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 밤돌에게선 드문드문 연락이 왔다. 한데 그날에 무슨 규칙이 있지도 않았다. 이를 테면 부모 중 하나의 생일, 어버이날, 결혼기념일, 심지어 엉뚱하게 얼굴도 본 적 없는 할아버지의 제삿날 등과 같은 특별한 날을 골라 전화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전화 내용에 이렇다 할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그냥 전화해서 수화기를 든 채 묵묵히 있다가 생뚱하게 안부를 묻거나 작별인사를 하곤 끊었다. 한마디로 세상의 모든 싸가지 없는 자식들과 세상의 모든 성스러운 부모들의 관계와 하나도 다를 바 없었다. 특이한 점이라면, 이 아들은 싸가지 없음의 정도가 좀 심하여, 지난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집을 찾지 않았다는 것이다. P시를 경유할 일이 있을 때도 그랬다.

 

그가 집에 전화를 한 날 중 하루는 P시의 여관에서 밤을 보낸 날이었다. 그때 그는 깊은 계곡으로 강 낚시를 갔다 오는 길이었고, 여독을 풀기 위해 아가씨 하나를 불렀더랬다. 부모의 집으로 다이얼을 돌린 그 순간은 그의 하룻밤 정사가 절찬리에 막 진행 중일 때였다. 하필이면 그때 부모의 존재가 너무나 그리워졌는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말로 표현하기 힘든 미묘한 떨림을 노부부는 전화선 너머로 또렷이 감지했다. 그리고 이제 곧 아들이 돌아온 탕자의 모습으로 귀향하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아들은 오지 않았고 그들의 믿음은 시간 속에 파묻힌 화석이 됐다.

 

그 사이에 밤돌의 동생들은 다 시집 장가를 갔고 노부부에겐 다섯 명의 손자손녀가 생겼다. 어느덧 칠순도 과거의 나이가 되고 팔순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저축해놓은 돈과 연금이 있었기 때문에 노부부는 이제 그냥 그대로 죽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딱 하나, 이대로 눈을 감을 수 없는 이유를 찾자면 바로 밤돌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 그런데 지금 밤돌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 정작 이렇게 되자 노부부는 아이고, 내가 이제 눈을 감겠다! 죽어도 여한이 없어!”라는 말 따위는 죽어도 할 수 없었다.

 

아이고, 이 썩을 놈아! 그래, 어미아비 버리고 섬에서 혼자 사니 좋냐? 그것도 장남이란 놈이! 에라이, 이 후레자식 같은 놈! 누굴 닮아서 이 모양이냐, ?”

보시다시피, 아버지는 밤돌을 마지막으로 봤을 때처럼 구질구질한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것도 모자라 아들에게 달려들어 사정없이 쥐어 패기 시작했다. 아들과의 해후 덕분에 갑자기 회춘해버렸는지, 힘까지 불끈 솟는 모양이었다. 그는 실로 힘이 셌지만 아들의 근육으로 중무장한 몸 방패를 뚫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대체로 이 부자는 다들 기골이 장대했다. 그 힘을 그냥 눌러두는 것도 고통이었던 지라, 아버지는 이참에 몸도 풀 겸 아주 작정을 하고 아들을 손봐주었다. 아들은 아들대로 이것을 일종의 숙제로 생각하여 간지러움과 성가심을 참아주었다.

 

이 일이 끝나자 어머니의 성화가 시작했다.

아이고, 우리 새끼, 보석 같은 내 아들,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으면 살이 쪽 빠졌네. 세상에, 이마에 이 주름하며 새치까지! 폭삭 늙었구나, 폭삭. 네가 절대 늙을 얼굴이 아닌데, 얼마나 고생을 했으면! 어서 가자! 이 엄마가 우리 밤돌이한테 맛있는 거 해줄 게. 뭐 먹고 싶니? 광어 회? 해삼이나 멍게는 어떠냐? 아휴, 내 정신 좀 봐! 회는 질리도록 먹을 텐데, 그럼 갈비찜을 해주랴?”

노부부에게선 바로 어제집을 나간 아들을 맞이하며 부산을 떨었다.

 

떡붕어 아저씨, 아니 밤돌의 기분은 그랬다. 노숙자와 노인 무리에서 부모를 알아본 첫 순간, 내부에서 뭔가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잡티 없는 감격이나 반가움, 세상의 모든 자식들이 주기적인 발작처럼 맛보는 죄책감, 애써 만들어준 생명을 곱게 키워가지 못했다는 회한 등등. 감정은 늘 연속적이고 뒤범벅이라 뭐라 꼬집어 말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이 격정의 파고가 지나자 해묵은 구토감이 밀려왔다. 병아리 시절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은 다 늙은 병아리를 앞에 두고 세트로 설쳐대는 촌닭 같은 부모의 모습에 우울해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결국 그는 부모의 손에 이끌려 고향집까지 가고야 말았다.

