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만큼 참았다는 듯 욕실 문이 활짝 열리면서 우진이가 뛰어 들어온다. 문 앞, 깔개 위에는 건우가 엄마를 기다리며 떡하니 앉아 있다. 누나가 공습경보를 발령하자 즉시 두 손을 들고 엉덩이를 든 채 무릎을 세운다. 곧 일어설 기세, 아니 일어서다가 앞으로 꼬꾸라질 기세이다. 딱딱하고 미끄러운 욕실바닥에 얼굴이라도 찧는다면! 이런 말들이 머릿속을 획획 오가는 짧은 순간, 고함이 터져 나온다.

애들 안 보고 뭐해, 정말!”

희뿌연 증기가 의식의 흐름처럼 자욱이 드리워진 가운데, 내 눈앞에서 어른거리던 칠순의 촌부와 초로의 영문학도와 유칼립투스를 갈아타는 코알라와 커피콩을 고르는 남자는 온데간데없다. 알몸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을 수건으로 닦아내는 둥 마는 둥 얼른 건우를 안아 올린다. 마루에는 장남감과 주방도구와 걸레통과 옷가지가 한껏 널브러져 있다. 계속 졸다가 이제 막 눈을 번쩍 뜬 남편은 아직도 마누라의 호통이 잘 접수되지 않는 눈치이다. 누적된 피로와 수면 부족 때문에 시뻘겋게 충혈 된 그의 눈에 문자 몇 개가 제멋대로 찍힌다. “여기가 묵시록이다혹은 “Welcome to the real world.”

 

아침부터 신경질을 부린 대가가 참혹하다. 우진이의 체온이 급속도로 상승한다. 37도를 넘긴 열은 순식간에 38도를 뛰어넘는다. 많이 보채지는 않지만 저녁 무렵에는 39도에 육박한다. 해열제를 먹이고 가재수건을 미지근한 물에 적셔 이마며 목덜미, 겨드랑이를 닦아준다. 하강한 열은 네다섯 시간이 지나자 또 상승하더니 기어코 40도를 찍는다. 동틀 녘, 아이의 몸은 땀방울 하나 흘리지 못하고 마른 나뭇잎처럼 바싹바싹 타들어가며 부지깽이처럼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월요일, 새벽 같이 소아과로 달려간다. 입 안이 헐고 목 안에는 하얀 물집이 잡혀 있다. 역시나 또 구내염이다. 배가 고파 음식을 입안에 넣으면 엉엉 울음이 나온다. 그럼에도 배고픔을 해소하려고 힘껏 음식을 삼키면 이제는 목구멍이 아파 죽겠다고 아우성이다. “엄마, , 아파, 아파.” 아이는 엄마보고 어떻게 좀 해달라고 계속 보채다가 까무러치듯 잠이 든다. 아플까봐 차마 다시 입안에 넣지 못한 곰 젤리를 쥔 채로.

이틀쯤 지나자 우진이는 열이 가셨다. 그동안의 치열했던 전투를 증명하듯 배와 등에 좁쌀 크기만 한 붉은 반점이 울긋불긋 피어난다. 열꽃이 만개하자 밥 한 공기를 바닥내고 곰 젤리도 먹고 아이스크림도 숟가락으로 퍽퍽 퍼먹는다.

한숨을 돌리자니 건우의 몸에 열이 오른다. 평생 처음 겪는 바이러스의 침입에 몸이 얼마나 놀랐는지 눈동자가 풀리고 끈적끈적 신음소리를 내며 온 몸을 부들부들 떤다. 숨이 곧 끊길 것 같은 무서운 경련이 10, 어쩌면 20분은 족히 지속된다. 우진이에게서는 본 적이 없는 현상에 오장육부가 다 뒤틀린다. 허겁지겁 응급실로 달려가니 경련은 멎어 있다. 그러나 열은 여전히 높아 해열 주사를 놓는다. 건우의 울음이 귀청을 찢어놓을 것만 같다. 평생 처음으로 목이 잠길 만큼 운 아이는 비몽사몽간에도 악착 같이 젖을 빨아댄다.

