌발행동으로 우승하여 수도 중심부까지 들어가 혁명을 일으킨다. 저자가 TV쇼 작가 출신이라서 그런지 연출을 잘 한다. 프리퀄인 <노래하는 새와 뱀의 발라드>는 안 읽어봄.



3. 파인즈 시리즈 
















미드 <웨이워드 파인즈>의 원작. 교통사고에서 깨어난 연방요원은 자신이 알던 세상이 묘하게 변했음을 감지한다. 도시는 황폐하고 사람들도 안 보인다. 이곳을 떠나서 사태를 파악 좀 해보려는데 웬 괴생명체들이 몰려와 도시를 애워싼다. 알 수 없는 현실에 물음표 백만 개 던지는 주인공과 독자의 맨붕 스파이크 작렬. 생각보다 별로였던 1권만 이겨낸다면 꽤 재미있는 시리즈다.



4. 메이즈러너 시리즈 ★


 







































<헝거게임> 다음으로 유명하지 않을까 싶은데, 개인 취향으로는 이 작품이 여러 면에서 베스트이다. 영화 <트루먼 쇼>의 스릴러 버전이랄까. 숲 속 공터에 갇힌 청소년들은 벽 안에 미로를 들어가 출구를 찾아내야 한다. 미로 밖을 나가면 또다른 시련과 혹독한 현실들이 모두를 반겨준다. 새장 밖의 혹독한 현실을 선택한 러너들의 피땀눈물어린 이야기. 메인 3부작은 미친듯이 재밌으나 프리퀄 <킬 오더>와 <피버 코드>는 쏘쏘. <크랭크 팰리스>는 안 봐서 모름.



5. 페이즈 시리즈 ★☆
















총 6부작인데 국내엔 아쉽게도 두 권만 출간되어있다. 만약 전부 출간되었다면 <메이즈러너>보다 이 시리즈가 단연 압승이다. 세계관이 매우 독특한 작품인데, 15살 생일을 맞으면 갑자가 사라져 모습을 감춰버린다. 그렇게 세상은 15살 이하의 아이들만으로 구성되어있다. 저마다 크고 작은 초능력을 안고 태어난 아이들끼리 계급도 나누고 파벌싸움도 벌인다. 일반 소년만화와 다른 점은 매순간 데스타임에 쫓긴다는 것과, 성선설과 성악설의 논쟁을 적나라하게 구경할 수 있다는 정도다. 겨우 두 권뿐이니 작품 전체를 평가할 순 없지만 각 권만의 재미가 실로 대단하다. 더이상 출간할 생각은 없어보이나 끝까지 존버할 거다.




<레드라이징>시리즈도 그렇고 아직 못 읽은 시리즈물이 더 있을텐데, 후에 페이퍼 2탄을 올려봐야겠다. 그런 날이 언제 올지는 모르겠지만. 이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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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3-06-15 09: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판타지 장르를 좋아하는 분들께 유용한 글이네요. 저는 <파인즈 시리즈>가 궁금하네요^^

물감 2023-06-15 09:26   좋아요 0 | URL
<파인즈>도 읽어볼만 합니다.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손에 땀을 쥐며 읽던 기억이 나네요 ㅎㅎㅎ

독서괭 2023-06-15 10: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메이즈러너> 영화 재밌게 봤던 기억이 나는데 원작이 소설이었군요! 별5 주시니 궁금합니다 ㅎㅎ

물감 2023-06-15 11:17   좋아요 1 | URL
영화도 정말 잘 만들었어요. 원작의 느낌을 꽤 잘 살려냈더라고요 ㅎㅎㅎ 메인 3부작만 별 5개입니다. 어떻게 했을 때 독자가 입맛 다시는 지를 여우같이 잘 아는 작가에요!

은오 2023-06-15 11: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감님 제가 바로 그 시각화가 안되는 인간인데요!!!!! 저는 인물이 어떤 옷을 입었고 어디에 있고 어떤 자세고 그 집의 벽엔 뭐가 있으며 창밖 풍경 구름은 어떻다든지 이런 묘사가 나오면 그냥 아 그렇구나 하고 말거든요?! (사실 궁금하지도 않음ㅜ 그래서 배경묘사 장황하게 하는 작가들 싫음ㅜ) 근데 시각화가 훈련으로 가능한거였나요? 도무지 그려지지가 않는데 말입니다. 저는 그냥 그건 타고나는 건줄....?! 되는 사람이 있고 안 되는 사람이 있고....

물감 2023-06-15 14:03   좋아요 1 | URL
대체로 시각화가 안되는 사람들은 제품의 메뉴얼처럼 인식을 해요. 이건 기능이 어떻고 활용도가 어떻고 하는 식의. 저는 어떤 장면을 두고 다각도로 묘사하는 글을 써봤어요. 남의 글만 가지고는 훈련이 안되니까 제가 직접 작가가 되어보기로 한 거죠. 이게 참 오래전 일이기도 하고, 글로 설명하려니 되게 어렵네요 ㅋㅋㅋ

먼저는 내가 지금 추구하는 감정이 뭔지를 알아야 해요. 다음은 스마트폰으로 인생샷을 찍는다 상상해보는 겁니다. 보통 사진찍을때 구도를 잡고 각도를 재고 필요에 따라 연출도 넣잖아요? 그런 식으로 연습하다보면 장면마다 자동으로 연상되는 앵글이 생기더라고요. 감각만 터득하면 금방 늘어요!