 

*

 

그것은 세월의 흐름을 완벽하게 빗겨간 영차원의 공간이었다. 특별히 더 추레하고 후줄근해 보이지 않는 것은 어딘가는 조금씩 변화를 주고 단장했기 때문이리라. 사람은 늙는데 집이 늙지 않는다는 것도 얄궂었다. 이 공간에는 떡붕어 아저씨는 없었다. 그저 타임머신을 타고 어디론가 떠났다가 어처구니없이 자기 집에 불시착해버린 중장년의 백수 김밤돌이 있을 따름이었다.

 

어머니는 혼자 환희에 들떠 결정한 대로 갈비찜을 내왔다. 사실 어제저녁에 양념을 해 재 둔 것이 있었다. 믹서에 간 양파와 배, , 단호박, 은행, 당근 등이 들어간 갈비찜은 척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다. 하지만 밤 한 조각을 입에 넣자마자 밤돌은 인상을 썼다. 지나치게 달고 또 지나치게 짰다. 갈비 하나를 뜯기 시작했다. 그 순간, 밤돌은 졸지에 과거로 회귀했다.

엄마! 음식이 이게 뭐예요? 간도 안 맞아, 고기는 고무줄처럼 질겨, 어떻게 먹으라는 거예요?”

이 놈이 지금 어디서 반찬 투정이야? 내 입엔 딱 맞구먼. 간도 적절하고 잘근잘근 씹으니 육즙도 많이 나오고.”

옆에서 아버지가 한마디 했다. 최근 그는 자식들의 돈을 자발적으로 갹출 받아 이빨을 왕창 새로 심었다. 그 비용은 실로 천문학적이었다. 어떻게든 뽕을 뽑아야겠다는 생각에 그는 질긴 음식에 열광하는 황당한 버릇이 생겼다. 음식의 간에 관한 한, 두 살 터울인 노부부가 공히 혓바닥이 맛이 갔다고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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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처럼의 비극: 바보로 죽을 것인가, 속물로 살아남을 것인가

- 플로베르, <마담 보바리>(1857)

 

 

 

<마담 보바리>는 시골 의사의 아내인 엠마 보바리의 불륜과 파멸을 그린 소설이지만 소설에 관한 소설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욕망을 생산해내는 책(소설)과 그 욕망-책을 끊임없이 배반하는 삶의 충돌, 그것을 엠마의 인생이 보여준다. 수도원에서 성장기를 보내며 소설을 많이 읽은 탓에 항상 소설처럼!’을 꿈꾸는 그녀에게 현실은 따분하기만 하다. 가령, 결혼 전에는 사랑을 느낀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결혼하고 나자 전혀 행복하지 않다. 오히려 소리 없는 거미와도 같은 권태가 그녀의 마음 구석구석의 그늘 속에 거미줄을 치고 있었다.”(70) 이런 그녀 앞에 레옹이 나타나, 지금껏 비어 있던 욕망의 빈 칸을 채워준다. 그를 직접 만나는 것보다는 고독 속에서 그의 모습을 마음껏 그려보는 것이 더 즐겁다.

 

 

 

 

 

 

 

 

 

 

 

 

 

 

 

