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는 비바람에 쓸린 물건들로 인해 졸지에 쓰레기바다가 됐다. 시큼한 냄새가 빗물을 타고 흘러내렸다. 개 등에 얹힌 장바구니에서는 생선 비린내가 풍겨 나왔다. 하지만 개의 눈에 광채가 나고 빗물에 젖은 털이 곧추 서는 것은 비린내 때문이 아니었다. 아무리 계절을 잊은 세상이라지만, 한여름도 아닌데 태풍이 온다는 것도 말이 안 됐다. 하지만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센 비바람이 <모텔 수>의 간판을 휙 날려버렸다. 간판은 쏜살같이 날아 저쪽 다세대주택의 화분에 가서 꽂혔다. 만개의 조짐을 보였던 분꽃이 순식간에 뭉개져버렸다. 어찌나 원통했는지, 복수를 하려는 듯 그 자리에서 번쩍 빛이 일었고, 그 빛이 곧 번개가 되어 사방으로 번졌다. 하늘에선 또 천둥이 치면서 번개와 조우했다.

 

아줌마, 마법을 써, 제발! 우리 다 날아가겠다!”

소영이는 마녀를 부여잡고 애원했다. 마녀는 장바구니를 개의 배 밑에 매달았다. 그리고 소영이를 한 손으로 거머쥔 채 커다란 개의 등에 훌쩍 올라탔다. 마녀는 모두의 상태를 점검한 뒤, 지휘를 하듯 두 팔을 양옆으로 벌리고 양 손을 약간 떨어뜨렸다. 그 자세로 고개를 정면으로 향한 채 소영이가 알 수 없는 말을 읊어대기 시작했다.

우아, 주문이다! 마법이다!”

소영이는 이 경건한 장면에 완전히 감화되었다.

글쎄, 이건 마법이 아니라니까.”

마녀가 혼잣말처럼 중얼댔다. 하지만 개는 땅바닥에 발이 닿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아름답고 보드라운 털이 바늘처럼 뻗쳤다. 여전히 비바람이 몰아쳤지만 그들은 빗줄기 사이로 바람을 가르며 달려갔다.

 

그들 옆으로 우체부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갔다. 최근의 괴상한 날씨 변동을 의식한 탓에, 비옷도 단단히 차려 입고 있었다. 눈썹까지 덮어버린 커다란 모자에서 빗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이제 그는 집으로 돌아가 집채만한 아들과 함께, 밤톨만한 아내가 해주는 밥을 먹을 것이다. 소영이도 떡붕어 아저씨가 차려주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저녁 식탁을 꿈꾸었다.

 

성문 앞에는 떡붕어 아저씨가 쭈그리고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우아, 아저씨! 대체 어디 갔었어? 마을을 다 뒤졌잖아! 맞아 볼 테야?”

소영이의 채근에 그는 멍한 눈만 멀뚱거렸다. 최근에 살이 너무 많이 쪄버려서, 덩치는 한없이 크고 팔다리는 무척 짧은 큰 곰처럼 보였다. 그 옆에는 흡사 곰을 지키는 듯 문지기가 서 있었다. 그는 땅바닥으로 내려서는 마녀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성탑에 있었던 거야? 문지기 아저씨랑 같이?”

떡붕어 아저씨는 그제야 정신이 드는 모양이었다. 갑자기 마녀 아줌마를 닦달했다.

이런 날씨에 애를. 요새 개 독감이 유행인 거 몰라요?”

그는 며칠 동안 아이를 혼자 방치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은 모양이었다. 아니, 지금껏 하룻밤도 제대로 자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시간이 지났을 줄도 모르고 있었다.

이 개는 건강하니까 걱정 마세요!”

마녀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녀는 소영이를 떡붕어 아저씨에게 넘겨주고서, 개와 고양이를 거느린 채 성 안으로 들어갔다. 문지기는 그녀의 그림자처럼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문지기는 하루 종일 성탑 한 구석에 앉아 있었고, 마녀는 자기 방에 칩거했다. 정녕 서로에게 할 말을 잃은 지 오래였지만 서로를 응시하는 습관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서로의 삶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아량도 여전했다. 이런 적막한 관계를 마녀와 문지기는 은근히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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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카라마조프>의 아이들과 도스토예프스키의 아이들

 

과연 신 없는 유토피아가 가능할까. 이반의 이성은 그 꿈에 젖어 있지만 드미트리의 감성과 알료샤의 영성은 영원히 신의 품 안에 머물고자 한다. 신의 존재를 상정하든 말든 <카라마조프>에서 영원한 삶을 담보해주는 지상낙원의 은유는 아이들이 아닌가 싶다.