그리고 저는 진짜 인풋을 겁나게 쑤셔넣었어요. 웹툰, 애니메이션, 영화, 짤방 등 온갖 이미지를 봐두고, 음악을 장르불문하고 들어보고, 운동선수나 댄서들의 움직임도 관찰하고~ 그게 다 아웃풋에 엄청난 도움이 되더라고요 ㅎㅎㅎ 편독하지만 않는다면 은오 님도 잘 될 겝니다. 화이링.
 

얼마 전에 다 읽은 <애거사 크리스티의 스페셜 컬렉션 시리즈>를 총 정리하고 싶어서 페이퍼를 쓴다. 영국의 추리소설 여왕인 크리스티 여사는 '메리 웨스트매콧'의 필명으로 여섯 권의 작품을 출간하였다. 추리소설 외에 다른 글도 써보고 싶었다던 저자는 필명을 써서 일반소설(대중문학)을 시도했고, 독자들의 반응도 좋았었나 보더라. 여성심리와 자기성찰을 중심으로 한 이 작품들은, 당시 영국의 사회 분위기가 어떻게 변화해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지금은 전부 품절이던데, 보실 분들은 도서관 대여나 중고 책을 찾아보셔야 할 듯.















1. 봄에 나는 없었다 (1944) 


https://blog.aladin.co.kr/loveoctave/9193884


개인적으로 이 책은 별로였다. 주인공이 사막의 한 모텔에 장시간 발목을 잡히는 데, 딱히 할 게 없어 이런저런 회상 속에 시간을 보낸다는 내용이다. 자신이 한 집안의 아내이자 엄마로써 썩 훌륭하다 믿었는데 돌아봤더니 엉망진창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본인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만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울그락붉그락 안절부절 요동치는 게 당최 말이 안될 정도였달까. 아 모르겠네. 이렇다 할만한 서사도 없는 데다 주인공의 독백들도 영 와닿지 않았었던.















2. 딸은 딸이다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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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심리소설의 정석이라 불러본다. 남편과 사별한 엄마가 재혼상대를 데려오자 딸이 극구 반대한다는 내용이다. 이후 엄마와 딸의 대립이 여러 차례 반복된다. 딸을 위해 지금껏 희생해 주었듯 이번에는 딸이 희생해줄 차례가 아니냔 거지. 두 모녀는 서로를 잘 안다는 착각에 빠져서 본인 주장을 절대 꺾지 않는다. 사랑이냐 핏줄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3. 장미와 주목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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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봐도 킹 받는 표지다. 선거운동에 나가는 남자의 이중인격 내용인데, 리뷰를 간단히 적어놔서 자세히는 기억이 안난다. 출세하기 위해 기꺼이 속물이 되려는 남자의 속사정은 사실 그게 아니었다. 더러운 계급주의 사회를 뒤집으려고 기회주의자를 자청했던 것. 그러나 대중들은 남자의 겉면 만을 보고 이러쿵 저러쿵 하고 있다. 하여간 재미는 보장하는데 왜 별점이 낮냐면, 빙빙 도는 전개라서 내용 파악이 막 쉽지가 않음.















4. 두번째 봄 (1934) 


https://blog.aladin.co.kr/loveoctave/9193884


저자의 자전 소설. 내성적인 딸은 엄마를 너무나 좋아했다. 남자가 생겨도 엄마랑 더 붙어지낼 정도. 문제는 엄마였다. 딸을 사랑한답시고 한 행동들이, 엄마 없이는 아무 것도 못하는 자식으로 만들어놨다. 결혼하고도 여전히 분리불안증에 시달리는 딸. 이혼이 눈 앞에 닥치자 겨우 자신의 감정에 진심이 된다. 물렁했던 과거의 자신을 책망하는 주인공과 저자를 보노라면 눈물이 다 난다.















5. 인생의 양식 (1930) 


https://blog.aladin.co.kr/loveoctave/9193884


시리즈 중 제일 두껍고 제일 재미있었다. 음악 자체를 혐오하던 소년이 어찌어찌하다 작곡가가 된다. 제 관심사가 전부인 소년은 이기적으로 굴 때가 꽤 있는데, 나쁜 뜻은 없고 순수함에서 비롯된 거라 딱히 태클 걸기도 애매했다. 훗날 군에 입대한 주인공이 기억상실에 걸린 채로 돌아온다. 음악성은 사라졌고, 아내는 재혼했다. 이제 그는 무슨 낙으로 살아갈까. 무엇으로 삶의 톱니바퀴가 굴러가는 지를 생각하게 해준 그레이트한 작품.