힘겨운 하루를 마감한 다음 날, 건우는 정상 체온을 되찾았다. 경련은 흔적도 남아 있지 않지만 시종일관 보챈다. 함께 보채는 남매를 상대하느라 나는 나대로 보챔을 경험한다. 뒤틀렸던 오장육부가 제자리를 찾는지, 식은땀을 뻘뻘 쏟고 방과 화장실을 오가며 구토와 설사를 반복한다. 남편은 지방 출장 중. 그것도 경기도 어디도 아닌 합천에 가 있다. 결국 두 아이를 할머니에게 맡겨놓고서, 어제 아이가 누워 있던 응급실의 그 침대에 누워 수액과 혈관주사를 맞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한 주가 사라지고 없다. 남편의 한 주도 만만치 않다.

 

8.

 

부장의 염려대로 다음 주가 시작되자마자 완주군 농장주가 전화를 걸어왔다. 얼결에 전화를 받은 남편은 사건 아닌 사건을 수습하느라 진땀을 뺐다. 이삼일 뒤 걸려온 전화는 아예 받지 않았다.

하루 이틀이 지나는 사이 남편은 오늘도 무사히 지나갔다는 생각도 하지 않게 되었다. 잊힌 농장주를 대신하듯 남쪽에서 태풍이 올라왔다. 나주가 쑥대밭이 됐다는 기사를 보자 문득 완주가 생각났다. 지갑을 열어보았다.

한영수, 전라남도 완주군 ***, 010-***-***.

고도로 상큼한 명함이었다. 안부전화라도 해볼까. 그러나 오디 박스를 건네주며 눈을 찡긋하던 표정이 떠올라 이내 아서라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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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 할아버지한테 연락할 거야?”

남편은 바지호주머니를 뒤적여 지갑을 꺼냈다. 명함을 잔뜩 꽂아둔 칸에 줄무늬 종잇조각 하나가 생뚱맞게 들어 있다. 옛날 공책에서 찢었는지 냄새가 난다. 그의 이름과 주소와 전화번호가 또박또박 적혀 있는데, 볼펜 똥이 시커멓게 묻어 있다.

? 부장은 아예 전화도 받지 말래. 혹시라도 대리점 차렸다가 노후 비용 다 날리면 어떡하냐고.”

이렇게 말하며 남편은 자기 배에 붙이다시피 안고 있는 건우를 내려다본다. 일요일 오전, 온 가족이 다함께 마트에서 장을 보며 여유로운 산책을 즐기는 중이다.

우리 옆을 지나가던 중년 여자들이 쑥덕댄다. “주중에는 실컷 일하고 주말에는 애보고. 우리 아들도 저런 대접 받을까봐 장가를 못 보내겠어.” “에이, 저런 사위 보면 되잖아?” “난 아들만 셋이잖아.”

중년들의 대화에 귀가 간질간질하고 눈도 따끔거린다. 이런 불편함에 종지부를 찍듯 시어머니의 전화가 걸려온다.

 

작년에도 둘째 출산을 핑계로 쉬었으니까 올 추석 때는 꼭 성묘를 가야한다는 요지이다. 곁다리 얘기처럼 지난 주말에도 안 왔는데 이번에도 안 오느냐고 묻는다. 물김치 새로 담갔다, 소꼬리뼈 고아 두었다, 장조림도 해놓고 멸치도 잣을 넣어 함께 볶아 뒀다 등의 말도 이어진다.

애들 먹기 좋게 소금도 거짓말 같이 조금만 넣고.”

소와 소의 꼬리와 그 꼬리의 뼈 대목부터 대략 놓고 있던 정신 줄을 얼른 붙잡는다.

어머니, 오디 드실래요?”

?”

애들 아빠가 출장 갔다가 오디를 얻어왔는데요, 어머니는 뭔지 아시죠?”

간만에 고부간의 대화가 활기를 띤다. 그 와중에 주말을 통째로 희생하느니 지금 후다닥 움직이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어마어마한 깨달음처럼 뇌수를 뒤흔든다.

 

시어머니는 웬일로 손자손녀도 보는 둥 마는 둥 오디부터 찾는다. 불과 삼십 여분 거리지만 이 한여름에 냉장고에서 아이스박스로, 거기서 다시 실온으로 옮겨오는 동안 오디는 형편없이 망가져 있다.

