왠지 결핵, 특히 폐결핵하면 낭만주의 퇴폐와 연결되어 어딘가 미학적으로, 아름답게 느껴진다. 각종 낭만주의 시인들을 생각하면 된다. 암에 관한 한, 동정의 여지가 없다. 종양 덩어리, 썩어지고 문드러지고 그렇게 추악하게 죽음에 이르는 것. 가까운 예론,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 이반 일리치의 여러 증상으로 미루어, 췌장암(?)으로 추정한다. 에이즈는 더하다. 이것은 어떤 미학도 허용치 않는다. 이 병을 둘러싼 각종 메타포-은유들이 너무 불결한 탓이다. 이런 유의 생각은 수잔 손택의 명저를 읽으며(이 책에서) 나온 것이다.
수잔 손택의 하고 많은 고급 에세이 중 유독 이 책에 꽂힌 것은 수시로 상기되는 저런 내용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병과 더불어 살고 있고, 더 무서운 것은, 그 메타포들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잠시 그녀와 관련하여, 그녀는 훌륭한 에세이스트였지만 끝까지 소설가이고자 했다. 그녀의 소설을 읽지 않아 뭐라고 판단할 수 없지만, 적어도 평판만 놓고 보면 그리 대단한 소설을 쓴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왜 그토록 소설을 쓰고자 했는지. 우리를 옥죄는 이 창작(특히 소설-이야기 창작)의 욕망은 당최 무엇인지.
손택의 <은유로서의 질병>이 국내에 번역, 소개되기 전에 그 내용을 어렴풋이 알게 된 것은 대학 시절 김윤식 교수 덕분이다. 한국비평론 강의에 이런 얘기가 왜 나왔는지^^; 아무튼 그때 주워들은 몇 마디가 무척 강하게 각인되었다. 곁들어, 그 시절의 국문학자임에도 영어를 잘 했고(요즘이야 국문과 학생들이 영어 공부 더 열심히 하는 듯^^; 심지어 몇 권의 책을 번역하기도 한(지라르 소설론,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 등) 김윤식 선생은 이 점에서도 나름 선구자이다. 손택의 이론을 처음(!) 소개함과 동시에 이상 연구에 적용, 청년 이상의 결핵과 그 문학 간의 상관성을 풀어내었다. (<이상 소설 연구>도 좋은 책인데 이미지 검색이 안 된다.) 그러리라 추정했는데, 그렇다고 확증해준 것은 방민호 교수의 최근 이상 연구서.
겸사겸사 방민호 교수의 한 논문에 한복을 입은 이상 사진이 있어 깜짝 놀랐다. 그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우면서도 멋있었기 때문이다. 모방과 창조(?)를 향한 엄청난 욕구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떻든 조선인이고 덧붙여 장남(!)이기도 했다. 아무튼, 오랫동안 외국문학 쪽만 보다가 한국문학을 보니 마음이 설레는 것은 물론이고, 학자들의 몸가짐과 마음가짐(?) 역시 다르다는 사실에 자극을 받는다. 외국문학 전공자의 몫 중 하나는 번역이기도 하지만, 국문학자의 연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해석(논문 및 저서 쓰기)인 듯하다. 어쩌면 이것이 굴레이자 억압일 수도 있겠으나 어떻든 그들이 더 부지런한 것만은 사실인 듯하다.
다시 은유로서의 질병. 이반 카라마조프식 화법으로, 성인은 차치하자. 그들은 이미 선악과를 따먹어서, 즉 환경적 요인을 비롯한 각종 원인에 침윤되었다고 할 수 있으니 그나마 덜 억울할 터이다. 가령, 술담배 많이 해서 위암, 폐암, 대장암 걸리고 등. 하지만 너무 어려서 미처 선악과를 따먹을 여유조차(!) 없었던 아이들의 질병(장애)은 당최 뭐냐는 거다.