6. 사랑을 배운다 (1956) 


https://blog.aladin.co.kr/loveoctave/9193884


이 작품도 꽤나 신선했다. 언니는 나이차 많은 동생을 딸처럼 키운다. 잘자란 동생이 나사 빠진 남자를 사랑하여 말려보지만, 나를 그만 좀 아껴달라는 동생의 팩트폭력만 돌아온다. 과연 그 말대로, 동생의 삶에 올인했던 언니는 자기인생이랄 게 없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렇게 태어나 이렇게 살아온 거, 무슨 상관이랴. 언니의 예상대로 동생부부는 파국을 맞았고, 그럼에도 동생은 언니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개인의 삶은 개인의 몫이며,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걸 이해한 두 사람. 사람 간에 일방통행이 얼마나 위험한 지를 보여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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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페이퍼를 쓰는 것도 괜찮네.

앞으로는 총정리 페이퍼를 종종 써야겠다.

그럼 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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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06-12 16: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럼 20000. : 너무 재밌습니다.

물감 2023-06-12 17:33   좋아요 2 | URL
페크 님의 관심을 사서 다행입니다😄

독서괭 2023-06-12 17: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시리즈 완독하셨군요!👏👏👏
5별은 일단 담아놔야지 하고 눌러보니 딸은 딸이다는 개정판 출간되었네요!^^

물감 2023-06-12 18:20   좋아요 2 | URL
상냥하신 독서괭 님 ㅎㅎㅎ
개정판을 전 권 다 내주려나요?^^
댓글 감사해요!

새파랑 2023-06-12 19: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역시 시리즈하면 물감님이군요~!
전 추리소설은 잘 안맞아서 거의 안읽었습니다. 하지만 물감님은 장르불문이시군요~!! 부럽습니다~!!

물감 2023-06-12 19:56   좋아요 1 | URL
ㅋㅋㅋ정확히는 추리보다 스릴러파 입니다. 제가 추리를 정말 못해서 막 재밌진 않더라고요. 저는 새파랑 님의 전작주의가 더 부럽습니다🙂

자목련 2023-06-13 09: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시리즈 가운데 몇 권만 읽었어요. 표지가 예뻐서 추리 소설이 아니라서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물감 2023-06-13 13:03   좋아요 0 | URL
저도 추리소설이 아니어서 읽기 시작했던 기억이 납니다. 개정판보다 구판 표지가 더 이쁘더라구요. 점점 날씨 더워지는데 건강 조심하세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헤르만 헤세 컬렉션 (그책)
헤르만 헤세 지음, 배수아 옮김 / 그책 / 2023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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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정신분석학자인 에리히 프롬이 말하길, 사람은 존재의 삶과 소유의 삶 중 한 쪽을 택해서 살아간다고 했다. 쉽게 말해 추상적인 정신세계와 구체적인 현실세계를 뜻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후자여서 나 같은 전자들은 음지로 밀려나게 된단다. 다 각자만의 세상에서 사는 거지 뭘 또. 여하튼 수차례 설명한 바, 나는 과몰입 이상주의자라 현실에 그닥 미련이 없다. 내 비공식 별명이 유니콘인데 이 자리를 빌려 몇 가지 적자면, SNS, 술, 담배, 게임, 도박, 주식, 배달음식, 부동산, 덕질, 커뮤니티를 일절 하지 않는 상위 1%의 대 현자다. 이런 삶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나중에 설명키로 하고, 헤세 작품 중 유독 추천이 많았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읽어보았다. 그런데 얼레, 생각했던 것과 여러 가지로 딴판이어서 두뇌 세팅을 몇 번이고 다시 해야 했던 작품이었다. 이것도 뒤에 가서 설명하겠다.


늘 그렇듯 이번 것도 헤세표 브로맨스 이야기이다. 수도원의 보조교사인 나르치스와 수도원생 골드문트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하지만 영혼이 불안했던 골드문트는 잠깐의 쾌락을 못 이기고 수도원을 떠나버린다. 이후 긴 세월을 유랑하며 만나는 여자마다 사랑을 나누는 픽업 아티스트로 살아간다. 그러다 독일 전역에 역병이 돌고 사망자가 속출하자, 골드문트는 제 영혼의 고향이 바로 저 죽음에 있다고 믿게 된다. 하여 자유를 노래하던 만큼이나 죽음도 신성시하기 시작한다.


<집시 소년의 사춘기, 그리고 페스트>로 제목을 바꿔야 한다. 골드문트의 보헤미안 챌린지로 가득했으니 말이다. 것보다 주제 파악이 영 쉽지 않은 작품이었는데, 헤세가 이것저것 손을 많이 댄 것도 있고, 헤세의 의식과 무의식이 끝도 없어서 아주 그냥 혼쭐이 났다. 일단 헤세의 작품에는 꼭 상반되는 두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중 나는 어느 쪽인지를 헤아려보게 된다. 나는 비교적 나르치스에 가까웠는데 나르치스가 거의 안 나와서 별 하나 깎았다. 거기다가 둘이 아닌 골드문트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비트박스까지 해 넣는 바람에 질려가지고 그만 별 하나 더 깎았다.


