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바고의 기억 속에서 라라는 그가 톨스토이의 크로이처 소나타를 읽으며 토냐, 미샤와 함께 금욕과 순수를 논하던 시절 음란한 욕망과 타락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다른 세계에서 온 소녀로서 신비스러움을 갖춘 존재였다. 이후, 1차 세계 대전은 군의관 지바고와 간호병 라라의 정신세계를, 소비에트 혁명은 두 사람의 삶 자체를 아름답고 절실한 사랑으로 묶어 놓게 된다. 그리고 지바고의 시 속에서 라라는 어린 시절부터 가혹하기만 했던 운명에 맞서면서 그녀가 익혀온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며 때로는 자기희생적인 삶, 코마로프스키와의 관계에서 나타났던 탕녀의 이미지 등을 복합적으로 구현하면서 궁극적으로는 막달라 마리아의 형상과 등치된다. 탈출에 성공하여 유라친, 이어 바르이키노로 돌아온 지바고를 간호하고 돌보는 라라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발을 씻기던, 타락과 구원을 동시에 담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의 또 다른 모습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혁명의 격동 속에서도 사랑과 삶을 창조하고자 했던 라라의 의지, 그리고 그녀의 비극적인 종말은 20세기 전반기에 어느 나라보다 여성의 활약이 두드러졌던 러시아-소비에트 시대의 아름답고 현명한 여성의 초상화의 일변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붉은 마가목 열매가 혁명과 사랑의 상징이라면, 이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인 파벨 안치포프야말로 가장 직접적인 예가 되겠다. 그는 1905년 혁명 당시 철도 파업을 주동하여 투옥되었다가 1917년 혁명 이후에는 가족도 내팽개친 무자비한 관료적 혁명가가 된 안치포프의 아들이다. 아버지와는 달리 섬세하고 여린 성정을 지녔던 그의 순수한 열정은 라라에 대한 사랑과 이것을 매개로 한 지식욕으로 구체화된다. 하지만 그 사랑은 타협을 모를 만큼 철저하고 맹목적이었기 때문에 결혼 직후 밝혀진 라라의 때 이른 순결의 상실과 육체적 타락을 그는 받아들일 수 없었으며, 라라의 표현대로,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악-불행을 시대정신, 즉 보편적인 악으로 환원시켜 버린다. 이 점에서 안치포프의 1차 세계 대전 참전은 결혼 생활로부터의 일시적인 도피이기도 했지만 무수한 코마로프스키들, 즉 구시대 러시아의 악의 대변자들에 대한 복수극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파벨 안치포프의 복수극은, 그가 종전 후 자신의 이름이 사망자 명단에 오른 것을 이용하여 스트렐리니코프라는 이름으로 부활한 뒤 혁명에 적극적으로 가담함으로써 극에 다다른다. ‘스트렐리니코프라는 이름이 암시하듯(‘학살자’, ‘총살자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라라에 대한 열정으로 나타났던 그의 순수는 이제 어떤 추상적인 것, 즉 이데올로기와 혁명과 결합된다. 지바고의 경우와는 정반대로, 역사의 흐름을 한 인간의 의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이 의지의 화신의 내부에 뿌리를 내리자, 그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어떤 잔혹한 행위도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정작 혁명이 완성되자마자 정식 당원이 아니면서도 수뇌부와 너무 가까웠기 때문에 최고형을 선고받게 되는 그의 운명은, 앞서 언급했듯, 낭만적인 혁명과 현실적인 정치가 서로 결합되었다가 분열되는 역사의 보편적인 현상을 잔혹할 정도로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것이다. 혁명을 위해 사랑하는 가족과의 만남조차 미루었던 이 비운의 인물은 라라가 떠나버린 지바고의 은신처 바르이키노로 숨어들었다가 자신의 아내와 한 시절을 보냈던 지바고와의 대화로 지새운 밤이 채 끝나기도 전에, 결국 자살하고 만다. 그러니까 아침녘 지바고의 눈에 비친, 하얀 눈밭 위에 붉게 번져 있는 안치포프-스트렐리니코프의 피는 빨간 마가목 열매의 또 다른 구현인 것이다. 나아가, 이것은 파스테르나크의 조금 어린 벗 마야코프스키처럼 너무도 순수하고 열정적이었기 때문에 혁명 이후 관료화되어가는 사회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었던 진정한 혁명가들, 영원한 혁명가들의 비극적인 죽음에 바치는 파스테르나크의 애정과 경의의 표현일 수 있겠다.

