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 소설집 나왔다.

좀 튕길 수 있으면 좋으려만, 솔직히 말해, 너무 기쁘다! 사심 없이, 마냥.

 

 

 

 

 

 

 

 

 

 

 

 

 

 

 

표지 이미지에 고양이를 제안하며 떠올렸던 그림은 피카소의 데생 두 점.  '엎드린 개 자세'를 취하는 고양이, 그냥 멍 때리는 것 같은 고양이.

 

 

지금의 표지, 전체적인 모양, 양감과 질감, 모두 다 마음에 든다. 10여년 전 <현대문학>에 실었던 단편 하나를, 모 평론가 선생님의 충고대로, 뺀 것은 무척 잘한 일인 듯하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작가 프로필 사진. 좀 더 밝고 경쾌한 사진이 쓰이길 바랐는데, 좀 진중하고 가라앉은(?), 떫은(?) 표정의 사진이 들어갔다. 그날, 그러니까 지난 여름에 같이 찍은 사진 한 장 중 마음에 들었던 것을 올려 본다. 사람 일 어찌 될지 모르니 제일 젊고 제일 예쁠 때(그게 바로 지금이다!) 찍어두자.

 

집 근처 구청과 일반 주택 사이를 오가며 찍었다. 굳이 멀리 갈 필요 있나. 다 거기서 거기지.

 

등단 20년(이 숫자에, 헉, 했다!), 조촐하지만 목록을 한 번 만들어 본다.

 

삼십대에 쓴 것. <고양이의 이중생활>은 200?년도 한겨레문학상 본심에 떨어진 소설이다.

 

 

 

 

 

 

 

 

 

 

 

 

 

 

이십대에 쓴 것. 정말 안 팔렸지만 <그러니 내가 어찌 나를...>은 참 아끼는 소설이다.

 

 

 

 

 

 

 

 

 

 

 

 

 

 

 

어째 삼십대가 더 부실하냐?? 네가 면죄부가 돼라.

 

 

 

 

 

 

 

 

 

 

 

 

 

 

 

 

 

 

 

 

 

 

 

 

 

 

 

 

 

 

 

이미지 넣다 보니 <악령>은 이십대 중반, 유학 가기 전에 했던 번역이다. 이후 번역은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는 듯한데 소설은 뭐냐. 계속 전락한 셈이 됐지만, 나는 나의 소설이 무척 성실하게 시간을 좀먹어 그 나름의 진화(퇴화 역시 진화다!)를 거듭하고 있다고 믿는다. 쓰는 것만이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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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몽 2016-10-13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축하드려요~
김연경님 번역을 사랑하는 독자로 (우연인지 위에 있는 책 다 있네요) 소설도 정말 기다려졌었거든요~
얼른 사서 읽어보고 싶네요.

사진도 너무 예쁘세요.^^

걸으며자는사람 2016-10-13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

도손 2016-10-14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말 축하드립니다!

푸른괭이 2016-10-14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댓글이 세 개나 달리다니! 다들 감사합니다!^_^

always 2016-10-18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

푸른괭이 2016-10-19 14:23   좋아요 0 | URL
앗, 감사합니다! 기왕이면 주문도 좀... ^^;
 

어젯밤부터 신경이 무척 날카로워지더니 뭔가 무척 쓰고 싶은 아침에, 1999년 언젠가, 2001년(즉, 모스크바) 언젠가 무지막지하게 써놓았던 글 두 편을 다듬어 본다. 이십대 중반, 그 꽃다운(!) 나이에 나는 정말 괴상하고 살벌한 생각을 하며 살았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세 번째 '악몽'을 써본다. 이 악몽 속의 나는 지금의 나와는 아주 다른 나다. "확실한 내 꿈에 나는 결석하였고...." / "내가 결석한 나의 꿈." 최근 계속 맴돌던 싯구를 찾아본다.

 

오감도: 시 제 15

 

1

나는 거울 없는 실내에 있다. 거울 속의 나는 역시 외출중이다. 나는 지금 거울 속의 나를 무서워하며 떨고 있다. 거울 속의 나는 어디 가서 나를 어떻게 하려는 음모를 하는 중일까.

 

2.

죄를 품고 식은 침상에서 잤다. 확실한 내 꿈에 나는 결석하였고 의족을 담은 군용 장화가 내 꿈의 백지를 더럽혀 놓았다.

 

3. (...)

 

4.

내가 결석한 나의 꿈. 내 위조가 등장하지 않는 내 거울. 무능이라도 좋은 나의 고독의 갈망자다. 나는 드디어 거울 속의 나에게 자살을 권유하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그에게 시야도 없는 들창을 가리키었다. 그들 창은 자살만을 위한 들창이다. 그러나 내가 자살하지 아니하면 그가 자살할 수 없음을 그는 내게 가르친다. 거울 속의 나는 불사조에 가깝다.