나르치스가 철학, 직관, 질서, 정신의 아버지라면, 골드문트는 피, 자연, 감각, 유희의 어머니였다. 한쪽은 무한한 통찰로써, 다른 한쪽은 유한한 경험으로써 세상을 이해하고 세계를 구축했다. 보조교사 나르치스는 골드문트의 성질을 간파하고, 그가 개화하려면 온전한 뿌리를 찾아내야 된다고 지적했다. 골드문트는 어머니의 흐린 기억을 되살리며 망각에서 겨우 벗어난다. 이제 스스로를 구원코자 세상으로 나아간 그는 둘도 없는 플레이보이가 된다. 여자를 가리지 않고 만나던 그의 무의식 속에는 어머니가 있었고, 저도 모르게 스쳐간 여자들을 종합해서 어머니의 형상을 창조하는 중이었다. 또 그러기 위해 모성과 본능에 지배되어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양껏 들이마셔댔다.


골드문트는 죽지 않기 위해 살인을 한다. 두 손에 묻은 피를 보고서야 자신의 방황을 인지하게 된다. 그리고 생각한다. 분열과 모순을 겪고 나야 비로소 꽃피운다는 삶에 대하여. 이렇듯 모든 사상과 이론을 체험하면서 이해했던 골드문트. 진리에 도달하려면, 상실된 신비를 찾으려면, 태초의 어머니인 이브가 필요했다. 그 뮤즈를 만나려던 방랑자는 원초적 감정에 뛰어들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허무와 번민, 고통만이 화답해 주었고, 어떤 때는 쾌락마저 가벼운 스트레스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알전구가 켜진 순간이 있었는데, 극심한 고통 중인 누군가의 얼굴에서 사랑을 나눴던 여자의 표정을 발견한 거였다. 죽음과 생명, 고통과 쾌락은 하나의 뿌리였고, 따라서 지금까지의 방식만으론 이브에게 접근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관능이 주는 자극에는 신비의 한계가 있으니까.


어느 수도원에 있던 조각상을 보고 넋이 나가버린 나그네. 그것은 줄곧 찾았던 신비의 형체였고, 곧바로 제작자를 찾아가 제자의 길을 걷는다. 창조의 행위는 그에게 호흡을 나눠 주었고, 이 예술이야말로 이브의 모성 그 자체였다. 그렇게 재능과 감각이 날마다 약동했으나 영혼의 속삭임을 못 참고 또다시 길을 나선다. 하여간 천재들은 이래서 문제다. 인생의 난이도가 낮은 탓에 세상만사가 시시해 보인다. 살기는 해야겠고 그래서 자극적인 일에 눈을 돌리는 것이다. 결국 골드문트도 관능의 세계로 되돌아간다. 이제는 반쯤 놔버린 생이었지만 꼭 막힐 때마다 나르치스의 가르침이 영혼을 멱살 잡고 흔들어댔다. 이 친구가 만든 유일한 작품이 사도 요한 상인데, 이는 나르치스의 영혼을 본따서 만든 것이다. 자신의 무의식을 나르치스와 공유하여 친구의 정신을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는 시도였을 테지. 오래도록 해답을 못 찾은 걸 보면 내 방식이 틀린 건가 싶었을 테고. 그럼에도 한 우물만 계속 파는 골드문트와, 흔들림 없는 수도사의 길을 걷는 나르치스. 둘 중에 누가 더 독종일까.


그는 세상을 흠모하여 하계로 쫓겨난 천사였다. 페스트로 인해 꺼져가는 생명에게서 두려움의 신비와 삶의 경멸을 느끼고 이 두 가지의 조화를 그려보는 골드문트. 신을 향한 부르짖음마저 끊어져 버린 그때에 나르치스가 등장한다. 그것도 무려 수도원장의 직책을 달고서.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두 사람은 여전했다. 수도원장은 오감으로 정신세계를 받아들인 골드문트를, 그토록 기원했던 친구의 개화를 보고 기뻐하였다. 반대로 자신은 평생 숙제였던 오만함을, 옛 친구의 자유분방함 속에 깃든 생명력을 흡수하여 고침 받는다. 매사에 온몸으로 부딪히고 보는 친구에게는 주변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고, 이 운동에너지와 철학이 조화를 이룰 때에 비로소 신성한 삶이 완성되는 거였다. 이렇듯 헤세의 교훈은 언제나 한결같다. 온전한 자신을 만나려면 금지된 것을 끌어안으라 말한다. 더 쉽게 말하자면 나와 안 맞는다고 해서 꼭 멀리할 필요는 없다는 얘기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10대는 골드문트로 살았고, 20대는 나르치스로 살았었다. 30대인 지금은 머리는 나르치스로, 가슴은 골드문트로 사는 중이다. 이것이야말로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유머와 초연함을 겸비한 물아일체 인생 모드이다. 생각해 보라. 자석의 N극은 S극에만 달라붙고, 같은 N극끼리는 오히려 밀려난다. 나와 다름을 인지하는 것이 균형이고, 인정하는 것이 곧 조화이다. 그 대상이 내가 되었든 타인이 되었든 간에. 반대로 내면이 불안정하면 나오는 몇몇 특징이 있다. 화가 많다거나, 가만있지를 못하거나, 극도로 조용하거나. 최고의 처방전은 역시 독서와 글쓰기이다. 기존에 잘 실천하는 분들의 경우, 평소 안 읽는 분야의 책을 읽어보고, 내 문체와 정반대의 스타일로 글을 써보시라. 이렇게 틀 자체를 깨부수는 연습을 하다보면 어느새 만족도 높은 존재의 삶의 주인이 된다. 이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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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3-06-09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르치스는 INTJ, 골드문트는 ESFP로 보인다. 과연 단 한글자도 겹치지 않는 N극과 S극이다.

