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포처형사이, 지루한 소송같은 삶: “개 같군!”

카프카(1883-1924), <소송>(1925)

 

 

 

카프카가 서른을 막 넘기고 쓴 미완의 장편 <소송>의 첫 문장이 유명하다. 누군가 요제프 K를 중상모략한 것이 틀림없다. 그가 무슨 특별한 나쁜 짓을 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어느 날 아침 느닷없이 체포되었기 때문이다.”(9) 피고인의 아침이나 훔쳐 먹는 한심한 감시인들(프란츠와 빌렘)K의 물음에 답을 주기는커녕 말단 직원의 설움만 늘어놓는다. 말이 좀 통할 것 같은 감독관도 마찬가지이다. 어떻든 체포됐음에도 은행의 자금담당 부장으로서 K의 일상생활은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 열흘쯤 뒤 일요일, K는 심리위원회에 참석, 예심판사를 향해 호통을 친 다음 법정을 나온다. 이어, 재차 법원 방문, 법원의 정리(廷吏)와 그의 아내와 그녀의 정부(법학도) 목격, 은행 사무실 근처 창고에서 매질을 당하는 두 감시인, “시골에서 온 유령”(112)K의 숙부(카를-알베르트)의 호들갑, 와병 중인 변호사(홀트 박사) 방문, 그의 애인인 레니와의 접촉, 은행의 고객(제조업자)이 소개해준 법원 소속의 초상화가(티토렐리) 방문, 변호사와 그의 고객인 상인 블로크의 관계 등 일련의 에피소드가 파편처럼 제시된다.

 

 

 

 

 

 

 

 

 

 

 

 

 

 

 

 

그러나 새 인물의 거듭된 등장도 사건의 큰 흐름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각각의 만남과 대화는 순서를 바꿔도 될 만큼 우연의 논리에 지배된다. 곳곳에 포진한 여자들과 K의 관계는 외설적이긴 하지만 관능적이지는 않고, 때문에 정서적 감흥보다는 미학적 당혹감을 불러일으킨다. 한마디로, <소송>은 동일한 것의 반복과 좀처럼 눈에 뜨이지 않는 섬세한 변주를 보여주는 티토렐리의 음산한풍경화 세 점(‘황야의 풍경’)을 닮았다. 하숙집 여주인(그루바흐 부인)의 말처럼 무언가 학문적인 것”(32), 일상이 된 체포-소송에 관한 학적 연구 같은 소설, 그리고 모든 점에서 평범의 화신인 K의 삶 깊숙이 침투한 이 권력-법의 테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소송>의 아홉 번째 장(대성당에서)에서 신부는 K에게 기만에 관한 성담’(聖譚)(법 앞에서)을 들려준다. 한 시골 사람이 법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문지기에게 저지당한다. 그럼에도 계속 기다리다가 마침내 임종을 앞둔 시점, 지금껏 아무도 법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이 없음을 알아채고서 이유를 묻는다. 문지기는 이 문은 오직 그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누가 누구를 기만한 것인가. 문지기야말로 기만당한 것이 아닐까. 그는 법의 내부를 지키는 문지기들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고, 법의 문을 지켜야 하는 직무 때문에 자기 자리에서 한 발도 벗어나지 못한다. 이쯤 되면 자기기만에 빠진 자발적인 노예가 아닌가. 한편, K는 얼핏 시골 사람에 가까워 보이지만 단 하루도 업무 영역 밖으로 밀려나지 않고자애쓰고 한번 밀려나면 다시 돌아오게 해주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249)에 떤다는 점에서 문지기의 삶을 사는 것도 같다. 혹은, 법의 문 안으로 들어섰고(, 체포됐고) 그 내부의 공허함과 비루함(허름한 주택가의 건물 안에 위치한, 각종 세간이 들어찬 방과 같은 법정!)을 봐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많은 가정과 물음은, 그러나, 소설의 길고 두툼한 몸통(‘소송’)을 무자비하게 절단하는 마지막 장(‘처형’) 앞에서 무한히 유예된다.

 

 

 

 

 

 

 

 

 

 

 

 

 

 

 

 

카프카가 친구들 앞에서 <소송>의 첫 장을 낭독했을 때 모두 즐거워했다고 한다. 익살스러운 농담 같은 첫 장(체포)은 그러나, 1년의 시간차(서른 번째 생일날 아침 8, 서른한 번째 생일날 저녁 9)를 보여주는 마지막 장(종말)과 그 정조에 있어 현격한 대조를 이룬다. 두 명의 희극배우 대신 프록코트와 실크해트 차림의 늙은 조연배우두 명이 등장한다. 저항해본들 아무 의미가 없음을 깨달은 K는 순순히 처형장으로 향한다. 하지만 도시 외곽의 황량한 채석장, 조끼는 물론 셔츠까지 벗겨져 땅바닥에 눕혀졌고 양날이 선 길고 얇은 정육점 칼이 달빛을 받아 번득이는 상황임에도 그가 아직 이르지 못한 상급 법원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287)하는 물음을 던져본다. 이 부질없는 희망을 조롱하듯, 한 남자가 그의 목을 양손으로 거머쥠과 동시에 다른 남자가 그의 심장에 칼을 찔러 넣고 두 번을 돌린다. “개 같군!” K의 말에 그가 죽은 후에도 치욕은 살아남을 것 같았다.”(287)라는 문장이 덧붙여진다. 두 번째로 법정을 찾았던 K가 건물을 빠져나오며 경험한 환각과 구토를 환기시키는 이 당혹스러운, ‘개 같은농담은 대체 무엇인가. 정녕 카프카는 농담의 검은 밑바닥까지 내려가기를”(쿤데라, <커튼>) 원했을 법하다. 눅눅한 농담(희극)과 찝찝한 진담(비극), 체포처형’, 그 사이에 위치한 소송은 물론, 부조리한 인간 실존의 은유이다. 덧붙여 존재와 존재함 자체가 죄이다. 도대체 인간이라는 사실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264)라는 K의 절규가 그래서 더 절절하다.

 

한때 심판이라는 제목으로 읽었던 소설을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K의 상황을 좀 더 잘 반영한 것 같은 소송이란 제목으로 다시 읽는 기분이 새롭다. 많은 이들이 카프카와 <소송>에 대해 말했지만, 말은 앞으로도 끊이지 않을 것이다. 카프카의 소설 앞에서 우리는 항상 새로운 절망에 빠지지만, 신부의 말처럼 글은 불변하는 것이고, 해석들은 종종 글에 대한 절망의 표현인 경우가 많”(273)기 때문이다.

 

-- <책앤>

 

-- 쿤데라에 대한 글을 쓰던 중 한숨 돌리는 참에 그가 대놓고 숭배했던 카프카에 관한 글을 올려본다. 그들을 읽던 시절이 있었다. 90년대. 

