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7시경, 남편은 부장과 함께 전주의 대리점에 도착했다. 업무는 곧바로 끝났지만 먼 길을 온 김에 자기 처남을 한 번 보고 가라는 대리점 사장의 말에 귀가 솔깃했다. 완주군에서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는데 파이프 산업에 관심이 많다는 것이었다.
남편과 부장의 차는 GPS의 가르침을 받으며 푸르디푸른 논밭을 착실히 가로질러 갔다. 마침내, 황량한 들판에 숲 속의 오두막처럼 호젓하고 자그마한 집 한 채가 나타났다. 한 남자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짙은 구릿빛 얼굴, 그 얼굴에 새겨진 산 지렁이처럼 굵은 주름살, 앙상한 팔뚝과 손등을 휘감은, 툭툭 튀어나온 검붉은 핏줄…. 아무래도 대규모의 농장을 경영하는 농장주의 느낌은 아니었다.
“안 그래도, 씨방, 매형이 전화했드라고. 어서들 오셔.”
남편과 부장은 거실로 안내되었다. 선반과 탁자와 벽 곳곳에 아들딸과 손자손녀의 사진이 세워져 있고 붙어 있고 걸려 있었다. 공간 자체가 사진을 위해 존재했고 그것이 곧 역사였다. ‘빛바랜’이라는 수식어를 꼭 붙여야 될 것 같은 흑백사진 속의 올망졸망 촌스러운 아이들이 학사모로 자라났고, 그 학사모들이 제 짝을 만나 아들딸을 낳은 다음 칼라 가족사진의 주인공으로 거듭났다.
농장주의 아내가 밥상을 차려왔다. 자반고등어 한 토막을 빼면 풀 천지였다. 부장은 황홀경에 들떴다.
“요즘은 염분이 나쁘다고 자반고등어도 싱겁게 만들던데 이건 진짜네요! 된장국은 이거, 아욱인가요? 머위며 완두콩이며…. 다 유기농일 거 아닙니까.”
“암, 그렇고말고. 옛날에야 부지런히 농약을 쳤지만 요새는, 씨방, 몸이 따라줘야 말이지, 농약 치는 건 엄두도 못내. 그러니까 그냥 지들이 알아서 크고 알아서 열매 맺고 그려. 절로 유기농이 된다니껴.”
애매한 동문서답이 오가는 중에 풀밭 밥상이 나가고 술상이 나왔다. 인삼주, 복분자주, 매실주, 솔방울 술, 왕벌술, 뱀술 등 열 개는 족히 넘는 장독에 가득 담겨 있는 술을 일일이 다 퍼온 것이었다. 풋풋한 솔방울이 알코올 속에 송골송골 맺혀 있고, 형체와 질감과 색감이 고스란히 보존된 벌 수십 마리가 입추의 여지없이 들어차 있고, 알코올 속에 생매장된 얼룩무늬 뱀 한 마리가 대가리를 위로 쳐들고서 병마개를 향해 독을 뿜어내고 있었다. 부장은 그 술을 한 모금씩 홀짝홀짝 들이켜며 음미했고, 남편은 표정 관리를 하느라 애썼다.
“각설하고, 여다가 대리점을 낼까 하는디, 씨방, 좀 도와들 줘.”
“안 그래도 한동수 사장님께서 그러시더라고요. 정확히 어디에다…?”
“여다가 낸다니께! 이게 다 내 땅이여. 작년에는 집도 새로 지었구만.”
“아, 예…. 그래도 대리점을 내려면 우선 자본금이 많이….”
“나 돈 많이 벌었어, 씨방, 재산이 십억도 넘는당께. 우리 아들딸도 다 서울 살어, 씨방, 큰놈은 의사고 작은놈은 변호사고 큰딸은 교사고 작은딸은 인물이 정윤희 뺨치게 좋아서 판사한테 시집을….”
농장주의 목구멍에서 뱀술 냄새가 솔솔 풍겨 나왔다. 뱀이 허물을 벗듯 그의 말도 계속 되었다. 인생의 각 시즌마다 조금씩 변주됐을, 꼭 압운을 맞춘 것처럼 질서정연한 자식 자랑은 숙연하고도 권태로운, 또 권태롭고도 숙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아무리 그래도 파이프 사업이 생각보다 어렵고요, 파이프에 대한 전문 지식도 필요하고…”
“허, 이 양반이 참! 씨방, 뭘 해도 농사짓는 것보다 어렵깐디? 좀 잘 가르쳐줘 봐이, 씨방, 내가 칠십 둘이라도 머리가 잘 돌아가는 편이여.”
