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을 정면에서 너무 오래 들여다보지 말라.”

- 멜빌, <모비딕>(1851)

 

 

  <모비딕>이 자신의 다리를 빼앗아간 고래에게 복수를 하다가 파멸하는 한 인간의 이야기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고래 뼈로 만든 의족에 몸을 의지한 채 두려움을 모르는 시선으로 앞만 바라보며 서 있는 노인, 신을 믿기는커녕 그 스스로 신이고자 하는 존재, ‘대학물까지 먹었으면서도 식인종과 어울린 적도 있는 거친 뱃사람. 에이해브 선장은 시종일관 신비스러운 존재로 그려지는데, 고래를 향한 집요한 복수심과 비장한 투지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스타벅의 눈에는 광기로, 불경스러운 반역으로 보인다. 근육질의 건강한 몸에 청교도적인 윤리와 합리적 실용주의를 겸비한 30세의 일등항해사는 당차게 말한다. “저는 고래를 잡으러왔지, 선장님의 원수를 갚으러 온 것이 아닙니다.”(216) 복수 따위는 돈벌이도 되지 못하거니와 그저 맹목적인 본능으로 공격을 했을 뿐인 말 못 하는 짐승에게 원한을 품었다가는 천벌을 받으리라는 것.

 

 

 

 

 

 

 

 

 

(세상에 쉬운 번역이 없겠지만, <모비딕> 완역하신 분,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하지만 이런 짐승에게서 에이해브는 가시적인 판지 가면로 가려진 뭔가 거대한 힘의 원천을 본다. “공격하려면 우선 그 가면을 뚫어야 해! 죄수가 감방 벽을 뚫지 못하면 어떻게 바깥세상으로 나올 수 있겠나? 내게는 그 흰 고래가 바로 내 코앞까지 닥쳐온 벽일세.”(217) 개인적인 복수심뿐만 아니라 인간의 이성과 의지로는 어찌할 수 없는 운명(신 혹은 자연)을 향한 분노를 모조리 고래에게 쏟아 붓는 것이다. 어떻든 열여덟 살의 어느 아름다운 날 처음 고래를 잡은 이래 40년 동안을 바다의 고래와 더불어 살아온 노선장의 한탄은 교향곡처럼 깊고 묵직한 울림을 낸다. 그는 당장 진로를 바꾸어 돌아가자는 스타벅의 바람직한 충고를 따를 수 없다. 고래, 특히 모비딕이야말로 그의 유일한 존재 이유인 까닭이다. “모든 것을 파괴하지만 정복하지 않는 고래여! 나는 너에게 달려간다. 나는 끝까지 너와 맞붙어 싸우겠다. 지옥 한복판에서 너를 찔러 죽이고, 증오를 위해 내 마지막 입김을 너에게 뱉어주마.”(681) 그러고서 에이해브는 고답적인 비극의 주인공답게 고래와 함께 바다 깊숙이 침몰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마감한다. 하지만 이 비장한 운명극은 이 소설의 일부를 이룰 뿐이다 

(모비딕, 향유고래.)

 

<모비딕>은 원제(“Moby-Dick or, The Whale”)가 말해주듯 고래의 생김새와 생태와 종류, 고래를 잡고 해체하고 보관하고 활용하는 법, 고래 요리의 종류와 역사 등 정녕 고래학과 포경(捕鯨)에 관한 책이다. 모비딕은 고래 일반을 대표하는 짐승임과 동시에 <피쿼드> 호의 여느 선원들보다 더 또렷한 형상과 성격을 가진 인물이기도 하다.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몸집, 이마에는 주름이 잡혀 있고 등에는 하얀 혹이 피라미드처럼 높이 솟아 있는, 인간처럼 교활한 지성과 영원한 악의를 뽐내는 독특한 향유고래! 무엇보다도 본질적으로 색깔이라기보다 눈에 보이는 색깔이 없는 상태인 동시에 모든 색깔이 응집된 상태”(246)와 같은 저 흰색이 압도적이다. 검푸른 바다를 뚫고 용트림하는 하얗고 거대한 힘 앞에서 움츠러들지 않을 수 있을까.