아이고, 아까워 죽겠네. 그러게 가까이 살면 내가 어젯밤에 바로 처리를 했을 텐데.”

진짜 아까운 건 응급처치를 못 받아 망가진 오디가 아니라 먼 곳으로 장가를 보낸 아들이다. 그 아들과 그 아들의 가족 앞에서 그들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을 방치해두고 있는지 보여주겠다는 듯 그녀는 이내 행동에 돌입한다.

불에 덴 살갗처럼 짓물러버린 오디는 살림의 대가의 손 안에서 마파람에 게 눈 사라지는 속도로 씻김과 선별 작업을 거쳐 믹서 안으로 들어간다. 바싹 갈린 오디는 블루베리와 체리를 섞어 놓은 것 같다. 거기에 우유를 붓고 얼음을 몇 개 띄우자 과일 주스가 따로 없다. 두 아이는 신바람이 나서 날뛴다. 남은 오디는 시댁의 냉동실로 들어간다.

 

7.

 

욕실 문이 닫힌다. 따뜻한 물이 흘러나와 욕조를 데우며 사라진다. 무더운 여름임에도 물은 따뜻한 것이 좋다. 욕실에 뽀얀 증기가 어린다. 닫힌 공간에 오롯이 혼자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 바로 알몸으로 욕조 안에 앉아 샤워기의 물세례를 받는 이 시간이다.

청신한 초록빛의 뽕나무 숲 위로 검푸른 어둠이 내린다. 시커먼 천정에 환한 구멍처럼 뚫린 달의 비호를 받으며 칠순을 넘긴 촌부가 오디를 따고 있다. 뽕나무 사이를 누비는 솜씨가 탄복할 만하다. 촌부의 밤은 어느덧 거창의 밤으로 바뀐다. 시퍼런 어둠이 내린 산비탈, 저승사자처럼 우뚝 선 나무들을 바라보며 초로로 접어든 영문학도가 희랍어 알파벳을 외우고 있다.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엡실론, 시그마, 오메가. 그 풍경화 속의 나뭇가지 사이에 코알라가 매달려 있다. 만년 영문학도의 고독을 완성해준 침엽수가 유칼립투스로 바뀐다.

어제만 해도 엄마 똥을 먹던 아기 코알라가 엄마 등에 찰싹 붙어 있다. 엄마와 아기 코알라는 슬며시 잠드는 듯, 그 잠에서 슬며시 깨어나는 듯, 무심히 죽어가는 듯, 그 죽음에서 무심히 부활하는 듯 우아한 춤을 춘다. 그 사이사이,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늙은 유칼립투스 이파리를 먹는다. 옆집 코알라들이 이사를 한다. 땅바닥으로 내려가지도 않고 공중에서 유칼립투스를 갈아타는 기술이 거의 신공, 공중부양 수준이다. 휘청대는 유칼립투스 나무 가지 사이로, 어딘가 뜨거운 나라에서 커피콩을 고르는 옛 남자 친구가 출몰한다. 얼핏 그의 얼굴이 보이려는 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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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7시경, 남편은 부장과 함께 전주의 대리점에 도착했다. 업무는 곧바로 끝났지만 먼 길을 온 김에 자기 처남을 한 번 보고 가라는 대리점 사장의 말에 귀가 솔깃했다. 완주군에서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는데 파이프 산업에 관심이 많다는 것이었다.

 

남편과 부장의 차는 GPS의 가르침을 받으며 푸르디푸른 논밭을 착실히 가로질러 갔다. 마침내, 황량한 들판에 숲 속의 오두막처럼 호젓하고 자그마한 집 한 채가 나타났다. 한 남자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짙은 구릿빛 얼굴, 그 얼굴에 새겨진 산 지렁이처럼 굵은 주름살, 앙상한 팔뚝과 손등을 휘감은, 툭툭 튀어나온 검붉은 핏줄. 아무래도 대규모의 농장을 경영하는 농장주의 느낌은 아니었다.

안 그래도, 씨방, 매형이 전화했드라고. 어서들 오셔.”

