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이 나보다 더 좋은(?!) 삶을 살기를 바라는 건 모든 부모의 마음이리라. 하지만 꿈 깨시라. 아이가 태어난지 겨우 5년이지만 아이의 삶은 부모의 삶을 고스란히 반복한다, 그러리라는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되는 요즘이다. 혹시 잠깐 진보(!)가 보인다면 그야말로 잠깐, 혹은 착시나 환각 같은 것. 결론은 똑같다. 하필 지난 학기에 쭉 다시 읽은 톨스토이는 그 점을 여실히, 아주 문학적으로, 문학적 사실주의(진실!)가 가닿을 수 있는 극점에서 보여준다.
주지하다시피 톨스토이는 러시아의 유서깊은 귀족 가문 출생이다. 아버지는 기껏해야(?!) '백작'이었으나 어머니는 공작, 더욱이 무척 부유한 볼콘스키 가문의 영애였다. 그의 데뷔작인 소위 자전 삼부작은 그런 환경에서 자란 유년, 소년, 청소년기를, 훗날 더 빛을 보게 될, 톨스토이만의 균형 잡힌 객관적인 문체로 찬찬히, 세세하게 그려낸다. <소년 시절>의 핵심 대목은 어머니의 죽음. 그렇다, 소위 '엄친아'의 그에게 최고의 상실은 이것이다. 소설에서는 열살 넘어 엄마가 죽는 걸로 되어 있지만, 실제는 아주 어릴 때(서너살?)였다.물론 이건 비극이다. 하지만, 저 정도의 집안이니 저 정도로 자랄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가령 체호프처럼 (해방된) 농노의 아들이었다면??) 그럼 어느 정도의 집안이었나. 이후 톨-이가 쓰게 될 걸출한 장편들은 결국 자신의 집안과 그와 연결된 러시아 귀족 사회(이것도 은근 좁았으리라 생각된다, 우리의 재벌 사회가 은근 좁듯)를 그려내는 데 치중한다. 그의 소설은 90퍼센트 전기적(=자전적) 소설이다.
<전쟁과 평화>. 물론 나폴레옹 전쟁을 다룬 역사소설이다. 하지만 톨-이의 입장에서는 우선적으로, 어머니 쪽 볼콘스키 집안 얘기를 대거 다룬 소설이기도 하다. 노 볼콘스키 공작의 '박색'(-임이 엄청 강조된다!) 딸 마리야 볼콘스카야가 대략 톨-이의 어머니, 그 다음 그녀와 결혼하는 니콜라이 로스토프 백작이 그의 아버지. 이들의 결혼 스토리는 그러나, 상대적으로 부수적인 편이다.
이 긴 소설은 셰레르 고관 부인(안나)의 모임으로 시작된다. 사교계 살롱, 그녀는 귀족사회의 '여왕벌'쯤 되는 듯하다. 여기에 거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다 나오고 인물들의 성격, 관계, (예상되는) 갈등 등이 다 제시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모스크바 굴지의(!) 부호인 베주호프 백작의 와병, 임종, 죽음이다. 다들 그 유산을 받으려고 애쓰는데, 결국 재산은 사생아인(그리하여 원래는 상속 자격이 없었던) 피에르 베주호프에게로 돌아간다. 그는 톨스토이의 소위 구도적(=정신적) 자아를 반영하는 인물이다. 나중에 (옐레나와의 실패한 결혼 이후) 나타샤 로스토바, 즉 로스토프 백작 집안의 딸과 결혼한다. 둘이 엮어지는 건 물론 이들이 한 사회 속에 있기 때문이다. 나타샤 입장에서는 '피에르 삼촌'이었던 자가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남자'로 보이고, 그들의 행복한 결혼 생활은 이 긴 소설의 맨 마지막을 장식한다.(더 마지막은, 정말 지루하다, 역사와 전쟁에 대한 장광설로 장식된다..ㅠ.ㅠ)
다 건너뛰고, 니콜라이 로스토프와 마리야가 만나는 장면은 어떠한가. 나폴레옹 침공, 마리야는 아버지가 변덕을 부리는 바람에 피난도 못 가고 영지의 저택에 거의 갇혀 있는 상태다.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로스토프 백작(장교)이 그녀를 구출하게 되는 것이다. 마리야의 시점, 평생 늙은 아버지의 변덕을 받아주고 또 자신의 못생긴 얼굴로 열등감을 느껴온 그녀에게 니콜라이는 그야말로 백마 탄 왕자이다.