겸사겸사 오래된 컴퓨터 속에 잠자코 버티고 있던, 젊은(어린?) 날 썼던 콩트 하나도 꺼내본다.(소설가 이인성의 홈페이지에 실었던 것도 같다.) 맞춤법을 손본 걸 빼면  문장을 전혀 고치지 않았다. 이십대중반, 내가 무슨 생각을 했던가, 무엇을 쓰고자 했던가, 반추해본다. 거칠고 도발적인 문장들(의도된 반복이 무척 불편한데, 그 불편함이 희극성을 낳는 것 같다!), 절망적인(혹은 절망을 가장한) 세계관, 환상적이고 알레고리적인 분위기 등이 눈에 들어온다. 요컨대, 사람 참 변하지 않는다.

다시 쿤데라. 처음부터 끝까지 쭉 일별. <농담>에서 <향수>까지. 많은 변주가 있긴 하지만 역시 사람 참 안 변한다. 시간이 변화를 강요하는 탓에 차라리 '안 변함'이 위안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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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

 

아내는 한 해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아이를 가졌고 역시 한 해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아이를 지웠다. 그러던 어느 해, 그 해도 아내는 어김없이 아이를 가졌다. 열한 번째였다. 역시나 아이를 지우려고 했으나 여느 해와는 달리 날짜가 얼마 경과하지도 않았는데도 태아가 너무 커져 있어서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만은 연중행사를 치르지 않기로 했다.

 

아내의 몸은 괴물이 되어 갔다. 모든 것이 임신부의 정상적인 증상이었으나 그 정도가 하나 같이 다 너무 심했다. 아이가 밖으로 나올 조짐을 보였다. 아이의 머리통은 뜻밖에도 몹시 작아서 쉽게 나왔다. 그런데 뜻밖에도 몸뚱이가 너무 비대해서 쉽게 나오질 않았다. 의사는 적잖이 당황하는 척했으며 아내는 전대미문의 섬뜩한 비명을 지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열흘 동안 그렇게 신음한 끝에 의사는 제왕절개를 해야겠다고 결정, 이미 나와 버린 아이의 머리를 다시 아내의 자궁 속으로 집어넣은 뒤, 실상 기절을 하여 마취 상태나 다름없는 아내의 몸을 마취하고 배를 갈라 아이를 꺼냈다. 이렇게 제 어미의 자궁을 찢고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아내는 아이에게 젖을 물렸다. 하지만 아이는 젖을 빠는 게 아니라, 어미의 젖꼭지를 깨물다 못해 잘근잘근 씹어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피가 나도록 만들었다. 분유를 먹여 봤으나 고무젖꼭지가 갈기갈기 찢어지고 말았다. 먹는 것이 거의 없는데도 아이는 쇠약해지기는커녕 나날이 비대해져 갔다. 아이의 불가사의한 성장에 충격을 받은 아내는 어미로서의 슬픔도 영 없진 않고 해서 몸져눕고 말았다. 아내가 잠깐 의식을 잃은 동안 아이는 몸을 뒤로 엎었다가 바로 눕고 하는 기초적인 운동을 되풀이하다가 마침 나타난 바퀴벌레를 한 손으로 잡아 입안으로 가져가더니 잘근잘근 씹은 뒤 삼켜버렸다. 우연히 이 광경을 목격한 나는 안도감을 느꼈다. 아이의 수수께끼가 풀렸으니 말이다. 나는 아비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했다. 아이를 위해서 살아 있음의 상태에 최대한 가까운 신선한 살을 준비했다. 정육점에서 사온 각종 고기, 횟집이나 열대어 가게에서 바로 사온 살아 있는 물고기 등은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아이는 보통 아이들보다 성장 속도가 빨라 생후 12개월이 지났을 땐 이미 살 정도는 되는 아이 만큼 자라나 있었고, 살이 많이 찐 개나 토끼나 고양이 같은 것을 즐겨 먹었다.

 

그 무렵 아내는 열두 번째 아이를 가졌고 그 아이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냥 죽어버렸다. 우리는 이를 응당 있는 연중행사로 받아들였으며 제가 알아서 지워져버린 미지의 아이에게 무언의 감사를 표했다. 그 동안에도 열한 번째 아니, 첫 번째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다. 1년 뒤 아내는 열세 번째 아이를 가졌지만 다시 실패했다. 이후 아내는 이런 식으로 열 번의 자연 유산을 했다. 그 동안 첫 아이는 아내의 몸속에 뿌리를 내렸다가 사라진, 형체를 알 수 없는 스무 명의 아이들을 다 합친 것보다도 더 거대할 정도로 자라나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아이를 위해 먹을 것을 찾아주는 신성한 의무에서 해방되었다. 아이가 알아서 제 먹이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 더불어 우리에겐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아이가 너무 거대해진 것이다. 아이는 결국, 기지개를 켜느라 제 몸을 한 번 뻗침으로써 집을 무너뜨리고 우리 곁을 떠났다. 그 해에도 주기에 맞추어 아내는 아이를 가졌고, 응당 있어야 할 일이 있었다.

 

*

 

65백 만년 뒤 어떤 존재가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것은 화석 속에 묻힌 유전자를 조작해 부활시킨 티라노사우루스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우리는 부모의 본능으로 그것이 우리의 아이임을, 불행히도, 알 수 있었다. 아이는 태초에 제 놈이 찢어 놓은 제 어미의 자궁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더니 급기야 어미의 몸 전체를 찢어 놓고 말았다. 그것도 모자라 발기발기 찢어진 어미의 몸을 살점 하나 남기지 않고 다 먹어치웠다. 그러고는 커다랗게 트림을 했다. 잠시 후, 나를 향해 아가리를 벌렸다. 나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것이 너무도 흔해빠진 시나리오를 재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참을 수 없었다.

 

(2000년 봄에 쓴 것으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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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테르부르크, 환시를 보다

 

 

 

 

1. 부활에 관하여: “주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

 

 

 

 

 

 

 

 

 

 

 

 

 

 

 

 

 

노작가가 130년 만에 음습한 지하 골방에서 나왔다. 싸늘한 공기에 오한이 일고 한낮의 햇살에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는 갓 세상에 나온 아이처럼 간신히 눈을 떴다. 정신이 멍했다. 아니, 나는 분명히 죽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눈이 뜨일 수 있지? 이어 그는 자리에 앉은 채로 손발을 살피며 움직여보았다. 볼도 꼬집어보았다. 몸뚱어리는 물론 통증마저 버젓이 존재했다! 그는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 살아생전 그의 믿음대로 완전한 소멸이란 없었다. 거봐, 죽고 나면 부활한다니까, 헤헤. 그는 히죽거렸다. 아무래도 매장을 한 건 잘 한 일이었어. 태워버렸으면 부활도 못하고 큰일 날 뻔했잖아.