 

(뱃사람처럼은 안 보이죠?ㅎㅎ)

 

한데 최후의 접전에서 살아남은 자는 비장함과도, 합리적 실용주의와도 무관한 인물이다. “내 이름을 이슈메일이라고 해두자.”(31) 이렇게 운을 떼는 청년은 지갑도 거의 바닥나고 뭍에는 딱히 흥미로운 것도 없어 기분 전환 삼아 배를 타게 되었다. 하필 포경선이었던 것은 거대한 고래, 그 경이롭고 신비로운 괴물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이 출사표에 대해 때론 비장한 말을 늘어놓기도 하지만 그의 어조는 대체로 덤덤하다. 자신이 속한 연극판과 자신의 역할에 대한 인식도 명징하다. “다른 사람들은 고상한 비극에서 당당한 역할을 맡거나 우아한 희극에서 짧고 쉬운 역할을 맡거나 익살극에서 유쾌한 광대 역할을 맡는데, ‘운명이라는 무대감독이 왜 나한테는 고래잡이 항해의 이 초라한 역할을 맡겼는지, 그 정확한 이유는 나도 알 수 없다.”(36) 그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것도 그렇다. 퀴퀘그의 관과 <레이첼> 호 덕분인데, 이런 흐름을 관장하는 메커니즘의 원리는 어떤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해 이슈메일 나름의 답은 이렇다. “인간들이여! 불을 정면에서 너무 오래 들여다보지 말라.”(511)

 

 

 

 

 

 

 

 

 

 

 

 

 

 

 

 

포경선은 나의 예일 대학이며 하버드 대학”(158)이라는 이슈메일의 고백은 작가에게도 적용된다. 멜빌 문학의 자양분 중 하나는 포경선과 남태평양의 섬에서 쌓은 경험이다. 그 토대 위에서 형상화된 자연의 이면에는 물론 문명이 도사리고 있다(멜빌의 후기의 역작인 필경사 바틀비는 문명의 한가운데 놓인 인간의 본질을 절묘하게 포착한다). 인종 박물관처럼 보이는, 총 서른 명의 선원을 실은 <피쿼드> 호는 19세기 중엽 미합중국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주인공들의 이름에서부터 여실히 드러나는 성경 텍스트가 이 작품의 보편성과 영구성을 부여해주기도 한다. 삼십대 초반의 작가가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십분 활용하여 공들여 쓴 소설이 <모비딕>이다. 이 소설과 함께 작가가 망각과 침묵의 바다 속에 침몰한 형국이랄까. 20세기 , <모비딕>의 부활은 눈 덮인 산 같은 모비딕이 바다 위로 웅비하는 모습을 반복하는 것 같지 않나.

 

-- <책&>

 

-- <모비딕>의 작가가 가장 열등감을 느낀 작가는 너대니얼 호손이었던 것 같은데, 언제 기회가 되면 다시 읽어봐야죠 ㅋ  <큰바위얼굴>은 연극도 하고 그랬는데...

 

 

 

 

 

 

 

 

 

 

 

 

 

 

 

-- 오로지 거대한 이미지, 숭고함, 뭐 이런 것 때문에 <모비딕>과 함께 연상되는 화가는 아이바조프스키입니다. 그의 그림은 종류 불문, 갤러리에서 실제로 보면 문자 그대로 압.도.(압사?)당합니다..^^;; 칸트의 숭고미 설명할 때 항상 언급하는 화가이기도.. ㅋ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시퍼런 빛이 식칼의 서슬처럼 깔려 있는 싸늘한 방. 긴 탁자 위에 내가 죽어 누워 있다. ‘가 내 곁으로 다가온다. 무심한 시선을 한 번쯤 주기도 한다. 곧 뭔가가 내 몸에 닿는다. 싸늘하면서도 부드럽고 축축한 감촉. 내 몸이 닦이기 시작한다. , 종아리, 무릎, 허벅지손을 놀리는 솜씨가 제법 노련하다. 떨림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 손길이 나의 허리께에 닿는다. 이어, ‘는 다소간 힘을 주어 내 다리 하나를 들어올린다. 그렇게 엉덩이까지 닦인다. 이제 나의 하복부를 건드린다. 그 다음, 배꼽을 스쳐지나간다. 배꼽 근처에서 가 잠깐 숨을 가다듬는다. 그러곤 손에 힘을 잔뜩 주어 배를 누르다시피 훔쳐낸다.