 

 

 

 

 

 

0. : 영원한 혁명의 시대

 

대러시아제국이 소비에트 연방이라는 이름 하에 거의 한 세기에 걸쳐 진행시켜온 사회주의 실험을 실패로 인정하고 다시 러시아로 돌아간 지 이미 10년이 넘었다. 이제 마르크스주의 자체,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와 트로츠키의 영구 혁명론 따위는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처럼 되었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라는 <공산당 선언>의 마지막 문구도 한 때는 우리의 모든 젊은 지성을 흥분시킬 만큼 강력한 것이었으나 이제는 잊혀진 지 오래며, 러시아 본토에서도 마르크스엥겔스 전집 따위는 좀처럼 읽히지 않는 고서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새로운 사건과 새로운 변혁의 꿈틀거림은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 한 어떤 식으로든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은 망각되지 말아야 될 것이다. 앞으로 수세기가 지난 이후, 현재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이 시대를 미래의 역사학자나 사회학자는 혁명의 시대로 기록할 지도 모를 일이다. 이와 맞물려 근시안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정치나 경제에 비할 수 없을 만큼 무기력하고 나약한 문학 및 예술의 소명에 대한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최소한 <닥터 지바고>에만 한정시켜 말한다면, 그리고 혁명이라는 것이 우리의 삶, 나아가 역사 자체와 동의어일 수 있다면, 문학과 예술은 지금도 진행 중이며 영원히 계속될 혁명에 대한 충실한 기록이 되어야 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작가의 의지 여부와는 무관하게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을 터이다. <닥터 지바고>의 주인공과 작가 파스테르나크의 삶이 보여주듯, 작가-인간의 운명은 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특정 시대의 운명과 어떤 식으로든 그 흐름을 같이 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동년배여야 하는데 부녀, 심지어 할아버지와 손녀 같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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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토요일 오후, 아파트 근처 복덕방. 그녀, 69년생의 우연이가 나타났다.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임에도 참 예쁘다. 차분하면서도 이지적인 표정과 몸가짐도 눈에 들어온다. 육아와 살림의 최전선에서 연일 참혹한 전투를 치루는 전업주부라면 누구나 느낄 법한 선망이 꿈틀댄다.

애기 너무 예쁘네요. 안아 봐도 돼요?”

그녀는 내 표정을 잠시 살핀 다음 건우를 조심스레 안아 올린다.

낯가림도 안 하네요? 어쩜, 웃는 것 좀 봐. 돌 지났어요? 애 키운 지 너무 오래 돼서.”

건우와 달리 아기 때부터 낯가림이 심했던 우진이는 지금도 내 옆에 꼭 붙어서 눈알만 굴린다.

돌이 한참 지났는데도 아직 못 걸어요.”

지희도 그랬잖아? 나중에는 다 잘 걸으니까 걱정할 것 없어, 새댁.”

일전에 통화한 주인 할머니가 끼어든다. 꾸부정한 허리를 받치고 있는 삭정이처럼 마른 두 다리가 양옆으로 애매하게 벌어져 금방이라도 무너질 기세이다. 살과 뼈를 팔십 여년의 세월에 충실히 헌납했음을 보여주는 얼굴도 새삼스럽다. 주글주글한 얼굴 한가운데로 진분홍색 립스틱이 기세등등하게 굴며 입술의 기를 꺾는다. 그악하고 왁살스러운 노파의 얼굴에서 순간순간 우연이의 모습이 잎사귀에 이는 바람처럼 스쳐 지나간다.