 

5(...)

 

6.

모형 심장에서 붉은 잉크가 엎질러졌다. 내가 지각한 내 꿈에서 나는 극형을 받았다. 내 꿈을 지배하는 자는 내가 아니다. 악수할 수조차 없는 두 사람을 봉쇄한 거대한 죄가 있다.  

    

 

 

 

 

 

 

 

 

 

 

 

 

 

유감스럽게도, 아마 메모하기가 힘들었는지 3연, 5연은 빠져 있다.  출처는 권영민 편집 전집. 옛날에는 <문학사상사> 전집으로 읽었고 작년에 <뿔> 전집으로 읽었다. 잘 만든 책인데, 또 좋은 출판사였는데 없어져서(?) 뿔난다 ㅠ.ㅠ

 

좀 많이 읽어 식상한 감은 있으나 <거울>과 같이 읽어볼 수 있겠다. <거울>이 저 <오감도>의 온건(?) 버전 쯤으로 읽힌다.  

 

 

거울

 

거울 속에는 소리가 없소 / 저렇게까지 조용한 세상은 참 없을 것이오

 

거울 속에도 내게 귀가 있소 / 내 말을 못 알아듣는 딱한 귀가 두 개나 있소

 

거울 속의 나는 왼손잡이오 / 내 악수를 받을 줄 모르는 - 악수를 모르는 왼손잡이오

 

거울 때문에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만져보지를 못하는 구료마는 / 거울 아니었던 들 내가 어찌 거울 속의 나를 만나보기만이라도 했겠소

 

나는 지금 거울을 안 가졌소마는 거울 속에는 늘 거울 속의 내가 있소 / 잘은 모르지만 외로 된 사업에 골몰할 게요

 

거울 속의 나는 참 나와는 반대요마는 / 또 꽤 닮았소 / 나는 거울 속의 나를 근심하고 진찰할 수 없으니 퍽 섭섭하오

 

 

 염상섭의 <삼대>를 아주 느린 속도로(ㅠ.ㅠ) 조근조근(^^;;) 읽어가며, 이토록 타자 (+ 사회) 지향적인 작가가 있구나, 생각한다. 반면  10년 안팎(?)으로 설치다  간  저 어린 작가는 시종일관 '나-자의식'을 팠구나, 싶다. 물론, 산문을 읽어보면 전혀 다른 이상, 즉 김해경을 만날 수 있다. 이런 분열 내지는 이중인격이야말로 이상의 문학의 핵심일 법하다. <권태> 같은 좋은 수필들은 제쳐놓고, 이런 편지만 봐도 뭔가 아찔하다. 생활인-자연인 이상과 문학가 이상은 이토록 다른 것이다.

 

 

 

- 편지 중 마지막. <9>

 

어제 동림이 편지로 비로소 네가 취직되었다는 소식 듣고 어찌 반가웠는지 모르겠다. 이곳에 와서 나는 하루도 마음이 편한 날이 없이 집안 걱정을 하여왔다. 울화가 치미는 때는 너에게 불쾌한 편지도 썼다 그러나 이제는 마음을 놓겠다. 불민한 형이다. 인자(人者)의 도리를 못 밟는 이 형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가정보다도 하여야 할 일이 있다. /쪼록 늙으신 어머님 아버님을 너의 정성을 위로하여 드려라. 내 자세한 글, 너에게만은 부디 들려주고 싶은 자세한 말은 2, 3일 내로 다시 쓰겠다.

- 1937. 2. 8. 동생 김운경(金雲卿)에게 보낸 마지막 엽서. (4, 1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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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너무 궁하던 차, 어제 수업 직후에 은행에 돈 빌리러 갔다가 나의 우수했던(!) 신용 등급이 하락하여 5백만원도 빌릴 수 없음을 확인, 아연실색하였다. (작년에는 그 자리에서 천만원을 빌려주더니!) '수신'(이런 어려운 용어란?!)이 꾸준히 5백은 되어야 한다나. 아니, 그 5백이 안 되니, 돈을 빌리려는 것인데! (같은 이유로 그 유명한 '마이너스 통장'도 안 된다니!) 하지만 돌아서서 생각해보면, 뭐, 오래 곱씹을 것도 없이, 그들이야말로 옳은 것이고, 나야말로 (거지임에 덧붙여) 등신임이 금방 깨달아진다. 그리고 나만 아는 '등신-스러움'의 가장 핵심적인 대목은 이 모든 것이 전부, 소설 때문이라는 점이다! 정말 문자 그대로 '빌어먹고 (날도 추워지니!) 얼어죽을' 소설이다. 폐가망신하기 위해 소설 쓰나 보다. 흥, 그래도 계속 쓸 테다. 안 쓰고 수가 있나. 시시콜콜, 이런 정황 역시 너무 소설적이다.

