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으로 돌아온 떡붕어 아저씨는 풀썩 쓰러졌다. 몇날며칠 동안 열이 펄펄 나고 살갗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반쯤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계속 헛소리를 하고 조금씩 정신이 들 때마다 숨이 끊어질 것처럼 불안하게 기침을 해댔다. 눈을 감은 상태로 몸을 반쯤 일으켜서는 정신없이 토사물을 게워내기도 했다. 개 독감이었다. 소영이는 학교도 가지 못하고 떡붕어 아저씨의 곁을 지키다가 결국 마녀를 찾아갔다.

 

마녀와 문지기는 의사를 불렀다. 무자비한 도시화와 산업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살아남은, 무릎이 귀를 덮을 정도로 늙은 시골의사였다. 그는 자기만큼 늙은 누렁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왔다. 이 형편없는 시골의사는 떡붕어 아저씨의 환부(이건 몸 전체였는데)를 보는 둥 마는 둥 하다가 그의 오른쪽 엉덩이 한가운데에 활짝 핀 붉은 꽃처럼 열려 있는 선연한 상처를 발견했다. 거기서는 수십 마리의 구더기가 꿈틀대고 있었다.

 

시골의사는 이제야 답을 알았다는 듯 근엄하게 입을 뗐다.

죽을병이오. 그냥 죽게 내버려둬요.”

이 말에, 지금껏 의식을 잃었던 떡붕어 아저씨가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키며 외쳤다.

안 돼! 난 살고 싶어! 나를 구해줘요!”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최후의 유언을 내뱉은 뒤 떡붕어 아저씨는 다시 자리에 털썩 드러누웠다. 순식간에 의식이 꺼졌지만, 그 무뚝뚝하고 음울한 얼굴에는 단말마의 고통을 반영하는 것 같은 주름이 생겨버렸다. 소영이는 떡붕어 아저씨를 흔들어보다가 반응이 없자 울부짖으며 악을 썼다.

으악! 우리 아저씨가 왜 죽어? 할아버지 의사잖아? 빨리 살려내란 말이야!”

하지만 귀가 다소 먹어, 어린 여자의 새된 소리에도 시골의사는 별 감흥 없이 자기 말만 되풀이했다.

어차피 죽을병, 약을 써도 소용이 없소.”

뭐야? 할아버지 돌팔이 의사야? 주사를 놓든 약을 먹이든 하란 말이야!”

소영이는 더 악에 받쳐, 저 애처로운 시골의사의 대머리를 주먹으로 쾅쾅 두들겼다. 그제야 시골의사는 자기가 어떤 환자, 어떤 보호자와 있는지 감이 왔다. 머리가 띵하고 속이 울렁거렸다. 이 골치 덩어리로부터 얼른 해방되기 위해 시골의사는 대번에 말을 바꾸었다.

, 그러고 보니 살 병이오.”

당연하지! 그러니까 빨리 낫게 하란 말이야!”

 

두 사람의 짧은 대화가 끝나기가 무섭게, 떡붕어 아저씨가 또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처럼 힘없이, 가늘게 눈을 뜨며 차분하게 말했다.

나를 그만 죽게 내버려둬요. 한평생 잘 놀다 갑니다.”

환자가 담담한 태도를 보이자 시골의사는 자기를 무시하는 것 같아 자존심도 상했다. 아니, 목숨을 경시하고 초탈한 척 구는 태도가 얄미웠다. 그는 예언자처럼 조용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허허, 그야 물론 그렇지요. 어차피 살 병이니까 그냥 두면 그럭저럭 살다가 나중에 알아서 잘 죽어요.”

이렇게 말하며 시골의사는 환자의 반응을 살폈다. 하지만 환자는 비장한 유언을 끝으로 장렬하게 무의식 속에 함몰한 뒤였다. 시골의사는 아주 오랜만에 부아가 치미는 걸 느꼈다. 때 아닌 폭풍우 속을 뚫고서 그야말로 죽을힘을 발휘하며 여기까지 왔는데, 저놈의 환자는 쿨쿨 잠이나 자고 있다니!

 

그때 시골의사는 급습을 당했다.

그런 게 어디 있어? 할아버지, 정말 나한테 맞아볼 테야, ?”

소영이는 당장 시골의사에게 달려들어 코를 콱 깨물어버렸다. 시골의사가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그의 귀가 소영이의 이빨 사이로 들어갔다. 시골의사는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렀다. 그런데도 소영이는 그의 귀를 풀어주기는커녕 숫제 잘근잘근 씹어댔다. 갑자기 시골의사의 절망적인 비명이 구질구질한 푸념으로 바뀌었다.