 

갱신한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있을 때 한 남자가 헐레벌떡 복덕방 안으로 들어온다. 삼십대 중반, 배가 둥그렇게 나오다 못해 이제는 옆으로 지긋이 퍼져가는 전형적인 회사원. 양복바지는 접촉 부위마다 주름이 가 있고 그 사이로 반들반들하니 때가 앉아 있고 와이셔츠의 소매는 걷어 올리고 맨 위의 단추 두 개는 풀려 있고 넥타이는 둘둘 말린 채 바지 주머니 안에 들어가 있다. 그리 덥지도 않은데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고 고불고불한 머리카락이 땀범벅이 된 관자놀이 주변에 들러붙어 있다.

아빠다!”

아빠, , , !”

두 아이가 듀엣처럼 화음을 넣는다. 정말 감격한 건 오히려 내 쪽이다. 어제 오후에 통영으로 출발한다고 할 때 이미 체념한 터였다. 아빠를 보자 안심이 되는지 우진이가 마침내 입을 연다.

아줌마, 캥거루 나라에서 왔어요?”

? 그런데?”

아줌마, 캥거루 봤어요?”

.”

아줌마, 코알라는 봤어요?”

아니. 코알라는 외곽으로 나가야 볼 수 있거든.”

외곽? 그런 말, 나는 몰라요.”

코알라는 멀리, 숲속이나 야생동물 공원에 산다는 얘기야.”

아줌마가 방실대며 대꾸를 해주자 우진이도 자꾸 질문거리를 생각해낸다.

아줌마, 캥거루 고기 먹어 봤어요? 코알라 고기도 먹을 수 있어요? 동물은 다 고기예요? 아줌마, 미어캣도 거기 살아요?”

우진이의 질문은 천일야화처럼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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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죽음과 불멸 - 의사와 시인

 

죽음은 어린 시절부터 지바고에게 낯설지 않은 것이었다. 소설은 어린 지바고인 유라의 어머니의 장례식으로 시작된다. “지바고(부인)의 장례식을 치루는 겁니다라는 문장은 그 중의적인 의미 산 자를 매장한다’(‘지바고Zhivago’산 자의 목적격이기도 하다)로 인해 삶과 죽음의 복합적 관계를 암시하고 있다. 곧이어, 조만간 유라의 벗이 될 미샤 고르돈과 그의 아버지가 동승한 기차에서 지바고의 아버지가 투신자살하는 장면이 묘사된다. 부모의 때 이른 죽음을 겪으면서 지바고는 삶과 죽음에 대해 남달리 초연한 태도를 갖게 된다. 그의 외숙이자 대학자인 니콜라이의 영향도 일정 부분 작용하는 바, 비단 종교적인 차원의 논의를 떠나서 죽음의 대극에 서 있는 것은 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불멸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에게 연일 죽음과 대면하는 의사라는 정체성 외에, 부활과 불멸을 향한 욕망을 실현시켜줄 수 있는 공간인 문학과 시인이라는 정체성이 필요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문학마저도 혁명과 정치에 봉사하도록 강요되었던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지바고와 그의 시 및 산문(일기)는 가히, 작가 파스테르나크에게 붙여졌던 퇴폐적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힘들었을 터이다. 한 인간으로서의 유리 지바고도 다분히 기회주의적이며 그것이 아니라면 최소한 무기력하고 나약한 인물로 읽힐 수 있겠다. 1차 세계 대전에 군의관으로 참전했으나 그에게 어떤 거국적 이념이나 명분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혁명 이후 내란 중 파르티잔들 틈에서 활동하게 된 것도 이미 그의 애인이 된 라라를 만나러 가던 도중 납치되었기 때문이었다. 전쟁과 혁명에 대한 그의 태도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여인에 대한 사랑에서도 그는 능동적인 행동의 주체로서의 면모를 거의 보여주지 못했다. 지바고가 자신의 삶의 주체로서 활동한 유일한 영역은 그러니까, 문학-시였다.