다락방 2023-06-09 18:51   좋아요 0 | URL
제가 바로 그 ESFP ..

물감 2023-06-09 18:53   좋아요 0 | URL
어머나...

은오 2023-06-11 07: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감님 그럼 퇴근하고 쉬는 날 뭐해요?!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살 수 있죠.... 그럼 이제 뭐 요리하고 책읽고 글쓰고 또 뭐있지....운동?! 근데 쇠질하는 물감님은 상상이 안됨ㅋㅋㅋㅋ

물감 2023-06-11 23:42   좋아요 1 | URL
집에서는 별거 없긴 해요. 독서랑 홈트랑 웹서핑 정도고요, 가능한대로 약속을 잡아요. 집에 초대도 자주 하고요ㅎㅎㅎ사람 만나고 수다떨기를 넘나 좋아합니다😝

새파랑 2023-06-11 07: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감님의 생활은 21세기판 나르치스군요. 하지만 가슴은 골드문트라니~ 물감님 인기 많으셨을듯!

물감 2023-06-11 23:49   좋아요 1 | URL
저는 페르소나가 백만개 있거든요ㅋㅋㅋ 인기는 없지만 일대일 만남에서는 절대 강자라 자부해봅니다😎
 
인생의 양식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5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이것으로 시리즈 전 권을 다 읽었다. 이 작품이 제일 두꺼워서 마지막에 읽은 건데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다. 여성 심리가 기반인 요 시리즈는 주인공이 전부 여자였는데 이 책만 유일하게 남자가 주인공이다. 그것도 의아했지만 다른 작품들에 비해 주제가 영 선명치 않아서 애 좀 먹었다. 여튼 주인공과 함께 여러 남녀의 서사도 담겨있어 종합선물세트 같았던 작품이다. 무엇보다 스토리가 미쳤고요.


절친 삼인조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음악을 극혐하던 버넌은 억지로 갔던 음악회를 계기로 각성하여 작곡가의 길을 간다. 남사친은 비상한 감각으로 잘나가는 사업가가 된다. 예술인의 고독을 동경하던 여사친은 조각가가 되려 한다. 목표도 성향도 제각각인 세 사람은 각자 인생의 쓴맛을 보면서 우정을 다져나간다. ㅡ 긴 생략 ㅡ 버넌이 오페라 작곡가로 활동하자마자 전쟁이 일어난다. 이후 군에 입대한 버넌의 전사 소식이 들려와 모두를 좌절시킨다. 무엇보다 음악계의 샛별이 사라졌다는 게 쓰디쓴 아픔이었다. 그 이슈가 잠잠해질 때 즈음에 갑자기 뿅 하고 등장해버리는 버넌. 그런데 이 친구,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단다. 기억이 돌아온다 한들 쓰라린 현실의 연장일 터. 그럼에도 다시 천재 음악가로 복원시키는 게 맞는 걸까.


저마다 삶의 톱니바퀴를 움직이는 스위치가 있다. 여사친은 예술가들의 불행 속에서 삶의 기쁨을 발견하곤 했다. 돈도 집안도 없지만 꿈에 대한 갈망이 꾸준한 친구였다. 반대로 부와 능력, 명성까지 다 갖춘 남사친은 자신의 힘이 사회에 보탬이 될 때에 기쁨을 느꼈다. 모든 게 완벽했으나 사랑만큼은 복이 없는 딱한 친구였다. 이들에 비하면 주인공은 이도 저도 아닌 캐릭터였다.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못해 문제가 생길 때마다 외면해버리기 일쑤였다. 그의 성장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은 애정 과잉의 엄마였다. 엄마는 훌륭한 엄마 역할 놀이에 심취에 있었다. 버넌도 그걸 알고서 내적 손절했으나 겉으론 무난하게 지내는 편을 택했다. 이런 식으로 신경 쓰기 싫은 일들을 무시해오다 보니 사회성마저 결여되고 말았다. 심지어 자신도 모르게 엄마의 행동까지 따라 하게 된 버넌이었다.


