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삶을 쟁취하다
- 샬럿 브론테, <제인 에어>
어려서 부모를 잃고 외숙부의 집에 맡겨진 소녀가 있다. 외숙부마저 죽어버리자 소녀는 그야말로 군식구가 된다. 그런데도 고분고분하기는커녕 곧잘 악다구니를 쓰며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다. 결국 그 벌로 ‘붉은 방’에 갇힌다. 게이츠헤드 저택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방, 하지만 외숙부가 그곳에서 임종을 맞은 뒤로 아무도 살지 않는 방, 불도 때지 않아 썰렁한 방, 유령이 나와도 전혀 이상할 것 같지 않은 방. 붉은 방의 어둠을 응시하며 소녀는 “억울해! 정말 억울해!”라고 외친다. 못 생긴데다가 당돌하기까지 한 열 살짜리 소녀는 ‘못된’ 외숙모와 외사촌들 틈에서 세상이 참 공평하지 않다는 일찌감치 깨달은 것이다.
제인 에어는 로우드 자선 학교에서 8년을 보낸 후 자유를 갈망하며 손필드 저택의 가정교사로 들어간다. 열여덟 살이 되었건만 여전히 못 생기고 키고 작고 비썩 마른 그녀 앞에 로체스터가 나타난다. 말하자면 ‘남자’가 나타난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로맨스도 없고 흥미도 없는 평범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조한 생활의 한 시간에 변화를 갖다 준 셈이었다. 나의 도움이 필요하였고 희구되었고 또 나는 그것을 부여하였다. 무슨 일을 했다는 것이 내게는 기뻤다. (중략) 게다가 그것은 새 얼굴이었고 흡사 기억의 화랑에 집어넣은 새 그림과 같았다. 이미 거기에 걸려 있는 딴 그림과는 전혀 다른 그림이었다. 첫째, 남성의 얼굴이었다는 점에서 그러했고 둘째로는 사납고 씩씩하고 검은 얼굴이었다는 점에서 그러하였다.(1권, 209)
본격적으로 열정의 드라마가 시작된다. 수시로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고딕소설 속의 성과 같은 손필드 저택, 미남도 아니고 성격도 괴팍하지만 어딘가 우수에 차 있는 남자, 가정교사와 부유한 귀족이라는 신분의 벽, 스무 살에 가까운 나이 차이…. 이로써 로맨스소설의 요건이 갖추어진다. 사건의 흐름과 속도는 더 기막히다. 한밤중에 로체스터의 방에 불이 나고 제인은 그를 구한다. 파티 날, 로체스터는 점쟁이로 분장해 제인의 속마음을 떠본다. 외숙모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제인이 한 달간 손필드를 떠난다. 그리움이 그들의 사랑을 점검하도록 해준다. 잉그램 양을 사이에 둔 삼각관계가 진전되면서 사랑은 더 깊어간다. 손필드 저택의 비밀이 조금씩 드러나, 아슬아슬한 긴장을 더한다. 애정의 표현 방식 역시 적절한 수위를 넘지 않으며 우리의 연애 욕망을 간질인다. 드디어, 제인과 로체스터의 결혼식. 그러나 뜻밖의 파국으로 인해 제인은 손필드를 도망치듯 떠난다. 다시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연인들은 재회하여 가정을 꾸린다. 인물들도 행복하고 독자도 행복한 결말이다. 가히, 달콤한 낭만성을 무기로 내세운 최고의 연애소설답다.
(여러 <제인 에어> 중 제일 마음에 들었던 BBC 영드 <제인 에어>. 단, 원래 제인은 체구가 왜소해야 하는데, 이 제인은 너무 튼실했다는..-_-;; 꽤 길지만 보는 동안 행복했습니다 ^^;)
이 러브스토리를 재구성해보자. 불쌍한 고아 소녀가 가난한 가정교사를 거쳐 대저택의 어엿한 안주인이 된다. 신데렐라 콤플렉스의 실현, 시쳇말로 ‘된장녀’ 이야기이다. 과연 그런가? 빅토리아조의 19세기 영국, 여성은 오직 ‘여자’의 길을 충실히 감으로써만 인간일 수 있었다. 간단히 결혼, 출산, 육아, 살림 등이다. 물론, 제인이 추구했고 또 손에 넣은 가치도 그것이다. 단, 그녀에게는 그럴 듯한 집안도, 미모도 없었다. 대신 그녀는 자신의 ‘분수’를 똑똑히 알고서 세상의 법칙과 당당히 맞섰다. 인간으로서의 최소치의 존엄은 이런 식으로 유지된다.
“제가 가난하고 미천하고 못생겼다고 해서 혼도 감정도 없다고 생각하세요? 잘못 생각하신 거예요! 저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혼도 있고 꼭 같은 감정도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제가 복이 있어 조금만 예쁘고 조금만 부유하게 태어났다면 저는 제가 지금 당신 곁을 떠나기가 괴로운 만큼, 당신이 저와 헤어지는 것을 괴로워하게 할 수도 있었을 거예요. 저는 지금 관습이나 인습을 매개로 해서 말씀드리는 것도 아니고 육신을 통해 말씀드리는 것도 아녜요. 제 영혼이 당신의 영혼에게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마치 두 영혼이 다 무덤 속을 지나 하느님 발밑에 서 있는 것처럼, 동등한 자격으로 말이에요. 사실상 우리는 현재도 동등하지만 말이에요!”(2권, 32)
“억울해! 정말 억울해!”라며 엉엉 울던 소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한 남자를 향해 대책 없이 열정을 불태우고 결국 그 남자를 자기 품에 안음으로써 제인은 사랑 이상의 것을, 삶 자체를 쟁취한다. ‘로체스터 씨’가 아닌 그냥 ‘에드워드’, 원죄와도 같은 어두운 과거 때문에 눈이 멀고 쇠락한 한 남자. 첫 눈에 반한 사랑이자 마지막까지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 여성이 열정과 삶의 주체가 되었다는 것, 나아가 기록-문학의 주체가 되었다는 것은 비단 제인의 인생에서뿐만 아니라 문학사의 관점에서 볼 때도 놀라운 성취이다. 물론, 그것은 <제인 에어>의 작가가 이룩한 위업이기도 하다.
(외유내강 이미지의 제인으로는 샬럿 갱스부르가 떠오르네요. 위에 인용한 저 대사 읊을 때 인상적이던데.)
샬럿 브론테는 이십대 때 뼈아픈 사랑을 겪고 계속 노처녀로 살다가 서른여덟에 결혼했다. 그리고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임신한 상태에서 병사했다. 여자로서, 아니, 그냥 인간으로서도 제법 처량한 운명이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의 기억을 투영하여 만들어낸 제인 에어는 ‘붉은 방’을 빠져나와 행복과 평온의 왕국에서 영생을 누리고 있다. 이만하면 브론테의 운명도 어느 정도 보상되지 않았을까.
-- 네이버 캐스트
-- 제각기 나름 걸출한 작가였던 브론테 자매를 소재로 만든 영화. 에밀리 역을 이자벨 아자니가 맞는 바람에 형평성(??)이 완전 깨져버렸어요 ㅋ 인지도가 제일 낮은 앤 브론테 역은 보다시피, 이자벨 위페르가 맡았습니다.
--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한 소설은 아무래도 에밀리의 <폭풍의 언덕>입니다만, 소설 자체는 샬럿이 좀 더 잘 썼던 것 같아요....^^;
-- BBC판 <제인 에어>의 마지막 장면(가족 사진 찍는)인데, 이미지가 너무 작네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