 

 

 

 

 

 

 

 

 

 

 

 

 

 

 

 

소설이 언제부터 '돈'을 문제 삼나. 단순히 가난(빈곤), 기아 등등이 아니라 '돈' 말이다. 아무래도 자본주의가 있어야하고 대도시가 있어야 하고 또한 돈의 희로애락을 다 보여주려면 장편이어야 한다. 역시 발자크. 그의 인생 자체가 '돈 있음(넘침)'과 '돈 없음'의 시소 놀이임을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을 읽으면 알 수 있다.

 

 

 

 

 

 

 

 

 

 

 

 

 

 

 

 

대놓고 '돈 타령'하지 않으나 쥘리앙 소렐이 꿈꾸었던 그 부르주아(그 이전엔 귀족이었을 터) 사회 역시 결국 돈에 기반한 것. <마담 보바리>는 예의 그 시니컬한 플로베르의 세계관이 반영된바, 돈(=신용카드 빚)으로 신세를 망치는, 19세기판 프랑스 파리판 '된장녀' 스토리로 읽을 수도 있을 정도다. 엠마가 사랑 때문에 망했다는 사람은 소설 대충 읽은 거다. 소설(특히 연애 소설) 속 주인공이 되기 위해 제일 필요한 것이 미모(치장)이고 거기에는 엄청나게 돈이 든다. 엠마는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 위해 옷을 너무 많이 산다(맞춘다). 굳이 돈이 화두는 아니지만, 내친 김에 에밀 졸라도 떠오른다. <인간짐승>은 유감스럽게도 읽지는 않았으나, 너무나도 '졸라스러운' 제목이다.

 

 

 

 

 

 

 

 

 

 

 

 

 

 

 

 

돈에 대한 가장 건전한(-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세계관, 말하자면, 근검절약하는 중산층의 세계관의 모델은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서 찾을 수 있다. 대부분이 청혼(심지어 연애, 라고 하기도 뭣한!)과 결혼(심지어, 결혼식)의 과정, 즉 '짝짓기'로 이루어진 그녀의 소설에서 결혼 상대들의 재산, 재력은 무척 중요한 요건이다. 문제는 등장인물이 거의 모두, 이런 문제를 꺼림칙하거나 불편한 어떤 걸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오히려 이게 그들 인생의 제일 중요한 화두이다.

 

 

 

 

 

 

 

 

 

 

 

 

 

 

 

 

내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물론 걸작임에는 확실하지만!) 이 소설은, 개츠비가 데이지에 대해 말하듯, 돈 냄새를 풀풀 풍긴다. 그것이 거의 푸짐한 똥냄새처럼 느껴졌던 소설. 역시 미국소설답다는 느낌을 비교적 최근에도 받았다. 데이지를 얻기 위해 돈을 펑펑 써대며 연일 화려한 파티를 여는 개츠비, 정녕 위대하다.  

 

 

 

 

 

 

 

 

 

 

 

 

 

 

 

 

러시아의 문학의 경우, 귀족-지주 작가는 돈 냄새가 자욱한 소설을 쓴다, 당연하다. 도스토예프스키가 (그의 외모와 매너와 재력 때문에) 열등감을 많이 느낀 투르게네프의 소설이 시종일관 온건한 사상과 세련된 서정주의로 가득 찬 것도 돈 많은 여지주의 외아들(?)이었던 그의 태생과 무관하지 않다. 한데, 그보다 더 부자였던 톨스토이는 훨씬 더 사실적인(!), 말하자면, 생활밀착형 소설을 쓴다. (언젠가 그와 돈 얘기를 했다.)

 

 

 

 

 

 

 

 

 

 

 

 

 

 

 

 

소위 세기말의 작가, 체호프는 어떤가. 사실 지금 이러고 있는 건 체호프 때문인데, 그에 관한 논문의 최종 교정본을 고치다가 이런 구절을 발견해서이다. 

 

(...) 이런 시작에 걸맞게 다음날 치러진 결투(19)는 시종일관 희극적이다. 무엇보다도, 새벽 5, 결투의 참여자들이 모두 모였고 위치도 정해진 상황에서 계속 꾸물대자 먼저 입을 연 의사의 말이 압권이다

 

- Вам, вероятно, еще не успели сообщить моих условий. Каждая сторона платит мне по 15 рублей, а в случае смерти одного из противников оставшийся в живых платит все 30.”(444) 

아무래도 여러분에게 저의 조건을 아직 알려주지 않은 모양이군요. 양측 모두 저에게 15루블씩 지불하고, 적수 중 한 쪽이 사망할 경우 살아남은 쪽이 30루블은 모두 지불한다, 입니다.”