남편과 부장은 거실로 안내되었다. 선반과 탁자와 벽 곳곳에 아들딸과 손자손녀의 사진이 세워져 있고 붙어 있고 걸려 있었다. 공간 자체가 사진을 위해 존재했고 그것이 곧 역사였다. ‘빛바랜이라는 수식어를 꼭 붙여야 될 것 같은 흑백사진 속의 올망졸망 촌스러운 아이들이 학사모로 자라났고, 그 학사모들이 제 짝을 만나 아들딸을 낳은 다음 칼라 가족사진의 주인공으로 거듭났다.

 

농장주의 아내가 밥상을 차려왔다. 자반고등어 한 토막을 빼면 풀 천지였다. 부장은 황홀경에 들떴다.

요즘은 염분이 나쁘다고 자반고등어도 싱겁게 만들던데 이건 진짜네요! 된장국은 이거, 아욱인가요? 머위며 완두콩이며. 다 유기농일 거 아닙니까.”

, 그렇고말고. 옛날에야 부지런히 농약을 쳤지만 요새는, 씨방, 몸이 따라줘야 말이지, 농약 치는 건 엄두도 못내. 그러니까 그냥 지들이 알아서 크고 알아서 열매 맺고 그려. 절로 유기농이 된다니껴.”

 

애매한 동문서답이 오가는 중에 풀밭 밥상이 나가고 술상이 나왔다. 인삼주, 복분자주, 매실주, 솔방울 술, 왕벌술, 뱀술 등 열 개는 족히 넘는 장독에 가득 담겨 있는 술을 일일이 다 퍼온 것이었다. 풋풋한 솔방울이 알코올 속에 송골송골 맺혀 있고, 형체와 질감과 색감이 고스란히 보존된 벌 수십 마리가 입추의 여지없이 들어차 있고, 알코올 속에 생매장된 얼룩무늬 뱀 한 마리가 대가리를 위로 쳐들고서 병마개를 향해 독을 뿜어내고 있었다. 부장은 그 술을 한 모금씩 홀짝홀짝 들이켜며 음미했고, 남편은 표정 관리를 하느라 애썼다.

각설하고, 여다가 대리점을 낼까 하는디, 씨방, 좀 도와들 줘.”

안 그래도 한동수 사장님께서 그러시더라고요. 정확히 어디에다?”

여다가 낸다니께! 이게 다 내 땅이여. 작년에는 집도 새로 지었구만.”

, . 그래도 대리점을 내려면 우선 자본금이 많이.”

나 돈 많이 벌었어, 씨방, 재산이 십억도 넘는당께. 우리 아들딸도 다 서울 살어, 씨방, 큰놈은 의사고 작은놈은 변호사고 큰딸은 교사고 작은딸은 인물이 정윤희 뺨치게 좋아서 판사한테 시집을.”

농장주의 목구멍에서 뱀술 냄새가 솔솔 풍겨 나왔다. 뱀이 허물을 벗듯 그의 말도 계속 되었다. 인생의 각 시즌마다 조금씩 변주됐을, 꼭 압운을 맞춘 것처럼 질서정연한 자식 자랑은 숙연하고도 권태로운, 또 권태롭고도 숙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아무리 그래도 파이프 사업이 생각보다 어렵고요, 파이프에 대한 전문 지식도 필요하고

, 이 양반이 참! 씨방, 뭘 해도 농사짓는 것보다 어렵깐디? 좀 잘 가르쳐줘 봐이, 씨방, 내가 칠십 둘이라도 머리가 잘 돌아가는 편이여.”

칠십 둘이라는 나이에 부장은 눈앞이 아찔해지는 느낌이었다.

 

농장주는 굳이 그들을 숙소까지 바래다주었다. 온갖 편의시설을 갖춘 민박집이고 엎드리면 코 닿을 데 있다고 했다. 도무지 코가 얼마나 길어야 할까. 남편과 부장은 어느덧 캄캄해진 논밭 사이로 난 시골길을 하염없이 걸어갔다. 종류별로 골고루 마신 술이 다 깰 정도였다. 드디어 자그마한 집 한 채가 나타났다. 문을 두드리자 쉰 살은 족히 됐을 법한 남자가 나왔다.

이 양반들 오늘 여기서 자야 쓰겄는디?”

