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접하자 이반은 양심이 켕기는 것을 느낀다. 나를 낳아준 아비마저 죽일 수 있는 자유에 맞서, 행동이 아닌 욕망까지도 관장하려는 ‘양심의 자유’가 고개를 들이민다. 그는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 결과 범인이 드미트리라는 억지스러운 확신을 얻는다. 그럼에도 희뿌연 자책은 계속되고 그는 구태여 세 번씩이나 스메르쟈코프를 찾아간다. 사건의 전말이 드러난 순간, 양심의 자유에 따라 모종의 윤리적 행동을 취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찾아온다.
즉, 늦은 시각이지만 당장 예심판사나 관련자를 찾아가 증거물을 내놓고 스메르쟈코프와 자신을 동시에 고발하는 것. 하지만 왠지 그는 그 일을 내일로 미룬다. 왜 이런 유예가 필요했을까. 중요한 것은 스메르쟈코프가 곧 자살할 것임을 예감, 어쩌면 기대했다는 점이다. 그날 밤, 바깥에서 누가 창틀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서 분신-악마가 말하지 않는가. “저건 자네 동생 알료샤가 아주 뜻밖의 흥미진진한 소식을 갖고 온 걸세, 내 장담하지!”(3권, 298쪽)라고.
이튿날 이반은 스메르쟈코프의 호언장담과 자살에 대들기라도 하듯 기어코 법정에 나간다. 하지만 문제의 3천루블까지 내놓아도 아무도 그의 진술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자, 이반이 감내한 수치를 과연 징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적어도 이반의 ‘내 안의 법정’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전날 밤 즉시 자수하지 못한 죄, 즉 유예와 비겁함의 죄까지 떠맡아 완전히 광기의 늪에 빠진다. 이반의 고뇌는 그가 향유한 자유의 용량에 비례한다. 그가 ‘위대한 죄인’인 것은 엄밀히 말해 죄의 크기가 아니라 자유와 양심의 크기의 따른 것이다. 죄 자체보다는 죄의식이 이반을 윤리와 도덕의 극점으로 이끄는 것은 이 때문이다.
(20세기 작가 중 도...키, 아니, 어쩌면 도...키 주인공들의 냄새를 가장 많이 풍기는 작가는 카뮈가 아닐까 합니다. <반항하는 인간>에는 이반, 키릴로프 등에 대한 얘기도 꽤 많이 나왔던 것 같은데요. 비교적 최근에 다시 읽은 <전락>은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이반이 쓴 것 같은 (얄궂은 ㅎㅎ) 느낌을 주더라고요.)
5. 모순을 어찌할 것인가 - 화해
대체로 <카라마조프>는 서로 모순되는 원칙의 대립 위에 구축되었다. 가령, 알료샤 vs. 이반, ‘그’(그리스도) vs. 대심문관(적그리스도), 신 vs. 악마. 물론 작가의 궁극적인 목표는 ‘길 잃은 양’을 ‘신’의 품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좀 더 온건한 표현으론 ‘화해’이다. 이 임무를 맡은 알료샤는 신성의 육화 같은 존재, 혹은 소설 속에 강림한 그리스도이다. 다시 「대심문관」으로 돌아가자.
이반은 「대심문관」을 ‘그’의 키스로 끝맺는다. ‘그’가 대심문관에게 건넨 화해의 몸짓이리라. 단, 대심문관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을 심리적인 차원에서는 받아들일 수 있을지언정 원칙에 있어서의 양보는 있을 수 없다. 특히 용서라면 대심문관의 성격상 더욱더 불가능하다. 제 아무리 신-그리스도일지라도 상대방이 달가워하지도 않는 용서와 구원을 베풀 권리는 없다. “입맞춤은 노인의 가슴속에서 불타오르고 있지만, 그래도 그는 여전히 예전의 이념을 고수하는 거지.”(1권, 554쪽) 이반의 이 말은 그래서 비극적인 것이다.
한편, 「대심문관」의 바깥에서 이반과 알료샤는 대심문관과 ‘그’의 관계를 반복하지만 그 강조점이 전혀 반대이다. 알료샤는 기나긴 이야기를 끝낸 형의 입술에 조용히 입을 맞춘다. 이반은 표절이라고 외치면서도 기쁨을 감추지 않는다. 즉, 이반 역시 동생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원칙과 논리를 철회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대심문과는 달리 화해의 몸짓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어찌 보면 여기에 화해의 전령으로서 알료샤가 갖는 의미가 들어 있는 셈이다.
(러시아 티브이 시리즈 물 <카라마조프>. 최근 것인데 아직 못 봤어요. 누가 누구인지는 보이는데, 이반을 저런 괴상한(??) 얼굴로...ㅠ.ㅠ 스메르쟈코프도 적어도 저 사진만으론 마음에 안 드네요. 좀 더 어두워보여야 하는데...)