노작가는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오랫동안 안간힘을 쓴 뒤에야 간신히 두 발로 설 수 있었다. 하지만 걸음을 떼기는커녕 몸을 지탱하기도 힘들었다. 그는 판판한 묘석 위에 드러눕듯 걸터앉았다. 이런, 부활한다 함은 가장 젊고 아름다운 모양새로 생명을 다시 얻는 것이 아니었나? 하지만 그의 모습은 죽기 직전 그대로였다. 수염과 머리카락은 성글고 푸석푸석했으며 허연 손등에는 거뭇거뭇한 반점과 쭈글쭈글한 주름이 번져 있었다. 입술 주변에는 간질발작을 할 때마다 물었던 게거품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어라, 폐동맥이 파열돼서 죽었는데, 이건 또 뭐람? 노작가는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마냥 투덜대고 있을 여유도 없었다. 부활한 작가들의 모임에 가려면 서둘러야 했다. 행색이 마음에 안 든다고 빠질 수도 없었다. 세상에 나올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기 때문이다.

칼바람이 너무 거세 걸음을 떼기도 힘들었다. 2월초, 페테르부르크, 혹한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였다. 그나마 죽은 것도 이맘때여서 옷가지는 두터웠다. 한데 서너 발짝도 채 옮기기 전에 노작가는 갑자기 요의를 느꼈다. 오랫동안 망각했던 이 욕구가 한편으론 생경하고 또 한편으론 신통방통했다. 그는 슬그머니 주위를 둘러본 다음 자신의 동상을 둘러싸고 있는 쇠창살을 조심스레 붙잡고 바지춤을 끌렀다. 샛노란 오줌이 콸콸 쏟아지면서 삼십 센티는 족히 쌓인 눈 더미를 거침없이 뚫었다. 그 동안 물 한 모금 마실 수 없는 처지였는데 어떻게 이렇게 많은 오줌이 몸속에 고여 있을 수 있을까. 노작가는 정말 놀라웠다. 부활이라는 것이 이토록 철저하게 유물론에 지배된다니! 이제 갈증과 허기가 동시에 찾아왔다. 점입가경이었다.

역시 육체를 갖는다는 것은 불편한 일이야. 만족시켜줘야 되는 욕망이 한 두 개라야 말이지, 젠장.”

노작가는 혼잣말을 중얼대며 혀를 끌끌 찼다. 한데 자기 무덤 앞에는 꽁꽁 언 카네이션과 장미 몇 송이만 초라하게 얹혀 있는데 저쪽 차이코프스키의 무덤 앞에는 음식이 놓여 있었다. 그는 예의 그 욱하는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질투심에 이를 갈았다. 뱃속에서는 간만에 소생한 위액들이 밥을 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고픈 배를 한 손으로 부여잡고 거의 기다시피 해서 가보니 빵은 물론 연어알과 소시지, , 치즈도 살짝 얼어 있었다. 설마 상한 건 아닐 테지? 하긴 얼었으니 그럴 리는 없겠군. 아뿔싸, 이러나저러나 나는 이미 죽은 몸, 더 이상 무엇을 두려워하랴! 노작가는 하이에나 같은 추잡스러움과 게걸스러움을 뽐내며 남의 무덤 위에 차려진 음식을 다 먹어치웠다. 종이컵에서 반쯤 얼어버린 보드카도 그 맛이 기가 막혔다. 깊고 굵은 트림이 올라왔다. 이 길고 둔중한 울림 속에 인간과 세계의 비밀이 오롯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역시 진리는 술 속에 있는 거야, . 노작가는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간혹 노작가의 축 처진 주름덩어리 살들이 출렁거렸다.

 

 

 

 

 

 

 

 

 

 

 

 

 

 

 

 

 

 

2. 타자는 지옥: “도무지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랑할 수 없어!”

 

 

네프스키 거리, 레스토랑 수정궁’, 저녁 6시 경.

러시아문학사에 안치된 대가들이 하나둘씩 몰려들었다. 위대한 망자들의 향연이 시작됐다.

죽어도 젊어서 죽을 일이야. 늙어 죽었더니 이런 잔치에 한 번 나오는 것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구먼.”

이렇게 엄살을 떨며 잔치판으로 들어선 자는 노백작 톨스토이였다. 그는 아스타포보 역에서 마지막 숨을 내쉬던 때의 복장 그대로 허름한 농민 복장에 보따리를 두르고 있었다. 지팡이도 짚고 있었지만 그냥 멋이었다. 팔순을 넘긴 나이에도 그의 허리는 여전히 꼿꼿했으며 눈에는 정염의 불꽃이 이글거리고 뺨에는 홍조가 어리어 있었다. 세월도 타고나길 무쇠 같았던 그의 체력을 별로 망가뜨리지 못한 것 같았다.

젊어서 죽은 놈이 더 골치야. 생각 좀 해보게, 이 도덕군자 양반, 오죽하면 젊어서 죽었겠나? 필경 죽을병에 걸렸을 테니 그 몰골이 얼마나 추하겠나.”

서른일곱 살의 비평가 벨린스키의 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낭만주의 소설 속의 병약한 주인공의 몰골을 한 채 연신 캑캑거리며 각혈을 해댔다. 하얀 손수건이 금방 붉게 물들었다.

그때 문단의 원로인 고골리와 푸쉬킨이 나타났다. 82 비율로 정교하게 옆 가르마를 탄, 뾰족하고 커다란 코의 얼굴과 곱슬곱슬하고 윤이 반들반들 나는 원숭이 수염을 가진 얼굴은 아무래도 영원히 한 쌍인 것 같았다. 말년에 정신이 나가 기괴한 단식 끝에 굶어죽은 고골리는 힘이 없어 비실댔고, 푸쉬킨은 결투에서 총상을 입은 지라 비틀거렸다.

곧이어 투르게네프의 등장! 그는 오랜 유럽 생활로 다져진 세련된 자태와 빛나는 미모를 뽐내며 잔치판으로 들어섰다. 진즉에 환갑을 넘겼건만 젊었을 때의 습관 그대로 화려한 프릴 장식이 달린 최신 유행의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다. 오늘 모임을 위해 네일 아트, 헤어, 메이크업 등에도 유달리 신경을 쓴 것이 보였다. 화장은 거의 분장 수준에 가까워, 암을 앓았던 흔적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투르게네프를 보자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예의를 갖추었다. 때문에, 별로 크지 않은 키에 어깨만 보기 싫을 만큼 떡 벌어진 도스토예프스키가 쭈뼛쭈뼛 들어오는 것은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투르게네프 선생은 나이를 거꾸로 드시나 봅니다. 미중년, 꽃중년이 따로 없군요!”

한 시간쯤 전에 도착하여 자리를 지키고 있던 노시인 네크라소프가 운을 뗐다.

나이를 거꾸로 먹는 것이 아니라 아예 안 먹고 있습니다. 죽고 나니 이 점 하나는 좋군요, 허허.”

투르게네프는 미소를 지으며 점잖은 어투로 응수했다. 한편 도스토예프스키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구석에 앉아 인상을 팍 쓰고 있었다. 영락없이 꿔다 놓은 보릿자루에 이제 막 상경한 촌뜨기 시골 쥐, 그것도 열패감에 사로잡힌 시골 쥐의 행태였다. 이런 비사교적인 태도가 귀족 작가들 눈에는 제법 거슬릴 법했다.