남자는 별 다른 대꾸도 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얇은 잠바 하나를 걸치고 다시 나왔다. 농장주가 부장을 향해 말했다.

그래도 이 사람한테 숙박료는 줘야 쓰겄는디?”

넋 놓고 있던 부장은 얼른 지갑을 꺼냈다.

저어기, 얼마나?”

좀 넉넉히 줘, 씨방, 한 삼 만원이나.”

창졸지간에 집을 뺏기고도 무덤덤한 기색이던 중년 남자는 지폐 세 장도 무성의하게 받아들었다. 그러고는 부장과 남편이 막 뚫고 온 시골길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부장은 안방에서 자고 남편은 마루에서 잤다. 일어나는 즉시 혼자 서울로 출발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눈을 떴을 때는 남쪽 나라의 뜨거운 아침 햇살이 얼굴을 사정없이 찔러대고 있었다. 아차! 시계를 본 남편은 벌떡 일어나 마당으로 나갔다.

이제 일어났는겨?”

한 아주머니가 인사를 건넸다. 생면부지의 관계이지만 우리 집에서 잤으니 가족보다 더 허물없는 사이라는 투였다. 그녀는 툇마루에 앉아 완두콩의 꼬투리를 벗기고 있었다.

읍내 나가는 버스 어디서 서요?”

저어기 전봇대 보이지? 저기서 옆으로 꺾으면 금방이여.”

전봇대까지도 백 미터는 족히 넘어 보였다. 남편은 곧바로 가방을 들쳐 매고 마당을 나섰다.

벌써 가는겨? 11시는 돼야 오는디.”

버스 배차 간격이 그렇게 길 수 있다는 사실이 서울내기인 남편에게는 부조리처럼 여겨졌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완두콩 더미를 헤적였다. 꼬투리를 벗기니 완두콩 다섯 알이 동화의 주인공들처럼 소복이 들어 있었다. 부장이 졸린 눈을 비비며 문을 열고 나왔다. 비슷한 시각에 농장주도 나타났다.

 

부장과 남편은 점심을 얻어먹고 떠날 채비를 했다. 농장주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아참, 어젯밤에 내가 뭘 좀 했는데 말이여.”

순식간에 일회용 플라스틱 박스가 나타났다. 거의 검다고 할 만큼 짙은 보라색에 알이 포동포동 굵은 최상품의 오디였다. 부장이 환호성을 질렀다.

아이고, 이 귀한 걸! 오디 아닙니까! 부모님이 양잠을 하셔서 집 주변이 전부 뽕나무 밭이었거든요. , 거참, 어릴 때 형이랑 오디 따 먹고 입이며 손이 전부 시퍼레져 갖곤, 하하!”

어허, 씨방, 이 양반이 뭘 좀 제대로 아는구먼. 내가 어제 밤새 딴 거여!”

농장주와 부장은 신이 나서 떠들어댔고 남편은 양미간을 찌푸렸다. 가느다란 초록색 줄기는 날카로운 칼날에 싹둑 잘린 쥐꼬리 같고 열매 부분은 기형이나 돌연변이 굼벵이에 색소를 입혀놓은 것 같았다. 박목월의 시에서나 들어본 오디, “뽕나무 열매를 그날 처음 본 것이었다.

 

남편과 부장이 차에 탔다. 농장주는 막 닫히는 창문에다 대고 간밤에도 곱씹었을 법한 얘기를 꺼냈다. 천기 누설하듯 반쯤 속삭이는 어조에 자신이 노회한 사업가임을 과시하려는 듯 눈도 찡긋했다.

씨방, 대리점은 언제쯤 낼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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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커>에 열광하고 있는, 예나 지금이나 진정한 만화광인 남편에게 아이를 맡겨두고 나와 있다. 시간이 철철 남아돌 때와는 달리(그래서 어떨 때는 12시간씩 자기도 했다!), (당장 밥벌이와 상관이 없는!) 뭘 읽고 뭘 쓰는 시간이 너무 소중하다.  암튼 진즉에 읽었어야 마땅한 이 책을 어쩌다 보니 이제야 읽는다. 대체로 예술에 문외한이고, 발레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3년 동안 러시아, 그것도 모스크바에 살면서 <볼쇼이> 한 번 안 갔다면, 뭐..-_-;;

 

 

 

 

 

 

 

 

 

이 책은 10년은 자라고 10년은 배우고 10년은 춤추고 나머지 30년은 암흑 속에 살다 간, 그렇다고 정리되는 천재 무용수가 말하자면 정신줄을 완전히 놓기 직전 6주에 걸쳐 남긴 일기인데, 그 도입부부터가  압도적이다.