-.

죽어 누워 있는 내 배에서 꺼-억 소리가 깊은 울림을 내며 올라온다. 트림? 설마! 하지만 싸늘한 방이 위액이 뒤섞인 시큼한 음식 냄새로 가득 찬다. 순식간에 서슬 퍼런 빛이 와장창 깨진다. 나도 모르게 몸뚱어리가 나무토막 마냥 진동한다. 또 한 번 꺼-억 소리가 흘러나온다.

 

-억 소리는 자명종 소리에 묻혀버렸다. 눈을 떴다. 속이 쓰리다. 머리도 묵직하다. 또 이 꿈이라니. 나를 향해 돌아누운 아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아내는 내 가슴팍에 손을 댄 채 어린아이처럼 곤히 자고 있다. 아침 630. 아내에겐 한밤중이나 다름없는 시간이다. 간단히 샤워를 하고 다시 방으로 왔을 때도 아내는 똑같다. 그래도 내가 옷을 입는 동안엔 잠시나마 눈을 떴다.

출근하는 거야?”

반쯤 감긴 눈엔 배시시 미소가 감돌고 목소리는 졸음에 겨워 나른하다.

빨리 들어와. 맛있는 거 해놓을게.”

두 번째 말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아내는 언제 잠에서 깼었냐는 듯 다시 곯아떨어졌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아내가 쉬는 날이다. 보나마나 정오까지 침대에서 자다 깨다를 반복하면서 허리가 아플 때까지 누워 있을 것이다. 그렇게 중간 중간 끊기는 몇 개의 꿈을 이어서 웬만한 시나리오 하나쯤은 거뜬히 구성한 뒤 남은 잠마저도 싹 소진시켜버리는 게 아내의 해묵은 습관이었다.

 

문을 한 번 확인한 뒤 나는 집을 나섰다. 몸은 아까 꿈속에서와는 달리 자동인형처럼 빈틈없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차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하자, 간밤에 축적된 뉴스가 내 귓전을 단조롭게 맴돌았다. 얼마 뒤엔 대로로 나왔다. 신호등 앞에 이르러, 차가 섰다. 순간, 지금까지의 기계적인 움직임을 바꾸려는 듯 몸이 움찔했다. -. 아침을 너무 급히 먹었나? 뉴스를 전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 사이로, 또다시 그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내 뱃속에서 올라오는 트림인지 내 귓전을 맴도는 꺼-억 소리의 환청인지 나도 헷갈렸다. 신호가 바뀌었고 다시 차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억 소리는 집요하게 내 귀를 후벼 파서 급기야 뇌수로까지 잠입한 미국 대선 뉴스에 묻혀버렸다.

 

845. 사무실로 들어가 커피 한 잔을 타서 책상 앞에 앉았다. 다시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꿈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래 전부터 간헐적으로 계속 나의 무의식 속을 찾아들어선 나의 의식을 흩뜨려놓곤 했다. 하지만 한동안 뜸했던 그 꿈이 결혼 이후에 더 빈번해진 이유는 무엇일까. 아니, 그보단 15년쯤 전에 한 친구한테서 그 꿈을 넘겨받은 것 같은 기괴한 느낌이 왜 자꾸 드는 걸까.

 

2.

 

대학교 1학년 때였다. 한 친구가 시체 닦는 아르바이트를 해보지 않겠냐고 권했다. 학과 동기라는 인연 탓에 함께 수업을 듣고 간혹 모임에서 술을 함께 마시곤 하는 사이, 전화를 하려면 번호 두어 자리가 생각이 안 나 수첩을 뒤적여 봐야 하는 그런 사이였다. 나는 선뜻 그러자고 했다. 특별히 용돈이 부족해서도, 인생의 경험을 쌓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돈이야 급하면 부모한테 갈취할 수도 있고 경험이란 원래 생활 속에서 자연스레 축적되는 것이지 인위적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니까. 한마디로, 친구 따라 강남 간 꼴이었다.