그나저나 체호프 선생은 안 오신답니까?”

투르게네프가 좌중을 향해 물었다.

, 젊은 양반이 꽤나 잘 쓰는 것 같던데.”

다들 그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역시나 도스토예프스키만 계속 똥 씹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체호프에게 불만이 있을 리는 물론 없었다. 그저 이런 유의 사교 모임을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당최 왜 왔느냔 말이다! 전 인류를 내 가슴에 껴안고 총체적인 화해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아니, 솔직히 말해, 지하의 고독과 소외를 견디지 못해 돌파구를 찾기 위해? 그의 머릿속에서는 오래 전에 자기가 휘갈겨 쓴 말들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분명히 무덤 속에 있을 때는 이 자들이 그리웠는데, 정작 이렇게 만나니 왜 이리 싫은 걸까. 투르게네프의 저 화장품 냄새, 머리가 깨질 것 같다. 톨스토이 백작은 또 어떻고. 그냥 한 자리에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불편하고 괜히 약이 오른다. 살아생전에 한 번도 안 만난 것이 차라리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소문대로 정말 추남이군. 하지만 그러는 나는? 영락없이 소크라테스의 골상(骨相)인걸. 에잇, 할 수 없다, 지하로 돌아갈 수밖에!

도스토예프스키는 샴페인 잔을 조용히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홀의 뒷문으로 나온 탓에 그가 증발한 줄은 아무도 몰랐다. 또 관심도 없었다.

 

 

3. 지하의 수기: “지하 만세!”

 

 

 

 

 

 

 

 

 

 

 

 

 

 

 

 

 

레스토랑 수정궁을 빠져나온 노작가는 센나야 광장의 지하 술집을 찾아갔다. 그는 제일 구석진 곳의 자리로 가서 앉았다. 보드카가 나왔다. 그는 혼자 홀짝홀짝 술잔을 기울이며 오이피클을 아작아작 씹었다. 금방 취기가 돌았다. 삼삼오오 떼를 짝을 지은 군중들이 하나 같이 처량해 보였다. 구원! 또 이 단어가 떠올랐다. 그리고 숨을 놓기 직전까지 열심히 구상했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2부가 그의 뇌수를 간질였다.

그 순간 그는 지금 자신의 모습이 술집에 앉아 있는 라스콜니코프를 닮지 않았나 싶었다. 스물넷의 청춘, 몹시 여위었음에도 젊음과 힘이 넘쳐나는 팔다리, 파리하면서도 앳된 얼굴, 삶이 열기로 번득이는 두 눈, 자기만의 몽상에 몰입할 수 있는 힘. 하지만 실제 그의 몰골은 며칠째 노숙 생활을 한 다음 딸내미가 몸을 팔아 번 돈으로 술을 퍼마시고 있는 마르멜라도프에 더 가까웠다. 슬라브족 특유의 하얗고 푸석푸석한 얼굴은 바늘로 찌르면 피를 뿜어낼 것 같은 위태로운 분홍색으로 바뀌었고, 흐리멍덩한 두 눈은 취기로 인해 시뻘겋게 충혈 됐다. 몸에도 점점 힘이 빠져갔다. 결국 그는 탁자 앞에 엎어지듯, 빈 부대 자루처럼 찌그러져 버렸다. 그 모습이 너무 초라했기 때문에 말을 걸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그러나 내 사정도 제법 구차했다. 나에게도 나만의 지하가 있었던 탓이다.

페테르부르크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지 어언 7. 나는 계속 비정규직 대학 교원, 즉 시간 강사의 삶을 살았다. 좀 과장하면, 좌절의 연속이었다. 그 설움이 엉뚱하게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유감으로 나타났다. 그 사이에 여러 편의 단편소설과 한 편의 장편 소설을 썼다. 단편은 청탁이 들어오지 않았고, 장편은 출간해주겠다는 출판사가 없었다. 역시나 좀 과장하자면, 열패감에 사로잡힌 지하인 신세였다. 그 소설이 하필이면 <죄와 벌>을 패러디한 것이라, 도스토예프스키를 향한 애증은 한층 더 커졌다.

그러던 어느 날, 통장 계좌에 어마어마한 숫자가 찍혔다. 내가 번역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세 권의 인세가 한꺼번에 입금된 것이었다. 이 인간이 병 주고 약 주는구나! 솔직히, 눈이 빙글빙글 돌았다. 황홀경에 사로잡힌 나는 어느 일본영화 속의 주인공 흉내를 내보았다. 우선 세계지도 한 장을 샀다. 그리고 눈을 감고서 손가락을 놀려가며 한 장소를 골랐다. 내가 은근히 바란 곳은 그린란드나 빈란드처럼 왠지 한 번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눈을 떴을 때 내 손가락은, 정말 안타깝게도, 페테르부르크에 찍혀 있었다.

한겨울의 페테르부르크라니! 추억 속에서나 거룩하지, 실제 현실 속에서는 혹한과 눈보라와 늪 같은 눈밭을 견뎌내야 하는 최악의 시공간이었다. 그렇다고 유학 시절처럼 방구석에만 처박혀 있을 수는 없어서, 거의 군장이나 다름없을 만큼 철저히 중무장을 하고서 센나야 광장으로 나갔다. 얼마나 걷지도 않아 코끝을 면도날로 박박 긁는 것 같은 통증이 찾아왔다. 나는 라스콜니코프와 마르멜라도프가 술을 마셨을 것으로 짐작되는 지하 술집으로 들어갔다.

사흘을 연거푸 출몰한 탓에 주인장은 심드렁했다. 그 심드렁함이 예나 지금이나 참 좋았다. 나는 구석 자리에 앉아, 독한 맥주 한 잔에 각종 빵과 파이를 잔뜩 주문했다. 버섯과 고기가 들어간 파이를 우걱우걱 씹고 있을 때였다. 이 음습한 지하로 가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과연 일까?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다. ‘는 이미 시체마저도 썩어문드러졌을 옛날 작가가 아닌가. 혹시 를 숭배하여 를 모방한, 심지어 러시아식으로 참칭하려 드는 미치광이는 아닐까? 이러나저러나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별달리 할 일도 없잖은가.

 

4. 소멸과 불멸에 관하여: “우리 두 존재는 무한 속에서 만났습니다

 

 

 

 

 

 

 

 

 

 

 

 

 

 

 

 

저어기, 도스토예프스키 선생 맞으시죠?”

그는 푹 수그렸던 고개를 들어 올렸을 뿐, 가타부타 대꾸는 전혀 없었다. 그래도 나는 용기를 내어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역시나 묵묵부답에 무반응이었다.

혹시 방해가 된 건 아니겠지요?”