 

점심 식사는 아주 좋았다. 살짝 익힌 달걀 두 개와 기름에 튀긴 감자와 콩을 먹었으니까. 나는 콩을 좋아하지만, 그것들은 메마르다. 나는 마른 콩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 속엔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스위스는 병든 땅이다. 온통 산들로 가득 차 있으니까. 스위스 사람들은 메마르다. 그들 속에는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내 시중을 드는 하녀는 메마른 인간이다. 그녀는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너무 많이 생각한다.”(103)

 

첫 느낌은 고골의 <광인 일기>. 하지만 고골이 아무리 광기의 작가라고 할지라도, 그리고 이 소설이 아무리 걸작이라고 할지라도, 정녕, 진짜 광인이 정신의 완전한 죽음으로 넘어가기 직전 광기의 정점에서, 필사적인 속기의 느낌으로 내면의 흐름을 줄줄이 써나간 이 기록을 어찌 따라가겠는가. 촘촘히 들어찬 대책 없는 1형식과 2형식의 문장들, 논리도 뭣도 없는 어마어마한 시적인 비약, 논증도 뭣도 없으되 엄청난 통찰을 담은 아포리즘들. 

 

춤꾼이 이 정도의 지성과 감성과 문체를 갖춘 나라, 역시, 러시아답다. 도중에 다윈, 니체, 톨스토이, 도..키, 졸라, 셰익스피어 얘기도 중구난방으로 나오지만 가장 놀라운 것은 이 모든 말(!)을 줄줄이 풀어내는 발레리노의 광기에 찬 필력이다.

 

인간은 신을 위해 죽는다. 신은 움직임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필요한 것이다. 육체는 죽지만 정신은 산다. 나는 살고 싶다. 하지만 내 손은 힘이 빠지고 있다. 손이 내게 복종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오늘 나는 오랜 시간을 쓰겠다. 신은 내게 나의 삶을 기술하기를 원한다. (...) 나는 내일 계속해서 쓰겠다. 신은 내가 쉬기를 바라기 때문에...”(127)

 

나는 신의 방법으로 쓰고 싶다. 따라서 나는 나의 저작을 교정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글을 고치지 않는다. 나는 고의로 서투르게 쓴다. ”(168)

나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176)

나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하지 않는 철학자이다. 나는 감정을 지닌 철학자이다. 나는 인공적인 일들을 쓰고 싶지는 않다.”(185)

 

 

나는 고독을 무서워할 테지만 울지는 않을 것이다. 신이 나를 사랑하니까 나는 외롭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만약에 신이 나를 버린다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나는 미리 느낀다. 만약에 신이 나를 버린다면 나는 죽을 것이라는 걸 안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그러니 나는 사람들이 나를 이해할 수 있도록 다른 사람들처럼 살겠다. 신은 사람들이다. 신은 자신의 목적을 방해하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그의 목적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다. 나는 신의 도구이다. 나는 신의 사람이다.”(190)

 

나는 니진스키이다. 니진스키는 나이고, 나는 그가 자신을 걱정하기 때문에 그가 걱정된다. 나는 그의 힘을 안다. 나는 그의 선량한 신이다. 나는 나쁜 니진스키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나쁜 신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신이다. 니진스키는 신이다. 니진스키는 선량한 사람이지 사악한 인간이 아니다. (...) 신은 통상적인 용모가 아니다. 신은 얼굴에 깃들인 감정이다. 꼽추는 신이다. 나는 꼽추를 좋아한다. 나는 못생긴 사람들을 좋아한다. 나는 감정을 지닌, 못생긴 남자이다. 나는 곱사등이를 춤추고 똑바른 등의 사람의 춤도 춘다.”(199)

  

유감스럽게도, 이 책의 원본을 갖고 있지 않다.  주문하려고 하니 다 품절. 암튼, <감정>이라는 제목으로 적절히 편집되어 나온 모양인데, 이 제목 역시 <일기>의 한 구절을 참조한 듯. 이렇다.