(계속)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사랑을, 삶을 쟁취하다

- 샬럿 브론테, <제인 에어>

 

 

 

 

어려서 부모를 잃고 외숙부의 집에 맡겨진 소녀가 있다. 외숙부마저 죽어버리자 소녀는 그야말로 군식구가 된다. 그런데도 고분고분하기는커녕 곧잘 악다구니를 쓰며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다. 결국 그 벌로 붉은 방에 갇힌다. 게이츠헤드 저택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방, 하지만 외숙부가 그곳에서 임종을 맞은 뒤로 아무도 살지 않는 방, 불도 때지 않아 썰렁한 방, 유령이 나와도 전혀 이상할 것 같지 않은 방. 붉은 방의 어둠을 응시하며 소녀는 억울해! 정말 억울해!”라고 외친다. 못 생긴데다가 당돌하기까지 한 열 살짜리 소녀는 못된외숙모와 외사촌들 틈에서 세상이 참 공평하지 않다는 일찌감치 깨달은 것이다.

 

 

 

 

 

 

 

 

 

 

 

 

 

 

 

제인 에어는 로우드 자선 학교에서 8년을 보낸 후 자유를 갈망하며 손필드 저택의 가정교사로 들어간다. 열여덟 살이 되었건만 여전히 못 생기고 키고 작고 비썩 마른 그녀 앞에 로체스터가 나타난다. 말하자면 남자가 나타난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로맨스도 없고 흥미도 없는 평범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조한 생활의 한 시간에 변화를 갖다 준 셈이었다. 나의 도움이 필요하였고 희구되었고 또 나는 그것을 부여하였다. 무슨 일을 했다는 것이 내게는 기뻤다. (중략) 게다가 그것은 새 얼굴이었고 흡사 기억의 화랑에 집어넣은 새 그림과 같았다. 이미 거기에 걸려 있는 딴 그림과는 전혀 다른 그림이었다. 첫째, 남성의 얼굴이었다는 점에서 그러했고 둘째로는 사납고 씩씩하고 검은 얼굴이었다는 점에서 그러하였다.(1, 209)

 

본격적으로 열정의 드라마가 시작된다. 수시로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고딕소설 속의 성과 같은 손필드 저택, 미남도 아니고 성격도 괴팍하지만 어딘가 우수에 차 있는 남자, 가정교사와 부유한 귀족이라는 신분의 벽, 스무 살에 가까운 나이 차이. 이로써 로맨스소설의 요건이 갖추어진다. 사건의 흐름과 속도는 더 기막히다. 한밤중에 로체스터의 방에 불이 나고 제인은 그를 구한다. 파티 날, 로체스터는 점쟁이로 분장해 제인의 속마음을 떠본다. 외숙모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제인이 한 달간 손필드를 떠난다. 그리움이 그들의 사랑을 점검하도록 해준다. 잉그램 양을 사이에 둔 삼각관계가 진전되면서 사랑은 더 깊어간다. 손필드 저택의 비밀이 조금씩 드러나, 아슬아슬한 긴장을 더한다. 애정의 표현 방식 역시 적절한 수위를 넘지 않으며 우리의 연애 욕망을 간질인다. 드디어, 제인과 로체스터의 결혼식. 그러나 뜻밖의 파국으로 인해 제인은 손필드를 도망치듯 떠난다. 다시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연인들은 재회하여 가정을 꾸린다. 인물들도 행복하고 독자도 행복한 결말이다. 가히, 달콤한 낭만성을 무기로 내세운 최고의 연애소설답다.

 

(여러 <제인 에어> 중 제일 마음에 들었던 BBC 영드 <제인 에어>. 단, 원래 제인은 체구가 왜소해야 하는데, 이 제인은 너무 튼실했다는..-_-;; 꽤 길지만 보는 동안 행복했습니다 ^^;) 

 

이 러브스토리를 재구성해보자. 불쌍한 고아 소녀가 가난한 가정교사를 거쳐 대저택의 어엿한 안주인이 된다. 신데렐라 콤플렉스의 실현, 시쳇말로 된장녀이야기이다. 과연 그런가? 빅토리아조의 19세기 영국, 여성은 오직 여자의 길을 충실히 감으로써만 인간일 수 있었다. 간단히 결혼, 출산, 육아, 살림 등이다. 물론, 제인이 추구했고 또 손에 넣은 가치도 그것이다. , 그녀에게는 그럴 듯한 집안도, 미모도 없었다. 대신 그녀는 자신의 분수를 똑똑히 알고서 세상의 법칙과 당당히 맞섰다. 인간으로서의 최소치의 존엄은 이런 식으로 유지된다.