로돌프의 경우도 비슷하다. 명실상부한 애인이 생기자 그녀는 옛날에 읽었던 소설 속의 여주인공들을 떠올리며 그녀 자신이 그토록 선망하던 사랑에 빠진 여자의 전형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설욕의 만족감”(237)마저 맛본다. 속된 현실과 권태를 참아낸 보상을 톡톡히 받아낸 셈이다. 이 낭만적 사랑에 탐닉하면서 그녀는 점점 더 소설의 여주인공 같은 자세를 취한다. 로돌프에게 버림받았을 때는 기만과 배반으로 점철된 사랑의 비극 때문에 파멸한 여주인공의 역을 맡는다. 종부성사까지 준비하고 신심을 불태우기도 한다. 3년 뒤, ‘파리 물을 먹고 돌아온 레옹이 파리에서는 흔히 있는 일인걸요!”(354)라는 천연덕스러운 말로 그녀를 유혹하고, 그녀는 기꺼이 거기에 응한다. 하지만 소설과 몽상 속에서는 낭만적 사랑의 정점이었던 불륜이 현실 속에서 반복과 지속을 거듭하자 결혼생활 못지않은 진부함을 지니게 된다. 권태와 환멸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엠마의 파국에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은 굳이 말하자면 연애가 아니다. ‘소설처럼살기 위해 그녀는 몸치장에 지나친 관심을 보이는 반면 살림살이와 금전문제에는 무관심하다. 낭만적인 소설에는 돈 얘기가 나오지 않는다. 책과 몽상 속의 세계는 너무나 시적인데 실제 현실은 너무나 속되고 천박하달까. 이렇게 현실을 외면하다가 엠마는 요즘 식으로 말해 카드빚 때문에 파산하고 만다. 사태를 수습하고자 로돌프를 찾아가 때 아닌 사랑 타령을 늘어놓고 돈을 구걸하는(“실은 저 파산했어요, 로돌프! 제게 삼천 프랑만 꿔주세요!”(448)) 장면은 거의 참담하다. 음독자살과 그 과정(특히 수의를 입힐 때 시체가 된 상태에서 구토를 하는 장면)은 어떠한가. 모든 것이 엠마의 욕망과 몽상을 모독하고 조롱한다. 혹시 그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했거나 다른 처지에 놓였더라면 사정이 좀 달랐을까? 물론 아니다. 욕망은 그 본질상 만족을 모르기 때문이다.

 

 

 

 

 

 

 

 

 

 

 

 

 

<마담 보바리>는 잡지에 연재될 당시부터 물의를 일으켰으며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작가와 출판업자, 편집자가 모두 법정에 섰을 정도였다. 자연스레 보바리 보인의 모델이 누구냐는 질문이 나왔을 법하다. 그때 플로베르가 내놓은 답이 마담 보바리, 그것은 바로 나다!”라는 저 유명한 말이다. 플로베르와 엠마 사이에 어떤 유사성이 있느냐는 차치하더라도 어떻든 그는 저 속된, 따라서 보편적인 모방 욕망의 근원과 귀결을 속속들이 해부하는 데 성공했다. 의사의 아들로서 메스 대신 펜을 손에 든 외과의-소설가였던 셈이다.

 

 

 

 

 

 

 

 

 

 

 

 

 

 

<마담 보바리>을 쓸 때 그는 스스로를 손등에 납덩어리를 얹어놓고 피아노를 치는 사람”(1852726일 루이즈 콜레에게 보낸 편지)에 비유했다. 그 살인적인 고통을 5년 동안 감내했다. 대체로 플로베르는 동굴 속에 칩거한 고독한 ’, 크루아세의 은둔자를 자처하며 고행하는 수도승과 같은 자세로 문학함을 실천했다. ‘일물일어설의 창시자답게 비단 무엇이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쓰느냐, 문체의 문제에 어쩌면 최초로 골몰한 작가이기도 하다.

 

(아무리 봐도 블독이에요 ㅎㅎ)

 

으젠느 지로가 그린 초상화 속의 플로베르는 머리가 훌러덩 벗겨지고 눈은 반쯤 풀려 있으며 전반적인 생김새는 불도그를 닮았다. 덧붙여 183센티의 거구였던 그는 간질병 환자였거나 적어도 간질발작으로 추정되는 신경 발작에 시달렸다. 이런 그를 두고서, 말년에 두툼한 플로베르 전기(<집안의 백치>)를 썼던 사르트르가 남긴 말이 인상적이다. “그는 내 마음에 들지도 않고 우스꽝스럽지만, 그러나 <마담 보바리>를 썼다. 내 관심을 끈 것은 뚱뚱하고 키가 큰 그 둔한 인간과 그의 그 걸작 사이의 대조였다.”(사르트르, 대담)

 

과연 남성우월주의에 빠진, 오만하고 방탕한(혹은 그런 척한) 독신자를 좋아하기는 쉽지 않다. 한편 마담 보바리라는 제목이 붙은 이 소설은 샤를르의 어린 시절로 시작해서 약제사 오메에 관한 문장(“그는 이제 막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503))으로 끝난다. 이렇듯 바보들’(결국 죽는다)속물들’(결국 살아남는다)만 등장하는 <마담 보바리>를 좋아하기는 더 쉽지 않다. 그러나 낭만적 거짓의 허울을 벗겨내고 그 밑에 감춰진 소설적 진실을 보여준 이 작품이 소설의 교과서가 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 <책앤>

 

--  말미에 쓴 대로 소설가 지망생(^^;)은 꼭 탐독해야 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톨스토이도 <안나 카레니나> 쓰기 전에 이 책을 읽었더랬죠.) 소설이 안 써질 때면  재능의 부재가 아닌 노력의 부족을 탓하라!, 뭐, 이런 생각하며 떠올리는 작가입니다...^^;