로스토프가 공작 영애 마리아에게로 안내를 받아 홀로 들어가 보니 그녀[마리야, 노공작 사망 직후]는 허탈감에 빠져 의자에 축 늘어져 있었다. 그녀는 그가 어떤 사람이며 무엇 때문에 왔는지, 또 자신이 어떻게 될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인답게 생긴 얼굴과 그가 방안을 들어설 때의 태도나 처음 입 밖에 낸 말씨로 보아, 그가 자기와 같은 사회 계급의 사람임을 안 공작 영애 마리아는 깊이 있고 빛나는 눈빛으로 손님을 보면서 흥분 때문에 토막토막 끊어지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로스토프는 그녀와 만나는 순간 어쩐지 낭만적 환상을 느꼈다. ‘난폭한 폭도들 가운데 혼자 남겨진, 몸을 보호할 능력도 없는 슬픔에 잠긴 아가씨! 내가 이곳으로 온 것은 어떤 불가사의한 운명의 작용에 의한 것이다!’ 로스토프는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얼굴빛이고 표정이고 어쩌면 저렇게 부드럽단 말인가! 그리고 어쩌면 저렇게도 품위가 있어 보일까!’ 그는 겁에 질린 듯한 공작 영애 마리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중, 468-469 / 3권, 2편 --> 이 번역본은 <범우사판>, 손때를 탄 아끼는 책이다.)
부유한 상속녀의 마음을 사로잡은 니콜라이 로스토프는 지금 어떤 상황인가. 백작 집안이지만 사람 좋고 경영 못 하는 우유부단한 부모 때문에 재산이 거의 바닥인 상태, 그런데 그는 또 집안을 일으켜세워야 하는 장남이다. 한편 마리야는, 마침 오빠(안드레이 볼콘스키)도 전사했기 때문에(그의 부인인, 올케 리자는 둘째 낳다가 일찌감치 죽어줌), 거의 유일한 상속녀이다. 그 재산을 나눠 가질 유일한 사람은 오빠의 아들뿐이다. 얼마나 대단한 귀족인지,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영지 한 덩어리를 재산으로 받는다.
아무튼 시쳇말로 '땡잡았다~'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 니콜라이로서도, 무척 불쾌하다. 여기서 돋보이는 것이 톨-이의 현실감각, 내지는, 그가 정말 천생이 귀족이라는 점이다. 니콜라이는 돈 때문에 마리야를 사랑하는 것이 절대(!) 아니고, 정말로 마리야를 사랑하고 (겸사겸사!) 그녀는 부유한 상속녀이다. 그의 눈에 그녀는 미녀는 아니지만 우아하고 기품있고, 그렇기에 매력적인 여성이다. 겸사겸사, 마리야는 수학적 재주가 뛰어나다.(아비가 딸에게 가우스 정리인가, 이런 거 가르친다 -_-;; 요즘 같으면 어디 수학과 교수 쯤 됐을 지도^^;) 결국 밀고 당기기를 반복하다가 둘은 결혼하게 된다. 모든 결혼은 정략결혼이다. 그렇지만, 그 정략결혼도 사랑(적어도 사랑의 환상)은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안나 카레니나>는 전 세계가 오랫동안 사랑해온(앞으로 사랑할!) 최고의 연애소설이다. 물론 소설이 이렇게 긴 걸 봐도 알겠지만, 이 소설을 연애소설로 읽는 독자는 없을 터이다. 연애가 이리 길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안나 카레니아와 브론스키가 처음 만나고 반하는 장면(1부)까지는 그렇게 읽어도 무방하리라. 많은 빛나는 문장들, 장면들을 빼고, 이번에 새로 읽으니, 이런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브론스키는 차장을 뒤따라 객차로 들어가다가 어느 부인에게 길을 내주고자 객차의 입구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사교계 사람의 감각이 몸에 밴 브론스키는 그 부인의 용모를 보고는 한눈에 그녀가 상류사회의 여성임을 알아차렸다. 그는 양해를 구하고 객차 안으로 들어가려다, 한 번 더 그녀를 꼭 보아야겠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녀가 대단히 아름다워서도 아니고, 그녀의 모습 전체에서 풍기는 우아함과 겸손한 기품 때문도 아니었다. 다만 그의 옆을 지나치는 그녀의 사랑스러운 얼굴 표정에 유난히 상냥하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뒤돌아보자, 그녀 또한 고개를 돌렸다. 