 

제가 가난하고 미천하고 못생겼다고 해서 혼도 감정도 없다고 생각하세요? 잘못 생각하신 거예요! 저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혼도 있고 꼭 같은 감정도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제가 복이 있어 조금만 예쁘고 조금만 부유하게 태어났다면 저는 제가 지금 당신 곁을 떠나기가 괴로운 만큼, 당신이 저와 헤어지는 것을 괴로워하게 할 수도 있었을 거예요. 저는 지금 관습이나 인습을 매개로 해서 말씀드리는 것도 아니고 육신을 통해 말씀드리는 것도 아녜요. 제 영혼이 당신의 영혼에게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마치 두 영혼이 다 무덤 속을 지나 하느님 발밑에 서 있는 것처럼, 동등한 자격으로 말이에요. 사실상 우리는 현재도 동등하지만 말이에요!”(2, 32)

 

억울해! 정말 억울해!”라며 엉엉 울던 소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한 남자를 향해 대책 없이 열정을 불태우고 결국 그 남자를 자기 품에 안음으로써 제인은 사랑 이상의 것을, 삶 자체를 쟁취한다. ‘로체스터 씨가 아닌 그냥 에드워드’, 원죄와도 같은 어두운 과거 때문에 눈이 멀고 쇠락한 한 남자. 첫 눈에 반한 사랑이자 마지막까지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 여성이 열정과 삶의 주체가 되었다는 것, 나아가 기록-문학의 주체가 되었다는 것은 비단 제인의 인생에서뿐만 아니라 문학사의 관점에서 볼 때도 놀라운 성취이다. 물론, 그것은 <제인 에어>의 작가가 이룩한 위업이기도 하다.

 

(외유내강 이미지의 제인으로는 샬럿 갱스부르가 떠오르네요. 위에 인용한 저 대사 읊을 때 인상적이던데.) 

 

샬럿 브론테는 이십대 때 뼈아픈 사랑을 겪고 계속 노처녀로 살다가 서른여덟에 결혼했다. 그리고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임신한 상태에서 병사했다. 여자로서, 아니, 그냥 인간으로서도 제법 처량한 운명이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의 기억을 투영하여 만들어낸 제인 에어는 붉은 방을 빠져나와 행복과 평온의 왕국에서 영생을 누리고 있다. 이만하면 브론테의 운명도 어느 정도 보상되지 않았을까.

 

-- 네이버 캐스트

 

-- 제각기 나름 걸출한 작가였던 브론테 자매를 소재로 만든 영화. 에밀리 역을 이자벨 아자니가 맞는 바람에 형평성(??)이 완전 깨져버렸어요 ㅋ 인지도가 제일 낮은 앤 브론테 역은 보다시피, 이자벨 위페르가 맡았습니다.

 

--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한 소설은 아무래도 에밀리의 <폭풍의 언덕>입니다만, 소설 자체는 샬럿이 좀 더 잘 썼던 것 같아요....^^;

 

 

 

 

 

 

 

 

 

 

 

 

 

 