 

 

 

 

 

 

 

 

 

 

 

 

 

 

 

 

 

<닥터 지바고>의 마지막 장인 17장에 수록된 유리 지바고의 시들은 혁명의 가두리에 머물고 있다가 불가피하게 그 물결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던 귀족 태생 지식인의 역사와 문학, 자신의 소명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가령 첫 번째 시 햄릿을 보자. 러시아문학사에서 물론 양가적인 의미를 띠긴 하지만 대체로 행동하기보다는 사유하는 인물로 받아들여졌던 햄릿은 파괴를 통한 재건을 슬로건을 내세운 혁명기의 러시아-소비에트에서는 결단코 긍정적인 인물상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지바고는 여러 다른 시에서도 보이듯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과 햄릿의 형상을 결합시키되, 이 문학적이고 종교적인 형상을 궁극적으로는 혁명과 마주한 시인의 이상적인 표상으로 제시하고 있다. 혁명이 아니었다면 그는 의사와 시인으로서의 직분에 충실하면서 평온한 삶을 살았을 것이며, 그에게는 어떤 순간적인 충격으로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놓을 수 없으며 요동치는 역사 위에 존재하는 뭔가 더 높고 더 숭고한 원칙이 있었다. 최소한 그러한 믿음이 있었다. 따라서 아버지, 나의 아버지 만일 할 수만 있으시다면, /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주소서 () 그러나 연극의 순서는 이미 짜여져 있고, / 길 끝은 피할 수가 없다라는 시구는 역사의 테러를 무조건 회피하거나 무기력하게 수용하는 것으로 읽혀서는 안 된다. 햄릿-그리스도의 처절한 고백은 차라리, 인간 개인의 힘으로는 어떻게 뒤바꾸어 놓을 수 없는 절대 법칙에 대한 작가 지바고-파스테르나크의 심오한 통찰과 고뇌의 산물이며 그의 일견 우유부단해 보이는 삶 역시도 이 법칙에 맞서 그가 취할 수 있었던 가장 적극적인 대응책이었던 것이다.

 

3. 붉은 마가목 열매 - 사랑과 혁명

 

유리 지바고가 성장기를 보낸 그로메코 집안의 파티에서는 빨간 마가목 열매로 담근 보드카를 선보이곤 했다. 마가목 열매는 아직은 대러시아제국이 존재했던 그 시절, 유년의 기억을 환기시키는 뭔가였던 것이다. 하지만 󰡔닥터 지바고󰡕의 주인공들이 성장하고 이와 맞물려 역사의 흐름이 거세질수록 마가목 열매의 의미역은 혁명 전반으로까지 확대된다. 특히 12눈 속의 마가목의 첫 장면에서 파르티잔 부대의 주둔지 근처 눈 밭 위에 홀로 우뚝 솟은 산마가목 나무에 달려 있는 빨간 열매들은 혁명으로 인해 희생된 피들, 그들의 선혈의 직접적인 상징으로 기능한다. 러시아의 하얀 설원을 배경으로 한 붉은 산마가목 열매는, 또한 그 눈부신 아름다움과 신비스러움에 있어서 라라와 합치되기도 한다. 파르티잔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살육과 광기를 견디다 못해 탈출을 결심하고 방황하던 중 지바고의 눈에 들어온 눈밭의 또 다른 산마가목 나무는 나의 마가목 아가씨라라의 다른 이름이었던 것이다.

 

(계속...)

 

-- 왜 우리는 계속 이 소설을 읽는가. 영화화되는 것 포함.