지금 이 늙은이를 갖고 노는 거요? 이 늙은이가 불쌍하지도 않소? 내 평생 여기저기 왕진을 다니느라 인생을 다 써버리고, 오늘은 누렁소도 사정이 여의치 않았단 말이오! 이웃사람이 빌려준다는 걸 끝끝내 뿌리치고 다 죽어가는 누렁소를 이끌고 저 비바람을 헤치고 왔거늘! 돈이라도 많이 받는 줄 아쇼? 하지만 나 아니면 누가 이런 시골에서 의사 노릇을 하겠소?”

귀는 물론 눈마저 멀기 시작한 늙은 시골의사의 푸념은 날카로운 비명보다 더 애절했다. 소영이는 이빨에 힘을 풀었지만 계속 씩씩댔다.

, 세상에 불쌍한 사람이 할아버지 밖에 없는 줄 알아? 괜히 불쌍한 척 하지 마!”

 

이 말에 시골의사는 흠칫 놀라며 소영이를 바라보았다. 이제껏 한창 물 오른 소녀인 줄만 알았는데 자세히 뜯어보니 쭈그렁바가지 노파였다. 늙은 시골의사에겐 때 아닌 연민이 샘솟았다. 노망이 난 노모를 돌보는 장성한, 심지어 중년으로 접어든 아들이라니.

! 그렇구먼. 내 처방을 해주리다. 저 양반은 푹 꼬아 드시구려.”

시골의사는 코와 귀를 번갈아 만지며 열린 문 너머로 보이는 개를 가리켰다. 그 녀석은 오늘도 변함없이 마녀의 현관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집을 지키고 있었다. 시골의사 옆에 있던 마녀는 피식 웃었고 시골의사는 계속 주위를 살폈다. 복도 끝에서 그의 누렁소가 해슬피 게으른 울음을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이 그에게 어떤 영감을 준 모양이었다. 갑자기 그는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마녀에게 귀를 좀 빌려달라며 손짓을 했다. 시골의사는 계속 뭐라고 속닥대고 마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뭐야? 나한테 얘기해줘, 얼른!”

, 그럼 이 몸은 그만 퇴청하겠소.”

어라, 할아버지! 이 대머리야!”

소영이가 바짓가랑이를 잡을 틈도 없이 늙은 시골의사는 쏜살같이 방을 뛰어나가 버렸다. 제대로 걷지도 못 할 만큼 늙어버린 양반이건만, 저 순발력과 정력은 어디서 나오나 싶을 정도로 놀라운 속력이었다. 수레에 올라타자마자 그는 누렁소의 궁둥이를 탁 쳤다. 누렁소는 갑자기 말처럼 히힝 소리를 내며 복도 창문을 뚫고 나가버렸다.

 

저 할아버지 정말 의사 맞아?”

소영이가 마녀에게 물었다.

그럼 이 동네에서 소문난 명의인걸. 의료행위 경력이 수백 년은 되는 양반이야.”

완전히 바보 같은데?”

원래 사람이 경지에 이르면 바보와 차이가 없어지는 법이란다.”

 

마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시골 의사가 다녀간 후 떡붕어 아저씨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병상을 털고 일어났다. 병마의 흔적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식음을 전폐할 만큼 앓아누웠던 것도 성과가 있었다. 기하급수적으로 축적되었던 지방이 싹 빠져버린 덕분에 떡붕어 아저씨는 생활의 감각을 되찾았다. 다시 금괴를 사기 위해, 그만한 돈을 모으기 위해 그는 P시로 떠났다. 갑자기 어른스러워진 소영이는 눈물을 감추며 그를 배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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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서 죄송합니다

-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

   

 

 

네 번의 자살미수, 그리고 마지막 다섯 번째 자살 시도와 성공. 한 작가의 문학세계의 핵심어가 자살일 수는 있어도 작가의 삶 자체가 이렇게 요약되기는 쉽지 않겠다. 다자이 오사무(太宰治)는 왜 그토록 자살에 집착했을까. 일본 문화의 특수성을 고려해도 쉽게 이해되지는 않는다. “태어나서 죄송합니다.”(20세기 기수(二十世紀旗手)라는 유명한 말, 그 기괴한 원죄 의식의 근거가 무엇일까.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13)

 

 

(왼쪽 사진은 처음 보는데, 이미지가 사뭇 다르네요! 웬 훈남의 중년이 ^^;; )

 

오바 요조가 쓴 총 세 편의 수기는 부끄럼으로 점철된 27년간의 생애에 관한 기록이다. 배고픔과 가난을 모르고 보낸 유년기와 익살연기를 시작한 소년기(수기1), 담배여자 등 타락과 이른바 가마쿠라 정사(情死) 미수 사건, 호리키와의 교류, 좌익사상에의 경도로 요약되는 청소년기(수기2), 무명 만화가(‘조시 이키타’)를 자처하며 넙치(시부타), 시즈코 등의 집에 기식하다가 약물 중독, 각혈에 시달리고 결국 정신병원에 감금되는 청년기(수기3). 여기에 스스로를 자살로써 벌해야 할 만큼 수치스러운 죄가 있는가.