 

나는 이 책을 감정이라 부르고 싶다. 나는 이 책을 감정이라 부르겠다. 나는 감정을 좋아한다. 그러므로 많은 것을 쓰겠다. 나는 감정에 관한 방대한 저서를 원한다.”(197-198)

 

번역도 참 좋다. 인터넷 사이트에서 다운받은 원문과 대충 비교를 해 봐도 그렇다. 그럼에도 러시아어에서 곧장 번역한 우리말 버전이 있으면 좋겠다 싶고, 한 번 해보고 싶다. 당장엔  너무 바빠, 그냥 읽어가며 느끼는 수밖에.  겸사겸사, 니진스키의 이름인 '바슬라프'는 그렇게 일반적인 건 아니다. Vatslav Nizhinsky. 바쯜라프 니쥔스키. 그대로 전사하면 이 정도의 발음.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 라는 말답게, 니진스키의 일기 속에서도 속된 부분이나 생리적 얘기를 쓴 대목이 와닿기도 하다. 이러나저러나, 책장을 넘기다 멀리 훌쩍 가서 발견한 익숙한 구절. 절친한 선배가 곧잘 인용하는 부분이다.

 

"나는 울고 싶은데 신은 내게 쓰라고 명령한다. 그는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 바라지 않는다. 아내는 울고 또 운다. 나 역시 운다. 나는 프랑겔 박사가 내게 와서 내가 쓰고 있는 동안 아내는 울고 있다고 말할까봐 두렵다."(347) 

 

 

유명한 사진 중 하나.(좌는 '목신'으로 분장한 니진스키.) 160이 겨우 넘는 단신이었다는데...흠. 겸사겸사 예브게니 플루셴코가 빙판에서 니진스키를 재현하기도. 이 동영상도 볼 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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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ssbaum 2013-06-29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혹시 네이버캐스트에 <위대한 개츠비> 에 관해 쓰신 분이 아니실지요?
간결하면서도 의미를 담은 글 감사히 잘 보았는데, 알라딘 서재에서 이렇게 또 뵙게 되네요.

종종 들려 쓰신 글, 읽도록 하겠습니다 : )

푸른괭이 2013-06-29 14:14   좋아요 0 | URL
예, 자주 오세요^^;;
 

4.

 

토요일 아침. 건우가 누나 뒤를 졸졸 따라 다닌다. 그러다 얼음 망치 놀이를 하는 것처럼 갑자기 움직임을 멈춘다. 발끝을 살짝 들면서 다리 한쪽을 움찔하기도 한다. “!” 한 차례의 파고가 지나갔는지, 터질 것처럼 시뻘게졌던 얼굴빛이 원래대로 돌아온다. 잠시 뒤 아이는 엄마에게로 설설 기어오더니 엄마의 어깨를 잡고 엉성하게 선다. 다시 온 몸에 힘이 들어가고 얼굴이 시뻘게진다. 조심스레, 격려하듯 아이의 등을 쓰다듬는 동안 두 번째 파고가 지나간다. 저만큼 기어가는 아이에게서는 막 나온 똥이 모락모락 연기처럼 냄새를 피어낸다.

엄마, 건우 응가했어!”

우진이는 손뼉까지 친다. 엄마를, 엄마 젖을 빼앗아간 동생을 마구 할퀴고 싶어도 혼날까봐 그러지도 못하고 분한 마음에 손만 부르르 떨던 녀석이 동생이 대변을 볼 때는 그렇게 신이 나는 모양이다.

건우의 대변을 치우는 걸로 시작된 하루는 또다시 말과 움직임으로 채워진다. 아이들 아침을 먹이고 나도 먹고 아이들 목욕시키고 나도 씻고 청소를 하고 빨랫감을 싹 쓸어 세탁기 안에 넣고. 어느덧 점심때다. 한숨을 가다듬고 전열을 정비하는 엄마를 향해 건우가 엉금엉금 기어온다. 내 어깨를 잡고 선 아이를 살포시 안아준다.