가뜩이나 사회성 부족한 애가 작곡에 빠져서 더더욱 마이웨이가 된다. 낌새를 느낀 친구들은, 버넌이 늦게라도 기쁨을 찾았다는 이유로 어쩔 수 없이 응원만 했다. 얼마 안 되어 옛 친구를 만나 적극 구애 활동에 들어간 버넌은, 사랑만 있으면 어떤 난관도 이겨낼 거라는 일방적인 신념을 밀어붙인다. 반면 애인은 버넌이 가난을 우습게 여기는 것과, 여자의 마음에 무관심한 태도 때문에 속을 앓는다. 여기서 주변인들의 생각도 반으로 나뉜다. 사랑과 이상만을 고집하는 버넌의 이기심과, 풍요로운 삶을 소망하는 애인의 속물근성. 누가 맞는지는 모르지만 상대에게 동의를 강요하는 버넌의 방식은 그토록 꺼려 했던 엄마한테 물려받은 인생의 양식이었다. 혐오하던 음악을 사랑하게 된 것도 그렇고, 버넌은 성향과 반대되는 모든 것이 삶의 원동력인 셈이었다. 겨우 세상을 살아갈 목적이 생겼으나 동시에 꺼져가는 삶을 살게 된 것이다. 마치 뜨거운 물을 못 느끼고 죽어가는 개구리처럼.


버넌의 시련은 계속된다. 우여곡절 끝에 결혼한 버넌 부부. 그리고 전쟁에서 사망한 버넌 소식을 듣고 재혼한 아내. 근데 하필 연상의 부자와 재혼하여 질타를 받게 된다. 사랑도 물론 중요하지만 대체 가난을 누가 좋아한단 말인가. 오히려 죄책감에 시달리며 사는 그녀가 안쓰럽기만 했다. 그러다 나타난 버넌한테 소용돌이치는 감정과 무방비 상태의 기분을 어찌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이윽고 버넌의 기억이 깨어나 재회하고, 그녀는 다시 버넌에게로 돌아오는데 오히려 난 이 장면에서 욕이 잔뜩 나오더랬다. 그렇게 인격을 되찾은 버넌은 옛 천재성을 잃어버려 좌절했지만 기억을 잃은 동안 행복을 만끽했던 것과, 기억을 잃기 전의 고통스럽던 삶을 떠올리며 앞으로의 기쁨을 조율해나간다. 멀리 돌아오긴 했지만 다 잘 됐구나 싶을 때쯤 관자놀이에 하이킥을 꽂는 애거사 크리스티. 하, 정말 이러기 있습니까요.


보다시피 작중 인물들은 삶을 지탱하는 열정의 재료가 전부 다르다. 그 재료물이 하찮고 보잘것없는 걸 수도 있고, 남들에게 눈총과 비난받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삶이란 내가 나일 수 있게끔 만들어주는 것들을 사랑해야 유지할 수가 있는 법이다. 이건 여러 리뷰에 적었던 말이기도 하다. 내 생각과 일치하고 공명하는 작품을 만났을 때의 기쁨, 이것이 지금 내 인생의 양식이 아닐까 싶다. 먹고 자고 독서 밖에 안 하는데도 질리지가 않는 걸 보면 말이다. 진짜 행복이 별거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하고 친하게 지내시면 다 됩니다. 화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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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6-05 1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분명 읽은 것 같은데 이 리뷰 읽는데 완전 너무 새로워서 지금 제 독서앱을 켜봤거든요? 2015년에 읽었다고 되어 있네요. 허허 그것참. 어쩌면 이렇게 하나도 모르겠죠? 도대체 뭣하러 독서를 하는건지 원.
저도 애거서 크리스티 이 시리즈 좋아했어요. 읽는 족족 팔아버렸는데 이건 모았어도 괜찮았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이 책들 모아두면 예쁘더라고요.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 소설 읽을 때도 느낀거지만, 애거서 크리스티란 사람은 한 명이고 자신만의 인생을 살았을텐데 어떻게 책마다 개성있는 인물들의 전혀 다른 삶의 이야기를 썼을까 신기하고 존경스럽더라고요. 이 책은 재독 찜입니다. 슝~

물감 2023-06-05 11:08   좋아요 0 | URL
ㅋㅋㅋ다락방 님의 글들을 분석해보면요, 읽다가 딱 꽂히는 포인트를 집중적으로 파고드는 타입이시더라고요. 특정 부분에 대한 개인의 감상을 위주로 기록하셔서 기억이 안남는 게 아닐까요 ㅋㅋㅋㅋ 이건 N과 S의 독서방식 차이일 거에요.

이 시리즈 정말 좋죠! 작가가 대체 어떤 삶을 살았을까 싶어요. 인생 몇회차인가 궁금하고요 ㅋㅋㅋㅋ다락방 님의 재독과 리뷰를 기다리겠습니다!
 