 

 

 

 

 

 

 

 

 

 

 

 

문제는 자기 연민과 자기 비하의 이면에 숨어 있는 가공할 만한 자기도취이다. 나르시시즘은 그 표현 양상은 다양할 수 있으나, 애초 희랍신화가 보여주듯, 지나친 자기애로 인해 죽음 충동에 사로잡히고 결국에는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다. 요조는 마땅히 어떤 죄를 지었다기보다는 죄인(=범인), ‘음지의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혀 죄를 조장하고 그것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죄의식을 더 키워나간다. 주로 여성과의 관계에서 보이는 일련의 기괴한 행각(가령 자신의 내연녀가 능욕당하는, 그렇다고 생각되는 장면을 목격하면서도 거의 일부러 방관자의 입장을 취한다), 건강한 생활을 마다하고 굳이 기생충의 삶을 고집하며 집안과 의절하기에 이르는 것 등 그 스스로 익살은 물론 수난을 자처한다.

 

비합법. 저는 그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즐겼던 것입니다. 오히려 마음이 편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의 합법이라는 것이 오히려 두려웠고(그것에서는 한없는 강인함이 느껴졌습니다.) 그 구조가 불가해해서, 도저히 창문도 없고 뼛속까지 냉기가 스며드는 그 방에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바깥이 비합법의 바다라 해도 거기에 뛰어들어 헤엄치다 죽음에 이르는 편이 저한테는 오히려 마음이 편했던 것 같습니다.

음지의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비참한 패자, 또는 악덕한 자를 지칭하는 말 같습니다만, 저는 태어날 때부터 음지의 존재였던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이 세상에서 떳떳하지 못한 놈으로 손가락질당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언제나 다정한 마음이 되곤 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그 다정한 마음은 저 자신도 황홀해질 정도로 정다운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범인(犯人) 의식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저는 이 인간 세상에서 평생 동안 범인 의식으로 괴로워하겠지만 그것은 조강지처 같은 나의 좋은 반려자니까 그 녀석하고 둘이 쓸쓸하게 노니는 것도 내가 살아가는 방식 중 하나일지도 모릅니다.(51)

 

어떤 경우든 요조의 관심사는 오직 이며 그 는 죄를 범하고 그 때문에 괴로워하는, 카인의 표식을 단 이다. 여기에 요조와 호리키의 말장난을 적용해 보자.

 

죄와 벌. 도스토예프스키. 언뜻 그 생각이 머리 한쪽 구석을 스치자 흠칫했습니다. 만일 저 도스토 씨가 죄와 벌을 유의어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반의어로 병렬한 것이었다면? 죄와 벌. 절대 서로 통할 수 없는 것. 얼음과 숯처럼 융화되지 않는 것. 죄와 벌을 반의어로 생각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바닷말, 썩은 연못, 난마(亂麻)의 그 밑바닥아아, 알 것 같다.(115)

 

다른 식의 물음을 던져보자. ‘’, 그리고 은 희극명사인가, 비극명사인가. 요조의 삶은 죄와 벌의 희비극성을 극대화하는 쪽에 있는 것 같다. 그는 스스로 죄 많은 광대이고자 한다. 그의 비밀을 꿰뚫어보는 자가 바보이자 외톨이인 다케이시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아니, 그가 어울리는 자들은 대체로 반쯤 날건달인 호리키, 어딘가 타락과 연민의 냄새를 풍기는 여성들 등 소외계층이거나 타락계층이다.

 

 

(다운만 받아놓고 아직 못 본 ㅠ.ㅠ 영화 ^^;) 

 

 

이렇게 낮은 데로 임하여 돈키호테 같은 우스꽝스러운 광인-바보의 역할을 맡음으로써 그는 지상의 그리스도로 거듭난다. 훗날 어느 술집 마담은 이렇게 회고한다. “우리가 알던 요조는 아주 순수하고 눈치 빠르고술만 마시지 않는다면, 아니 마셔도하느님같이 착한 아이였어요.”(138) 지상의 그리스도를 꿈꾼 도스토예프스키의 주인공들이 현실에서 범죄자, 백치, 광인이 될 수밖에 없던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요조는 스스로에게 인간 실격을 선고한다. 물론 다분히 퇴폐적인 측면이 있다.

 

이젠 저는 죄인은커녕 미치광이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아니요, 저는 결코 미치지 않았습니다. 단 한순간도 미친 적은 없었습니다. 아아, 그렇지만 광인들은 대개 그렇게들 말한다고 합니다. 즉 이 병원에 들어온 자는 미친 자, 들어오지 않은 자는 정상이라는 얘기가 되는 것이지요.

신에게 묻겠습니다. 무저항은 죄입니까?

(중략)

인간 실격.

