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오베 얘기가 처음(혹은 제대로) 나오는 것이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인가. 이 책을 제법 꼼꼼히 읽었지만(그래서 작은 글도 하나 썼지만)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 정도 나에겐 재미가 없었던 얘기. 요지인즉, 아들 딸이 골고루 무척 많은(7명씩이었나, 10명씩이었나, 암튼 많이도 낳았다!) 어머니(이자 동시에 테바이(?)의 왕비)인 니오베는 자신의 행복을 떠벌리며 오만하게 굴어 신들에게 혹독한 벌을 받는다. 결국 그렇게 자랑스러워한 모든 자식들을 다, 아폴론과 아르테미스의 화살에(맞나?) 잃게 된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물론 '신'에 대한 인간의 오만에 대한 응징이다. 이건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이기도 하다. 신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는 존재. 인간이여, 니 주제를 알라.
지금 니오베 얘기는 다른 식으로 의미심장하다. 여자에게 엄마, 그 이름과 자리는 무척 놀라운 것이다. 지금도 가능하다면 최소 둘은 낳고 싶은 욕심, 어느 여자에게나 있을 것이라고 거의 확신한다. 둘이 뭐냐, 낳을 수 있다면, 키울 수 있다면 니오베처럼 많은 아이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으면 얼마나 뿌듯하겠는가. 니오베가 왕비니 그 새끼들은 모두 왕자, 공주다. 이미 남아선호 사상은 거의 없어졌고, 동생들 부부를 봐도, 아들 혹은 딸에 대한 욕심도 말하자면 이렇게 자식을 많이, 두루두루 갖고 싶은 욕심의 연장인 듯하다. 아들이 있으니 딸고 갖고 싶고, 딸이 있으니 아들도 갖고 싶고, 심지어 빨리 결혼해 이십대에 두 아이 낳은 어느 후배 말대로, 아들딸 다 있으니 한 '세트' 더 갖고 싶고. 엄마로서의 여자의 욕심도 끝이 없다. 그 다음, 아이 낳고 나면, 극성 엄마 아닌 엄마 없다. 아닌 경우는 친모가 아니거나 아니면 믿는 구석이 있거나.
애초 엄마의 자리를 꿈꾸지 않았던 탓인지, 엄마로서의 내 자리에 깜짝 놀라곤 한다. 더 정확히, 내 안의 모성애에. 아마 세상에서 나와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해온 여동생이 더더욱 놀란다. 자기처럼 성격 좋은 사람도, 평생 좀처럼 화를 안 내는 사람도 두 아이 엄마로서는 매일 짜증의 연속이라고. 반면, 나는 걸핏하면 화를 내는 성격인데, 오히려, 애 낳고 (적어도 아이에겐) "보살"됐다고. 맞다, 아이가 너무 좋다. 하지만 이건 동생도 나의 24시간을 잘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아이에게 엄마가 절대적인 존재인 건, 절대적으로 맞다. 엄마와 아이는 원래 한 몸이었다. 정자 한 방울에 어떻게 비기랴. 하지만 그럼에도 분명, 사랑은 아이를 키워가며, 아이와 상호 작용하며 형성된다. 제삼자는 한마디로 못 알아듣는 아이의 말을 엄마는 다 알아듣는다. 심지어, 말이 아닌 표정이나 몸짓으로만 표현되는 의사도 엄마는 다 이해한다. 아이는 어릴 수록, 약할 수록(정신 박약 포함), 아플 수록 더 엄마만 찾는다. 우리 아이가 엄마한테 많이 집착하는 것도, 발달 지연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진즉 인정한 터이다. 옛말 다 맞다. 눈 먼 놈이 효도하고, 못난 놈만 내 자식이다. 잘난 놈은 결국 부모 품을 떠나게 돼 있다, 그것도 최대한 빨리, 최대한 멀리. 적당히 잘난 놈은 국가의 자식, 더 잘난 놈은 세계의 자식, 예수같은 자는 한 여자 마리아의 자식이 아니라 온 인류의 자식이다.
아이는 무한히 사랑스럽지만 육아는 너무 힘들다. 모성, 모성애는 물론 본능이지만, 하지만 그렇지 않다. 언젠가 읽은 권보드래 교수의 칼럼대로, 사회가 은연중에 작당, 모의를 한 건지도 모른다. 엄마인 네가 다 책임져, 넌 엄마잖아, 모성은 위대해! 이런 식으로. 더 극단적으로, 부모자식간의 범죄를 일개인의 잘못으로 몰아가면 문제는 단순해질 수 있으나, 이 역시 비겁한 일일 수 있다. 요즘 부모가 어린 아이를 학대하거나 심지어 살해하는 뉴스가 빈번하다. 대부분의 반응은 경악인데, 특히 엄마가 범행의 주체라면 더 경악한다. 엄마란 그런 존재이다. 하지만 요즘 생각은 좀 다르다.