 

심지어 이 말을 꺼낸 것도 굳이 돈 때문이 아니라, 사모일렌코의 부탁으로 마지못해 온 까닭인지, 관련자들에 대한 증오(“просто из ненависти, 444) 때문이다. 이런 정황까지 포함하여 결투에 입회한 의사가 소위 수임료를 언급하는 것은 문학사적으로 유례없는 일일 법하다.

 

<결투>의 주인공들은 정말 한심의 극치다. 고등백수, 한량인 라옙스키는 빚이 맨날 놀고 먹느라(카드, 술) 최소한 7백루블이나 되고 그의 사실상의 아내인 나제쥬다 역시 (보바리처럼!!) 옷을 너무 질러서 역시나 옷가게에 3백루블이나  빚을 졌다. 이곳, 카프카스의 터줏대감인 마음 좋은 의사(사모일렌코)는 사람들한테 돈을 너무 많이 빌려줘서 완전히 빈털털이인데다가, 더 가관인 건, 이놈한테 돈을 빌려주기 위해 저놈한테 꾸는 식으로 살아와서, 그 자신도 빚쟁이라는 것이다. 정말 너무 체호프적인 인물들이다!

 

 

 

 

   

 

 

 

 

 

 

 

 

 

 

체호프 주인공들의 이런, 뭐랄까, 어딘가 초월한 듯한 극도의 한심함은 희곡에서 더 도드라진다. 돈 얘기가 정말 많이 나오는데(특히 <벚꽃 동산>은 부동산이 처분되는 이야기니 더더욱), 인물들의 어린애 같은 울음과 또한 역시나 어린애 같은 웃음이 독자를 역시나 울게도, 또 웃게도 만든다. 한 반 세기전, 고골은 바로 이 돈(=속됨, 속물성, 비루함)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지만^^;) 미쳐 죽었다.

 

 

 

 

 

 

 

 

 

 

 

 

 

 

 

 

소설 속 돈, 의 테마에서 절대 빼놓은 안 되는 작가는 물론 도스토예프스키다.  그의 거의 모든 소설은 돈(혹은 가난)에서 출발, 그 흐름을 타고 이어진다. 가난해서 사랑도 잃고, 돈으로 사랑을 사려고 하고, 돈 때문에 아비 죽이고. 오죽하면 연구서 제목까지 이렇게 빠질 정도이다. 

 

 

 

 

 

 

 

 

 

 

 

 

 

 

 

물론, 출발은 돈이었을지언정 그 기나긴 소설을 쓰는 동안에는 돈은 저 멀리 밀려나고 세상에는 오직 쓰는 나와 쓰이는 소설 밖에 없었을 터이다. 덕분에 우리는 이런 걸작을 갖게 되지 않았나.

 

 

 

 

 

 

 

 

 

 

 

 

 

 

 

 

한데 우리 문학에서 돈은 어떤가. 아, 정녕 우리는 너무 굶주렸던 것인가. 도무지 돈에 대한 미학적(?!) 접근이 불가능했던 듯하다. 지금 당장 떠오르는 소설은 이런 것들. 특히, '해학'의 작가로 알려진 김유정의 <소나기>(아내에게 매춘시키는), <땡볕>(뱃속에 사산한 아이를 가진 채 죽을 것이 예견되는 아내) 등은 다시 읽어도 그 가난과 무지의 무게 때문에 너무 충격이었다..ㅠ.ㅠ 항상 굶주렸던 어린 아이가 떡을 많이 먹어 죽는(?) 결말의 단편도, 나의 유년을 연상시키는 대목이 있어, 울컥, 했던 소설이다.  

 

 

 

 

 

 

 

 

 

 

 

 

 

 

 

아마 그 다음은 지난 시절, 노동자 소설 같은 걸 꼽을 수 있을 터. 그런데 어째 떠오르는 것이 별로 없나. 고작해야 이 정도?