엄마, 나도, 나도!”

우진이가 옆에서 까불어댄다.

엄마 몸은 하나인데 둘을 어떻게 다 안아주니?”

큰아이는 금세 불퉁하고 시무룩해진다. 짧은 시간, 분노와 반항, 체념과 인내 사이를 오가다 후자 쪽으로 마음을 굳혔는지, 슬그머니 내 등 뒤로 와서 머리를 기댄다. 몸의 앞판과 뒤판에 아이 둘을 붙이고 있자니 묘하게 뿌듯하고 푸근한 느낌이다. 갑자기 건우의 몸에 힘이 들어가는가 싶더니 큰소리로 울음을 터뜨린다.

엄마, 오늘 건우 응가하는 날이야!”

날도 덥고 양도 많아 다시 씻기지 않을 도리가 없다. 10킬로가 훌쩍 넘지만 아직 제 몸도 잘 못 가누는 사내아이를 두 번이나 씻기자니 힘에 부쳐 슬슬 성질이 난다. 이런 심사를 귀신 같이 아는 건우는 또 건우대로 더 버둥거린다. 건우의 손에 크림 통 뚜껑을 쥐어 주고서 간신히 기저귀를 채우고 나니 우진이가 크림 통에서 크림을 신나게 파내고 있다.

김우진!”

그 일에 어찌나 몰입했는지 우진이는 몸을 부르르 떤다. 엄마의 성난 얼굴을 보면서도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는 투다. 그 사이 건우는 냉큼 몸을 뒤집은 다음 누나 옆으로 기어가고, 눈 깜짝할 사이에 어설픈 몸짓으로 크림 통에 손을 푹 집어넣는다. 나는 얼른 건우의 손에서 통을 낚아챈다. 그 반동 때문에 건우의 상체가 앞으로 수그러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자지러질 것 같은 울음이 터져 나온다. 순식간에 건우의 입이 피범벅이 된다. 건우를 안아 올려 달램과 동시에 손에 잡히는 대로 가재 수건을 입안에 넣었다가 뺀다. 내 어깨도, 가재 수건도 금방 피에 흠뻑 젖는다. 우진이도 옆에서 엉엉 울고 있다. 이 최악을 멋지게 장식해준 것은 막 도착한 남편의 메시지.

마누라야, 흑흑, 늦잠 잤어. 저녁은 아빠랑 먹자^^;”

목 놓아 울고 싶은 마음을 두 아이가 표현해준다. 우선 건우에게 젖을 물린다. 금방 곯아떨어지는 걸 보니 상처는 크지 않은 모양이다. 그 사이 울음을 그친 우진이는 엄마의 젖무덤에 얼굴을 파묻은 채 새근대는 동생을 우수에 찬 눈으로 하염없이 지켜보다가 조용히 잠이 든다.

 

남편이 집에 온 시각은 밤 9시 경. 서울 근처에서 길이 막혔단다. 항상 이런 식이다. 길은 어디선가, 언젠가는 꼭 막힌다. 막히기 위해 뚫려 있는 것이 길이다.

그렇게 큰 교통사고는 처음 봤어. 뇌수가 터졌나봐. 노란 물이 뇌수밖에 더 있겠어?”

녹초가 된 그의 얼굴에는 죽을죄를 지은 것 같은 표정이 드리워져 있다. 그 죄를 사해달라는 듯 플라스틱 상자 두 개를 내놓는다. 그것은 놀랍게도, 오디였다. 한 알을 집어 입안에 넣어 봤다. 물컹하고도 달달한 기운이 입안으로 퍼지지만 어딘가 울적한 맛이다.

아빠, 이거 블루베리야?”

누나의 물음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동생은 손부터 갖다 댄다. 손에 닿는 감촉이 신기한지 움찔 물러서더니 한 박자 쉬고 다시 손을 갖다 대는데 이번에는 제법 대담하다. 낮잠을 푹 잔 탓에 둘 다 눈이 말똥말똥하다. 박스 두 개를 냉큼 냉장고에 집어넣었지만 뭔가 마뜩치 않다. 시쳇말로 즉취 식품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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