이제 저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습니다.(131)

 

몇몇 소설적 장치에도 불구하고 <인간 실격>은 거의 사소설(私小說)에 가까운, 말하자면 가면의 고백이다. 맨손 체조만 좀 했어도 그의 우울증은 치유됐을 것이라는 미시마 유키오의 냉소적인 말은 상당히 일리가 있지만 그럼에도 고통을 향한 그의 집요한 엄살에서 모종의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가.

 

-- 네이버캐스트

 

말미에 언급한 미시마 유키오의 <가면의 고백>도 재밌습니다 ^^; 

 

 

 

 

 

 

 

 

 

 

 

 

 

원래 썩 좋아하지 않은 일본근대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데는 영화와 애니메이션의 역할이 큰데요, 요즘 가장 다시 보고 싶은 영화는 우울할 때마다 항상 틀어놓았던(일본어 공부도 할겸^^), "필란도노 카모메와 데카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이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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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미 2013-04-08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고통을 향한 집요한 엄살...ㅋㅋㅋ 인간실격에 딱맞는 표현이네요
 

 

 

이듬해 여름, 엄마 말대로 <훈이네 복덕방>의 노부부는 거의 동시에 죽었다. 먼저 마지막 숨을 내쉰 건 할아버지였다. 골목 어귀 낡은 검정 소파의 한 귀퉁이를 할머니 혼자 지킨 시간은 일주일 정도였다. 그 짧은 시간 동안 할머니는 말과 표정을 되찾는 일이 더러 있었다. 한 번은 음식을 만들겠다며 하루 종일 부엌에서 부산을 떨었다. 예의 그 큰 손이 건재함을 증명이라도 하듯 아무도 먹을 수 없는 미역국을 잔뜩 끓인 다음 사람들에게 나눠주겠다고 국그릇에 하나하나 담았다. 손놀림이 서툴러 온 집안이 미역국 천지가 됐다. 마룻바닥을 뒤덮은 미역을 닦아내다가 며느리는 급기야 울음을 터뜨렸다. 그날 밤 <훈이네 복덕방> 2층은 초상집이나 다름없었다. 바로 그 뒤에 할머니는 목숨을 놓았다. 부산의 낮 기온이 30도를 훨씬 웃도는 후텁지근한 날이었다. <훈이네 복덕방>은 청도에 있는 선산에 묻혔다. 시신은 화장을 할 것이며 유골함은 반드시 목재를 쓸 것이며 또 봉분도 만들 필요 없이 그냥 오래 된 나무 밑에 묻어달라는 것이 정신을 놓기 전 그들의 유언이었다.

 

지난 추석에 내가 집에 내려갔을 때 <훈이네 복덕방>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 젊은 남자가 아예 그곳을 임대한 것이었다. 그는 <미래 공인중개소>라는 간판을 내걸고 <대표: 정원섭>이라는 말까지 당당히 붙었다. 몇 발짝을 떼놓기가 무섭게 공인중개소가 넘쳐났지만 그는 자신만만했다. 사실 우리 동네도 조만간 재개발 물살에 휩쓸리게 될 테니 영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니었다.

 

<훈이네 복덕방>은 없어졌지만 골목 어귀의 검정 소파만은 그대로 있었다. 뜻밖에 그곳을 지키고 있는 건 엄마였다. 나도 모르게 할머니의 환영이 겹쳐지면서 소리를 질렀다.

엄마! 뭐 할라고 거 앉아 있노?”

니 마중 나왔다 아이가. 백서방은?”

저 밑에 마트에 잠깐 들른다고.”

그래, 그래. 세상 참 좋아졌제, 진수야. 서울역에서 기차 탔다고 전화한 게 언젠데 벌써 이래 왔네. 백지 차 몰고 올 필요도 없는 기라.”

형우네는?”

처가 갔다 아이가.”

형우 얼굴 보기 진짜 힘드네. 희은이 엄마는 잘 지내나?”

올케의 안부를 묻자 엄마는 말이 길어졌다. 처음에는 세상에 그만큼 똑똑한 며느리가 없다라는 칭찬이었지만 슬슬 흉을 보기 시작했다. 입이 짧아서 마른 명태같이 빼빼 말랐다는 둥, 어른 말에 꼬박꼬박 말대꾸를 한다는 둥, 시답잖은 일에도 고집을 부린다는 둥. 나는 맞장구를 쳐주다가 요즘 시부모랑 같이 살아주는 것 자체가 무조건 고마운 거라며 엄마를 타일렀다. 졸지에, 며느리 때리는 시어머니를 말리는 손위시누이 역할을 맡자니 민망해졌다.

소파 이거는 왜 안 치웠는고?”

고마 이래 오가는 사람들 쉬라고 그냥 뒀겠지. 근데 진수야, 훈이네 복덕방 노인들이 저래 정신을 놓았어도, 신통방통하제, 아침이면 딱 7시 반에 일어나고 9시에 귀신같이 복덕방 문 열고 안 했나. 노상 둘이 손 꼭 붙잡고 다니고.”