 

 

 

 

 

 

 

 

 

 

 

 

 

 

--- 

 

솔직히 그렇지 않나. 헬조선이라고는 하지만, 더 이상 돈-빈곤은 우리의 문학적, 소설적 화두가 아닌 시대가 됐다. 덕분에 소재-주제를 찾기 더 힘들어졌다고도 할 수 있으려나. 여하튼 다른 의제가 필요한 때다. 차라리 지진? -_-;;

 

언젠가 여동생이 말하더라. 돈이 있으니 싸울 일이 없다고, 너무 행복하다고. 물론 일상의 소소한 불행, 다툼이야 끊이지 않지만, 오히려 돈 덕분에 그것이 쉽게 무마된다는 것. 돈이 있어 보니, 우리 성장기의 많은 불운이 거의 99프로 돈의 부족에서 기인한 것이었음을 알겠더라고. 심지어 육체적인 부분, 가령 차 멀미를 많이 하는 것 역시도, 소화기 장애와 자동차에 익숙치 않음(당연히 자가용이 없고 어지간한 거리는 걸어다녔고 여행도 다니지 않았으니)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현재, 부유한 인세생활자에서 거렁뱅이 시간강사로 전락하니,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 어디에 나오는 대사대로, 세상이 거의 통째로 나를 멸시하는 것 같은 느낌을, 역시나 체호프식으로 희극 비스므리하게, 받는다. 아웅, 어디선가 돈벼락이 떨어져야 할 텐데, 과연 어디서? 그러게 이런 이야기들이 있지 않나. [고래]에서도 어느 장면에서 지붕에서(??) 돈이 떨어졌는데, 읽으면서 너무 행복했던 것 같다^^;; 아무래도 '꿈과 희망'을 주는 소설이 필요하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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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는 즐겁지만 어렵고 또 어렵지만 즐겁다.

오래 전, 그러니까 학부 시절이니 20여년 전에 읽었던 문학사 책을 펼쳐본다. 그때 읽었던 것도 있고 읽으려 했다가 놓친 것도 있고 아마 읽었으나 그 사실 자체를 까먹은 책도 있고 반대로 안 읽고서도 읽었다고 착각하는 책도 있고 뭐 그럴 것이다. 도서관(새로 정리된 서고가 익숙치 않아, '길치'인 나로서는, 정말 짜증난다오 ㅠ.ㅠ) 한 번 돈 다음 꼭 (다시) 읽어야겠다고 생각되는 책은 주문해서 보는 중이다. 

 

 

 

 

 

 

 

 

 

 

 

 

 

 

 

전부 다(!) 하면 좋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 현대문학사, 그 중에서도 소설 부분에만 집중한다. 권영민 선생은 정녕 교과서의 대마왕(^^)임을 보여준다. 내용의 알참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세 줄 넘어가는 문장도 없이 무척 간결하고 정확하게 서술되어 있다. 최대한 정독 중. 조동일 선생의 저 유명한 저서는 앞 부분은 딱 자르고 5권만 주문. 조만간 읽기 시작할 터. 하지만 아무래도 '소설' 관련 그의 역작은 이것일 터. 언젠가 재미있게 읽은 듯하다.

 

 

 

 

 

 

 

 

 

 

 

 

 

 

한편, 이 참에 꼼꼼하게 읽어야지 다짐했다가 어마어마한 분량과 (익히 아는!) 너무도 진지한(ㅠ.ㅠ) 문체에 짓눌려 지레 포기한 역작은 이것. 하지만 경제 사정이 회복되는(과연 언제?ㅠ.ㅠ) 대로, 바라건대 겨울 방학 쯤엔 사서 볼 수 있길 바란다. (지난 여름, 정말로 우연찮게(!!) 아이의 유치원 근처에서 이 책의 필자를 만났다, 헐. 우리 아이한테 만원 주셨다...^^;;)

 

 

 

 

 

 

 

 

 

 

 

 

 

그 다음, 우리의 현대 문학 연구에서 결코 빼먹을 수 있는 그, 그의 그 많은 책들. 김윤식 선생이 김현 선생과 쓴 <한국 문학사>는 작년인가, 김유정에 관한 글을 쓰면서 비교적 정독한 바 있어, 다른 책을 더 주문했다.

 

 

 

 

 

 

 

 

 

 

 

 

 

 

 

사실 그는 각종 문학사도 많이 썼지만, 작가론-저서도 많아서 좇아가기가 힘들 정도다. 다시 읽고 싶은 책으론 아무래도 이광수 연구, 염상섭 연구, 그리고 좀 뜬금없지만, 임화 연구이다.(이상 연구는 비교적 최근에 다시 읽고 여전히 감동(!) 받았다.) 

 

 

 

 

 

 

 

 

 

 

 

 

 

 

물론 문학 연구의 가장 근본적인 전제인바, 어떤 훌륭한 연구서도 연구되는 대상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즉, 해당 작품을 읽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사실 그럴 시간이 없으니 연구서를 읽는 것이다. 문학사를 뒤적이며 꼭 (다시) 읽고 싶은 몇몇 소설을 뽑아본다.