 

 

 

 

 

 

 

 

 

 

 

 

 

 

(하나는 내가 번역한 책, 하나는 내가 고등학교 때, 대학교 때 완전 빠져 있던 번역본(옛날 판본을 아직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죠 ^^;), 마지막 하나는 대학원 시절 원문 대조 교열을 본 번역본입니다 ^^;)

 

 

일류샤라는 아이가 그야말로 아무런 이유 없이, 이반의 어법을 빌자면 부조리하게 죽는다. 그리고 그 아이의 무덤 옆에 콜랴 크라소트킨, 스무로프 등 다른 아이들이 모여 있다. 앞서, 이반이 추상적인 아이들의 고통을 근거로 반역을 주장한 것을 상기해보라. 알료샤는 정반대로 구체적인 한 아이 일류샤의 죽음을 근거로 사랑과 용서를 촉구한다. 일류샤의 죽음이 단순한 비극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바로 이 아이들의 존재가 필요하다. 순환논리 같지만, 이들이 살아 있기에 또한 일류샤의 죽음이 유의미하다.

 

마찬가지로 살아남은 카라마조프들은 아비와 이복형 스메르쟈코프의 죄악과 죽음을 대가로 삶을 선사받는 셈이다. 뒤집어 말하면, 아비와 형제의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들들-형제들이 앞으로 아름다운 삶을 일궈나가는 것뿐이다. 요한복음에서 취한 제사가 의미하는 바도 이것이 아닐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복음서 12: 24)

 

작가가 조시마 장로의 입을 빌어 풀어주는 구약의 욥기도 비슷한 전언을 담고 있다. 실상 도스토예프스키가 주목하는 것은 욥의 신실함과 의로움이라기보다는 신의 시험이 종결된 이후 욥이 보이는 반응이다. 성경 속의 욥과 달리 <카라마조프> 속의 욥은 심히 고뇌하며 반문한다. 예전의 아들딸들을 영원토록 잃어버린 상황에서 과연 새 아들딸들과 더불어 행복할 수 있을까, 아니 그래도 될까, 하고. 이에 대해 작가는 해묵은 슬픔을 대체할 온화한 기쁨에 대해, 삶의 위대한 비밀에 대해 얘기한다. 음울한 과거를 잊고 이 순간의 삶을 즐기며 밝은 미래를 꿈꿀 것. 이것이야말로 작가가 생각한 진정한 구원과 부활의 실체이다. 이제 작품의 맨 앞으로 돌아가자.

 

(도..키의 두 번째 아내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작가보다 스물 네 살이 어렸습니다. 미인은 아니지만, 심지어 러시아 여자치고는 좀 빠지는 얼굴이지만, 야무지고 당차 보이죠? ^^)

 

도스토예프스키는 환갑을 코앞에 두고 완성한 대작 <카라마조프>를 아내에게 헌정했다. 실제로 안나 그리고리예브나는 첫 부인과 사별한 25세 연상의 남자 곁에 머물며 14년 동안 알뜰한 살림꾼이자 뛰어난 조력자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른바 가정의 행복을 누리며 도스토예프스키는 <작가 일기>의 다음호를 준비하고 <카라마조프>2부를 구상했다. 건강이 악화되긴 했으나 그럼에도 그는 아직 죽을 생각까지는(!) 없었던 것 같다. 역시나 그럼에도 죽음은 그 나름의 원칙대로 그를 찾아왔고, 그는 폐동맥 파열로 이듬해 1월 세상을 떠났다. 그때 그의 딸 류보비는 열두 살, 아들 표도르는 열 살이었다.

 

(그녀가 남긴 회고록은 도..키 연구에 큰 도움을 주는 책입니다. 소설가의 아내가 되지 않았다면 수필가(^^;)가 되었을 법한 평이하고 균형 감각 있는 문체가 돋보입니다.) 

 

<카라마조프>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여우같은 아내, ‘토끼같은 두 아이와 더불어 인생의 절정을 구가하며 쓴 소설이다. 그 무렵 간질병 발작으로 사망한 막내아들 알료샤에 대한 피 끓는 애도의 감정도 자연스레 작품 속에 스며들었다. ,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니라 인간 도스토예프스키를 잠시 떠올려 보자. 임종의 침상에서 겸허히 죽음을 받아들이며 그가 가장 애달파 한 것은 물론, 두 아이와의 영원한 이별이었을 것이다. <카라마조프>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곧 그의 아이들이다. 그리고 이 소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고백록이자 그의 아이들, 그들이 살아갈 미래의 세계 앞에 바치는 유언서이다.