이 대목에서 엄마는 갑자기 거의 들릴 듯 말 듯 목소리를 죽이며 속삭였다.

근데 마지막엔 결국 간병인을 썼다 아이가. 저 집 며느리 그리 효부라도 나중에는 노상 얼굴을 찌푸리고 다니더만. 사실 구구절절이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옆에 사람도 할 짓이 아니었던 기라. 장례식 때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더라. 나이 앞에 장사 없고 긴 병에 효자 없는 기라. 아무리 그래도 요즘 세상에 병원 안 가고 제 집에서 죽기가 쉽나, 어데?”

말을 쉬며 한숨을 내쉴 때는 눅눅한 감정이 섞여 나왔다. 행여나 자기에게 그런 일이 생겨도 병원에 갖다 버리지는 말아달라고 애원하는 듯.

제 집에 있어서 그런지 저 노인들 고마 자는 잠에 곱게 죽었다 아이가. 너거 아빠랑 나도 저래 죽어야 될 긴데.”

우리 좀 편하게 둘이 한 날 한 시에 죽든가.”

나도 진담이었지만 엄마도 역정을 내지도 않고 진지하게 응수했다.

그래 딱 죽으면 좀 좋겠나? 근데, 진수야, 아는 안 낳을 기가?”

큰사위 기다린다는 핑계 대고 엄마는 소파에서 일어날 생각을 안 했다. 나도 그냥 엄마 옆에 앉아버렸다. 그간 비가 와도 몇 번은 왔을 텐데 누구 손을 탔는지 소파는 무척 깨끗했다.

낳고 나면 니 때문에 내 하고 싶은 일도 못한다고 원망할 거 같은데.”

아이고, 한 번 낳아 봐라, 그런 소리가 나오나. 아한테 더 못 해줘서 니를 원망하면 모를까.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낳아야제. 삼신 할매 노하면 큰일 난다. 피임 하면 안 된다고 몇 번을 말해도 안 듣고.”

사위가 나타나자 엄마는 금방 입을 닫아버렸다. 남편이 소파에 대해 묻자 엄마는 나한테 했던 얘기를 반복했다.

, 그럼, 저도 한 번.”

남편은 그러고서 내 옆에 털썩 앉았다. 가을햇살이 따사로웠다. 적어도 마음만은 우리도 가을걷이가 끝난 논에서 햇볕을 받으며 뛰노는 아이들 같았다. 집 안에서 큰딸 내외를 기다리다 지친 아빠가 급기야 골목 어귀로 나왔다. 때마침 반대쪽에선 해수 부부, 그리고 내년이면 초등학생이 될 그들의 아들의 모습도 얼핏 보였다.

할머니, 할아버지! 승호 왔어요!”

녀석의 목소리가 어찌나 우렁찼는지, 쌀쌀맞기로 소문 난 <뭉치슈퍼> 아저씨, 아니 할아버지까지 히죽 웃을 정도였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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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가을, 해수는 오랫동안 사귀어온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 해수의 남편도 형우처럼 말하자면 가업을 이어받은 젊은 사업가였다. 하지만 얼추 같은 동네에 있는 가게라도 <영진선루프><성득상회>와 급이 달랐다. 해수의 월급은 <영진선루프> 사장의 수입에 비하면 고급 레스토랑 음식의 팁에 불과했다. 물론 그래도 해수는 일을 그만 두지 않았다. 다음 해에 아이가 태어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처럼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나이가 들면 어린이집을 차리는 것이 해수의 꿈이었다.

 

그렇게 우리 애를 태우던 형우도 서른을 좀 넘긴 뒤에 제 짝을 만나 장가를 들었다. 올케는 형우보다는 제법 어렸지만 생활력이 강하고 허영심이라곤 없는 여자였다. 하긴 안 그랬다면 시장바닥에서 막일을 하는 남자의 아내가 되진 않았을 거다. 형우 내외는 <훈이네 복덕방>의 작은아들처럼 결혼식 거의 직후에 아이를 낳았다. 형우처럼 커다랗고 동그란 눈에 쌍꺼풀이 깊고 애 엄마를 닮아 얼굴이 뽀얀 딸아이였다. 88년에 전세로 들어온 집을 나중에 아빠가 완전히 샀기 때문에 이 집은 형우의 집이 될 것이었다.