출생 직후에 문제가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조산아도 생각보다 많아 놀랐다.(우리 아이도 생후 1개월에 입원했는데 마침 병실이 없어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이런 경우 각종 질환이나 (아직 단정하긴 이르지만 장애가 적지 않다. 유전자 이상(우리가 제일 흔히 아는 건 다운 증후군)은 물론 증상이 심할 수록 조기에, 거의 생후 몇 개월에 발견,진단된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이런 장애(질환)는 다른 장애를 동반한다.
"애들이 한 번씩 경기도 하는 거지, 무슨 mri야."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러지 못한 정황도 많다. 증세가 심하거나(우리 아이도 눈이 뒤집어지고 병원에 도착한 시점에서 산소포화도가 아주 낮았다) 두세번 이상 반복된다면 더 그렇다. 보통은 약으로 조절하지만 드문 경우 (주로 간질파가 발견되는 뇌의 특정 부분을 잘라내는) 수술도 한다. 대개는 커가면서 좋아진다고 하지만(나도 그런 경우이고) 일단 약을 복용하면 증상이 없어도 3년은 계속 복용한다. 계속 증상이 있다면 그것이 간질병이고 평생 약을 먹는다.
주지하다시피 카이사르, 나폴레옹, 플로베르 등도 간질을 앓았다고 한다. 우리가 간질에 대해 갖는 극히 양가적인 인상은 이런 사실에도 기인한다. 즉, 그것을 '지랄병'(-서양에서는 '악마'가 들린 것)이면서 동시에 어딘가 천재적인 것이라는 것. 나의 경우, 경기를 많이 했으나 발달에 문제가 없어서, 오히려 너무 빨라서 후자처럼 생각했던 듯하다. 우리 아이의 경우는, 유감스럽게도, 반대. 하지만 전에 쓴 글에서 강조했듯, 이것은 그저 질환일 뿐이고, 이 질환과 특정 분야의 천재성 사이에 어떤 인과 관계가 있지는 않을 터이다. 심지어 프로이트조차도 <도..키와 살부(친부살해>라는 글에서, 기억나는 대로 조잡하게 정리하면, '몸'의 간질과 '정신'의 간질을 구분하고 도키를 후자에 넣는다. 하지만 이런 것은 있을 수 없다! 특발성(별 이유 없이 그냥^^;) 간질은 결국 증상이 문제이지, 원인(뇌의 구조에 어떤 확실한 문제, 기형 등)이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치료도 항간질약을 통해 발작을 최대한 억제하는 쪽으로 맞추어지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의학.
<백치>의 유명한 부분 중 하나. 므이시킨이 간질발작에 대해, 발작이 시작되기 직전의 아주 짧은 순간에 대해 얘기하는 부분을 한 번 옮겨보자. 엄청 길어서(그대의 수다-력이란!) 중간에 왕창 잘랐다.
"그의 간질병 증후 중에는 거의 발작 직전에 오는 어떤 단계가 있었다(물론 의식이 분명한 상태에서 발작이 올 때에 한해서지만). 그 단계에 들어서면 우수와 정신적 암흑과 억압 사이에서 순간적으로 그의 뇌는 불꽃을 튀기고 모든 활력은 폭발적으로 긴장한다. 삶의 감각과 자의식은 번개처럼 이어지는 매순간 거의 10배로 증가되었다. 그의 모든 감정, 의심, 걱정은 지극한 평온함으로 바뀜과 동시에 빛을 발하는 기쁨, 조화, 희망이 되고, 그의 이성은 결정적인 원인을 이해하는 데까지 이른다. (...) 만약 그 1초 동안, 즉 발작이 일어나기 직전의 의식이 깨어 있는 마지막 순간에, 그가 분명히 의식적으로 <그렇다, 이 순간을 위해 나의 모든 생을 내줄 수 있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면, 물론 그 순간은 그의 전 생애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백치>, 상권, 350-52쪽.)
한데 의학자들은 이것이 판타지라고 말한다. 간질의 전조로 흔히 얘기되는 증상(오심, 구토, 환청, 환시 등)과는 너무 동떨어진 것이라는 것. 하지만 간질병환자였던 도...키는 거의 전적으로 자기 나름의 경험에 기대어 자신의 인물로 하여금 저런 얘기를 하고 있다. 여기서 문학은 의학과 완전히 결별한다.