(-- 끝)

 

안나, 딸 류보비, 아들 표도르입니다. 놀랍게도(^^;), 처음 보는 사진입니다. 류보비는 훗날 (삼류) 작가가 되는데, 편파적이기로 유명한(특히 도..키의 첫 부인에 대한 '모함') 회고록을 남깁니다. 간질병은 유전이 돼도 천재성은 유전이 안 되나 봅니다...-_-;; 톨스토이 집안에서는 계속 나름대로 걸출한 인물들이 나오는데(그래서 인물 사전에서 '톨스토이' 항목은 항상 긴데) 도...키 집안은 앞뒤로 다  그 도..키 밖에 없으니...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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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01-11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만큼 '인간의 본성'을 속속들이 저 밑바닥 끝까지 파고 내려가는 작품도 드물지 싶어요. '음울한 과거를 잊고 이 순간의 삶을 즐기며 밝은 미래를 꿈꿀 것. 이것이야말로 작가가 생각한 진정한 구원과 부활의 실체'라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그리고 작가의 가족을 둘러싼 흥미로운 얘기도 잘 들었습니다. 늙은 작가에겐 '아이들'만이 희망이겠죠.
* * *
지나가는 바람이 일으킨 먼지의 소용돌이처럼 생명체들은 생명의 커다란 숨결에 매달려 회전하고 있다. 따라서 그것들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며 부동성을 너무도 잘 가장하여 우리는 그것들을 과정이라기보다는 사물로 취급한다. 우리는 그것들의 형태의 항구성조차도 한 운동의 윤곽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잊고 있다. 그러나 때때로는 생명체들을 실어 나르는 보이지 않는 숨결은 희미한 출현 속에서 우리 눈에 구체화되기도 한다. 우리는 특정한 형태의 모성애 앞에서 이러한 갑작스런 광명을 접하게 되는데, 모성애는 대부분의 동물들에서 너무나 현저하고 감동적이며 종자를 염려하는 식물에서까지도 관찰된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사랑에서 생명의 신비를 보기도 하는데 그것은 아마 우리에게 생명의 비밀을 건네줄지도 모른다. 그것은 각 세대가 자신을 뒤따르는 다음 세대에 기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로부터 우리는 생명체가 무엇보다도 경과의 장소이며 생명의 본질은 그것을 전달하는 운동 속에 있다는 사실을 엿보게 될 것이다. - 앙리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中에서

푸른괭이 2013-01-11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만이 희망인 건 '젊은' 작가도 마찬가지일 것 같아요 ^^;;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접하자 이반은 양심이 켕기는 것을 느낀다. 나를 낳아준 아비마저 죽일 수 있는 자유에 맞서, 행동이 아닌 욕망까지도 관장하려는 양심의 자유가 고개를 들이민다. 그는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 결과 범인이 드미트리라는 억지스러운 확신을 얻는다. 그럼에도 희뿌연 자책은 계속되고 그는 구태여 세 번씩이나 스메르쟈코프를 찾아간다. 사건의 전말이 드러난 순간, 양심의 자유에 따라 모종의 윤리적 행동을 취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찾아온다.

 

, 늦은 시각이지만 당장 예심판사나 관련자를 찾아가 증거물을 내놓고 스메르쟈코프와 자신을 동시에 고발하는 것. 하지만 왠지 그는 그 일을 내일로 미룬다. 왜 이런 유예가 필요했을까. 중요한 것은 스메르쟈코프가 곧 자살할 것임을 예감, 어쩌면 기대했다는 점이다. 그날 밤, 바깥에서 누가 창틀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서 분신-악마가 말하지 않는가. “저건 자네 동생 알료샤가 아주 뜻밖의 흥미진진한 소식을 갖고 온 걸세, 내 장담하지!”(3, 298)라고.

 

이튿날 이반은 스메르쟈코프의 호언장담과 자살에 대들기라도 하듯 기어코 법정에 나간다. 하지만 문제의 3천루블까지 내놓아도 아무도 그의 진술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 이반이 감내한 수치를 과연 징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적어도 이반의 내 안의 법정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전날 밤 즉시 자수하지 못한 죄, 즉 유예와 비겁함의 죄까지 떠맡아 완전히 광기의 늪에 빠진다. 이반의 고뇌는 그가 향유한 자유의 용량에 비례한다. 그가 위대한 죄인인 것은 엄밀히 말해 죄의 크기가 아니라 자유와 양심의 크기의 따른 것이다. 죄 자체보다는 죄의식이 이반을 윤리와 도덕의 극점으로 이끄는 것은 이 때문이다.

 

 

 

 

 

 

 

 

 

(20세기 작가 중 도...키, 아니, 어쩌면 도...키 주인공들의 냄새를 가장 많이 풍기는 작가는 카뮈가 아닐까 합니다. <반항하는 인간>에는 이반, 키릴로프 등에 대한 얘기도 꽤 많이 나왔던 것 같은데요. 비교적 최근에 다시 읽은 <전락>은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이반이 쓴 것 같은 (얄궂은 ㅎㅎ) 느낌을 주더라고요.) 