 

엄마와 아빠는 시장 일을 슬슬 접고 손자 보는 재미로 살았다. 아래층에 사는 형우 내외는 오래 전 엄마와 아빠가 그랬듯 새벽같이 일어나 별을 보며 시장에 나가고 또 별을 보며 집에 돌아왔다. 결혼 전엔 걸핏하면 농땡이를 치던 형우도 이젠 아이까지 생긴 터라 악착같이 일에만 매달렸다. 물론, 젊은 날의 아빠처럼 주기적으로 술을 마셔 마누라 속을 발칵 뒤집어 놓았지만, 역시나 젊은 날의 아빠처럼 술을 마신 다음날에도 머리통이 깨질 것 같은 통증을 참으며 시장에 나갔다. 아옹다옹, 옥신각신 하는 와중에 그들의 아이는 무럭무럭 커갔다.

 

*

 

서른일곱 번째 생일을 맞은 해수의 눈에 <훈이네 복덕방>은 참 새삼스러워 보였다. 앙다문 입술처럼 굳게 닫힌 미닫이 유리문 너머로 낡은 소파, 낡은 탁자, 낡은 난로가 보였다. 난로 위의 싯누런 주전자도 군데군데가 우그러져 주글주글했다. 복덕방의 유리문 위에 붙여진 종잇장들에서는 왠지 오래 묵힌, 벌레마저 쓸기 시작한 폐지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너무도 낯익어, 오히려 작년인가에 고용한 젊은 직원의 모습이 낯설어보였다.

 

해수는 골목 안쪽으로 발길을 꺾었다. 오늘도 낡은 검정 소파가 보였다. 어김없이 거기엔 <훈이네 복덕방>의 노부부가 앉아 있었다. 이제는 노부부 없는 검정 소파를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해수는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노부부는 모두 말이 없었고 표정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겉표지도, 속지도 노랗게 바라다 못해 바스라질 것만 같은 책이 오늘도 할머니의 손에 들려 있었다. 할머니 옆에 음전한 신부처럼 다소곳이 앉아 있는 할아버지는 천연산 장식품 같기도 했다.

 

해수가 집을 떠날 때 엄마는 늘 그렇듯 골목 앞까지 배웅을 했다. 노부부는 여전히 자연의 손이 만들어놓은 최고의 박제처럼 소파에 앉아 있었다. 할머니의 고개가 할아버지 쪽으로 약간 기울어졌다. 할아버지의 손이 할머니의 손을 살포시 쥐고 있었다. 그렇게 소파에 앉은 채로 노부부는 죽은 듯 잠을 자고 있었다. 그들의 목엔 큰아들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힌 명찰이 걸려 있었다.

 

좀 춥지 싶은데?”

엄마의 말에 해수는 <훈이네 복덕방> 안으로 들어갔다. 해수가 말을 꺼내자, 아까부터 그곳을 지키던 젊은 남자는 복덕방 한 쪽에 개져 있는 담요를 내밀었다.

괜히 깨우지는 마시고요.”

자주 저러시나 봐요?”

저 정도면 점잖죠. 접때는 두 양반이 손잡고 초읍까지 갔다 아입니까. 공원에서 간신히 찾았어요. 요즘은 멀리 나가 봐야 저 앞 파출소지만.”

해수는 담요를 껴안은 채 <훈이네 복덕방>을 나왔다. 담요를 덮어줄 때도 노부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콧구멍과 살짝 벌어진 입에서는 웅장한 합창에 붙은 조용한 후렴구처럼 낮은 숨결이 뿜어져 나왔다. 그 따뜻한 숨결에는 성별을 구별할 수 없는 늙은 몸뚱어리의 향내가 배어있었다.

 

얼렁 가자.”

해수의 손을 당기며 엄마가 말했다.

저 양반들, 그래도 곱게 늙었제. 저라다 하나가 죽으면 다른 쪽도 금방 죽을 기라. 나랑 너거 아빠도 저래 늙으면 좋겠구만.”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엄마도 이미 늙으면이라는 가정법이 별로 어울리지 않는 나이였다. 버스나 전철을 타도 경로우대증만 보이면 됐다. 그렇기에 엄마는 누가 자기를 할매라고 부르면 하루 종일 별 일 아닌 것에도 짜증을 냈다. 그러다 갑자기 생각이 난 듯 미친 놈, 누가 할매라고!”하며 투덜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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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삼남매는 밥벌이 문제를 두고서 제각기 고군분투했다. 해수는 3년 동안 학문의 상아탑 안에서 원 없이 놀다가 어느 날 갑자기 수학능력시험을 다시 봤다. 그렇게 덜커덩 교대에 입학했고, 뭘 잘못 먹었는지 머리에 물도 안 들이고 화장도 전혀 안 하고 4년 동안 공부만 했다. 결국 해수는 우리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서 교사가 되었다.

