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혁명의 시:
- 파스테르나크(1890-1960)의 <닥터 지바고>(1957)
0. 들어가며: 문학과 이데올로기
20세기 러시아-소비에트 문학사를 논할 때 독자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작품을 꼽으라면 단연코,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가 되겠다. 특히 우리나라 독자들의 머릿속에는 데이비드 린의 영화 「닥터 지바고」(1965년)까지 더해져서 소설가로서의 파스테르나크가 20세기 러시아문학의 대명사로 자리 잡은 감이 없지 않아 있다. 그런데 그는 소설가이기보다는 시인이었으며 <닥터 지바고>는 그의 유일한 장편소설이다. 그 때문에 이 소설은 문학사적 관점에서 이것과 자주 비교되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와 달리 소설적 문법보다는 서정시적 문법에 충실한 작품이며, 다소 과장해서 말하자면 아름답고 세련된 산문으로 쓰인 한 편의 긴 서정시라고 할 수 있다.
익히 알려진바, 1955년에 완성된 이 작품은 혁명의 이데올로기를 전격 부정하고 있다는 이유로 국내에서 출판이 거부되어 1957년 이탈리아에서 먼저 출판되었다. 작가가 노벨상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른바 사회주의 리얼리즘(socialist realism)의 원칙 하에 문학과 이데올로기 간의 위계질서가 확고하게 굳어져버린 정치적 정황과 밀접하게 닿아 있었다. 어쩌면 스캔들과도 같은 일련의 사건 때문에 <닥터 지바고>는 지나치게 폄하되거나 혹은 반대로 지나치게 과대평가되는 경향도 없지 않다.
실상 파스테르나크는 문학과 예술과 학문 외적인 어떤 것, 즉 정치나 혁명에는 원칙적으로 무관심한 사람이었다. 소비에트 혁명을 전후하여 많은 작가들이 소비에트의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망명하는 일이 적지 않았지만(<롤리타>의 작가 나보코프(1899년생)가 대표적인 예이다) 소위 반체제 작가들에게 있어 추방 명령을 이겨가면서까지 고국에 남아 소비에트-러시아를 살아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따라서 ‘내적 망명 문학’, ‘유배 문학’이라고 불릴 수 있는 <닥터 지바고>를 이해함에 있어서 문학과 정치, 예술과 이데올로기 간의 역학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출발점이자 종결점이 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1. 파스테르나크와 지바고: 대러시아제국에서 소비에트 연방으로
파스테르나크는 1890년생으로서 <닥터 지바고>의 주인공 지바고와 마찬가지로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 제 1차 세계 대전, 1917년 2월 혁명과 10월 혁명, 백위군과 적위군 간의 전쟁, 즉 내란에 이르기까지 천년의 울림을 자랑하는 ‘대러시아제국’이 하루 아침에 ‘소비에트 연방’으로 바뀌는 과정을 ‘살아 있는 역사’로 체험했다.
이 역사의 격동 속에서 파스테르나크 연배의 작가들 대부분이 부닥쳤던 딜레마는 문학과 이데올로기 간의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였다. 혁명 전야, 젊은 작가들은 혁명을 새로운 세계의 도래로 생각하면서 환영했다. 세기말과 세기초 러시아문학에서 혁명이 거의 종교적이고 비의적인 색채마저 띠면서 신비화되는 것은 봉건적 러시아에 대한 이들의 환멸과 새로운 것에 대한 이들의 갈망이 얼마나 도저했는지를 보여준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대문호 체호프가 사망하고(1904년) 톨스토이가 이미 문학 활동을 접고 종교적 교시자로 나섰던 만큼, 러시아 특유의 메시아주의는 이제 젊은 작가들의 손으로 넘겨졌던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를 거의 신화화하면서 새로운 미학을 구축하고자 했던 상징주의자 그룹은 대표적인 예이다. 소비에트 비평가들의 범주에 의할 때 ‘부르주아 문학’으로 명명된 상징주의자 그룹보다 조금 늦게 등장한 ‘미래파’라는 이 점에서 훨씬 더 과격했다. 미래파가 레프(LEF: 예술좌익전선), 나아가 레프(REF: 예술혁명전선)로 바뀌는 지점은, 곧 문학이 다분히 낭만적인 개념인 혁명이 아닌 극히 사실주적 개념인 정치와 뒤섞였다가 결렬되는 지점이기도 했다. 이 과정의 중심에 섰던 ‘혁명의 시인’ 마야코프스키의 자살이 보여주듯, 이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자체가 아니라 ‘혁명’이라는 개념이 담고 있는 세계 창조의 기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러시아의 이런 떠들썩한 분위기는 온화하고 조용한 성품의 소유자였던 파스테르나크에는 생경한 것일 수도 있겠다. 톨스토이의 <부활>의 삽화를 그리기도 한 저명한 화가와 저명한 피아니스트였던 부모 밑에서 귀족문화를 충분히 향유하면서 성장한 그는, 일련의 전기적 사실들이 보여주듯, 대러시아제국의 귀족주의와 엘리트주의를 문학 속에 담아낼 수 있는 자양분을 지닌, 수용력이 넓은 자였다. 어쩌면 그러했기 때문에 상징주의의 두 거두인 시인 알렉산드르 블록과 안드레이 벨르이를 좋아했으며, 동시에 상징주의와는 정반대되는 미학적, 시학적 전략을 표방했던 미래파와 가깝게 지낼 수도 있었으며 심지어 미래파, 나아가 레프의 일원이 되기도 했다.