 

5. 모순을 어찌할 것인가 - 화해

 

대체로 <카라마조프>는 서로 모순되는 원칙의 대립 위에 구축되었다. 가령, 알료샤 vs. 이반, ‘’(그리스도) vs. 대심문관(적그리스도), vs. 악마. 물론 작가의 궁극적인 목표는 길 잃은 양의 품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좀 더 온건한 표현으론 화해이다. 이 임무를 맡은 알료샤는 신성의 육화 같은 존재, 혹은 소설 속에 강림한 그리스도이다. 다시 대심문관으로 돌아가자.

 

이반은 대심문관의 키스로 끝맺는다. ‘가 대심문관에게 건넨 화해의 몸짓이리라. , 대심문관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을 심리적인 차원에서는 받아들일 수 있을지언정 원칙에 있어서의 양보는 있을 수 없다. 특히 용서라면 대심문관의 성격상 더욱더 불가능하다. 제 아무리 신-그리스도일지라도 상대방이 달가워하지도 않는 용서와 구원을 베풀 권리는 없다.입맞춤은 노인의 가슴속에서 불타오르고 있지만, 그래도 그는 여전히 예전의 이념을 고수하는 거지.”(1, 554) 이반의 이 말은 그래서 비극적인 것이다.

 

한편, 대심문관의 바깥에서 이반과 알료샤는 대심문관과 의 관계를 반복하지만 그 강조점이 전혀 반대이다. 알료샤는 기나긴 이야기를 끝낸 형의 입술에 조용히 입을 맞춘다. 이반은 표절이라고 외치면서도 기쁨을 감추지 않는다. , 이반 역시 동생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원칙과 논리를 철회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대심문과는 달리 화해의 몸짓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어찌 보면 여기에 화해의 전령으로서 알료샤가 갖는 의미가 들어 있는 셈이다.

 

(러시아 티브이 시리즈 물 <카라마조프>. 최근 것인데 아직 못 봤어요. 누가 누구인지는 보이는데, 이반을 저런 괴상한(??) 얼굴로...ㅠ.ㅠ 스메르쟈코프도 적어도 저 사진만으론 마음에 안 드네요. 좀 더 어두워보여야 하는데...)

 

실상 이반의 무신론에 맞서는 알료샤의 사상은 정확히 사상이 아니라 삶 그 자체이다. 그는 세계의 부조리와 모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세계와 타자는 또한 그에게 늘 구체적이다. 가령 이반은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반면, 알료샤는 하루 24시간을 항상 발로 뛰어다니며 남을 돕는다. 물론 이 청년에게도 위기가 찾아온다. 조시마 장로가 사망하자 그 시신에서 방향이 아닌 썩는 냄새가 풍긴다. 그렇다면 그는 성자가 아니란 말인가? 사람들이 수군대기 시작한다. 그러나 알료샤는 이 기적에의 유혹을 극복해낸다. 자연의 법칙에 따라 죽은 사람의 몸에서 썩는 냄새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과 성스러움은 결코 서로 이율배반적인 것이 아니다. , 장로의 시신을 통해 기적이 드러나지 않았을지라도 그것이 장로의 위업이나 신의 전지전능함을 부정할 만한 근거는 되지 못한다.

 

여기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종교관을 엿볼 수 있다. 기적을 보았기 때문에 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을 믿기 때문에 기적을 본다는 것.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온 알료샤가 꾸는 꿈(갈릴래아의 카나)을 보라. 그것은 깊은 믿음이 불러낸 기적의 표현으로서 이반의 악몽과 현격한 대조를 이룬다. 알료샤의 영성이 신의 존재를 보는 반면(epiphany) 이반의 이성은 그 분열적 성격 때문에 악마를 보는 것이다.

(아들 혹은 아들들이 아비를 죽이는 <카라마조프> 연극 공연(준비)과, 어린 아들을 잃은 아비의 감당할 길 없는 '깊은 슬픔'이  극적으로 섞여 있는 영화! 연극이 끝나자 아비는 자살합니다ㅠ.ㅠ )

 

<카라마조프>의 구성적 축이면서 동시에 감성의 영역을 대표하는 드미트리 역시 알료샤처럼 세계와 인간의 모순 앞에 경외감을 갖고 고개를 숙인다.

 

아름다움이란 정말! 덧붙여 내가 참을 수 없는 건 어떤 사람이, 그것도 고귀한 마음과 드높은 이성을 가진 사람이 마돈나의 이상에서 시작하여 소돔의 이상으로 끝을 맺는다는 거야. 더 끔찍한 것은 영혼 속에 이미 소돔의 이상을 품은 상태에서도 마돈나의 이상을 또한 부정하지 못하여, 그 때문에 죄악을 모르던 젊은 시절처럼 자신의 가슴을 진실로, 진실로 불태운다는 거지. 아니야, 인간이란 넓어, 너무도 넓어, 나는 차라리 축소시켰으면 싶어.”(1, 228.)