짙은 속눈썹 때문에 검게 보이는 그녀의 빛나는 회색 눈동자가 다정한 빛을 띠며 마치 그를 알기라도 하듯 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곧 누군가를 찾는지 가까이 다가오는 군중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 짧은 시선을 통해, 브론스키는 그녀의 얼굴에서 뛰노는 절제된 활기를 포착할 수 있었다. 붉은 입술을 곡선 모양으로 만든 희미한 미소와 빛나는 눈동자 사이에서 차분한 생기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다녔다. 마치 그녀의 존재에서 어떤 것이 넘쳐흘러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반짝이는 눈빛과 미소로 나타나는 것 같았다. 그녀가 일부러 눈 속의 빛을 꺼버리긴 했지만, 그 빛은 그녀의 의지에 반해 희미한 미소로 반짝였다.(1, 137 / 1부 18장)
브론스키가 소설에 처음 등장하는 대목이다. 그가 안나를 인지한 이유(?)를 설명함에 있어 우선적으로 강조되는 것이 그녀가 상류 사회의 부인이라는 점이다. 아, 물론, 이건 사랑이고 첫 눈에 반한 사랑이다. 그리고 안나의 아름다움이야, 앞으로도 많이 나오지만,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 화학 반응이 일어나기까지, 저 요소가 들어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나아가 작가가 이 점을 저렇게 지적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겸사겸사, 안나의 아들 세료쟈. 아이는 학교도 가지 않는다. 갈 필요가 없다. 과목별로 가정 교사(겸 보모 - 육아 도우미)가 다 있고 원어민(!) 교사가 다 딸려 있다. 아이가 9살이 되었을 때인가, '사회성' 함양을 위해 학교에 보낸다.
귀족 사회의 충실한 일원으로서, 또 부지런하고 경영 마인드가 (^^;;) 투철한 지주로서, 또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은 활동가로서, '여우' 같은 아내와 '토끼' 같은 자식들을 거느린 가장으로서 톨-이는, 왜 소설을 썼던가, 굳이 왜 써야 했던가. 이것이 지난 봄학기 내가 제일 많이 던진 물음이었다.(영원히 답이 나지 않는 -_-;;) 실상 그는 엄청난 양의 소설을 썼지만(희곡도 썼다) 자신을 결코 '직업 작가'로 여기지 않았다. 그건 그가 충분한 '프로'가 아니어서가 아니고, 내가 앞에 썼듯, 다른 정체성만으로도 너무 멀쩡, 심지어 멀쩡 이상의 멀쩡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세상에 이렇게 재수 없는(!) 작가는 없을 법하다. 그에게 유일한 콤플렉스는 외모(얼굴)였지만, 중년 넘어가니 오히려 미남 작가들보다 더 낫다...^^;; 그가 문학-소설 속에서 보여주는 철저한 환경결정론, 균형 잡힌 구성, 사물의 궁극을 추구하는 집요하고도 찬찬한 문체 등은 모두 이런 '신분-계급'과 무관하지 않다. 이렇게 최고의 '갑'이었음에도 '베품'의 미덕까지 갖고자 했으니(재산도, 저작권도 결국에는 아내와 자식들에게 남기게 되지만) 더더욱 재수 없나, 그대는.
---
수저 얘기를 하고 싶었나. 그랬다. 하필, <톨스토이> 수업 전에 경제학 관련 수업이 있어서인지 PPT 파일이 떠 있을 때가 더러 있었는데, 한 번은 그 내용이 바로 저것이었다. 플래티넘 수저,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 등등. 다들 알면서 왜 그러나, 세상이 원래 그렇다! 다만, 보다 인간적, 문화적이려면 소위 '흙수저'도 먹고살만하게 사는 세상, 그게 멀쩡한 세상(=선진국)이다. 문제는 이 '먹고살만하다'의 정의가 참, 애매하다는 것.
부산의 허름한 동네, 불과 2킬로 정도의 거리를 두고 소위 흙수저로 사는 남동생 부부와 소위 핵금수저로 사는 여동생 부부를, 이렇게 멀리 서울의 역시나 허름한 동네에 살면서 지켜보는 마음이 참 묘하다. 우리 삼남매야 이미 인생의 절반을 지나왔지만, 그 아이들의 삶은 이제 겨우 네 살, 다섯 살, 여섯 살, 일곱 살임에도 너무도 다르게 전개된다. 고급한 영어 유치원, 그 다음, 아이가 힘드니 학원도 안 보낸다, 선생이 다 온다.