-- BBC판 <제인 에어>의 마지막 장면(가족 사진 찍는)인데, 이미지가 너무 작네요..ㅠ.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갑자기 하늘이 캄캄해지고 천둥번개가 치고 굉음이 일면서 성이 폭삭 무너지는 장면이 떠올랐다. 소영이는 피식피식 웃었다. 가방을 갖다놓은 뒤에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인기척을 듣고서 마녀의 개가 고개를 들었다. 몸을 일으키려고 애쓰는 기색도 역력했다. 녀석은 최근 들어 심히 늙어버렸다. 올 봄부터는 마녀의 빗자루, 즉 운송용으로도 쓰이지 않았다. 가끔 산책을 나가긴 해도 거의 하루 종일 이 문 앞에 웅크리고 앉아 해바라기를 하며 졸고 있었다. 그럴 때는 소영이가 다가가도, 쓰다듬어주어도 꿈쩍도 안했다. 한 번은 심술이 나 귀를 꼬집었다. 감각이 둔해진 탓인지 녀석은 그저 고개를 조금 쳐들고 눈을 반쯤 뜬 채 소영이 옆으로 비스듬히 내리쬐는 햇볕을 좀 음미하곤 다시 잠들어버렸다. 한 번은 열린 창문 너머로 동네 고양이들이 우르르 몰려 든 일이 있었다. 마녀가 깜박 잊고 음식쓰레기를 복도에 그냥 방치해둔 탓이었다. 온 복도가 고양이 울음소리와 바스락대는 봉지 소리로 가득 했다. 그때도 마녀의 개는 낭창하게 게으름만 피웠다. 한번쯤 귓바퀴를 달싹이고 콧구멍을 벌름거리긴 했지만 그냥 고양이들이 연주하는 음악을 감상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녀석이 오늘따라 귀를 세웠다. 탄력이 없어 쫑긋서지는 못했지만 그 긴장감만은 소영이에게도 충분히 전해졌다.

어라, 너 왜 이래? 아줌마는?”

개는 대답이랍시고 컹컹 짖어댔다.

응가 하고 싶어? 배고파?”

 

소영이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개에게 줄 먹이를 찾던 중에 어항에 눈이 갔다. 연못에서 가져온 검정말이 물속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소영이와 떡붕어 아저씨가 그 안에 풀어놓은 올챙이는 긴 꼬리를 흔들며 볼록한 배로 헤엄을 쳤다. 부화한지 얼마 되지 않은 올챙이는 검정말 숲을 한번 통과할 때마다 쑥쑥 커졌다. 꼬리가 짧아지는 것도 눈에 훤히 보였다. 터질 것처럼 탱탱한 배에서는 앞다리와 뒷다리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어항이 불안스레 진동했다. 처음에는 그것이 물과 올챙이의 움직임에 반응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이내 어항이 탁자와 부딪치면서 미묘하지만 또렷한 소리를 냈다.

 

소영이는 문득 아름이의 말이 생각나, 복도로 나갔다. 아까는 귀를 세우고 그렇게 짖던 개가 언제 그랬냐는 듯 곤히 잠들어 있었다. 소영이는 마녀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한참 동안 집을 뒤졌지만 없었다. 그제야 마녀가 아직 학교에서 교사 놀이를 하고 있을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맥없이 돌아서려는데 맞은편 벽이 뚫리면서 문지기가 나타났다. 그는 이제 여기서 살았다.

아저씨, 성이 흔들려!”

그 얘기 하려고 그렇게 뛰어왔어?”

문지기는 조금도 놀라지 않는 눈치였다. 갑자기 등 뒤로 마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낡아빠진 마법인 걸, 흔들리는 성이라니.”

아줌마도 알고 있었어?”

, 글쎄, 그러다 하루아침에 폭삭 무너질 수는 있겠다.”

그 하루아침이 내일이면 어떡해?”

어떡하긴, 죽어야지.”

 

마녀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문지기도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벽을 뚫고 사라졌다. 소영이는 성도 저렇게 스윽, 사라져버리지나 않을까 염려됐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불안하던 어항도 안정을 찾았다. 오후에도 아무 이상이 없었다. 다음 날도 별 다른 징후 없이 지나갔다.

 

며칠 뒤 어항의 올챙이는 모두 새끼 개구리가 되었다. 떡붕어 아저씨와 소영이는 그들을 놓아주려고 밖으로 나가 다리를 건넜다. 소영이가 성탑 노파의 나무 옆에 쪼그리고 앉아 유리 상자의 뚜껑을 열자, 개구리들이 폴짝폴짝 뛰어나갔다. 그 동안의 갑갑함을 모조리 보상받겠다는 듯 녀석들은 순식간에 여기저기로 흩어져 금방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보이는 건 무성하게 자란 부들과 연못가를 거의 다 덮은 개구리밥뿐이었다. 갑자기 부들과 줄풀이 서슬 퍼런 몸짓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떡붕어 아저씨와 소영이의 발에서도 진동이 느껴졌다. 둘은 벌떡 일어나 앞을 응시했다.