 

저 고백은 악마와 신이 싸우는데 그 전쟁터가 바로 사람들의 마음속인 거지.”(1, 229)라는 말로 끝난다. 실제로 드미트리는 아비 살해의 누명을 씀으로써 온갖 모순을 감내해야 하는 크나큰 시련을 맞이한다. 그 전말을 간략히 보자.

 

그는 결백을 부르짖지만 즉흥적이고 다혈질적인 성격답게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만 되풀이한다. 그렇게 길고 고된 심문이 끝난 후 잠깐 잠이 들었다가 애기꿈을 꾼다. 아이들의 굶주림에 지독한 연민을 느낀 그는 고통과 죄에 있어서의 연대의식을 넘어서 윤리적 행동을 촉구한다. 심지어, 더 이상 죄 없는 아이들이 가난과 기아에 허덕이는 일이 없도록 그 자신이 십자가를 지겠다고 외친다. 간단히, 아버지를 죽이지는 않았으나 못된(!) 생각을 품은 죗값을 달게 받아 옥살이를 하겠다는 것이다. 가히 작가로부터 열광자라는 별명을 얻은 인물다운 발상이다. 하지만 이 착한 형을 알료샤는 다독인다. “형은 준비가 안 돼 있고, 또 그런 십자가는 형을 위한 것이 아니야.”(3, 528)라고. 실은 드미트리 쪽에서도 짓지도 않은 죄를 감당하는 것이 슬슬 두려워진 터이다. 간수의 하찮은 횡포도 참기 힘든데 유형생활을 어찌 견디랴!

(여러 <카라마조프> 영화 중 드미트리에게 가장 큰 비중이 실렸던 영화는 아무래도 이것! 율브리너가 드미트리 역을 맡았거든요ㅋ) 

 

결국, 드미트리는 알료샤와 이반의 독려를 받아 아메리카로 도주하는 쪽을 선택한다. 이는 어쩔 수 없이 이반의 비극적인 고뇌와 비교된다. 두 형제 모두에게 있어 죄는 욕망 차원의 문제이지만 이반과 달리 드미트리는 죄책감의 굴레를 가뿐히 벗어버린다. 그러나 그의 변덕은 웃긴 만큼이나 상식적이다. 이 대목에서 도스토예프스키 특유의 리얼리즘과 유머가 유달리 빛을 발한다. 온갖 형이상학적 고뇌와 수식어보다 더 중요한 것, 그것이 삶-목숨이기 때문이다카라마조프적인 저열함의 힘!

 

 

(나름 감동 깊게 봤던 러시아 판 <카라마조프>. 드미트리-이반의 여자들, 그루셴카와 카체리나, 둘 다 캐스팅이 완벽했던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취향상 금발 미녀 보다는 짙은 머리색의 그루셴카 쪽이 더 매력적이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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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신 없는 유토피아 - 이반 카라마조프와 대심문관

 

도스토예프스키는 창작 노트에 이반을 무신론자라고 정의했다. 소설 속에 자주 나온 표현을 정리해보자. “인간의 마음속에서 불멸에 대한 믿음을 제거한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반은 알료샤를 앞에 두고 반문한다. 신이 전지전능하다면 왜 세계에 악이 존재할까? 인간이 신의 닮은꼴로 창조되었다면 왜 악행을 저지르는 것일까? 이 부조리함 속에 뭔가 대단히 고매한 목적이라도 있는 것일까? 설령 그럴 지라도 나의 유클리드적’, 3차원적 지성으론 이해할 수도 없으며 또 그러고 싶지도 않다, 라고 이반은 말한다. 여기서 그의 유명한 테제가 나온다. “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가 창조한 세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어린아이의 고통을 예로 들어가며 역설한다. 신이 의도한 조화의 왕국을 만들기 위해 어린아이마저도 희생해야 한다면 그 비싼 입장료를 감당할 수 없다, 따라서 그 입장권을 양심에 따라 정중히 반납한다, 라고. 알료샤의 말대로 반역이다. 신에 대한 반역, 즉 이반의 무신론의 궁극적인 목표는 신 없는 유토피아건설이다. 대심문관을 보자.

 

 

 

 

 

 

 

 

 

 

 

에스파냐의 세빌리아, 종교재판이 한창 기승을 부리던 15세기말, ‘가 나타난다. 대심문관은 민중을 사로잡은 를 곧바로 체포한다. 이어 밤이 되자 남루한 수도복을 입은 대심문관이 감옥을 찾아온다. 대심문관의 기나긴 고백의 내용은 실상, 복음서에 묘사된 그리스도의 유혹을 다시 풀어쓰는 것이다. 악마가 황야에서 수행 중인 그리스도에게 세 가지 제안을 연거푸 내놓는다. 돌을 빵으로 바꿔라, 절벽에서 뛰어내려라, 내 앞에 경배하라 등. 대심문관은 그것을 각각 기적과 신비와 권위에의 유혹으로 풀이한다. 어떻든 그리스도가 당당히 물리쳤던 저 유혹을 대심문관은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바탕 위에 자기만의 유토피아를 건설한다 

(<대심문관> 공연 장면 중. 연극을 안 봤으나, 일인극으로 연출해도 좋을 것 같아요. '그'는 아무래도 대심문관의 '판타지'일 수 있으니까요.)