묻는 사람 민망하게 이번에도 침묵뿐이었다. 취기와 피로에 전 게슴츠레한 눈빛 때문인지 그 침묵이 제법 시적으로 느껴졌다. , 그렇다. 어딘가 애처롭고 우스꽝스러운, 그렇기에 더 절절한, 침묵하는 그리스도! 평생 그리스도의 소설적 형상을 만들려고 애쓰더니 절로 그리스도의 모상이 됐나. 이쯤 되면 인신 공양 끝에 탄생한 등신불이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힘든 걸음을 다 하셨습니까? 하긴 저도 제법 멀리서 왔지만 이반 카라마조프의 악마처럼 무한의 시공간을 넘어온 선생만 하겠습니까! 그래, 무슨 일로 여길 다시 오셨습니까? 그냥 세상을 한 번 둘러보시려고요? 하긴 선생이 소설로써 구원하고자 했던(당최 이런 꿈은 소설가가 꾸기엔 너무 가당치 않지만) 세상이 1881년 이후에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하셨겠지요. , 그래, 이렇게 와 보시니 어떻습니까? 사실 페테르부르크는 19세기 이래로 별로 발전한 것이 없어요. 선생이 살아 있을 때만 해도 근대의 명암이, 온갖 미덕과 악덕이 공존하던 이곳이 이제는 살아 있는 박물관처럼 됐거든요. 그러니 라스콜니코프의 니힐리즘이나 그런 유의 범죄는 찾아볼 수가 없지요. 아니, 대체로 뭔가 그럴 듯한 사건 자체를 찾기가 힘들답니다. 지금 태어났으면 아무리 선생이라도 별 수 없었을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 이런, 계속 아무 말씀도 안 하실 겁니까? , 거참, 괜히 과묵한 척 하시네.”

정녕 혼자 애가 달아 설치는 꼴이었다. 나는 그가 제발 무슨 말이든 해주길 바랐다. , 과연 무슨 말이 나올까나? 대심문관에 묘사된 것처럼 그리스도의 기나긴 침묵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것은 촌철살인의 키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의 기대와는 달리, 술 취한 그리스도는 졸지에 수다스러운 대심문관이 됐다.

과묵이고 뭐고 시끄러워! 다들 인생이란 것이 뭔가 대단한 것인 양 떠들어대지만 참 별 것 없어. 오죽하면 부활을 해봐도 똑같을까. 겉모양새야 좀 변했을지 몰라도 본질적으론 살아생전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걸. 무덤 뒤의 세상이 무덤 전의 세상과 똑같다면, 무덤 뒤에는 차라리 어둠만 있는 것이 낫겠어. 다들 어쩔 수 없이 죽어야 되는 것이 서럽고 억울하니까 이것저것 상상해보지만, 아무래도 스비드리가일로프의 말이 명언이야. 내세란 옹색하고 지저분한 시골 목욕탕 같아, 거미줄이 덕지덕지 쳐진. , 이런 걸 다 생각해 내다니, 나는 가히 천재야! 아니, 천재는 무슨! 먹고 살려고 평생 죽도록 쓰다 보니 이렇게 된 것이지. 아무리 그래도 내 소설이 이렇게까지 읽힐 줄이야. , 잘 쓰긴 잘 썼지. 내가 봐도 놀랍다니까. 아니, 잘 썼다기보다는 독특하다고 할까. 하긴 어찌나 독특했는지 톨스토이 백작은 아주 대놓고 내 소설을 씹어댔지, 소설 같잖다고.”

꼬인 혀를 타고 말들이 마구잡이로 쏟아졌다. 표도르 카라마조프가 코냑을 홀짝홀짝 마시며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눅눅하고 음탕한 넋두리를 연상시키는 횡설수설이었다. 바로 이 노인이 슬라브족 특유의 매력을 뽐내는 마성적인 광기에 사로잡힌 이지적인 청년들의 아비이다. 문득 가슴이 뭉클해온다.

페로프가 그린 초상화 속의 그는 소설가 이상의 소설가, 거의 예언자처럼 보인다. 악의 심연을 들여다본 자, 동시에 신의 배꼽을 간질여본 자랄까. 여하튼 그것은 무한한 거리감을 안겨주는 얼굴이다. 반면 지금 내 앞에 구겨지듯, 널브러지듯 앉아 멍한 시선을 어딘가 애매한 곳에 던져 놓은 이 얼굴은 인간적임과 동시에 참 소설가답다. 후줄근하고 익살스러운, 돈키호테 같은 노인네, 꽤나 마음에 든다. 그는 말에 걸신들린 자답게 계속 웅얼대고, 나는 그의 말보다는 그 말이 흘러나오는 분위기를 만끽한다. 어차피 말이라면 그의 소설 속에 충분히 들어 있으니까.

 

 

* 소제목 인용 문구 출처:

1. <죄와 벌>: 소냐가 라스콜니코프에게 읽어주는, 복음서의 나사로의 부활 부분.

2.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이반 카라마조프가 알료샤에게 하는 말.

3. <지하로부터의 수기>: 주인공-화자의 말.

4. <악령>: 샤토프가 스타브로긴에게 하는 말.

 

(<대산문화>. 2011년 봄호. <가상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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닮음-분신과 아이(2)

 

    

 

아니면 [두 인간이] 두 방울의 피처럼 서로 닮는다는 것 자체가 실제로 이미 범죄인 걸까?”(나보코프, <절망>) 그 자체로 고유하고 유일한 존재인 인간을 명백히 가치론적인 위계질서를 전제로 하는 원상-분신의 틀에 맞추려는 것은 죄악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닮음의 공동체나 계보를 향한 인간의 집착이 흥미롭다(김연경, 닮음-분신과 아이, <대산문화> 2013 여름호). 나를 닮은 존재(분신), 원전-고전을 닮은 문학(패러디)처럼, 불편함 이상의 불편함을 야기한다. 외부의 도플갱어가 아니라 그것을 만들려는 내 안의 욕망이 문제인 까닭이다.

 

많은 철학자들이 아이의 비유를 즐겼고 아마 그들 대부분이 남성이었던 탓에 십중팔구는 추상적이었는데, 루소만은 예외가 아니었나 싶다. 계몽과 이성의 대명사이자 교육학 분야에서도 고전(<에밀>)을 남긴 그가 사실혼 관계에 있던 여성(테레즈)에게서 다섯 아이를 낳았고 그들을 모두 고아원에 보낸 것은 널리 알려진 얘기이다. ‘고백을 통해 자신의 죄악(나아가 인간의 본성을) 환히 밝히려는(enlightenment, 계몽!) 그의 문체가 웬만한 소설을 능가할 만큼 혁신적이고 유머러스하다. “내가 인간의 의무에 관해서 철학적 고찰을 하고 있는 동안, 한 사건이 일어나, 내 자신의 의무에 관하여 좀 더 깊이 생각하게 했다. 테레즈가 세 번째로 임신한 것이다.”(루소, <고백>) 자식들을 직접 키울 힘이 없었던 까닭에, 아이들을 공적교육(公的敎育)”에 맡김으로써 방랑자나 투기사가 아닌 노동자나 농부로 만드는 것이 공민(公民)으로서 애비로서의 할 일을 하는 것이라는 논리이다. 이것이 무척 좋고 분별 있으며 아주 정당하게 생각되었다.