‘칠십 둘’이라는 나이에 부장은 눈앞이 아찔해지는 느낌이었다.
농장주는 굳이 그들을 숙소까지 바래다주었다. 온갖 편의시설을 갖춘 민박집이고 엎드리면 코 닿을 데 있다고 했다. 도무지 코가 얼마나 길어야 할까. 남편과 부장은 어느덧 캄캄해진 논밭 사이로 난 시골길을 하염없이 걸어갔다. 종류별로 골고루 마신 술이 다 깰 정도였다. 드디어 자그마한 집 한 채가 나타났다. 문을 두드리자 쉰 살은 족히 됐을 법한 남자가 나왔다.
“이 양반들 오늘 여기서 자야 쓰겄는디?”
남자는 별 다른 대꾸도 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얇은 잠바 하나를 걸치고 다시 나왔다. 농장주가 부장을 향해 말했다.
“그래도 이 사람한테 숙박료는 줘야 쓰겄는디?”
넋 놓고 있던 부장은 얼른 지갑을 꺼냈다.
“저어기, 얼마나?”
“좀 넉넉히 줘, 씨방, 한 삼 만원이나….”
창졸지간에 집을 뺏기고도 무덤덤한 기색이던 중년 남자는 지폐 세 장도 무성의하게 받아들었다. 그러고는 부장과 남편이 막 뚫고 온 시골길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부장은 안방에서 자고 남편은 마루에서 잤다. 일어나는 즉시 혼자 서울로 출발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눈을 떴을 때는 남쪽 나라의 뜨거운 아침 햇살이 얼굴을 사정없이 찔러대고 있었다. 아차! 시계를 본 남편은 벌떡 일어나 마당으로 나갔다.
“이제 일어났는겨?”
한 아주머니가 인사를 건넸다. 생면부지의 관계이지만 우리 집에서 잤으니 가족보다 더 허물없는 사이라는 투였다. 그녀는 툇마루에 앉아 완두콩의 꼬투리를 벗기고 있었다.
“읍내 나가는 버스 어디서 서요?”
“저어기 전봇대 보이지? 저기서 옆으로 꺾으면 금방이여.”
전봇대까지도 백 미터는 족히 넘어 보였다. 남편은 곧바로 가방을 들쳐 매고 마당을 나섰다.
“벌써 가는겨? 한 11시는 돼야 오는디.”
버스 배차 간격이 그렇게 길 수 있다는 사실이 서울내기인 남편에게는 부조리처럼 여겨졌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완두콩 더미를 헤적였다. 꼬투리를 벗기니 완두콩 다섯 알이 동화의 주인공들처럼 소복이 들어 있었다. 부장이 졸린 눈을 비비며 문을 열고 나왔다. 비슷한 시각에 농장주도 나타났다.
부장과 남편은 점심을 얻어먹고 떠날 채비를 했다. 농장주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아참, 어젯밤에 내가 뭘 좀 했는데 말이여….”
순식간에 일회용 플라스틱 박스가 나타났다. 거의 검다고 할 만큼 짙은 보라색에 알이 포동포동 굵은 최상품의 오디였다. 부장이 환호성을 질렀다.
“아이고, 이 귀한 걸! 오디 아닙니까! 부모님이 양잠을 하셔서 집 주변이 전부 뽕나무 밭이었거든요. 야, 거참, 어릴 때 형이랑 오디 따 먹고 입이며 손이 전부 시퍼레져 갖곤, 하하!”
“어허, 씨방, 이 양반이 뭘 좀 제대로 아는구먼. 내가 어제 밤새 딴 거여!”
농장주와 부장은 신이 나서 떠들어댔고 남편은 양미간을 찌푸렸다. 가느다란 초록색 줄기는 날카로운 칼날에 싹둑 잘린 쥐꼬리 같고 열매 부분은 기형이나 돌연변이 굼벵이에 색소를 입혀놓은 것 같았다. 박목월의 시에서나 들어본 오디, “뽕나무 열매”를 그날 처음 본 것이었다.
남편과 부장이 차에 탔다. 농장주는 막 닫히는 창문에다 대고 간밤에도 곱씹었을 법한 얘기를 꺼냈다. 천기 누설하듯 반쯤 속삭이는 어조에 자신이 노회한 사업가임을 과시하려는 듯 눈도 찡긋했다.
“씨방, 대리점은 언제쯤 낼 수 있을까, 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