실상 이반의 무신론에 맞서는 알료샤의 사상은 정확히 사상이 아니라 삶 그 자체이다. 그는 세계의 부조리와 모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세계와 타자는 또한 그에게 늘 구체적이다. 가령 이반은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반면, 알료샤는 하루 24시간을 항상 발로 뛰어다니며 남을 돕는다. 물론 이 청년에게도 위기가 찾아온다. 조시마 장로가 사망하자 그 시신에서 방향이 아닌 썩는 냄새가 풍긴다. 그렇다면 그는 성자가 아니란 말인가? 사람들이 수군대기 시작한다. 그러나 알료샤는 이 ‘기적’에의 유혹을 극복해낸다. 자연의 법칙에 따라 죽은 사람의 몸에서 썩는 냄새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과 성스러움은 결코 서로 이율배반적인 것이 아니다. 즉, 장로의 시신을 통해 기적이 드러나지 않았을지라도 그것이 장로의 위업이나 신의 전지전능함을 부정할 만한 근거는 되지 못한다.
여기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종교관을 엿볼 수 있다. 기적을 보았기 때문에 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을 믿기 때문에 기적을 본다는 것.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온 알료샤가 꾸는 꿈(갈릴래아의 카나)을 보라. 그것은 깊은 믿음이 불러낸 기적의 표현으로서 이반의 악몽과 현격한 대조를 이룬다. 알료샤의 ‘영성’이 신의 존재를 보는 반면(epiphany) 이반의 ‘이성’은 그 분열적 성격 때문에 악마를 보는 것이다.
(아들 혹은 아들들이 아비를 죽이는 <카라마조프> 연극 공연(준비)과, 어린 아들을 잃은 아비의 감당할 길 없는 '깊은 슬픔'이 극적으로 섞여 있는 영화! 연극이 끝나자 아비는 자살합니다ㅠ.ㅠ )
<카라마조프>의 구성적 축이면서 동시에 ‘감성’의 영역을 대표하는 드미트리 역시 알료샤처럼 세계와 인간의 모순 앞에 경외감을 갖고 고개를 숙인다.
“아름다움이란 정말! 덧붙여 내가 참을 수 없는 건 어떤 사람이, 그것도 고귀한 마음과 드높은 이성을 가진 사람이 마돈나의 이상에서 시작하여 소돔의 이상으로 끝을 맺는다는 거야. 더 끔찍한 것은 영혼 속에 이미 소돔의 이상을 품은 상태에서도 마돈나의 이상을 또한 부정하지 못하여, 그 때문에 죄악을 모르던 젊은 시절처럼 자신의 가슴을 진실로, 진실로 불태운다는 거지. 아니야, 인간이란 넓어, 너무도 넓어, 나는 차라리 축소시켰으면 싶어.”(1권, 228쪽.)
저 고백은 “악마와 신이 싸우는데 그 전쟁터가 바로 사람들의 마음속인 거지.”(1권, 229쪽)라는 말로 끝난다. 실제로 드미트리는 아비 살해의 누명을 씀으로써 온갖 모순을 감내해야 하는 크나큰 시련을 맞이한다. 그 전말을 간략히 보자.
그는 결백을 부르짖지만 즉흥적이고 다혈질적인 성격답게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만 되풀이한다. 그렇게 길고 고된 심문이 끝난 후 잠깐 잠이 들었다가 ‘애기’ 꿈을 꾼다. 아이들의 굶주림에 지독한 연민을 느낀 그는 고통과 죄에 있어서의 연대의식을 넘어서 윤리적 행동을 촉구한다. 심지어, 더 이상 죄 없는 아이들이 가난과 기아에 허덕이는 일이 없도록 그 자신이 ‘십자가’를 지겠다고 외친다. 간단히, 아버지를 죽이지는 않았으나 못된(!) 생각을 품은 죗값을 달게 받아 옥살이를 하겠다는 것이다. 가히 작가로부터 ‘열광자’라는 별명을 얻은 인물다운 발상이다. 하지만 이 착한 형을 알료샤는 다독인다. “형은 준비가 안 돼 있고, 또 그런 십자가는 형을 위한 것이 아니야.”(3권, 528쪽)라고. 실은 드미트리 쪽에서도 짓지도 않은 죄를 감당하는 것이 슬슬 두려워진 터이다. 간수의 하찮은 횡포도 참기 힘든데 유형생활을 어찌 견디랴!
(여러 <카라마조프> 영화 중 드미트리에게 가장 큰 비중이 실렸던 영화는 아무래도 이것! 율브리너가 드미트리 역을 맡았거든요ㅋ)
결국, 드미트리는 알료샤와 이반의 독려를 받아 아메리카로 도주하는 쪽을 선택한다. 이는 어쩔 수 없이 이반의 비극적인 고뇌와 비교된다. 두 형제 모두에게 있어 죄는 욕망 차원의 문제이지만 이반과 달리 드미트리는 죄책감의 굴레를 가뿐히 벗어버린다. 그러나 그의 변덕은 웃긴 만큼이나 상식적이다. 이 대목에서 도스토예프스키 특유의 리얼리즘과 유머가 유달리 빛을 발한다. 온갖 형이상학적 고뇌와 수식어보다 더 중요한 것, 그것이 삶-목숨이기 때문이다. 카라마조프적인 저열함의 힘!
(나름 감동 깊게 봤던 러시아 판 <카라마조프>. 드미트리-이반의 여자들, 그루셴카와 카체리나, 둘 다 캐스팅이 완벽했던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취향상 금발 미녀 보다는 짙은 머리색의 그루셴카 쪽이 더 매력적이었던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