 

위에 이미지를 가져다 놓았지만, 이자벨 위페르 주연의 <보바리>,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보바리의 삶이 얼마나 '연극적'(!)인지를 무척 잘 표현했던 것 같아요. 겸사겸사, <레이스 뜨는 여자>, <피아니스트> 등 (그녀와 동갑인 이자벨 아자니의 미모가 그렇듯 ^^;) 그녀의 매력과 연기력에 대해서는 굳이 말이 필요 없을 터. <브론테 자매>(?)인가 하는 영화에서는 이자벨 아자니가 에밀리 역을, 이자벨 위페르가 앤 역을 맡았는데요... 흠.

 

 

전설 같은 프랑스 여배우들을 한 자리에서 다 볼 있는 이런 영화가 있었죠...^^;  

 

한편, 러시아 소설 판 <보바리 부인>은 (역시나 불륜을 소재로한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보다는 ^^;) 체호프의 단편 <베짱이>인 것 같습니다. 아참, 이것도 불륜 얘기이긴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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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현 2013-03-08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선생님 안녕하세요 예전 서울대 러시아문학의 이해 수강생입니다.

방금전 보바리 부인을 다 읽고 감상문을 써보려고 검색하다가 선생님 글을 발견하였습니다.

이자벨 위페르의 '마담 보바리'를 한 번 봐야겠네요^^

2013-03-08 19: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

 

P시는 섬에서 제일 가까운 도시였다. 항구도시라는 이름은 바닷가와 부둣가에 있을 때만 실감났다. 무엇보다도 직장으로서는 T시와 다를 바 없었다. 조금만 안으로 들어가면 버스와 자동차가 매연을 내뿜고 땅 밑으로 지하철이 다니는, 평범한 지방 도시일 뿐이었다. 도심 번화가로 들어가면 갑갑하고 텁텁한 냄새에 숨이 턱턱 막혀왔다. 시민들은 적절히 촌스러웠지만 적절히 멋을 부렸고, 또 적절히 세련됐지만 적절히 촌닭 짓을 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바빴고 하나같이 비루했다. 떡붕어 아저씨도 곧 그 일원이 되었다. 그의 업무, 만나는 사람들의 종류는 T시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통장에 찍히는 입금액의 숫자를 높이기 위해 그는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새로이 직장을 구한 것이 기적이었다.

 

일이 끝났을 때, 그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P, 기차역 근처 슬럼가로 갔다. 천연의 빛이 하나도 들지 않는, 어둠 속에서 화려한 네온사인과 전깃불만이 반짝이는 곳, 그곳 깊숙이 박혀 있는 그 음습한 가게. 주인은 가게 한 구석의 나지막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단골손님을 보고도 일어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말을 붙여보았다.

그간 안녕하셨지요? 워낙 오랜만에 와서.”

그래도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초점이 없는 멍한 두 눈이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인기척을 듣고서 안에서 사람이 나왔다. 10여 년 전 주인의 모습을 보는 것 같은 환시가 일었다. 떡붕어 아저씨는 눈앞에 나타난 젊은 남자와 의자에 붙박여 있는 노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젊은 남자는 손님의 탐색이 끝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떡붕어 아저씨가 돈을 내놓자 그는 차분하게 돈을 셌다. 그러고는 또 안으로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을 때 그의 손에는 무척 작은 금괴 몇 개가 들려 있었다. 떡붕어 아저씨는 의아스러운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요즘 금이 정말 금값입니다.”

구태여 이런 말까지 해줘야 되냐는 식의 표정이었다.

 

떡붕어 아저씨는 가게를 나왔다. 횡단보도를 사이에 두고 기차역 광장이 보였다. 환한 낮이 시작됐다. 역사는 화려하고 투명한 수정궁이었다. 완만하게 뻗은 에스컬레이터가 묵묵히, 꾸준히 움직였고, 여행객들은 인상파 화가의 그림 속 신사숙녀처럼 정적인 자세와 표정으로 그 위에 서 있었다. 기차역 광장의 풍경은 좀 더 생기로웠다. 곳곳에서 비둘기들이 종종 걸음을 치고 푸드덕거리며 저공비행을 시도했다. 의자나 벤치에는 노숙자들과 노인들이 한가롭게 봄의 오후를 즐겼다. 떡붕어 아저씨는 그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의 자리는 햇빛이 잘 드는,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시큼한 지린내와 삭막한 노린내가 코를 간질였다. 어느 것이 노숙자 냄새고 어느 것이 정갈한 노인 냄새인지 알 수 없었다. 이 특이한 냄새들은 바닷바람에 실려 곧 허공중으로 흩어졌다. 그 냄새처럼 익숙한 한 마디가 실려 왔다.