 

형우는 경찰서와 병원을 들락날락하며 부모 속을 태우다가 급기야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그러고도 한동안 코뼈와 이빨을 부러뜨리고 남의 차를 부수고 남의 오토바이를 훔쳐 타고 난리법석을 떨었지만 스물다섯을 넘기면서 그나마도 잠잠해졌다. 그렇게 간신히 철이 들었을 때 형우는 이미 환갑을 코앞에 둔 아빠의 사업을 슬슬 물려받는 중이었다. 명함도 따로 팠다. 빨간 사과와 보라색 포도 그림이 촌스럽게 들어간 명함엔 <성득상회 사장 김형우>라는 이름이 들어갔다. 이건 사실 엄마와 아빠가 형우의 미래를 상상하며 가장 바라지 않았던 모습이었다. 형우는 바싹 여윈 몸을 트럭에 실은 채 연일 산지를 오갔다. 갈 때는 말짱해도 부산으로 내려올 때는 술에 절어 있었다. 그렇게 트럭 안에서 잠을 잔 뒤에는 밤새도록 과일 선별을 했다. 형우의 얼굴은 뙤약볕에 시커멓게 그을린데다가 늘 푸석푸석했다.

 

형우가 안쓰러웠던 엄마는 <훈이네 복덕방> 아줌마가 오면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우리는 이래 시장 바닥에서 살았어도 우리 아들만은 몸 쓰는 일 안 하고 펜대 굴리며 살았으면 싶었는데. 그게 참 뜻대로 안 되네요.”

아이고, 변변찮은 직장보다 장사가 훨씬 낫다. 그라고 아 착하면 됐지, 또 뭘 바라노? 이제 참한 딸아 구해서 장가만 잘 보내면 되겠구먼. 진수 엄마가 애 셋 데리고 이리로 이사 온 게 엊그제 같은데. 지금 봐라, 얼마나 좋노. 옛날엔 우리가 와도 이래 앉아서 노닥거릴 여가도 없었다 아이가. 진수 엄마가 그만큼 마음이 편하다는 기라. 시장도 그냥 놀기 삼아 오면 안 되나.”

<훈이네 복덕방> 내외는 그만 일어났다. 별로 크지 않은 토마토 상자였지만 두 노인이 들기엔 꽤나 무거워보였다. 형우가 좀 있다가 직접 갖다 주겠다고 해도 한사코 마다했다. 두 노인이 사라졌을 때 엄마가 형우를 보며 말했다.

팔아줘서 고맙긴 하지만 저 많은 걸 노인 둘이서 우째 다 묵을라노? 요새는 <훈이네>도 한산하던데.”

 

사실이 그렇기도 했다. <훈이네 복덕방>의 큰아들 내외가 부산으로 전근을 오긴 했지만 먹을 입이 크게 늘어난 것 같지는 않았다. 어느덧 중학생, 고등학생이 돼 버린 손자들은 얼굴을 보기도 힘들었다. 어쩌다 거실에 함께 있게 돼도 다들 텔레비전에 코를 박아두었다. 친구들은 늙고 죽어서 떠나버리고 그 많던 동네 아이들은 자라서 떠나버렸다.

 

<훈이네 복덕방> 내외는 간판에 붙은 두 글자 을 어떻게든 나눠주려고 고심했다. ‘은 무릇 음식의 양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아줌마는 요즘도 음식을 하면 옛날처럼 가득이었다. 손자들한테 냉대를 받아도 꿋꿋했다. 남은 음식은 대개 최근 들어 부쩍 늘어난 노숙자나 길거리 점쟁이들 차지가 됐다. 그들을 먹이기 위해, 아니 음식을 만들 명분을 찾기 위해 <훈이네 복덕방> 아줌마는 수시로 서면 일대를 순례했다. <성득상회>에서 사온 토마토도 하나씩 끼어 넣었다. 그러는 동안 유리문을 모자이크 벽지처럼 뒤덮은 종잇장들은 빛이 바래갔다. 아저씨가 펜으로 멋을 부려가며 써놓은 전세, 월세, 매매 등의 문구와 숫자도 고색창연하기만 했다.

 

건조하고 쌀쌀한 탓에 투명한 햇살이 더 따뜻하게 느껴지는 겨울날이었다.

남자 친구는 <부전역>을 나오자마자 완전히 시골이라더니 있을 거 다 있는데?”라고 말했다. 그러게 말이다. 전철역 근처에 닥지닥지 붙어있던 추레한 가게들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대형 마트, 유명 제과점, 유명 음식점이 들어섰다. 학창 시절 고무신 공장이 있던 자리엔 아파트 단지가 터줏대감 마냥 버티고 있었다. 남루한 차림의 노동자나 노점상들 대신 말쑥한 회사원들이 거리를 채웠다. 아파트 단지 주변에는 조그만 정원도 조성되어 있었다.