 

이 대목은 통상 루소의 도덕적 결함과 이중성을 질타하는 근거로 활용되지만, 그가 18세기의 남성로서 출산과 육아의 문제에 관여, 적어도 그것을 자신의 고민의 영역에 포함시켰다는 사실이 오히려 기특하고 갸륵해 보인다. 결국 그는 아버지로서의 의무를 당당히, 떳떳이 방기하고 그 대신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사유하고 기록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아이와 마주한 순간, 이른바 루소의 선택이 영원한 딜레마처럼 되살아난다. 역시 이론과 실제는 서로 어긋나야 제 맛인가.

 

 

 

 

 

 

 

 

 

 

 

 

 

 

 

 

*

 

해질 무렵, 곱슬곱슬 파머 머리를 한 짜리몽땅한 아줌마가 각각 일곱 살, 다섯 살짜리 두 딸을 걸리고 돌도 지나지 않은 아들을 등에 업은 채 어느 산동네의 비탈길을 오르고 있다. 그 무렵 그녀는 셋방에 딸린 홀에서 라면을 끓여 팔았고 행여 주인한테 밉보여 길바닥에 나앉을까봐 수시로 그 집 빨래를 해주기도 했다. 서른다섯을 넘겼을 즈음, 그녀는 시장에 노점을 하나 얻어 보리차와 옥수수차, 소금을 팔았다. 이른 새벽에 출근하여 하루 종일 장사하고 저녁에는 집안일을 했다. 가뜩이나 거무스름한 얼굴에는 칙칙한 기미가 안화(眼花)처럼, 비문(飛蚊)처럼 드리워졌다. 내 기억 속의 엄마는 항상 바빴고 때문에 항상 신경질적이었다. 도무지 국어책 삽화 속의 다소곳한 앞치마를 두르고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우아한 엄마, 즉 이론은 실제 속에서는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모들의 회상 속에 등장하는 엄마는 생판 딴 모습이다. 한글도 제대로 못 읽는 열여덟의 시골 처녀가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로 떠난다. 일 년쯤 뒤, 70년대의 유행을 십분 반영한 짧은 미니스커트에 치렁치렁 긴 생머리, 굽이 높고 코가 뾰족한 하이힐, 화려하고 짙은 화장을 뽐내며 고향 땅을 밟는다. “너거 엄마가 왕년에는 진짜 멋쟁이였는데.” 금의환향의 포즈는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한다. 그녀는 이내 완전히 귀향, 군복무 시절을 빼면 평생 거창 바깥을 나간 적이 없는, 그러나 신문도 읽을 줄 아는 스물일곱의 노총각에게 시집간다. 이모들의 분석에 따르면, 이 대목에서 그녀의 팔자가 완전히 망가진다. 시부모 모시고 시동생들 뒷바라지하고 사시사철, 밤낮 지옥 같은 노동에 시달리고 한 아이의 젖을 떼기가 무섭게 또 배가 불러 오고 등등 전형적인 농부(農婦)의 삶이 시작된다. 몇 년 뒤, 죽어도 고향은 못 떠난다는 남편을 구슬려, 기필코 아들을 가져보겠다고 낳은 셋째를 담요에 둘둘 말다시피 하여 부산으로 나와, 전포동 기찻길 윗동네에 조그만 방을 얻는다. 여기부터가 대략 내 기억 속의 억척스럽고 그악스러운 엄마이다.

 

*

 

죽어도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 이런 말을 많은 딸들처럼 나도 수없이 되뇌었고 얼마간은 실제로도 그리 되는 성 싶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비포의 얘기일 뿐, ‘애프터’, 즉 내가 엄마의 자리에 앉게 되자 역사가 고스란히 반복되는 것 같은 느낌에 놀라울 따름이다. 놀라는 일 자체가 오히려 놀랄 일이라는 듯, 정확히 그럴 줄 알았음에도 애써 감고 있던 눈을 뜨지 않으면 안 되는 순간이 기어코 찾아온 듯, 민망하고 멋쩍기도 하다. 돌이켜 보니, 엄마의 멋이 미니스커트와 하이힐이었다면, 나에게 그것은 엄마의 얼굴을 기미투성이로 만들어버린 삶의 속됨으로부터의 해방, 그 추구였지 싶다. 상당 부분 의도적이었을 법한 퇴폐적인 삶, 시도 때도 없이 연거푸 피워댄 담배, 단식과 폭식을 오가는 방만한 식생활, TV공각기동대나 <몽테크리스토 백작> 따위로 채워진 밤, 그 무익함과 한심함 때문에 더 즐겼던 웹서핑.

 

까막눈 엄마는 서울살이를 얼마 견디지 못해 귀향했지만, 너무 긴 가방끈 때문에 섣불리 귀향도 못한 나는 마냥 엄살만은 아니었던, 위악과 냉소, 권태와 우울과 환멸을 양념처럼 섞어 넣은 고독하고 굶주린 서울살이를 이어나갔다. 마흔을 앞둔 현재, 금연은 물론이거니와 삼시 세끼 저염 웰빙 식단을 꾸리고 매일매일 방바닥을 물걸레로 닦고, 무엇보다도, 진짜 비문 때문에 시야가 어질어질한 가운데, ‘나인 투 식스의 삶, 그것도 마땅한 직장은커녕 어디 작업실도 없어 집 앞 커피숍으로 출퇴근하는 삶을 살고 있다. 생계를 이유로 아이를 남의 손에 맡겨놓는 것이 죄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정말로 죄스러운 엄마가 되는 것인 까닭에 죄스러운 마음 자체를 갖지 않으려고 애쓰고, 그럼에도 당장 밥벌이와 무관한 책을 보거나 그런 글을 쓸 때면(지금처럼!) 쾌감과 더불어 어김없이 죄스러운 마음이 동반되고, 때문에 생계도 생계거니와 일종의 자기 응징(!) 차원에서 최소한 두서너 쪽의 번역은 꼭 하려고 애쓴다.

 

엄마의 과거를 약간 변주하되 궁극엔 그녀와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궁상과 청승과 극성의 짬뽕으로 요약될 작금의 내 모습이 유머러스하다. 걸어도 걸어도, 아니, 걸어서 걸어서 제 자리이다. 이럴 거면 뭐 하러 이 먼 길을 왔던가. 이런 말도, 애당초 인생에서 를 상정했다는 사실과 더불어, 어딘가 유머러스하다. 차원과 수준이 너무 달라 비교할 건 아니나, 힘겹게 성() 앞에 도달한 K의 허허로운 무채색 탄식이 요즘 곧잘 상기된다. “성을 시찰하기 위한 것뿐이라면, K는 일부러 먼 길을 올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 정도라면 이미 오랫동안 못 가 본 고향을 다시 한 번 찾아보는 편이 훨씬 현명한 행동이었을 것이다.”(카프카, <성>)

 

 

 

 

 

 

 

 

 

 

 

 

 

 

*

 

한동안 내 속에서 유유자적 잘 놀다가 버럭 세상에 나온 분신의 얼굴에서 오래 전에 잊어버리고 잃어버린, 흑백의 돌 사진에 박힌 내 얼굴이 활동사진처럼 되살아난다. 그때마다 내 모습에서 과거 엄마(아빠)의 모습을 볼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강렬한 절망을 맛본다. 과연, 악몽과 역사는 반복되고,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오직 이 반복을 완성하기 위해서일뿐인가!