 

밤돌아! 아이고, 내 새끼!”

이 사람이 노망이 들었나? 밤돌이가 어디 있어? 아이고! 밤돌이 이놈!”

밤돌은 떡붕어 아저씨의 본명이었다. 그의 반생은 이 난감한 이름으로부터 도피하는 시간이었다. 첫 아이의 이름을 절대로 순수 한글로, 덧붙여 누구의 귀에나 쏙 들어오는 낱말조합으로 짓고자 했던 부모의 존재는 모종의 상징 같았다. 이제 어쩔 수 없다. 또 다시 밤돌의 시간이 도래했다.

 

밤돌의 부모는 평생 P시 바깥을 나가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이 주말마다 기차역 광장에 나오는 것은 하나의 의식이었다. 처음에는 바로 어제집을 나간 아들을 기다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10년이 넘도록 반복되다 보니 이제는 그저 잠에서 깨면 눈을 뜨듯 자연스레 이곳으로 나왔다. 각각 절과 교회를 다녀온 뒤였다. 남편의 손에는 불경이, 아내의 손에는 붉은 장정의 성경이 들려 있었다.

 

한때는, 물론, 그들도 대한민국의 성실한 노동력이었다. 남편은 동네에서 조그만 병원을 경영했고, 아내는 P시 외곽에 있는 한 사립대에서 교편을 잡았다. 은퇴는 예정된 죽음의 순간처럼 찾아왔다. 이와 더불어 정말로 예기치 못한 죽음의 선언이 있었다. 바로 아들의 가출, 아니 출가 선언이었다. 그 무렵 아들, 즉 밤돌은 한창 왕성하게 사회생활을 하던 젊고 건강한 대한의 아들이었다. 그가 갑자기 장가가 아니라 낚시를 가겠다고 하자 부부는 껄껄 웃었다.

그래, 쉬는 법도 배워야지.”

하지만 아들이 말하는 낚시는 좀 달랐다.

아예 섬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이어 밤돌은 자신의 결심을 간결하지만 단호하게 설명했다. 한참 뒤에야 부부는 아들의 터무니없는 진의를 깨닫곤 아연실색했다.

아니, 지금 정신이 있는 거냐?”

그럼에도 설마, 하는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그 설마가 정녕 사람을 잡았다. 다음날, 밤돌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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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순간’, 그 이후의 삶

-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러시아의 고관 부인 안나 카레니나는 가정교사와 불륜 행각을 벌이다 발각된 오빠의 집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온다. 오빠와 올케 사이는 용케 봉합해놓지만, 정작 그녀 자신이 그날 기차역에서 만난 젊은 장교 브론스키에게 모종의 끌림을 느낀다. 당황한 그녀는 도망치듯 예정보다 빨리 페테르부르크로 떠나는데 도중에 브론스키가 그녀의 뒤를 좇아 같은 기차에 탔음을 알게 된다. 종착역, 마중을 나와 있는 남편 카레닌을 보자 , 어쩜! 저이의 귀는 어째서 저렇게 생긴 걸까?’(1, 229)라는 생각이 든다. 결혼한 지 거의 10년이 됐건만 왜 이제 와서 남편의 귀가 별안간 못생겨 보인 걸까. 말하자면 운명의 테러와 같은 열정 때문에, 지금껏 아름답고 정숙한 귀부인이자 다정다감한 어머니로 살아온 안나의 삶에 치명적인 균열이 생긴다.

 

 

 

 

 

 

 

 

 

 

 

 

 

8부로 이루어진 <안나 카레니나>는 이렇게 시작하지만 이 이 두툼한 소설의 내용을 요약하기는 쉽지 않다. 제목 그대로 안나 카레니나의 인생 역정, 즉 사회의 통념과 편견에 맞서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사랑을 지키고자 했던 한 여자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기도 하다. “난 더 이상 자신을 속일 수 없다는 걸 깨달았어. 난 살아 있는 여자야.”(2, 122) 그녀에게 있어 사랑은 삶의 동의어이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 그녀는 자신을 휘감고 옥죄는 거짓과 기만의 거미줄을 찢어버린다. 결국 그 대가로 그녀는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안나의 열정이 소설의 중심축을 형성함에도 작가의 주된 관심사가 거기에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톨스토이는 사랑과 연애, 심지어 결혼 자체도 아닌, 그 모든 것 이후에 오는 생활의 속성을 거시적이면서도 세밀하게 안팎에서 묘파해낸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1, 13) 이렇게 시작하는 <안나 카레니나>는 무엇보다도 가정 소설이며 사회 소설이며, 이른바 위대한 순간’(카타르시스의 순간)보다 그 이후의 삶을 문제 삼는다.