통상 살부(살모)에 대한 논의는 제법 활발하다. 세계문학사의 대표적인 텍스트 세 편, 위의 것이다. 그 반대(?)는 어떠냐. 즉, 부모가 자식을 죽이는 것 말이다. 이 역시 연원이 깊다. 크로노스(시간)가 가이아(땅/대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신의 자식을 삼키는 이야기가 처음 나온 것도 <변신 이야기>던가. 아무튼 유명한 일화. 고야의 소름 돋는 그림으로 더 유명하다.
아마 저 신화 자체는 시간에 대한 인간의 공포를 표현한 것일 터이다. 여기에는 또 남자 대 남자, 즉 부자 간의 권력 다툼이 개입되니 문제는 또 복잡해진다.(헐, 우리의 사도세자!) 잘했다는 것이 물론 아니고, 불가피했으리라 여겨지는 어떤 지점은 분명히 있다. 아무렴, 아버지가 자식을 집어삼키는 것의 공포는 정말, 후덜덜이다.
돌도 안 된 아이, 심지어 백일 전후한 아이를 그냥 방치한 것에 덧붙여 사실상 폭행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 엄마들이 있다. (최근의 그 냉장고 냉동실 사건은, 참, 소설의 내용이라고 해도 어처구니없다..ㅠ.ㅠ 토막 이후에 치킨이라는 이 도저한 산문성은 뭐냐...ㅠ.ㅠ) 아이를 낳기 전에는 나도 응당 "세상에, 엄마라는 사람이!"라고 쉽게 말했을 터이다. 하지만 막상 아이를 낳고 4년 반 정도 키워 보니 "오죽하면!"이라는 소리도 나온다. 내 뱃속에서 나와 호흡하며 키운 아이를 세상 밖으로 빼내고, 오직 나밖에 몰라 죽자사자 나한테 매달리는 핏덩어리를 죽음에 이르게 하기까지 분명히 몇 단어로 요약이 안 되는 복잡한 정황이 있었을 것이다. 엄마 자체의 몸과 마음의 건강, 주변 인간들의 무성의(심지어 폭력), 때론 아이 자체의 문제(심지어 장애에 가까운 질환이 있거나) 등등. 마지막 요소도 무척 심각하다. 많이 보채고 떼를 심하게 쓰는 것도 어느 지점에서는 약물 치료까지 요하는 장애이다. 가령 흔히 말하는 adhd는 눈으로 직접 보기 전에는 그 심각성을 모른다. 학동기, 이미 의사소통이 어느 정도 되는 나이에서 아이의 인성이나 행동이 지나치게 문제적일 때는 엄마로서 더 좌절할 것 같다.
'모성'의 메타퍼들이 있다. 지난 번에도 얘기한 울리츠카야의 소설 중 하나는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형상화한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박경리의 <토지> 역시, 굳이 작가가 여성이어서라기 보다는(물론 이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겠다 - 그리고 여자가 여자처럼 쓰는 건 나쁜 게 아니다) 소설의 문체나 어떤 분위기 때문에 항상 그런 느낌이 들었던 듯하다. 겸사겸사, 어떻든 이 소설은 최서희의 일대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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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시에 낮잠이 들면 어떡하나, 정말 난감하다. 내 몸도 힘들지만, 남의 몸, 즉 아이의 몸을 건사하는 것은 그에 비길 바 아니다. 컨디션 조절이 잘 안 되는 것도 역시나 발달 지연의 일부일 터. 요즘은 모든 것을 다 여기에 갖다 붙이는 비겁한(?) 버릇까지 생겼다 -_-;; 아이의 지연 혹은 장애보다 더 무서운 것은 타인의 시선을 자꾸만 의식하는 나의 소심함인가, 에효. 그러게 '맷집'이 필요하다.
몇 달 전,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을 곧잘 듣던 아이와의 대화. 1인칭 대명사를 잘 못 쓰던 때의 일이다.
- **아, 싸우자! 엄마는 황산벌에 계백할 테니까 너는 맞서 싸운 관창 해.
- 싫어. **는 역사할 거야. 역사는 흐른다~
한 일주일쯤 전, 잠자리에 들어 뭔가 열심히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런 말을 한다.
- 엄마, 고추는 매운데 왜 내(**이) 고추는 안 매워? 먹는 고추는 매운데 사람 고추는 왜 안 매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