 

언제가 아이는 나의 비포, 심지어 애프터마저도 제 나름의 변주를 곁들여 반복할 것이다. 반복이 불가피한 만큼이나 이 변주가 소중하다. 그리고 공시적 닮음이든 통시적 닮음이든 완전한 닮음(같음)이 불가능한 만큼이나 닮음의 비율, , 다름(차이)이 중요하다. 강조하건대 모든 얼굴은 유일무이”(나보코프, <절망>)하다. 아이가 순전히 그 자신의 것으로서 갖게 될 고유하고 유일한 얼굴, 또 그렇게 일궈갈 삶을 축복한다. 더불어 요 삼년사이에 갑자기 많아진 조카들, 세상 모든 아이들의 얼굴과 삶을. “불아불아! 해님 같은 우리 아가, 밝은 빛이 되어라.() / 질라아비 훨훨! 우리 아가 예쁜 아가, 건강하게 자라라.(최숙희, <곤지곤지 잼잼>.)

 

 

 

 

 

 

 

 

 

 

 

 

 

 

(소설가 이인성 홈페이지(www.leeinseong.pe.kr )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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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08-15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른괭이님의 글을 읽어보니 루소가 몽테뉴로부터 얼마나 깊은 영향을 받았는지를 새삼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몽테뉴 역시 어린아이들의 양육을 '무작정' 그들의 부모에게 맡기는 일의 어리석음을 강하게 질타하는 글을 최근에 읽은 적이 있거든요.

* * *

플루타르크는 모든 점으로 보아 감탄할 만하지만, 특히 그가 인간의 행동을 판단할 때에는 더욱 그렇다. 그가 리쿠르고스와 누마의 비교에서 어린아이들을 국가에 맡기고 부친들의 책임하에 기른다는 것이, 우리들에게 엄청나게 어리석은 일이라는 문제에 대해 말하는 훌륭한 글을 우리는 읽을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바와 같이, 우리들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퀴클롭스(눈 하나를 가진 반신(半반神신))가 하는 식으로,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어리석고 철부지 같은 생각이 하는 대로 각자에게 맡겨 두고 있다. 그리고 라케데모니아 인들과 크레테 인들만이 어린아이의 훈련을 법률에 맡겨 두었던 것이다. 한 국가에서는 모든 일이 국가의 훈육과 부양에 달려 있는 것을 누가 보지 않는가? 그러나 부모들이 아무리 어리석고 패악해도,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어린아이들을 맡겨 둔다.

다른 일 중에도, 나는 거리를 지나다가 어떤 아비나 어미가 광분하며 열이 치밀어올라 어린아이들 피부가 벗겨지고 상처가 나도록 마구 두들겨패는 것을 보고, 얼마나 여러 번 그 아이의 원수를 갚아 주고픈 술책을 꾸며 볼 생각이 났던가! 그들의 눈에서 독살에 찬 불덩어리가 튀어나오는 것을 보라.

(히포크라테스에 의하면 가장 위험한 질병은 얼굴을 변형시키는 질병이라고 한다) 게다가 그들은 칼로 찢는 듯한 목소리를 가지고 유모의 품에서 겨우 떨어진 어린아이를 마구 야단치는 일조차 있다. 어린아이들은 몽둥이 찜질에 얼이 빠지고 다리불구자가 된다. 그런에 우리의 법률은 이런 신체 불구자들은 우리 국민의 일원이 아닌 것처럼 이런 일은 고려해 보지도 않는다.

그대가 그를 나라에 바칠 수 있고 밭갈이에 쓸모 있고,
전쟁의 복역과 아울러
평화로울 때 힘든 일에 쓸모 있게 만들어 준다면,
그대는 조국과 국민에게 한 시민을 제공한 것으로
감사받을 만하다. (주베날리스)
 

 

정해진 원고의 자리는 좁은데 메모가 넘쳐나서 여기다 다시 좀 갖다 놓는다. 메모가 넘치는 건 시간이 넘치기 때문인데, 시간이 넘치는 건 또, 다른 일(그러니까 번역-_-;;)을 너무 하기 싫기 때문이다. 대체로 요즘 나는 글을 실을 지면과 책을 내줄 출판사를 필요로 하는데, 그쪽에서는 내 글과 원고가 필요없다는 것이 문제이다...ㅠ.ㅠ 그뿐이냐. 나는 어디든 '자리'가 필요한데, 그쪽에서는 나한테 줄 '자리'가 또 없는 것이다..ㅠ.ㅠ 이건 되게 웃긴 정황인데, 가만 생각하면 울쩍해지고, 생각을 멈추면 다시 좀 웃을 수 있다. 암튼.

 

 

 

 

 

 

 

 

 

 

 

 

 

 

 

우선 책 얘기다. 아무래도 보르헤스는 '책'의 작가이고, '바벨의 도서관'은 그 상징이다. 소설로는 정말 마음에 안 들고 재미도 없지만(재미는 <피에르 메나르...>, <두 갈래... 정원> 쪽) 워낙에 교과서라. 도서관 사서(나중에는 관장)로 살았던 이력이 이런 글도 만들어낸다.

 

 “다른 사람들이 도서관이라고 부르는 우주는 육각형 진열실들로 이루어진 부정수, 아니, 아마도 무한수로 구성되어 있다.”(97)

당연한 소리이지만, 그런 억제할 수 없는 희망 후에는 엄청난 절망이 뒤따랐다. 어떤 육각형 진열실의 어떤 책장에는 틀림없이 귀중한 책들이 존재하지만 그 누구도 그것들에 접근할 수 없다는 확신감은 거의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104)

만일 제가 영광과 지혜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그 책을 읽어 볼 수 없다면, 다른 사람들에게라도 그런 기회를 허락해 주소서.”(106)

 

좀 더 잘 쓴 건 사실 <모래의 책>인 것 같다. (<셰익스피어의 기억>에 수록.) 제목 자체가 이미 많은 얘기를 해주지 않는가.  첫 문장은 이렇다.