 

 

 

 

안나가 브론스키의 아이를 출산 직후 연출되는 장면을 보자. 죽음을 예감한 그녀는 남편 앞에서 회개하고 연민에 사로잡힌 카레닌은 부정한 아내와 그녀의 정부를 너그럽게 용서한다. 그러나 거국적인 화해로 점철된 위대한 순간은 그야말로 순간일 뿐, 그 이후 인물들은 이전보다 더 묵직한 일상의 시간을 살아내야 한다. 진정한 공포는 극적인 파국의 순간이 아니라 그 이후에 찾아오는, 철저히 관성의 법칙에 지배되는 저 생활의 무게에서 비롯된다. 다른 한편, 주인공의 자살과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에도 불구하고 총체로서의 삶은 지속된다. 더욱이 그 삶이란 레빈과 키티의 결혼생활이 보여주듯 지극히 보잘것없고 사소한 것으로 가득 차 있다.

 

 

 

소설의 맨 앞으로 돌아가자.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 <안나 카레니나>의 제사이다. 불륜의 주체였던 안나는 물론이거니와 각기 다양한 방식으로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한 모든 이들에 대한 심판을 인간의 차원이 아닌 더 높은 심급으로 이월시키려는 작가의 의도가 엿보인다. 레빈의 형의 말대로 심판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이 지점에서 <안나 카레니나>는 간음을 소재로 죄와 벌, 타락과 구원의 문제를 다룬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소설로 거듭난다.

 

그러나 실제 소설 속에서는 기독교적 신이 형상적으로 부각되지도 않거니와 오히려 이신론(理神論)의 세계관이 지배적이다. 가령 안나는 무섭게 생긴 한 농부가 침실 한 구석에서 열심히 무슨 일을 하며 프랑스어로 뭐라고 읊조리는 것 같은 꿈을 꾼다. 자살하기 전날 밤에도 거의 비슷한 꿈을 꾸고, 자살하는 순간에도 명멸하는 그녀의 의식의 한가운데로 그 농부가 떠오른다. 그의 손에 쥐어진 철은 안나가 브론스키를 처음 만난 순간 한 역무원의 목숨을 앗아간 기차-철로의 상징이며, 그것이 계속 그녀의 무의식을 장악하다가 그녀를 달려오는 기차 밑으로 던져넣은 것은 아닐까. 이런 가정이 유물론의 산물이든 미신의 산물이든 어떻든 인간 개개인의 삶과 세계의 흐름을 관장하는 어떤 거대한 힘(때로는 자연이라 불리는)이 있는 것이며 아무리 위대한 순간도 그것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다.

 

 

 

 

 

 

 

 

 

 

 

톨스토이의 이름 앞에는 흔히 러시아의 대문호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실제로 그의 소설은 19세기 러시아 귀족 사회의 세태와 풍습을 꼼꼼하고 치밀하게 담아낸 백과사전일뿐더러 러시아문학 특유의 심리적 깊이, 각종 사회 문제에 대한 통찰,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사유까지 갖추고 있다. 그 기저에는 그가 유서 깊은 백작 가문의 후예로서 유년시절부터 평생 동안 쌓아올린 직간접인 경험과 폭넓은 사유, 학습의 성과가 깔려 있다. 거장의 여러 자아가 소설 속 인물의 모습으로 살아나기도 한다. 도시의 번잡한 사교계를 떠나 시골의 영지를 경영하며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그러면서 사상적 추구에 골몰하기도 하는 지주 귀족 레빈은 작가의 직접적인 분신이다. 그러나 그가 꿈꾼 가장 이상적인 자신의 모습은 허름한 농민 차림에 봇짐을 진 순례자였던 듯하다. 노작가는 해묵은 가정불화 끝에 오랜 숙원을 실행에 옮겼으나 그의 마지막 여행은 안타깝게도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결국 그는 시골의 외딴 기차역에서 82년에 걸친 인생을 마감한다.

 

 

 

 

 

 

 

 

 

 

 

 

 

 

 

 

 

 

 

 

-- <책앤>

 

--- 톨스토이 번역 중입니다! 큰 작품을 맡고 싶은 욕심이 없지 않으나, 여러 정황상, 좀 규모 있는 단편을 하고 있는데, 역시 번역은 '중-노-동-'입니다.  독려 차원에서 <안나 카레니나>에 관한 글을 올려봅니다.