어느 날 여동생도 말했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매달 건물세가 이렇게 들어오는데(액수가 너무 감이 없어서 까먹었다) 이게 멀쩡한 세상이냐, 고. 물론 그말도 맞다. (경제학자들, 사회학자들, 정치학자들 열심히 연구하시라.^^; ) 소위 부자의 삶을 전혀 몰랐던 내가 여동생네의 삶을 보며 가장 절감하는 건, 부가 죄가 아니라는 것, 이다. 부자라고 쉽게 살지 않는다. 펑펑 쓰지도 않는다. 마구 살아서는 그 부가 유지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그 부를 되물림하기 위해 무척 노력한다. (재벌사회의 룰은 더 엄격하리라 생각된다.)
흔히들 쉽게 '가난은 죄가 아니다'라고 말하지만, 정말 부도 죄가 아니다. 부자가 띠껍냐? 그래, 띠껍다, 더럽고 아니꼽다! 하지만 배알이 꼴리는 순간 우리는 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억울하면 출세하라'라는 식의 태도로 나가는 것도 이미 우리 사회에는 맞지 않는다. 그거야말로 70년대, 새마을 운동 시절 얘기고. 또 출세하지도 못한다. 개천에서 난 용은 개천으로 돌아갑니다요^^;
1975년 농부의 딸로 태어나 막노동꾼, 시장바닥 장사치의 장녀로 자란 나는 정말 배고프고 추운 유년시절을 보냈다. 먹성이 유달리 좋은 여동생은 "밥 많이 주세요, 꾹꾹 눌러주세요~" 이런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듯.(그런데 지금 자기 말대로 "미꾸라지 용 됐으니" 로또인가?!) 대학 입학 전까지 삼겹살을 구워 먹어 본 적이 없다. 구워 먹을 고기가 어디 있나. 김치찌개도 호사였다. 그렇게 다니고 싶었던 피아노 학원을 못 다닌 것이 마흔이 넘은 지금도 아쉽다.
가난한 남동생 부부와 부유한 여동생 부부를 속속들이 보면서 절감한다. 그래도 옛날과 비교하면 어지간히 먹고살만한 세상이다. 부자-갑의 횡포, 소위 '갑질'도 무섭지만, '을질'도 만만치 않다. 나 돈 없어, 어쩔래? 우리 애 띨빵해, 어쩔래? 나 성질 더러워, 어쩔래? 등등. 나도 요즘 '을질' 중인데, 좀처럼 착해지지 않는다. 인세가 들어와야지 착해질 듯, 에효. 돈의 노예인가? 돈의 노예가 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돈을 많이 갖는 것 뿐이라는 슬픈 현실^^;;
--
지난 주 화요일인가, 애를 유치원에서 치료실로 데려가는 중, 엘리베이터 앞에서 찍었다. 여섯 살은 똘똘하기 때문에 자기들끼리 잘 논다. "야, 너 한 번만 더 그런 식으로 하면 내 자리에 못 안 게 할 거야!" "야, 그러는 너는?" 우리 아이의 '놀이 수준'은 아직 '탐색'의 단계(그 다음 대략 '역할' 놀이, '상상-환상' 놀이 등)에 머물고 있으니 여기에 못 끼는 건 당연하다. 혼자서 띨빵한 소리 한다. "**(친구 이름)가 키가 제일 커." 웬 뜬금없는 소리? 당사자인 **도 못 알아들음 -_-;; 그래도 별 탈 없이 다녀주는 것만도 고맙구료.
이건 작년초, 심지어 3월. 다섯 살임에도 몸놀림이 엉성해서(오죽하면 '뇌성마비'라고 했을까!) 바보 같은데도 왜 이리 이쁘냐. 제 딴에는 그래도 노래와 율동을 해보겠다고 애쓰는 모양이 너무 귀엽다. 겸사겸사 다른 친구들도 아직 네 살이라 만만찮다. 그리고 제 내복들의 압박ㅋ 작년에 찍힌 사진들 중 제일 아끼는 사진이다. 저 때 달고 있는 명찰, 이제는 읽을 줄도 안다. 잘 커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