 

 

 

눈 덮인 설원을 달리는 썰매. 데이비드 린의 <닥터 지바고>는 어린 시절 러시아문학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는데, 실제 영화 속 배경은 러시아가 아니었다는..-_-;; 최근 BBC에서 만든 <닥터 지바고>. 키이라 나이틀리가 라라 역을 맡았는데, 어떨지 궁금하다. 이미지만 봐서는 너무 안 어울리는 캐스팅..ㅠ.ㅠ

 

 

 

물론 더 잘 만든 건 (끝까지는 못 봤지만)  러시아 판 <지바고>이다. 단, 올렉 멘쉬코프가 아무리 훌륭한 배우라도, 중년의 나이로 이십대 유리 지바고(유라)를 감당하는 건 아무래도 역부족. 특히, 라라 역을 맡은 젊고(어리고!) 예쁜 여배우와 너무 대조되어 몰입이 잘 안 될 정도였다..ㅠ.ㅠ 

 

 

 

-- 마가목(Рябина)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신지. 러시아 가면 한 번 보고 싶었는데, 떠날 즈음에 알았다, 기숙사 건물 옆에 줄창(!) 서 있던 바로 그 나무가 마가목이었음을...-_-;; 

<지바고>의 이미지대로 하얀 눈을 묻히고(^^;;) 있는 사진은 쉽게 찾을 수 있다. 눈과 함께 있으면 진짜 '선혈'이라는 단어를 연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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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라벤의 소멸과 함께 다시 출장 인생이 시작됐다. 운전대, 카페인이 다량 함유된 각성제, 고속도로, 휴게소. 내가 팔에 링거를 꽂고 있을 때 남편은 부장, 합천 거래처 사장과 함께 해인사 근처 음식점에서 산채 정식을 먹고 있었다. 같이 나온 자연산 송이버섯의 맛이 일품이었다. 멀찍이 앉아 있던 할머니가 직각으로 굽은 허리를 움직이며 어기적어기적 다가왔다.

더 먹을라나?”

이번에 나온 송이의 양은 처음 것의 서너 배는 족히 됐다. 구운 송이는 물론 그 물까지 다 받아먹었다. 그러나 나른한 포만감은 계산서 앞에서 경악으로 바뀌었다.

, 그거 서비스 아니었어요?”

젊은 양반들이 미쳤나, 요즘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노?”

할머니는 직각 허리를 용케 잘 움직이며 천연덕스레 돈을 받아 챙겼다.

<고바우식당>을 나와 노래방으로 향하는 중에도 부장은 계속 투덜댔다.

촌 인심이라서 후한 줄 알았더니, 무슨 귀곡산장이냐, 꼬부랑 할머니가 우리를 홀린 거잖아, . 그나저나 도우미가 있어야겠죠, 사장님?”

부장의 선심에 거래처 사장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대구에서 불러와야 되는데, 출장비가부장님이 내실라우?”

시커먼 노래방 안, 도우미도 없이 시커먼 남자들만 엉거주춤 설쳐대니 분위기도 영 침침했다. 일찌감치 자리를 파한 남편과 부장은 오늘 따라 웬일로 문을 연 인근 여관으로 향했다. 갑자기 사나워진 바람을 타고 굵은 빗방울이 우박처럼 떨어졌다.

 

<만봉장>. 낡은 4층짜리 건물 옆에는 건물보다 더 낡은 차 한 대가 서 있었다. 텅 빈 여관을 홀로 지키고 있는 주인의 차였다. 투숙객이 없어 방도 골라잡을 수 있었다.

2. 문을 열자마자 텔레비전이 눈에 들어왔다. 두툼한 몸체며 목재 틀에 새겨진 ‘Gold Star’라는 문자며 영락없이 골동품이었지만 멀쩡히 잘 나왔다. 남편은 불을 끄고 텔레비전만 켜놓은 채 침대에 누웠다. 장마철에 제대로 말리지 않은 빨래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가 가득했다. 에어컨은 다이얼을 돌리는 식이었는데, 냉방은 고사하고 제습도 안 됐다. 남편은 창문을 살짝 열었다. 창밖의 비바람이 여관방 벽을 뚫고 들어올 기세로 거칠었다. 남편의 눈꺼풀 위로 낡은 여관방의 어둠이 드리워지고 그 위로 간간히 골드 스타의 불빛이 번득거렸다. 거세고 대범한 비바람 소리와 윙윙대는 잡음 속으로 뭔가 분절적인 말도 들려왔다.