 

선은 무한한 점들로 이루어져 있다. 면은 무한한 선들로 이루어져 있다. 부피는 무한한 면들로 이루어져 있다. 4차원적 부피는 무한한 부피들로 이루어져 있다. 아니 의심할 바 없이 이러한 방식은 <보다 기하학적인> 나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최고의 방법이 아니다. 요즘의 모든 허구적 이야기들은 유행처럼 그것이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나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사실이다.”(132)

 

그리고, 성경을 파는 낯선 남자가 나를 방문한다.  근데 왜 음울한 얼굴이냐. 그가 내놓은 책은 인도,  어느 평원에 있는 마을, 카스트 제도의 최하층 사람한테서 구한 책이다. 이른바 <모래의 책>. 뫼비우스의 띠를 연상시키는 측면이 있다.

 

 

왜냐하면 책도 모래도 처음과 끝이 없기 때문이라나요.”(135)

 “... 마치 책 속에서 페이지들이 점점 불어나는 것 같다고나 해야 할까.”(135)

만일 공간이 무한하다면 우리는 공간의 모든 곳에 있다고 할 수 있지요. 만일 시간이 무한하다면 우리는 모든 시간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는 거지요.”(136)

 

일종의 물물교환처럼((위클리프 성경 vs. 모래의 책>) 손에  넣은 책이 결국 처치 곤란이 된다. 나는 마침내 그것이 악몽의 물체, 현실을 손상시키고 썩게 만드는 물건이라는 느낌에 이르게 되었다.”(139) 어쩔까 하다가 도서관에 갖다둔다. “나는 축축한 서가 속에서 <모래의 책>을 잃어버리기 위해 사서들이 한눈을 팔고 있는 틈을 이용했다. 나는 출입구로부터 어느 높이, 어느 정도의 거리에 그 책을 두었는지 기억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139)

 

 

 

 

 

 

 

 

 

 

 

 

 

 

 

 

 

'책의 작가'도 물론, 자기 인생에 대해, 개인사에 대해 대놓고 얘기할 때가 있다. 치명적인 사건을 겪었을 때는. 우선 일종의 '급성'은 마흔 즈음, 크리스마스 이브에 당한 사고와 그로 인한 패혈증이다. 그것에 대해 그는 <남부>라는 소설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마치 여덟 세기와도 같은 여드레가 지나갔다. (...) 그러나 병원에 도착하자 그의 옷은 벗겨졌고 그의 머리는 죄다 깎였으며, 간이침대에 눕혀져 쇠사슬로 묶였다. 그러더니 그들은 눈이 부시고 어지러울 정도로 강한 빛을 쪼이더니, 청진기로 진찰을 했고, 마스크를 한 누군가가 그의 팔에 주삿바늘을 꽂았다. 붕대에 감긴 채 구역질을 느끼며, 그는 우물 바닥 같은 병실에서 깨어났다. 수술 이후 몇 번이나 밤과 낮을 보낸 뒤, 그는 그때까지 자기가 지옥 언저리를 헤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입에 얼음을 넣어도 조금도 시원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 기간 동안 달만은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증오했다. 자기의 정체성을 증오했고, 얼굴에 바늘처럼 서 있는 수염도 증오했다. 그는 몹시 괴로운 치료를 꿋꿋하게 견뎌 냈다. 그러나 의사가 패혈증으로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는 말을 하자, (...)”(219)

 

 

급성보다 더 무서운 건 물론, 만성이다. 바로, 실명. 보르헤스와 실명은 유명한 테마이지만, 최근에 내가 안질환으로 약간의(-_-;;) 고생을 하다 보니, 정녕 이것도 농담이 아니다 싶다. 암튼. 그에 대해 보르헤스는 이렇게 쓴다. 

 

점차로 아름다운 세계가 그로부터 떠나기 시작했다. 걷히지 않는 안개가 그의 손금들을 지워버렸다. 밤은 자신의 수많은 별들을 잃어버렸다. 대지는 그의 발 아래에서 불분명해지기 시작했다. 모든 것들이 멀어지고 혼란스러워졌다. 그는 자신이 점차로 장님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소리쳐 울었다.”(10)(<작가>. <<칼잡이들의 이야기>>)

 

 

곁다리. 유다에 관한 보르헤스의 얘기도 재밌다. 학기 말에 반쯤은 수업 준비차 파졸리니 감독의 <마태복음>을 봤다. 예수보다(혹은 못지않게) 흥미로운 인물이 유다였는데, 보르헤스는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사도들 중에서 유일하게 유다는 비밀스러운 신성과 예수의 가공할 만한 목적을 깨달았다.”(199) / “닐스 루네베리는 과장되고 심지어는 무한한 금욕주의 때문이라는 완전히 상반되는 동기를 제안한다. 하느님의 크신 영광을 위해 금욕주의자는 육체를 비하하고 고행한다. 유다는 영혼을 비하하며 고행했다.”(200)(유다에 관한 세 가지 이야기.)

 

 

마지막.

보르헤스는 전형적인 엘리트 작가이다. 그가 라틴아메리카(아르헨티나) 작가라는 것이 오히려 놀라울 수 있는데(실은 스페인 정복자 가문의 후예니까 또 얘기가 다르다), 암튼, 지식인의 현실 망각에 대해 내놓은 답이 멋지다. 이 정도는 되어야 니가 작가다...! 모두가 다 참여작가일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나는 상아탑 속에 갇혀 다른 것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 또한 현실을 변화시키는 하나의 방법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나는 당신이 말한 대로 상아탑 속에 있기 때문에 어떤 시 한 편을 떠올리고 있고, 어떤 책 한 권을 구상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어떤 것만큼이나 현실적인 겁니다. 나는, <현실은 일상적인 것이고 그것이 아닌 다른 것은 비현실적>이라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은 오류라고 생각합니다.”(141)

  

비슷한 맥락인데, 저번에 잠깐 소개한 단편  1983825」은 일종의 자살 예언서(?) 같은 것이었다. 문제는, 그렇게 자살할 거다, 라고 해놓고서 죽지 않았다는 것...-_-;; 왜 자살을 안 했냐고 묻자, 보르헤스의 답인즉:: 겁이 나서”.(156)  이 역시 지식인의 (대놓고! 당당히! 떳떳히!) 나약함을 보여주는 대목이 아닌가 싶다.  요컨대, '보다 체념적이고, 보다 문화적이고, 보다 지적인 행위'... 

 

 

 “이따금 나는 좋은 독자들은 좋은 저자들보다 더욱더 난삽하고, 독특한 존재들이라고 생각한다. (...) 따라서 읽기는 쓰기 후에 일어나는 행위이다. 보다 체념적이고, 보다 문화적이고, 보다 지적인 행위.”(13)

(<불한당들의 세계사> 1판의 서문」)

 

 

7월, 보르헤스를 읽으면서 내가 그를 많이 좋아했음(-좋아함)을 깨닫는다. 아무리 다른 일이 하기 싫어도, 읽기 싫은 책을 이렇게 오래 들고 있을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젊었을 때 사진은 꽤 미남이던데, 우리가 사랑하는 보르헤스의 얼굴은 아무래도 이런 얼굴. 나이가 좀 들어야 (다른 일을 할 힘이 없어서-_-;;) 책도 더 많이, 더 잘 읽을 수 있는 것 같으니...-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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