 

그토록 컸던 성이 점점 더 작아졌다. 천둥번개나 짙은 어둠, 굉음이나 자욱한 먼지 따위도 없었다. 그냥 돌멩이들이 서로 부딪치듯 마찰음이 들리면서 좌우, 상하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성을 이룬 석재와 철재가 모두 변해서 나일론처럼 쪼그라들고 종이처럼 구겨졌다. 이내 성은 낡고 이빨 빠진 모형이 됐는데, 그 모양새가 쭈글쭈글한 것이 종이로 만든 집 같았다.

 

아저씨, 저게 뭐야?”

 

성의 그 많던 방, 창문, 문틈, 벽 틈새, 심지어 땅 속에서 뭔가가 무례하도록 생기롭게 튀어나왔다. 그것은 언젠가 이 성을, 아니 더 오래 전에 이 곳 땅을 거쳐 간 망자들이었다. 그들은 죽기 직전이나 직후의 모습이 아니라 살아생전에 가장 아름답고 예뻤을 때의 모습으로 부활했다. 그러고는 그 절정이 가장 참혹한 기만인 줄도 모르고 바람처럼 숲속 어딘가로 사라졌다.

 

햇살이 따사롭고 공기도 맑은, 5월의 찬연한 아침이었다. 한창때의 성탑 노파의 모습이 맨 마지막으로 보였다. 그녀는 적당히 살집이 오른, 허리도 전혀 굽지 않은 몸을 똑바로 세운 채 튼튼한 두 발로 타박타박 숲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하지만 문지기와 마녀, 그녀의 개와 고양이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어쩌면 그들이 아직 한 번도 죽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부활의 대열에 합류할 수 없었던 것이리라.

 

대신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금괴만이 폐허 아닌 폐허, 잔해 아닌 잔해 위에 덩그러니 쌓여 있었다. 떡붕어 아저씨는 그곳을 향해 부리나케 달려갔다. 횡 하는 바람 소리가 난 것 같았는데, 그는 이미 금괴를 품에 앉은 채 소영이 옆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들은 곧 그곳을 등졌다. 뒤에서 다리가 녹아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

 

겨울이 왔다. 성 주변에는 여느 해와 다름없이 유리벽이 쳐졌다. 마녀는 하루가 다르게 배가 부풀어갔다. 배꼽 주변으로 털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뽀얀 솜털 같은 것도 아니고 새카맣고 윤기마저 나는 그야말로 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털 밭을 가르며 배가 터졌다. 선홍빛의 피가 솟구쳤다. 시골의사가 누렁소를 타고 기어왔다. 그 뒤를 따라 젊은 도시의사가 나타났다. 간호사도 함께였다.

팔자요, 팔자. 그쪽 잘못이 아니라, 그러니까 저어기. 뱃속에 들었던 그 녀석의 팔자가 그랬던 게야.”

시골의사의 말은 인정과 이해를 듬뿍 담고 있었다. 하지만 마녀는 점점 더 미쳐 날뛰었다. 그 순간만은 정녕 귀신에 홀린 마녀 같았다.

 

그 모든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도시의사가 나섰다.

사산이 무슨 큰일이라고.”

그는 간호사에게 눈짓을 했다. 간호사는 곧 마녀의 팔에 주사를 놓았다. 하지만 마녀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문지기는 줄곧 문 칸에 말없이 서서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시골의사는 안절부절못하고 수술대 주위를 맴돌았다. 그 다음엔 몸을 숙이는가 싶더니 아예 땅바닥에 엎드려 네 발로 기기 시작했다. 이건 정녕 가망 없는 환자였다. 어떤 농담도, 웃음도 허락되지 않는 절망적인 사례였다. 시골의사는 자신의 무능함과 자연의 폭력을 탓했다. 소영이는 사색이 되어 발을 동동 굴렀다.

사람이 히스테리 때문에 죽는 법은 없습니다.”

이런 말을 최후통첩처럼 날리고 도시의사는 깔끔하게 떠나버렸다. 그가 떠난 뒤에도 시골의사는 여전히 방바닥을 기고 있었다. 이제는 두 다리와 두 팔에 힘이 빠져 거의 엎어지다시피 했다. 문밖에서 보다 못한 개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개는 킁킁대더니 그의 바지자락을 물고 누렁소가 있는 곳까지 데려다 주었다. 시골의사는 안간힘을 쓰며 누렁소가 끄는 달구지로 기어 올라갔다.

