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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자원 봉사자가 도착했다. 젊은 대학생 둘이었고 연인이었다. 정은이는 새로운 인물의 등장에 눈알을 동동 굴렸다. 젊고 건강한 남자를 보자 왠지 마음이 달떴다. 그 남자를 “오빠!”라고 부르며 옆에 꼭 달라붙어 있는 역시나 젊고 건강한 여자의 모습도 뭔가를 자극했다. 정은이는 소영이의 품안으로 안겨들며 얼굴을 붉혔다.
“언니, 예뻐!”
“저 여자애?”
“아니, 저 쪽.”
정은이는 남학생을 가리켰다.
“음, 남자보고는 예쁘다고 하지 않아.”
“그럼 뭐라 그래?”
소영이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몰라. 하지만 예쁘다고 하지는 않아. 저어기, 너희들, 우선 이거 좀 치워 봐.”
소영이는 방바닥에 널브러진 도시락 찌꺼기를 가리켰다.
젊은 연인은 거의 자동적으로 청소를 후다닥 해치웠다. 그러다 문제의 홑청을 발견했다. 왜 방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지독한 냄새가 코를 찔렀는지도 알겠다는 투였다. 남학생은 자신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명분을 발견한 양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인분이 묻은 홑청이 저렇게 방에서 뒹굴고 있으면 어떡합니까? 위생 상태가 이래서야 사람 사는 곳이라고 할 수가 없군요.”
재활원 건물을 본 순간부터, 아니, 재활원에 자원봉사를 신청한 순간부터 이 혈기 방창한 청년은 울분에 차 있었다. 소외되다 못해 완전히 버려진 특정 집단에 대한 의협심 가득한 분노로 똘똘 무장을 했던 것이다. 얇은 시멘트 벽, 장판 곳곳이 뜯기고 눌러 붙어 버린 누추한 방, 일부러 병균을 배양하는 것 같은 불결한 공기…. 이 모든 것이 청년의 피를 끓게 하기에 충분했다.
“오빠, 저것 좀 봐. 쟤는 철봉에 묶여 있어.”
여학생은 얼굴에 동정심을 가득 담은 채 속삭이듯 말했다. 남학생은 더욱더 발끈했다.
“세상에! 멀쩡한 아이를 이렇게 묶어두다니, 이게 뭡니까! 고도로 발전된 민주사회의 계몽된 시민에게 어떻게 저런 혈거 시절에나 가능할 법한 야만 행위를!”
남학생이 언성을 높이자 소영이도 열을 올렸다.
“에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가람이는 묶어 놔야 돼. 안 그러면 밖에 나간단 말이야. 너, 이름이 뭐야?”
소영이의 호통에 여학생은 겁을 집어먹었다. 자기 또래로 보이는 소영이가 마냥 이상했다. 팔뚝 힘이 무척 셀 것 같은 아줌마들이 하는 일을 호리호리한 처녀가 하고 있다니.
“수정인데요, 이수정.”
“수정이 너, 저기 가서 빨래 좀 해.”
괴상한 명령이었지만 수정은 곧 세탁실로, 즉, 욕실로 갔다. 가건물처럼 얇은 건 물론이고, 방과는 달리 난방도 안 돼 바깥의 찬바람이 벽과 창문으로 그대로 스며들었다. 세탁기는 너무 낡은 것이어서 사용법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세탁실에서 오들오들 떨며 그냥 앉아 있었다. 소영이가 안으로 들어왔다.
“어라? 빨래는 안 하고 뭐해?”
소영이는 툴툴대며 이불호청과 겉옷을 세탁기 안에 집어넣었다. 갑자기 문 너머에서 뭔가가 쾅 넘어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소영이는 얼른 세탁실 문을 열었다.
세탁실과 방문 사이의 비좁은 마루, 신발장 바로 곁에 정은이가 벌러덩 나자빠져 있었다. 그 위에 남학생이 엎어져 있었다. 역시나 비좁은 현관 바닥에는 정리하다 만 신발들이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었다.
“오빠! 뭐하는 거야?”
“신발장을 정리하고 있는데 얘가 와서 자꾸….”
남학생은 일어나 구겨진 옷을 바로 잡았다. 정은이도 어기적대며 몸을 일으키더니 남학생에게로 달려들어 그를 껴안았다.
“오빠! 뽀뽀!”
그러곤 정말로 그의 볼에 뽀뽀를 쪽 했다. 무거운 체중에 그는 비틀대기까지 했다.
“뭐야, 정은이는 뽀뽀 놀이 하고 있었던 거야? 얘한테도 해봐, 응?”
소영이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옆에 서 있는 여학생을 가리켰다. 하지만 정은이는 멈칫거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어, 왜? 얘한테는 하기 싫어?”
“에잇, 정말 이게 뭐야!”
여학생은 방안에 걸어둔 코트를 걸친 뒤 그 길로 재활원을 나가버렸다. ‘뜻 깊은 일’을 해보자는 취지로 따라나섰지만 처음부터 영 마뜩치 않았던 것이다. 남학생 역시 잠깐 머뭇거리더니 주섬주섬 옷을 챙겼다.
“어라, 벌써 가? 신발장 정리는? 목욕탕도 청소해야 되는데?”
“오빠, 뽀뽀! 뽀뽀하고 놀자, 응?”
당황한 남학생이 정은이를 떼 내자 숫제 울음까지 터뜨렸다.
“아까는 잘 놀아줬잖아? 찌찌도 만지고 배도 간질이고….”
울먹거리며 정은이는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남학생은 간이 쪼그라든 채 쏜살같이 내빼버렸다. 재활원 밖을 나와 싸늘한 아스팔트길을 한참 뛰어 내려간 다음에야 비로소 걸음을 멈추고 한숨을 돌렸다. 자기 몸으로 감겨드는 푸근한 몸뚱어리의 온기와 묵직하면서 유쾌한 중량감, 옷 속으로 파고드는 포동포동하고 따뜻한 손놀림의 여운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평생 처음 경험한 그 감각을 그는 스스로도 어떻게 설명할 수 없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바들바들 떨며 서있는 여자 친구를 보았을 때도 그 감각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