패배의 신호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장소미 옮김 / 녹색광선 / 2022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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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를 하다 보면 읽고 있는 책이 나랑 맞는지 아닌지를 금방 알 수 있다. 내 경우는 첫 만남에서 아무런 삘도 받지 못했을 때 칼같이 손절하는 편이다. 그런데 아주 가끔 예외인 경우가 있는데 말하자면 이런 거다. 소개팅에 나온 저 시시껄렁한 상대한테서 알 수 없는 태평함과 여유로움이 막 느껴진단 말이지. 어쩐지 이대로 끝내기엔 뭔가 좀 아쉬워. 그래서 모른척하고 기회를 줘봤더니 과연 내 직감에 딱 적중했지 뭐겠어. 이런 식으로 리스트업 해둔 작가 중 하나가 프랑수아즈 사강이다. 앞전에 읽은 <한 달 후, 일 년 후>가 라이트한 일본 문학에 가까워서 적잖이 실망했더랬다. 헌데 요상하게 문장 곳곳에 뼈가 있어가지고 이건 또 뭐냐 싶어서 한 권 더 읽어봤더니 결과는 대만족쓰. 이번 건 아메리카노가 아니라 에스프레소였어.


<한 달 후, 일 년 후>의 재탕이라 해도 될 만큼 설정이 똑같았다. 사교모임을 즐기는 남녀들의 뺏고 뺏기는 사랑 이야기. 이 책으로 처음 만났다면 별 다섯 개는 거뜬히 주었을 텐데, 아무리 봐도 재탕이어서 별 하나 뺐다. 이번에도 비슷한 류의 인물들이 대거 등장한다. 그중 나이차가 있는 연상의 애인을 둔 남녀가 사교모임에서 눈이 맞는다. 그러나 이들은 유명인의 공식 애인인지라 함부로 행동할 수가 없다. 하여 숨 막히는 비밀 연애를 병행하다 결국 커플이 되어 사교계를 떠난다. 그리고 얼마 못가 현실의 벽에 부딪혀 삐걱대기 시작한다. 부자 애인에게 빨대 꽂았던 생활 방식에 너무도 익숙해져 버린 탓이었다.


<한 달 후, 일 년 후>와 똑같다면서 왜 높은 점수를 줬냐면, 이 책에는 풀이 과정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앞전에 읽었던 건 온통 문제하고 답밖에 없었으니까. 프레임이 자꾸만 끊어지던 그 책에 비하면 이 책은 얼마나 친절하고 상냥한지. 한 가지 더. 이번에는 딱 주인공 두 사람끼리만 스파크가 일어난다. 곁가지가 좀 있긴 한데 거의 둘만의 내용이라서 전개도 깔끔하고 주제도 명확했다. 비교는 이쯤 해두고, 작품을 논하기 전에 문란한 캐릭터를 즐겨 쓰는 저자의 정신세계부터 알아둘 필요가 있다. 술-담배-약물 중독은 기본이요, 스포츠카 사고에 요트 사고, 카지노 죽순이에 도박으로 재산 탕진 등등, 급이 다른 저자의 비행 앞에 전 국민이 떠들썩했더랬다. 사강은 제 기분을 표출함에 있어 몸 사리질 않았으며, 스스로를 파괴하는 일에 굉장히 저돌적인 사람이었다. 또한 허황된 환상보다 날것의 고독을 쫓았다는 걸로도 유명하다. 여하튼 그 불안한 사상과 자유가 도덕적 관념을 깨뜨리는 문학 작품으로 이어지면서, 쉬쉬해오던 사회적 금기사항들을 대중화하는 데에 일조하게 된다. 이렇듯 사강이 꺼림직한 문장을 쓰고도 살아남은 건, 독자들의 은밀한 욕망을 어루만져 준 문화충격 반항아였기 때문이지 싶다. 단짠단짠의 아이콘이랄까.


사강의 캐릭터들은 꼭 하루살이 같다. 내일은 생각지 않고 오늘만을 살아간다. 주인공 두 남녀는 자신들의 썸씽이 사교계에서 어떤 파장을 일으키고 어떤 취급을 받게 될지를 알았으면서도 그저 본능에만 충실한다. 갈수록 양심은 희석되고, 서로를 탐하고 소유하는 데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두 사람. 그래 그렇지, 남이 끓인 라면은 무조건 맛있는 법이거든. 정작 주변인들은 이들의 불장난을 눈치채고도 그저 방관한다. 자신들의 평판이 바닥난 것을 정녕 모르는 건지, 아님 모른 체 하는 건지. 아무튼 본격적인 서민생활과 함께 멘탈이 털린 이들의 코믹 쇼가 펼쳐진다. 돈에는 욕심 없는 남주와, 돈에만 관심 있는 여주는 몇 번의 시행착오로 사랑이 밥 먹여주는 게 아님을 겨우 알게 된다. 여주의 속물근성을 보고도 반했던 남주는 이제 와서 일 안 하고 돈만 밝히는 그녀에게 실망한다. 그리고 고생길 훤한대도 가난한 남주를 택했던 여주는 뻔뻔하게 전 애인을 찾아가 도움을 받는다. 그걸 또 받아주는 전 애인도 참 뭐라 할 말이 없다. 직접 겪어보지 않은 일은 쓰지 않는다던 사강 언니, 대체 어떤 삶을 사셨던 검까...