 

젊은 도시의사의 말은 정확했다. 마녀의 히스테리는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계속됐지만 목숨을 앗아가진 않았다. 이후 몇날며칠 동안 그녀는 의식을 잃는 행운을 누렸다. 그녀의 살갗이 벌겋게 부어올랐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가려움증이 수시로 그녀를 괴롭혔다. 무의식 상태에서도 그녀는 손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 박박 긁어댔다. 문지기는 그녀의 손을 묶어버렸다. 가려움증을 해소할 길 없는 그녀는 눈도 제대로 못 뜨는 상태에서 심하게 몸부림을 쳤다. 팔뚝과 무릎, 머리통 등 서로 교통할 수 있는 곳들이 만나 곳곳에 상처를 만들어냈다. 하는 수 없이 문지기는 마녀의 손을 풀어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또 다시 몸을 구석구석 긁어댔다. 자신이 살아 있음을 증명할 길은 이것밖에 없는 양 수시로 손톱을 세웠다. 문지기는 주기적으로 마녀의 손톱을 깎아주었다. 그 일이 반복되는 동안 마녀의 몸을 덮었던 불그죽죽한 붓기가 빠졌고 살갗의 껍질이 하얀 막처럼 벗겨졌다. 허물을 벗는 작업은 오래 지속되었다. 문지기는 따뜻한 물수건으로 마녀의 몸을 닦아주었다.

 

마녀의 미망은 한파가 꺾일 무렵에 끝났다. 풍선처럼 부풀었던 배는 병을 앓는 동안 조금씩 가라앉았다. 하지만 뱃가죽 위에는 쭈글쭈글한 주름이 생겼고 얼굴도, 몸도 바람 빠진 풍선처럼 허망했다. 10, 아니 20년을 세월을 한꺼번에 먹은 듯, 마녀는 폭삭 늙어버렸다. 중력의 법칙이 가혹하게 적용된 탓에 살가죽은 축축 늘어졌고 모든 지방들은 핵을 향해 모여 들었다. 그제야 비로소 그녀는 문지기와 말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문지기를 보며, 혹은 그의 시선을 피하는 척하며 야릇하게 배시시 웃는 일도 있었다. 물론 한 번 생긴 주름은 사라지지 않았고 새 살은, 최소한 탐스러운 새 살은 영원히 돋아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이 얘기가 시작되기 전, 언젠가 한 시절엔 분명히 존재했을 화사한 봄날로 회귀하는 것 같았다.

 

*

 

봄이 왔다. 날씨가 풀리면서 연못 위의 얼음이 물로 바뀌고 땅이 녹록해지고 몰랑해졌다. 성벽의 틈새, 이끼를 뚫고 처음 보는 싹들이 돋아났다. 그때마다 눈에 거의 뜨이지 않게 조금씩 균열이 생겨났다. 싹들은 무서운 속도로 자라나 성채의 틈을 뚫어갔다. 푸른 연못 가두리에 부들, 개구리밥, 마름, 줄풀이 진풍경을 이루었다. 성을 에워싼 산에는 진달래가 진분홍색을 뿜어내며 봄을 축하했다. 성을 처음 본 아름이는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랐다.

 

우아, 진짜 성이다! 움직이는 성이다! 진짜 신기해!”

?”

흔들흔들하면서 조금씩 밑으로 내려가잖아?”

설마! 성이 어떻게 움직이니?”

소영이는 그야말로 어린아이를 다루듯 아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니야, 정말 움직이는 걸. 성에 붙은 풀도 움직이잖아, 그치, 오빠?”

, 정말 움직이는 것 같아.”

은학이는 아름이의 말에 반대했다가는 또 봉변을 당할 것 같아 얼른 찬성을 해주었다.

둘 다 눈이 뼜나봐, 정말. 다들 이제 집에 가!”

언니, 뭐야? 우리도 성 안에 들어갈래!”

성이 움직인다며? 움직이는 성 안엘 어떻게 들어가니? 어서 집에 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