 

횡단보도를 건너자 눈에 익은 파출소가 나왔다. 각종 범죄자의 몽타주나 사진이 붙어 있는 건 여전했다. 그 맞은편엔 기어코 또 다른 아파트 단지가 자리를 잡았다. 그와 함께 편의점, 사설 학원, 피트니스 클럽 등도 잔뜩 들어왔다. 하지만 그로부터 불과 2, 3미터 떨어진 곳의 풍경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뭉치 슈퍼>, <구슬동자>, <승리반점>, <대포 마을>. 오직 <익돌이 피아노>만이 <예쁘제 머리방>으로 바뀌어 있었다. <익돌이 피아노>의 주인공인 익돌이, 즉 해수의 초등학교 동창 가족이 얼마 전에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간 탓이었다.

 

골목 어귀, <훈이네 복덕방>은 문이 닫혀 있었다. 두어 걸음을 떼자 골목 안쪽에 전에 없던 검정색 가죽 소파가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소파 한 쪽에 복덕방 아줌마, 아니 할머니가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한 손에는 조그만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책장이 노랗게 바란, 활자가 세로로 이어지는 오래된 책이었다.

안녕하세요?”

하지만 나의 인사에 할머니는 묵묵부답에 무표정이었다. 주름과 백발로 덮인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눈동자가 몹시 영롱했지만, 예전처럼 다정다감한 생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저 진수요, 기억 안 나세요?”

할머니의 눈동자는 여전히 어딘가에 고정된 채 꿈쩍도 안 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가벼운 겨울바람에 낡은 책장이 팔랑거리자, 할머니는 책을 쥔 손에 아주 약간 힘을 주었다. 그 순간, 할머니의 눈에는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맛있는 것을 뺏기지 않으려는 어린애의 욕심 같은 것이 어리었다. 내 시선은 다시 할머니의 손으로 향했다. 뽀얗고 곱던 자그마한 두 손에 충격처럼 내려앉았던 굵은 주름과 누르스름한 반점이 이제는 어엿한 주인처럼 보였다. 저 두 손이 형우에게 점심을 차려주고 해수와 친구들에게 수박을 잘라주고 먼 길 떠나는 내게 계란을 삶아주었던 것이다.

 

할아버지가 내 등 뒤로 나타났다. 백발도 이제 몇 가닥 남아 있지 않았다.

, 이게 누구고?”

할아버지가 반색을 표하자 나도 숨통이 좀 트였다. 할머니의 표정에도 미약하나마 떨림이 일었다.

안녕하셨어요?”

그래, 그래. 훈이 엄마한테는 인사해도 소용없다. 노망이거든, 허허, 내 여편네가 노망이 들다니, . 닭개장이 먹고 싶어 죽겠는데, 여편네가 이 모양이니 원. 그래, 니는 결혼 안 하나? 올해 몇 살인고?”

서른 셋요. 올 봄에 이 사람이랑 결혼하려고요.”

남자 친구가 가볍게 목례를 했다.

아이고, 인물이 훤하네. 그래, 아들딸 낳고 잘 살아야제. 요즘 세상에 위아래가 따로 있나, 어데. 언니가 못 가면 동생이라도 얼렁 가야제.”

이 말에 나는 곧장 웃음을 터뜨렸다. 아저씨한테 걸핏하면 동생보다 작은 언니라며 놀림 받던 일이 생각나, 나도 모르게 성장기로 돌아갔다.

에이, 아저씨, 제가 언니고 해수가 동생이라니까요! 키 작다고 무시하지 마세요!”

무시는 무슨! 세상이 아무리 변했어도 시집은 언니가 먼저 가야 되는 법이다. 오빠는 요새 뭐 하노?”

오빠요?”

이쯤 되자 자연스레 할아버지의 얼굴을 살피게 되었다.

너거들 오빠가 맨날 추리닝 입고 안 다닜나. 고놈 참, 딱지 주머니를 들고 여 와서 점심 먹고 그랬는데 요새는 통 안 보이네. 그래, 니 시집은 언제 가는고?”

지금 가려고요. 이 사람한테요.”

아이고, 인물이 훤하네! 그래, 니라도 여 이래 있으니 안 좋나. 진수 서울 간 뒤로 너거 엄마, 아빠가 그래 허전해하는데. 하긴 니도 언니가 없어서 심심하제? 근데 진수는 대학은 졸업했는가?”

졸업도 하고 취직도 하고 이제는 좋은 사람 만나 시집가요.”

 

나는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대문 안으로 들어설 때도 곁눈질을 하게 되었다. 이제 할아버지도 조용히 할머니 곁에 앉아 있었다. “훈이 엄마, 저어기 <성득상회>네는 이제 호강할 일만 남았어. 진수는 졸업을 하고 해수는 시집을 간다네. 아참, 가들 오빠 소식을 못 들었다. 글마 이름이 뭐였더라? 형우는 저어기 <천상선녀>네 집 손자고.” 할아버지는 할머니 손을 꼭 잡은 채 종알종알 수다를 떨었고, 할머니는 멀뚱멀뚱 눈알을 굴렸다. 아무래도 겨울치곤 햇볕이 너무 좋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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