 

대심문관의 논리의 핵심은 인간의 본성을 둘러싼, 빵과 자유의 역학 관계에 있다. 인간이란 본디 그리스도의 믿음과는 달리 너무도 나약하게 창조되었기 때문에 자유를 감당할 능력이 없다, 따라서 자유라는 짐을 덜어주고 빵을 제공함으로써 오히려 인간을 행복하게 해준다, 라는 것. 대심문관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을 받아들였다면, 너는 개개의 인간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의 총체적이고 영구적인 우수에 대한 해답을 함께 줄 수 있었을 것이니 그건 다름 아니라 누구 앞에 경배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하지만 인간이 찾는 그 대상이란() 너무도 확실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일시에 만장일치로 그 앞에 함께 경배할 수 있어야만 되는 것이다. 이는 이 가련한 피조물들은 나나 다른 사람이 경배할 수 있는 대상을 찾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를 믿고 그 앞에 경배할 수 있는, 반드시 모든 사람이 함께경배할 수 있는 그런 존재를 찾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기 때문이지. , 바로, 경배를 하긴 하되 공동으로해야 한다는 요구야말로 인간 개개인이 개별적으로건 인류 전체로건 태초부터 골머리를 앓아온 주된 문제인 것이다.(1535쪽.)

 

이것이 신 없이 건설된 유토피아의 실체이다. 여기서 우리가 파시즘과 나치즘의 전조를 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실제 역사 속의 대심문관이 많은 경우 세속적 권력에 눈이 먼, 극도로 부패한 가톨릭 위정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반의 대심문관은 극히 예외적인 존재인 것이다. 그는 인류를 구원하려는 열망에 사로잡혀, 또 저 선택받은 자의 대열에 합류하기 위해 그리스도처럼 황야에서 풀뿌리와 메뚜기로 연명하며 수도 생활을 했다. 그랬던 그가 신이 아닌 악마의 원칙을 받아들여 유토피아 혹은 반()유토피아를 만든 까닭은 무엇인가. 바로 무덤 뒤엔 아무 것도 없다는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글라주노프가 그린 대심문관과 '그'. 이 양반의 삽화들을 많이 좋아하진 않지만, 대심문관이 무척 처량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신도, 불멸도, 저 세계도 없다면 결국 양떼(우매한 중생)에게 필요한 것은 지상의 양식인 빵과 우상(경배의 대상) 밖에 없다. 이 도저한 허무주의가 인간을 향한 무한한 사랑과 경멸의 복합작용에서 비롯됐다니, 실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한데 그의 유토피아는 존재하지도 않는 신(그림자 신)을 기치를 내걸고 있다. 그는 민중의 행복을 위해 오직 자기 혼자만 이 거대한 기만의 고통을 감수하면 된다고 말한다. 이 역시 대심문관의 오만한 선민의식을 보여주는 셈이다. 어떻든 이반의 이론적 극단인 이 분신은 일종의 악마이되 매혹적인 카리스마를 자랑한다. 인간의 본성과 맹점, 정치와 종교의 본질을 대심문관만큼 날카롭게 꿰뚫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반의 무신론이 실제 현실에서는 어떤 모습을 띠게 될까.

 

4. 과연 모든 것이 허용되는가? - 아비를 죽일 수도 있는 자유

 

작가는 이반에게 모든 것이 허용된다라는 도발적인 사상과 함께 무한한 자유를 선사했다. 다소 과격하게 말해, 나를 낳아준 아비를 죽일 수도 있는 자유, 바로 그것이다. 이론의 극단에서 신을 죽이고 신 없이 자기만의 왕국을 만든 이반이지만, 정작 아비가 살해되자 당황한다. 문제의 3천 루블을 내놓으며 스메르쟈코프는 반쯤은 씁쓸하게, 반쯤은 의기양양하게 말한다. 하인이자 제자이며 분신인 스메르쟈코프가 주인이자 스승이자 원상인 이반을 압도하는 섬뜩한 순간이다.