그렇게 여주는 전 애인에게로 돌아간다. 이별 후에야 비로소 자신한테 확신을 갖게 되는데, 그녀는 단조로운 일상 말고 속물대로 살 때라야 진정으로 행복할 수가 있었다. 손가락질 받을지언정 지금 이 모습이야말로 자신의 본캐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거짓된 삶을 연기하다 튕겨져 나가는 것보단 나을 테지. 저자도 이런 생각으로 자기 파괴적인 마인드를 고집했으리라. 사강을 보고 있으면 1급수에서 살 수 없는 물고기처럼 느껴진다. 근데 또 탁한 물에 사는 물고기가 더 맛있긴 하거든. 그 맛을 잘 아니까 독자들이 계속 사강을 읽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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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5-29 08: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옷 이거 재미있겠는데요? 오오.. 여기요, 150원.

물감 2023-05-29 10:39   좋아요 0 | URL
으잉? 다락방님 사강 책 다 읽으신 줄ㅋㅋㅋ 이책 강추합니다. 재밌어요😎

다락방 2023-05-29 11:02   좋아요 1 | URL
아뇨 저는 한두권 읽고 저 쪽에 밀어둔 작가입니다 ㅋㅋㅋㅋㅋ

물감 2023-05-29 11:15   좋아요 1 | URL
저는 아니 에르노보다 사강에게 한 표 던집니다 ㅋㅋㅋ
(이래놓고 또 실망하면 안되는 데....)

얄라알라 2023-05-29 17:57   좋아요 1 | URL
사강은 알라딘 책덕후분들 사이에서 꾸준히 다시 듣게 되는 존함입니다만
아직 저는 이름 들어본 작가의 영역으로만 남기고 있어 죄송하네요

에스프레소 강도라니!^^ 물감님의 평을, 혹 이 책 올해 안에 읽게 된다면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물감 2023-05-29 18:03   좋아요 1 | URL
왜 저는 사강 보다 에르노를 더 많이 본 것 같죠? 상 타서 그런건가ㅋㅋㅋ 여튼 적당히 자극적이고 좋습니당. 읽어보세요🙂

새파랑 2023-05-29 16: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천원 이었나요? 😑 그래도 별 넷이라니 다행입니다~!!
전 아니에르노 보다 사강입니다~!!

물감 2023-05-29 16:53   좋아요 1 | URL
ㅋㅋㅋ 삼세번의 기회를 주는 작가가 있고 곧바로 손절하는 작가가 있고 그렇습니다.
다행히 사강은 재밌는 작가였어요! 여기도 후에 전작을 읽어볼까 해요 ㅋㅋ
새파랑 님도 아니 여사 보다 사강 언니파!!!!!

얄라알라 2023-05-29 17:57   좋아요 2 | URL
글쵸! 사강하면 새파랑님 자동 떠오릅니다요!

물감 2023-05-29 18:00   좋아요 2 | URL
오 새파랑 님이 그정도였나요? 저한테도 연상되는 작가가 있었으면 좋겠네요ㅎㅎㅎ

새파랑 2023-05-29 18:10   좋아요 1 | URL
앗 ㅋ제가 사강 책을 많이 읽기는 하긴 했는데 그정도는 아닌거 같습니다 ㅡㅡ

coolcat329 2023-05-29 16: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물감님에게 사강이 이런 작가였군요. 모든 리뷰가 재미나지만 이번 글 참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읽었네요.
사강 책은 브람스...만 읽어봤는데 저는 사랑 이야기를 별로 안 좋아하지만 이 책은 기회되면 읽어보고 싶네요~

물감 2023-05-29 16:41   좋아요 2 | URL
전 절대 나쁜 여자 취향이 아닌데 이상하게 끌리는 거 있죠? 신선한 경험이었습니다 ㅋㅋㅋ 저는 달달한 사랑 이야기만 아니면 상관없어요. 인생에 굴곡이 좀 있고 그래야 보는 맛이 있으니깐요. 이 책 강추합니다ㅋㅋ

잠자냥 2023-05-29 22: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강은 읽다보면 질려서(도돌이표 같은 ㅋㅋ) 이제 그만 읽자, 하고 녹생광선에서 나온 책 중 유일하게 안 읽은 게 이 작품인데(심지어 도서관에서 2번이나 빌렸다가 2번 다 그냥 반납) 이 작품까지는 언젠가 읽어야겠군요….

물감 2023-05-29 23:40   좋아요 1 | URL
앗 도돌이표라! 그렇담 연달아 읽는 건 피해야겠네요ㅋㅋㅋ여튼 즐건 독서였습니다😀😀😀

잠자냥 2023-06-08 12: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달의 당선작까지 되었어!

물감 2023-06-08 12:39   좋아요 1 | URL
따란! °_°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