파스테르나크의 이러한 문학적, 정치적 활동에는 마야코프스키에 대한 그의 각별한 애정이 깔려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닥터 지바고>에도 마야코프스키의 이름이 직접 언급되는데, 유리 지바고는 “그(마야코프스키)는 모든 점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계승자”라고 할 수 있으며 그의 시는 라스콜리니코프를 포함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젊은 주인공들이 쓴 것 같은 느낌을 준다고 말한다. 이는 정치 전반에 냉담한 태도를 취했으며 볼셰비키 혁명과는 무관한 삶을 살았거나 최소한 그러고자 했던 그가 혁명에 투신한 자들에 대해 가졌던 ‘동정적인’ 태도와 연결되어 있다. 마야코프스키가 적극적으로 혁명에 가담했으며 결국엔 혁명에 대한 환멸과 좌절로 인해 자살했다면, ‘동반자 작가’ 파스테르나크는 차라리 혁명과 무수한 마야코프스키들의 형상을 문학 속에 남기는 쪽을 택한 것이며 그 산물이 ‘자전적 소설’ <닥터 지바고>였다. 여기에는 그 시대와 그 시대의 순수한 희생자들에 대한 파스테르나크의 부채의식이나 죄의식도 적잖이 개입되었을 것이다. 작가 파스테르나크의 의심의 여지없는 분신인 지바고가 작가와는 달리, 군의관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볼셰비키 혁명 및 내란 과정에서 파르티잔으로 활동하도록 그려진 것은 이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터이다.
(계속.)
-- 아주 오래 전에 쓴(더욱이, 좀 많이 못 쓴 것 같다..ㅠ.ㅠ), 저 책에 수록된 원고인데, 왜 꺼냈느냐.
-- <죄와 벌>에 이어, <닥터 지바고>를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척 하기 싫다! 모든 번역을 나는 다 하기 싫은데 억지로, 마지 못해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럼 왜 하냐. (어느 원로 시인의 말마따나) 다른 일보다는 덜 하기 싫기 때문이다 운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번역이야말로 최근 내 존재(혹은 부재?)의 알리바이인 것 같다.
-- <닥터 지바고>를 상대로 열애를 했던 밤이 물론, 있었다. 중학교 때. '구덩이 오막살이' 단칸 월세방에서 두 칸 짜리 방으로 이사 간 다음. 햇볕이 들어오는 방이라 너무 좋았다. 아무튼 그때 내가 읽은 번역은 오재국 것. 한데 머리가 굵어지면서 이 작품을 좀 얕잡아 보게 됐다. 몇년 전부터는 아주 대놓고(!) 그리했다. (강의 커리큘럼에서도 뺐다.) 한데 나이가 더 드니, 다른 식의 질문을 던져보게 된다.
-- 왜 우리는 계속 이 소설을 읽는가. 그러니까 잘 쓴 여타 러시아 소설에 비하면 못 쓴 소설인데 왜 계속 읽느냔 말이다. 요컨대, 러시아문학 연구자(^^;;)로서의 나는 이 질문에 답할 필요가 있다.
-- 번역가로서는? 여러 말 할 것도 없다. 무조건 쉼 없이, 열심히, 잘, 옮겨야 한다. 문장 하나하나, 단어 하나하나, 그것이 거기 있는 건 다 이유가 있음을, 심지어 구둣점이나 행간에도 작가의 (때론 무의식적인!) 의도가 들어 있음을 명심하면서.
-- 소설가로서는? ... 역시, 번역은 너무 하기 싫은 일이고나!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