 

그때만 해도 도련님은 줄곧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자기 입으로 말씀하시더니, 이제 와선 왜 그렇게 불안에 떨고 계신 거죠, 정작 도련님 자신이 말입죠?”(3, 259)

 

이반이 무신론적 원칙하에 품었던 기대의 권리란 무엇인가. 실상 법률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에게 어떤 죄를 묻기는 상당히 힘들다. 구태여 지적하자면 부작위의 죄 혹은 미필적 고의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반 스스로 세운 내 안의 법정의 논리는 전혀 다르다. 이런 식이다. 형과 아버지 사이에 모종의 비극이 생길 것임을 예감하고 심지어 그러길 기대했다(“한 마리의 독사가 다른 한 마리의 독사를 잡아먹을 거야, 두 놈 다 그 길 밖에 없어!” 1, 296). 그 기대에 스메르쟈코프가 은근슬쩍 개입했음을 알면서도 적극적인 수단을 취하기는커녕 오히려 무책임하게 집을 떠나버렸다. 말하자면 이반은 자신의 욕망과 욕망할 수 있는 자유 때문에 죄인이 된다.

(계속...)

 

-- 이반-대심문관(나아가 도스토예프스키?)의 모델은 그리스도였던 셈인데요, 애초 <카라마조프...> 표지로 쓰고 싶었던 이미지입니다. 크람스코이의 <황야의 그리스도>! 진짜 먹을 거라곤 풀뿌리와 메뚜기뿐일 듯, 그나마도 거의 없을 듯합니다...ㅠ.ㅠ '빵' 유혹 거절하기가 진짜 힘들었을 듯...ㅠ.ㅠ  

 

 

 --  이 그림의 20세기(21세기?)판처럼 보이는 현대 작가(코스니체프)의 <수도사>. 울룩불룩한 손과 빨간 책, 즉 성경이 잘린 채로 <죄와 벌> 표지가 됐죠? ㅎㅎ 아무나 소화할 수 없는 1:1 가르마, 수세미 같은 머리결 때문에 좀 반대했었는데요 ㅋㅋ 라스콜니코프의 이미지와 겹쳐지는 측면이 물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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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01-05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 없는 유토피아'에 대한 탐구가 이 소설의 전편을 흐르는 가장 강력한 주제라는 점에서도 이 책이 불멸의 고전이 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신을 믿지 않는 과학자'가 쓴 어느 책에서도 '신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혜안'에 놀라워 하더군요. 그 책의 주제가 하필이면 '신 없는 유토피아는 가능하다'였기 때문에 까라마조프 형제들이 자연스레 등장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도 듭니다.
* * *
수감중인 드미트리 카라마조프가 그를 방문했던 학자에게서 방금 배운 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누가 그의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중략)
알료샤, 이 과학이란 건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내가 이해하기로는 새로운 인간의 출현일세. ...... 하지만 슬프게도 신을 잃게 되지 않는가!

도스토예프스키의 혜안은 정말 놀랍다. 1880년은 신경 기능의 기초만이 밝혀진 때여서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모든 경험이 떨리는 신경 꼬리에서 발생한다고 믿기 힘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뇌의 정보 처리 활동이 마음의 원인이라고 말하거나, 혹은 그것이 바로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느 경우든 간에 정신 활동의 모든 양상이 뇌 조직 속에서 일어나는 심리적 사건들에 전적으로 좌우된다는 증거는 압도적으로 분명하다.(88쪽)
- 스티븐 핑커,『빈서판』 中에서
 

*

 

떡붕어 아저씨는 T시를 완전히 버렸다. 하지만 그건 그만의 착각이었고 실은 해고당한 것이었다.

이참에 떡붕어 아저씨는 오랫동안 꿈꾸었던 놀고먹는 삶을 마음껏 탐닉했다. 한 번 낚시를 나가면 몇 박 몇 칠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올 때는 주로 빈손이었다. 낚시도 하지 않을 때는 만화방에 둥지를 틀었다. 매캐한 담배 연기와 책장 곳곳까지 밴 담배냄새, 공기에 스민 눅눅한 곰팡내가 떡붕어 아저씨 몸의 톱밥 냄새를 조금씩 지워버렸다. 피시방 컴퓨터 앞에서도 대단한 집중력을 발휘하며 오락에 몰입했다.

 

각종 아이템은 금괴와 동일시됐고 그 자신은 그가 조종하는 캐릭터와 한 몸이 됐다. 컵라면 용기가 차곡차곡 쌓이고 재떨이가 꽁초로 가득 찼다. 용을 무찔러 성을 탈환하려면 목구멍과 폐를 온통 니코틴과 타르로 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식이었다. 그 무렵 그가 가장 존경한 사람은 일주일 내내 식음을 전폐하고 잠도 자는 둥 마는 둥 오락만 하다가 조용히, 영원히 깊은 잠에 빠지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 옆에 앉아 있던 사람이 그런 식으로 마지막 숨을 내쉬었을 때는 지하 피시방의 음습한 공기로부터 자기를 보호하려는 듯 얼른 내빼버렸다. 그 뒤로 그는 방에 칩거해버렸다.