태풍 볼라벤에 이어 태풍 덴빈이 지금 경상남도 거창을 지나고.”

남편은 아내, 즉 나의 고향이 거창이라는 사실을 상기했다. 맞다, 아까 거창을 지나왔지, 아무것도 없는 그런촌구석에도 사람들이 살고. 이런 상념과 함께 의식이 완전히 명멸하기 직전의 황홀한 찰나를 짧고 날카로운 기계음이 망쳐놓았다. 남편은 입안에 막 고인 침을 추슬렀다. 역시 대리 운전이었다. 10시가 다 됐음을 알려주는 메시지이기도 했다.

 

남편은 다시 등이 바닥에 닿기가 무섭게 고된 행군을 마친 군인처럼 곯아떨어졌다. 이번에는 길고 긴 음악소리가 단잠을 부숴놓았다.

이봐, 김대리, 씨방, 난데 말이야, 알지? , 한영수?”

완주의 농장주였다. 왕벌과 솔방울과 뱀 등 각종 술 냄새가 한꺼번에 풍겨 나왔다.

젊은 사람이 말이야, 인생 그렇게 살면 못 써!”

말끝을 그윽하게 끌며 거국적인 말로 입을 연 농장주는 평생 쌓인 울분을 토로했다. 걸쭉하게 재구성된 그의 전기의 말미에 소일삼아 파이프 대리점을 경영하는 노년의 풍경이 펼쳐졌다. 남편은 졸지에 소박하고 착실한 촌부의 꿈을 잔인하게 짓밟은 질 나쁜 깡패, 양아치가 되었다. 그러나 어리둥절한 미안함과 본능적인 짜증 사이를 오가다가 후자 쪽으로 폭발해버렸다.

할아버지, 지금 누구한테 신세타령이세요? 보자보자 하니까 정말! 나이 많은 게 무슨 유세예요?”

굳이 이런 말까지 내뱉은 것은, 누적된 수면 부족을 해갈하려는 순간, 막 진입에 성공한 잠의 세계로부터 느닷없이 호출당한 까닭이었다. 농장주는 뜻밖의 응수에 당황한 나머지 한마디 대꾸도 못했다.

 

남편은 다시 잠을 청했으나 잠도 성질이 났는지 좀처럼 다시 찾아와 주지 않았다. 캔 맥주 하나를 마셨다. 몸이 묵직하고 머리가 알딸딸하고 눈앞이 침침해졌다. 그럼에도 잠은 들지 않고 오히려 늙은이에게 몹쓸 짓을 했다는 자책감이 커졌다. 혹시 무슨 몹쓸 짓이라면 하면 어떡하지. 이런 염려에 스마트폰을 잡는데 갑자기 잠이 왕림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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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혁명의 시:

- 파스테르나크(1890-1960)의 <닥터 지바고>(1957)

 

 

 

 

0. 들어가며: 문학과 이데올로기

 

20세기 러시아-소비에트 문학사를 논할 때 독자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작품을 꼽으라면 단연코,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가 되겠다. 특히 우리나라 독자들의 머릿속에는 데이비드 린의 영화 닥터 지바고(1965)까지 더해져서 소설가로서의 파스테르나크가 20세기 러시아문학의 대명사로 자리 잡은 감이 없지 않아 있다. 그런데 그는 소설가이기보다는 시인이었으며 <닥터 지바고>는 그의 유일한 장편소설이다. 그 때문에 이 소설은 문학사적 관점에서 이것과 자주 비교되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와 달리 소설적 문법보다는 서정시적 문법에 충실한 작품이며, 다소 과장해서 말하자면 아름답고 세련된 산문으로 쓰인 한 편의 긴 서정시라고 할 수 있다.