 

 

 

 

 

 

 

 

 

 

 

 

 

 

 

물론 일순위는 춘원 이광수. 내게 그는 아무래도 연애소설 작가처럼 남아 있는데, <무정>도 그렇고 <사랑>인가, <유정>인가 아무튼 고등학교 읽은 무슨 장편소설 한 편이 정녕 순애보처럼 기억되어 있어서 그렇다. <흙>, <단종애사>, 이런 걸 읽은 뒤의 느낌도 그렇다.

 

 

 

 

 

 

 

 

 

 

 

 

 

 

 

염상섭은 교과서에 실렸던 <삼대>를 비롯하여 대학 시절에 읽은 다른 소설까지, 단 한 번도 재미를 느끼지 못한 소설가이다. 그를 다시 읽으려는 것은 역시나 공부(^^;;), 즉 의무감에서이다. 모르겠다, 지금 다시 읽으면 그의 진가가 보일지도.

 

 

 

 

 

 

 

 

 

 

 

 

 

 

 

그밖에 언젠가 읽었던 이런 소설도 꼽아본다. 

잘 썼다, 못 썼다, 를 떠나 너무도 강렬했던 소설인 최서해의 <탈출기>, <기아와 살육>, <홍염>(?) 뭐 이런 것도 다시 읽으면 어떨까, 궁금하다. 그 다음, 처음 읽는 순간부터 너무 좋았던 김동인. 그는 단편을 잘 썼지만, <운현궁의 봄>, <젊은 그들> 같은 장편도 어릴 때는 재미있게 읽었다.

 

 

 

 

 

 

 

 

 

 

 

 

 

 

시간을 어디까지 낼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열심히 읽어보자, 다짐해 본다. 공부는 적절한 강제가 필요하니 강의 커리큘럼도 여기에 맞추어 조금씩 변경한다. 읽을 작품의 목록은 계속 추가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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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의 '추'가 '가을'을 의미함을 증명하듯, 갑자기 찬바람이 불어 추석 날 오후부터 하루 반을 앓아누웠다. 꽉 막힌 코를 풀어가며, 까마득한 옛날(ㅠ.ㅠ)에 초고를 잡아둔 러시아문학 연구서를 다듬으며, 음, 반성해 본다. 국문학자들은 아무리 게을러도 외국문학자들에 비하면 반타작은 족히 하는 듯하다. 어지간하면 다 연구서 몇 권. 반면, 외국문학자는 (과연 외국어 배우는 데 시간을 너무 많이 투자해서??ㅠ.ㅠ) 평생 퇴직할 때까지 연구서 한 두 권 없는 교수가 태반이다. 아, 물론, 평생 '퇴'할 '직'도 얻지 못하기 일쑤지만, 이것이 게으름을 정당화해주는 못한다. 그럴수록 더더욱 공부가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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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를 문학으로: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1805-1875), <안데르센 메르헨>

 

 

안데르센이 쓴 동화는 총 156편인데, 하나같이 인간 개개인의 속물성과 이중성, 인간사의 희로애락과 세태를 놀랍도록 잘 묘파한다. 인물 역시 전통적인 우화와 달리 또렷하고 개성적인 성격을 갖는다. 동화 속의 환상 세계와 동화 밖의 현실 세계가 닮았다는 느낌은 우선 그가 인간의 차이-다름에 천착했기 때문이다. 인간과 동물(심지어 오리와 오리, 나이팅게일과 인조 새 등)의 이분법은 물론 부자와 빈자, 왕족(귀족)과 천민(평민) 19세기사회의 신분-계급 틀의 의인화된 버전이다. 갈등과 사건은 주로 낮은 쪽에서 높은 쪽으로의 상승 욕망과 복수 욕망, 이른바 원한의 심리학에 의해 형성된다. 문제는 그것이 전개되는 과정과 방식이 전혀 동화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흔히 작가의 전기를 고스란히 반영한 입신출세의 스토리로 읽어온 못 생긴(미운) 아기 오리를 보자. 이 동화의 첫 부분에서 조명 받는 것은 흥미롭게도 아기 오리가 아니라 엄마 오리이다. 다른 알들은 다 부화됐는데 유독 알 하나만 아직도 소식이 없는 터라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칠면조 알이니 그만 품으라는 충고도 있지만 엄마 오리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마침내 알을 깨고 나온 오리는 그러나, 너무 크고 못 생겼다. 엄마 오리는 아이의 정체를 확인하려고 물에 풀어놓았다가 헤엄치는 모습을 보고서 자기 아이가 틀림없다며 기뻐한다. 머지않아 예뻐질 거라는 남들의 인사치레에도 담담하다.