-- 작가의 밑천은 물론 자신의 삶 전체니까 당연한 소리이지만, 톨스토이는 그 인생 자체가 톨스토이 소설감인 것 같습니다. 실제로 그의 소설은 거의 백프로 자전소설이고요. 당대에는 자타가 공인하는 '엄친아'(부유한 백작에 젊고 예쁜 아내에 명성에 등등)이고 죽어서는 거장이고, 흠, 이런 재수 없는(ㅋㅋㅋ) 인물도 있지만, 솔직히, 단편 하나만 읽어봐도 입이 쩍~ 벌어지긴 합니다...^^;; 그러니까 더 재수 없고..-_-;; 그에 대한 얘기는 언제 또 하도록 하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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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악마를 어찌할 것인가

- 윌리엄 골딩, <파리대왕>

 

 

 

 

 

비행기에 탄 채 어디론가 이송되던 소년들이 불의의 사고로 바다 한가운데 무인도에 불시착한다. <파리 대왕>은 이 소년들의 모험담을 다루고 있지만 모험소설이나 성장소설로 읽히지는 않는다. 차라리 디스토피아 소설, 혹은 우화의 형식 속에 인간의 본성과 그것의 사회적 발현인 정체(政體)에 대한 사유를 담아낸 철학소설에 가깝다 

(베엘제붑(-불)/파리대왕)

 

소년들은 크게 랠프 파와 잭 파로 나뉘는데, 이를 통해 이성과 광기(본능), 문명과 야만, 어른의 세계와 아이의 세계, 낙관주의와 냉소주의, 민주주의와 전체주의 등의 이분법이 형성된다. ‘쿠데타-혁명으로 정권을 쟁취한 후 불이 필요해지자 피기의 안경을 훔쳐가 버린 잭 일당 앞에서 랠프와 피기가 하는 말이 나름의 도식이 될 수 있겠다. 두 소년의 과 잭 일당의 야유와 함성도 묘한 대조를 이룬다.

 

나는 이 말을 해야겠어. 너희들은 마치 한 패의 어린아이들처럼 처신하고 있다는 것을

야유소리가 높아졌다가 돼지가 마술적인 힘을 가진 흰 소라를 쳐들자 다시 조용해졌다.

어느 편이 좋겠어? 너희들같이 얼굴에 색칠한 검둥이처럼 구는 것과 랠프같이 지각 있게 구는 것과

오랑캐들 사이에서 큰 함성이 터졌다. 돼지는 다시 소리쳤다.

규칙을 지키고 합심을 하는 것과 사냥이나 하고 살생을 하는 것 - 어느 편이 더 좋겠어?

다시 함성과 휙 하고 날아오는 소리.

소음에 지지 않고 랠프가 다시 외쳤다.

법을 지키고 구조되는 것과 사냥을 하고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 중 어느 편이 좋으냔 말이야?(270)

 

랠프는 해군 중령의 아들로서 아빠 없는 피기를 은근히 무시하고 또 피기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그의 별명(피기-돼지)을 다른 아이들에게 알리지만,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수호할 의지와 능력을 갖춘, 온화한 유형의 지도자-대장으로 나온다. 피기 역시 훌륭한 통치자의 멘토, 즉 지성의 상징이다. 그럼에도 성가대 지휘자로서 카리스마를 발휘하던 야심가 잭 대신 랠프가 선거를 거쳐 대장으로 선출되는 데 엄정하고 필연적인 논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선거 장난은 소라만큼이나 모두의 마음에 들었다. 잭은 항의를 하기 시작했으나 좌중의 고함소리는 대장을 골라내자는 일치된 의견에서 박수갈채로 랠프를 선출하자는 것으로 변했다. 그 이유는 아무도 설명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성(知性)이라고 할 만한 것을 보여준 것은 돼지였고, 한편 누가 보아도 지도자다운 소년은 잭이었다. 그러나 앉아 있는 랠프에게는 그를 두드러지게 하는 조용함이 있었다. 몸집이 크고 매력 있는 풍채였다. 뿐만 아니라 은연 중 가장 효과적인 것은 소라였다. 그것을 불고 그 정교한 물건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화강암 고대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존재 - 그런 존재는 별난 존재였던 것이다.(30)

 

그 때문인지 랠프와 잭의 연대는 시작부터 위태롭다. 우선 구조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불을 피워 연기를, 즉 봉화를 올리자는 견해와 당장 먹을 식량을 구하기 위해 사냥을 하자는 견해가 대립한다. 작가는 은근히 전자 쪽에 손을 들어주지만 과연 어느 쪽이 옳다고 정언적으로 말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또 잭 일당을 얼굴에 색칠을 한 채, 즉 가면을 쓴 채 짐승처럼 날뛰는 오랑캐, 공포와 폭력의 축으로 몰아간 것(상당히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암퇘지 사냥 장면이나 사이먼-‘짐승살해 장면)은 영국 작가 특유의 결벽증의 산물인지도 모르겠다.