 

 

 

 

 

 

 

 

 

 

 

 

익히 알려진바, 1955년에 완성된 이 작품은 혁명의 이데올로기를 전격 부정하고 있다는 이유로 국내에서 출판이 거부되어 1957년 이탈리아에서 먼저 출판되었다. 작가가 노벨상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른바 사회주의 리얼리즘(socialist realism)의 원칙 하에 문학과 이데올로기 간의 위계질서가 확고하게 굳어져버린 정치적 정황과 밀접하게 닿아 있었다. 어쩌면 스캔들과도 같은 일련의 사건 때문에 <닥터 지바고>는 지나치게 폄하되거나 혹은 반대로 지나치게 과대평가되는 경향도 없지 않다.

 

실상 파스테르나크는 문학과 예술과 학문 외적인 어떤 것, 즉 정치나 혁명에는 원칙적으로 무관심한 사람이었다. 소비에트 혁명을 전후하여 많은 작가들이 소비에트의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망명하는 일이 적지 않았지만(<롤리타>의 작가 나보코프(1899년생)가 대표적인 예이다) 소위 반체제 작가들에게 있어 추방 명령을 이겨가면서까지 고국에 남아 소비에트-러시아를 살아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따라서 내적 망명 문학’, ‘유배 문학이라고 불릴 수 있는 <닥터 지바고>를 이해함에 있어서 문학과 정치, 예술과 이데올로기 간의 역학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출발점이자 종결점이 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1. 파스테르나크와 지바고: 대러시아제국에서 소비에트 연방으로

 

파스테르나크는 1890년생으로서 <닥터 지바고>의 주인공 지바고와 마찬가지로 1905<피의 일요일 사건>, 1차 세계 대전, 19172월 혁명과 10월 혁명, 백위군과 적위군 간의 전쟁, 즉 내란에 이르기까지 천년의 울림을 자랑하는 대러시아제국이 하루 아침에 소비에트 연방으로 바뀌는 과정을 살아 있는 역사로 체험했다.

 

이 역사의 격동 속에서 파스테르나크 연배의 작가들 대부분이 부닥쳤던 딜레마는 문학과 이데올로기 간의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였다. 혁명 전야, 젊은 작가들은 혁명을 새로운 세계의 도래로 생각하면서 환영했다. 세기말과 세기초 러시아문학에서 혁명이 거의 종교적이고 비의적인 색채마저 띠면서 신비화되는 것은 봉건적 러시아에 대한 이들의 환멸과 새로운 것에 대한 이들의 갈망이 얼마나 도저했는지를 보여준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대문호 체호프가 사망하고(1904) 톨스토이가 이미 문학 활동을 접고 종교적 교시자로 나섰던 만큼, 러시아 특유의 메시아주의는 이제 젊은 작가들의 손으로 넘겨졌던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를 거의 신화화하면서 새로운 미학을 구축하고자 했던 상징주의자 그룹은 대표적인 예이다. 소비에트 비평가들의 범주에 의할 때 부르주아 문학으로 명명된 상징주의자 그룹보다 조금 늦게 등장한 미래파라는 이 점에서 훨씬 더 과격했다. 미래파가 레프(LEF: 예술좌익전선), 나아가 레프(REF: 예술혁명전선)로 바뀌는 지점은, 곧 문학이 다분히 낭만적인 개념인 혁명이 아닌 극히 사실주적 개념인 정치와 뒤섞였다가 결렬되는 지점이기도 했다. 이 과정의 중심에 섰던 혁명의 시인마야코프스키의 자살이 보여주듯, 이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자체가 아니라 혁명이라는 개념이 담고 있는 세계 창조의 기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러시아의 이런 떠들썩한 분위기는 온화하고 조용한 성품의 소유자였던 파스테르나크에는 생경한 것일 수도 있겠다. 톨스토이의 <부활>의 삽화를 그리기도 한 저명한 화가와 저명한 피아니스트였던 부모 밑에서 귀족문화를 충분히 향유하면서 성장한 그는, 일련의 전기적 사실들이 보여주듯, 대러시아제국의 귀족주의와 엘리트주의를 문학 속에 담아낼 수 있는 자양분을 지닌, 수용력이 넓은 자였다. 어쩌면 그러했기 때문에 상징주의의 두 거두인 시인 알렉산드르 블록과 안드레이 벨르이를 좋아했으며, 동시에 상징주의와는 정반대되는 미학적, 시학적 전략을 표방했던 미래파와 가깝게 지낼 수도 있었으며 심지어 미래파, 나아가 레프의 일원이 되기도 했다.