 

그렇게는 안 될 것 같아요. 쟤는 별로 예쁘지가 않아요. 하지만 성격은 좋고 헤엄도 다른 아이들처럼 잘 친답니다. 어쩌면 더 잘 치는 것도 같아요! 곧 나아지겠지요. 시간이 지나면 작아질지도 몰라요! 알 속에 너무 오래 들어 있어서 모습이 좀 이상해졌을 거예요.() 게다가 얘는 사내아이니까 조금 안 예뻐도 괜찮아요. 힘이 아주 세질 거예요. 벌써부터 저렇게 거침없이 나다니잖아요.”(95)

 

결국 아기 오리는 주변의 박해를 견디다 못해 집을 나간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가출이라기보다는 난 세상으로 나갈 거야.”라는 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첫 걸음이다. 엄마 오리의 믿음과 격려는 그 자양분이 되었을 법하다. 간난신고 끝에 우리가 익히 아는 반전이 펼쳐진다. “못생긴 아기 오리였을 때 이런 행복이 오리라고는 꿈도 못 꿨어!”(105) 과거의 원한은 이렇게, 말하자면 우아하게 설욕된다.

 

차이-다름은 물론 같음을 배면에 깔고 있다. 웅숭깊은 해학이 돋보이는 연애 동화 양치기 소녀와 굴뚝 청소부의 두 연인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쓴다. “서로 잘 어울렸는데요, 둘 다 젊은이들이었고, 똑같은 도자기였고, 둘 다 부서지기 쉬웠지요.”(188) 젊은 연인은 자신들의 사랑을 방해하는 숫염소다리(소녀를 열두 번째 색시로 데려가려고 한다)와 고개를 끄덕일 줄 아는 늙은 중국인 인형을 피해 넓은 세상으로 나간다. 하지만 굴뚝 밖을 나가기가 무섭게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데, 중국 영감이 그들을 쫓아오다가 산산조각 난 상태이다. 그는 다시 붙여졌지만 목에 죔쇠를 달아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게 되고 고로 숫염소의 청혼에 답을 못해주는 신세가 되었다. “그래서 두 도자기 인형은 함께 지낼 수 있게 되었어요. 둘은 할아버지의 죔쇠에 감사하면서, 깨질 때까지 서로 사랑하면서 살았답니다.”(193) 못 생긴 아기 오리와는 전혀 반대로 분수/주제를 알고 착하게 살라는 전언이 전해지는 듯하다.

 

 

 

 

 

 

 

 

 

 

 

 

 

이런 해학과 위트가 넘치는 동화가 적지 않음에도 우리에게 안데르센은 여전히 슬픈 동화의 대명사이다. 인어 공주의 비극은 인어’(동물-천민)로서 왕자’(인간-왕족)의 사랑을 갈구했다는 데 있다. 주지하다시피, ‘필멸’(물거품)의 운명을 타고난 인어 공주가 불멸’(영혼)의 지위를 가진 인간이 되기 위해 치르는 노력은 필사적이다. 제일 잔혹한 것은 한 푼의 에누리도 없는 등가교환의 원칙이다. “막대기같은 두 다리를 얻는 대가로 인어 공주는 자신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내놓고(마녀는 그녀의 혀를 싹둑 잘라간다) 다시 인어로 돌아갈 수도 없을 뿐더러 반드시 왕자와 결혼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예쁜 얼굴”, “하늘거리는 걸음과 말을 하는 듯한 눈으로 왕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는 성공하지만, 왕자는 그녀를 왕비로 맞을 생각이 전혀 없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공주의 추억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기에는 현실의 법칙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왕자는 썩 내키지 않음에도 이웃나라의 공주와 결혼하라는 부모님의 뜻을 따르기로 한다. 정략결혼의 상대가 기억 속의 그 공주였음이 밝혀지는 반전이야말로 인어 공주에겐 크나큰 비극이다. 그들의 결혼식 날, 인어 공주가 얻은 또 한 번의 기회(다섯 언니들이 머리카락을 대가로 얻어온 칼날로 신혼 초야를 치룬 왕자의 심장을 찌르고 그 피를 다리에 묻히면 다시 꼬리가 돋아나 인어로 돌아갈 수 있다)는 더 큰 시련이 된다. 신방으로 들어간 인어 공주가 보는 것은 꿈결에도 신부의 이름만 부르는 왕자이기 때문이다. 다음날, 사라진 인어 공주를 찾는 왕자와 공주의 모습을 통해 그들의 선함이 강조된다. 요컨대 불행은 있으나 악역은 없고, 고로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도 탓할 수 없다. 이것만도 서러운데, 물거품이 된 인어 공주에게 공기의 딸들의 세상(연옥)에서 3백 년 동안 열심히 착한 일을 해서 영혼을 얻으라는 판결이 떨어진다. 일말의 정상참작도 없는 이 등가교환의 원칙에 간담이 서늘해진다.