 

소영이가 책가방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어라, 오늘도 안 나갔어?”

떡붕어 아저씨는 슬슬 몸을 일으켰다. 사지를 추스르는 것조차 귀찮다는 투였다. 하품을 쩍쩍 했지만 그 하품마저도 성가신 것 같았다.

아저씨, 나 아저씨 이렇게 사는 거 정말 싫거든! 아저씨 세수도 안 했지? 양치질은? 뭐야, 정말?! 이빨 닦는 법 몰라? 내가 가르쳐줘, ?”

소영이는 잔소리 많은 마누라처럼 바가지를 긁었다. 떡붕어 아저씨는 천천히 일어나 방을 나갔다. 그 뒤로 그는 집에 오지 않았다.

 

열흘 정도가 지났을 때 소영이는 마녀를 찾아갔다. 호랑이를 닮은 커다란 개가 집 앞을 지키고 있었다. 마녀는 겉옷을 걸치고 나왔다. 이상하게도 그녀의 가슴이 부풀어 있고 배가 불룩 솟아난 것 같았다. 소영이는 그녀의 뱃속에 새로운 고양이가 생겨났다고 생각했다.

언제 태어나, 그 고양이는?”

그게 무슨 소리야?”

에이, 시치미 떼지 마. 아줌마 배 말이야!”

어라, 이건 그냥 똥배야.”

에이, 무슨 똥배가 그렇게 커? 뱃속에 커다란 혹이 생긴 것 같은데?”

설마?”

아줌마, 아저씨가 사라졌어. 찾으러 가야겠어. 같이 가줄래?”

마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고양이 얼굴을 한 커다란 개가 몸을 일으켰다. 오랫동안 한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기 때문에 다리에 쥐가 나는 모양이었다. 개는 덩치에 맞지 않게, 참 품위 없게 네 다리를 비틀며 제 자리에서 준비운동을 했다. 달릴 준비가 된 개는 소영이를 등에 태웠다. 소영이는 의아해하며 마녀를 올려다보았다. 마녀는 개의 꼬리를 살짝 잡아당기며 개를 몰았다.

 

마녀와 소영이는 명동이 즐비한 동네를 구석구석 다 돌았다. 어디에서도 떡붕어 아저씨는 찾을 수 없었다. 지친 그들이 <장보고 명동>을 지나칠 때는 이미 날이 어둑어둑했다. 마녀는 장이나 봐야겠다며 슈퍼마켓 안으로 들어갔다. 졸지에 개의 등은 장바구니로 가득 찼다. 그들 일행은 두부 공장 옆을 지나갔다. 삶은 콩과 막 쪄낸 두부 냄새가 코를 찔렀다. 공장 앞의 개는 몰려드는 길 고양이들을 향해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여차하면 당장 달려들 기세였다.

 

낡은 다세대 주택들이 두부 공장과 벽을 맞대고 있었다. 수십 년 동안 수리를 하지 않은 건물 벽에는 쇳물과 땟물이 화석처럼, 돌무늬처럼 새겨져 있었다. 손바닥만 한 창문 너머로 누추하고 번잡한 세간들이 보였다. 현관문은 대개 다 열려 있었다. 마당 한구석에는 장독들이 있었고, 벽을 따라 화분대용으로 쓰는 두툼한 물통이 보였다. 그곳에도 자잘한 모종들이 삐죽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성질이 급한 풀들은 벌써 꽃을 활짝 피웠다. 저녁 식사 시간을 앞두고 아이들은 마당을 이리저리 오가며 뛰어놀았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이곳을 벗어나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다. 불과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부터 모텔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모텔은 해가 떨어지길 기다렸다는 듯 이른 저녁부터 화려한 불꽃을 피웠다.

 

어라, 빗방울 떨어진다!”

어스름이 내린 시멘트 길을 걷고 있던 소영이가 위를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호텔 바이올렛>, <호텔 수>, <목화장> 등을 막 지나왔을 때였다. 그리로 향하던 늙은 연인들은 깜짝 놀라며 부질없이 고개를, 몸을 숙이며 걸음을 재촉했다.

아참, 아줌마 마녀잖아? 우산 좀 만들어 봐, ?”

마법은 그런 때 쓰라고 있는 게 아니야.”

 

그러고도 마녀는 뭐라고 더 말을 했지만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가랑비인가 싶었는데 빗줄기가 금세 굵어진 탓이었다. 몇 걸음도 떼지 않아 우박이 떨어지고 천둥번개가 쳤다. 첫 번째 천둥에 소영이는 비명을 지르며 마녀의 팔을 꼭 붙들었다. 두 번째 천둥이 치자, 더욱이 번개마저 번쩍하며 세상이 순식간에 밝아졌다가 어두워지자, 소리 내어 엉엉 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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