 

 

 

 

 

 

 

 

 

 

 

 

 

 

 

대체로 <파리 대왕>의 내포 작가는 어디로 튈 줄 모르는 아이-자식을 바라보는 어른-아빠와 유사하다. 어른-아빠는 소위 착하고 똑똑한 아이들(랠프와 피기)이나 아직 백지 상태에 가까운 꼬마들이 자신의 권위를 따르며 그 훌륭하고 질서정연한 세계를 모방하길 바란다. 소라의 이용, 선거 흉내, 봉화 지키기 등에 반영된 의회 민주주의의 미니어처를 보라. 한데 하나의 전범이나 희망의 형태로만 존재하던 어른-아빠가 소설의 말미에서 갑자기 진짜로 등장한다. 이 해군 장교가 아이들에게 던진 첫 질문이 성인들 - 어른들도 함께 있니?”(300)라는 점은 꽤 의미심장하다. 사태를 어느 정도 파악한 다음 그는 어른-아빠특유의 점잖은 완곡어법으로 아이들을 나무란다.

 

영국의 소년들이라면너희들은 모두 영국 사람이지?그보다는 더 좋은 광경을 보여줄 수가 있었을 텐데. 내 말은…」(302)

 

진짜 어른-아빠앞에서 아이들은 더 이상 어른 흉내를 낼 수 없다. 그토록 호기롭고 용감하게 어른의 세계를 구축했던 잭마저도 몸부림치며 울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과연 어른-아빠의 세계는 완벽할까 

 

<파리 대왕>어른-아빠가 아이들을 구원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소설 바깥에 더 큰 공포가 도사리고 있음을 간과하지 않는다. 섬 속의 아이들이 봉화냐, 사냥이냐 하는 문제로 다투다가 결국 두 명의 희생양을 내기에 이르렀다면, 섬 밖의 어른들은 숫제 핵전쟁을 벌이고 있다. 어른 세계라고 짐승이라는 이름의 불안과 공포가 없을 리 없다. 잭 일당에게 잔인하게 살해된, 무수한 파리 떼로 뒤덮인 암퇘지의 머리, 파리 대왕’(베엘제붑-악마)은 우리 안에 있으며 그것이 결코 아이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 이것이 진정한 비극이다.

 

(사이먼)는 재빨리 눈을 떴다. 야릇한 햇볕 속에 그 머리는 재미있다는 듯 씽긋 웃고 있었다. 꾀는 파리도 도려낸 창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막대기에 꽂혀 있다는 창피함조차도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투로 -(205)

 

 

-- 네이버캐스트

 

-- 저 글을 쓰며 처음 읽어봤는데요(-_-;;)  그 명성에 비해... 좀 실망했습니다.(영화는 오히려 괜찮았는데요.)  전반적인 주제는 아무래도, 도...키의 <악령>에 가까울 법도 합니다만. 영국 소설은 아무래도 너무 귀족적인(??) 감이 있어요. 최고 소설가는  코난 도일과 아가사 크리스티??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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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01-18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대생활하하던 1984년에 '1983년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부러 누군가에게 부탁해서 사 읽었던 책인데, 이 소설이 영화로도 제작되었다는 건 금시초문이네요.

구원의 상징이었던 불(안경으로 발생시켰던)을 둘러싼 다툼, 추적자의 신호소리, 히죽이 웃던 '파리대왕'의 등장 등등에서 적잖이 '충격적인 모습으로 다가왔던' 소설이었던 기억이 나네요. 이 소설을 읽기 직전에 읽었던 또다른 노벨상 수상작 '백년동안의 고독'도 같이 언급해 주시니 더욱더 옛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네요.

푸른괭이 2013-01-20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백년...>은 아직 다룰 기회가 없었네요-_-;;

DANNYJ 2013-01-22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미국에서 잘 보고 갑니다:) 앞으로도 더 유익한 포스팅 부탁드려요!

푸른괭이 2013-01-22 15:38   좋아요 0 | URL
예,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