 

파스테르나크의 이러한 문학적, 정치적 활동에는 마야코프스키에 대한 그의 각별한 애정이 깔려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닥터 지바고>에도 마야코프스키의 이름이 직접 언급되는데, 유리 지바고는 (마야코프스키)는 모든 점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계승자라고 할 수 있으며 그의 시는 라스콜리니코프를 포함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젊은 주인공들이 쓴 것 같은 느낌을 준다고 말한다. 이는 정치 전반에 냉담한 태도를 취했으며 볼셰비키 혁명과는 무관한 삶을 살았거나 최소한 그러고자 했던 그가 혁명에 투신한 자들에 대해 가졌던 동정적인태도와 연결되어 있다. 마야코프스키가 적극적으로 혁명에 가담했으며 결국엔 혁명에 대한 환멸과 좌절로 인해 자살했다면, ‘동반자 작가파스테르나크는 차라리 혁명과 무수한 마야코프스키들의 형상을 문학 속에 남기는 쪽을 택한 것이며 그 산물이 자전적 소설’ <닥터 지바고>였다. 여기에는 그 시대와 그 시대의 순수한 희생자들에 대한 파스테르나크의 부채의식이나 죄의식도 적잖이 개입되었을 것이다. 작가 파스테르나크의 의심의 여지없는 분신인 지바고가 작가와는 달리, 군의관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볼셰비키 혁명 및 내란 과정에서 파르티잔으로 활동하도록 그려진 것은 이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터이다.

 

(계속.)

 

-- 아주 오래 전에 쓴(더욱이, 좀 많이 못 쓴 것 같다..ㅠ.ㅠ), 저 책에 수록된 원고인데, 왜 꺼냈느냐.

 

-- <죄와 벌>에 이어, <닥터 지바고>를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척 하기 싫다! 모든 번역을 나는 다 하기 싫은데 억지로, 마지 못해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럼 왜 하냐. (어느 원로 시인의 말마따나) 다른 일보다는 덜 하기 싫기 때문이다 운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번역이야말로 최근 내 존재(혹은 부재?)의 알리바이인 것 같다.

-- <닥터 지바고>를 상대로 열애를 했던 밤이 물론, 있었다. 중학교 때. '구덩이 오막살이' 단칸 월세방에서 두 칸 짜리 방으로 이사 간 다음. 햇볕이 들어오는 방이라 너무 좋았다. 아무튼 그때 내가 읽은 번역은 오재국 것.  한데 머리가 굵어지면서 이 작품을  좀 얕잡아 보게 됐다. 몇년 전부터는 아주 대놓고(!) 그리했다. (강의 커리큘럼에서도 뺐다.)  한데 나이가 더 드니, 다른 식의 질문을 던져보게 된다.

-- 왜 우리는 계속 이 소설을 읽는가. 그러니까 잘 쓴 여타 러시아 소설에 비하면 못 쓴 소설인데 왜 계속 읽느냔 말이다. 요컨대, 러시아문학 연구자(^^;;)로서의 나는 이 질문에 답할 필요가 있다.

-- 번역가로서는? 여러 말 할 것도 없다. 무조건 쉼 없이, 열심히, 잘, 옮겨야 한다.  문장 하나하나, 단어 하나하나, 그것이 거기 있는 건 다 이유가 있음을, 심지어 구둣점이나 행간에도 작가의 (때론 무의식적인!) 의도가  들어 있음을 명심하면서.   

-- 소설가로서는? ... 역시, 번역은 너무 하기 싫은 일이고나!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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