도...키 소설의 또 한 명의 간질환자는 (<악령>의 키릴로프를 빼면) 스메르쟈코프이다. 그의 간질병은 소설의 플롯 진행에 큰 역할을 하지만(발작이 난 것처럼 연기하다가 틈을 봐서 표도르를 죽인다), 작가는 그로 하여금 자신의 병을 통찰하는 페이지를 마련해주지 않았다. 이 점에서 스메르-프는 애초부터 '미학적 죽음'을 선고받은 인물이다. 백치-병신조차 자신의 질환을 그토록 깊숙이 응시하건만!
한편 뇌전증과 무관하지 않고 아이의 발달이 너무 늦어 관심을 갖게 된 발달 장애(자폐 스페트럼 장애). 그것의 가장 큰 특성은 (아주 중증이 아닌 다음에는!) 출생시 문제가 없었던 것은 물론,두 돌 정도까지는 별 이상이 없다는 것이다. 각종 검사에서도 이렇다 할 원인이 발견되지 않는다. 혹은 발견되도(더러 뇌파에 잡히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냥 그렇다, 하는 정보만 줄 뿐, 증상의 개선에 별 도움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아동발달센터를 봐도 한국 나이로 네다섯에서 일고여덟 정도 되는 아이가 제일 많다. 즉, 두 세돌 부터 의심을 하다가 병원 혹은 센터를 다니기 시작, 여사여사 진료 예약, 치료 스케줄 잡으면 이렇게 되는 거다. 다른 한편, 대략 초등 1, 2학년 정도까지(만 7, 8세) '늦음'이 잡히지 않으면 그것은 '장애', 즉 영구적인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가 이른바 좀 모자란다, 좀 덜 떨어졌다, 라는 것이 실은 자폐성 발달 장애, 지적 장애이다. 어릴 때는 '자폐'(autism)라고 하면 뭔가 굉장히 철학적으로 생각한 듯한데, 아이가, 사람이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것이 자신의 의지와 취향에 의해 선택된, 특정한 성향(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지와 감각 처리 능력의 문제 탓이기 때문에 그것은 장애인 것이다. 이것을 둘러싼 가장 큰 오해 중 하나는 양육 과정을 비롯한 환경적 요인 탓이라는 것이다. 환경이 문제라면 그것을 개선할 시 1년 안팎이면 아이의 문제가 사라진다. 그렇게 되지 않으니 장애인 것이다. 그 다음, 고소득 전문직(특히 의사) 부부에게 이런 아이가 많다는 것 역시 속편한 오해다. 오히려 부모가 그렇기 때문에 더 빨리 인지(발견)하고 치료에 적극적이고 때문에 통계에 잘 잡히는 것 뿐이다.
부산에 있는 부모와 두 동생과 떨어져 살며 거창 외갓집에서 학교를 다니던 시절, 1984년 4학년 1학기, 우리 반에 엄마와 이름이 똑같은 여자애가 있었다. 키가 무척 크고 얼굴이 무척 선하게 생긴 아이였다.(생각해 보면 또래보다 나이가 많았을 확률이 높다.) 눈썹이 길고 눈매가 여리고 미소가 은은했다. 학교도 드문드문 나왔던 것 같고. 그 아이와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제법 친했던 기억은 있다. 그 아이를 회상하면 왠지 청신한 초록빛 논과 밭이 떠오른다. 시골 학교였고 운동장 뒤로 전부 논밭이었으니 그럴 법도 하고. 아무튼 교실에 있는 그 아이의 모습은 거의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다. <고슴도치>를 쓸 때도 그랬지만, 요즘 곧잘 그 아이가 떠오른다. 거의 한 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이였던 것이다! 그 아이도 사십을 거뜬히 넘겼을 텐데 어떤 모습일지...
아무리 낙서라도 완결이 되어야 하는데 사방에서 떠들어대는 통에 집중이 안 된다. 역시나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는 정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