 

 

 

 

 

 

 

 

 

 

 

 

 

 

안데르센은 덴마크가 인류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다. 실상 그는 뛰어난 동화작가라기보다는 동화를 문학의 지위로 올려놓은 최초의 작가라고 정의하는 편이 옳을 것 같다. 그 이전의 페로나 그림 형제가 주로 민담을 수집, 정리, 편찬했던 것에 반해 안데르센은 낭만주의의 후예를 자처하며 명실상부한 창작 동화를 썼다. 하지만 그의 시와 소설, 희극은 별로 인기를 얻지 못했는데, 흥미로운 것은 그가 자서전을 쓰는 데 무척 공을 들였다는 점이다. <내 인생의 동화>는 젊은 구두수선공과 세탁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가 전 유럽의 유명 인사가 된 동화같은 이야기를 세밀하게 기록하는데, 전반부는 가난과 역경과 그 속의 행복, 각종 후원자들의 은혜와 교육의 과정을, 중후반부는 출세의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덴마크와 유럽의 각종 유력, 유명 인사를 찾아다니며 자기가 만든 이야기를 읊어주고 밥을 얻어먹는 삶, 즉 진정한 매설’(賣說)의 삶이 펼쳐진다. 이런 그를 두고 하이네는 재단사처럼 추레한 행색과 충성을 바치려고 안달복달하는 행동거지며 모든 시인의 완벽한 전형, 왕이 딱 좋아하는 시인이라고 비꼬기도 했다. 안데르센의 출신과 유산계급을 향한 양가적이고 모순적인 감정은 물론 그의 동화의 저변에 깊숙이 침투되어 있다.(잭 자이프스)

 

실상 동화 작가로서는 너무도 많은 얼굴과 목소리를 가진 위대한 인물이 자서전 속에서는 한평생 출세를 위해 아등바등 살았던 선량하되 속된 인간의 전형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19세기의 신분 체제를 고려한다면 그의 아첨은 일종의 생존 전략, 즉 기법이자 방법론이 아니었을까. 적어도 동화를 쓸 때만큼은 그는 이었다. 그가 자서전에서 한껏 포장해놓은 외로운 떠돌이에 출세한 촌놈의 모습과, 그가 창조한 동화 세계가 날카로운 대조를 이룬다. 과연 좋은 문학이란 그것을 창조한 작가를 뛰어 넘어 불멸하는 것이다.

 

- <책앤> 2015년 ??월

 

- 아이 때문에 동화를 많이 읽는다.  안데르센의 동화 중 최근에 가장 유명세를 떨친 것은 아마, 심하게 개작된 디즈니 애니메이션 <얼음왕국>(프로즌)의 밑텍스트인 <눈의 여왕> 일 터.

개인적으론, <어머니 이야기>를 무척 좋아한다. 어릴 때 텔레비전 만화 영화로 봤던 듯하다. (<안개 속의 고슴도치>에도 삽입했다.) 그리고, 간혹 <안데르센 동화 전집>에나 실리는, 별로 안 알려진 , 이루어지지 못한 슬픈 러브 스토리인 <한스와 크리스티나>.  초등 3학년 때 책이 아주 많았던 어느 친척집에서 몰래(?) 읽은 기억이 있다. 동화의 초반에 점쟁이 할머니가 호두인가 뭔가를 가지고 두 남녀 아이의 운명을 예언하는 부분, 마지막, 한스가 크리스티나가  죽은 다음 그녀를 꼭 닮은 어린 딸과 함께 그녀의 무덤을 찾는(맞나??) 장면 등이 인상적이었다. 아무튼 아주 슬픈 동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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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 최근에는 일찍 일어나던 아이가 오늘은 웬일로 9시가 넘도록 퍼질러 잤다. 하긴 이렇게 기습적으로 가을이 왔으니.(정녕 사람 놀리냐!) 자다 깨면서 경기를 할까봐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곤히 자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차마 못 깨웠다. 비까지 주룩주룩 오는 가운데 아이를 데려다 주고(아, 운전 면허증 좀 따둘 걸!ㅠ.ㅠ) 돌아와 책상 앞에 앉으니 뭐, 거의 11시다. 그럴 수록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하건만, 역시 공부(=일)란 (잘)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무한히 하기 싫은 어떤 것이다. 음, 그럼에도, 아니, 그러니까 더더욱 나도 <내 인생의 동화>를 꿈꾸어 본다.

 - 기적 한 줌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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